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해전은 북한군이 서해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한 해상전투다. 1999년 6월15일 1차 해전에서는 북한 함정 10척을 우리 해군이 14분 만에 격퇴했다. 그러나 2002년 6월29일 2차 해전에서는 북한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참수리 357호정이 침몰했으며, 우리 해군 병사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국민은 놀랐고 충격에 빠졌다.
2차 해전 다음날인 6월30일 오후,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한일월드컵 결승전을 참관하기 위해 서울공항(성남)을 통해 특별기편으로 일본으로 출국했다. 용사 6명이 안치돼 있던 국군수도병원은 서울공항과는 불과 4.5km로 헬기로는 2분도 채 안 걸리는 지척인데도 들르지 않고 지나갔다.
도발 직후 북의 ‘우발적 사고’라는 통지문을 우리 군의 ‘계획적 도발’이란 정보보다 더 신뢰한 결과다. 다음날, 요코하마경기장에서 아키히토 일왕과 함께 축구를 관람하는 대통령 내외의 모습에서, 또 다음날인 7월1일, 3일장으로 치러진 순국장병의 합동장례식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장관도 정부관리 그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 아니었다. 월드컵, 좋다. 그러나 햇볕정책이든 북한 눈치를 보든 간에 순국영령과 유족을 ‘패싱’해선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2017년 7월17일 포항, 해병대 작전헬기(마린온)가 추락해 해병 장병 5명이 순직하고 2명이 부상했다. 군의 공식브리핑, 문재인 대통령의 애도 메시지는 사흘째야 나왔다. 유족들은 “명백한 기체결함인데 청와대는 ‘수리온 성능은 세계최고라는 말만 했다’”며 장병 목숨보다 수출이 더 중하고, 세월호와는 너무도 다른 정부 태도에 울분을 토했다. 조문 온 청와대 국방비서관은 식장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미국은 이랬다.
2009년 10월29일 미국 델라웨이 도버 공군기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어둠이 깔린 새벽인데도 아프간에서 희생된 미군 장병의 유해를 맞으려고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드디어 수송기가 도착하고 유해(18구)가 담긴 관의 운구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영웅은 절대 잊지 않는다’는 미국 대통령의 결연한 모습이었다.
2018년 8월1일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 이른 시간인데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55구를 직접 맞이했다. 국가원수급 봉안식에서 관을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최고로 예우하였으며, 유가족들도 부통령 전용기로 데려왔다. 그리고 이들을 ‘잊혀진 영웅’으로 칭했다.
부럽다. 우리는 없나? 우리도 감동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2012년 5월25일 서울공항, 미군이 발굴한 ‘북한지역 국군전사자 유해(12구) 봉환식’이다. 62년 만에 하와이공군기지를 거쳐 귀국하는 6ㆍ25 참전용사의 유해를 차렷 자세로 기다리는 이명박 대통령, 김관진 국방장관의 굳은 표정과 거수경례에 가슴이 뭉클했다. 21발의 조포와 최고의 예우가 이어졌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다. MB 정부의 공과(功過) 중 공이다.
연평해전, 어느덧 16년이 흘렀다. 고(故) 한상국 상사의 부인은 정부의 태도에 분노해 이민을 떠났다. 다시 돌아와 추모로고를 만들어 ‘REMEMBER 357’ 캠페인에 열심이고, 마린온 추락사고로 순직한 장병 5명의 유족은 정부의 ‘무심한 대우’에도 시민조의금 5천만 원 전액을 해병대에 기부했다. “나라에 대한 원망은 있어도, 장례를 치렀는데 뭘 더 말하겠나”는 유족의 말이 세월호와는 딴판이다.
“우리는 대통령이 버린 군인의 부모였다”(희생 장병의 어머니)는 통한이 이젠 끝이길 바란다. “국가가 국민에게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려면 국가도 국가답게 국민을 위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희생자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가슴을 때린다. 남북대치 상태다. 평화도 중요하지만 비핵화와 안보가 먼저다. ‘정권이 추구하는 이념에 따라 안보가치가 달라지면 분명 사달이 난다’는 사실이 두 사건이 준 소중한 교훈이다.

이상섭

경북도립대교수 행정학

한국지방자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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