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5) 황룡사 장륙

신라 24대 진흥왕은 삼촌이자 외할아버지인 23대 법흥왕의 불교를 지향하는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강한 나라를 건설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으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어머니의 섭정기간 동안 학문을 익히며 무술 연마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왕이 훌륭한 장군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흥왕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나라의 연호를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으로 명명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정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룡사를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평화를 이룩하는 통치이념을 일원화 했다. 왕궁을 크게 짓기보다 황룡사를 지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국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게 했다.◆삼국유사: 황룡사 장륙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얼마 있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의 사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살펴보니 쪽지에 글이 적혀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하고,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양을 함께 실어 놓았다.현의 관리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해 대건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마쳤다.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136푼 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다음해였다.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뒤꿈치까지 이르렀는데 땅을 적시기가 한 자나 되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어떤 이는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나 잘못된 말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공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왕의 태자가 혼자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나무랐다.태자는 왕에게 “힘만으로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일찍이 되지 않으리라 알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 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그러나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크기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데 없었지만 이루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되자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뒷날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을 주면서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왕(아육왕)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00여 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완성해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며 부탁하는 것이었다.불상이 완성되자 동축사의 삼존불도 이 절로 모셔왔다. 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진평왕 5년 갑진년(584)에 금당을 만들었다. 선덕왕 때 절의 첫 지주는 진골인 환희사이고, 2대는 자장 국통, 다음은 혜훈 국통, 다음은 의상 율사이다.지금 전쟁을 겪은 이래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 상만이 남아있다.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다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에 깃든 진흥왕의 통치이념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가지고, 친정하는 진짜 왕으로 등극했다. 가장 먼저 그가 무술수업을 하면서 함께 훈련했던 청년들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진흥왕과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신라의 최고 군사 세력으로 성장해 전쟁터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적군들을 무찔렀다.진흥왕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곡창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금관가야를 정벌해 복속시켰다. 가야를 합병하면서 왕족을 비롯한 인재들을 그대로 영입해 신라인으로 귀속시켰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친정부대로 성장해 화랑과 함께 기존의 신라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다.진흥왕의 군사진영이 짜여지자 곡창지대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해 성왕을 죽이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교두보로 삼았다.