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권도중 시조시인

▲ 권도중 시조시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시는 정리할 수 없고 정답이 없는 것”이라며 “단 한 줄의 시구가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그 시는 좋은 시다. 감동을 주고, 행복을 준다면 ‘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권도중 시조시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시는 정리할 수 없고 정답이 없는 것”이라며 “단 한 줄의 시구가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그 시는 좋은 시다. 감동을 주고, 행복을 준다면 ‘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도중(68) 시조시인이 문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시조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이영도 시조시인을 스승으로 모시면서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그는 입대 전까지 수성못 인근 ‘대구수성관광호텔’에서 일을 했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전국문예백일장 등에서 두각을 드러냈기에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과 서울 유명 출판사 채용 추천이 있었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쉽사리 대구를 떠날 수 없었다.
그와 문학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움켜쥔 이는 이영도 시조시인이었다.
권 시조시인은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영도 선생님께 막연히 작품을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때부터 작품 첨삭 등 지도해주시며 제자로 삼아 주셨다. 이영도 선생님의 오빠 이호우 선생님을 고교시절 문학동인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이영도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는 좋은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선생님은 아끼는 만년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며 이영도 시인과의 만남을 추억했다.
이영도 시인의 가르침은 1974년 ‘현대시학’을 통한 등단으로 이어졌다.
“시조에 대해 알지 못했던 당시에는 자유시를 썼지만, 이영도 선생님께서는 내게 시조의 매력을 가르쳐주시며 시조 쓰기를 권하셨어요. 군에 있을 때 선생님께서 편찮으실 때였는데 편지로 작품을 보내지 않느냐며 재촉하시곤 했어요. 그해 8월과 12월 연속 2회 추천을 받아 등단하게 됐죠.”
◆회귀선문학동인회를 이끌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시작됐다. 재미삼아 투고한 글이 당시 유명했던 청소년 잡지 ‘학생’이나 ‘여학생’에 실리는가 하면 학원문학상을 타는 등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대구상고 재학 중에는 지역에서 최초로 태동한 대구 지역 고교생 문학동인 ‘회귀선문학동인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회귀선문학동인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문학도들의 독려로 1968년 탄생한 고교 문학 써클이다. 경북고, 계성고, 대륜고, 대구고, 영남고, 대구상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원화여고, 제일여상 등 문예반 학생 2명씩으로 구성됐다.
권 시조시인은 “불법써클 단속과 학생들의 교외활동 통제가 심했던 당시 회귀선문학동인회 결성을 위해 김춘수, 이호우, 이응창 선생님이 고문을, 여영택, 김시헌, 이성수 선생님이 지도를 맡아주셨다. 초창기 모임은 주로 방과 후 원화여고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이뤄졌으나, 나중에는 각 학교장의 허가로 각 학교에서 돌아가면서 진행됐다”고 떠올렸다.
동인회는 그해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주축이 됐고 권 시조시인이 회장직을 맡아 이끌었다. 이듬해 11월22일 ‘회귀선’이라는 제호의 동인지 제1집이 발행됐다. 이 동인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는 속간되지 못했다.
권 시조시인은 “회귀선문학동인회가 생겨난 이후 대건고, 대구고, 대륜고, 대구상고 등에서 경쟁적으로 학교별 문학동인회가 활성화됨으로, 회귀선문학동인회는 소멸의 길로 갔다. 회귀선문학동인회가 지금은 소멸되고 없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아쉽다. 현재는 당시 2, 3대 회원 몇몇과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 기억 속에 잠겼다”고 말했다.
◆시조를 안식처로 삼다
“30여 년 동안 사업에만 갇혀 있다 보니 깡통이 돼 있구나 싶었어요. 사업을 정리하고, 10년 전쯤부터 시조를 쓰며 충전을 하고 있어요.”
권도중 시조시인은 2008년 다시 시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부동산 회사, 건설 회사 등에 근무하며 문학은 젖혀둘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 문단에서 자연스레 멀어졌던 그였다.
“사업에만 매달렸던 시간을 되새기면 후회가 밀려오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글은 남지만, 돈을 남긴다고 해도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지요. 회사가 굉장히 잘됐다면 문단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요. 상처를 받고 슬픔이 있어야 시상이 싹튼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권 시조시인은 문학을 통해 이 세상에 없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된 기표 이전의 모습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문학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이며 꿈이 향하는 끝없는 고투라 생각한다. 저녁이 핏빛으로 물들며 사라지듯이 한 인간의 생각이 그것처럼 보이고 펼쳐지며 머물다가 사라지기 마련인데, 그 과정이 없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시조에서 현대적(시대적) 감각이 살아있기를 항상 유념하고 희망한다고 말한다.
“시조는 인간의 삶에서 시간 속에 있는 리듬을 현재화하는 시(詩), 그래서 시조(時調)라 호명합니다. 전통은 새로운 감각이어야 예술이 됩니다. 예술은 파괴하는 것이고, 파괴는 창조행위이며, 이러한 전통이 한국인의 숨 속에, 핏속에 천 년을 내려오며 존재하고 있어요. 시조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창조돼야 하고, 곧 시상, 이미지가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죠.”
내년이면 등단 45주년을 맞는 그는 시집 ‘비어하는 가득하다’ 이후 발표작으로 시집 한 권을 더 내고 싶다고 했다.
권 시조시인은 “시상은 가장 바쁠 때 아침 출근길, 시간이 없는 약속시간 앞에, 불현듯 왔다가 가버린다. 언제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단 한 줄의 시구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권도중 시조시인 약력
1950년 안동 출생
1968년 회귀선문학동인회 초대 회장
1969년 현대율 활동
1974년 현대시학 ‘북소리’ 추천 완료
2008년 시조집 ‘네 이름으로 흘러가는 강’
2008년 시집 ‘혼자 가는 긴 강만으로는’
2010년 시조집 ‘낮은직선’
2015년 시조집 ‘비어 하늘 가득하다’
2015년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2017년 시조선집 ‘세상은 넓어 슬픔 갈 곳이 너무나 많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중앙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시인협회 회원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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