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권한 없다해도모른체 지나치지 않고함께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 필요해”


크리스마스를 앞둔 교회는 분주하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교회마다 춤과 노래, 연극 등으로 작은 축제를 준비한다. 연극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베들레헴 작은 마을을 찾아가는 세 동박 박사의 이야기이다.
에자르드 샤퍼의 ‘네째 왕의 전설’이라는 책에는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박박사 세사람 말고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또 한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러시아 땅, 작은 나라의 왕인 그는 하늘의 별을 보고 오래전부터 전설로 전해오던 인류 전체를 구원할 위대한 왕이 태어났음을 알고 보물들을 챙겨 길을 떠난다. 궁궐에서 나와 계속 길을 가던 그는 자기 나라를 넘어서 낯선 나라를 여행하게 되고, 그동안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을 많이 보게 된다. 좋은 일들은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자기 백성들에게도 같은 일을 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나쁜 일들을 보았을 때는 상심했다. 의로운 사람들이 괴로워하거나 착한 사람들이 비참한 처지에 있어도 자신의 나라와 백성이 아니었기에 그에게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장차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다스리게 될 위대한 왕, 그 분의 백성들이 보살핌이 아닌 채찍으로 통치를 당하고 상품이나 다름없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며 그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위대한 새 임금이 그 숱한 일들을 바로잡기를 간절히 원했다.
위대한 왕에게 바치려고 가지고 온 보물들은 다쳐서 누워있는 어린 아이를 위해, 농장에서 쇠몽둥이로 맞아 빈사상태에 빠져있는 농노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나환자의 상처를 감아주고 감옥에 갇히거나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해 차례차례 쓰였다. 보물이 점점 사라졌지만 어차피 그 분의 백성들인데 그들이 알맞은 때에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함과 고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보물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그는 어느 항구에 닿아 있었다. 어떤 악독한 선주가 빚을 갚기 위해 노 젓는 일을 하다가 죽어버린 사람의 아들을 아버지 대신 배에 태워 사슬로 묶으려는 것을 목격하고 그 어린 아이를 대신해서 자신이 배를 탄다. 악독한 선주의 계산법은 제 멋대로여서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늙고 병들어 더 이상 노를 저을 수 없을 때 그가 배를 탔던 선창에 버려지기까지는 삼십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평생을 길 위에서 보내고 난 후 겨우 자유를 찾은 그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어느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그곳은 바로 예수가 못 박히는 자리였다. 긴 세월이 걸려서 비로소 위대한 왕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외친다.
‘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려고 했던 것들을 죄다 없앴습니다. … 저의 마음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진정 바라는 보물은 무엇일까? 황금과 유향과 몰약, 이러한 보물의 물질적 가치보다 귀한 보물들이 꼭 필요한 곳에서 쓰여지는 그 선함과 베풂, 그로 인해 생겨난 감사와 사랑 그리고 용서, 그것을 가장 귀한 보물로 여기시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때마다 아기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실망과 분노, 두려움도 반성도 없는 교만과 뻔뻔함,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 청년들의 절망이 가득한 이 땅에 네 번째 왕이 온다면 보물들은 어디에 쓰여질까? 절망의 끝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세 모녀를 살리고, 학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맨발로 도망쳐 나왔던 소녀에게 그의 자루에서 나온 좋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배불리 먹일 것이다. 손을 흔들며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과 딸들이 탄 배가 가라앉은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는 부모들은 어떻게 위로해 줄까. 절망에 빠져있는 청춘들에게 어떤 희망을 심어줄까. 촛불을 들고 나라의 평안과 안정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나라의 왕인 그는 이방의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 지금 우리에게는 권한이 없다하여도 모른 체 지나치지 않고 함께 아파하고 부당함에는 함께 맞서고 억울함은 풀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넷째 왕이 우리나라에 당도하기를 바란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위로와 사랑을 받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따뜻해진 그 마음을 다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이명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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