진흥왕은 연이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황초령, 마운령까지 치고 올라가 영토를 최고로 넓혀 재정적, 인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영토를 넓히면서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높여야 귀족층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국력이 안정적으로 유지 확산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왕궁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이때 후궁 미실이 진흥왕을 찾아와 조용하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지금 왕궁을 크게 짓는 것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어 갈등을 조장하며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왕의 반문에 미실은 “왕궁의 규모와 같은 절을 지어 백성들의 평화와 부강한 나라를 기원하는 법회를 지속적으로 올린다면 귀족은 물론 백성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왕실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고 했다.진흥왕은 미실 후궁의 지혜로운 제안을 옳게 여기고 “왕궁을 지으려 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땅이라는 게시니 당장 왕궁을 황룡사로 고쳐 국태민안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미실은 왕의 명령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진흥왕의 마음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에 전국에서 유명 고승들을 비롯해 승려들과 백성들이 황룡사 건축에 참여했다. 17년의 긴 건축기간 동안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태려 애썼다.황룡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왕궁과 맞먹는 대규모의 사역을 자랑하며 최고의 국찰로 완성됐다.신라의 국운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와 고구려조차 밀려오는 신라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 전전긍긍했다.진흥왕 즉위 30년을 넘어가면서 귀족세력들이 암암리에 다시 힘을 길러 왕권에 도전했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다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세우기로 했다. 일장육척에 이르는 본존불과 거대한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십대제자상을 세웠다.장륙존상이 금당의 지붕보다 높아 황룡사 금당을 뜯어내고 다시 지었다. 장륙존상 앞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불상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진흥왕의 세력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실과 귀족층의 연합세력에 밀렸다. 진흥왕은 흥륜사에 감금되면서 정복군주의 삶을 마감했다.진흥왕이 황룡사와 왕궁을 떠나 흥륜사 법당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3) 흥륜사 금당십성-혜공과 혜숙

혜공과 혜숙은 같이 신라 십성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일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특히 혜숙은 더 그렇다. 그렇지만 두 성인은 도력이 높아 일반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으나 불교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신라시대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이 출세할 수 있었던 시대로 읽혀진다.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들의 이력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 등의 이력을 흔히 볼 수 있다. 혜숙 스님은 화랑 출신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몸으로 깨우침을 주었다.혜공 스님과 원효대사가 도력을 시험하는 이야기는 설화로 전해 내려오며 오어사라는 사찰 이름까지 남겼다. 기행을 일삼았던 신라십성 혜숙과 혜공 스님의 이야기를 더듬어본다.◆삼국유사: 혜숙과 혜공의 삶-혜숙 스님은 호세랑의 무리에 섞여 지냈다. 혜숙이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은거해 20여 년을 보냈다.때마침 국선인 구참공이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게 되었다. 구참공이 가는 길가에 혜숙이 나와 말고삐를 잡으며 “저 또한 따라가고자 합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공이 허락했다.사냥하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치달으며 옷소매를 걷고 서로 앞서거니 요란스러웠다. 공은 흐뭇했다. 잠시 쉬면서 여러 줄로 앉아 고기를 삶아 다투어 먹고 권하고 했다. 혜숙 또한 더불어 씹어 먹는데 꺼려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다 구참공의 앞에 나아가 “이제 이보다 더 좋고 신선한 것이 있으니 바칠까요”라고 하니 “그래, 좋다”고 했다.혜숙은 사람들을 물리고 허벅지 살을 베어 쟁반에 올려 바쳤다.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있었다. 공은 깜짝 놀라 “어찌 이다지 지독한 짓을 하는가”라고 물었다.“처음에 저는 공을 인자한 사람이며 만물과 통할 수 있는 분이라 여겨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 살펴보니 공께서는 죽이는 데에만 온통 푹 빠져 있으시고, 남을 헤쳐 자신만 살찌우려 하니, 어찌 군자가 할 짓이겠습니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고 꼬집고는 옷을 털고 가버렸다.공은 대단히 부끄러워졌다. 혜숙이 먹던 쟁반을 보니 생고기가 그대로였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조정에 돌아와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아 들이도록 하였다. 혜숙은 부녀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었다. 사신이 더럽게 여기고 7~8리쯤 돌아오는 길에서 혜숙을 만났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성 안 우리 신도 집의 칠일제에 갔다가 파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 신도 집에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얼마 있지 않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의 동쪽에 묻어주었다. 