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황룡사 대종

신라 황룡사의 종루에는 대종이 있었다.
이 대종은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보다 5배나 컸다.
황룡사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건재했지만 제3차 고려ㆍ몽골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몽골 군대는 황룡사 대종을 약탈한 뒤 토함산, 대종천을 거쳐 동해안까지 운반했다.
그들은 배에 대종을 싣고 떠나려 했으나 그만 물속에 빠트리고 말았다.
감포 문무대왕암 부근에 대종이 가라앉아 있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대왕암.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몽골군이 황룡사 대종을 약탈해 운반했다는 경주시 양북면 구길리의 대종천.

▲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최윤섭 전 경주 부시장을 만났다. 보물이 실렸다는 러시아 선박 돈스코이호 인양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무렵 황룡사 대종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황룡사 대종이 아직도 감포 앞바다에 묻혀 있느냐고 물었다. 머뭇거림 없이, 노력과 기술이 부족해서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들려준 황룡사 대종 찾기 전말은 이렇다.
“이상 물체 발견!” 레이더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크기 2m가량의 타원형 물체가 레이더에 잡혔다는 보고를 받은 함장은 즉시 침투조 5명을 투입시켰다. 배를 타고 뒤쫓던 모 방송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룡사 대종이 천 년의 비밀을 벗고 세상에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97년 5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 타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만든 장엄한 평화의 대종소리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에 땀이 났다. 침투조가 황룡사 대종 발견 소식을 들고 나올 6~7분 안팎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망망한 바다 위를 밭이랑 갈 듯 누비던 허탈과 실망의 나날들, 20여 일의 가슴 졸이던 일들이 무성영화처럼 흘러갔다.
해군 탐사선의 작전 허락 기간이 닷새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는 소주 한 병과 북어 포 한 마리를 사들고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 제발,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세요. 어머니는 제가 바라는 것 다 들어주셨잖아요.” 경주 일대의 사찰들이 간절하게 올리는 불공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독교 신자의 조언도, 대종 찾기를 바라는 언론의 관심도, 마을 어른들의 전언도 끝내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지 못한 뒤의 일이었다.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어머니께 우리 집엔 왜 용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뒤뜰 항아리를 열고 용을 보여주셨다. 몸체는 꿈틀거리는 용이었으나 완성되지 못한 입 모양이 특이했다. 병아리 부리처럼 노란 입으로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이한 꿈이었다.
어느 날보다 더 환한 아침이 밝았다. 분명 오늘은 대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를 설레게 했다. 종뉴(鐘紐)는 모두 용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는 함장에게 문무수중왕릉 뒤쪽을 샅샅이 살펴보자며 탐사선에 올랐다. 용이 있었던 뒤뜰이 수중왕릉 뒤쪽과 겹쳐보였던 것이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룡사 대종 삼국유사에도 전해져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타원형 모양의 2m 크기의 이상 물체는 황룡사 대종이 분명할 것이었다. 삼국유사권3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만든 황룡사 종은 그 무게가 49만7천581근이나 되는 실로 거대한 종이었다. 종뉴의 길이를 제하고 나면 그 크기는 2m 정도로 추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투조가 확인한 이상물체는 타원형의 바위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꿈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렁이는 바다가 야속하기만 했다. 허망했다.
그의 고향은 경주시 양북면이다. 마을 어른들로부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봉길리 바다 쪽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 또한 멱을 감으며 놀다가 바다 쪽에서 웅~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 종소리는 고래가 우는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목소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종 이야기를 쓰고 있다.

▲ 황룡사 대종은 에밀레종(사진)보다 5배 이상 컸다.
▲ 황룡사 대종은 에밀레종(사진)보다 5배 이상 컸다.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을 불태운 몽고군이 황룡사 대종을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대종은 에밀레종보다 무게가 5배 이상일 정도로 컸다. 이 작전은 바닷길이 아니고는 운반이 불가능해 대종을 뗏목에 싣고 강에 띄워 바닷가로 운반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바닷가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만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았고 이후 이 하천을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황룡사의 역사를 읽고 여몽전쟁사를 공부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창건이 시작되어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이르기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동양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근대에 가장 높았던 80m가량의 9층 목탑과 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 그리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대종으로 유명하다.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된 황룡사지에는 건물과 탑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들만 남아 있다. 1963년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6호로 지정되고,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7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기와를 비롯한 금동불, 풍탁(처마 끝에 매다는 장식물), 금동귀고리, 유리 등 유물 4만여 점이 출토됐다.
몽골군들은 왜 50만 근에 이르는 그 무거운 종을 가져가려 했을까? 세계정벌에 필요한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서? 군사적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가 욕심이 나서? 오랑캐 종족에게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그만한 이해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왜 전란의 와중에 무거운 종을 메고 토함산을 넘었을까? 내 궁금한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리 짓밟아도 끝내 짓밟히지 않는 고려인들의 대몽항쟁, 그 원동력의 불가사의한 출처를 황룡사 대종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요? “섬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면서 백성과 장정을 칼과 화살에 죽게 만들고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와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장계(長計)가 아니다” 라고 조정의 강화도 천도를 저지하려던 종2품 문신 참지정사 유승단의 기개, 서슬 푸른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의 집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군사 양식이 풍족하니 천도는 불가하다”고 외치다 그 자리에 참수당한 삼별초 부대장 김세충의 결사항전의 용맹이 대종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그의 추정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지만 대몽항쟁은 끝없이 전개되었다. 1206년 건국 이후 불과 50년 만에 모스크바를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집어삼킨 몽골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은 나라 고려를 정복하지 못했다. 국토를 초토화하고 백성을 짓이겨도 항복을 거부했다. 고려는 몽골에게 불가사의한 나라였던 것이다. 외세를 무찌르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과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킨 문무대왕의 문두루비법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몽골 군사들에게 황룡사 대종은 예사롭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꼈을지 모를 일이었다.

◆종은 국태민안의 상징

종이란 무엇인가? 종이 울지 않자 한 여인의 무남독녀를 쇳물 가마에 넣어 만들자 울었다는 에밀레종,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자 나타났다는 돌종, 부부가 그 돌종을 치자 웅숭깊은 소리가 왕에게까지 들려 집 한 채와 벼 50석을 하사받았다는 모량리 사람 손순의 종.
불가에서는 우주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무병장수와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종을 친다고 한다. 종이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국태민안의 상징이다. 그것이 황룡사 대종을 찾아야 할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서 최윤섭 전 부시장에게 소주 한 잔 하자고 권했다. 건강검진이 약속되어 있어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황룡사 대종 찾기를 다시 하겠냐 물었다. “전설 속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 기록했다는 것으로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습니다.” 구전되는 전설은 구전자와 함께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의 대종탐사기는 기록되어 있어 지워지지 않을 테니 다행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돈벌이와 관계없이, 감포 앞바다에서 벌였던 순정한 그의 대종탐사기가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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