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48) 김부대왕 (상) 항복이냐 항전이냐

신라 최후의 왕 56대 경순왕은 삼국유사에서 그의 이름을 빌려 김부대왕으로 쓰였다. 김부대왕은 55대 경애왕과 이종사촌 간이다. 경애왕과 경순왕의 어머니가 모두 헌강왕의 딸이기 때문이다. 신라 천 년의 종말을 가져온 후손들인 셈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은 촉망받는 화랑으로 헌강왕의 맏사위였다. 경애왕의 아버지 신덕왕 또한 헌강왕의 둘째 사위였다.경순왕은 자신을 왕으로 앉혀준 후백제 견훤을 배신하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927년 왕위에 올라 8년째인 935년 일이다.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는 후백제 견훤은 이미 그의 아들들에게 유폐되어 있다가 도망해 고려 왕건에 의탁하고 있었다. 또 고려는 후백제가 지배하던 웅진과 운주 등 충남지역은 물론 인접한 경산, 영천지역까지 빼앗아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신라는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의 침략과 남하하는 고려의 세력에 버티기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신라 궁성에서는 끝까지 전쟁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연일 지루하게 열렸다. 결국 경순왕은 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도모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삼국유사: 김부대왕제56대 김부대왕은 시호가 경순이다. 천성 2년은 정해년(927)인데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울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서 구해주라 하였다.이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라벌로 들이닥쳤다. 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다. 견훤은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다음해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술자리가 무르익자 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라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와 태조도 눈물 흘렸다.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하는 말이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청태 2년은 을미년(935)인데 10월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것이 되고, 나라가 약해져 이제 더는 무엇으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여러 신하가 나라를 태조에게 맡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신하들은 가부 간의 결정을 내리느라 의견이 분분해 마지않았다.태자가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렸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1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왕은 “위태롭기가 이 같으니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면서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로 갖추어 태조에게 항복하겠노라 전하였다.태자는 크게 울며 왕에게 사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법명은 범공이었다. 나중에 법수사와 해운사에 머물렀다고 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망한 나라 궁성 지키는 사천왕경애왕과 이종사촌이었던 김부는 적군인 후백제 견훤의 추대로 왕좌에 앉았지만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애왕의 형인 경명왕 때부터 신라는 고려에 의존하며 급속하게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급기야 경애왕 8년에는 후백제로부터 왕과 궁인들까지 잡혀 죽임을 당해 실질적인 나라의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그러나 견훤이 강력하게 세력을 키워 성장하는 고려를 상대하면서 서라벌만 접수한 신라까지 통치할 힘이 없었다. 신라를 친고려 세력에서 후백제를 지원하는 세력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그러나 성격이 급했던 견훤은 신라를 정복했지만 내치에 실패해 아들들에 의해 유폐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후백제의 내란은 결국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견훤이 아들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왕건에 투항하며 자신이 세우고, 아들이 다스리는 후백제 정복에 앞장섰다. 후백제를 평정한 고려 왕건은 느긋하게 기다리며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인접한 경산과 영천지역의 장수들까지 후백제와 고려에 투항하고, 후백제까지 평정한 고려는 세력이 크게 불어나며 안정화되었다. 반면 신라는 크게 위축된 영토와 함께 백성들도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경순왕은 이미 나라의 세력이 진한으로 출발할 당시보다 좁혀지며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까지 감소하자 최종적인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나라를 경영해 나갈 여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결국 935년 중요 대신들을 어전에 불러 의견을 물었다. “짐이 부덕하여 백성들이 헐벗고, 불안에 떨게 했다. 우리 힘으로 고려와 전쟁할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며 왕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태자가 떨치고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신라는 천 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의 뜻입니다.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를 덥석 바친다는 것은 치욕이요, 조상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며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태자의 동생과 젊은 장수 몇몇도 울분을 토하며 전쟁에 나설 뜻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 중신은 차마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경순왕은 무겁게 그러나 결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어차피 이 나라든 저 나라든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잘 먹고 잘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군주는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며 “전쟁을 하면 백성들은 또다시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고려에 항복하겠다”고 선언하고 시랑 김봉휴에게 고려에 항복의 문서를 전하라 명했다.경순왕은 이미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국력회복의 시기가 늦었음을 절감하고, 재위 4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치고 왕도를 방문했을 때 임해전에서 후하게 대접하며 항복의 의사를 타전했다. 그 때문에 왕건도 느긋하게 신라의 항복을 기다리며 고려를 안정적인 나라로 경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경순왕이 항복의 뜻을 밝히고 문서를 작성해 고려에 바치게 하자,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생활하다 생을 마감했다.월성을 지키던 사천왕들은 왕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궁성을 침범하는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한 그들은 그 어떤 소용돌이에도 나서지 않았다. 오로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궁성과 당시 왕의 안위를 보살필 뿐이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7) 경애왕

신라 55대 경애왕의 이름은 위응으로 경명왕의 동생이다. 형이 죽자 924년에 즉위해 927년 견훤의 침략으로 죽을 때까지 3년여의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다.경애왕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을 잃고, 고려에 의탁해 위축된 신라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후백제 견훤의 공격에 경애왕이 목숨을 잃었다. 신라는 경애왕의 죽음으로 실질적으로 망했다고 해석하는 사학자들의 목소리도 최근들어 높아지고 있다.포석정에서 견훤의 침략을 만나게 된 경애왕은 당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후백제가 침략해 올 당시는 음력 11월 엄동설한이요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점이라는 점 등을 들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제를 올리고 있었다는 해석이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경애왕이 천 년 신라 박씨 왕가에 종지부를 찍었고, 나라가 패망에 이르게 만든 왕이라는 비난의 노골적인 목소리도 그의 꼬리표로 이어지고 있다.◆삼국유사: 경애왕제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은 갑신년(924)인데 2월19일에 황룡사에 백좌를 설치하고 경전을 읽었으며, 이와 함께 신승 300명을 대접했다.대왕이 몸소 가서 향을 살라 정성을 바쳤다. 이 백좌가 선종과 교종이 함께 한 처음이라 한다.-경애왕의 죽음: 천성 2년은 정해년(927)인데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을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서 구해주라 하였다.이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울(경주)로 들이닥쳤다. 왕과 여러 부인 그리고 종친들은 포석정에서 흐드러지게 놀고 있었다. 군사가 코앞에 이르렀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엄벙덤벙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들은 후궁으로 달아나다 적에게 잡혔다.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엎드려 노비로라도 살려주길 구걸했고, 견훤은 군사를 풀어 공사간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다.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다. 첩들은 그 아랫것들에게 수난을 입었다.견훤은 왕의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경애왕의 시신이 서당에 안치되자 여러 신하가 모두 통곡해 마지않았다. 고려 태조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다음해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경순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라며 통탄했다.그러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들이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태조 또한 눈물 흘렸다. 왕건이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는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람을 시켜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보내주고, 여러 신하와 장수들에게 차등을 두어 선물을 내렸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애왕의 죽음과 월성의 전설경명왕이 즉위 7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들이 어려 동생이었던 위응이 경애왕으로 즉위했다. 경애왕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에 급급했다.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화되고 있던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애왕은 경명왕과 같은 외교정책을 택했다. 막무가내로 신라 영토를 침략해오는 견훤을 견제하면서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 친화전략을 필사적으로 펼쳤다.그러나 왕건도 고려를 건국한 초기에는 후백제 견훤이 북쪽 경계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내미는 악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경애왕은 안정적인 후삼국 구도를 지키기 위해 신라에 보다 친화적인 고려와 손을 잡는 전략을 택해야 했다.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택한 궁여지책이었다.그런데 왕건이 견훤의 조카 진호를 볼모로 받아들이고, 후백제와도 화해정책을 펼치자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밀리에 자객을 고려로 급파해 견훤의 조카 진호를 살해했다. 고려 군사세력에 살해된 것처럼 은근슬쩍 증거를 조작했다. 성격이 급한 견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고려를 원수로 간주하고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바로 고려와 전쟁을 선포하고 신라로 향하던 말머리의 상당한 전력을 고려 쪽으로 돌렸다.견훤은 “왕건이 내 조카 진호를 죽였다. 왕건이 나의 성의를 무시하고 후백제와 싸우자는 것이다. 내가 이를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왕건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경애왕의 대 고려 외교는 일단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고려와의 전쟁에 큰 이득을 내지 못하고 지루하게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견훤은 공격의 창을 다시 신라로 돌렸다. 견훤의 군사가 고을부를 점령하고 다시 금성 쪽으로 남하하는 속도를 높였다.경애왕은 다급해져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견훤의 신라에 대한 공격 속도는 너무 빨랐다. 왕건의 후원군사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경애왕이 신하들과 머물러 있던 포석정으로 몰려왔다.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들을 피난시키면서 자신도 정신없이 도망하는 신세가 됐다. 월성 안으로 들어서면 사천왕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당시 신라 천 년의 궁성 월성은 사천왕들이 각자 팔부중신들을 거느리고 사방을 지키고 있어 철옹성이었다. 어떠한 외부 침략도 월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이 신라의 세 가지 보물과 함께 동서남북 4대 성문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전설적인 힘을 가진 사천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궁성은 천 년 동안 외세의 침입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부적인 다툼으로 왕좌가 바뀌는 경우는 있어도 외세의 힘으로 월성이 함락된 일은 없었다.경애왕은 이러한 월성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월성까지만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믿고 월성으로 기를 쓰고 도망 길을 찾았다. 경애왕을 호위하던 무사들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견훤의 군사들에게 맥없이 쓰러졌다. 목숨으로 퇴로를 열던 호위 무사들은 경애왕의 길을 50보, 100보씩 거리를 확보하는데 그쳤다.경애왕의 퇴로를 확보하는 마지막 길에는 후궁 비려의 칼이 있었다. 비려는 무가의 여식이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려로 잠입해 견훤의 조카 호진의 목을 취한 자객 ‘무심’이 비려의 아비였다. 무심의 공을 높이 사 경애왕이 비려를 가까이에 두고 정을 주었던 것이다. 경애왕을 앞서 보내고 뒤를 지키려 검은 복면을 쓴 비려는 단도 수십여 개를 몸에 지니고 긴 칼을 양손에 들고 견훤의 사내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거친 사내들의 힘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장렬한 비려의 죽음에 대한 보람도 없이 경애왕은 월정교를 넘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들에게 잡혀 치욕의 죽음을 맞았다. 천 년 신라의 막이 그렇게 내렸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6) 경명왕

