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닷가 카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다. 큰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뜨락까지 파도가 밀려올 것 같은, 크지도 작지도 누추하지도 화려하지도 오래되지도 새것이지도 않은 바닷가 카페 ‘꽃밭에서’.
그 곳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살고 있다. 담벼락에는 꽃이 그려져 있고 소박한 마당 작은 꽃밭에 있는 듯 없는 듯 몇 송이의 들국화가 피고 지는 곳. 사람도 꽃도 아닌 파도가 주인인 마당.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 돌리는 비디오처럼 같은 동작으로 모래사장을 들락거리는 파도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잠깐씩 모습을 바꾸는 구름 말고는 새로울 것도 다를 것도 없는 풍경.
그들은 얼마나 함께 살았을까?
아내가 먼저 마이크를 든다. 카페를 반쯤 채우고 앉은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노래를 시작한다.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웃으며 따라 부르기 시작했던 노래에 눈물이 난다. 젊었을 적의 그녀는 누구를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불렀을까? 노래 한 곡에 그녀의 인생이 보인다. 나도 그녀도 서로의 사연과 속내를 모르지만 노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함께 흐른다. 말로 해야만,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야만 누군가를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이 마이크를 건네받는다. 속속 손님들이 도착하는 주차장과 작은 공연을 하기위한 기계 설치, 카페의 자잘한 모든 일들을 컨트롤하느라 그는 분주하고 피곤해 보였다. 작업복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아내가 드레스 차림으로 완벽하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나왔다면 그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의 차림새와 표정에 우리는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한 두곡 부르고 내려갈 것이라 생각했다. 반주가 흐르고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누가 음악을 예술이라 했던가, 그것은 마술이었다. 신데렐라의 누더기 옷이 드레스로 바뀌고 호박이 마차로 바뀌는 것처럼 그의 노래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그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충분했고 넘쳤다.
바닷가 카페, 조용한 그 마을에서 가수 정훈희, 김태화 부부는 그렇게 인생의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2. 익어가는 사람들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이전부터 살았던 토박이들이다. 장날이 되면 같은 장터에서 산 신발과 양말을 신고 명절이면 비슷비슷한 옷들을 사 입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봄 소풍과 가을운동회와 학예회를 함께 치렀다.
버스를 타고 시내의 학교로 통학을 하던 사춘기 시절에는 알아도 모른 체 보아도 못본 체 하며 지나쳤던 우리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삶을 살던 어느 날, 마흔을 기점으로 만났다. 남들이 보면 그저 초라한 중년의 일남일녀로 보일 얼굴이지만 우리에게는 어릴 적 장난스러움과 촌스러움과 한없이 순박하고 착한 표정이 보여 억지를 부리거나 얄밉게 보일 때도 미워할 수가 없다. 어릴 적 그 아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친구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점점 깊어지는 연민의 정체는 무엇일까.
늘씬하고 키도 커서 여자들 중 제일 멋쟁이였던 K는 살이 쪄서 고무줄 바지를 입고 왔고 제일 많은 일을 치러내야 하는 직책을 갖고 제일 바쁘면서도 제일 멀리 사는 J와 M은 늘 그랬듯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달려와 든든하게 존재감을 채워 주었다. 가끔 지나치게 알뜰하고 못 하나도 계산 없이 박지 않을 것 같던 O는 갓 출고한 수입차를 타고 왔다. 아무도 어디서 돈이 생겼느냐고 묻지 않았다. 하필 모임 때마다 일정이 겹치는 H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문자만 날아왔고 옛날 같으면 한번쯤 빈정거렸을 친구들도 이제는 그 친구를 옆자리에 놓아둔 짐보따리처럼 내려놓을 줄 안다.
몇 잔의 술에 과하게 오버액션하며 좌중을 흥겹게 만들어주는 Y는 오늘도 자진해서 망가지며 분위기를 띄워주었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G의 마음속에는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어린아이가 숨어있다는 것을. 평소의 우울해 보이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게 과도하게 발랄한 오버액션의 주인인 S는 늦게 합류한 이 모임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불안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이제 우리는 안다. 설명도 필요 없다. 그저 만날 때 환하게 웃어주고 헤어질 때 조금만 더 힘을 주어서 손을 잡아주면 된다. 서로의 어려움과 아픔과 기쁨의 그 속내를 안다. 비슷한 길을 지나왔고 비슷한 지점에 서 있으니까.
그 친구들과 가을 여행을 떠났다. 가수 부부가 작은 음악회를 여는 바닷가마을 카페, 파도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가을 바닷가로.
가을이 깊어간다. 나의 벗들도 각각의 빛과 색으로 깊이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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