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자 한 걸음 변화로 생활을 변주한다면 일에 치인 우울함, 막



뜨거운 열기만 가득하던 여름이 저물고 가을볕이 완연하다. 곧 수굿해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견디기 어려웠던 두께의 여름 땡볕도 어느새 순편한 눈빛이 되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에 두드러기가 날 즈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광고의 카피가 떠올라 머릿속에 불을 반짝 켠다. 그래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라는 것은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허해진 심신을 보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어디일까. 마음먹고 둘러보니 가을맞이 행사가 지천이다.
가장 만만하지만, 또한 알찬 곳이 박물관이다. 대구박물관의 상시전시관을 둘러 특별전까지 샅샅이 훑는다. 해설사의 재치 있는 입담에 시간이 바삐 간다. 특별전시관에서는 프랑스 근현대 복식, ‘단추로 풀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구석기와 선사시대를 넘어 프랑스의 역사까지 하루에 넘나드는 멋진 시간여행이다. 어쩌면 축제도 이렇게 다양하게 많을 수 있을까. 별의별 이름이 붙은 축제가 시 단위, 군 단위, 마을 단위로 펼쳐지고 있다. 바람에 펄럭이며 유혹하는 현수막들 때문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행사도 많지만, 개중에는 아주 멋진 축제도 있다. 행사가 많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고를 수 있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재즈도 초가을 밤을 감미롭게 한다. 흐느끼듯 늘어지는 소리에 매료되어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다. 젊은 가수들이 어쩌면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호수의 물결 따라 흐르는 음의 선율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춥지도 않은데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맥주 한 캔이 잘 어울리는 수성못의 감미로운 밤이다. 다음으로 마음이 간 곳이 무형문화재 분들의 공연이다. 승전무, 대금산조, 한량무, 입춤 등으로 이어지는 공연은 관중을 압도한다. 고요한 듯 힘 있는 춤사위에 연방 박수가 터진다. 대금운율에 아릿해진 감성을 춤으로 잔잔히 다독이더니 힘찬 북소리가 심장을 마구 두드린다.
우리의 악기들이 내는 화음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여러 개의 대북이 내는 울림과 모듬북의 경쾌함, 태평소의 선율은 상상 그 이상이다. 신들린 북소리에 혼이 반쯤 나가 있을 때, 긴 줄을 단 상모꾼이 시선을 모은다. 아슬아슬한 내 마음과는 달리 한 번의 엉킴도 없이 열두 발 줄은 잘도 돌아간다. 언제부턴가 교향악에 친숙해져 우리 음악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보는 내내 흥이 나고 눈이 촉촉 젖는 것을 보면 내 감성은 우리 것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이화무용단의 신명나는 춤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를 마무른다. 한 무대에 선 춤꾼들의 아름다운 한복 색상과 재치 있는 무대 인사로 관객은 하나가 되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손바닥이 아리도록.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느새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지루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마음을 당기는 곳들이 많다. 숱한 공연 중 고르고 골라 스케줄노트에 꼼꼼히 기록한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기, 고요히 혼자 다녀오기 등 공연마다 꼬리표도 달아둔다. 영화와 연극과 음악이 가을을 풍성하게 만든다. 입에 붙이고 살던 바쁘다는 말을 잠시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면 좋을 시기다. 너무 큰 변화는 변주라 할 수 없지 않을까. 한 걸음 만큼의 변화로 생활을 변주한다면 일에 치여 우울해지는 것쯤 너끈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어느새 노트가 빽빽하다. 이쯤 되면 일상을 변주하는 건지, 일상이 변주인지 모를 아름다운 가을이다.

박경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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