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아가자 변했어도 그러려니 해야 한다 가까이 있는 곳도 되돌아보자”


지난 9월 20일경 필자의 농원에 목련이 피었다. 4월 초 지인에게 ‘목련꽃 향기가 서럽게 느껴지는 밤’이란 카톡을 보낸 지 6개월 만이고 심은 지 10년 만에 처음이다. 기후변화 탓일까? 아니면 별난 농장주 탓일까? 꽃구경 온 친구와 한참 동안 설전을 벌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5월의 여왕이란 장미는 초겨울까지 피고지고를 반복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전국적인 현상이다. 흔히 밤에 피는 야화(夜花)라고 하는 달맞이꽃은 해질 무렵에 피었다가 해뜨기 전에 진다고 하여 일명 ‘달바라기’라고도 하는데 필자 집에는 낮에도 핀다. 노란 달맞이꽃이 지금은 지고 없지만 여름까지는 누구를 그렇게도 기다리는지 고개를 높이 들고 낮에도 피었다. 참 신기하고 오묘하며 우스운 일이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탐스럽게 피어나는 목련은 ‘봄이 왔어요∼’를 알려주고는 ‘제가 할 일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하면서 소박하게 임무를 다한 양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애절함도 묻어 있고, 고귀함과 숭고한 사랑도 숨어 있고, 자태도 우아하다. 잎이 떨어질 때도 꽃잎이 하도 커서 그런지 벚꽃과는 차원이 다르다.
슬픈 설화도 가지고 있다. 하늘나라 공주가 왕이 골라준 배필보다는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북쪽마을의 바다지기를 짝사랑한 나머지 궁궐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갔으나, 바다지기는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된다. 얼마 후 바다지기의 아내도 죽게 되는데, 공주의 넋은 하얀 백목련으로, 바다지기 아내의 넋은 자줏빛 자목련으로 태어났다는 것.
개화 시기의 작은 이변은 날 때와 들 때도 모르고 한자리에 앉으면 안하무인 설쳐대는 무치(無恥)한 사람들에게 던지는 자연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친구와 설전은 마무리되었다. 9월에 피는 목련도, 낮에 피는 야화도 다 인간들이 만든 지구 온난화의 영향과 주인의 문학소년적 감성과 그리움 탓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꽃말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또 가을이다. 연구실이 답답하여 학교 앞 논길을 걷는다. 유난히 하늘은 높고 푸르며 가을 향기가 좋다. 들깨밭을 지나니 가을이 짙다. 지난봄에는 이 길을 중국 한나라시대 절세 미녀 왕소군의 심정을 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마음으로 걸었는데, 오늘은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이 생각난다. 망명정부의 지폐도, 구겨진 넥타이도, 담배연기도 없는데 왠지 황량하고 고독하다.
이 가을이 이곳에선 마지막이라 그런지 더하다. 그래도 가을에는 우수도 고독을 넘어 멋스럽게 보일 텐데 하면서 걷는다. 많이 사색하고 걸어야 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모든 사고는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다. 문만 나서면 걸을 수 있다. 마음이지 시간과 여유 타령은 핑계다. 많이 걸어야 만날 수 있다.
가을엔 그리운 사람과 추억을 만나자. 기다리지만 말고 찾아가서라도 만나자. 동백은 애타는 그리움에 멍이 들었고, 목련과 야화도 기다림에 슬픈 사랑이 되었다고 한다. 추석연휴가 지나면서 곧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되고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다. 만나거든 부담도, 떠난 이유도 묻지 말고 화해를 위한 좋은 말만 하자. 그리고 기다리자. 세월이 흘러 이미 사랑이 식었거나 변했어도 아쉬워하지 말고 그러려니 해야 한다. 혹 돌아오는 길이 힘들고 아파도 미련에 떨지 말고 참아야 한다. 그래야 남은 가을과 내년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추억도 그렇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 100가지 목록인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에도 첫사랑 만나보기, 어린 시절 친구에게 연락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고백하기가 들어 있다. 영화(2007년) 버킷 리스트에 자동차정비사 카터는 헤어진 딸과 화해를 못 하는 재벌사업가 에드워드를 같은 병실에서 만나 “더 이상 망설이지 마라. 천국에 가려면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와 남에게 기쁨을 줬는가를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무심하게 버려둔 사람은 없었는지 삶의 기쁨을 되새겨보는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이상섭

경북도립대 행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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