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불교문화의 관광자원화…천년세월 우리 삶에 스며든 불교…민족의 맥을 잇는 문화가 되다

한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종교이기도 하지만 ‘공공재’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어디 여행이라도 가려면 가장 먼저 그곳에 유명 사찰이 있는지를 알아본다. 물론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에는 볼만한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그밖에 의성 고운사처럼 몇몇 사찰은 평소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사찰 음식을 장만해 대중들에게 공양하기도 한다.또 마을의 어느 할머니나 어머니는 ‘무슨 무슨 보살이네’라는 소리를 듣는다.그만큼 불교는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불교문화의 이해구미의 불교를 연재하면서 중간 중간 불교문화를 소개했다.인도 불교에서 시작된 탑의 유래와 구미에 남아 있는 탑의 형태, 구미 불교의 종단 변화, 불교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용의 의미, 일주문과 천왕문의 의미, 금오산의 사찰 분포 형태, 불상의 구별방법과 보살과의 차이점, 불상마다 다른 손 모양(수인) 등이 그것이다.종교와는 별도로 유교를 유교문화, 이슬람을 이슬람문화라고 부르듯이 불교를 불교문화라고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종교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다.하지만 불교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불교를 신앙해서 될 일만은 아니다. 우린 문화를 어려서부터 생활 속에서 체득하기도 하지만 학교 등에서 배운다.불교문화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 불교문화를 이해하려면 역시 배워야 한다.구미의 대표적인 농악인 무을농악이 태어난 곳이 무을 연악산 자락의 수다사란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불교는 1천600여 년 이상 우리의 삶 속에 함께하면서 특유의 어울림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발전시켜왔다.그래서 불교문화를 이해해야만 불교문화와 결합한 우리의 전통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불교문화의 진정한 저력이다.‘알면 알수록 더 많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불교문화를 알아두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찰의 전각과 불상 등 문화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불교문화의 관광자원화지난 1일 광주불교사찰순례단 40여 명이 제주를 찾았다.이들은 관음사와 천왕사 등 제주불교 성지순례 길을 탐방한 후 제주불교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체험했다.이들이 도보로 걸었던 길은 제주가 제주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만든 불교 성지순례 길, 일명 ‘절로 가는 길’이다.제주는 2012년 ‘지계의 길’을 시작으로 6개의 불교순례 길을 조성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최근 관광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제주시는 도보순례 길 활성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제주불교순례 길은 마음의 혼돈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무아’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제주시는 이를 위해 보시의 길(대원정사~해륜사, 42.9㎞), 지계의 길(관음정사~관음사, 14.2㎞), 인욕의 길(관음사~존자암, 21㎞), 정진의 길(존자암~남국선원·선덕사, 18.6㎞), 선정의 길(선덕사·쌍계암~광명사, 39.6㎞) 등의 순례코스를 지정했다.제주의 불교성지순례는 최근 일상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걷는 즐거움과 함께 종교를 통한 마음의 안식과 여유를 가져다주는 건강과 치유의 관광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제주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는 불교문화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경기도는 ‘경기방문의 해’ 사업 중에 평택시 수도사 전통사찰 음식 학습체험관, 포천시 자인사와 파주시 보광사 투어, 양평군 용문사의 ‘산사로 떠나는 마음여행’ 등 불교를 테마로 한 사업들을 포함하기도 했다.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해 도지사 선거 당시 호국불교의 숨결이 이어지는 경북의 전통사찰과 불교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전통사찰의 보존과 관리, 불교문화 홍보와 관광자원화를 약속한 바 있다.이 도지사는 “유명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 미술, 불교 문학, 불교유적, 순례길, 그리고 무형적 문화로서 불교 음악과 의례의식, 수행생활 등을 종합해 체계적이며 독창적인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문화관광 테마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구미 불교문화 관광자원화구미는 아도가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한 신라불교초전지다.이후 통일신라 때에는 신라불교의 성지로 지역 곳곳에 융성했던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가탑과도 견줄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륵사 폐탑이 그렇고, 아도가 창건했다는 도리사가 그렇다.구미시는 장세용 시장 취임 이후 최근 문화와 관광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관광진흥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이에 자문할 전문가 자문회의를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하지만 국내 최고 산업도시라는 명성에 밀려 새로운 관광콘텐츠를 찾기란 쉽지 않다.그래서 장 시장이 주륵사 폐탑 복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구미의 불교문화 자원은 어떤가. 충분하다.아도화상이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파했던 구미시 도개면에 신라불교 초전지가 있다.신라불교 초전지는 경북도 3대 문화권(유교·신라·불교권) 조성 전략 사업에 선정돼 국·도비와 시비 등 400억 원을 들여 2017년 10월13일 개관했다.3만6천여㎡(1만1천 평)나 되는 부지에 초전기념관과 전통한옥체험관, 대강당, 불교음식체험관, 단체생활관과 전시가옥 등을 갖췄다.발우공양과 각종 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휴일에는 대관하기 어려울 정도다.이곳에선 기존 사찰 템플스테이와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객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있다.하지만 여기까지다. 지역 곳곳에 산재한 불교문화자원과의 연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도리사가 지척에 있고 주륵사 폐탑지가 바로 곁에 있지만 이와 연계한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도리사와 수다사 인근에는 아름다운 임도가 있다. 이를 이용한 순례길 걷기 등의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불자들은 윤달이 되면 각기 다른 세 곳의 절을 한꺼번에 순례하며 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삼사순례를 행한다. 최근에는 윤달과 관계없이 불자들 사이에서 성행하고 있다.구미시 사암연합회를 통해 삼사순례객을 모으고 다른 지역 불자 단체들과 교류하며 순례행사를 갖다 보면 더 많은 외지 불자들이 신라 때 찬란하게 꽃피웠던 구미의 불교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구미를 찾을 것이다.물론 의성 고운사처럼 사찰도 사찰 나름의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천생산 천생사처럼 가을이면 국화 축제를 연다든지, 도개 문수사의 와인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도 괜찮다.각 사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계해 관광자원화할 수도 있다.◆대혜 스님(금오산 약사암 주지)이 시대 최고의 과제는 경제와 관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은 쓰기 위한 것이고 그 쓰일 곳을 만드는 것은 관광이 큰 몫을 담당한다.그런 면에서 구미는 큰 가치가 있는 곳이다.산업지향적인 구미에서 관광마저 진흥시킨다면 구미의 발전은 약속된 것이라 확신한다.불교와 유교 등 역사적 문화와 천혜의 자연 그리고 현재 산업기지인 구미 국가산업단지를 관광자원화할 수 있다면 구미는 한국 최고의 관광지가 될 것이다.