마을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현의 서쪽에서 오다가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 가는가 물었더니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다른 지방에 가고자 하네.”서로 절을 하고 헤어졌다. 반리쯤 갔는데 구름을 타고 멀어졌다. 그 사람이 이현의 동쪽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있었던 일을 말했다. 무덤 안을 보니 오직 가죽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절이 있는데 이름이 혜숙사이니 그가 거처했음을 말한다. 또한 부도가 있다.-혜공 스님은 천진공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의 아들이었다. 어려서의 이름은 우조였다.천진공이 일찍이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때 우조의 나이 일곱이었다. 우조는 어머니에게 공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라 말하고 공의 침실로 찾아가 저절로 병이 낫게 했다.우조가 커서 공의 매를 길렀는데 공의 뜻에 꼭 들어맞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공은 우조가 성인임을 늦게야 깨달았다.“내가 지극한 성인이 우리 집에 맡겨진 것을 알지 못하고 헛말과 비례로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구나. 그 죄를 어찌 씻겠는가? 이후로는 인도자가 되어 저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는 내려와 절을 했다.신령스런 이적이 드러나면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공이라 했다. 혜공은 작은 절에 머무르며 미친 듯이 크게 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그래서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거처한 절도 그런 까닭에 부개사라 했다. 이는 삼태기의 신라 말이다.또 절의 우물 가운데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기도 했다. 나올 때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구쳐 나왔기 때문에 절의 승려들이 이를 보고 나오리라는 신호로 알았다. 그렇게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늘그막에는 항사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때 원효가 여러 경소를 찬술하면서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묻곤 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똥을 누었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라고 외쳤다. 이로 인해 오어사(吾魚寺)라 이름 지었다.또 하루는 새끼줄을 꼬아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 그리고 남문의 회랑 둘레를 묶었다. 강사에게 이 새끼줄을 3일 뒤에 거두라고 일러두었다. 강사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따라 했다. 드디어 3일이 지나 선덕여왕의 가마가 절 안으로 들어오자 지귀가 불을 질러 그 탑을 태우는데 오직 새끼줄로 묶어둔 곳만은 화를 면하였다.신령스런 자취가 자못 많았으며 마지막에는 공중에 떠서 입적을 알렸다. 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과 원효의 도술 시합혜공은 부궤화상이라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삼태기를 짊어지고 시장바닥이든 야산이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가 아무 곳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혜공은 이미 아무렇게 행동해도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자연의 힘을 빌려 병을 치료하는 수준에 이르러 가끔 기인의 이적을 일으키곤 했지만 누구도 그 행적을 알아채지 못했다.다만 고선사와 기림사에 머물며 대승불교론을 써내려가던 원효대사는 그의 행적과 높은 공부를 이해하고 가끔 선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불교의 진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원효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혜공의 기행을 부러워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깨우침에 적극 나서길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혜공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며 웃음으로 넘겨버렸다.원효가 혜공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에 장난을 부렸다. 혜공이 잠든 틈에 그의 삼태기에 죽은 쥐 여러 마리를 넣어두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채소더미로 보였다. 일어난 혜공은 삼태기에 가득한 채소를 보더니 소여물을 삶는 농부의 솥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쥐는 이미 채소로 변한 채 소여물이 되었다.다음 원효가 항사사로 옮겨가 있는 혜공을 찾아갔다. 이때 혜공이 “먼 길을 와서 배가 고플 텐데 물고기나 잡아먹자”고 권했다. 원효는 먼저 장날 쥐로 장난한데 대한 복수라 생각하고 흔쾌히 “좋다”고 응했다.둘은 어린아이들처럼 물가를 첨벙거리며 고기를 잡아 배부르게 구워먹었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마주보며 물가에서 변을 보았다. 배설되는 것들은 모두 고기가 되어 상류로 힘차게 헤엄쳐갔다. 그중 하나가 오색찬란한 빛을 자랑하며 춤추듯 두 사람을 선회하다가 또한 상류로 유유히 사라져갔다.이를 보고 둘은 서로 “저 녀석은 내 고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여시오어(如是吾魚)’라는 말이다. 이 말로인해 혜공이 머물던 항사사의 이름이 오어사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2) 흥륜사 금당십성-자장과 표훈

