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상주 북장사

경북 상주 시내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 북장사는 속리산 끝자락인 천주산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상주시 내서면 북장리를 지나 북장사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10여 분 남짓.시야가 탁 트인 공터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크기의 일주문(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가운데 첫 번째 문)이 우리를 반겨준다.차를 이용해 곧장 올라갈 수도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일주문의 자태에 차를 한편에 세워놓고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북장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상주 천주산 북장사사적기’ 필사본에는 833년(흥덕왕3년) 진감 국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하고 있다.이 사적기에는 천주산 이름에 대한 기록도 있다.이 산에는 수미굴이 있고 굴 가운데에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모양인 돌기둥이 있다.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받친 기둥처럼 보일 뿐 아니라 고태스럽고 괴이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서서 구름과 안개를 마시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천주산이라 불려 왔다고 한다.천주산이라는 이름이 언제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절터에서 창건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산’ 기와가 출토돼 비로소 그 이름을 알게 됐다.창건 이후 이 사찰은 수미암, 상련암, 온선암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닌 국찰이었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불타 폐허가 됐다.그 후 1624년(인조2년)에 이곳에 온 중국 승려 10여 명에 의해 중건됐으나 1650년(효종1년)에 화재로 당우가 모두 소실되고 다시 서묵, 충운, 진일화상 등이 신도와 함께 중건했다. 불과 8년 만인 1657년(효종8년) 다시 화재로 당우가 모두 소실됐다.이 절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도 많은 화재가 발생하는 것은 사찰이 있는 자리 남쪽에 화산이 비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염수를 그 첨두에 묻어 재앙을 면했다고 한다.하지만 세월이 지나 나무꾼이 이를 훼손하자 다시 화재를 입었다.이에 절의 스님들이 의논해 1년 후인 1658년 복지로 이전해 용순이 궁형당을, 취건이 원통전을, 일휘가 은현당을 각각 세워 신북장사라 했다.그렇게 옮겨 간 북장사는 그 이후로 번성해 불전은 넓고 화려해 극락보전, 화장전, 원통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는 대사찰이 됐다.이후 쇠락해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로 속해 있다. ◆비를 부르는 ‘북장사 괘불’괘불은 야외에서 벌어지는 불교의식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대형 걸개그림이다.보물 제1278호인 ‘북장사 괘불’은 가로 811.6㎝, 높이 1천330㎝다.이 그림은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다.녹색과 붉은색, 금색이 도드라진 그림에는 광배를 뒤에 두고 중심에 서 있는 부처가 압도적이다.부처 주변으로는 여러 보살과 제자, 사천왕, 제석천 등이 보인다.일반적으로 영산회상도에는 법회를 주관하는 석가모니불이 대좌 위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비해, 이 불화는 서 있는 입상의 부처로 표현됐다.야외 법회를 위한 괘불의 기능에 맞게 예배의 주존을 화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 있는 부처로 그린 것이다.일어서있는 부처의 도상은 ‘북장사 괘불’에 처음 나타났으며, 이후 경북지역 사찰의 영산회상도 도상으로 확산됐다.북장사 괘불의 화기에는 1688년 불교 신도들과 승려 165명의 시주와 후원으로 제작됐다고 적혀있다.이 괘불은 미완성 작품이다.자세히 관찰하면 부처의 오른손이 밑그림만 돼 있다.이와 관련해 연기설화가 전해진다.신라시대 때 당나라 스님이 사흘 동안 문을 닫은 채 먹지도 않고 괘불을 그리는데, 열세 살의 어린 스님이 이를 몰래 엿보니 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새 한 마리가 화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있더란다.어린 스님이 엿보는 것을 눈치챈 새는 갑자기 입에 문 붓을 놓고 날아가 버렸고 그림을 확인하니 한쪽 귀퉁이가 완성되지 않았다.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이 그림을 싣고 읍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효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이 괘불은 주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야외에 걸렸지만 극심한 가뭄이 닥친 상주 지역에 비를 청하는 기우제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그 내용은 상주지역 읍지 ‘상산지’에 나온다.1950년대에도 가뭄이 심해 이 괘불의 사본을 북천강에 가서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다.이후 2001년에도 다시 한번 괘불을 대동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괘불을 걸고 난 이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단비가 내렸다.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다.극락보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2001년에 지어졌다.3구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북장사사적기’를 통해 1676년(숙종2년)에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 왼쪽에 관세음보살좌상,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다.아미타여래좌상은 좌우 보살상 보다 조금 크게 조성됐다.3구의 아미타여래좌상은 결가부좌 자세로 구품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 보살상은 연꽃 가지를 들고 앉아있다.크기는 180~190㎝에 달하는 중형의 불상으로서 모두 나무로 조성해 도금한 상태다.별도로 제작돼 몸체에 삽입된 두 팔을 포함해 전체가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2m에 달하는 크기의 불상이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 불상들은 북장사 명부전에 모셔진 24구의 목조상이다.불교의 지옥관이 다른 지옥 사상과 다른 점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해 극락 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종교적 기능을 하는 곳이 바로 명부전이다.불가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저승 시왕 중 7왕에게 7일 동안씩 생전의 업에 대하여 조사를 받는다.이어 100일, 1주년, 3주년이 되는 시기에 나머지 3왕에게 심판을 받아 육도 가운데 한곳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이 시기에 맞춰 행하는 천도의식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49재로 죽은 이가 다음 생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 10왕을 모시므로 지장전·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봉안된 지장시왕도는 불교의 지옥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대체로 지장전의 중앙에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해 삼존을 이룬다.북장사의 명부전도 중앙의 지장삼존을 비롯해 좌우에는 10구의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의 순서로 배치돼 있다.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689년에 조각승 지현을 비롯한 8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24구에 달하는 상이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북장사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38호인 북장사 삼층석탑은 괘불을 제외하고는 북장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다.이 탑은 이곳이 본래 자리도 아니고 새 부재가 많이 들어가 복원된 탑이지만 1991년 문화재로 지정됐다.원래는 상주시 인평동에 있던 탑으로 우암산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용흥사로 옮겨 관리했다가 199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북장사 경내로 옮기면서 북장사 삼층석탑으로 이름을 바꿔 복원했다.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원래는 기단 일부와 탑신의 3층 몸돌 1개, 지붕돌 3개만 남아 있었다.지붕돌은 낙수 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뒀다.남아있던 기단과 지붕돌 등 부재들의 양식상 특징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장사는 사람이 거의 통행하지 않아 휑한 모습이지만 전성기 때 사찰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한눈에 봐도 느낄 수 있다.사찰 감상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는 길.마당을 지키는 삼층석탑이 발걸음을 돌리는 나를 다시 맞아준다.깨끗이 정돈된 마당 가운데 자리한 석탑 앞에서 앞뒤로 우뚝 솟아 있는 큰 산들을 바라본다.매서운 겨울바람으로 얼어있던 몸을 산들이 포근하게 안아 주는 느낌이 든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꼬여있던 마음이 간결해짐을 느낀다.코로나19로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이곳에서 잠시나마 훌훌 털어버리는 것은 어떨까.권종민 기자 jmkwon@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상주 북장사

경북 상주 시내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 북장사는 속리산 끝자락인 천주산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상주시 내서면 북장리를 지나 북장사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10여 분 남짓.시야가 탁 트인 공터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크기의 일주문(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가운데 첫 번째 문)이 우리를 반겨준다.차를 이용해 곧장 올라갈 수도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일주문의 자태에 차를 한편에 세워놓고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북장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상주 천주산 북장사사적기’ 필사본에는 833년(흥덕왕3년) 진감 국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하고 있다.이 사적기에는 천주산 이름에 대한 기록도 있다.이 산에는 수미굴이 있고 굴 가운데에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모양인 돌기둥이 있다.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받친 기둥처럼 보일 뿐 아니라 고태스럽고 괴이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서서 구름과 안개를 마시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천주산이라 불려 왔다고 한다.천주산이라는 이름이 언제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절터에서 창건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산’ 기와가 출토돼 비로소 그 이름을 알게 됐다.창건 이후 이 사찰은 수미암, 상련암, 온선암 등의 부속 암자를 지닌 국찰이었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불타 폐허가 됐다.그 후 1624년(인조2년)에 이곳에 온 중국 승려 10여 명에 의해 중건됐으나 1650년(효종1년)에 화재로 당우가 모두 소실되고 다시 서묵, 충운, 진일화상 등이 신도와 함께 중건했다.불과 8년 만인 1657년(효종8년) 다시 화재로 당우가 모두 소실됐다.이 절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도 많은 화재가 발생하는 것은 사찰이 있는 자리 남쪽에 화산이 비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염수를 그 첨두에 묻어 재앙을 면했다고 한다.하지만 세월이 지나 나무꾼이 이를 훼손하자 다시 화재를 입었다.이에 절의 스님들이 의논해 1년 후인 1658년 복지로 이전해 용순이 궁형당을, 취건이 원통전을, 일휘가 은현당을 각각 세워 신북장사라 했다.그렇게 옮겨 간 북장사는 그 이후로 번성해 불전은 넓고 화려해 극락보전, 화장전, 원통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는 대사찰이 됐다.이후 쇠락해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로 속해 있다. ◆비를 부르는 ‘북장사 괘불’괘불은 야외에서 벌어지는 불교의식에서 예배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대형 걸개그림이다.보물 제1278호인 ‘북장사 괘불’은 가로 811.6㎝, 높이 1천330㎝다.이 그림은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다.녹색과 붉은색, 금색이 도드라진 그림에는 광배를 뒤에 두고 중심에 서 있는 부처가 압도적이다.부처 주변으로는 여러 보살과 제자, 사천왕, 제석천 등이 보인다.일반적으로 영산회상도에는 법회를 주관하는 석가모니불이 대좌 위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비해, 이 불화는 서 있는 입상의 부처로 표현됐다.야외 법회를 위한 괘불의 기능에 맞게 예배의 주존을 화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 있는 부처로 그린 것이다.일어서있는 부처의 도상은 ‘북장사 괘불’에 처음 나타났으며, 이후 경북지역 사찰의 영산회상도 도상으로 확산됐다.북장사 괘불의 화기에는 1688년 불교 신도들과 승려 165명의 시주와 후원으로 제작됐다고 적혀있다.이 괘불은 미완성 작품이다.자세히 관찰하면 부처의 오른손이 밑그림만 돼 있다.이와 관련해 연기설화가 전해진다.신라시대 때 당나라 스님이 사흘 동안 문을 닫은 채 먹지도 않고 괘불을 그리는데, 열세 살의 어린 스님이 이를 몰래 엿보니 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새 한 마리가 화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있더란다.어린 스님이 엿보는 것을 눈치챈 새는 갑자기 입에 문 붓을 놓고 날아가 버렸고 그림을 확인하니 한쪽 귀퉁이가 완성되지 않았다.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이 그림을 싣고 읍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효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이 괘불은 주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야외에 걸렸지만 극심한 가뭄이 닥친 상주 지역에 비를 청하는 기우제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그 내용은 상주지역 읍지 ‘상산지’에 나온다.1950년대에도 가뭄이 심해 이 괘불의 사본을 북천강에 가서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다.이후 2001년에도 다시 한번 괘불을 대동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괘불을 걸고 난 이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단비가 내렸다.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다.극락보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2001년에 지어졌다.3구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북장사사적기’를 통해 1676년(숙종2년)에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 왼쪽에 관세음보살좌상,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다.아미타여래좌상은 좌우 보살상 보다 조금 크게 조성됐다.3구의 아미타여래좌상은 결가부좌 자세로 구품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 보살상은 연꽃 가지를 들고 앉아있다.크기는 180~190㎝에 달하는 중형의 불상으로서 모두 나무로 조성해 도금한 상태다.별도로 제작돼 몸체에 삽입된 두 팔을 포함해 전체가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2m에 달하는 크기의 불상이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 불상들은 북장사 명부전에 모셔진 24구의 목조상이다.불교의 지옥관이 다른 지옥 사상과 다른 점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지옥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해 극락 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종교적 기능을 하는 곳이 바로 명부전이다.불가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저승 시왕 중 7왕에게 7일 동안씩 생전의 업에 대하여 조사를 받는다.이어 100일, 1주년, 3주년이 되는 시기에 나머지 3왕에게 심판을 받아 육도 가운데 한곳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이 시기에 맞춰 행하는 천도의식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49재로 죽은 이가 다음 생에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 10왕을 모시므로 지장전·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봉안된 지장시왕도는 불교의 지옥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대체로 지장전의 중앙에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해 삼존을 이룬다.북장사의 명부전도 중앙의 지장삼존을 비롯해 좌우에는 10구의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의 순서로 배치돼 있다.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689년에 조각승 지현을 비롯한 8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24구에 달하는 상이 손상된 곳이 거의 없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북장사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38호인 북장사 삼층석탑은 괘불을 제외하고는 북장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다.이 탑은 이곳이 본래 자리도 아니고 새 부재가 많이 들어가 복원된 탑이지만 1991년 문화재로 지정됐다.원래는 상주시 인평동에 있던 탑으로 우암산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용흥사로 옮겨 관리했다가 199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북장사 경내로 옮기면서 북장사 삼층석탑으로 이름을 바꿔 복원했다.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원래는 기단 일부와 탑신의 3층 몸돌 1개, 지붕돌 3개만 남아 있었다.지붕돌은 낙수 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뒀다.남아있던 기단과 지붕돌 등 부재들의 양식상 특징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장사는 사람이 거의 통행하지 않아 휑한 모습이지만 전성기 때 사찰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한눈에 봐도 느낄 수 있다.사찰 감상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는 길.마당을 지키는 삼층석탑이 발걸음을 돌리는 나를 다시 맞아준다.깨끗이 정돈된 마당 가운데 자리한 석탑 앞에서 앞뒤로 우뚝 솟아 있는 큰 산들을 바라본다.매서운 겨울바람으로 얼어있던 몸을 산들이 포근하게 안아 주는 느낌이 든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꼬여있던 마음이 간결해짐을 느낀다.코로나19로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이곳에서 잠시나마 훌훌 털어버리는 것은 어떨까.권종민 기자 jmkwon@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삼휴정