금오산은 어느 도시의 산보다도 특별하다. 이 때문에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감탄한다.최초의 도립공원에 걸맞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할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수많은 산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올라보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금오산 마애여래불뿐만 아니라 곳곳의 등산로와 전망대, 역사적 가치는 전국 세 곳의 금오산 중의 으뜸이다.금오산과 신라 최초의 불교 전래지 모례원, 태조산 도리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금오산 약사암에서 굽어보는 낙동강은 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세계 어느 지역의 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또 구미 국가산단은 생산에 그치지 않고 산업의 역사를 가르치고 그에 따른 전시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산업문화로 만들어 낸다면 국내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이제는 공장만 지어서 윤택한 삶을 사는 시대는 아니다.경제와 문화가 조화를 이룰 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후손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도시가 될 것이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천 년을 한결같이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진리 체득한 이, 모두 ‘붓다’ 사찰엔 다양한 부처 있어 손모양으로 제 이름 말하네

사찰에는 많은 부처가 있다.석가모니불 외에 미륵불이니, 아미타불이니, 약사여래불이니, 아미타불이니 그 수를 세고 외우기도 어려울 정도다.왜 이렇게 많은 부처가 존재할까. 불교 학자들은 불교가 ‘진리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래서 유교나 도가, 희랍철학 등과 같이 노력해서 진리를 체득한 이들, 즉 진리와 하나가 된 인간을 ‘성인’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들을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진리가 곧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라는 말로 이 때문에 다양한 부처가 있을 수 있다.◆셀 수 없이 많은 부처현재를 관장하는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다.하지만 인간세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이를 관장하는 부처가 연등불(과거), 미륵불(미래)이다. 시간적 차이를 둔 이들을 합쳐 삼세불이라고 한다.또 위치상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서쪽에는 아미타불이 있는데 이를 삼계불이라고 부른다.공간상 우주에는 지구 외에 다른 많은 세계가 있다. 이곳에도 진리를 체득한 이들이 있으며 이들을 동서남북, 상하 등 방위로 표현해 10방의 부처, 즉 시방불이라고 한다.그러다 보니 사찰엔 많은 부처를 모시고 있다. 통상적으로 법당 가운데 부처를 앉히고 양쪽에 두 보살을 두는 협시가 일반적이다. 일종의 비서 역할이다.대웅전 석가모니불 곁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극락전 아미타불 옆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뜻을 받든다.금오산 약사암처럼 약사여래불 곁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앉힌다.이와는 달리 보살이 주존이 될 경우에는 보살보다 낮은 협시가 함께 모셔진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 곁에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지장전 지장보살 곁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앉아 있다.◆불상은 손으로 말한다불상을 자세히 보면 손 모양이 모두 다르다. 불상의 이름은 이를 통해 구별할 수 있다. 이를 ‘수인’이라고 한다.처음 인도 불교는 인도문화를 중심으로 오른손을 강조해 오른손이 주가 됐지만 불교가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왼손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화했다.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오른손과 왼손이 혼합해 쓰이고 있다.우리나라 각 사찰에 모셔져 있는 불상 중 비로자나불의 경우 인도문화와 중국문화가 혼재된 보습을 보인다.앞서 불상의 이름을 수인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은 구품인, 비로자나불은 지권인 등 특정 수인을 사용한다.항마촉지인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마왕을 항복시킨다는 뜻으로 석굴암의 석가모니불이 이 모양을 하고 있다.약사여래불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상태에서 왼손은 약기인이 된다.(약그릇을 들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손의 방향이 바뀐 불상도 여럿 있다)극락이라는 이상세계를 주관하다는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양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대 동그랗게 만드는 손 모양으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돈 내놓아라’라고 하는 모습이다.마지막으로 비로자나불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든 뒤 왼손의 검지를 세워 말아쥐는 모습이다.◆부처와 보살보통 불상은 의복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모양은 상투의 모습이 종교적으로 변화한 육계(정수리가 두둑하게 솟아오른 모습으로 최고의 지혜를 나타냄)와 나발(머리카락이 소라고둥처럼 틀어 말린 모양)로 특이하다.불상은 약사여래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물건을 손에 쥐지 않는다. 수행자의 무소유를 강조한 것이다.이에 비해 보살상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의 국왕을 모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보살상에는 왕관(보관)과 영락이라고 하는 다양한 길이의 구슬장식과 장신구를 표현한다.귀고리와 팔찌, 발 찌를 한 보살도 볼 수 있다.보살상은 갖고 있는 물건으로 구별한다. 문수보살은 칼을 쥐고 있고 보현보살은 폐업경(불교경전)을 들고 있거나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관세음보살은 군지라는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대세지보살은 폐업경이나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는다.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은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보살로 이마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달을 상징하는 하얀 원이 묘사된다.잘 알다시피 지장보살은 육환장과 투명한 보주를 들고 있다. 금오산 법성사 마당에 가면 큰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 상을 만날 수 있다.구미에는 규모가 아주 큰 불상 2구가 거대한 암벽에 조각돼 있다.하나는 보물 제1122호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고 또 하나는 보물 제490호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다.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라고 불렸다.하지만 형태 등을 종합해 본 결과 보살의 모습이 아닌 부처의 모습이라고 판단해 문화재청이 2010년 마애여래입상이라고 명칭을 변경했다.이처럼 천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윤곽은 흐릿해지고 일부는 손상돼 당초 만든이의 생각과는 다른 이름이 붙는 경우도 생겨났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인동에서 선산으로 가는 길목 황상동 속칭 돌고개(석현)라는 고갯길 왼쪽, 산과 공장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산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선 큰 바위가 있다.신라의 영원한 통일을 기원하며 사방정토, 극락세계가 이 땅에 성취하길 위해 만든 석불상으로 보물 제1122호인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돌부처는 높이가 7.2m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바위의 면이 고르지 못하고 곳곳에 균열과 부서짐이 심하지만 보존상태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인근에는 금강선원이라는 절과 석불상 정리 괴장에서 나온 작은 파편들이 있어 예전 이곳에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마여여래입상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육계가 있고 잘 정제된 듯한 얼굴의 이목구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턱 끝까지 내려온 큰 귀다.