경명왕은 신라 하대 다시 시작된 박씨 왕가의 두 번째 왕이었다.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54대 왕좌에 올라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신라를 이끌었다.경명왕대에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또 궁예의 침략에도 상당히 많은 고을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다 왕건이 후고구려의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면서부터 경명왕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정책을 추진했다.결국 경명왕대에 신라는 경상도 지역 정도의 영토를 가진 열세의 나라로 전락했다. 내부 반란에 이어 지속되는 외세 침략을 감당하기에 신라의 국력은 이미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도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기는 등으로 향락에 빠져 신라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왕실 스스로 나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형세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경명왕이 죽기 1년 전에는 경산부 등의 신라 장군에게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정들이 역사 기록으로 전하기도 한다.◆삼국유사: 경명왕제54대 경명왕 때인 정명 5년은 무인년(918)인데 사천왕사의 벽화에 그려진 개가 짖었다. 3일간이나 경전을 읽어 겨우 물리쳤으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또 짖었다.7년은 경진년(920)인데 2월에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정원에 거꾸로 서 있기를 열흘간이나 했다.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에 그려진 개가 뜰로 나와 달리다가 벽으로 다시 들어갔다.◆경명왕경명왕 이름은 승영이고, 신덕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헌강왕의 둘째 딸 의성왕후다. 경명왕은 동생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는데 위응이 나중에 55대 경애왕으로 즉위했다.경명왕은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국력이 극심하게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경명왕 2년에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의 압박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경명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수교하며 후백제를 물리치는데 군사적 도움을 받으면서 고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이러한 경명왕의 국정 운영 방향에 따라 변경의 장군들은 고려에 앞다투어 항복해 신라의 국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심지어 경명왕은 경산부 양문 장군 등에게 고려에 항복하도록 명령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경명왕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매사냥을 즐겼다. 삼국유사 등에는 경명왕 때에 사천왕사에 있던 벽화 속의 개가 짖고, 흙으로 빚은 신상의 활줄이 끊어지고,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열흘 동안이나 거꾸로 서는 등의 천재지변과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반면 경명왕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시도하려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사망했다.역사서에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밀양 박씨 족보에 의하면 경명왕이 석씨와 결혼해 밀성대군, 고양대군, 속함대군, 죽성대군, 사벌대군, 완산대군, 강남대군, 월성대군 등 여덟 아들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명왕의 실정신라 53대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은 917년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즉위하면서 동생 박위응을 상대등으로,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화랑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며 나라 살림살이의 주체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그러나 즉위 2년에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어수선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후백제 견훤이 공격의 수위를 높여 대야성까지 함락되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와 신라의 영토는 결국 현재 경상도 정도의 영역으로 좁혀졌다.신라는 진성여왕 당시 위홍의 정치에 이어 김예겸의 손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면서 왕권은 사실상 실추되고 권위를 잃었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신덕왕이 왕좌에 오르기까지 왕위 선양도 모두 예겸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입김으로 진행되었다.경명왕은 이렇게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실권 회복에 나섰지만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고, 외세의 침략전쟁 등으로 나라는 저항의 힘을 잃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경명왕의 측근세력 위주 인사정책으로 왕실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세력들 대다수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 후백제나 고려에 투항해 신라의 국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자 경명왕은 고려를 나라로 인정하고 사신을 보내 친화정책을 도모했다. 왕건도 고려에 친화적인 신라와 손을 잡고 후백제 견훤을 손쉽게 견제하는 후삼국 형태가 갖추어졌다.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신라와 친화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신라의 지방세력들은 앞다투어 고려에 투항했다. 경명왕 말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도 시도했지만 성사하지는 못했다. 경명왕은 스스로 나라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고려에 의존하면서 경산부의 장군에게도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후삼국의 형태에서 신라 왕실은 군사력을 키워 백성의 안위를 지키고, 나라의 영토를 확립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명왕은 즉위 초기 1~2년을 지나면서 귀족들과 대신들의 힘을 규합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경명왕은 오히려 매사냥에 나서는 취미활동을 즐기는 등으로 나랏일을 돌보는데 태만했다.경명왕시대의 신라는 고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경명왕의 정책 중에도 가장 큰 실정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자연재해도 잇따라 일어났다. 당시 중국과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기온저하, 가뭄 등으로 기후가 변화하면서 자연재해로 독자적인 생산활동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실을 비롯한 왕경지역에서는 지방의 물자 유입이 필요했지만 지방세력들의 투항으로 이마저 어려웠다.경명왕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군사력을 잃은 것은 오래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백성의 민심 또한 흔들렸다. 신라가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경명왕은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압박해오자 고려 왕건에게 아찬 김률을 사신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왕건이 “신라에는 장육존상과 황룡사 구층목탑, 진평왕옥대 등의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옥대는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다. 김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돌아와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황룡사의 노승만이 이를 알고 전해주었다.경명왕은 옥대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재해와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보물의 힘이라는 것이라 믿고, 비밀리에 보물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명왕의 이러한 정치형태는 경애왕으로 이어져 신라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보다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락했다. 결국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종교적인 힘을 구하려다 견훤의 칼에 나라를 잃게 됐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5) 효공왕

신라 제52대 효공왕은 49대 헌강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왕궁 밖에서 자랐다. 진성여왕이 이를 전해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명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효공왕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7세까지 15년간 재위하는 동안 군주로서 제대로 기능을 펼쳐보지 못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고, 후반기에는 여자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아 신하가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신라의 조정은 어지러워지고 국력이 약해졌다.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일으키고, 침략해와 신라의 영토는 크게 위축되었다. 효공왕이 아들 없이 죽자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 즉위했다. 신덕왕은 박씨였지만 헌강왕의 딸과 결혼해, 경덕왕가의 사위라는 신분에 힘입어 국인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대에 이르러 많은 자연재해가 발생한 기록이 전한다. 5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승영과 위응을 낳아 54대와 55대 경명, 경애왕으로 오르게 함으로써 신라하대의 박씨왕가 세습을 재현했다. ◆삼국유사: 효공왕제52대 효공왕 때인 광화 15년은 임신년(912)인데 봉성사 바깥문의 동서쪽 21칸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된 을해년(915)에 영묘사 안쪽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였다. 또 3월에 서리가 다시 내리는가 하면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간이나 서로 싸웠다. ◆효공왕과 신덕왕-효공왕은 895년 진성여왕 9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897년 진성여왕 11년에 신라 제52대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12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경문왕 이후부터 왕권을 둘러싸고 두텁게 포진하고 있던 화랑세력들에 맞선 예겸 등의 세력들이 추대하는 형식이었다. 이찬 예겸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여 더욱 세력을 굳혔다. 왕실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알게 모르게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어린 효공왕은 실권을 휘두르지 못했다. 당시 견훤은 완산주에 터전을 잡고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신라 땅을 꾸준히 침략해 영토를 확보했다. 궁예도 이 시기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라 나라이름을 짓고 스스로 왕좌에 앉았다. 궁예 또한 남하해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신라의 입지는 전반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차제에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신하들이 궐기해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신라 53대 신덕왕은 8대 아달라왕 후손으로 박씨에 이름은 경휘다. 912년 효공왕에 이어 즉위해 917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아들들이 경명왕, 경애왕으로 대를 잇게 해 신라말기 박씨 왕가를 이루었다. 신덕왕은 엄연히 박씨 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예겸의 눈에 들어 예겸이 의자(義子)로 삼아 사위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잇도록 후견인의 역할을 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맏사위이자 화랑이었던 효종에 비해 왕위를 차지하기에는 입지가 한참 밀렸다. 그러나 의부였던 예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하는 덕을 누렸다. 신덕왕 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지진과 때아닌 서리, 해일 등의 자연재난이 다양하게 많이 발생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도 잦아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렸다. ◆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경주시 성건동 남천의 끝부분에 있었던 절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도화상이 과거칠불 중의 제5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 지명했던 곳이다. 선덕여왕 때에 두두리 라는 도깨비 무리가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한 곳으로 전한다. 영묘사는 사천왕사를 지었던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금당의 장육존상을 비롯해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양지의 솜씨였다. 영묘사 장육삼존불은 경덕왕이 개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이 절로 옮겨 안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지금 흥륜사터로 알려지며 사적 15호로 지정된 경주시 사정동 일대에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고,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최근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영묘사가 있던 곳으로 밝혀졌다. 신덕왕 때에 영묘사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소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삼국시대의 도래천년의 사직을 이어오던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효공왕과 신덕왕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효공왕이 12세에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 왕비로 간택하게 하며 실질적인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던 사람은 김예겸이다. 김예겸은 인물이 훤칠하게 잘생겼고, 키도 6장의 장신이었다.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람이 많아 지도자로 군림했다. 예겸은 진성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화랑들의 품에 안겨 실정을 쏟아내자 귀족들과 세력을 모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예겸은 헌강왕이 사냥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와 진성여왕에게 천거했다. 결국 진성여왕은 효공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예겸은 재빠르게 자신의 딸을 효공왕에게 추천해 왕비로 간택하게 했다. 이어 왕실에 자신의 세력을 깊숙하게 심어 화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효종 등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900년을 전후해 견훤과 궁예가 서쪽과 북쪽에서 나라를 세워 후백제, 후고구려라 칭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신라를 압박하는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효공왕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세력들은 하나 둘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투항하며 살길을 찾아 떠났다.이때 차기 왕으로 등극할 후보는 효종과 경휘가 유력했다. 효종은 화랑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났다. 거기에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경문왕가의 튼튼한 줄을 잡고 있었다. 경휘는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아달라왕의 후손이었다. 역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효종보다 명분으로 한겹 접어야 했다. 그러나 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義子)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다. 예겸은 전쟁이 산발적으로 신라 곳곳에서 일어나자 효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나라를 구할 사람은 화랑도뿐이다”며 효종을 부추겨 전쟁의 선봉에 나서게 했다. 결국 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효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 53대 왕은 김예겸의 의자인 박경휘가 물려받았다. 후삼국시대에 멸망의 길을 걷는 기울어가는 신라의 왕실은 효공왕에 이어 신덕왕까지 예겸의 입김으로 움직였다. 효공왕은 예겸의 사위이고, 신덕왕은 예겸의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예겸의 세상은 기울어가는 신라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3) 처용랑과 망해사