‘선비정신’을 국어사전으로 찾아보면 ‘인격적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정신’이다.조선 시대 이러한 선비정신을 꼿꼿이 지켜낸 삼휴(三休) 정호신 선생이 머물었던 정자가 영천에 있다.사라져 가는 선비 정신의 근원을 찾아 영천댐으로 향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지났다고 느끼는 순간 깊게 가라앉은 영천호수는 들이치듯 불쑥 나타났다.영천호수를 어느새 발밑에 두고 길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굴곡진 채로 비스듬히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겨울철 칼바람이 불어 왔지만, 창문을 내리고 영천호수의 정기와 소나무 숲의 향기를 마시고 싶어졌다.괜스레 차창 너머로 헛기침을 내뱉는다. 어느새 어깨를 짓누르는 선비들의 기운에 맞서려는 스스로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길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어느새 노송들이 멋지게 늘어선 곳을 맞닥뜨린다. 고즈넉한 한옥들도 눈에 띈다. 등 뒤로 기륭산을 두고 양옆으로는 보현산 줄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눈앞에는 말 없는 영천호수가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곳이 ‘명당’ 자리라는 것을 눈치 챌 만하다.노송의 숲 좌측에는 물 마른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다. 영천댐 수몰지에 있었던 오천정씨(烏川鄭氏) 가문의 문화재 가옥들이다.영천지역의 영일정씨(迎日鄭氏)를 오천정씨라 하는데, 호수(湖수) 정세아(鄭世雅)의 조부인 선무랑(宣撫郞) 정차근(鄭次謹)의 후손들을 말한다.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 입구 둔덕에 ‘오천정씨하천세적지비’(烏川鄭氏夏泉世蹟之地)가 서 있다. 비에는 가문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정차근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주자(朱子)의 서재인 자양서실(紫陽書室)의 이름을 따 학당을 자양이라 불렀고 그것이 현재 자양면의 유래가 되었다는 내용이다.강호정을 시작으로 여섯 건물이 형제처럼 나란히 늘어섰다. 강호정은 정호신의 할아버지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정세아 선생이 세운 정자이다. 강호정만 남향이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동향이다. 길 곳곳에 심겨 있는 향나무들이 근사하다. 삼휴정은 여섯 채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한밤의 절경을 바라보며 ‘삼휴’를 논하다삼휴정은 1975년 8월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됐다. 1635년(인조 13년)에 조선 시대 선비였던 정호신이 학업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정호신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과거에 응시해 여러 번 낙방하자 할아버지의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와 평생 독서에만 매진했다.정호신은 자양동에 정자를 지어 삼휴정이라 이름 짓고 시를 지으며 소요하고 자적했다.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해 날이 갈수록 가난해졌다. 결국 45세에 사망했다. 저서로는 ‘삼휴일고’가 전해진다.정호신은 달이 가득 찬 어느 날 정자에 올라 그 절경을 바라보며 ‘삼휴’라는 시를 지었다. 이에 ‘삼휴당’이라는 당호가 생겼다.‘좋은 봄날 꽃을 즐기다가 꽃이 지면 쉬고맑게 갠 밤 달을 마주 보다 달이 지면 쉬고한가한 달에 술을 얻어 마시다가 술이 떨어지면 쉬노라.’그는 글을 짓고 해석하기를 ‘꽃이 있으니 완상(즐겨 구경)하고 달이 있으니 즐긴다. 술이 있으니 마심은 한가한 가운데 움직임이요, 꽃이 지면 쉬고 달이 기울면 쉬고, 술이 떨어지면 쉼은 한가한 가운데 고요함이다. 움직임은 능히 언제나 움직이면서 고요하지 못하고, 고요함은 능히 고요하면서 움직이지 못함은, 그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를 길러 주는 공부를 마음속으로 깊이 납득하고 실체를 궁행(몸소 실행)하는 까닭이다’라 했다.겉은 궁핍했어도 마음은 항상 풍요롭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삼휴정에는 가난했지만, 지조를 잃지 않았던 정호신의 마음가짐이 곳곳에 묻어 있다. 이 좁은 공간에서도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의 정수를 느껴 볼 수 있다. 10평가량의 작은 마당은 아담하지만 초라하지 않다.건물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다락집으로 건물의 전면에만 난간이 있으며, 기둥 가운데 다섯 개만 원주이고 나머지는 육축(기초가 되는 돌) 위에 초석을 놓고 평주(평 기둥)처럼 세워져 있다.평면은 중앙에 2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좌우 2칸에 반 칸의 전퇴(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를 두고 각각 1칸 반 크기의 방을 배치했다.삼휴정 정자에 올라서 정면을 바라보면 숲이 울창하고 계곡물이 흐르며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서 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껴 볼 수 있다. 삼휴정 앞으로 울창하게 우겨져 있는 소나무 숲 사이로 하얀 석물들과 봉분들이 보인다. 아마 오천정씨 문중의 묘소이리라. 문중 묘소 앞에서 책을 읽어보는 것도 기묘한 경험일 것이다.4평 남짓한 누마루는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음 수양과 사교활동을 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담소를 나누며 아름다운 바깥 풍광을 바라보면 절로 멋들어진 시 한 편이 완성되었으리라.현재 삼휴정은 산등성이 끝자락에 있어 주변의 풍광이 그다지 볼 것이 없지만, 과거에는 자리를 깔고 밤에 누웠더니 8시간 동안 달구경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옛 정취를 감상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명상에 잠기고, 또 수양하는 요체로 삼은 선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삼가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풍수지리 1번지, 잘되는 집안은 이유가 있다삼휴정에서 벗어나 드리워진 베일을 걷듯 소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저편에서는 감히 가늠치 못했던 푸른 땅이 펼쳐진다. 이곳은 과거 설학대사라는 노승이 정차근의 아들인 효자 정윤량에게 점지해 주었다는 명당으로 오천정씨 문중에서 대대로 묘소를 쓰는 곳이다.정차근과 정세아의 묘 등 80여 기의 묘소가 모여 있는 이곳을 하천묘역이라고 하며 후손들로 이루어진 하천종약회가 이 일대를 관리한다.이곳 어딘가에 정호신 선생의 묘도 있으리라. 주인도 알지 못하는 무덤 앞에서 나는 홀로 정호신 선생의 선비 정신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했다.이곳은 문중 묘역 자리로는 대한민국 1등 자리라는 소문이 장안에 자자하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필수로 와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지금도 오천정씨 후손들이 우리나라 정·재·학계에서 꽤 콧방귀를 뀔 수 있는 것은 묫자리 덕분일지도 모르겠다.조선 시대 오천정씨는 굵직한 실적은 없지만 모두 벼슬길을 놓지는 않았다. 큰 욕심 없이 학문에 전념하는 선비들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대신 학계에서의 오천정씨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오천정씨 일가는 현재 영천의 학계를 주름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0년대 초반 영천 학문의 르네상스를 만들었다는 정석달 선생과, 정마양 선생, 정규양 선생 등이 모두 오천정씨의 자랑거리이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정동윤씨와 ‘해상왕’이라고 불렸던 천일해운 정연통 전 회장도 모두 잘나신 조상의 공덕을 입었을 것이다.문중 묘역 외에도 이곳은 멋들어지게 펼쳐진 소나무 숲 덕분에 영천댐 인근 캠핑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언택트 관광이 유행인 지금 겨울철을 제외한 봄·여름·가을에는 캠핑족들이 몰려든다고 한다.현대의 가치관은 조선 시대의 가치 덕목들을 하나같이 평가 절하한다.명분은 핑계로, 의리는 철없는 남자들의 아집으로, 선비의 기개를 뜻하는 사기(士氣)는 군대용어로 전락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청빈(淸貧)은 낡아빠진 구시대의 덕목으로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요시하는 결과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현대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왔지만, 적잖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자연과 전통이 파괴되고, 가족이 해체됐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황폐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현대사회에서 조선 시대의 선비처럼 자연과 학문을 벗하며 유유자적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정신만큼은 되새길 만하다. 자연을 사랑하며,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던 선비 정신 말이다.코로나19는 대다수 시민에게 큰 아픔을 줬다. 하루하루를 감염병 공포에 불안해하며 우울증을 호소한다.선비 정신의 현대적 부활은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해결책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정신적 심리적인 치료제이자 백신이기도 하다.자연을 찾아 떠나자. 그리고 조상들의 지혜를 온몸으로 느껴 보자. 삼휴정에서 선비 정신을 곱씹으며 마치 선비가 된 양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공포도 어느새 멀찍이 달아나 있을 것이다.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자천교회

경북 영천 화북면에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한 교회가 있다.바로 ‘자천교회’다.자천교회가 위치한 화북면은 태백산맥의 준봉인 보현산을 끼고 이로부터 발원한 횡계천과 고현천이 흐르고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현재 젊은이들이 다 떠나간 후 대부분 어르신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번성한 마을 중 하나였다.자천교회를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있는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천교회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1년에 3만여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찾았다.특히 자천교회를 설립한 권헌중(1865~1925) 장로에 대한 이야기는 각박해지고 있는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자천교회 시작, 그리고 과거와 현재영천 화북면 보현산 자락에 있는 자천교회는 미국 북 장로교에서 파송된 제임스 아담스(안의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 장로가 세운 교회다.제임스 아담스 선교사는 1895년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경북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98년 4월 전도차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순회하던 중 영천과 청송의 경계 지점인 노귀재에서 권헌중을 만나 선교했다. 같은해 10월 권헌중이 화북면 자천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해 서당 겸 기도소로 사용하면서 자천교회의 역사는 시작됐다.이후 교회가 조금씩 번성하게 되자 권헌중 장로는 좀 더 큰 예배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사재를 들여 1904년 현재의 16칸 목조건물의 예배당을 완공했다.이렇게 시작된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축 이후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을 함께 펼쳤다.권헌중 목사는 암울한 민족의 미래를 밝혀나가기 위해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구식인 서당 교육을 벗어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권 목사는 선교사들이 실시한 근대식 학교 교육 제도를 도입해 자천교회 예배당에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했다. 주일학교가 아닌 교회학교로서 근대식 공교육의 현장이었다.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수탈이 이어지면서 자천교회 또한 어려움에 직면했다.자천교회의 대들보였던 권헌중 장로가 1925년 별세해 교회의 앞날은 더욱 암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르러 도회지에서 전입해 온 양재황, 이복조 부부의 헌신으로 활기를 되찾았다.일제가 대동아전쟁에 광분해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자 전국에 걸쳐 잔혹한 수탈을 자행한 당시 자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의 귀중한 종이 공출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가 예배당에 가마니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어 교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일제의 핍박을 버틴 자천교회는 광복을 맞아 교회 재건에 힘썼다.하지만 좌우 이념 대립으로 피해를 받았다.대구 10·1사건 여파가 영천 자천리 마을까지 전해졌다.좌익 가담자들이 준동해 우익 인사들에게 해를 가했고 그 과정에서 자천교회 부속 건물이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6·25전 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천이 북한군의 점령지가 되자 자천교회 예배당은 북한군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북한군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교인들이 예배당 지붕에 하얀 횟가루로 ‘CHURCH’라고 표시해 예배당을 보존한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권헌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자천교회를 세운 권헌중 장로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오롯이 나라와 지역민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그는 경주에서 서당훈장을 지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의병으로 활동을 했다. 의병활동의 전력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청송과 영천의 경계가 되는 노귀재를 넘던 중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고 대구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지금의 영천 화북면 자천리에 정착했다.이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니 자천리 주민의 반발이 심했다.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천주교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이 완고했던 터라 “우리 마을에 야소교가 웬 말이냐”며 반대에 부딪쳤다.이에 권 장로는 당시 마을이 꽤 번성해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음에도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음을 간파하고 “내가 마을에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 줄 테니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제의했다.결국 마을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은 권헌중 장로는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해 서당을 겸한 교회를 시작하게 됐다.기도처처럼 교회를 시작하다 보니 서당 겸 가정교회로 출발했다.교인이 늘기 시작하자 예배당 역시 사재를 털어 지었다. 애초 교육자, 민족의식을 가졌던 권 장로는 ‘신성학교’를 세웠다. 1913년 1회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당시 50명이 모였다. 이중 여학생은 단 1명이었는데 자신의 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계집아이 글 가르쳐서 뭐하느냐”며 딸자식을 보내지 않자 권헌중 장로가 주민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솔선수범했다.이후 학교가 마을에 긍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주민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 여학생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됐다.자천교회는 선교사가 재정적 지원을 해준 교회가 아니다 보니 권 장로의 고심은 깊어져 갔다. 교회에 빚이 생기자 권헌중 장로는 자신의 논밭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 자기 살던 집을 담보로 잡혀 있었고 결국 다른사람에게 넘어갔다. 현재 자천교회 부지는 예배당과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 한옥 교육관인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신성학당이 있던 부지는 영천의 한 재력가에게 넘어가면서 예배당과 신성학당은 돌담으로 단절돼 있었다. 권헌중 장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마음이 통했을까.2007년 신성학당 부지의 주인의 아들이 교회에 기증을 했고 초창기 교회 터 일대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과거 권헌중 장로가 살았던 곳이자 재력가가 살았던 이 집은 오늘날 신성학당으로 재탄생됐고 이곳에서 전국 유일무이한 ‘처치스테이’가 진행되고 있다.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자천교회의 역사적 가치는 독특한 예배당 구조를 들여다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자천교회 예배당은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으로서 독특한 ‘ㅡ자형’ 구조를 가졌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은 ‘ㄱ자형’, ‘정방형’, ‘장방형’ 등의 형태가 일반적이다.자천교회는 똑같은 장방형 집 두 채를 나란히 ‘ㅡ자형’으로 배치한 겹집 양식이다.‘ㅡ자형’ 겹집 구조로 독특한 지붕 모양을 갖게 됐다. 자천교회의 지붕은 아주 짧은 용마루를 가진 ‘우진각’ 형태로서 이는 전후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이다.자천교회 지붕이 극단적으로 짧은 용마루를 갖게 된 원인은 내부의 종도리(상량)가 활처럼 굽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종도리는 일직선으로 곧게 돼 있으나 자천교회 예배당은 종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이를 연결점으로 해 종도리를 활처럼 굽게 했다.