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나무 이파리가 붉은빛을 더한다.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산딸기처럼 동그란 열매가 빨갛게 익어간다. 나보란 듯이 우뚝 솟은 산딸나무의 자태가 사뭇 고고해 보인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투명한 가을 하늘에 흰 구름 몇 점만이 소리 없이 두둥실 떠서 마음껏 가을을 즐겨보라고 이른다. 가을이 잔뜩 익어간다.
의학도들의 수필 공모전 시상식이 있어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길가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것 같다. 말갛게 내리는 햇살에 알곡 익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오후 코끝으로 가을 향기를 흠씬 들이키며 문학의 숲길로 향한다.
얼마나 바쁘고 힘든 의학도의 생활인가. 그 바쁜 틈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지우고 또 쓰기를 반복하여 드디어 응모하였을 어린 학생들, 가까이에는 지역의 의대생부터 멀리 제주도에서까지 골고루 응모한 수십 편의 응모작을 심사위원들이 정성껏 심사하였다. 한 편당 평균 4명씩 돌려가면서 예심을 거친 후에 본선 작을 뽑았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놓고는 최종심사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서 등위를 매겨 수상작을 결정하였다. 각자 글에 대해 점수의 차이는 조금씩 날 수 있을 터인데도 탁월한 수작으로 뽑힌 한 학생의 글이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학생의 작품이라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훌륭한 글이라 정말 놀랍다며 찬사를 보냈다.
시상식과 심포지엄을 위해 수필계와 의료계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시 의사회관에 모인 수상자들과 가족들은 모두 상기된 얼굴이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바쁘면서도 틈틈이 쓴 글이 선에 들었으니 말이다. 한 학생의 가족은 유학 중이었다. 만약 큰 상을 받게 된다면 귀국하여 시상식에 참석할 것이라 약속했단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짝이 바로 아주 큰 상,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되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무대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건실한 그 청년의 표정이 참으로 인상 깊다. 시상식이 끝나고 다시 유학길에 올라야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기쁜 일에 함께해 주었기에 그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환하게 미소 짓는 수상자들과 마음껏 축하해주는 선배들의 얼굴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환하다.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도 묵묵히 진행되는 행사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이어진다면 참으로 의미 있는 행사가 되리라 생각되어 먼 거리에서 오르내리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우리 지역 후배들도 많이 응모하여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으며 다시 기차에 오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동대구역에 내리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역 광장에는 불이 훤히 켜져 있고 낮에는 플랫폼으로 곧장 달려 내려가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멋진 정원이 떡 하니 들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증이 일어 다가가 보니 지킴이 한 분이 앉아계신다. 주름진 얼굴에 우산도 쓰지 않아 더욱 연로해 보여 조심스레 여쭈어보았다. “여기 계속 계시나요?” 그분은 빙그레 웃으시며 “아~밤새 있어야지. 혹시 정원 나무에 달린 과실이 떨어지든가 사람들이 만지거나 하면 안 되니까~”라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여럿이다. 그 옆으로는 탐스럽게 달린 배도 있고 꽃 사과, 수박, 꽃 호박, 멜론 등의 과일이 달린 나무들이 울타리 모양으로 둘러쳐 있었다.
한쪽 옆으로는 무엇일까 평소에 궁금했던 꽃들에 이름표까지 달아 아름답게 조명까지 비춰둔 것이 아닌가. 소리 없는 비까지 내리니 빗줄기가 빛줄기에 비쳐 환상의 영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말이지 간직하고 싶은 가슴 떨리는 순간이다. 아래에는 허브향이 비에 젖어 향기를 더하고 옆에는 밤새 묵묵히 정원을 지치며 소임을 다하시는 인생 선배의 향내를 맡을 수 있고 가슴에는 의학도 후배의 글에서 느낀 여운이 남아 참 아름다운 밤이라는 느낌이 들어 한참을 서 있었다.
‘가우라’라고 불리는 바늘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빗줄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빛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노랗게 피어난 메리골드의 모습을 드러낸다. 페퍼민트와 애플민트도 나 좀 봐 달라고 향내를 품어댄다. 바질은 나도 여기 있어요~, 하고 외친다. 넓적한 잎새의 인물 좋게 생긴 크로톤은 하얀 눈꽃 송이 같은 백묘국 옆에서 웃고 있다. 밤새 앉아서 정원을 지키겠다는 지킴이 할아버지 곁에는 화사한 얼굴의 족두리 꽃 풍접초가 약속이나 한 듯 환하게 웃으며 손짓한다. 정원을 보면 그 집의 정원사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올가을에는 저장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기를 기대한다.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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