헌강왕은 신라 하대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해마다 풍년이 들고, 거리에는 노랫소리 그치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이는 헌강왕의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세력과 고승들을 동원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면서 백성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결실이 나타났던 덕이라는 평이다.헌강왕 당시에는 많은 신이 현신했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용왕을 만난 것과 남산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따라 춤춘 일, 금강령에서 북악의 산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며 경계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국운이 다함을 신들이 나타나 경고를 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상서로운 일로 잘못 해석하고 더욱 나태해 결국 나라가 망했다. 신들의 춤을 따라 추었던 헌강왕 시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제49대 헌강왕 때였다.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연주와 노랫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주었다.이때 대왕이 개운포로 놀이를 나갔다. 왕이 가마를 돌려 돌아오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들려는 참이었다. 홀연히 운무가 가득하여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곁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이는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만 풀리겠습니다”고 했다.이에 신하에게 명령해 용을 위해 가까운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운무가 걷히며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불린다. 동해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가마 앞에 나타나 덕을 칭송하면서 춤추고 곡을 연주했다.그 아들 하나는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정을 보좌했는데, 처용이라 불렀다. 왕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그의 마음을 붙잡아두고자 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역신이 이 여자에게 푹 빠져 사람으로 변장하고 밤에 그 집에 들어와 남몰래 함께 자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이르러 침상에서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대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세컨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이 때문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맞아들이려 했다.왕은 돌아온 다음, 영축산의 동쪽 기슭이 좋다 하여 절을 짓고 망해사라 불렀다. 신방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용을 위해 지은 것이다.또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이다.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는데 곁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왕만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서서 춤추니, 왕이 손수 따라 춤을 추며 형상으로 보여주었다.신의 이름을 상심이라고도 하므로 지금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면서 임금이 춘 상심 또는 임금이 춘 산신이라 한다. 신이 나타나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 본 따 기술자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대에 보여주었으므로 상심이라고도 하였다. 또는 상염무라 하는데 이는 곧 그 모양을 보고 지은 것이다.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옥도검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지백급간이라 불렀다.어법집에 “그때 산신이 춤을 추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노래한 것은 나라 안에 지혜롭게 다스리는 자들이 미리 알고 도망을 가 도읍이 무너질 것’을 이르는 바였다”고 한다.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고했던 것이다. 나라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탐락에 극심하게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하고 말았다.◆다시 쓰는 삼국유사: 헌강왕의 정치헌강왕은 15세에 즉위해 철이 없었다. 단지 성격이 호쾌하고 활달해 화랑들과 무예를 즐기며 사냥과 놀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는데 게을리했다.황성숲에서 사냥을 즐겼다.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의 미모에 빠져 그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여인이 그곳에 기거하게 했다. 이 여인이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나중에 52대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53대 신덕왕의 왕비가 되어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을 낳았다. 신덕왕이 박씨 성을 가졌으나 김씨 왕가의 사위로, 결국 김씨 왕의 세습이 이어진 셈이다.또 헌강왕이 배를 타고 개운포로 나들이를 갔다가 해적의 난을 만났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인도 상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헌강왕은 인도 상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어 개운포에 인도 상인들을 위한 전용 상가를 개설하게 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헌강왕은 또 틈만 나면 연회를 열어 신하들과 함께 즐기기를 좋아했다. 왕궁과 가까운 남산으로 나들이도 잦았다.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용포가 젖도록 술을 마시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하곤 했다.헌강왕이 20세를 맞아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오르고 흥이 지나치자 남산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이때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헌강왕을 숨어서 따르던 화랑들의 힘에 제압됐다.헌강왕은 유흥에 빠져 있었지만 주변에 실력이 뛰어난 화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버지 경문왕의 뜻에 따라 그들을 중용해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었다. 이어 경문왕 때부터 장려해왔던 국학을 발전시켜 6두품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해 신흥세력의 지지 또한 두텁게 받아 강한 국운을 이어갈 수 있었다.아버지 경문왕이 불교를 장려하며 고승들을 각 고을로 배치해 백성을 두루 교화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화랑과 6두품 신흥세력들을 고루 등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중앙집권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헌강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평성대한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복된 군주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10여 년에 이르는 문란한 정치로 훌륭한 기반도 급격하게 기울어 나라의 패망을 막을 수 없었다.나약했던 동생이 50대 정강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여동생 김만이 51대 진성여왕으로 등극해 상대등이었던 삼촌 위홍과 결혼했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화랑 두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다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듯 스스로 물러났다. 이러한 신라의 왕권이 실추되는 시기를 틈타 후백제와 고려가 세력을 키웠다. 신라는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2) 경문왕

신라 48대 경문왕은 화랑 출신으로 헌앙왕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 행운아라고도 할 수 있다. 경문왕대에 이르러 원성왕부터 피비린내를 풍겼던 왕권을 둘러싼 전쟁은 잦아들었다. 원성왕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왕좌는 경문왕부터 다시 50여 년간 그의 직계들이 차지했다. 물론 헌안왕과 경문왕도 원성왕의 직계 후손이다.경문왕은 861년부터 875년까지 14년간 왕좌에 있었지만 남아 있는 업적이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그의 왕릉조차 비정되지 않아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그러나 최근들어 경문왕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불법을 확산하는 노력을 다양하게 전개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경문왕은 왕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던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고, 숭복사를 중창했다.경문왕은 또 동화사에 민애왕의 추숭 복업을 위한 석탑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당시 동화사 주지 심지를 끌어들여 진표의 미륵신앙과는 또 다른 미륵신앙을 수용하려 했다. 왕은 동화사 심지대사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한편 지방의 선종과 선승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도 적극 펼쳤다. 왕은 선승 낭혜무염을 국사로 임명하고, 그를 상주로 내려 보내 불만세력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화랑이 왕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기 위한 노력은 그가 화랑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수련했던 심신의 단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분제도 철폐를 비롯 화랑들의 중앙무대 진출, 불교정책을 통한 왕권강화와 안정을 도모했던 경문왕의 길을 돌아본다.◆삼국유사: 경문왕-화랑 응렴 왕이 되다: 왕의 이름은 응렴인데 열여덟 살에 국선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자 헌안대왕이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며 “낭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떤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고 물었다.응렴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고 했다.왕은 그 말을 듣고 그의 어진 성품을 알아보고 “내게 딸이 둘 있거니와 그들이 수발을 들도록 하겠노라”고 말했다.응렴은 자리를 벗어나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 나와 부모에게 아뢰었다. 부모는 놀라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다. “큰 공주는 얼굴이 매우 못생겼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를 맞아들이면 좋겠다.”응렴의 무리 가운데 범교라는 스님이 “낭께서 동생을 맞으신다면 저는 반드시 낭의 앞에서 죽을 것이로되, 언니를 맞으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명심하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응렴은 범교 스님의 뜻에 따라 큰딸과 결혼했다.한 달 보름쯤 지난 다음 왕이 큰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짐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소. 장례를 치른 다음 마땅히 큰딸의 남편 응렴이 잇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왕이 돌아가시자 응렴은 왕의 뜻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이때 범교가 왕에게 나아와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여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고 말했다.왕은 그 말을 치하하여 대덕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돌아가시자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뱀의 왕: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막지 말아라.”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당나귀의 귀: 경문왕은 왕위에 올라선 다음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만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을 무렵, 도림사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이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화랑들의 노래: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숙종랑 등이 금란에 가서 놀다가 적이 군주를 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뜻을 담아 노래 가사 세 편을 지었다. 심필 사지를 시켜, 가사가 적힌 원고를 대구화상이 있는 곳에 보내 세 노래를 짓도록 하였다.처음은 현금포곡, 둘째는 대도곡, 셋째는 문군곡이다. 왕에게 들어가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칭찬하였다. 노래는 자세하지 않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의 맹세김응렴의 길은 낭염화상을 만나면서 크게 달라졌다. 응렴은 낭도들과 수련을 위해 아름다운 산천을 주유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라를 위한 일이든 자신을 위한 일이든 지혜를 바탕으로 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자신의 지혜와 무예에 대한 실력은 만족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응렴은 이러한 정신적 부담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훈련과 진리탐구에 매달렸다. 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들고, 밥을 먹으면서도 주먹을 내지르는 훈련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과 지혜가 나날이 눈에 뜨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응렴 스스로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답답해하며 훈련의 강도를 갈수록 높여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낭염화상이 어느 날 천 길 낭떠러지로 황하처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 아래로 응렴을 밀어 넣었다. 소용돌이가 심해 무술을 익힌 청년이라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겨우 헤엄쳐 나오면 낭염화상은 사정없이 다시 물줄기가 떨어지는 가운데로 밀어 넣어 버렸다.완전히 지쳐버린 응렴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무렵 낭염은 그를 건졌다. 낭염화상은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른 도승이었지만 화랑도들의 틈에 끼어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자 길을 찾고 있었다.기운을 회복한 응렴은 낭염화상 앞에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세속오계를 실천할 것을 맹세하고, 그의 제자가 되어 정신적 훈련과 무예수업을 새로운 각도에서 속성으로 익혔다. 응렴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골격을 타고 태어났으며 지혜로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미 닦아온 기초가 튼튼해 낭염의 지도는 줄탁동시가 되어 나날이 성장하는 속도가 빨랐다. 괄목할만한 응렴의 실력은 가르치는 낭염화상조차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낭염의 엄격하고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가르침은 빼어난 응렴의 자질을 부추겨 어느덧 깨달음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목검을 잡고 상대를 노려볼 때는 짐승의 불빛 같은 안광을 쏘아냈으나 승복을 걸치면 그의 눈은 깊은 바다보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했다.응렴은 헌안왕의 눈에 들어 48대 경문왕으로 즉위해 원성왕 이후 이어지던 왕권 다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화랑들의 교육을 정예화시키고, 인재를 키워 대거 등용했다. 이어 불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수련이 깊은 승려들을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파견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평화스러운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경문왕의 노력은 결국 아들 헌강왕이 즉위했을 때 빛을 발해 전국에 풍년이 들고, 백성의 마음에도 평화가 깃들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1) 장보고