대체로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의 이 불상은 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있다. 왼손은 바닥이 안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밖을 향하게 해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인의 모양으로 보아 구품인, 즉 아미타여래에 가깝다.이에 비해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암벽 모서리에 조각돼 있다. 여래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다.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 코, 입 등도 원만 상으로 처리됐다. 귀는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처첨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이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은 아마도 경주인 듯하다. 신라시대와 통일신라 때 제작된 대부분의 마애불상이 수도인 경주로 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학자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물론 금오산 해발 800m에 있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도 큰 바위 모서리를 활용해 같은 방향을 응시하도록 만들었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에는 구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에서 파견된 한신이라는 장군이 어느 전쟁터에서 백제군에게 포위됐다.그런데 꿈에 보살이 희모시자(중국 항주의 승려회통에 기록, 아미타불을 말함)로 변신하고 나타나 도망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이에 한신 장군은 보살이 알려준 대로 작전을 수행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한신은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지만 생명의 은인이었던 희모시자, 즉 아미타불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 황상동 이곳 암석에 희모시자의 모습을 조각했다고 한다.현재 균열에 따라 보호각을 씌워 둔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더 이상의 균열을 방지하고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정밀안전진단과 데이터 분석연구를 진행하고 있다.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나, 금오산 마애여래입상과 같은 석불상은 절벽이나 바위의 면을 조각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동할 수 없다.대부분 조성될 때 그 모습, 그 위치에 있어 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의 전파 경로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금오산 약사암…기암괴석 험지의 맨 꼭대기, 가장 뛰어난 절경에 내려앉은 ‘천년고찰’

남숭산이라 불린 금오산은 통일신라 이후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기 전까지 수많은 절이 곳곳에 들어서며 불교의 꽃을 피웠다.금오산은 동쪽에서 바라다보면 큰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와불 형태가 도드라져 보인다.평지지형에는 제법 큰 규모의 절이 지어지고, 산록에는 그 지형에 맞게 아담한 절이 들어섰다. 또 깎아지른 절벽 끝이나 커다란 바위를 등지고 자리한 절들도 생겨났다.신령한 영산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1천여m 가까운 산 정상에도 절은 자리했다. 금오산 정상에는 약사전과 보봉사, 동양사가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보봉사와 동양사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신라시대 창건했다는 약사전만 약사암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불교의 성지 금오산시절을 깜빡한 추위가 살을 에이게 하는 날. 금오산(976.5m)에는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평일 때 이른 강추위에도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에는 많은 등산객이 몰려 사진찍기에 바쁘다.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선굴이 있다. 고려 때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곳인데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도선굴 아래에 대혈사라든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일선지에는 ‘대혈사는 금오산 북쪽에 있다. 임진란 후에 중창하였고, 서원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또 ‘야은 선생이 항상 대혈사 인근 누각 위에 거치하였고, 금산에서 대나무를 손수 옮겨 여기에 심었다. 고을 사람들이 대나무 베는 것을 금하여, 지금도 오히려 짙푸르고 무성한데, 이름을 야은죽이라 한다’고 했다.이와 관련된 야은 길재의 시가 전한다.대나무 빛은 봄가을로 절의를 굳게 하고(竹色春秋堅節義)/ 흐르는 시내물은 밤낮으로 탐욕을 씻어주네(溪流日夜洗貪婪)/ 마음의 근원이 깨끗하여 티끌이 없으니(心源瑩淨無塵滓)/ 이로써 바야흐로 도리의 참맛을 알 수 있다네(從此方知道味甘)오래된 절과 영남 성리학의 문을 연 유학자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다.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멀리서 바라다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산이라는 이야기다.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해 오래 산을 탄 등산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산이다.그래서 일부 구간의 이름은 일명 ‘할딱고개’이기도 하다. 대혜폭포에서 수백m 정도 거리인데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경사가 급하긴 마찬가지다.또 이를 통과해도 8부 능선에 있는 철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철탑 인근은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안전시설을 설치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다.철탑을 지나면 평지가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다시 개축했다는 금오산성의 내성을 지날 때까지는 평지다.하지만 정상을 500여m 남겨두고 다시 급경사가 이어진다.할딱고개와 철탑까지는 그래도 잠시 쉬면서 뒤돌아서 멀리 구미시내와 낙동강을 조망하는 재미라도 있었지만 정상을 앞둔 이곳은 주변을 둘러봐도 참나무뿐이다. 눈을 시원하게 하는 그 무엇도 없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면 사고가 날 수 있는 곳이 금오산이다.정상 부근 작은 돌을 쌓아올려 만든 탑이 멀리 보인다. 한 노인이 사연을 담아 탑을 쌓았다는 이곳은 보봉, 백운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 보봉사가 있었다고 한다.금오산 정상은 현월봉(976.5m)이다. 초승달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에서 따 온 이름이라고 한다. 각오는 했지만 추위가 만만찮다. 산을 오르며 느끼지 못했던 칼바람에 등산객들이 우왕좌왕한다.◆성속의 경계에 있는 약사암현월봉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약사봉이다. 그 아래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약사암이 자리를 하고 있다.정상에서 내려와 동쪽을 향하면 ‘동국제일문’이라고 쓴 약사암 일주문이 나온다.일주문은 앞으로의 공간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상징문이다. 일주문 너머는 부처님의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약사암 일주문을 지나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길 양옆으로 막아선 엄청나게 큰 바위틈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내가 서 있는 쪽은 음지이고, 겨울이고, 어둠이고, 세속적인 데 비해 바위 아래로 드러난 모습은 양지이고, 여름이고, 광명이고 성스럽다.경북 8경으로 꼽히는 금오산에서도 가장 절경인 곳, 그곳에 약사암이 있다.