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김천 과하주 복원한 송재성

▲ 송재성에 대한 지역민의 감동적 정서는 남달랐다. 1999년 그가 작고했을 때 전례가 없는 김천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만큼 지극한 애향 인물로 평가받았다. 영결식 모습.
▲ 송재성에 대한 지역민의 감동적 정서는 남달랐다. 1999년 그가 작고했을 때 전례가 없는 김천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만큼 지극한 애향 인물로 평가받았다. 영결식 모습.

전후복구와 과하주 재현을 위한 업적 외에도 김천을 위한 그의 헌신과 활동은 광범위해 그가 생존했던 시기의 김천시민들은 직간접적으로 그와 연계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52년부터 9년간 김천고등학교의 사친회장을 역임했고 1953년부터 8년간 김천시 교육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그후 송설당 교육재단이사, 김천여자중고등학교 기성회장 등을 지내면서 김천의 후세교육을 위해서도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김천교육의 큰 버팀목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69년에는 김천시립도서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김천지역의 문헌자료와 도서 정보를 총괄 관리하고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도서관이용의 편의를 제공하는 기초를 만든 것이다. 1972년에는 재단법인 문화재보존협회 김천시지부장을 맡아 김천의 문화재 지킴이로서 역할을 수행했었다.
이밖에도 그가 맡았던 직함으로는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회위원, 김천세무서 조세자문위원장, 반공연맹 김천금릉지부장, 국제로타리클럽 김천시지역회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천시행정자문위원장, 대한노인회 김천시지부장, 사회정화협의회 경북연구평가분석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김천지역과 경북지역의 여러 방면에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그는 슬하에 5남 1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 장남 영호씨는 치과의사로서 가업을 이었고, 차남 강호씨는 김천에서 과하주 양조업을 맡아 그의 필생의 업적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고향인 충북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에 있다.
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연보

·1913년 충북 영동서 출생
·1940년 치과의사 검정고시합격
·1942년 송치과의원 개업
·1953~1960년 김천시교육위원회 위원
·1956~1960년 송설당 교육재단이사(김천중고)
·1956~1989년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회 위원
·1960~1967년 김천여자중ㆍ고등학교 기성회장
·1960~1970년 국제인권옹호 김천시금릉군지부장
·1967년 김천시문화상(제1회)수상
·1968~1973년 김천경찰서 자문위원장
·1970년 김천시립도서관 건립추진위원장
·1971~1972년 국제로타리클럽 김천시지역회장
·1972~1976년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1979~1989년 김천시 행정자문위원장
·1980년 김천 문화원장
·1982년 대한노인회 김천시지부장
·1987년 경북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경북 제13호)
·1995년 전통식품 명인지정(농수산부 제8호)
·1999년 5월1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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