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나는 강가에 나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오시려나, 하고요/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가슴으로 눌러두고/ 당신 계시는 쪽 하늘 바라보며 혼자 울었습니다/ 강물도 제 울음소리를 들키지 않고/ 강가에 물자국만 남겨놓고 흘러갔습니다// 당신하고 떨어져 사는 동안/ 강둑에 철마다 꽃이 피었다가 져도/ 나는 이별 때문에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란도란 열매가 맺히는 것을/ 해마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별은 풀잎 끝에 앉았다가 가는 물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벼운 것임을/ 당신을 기다리며 알았습니다// 물에 비친 산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던/ 그 뻐꾸기 소리가 당신이었던가요/ 내 발끝을 마구 간질이던 그 잔물결들이 당신이었던가요/ 온종일 햇볕을 끌어안고 뒹굴다가/ 몸이 따끈따끈해진 그 많은 조약돌들이/ 아아, 바로 당신이었던가요// (중략)/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현대문학북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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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임을 그리워하며 만남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내용의 연시다. 연애편지에 써먹으면 딱 좋을 애절함이 넝쿨째 주렁주렁 이어졌다. 안도현 시인이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시 때문이리라. 시는 처음 읽을 때의 느낌 그대로 음미하는 것이 가장 좋다. 교과서에서처럼 너무 숨은 뜻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은유와 상징에 갇혀버리면 서정적 자아의 혼란만 가져와 시 감상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서정적 자아를 살펴 읽는 것이 바람직할 때가 있다. 투철한 민족의식과 뚜렷한 역사인식을 견지해온 시인임을 감안하면 이 시는 의미를 확장하여 얼마든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먼저 남북의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는 상황을 상정하면서 그 축원으로 쓴 시라 해도 수긍이 가고, ‘당신’을 북녘 동포나 통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물론 쉽게 ‘가을’이라 대체해 읽어도 통하고 간절히 바라는 어떤 성취라 해도 어색하지 않겠다. 죽도록 사랑하는 ‘내 마음 아실 이’ 그대를 이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에서 만나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은 열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운명의 분탕질로 비록 헤어져 있긴 하지만 흩어진 가족의 상봉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의 통일만큼 설레고 간절한 일이 어디 있으랴. 한반도에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만남이 또 있으랴.
이번 방북 수행 문화예술계 인사 가운데는 언론이 다뤄주지 않아 그렇지 문학인도 여럿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주무부처 장관인 도종환 시인 외에도 안도현 시인이 눈에 띄고, 백낙청, 염무웅 두 분 문학평론가와 유홍준 교수도 보인다. 백낙청 교수는 남북정상회담 자문단 일원으로, 염무웅 교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장’ 자격으로 함께 한다. 대중 가수의 공연도 좋으나, 안도현 시인이 시를 한 편 낭송하는 것은 어떨까. 겨레말을 함께 쓰는 북측 인민들이 서정의 격차를 느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지코와 에일리의 노래처럼 ‘세련된’ 언어 감각이 순간 생경하게 들릴 수는 있겠으나 ‘그리운 당신’에 사무치지 않을 도리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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