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현대사회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부른다. 1970년대 후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용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함축하고 있다.
갤브레이스는 책을 통해 20세기를 지탱해 온 아담 스미스와 케인즈의 경제에 관한 철학과 원리의 유효성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상황은 다변화되고 막다른 상황에 이르렀음을 강변한다.
실제 다국적 기업의 등장은 어느 하나의 특정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새로운 경제 프레임을 소비자인 우리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기업적 이미지를 사회적 기업의 선행처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현대 경제의 불투명성을 대표한다.
불확실성은 이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는 하나의 원리처럼 응용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불확실성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불확실성의 근본적 원인은 급격한 변화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빠른 시간적 흐름이다.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대한 예측들이 기존의 지표로서 사용되던 요인들의 예상외적 변화로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사회 구조 속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린 분야를 우리는 쉽게 법률과 그 제반 조직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최근 국정농단과 적폐청산이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법원의 판결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은 극에 달하고 있다. 심지어 법원의 판결 내용뿐만 아니라 양형에 대한 부정과 담당판사의 신상 털기마저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적 정의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면서부터 수많은 사회규범을 통해 기준을 만들어 가게 되고 그러한 규범 속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 법이란 이러한 사회규범들 중에서도 의식적 행위규범으로서 국가에 의한 강제성과 법적 제재가 보장되고 있다. 이는 곧 개인의 권리에 대한 법률을 통한 제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법적 안정성의 핵심적 내용이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내용의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은 필연적이어야 한다. 더불어 법적 안정성은 그 내용의 만족 여부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준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적 안정성을 담보로 국민의 일반적인 법의식과 괴리가 있는 법원의 판결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적 법해석으로 법원을 재단하고 비난하는 ‘국민들의 법감정’이라는 떼법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이익집단의 빈번한 집단시위와 SNS를 통한 분노와 법원에 대한 공격은 결코 정당한 의사표현이라 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권 세력은 개혁과 부패청산이라는 슬로건 아래 언론과 법원마저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현실 속에서 개혁에 대한 주체는 국민이어야 하며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토대와 원칙을 엄격히 확립해야만 한다.
개혁에 앞서 법치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결코 떼법이 불확실성의 정당화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부터 수능 필수과목으로 한국사가 들어온 취지만큼이나 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권리 못지않은 공익과 사회질서의 중요성을 자각할 때 불확실성 시대를 다소나마 극복하는 확실성의 전제가 아닐까 한다.

김시욱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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