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킬로미터/ 목포까지 414킬로미터/ 강릉까지 374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중략)/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 계간 《애지》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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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길은 뚫어야 하고 뚫린 길은 닦아야 한다. 닦아놓은 길에서 왔다갔다 잘 다니기만 하면 모든 일은 형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늘길로 1시간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언젠가는 김포공항에서도 평양행 국내(Domestic) 노선이 개설되리라. 닦아놓은 모든 길 위에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나래를 활짝 펼칠 수 있다면 8천만 겨레에게는 다시없는 축복이고 선물이 아니랴. 항공이 출발지점과 목적지점 간 점과 점의 연결이라면, 육로는 그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풍경과 사람과 풍성한 스토리의 선으로 이어지는 이동 수단이다.
1990년대에 발표된 신형원의 노래 가사처럼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5만 원’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느냐고 당시 택시요금으로 환산한 ‘5만 원’만큼의 가까운 길, 지금이야 대절요금으로 20만 원은 줘야겠지만 길만 열린다면야 북녘 어딘들 가지 못하랴. 남북 정상회담이 몇 번 더 열리고 남북교류가 확대되어 획기적 계기만 마련된다면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택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리라. 서울에서 평양까지 육로 250km 거리를 달려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평양냉면 한 그릇 말아먹고 돌아오는 길의 행복은 어디에다 견주랴.
이번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선발대는 경의선 육로를 따라 시속 60㎞로 달려 서울 출발 4시간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개성부터 평양까지 왕복 4차선 고속도로 곳곳이 최근 폭우로 파인 탓에 더 이상 속도 내기가 불가능했다. 서울에서 전주보다 가까운 거리지만 더 천천히, 더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말한 대로 ‘잘 정비되지 않은 도로’였다. 지금 북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교통 인프라 사업임을 알 수 있다. 순안공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특별히 김현미 장관을 소개하는 장면을 눈여겨보았다.
북한은 도로만 낙후한 것이 아니다. 철로가 하나뿐인 단선이 97%에 이르며 선로의 유지 보수 또한 형편없다. 길만 잘 닦아놓으면 나진이든, 선봉이든, 신의주든, 원산이든지 간에 개성공단과 같은 공단을 10개만 더 조성하면 남북통일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그리고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까지 마음껏 선을 이어 가는 자유로운 여행도 머지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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