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충의공원

▲ 충의공원 가운데 건립된 최진립 장군 동상. 동상 기단에는  충노 ‘기별’과 ‘옥동’의 활약상도 새겨져 있다.
▲ 충의공원 가운데 건립된 최진립 장군 동상. 동상 기단에는 충노 ‘기별’과 ‘옥동’의 활약상도 새겨져 있다.

나 혼자 살기도 힘겨운 세상이다. 충신, 효자, 열녀라는 말은 책 속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사회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갈수록 삭막하게 황폐화되는 느낌이다. 요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은 그냥 이야기로만 전할 뿐이다. 스포츠를 통해 울컥 한 번씩 치솟는 감정 확인으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소속감을 확인하고 있다. 이래도 ‘애국심이 살아있다’고 정의해도 될까?
이러한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충신, 이웃을 위해 내 곳간의 문을 활짝 열었던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효를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경주 내남면 이조리 충의공원에 가면 이런 이야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충의공원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나라를 지키고자 의연히 일어나 칼을 들었던 최진립 의병장군을 기리는 동상이 있다. 동상을 중심으로 최진립 장군이 공부하며 자랐던 충의당, 박물관으로 조성된 기념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활인당 등이 있다. 주변에 정자를 짓고, 벤치를 설치하고, 조경수 조성 등으로 쉼터를 만들어 공원으로 조성했다.
충의공원 일대에는 충노각, 효자각, 용산서원, 경덕왕릉 등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어 역사문화탐방 코스로도 훌륭하다.

◆충의공원

충의공원은 경주시 내남면 소재지 중심에 있다. 공원 인근에 내남면사무소, 내남농협,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내남우체국 등의 기관단체들이 있다.
내남면사무소까지 찾아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말을 달리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최진립 장군의 동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상 기단에는 장군의 활약상과 충노 ‘기별’과 ‘옥동’의 장엄한 기상을 새겨두고 있다. 동상 뒤편에는 400년 된 회나무가 큰 그늘을 만들고 있다. 최진립 장군이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직접 심은 나무로 전하고 있다.
공원 입구에는 최부자의 나눔과 상생정신을 전하는 ‘활인당’이 조형물로 조성돼 눈길을 끈다. 공원 서편에는 최진립 장군이 성장했던 터전 ‘충의당’이 있고, 사당, 기념관이 동서로 이어져 있다. 충의당 뒤편에는 충노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이 거처했던 충의당은 ‘최부자의 혼이 시작된 소박한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충과 의로 가득 찬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전통한옥으로 꾸며진 2인실, 4인실 등의 방이다. 맏며느리가 방문객들에게 문화해설을 하며 친절하게 안내한다.
충의공원 주변에도 많은 역사문화사적이 산재해 있다. 공원에서 승용차로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경덕왕릉, 용산서원, 최진립 장군 신도비가 있다. 또 가까운 곳에 효자각, 정무공 정려각, 개무덤 등의 탐방하고 싶은 의욕을 자극하는 사적들이 가득하다.

◆충의당과 기념관

▲ 충의당 내부.
▲ 충의당 내부.

충의당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가인 현곡에서 이사와서 살며 공부하고 성장한 외가 터전이다.
충의당은 경북도지정 민속자료 99호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최진립 장군이 기거하던 종택으로 1760년 중건되면서 흠흠당 편액을 걸고 있었다. 편액은 이계 홍양호 선생이 쓴 글이라 전한다.

▲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
▲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

충의당은 후손이 기거하고 있는 전통한옥 주택과 서책을 보관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곳 ‘경모당’, 경모당에서 보관하던 고문서 등을 옮겨와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 장군과 현재 기거하는 후손으로부터 4위를 모시는 사당, 서실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흠흠당과 우산초려 등의 이름을 붙인 고택체험방도 있다. 가문에서 사용하던 농기구 등을 전시하고 있는 민속자료실도 눈길을 끈다.
충의당에는 3천500여 권의 고서가 보관되고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안승준, 김학수 등의 교수와 연구원들이 조사해 ‘고문서집성’과 ‘용산서원’이라는 연구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정무공최진립선생기념관’은 본건물 바로 앞에 서 있는 ‘경모각’을 확장 개편한 것으로 다양한 문화자원들이 전시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의 호패와 갓끈, 가죽신 등의 생활용품과 교서, 교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쟁터에서 직접 쓰던 칼. 활과 화살은 재현품.
▲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쟁터에서 직접 쓰던 칼. 활과 화살은 재현품.

△칼과 활, 화살: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군사를 지휘할 때 사용하던 칼의 진품을 전하고 있다. 칼자루 15㎝를 포함 1m 크기다. 활과 화살은 장군이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 최진립 장군이 병자호란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쓰던 각대와 흑혜(가죽신발) 등 유품.
▲ 최진립 장군이 병자호란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쓰던 각대와 흑혜(가죽신발) 등 유품.