자장은 신분이 상당히 높은 신라 진골 대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황제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덕망이 높은 승려였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그를 돌려줄 것을 요청해 돌아오게 할 정도로 자장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었다.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은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이 되어 왕실에서 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목탑이 준공되고 황룡사 제2대 주지로 주석했다.반면 대덕 표훈은 삼국유사에서 천제를 만나 왕의 뜻을 전하는 등으로 천궁에까지 드나드는 술법을 펼치는 도력이 높은 승려로 전해진다. 표훈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 하나로 불국사에 머물면서 아들이 없던 경덕왕의 심부름으로 천제를 만나 부탁해 혜공왕을 낳게 했다.자장과 표훈은 신라시대 불교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신라 십성으로 선정됐다. 같은 금당십성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자장이 널리 알려진데 반해 표훈은 삼국유사에 잠깐 등장하는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전해지는 신라십성 자장과 표훈의 단면을 살펴본다.◆삼국유사: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대덕 자장은 김씨이고, 본디 진한의 진골 무림 소판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뒤를 이을 자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에 삼보에 마음을 기울여 천부관음에게 나아가 자식 하나 낳기를 바라며 축원했다.“만약 사내아이를 낳으면 불교의 바다에 나루터와 다리가 되도록 키우겠나이다.”문득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가슴 속으로 들어오더니 아이를 가져서 석가모니와 같은 날 태어났다. 이름을 선종랑이라 했다. 정신은 맑고 뜻이 슬기로웠으며 글은 빛나고 생각이 높아 세상의 맛에 물들지 않았다.일찍 부모를 여의고는 더욱 세상의 번잡한 것이 싫어졌다. 처자식을 버리고 밭과 동산을 내놓아 원녕사를 만들었다. 홀로 그윽하고 험한 곳에서 지내며 호랑이와 승냥이도 피하지 않고 고골관을 닦았다. 조금이라도 권태로움이 닥치면 곧 작은 방을 지어 둘레에는 가시나무 담을 두른 채 그 안에 벌거벗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면 곧 가시바늘이 찔러댄다. 머리는 기둥에 달아두고 명상이 흐려지는 것을 물리쳤다.마침 재상 자리가 비자 귀족 집안 간에 의견이 맞아 여러 차례 자장을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오지 않으면 참형을 내리겠다”는 칙명을 내렸다.자장이 이를 듣고 “내가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깨고 백년을 사는 일은 바라지 않노라”고 했다.사정을 들은 왕이 출가를 허락했다. 이에 바위 수풀 속으로 깊이 숨어서 먹는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이상한 새가 과자를 물고 와 공양하니 손으로 받아먹었다. 아련히 꿈속에 하늘의 사람이 내려와 오계를 주자 그제야 비로소 골짜기를 나왔다. 동네의 남녀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자장은 변방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며 서쪽으로 가 큰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평 3년 병신년(636)에 칙명을 받아 제자 승실 등 열 명 남짓 데리고 서쪽 당나라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았다.산에는 만수대성의 소상이 있었다. 그 나라에서 이 상에 대해 “하늘님이 기술자를 데리고 와 만든 것이다”라고 전해 내려온다. 자장은 이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겼다. 꿈에 불상이 이마를 만지더니 산스크리트어로 된 계를 주었다. 하지만 깨어나서도 해석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특이하게 생긴 어떤 스님이 오더니 해석해 주었다.또 “비록 수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한들 이 글을 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자장은 이미 성스러운 가르침을 입었음을 알고, 북대를 내려와 태화지를 거쳐 당나라 서울로 들어갔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승광별원에서 편히 지내게 해 주었다. 은총을 내림이 빈번하고 두터웠다. 그러나 자장은 그 번잡스러움을 싫어해 황제에게 글을 올리고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낭떠러지에 들어가 바위를 잇대 방을 지었다. 3년을 지내는 동안 사람과 신이 계를 받고 신령스런 응답이 날마다 번갈아 나타났다. 글이 너무 길어져 싣지 않는다.다시 서울에 들어오자 황제가 사람을 보내 위로했다. 비단 20필을 내리고 옷감으로 쓰도록 했다.정관 17년 계묘년 (643)이었다. 본국의 선덕왕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는 허락해 주면서 궁궐로 불러들여 가사 한 벌과 좋은 비단 500단을 내려 주었다. 세자도 200단을 내렸으며 여러 가지 예물을 갖추어 주었다. 자장은 자기 나라에 경전과 불상이 충분치 못하다 하여 대장경 1부와 여러 번당에서 화개까지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해 모두 실었다.본국에 이르니 온 나라가 크게 환영했다. 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쓸 것과 시중들 사람을 충분히 내려주었다. 한번은 여름에 궁중으로 불러 들여 대승론을 강독했으며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일곱날 일곱 밤을 강연했다.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어둑어둑 깔려 강당을 덮었다. 남녀 승려와 신도 모두 그 신이스러움에 깊이 감탄했다.조정에서 “불교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지만 부처님의 일을 맡아 받들고 수행하는 규칙이 없는 채 지내고 있다. 잘 짜여진 규정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잘 정돈할 수가 없다”고 의논했다. 의논에 따라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는 칙령이 내렸다. 무릇 승려들을 하나로 이끌어 가도록 모든 권한을 승통에게 주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자장과 당 태종의 약속자장은 신라 소판 무림공의 아들로 590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진평왕 12년으로 진흥왕의 정복전쟁 후유증에 의한 외세침략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자장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자식마저 등진 채 깊은 산으로 들어가 처절한 수신의 길을 걸었다. 골방에서 알몸으로 가시덤불 속에 앉아 머리는 천정에 매달아 졸음을 좇아가며 불도 삼매경에 들었다.