장보고는 신라인이지만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 더욱 유명한 인사로 기록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다.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당나라로 들어가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장군이 되었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백성을 돌보는 해상왕으로 이름을 날렸다.반란군으로 낙인이 찍혀 허망한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결코 반란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장보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왕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였다는 내용은 없다. 간신배들의 혀 때문에 충신의 허망한 죽음이 생산된 것이다.해상왕 장보고의 충의와 강직한 신념으로 펼쳤던 업적,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미쳤던 그의 활달한 외교의 흔적을 찾아 오늘날 교훈으로 곱씹어본다.◆역사 속의 장보고장보고의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이라 전한다. 삼국유사는 궁파(弓巴)로 기록하고 있다. 모두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보고(張保皐)는 궁복이라는 이름의 한자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변환해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부터 부른 것으로 풀이된다.장보고는 780년대 후반에 완도에서 태어나 84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과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그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828년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해 허락을 얻었다. 청해진 대사로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해상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그의 전력은 왜구의 노략질과 당나라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쳐 제압하고, 멀리 인도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까지 포용해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했다.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했다.845년 장보고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은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이러한 내용이 역사의 주된 줄거리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더 확인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신라 궁성에서는 장보고의 죽음에 이어 청해진을 없애고, 병사들과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동북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신라의 아성은 이후로 무너져내렸다.◆완도 청해진 장보고유적지장보고는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시설, 다양한 생활시설과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신라하대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항만시설과 유적들이 대거 발굴됐다.청해진은 완도에서도 썰물, 밀물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작은 섬이 되는 장도를 위주로 성을 쌓고, 접안시설 등의 수비와 공격이 용이한 요새로 만들었다. 지금도 목재 다리를 만들어 걸어서 장도를 둘러볼 수 있게 했다.신라시대 청해진유적지 장도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입구까지 330여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는 소나무 말뚝, 목책이 박혀 있다. 방어용이었거나 접안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우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최근 당시 모양을 살려 복원한 우물이 장도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청해진 입구에 외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내성문을 설치해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를 설치해 두고 있다.청해진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도 일대는 사적지 제30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청해진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바다의 삼면을 살필 수 있어 접근하는 선박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이다.◆중국 위해 적산법화원중국의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설치한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주변에 신라인의 집단거주지 신라방이 있었다.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 있을 당시 823년경에 창건했다. 이 사찰은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한 것으로 장보고가 나중 무역활동을 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신앙적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장소로 활용되었다. 신라와 연락을 하는 기관의 역할도 담당하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 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특히 이곳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옌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장보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글을 남겼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장보고의 전쟁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과 승마, 창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신라의 계급사회에서 뜻을 펼치는데 한계를 느끼고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인이 되었다.그는 뛰어난 무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받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무령군이 감축되면서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지키기로 했다.흥덕왕을 찾아가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백성이 외국으로 팔려가는 일을 막고, 해상으로 침투해오는 왜구와 당나라 해적들을 토벌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청원을 했다.흥덕왕이 이를 허락하여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 되었다. 그는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남방으로부터 침략해오는 일본과 중국반도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서역까지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거상으로 성장했다.장보고는 또 중국 위해지역까지 진출해 신라인들이 편안하게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 적산법화원을 세워 운영했다.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우징이 왕권쟁탈전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의탁해오면서 운명의 여신은 불길한 기운을 함께 던져주었다.김명이 뜻을 함께했던 희강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해 민애왕으로 등극하자, 우징은 장보고에게 “하늘을 두고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이때 장보고는 “흥덕왕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소. 나는 바다를 지켜 신라의 백성을 돌보기로 했소.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면서 친구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불의한 임금을 제거하도록 했다.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신무왕의 아들이 문성왕으로 즉위해 아버지가 장보고와 한 약속을 지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보고는 이에 대한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보고의 세력을 우려한 왕의 측근들은 간사한 계략으로 장보고를 제거키로 하고 염장을 파견했다.장보고는 왕의 신하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왕이 신하의 목숨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겠소”라며 문성왕의 밀지를 받고 달려온 염장의 칼끝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다.결국 간사한 무리들의 혀로 인해 해상왕 장보고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세계 해상왕의 명성과 함께 청해진의 철옹성도 함께 무너졌다. 신라가 주름잡았던 해상 무역권까지 힘을 잃고 백성의 안위까지 담보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0) 신무대왕과 염장 그리고 궁파

흥덕왕 이후 왕좌를 두고 벌어진 권력 다툼은 치열한 혈육 간의 전쟁으로 대를 이어 길게 진행됐다. 희강왕과 민애왕에 대항해 싸웠던 김균정은 전쟁에 패배해 죽었다. 이때 죽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완도로 도망해 장보고에게 의탁했다.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김우징은 복수전을 결심했다. 우징은 장보고의 도움을 얻어 군사를 일으켜 왕도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여 복수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가 신라 45대 신무왕이다.신무왕은 왕좌에 앉은 지 3개월 만에 죽어 최단명 왕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아들이 46대 문성왕으로 즉위했다.신무왕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장보고에 남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장보고의 반란을 야기 시켰고, 해상을 주름잡으며 신라의 위상을 떨쳤던 해상왕 장보고를 허무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삼국유사: 신무대왕과 염장 그리고 궁파제45대 신무대왕이 왕자였을 때 데리고 있던 신하 궁파에게 “내겐 함께 하늘을 같이하지 못할 원수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제거해 주고 내가 왕위에 오르면 그대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소”라고 말했다.궁파가 이에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함께 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을 쳐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삼아 신무왕이 되었다.왕위에 오른 다음 궁파의 딸로 왕비를 삼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가 극렬히 반대하며 “궁파는 미미한 사람입니다. 왕께서 그 딸을 왕비에 앉게 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고 한사코 궁파의 딸을 궁으로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랐다.그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였다. 마침 염장 장군이 이를 듣고 왕에게 “궁파가 불충을 저지르려 합니다. 제가 그를 제거하겠습니다”라며 용감하게 나섰다.왕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염장은 왕의 명령을 받들고 청해진에 가서 비서를 통해 뵙자 하면서 “저는 이 나라 왕에게 자그마한 원한이 있기에 현명하신 장군에게 붙어 이 몸의 목숨을 보전코자 하나이다”고 거짓으로 귀순의 허락을 구했다.궁파가 이를 듣고 화를 내며 “그들이 왕에게 아뢰어서 내 딸을 내쳤거늘 무슨 염치로 나를 보려 한단 말이냐”라고 오히려 꾸짖었다.염장이 다시 “이는 여러 신하가 말한 바이오. 나는 꾀임에 끼지 않았으니 현명하신 장군은 혐의를 두지 마십시오”라고 간청했다.궁파가 이를 듣고 염장을 불러들여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하고 묻자 “왕에게 거스르는 짓을 했습니다. 장군께 붙어 해코지를 면해보려 할 따름입니다”라고 둘러댔다.궁파는 의심을 풀고 “잘 왔다”며 술을 마시며 즐거이 놀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뽑아 목을 베었다. 그러자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에 이르러 왕에게 보고하였다. “궁파의 목을 베었나이다.” 왕은 기뻐하며 상으로 아간 벼슬을 내렸다. ◆신무왕신라 45대 신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원성왕의 증손자로 43대 희강왕의 사촌 동생이다.839년 4월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도움으로 서라벌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7월에 승하함으로써 재위 3개월 만에 죽어 신라 천 년 역사에 가장 단명한 왕이 되었다.신무왕릉은 경주시 배반동 낭산 동남쪽에 위치해 사적 제18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고분의 지름 15m, 높이 3.4m다. 신라왕릉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것으로 평가된다.죽은 뒤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해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 아무런 시설이 없는 일반민묘 형태로 단순하다.그러나 이 능이 신무왕릉이 아니고, 경주시 충효동의 사적 제21호 김유신 묘 또는 현곡면의 사적 제24호 진덕여왕릉이 양식과 연대로 보아 신무왕릉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의 약속우징은 제륭과 김명의 군사들에 밀려 병사 절반 이상을 잃었다. 전쟁 중에 아버지 김균정이 눈앞에서 화살에 관통상을 입어 죽음을 맞았지만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살길을 찾아 도망치기에 바빴다.