겹집 구조는 넓고 높은 지붕을 갖게 했다. 따라서 지붕의 하중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서까래를 촘촘하게 깔았으며 실내에 기둥 4개를 세웠다.이 기둥들을 자세히 보면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중앙의 기둥 열을 따르면 강대상에도 수직 기둥이 있어야 하지만 이를 아치형의 기둥으로 대신해 강대상 공간을 자연스럽게 확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또 초기 한국 교회 예배당의 칸막이는 대부분 천으로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했지만 자천교회는 나무 칸막이를 설치했다. 그 이유는 중앙의 기둥들 때문에 휘장을 치는 것에 방해가 되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나무로 잇대어 칸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중석에 앉아서 보면 벽처럼 높은 칸막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지만 강대상의 중앙에서 보면 칸막이는 기둥에 가려 보이질 않아 설교자는 마치 열린 공간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분리된 남녀 공간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자천교회 예배당 건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투박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옥 예배당 가운데 제일 오래되고 고급스런 성공회 강화읍성당 예배당(1900년 건축)과 견줘볼 만하다.자천교회는 시골 목수의 세련되지 못한 솜씨와 인근 보현산에서 난 목재를 가지고 나무 모양 그대로 투박하게 지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지혜를 발휘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 한 예로 예배당 안 뒤편에 온돌방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고 들문을 달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을 표현했다.자천교회 예배당의 건축 양식과 기법들은 예배당은 물론 일반 한옥 구조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어 교회사적, 건축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하지만 아쉬운 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남에도 아직까지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한 채 경북도 문화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가 남긴 신앙의 역사적 유산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예배당과 같은 건축물을 비롯해 서적 등을 말하며 후자는 과거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하는 신앙 삶, 정신,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그런 점에서 자천교회는 유형과 무형을 모두 갖춘 유산이다. 이미 한국 교회에서 자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신교의 초입 이래 토착화로부터 시작해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전 과정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경북도를 비롯해 영천시에서 많은 관심으로 오늘날의 자천교회 모습이 지속되고 있지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경북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거듭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안동 송은정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초겨울이 다가오는 가운데 산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고, 가을의 만연한 기운을 뽐내기 바쁘다.바쁜 일상 속 가을의 막바지를 느끼고, 코로나19로 인한 잠깐의 휴식을 취할 겸 안동을 방문했다.대구에서 안동으로 향하는 긴 도로에서는 일상 속 잠깐의 휴식을 보상해주듯 산과 밭 곳곳에서 여유로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줬다.산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우거졌고 떨어진 낙엽들은 바람에 흩날렸다.가을 냄새도 물씬 났다.따스한 햇볕 아래 올라오는 은은하고 포근한 나무 냄새와 흙과 풀 향은 바쁜 일상을 달래기에 충분했다.세계문화유산의 도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안동은 옛날 옛것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아름다운 풍경과 운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휴식터와 같은 곳이었다.과거와 미래가 함께 한 매력적인 관광자원이 무궁무진하다. 안동에는 관광지인 하회마을과 월영교, 도산서원 등이 있다.자주 접할 수 없지만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문화재들도 넘쳐났다.소박하지만 긴 세월로 인해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었다.안동에 들어서자마자 안동만의 예스러움과 고즈넉한 정자,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큰 도로에서 벗어나 20분가량 좁고 굽은 골목을 지났다.안동 ‘송은정’이라는 작고 아담한 정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한 폭의 그림, ‘송은정’송은정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솟아 있는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경북 안동시 아랫태장길 43-13에 있다.봉정사 삼거리인 교차로를 지나 김태사묘 맞은편 좁은 길로 들어가면 산 중턱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송은정이 위치한 마을은 아주 한적하고 고요한 작은 동네다.오후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동네는 조용했고, 지나가는 주민 1~2명만 드문드문 있었다.인근에는 태장1동 노인정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다본 정자는 산과 어우러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 그림 같은 장면을 눈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송은정을 더욱 가까이서 보기위해 다가갔다.아주 큰 밭을 지나가야했다. 작은 차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다.골목을 지난 뒤에는 사람이 살지만 아주 오래된 흔적이 느껴지는 집 5채가량이 눈에 띄었다.좁은 길이었지만 정자 앞에는 다행히도 널찍한 주차공간이 있었다.정자를 더욱 가까이서 보려면 가파른 돌과 흙 길을 밟고 올라서야 했다.정자는 작았지만,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완연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억새풀과 나무 등이 어우러져 남다른 기운을 자랑했다. ◆경북 문화재 제473호송은정은 2004년 12월6일 지정된 경북 문화재자료 제473호다.송은정의 역사는 아주 옛날인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송은 송형구(1598~1675)가 관직에서 은퇴한 현종 5년 1664년에 학문 연마와 향촌 사림과의 가까운 왕래를 목적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처음에는 이송천변에 있었다.송형구의 후손 송인명이 조상을 추모하고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1933년 태장리로 옮겨왔다.송은정은 야산 기슭 중턱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해 있다.후대에 훼손됐지만 일제 강점기의 건축양식으로 새로 건립됐다.이곳은 아담한 들판을 건너 태계가 흘러 선비들이 은거하기에는 좋은 자리라고 불린다.조상의 깊은 뜻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서였을까.송은정 아래에는 양주 송씨 후손들이 오래전부터 지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송형구, 관직에서 이름난 문관송형구는 조선 중기 문관이다.본관은 양주, 자는 태이, 호 송은이며 안동 출신이다.164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시 진사에 합격해 관직은 관상감직장 찰방 등을 역임했다.그는 1660년 진사 시설부터 역서에 관심이 깊었다.원나라 허형이 만든 대통력과 명나라 때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의 시헌력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시헌력이 1644년 조선에 전해진 후 1653년부터 널리 사용됐다.송형구는 평소 시헌력에 비해 대통력이 더욱 정확하다고 생각해 당시 대통력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방도를 찾아달라는 상소를 올렸다.1661년 전관상감직장으로서 음력과 양력이 더해져 24절기에 맞추어 제정된 시헌력을 폐지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음력 대통력을 사용할 것을 청했다.하지만 관상감에서 일식과 월식을 통해 역수의 차이를 조사한 결과 대통력이 시헌력에 비해 오차가 크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1669년 새로 만들어진 달력의 윤달 계산에 오류가 있음을 상소해 시헌력의 오차를 관상감에게 조사하게 했으나 윤달 계산에 오류가 없음이 확인됐다고 한다.1664년 관직에서 물러났다.송형구는 고향인 안동의 송천읍으로 내려갔지만 학문을 멀리하지 않았다.지역 사림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을 연구할 목적으로 송은정을 세웠다. ◆조상의 지혜 엿보여송은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1명이 살 정도의 아주 작고 소박한 정자다. 온돌방 1개와 마루 1개 및 툇마루로 구성돼있다.건물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방을 들였는데 앞쪽은 반 칸의 퇴칸을 두고 퇴주 앞으로 2자 정도 마루를 더 확장시켜 계자난간을 세웠다.문이 잠겨있지 않아 방안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오래된 기와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이 지낼 수 있을 정도의 비교적 잘 정돈돼있고, 깨끗한 편이었다.정자 안 마루와 온돌방 사이에도 문이 달려있는데 아마도 겨울철 온돌방에서 지내며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것 같았다.또 남향으로 마루쪽 큰문을 통해서는 해가 잘 들어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놓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사색하기 좋을 것 같았다.건물은 경사면에 비스듬히 지어져있어 하부에 시멘트로 기둥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면은 화강석 주초를 놓고 위에 4각의 누하주를 세웠다.자세히 건물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 위에는 향촌 사림들의 시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한자로 돼 조금은 보기 어렵겠다. 하지만 학문에 조예가 깊던 조상의 깊은 뜻을 기리기 위한 가문의 남다른 자부심이 느껴졌다.이는 송은정상량문의 기문과 송은정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송은정기의 기문이라고 한다.한글로 쓰인 송은정 약사의 편액도 볼 수 있다.바로 앞에는 마치 정자를 지키고 있는 듯 한 아주 큰 소나무 2그루가 서있었다. 늠름한 자태를 자랑했다.소나무 2그루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한 빛이 되기도 했고, 그늘이 되기도 해 운치를 더했다.운이 좋게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다볼 수 있었다. 정자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운치는 장관이었다.가까이 있는 자연과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선조가 남기고 간 유물을 돌볼 수 있는 후손들의 마음은 어떨까.정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거 조상이 했던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당시 선조의 경험과 지혜 등을 느낄 수 있었고, 잠깐의 휴식과 함께 현대사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바쁜 일상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 안동 송은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도심에 있다 보면 문뜩 시골 경치가 주는 포근함을 느껴보고 싶어진다.코로나19로 답답한 생활의 연속인 요즘 같은 날이면 더더욱 그렇다.매년 이맘때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며 한가로이 자연의 향기를 느끼는 시간을 갖지만 올해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해 반쪽짜리 가을이 됐다.그래도 가을이 주는 편안함을 느끼고자 천년수도 경주를 선택했다.경주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옛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인 ‘양동마을’을 찾았다.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여주) 이씨’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에는 수많은 고택이 즐비하다.그 중에서도 ‘송첨종택’을 방문했다.‘경주 손씨’의 대종가인 송첨종택은 조선시대 전기의 옛 살림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이곳은 대종가들의 명맥을 잇는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꼽히며,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전통 가옥이다.송첨종택은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해 건축 문화재로서의 역사적 가치도 높다.이곳은 양동마을의 입향조(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인 ‘양민공 손소’가 1459년(세조 5년)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종택’ 또는 ‘서백당’이라고도 한다.특히 손소의 아들인 손중돈 선생(조선전기 이조판서,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과 외손인 이언적 선생(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그의 주리적 성리설이 퇴계 이황에게 계승돼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됨)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양동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송첨종택은 현재까지 경주 손씨의 후손들이 거주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양동마을의 가장 오래된 곳, 세 현인을 기다리다양동마을에 처음 들어 온 양민공 손소는 마을 내 처가에서 살다가 ‘송첨종택’을 짓고 분가했다.손소는 경북 청송 출신으로 ‘풍덕 류씨’ 류덕하의 사위로 경주 양동에 정착했다.조선시대 전기에는 혼인을 계기로 처가로 이주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었다.양동마을의 역사 해설사들에 따르면 이 당시 재산 상속의 구조가 ‘장남’ 중심이 아닌 형제‧자매에게 모두 배분되는 형식이라 처가에 얹혀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임진왜란 전까지는 균등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임진왜란 후부터는 맏이 중심의 상속제도가 강화되는 사회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전쟁이나 질병 등이 창궐하게 되면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양동마을 사람들은 송첨종택 터가 ‘설창산’의 지맥이 응집된 지역 최고의 명당으로 여겨 왔다.송첨종택은 삼현지지(세 명의 현인이 출생한다)라 해서 세 분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두 현인(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은 이미 태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세 번째 현인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특히 손소의 딸이 친정에 와서 낳은 아들인 ‘이언적’은 종묘와 문묘에 함께 배향된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라 불린다.동방오현(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끈 유학자로서 이언적, 이황,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한 사람으로서 후대의 추앙을 받고 있다.마을사람들의 속설에 의하면 세 번째 현인을 만들고자 ‘경주 손씨’ 중 시집을 간 후손들이 송첨종택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그렇게 양동마을을 되찾아왔다고 한다.임신을 하고도 아닌 척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친정에서는 마을 밖 초가를 내어 딸을 재웠다고 한다.◆서백당과 향나무, 송첨삼보서백당은 양민공 손소 종택의 당호(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으로 인명을 대신해 부르는 호칭)다.송첨종택의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송첨은 양민공의 호이다.서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전통 건축물 중 하나다.사랑채는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서백당은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 한 쪽으로 둬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통로가 마루 형식으로 돼 있는 것도 특이하고 사랑채 주변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있다.사당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은 송첨종택이 전체적으로 ‘서남향’이라는 점이다.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살림집에서는 절대 방위보다 상대적인 방향을 중시했다고 한다.이에 정침(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의 오른쪽에 사당을 두는 제도를 따랐고 대문간도 문채의 정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과 의식 공간을 가르는 경계점에 위치한다.대문간과 서백당, 사당으로 이어지는 외래의 동선이 맞아 떨어져 삼위일체(세 가지의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통합되는 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과거에는 서백당 주변에 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림집도 있었다고 한다.서백당은 1992년 영국 찰스 황태자가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다.이 당시 찰스 황태자를 만났던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저녁 늦게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급하게 들어서인지 황토를 깔고 청소하며 분주했던 기억이 있다”며 “오래 전 일이지만 ‘경주 손씨’ 문중에는 찰스 황태자와 찍었던 사진이 가보(?)처럼 걸려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서백당 앞 마당에는 5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양민공 손소가 송첨종택을 짓고 이를 기념해 심었다고 한다.