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이다. 하늘은 깊이를 알 수 없게 높고 푸르고 구름은 정처 없이 흘러간다. 가만히 앉아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느껴보고 싶은 날, 바람은 기분 좋게 살랑댄다.
붉게 핀 칸나 꽃들이 줄지어 늘어선 길을 달려 고개를 넘어서자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 알이 탐스러운 경기장 길이다. 잎사귀보다 열매가 먼저 가을을 닮아가는 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운동화 끈을 맨다. 올해로 18년째를 맞이한 ‘핑크 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유방 건강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유방암 조기 검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행사. 2001년 시작되어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전국 다섯 개 대도시에서 개최되는 달리기 축제이다. 첫해부터 오늘 대회까지 전체 참가자 수 37만621명, 누적 기부금액 40억1천784만9천545원이 넘어간다고 한다. 기부금은 모두 한국유방건강재단에 전달되어 유방암 환자의 수술 치료비 지원 사업 및 유방암 예방 검진 사업에 사용되기에 취지도 좋고 건강한 나눔 문화를 확산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이들도 즐겨 참석하는 이 대회는 참가비보다 행사의 만족도가 아주 높은 대회로 알려져 있다. 건강한 사람들뿐 아니라 유방암을 이겨낸 이들, 그의 가족들도 동참하는 대회라 열리고 나면 얼마 되지 않아 마감되는 수가 있기에 서둘러야 하는 대회다. 여성의 아름답고 건강한 미래를 위하여 이런 핑크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달렸던 행사, 핑크 런에 동참하다 보면 아픈 이들도 병을 이겨내는 데 힘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대구 대회도 참가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3천 명 선착순 마감이 일찌감치 마무리되었다. 마감 이후 추가 접수에 관한 문의 전화가 많았지만, 행사 진행상 추가 접수가 더 이상 없어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구 월드컵경기장, 푸른 하늘 아래 온통 핑크빛 물결이다. 무대와 천막 모두 분홍빛이다. 그 속에서 각자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이들. 우리가 맡은 여의사회 부스에서는 의과대학 학생까지 대대적으로 동참하여 ‘핑크 런’ 행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눔을 실천하였다. 성폭력, 가정폭력을 전담하는 해바라기 센터에서도 동참하였다. 여성 경찰관과 상담 요원이 참가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사람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매년 참석하다가 작년엔 만삭이라 참석하지 못했다는 한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왔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전공의는 이제 105일로 접어드는 아들을 기부자로 등록하였다. 최연소 핑크 런 참가자로 무대에 불려 올라갔다. 아이가 자랐을 때 그 사진을 보면 얼마나 큰 감동이랴.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서 기부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목청 좋고 인물 시원한 아나운서의 사회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햇볕은 따가워도 그늘에만 들어서면 시원하다. 따스함과 써늘함을 번갈아 즐기며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본다. 마음은 10km이지만, 체력을 생각하여 3km로 만족하리라. 그저 기분 전환도 되고 도전하는 것도 좋고 인형 같은 연예인을 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 여기면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을 보면서 대회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자그만 아이들이 해마다 티셔츠 사이즈를 달리하며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유방암 환자들에게는 가족의 힘이 무엇보다 소중하리라. ‘유방암 투병일기’를 읽을 때 “나 정기검진 통과 했어요”라는 글을 볼 때면 늘 가슴이 먹먹해 오곤 하지 않던가. 유방암 환자들이 유방암을 잘 이겨내고 음식도 잘 먹고 건강하게 당당하게 잘 살아가기를 기원하며 두 팔을 힘차게 흔든다. 조금 힘들더라고 무엇이든 나누다 보면 아픔도 덜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조금씩 숨이 차기 시작한다. 친구가 보낸 글로 위안 삼아야겠다.
“어릴 때는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없고, 나이 들면 나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는데, 늙고 나면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중략)//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미워하면 됩니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사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됩니다.//(중략)//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정말 세상은 행복합니다.”
하얀 이슬이 내린다는 절기도 지났다. 가을이 점차 깊어간다. 우리의 인생길, ‘핑크 런’에 참가하듯 모두 힘껏 달려 보자.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할 터이니까.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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