△호패와 각대, 흑혜: 조선시대 신분과 관직을 표시하여 공적인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던 호패는 정무공의 출생연도(1568년)와 급제한 시기(갑오년 1594)가 표시된 상아 호패다. 각대는 정무공이 관직을 역임할 때 관복에 착용하던 것(길이 86㎝)으로, 1630년 이후 병자호란으로 163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착용하던 것이다. 흑혜는 맑은 날에 신었던 것으로 문무 관료들이 제복과 함께 착용했던 가죽신이다.
△교지: 최진립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받은 교지와 함께 임진왜란에 참가해 전공을 인정받아 공신 2등에 책봉된 선무원종공신녹권, 경원도호부사 겸 병마절제사로 지낼 때 자녀들에게 직접 상속한 내용을 기재한 분금문기, 서해안 군사적 요충지 경기수군절도사에 임명하는 국왕의 이름으로 내린 교지가 있다. 특히 효종이 정무공 시호를 내린 교지는 특별하다.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유일한 교지로 조선정부의 청나라에 대한 당시 의식을 대변한다.
△서적: 용산서원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이다. 용산서원지, 용산서원 청액소, 용산서원 호적, 용산서원 심원록, 문루일기, 용산서원 사역을 담당하던 인원의 명단 소속안, 안계암 완문, 별치 추수기, 학생들의 성명과 주소가 기록된 유생안, 사림품목 등등 서원을 관리하던 내용들이 기록된 서적이 다수다.

▲ 용산서원 정문의 문루인 청풍루 현판. 후손들의 구전과 서풍으로 미루어 미수 허목의 글씨로 추정된다.
▲ 용산서원 정문의 문루인 청풍루 현판. 후손들의 구전과 서풍으로 미루어 미수 허목의 글씨로 추정된다.

△청풍루 현판: 용산서원 정문의 문루인 청풍루 현판이다. 정무공의 풍모와 절의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누각의 이름을 ‘청풍루’라 했다. 조선 중기 전서의 대가인 미수 허목(1595~1682)의 글씨로 추정된다. 용산서원이 사액받기 전인 17세기 후반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1568년 경주시 현곡면 구미동에서 문창후 최치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생해 적도들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북상하여 경주성까지 무너뜨렸다. 당시 정무공은 부윤을 찾아가 경주성 수복을 위한 의거를 호소하고, 동생 계종과 집안 종들을 비롯해 마을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사들과 합세해 계연에서 적을 무찌르고, 경주 길목 열박재에서 언양으로 침입하는 적을 격파했다.
정유재란 때에도 결사대 100명을 이끌고 서생포에서 야영하던 왜적을 공격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2등에 녹훈 되었다. 1607년에 도총부도사, 다음해에 마량진첨사, 1614년 경원부사를 역임했다. 인조 원년인 1623년 경흥부사, 공조참판에 특진되고 이어 경기, 공청, 황해수군통어사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장군은 69세의 노령에도 군사를 이끌고 국왕이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 용인에서 적을 맞아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조정은 정무공의 공적을 기려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효종이 1651년에 시호 정무공을 내리며 청백리로 녹선했다.
숙종 때 함경도 경원에 충렬사를 창건해 제향했다. 1711년 향리 용산에 숭렬사우의 사액을 내리고 ‘용산서원’으로 이름 지었다. 자손들은 전쟁에 함께 참전해 순절한 충직한 노비 기별과 옥동을 장군의 제를 지낼 때 함께 제향하고 있다.

◆활인당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충신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손자 최국선은 문중과 협의해 마을 어귀에 초가집을 짓고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했다. 자신의 곳간을 열어 조선시대 헐벗은 백성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던 것이다. 이조리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이든 마을사람이든 굶주린 사람 누구나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활인당’이라 불렀다.
충의공원 입구에 초가집을 짓고, 마당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는 당시 상황들을 조형물로 만들어 재현하고 있다. 지금 보아도 믿기 어려운 상황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굶주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줄을 지어 찾았을까? 어떻게 나라살림도 아닌 개인이 그런 베풂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궁금함을 넘어 감동하게 한다.
활인당은 최부자의 ‘상생과 나눔정신’의 시발점이 되었다. 최부자집이 교촌마을로 이사한 후에도, 이런 나눔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6ㆍ25전쟁 당시에도 최부자집은 집 앞의 공터에 솥을 걸고 죽을 쑤어 피난민들을 구호했다. 후손들이 선대의 상생정신을 누대로 이어 실천하면서, 최부자의 명성을 이어갔던 것이다. 교촌마을에는 최부자의 나눔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최부자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충노각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가슴을 저미게 하는 말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최진립 장군이 69세의 노구로 병자호란 전쟁터로 뛰어나갈 때, 노비였던 ‘기별’과 ‘옥동’이 장군의 뒤를 따라 끝까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은 지금도 매년 음력 12월27일 장군의 대제일에 충노 두 사람을 함께 제향한다. 후손들은 그것이 장군의 뜻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최진립 장군이 자랐던 충의당 뒤편에 충노 기별과 옥동의 의기를 비석에 새겨 세우고 비각을 건립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나라를 위한 일에 신분의 고하가 없다는 말을 몸으로 보여준 현장을 체감하게 한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긴다. 오래전 정무공 최진립 장군 가문의 이야기가 인심이 각박해진 오늘날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힐링의 자원이 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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