이 나무는 원줄기가 자상 90㎝ 높이에서 세 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 그 뒷부분이 위로 자라 다시 세 가지를 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사람도 작게 보일만큼 그 위세가 대단해 멀리서 보면 마치 분재를 보는 것 같은 형상이다.이 밖에 송첨삼보라는 것이 있다.손씨 종가가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는 세 가지 보물로 연적과 장도, 갓끈이다.용 모양의 연적은 옥으로 만들어져 있고 장도의 뚜껑은 상아에 용이 새겨져 있다.갓끈의 재료는 산호로 돼 있어 산호영이라 불리고 있다.이 세 물건 모두 세조가 공신인 손소에게 하사했다고 한다.◆살림집의 역사를 보여주다송첨종택은 집 전체가 경사지에 맞춰 뒤가 높고 앞이 낮은 배산임수의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송첨종택은 물(勿)자 모양의 양동마을에서 제일 위쪽 골짜기인 ‘안골’의 깊숙한 곳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송첨종택의 중심은 일자형 대문채 뒤로 ‘ㅁ’자형의 몸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므’자형 모양을 이룬다.경사가 급한 땅에 있어 몸채와 행랑채 사이의 공간이 좁고 몸채의 경우 앞면과 뒷면 사이의 높이 차이가 커 정면에 놓인 사랑채의 하부 기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송첨종택 안에서 바라 본 주변 모습은 선조의 멋을 엿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정면은 계곡의 맞은 편 봉우리에 가로 막혀 있지만 사랑채 옆면은 양동마을의 안산(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인 성주봉을 마주 대하고 있다.안채와 사랑채과 방향을 달리 한 것은 경사지에서의 지세(땅의 생김새)와 안대(집이나 묘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를 둘 다 만족시키려는 해결책으로 보인다.송첨종택의 몸채(여러 채로 된 살림집에서 주가 되는 집채) 뒷부분 지붕의 처마 높이는 양 날개채 부분의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높이와 같다.하지만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한 탓에 몸채에서 뒷부분 몸통을 이루는 지붕과 중간부의 양쪽에 있는 날개채 부분, 앞부분의 지붕이 서로 다른 높이로 이어져 있다.이는 지붕의 높이를 한 단씩 내리는 방법으로 영남지방의 살림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조다.송첨종택은 대칭형 안채로 구성됐고 공간의 구성이 검소하고 간결했다.대칭형 안채는 서울과 경기 지역의 상류층 살림집에서 사용된 형식인데, 이것이 영남의 사대부 살림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또 ‘기(氣)’에 비해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이(理)로 보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철학)의 살림집 계획 방법이라는 속설도 있다.이는 실용성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그래서일까.남쪽 지방으로 갈수록 개방적인 구조를 갖는 한옥 구조와 달리 송첨종택 등 양동마을의 집은 모두 원리원칙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반‧상의 공간, 내‧외의 공간, 종손‧지손의 공간이 구별되고 영남학파의 전통을 잇고 있어 집의 구조도 자연스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500여 년이 넘는 전통의 향기를 품은 채 100여 호가 넘는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들어선 양동마을에서 송첨종택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내가 바라 본 송첨종택은 그 당시 경북지역의 양반 가옥 형태를 가장 잘 표현해 낸 건축물이었다.답답한 도시를 떠나 전통 가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양동마을의 ‘송첨종택’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 -영양 하담고택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얼굴을 감싸고 있는 마스크 탓인지 이웃 간 대화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 한 마디도 건네기도 쉽지 않다.행여나 엘리베이터 등에서 자칫 헛기침이라도 내밷게 되면 괜스레 동승자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쩌면 우린 먼 훗날 후손들에게 코로나19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주인공 선조들로 기억될 것이다.답답한 가슴을 안고 경북 영양 ‘하담고택’을 찾아 나섰다.영양은 태백과 소백을 따라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를 끼고 있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고장이다.경북에서도 최오지에 속한 까닭에 청정한 산과 계곡에다 옛 정취를 머금은 정자와 고택이 즐비하다. 조선시대의 문학과 풍류를 즐기며 격조 높은 문화를 누렸던 선비 정신이 깃든 고장이다.영양에는 웅장한 아흔아홉칸 집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저 살림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소박한 건물로 보통 열 칸 미만이다.그래서 영양 지방에 사는 선비의 삶을 ‘초가삼간’ 문화라고도 한다. 초가삼간에도 만족을 느끼면서 생활하는 선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담 고택(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41호)‘하담고택’은 영양군 영양읍 삼지리 315-1번지에 있다. 영양읍에서 서쪽으로 난 마을길인 삼지길을 따라가면 가옥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남서향로 자리잡은 고택은 사면에 한식기와를 올린 낮고 두터운 토석담장을 둘렀다. 대문 앞쪽과 좌측에는 마을길이 지나고 있으며 우측에는 이웃집이 자리하고 있다. 낮은 담장은 이웃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담장을 높이쌓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이다.뒤뜰에 깔린 녹색 잔디와 푸른 하는 사이에 높인 고택은 고풍스런 멋을 풍긴다.하담고택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조언관의 호(하담)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2003년 4월17일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41호로 지정됐다.조언관(1805~1870)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 큰아버지인 조홍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당대 글이 밝기로 소문났다.병자호란 당시에는 먹고 살기 어려워 마을 주민들이 죽어나가자 직접 다니면서 시체를 치우는 등 봉사를 많이 해서 칭송이 자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조언관은 봉사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하담고택에서 북쪽 1시 방향에 있는 하담정에서 선비를 양성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이 같은 조언관의 선행은 어쩌면 선조들로부터 대물림해 온 것일법 하다.하담고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워 지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사월 조임(1573~1644)의 손자인 조시벽(1670~1753)이 1710년 경에 건립했다.조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2번에 걸쳐 군자금으로 써달라고 전재산을 내놓고 ‘홍의장군’ 곽재우의 지휘 하에 의병에 참여하는 등 누구보다 애국심이 컸다.하담고택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언뜻 사월 조임, 하담 조언관 등이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의료진으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박함이 담겨있는 구조하담고택은 ‘ㅡ’자형 안채와 ‘ㄷ’자형 사랑채가 맞물려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조선중기 전형적인 사대부의 살림집 형태이지만 소박함이 담겨있다.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측에 툇마루가 있는 1간 규모의 온돌방과 1.5간 규모의 온돌방과 정지간이 있다.대청의 서측에도 전면 툇마루가 있는 1간 규모의 온돌방이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 구조이고 전면으로 열려 있으며 배면에는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대청쪽으로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았고 동측 방 쪽에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아 통하도록 했다.대청 서측의 1.5칸 방은 전면과 배면에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정지와 고방 쪽으로 각각 외여닫이 띠살문을 달아 외부와 통하도록 했다.최근 집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거주할 수 있도록 현대식으로 살짝 보완했다. 배면 기단 위에 샌드위치 패널로 보일러실을 꾸미고 외부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꾸몄다.사랑채의 기단은 자연석 주초를 놓고 누하주를 세워 상부 툇마루와 기둥을 받도록 했다.하담고택의 기둥은 모두 사각기둥으로 돼 있다. 기둥상부는 납도리 형식으로 짜 맞춤을 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으로 끝을 와구토로 마감했다. 대문간채는 맞배지붕이다. 사랑채 마루에는 ‘荷潭古宅(하담고택)’ 편액이 멋진 글씨체를 뽐낸다. 안채 마루간에도 ‘三巖軒(삼암헌)’ 편액을 걸어 두었다.사랑채는 전퇴 형식으로 대문간을 중심으로 동측에 1간 규모의 온돌방과 2간 규모의 광이 있다. 광 배면에 2간 규모의 곡간이 있다.대문간 서측에는 1간 규모의 사랑방 두 개와 1간 규모의 사랑마루간이 있다. 사랑마루에 면한 사랑방은 배면에 반침을 달아 벽장을 꾸며 놓았다.사랑채의 두 방은 전면 각 칸에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고 마루간으로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마루간의 삼면은 두 짝 여닫이 띠살청판문을 달고 판벽으로 마감했다.사랑마루에 면한 사랑방은 배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아 윗간과 통하도록 했다. 윗간 방은 좌우측에 외여닫이문을 달아 외부와 통하도록 했다.대문간의 동측 온돌방은 전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측면으로 외여닫이문을 내어 광으로 통하도록 했다. 광의 북측에 있는 2간 규모의 곳간채는 안마당 쪽에 두 짝 널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다. ◆고인돌 이야기하담고택에는 고인돌이 있다. 남방식 형태로 구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고인돌이 3개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담고택은 ‘삼암헌’으로 불리기도 한다.고인돌에 얽힌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인돌에는 구멍들이 뚫려져 있다. 이것은 별자리를 의미하고 기록하기 위해 표시해 놨다는 것.실제로 영양지역은 밤하늘 투명도가 뛰어나 은하수, 유성 등 하늘에서 발생하는 현상이 육안관측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또 다른 이야기는 ‘다산’과 관계가 있다. 고인돌에는 달걀 반 개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성혈이 있다.선사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신앙의식은 생존을 위한 기원(祈願)으로 신변 안전이나 식량 확보를 위한 개체보존과 종족을 이어가기 위한 종족보존이 주된 형태다.하담고택의 성혈은 대(代)를 이어나갈 수 있게 자식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로 전해지고 있다. ◆대를 이어온 고택 가꾸기마당에는 수백 년을 살아온 회화나무(홰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홰나무는 학자수, 출세수, 행복수, 양반수로도 불린다.고택이나 관청 앞에서 서 있는 고목을 보면 어쩐지 선비정신이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홰나무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도 알려졌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부근에 많이 심었고, 서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당에도 홰나무를 심어 악귀를 물리치는 염원을 했다고 전해진다.향나무는 ‘믿음’을 상징한다. 믿음을 갖고 우애하며 살아가자는 뜻이 담겼다.하담고택에 버티고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조시벽의 아들인 농수 조백규(1697~1762)가 심었다고 전해진다.잡귀를 물리치는 홰나무 덕분이었을까. 하담고택에 살았던 조시벽부터 조백규, 조호신, 조언관 등 모두 장수했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았다. 돌담에 대문이 없었던 것도 언제든지 이웃과 소통하고 도우기 위한 의미가 아니었을까.마당에는 연못도 있다. 하담 조언관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조그마한 연못에는 아직도 연꽃이 피고 물고기도 살고 있다.현재는 후손인 조국영(79)·심용진(72)씨 부부가 정성스럽게 고택을 가꾸고 있다. 비록 타 지역에 살고 있지만 1~2개월에 한 번씩 고택을 방문해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이들 부부는 이곳에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매난국죽(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을 비롯해 라일락, 배롱나무 등 50여 종류의 식물을 심었다.하담고택은 영양의 숨은 명소다. 영양 고추연 테마공원에 인접해 있어 전국에서 하담고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자 찾는 방문객이 늘고 있다.하담고택에서 대대로 이어져 온 선조들의 따뜻한 이야기는 어쩌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고 실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어려울 때 일수록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아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진다면 코로나19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성주 삼봉서원

성주 삼봉서원지루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다. 기사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 초초해 하던 중, 한주선생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이채영 선생과 마침 연락이 닿았다. 그는 필자와 고교⋅대학의 동문인데다가 좀 멀지만 일족이기도 해서 여러 가지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한참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도착한 삼봉서원은 여전히 삼봉산 자락에 몸을 기댄 채 조선 말기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 가운데 한 분이었던 한주 이진상(1818~1886) 선생의 근엄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삼봉서원은 원래 한주 선생을 향사하는 서당으로 세워졌다. 한주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6년째 되던 1892년에 그의 뛰어난 제자들인 ‘주문팔현(洲門八賢; 한주선생 문하에 모인 8명의 현사(賢士)라는 뜻이다)’이 중심이 되어 서당 건립을 결의하고, 1897년에 영남 유림들이 마련한 성금으로 강당, 동·서재, 관리사 등을 준공하였다.강당은 심원당(心源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좌우에 1칸의 방을 두고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삼았다. 대청에는 대들보에 있는 회당 장석영‘상량문’, 정면의 대계 이승희가 쓴 ‘심원당기(心源堂記)’와 면우 곽종석이 쓴 ‘삼봉서당기(三峯書堂記)’ 등 한말⋅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를 뒤흔든 쟁쟁한 학자들이 쓴 현판들이 가득하다. 순한문으로 쓰여진 현판이라 요즘의 탐방객 대부분에게는 어떤 암호처럼 보일 수도 있으므로, 현실에 맞추어 서원 측에서 간략한 해설서라도 하나 장만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삼봉서당에서 삼봉서원으로삼봉산의 경사지를 단을 나누어 건물을 배치했는데, 강당의 한 단 아래에 동재인 성존실(誠存室)과 서재인 경거재(敬居齋)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강당과 마찬가지로 동재의 중앙에는 후산 허유가 지은 ‘성존실명(誠存室銘)’이, 서재의 중앙에는 교우 윤주하가 쓴 ‘경거재명(敬居齋銘)’이 걸려있어, 건물의 이름이 가진 뜻과 출입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등을 말해주고 있다.사실 삼봉서당은 창건 당초부터 곧 서원으로 승격될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만약 조선왕조의 수명이 조금만 길었더라면 삼봉서당은 얼마 후 틀림없이 서원으로 승격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진 가운데 한주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많은 문인⋅제자들이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해외로 망명하기도 했고, 옥중에 갇히거나 아니면 일제의 감시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빠지게 되어 서원 승격 문제를 거론해 볼 겨를조차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서원은 봉건시대의 유물일 뿐이며, 현실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회 대중의 인식도 서원으로의 승격이 마냥 미루어지게 하는데 크게 한 몫 하였다.그러나 어느 시대, 어떤 장소이건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2006년에 이남철공이 주도하여 한주선생기념사업회가 출범하면서, 서원 승격에 대한 논의가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016년에는 사당인 현도사(見道祠)를 건립하여 한주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뛰어난 제자였던 면우 곽종석(1846~1919) 선생과 아들이자 문인인 대계 이승희(1847~1916) 선생을 종향으로 모시게 되자, 사당, 강당, 동서재에 서고인 장판각까지 서원의 규식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드디어 삼봉서당은 삼봉서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주와 한주학파삼봉서원에 주향으로 모셔진 한주 이진상(1818~1886) 선생은 조선 말 최고의 성리학자 가운데 한 분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성산이며,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이다. 아버지는 원호 공이며, 숙부가 공조판서에 오른 응와 이원조 선생이다. 그의 심오하고도 독창적인 사상은 흔히 ‘심즉리설(心卽理說)’로 불리지만, 여기서 그 어렵고 딱딱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다.다만 선생의 문인⋅제자들을 일컫는 한주학파(寒洲學派)에 대해서는 짧은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1870년대부터 경북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 남부와 산청⋅거창⋅진주 등 경남 서부 지역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한주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그의 학설을 받아드려 하나의 학맥을 이루게 되었다. 그 정맥을 이어받은 8명의 현사(賢士)들이 있는데, 그들을 ‘주문팔현(洲門八賢)’이라고 한다. 후산(后山) 허유(許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 8명의 탁월한 유학자가 바로 ‘주문팔현’이다.