인공으로 만든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서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을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은 전각 뒤로 마치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절벽, 약사봉은 그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인 약사암은 신라시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초년에 천하 비경을 찾아 이 바위 아래에서 참선할 때 하늘의 선녀가 하루 한 끼의 주먹밥을 내려주어 하루하루 요기를 했고 약사여래가 내려와 시중을 들어줘 사바와 번뇌에서 벗어나 고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약사암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학자며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의 일선지와 정조 23년(1799년)에 간행된 범우고에도 남아있다.일선지에 ‘약사전은 약사봉 아래에 있다. 돌 벼랑이 높이 솟은 곳에 바위틈을 타고 작은 암자를 지었다. 나무다리를 건너 절벽을 붙잡고 들어가는데 그 아래가 만 길이나 아득히 깊어서 내려 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또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 3리에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의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삼형제 불상 중 하나 이곳에계단을 내려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오른편에 삼성각이, 왼편에 본당인 약사전이 있다. 이는 모두 근세에 조성한 것이다.마당이라고 하지만 그 아래에 종무소 등 다른 건물이 이 마당을 지붕으로 삼고 있다.약사전은 1985년에 중수한 법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약사전에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이 있다.약사전 옆에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조여래좌상은 약사전에 모신 불상이며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을 두텁게 입혔으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새로 금을 입히기 전인 1960년대 사진을 통해 원만한 얼굴모습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우상학의 약사암 중수기(1935년)에는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구, 삼형제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그 중 1구는 김천 직지사에 다른 1구는 김천 증산면 수도암에 봉안했다고 한다.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수도암 석불좌상은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과 김천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보물 제319호)과 함께 3형제라고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두 석불이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유래를 밝히고 있다.또 다른 이야기도 약사전 중수기에 전한다. 석불을 모시게 된 배경과 약사전을 중수하게 된 이유다.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인 박유술이 불상을 만들고 금오산에 와서 석봉대 아래 쉬고 있을 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고 하며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우상학이 중수했다고 한다.약사전 석조여래좌상 옆으로는 일광, 월광보살이 협시돼 있으며 후불탱, 신중탱, 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만길 낭떠러지, 어마어마한 약사봉 절벽을 붙잡고선 약사암약사전을 뒤로하고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과 칠곡이 훤하게 보인다.약사전 바로 아래는 최현이 일선지에서 지적했듯이 천길 아니 만길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 너머로 종각이 있는데 출렁다리에 의지해 건너야 한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안전을 우려해 출렁다리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또 약사전 아래로는 좁은 철 구조물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는 동쪽 암벽에서 용출하는 약수를 받기 위해 만든 다리다. 이 약수가 나온다는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최근에는 이곳의 주지인 대혜스님이 국내 최소 크기의 마애불을 발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대혜스님은 약사암에서 멀지 않은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 인근에서 부처님이 좌선하는 모습을 새긴 손바닥만 한 마애불을 발견했다.그는 “지난 추석쯤 우연히 바위 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발견했는데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방법이나 바위에 새겨진 글들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대혜스님은 이 마애불을 보호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약사암 난간 끝에서 내려다보는 공간의 아름다움은 마침내 낙동강과 그 평야를 끌어들여 눈앞에 펼쳐지게 하고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사자암 절벽과 문수사…반은 동굴에 반은 목조건물 ‘반쪽짜리 법당’ 재미난 이름 차 한 잔 건네며 방문객 반겨

우리가 늘 보거나 상상하는 절의 모습은 이렇다.아름드리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싼 넓은 산중에 물로 씻어낸 듯 깔끔한 돌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화강석으로 만든 탑과 석등을 자리에 맞게 배치한 모습이다.또 그 소리는 어떤가. 가끔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에 몸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는 풍경소리, 그리고 간간이 절 옆을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 정도일 것이다.아마도 이런 모습이 일반적인 절,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한 사찰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청량산 중턱에 이 같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절이 있다.◆납석사의 오랜 흔적 남아이곳에 있는 문수사는 꽃과 음악이 있는 서정적인 절이다. 임진왜란 당시 당진현감인 정방준의 처 초계 변씨의 슬픈 전설이 서린 도개면 신곡리 문암산을 정면으로 보고 구불구불 농로를 따라간 곳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주차장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청량산이다. 청량산 중턱에 문수사가 있다. 문수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절이다.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데 현재의 절은 1948년 창건했다고 한다. 절터 곳곳에 널린 석탑 부재 등으로 미뤄 이곳에 오래전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기록에도 이곳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선산부사를 지낸 인재 최현은 일선지 불우편 ‘납석사조’에 ‘납석사는 신곡 문암 북쪽에 있다. 절 뒤에 석굴이 있는데 방 몇 칸이 들어갈 정도이다’라고 적었다.일선지가 지목한 위치와 일치하고 탑신부와 석탑 파편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납석사는 현재의 문수사와 부속 건물인 사자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에 남아 있는 각종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창건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의 불교 탄압에 따라 언제 폐사되고 또 몇 차례 중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이후 1865년(고종 2년) 도적(일부에서는 일제가 도굴했다고 한다)의 침입으로 폐사된 것을 1948년 혜봉선사가 재창건했다.절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혜봉선사가 재창건할 당시 꿈에 노승이 말을 타고 내려와 사기를 편람 했다고 한다.이를 해몽하니 노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며 승마는 사자라고 해서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청량산, 절의 이름을 문수사라 지었다고 한다.