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문경 김룡사의 문화자산

김룡사 대웅전. 정면3칸, 측면3칸 팔작지붕으로 다포식의 공포양식이며, 대웅전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원시림이 빽빽한 운달산 계곡을 지나 보이는 김룡사는 588년(신라 진평왕 10)에 운달이 창건하여 운봉사라고 하였다.
그 후 1624년(인조 2)에 혜총이 중건하였는데, 1642년 화재로 모조리 불타버려, 1649년에 의윤ㆍ무진ㆍ태휴 3승려가 대웅전을 짓고, 김룡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1650년(효종 1) 유주가 범종루를, 대염이 첨성각을, 서헌이 선당을, 두청이 승당을, 민운이 정문을 세운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에 걸쳐 전각과 문두가 세워졌고, 또 중수가 이루어졌다.
민족항일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

김룡사 보장문

보물 제1640호인 김룡사의 영산회괘불도. 조선 숙종 때 그려진 높이 10m에 가까운 거대한 불화로 녹색과 홍색보다는 청색을 많이 사용해 맑은 느낌을 준다.



100년래 최고 더위였다는 올여름은 유별 길었다.
김룡사를 찾은 날도 그 무더위가 또다시 최고를 기록하면서 전국을 강타한 날이었다.

운달산 계곡도 예외는 아니어서 깊은 김룡계곡에도 물이 겨우 더위를 식힐 정도다.
예천에서 문경의 경계 지점에 있는 운달산 자락을 오르면 깊은 전나무 계곡으로 사람들이 텐트촌을 이루고 있다.
절 아래 계곡에서 하룻밤 지내겠다는 것은 단순히 더위를 물리친다는 육체적 안락함에다 비록 기도는 하지 않더라도 절집 부처님의 가피로 정신적 염력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까.
김룡사가 위치한 운달산 김룡계곡은 냉골이라고 불리는,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절 입구에서 더 이상 계곡으로 오르는 것을 막고 있다.
스님들의 수행과 공부를 방해함은 물론 사찰과 산내 암자, 그리고 사찰 아래 마을 주민들의 상수원이어서 오염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고 사찰 측은 설명한다.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 깊은 계곡 아래 있는 김룡사는 신라시대 진평왕대 (588년) 운달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을 수도 있고 절의 규모가 갖춰진 것은 조선 후기 인조 2년(1624년) 혜총이 운달산에 도량을 열었다는 기록을 신뢰하고 있다.
그 후에도 1643년 큰불이 나서 이후 여러 승려들이 중건해서 사찰을 일신한 것으로 보인다.

김룡사는 처음 이름이 운봉사였던 것으로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다.
이름이 김룡사로 바뀐 것은 김룡사사적서에 “절의 북쪽에 층암괴석이 교차하여 둘레가 수십무인데 그중에서 우레가 울고 용이 숨 쉬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듣고 놀라서 절 이름을 김룡사로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속설에는 김씨 성을 가진 문희부(문경의 옛 이름)의 하급 관리가 죄를 짓고 이 산 속에 숨어들었다가 선녀를 만나 살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룡(龍)이라 했다.
비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선녀와 아들이 사라지고 융성했던 집안은 터만 남아 절 이름을 김룡사라 했다고 하나 일개 관리의 이야기를 빌어 절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화유산의 보고 김룡사

김룡사에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보물(11-2호) 동종을 비롯, 괘불탱과 불화 등 대부분은 교구 본사인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문화재가 김룡사에 자리를 지키고 있고 또 장차 문화재 지정을 준비하고 있는 비지정문화재들도 많이 있다.

주지 상오 스님은 “문화재 보전을 위한 전각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지만 김룡사 자체가 보물을 관리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며 문화재를 제대로 보전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실제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처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룡사 동종을 보지 못한 것은 정말 서운하다.
대신 만난 동종. 범종각에 봉명루라고 쓴 편액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몇 년 전 지역 유지의 자제가 김룡사에서 요양을 하고 쾌차하자 그 고마움으로 범종을 시주했다고 한다.