이들의 사상과 저술 또한 한국유학사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주학파는 국권의 박탈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여 보수유림이면서도 구미(歐美) 사회에 대해 탄력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기도 했던 특징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1905년에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이승희⋅곽종석⋅장석영 등은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목을 벨 것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또 1919년에 많은 유림들이 동참하여 파리에 서한을 보내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곽종석을 비롯한 한주학파가 있었다. 그런데 ‘파리장서운동’은 세계 각국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보편적 질서인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내세워 구미 열강과 서로 도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보수유림에서 흔히 따르고 있었던 자신의 한 목숨을 던져 국권 회복을 외치는 순절 투쟁이나 총칼을 들고 일제와 직접 싸우자는 의병운동과는 조금 결이 다른 방식이었다. 그만큼 국제 정세나 세계 문물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접근했던 것이다.삼봉서원은 한주 선생이 태어나 자랐으며 학문을 익히고 가르쳤던 성주군 월항면 한개 마을에서 1㎞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다. 1897년에 서당이 준공되자 한주 선생의 외아들이자 문인이기도 한 이승희 선생이 이곳을 지켰다. 자연히 한주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암울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고 올바른 학문의 쇠퇴를 안타까워하며, 울분을 터트리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한주 선생의 글을 모아 1895년에 펴낸 ‘한주문집’을 둘러싸고 물의가 일어나자 삼봉서당은 1897년부터 그 일을 수습하는데 본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곽종석 선생과 이승희 선생이 중심이 되어 ‘한주문집’의 개정판을 준비한 곳도 삼봉서당이었다. 원래의 문집보다 훨씬 다듬어진 개정판은 면우와 대계 양 선생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인 1927년에 삼봉서당에서 간행되었다. 또 1907년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대계 선생이 성주군 국채보상회 회장을 맡게 되자 삼봉서당은 국채보상운동 성주 추진 본부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삼봉서당은 한주학파의 정신적 고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권회복운동의 중심 장소 역할도 하였다.1908년 10년 이상 삼봉서당을 지켜왔던 대계 선생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해 갔다. 더 이상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은 국권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대계 선생이 떠나자 삼봉서당의 현실적인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지역의 유림들은 삼봉서당을 한주 선생에 대한 춘계 향사를 올리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한주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으로의 승격을 계획하고 있었던 본래의 취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례들이 쌓이고 붉은 성심이 모여 삼봉서당은 삼봉서원으로 원래의 품위를 되찾게 되었다.언제나 그러하듯 웅장한 서원 건물을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은 즐겁지 만은 않았다. 21세기에 과거의 올곧은 정신이 깃들어있는 저 아름다운 건축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일까?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이문기경북대 명예교수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상주 퇴강성당

상주시 조암산 자락 아래, 낙동강의 옛 물미 나루터에 자리잡은 ‘퇴강성당’.퇴강성당(경북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 398)이 상주의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늘 빠지지 않는 건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 때문만은 아니다. 선교사 없이 신자들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일 정도로 신앙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44명의 성직자와 15명의 수도자를 배출해 경북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요 거점으로 인정받는 등 명실상부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인 것이다.1956년 재건립된 퇴강성당의 본당과 사제관 건물은 지역 천주교회의 역사와 건축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히고 있다.지역 천주교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성당이라는 점과 고딕 양식으로 이뤄진 근대 건축물 등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경북 문화재자료 제52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퇴강성당 신자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시각으로 성당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종교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들 한다.한적한 시골마을에 붉은 벽돌로 뒤덮인 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퇴강성당을 찾아 떠나보자.◆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당퇴강성당은 1903년 상주 사벌면 퇴강리 물미마을에 공소성당이 설립된 후, 1922년 본당으로 승격됐다.이후 신자 수가 줄어 다시 공소(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 및 천주교건축물)로 유지되다가 2003년 준본당으로, 2007년 본당으로 재승격됐다.특이하게 해외 선교가 아닌 마을 주민들이 자진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본당으로 정식 승격됐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초창기 천주교 유입과 닮아있어 지역 주민들이 갖는 천주교 신앙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지금도 성당 인근 마을 주민의 80% 이상이 성당을 찾고 있다.퇴강성당의 출발점은 1899년.당시 퇴강마을 주민 3명인 김운배(세례명: 호노리오), 김종록(세례명: 클레멘스)와 최면집(세례명: 말딩)은 가실 본당 문경 공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이후 마을의 친지와 가족, 이웃들에게도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자연스레 마을 이름을 딴 ‘물미 공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1930~1940년에는 본당과 관할 공소 천주교 신자만 1천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하지만 1968년 안동교구 함창성당 관할 공소로 예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경제 개발과 산업화로 인한 이농 현상으로 신자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게 되면서다.현재 퇴강성당은 대략 300~400명의 신자 가운데 60세 이상이 전체의 40%에 육박하는 고령화 본당이 돼가고 있다역대 본당 신부로는 1922년 본당의 제1대 신부인 이종필(마지아) 신부를 시작으로 제2대 이성인(야고보) 신부, 제3대 정수길(요셉) 신부를 거쳐 현재에는 제12대 박재식(토마스) 신부(2013년~현재)가 주임 신부로 임하고 있다.2007년 본당으로 재승격한 후 3명의 수녀를 배출했다.제1대 정요한(황아가다) 수녀, 제2대 최아가다(이발바라) 수녀, 제3대 고재노베파(김베드로) 수녀다.◆고딕 양식의 근대 건축물퇴강성당은 지역 천주교회 건축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무엇보다도 1950년대부터 본당과 사제관이 잘 보존돼 있어 근대 건축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특히 본당은 높은 첨탑을 상징하는 12세기 이후 중세 서유럽의 건축 양식인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건립돼 수직 효과를 강조했고 천국에 닿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소망을 잘 드러내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지역 명소로도 유명하다.첨탑 뿐 아니라 성당 본당 건물은 입면과 평면 구조물이 독특하다.외벽은 콘크리트 기초 위에 벽돌을 쌓은 ‘영식 쌓기’를 이용해 고딕 양식을 잘 표현했고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내각이 모두 직각이면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의 ‘단랑식’(측량을 없앤 폭 넓은 구조)으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줄기둥의 아케이드(기둥으로 지탱하는 아치 또는 반원형의 천장 등을 연속해 건축한 구조물) 천장도 근대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운 멋을 뽐내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본당 남쪽 정면의 주 현관 바로 앞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성모 마리아상을 기준으로 현관을 바라보면 첨두형 아치 형식(예각으로 이뤄진 아치로 고딕식 아치형 천장의 특징)의 주 출입구가 눈에 띈다.또 부 출입구에는 나르텍스(초기 기독교 시대 성당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좁고 긴 현관)가 위치해 본당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세례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회개하러 온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나르텍스 중앙 상부에는 8각의 첨탑을 둔 1개의 종탑이 있다.삼종기도(오전 6시, 낮 12시, 오후 6시)를 알리기 위해 쓰이는 종탑은 평소 전등을 달아 야간에도 성당 건물을 비추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종탑의 유‧무에 따라 성당의 빛 공해도가 달라질 정도다.본당의 창문도 붉은 벽돌을 이용해 반원형 아치 형식으로 장식됐다.벽면의 플라스터(석고, 회반죽, 흙 따위를 물로 개어 바르는 데 쓰는 재료) 기둥 사이에 벽돌을 이용한 인방(창, 출입구 등 벽면 개구부 위에 벽을 지지하는 나무 또는 돌로 된 수평재)과 창문틀을 만들어 창을 달았다. 건축물의 상부 무게를 버티면서 멋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겠다는 의미다.스테인드글라스(색판 유리조각을 접합시키는 방법으로 채색한 유리판) 유리창도 고딕 양식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특별한 유물과 관광 자원이 있지 않더라도 건축물이 주는 모던함과 감각적인 조형미, 웅장한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당의 전형을 퇴강성당은 갖고 있는 것이다.◆퇴강성당의 정신을 이어가다퇴강성당의 주보성인(가톨릭 신자 개인 또는 단체나 성당을 보호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수호자)은 ‘성모 마리아’다.퇴강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죽은 후 육체도 영혼과 더불어 승천했다는 가톨릭의 교의(성모승천)를 믿으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퇴강성당의 정신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에서 숨지고 땅에 묻힐 때까지의 수난을 기억하는 14처의 기도에서 엿볼 수 있다.본당을 지나 성지순례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14개 비석으로 이뤄진 14처가 보인다.신자들은 이 곳을 순서대로 돌며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가 주는 역경을 기념하며 묵상을 하거나 ‘주모경’(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기도를 한다.1999년 퇴강성당 신자들은 천주교 봉도전교 100주년 기념비를 설립하며 선대들이 이어 온 천주교 신앙을 되새겼다. 100년 전 하느님의 백성이 된 선대 신자들의 영세 기념을 통해 하느님을 봉도하게 된 큰 은총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다.이들이 전하고 싶은 퇴강성당의 정신은 이 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교회의 역사와 과거의 신앙적 역할을 알리고 성당을 미래의 성지로 개발하는 등 진실된 신앙생활을 통해 신자들 간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한다는 것이다.2012년 성당 내 낡은 교육관을 허물고 새로운 교육관을 재건축할 때도 전문 기술이 필요한 요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공사를 신자들의 손으로 직접 해냈다는 점에서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마음이 평소 신자들의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또 2014년부터 상주시와 함께 어르신 사랑방학교와 시골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주민들과 소통하고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일하는 종교의 모습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그래서일까. 퇴강성당에 대해 신자들이 만나자마자 얘기하던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말 속에는 성당이 발원할 때 신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지역사회와의 공존이 과거의 시각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하늘의 모후여, 우리를 보호하소서’라는 천주교 신앙의 토대가 조용하지만 힘있게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것도.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흥암서원

흥암서원여름철이어서 서원 마당은 잡초들로 붐볐다. 여름철이어서라기보다는 서원을 돌보지 않은 무관심이 잡초를 불러들였다고 해야 옳겠다. 들판에 자생하는 풀들이 채소밭을 침범하면 그 이름이 잡초로 바뀐다. ‘풀’이 ‘잡초’로 이름이 바뀌어 지는 순간 그것은 제거돼야 할 몹쓸 처지가 된다. 채소밭을 뒤덮은 잡초들이 그러하듯이 서원의 뜰에 붐비는 잡초들은 선비의 고적한 기운을 해친다. 잡초들로 붐비는 일상, 잡초들이 들끓는 정치로부터 민족사의 비극은 시작된다. 날뛰는 잡초들의 소음이 견디기 힘들어 뉴스 채널을 끄고 사는 나날이었다. 맥 빠진 민초들은 미스터 트롯으로 마음을 달래는 날들이었다. 흥암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61호)을 찾았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흥암사, 진수당, 집의재, 의인재, 어필비각 등 경내 건물을 가진 흥암서원(상주시 연원동 769번지)은 숙종 28년(1702년)에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흥암사는 동춘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팔작지붕의 진수당은 강당, 집의재와 의인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였다. 어필비각 안에는 숙종이 지어준 ‘흥암서원(興巖書院)’이라 새긴 비가 있다. 찾는 이의 발길도 없고, 좁은 농로 한 끝에 방치된 듯 스산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대원군의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곳이었다. 동춘당 송준길은 누구인가? 그가 잡초로 들끓는 오늘의 세태를 향해 던지는 역사적 가르침은 무엇인가? 조선조 후기 문신이었던 송준길(1606~1672년)은 효종 때 판서를 지낸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 당색은 서인, 율곡 이이를 사숙한 기호학파의 중심이었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었다. 장인이기도 한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해 퇴계학맥을 이은 그를 사표로 받들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릴 만큼 당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분이다. 광해군의 난세에 등을 돌리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효종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발을 딛는다. 1649년 즉위한 효종이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였다.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돼 집의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는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준길은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한다. 침략만 받아온 조선의 역사임을 상기할 때, 그 성패와 상관없이 ‘북벌’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 찡한 바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효종의 북벌론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이었다.◆삼전도의 치욕 아직도 남아1637년 1월 조선은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남한산성에서 끌려나온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바닥에 머리를 찧는 예를 행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다.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간다. 1645년 2월이었다. 청국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국과의 화친을 주장했고, 차남인 봉림대군은 청과의 전쟁을 주장한다. 청 태종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는 자신을 ‘화살을 맞은 새’라 자탄하며 청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칠 때였다. 효종은 소현세자를 멀리하고 경계한다.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원손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한다. 임금으로 즉위한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의 인물을 등용, 북벌을 준비한다.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의 군사력을 정비하고, 이완을 대장으로 어영청군을 크게 증가시킨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 송준길 등을 등용해 군비를 확충한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을 씻으려는 북벌계획은 효종의 승하와 함께 수포로 돌아간다.후대의 논객들이 지적하듯이 효종의 북벌론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만주 벌판을 달리려 한 허황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성 없는 지배계층의 지속된 북벌의식은 청나라 문화의 유입을 막아 정치적 쇄국주의, 문화적 폐쇄주의를 낳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전도의 역사적 치욕을 씻으려는 자세와 정신, 국격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 했던 당당한 북벌의지마저 폄하돼서는 안 된다. 