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 속 어른들의 소탈한 대화들오로지 맨몸 하나가 삶의 도구였을순박한 사람들에게 어서

한 꺼풀 한 꺼풀 겨울을 벗기며 봄은 그렇게 다가오는가 보다. 머지않아 목련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개나리의 노란 웃음도 자지러지게 들릴 터이지. 손바닥에 들어온 이른 봄바람이 마음을 간질이고 저만치 달아난다.
길을 나선다. 발길이 닿은 곳은 시골 장터, 들떴던 음력설 기분도 가시고 조용하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왁자하다. 주위를 살핀다. 바람에 날리는 햇살 속에서 봄을 파는 주인공, 나물을 매만지는 할머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양지바른 노지에서 캤을 봄동,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이것을 참기름과 깨를 넣어 겉절이로 만들면 식욕을 돋울 것이고, 쌈을 싸서 크게 한입 먹으면 금방이라도 입속에서 봄이 툭툭 터질 것 같다.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잇는다. 난전에 비닐을 깔고 약초를 다듬는 노파 앞에서 멈춰 선다. 이것은 감기에 좋고 저것은 관절에 특효이며 못생겨도 저쪽 끄트머리에 있는 것은 항암효과가 있다며 나를 쳐다본다. 목을 길게 빼고 표정을 연신 살핀다.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양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은 다문화 가정의 부부 모습이 보이고 젊은 외국인은 서툰 우리말로 생선값을 깎아 달라고 조른다. 어물전 주인은 떼쓰는 이방인이 귀여운지 덤으로 작은 생선까지 끼워준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굿바이”를 외치며 또 오라고 손을 흔든다. 그 한마디가 싱싱한 물고기처럼 퍼드덕거린다. 이젠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고 자연스럽기만 하다.
벌써 끼니때가 되었을까. 할머니 여럿이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고 있다. 김이 나는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이 차가운 속을 데워 준다. 거울 같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식기 전에 얼른 먹으라고 챙겨주는 살가운 행동들이 봄바람처럼 포근하다. 어쩌면 이들이 서로의 삶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시장기가 느껴져 국숫집에 들어갔다. 찬물에서 갓 나온 밀국수에 침이 고인다. 쫄깃하게 잘 익은 면발, 국물을 들이켜니 그 옛날 어머니의 손맛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지금이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쌀이 귀하고 모든 게 넉넉지 못했던 시절엔 국수마저도 모자라 국물로 배고픔을 달래었다. 그래도 꿀맛이었다. 자고로 음식은 맛보다 기억으로 먹을 때 더 강렬한 맛을 내는 것 같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던 그때가 새삼 그리워진다.
두 어르신이 국밥을 사이에 두고 지난날을 이야기 중이다. 차가운 막걸리 한 잔을 주인장에게 따라 주며 질박한 사투리로 안부도 묻는다. 귀동냥한다. 가난했던 시절, 국그릇 속에 몇 개 떠오른 옹골찬 밥알처럼 살았던 청년들이 어느새 백발이 되어 술잔을 기울인다. 그때는 막걸리 한 사발에 소금으로 입가심했지. 소금만 한 안주도 없었어. 다부진 체격의 어른이 당시를 회상하자 세상살이가 나아지면서 그나마 장날엔 국밥으로 속을 두둑이 채웠지. 하시며 마른 체구의 어른이 맞장구를 놓는다. 듣고 보니 국밥과 막걸리는 서민들의 배를 채워주며 가난을 끌어안은 음식이었다.
주인 부부의 인상도 푸근하다. 지금까지 함께 했을 천사 같은 아내와 머슴 같은 남편의 골 깊은 주름이 그저 생겨났을까. “몸은 고단해도 보람은 있었지. 커가는 자식들을 보면 힘들었던 기억은 금세 사라졌거든.” 라고 말하는 아내는 흰머리가 수북한데도 상냥하기가 봄바람 같다.
어른들의 대화는 그 시절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삶을 하나하나 잘 살아나온 게 고마운 듯 보였다. 욕심내지 않고 하루해가 주는 만큼만 걷는다면 앞으로 이어갈 인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오일장은 덤이 있어 좋고 소탈한 사람 냄새가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경사길이 끝났나 싶을 때 또다시 비탈길이 나오는 게 우리네 인생, 아찔한 구름다리에 선 기분이 매사 인생사 아니던가. 겨울이 녹아 봄이 오듯, 오로지 맨몸 하나가 삶의 도구였을 순박한 사람들에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시끌벅적하던 장터가 어느새 파장 분위기다. 손수레 위에 놓인 먹음직스런 군음식이 떨이로 팔리고, 보따리장수도 난데장꾼도 짐을 싸기에 바쁘다. 고소한 풀빵 냄새가 여운을 남기는 닷새마다 열리는 현풍장, 그 특별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김미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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