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에 대한 믿음은 없지만자식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의중에좋은 기분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촛불로 타오르던 민심이 명절 연휴로 인해 잠시 주춤해졌다. 어수선한 마음들은 잠시 접어두고 새해에는 모두가 품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보기도 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덕담에도 정이 듬뿍 깃들어 있다. 이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비하는 일도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져봄 직하다.
설 연휴에 친정가족이 모두 모였다. 세배가 끝나자 아버지는 모두 거실에 불러 앉히고 어김없이 토정비결 책을 꺼내셨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첫째네 가족부터 막내네 가족까지 차례차례 출석을 불러가며 보아주시는 것이다.
“이것만 보면 따로 신수 같은 거 안 봐도 된다.”
어느 해인가. 처음 토정비결 책을 꺼내놓으며 당신은 자식들이 한 해 운수를 보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대지나 않을까 염려하셨던지 그렇게 말씀하셨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부분 좋은 일이 많다는 전망을 내놓으셨다. 사위들의 사업이 여전히 탄탄하거나 더 나을 거라는 말씀에 아이들에 대한 덕담이 이어졌다. 나쁜 일이 일어날 조짐은 별로 없다. 누구와 누구는 올해 특별히 물 조심을 하라거나 운전 조심, 혹은 교통사고에 유의하라는 정도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들뿐이다. 자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잔소리 같지 않게 위험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을 내놓으신 것일 터이다.
“올해도 다들 나쁘지 않구나. 특별한 일은 어느 집도 없다. 그저 작년처럼 그렇게 의좋게 열심히 살면 만사가 다 무난하니 다행이다.”
그렇게 올해도 우리 형제들은 덕담을 세뱃값으로 듬뿍 받았다. 덕분에 모두가 흡족한 한 해를 미리 선물 받은 기분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신의 점괘는 특히 아이들에게 잘 먹혔다. 각각의 아이에게 맞춤하여 일어날 법한 일을 예견하시니 제 속을 들여다보며 하는 말씀 같았으리라. 뜨끔해진 아이는 스스로 조심하려 애쓰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더불어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도 더해지니 일석이조의 교육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당신의 점괘에는 당연히 비밀이 있었다. 우리 형제가 늘 아이의 문제점이나 바라는 점을 당신께 미리 귀띔해두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토정비결을 더 신봉하는 일이 생겼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큰 키로 늘 덤벙대다가 다치기 일쑤인 아이였다. 큰 덩치 때문에 혹시라도 철없이 패거리 짓는 싸움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신 아버지께서 특별한 당부를 하셨다.
“올해는 진학도 하니 친구 사귀는 것을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괘가 나오는구나. 다툼에 휘말리면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구나.” 모난 데 없이 둥근 성격을 가진 아이는 걱정 내려놓으시라고 호기롭게 대답을 했다.
입학을 하고 두어 달이 지났을 때 일이 터졌다. 큰 키 때문에 일명 일진이라 불리는 선배들의 눈에 든 것이다. 아이를 자신들의 패거리에 끌어들이기 위해 밤낮으로 전화를 걸고, 하굣길에는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가 내색하지 않아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알고는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매일 하교 시 교문에서 기다리고, 부모의 손이 미치지 않는 교내에서는 학생주임 선생님께 특별히 도움을 청했다. 밀착관리 덕인지 다행히도 몇 개월이 지나자 선배들은 아이에게 시들해졌다. 아마도 자신들의 생각보다 다부지지 못한 성격도 톡톡히 한몫을 했으리라.
그 일로 아이는 할아버지께 경외감을 가진 듯하였다.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하셨으니 어린 마음에 할아버지께서 신통력을 가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사촌들 중 맏이인 아이의 일을 전해들은 동생들도 할아버지의 점괘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고민이 생기면 할아버지께 상의하기도 했으니 아픈 경험으로 큰 것을 얻은 해였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 선생이 남긴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서 어느 곳에도 책에 대한 언급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1899년 황성신문 논설에서 처음으로 정감록과 관련하여 언급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그것도 개인의 신수를 풀어보는 점술 책이 아니라 정감록처럼 국가 존망과 풍수도참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는 비결서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터이다. 그러니 토정비결이 언제 누구에 의해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책으로 변한 것인지 모를 일이기에 그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다. 하지만 자식들의 평안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의중은 헤아리고도 남는 일이기에 해마다 좋은 기분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다.
어수선하고 아픔이 많았던 지난 해였다. 상처 입은 사람도 상처 준 사람도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맞이한 새해다. 인정하고 양보하여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새해는 욕심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는 해가 되기를,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토정비결의 덕담이 쏟아지기를 기원해본다.

박경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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