집요하게 추적하는 제륭의 무리를 김양의 군사가 막아 다소 지체하는 시간을 벌었지만 김양도 살을 맞아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우징과 마찬가지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우징은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에 있을 때 신라의 바다를 수호하겠다며 흥덕왕에게 군사를 빌리러 왔던 장보고에게 흔쾌히 은혜를 베풀었던 것을 생각하고 무작정 완도로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우징은 도망하면서 군사적 지원을 얻게 해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기어이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하던 듬직해 보였던 사내 장보고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예상대로 장보고는 우징을 내치지 않았다. 패잔병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힘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그러나 장보고는 의리의 사내이기도 했지만 크게 신라의 충신이었다. 딱히 왕을 죽이는 반란군은 아니었지만 왕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던 우징을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상대등이었던 김균정이 자신을 도와주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나라를 위한 일에 국록을 먹는 이가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 장보고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장보고는 그들의 싸움에 깊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징의 군사들에 대한 지원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선이었다. 그렇지만 의지할 곳이 없었던 우징에게는 큰 언덕이었다. 육상으로 나가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 판이었다.와신상담하던 김우징에게 기회가 왔다. 김우징과 왕권을 두고 맞붙었던 김제륭, 김명이 내부적으로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징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제륭은 희강왕이 되었고, 김명은 상대등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던 그들이 갈등을 일으켰다.김명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희강왕을 압박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희강왕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명이 44대 민애왕으로 등극했다. 김우징은 장보고 앞에 앉았다. “내겐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있소.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김명이란 자요”라며 우징은 장보고의 군사력 지원을 부탁했다. “그대가 나를 도와 원수를 죽여준다면 내가 왕이 되어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라고 약속했다.장보고는 왕을 죽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백성이자 나라의 녹을 먹는 장군으로 최소한의 의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충한 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딸을 왕비로 책봉해 줄 왕을 돕기 위해 자신의 수하와 군사를 기꺼이 지원했다. 그리고 그의 숙원을 해결했다. 왕의 약속을 기대하면서.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얽히고설킨 족보 속 혈육간의 ‘피의 전쟁’ 끝나지 않은 ‘막장 드라마’ 배신 뒤엔 또 다른 칼 끝이

일연스님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다. 왕력편에서 신라 왕들을 시대별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기이 편에서는 왕조사에 대해 소개하면서 흥덕왕 이후 희강왕과 민애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헌덕왕과 흥덕왕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라하대 왕위를 두고 일어난 비사의 출발을 보였다. 흥덕왕에 이어 희강왕은 민애왕과 손을 잡고 삼촌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함께 뜻을 모았던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모두 원성왕의 직계 후손들이지만 워낙 얽히고설킨 싸움을 벌여 혈육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후손으로 부끄럽기까지 하다.삼국유사 기록에는 없지만 역사에서 삭제할 수 없는 흐름이라 희강왕과 민애왕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다루어본다.◆희강왕희강왕의 성은 김, 이름은 제륭이고 시호는 희강(僖康)이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증손자로 조부는 원성왕의 셋째아들인 김예영이다. 아버지는 이찬 김헌정이다. 비는 흥덕왕의 동생 김충공의 딸인 문목부인 김씨이다. 6촌 누이를 비로 맞이한 것이다. 자식으로는 제48대 경문왕의 아버지인 아찬 김계명이 있다.희강왕은 836년 12월에 당숙인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희강왕은 숙부인 상대등 김균정과 왕위 계승을 위해 전쟁을 벌였다. 시중이던 김명,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이 희강왕을 지지해 승리했다.아찬 김우징(제45대 신무왕)과 김예징, 김양 등은 김균정을 지지했다. 김우징은 적판궁에서 아버지 김균정을 왕으로 세우고 김양 등과 함께 왕위 쟁탈전에 나섰다.김명과 이강 등은 적판궁을 에워싸고 공격해 김균정을 죽이고 제륭을 희강왕으로 옹립했다.그러나 희강왕의 재위 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갈등은 더욱 확대되었다.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은 가족들과 함께 황산진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청해진, 지금의 완도로 건너가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했다. 김균정의 매제인 아찬 김예징도 아찬 김양순과 함께 김우징의 세력에 합류했다. 한기로 도망친 김양도 산속에 숨어 세력을 모으며 복수를 꾀하다 청해진으로 와서 합류했다.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는 가운데 838년(희강왕 3) 정월에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 등이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죽였다.희강왕은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강왕은 소산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있는 희강왕릉은 사적 제22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희강왕이 죽은 뒤에는 상대등 김명이 왕위에 올라 제44대 민애왕이 되었다. 그는 김충공의 아들로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부인과는 남매 관계로 희강왕과는 처남 매부가 된다.◆민애왕민애왕의 성은 김, 이름은 명(明), 시호는 민애(閔哀)이다.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의 증손자로 조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이며, 부친은 제39대 소성왕과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의 동생인 대아찬 김충공이다. 어머니는 귀보부인 박씨이며, 비는 윤용왕후 김씨이다.제43대 희강왕의 왕비인 문목부인, 제47대 헌안왕의 생모인 조명부인과는 남매 사이이다. 제40대 애장왕과는 사촌 사이이다.민애왕은 흥덕왕 때인 835년 자리에서 물러난 김우징(제45대 신무왕)을 대신해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836년 음력 12월에 흥덕왕이 적장자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이홍, 배훤백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왕으로 세웠다.민애왕은 아찬 이홍과 함께 적판궁을 에워싸고 김우징 일파를 공격해 김균정을 죽이고 희강왕을 왕위에 앉혔다. 이러한 공으로 희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하지만 838년(희강왕 3) 음력 정월에 시중의 자리에 있던 이홍과 함께 다시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으로 하여금 목숨을 끊게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자 청해진(지금의 완도)의 장보고에게 피신해 있던 김우징과 김예징, 김양 등은 장보고를 설득해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鄭年)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반란을 일으켰다.민애왕은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 억훈 등을 보내 김양의 군대를 막도록 했으나 연이어 크게 패했다. 결국 민애왕은 측근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월유택으로 도주했으나 병사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 이홍도 가족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으나 붙잡혀 죽음을 맞았다.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보물 제741호)에는 민애왕의 행적을 나타낸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민애왕은 839년 음력 1월23일에 죽었고 당시 나이는 23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음력 1월22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민애왕이 죽은 뒤 김우징이 제45대 신무왕으로 왕위에 올랐고, 신하들은 예를 갖추어 민애왕의 장사를 지냈다. 민애왕의 장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데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의 고분이 민애왕의 왕릉으로 전해지며 사적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성왕 후손 처남 매부간의 전쟁신라 43대 희강왕과 44대 민애왕은 원성왕의 증손자로 각자 할아버지가 친형제인 6촌 간이다. 또 희강왕의 비는 민애왕의 여동생이어서 둘은 처남 매부 사이다. 이점은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와 같다.처남과 매부가 손을 잡고 희강왕 제륭의 삼촌인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사이가 좋았다. 민애왕은 희강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을 인정받아 상대등의 벼슬에 올라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서의 실권을 잡았다.민애왕은 아버지 충공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 늘 왕권에 대한 미련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기회는 꿈꾸는 자의 몫인 양 희강왕의 정치적 타락으로 쉽게 찾아왔다.민애왕 김명이 상대등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의 여동생이자 왕비였던 문목왕후가 그를 찾아왔다. 희강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져 자기를 천대한다는 것이었다.김명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아찬 이홍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 모든 병사들을 움직이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김명에게 궁궐을 접수하는 일은 여반장이었다.희강왕은 제대로 보고조차 받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이는 자신의 침소를 보아야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반란의 우두머리가 처남 김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저히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희강왕은 숨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민애왕도 왕좌에 올라 3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상왕 장보고의 군사를 등에 업고 쳐들어오는 김우징과 김양의 칼끝을 피하지 못하고 전쟁통에 시해됐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진실을 목숨으로 보여준 비극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단…‘덕심 장착’ 구석구석 이야기 무대 찾아 발로 뛴다

이노버즈와 대구일보는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는 ‘삼국유사 기행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단은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해 영화, 드라마, 뮤지컬, 인형극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와 접목하는 등 삼국유사를 역사문화산업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삼국유사 기행단은 경주를 비롯해 포항, 영천, 울산, 대구, 부산 등 인근 도시의 역사문화와 문화관광산업에 관심이 있는 인문학자, 역사학자, 기업인, 언론인, 교육계, 작가 등 50여 명으로 구성됐다.이들은 각자 소속된 단체 또는 독자적으로 삼국유사를 공부하고 있다. 매주 삼국유사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기행단은 정기적으로 매월 1회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 서너 곳을 방문해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내고, 다시 새로운 시각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대구일보는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를 매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1년에 한 번씩 ‘새로 쓰는 삼국유사’를 책으로 엮어 전국 국·공립도서관에 배부할 계획이다.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의견을 모으고, 정보를 교류하면서 삼국유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터전으로 삼는다. 삼국유사 기행단 운영과 블로그 운영에 대해 소개한다. ◆삼국유사 기행단 구성대구일보는 지난 2월 20여 명으로 삼국유사 기행단을 꾸려 처음 오릉과 숭의전, 나정, 양산재, 창림사지, 표암재, 석탈해왕릉, 명활산성 등에서 삼국유사 기행을 시작했다.대구일보에서 기행단 운영에 대한 총괄 책임을 맡고, 알영로타리 유소희 회장이 부단장, 경주문예대학 이인숙 시인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블로그는 출판사 인공연못의 이원주 시인이 운영자로 다양한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정보를 교류하고 편성하는 책임을 맡았다.문화해설은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과 류정숙 문화해설사가 우선 붙박이 해설사로 초빙됐다. 또 남산 지킴이 오희, 손은조, 하명옥, 이상범, 이희자, 장근희 등의 해설사가 문화해설을 보조해 진행하기로 했다.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과 한순희 경주시의회 전 의원, 이상애 경주시 전 공무원, 언론인 박대호·이은숙 기자 등도 자문역할과 함께 삼국유사 기행을 통한 문화콘텐츠 육성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이령, 지명숙, 우진호, 이상희, 박용, 정임현, 이제이, 정민정 시인 등 경주문인협회와 해동문학, 웹진시인광장 등의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도 삼국유사 기행에 적극 참여하며 창작활동에 의견을 보태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역사문화 산업 현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삼국유사 기행단은 매우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활동한다.매월 1회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삼국유사 기행에는 보통 20~50여 명이 참여한다. 참여자들이 떡, 귤, 감, 사과 등의 간식과 김밥 등을 협찬해 늘 가족 같은 분위기다.-첫 삼국유사 기행: 2월16일 오릉 주차장에 모인 기행단은 류정숙 문화해설사의 해설로 첫 기행을 시작했다. 박차양 도의원이 금방 쪄온 떡을 나누어 주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신라의 나라 구성과 박혁거세 옹립,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로 재구성했다. -두 번째 기행: 3월16일 30여 명이 토함산 정상에 올라 석탈해의 흔적을 더듬고, 삼국유사 기행단 발대식을 가졌다. 기행단의 안전 기원제를 겸했다. 이어 석탈해왕 탄강지, 숭덕전, 김알지의 탄생지인 계림 등을 기행했다.-세 번째 기행: 4월20일 대릉원을 둘러보면서 미추왕릉과 내물왕릉, 벌지지에서 박제상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포항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을 답사했다. 