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타령은 자해일 뿐


우리나라에서 왕따 당하기 딱 좋은 사람은 ‘물빛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분위기를 보고 혹자들은 ‘알아서 기기’가 우리가 세계최고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 티모시 슈나이더의 저서 폭정(暴政)을 보면 ‘알아서 기기’(Anticipatory Obedience)는 전 세계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그리고 스탈린의 공산주의 등 전체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모두 국민의 ‘알아서 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특히 인류 가운데 가장 이성적이라는 독일인마저도 히틀러의 공갈에 너무 쉽게 넘어가 알아서 기기를 했다니.
공직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 예로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나치친위대는 지도부의 명령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솔선하여 대량학살 방법을 고안해 낸 점을 들고 있다.
이들은 지도부가 무엇을 원하는지 미루어 짐작하고, 시연해 보였다는 것. 그것은 히틀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평가됐다.
요즘 북한산 석탄의 위장수입 사건을 놓고 여야 간 설전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조사를 맡은 관세청의 태도를 보면 ‘알아서 기기’의 흔적이 도처에서 보인다.
북한산 석탄이냐 아니냐를 조사하는 과정인데도 수입경로나 배의 항로 등은 조사하면서도 ‘북한’이란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사대상이었던 남동발전은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해운업체인 P사가 러시아 홈스크항의 전용부두 임차계약서에는 ‘북한산 석탄’ ‘북한선박ㆍ선원’이란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도 몰랐다니 윗사람의 의도를 알고 알아서 긴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부실 조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미국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결과를 내놓는 늑장조사는 누가 뭐래도 알아서 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
언론보도와 국익론도 문제가 있다. 즉 홍영표 여당 원내대표는 “한미양국이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국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는 정치공세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청와대는 “미국이 한국정부를 신뢰하는 데 언론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고 있다. 모두 국익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다. 이 위장수입사건을 우리가 알고 조사한 것이라면 일단 덮으면 될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우리에게 통고한 곳이 바로 주한미국대사관이다. 게다가 굳이 한마디 덧붙여서 “한국정보기관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한국정보기관의 ‘알아서 기기’까지 꼬집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슈나이더 주장처럼 알아서 기기는 이렇게 민주주의를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덮으면 덮을수록 미국의 불신만 높아질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조야에서는 미군철수론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리고 우리 외교부에는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동맹파는 힘을 잃고 대북협력을 중시하는 자주파가 등극하는 것도 미국은 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숨겨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차라리 북핵문제의 당사자로서 우리 정부가 내린 5ㆍ24조치는 물론 유엔안보리 결의를 잘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 못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야당의 공세가 거세다.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국가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없어도 될 곳에는 완장을 차고 있다”며 “잘못되면 국가적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미국하원 외교위원회 테러리즘ㆍ비확산ㆍ무역소위원장인 테드 포 의원은 “연루된 한국기업도 세컨더리 보이콧을 부과해야 한다. 예외인 나라는 없다”고 한 말을 염두에 둔 발언이 아닌가 한다.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경제적 불이익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위상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서상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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