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불과 50여 년도 안 됐다.혜향화상이 1972년 다시 절을 중건하고 1993년부터 절에서 서북쪽으로 150m 올라간 곳에 사자암을 짓기 시작해 2000년 완공했다.사자암 건립 이후 ‘반쪽짜리 법당’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유적과 유물산 내 암자 중 사자암은 천연동굴 입구에 목조 건물을 덧댄 구조로 문경 대승사에서 옮겨온 불상과 4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 탱화 중에는 1873년(고종 10년) 제작된 산신탱화가 있는데 국내 남겨진 산신 그림 중 비교적 오래된 유물에 속한다.문수사에는 2006년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78호로 지정된 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경전은 한국의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문수사에 있는 묘법연화경은 서체와 판식, 도각 등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고산 화엄사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간행연도가 1477년(성종 8년)으로 확실하고 완질본이어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또 문수사 극락보전 옆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인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 상은 통일신라 때의 석조 불상으로 높이가 82㎝로 작지만 전체적으로 신체 균형이 잘 잡혀 있다.하지만 머리부분이 부서지고 얼굴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윤곽을 알 수 없다.불신과 대좌와 광배가 모두 같은 돌에 조각된 보살상으로 양감 있는 어깨와 허리는 가늘게 표현하고 가슴은 풍만하고 결가부좌한 하반신은 다소 좁게 표현했다.전문가들은 단아한 형태미와 특징적인 광배 등에서 당대 일급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 균형잡힌 신체의 비례나 섬세한 조각수법 등 여러 가지 특징으로 살펴볼 때 통일신라 말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국화 향기와 선율로 가득한 문수사문수사 입구부터 가을의 고즈넉함을 알리는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한 산중을 울린다. 일주문은 없다. 청량산 정상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가을 하늘과 맞닿아 있다.문수사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절이다. 절 식구들의 바지런함이 절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을 낙엽이 산중 곳곳에 쌓여가는데도 절 마당에는 낙엽 하나 찾아볼 수 없다.본전인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은 비탈면인데 각종 조경수와 꽃으로 장엄했다. 계단을 올라 극락보전 앞에 다다르니 가을 국화가 한 가득이다. 주차장에서 걸어오는 동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도록 한 찬불가와 극락보전 앞 국화가 이 절의 성격을 말해준다.꽃향기와 음악의 선율이 어울리는 서정적인 절이다. 극락보전 옆에는 선산 궁기동 석불 상이 자리를 차지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형상은 그을리고 망가졌지만 자애로움과 당당함은 그대로이다.극락보전 뒤 비탈면에는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숲은 솔바람 길을 따라 사자암까지 이어진다. 극락보전 옆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석탑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설 때 어느 나무인지 모를 소나무에서 솔방울 하나가 떨어져 산사의 적막을 깨는 댕그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온다.잔잔한 찬불가가 내리깔린 솔바람 길에 들어서니 날은 서지 않았지만 제법 찬 바람이 솔숲을 스친다. 찬불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조금씩 계단을 오르니 마음이 가라앉으며 상념이 사라진다.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일을 다음에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산비탈을 따라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자극적이지 않은 솔 향기를 뿜어낸다.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랐을까. 여유롭게 걸은 탓에 그리 힘들지 않다. 아니 찬불가가 주는 편안함에 힘들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계단 옆 수줍게 핀 들국화의 모습에 취해 한발 한발 오르다 보니 어느덧 큰 절벽에 몸을 기댄 규모가 꽤 큰 암자가 나온다.문수사의 보물, 사자암이다. 2층으로 된 사자암 옆으로 산신각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사자암이란 암자가 기대선 절벽이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라는 데 어느 모습이 사자의 모습인지 사실 분간하긴 어렵다. 하지만 청량산 중턱 널찍하게 펼쳐진 절벽은 그 자체로 위엄이다.옛 납석사 방 몇 칸이 들어설 정도의 석굴이 있었다는 사자암은 2층 목조건물이다. 사자암은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고 절벽에 몸을 붙이고 있다.1층은 참선방, 2층은 삼존불을 모신 법당이다. 산존불은 바깥으로 드러난 목조 건물의 안쪽인 동굴에 있다. 법당의 절반이 동굴, 나머지 절반은 목조건물이어서 ‘반쪽짜리 법당’이라고 불린다.참선방에는 항상 차가 준비돼 있다. 사자암을 찾는 이면 누구나 들러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절벽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사자암에서 바라보는 전경을 빼놓을 수 없다. 늙어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멀리 도개 신곡리의 누런 황금 들판이 보인다.사자암 바로 아래에는 데크로 만든 무대와 객석이 있다. 매달 보름을 전후해 이곳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가끔 와인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한다.그래서 문수사는 꽃과 차 향기, 선율이 있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절이다. 땡그랭, 땡그랭 풍경소리가 산중에 울리는 음악 소리에 박자를 맞춘다. 사자암을 둘러보고 차향에 취해 문수사를 내려오는 길, 미련이 나를 붙잡고 자꾸 뒤돌아서게 한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천생산 천룡사…엎은 함지박처럼 납작한 얼굴의 산, 두 눈 부릅뜬 용 품고 있어 든든하네

구미시 인동동과 산동면, 장천면에 걸쳐 솟아있는 천생산.천생산은 하늘이 내린 산이라고 불린다.비록 정상이 406m로 야트막하지만 낙동강 너머 마주하는 금오산과 함께 구미를 대표하는 산이다.낙동강 건너 서쪽에서 바라보면 정상이 한 일(―)자로 마치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방티산이라고도 부른다.또는 병풍이 둘러쳐진 것 같다고 병풍산, 미덕암(미득암이라고도 부른다)의 모습이 사자가 하늘을 보고 포효하는 모습과 같아 앙천산이라고도 불린다.다양한 이름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이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그리 오래지 않은 작은 사찰이 있다.◆하늘이 내린 산 천생산하늘이 내렸다는 천생산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천연요새다.조선시대 인동부수와 학자들이 편찬했다는 옥산지(옥산은 인동의 옛 이름이다)에는 ‘천생산은 고을 동쪽 8리 거리에 있는데 삼면이 석벽을 깎아 세워 천연의 성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마치 하늘이 만든 것 같은 까닭으로 천생산이라 이름 불렀다’라는 글귀가 있다.이 산 정상에는 아직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 박혁거세가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특히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금오산에 있는 금오산성과 함께 경상도 산성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인동부읍지에는 임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크게 격파하고 이들의 병기인 조총과 창, 화살, 진천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건을 얻었다고 전한다.홍의장군 곽재우가 산성에 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왜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흰말 등에 쌀을 쏟아 부었다는 미덕암(미득암)과 스님들과 박영 장군의 이야기가 전하는 땡그랑 바위는 천생산이 간직한 오랜 역사다. ◆천생산 중턱 오래지 않은 사찰 천룡사그런데 미덕암 아래 산 중턱에 오래되진 않았지만 범상치 않은 작은 사찰 하나가 있다.