서원 뒤뜰의 잡초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무성했다. 담당 관청에게 까닭을 묻는다면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뻔한 대답을 들려줄 것이었다. 그렇게 방대한 추경예산으로 왜, 문화재 앞뒤 마당 잡초 뽑는 일자리는 늘리지 않는가. 길가 휴지 줍기보다, 가로등 소등하기보다 조상의 얼을 지키는 일이 하찮다는 말인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돈과 밥과 권력과 무관한 일에는 침묵해도 좋은가. 위대한 침묵도 있고 비열한 침묵도 있다. 죽을 때까지 묵언 수행하는 수도사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의 제목은 Into Great Silence이고, 한 시인이 신군부시절 지식인들의 비굴함을 풍자한 침묵은 ‘침을 퉤퉤 뱉어 만든 묵’이다. 신문 기사를 옮긴다.북한의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이날 ‘옥류관 주방장 오수봉’이 쓴 글을 내보냈다. 오수봉은 “평양에 와서 우리의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에 오늘은 또 우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으니 이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그 더러운 똥개무리들(탈북민 단체)과 그것들의 망나니짓을 묵인하며 한 짝이 되여 돌아친 자들을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조선비즈 2020.06.13.) 국민들의 마음에 오물을 끼얹은 모멸적인 언동에 왜 침묵하는가. 하찮은 주방장 말쯤이야… 전략적 차원의 위대한 침묵인가. 꼬리를 감추는 비열한 침묵인가. 안타깝고 딱하다. 안타깝고 딱한 오늘의 시점에서 효종의 북벌의지를 바라보니 그것이 한갓 계란으로 바위 치는 허황된 꿈이었다 하더라도 그날의 꿈은 당당했으므로 숭고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민(安民)과 내치(內治)가 먼저이고, 안민과 내치의 근본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격군심(格君心)에 있다는 송준길의 주장은 탁월한 바 있다.송준길은 존명배청(尊明排淸)과 복수설치(復讐雪恥) 운동을 추진한다. 현실을 직시한 송준길의 북벌운동은 허황한 꿈에 앞서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조선은 수년간 지속된 대기근과 청의 대약진이라는 악조건 속에 처해있었다. 이에 송준길이 추진한 현실 정책은 외양에 앞서 내수를 다지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이었다. 내치(內治)는 외양(外攘)의 근본이고, 치병(治兵)은 안민이 우선이라고 했다. 내수의 핵심은 양민(良民)과 격군심(格君心)이었다. 송준길은 군주의 덕성함양과 심성수양이 곧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백성의 마음, 임금의 됨됨에 달렸다는 것이었다.◆북벌 진출의 한을 남긴 채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송준길의 죽음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늘도 안타까워, “이날 붉은 기운이 하늘로 솟고 그 빛이 땅을 비추니 길을 가던 사람이 바라보고는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는데, 와서 보니 선생이 막 운명하였다. 이해 10월 성관(星官)의 ‘소미성이 동방에 떨어졌다.’라는 발언이 있었는데, 권상하는 송준길의 죽음이 바로 성관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고 애석해 하였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잡초 북적이는 흥암서원을 나서며 ‘격군심(格君心)’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격군심이라는 말이 구한말 이 땅을 찾았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를 불러내었다. 강자 앞에 굽실대는 조선인들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했던 비숍이, 러시아 자치구 프리모스키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당당한 삶의 현장을 만난 뒤에는 자신의 생각을 고친다. “정부가 부패하지 않고 잘해주기만 한다면,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우수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정부를 거꾸로 읽으면 부정(不正/不淨)이 된다. 당당하지 못한 정부는 거꾸로 된 정부이다. 당당한 국민이 당당한 정부와 당당한 역사를 만들고, 당당한 정부가 당당한 국민과 당당한 역사를 만든다. 아무리 물러서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효종의 북벌의지, 동춘당 송준길의 북벌운동은 당당했으므로 아름다운 민족사의 한 획이었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연 이사장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안동 함벽당

함벽당(涵碧堂)은 안동시 서후면의 산골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정자이다(경북 문화재자료 제260호). 천등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절집인 개목사를 바라고 산길을 올라가노라면, 길섶에 동남쪽을 향해 두어 길 높이의 막돌로 쌓은 석축이 보인다. 그 석축 위에 조성된 대지에 함벽당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높다란 석축으로 말미암아 정자가 마치 누각처럼 보이기도 한다.서쪽으로 난 작은 사주문(四柱門)을 지나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정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T’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뒤편에 3칸의 온돌방 2개를 배치하고 가운데 칸 앞으로 2칸의 대청을 앞으로 길게 뽑아 놓았다. 평난간을 두른 우물마루 대청을 맞배지붕이 덮고 있다. 보통 정자에서 흔히 보이는 건축적 장식이 거의 없고, 사용된 목재 또한 우람한 맛이 없다. 그저 작고 소박하다는 느낌만 줄 뿐이다. 화려함을 경계했던 정자를 세운 사람의 의도가 엿보인다. 함벽당은 세 번에 걸쳐 주인이 바뀌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조선 명종 때의 절충장군 강희철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 마을 가야촌에 살면서 처음으로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함경당(涵鏡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외손자였던 북후면 도촌에 살던 옥봉 권위(1552~1630)가 정자를 물려받았다. 이 무렵 매원 김광계(1580~1646)가 인근의 봉정사를 유람하다가 함경당에 들러 친구로부터 주식(酒食)을 대접받은 일화가 그가 쓴 ‘매원일기’에 남아 있어, 함벽당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그 후 함경당은 이 마을에 살다가 문과에 급제해 내외 관직을 역임하고 귀향한 류경시(1666~1747)의 소유가 돼 후학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장소로 이용됐다.다만 당호가 함경당에서 함벽당으로 바뀐 까닭은 이렇게 전해진다. 함경당의 새 주인이 된 류경시는 주위 사람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새로 당호를 짓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양 주실에 살던 외종형인 옥천 조덕린(1658~1737)이 그를 항상 “함벽주인(涵碧主人)”이라 칭했고, 문생과 후학들도 류경시를 “함벽선생(涵碧先生)”이라 부르면서 정자 명칭이 어느덧 함벽당으로 정착됐고 또 류경시의 아호(雅號)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현재의 건물은 창건 당시인 17세기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류경시가 작고한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62년(철종13)에 대대적으로 중건했음이 건축 수법이나 ‘중건기’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온통 천지가 짙푸른 녹음 속에 묻혀 있는 이즈음에 함벽당 난간마루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푸르름 속에 잠겨 있는 집”이라는 당호가 가진 의미가 저절로 깨우쳐진다. ▲류경시과 함벽당 둘러보기함벽당의 주인 류경시는 관향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흠약(欽若), 호가 함벽당(涵碧堂)으로 전주류씨 세거지인 안동 무실(水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집이 가난해 솔방울에 불을 붙여 밤새 책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니 세숫물이 먹물처럼 까맸다거나, 개목사에 들어가 ‘맹자’를 읽었는데 방에서 나와 주변의 나뭇잎을 보았더니 거기에 맹자의 글이 모두 쓰여 있더라는 일화 등이 그것이다. 아호가 천태공인 할아버지의 권유로 안동 풍산에 사는 고산 이유장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후일 강원도 원주의 우담 정시한과 안동으로 돌아 온 갈암 이현일을 찾아가 학문을 물은 바가 있어, 그들의 문인록(門人錄)에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류경시는 1694년(숙종20)의 갑술환국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후, 폐서인이 돼 쫓겨났던 왕비 민씨(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했음을 기념해 시행된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들게 됐다. 내직으로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사, 평안도사를 거쳐 용강현령, 한산군수, 풍기군수, 양양부사, 순천부사를 지냈다.그는 관료로서 생활하는 동안 특히 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일화 한두 가지만 소개해 두고 싶다. 황해도사로 부임했을 때 장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 아들이 이번에 시행되는 도회시(都會試)에서 합격할 수 있게 해달라며 꿩을 뇌물로 바치자, 그를 잡아 장형을 내리고 아들은 응시를 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소문이 알려져 평안도사로 재임 중에 평안도의 문교행정을 관찰사로부터 전적으로 위임받았는데, 강서현령 윤순이 도회시 고시관으로 참여했다가 “이번 시험에는 사적으로 청탁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이 모든 것은 공의 공정함과 염치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아빠찬스’라는 말로 빈정대며 분개해 마지않는, 자식의 좋은 학교 진학을 위해 각종 부정을 꺼리지 않았던 어느 장관 역임자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회 기득권층의 얼굴 두꺼운 표리부동함과 불공정성과 비교할 때, 공의 이런 일화는 한여름의 시원한 샘물 같은 청량감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그는 특히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후일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다.용강현령으로 재임 중의 일이었다. 용강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교통로로서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재물을 비축해 두는 지칙고(支勅庫)가 두어져 있어, 거기에 은전 수만 꿰미가 비축돼 있었다. 이전의 현령들은 이를 유용해 백성들에게 고리로 빌려주거나 장사 자금으로 전용해 사복(私腹)를 채워왔다. 그러나 류경시는 그런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녹봉에서 엽전 8천 꿰미를 내놓아 믿을만한 읍내 사람 8명을 뽑아 관리하게 해 지척고의 부족분을 메꾸었다. 뒷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현명(1690~1752)이 그의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참으로 큰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엽전 2천 꿰미를 더 보태어 백성들을 도왔다고 한다. 조정으로 복귀한 조현명은 뒷날, 류경시를 ‘당금(當今) 제일의 목민관’이라 일컬었다고 전한다.◆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을 높여한편 그는 ‘문무겸재(文武兼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가 양양부사로 부임할 당시 강릉에서 양양에 걸친 일대에는 도적떼가 크게 번성해 조정의 큰 우환거리였다. 새로 부임하자 말자 그는 적당들이 여파령(黎婆嶺)에서 대관령(大關嶺)에 걸친 산중에 소굴을 마련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강릉태수와 힘을 합쳐 도적들을 소탕했다. 먼저 화전민 몇 사람을 포섭해 그들로 하여금 적당들을 회유하게 하는 계교를 써서 결국 적당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러나 토벌 후에는 괴수 몇 사람만 처형하고 원래 양민들인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양민이 되돌림에 그 후 강양 일대가 평안해졌다고 한다. 학문에만 뛰어난 문신이 아니라 군사 운용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28년(영조4) 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으로부터 기호지방 병영에도 이를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라는 명이 떨어졌다. 잠시 금강산 유람을 떠났던 그는 즉시 양양으로 복귀해 군기를 보수하고, 군사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태평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진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류경시는 밤에는 ‘육도삼략’과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병서를 강론하고, 낮에는 훈련을 시켜 5일이 지나자 제법 군용을 갖추게 됐다. 이를 직접 목격한 승지 이휘진과 정언 최규태 등이 “류공은 가히 문무겸재라 이를만하다.”라고 찬탄했다고 한다.이렇듯 함벽당은 얼핏 소박하고 자그마한 정자 건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함벽당 류경시 선생의 맑은 정신이 깃들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답사 당일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함벽당 11대 종손 류건기(91)옹은 여전히 꼿꼿한 유자(儒者)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해 받은 류옹의 문집격인 ‘성헌만록(誠軒漫錄)’에 실린 각종 문장을 음미하면 유자의 풍취가 가슴에 아련히 와 닿는다. 또 선대 종손인 농포공도 퇴계학맥을 이은 근대의 선비⋅학자로서 문집인 ‘농포문고(農圃文稿)’와 1909년부터 1951년까지 40여 년 간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보며 기록한 일기인 ‘농포일기(農圃日記)’를 남겼다. 이문기 경북대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김천 방초정

김천 시내에서 남쪽으로 황악산 바람재를 넘어 공자동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감천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2층 누각으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정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주심포계 이익공 팔작지붕 양식의 건물로 1974년 12월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이다.1625년(인조3년) 원터마을에서 태어난 유학자 부호군 연안이씨 방초(芳草) 이정복(1575-1637)이 사별한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흘러 퇴락해진 건물을 1689년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다시 1727년에 보수했는데 이듬해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의 난’ 때 파손되고 말았다. 한동안 부서진 채 방치되다가 1737년에 일어난 홍수로 인해 유실된 누정을 1788년 5대 후손인 이의조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세운 것이 현재 우리가 만나는 ‘방초정’이다.동남향인 ‘방초정’ 앞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고목을 품은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연못가에는 배롱나무를 비롯해 목백일홍, 나리꽃 등이 어우러져 한 여름에 찾아가면 왜 이곳을 ‘방초(芳草)’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다.정자 바로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상원 마을 입구에서 부터 걸어가면서 보는 연못과 방초정의 풍경이 으뜸이다. 한 시인은 이 주변경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이란 시문도 남겼다.‘방초정’이 있는 원터 마을은 조선시대의 관영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 있던 곳인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인 1519년(중종3)으로 추정된다. 연안이씨 부사공파 일가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이래 세거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형적인 반촌이다.​연안이씨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으로 와서 공을 세운 후 신라에 귀화한 ‘이무’를 시조로 한다. 이무는 본래 중국 노자의 후손으로서 무열왕이 그를 ‘연안후’로 봉하고 식읍을 내린 것이 성씨의 출발이다.◆방초정과 최씨담(崔氏潭)‘방초정’은 2층 누각에 팔각지붕을 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2층 누각인 점은 일반적인 누정의 형태이나 2층의 방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양 끝에 방이 배치되는 누정의 일반적인 구조와는 달리 방에 앉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게 ‘방초정’의 특징이다.누정 가운데 자리한 방의 둘레는 벽이 아니라 세 짝의 들문으로 이뤄져 있어 들문을 위로 들어 올려 걸어두면 사방으로 트인 공간을 이룬다. 이는 ‘방초정’이 자리한 곳이 평지라 마을 곳곳을 내려다 보는 것은 물론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과 주변 논밭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 한 쪽 방향으로만 보는 구조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소통하기에 유리한 구조를 가진다. 들문을 내려서 닫더라도 문 한가운데 나있는 작은 살창 쌍여닫이문이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정자의 아래층은 자연미를 살린 통나무 기둥에 2층 온돌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굴뚝 기능을 하는 호박돌을 붙인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단 네 모서리 지붕 추녀에는 둥근 활주(闊柱)가 서 있어 건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방초정’ 앞에는 ‘최씨담’이라 불리는 정방형의 연못이 있다. 두 개의 섬을 가진 연못은 이른바 ‘방지원도’로 이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인공정원의 일반적인 형태다.연못가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버드나무가 물가에 깊게 드리워 있고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화사한 붉은빛이 연못에 비쳐 장관을 이룬다. 주변에는 오랜 세월 연못과 정자 곁을 지켜온 회화나무와 불두화, 사철나무, 작약, 원추리, 국화, 창포 등이 연못에 떠있는 개구리밥과 어우러져 정취를 더 한다.