내물왕과 실성왕, 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네 번째 기행: 소지왕의 월성 환궁과 내란을 짐작하게 하는 서출지, 무열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을 둘러보며 왕릉 지정 현황과 학자들이 지정하는 왕릉의 위치를 추정해 밝히는 시간도 가졌다. 법흥왕릉을 둘러보며 신라왕릉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도 공부했다.-다섯 번째 기행: 6월22일 사천왕사지에서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살펴봤다. 선덕여왕릉, 황복사지, 진평왕릉에서 도시락을 펼쳐두고 삼국유사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진덕여왕릉까지 둘러보았다.-여섯 번째 기행: 7월27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에도 기행은 계속 이어갔다. 신문왕릉, 효소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을 돌아보고, 추령재를 넘어 감은사지, 이견대, 문무왕릉도 찾았다. 만파식적 설화와 원성왕의 왕위 찬탈 과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일곱 번째 기행: 무더위를 피해 8월31일에 기행을 했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에 모여 호석이 잘 정비된 경덕왕릉, 흥덕왕릉까지 돌아보며 역사의 흔적을 꼼꼼하게 살폈다. 경덕왕릉과 흥덕왕릉은 특히 입구에 조성된 소나무숲이 일품으로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곳이다.-여덟 번째 기행: 가장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던 신무왕의 능과 신라가 기울기 시작했던 52대 효공왕릉, 희강왕과 민애왕의 능을 둘러보며 왕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신라하대 피의 역사를 찬찬히 살폈다. -아홉 번째 기행: 10월26일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기에 신라 멸망의 터 포석정, 시대적으로 맞지 않게 비정되었다는 삼릉, 경애왕릉, 헌강왕릉, 정강왕릉을 둘러보며 천 년 왕조 신라의 붕괴에 대한 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했다.-열 번째 기행: 지난 23일 기행할 답사단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모집했다. 대형버스로 이동하기 위해 35명으로 제한했다. 5분 만에 접수가 끝나버렸다. 삼국유사 기행에 대한 열의를 짐작하게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5시간 동안 신라 마지막 왕 김부대왕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연천까지 기행하며 천 년 신라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마지막 기행은 다음달 21일 신라 세 번째 여왕인 진성여왕의 흔적을 찾아 양산, 용의 설화가 전해지는 처용랑과 망해사로 계획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에서 신화 같은 삼국유사를 그대로 해석해 전해주는 해설을 통해 역사 현실을 추정하고, 이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기행은 계속 이어진다. 기행단으로 움직이는 매월 정기적인 기행 이외에 3~4명이 매주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는 기행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삼국유사 기행 카페삼국유사 이야기에 대한 풍성한 정보를 나누는 사이버공간을 마련, 운영한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이원주 시인이 경주 남산, 역사기행 경주, 경주 힐링로드 등 책으로 출판된 경주지역의 오래된 역사 이야기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정보의 바다를 운영하고 있다.많은 사람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삼국유사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창작을 이어간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육성하고, 문화관광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문화콘텐츠 육성 세미나…‘천년의 역사서’ 무궁무진한 활용법, 언제 어디서 펼쳐볼까

경주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는 신라 천 년의 많은 흔적이 삼국유사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삼국유사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가진 우리와 직접 연결고리를 가진 떼려야 뗄 수 없는 핏줄과 같은 역사이자 현실이다. 대구일보는 삼국유사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역사문화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산업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삼국유사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지난 15일 경주더케이호텔에서 학계, 문화연구단체, 문화산업단체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세미나가 열렸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삼국유사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실례로 삼국유사에 실린 225개소의 절터 찾기,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등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어 충담재, 월명재 등과 관련된 축제를 소개하면서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테마로 축제를 개발해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경주남산연구소는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 코스를 테마별로 개발해 연중 다양한 방법으로 운영한다. 또 문화유산에 대한 학습에 이어 현장 강좌를 개설, 운영하는 한편 문화유산 해설사 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한다.설화 또는 역사의 현장 유적지를 정비하고 사적비 또는 표지석, 향가의 연고지 건립 등으로 문화탐방객 유치를 위해 노력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고지마다 문화축제를 열어 뛰어난 인물의 정신을 계승하고 역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역사문화관광객을 유치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 또는 역사적 사실을 오페라, 연극, 음악 등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창작극으로 개발 운영한다. 이어 삼국유사 신화와 전설 등의 문화유산을 지역별로 알려주고 해설을 받을 수 있는 어플을 개발한다.◆경주대학교 임선희 교수 임선희 경주대학교 교수는 ‘김춘추의 평화와 화해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기법을 소개하면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문화유산을 스토리와 장소로 연계해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로 엮어야 한다. 김춘추가 외교전을 벌였던 일본, 중국, 북한의 역사학자와 당시 상황 관련 공동연구 발표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한반도에서 삼국통일 후 평화와 화해가 지속된 점과 삼국의 기술발전으로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점을 이해해야 한다.삼국통일 그 후부터는 한반도가 하나의 세력으로 외세에 대항했던 상황을 그리며 분야별 공간적 요소를 포함한 스토리를 완성해 이야기에 맞는 문화콘텐츠와 접목을 시도해야 한다.◆동국대학교 박종희 교수 박종희 동국대학교 교수는 4차 산업시대에서 삼국유사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도시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매력과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주에서 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삼국유사를 연결, 융합,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어 타지역과 연결하고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경주 역사문화에 과학의 새로운 옷을 입혀 21세기 융합관광의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역사적 현장을 재발굴하고 스토리텔링화 하고,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어야 한다.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연결, 융합, 소통이다. 경주는 삼국유사를 활용한 다양한 인성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관광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웹진시인광장 이령 시인 웹진시인광장 부주간 이령 시인은 삼국유사 내용을 모티브로 사랑서사시를 지어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지역의 역사문화를 문학으로 승화시켜 관심을 유발한다는 전략을 소개했다.이령 시인의 삼국유사 사랑서사시의 내용은 크게 10장으로 구성된다. 총 10장에 걸쳐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적과 관련된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각장 5편씩 모두 50편을 싣는다.제1장-백률사(신라의 민심을 통합하려 했던 법흥왕 제위 시 이차돈과 관련된 나라사랑)-백률사는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절이다. 불교공인을 위해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고 그의 목을 치자 흰 피가 솟구쳐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자추사라 불렸다. 절의 진입로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풀이면서 나무이며 꽃이 피기까지 약 76년이 걸리고 한 나무의 꽃이 피면 숲 전체가 따라 꽃이 피고 한꺼번에 진다. 이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유사해서 공심의 대표적 유적이라 생각된다.‘누구의 피 울음인가 꽃 비경 덧널처럼 쌓이는 대 숲, 땅속 금강이 일제히 솟구치니 내 귀 천 년의 서루에 올랐다 내린다 소름 돋는 저잣거리 원성을 말아 쥔 북악산 솔이끼며 귀신새 소리마저 이곳에선 하얗게 날이 선다.만파식적 듣고 자란 서라벌 백률송순, 황룡이 승천하듯 굽이굽이 내달린 곳, 자추사 흰 피도 찰나에 지고 찰나에 지는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삼국유사 사랑 서사시 1장 일부.◆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 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은 ‘삼국유사의 무궁무진한 콘텐츠’라는 제목으로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를 역사의 뒤안길 기록, 신화와 설화의 보고, 불교유적의 스토리, 인물과 얽힌 이야기, 향가와 신라어의 본원 등으로 해부했다.삼국유사를 근거로 서사 공간으로써 활용이나 인터넷 디지털 공간과 현실 공간의 접합 등을 도모한다면 문화콘텐츠로서의 활용은 무궁무진할 것이다.삼국유사의 설화에 깃든 다양한 삶의 방식과 존재 양식에 대한 이해와 융화와 조화라는 이상적 지향을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킨다면 원형적 상상력과 구술성은 새로운 상품이 될 것이다.삼국유사에 소개된 향가는 한반도의 노래 행위가 구술행위 중심에서 문자로 넘어오는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고대 신라어를 복원하고 활용한다면 여러 가지 요소의 콘텐츠로 재탄생할 것이다.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마음을 생각하면서 삼국 당시의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이야기로 흡수해 재생산할 때 그 값을 다할 것이다.◆경북도의회 박차양 도의원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은 ‘스토리텔링이 답이다’는 제목으로 삼국유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활성화 방안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며 스토리텔링 방법까지 제안했다.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의 중심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이야기다. 신라는 천 년 동안 경주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주를 빼고 삼국유사를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경주야말로 삼국유사의 본고장이다.경주에는 많은 역사문화 유적이 산적해 있다. 곳곳에 구슬이 널려 있다. 등록된 문화재만 330개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다.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우리 눈에 보이는 비지정문화재도 수두룩하다.이런 보석들을 사람들이 보고 싶어 달려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스토리텔링해 꾸준히 알리는 방법뿐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 뮤지컬, 연극 등의 대중적인 문화콘텐츠와 접목시켜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이런 문화콘텐츠로 경주의 역사문화유적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토리텔링으로 옷을 입혀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지역정서에 맞는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 경륜 있는 작가들에게 의뢰하거나, 작품공모를 통해 꾸준히 모집해 현실정에 맞는 이야기를 선정해야 한다.◆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문화재 활용을 통한 가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서악마을에서 삼한통일의 주역들과 함께 힐링여행을 기획 운영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문화콘텐츠를 산업화하는 과정을 소개했다.문화를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하자는 시대정신이 점점 커지면서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화재의 활용에 대한 필요성을 높였다.창의적 연출을 통한 문화재 활용은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넘어 현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소통을 원활히 하고 국민의 문화수혜를 넓히는 창조적 문화생산이 되고 있다.그뿐 아니라 문화재 활용은 보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문화재 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듯 문화재는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큰 부가가치를 지닌 소재여서 21세기 문화국가로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한다.특히 삼국유사의 주 무대인 경주에서는 우리 시대 문화창조의 신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신라문화원에서 삼한일통의 주역들이 잠들어 있는 서악마을을 가꾸고 문화재활용을 통한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통해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흥덕왕…빼곡했던 천 년의 이야기 피로 물든 뒷 장은 감추고 싶은 듯 군데군데 이름조차 없구나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왕조사를 간단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천 년의 이야기를 몇 권의 책으로 소개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4대 유례왕, 15대 기림왕, 37대 선덕왕, 41대 헌덕왕, 희강왕, 민애왕 등은 왕들의 이야기가 집중되는 기이편에서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다.흥덕왕의 이야기도 아주 간단히 기록하면서 앞의 헌덕왕과 소성왕, 애장왕의 사연도 움푹 빠뜨렸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들추고 싶지 않았던 일연 스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원성왕 이후 잇따른 태자의 죽음과 소성왕, 애장왕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볼 때 특기할만한 일이지만 삼국유사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고, 17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조들의 얼룩진 이야기는 피하고 싶었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본격적인 신라하대를 열었던 형제들의 쿠데타를 픽션으로 재구성해 소개한다.◆삼국유사: 흥덕왕과 앵무제42대 흥덕대왕 때 보력 2년은 병오년(826)인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으나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암컷이 죽었다. 그러자 혼자 남은 수컷이 슬피 울어 마지않았다.