천룡사(경북도 구미시 천생산길 200)다. 1951년 이춘백 화상이 법당을 세우고 창건했다.구미지역 조계종단의 대부분 사찰이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 데 비해 천룡사는 제9교구 본사인 팔공산 동화사의 말사이다.사찰을 지을 당시 경내에서 고려시대의 와당과 탑신, 축대 등의 유물이 발견됐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에 약사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그래서 고려 중기까지 이곳에 대규모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커다란 두 눈 부릅뜬 용 한 마리, 천룡사 지킴이가을 어느 날, 선선한 바람에 몸도 마음도 가볍다. 오후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산을 오른다.천생산 삼림욕장 옆 주차장에 주차한 후 조금은 거칠지만 포장된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길을 오른다.길옆 나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노랗고 빨갛게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멀리 천생산 정상, 미덕암이 낙동강 쪽으로 고개를 쭉 빼고 내려다본다.미덕암을 길잡이 삼아 조금 더 길을 오르니 오른편으로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아마도 주차장 용도로 사용하는 곳인가 보다. 그곳을 지나니 큰 눈을 부릅뜨고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양각된 용이 객을 맞는다. 음지쪽에 있어서인지 온몸이 이끼로 물든 용은 입 안 가득 여의주를 물고 있다.보는 방향에 따라 용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건 착각일까. 너무나 생생한 표정에 살아있는 이끼로 치장한 탓에 금방이라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기상이다.용은 절대 권력자를 표현하는 상징이다. 왕과 관련된 용포와 용안, 용상 등이 그것. 그런데 불교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용이다. 용은 고대 인도의 사신(蛇神) 숭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우리나라에는 대개 통일신라를 전후해 불교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사찰의 창건과 관련된 것이 많은데 황룡사, 구룡사 등과 같이 용을 사찰의 이름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물론 천룡사도 마찬가지다.용은 불교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여겼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왕, 용신은 팔부중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는 반신반사이다. 팔부중이란 천, 용,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를 말하는데 신앙적인 면에서 호불신이나 호법신들이다.또 불교에서의 용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중과 불법, 도량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사찰 곳곳뿐만 아니라 탱화 등에서 용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찰 입구는 물론 법당 전면 기둥과 처마 밑, 법당 안의 닫집, 천장, 기둥, 벽, 그리고 계단 소맷돌 등에서도 볼 수 있다.법당 기와 암막새에 용 문양을 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는 법당을 상서롭게 유지하고 건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다. 용은 이외에도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목조건물인 사찰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 의미로 사찰 곳곳에 용을 배치했다는 해석도 있다.아무튼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을 불법의 수호자로 만든 것은 불자들의 종교적 열망이었을 것이다. 이런 열망이 사찰을 더욱 청정하고 신비롭게 만들고 있다.천룡사에는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입구의 용 외에 삼성각 오르는 계단 앞에도 장난스럽게 생긴 용이 있다. 여의주를 물진 않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새운 채 크게 벌리고 있다. 그리고 불자들이나 방문객들이 던진 동전 몇 닢을 넙쭉넙쭉 받아먹는다. ◆마애미륵불상과 큰 규모의 천생미륵대불천룡사를 지키고 있는 용 바위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 보면 햇살을 등지고 앉은 마애미륵불상을 만난다. 마애미륵불은 자연 암벽을 갈거나 깎아서 만든 불상으로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고 56억7천만 년이 지난 후 사바세계에 출현해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다.1989년에 천룡사 대웅전 아래 큰 암벽에 조각한 높이 2.7m의 마애미륵불상은 기도하는 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 사찰을 지키는 쌍사자상을 지나면 넓은 마당과 종무소가 나온다.넓은 마당에서 천생산 정상을 올려다보면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큰 규모의 건물이 있다. 2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인데 이 건물이 이춘백 화상이 이곳에 있던 기와집을 걷어내고 지은 대웅전이다. 절집 같지 않은 전각이다.종무소를 지나 국화향기를 맡으며 대웅전으로 향하다 보면 엄청난 규모의 대불을 만난다. 1992년 신도들의 도움으로 화강석으로 만든 15m 높이의 천생미륵대불이다. 그 높이만큼이나 장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이곳을 지나 오른쪽으로 향하면 극락전과 삼성각이 나온다. 전각의 모습을 갖춘 극락전과 삼성각의 처마는 한복의 아름다운 선 만큼이나 유려하고 아름답다.또 새로 칠한 듯 단청이 곱다. 극락전에서 조금 떨어져 삼성각을 올려다보니 파란색 하늘이 감싸 안은 천생산 정상 미덕암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주륵사 폐탑과 구미의 석탑…1천 년 넘은 폐탑지 큰 옥개석만 널부러져 어떤 비밀 안고 잠들었나

탑은 부처의 유골이나 유품 등을 모셔 두고 공양하기 위해 높게 만든 건조물이다.초기에는 부처의 사리를 묻고 돌이나 흙을 쌓아 만든 봉분 형태였다. 탑의 형태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인도의 탑(탑파, 인도어로 스투파)이 중국으로 전파된 후이다.중국은 황제가 정사를 보던 정전과 같은 궁중 건물을 명당 건축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앞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고 했는데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인들 역시 황궁과 같이 탑을 신성시했다.이런 탑의 형태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탑 형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대웅전 앞이나 사찰의 중심에 탑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탑은 대부분 석탑이다.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목탑은 조선시대 건립된 법주사 팔상전 하나다. 흙으로 만든 전탑은 안동 신세동의 7층 전탑 등 5기가 남아 있다.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석탑은 백제 후기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탑이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고려중기 신륵사 다층 전탑, 경천사지 10층 석탑 등이 대표적인 탑으로 꼽힌다. ◆탑, 형태로 조성연대 구분오래된 탑 대부분은 홀수 층이다. 이유는 뭘까. 이는 주역과 관련이 깊다.중국 문화에서 세로는 하늘과 홀수·남자, 가로는 땅과 짝수·여자를 일컫는데 탑을 조성할 때도 이를 적용했다는 것이다.탑은 세로로 3·5·7·9·13 등과 같이 홀수로, 가로는 4각·8각·12각형 등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 원칙이 적용됐다.이 같은 원칙은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까지 탑을 제작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단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처럼 짝수인 경우도 있다. 이는 10이 주역에서 온전한 수를 나타내는 수이며, 고려말 원의 간섭기에 만들어져서라고 학계는 해석한다.또 탑은 그 모양을 보면 건립시기를 알 수 있다.