이정복이 세운 ‘방초정’과 인공연못인 ‘최씨담’에는 조선의 쓰라린 역사와 연안이씨 집안의 슬픈 가족사가 담겨 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구로다가 이끄는 제3번대와 모리와 시마즈가 인솔하는 제4번대가 성주, 지례, 개령, 김산을 지나 추풍령으로 향했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 인근 ‘하로마을’의 화순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던 이정복은 처가에서 혼자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영이 있는 능지산 아래로 피신했다. 친정인 ‘하로마을’에 남아 있던 부인 최 씨는 왜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죽어도 시집에서 죽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향했다.​산길 40여 리를 걸어 원터마을에 도착했으나 이미 시댁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난 뒤 였다. 시댁식구들이 있는 능지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왜구들과 마주치게 된 최 씨는 왜구에게 겁탈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겠다며 웅덩이에 몸을 던진다. 최씨가 따르던 여종 석이에게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주길 당부하고 자신은 명의로 갈아입고 투신하자 석이도 따라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최씨의 나이 열 일곱이었을 때다. 후에 사람들은 이 웅덩이를 ‘최씨담(崔氏潭)’이라 부르고, 이정복은 부인이 자결한 웅덩이를 넓혀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의 호를 딴 ‘방초정’을 세웠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난간에 오르면 연못의 두 섬은 이정복 부부처럼 안타까워 보이기도 하고, 최씨와 석이처럼 의연해 보이기도 한다.‘방초정’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최씨 부인이 물에 빠져 죽고 난 후 신랑 이정복은 벼슬 임지에서 돌아와 부인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웅덩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후손을 봐야 한다는 문중의 권유로 훗날 재혼을 하게 되지만 못 옆에 정자를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렇게 먼저 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정자가 ‘방초정’이며, 웅덩이를 넓게 파서 만든 연못을 ‘최씨담(崔氏潭)’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방초정의 ‘방초’는 당나라 시인 최호(704~705)의 시 ‘등황학루’에서 따왔다. ‘앵무 섬에는 꽃다운 풀들만 가득하구나’(芳草萋萋鸚鵡洲)라는 싯구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더불어 중국 강남 3대 누각의 하나다. ‘방초’는 또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 봄 풍경을 읊는 대목에도 나온다. ‘나뭇잎이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을 때(綠陰芳草勝花時)’라는 대목에서다.그러나 이정복에게 ‘방초’는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부인이 자결할 때가 ‘녹음방초승화시’였던 5월말이나 6월초로 추정된다. 꽃잎 다 떨군 나무들이 새 잎을 달고 싱그러운 기운을 한껏 내 뿜을 때 이정복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했던 것이다. 그에게 ‘방초’는 절개를 지킨 부인의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백과 최호가 ‘황학루’에서 앵무 섬을 내려다보며 예형의 죽음을 애도했듯이 이정복도 ‘방초정’에서 ‘최씨담’을 보며 부인의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다.◆화순최씨 정려각과 여종 석이의 비석​마을 밖에서 ‘방초정’에 오르려면 정려각을 지나야한다. ‘방초정’ 들머리에 세워진 정려각에는 ‘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증 숙부인 화순최씨지려(節婦 副護軍 李廷馥 妻贈 淑夫人 和順崔氏之閭)’라고 쓴 비각과,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婢)’라고 쓰인 작은 비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정복의 부인에게 인조임금이 1632년(인조 10년)에 내린 어필 정려각이다.‘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는 최씨 부인과 함께 자결한 몸종 석이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연안이씨 후손들이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작했으나 종의 비석을 절부의 정려각 앞에 세울 수 없다며 ‘최씨담’에 던져졌다가 1975년 ‘최씨담’ 준설공사 중 발견돼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경북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누에 올라 주위의 경치를 찬미한 시와 글씨를 남겼다. 김천 삼산금오산, 황악산, 대덕산의 중앙을 관통해 흐르는 감천 중류에 위치한 ‘방초정’에는 편액뿐 아니라 20개가 넘는 시판이 걸려있다. 그만큼 ‘방초정’에서 조망되는 경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많은 시인 묵객들이 ‘방초정’에 올랐을 때 끓어오르는 시상을 시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가운데 작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방초정십경’이 유명한데, 방초정에는 십경의 제목이 각각 따로 판각돼 기둥과 대들보에 걸려있다. 그 가운데 일경 ‘일대감호(一帶鑑湖)’는 방초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를 시로 표현했다.檻外鑑湖一帶流 (난간 밖에 감호가 한 줄 흐르니)明沙白石短長洲 (맑은 모래 흰 돌이 들쑥날쑥한 물가에 있구나)桃花氣暖春風靜 (복사꽃 기운이 따뜻한 가운데 봄바람이 고요하니)時有漁郞係片舟 (때때로 고기잡는 사내가 조각배를 매는구나)이 시에서 드러나는 정취는 아쉽게도 현재의 ‘방초정’에 올라서는 느낄 수 없다. 이 시가 말하는 ‘감호’는 ‘감천’으로 현재의 방초정에서 200m 이상 떨어져 있고 둑 아래여서 보이지 않는다. ‘방초정십경’이 지어진 시기가 난간 아래 감천이 흐르는 곳에 방초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정복 부부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방초정’은 지난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도 지정됐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청도 운문사 비로전

코로나19로 일상생활이 바뀐 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오면서 땅에는 새싹이, 나무에는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봄 풍경, 정취를 느껴볼 틈도 없이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마스크처럼 답답한 연속의 나날이다.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청도 운문사로 향했다. 대구에서 가까우면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다.수헌(壽軒) 이중경(1599~1678)이 쓴 오산지(鰲山志)에 따르면 청도는 예로부터 ‘산과 시내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길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산천청려, 대도사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그 말 그대로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운문댐을 지나 구비진 길 사이사이엔 신록의 짙푸름이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고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신록 속에 가라앉은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맡아보는 자연 그대로의 공기인지. 적어도 이곳에서 코로나19는 먼나라 이야기임을 새삼 느낀다.차를 멀리 주차해놓고 운문사까지 걸어갔다.주차장에서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어린이들도 쉽게 걸어갈 수 있을만큼 쉬운 길이다.여느 사찰과 달리 계단이 많지 않다. 천천히 걸으며 절로 향하는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스스로의 삶을 한 번쯤 되돌아보라는 부처님의 뜻이 아닐까. ◆비로전운문사에 도착하자마자 비로전으로 향했다.보통 대웅보전이 사찰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운문사의 경우 비로전이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비로전은 1105년(고려 숙종 10년) 운문사 제3중창주인 원응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불전이다. 1985년 보물 제835호로 지정됐다.현재 건물은 2006년 해체 수리 당시 종도리에서 발견된 ‘순치십년계사구’에 상량했다는 묵서명을 통해 1653년(조선 효종 4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종도리 묵서명과 함께 발견된 ‘운문사 법당 기문’과 ‘건륭 삼십팔년 계사 유월 십삼일 대웅전 중집기’, ‘불기 이천구백육십이년 대웅전 중집약기’ 등을 통해 1653년 중창한 이유와 그 후의 중수 사실도 알 수 있다.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 후기 불전으로는 큰 규모에 속한다. 기단은 크고 작은 자연석에 진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이용해서 마무리한 혼합식 기단이다. 양 측면과 정면에는 4면의 장대석 디딤돌을 이용해 계단을 마련했고 정면 계단 좌우에 해태 두 마리를 두었다.기단 위에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주춧돌인 덤벙주초를 놓고, 외진주(바깥기둥) 12기와 내진주(안둘렛기둥) 2기 등 총 14기의 기둥으로 평면을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의 어칸에는 5짝 분합문을 달고 협칸에는 4짝 분합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2짝 분합문을 두었다. 배면의 좌우 협칸은 쌍창으로 구성하고 어칸에는 2짝 분합문을 달았다. 다른 창살이 격자무늬인 것과는 달리 전면 어칸 창살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비로전에 들어가 보니 ‘#덕분에 챌린지’를 하고 있는 듯한 불좌상이 눈에 띈다. ‘덕분에 챌린지’는 코로나19로 힘쓰고 있는 의료진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캠페인의 일종이다.한 눈에 보아도 흔히 알고 있던, 그동안 봐 왔던 부처님의 모습과는 다름을 알 수 있었다.바로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비로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불상으로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원래 모습인 진리 자체를 상징하며 ‘진신’ 또는 ‘법신’이라고 한다.소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210㎝ 무릎 너비 152㎝로 중형 규모다. 머리는 나발에 중간 계주와 정상계주를 표현했다. 상호는 반쯤 뜬 눈에 오똑한 콧날, 꽉 다문 입술을 표현해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수인은 가슴까지 들어 올린 후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을 취했으며 다리는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좌상의 가부좌 형식에서 일반적인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오른발을 왼발 앞에 놓아 반가좌의 자세를 취했는데 이런 자세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둑도 가치를 알아본 탱화소조비로자나불좌상 뒤로 탱화가 눈에 들어온다.비로전에 봉안돼 있는 후불탱인 ‘비로자나삼신불회도’다.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1755년 임한을 수화사로 19명의 화승이 제작했다. 현재 보물 제1613호로 지정돼 있다.삼신불회도는 법신 비로자나불과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표현했다.화폭이 가로 520㎝, 세로 460㎝로 큰 규모에 속한다.화면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됐다.중앙에는 삼신불, 하단에는 협시보살과 사천왕, 상단에는 설법을 들으려는 십대 제자와 성중들이 표현돼 있다. 비로자나불 좌우로는 문수·보현 보살이 협시로 배치됐으며 하단에는 좌우 3위씩 총 6위의 보살이 자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로자나불 아래 양쪽 각 4위의 보살이 대칭을 이루어 중앙에 집중된 모습이다.또 상단에는 오색구름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는 타방불이 내려오는 모습이 표현됐다.비로자나삼신불회도가 가진 가치는 큰 규모에 속하는 탱화임에도 잘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특히 이 삼신불회도는 존상의 배치 외에 도상적, 구도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8세기 삼신불회도의 경우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각각 한 폭의 그림으로 구분해서 그리는 경향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이 삼신불회도는 한 폭에 법신, 보신, 화신의 설법 장면을 모두 묘사했다. 이로써 19세기 한 폭에 그려지는 삼신불회도의 구도가 완성되지 이전 형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이처럼 비로자나삼신불회도의 가치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먼저(?) 알아봤다.때는 1940년대 여름. 당시 한 스님이 아무리 잠을 자려고 해도 잠에 들지 못했다. 결국 새벽 2시께 툇마루에 잠시 앉아 있기로 했다. 그런데 비로전 안에서 수상한 불빛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수상함을 느낀 스님이 비로전으로 발걸음 했고 도굴꾼들이 탱화를 떼어 내려는 장면을 목격했다. 다른 스님들을 깨워 도굴꾼을 내쫓았다.문화재보호법이 없던 시절인 1940년대에는 문화재 도굴꾼들이 판을 쳤다. 스님의 불면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비로자나삼신불회도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지금도 운문사에서는 이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꼼꼼하게 보아야 보인다비로전을 방문했다면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다. 가치 있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아무 생각 없이 비로전에 들어갔다면 소조비로자나불좌상과 탱화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절에 온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구석구석 살펴볼 필요가 있다.누구에게 충고를 하랴. 나 역시 고봉 스님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숨겨진 보물을 눈앞에 두고 못 찾았을 것이다.소조비로자나불좌상 뒤로 작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부처님께 절을 올리기 전 오른쪽 어깨가 불좌상 쪽으로 향하도록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기 위해 마련됐다. 도는 이유는 ‘인도의 전통예법’에 따라 존경하는 대상에 대해 오른쪽 어깨를 보이는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보통 오래된 사찰은 십중팔구 불좌상 뒤로 공간이 있다.비로전 후불벽 뒷면에 서면 나란히 앉아 있는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가 보인다. 이 벽화는 보물 제1817호로 지정돼 있다. 화면이 크기는 세로 290㎝, 가로 524㎝다.후불벽 뒷면에 관음보살도가 있는 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 여수 흥국사 대웅전, 순천 동화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등 10여 점이 알려져 있다.하지만 관음보살과 달마대사가 한 벽면에 나란히 표현된 것은 운문사가 유일하다.화면 오른쪽에 그려진 관음보살도는 보타락가산에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고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백의관음, 선재동자, 정병, 청조, 청죽 등으로 이뤄진 화면 구성은 전형적인 보타락가산이 배경인 수월관음도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준다.화면 왼쪽에는 험준하게 중첩된 암산의 깊은 암굴에서 수행하는 달마대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 수행했다는 일화를 실재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이 벽화는 두 가지 다른 주제를 한 화면에서 다루지만 관음보살의 보타락가산과 달마대사의 소림굴이 단절된 공간이 아닌 하나로 연결된 공간임을 강조한 구성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다시 소조비로자나불좌상 앞으로 왔다.그러니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인형이 보인다. 불단 서쪽 천장 아래에 반야용선에 오르기 위한 ‘청의동자’가 그것. 반야용선은 중생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반야용선이 출발할 때 한발 늦은 보살에게 사공이 밧줄을 던졌고 청의동자가 붙잡고 배에 오르려고 한다.청의동자와 반야용선을 누가 천장 아래에 매달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무 상태를 봐서 100~200년 전으로 추정할 뿐이다.운문사 비구니들은 청의동자를 ‘악착보살’이라고 부른다.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악착같이 올라가고 수행을 위해서는 악착같이 참아야 한다는 뜻에서다.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에 갈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을 다다르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전 세계가 코로나19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지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반야용선에 오르려는 청의동자처럼 우리 스스로 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해 힘든 현재 상황을 조금 더 참고, 생활 방역을 철저히 한다면 코로나19 사태도 어느 순간 종식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영천 백흥암(7)

