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군주를 꼽는다면 세종을 제외하고는 영조와 정조가 아닐까 한다. 이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조선 후기의 황금기였다. 그 원동력은 인사의 형평성, 즉 탕평에서 출발한다.
탕평(蕩平), 기본적 의미는 싸움이나 시비, 논쟁 따위에서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나, 역사적 의미는 다소 다르다.
탕탕평평, 즉 씻고 또 씻어 절대로 차별하지 않음을 강조한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 유래했다. 군주의 정치행위가 쏠리지 않고 지극히 공정하고 정당함을 의미한다. 숙종(1674∼1720) 때 처음 제기되었으나 제대로 시도되지 못하다가 영ㆍ정조에 이르러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영조(1724∼1776)가 즉위할 무렵 조선의 정치판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미 당파 간 철천지원수가 되어 붕당정치의 해결 없이는 몰락하고 만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한다. 민생은 팽개치고 정쟁뿐인 우리 정치판 같았다.
영조는 일평생 치세를, 정쟁에만 눈이 멀어 민생을 외면한 붕당정치 타파에 두었고, ‘임금이 탕평의 모자를 쓰고, 탕평의 부채를 들고, 탕평채를 먹는다’는 말이 생겨날 만큼 탕평책을 중시했다. 영조의 탕평 교서다. “붕당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중략)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인재 임용이 당 사람만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중략) 선악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노론 측 인사를 한 사람 등용하면 상대 자리엔 소론 측 인사를 등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 인사정책이었다. 드디어 국론이 모이자 민생안정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이게 ‘인사가 만사’란 증거고 통치자의 올바른 리더십이다. 그래서 대왕의 호칭을 붙인다.
정조(1776∼1800)가 즉위한 때도 반대파로 득실거렸고 신변은 늘 불안했다. 장용영(친위부대), 초계문신(규장각 인재양성), 화성건설로 왕권을 회복하고 난장판이 된 정치를 복원시켰다. 그 힘도 인재 발굴과 탕평이었다.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보다 훨씬 견고하고 훌륭했다. 영조가 무당파적 ‘완론탕평’이라면, 정조는 옳고 그름을 가려 쓰는 ‘준론탕평’이었다. 인재 등용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노론도 등용했다. 남인인 채제공을 영의정에 파격적으로 임명한 것은 실사구시 파인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같은 조선 최고의 학자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같은 신진학자들의 포진이 바탕이었다.
정조의 탕평 교서다. “탕평은 의리에, 의리는 탕평에 방해롭지 않아야 바야흐로 탕탕평평의 의리라고 할 수 있다.” 만고의 진리다. 이념 성향과 지역의 편중 없이 우수한 인재를 골고루 뽑아서 적재적소에 배치함이 바로 정조 탕평이고, 뿌리는 소통이었다.
노론벽파의 거두인 심환지(1730∼1802)와 4년간 무려 297통의 어찰(임금의 비밀편지)를 주고받았다. 오늘날 우리 정치는 대립만 반복하는 ‘불통의 시대’다. 정조의 비밀서찰은 국정의 동반자로서 포용하고, 소통해 가는 탁월한 정치력 그 자체요, 정치 9단의 면모다.
‘하늘의 달은 하나이지만 물에 비친 그림자는 여러 것이기 마련’이라며 신하들의 각기 다른 성향과 행동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임금의 체면도 자존심도 버리고 부지런히 편지를 쓰면서 소통과 조정을 이루려고 했다. 이게 국민이 바라는 진정한 정치다. 지금 우리는? 그립다. 한없이 그립다.
문재인 정부도 어느새 2년째다. 지지율은 높으나 경제성적은 매우 나쁘다. 소득주도성장과 일자리정책도 실패한 것 같은데 계속 고집하니 경제가 걱정이다. 취임사의 키워드도 탕평인사와 대야(對野)소통으로 ‘협치시대’를 기필코 열겠다고 했다. 지켰는가? 글쎄다. 이유는? 끼리끼리 했고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남북문제도 그렇다. 대화도 중하나 안보가 먼전데 반대로 보인다. 참 안타깝다.
노무현 정부보다도 ‘이념의 탕평’이 후퇴했다는 지적이고, 소통도 부재다. 답은? 진정한 탕평뿐이다. 탕평 없인 성공한 정부 없고, 아집은 공멸이다. ‘국가 흥망에는 필부도 유책’이란 김구 선생의 충고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서 더 걱정된다.

이상섭

경북도립대교수 행정학

한국지방자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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