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탑을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탑은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기단의 면석이 3개, 탱주가 2개였다는 점이다.또 옥개석은 한옥구조의 화려함을 모방해 옥개석 받침이 5개이다. 옥개석 받침은 건립 시기를 알아볼 수 있는 결정적 요소로 고려와 조선시대 옮겨오면서 그 숫자가 4개, 3개, 2개로 줄어든다.아름다운 탑은 어떤 모양일까.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눈으로 봐서 시원하고 비율과 비례가 잘 맞는 탑이다. 흔히들 석가탑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눈으로 봐서 시원하면서도 진중한 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들어서 탑의 형태는 자율적인 양식이 강조된다. 옥개석 받침도 5개에서 4개로 줄고, 층수도 3층에서 벗어나 다층 구조로 변한다. 모양은 통일신라의 석탑처럼 날씬한 것이 특징이다.조선시대 들어서는 이 같은 원칙이 사라진다.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조정은 물론 백성의 관심이 줄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저것 섞인 듯한 그러면서도 무겁고 뚱뚱한 형태로 변한다.조선시대 석탑에 대해 자현스님은 ‘사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잘 차려진 한정식이 아닌 국밥처럼 여러 가지가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것”이라고 혹평했다.◆구미(선산)의 석탑그럼 구미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은 어느 것일까. 지역 향토사학자로 석탑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전정중 현일고 교사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탑 7곳을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소개한다.죽장사지 오층석탑(국보 제130호), 낙산동 삼층석탑(보물 제469호), 도리사 석탑(보물 제470호), 강락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주륵사지 석탑(문화재자료 제295호), 죽림사지 사층석탑, 도중동 사지 석탑 등이 그것이다.그는 도리사 석탑과 도중동 사지석탑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석탑의 건립 연대가 통일신라시대라고 추정했다.그러면서 구미(선산)지역도 신라문화의 중심인 경주지역처럼 불교관련 유적과 유물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거대하고 웅장한 7개 석탑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치적 종교적 지배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했다.◆폐탑만으로 그 규모 짐작할 수 있는 주륵사 폐탑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산 123번지 상주∼영천 간 고속도로 너머로 아주 오래된 폐사지가 있다.선선한 가을 바람을 따라 도개면 다항마을을 향하다 주륵사 폐탑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비포장길이 이어진다.이곳에서 450m 떨어진 곳에 1천여 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륵사 폐탑이 있다. 고속도로 박스를 지나 조금 평평한 곳에 주차하고 작은 하천을 건너 오르막을 오른다.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조금은 넓고 평평한 폐탑지가 있다. 1천 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 온 주륵사지 폐탑의 옥개석과 기단석 등이 널려 있다.폐탑지 주변엔 멧돼지들이 뛰어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 주변에 많은 묘소가 있는데 묘소에 사용된 석상 등이 주륵사지의 탑재와 기단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주륵사 폐탑은 현재 남아 있는 옥개석의 규모로 짐작할 수 있다. 폐탑 옥개석의 추녀 너비는 제1지붕 돌은 236㎝, 제1지붕 돌의 5단 받침의 최하 너비는 144㎝로 매우 큰 탑 축에 든다.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주륵사 석탑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못지않은 대규모의 석탑이었으며 3층이나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옥개석 받침이 5개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도 당대의 수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탑의 규모로 주륵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주륵사는 냉산을 마주한 청화산 중턱에 있다. 냉산에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아도화상이 건립한 도리사가 있다. 주륵사는 기록을 통해 흥망성쇠를 짐작할 수 있다.동국여지승람은 ‘주륵사는 냉산 서쪽에 있으니 고려 안진이 찬한 승 혜각비명이 있다’고 전하고 선산부사를 지낸 최현은 일선지에 ‘주륵사는 백마산(지금의 청화산) 아래 있으며, 고려 안진이 찬한 승 혜각비명이 있다.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지을 때 기와를 철훼하여 폐허가 되어 지금은 유지만 있다’고 기록했다.또 태종실록에는 ‘주륵사의 주산에 물에 솟아올라 모래가 무너지면서 절을 덮쳐 2명의 승려가 돌에 눌려 죽었다’고 한다.이처럼 주륵사는 여러 기록을 통해 실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 신라 불교 초전지며 성지인 구미에 건립된 후 고려 왕실의 불교 장려에 힘입어 큰 사찰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조선시대 억불숭유와 영남학파의 번성으로 움츠러들기 시작해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수리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최현이 선산 부사를 지낸 조선 중기에는 이미 폐찰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앞서 주륵사 폐탑은 남아 있는 석탑재, 특히 옥개석 받침돌의 크기로 미뤄 경주 석가탑과도 견줄 수 있는 큰 탑이라고 했다.제대로 보존됐더라면 신라불교 초전지인 구미지역의 자랑이 될 만하다.구미시는 기록에만 남아있는 주륵사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주륵사 탑을 복원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신라 이후 구미 불교의 변화…신라 불교문화 가장 먼저 자리잡은 곳 고구려 승려와 세력가 합심해 전했다네

‘조선의 인재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구미)에 있다.’구미가 조선시대 성리학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교문화가 가장 먼저 발달한 지역이다.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에서 불교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새로운 문화, 외래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지닌 곳이다.유교문화의 번성으로 불교문화의 흔적은 많이 사라졌지만 구미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종단 불교의 번성지로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미에는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있다.본보는 지난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의 불교 전파 과정과 신라시대 창건한 여러 사찰 및 문화재 등을 소개한 바 있다.이번에는 고려, 조선시대 구미지역 불교의 특성과 부침, 사찰 등을 둘러보는 기회를 갖는다.◆불교와 구미, 개략구미, 옛 선산은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연원지다. 이보다 앞서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고려시대에는 종단 불교의 번성지로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불교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처음 전파될 때 모례(毛禮)의 후견으로 처음 전래된 지역이었고, 승려 아도(阿道)에 의해 도리사가 세워졌다.이후 구미지역에는 도리사가 있는 도개면과 선산, 금오산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찰이 생겨나며 신라불교의 성지로 자리했다.고려시대는 대각국사 의천을 따르는 제자들이 입산한 천태종 육산문의 하나인 남숭산문 선봉사와 고려 말 해인사에 있던 실록을 한때 보관한 득익사, 화엄승 혜각이 하산했던 주륵사, 고려 후기 유가종의 미수가 출가하고 후에 미수의 제자들이 따라 머물렀던 원흥사, 고려 말 화엄승의 법손이 입산했던 수다사 등 중요 사찰이 있다.이에 비해 억불숭유 정책이 실시됐던 조선시대의 사찰은 주로 승병과 관련한 기록이 전한다.수다사와 대둔사는 사명대사가 의승을 결집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근대 들어서는 해운사와 봉죽사, 원각사, 금강사 등이 창건됐다.