“모든 게 흥한 큰 가람(百興大蘭若)”. 조계종 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의 산내 암자 백흥암의 출입 건물인 보화루에 걸려있는 편액 글씨이다. 난야(蘭若)는 아난야(阿蘭若)를 줄인말로 스님이 사는 곳이니 바로 가람을 의미한다. 백흥은 언뜻보면 세속적 소원을 담은듯하나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비워내고 깨끗하며 고요하게 열락의 세계를 지향하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청정한 선원에도 어울리는 말이다.팔공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백흥암에 들어서면 오백년 전 고쳐 지은 극락전과 조선시대 목조불단의 백미로 손꼽히는 수미단 등 두 점의 보물이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건물마다 볼만한 글씨가 편액이나 주련으로 걸려있어 문화재의 보고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절집이다.은해사에서 계곡을 끼고 900m 가량 올라가면 신일지(新日池)라는 저수지가 나오고 여기에 세 갈래 길이 나타난다. 산길로 가면 태실봉·인종대왕태실, 신일지를 끼고 오른쪽 택골로 가면 운부암, 왼쪽 절골로는 백흥암·중암암으로 갈 수 있다. 백흥암은 신일지의 왼쪽 길인 태실봉 남쪽 절골로 1.5㎞ 지점 경사진 곳에 있다.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1년(861)에 혜철국사(785~861)가 착공하여 그가 입적한 뒤 873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보화루중건기에는 “이 암자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기록에 의하면 본래 주변에 잣나무가 많아 창건 당시에는 백지(栢旨)의 거찰이었는데 중간에 암자로 고쳤다. 백지는 신라 때의 사찰이니 창건연대가 유구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후 조선 전기까지 백흥암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조선 중기 1546년(명종1) 천교대사가 중창하면서 백지사에서 백흥암으로 절 이름을 바꾸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1520년(중종15) 사찰 뒤 팔공산 동쪽 자락인 태봉에 훗날 인종대왕에 오른 태자의 태실(胎室)이 조성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는 태실수호사찰로서 위상이 높아진다.태실수호사찰로서 보호를 받은 증거는 ‘순영제음(巡營題音)’과 ‘완문(完文)’이란 편액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순영제음은 감영에 백성들이 민원을 올리면 이에 대해 감영에서 처분한 내용을 말하고, 완문은 조선 왕실에서 향교·서원·결사·개인 등에게 어떤 권리나 특권을 인정하는 공식적인 문서이다. 태실을 지키는 암자이니 승역을 함부로 침탈하지 말라는 왕의 어압(御押,싸인)까지 새겨넣은 편액 완문이 설치된 1798년 이후로 왕실의 인정과 보호를 받으면서 중흥의 기반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임진왜란으로 전각과 불화 및 불상 등 가람이 소실되어 중건불사가 이어졌다. 1985년 극락전을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43년(인조21)에 극락전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여 년 뒤 1685년(숙종11) 극락전이 중건됐고, 1730년(영조6) 보화루를 고쳐 지었다. 1858년(철종9) 청봉(靑峰)이 영산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백흥암이 융성할때는 수백 명이 기거하면서 수도하던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 사세가 축소되었지만 암자로는 큰 규모이고 사방이 솔숲으로 둘러쌓인 한적한 비구니의 수도 도량이다. 고즈넉한 이 절의 중심 전각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보화루 등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건물들을 돌아보며 예스러운 천년고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다포계 팔작지붕에 상서로운 동물도상을 품은 극락전백흥암의 주 불전인 극락전(極樂殿)은 1546년(명종 1년)에 건립되고 1643년(인조 21년)에 중수하였으며, 1685년(숙종 1년)에 중건한 앞면 3칸, 옆면 3칸의 조선 시대 건축양식을 대표할만한 우아한 단층건물이고 지붕은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이 전각은 1984년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었고 서방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이다. 불상 배치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 관음보살과 오른쪽 대세지보살이 보좌하는 삼존형식이다.건물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올렸다. 그랭이질한 주춧돌 위에 둥근 두리 기둥을 세웠는데 안쏠림을 준 귀퉁이의 귀기둥은 가운데 기둥보다 조금 높게 꾸민 귀솟음을 둔 것이 특이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올린 다포계 양식이고, 천장은 층단을 나누어서 가는 테두리를 둘러서 꾸며놓아 조선 시대 건축의 멋을 보여준다.무엇보다 극락전 내부는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극락세계가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삼존불 뒷배경은 아미타존도를 중심으로 위에는 천개(天蓋), 아래에는 수미단이 놓여있다. 천장에는 꽃무늬와 단청으로 꾸며져 있고, 벽에도 단청과 벽화로 장식되어 있어 시선을 옮길 수 없다. 천개는 하늘의 세계로 용이 조각돼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부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수미단은 땅의 세계로 길상의 동물과 식물들이 위를 향해 솟구치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듯하다.◆조선 목조각의 백미 수미단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은 1968년 보물 제486호로 지정됐는데 조선 시대 수미단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각과 다양한 도상으로 장식되어 있어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수미단은 사찰의 불전 안에 불상을 모시는 단으로 불단(佛壇)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수미산(須彌山)이라고 한다. 즉 수미단은 하늘과 땅을 잇는 수미산을 형상화 한 것으로 부처나 보살이 상주하는 신성한 장소를 의미한다.수미단은 높이 134㎝, 너비 413㎝(정면)로 상‧중‧하대의 삼단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상대는 가리개형의 보탁을 별설하였고 중대는 3단이며, 하대는 족대(足臺)형이다. 조각은 중대에 집중되어 있고 하대에는 안상 내에 용과 귀면을 투각기법으로 정교하게 조각하였다.정면에서 중대를 바라보면, 윗부분 1단은 하늘(天)을 상징하는 천상세계로 가로로 다섯 칸을 같은 간격으로 나눈 뒤 좌에서 우로 하늘에 날아다니는 공작, 봉황, 운학, 봉황, 꿩 등을 조각했다. 가운데 2단은 바다(水)를 나타내는 수중세계로 가운데가 넓고 가장자리가 좁은 다섯 칸에 수중에 사는 마갈어(龍魚), 황룡, 황룡, 황룡, 잉어 등을, 아랫부분 3단은 땅(地)을 의미하는 지상세계로 가운데가 넓고 가장자리가 좁은 다섯 칸에 땅에 있는 육지동물인 코끼리, 천마, 사자, 기린, 해태 등을 표현하고 있다. 중대에는 육‧해‧공의 우주가 담겨있고, 천상, 수중, 지상의 새와 물고기와 동물 주변에는 국화, 연꽃, 모란, 동백 등 수많은 꽃과 동자, 개구리, 물총새 등을 아로새겨 놓았다.이렇게 화려하고 다양한 문양들이 조각된 것은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수많은 사찰들이 중수되면서 불단의 장식이 화려해지는 시대적인 영향으로 이 곳 수미단의 도상들도 다양하게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양은 서수(瑞獸), 동물, 꽃, 구름무늬 등 30여 종이나 된다. 유‧불‧도교의 종교적 상징성을 가진 것도 있지만 당시 기복문화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길상적 상징성을 가진 것도 많이 보인다. 이는 불교문화가 전통문화와 섞여 문화융합을 이룸으로 인해 봉황, 기린, 천마, 해태 등 길상적인 것 까지 망라된 것으로 살펴진다.특히 수미단의 목조각은 사실적 표현으로 완성도가 높아 조선 목조각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날개의 선, 꽃모양 등 굴곡을 살려서 입체적이고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가로로 넓은 공간에 동물들이 걷거나 뛰고 새가 날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했고, 용이 날아 오르는 형상에 꽃이나 식물까지 적절하게 어울어져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조선의 어떤 수미단보다 섬세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최고 수준의 조각승이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보화루의 추사 글씨백흥암에는 산해숭심(山海崇深), 시홀방장(十笏方丈), 극락전(極樂殿), 보화루(寶華樓), 화엄실(華嚴室), 백흥대란야(百興大蘭若), 심검당(尋劒堂) 등 다수의 편액과 주련이 걸려있다. 사찰에는 그 건물을 상징하는 편액이 걸리기 마련이고, 명가의 글씨를 걸어두는 것이 상례이다.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편액은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산해숭심’이다. 가로 235cm, 세로 56cm 크기에 3개의 목판을 가로와 세로를 연결한 뒤 양각으로 새겼다.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며 현재 보화루에 걸린 것은 모각본이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의미로 예서바탕에 해,행서의 분위기를 가미한 활기찬 운필과 조형성이 돋보인다.스승인 담계 옹방강이 추사를 격려하며 보낸 “옛 것을 고찰해 오늘을 증명하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攷古證今 山海崇深)”란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에 나온다.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산숭해심(山崇海深)’과 백흥암의 ‘산해숭심’은 글자의 순서와 위치가 다르다. 산(山)자는 글자가 뒤집어져 있다. 그 까닭은 서각을 할 때 원본 위에 화선지를 대고 본을 떠서 새 편액에 붙이는 과정에서 앞뒷면을 뒤집어서 붙인듯하다. 또한 해(海)자도 호암미술관 소장본은 오른쪽 방의 매(每)가 수평에 가까운데 백흥암 모각본은 매(每)가 오른쪽 아래로 기울어져 있다. 아마 본뜬 화선지를 삐뚤게 붙인듯하나 편액 전체를 보면 볼수록 여운이 남는다. 신록의 계절에 천년의 역사향기가 서린 백흥암을 찾아서 극락전과 수미단 그리고 건물마다 달린 편액글씨의 운치까지 음미하면 좋을듯하다. 아울러 문화재의 보고인 청정도량에서 심신을 이완시키면서 안복도 누리는 힐링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정태수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6) 고령 관음사 신중도

괴질이 지구촌을 뒤덮어 기본적인 사회시스템 마저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병고로부터 속절없이 고통을 받게 되면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게 된다. 바로 지금이 종교에 관계없이 명상과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기독교의 성화나 사찰의 불화도 경배의 대상이 된다. 신중도(神衆圖)라는 불화의 형태가 있다. 예로부터 절 집 내부 벽면에 가장 많이 장엄되고 있다. 신중도는 말 그대로 여러 신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불교 발상지 인도에서는 이미 여러 종교가 있었는데 그들의 신은 불교와 다투는 대신 부처님을 지키는 호법신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유입되면서 원래 있던 토착 신앙을 흡수하게 되는데 산신과 용왕, 칠성이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모든 제신들이 불화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신중도는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교류한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그림이다. 신중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구촌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불교적 메시지나 지혜라도 찾아보려는 것이다.◆안정된 구성과 섬세한 기법의 고령 관음사 신중도지난해 3월25일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관음사 신중도’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3호로 지정됐다. 1908년 금어(金魚)인 원일(圓日)과 진규(眞珪)에 의해 제작된 화면 119.8×112.2㎝ 크기의 불화이다. 금어는 불모(佛母)라고도 불리며 불화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이 불화는 하단의 붉은 색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 시기와 제작자, 봉안처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처음 조성 당시의 사연도 적혀 있다. 원래 해인사 백련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했었다. 함경남도에 사는 박씨라는 여 신도가 세상을 떠난 남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단독시주했다. 안정된 구성과 섬세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후기 불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문화재청은 기록하고 있다.고령 관음사에는 신중도 외에도 2점의 문화재가 더 소장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2호 ‘아미타여래도’와 2017년 5월2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84호로 지정된 관음사 칠성도이다. ‘아미타여래도’는 신중도와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고 동시에 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됐다. 이 불화는 관음사의 주불전인 관음전의 후불화로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이 서방 정토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화면의 정중앙에 아미타여래가 연화대좌에 앉아 있으며 좌우 협시로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4위가 유희좌 형식의 자세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유희좌는 한쪽 다리는 세우고 다른 한쪽은 대좌 아래로 내려뜨린 자세를 말한다. 그 뒤 편으로 가섭, 아난, 지장보살을 포함한 4위의 보살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아미타여래의 배경으로 법신에서 퍼져 나오는 오색파장의 광채가 화려하고 아름답다.칠성도에 대하여 문화재청은 화기를 통해 1892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 제작자, 시주자 등 제작체계와 후원자를 알 수 있어 이 시기 불화 연구에 있어 기준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이 칠성도는 인물의 얼굴과 옷주름 등에 명암법을 도입하여 입체적인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고 했다. 병풍을 배경으로 마치 단체 사진 찍듯 존상들을 배치한 형식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기록했다.마스크를 단단하게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아름다운 색채의 연등들이 절 집 마당에 가득 걸려있는 고령 관음사를 찾았다. 현재 당우로는 정면의 관음전을 중심으로 칠성각과 산신각, 천불전, 범종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1911년 합천 해인사의 포교당으로 창건되었고 1956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관음사에서도 대한불교 조계종의 방침에 따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및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정진’이 진행되고 있다. 한달 동안 전국 1만5000여 사찰에서 진행되는데 회향식은 5월30일(음력 윤달 4월8일) 열린다.인적 없는 관음전에 올라 삼배를 올리고 신중도 앞에 섰다. 불단 우측 벽면 유리 액자 속에 장엄되어 있다. 합장하고 고요히 바라보니 그 속의 신중들이 일제히 깨어나 웅~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극적인 순간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1백 년 전, 한 화승의 지극 정성이 있었다. 작가들은 매일 목욕재계하고 항상 깨끗한 옷을 입으며 말도 하지 않는 등 철저한 계율을 지켰고 법식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수행의 연장으로 색채 작업을 했으며 이를 바라보는 신도들에게 환희심을 느낄 수 있는 불화로 완성시켰다. 경전에 나오는 여러 보살과 수호 신장들을 그린다고 해서 형상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 그려내야 한다.관음사 신중도에는 황금투구를 쓰고 금강저를 든 ‘위태천(韋太天)’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뒤편으로는 역삼각형 구도로 좌측에 범천, 우측에 제석이 배치돼 있다. 주변으로 천녀와 천동, 일천·월천대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 하단에 무장한 천룡팔부 신중 4위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그런데 이 신중도의 중심인물인 위태천은 질병 퇴치를 담당하기도 하는 신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코로나가 불러온 거리두기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리스 신화처럼 재미있는 스토리가 연결된다.◆하루빨리 괴절이 사라지길 기원하며위태천은 인도 서사시의 시기인 기원전 600년경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브라만 즉 바라문의 신이었다가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열반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다비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마왕 첩질귀(捷疾鬼)가 갑자기 나타나 불사리를 빼앗아 달아났다. 이때 위태천은 즉각 뒤쫓아 수미산 정상까지 달려가 상대를 제압하고 무사히 찾아왔다고 한다, 높이 132만km로 알려진 눈 덮힌 수미산을 한순간에 뛰어올랐다는데 흔히 달리기를 잘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경 약찬계에 나오는 첩질귀도 빛처럼 발이 빠르고, 순식간에 사리를 낚아챈 것으로 보면 날렵한 귀신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괴질과 병을 옮기는 야차이며 사천왕의 부하였다. 중생에게 고통을 주는 코로나19는 현대판 서질귀라 할 수 있겠다. 위태천은 그를 누르고 이겼으니 신중도의 중앙에 그려 넣어질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위장군’, ‘위태보살’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일본 프로야구계에서는 도루 잘하는 발빠른 야구선수를 ‘이다텐’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태천을 일본어로 발음한 것이다. 지금은 스포츠의 신으로서, 또 아이들의 병을 재빠르게 제거하는 신으로서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존재가 되어 있다. 신중도의 위태천 앞에서 다리와 허리 건강을 빌고 도난 방지 대한 기원도 한다. 인도의 힌두 신화에서는 창이나 그 밖의 무기를 쥐고 공작새를 타고 다닌다. 위태천은 불탑의 도굴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상은 금박 찬란한 새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합장한 팔 위에 칼 혹은 금강저를 가로질러 놓는 모습이다.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의 목판화인 ‘소자본묘법연화경’등에서 사경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으로 등장했다. 조선시대 신중탱화에서는 무장들을 이끄는 대장격으로 나타난다. 불경을 간행할 때 권두 또는 권말에 동진보살 즉 위태천을 판각해서 경전의 수호를 상징하는 경우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현재 관음사 신중도 하단의 무장한 호법 신중들은 위엄 있는 기세로 눈을 부라려 위협하거나 단호함을 드러낸 표정이다. 대조적으로 위태천의 얼굴은 둥글 넙적하며 단정한 이목구비에 무표정하게 묘사하였다. 그래서인지 중앙에 위치하며 정면을 직시하는 시선에서 더욱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신중들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영험과 불가사의한 힘을 기대한다. 한 달 간 전국 사찰에서 펼쳐지는 ‘코로나19 극복과 치유를 위한 기도 정진’이 잘 회향되어 신중도 위태천의 위신력이 발휘되기를 기원해 본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