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호주필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대통령 임기 내 비핵화를 하겠다’고 말했다며 희색이 만면하다. 우리 청와대도 ‘임기 내 비핵화’를 강조했다. 하긴 우리 정부는 지난 4월 27일 판문점선언이 나오기 전부터 그랬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특사였던 정의용 안보실장은 지난 3월 김 위원장을 만난 뒤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며 그의 선한 의지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핵화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이 정상회담 이전부터 북핵전문가들로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었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선 한층 더 굳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4개월 동안 전혀 진전이 없다. 핵과 미사일개발이 완료되어 필요 없게 된 관련 실험장만 폐기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금도 계속 핵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이 있었던 일 외에 얼마 전에는 북한 외교부가 미국 보고는 ‘강도 같은 요구’라거나 우리 대통령 보고는 ‘쓸데없는 훈시질’이라는 막말을 쏟아 붓고 있다.
이렇게 북한의 입장이 고자세로 바뀔 수 있었던 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선언이다. 한미 양국의 조급증이 불러온 급조된 정상회담의 영향으로 불완전 평화는 왔으나 이를 틈타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 규제의 강도를 늦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한다. 한숨 돌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국제 분위기가 바뀌자 이상하게도 이슈 자체도 바뀌고 있다. 국민적 염원이었던 북한 비핵화는 한반도 비핵화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에서 어느새 FFVD(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로, 일괄타결은 어느새 단계적 해결로 바뀌었고, ‘핵 없는 평화’는 ‘핵 있는 평화’로 바뀌었다. 이제는 ‘핵 있는 평화’가 대세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를 상징하는 말이 문정인 대통령특보의 ‘북한을 악마화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이다. 지난 30년간 8번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는 북한에 무엇을 보고 악마화 말라는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여당의 북핵전문가이자 북핵문제로 북한과 여러 차례 접촉을 가졌던 이수혁 의원마저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고 예측하고 있다.
올 초 김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사실상의 남북대화를 제의했다. 그때 북한은 유엔과 국제사회의 강한 규제를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북핵 대화에서 처음으로 우리와 미국이 갑의 위치에 있을 때였다. 우리와 미국이 모두 너무 서두르다 북한에 당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와 미국 측이 어디까지 물러섰나 하면 문정인 대통령특사가 ‘북핵에 모든 걸 걸면 남북관계가 잘 안 되고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거나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가 비핵화를 이끄는 유인책이 돼야 한다’고 할 정도로 후퇴돼 있다.
비핵화 대신 평화를 얻지 않았나 하지만 앞서 지적처럼 ‘핵 있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는 것이 현실이고, 북한도 지난해를 기점으로 핵과 미사일을 완성한 만큼 더 이상 실험을 통한 도발은 없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미국의 북폭 가능성도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었던 사안이었던 것이다. 조급증을 보이지 않아도 올 수 있는 평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비관론 우위의 국제적 분위기를 아는지 김정은은 이번 9ㆍ9절 행사에 북한은 미사일을 시위하지 않고 연설도 하지 않는 등 평화 제스처를 취하고 있기는 하다. 어쩌면 이번 평양정상회담서나 UN총회 때는 리비아식 핵탄두를 미국에 보내는 쇼를 할지도 모른다. 핵탄두 전부가 아닌 일부가 무슨 의의가 있는가. 지금까지 핵실험까지 한 나라가 비핵화를 한 나라는 없다.
국제정치에서 선의는 언제나 비극의 씨앗이다. 한 예로 공산주의자로 몰리기까지 했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왜 공산주의자가 나쁘냐’하며 스탈린을 옹호하며 선의를 보였다. 얄타협정 등 모든 대소 접촉에서 양보해 줬다. 그래서 2차대전 후 세계가 겪은 냉전은 소련을 부흥시켜준 루스벨트에 있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래 놓고는 죽기 한 달 전 측근에 ‘내가 선의로 대해주면 선의로 받아줄 줄 알았다’며 후회를 했다고 한다.

서상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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