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새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짝을 찾은 것으로 알고 이내 그 거울을 쪼아대었으나 그것이 그림자인 줄 알자 슬피 울다 죽었다.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히는 모른다.[{IMG03}]◆새로 쓰는 삼국유사: 권력과 사랑-형제들의 쿠데타: 원성왕의 장남으로 태자에 임명되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의 아들은 6형제였다. 준옹, 언승, 숭빈, 수종, 충공, 제옹 등이 6형제가 태어난 순서이다.원성왕은 이들을 순서대로 궁중으로 불러들여 나랏일을 익히게 했다. 준옹은 맏손자여서 아들들이 죽자 곧 태자로 임명하고 중책을 맡겨 말년에 병부령에까지 올랐다.이들 6형제는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지만 성향은 각각 달랐다. 태자로 임명된 준옹은 천성이 심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했다. 준옹은 병부령에 임명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도 몸이 약해 잠깐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IMG03}]이에 반해 둘째 언승과 넷째부터 막내까지 수종, 충공, 제옹은 활달한 성격으로 나랏일에도 적극 참여해 권력에 대한 야망을 키우면서 자신들만의 세력을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셋째 숭빈은 소극적이고 차분한 편이었다.준옹이 원성왕의 죽음에 이어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소성왕은 왕좌에 오르면서 후계구도를 걱정해야 했다. 자신의 병이 심각해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았다. 아들은 아직 12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여서 스스로 나랏일을 이끌어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소성왕은 즉위 1년 만에 죽으면서 13살 어린 아들 청명에게 왕위를 넘겼다. 소성왕은 아들의 안위를 위해 동생들에게 섭정을 당부하면서도 몰래 비밀호위 무사들을 배치하고, 뛰어난 장수 명호와 정용을 시중으로 발탁해 아들을 엄호하도록 안배했다.소성왕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800년에 즉위했다. 이때부터 왕의 숙부 언승과 수종의 시대가 도래했다. 언승이 섭정하면서 병부령에서 상대등으로 스스로 옮겨 앉아 정권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언승은 자신의 뜻을 잘 따르는 넷째 수종과 다섯째 충공을 병권과 재무를 담당하는 대신으로 중용하고 실권을 휘둘렀다.그러나 애장왕이 18세가 넘어 성인으로 성장해 조금씩 자신의 의지를 펼치려 하자 삼촌 언승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애장왕이 23세, 재위 10년차에 접어들던 809년 일이 터졌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문제에서 왕과 삼촌 언승의 대립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사신을 누구로 파견할 건지 예물을 무엇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로 마련할 것인지 등의 작은 문제로 시작해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상대등이었던 언승은 병부령과 상부령에 있던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병사들을 궁궐 깊숙이 배치하게 하고, 삼 형제가 칼을 빼들고 직접 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애장왕의 비밀호위 무사들도 이미 언승의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언승 형제들은 애장왕을 단숨에 베었다. 저항하던 애장왕의 동생 체명까지 처리하고,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애장왕은 23살의 젊은 나이에 이렇다 할 권력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헌덕왕은 특유의 괄괄한 성격으로 왕권을 박탈하는 일에 동생들을 모두 참여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없었던 헌덕왕은 자신의 일에 적극 찬동하고 앞장서는 수종을 태자로 삼았다. 이어 충공을 상대등으로 삼고, 막내 제옹을 병부령에 앉혔다.헌덕왕은 즉위 이후에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거문고를 타는 등으로 흥청망청하여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 왜구들의 노략질도 심해 백성은 어려움에 처하며 신라하대 패망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흥덕왕의 사랑: 흥덕왕 수종은 애장왕의 여동생, 조카인 장화를 부인으로 맞았다. 당시 형 언승을 도와 병부령에 있으면서 권력을 자랑할 때였다. 수종과 장화부인의 애정은 궁궐을 벗어나 시중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별났다.장화부인은 언승과 수종 형제가 자신의 오빠 애장왕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장화부인이 10살, 어릴 때의 일이었고, 언승이 당나라에 소성왕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한 것처럼 백성에게도 그렇게 숨기고 즉위했기 때문이다.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헌덕왕이 죽고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장화부인은 28살에 왕비의 관을 썼다. 화려한 날들이 시작되던 무렵 장화부인의 귀에 오빠들에 대한 죽음의 진실이 들려왔다.믿어지지 않는 오빠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곰곰이 뒤집어 생각하니 왕이었던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둘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일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장화부인은 결혼 10주년이 되던 날, 흥덕왕 즉위 1년을 맞은 날에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술에 취한 흥덕왕의 입을 통해 비극의 전말을 들었다. 절망하던 장화부인은 끝내 이승의 문턱을 스스로 뛰어넘었다.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쩌면 예고되었던 불운의 사랑인지 모른다. 현실로 닥친 사랑의 상실에 직면한 흥덕왕은 넋을 놓았다.그러나 흥덕왕은 당나라와 일본의 위협,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 흉년에 이어지는 도적떼들의 극성 등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대신들의 추궁으로 사랑의 병을 앓을 틈을 잃었다.흥덕왕은 헌덕왕 때와는 다르게 청해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그는 아들 없이 물러나 본격적인 피의 왕권쟁탈전 시대를 불러왔지만 죽음에 이르러 장화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사랑을 찾아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③비극의 서막…저무는 영광의 시대…두 아들에 손자까지, 펼치지 못한 삶 끝나버려

원성왕은 통일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을 열었던 왕으로 분류된다. 그는 혜공왕을 시해한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면서 왕위에 오른 선덕왕과 함께 최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상대등의 자리에서 병권과 내정을 주무르면서 본격적인 왕좌에 오르기 위한 발판을 굳혔다.적절한 기회를 맞아 선덕왕의 죽음에 이어 38대 원성왕으로 등극한 김경신은 왕권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이어 장남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일찍 죽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그러나 둘째 아들마저 죽자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을 태자로 책봉해 그가 39대 소성왕으로 왕위를 이었다. 소성왕은 사형제의 맏이였다. 왕위에 오른 소성왕은 1년 만에 죽었다. 이어 소성왕의 아들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등극했지만 그의 삼촌들에게 살해됐다.김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를 죽이고 41대 헌덕왕으로 왕좌에 앉았다. 17년의 왕위에 이어 헌덕왕의 동생 수종이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이어지며 신라 하대는 비극적인 내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신라 하대 비극은 원성왕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사가들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삼국유사: 원성왕의 죽음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다. 최치원이 쓴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서 있으며 또 보은사와 망덕루를 새로 지었다. 할아버지 훈입 잡간에게 흥평대왕, 증조할아버지 의관 잡간에게 신영대왕, 고조 할아버지 법선 대아간에게 현성대왕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 잡간이다.-이른 눈제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인 데 8월15일에 눈이 내렸다.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인데 3월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제46대 문성왕 기미년(839) 5월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라 하대 비극의 서막원성왕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통해 관리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써가며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많은 심력을 기울였다.외교문제는 공격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유한 사신들을 당나라와 일본에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내적으로는 강한 나라의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잦은 사냥을 통해 건재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어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을 보여 외부의 침략에 대한 사기를 일찍이 차단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맏아들 인겸을 태자로 일찌감치 지정 공표했다. 원성왕은 사냥에 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대동해 왕손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원성왕은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매월 삭망일 두 차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냥을 했다.원성왕은 매월 초하루에는 어전 회의를 마치고 대신들과 함께 일찍 사냥에 나서 그달의 국운을 점치기도 했다. 사냥이 기분 좋게 잘 되는 날은 늦게까지 축하연을 열어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그의 보름날 달밤사냥이 문제를 가져왔다. 초하루의 사냥과 다르게 보름날의 사냥은 달이 높이 걸리는 시간에 맞춰 야간사냥으로 진행됐다. 큰 짐승을 잡기라도 하는 날에는 밤이 늦도록 주연이 이어졌다. 원성왕의 이 같은 사냥에 대한 취향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의 아들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통일신라 하대를 비운의 시대로 흐르게 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으로 내정되어 있던 김주원의 도움으로 가족들의 생명을 건지고 벼슬길에 오르게 된 김제공은 김주원의 은혜를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김주원이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피신해버리자 김제공은 스스로 김주원과의 관계를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이어 제공은 원성왕에게 거짓 충성을 하면서 눈에 들어 각간의 위치까지 올랐다.김제공은 거처를 왕경숲 근처로 옮기고 스스로 궁술을 익혔다. 그리고 무인들과 벼슬아치들을 암암리에 포섭해 세력을 키웠다. 그의 목적은 원성왕의 세력을 꺾고 김주원을 모셔오는 것이었다.그러나 원성왕의 세력을 휘어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성왕 김경신은 타고난 무인체질로 활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태자 인겸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왕가로 뿌리를 내리며 튼튼한 울을 두르고 있었다.김경신이 오랜 장계를 통해 왕좌에 올랐듯이 김제공 또한 그의 튼튼한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장계를 세우고 곳곳에 복수의 함정을 마련했다.첫 번째 김제공의 복수는 쉽게 진행되는 듯했다. 792년 원성왕이 즉위 8주년을 기념해 전개하는 야간사냥 날이었다. 왕이 태자와 왕자를 대동하고, 대신들과 함께 대대적인 규모의 야간사냥을 축제로 진행하는 때를 기회로 잡았다. 많은 군사가 동원되고 무인들이 대거 참여해 위험했지만 오히려 반란세력들도 자연스럽게 사냥에 참여할 수 있었다.제공의 세력은 이날 왕과 태자를 한꺼번에 사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준비한 사냥감을 풀어 왕과 왕자팀이 두 곳으로 갈라지게 하고는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이날 사냥에서 왕은 충신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태자 인겸은 사냥감과 함께 함정으로 만들어놓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사고였다. 김제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덫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원성왕 또한 워낙 자신만만한 시기였고, 반대세력 또한 드러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반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태자를 잃어버린 원성왕은 큰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 첫째 아들의 아들인 손자 준옹에게 벼슬을 주어 궁궐 가까이 두었다. 왕권 강화를 위한 구도를 한층 더 두텁게 했다.원성왕은 태자를 잃은 이후 사냥의 횟수를 크게 줄였다. 즐기던 야간사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천상 무인이었던 거친 기질의 원성왕도 나이가 들면서 차츰 기운이 쇠락해 갔다. 둘째 아들에 대한 왕위 수업과 손자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원성왕의 아들을 잃은 슬픔이 잊혀 갈 무렵 김제공의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을 맞은 해였다. 원성왕이 즉위 10주년 축하연을 조촐하게 궁 안에서 열었다. 축하연에 이은 야간사냥에서 아들을 잃었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조촐한 행사로 진행했다.축하연에 참석했다가 늦게 동궁으로 돌아가는 태자의 말이 목에 피를 토하며 넘어졌다. 술에 취한 태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 김제공 무리들의 비수가 원성왕 두 번째 아들의 목줄을 끊었다.궁궐에서는 잠든 왕실로 잠입하려던 김제공의 무리들이 기다리던 왕의 비밀 호위군사들에게 포박을 당했다. 10년 복수의 칼을 갈며 준비했던 김제공의 난은 왕자 두 명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원성왕의 마음에 비수를 던지는 일로 막을 내렸다.원성왕 또한 8주년 축하연의 사냥에서 입은 상처와 연거푸 아들을 잃은 심적인 충격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원성왕은 즉위 14년인 798년 손자 준옹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그의 장계에 종지부를 찍고 저승으로 떠났다.제39대 소성왕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 신라의 왕위는 모두 원성왕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②외세의 간섭…호시탐탐 뻗어오는 검은 손, 금은보화로 눈 가리고 ‘만파식적’에 슬금슬금