보물 동종이 아닌 종의 용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종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종 밑에 큰 항아리를 묻어 두었다.
조선말 사인 스님이 제작한 높이 100.3cm의 김룡사 동종은 사진으로 보아도 한 마리의 꿈틀거리는 용 모양을 돌기와 뿔, 굳건히 다지고 있는 발 등으로 섬세하게 조각해서 보물로서의 장엄과 화려함이 느껴졌다.

김룡사의 대웅전은 웅장하다.
절 앞의 탑이 없다.
대신 절 뒤 50m쯤 산 중턱에 3층 석탑을 모셔두었다.
한 때는 절 앞에 세워 두기도 했었다는데 김룡사에는 석물(石物)을 두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 뒤편에 모셔진 것 같다고 주지 상오스님은 설명한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는 알 수 없다는 거다.
대신 대웅전 앞마당에 노주석 2기가 버티고 있다.
외형과 크기만 같은 노주석은 자세히 보면 조각이 다르고 조성 시기도 다르다.
엄야간 법회에서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듯한 노주석은 아직 학계의 연구가 뒤따르지 못해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은 듯하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1640호로 지정된 괘불이 보관돼 있다.
조선 숙종 때(1703년) 제작된 괘불은 국가에 변고가 생겼을 때나 기우재 영산재 예수재 등 야외법회에서 사용하는데 높이 9.47m 너비 7m에 이르는 거대한 괘불은 김룡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이다.
대웅전 불상 뒤 괘불함에 모셔져 있고 대웅전 앞 석계단 양측에 괘불지주가 박혀 있다.

또 대웅전은 보통 화마를 제압하기 위해 거북 형상의 귀두를 박아두는데 김룡사 대웅전에는 거북 대신 거대한 두꺼비 형상이 대웅전 옆에 버티고 있다.


대웅전옆 설선당은 휘어진 통나무를 막주춧돌 위에 자연스레 올리고 일으켜 세운 누각으로 경흥강원이라 불린다.

대웅전은 조선 인조 21년(1643)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27년 복구한 뒤 몇 차례 중건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1997년 김룡사에 큰 불이 나서 설선당과 크고 작은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탔으나 당시 절에서 대웅전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웅전만은 불길을 면했는데 아마도 두꺼비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대웅전 뒤 구릉에 모셔진 3층 석탑은 높이 2.67m로 크지도 않고 조각수법도 우수하지 않지만 1단 옥신석에 동자상을 새겨 두었다.
탑의 양식이나 규모로 보아 대웅전 앞에 세울 정도는 아니고 사리탑도 아닌 그냥 탑으로 보이는데 천왕상이나 십이지상이 아닌 동자상을 새겼다는 데서 학술적 의미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석탑과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동자석상이 서 있는데 이 동자상도 마찬가지로 절 뒤로 옮겼을 것이라고 동행한 엄원식 학예사(문경시 문화재담당은 설명한다.
높이 2.27m의 화강석 석불은 마치 절 뒤에서 사찰 전체를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1709년 쓴 김룡사 사적기에는 풍수적으로 소가 누워 있는 형태의 김룡사 터에서 상대적으로 허약한 곳을 보호하기 위해 매미 날개에 해당하는 곳에 돌탑과 돌부처를 세웠다고 적고 있으나 정확히 어디에 있다가 절 뒤로 옮겨지게 되었는지 기록은 없다.

금룡사가 와우형의 터라는 데 대해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 공양간인 해운암 마루에서 서쪽 설선당을 바라보면 뒷산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 된다.

보제루

팔공산 성진암에서 10년 무문관 수행을 마친 성철 스님이 1965년 처음으로 대중들을 향해 100일 법문을 시작한 곳이 김룡사 설선당이었다.
지금 대웅전 앞마당의 설선당과 해운암, 보제루 등이 모두 1997년 화재로 소실되고 새로 건축한 건물들이다.
설선당은 한꺼번에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온돌방으로 해운암과 함께 ‘U’자 구조로 돼 있다.

