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짐 나눠지고 까치밥 남겨두고본래 콩 한쪽도 나누던 선한 국민들개혁 좋지만 결코 서로

해마다 신학기 새내기들의 행정학 개론 강의는 ‘정부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와 정부와 시장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이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례가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선하게 태어날까? 아니면 악하게 때어날까? 전자라면 세상살이는 도덕과 상식이 충만한 질서정연한 천국이고, 후자라면 혼돈과 무질서가 판치는 지옥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고 했다. 맹자도 인간은 본래 착하기 때문에 예절만 지키면 사회질서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측은지심은 인(仁), 수오지심은 의(義), 사양지심은 예(禮), 시비지심은 지(智)의 뿌리로서 ‘4단’을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한다. 시장이 성공한 무정부론의 기본원리다.
반면에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사악하여 혼돈 상태를 지향하며 모든 인간은 상호 간에 투쟁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들에겐 초인간적 괴물인 리바이어던(Leviathan)이 나와야 사악한 무리를 단숨에 정리하고 질서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순자의 결국엔 법률만이 사악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주장의 논거며, 시장에 뛰어드는 정부의 존재원리다.
물론 시장이 혼탁하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가능한 시장 흐름에 맡기고 정부는 선도와 지원이 원칙이어야 한다. 이게 시장경제 원리다. 물론 기업도 잘 못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부가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거나 마치 칼을 휘두른 것 같은 자세는 금물이다. 그래서 국가주의라고 비판한다. 시장은 예민하여 처음엔 움츠리나, 바로 역습이 일어나 소비와 고용은 위축되고 국민경제가 어려워짐은 지나온 관례였다. 정부와 시장은 ‘신뢰와 동기부여’가 먼저다. 개혁도 좋으나 시장은 결코 적이 아니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동기만 부여되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하고야 마는 근성’을 갖고 있다. IMF 금모으기와 88올림픽 땐 세계가 감탄한 일등 국민이었다. 본래 콩 한쪽도 나누고 상부상조하던 착한 국민이었다. 먹고살기가 나아지면서 ‘지나친 경쟁과 끝없는 소유욕’이 넘쳤을망정 악보단 분명 선이 많았기에 우린 성선설에 가깝고, 그 예다.
장편소설 ‘대지(大地)’로 노벨문학상(1938년)을 수상한 펄벅(1892∼1973)의 이야기다. 1960년 경주의 어느 해질 무렵, 지게에 볏단을 진 채 볏단을 싣고 가던 농부를 만났다. 펄벅은 서양의 농부처럼 지게 짐을 소달구지에 실어 버리면 힘들지 않고, 소달구지에 타고 가면 더욱 편할 것이란 생각에 농부에게 물었다. “왜 소달구지에 타지 않고 힘들게 갑니까?” 농부가 답했다. “에이! 어떻고 타고 갑니까. 저도 하루 종일 일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일했는데요. 그러니 짐도 나누어서 지고 가야지요.”
훗날 펄벅은 한국 농부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늦가을 감이 달려 있는 감나무를 보고는 “따기 힘들어 그냥 남긴 건가요?”라고 물으니 “아니요,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 둔 까치밥입니다”는 설명엔 짜릿한 전율마저 느꼈다고 기록했다.
그랬다. 이게 성선설의 증거고, 동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옛 고향 모습이었다. 새벽이면 늘 소죽부터 끓이시던 아버지 모습이 아련히 밀려온다. 소에 얽힌 아픈 사연은 부지기수나 지면상 차치하자. 애덤 스미스는 “과거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머리가 나쁘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때가 왠지 그립고 사무칠 때가 많다. 돌아보니 지나온 발자국마다 기쁨보단 아픔이 더 서려 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더한 것 같다.
요즘 경기불황에 먹고살기가 어렵다고 도처에서 아우성이다. 식당업이나 소상공인과 청년들이 더하다. 정부는 착한 국민을 그만 울리길 바랄 뿐이다. 기르는 소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감이나 대추를 따면서도 ‘까치밥’은 남겨두는 마음, ‘작은 배려를 몸으로 실천하는 선조들의 지혜’를 생각하면서 지금의 난관을 선(善)하게 이겨내자. 그리고 즐거운 추석을 다 함께 맞이하자.

이상섭

전 경북도립대교수

한국지방자치연구소장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