원성왕은 즉위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는 등 제도를 정비했다. 당시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춘추를 풀어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곡례, 논어, 효경 등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했다.왕은 조상의 5묘를 만들어 왕의 권위를 높이는 일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고 재상과 중앙과 지방정부의 조직을 정비했다. 발해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두텁게 하고, 봉은사를 건립했다.원성왕은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죽어 둘째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차례로 죽어버리자 인겸의 아들이자 손자인 준옹을 태자로 삼아 나중에 39대 소성왕이 되었다.원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중국을 비롯 일본에서도 사신을 보내 보물 만파식적을 보고 싶어 하는 등으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연회 국사가 번번이 해결책을 내놓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야사가 설득력 있다.◆삼국유사: 신라 보물 노리는 외세왕은 진실로 잘되고 못 되는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은 조정의 만파식적을 전하여 왕에게 넘겨주었다. 왕이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정원 2년은 병인년(786)인데 10월11일에 일본의 문경왕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고자 했으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다. 그러면서 사신을 시켜 금 50냥을 내고 그 피리를 보자고 했다. 왕은 사신에게 “짐도 윗대의 진평왕 때 있었다고 들었을 뿐이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오”라고 말했다.다음해 7월7일 다시 일본왕은 사신에게 금 1천 냥을 보내며 청하였다. “과인이 신기한 물건을 보고 돌려주려 합니다.” 왕은 저번처럼 사양하면서 은 3천 냥을 그 사신에게 내려주었다.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하게 하였다.왕이 즉위한 지 11년째인 을해년(795)이었다.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보름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 다음 하루는 두 여자가 궁 안에 들어와 “저희는 동지와 청지에 있는 두 용의 마누라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바꾼 다음 통에 넣고 돌아갔습니다”고 했다. 이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남편들은 나라를 지키는 용입니다”고 청했다.왕은 쫓아가 하양관에 이르러 손수 잔치를 베풀면서 하서국 두 사람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용 세 마리를 잡아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만약 사실대로 이르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그러자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풀어주니 물살을 한길 남짓 튀기면서 기뻐 뛰며 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왕의 명석함에 탄복하였다.왕이 하루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를 안으로 불러들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려 묘정이 매번 금광정에 바리때를 씻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안에서 잠겼다 올랐다 하였다. 묘정이 그때마다 남은 음식을 먹이며 놀았다. 50일간의 화엄경 강의가 끝나자 묘정이 자라에게 “내가 너에게 덕을 베푼 지 여러 날인데 무엇으로 갚아주겠니”라고 말했다.며칠이 지나 자라가 작은 구슬 하나를 마치 주려는 것처럼 뱉어냈다. 묘정이 그 구슬을 가져다가 허리띠 끝에 달고 다녔는데 그런 다음 대왕이 묘정을 보고 매우 아껴 내전에 불러들여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다. 그때 잡간 한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그 또한 묘정을 아껴 함께 가도록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같이 당나라에 들어가자 당나라 황제 또한 묘정을 보고 총애하니 주변의 정승들이 우러러 마지 않았다. 점을 치는 신하 한 사람이 “이 승려를 살펴보니 하나도 좋은 관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들로부터 존경과 믿음을 받으니 반드시 특이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했다.사람을 시켜 검사해 보자 띠 끝에 작은 구슬이 보였다. 황제가 “짐이 여의주 네 낱을 가지고 있다가 지난해 하나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곧 내가 잃어버린 것이로구나”라고 말했다.묘정은 구슬을 얻은 일을 모두 갖추어 설명드렸다. 황제가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을 가만히 맞추어보니 같은 날이었다. 황제는 그 구슬을 두고 가라고 하였다. 다음부터 사람들이 묘정을 믿고 아끼는 일이 없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외세의 간섭원성왕은 즉위식에 이어 왕권 강화를 위해 축하연을 열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나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선보였다. 원성왕은 주연에서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직접 만파식적으로 태평가를 연주했다. 축하연에 참석했던 대신은 물론 모든 이들이 태평가의 연주에 맞춰 어깨동무하기도 하며 흥겨운 춤을 추었다.당시 축하연에 참석해 만파식적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술에 취했던 사람도, 근심 걱정이 많았던 사람도, 몸에 병이 들었던 사람도 모두 건강하게 활달해졌다. 축하연에는 당과 일본의 사신도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 만파식적의 신묘한 힘에 대해 보고했다.일본의 왕은 사신에게 50냥의 황금을 보내 만파식적을 한 번만 구경할 수 있도록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일본 왕의 저의를 의심해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고, 만파식적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깊이 감추었다. 일본의 왕은 끈질겼다. 다시 사신에게 1천 냥의 금을 주어 만파식적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원성왕은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은 3천 냥을 주어 위로하며 돌려보냈다.당나라 사신도 황제의 명을 받아 신라 궁궐을 찾았다. 역시 만파식적을 빌려 가려는 수작이었다. 당나라 사신은 일본 사신들이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원성왕의 측근에 있는 대신들에게 접근해 기회를 노렸다. 당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주술사들을 동원해 여차하면 술법으로 만파식적을 가져가려 했다.그러던 중 당나라 사신들은 만파식적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영물이 신라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꿩 대신 닭이 아닌 봉황을 잡은 셈이었다. 당나라 사신들은 신라 궁성 주변에 웅크리고 있는 영험한 힘을 가진 세 마리의 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신시켜 호리병에 넣어 도주했다.용의 아내들이 이러한 사실을 원성왕에게 보고해 신라의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원성왕은 자신의 길을 안내해주던 도력 높은 연희 스님을 모셔오라고 명했다.신하들이 연희스님을 모시려 파발마를 출발시키려는 때 삿갓을 깊이 눌러 쓴 훤칠하게 키가 큰 스님이 “먼 길 가는 수고를 덜어주려 하오”라며 궁으로 안내하라 전했다.연희 스님은 원성왕의 부탁을 직접 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사흘 만에 호리병 세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왕을 대동하고 월지와 황룡사, 분황사를 돌며 호리병에서 물고기를 방사했다. 물고기는 청룡, 황룡으로 모습을 바꾸어 모두 거대한 용오름으로 한차례 춤사위를 보이고는 다시 연못으로 들어갔다.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해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수행하던 연회 스님은 원성왕의 부름에 거절할 수가 없어 국사의 직을 맡았으나 나라에 위기가 발생할 때에서야 해결책을 내놓곤 할 뿐 일체 국사에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에만 정진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성대왕-①즉위…한 발 물러나 ‘힘의 구도’ 재편 천재지변에 왕좌를 움켜쥐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이다. 그는 내물왕 12대손으로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6대 혜공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김양상을 선덕왕에 즉위하게 하고 김경신은 스스로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잡고는 본격적인 권력의 구도를 재편하기 시작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어디에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혜공왕을 살해하고, 김양상을 또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경신의 왕권에 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결국 원성왕 즉위 이후 신라는 왕좌를 두고 죽이고 죽는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천 년 사직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삼국유사: 원성대왕이찬 김주완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때 원성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자리에 있었다. 왕이 하루는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깨어나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다. “두건을 벗은 것은 직위를 잃는 조짐이고, 십이현금을 낀 것은 형틀을 차는 징조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히는 징조이고요.”왕은 이를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이 은밀히 왕을 뵙고자 하였으나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다시 통지가 오기를 “한 번만 뵙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응낙하였다.“공께서는 무슨 일로 그다지 꺼리십니까?”왕은 꿈을 점친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고 “이는 곧 매우 좋은 꿈입니다. 만약 공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께 맞는 해몽을 해 드리지요.”이에 왕은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 오지 못하게 한 다음 해몽을 부탁했다.“두건을 벗은 것은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 위에 없음이요,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십이현금을 낀 것은 열두 손대까지 이어질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움입니다.”“위로 주원이 있는데 어찌 윗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 하자 “청컨대 은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지내면 됩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랐다.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죽었다. 사람들이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와 즉위하였다. 주원의 부하들이 모두 복종을 하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바로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고 김씨인데 대개 좋은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주원은 명주로 물러가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어 그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내려 주었다. 왕의 후손이 다섯인데 혜충태자, 헌평태자, 예영잡간, 대룡부인, 소룡부인 등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경신의 조용한 쿠데타김경신은 전략가이면서 행동가이지만 직접 행하는 것보다 심복이나 주변 인물을 시켜서 뜻을 이루어가는 지시형 스타일이다.김지정의 난을 유발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도 김경신의 전략에 의한 작품이다. 이 또한 김경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철저한 계획에 따른 절차였다.김양상이 선덕왕에 즉위하면서 상대등의 자리를 꿰어찬 김경신은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경신은 선덕왕과 대신들이 자신보다 위의 상재로 있는 김주원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있을 때도 노골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장기적인 충실한 계획이 있었고 그는 또 그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김경신은 상대등으로써 입지를 굳혀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인사와 재정, 공부와 형부, 예부까지 대신들을 모두 자신의 수족으로 채웠다. 그 시간이 5년이나 걸렸지만 김경신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선덕왕 재위 6년에 이른 어느 여름 태풍이 동해안을 휩쓸고 서라벌에 상륙할 때였다. 김경신은 조용하게 병부의 대신을 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태풍이 서라벌을 지나갈 무렵 알천이 범람하는 때가 거사일이요. 만약에 대비해 병사들을 배치하고, 대신들에는 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함구하시오”라고 조용히 밀지를 내렸다.김경신은 전략가답게 김주원의 집이 알천을 건너 북쪽에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권을 손에 넣는 방법을 선택했다. 알천이 범람하면 북쪽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길은 차단된다. 토함산 고개를 넘어 명활산성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지만 지세가 험하고, 우기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목 때문에 군사들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알천은 매년 여름 적어도 두세 번은 범람했다.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면 궁궐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북쪽의 집을 고집했던 데는 뚜렷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선조들의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것과 복잡한 업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김경신은 그 두 가지를 아주 적절하고도 교묘하게 이용했다. 상재의 위치에 있는 김주원에게 잡다한 민원성 업무는 모조리 넘겼다. 골치 아프게 내전에서 일하도록 주원을 묶어두고, 대내외적인 행사는 상대등인 김경신 자신이 처리하면서 실권을 휘둘렀다. “백성의 아픔을 헤아리는 중요한 일은 상재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원을 인정해주는 척하며 철저하게 내전에 고립시켜 각 부서의 실권자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다.내성적인 김주원의 성격을 파악한 김경신의 약삭빠른 처세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주도면밀해 김주원도 무어라 항변할 길도 없었다.선덕왕 6년 785년 음력 칠월 그믐께 긴 장마가 기승을 부리며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돌변해 알천이 크게 범람한 깊은 밤. 비수를 품은 김경신이 왕을 치료하는 의사를 대동하고 왕의 침소를 찾았다. 내실 주변에는 살수의 눈을 번뜩이는 김경신의 병사들이 곳곳에 몸을 숨기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불편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만 겨우 일으켜 앉은 선덕왕은 주치의가 들고 온 약사발을 청하여 받아들었다. 왕은 김경신을 지긋이 바라보며 “내가 진작 대업을 경에게 넘겨야 하는데 눈 어두운 대신들의 중언부언에 밀려 늦었소. 백성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라오”라며 부탁하고는 천천히 약사발을 기울였다. 선덕왕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과 김경신이 추진하는 전략을 인지하고, 그의 뜻을 암묵적으로 따르기로 벌써 작정하고 있었다. 선덕왕은 이제나저제나 하던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왕표를 받아든 김경신은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오. 아무도 피 흘리지 않고, 백성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겠소”라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선왕을 반듯하게 누이고는 천천히 돌아서 성큼성큼 왕좌에 올랐다. 그가 신라 제38대 원성왕으로 52대 효공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본격적인 신라 멸망으로 가는 피의 시대 개막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