당시 성철 스님이 계셨던 대웅전 뒤편 상선원은 지금 주지 스님의 거처 공간이다.

절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해우소이다.
특히 김룡사에서 해우소는 그 깊이나 전통으로 보아 전국적이다.
일주문인 홍하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개울가에 붙어있는 해우소는 밖에서 보면 그냥 2층 루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해서 부녀자들이 함부로 해우소 들락거리기를 꺼릴 정도다.

김룡사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건물의 하나가 공루이다.
사찰 공양간 뒤편에 마련된 공루는 기울어진 바닥을 그대로 이용해서 건물을 지어 기둥 길이가 차례로 짧아진다.
그 규모가 옛날 김룡사의 예사롭지 않았을 규모를 말해준다.

일제 강점기 항일의병군의 거점이기도 했던 김룡사는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사찰의 곡물을 약탈해 간 물품 목록이 ‘정미 34석 9말(134포), 소맥 1석 2말(4포), 보릿가루 2석, 소금 4석(17포) 대두 3말 5되(2포) 기타 부식물과 기념품, 짚신 등 다수’였던 점을 볼 때 알 수 있다.


◆항일 운동의 거점 김룡사

일제 강점기 김용사는 전국 30개 본사 중 하나였다.
직지사가 김용사의 말사였던 데 대해 일제가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예천과 문경을 모두 관리할 수 있도록 김룡사를 본사로 지정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김룡사의 사세는 이런 역할을 맡을 만큼 여러모로 컸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김룡사와 대승사였고 이강년 의병부대의 활동 근거지였던 김룡사는 거꾸로 일본군의 토벌과 약탈 대상이기도 했다.
1911년 일본이 사찰령을 내려 30본산 중 하나가 되고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주지가 내려오고 사찰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한편 불교계 전체로는 일제의 원종과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선학원 중심이 선명성과 정통성을 놓고 대립하게 되고 이 싸움이 조계종 싸움의 원류가 된다.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민족불교 운동파는 일제의 주지 임명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항일 운동을 벌였고 경북 북부지방에는 김용사가 그 중심이 됐다.

1919년 4월13일 김룡사 부설 지방학림 학생 18명은 수업을 마친 후 태극기를 감추고 몰래 산문을 나선다.
이들은 헌병주재소가 있는 대하리로 가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으나 이곡리 석문 앞에서 주지 혜옹스님을 만난다.
혜옹은 “너희들의 뜻을 알았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회유 반 호령 반 윽박질렀고 도중에 돌아왔던 학생들은 이튿날 일제 헌병에게 체포돼 만세운동은 좌절됐다.
만세운동이 좌절된 뒤에도 김룡사 학생들은 항일과 계몽운동을 계속했다고 당시 신문들은 보도했다.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중앙학림의 젊은 학승들이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했고 김룡사는 조선불교청년회 김룡지회를 결성하여 개혁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동경유학생과 경성 유학생들을 불러 초청 특강을 했다고 한다.
특히 김룡사 지방학림과 김룡지회 노동야학은 매우 성황을 이뤄 1921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김룡지회가 일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들었다고 보도했다.

김룡사는 일제의 사찰령 이전에 이미 경오학숙을 지어 불교공부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교육 역할도 했다.
김용사는 종교적 교육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경북 북부지역의 항일구국운동 거점이었다.

김룡사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퇴옹 성철((1912~1993) 스님과 서암 홍근(1914~2003) 스님이다.
해방 이후 친일불교의 흐름을 끊고 비구와 대처의 갈등을 정리하고 불교 종단의 정화 운동을 주도했던 중심에 선 사람들이다.
성철은 처음으로 대중 법회를 한 절이 김룡사이고 서암은 1935년 김룡사에서 화산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했다.
성철을 종정으로 추대했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거쳐 성철 이후 8대 종정으로 추대됐으나 1994년 조계종 사태와 관련, 종정직과 봉암사 조실을 사임하고는 열반에 들 때까지 수행에만 전념했다.






이경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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