◆고려 이전의 구미 불교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은 구미시 도개면 도리사 일대이다.고구려 승려 아도가 이 지역 세력가인 모례의 후원을 받아 불교를 전하고 도리사를 창건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도리사조)고 전한다.여기에서 아도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전도승을, 모례는 전도승을 숨겨주고 거처까지 마련해준 후견인의 대명사로 추정된다.아마도 모례는 고구려 문물을 일찍 접하고 신라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당시 불교를 받아들일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왕실이었기 때문에 일선(선산)의 모례는 후견 세력으로 볼 수 있다.도리사 인근인 고아읍 봉한리 한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과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184호), 도리사 세존사리탑에서 발견한 금동육각사리함 등은 도리사 일대가 신라와 통일신라 시대를 거치며 불교 성지로 자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려시대 구미 불교불교가 현재와 같이 종단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불교 학자들은 5교9산이 신라시대에 형성됐다고 하나 중국에서처럼 뚜렷한 특징을 갖추지 못했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려시대에 와서야 정착됐다는 것이 흥왕사 대각국사묘지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 대각국사묘지에는 계울종과 법상종, 열반종, 법성종, 원융종, 선적종(선종) 등 6종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여기에 대각국사가 개성 영통사에서 천태종을 열면서 사실상 7종이 성립됐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 견해다.이곳에 대각국사비가 있는 데 같은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가 구미 금오산 남쪽 기슭 선봉사(선봉선원)에도 남아 있다.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옛 선봉사는 대각국사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규모가 매우 큰 도량으로 현 대각국사비가 서 있는 곳보다 아래쪽에 있었다고 한다.이곳은 우리나라 천태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성지로 대각국사가 머물렀던 시기에 인근에 수백 개의 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금오산은 중국 5대 산 가운데 하나인 숭산(남숭산)으로 불리기도 했다.최현이 쓴 일선지에는 보봉사와 대혈사, 동양사, 약사전, 전종사, 보제사 등이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한 발굴조사에서 진남사 등 18곳의 제법 규모가 큰 사찰 흔적이 나타나는 등 금오산은 계곡마다 물소리와 목탁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신라때 가장 먼저 불교가 전해졌던 도개면 도리사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불교문화는 선산을 거쳐 구미에서 가장 높고 신성시됐던 금오산으로 성지를 점점 넓혀갔던 것으로 추정된다.대각국사가 입적(1101년)하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가 인종 15년(1137년) 순선과 교웅, 유청 등 제자들이 뜻을 모아 남숭산(금오산) 선봉사에 대각국사비를 세우고 다시 산문을 결집했다.이 대각국사비는 선봉사가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에 의해 전소된 후 자취를 감췄다가 1922년 유장렬이라는 사람이 선몽을 꾸고 이곳을 찾아 발견했다고 한다.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임존이 짓고 덕린이 글씨를 썼다고 전하는데 높이만도 3m를 훌쩍 넘는 고승 탑기 중 가장 오래된 비이다.비문의 이름은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으로 이름 옆으로 봉황과 구름 무늬가 있다.내용은 앞면에는 대각국사의 생애와 송나라 유학을 통한 구법 활동, 천태종 확립 과정을 담았다. 뒷면에는 천태종의 개창과 비를 건립한 과정, 대각국사의 천태종 주요 제자와 문도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앞서 대각국사 의천의 비가 개성 영통사(화엄종)에도 있다고 했는데 이 비에는 제자 명단에 화엄종 승려들만 기록돼 있다고 한다.선봉선원을 지키고 있는 대안 스님은 “개성 영통사와 남숭산 선봉사 대각국사비는 다른 비와는 달리 해석으로 만든 비석이다”며 “해주 어디 바다의 흙이 굳어 만들어진 것으로 남숭산 대각국사비는 바다에서 만든 후 서해를 따라 남해로 온 후 낙동강을 따라 이곳 남숭산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선봉사에 비해 구미시 도개면에 있는 원흥사는 법상종의 또 다른 이름인 유가종과 관련된 사찰이다.고려 후기 유가종단이 배출한 국사 3명 가운데 한 고승인 미수의 비문에 따르면 원흥사는 미수가 출가하고 그의 첫째 제자가 머물렀던 사찰이라고 한다.이 시기 원흥사는 유가종단의 중요 사찰인 중앙 지역의 숭교사, 중부권 지역의 장의사·중흥사·흥덕사·법주사, 남부권 지역의 유가사·동화사·불국사·기림사·남백월사 등을 이어주는 낙동강 수계상의 사찰로 요충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구미시 도개면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원흥사는 이규보의 시에도 등장한다. 그가 남쪽을 유람하고 남긴 51수의 시 가운데 12수가 원흥사와 관련이 깊다.이규보의 시에 나타난 원흥사는 낙동강에 접해 있고 많은 돛배가 모여들던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됐다.원흥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주초석과 기와 파편, 탑 받침돌 등이 널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대부분 논이나 밭이 됐다.이 밖에 백마산(지금의 청화산) 아래 주륵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고려시대 학자 안진이 지은 화엄승 혜각의 비문이 있었다고 전한다.비문을 적은 안진이 충선왕 5년인 1313년에 과거에 급제한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비문이 새겨진 것은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비문에 혜각이 국사와 왕사에 추증된 것으로 미뤄 주륵사는 국사나 왕사의 제자나 문도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따라서 이 주륵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이 번성했을 것이다. 이를 짐작게 하는 것이 국내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주륵사 폐 탑이다.번성했던 주륵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지으면서 각종 부자재를 가져가면서 폐사되고 오늘날 폐 탑만이 그 자리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조선시대 구미 불교앞서 구미가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연원지라고 소개한 바 있다. 물론 조선은 불교의 폐단을 막는다며 억불숭유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그 결과 태종 6년(1406년)에 242곳으로 전국의 사찰 수를 줄이더니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36곳만 남기고 모두 폐사했다.영남학파의 연원지인 구미에서의 불교 위상이 어떠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폐 탑의 크기로 미뤄 신라시대 최대 규모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백마산 주륵사는 부사 이길배가 남관을 짓기 위해 가져가고 인근 지방 유력자와 마을 주민들도 기와는 물론 비의 받침돌도 가져갔다.하지만 조정의 억압 속에서도 몇몇 사찰과 불교문화는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훼철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했다.호조판서를 지낸 조선전기 학자 김수온이 쓴 ‘수다사상전기’에 따르면 화엄승통 화옹과 그의 제자들인 해유와 성관, 학의 등이 수다사에 머물렀다. 학의는 수다사에 장년춘추수륙지보를 설치하고 효령대군의 지원도 받았다.수다사는 대둔사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1만여 승려가 모여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던 곳이다.또 조선 중기 문신으로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인재 최현이 쓴 일선지에 따르면 죽장사, 미봉사, 수다사, 대둔사, 납석사, 접성사, 보봉사, 동양사, 약사전, 도리사, 금당암, 숭암사, 백운암, 문수사, 석수암, 중애사 등이 그가 선산부사로 있을 당시까지 폐사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