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달성토성ㆍ경상감영ㆍ대구읍성 유네스코등재추진위원회’가 사단법인으로 출발하기 위해 모금행사를 준비 중인 것 같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다만 이왕 늦은 것, 급히 서둘 일이 아니라 급할수록 돌아간다는 자세로 복원부터 먼저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복원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걸 유네스코에 등재한다는 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꼴이다. 글로벌 시대에 대구가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그 정체성 확립이다. 대구의 정체성은 그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달성은 기원전 1세기께 삼한시대부터 이 지역 중심세력의 생활근거지였다. 삼국시대 말기인 3세기께 자연적 지형을 살려 토성을 축성하였다. 성문이 난 동쪽으로 달서천이 휘돌아 흘러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달성토성은 ‘달성 서씨’의 세거지였으나 조선 세종 때 구계공 서침이 이 지역 백성의 환곡 이자 면제를 조건으로 국가에 무상 헌납하였다. 세종은 그 뜻을 높이 사 한 섬 이자 한 말 닷 되를 한 말로 다섯 되 깎아주었다.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9년(1596년)에 석축으로 성을 정비하고 잠시 경상감영을 두기도 했다. 청일전쟁 때, 달성에 일본군이 주둔한 까닭에 달성은 승리를 안겨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일제는 1905년 달성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달성에서 발원되는 민족정기와 대구의 얼이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것이다. 달성은 대구의 원형질이다.
경상감영은 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이다. 원래 상주 등지로 떠돌던 것이 선조 34년(1601년)에 대구에 정착했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중심, 영남의 심장이었다. 영남의 구심점이자 대구의 자존심이었던 경상감영을 얼렁뚱땅 대충 땜질하여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모습이다. 경상감영의 공해도(公圖)가 존재하기 때문에 경상감영 복원은 충분히 가능하다. 없는 유적도 만드는 세상에, 있는 것마저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중심은 영남이고, 영남의 중심은 대구다.
대구읍성은 선조 23년(1590년) 토성으로 축성되었고, 임진왜란 때 파손되어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되었다. 광무 10년(1906년) 당시 대구 군수 박정양에 의해 고종황제의 허가도 없이 불법적으로 철거되었다. 대구읍성의 복원은 예산이 많이 들고 장시간을 요하는 방대한 사업이기 때문에 우선 가능한 구간만이라도 복원을 서둘러야 한다. 위 세 가지는 비록 돈이 많이 들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숙원사업이다. 반듯하게 복원해놓는다면, 반대급부로 이들은 대구를 자자손손 지켜줄 것이고, 우리 후손들에게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훌륭한 자원이 되어 이 지역의 마르지 않는 소득원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대구골목투어의 부상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욕심을 내어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大邱(대구)’의 명칭을 ‘大丘(대구)’로 환원하는 것이다. ‘달구벌’로 하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과욕이고 大丘(대구)로만 해도 좋겠다.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경덕왕 16年(757년) 때다. 조선 영조 26년(1750년)에 이르러 한자 표기가 현재의 대구(大邱)로 바뀌었다. 당시 이양채(李亮采)라는 대구의 유생이 대구(大丘)의 구(丘)가 공자의 이름과 같다고 이를 바꾸자고 상소하였다. 당시 영조로부터 윤허를 받지 못하였지만, 정조 이후 대구(大邱)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대구의 한자명을 원래의 글자로 환원해야 하는 이유로 네 가지를 우선 꼽을 수 있다. 첫째, 바꾼 사유가 불합리하다는 점, 둘째, 邱(구)자는 용례가 드문 어려운 글자라서 한자문화권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 셋째, 바꾼다 하더라도 한글로는 변화가 없어 바꾸기 쉽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있던 것은 그대로 두되 앞으로만 바꿔 쓰면 된다. ‘달성토성ㆍ경상감영ㆍ대구읍성 유네스코등재추진위원회’가 의도한 대로 잘 론칭 되어 대구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되찾아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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