왕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려 불렀지만 목숨을 걸고 응하지 않았다.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 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며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그에게 승려의 길을 갈 것을 허락했다.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청량산에서 기도하며 정진해 문수보살로부터 사구계를 받았다. 이에 당나라 태종의 신임과 예우를 받으며 장안에서 수도했다.당 태종 이세민은 반역 호족들을 진압하는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자 아버지인 당 고조로부터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천책상장의 별호를 얻을 정도로 호걸이었다.이러한 태종이 나라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복전쟁을 이어나가자 자장은 그의 신임을 바탕으로 신라와의 전쟁 불가론을 펼쳐 불가침의 약속을 얻어냈다. 태종이 고구려 정복의 꿈을 펼치며 승승장구 할 때의 일이라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자장은 당시 볼모로 당나라에 와있던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과 머리를 맞대어 신라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김인문은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신라가 고구려를 칠 수 있는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자장은 태종에게 신라와의 협력을 다짐하는 약속을 얻어냈다.자장은 태종의 야욕을 간파해 고구려와 맞대면하고 있던 거란을 꾀어 고구려와 전쟁하도록 종용하고, 약해진 거란과 고구려를 한꺼번에 침략하는 전략을 제시해 더욱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자장은 신라와의 동맹을 제의해 태종의 선심을 얻는데 성공했다.그러나 태종의 야욕에 찬 속마음을 헤아린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데 집중했다.이때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신라에 화엄사상을 소개하며 승려들의 질서를 세우는데도 크게 공헌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1) 흥륜사 금당십성-원효와 사파

원효는 신라 금당십성으로 알려진 것 외에도 신라 불교 대중화를 이룩한 시대를 초월한 성인으로 이미 유명한 인물이다. 원효는 삼국유사에서도 여러 장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 곳곳에 등장한다.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과정,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설총을 낳은 이야기, 기림사 설립과 혈사에서의 죽음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도술을 부리는 수준의 깨달음을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전한다. 오어사의 이름이 지어진 배경이 된 혜공과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도 등장한다.반면 사파 또는 사복 등으로 불리는 인물은 신라십성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유사 4편 의해 ‘사복이 말하지 않다’에서 원효와 함께 잠깐 언급되는 외에는 기록이 없다.이번 호에서는 원효와 사파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원효에 대한 이야기는 제4편을 소개하는 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삼국유사: 사복이 말하지 않다서울(경주) 만선북리에 과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잉태해 낳았다.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때문에 사동 또는 사복 또는 사파라고 불렀다.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맞으면서 예를 갖추었다.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그대와 내가 예전에 암소에 불경을 실었는데 지금 죽어버렸으니 함께 가서 장사를 치르자”고 했다.원효가 “좋소”라 대답하고 함께 사복의 집에 이르렀다. 원효가 시체 앞에 나아가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고 하자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고 했다. 원효가 다시 “죽고 나는 것이 고통이다”고 했다.둘이서 시신을 메고 활리산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원효가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소”라고 했다. 사복이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사라수 사이에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 역시도 그와 같은 이가 있으니 연호장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오”라 답했다.사복이 말을 마치고 풀을 뽑으니 아래에 세계가 생겨났다. 휘황찬란하고 깨끗하면서도 칠보로 장식한 난간과 누각이 장엄해 분명히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들어가니 그 땅이 갑자기 합쳐졌다. 원효는 이에 돌아왔다.후세 사람들이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도량사라고 했다. 매년 3월14일에 점찰회를 행하는 것을 항규료 삼았다. 사복의 교화는 오로지 이것을 보여 준 것뿐인데 세간에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돈다.찬한다. “깊이 잠든 용을 어찌 등한시하리/ 떠날 때 읊은 한 곡 간단도 하다/ 고통스런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니/ 연화장에 떠도는 세계가 넓기도 하다.”◆신라십성 원효와 사파-원효는 7세기에 활약한 승려로 출가 이후 환속해 무애행을 통한 정토신앙 확산에 힘쓴 인물이다. 속성은 설씨이고, 어렸을 때는 서당, 신당이라는 이름이 있다.파계하고 환속한 뒤에는 소성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이라는 뜻으로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지었다.원효는 15세에 출가,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세웠다. 낭지와 혜공, 보덕 등의 선승들에게서 불법을 배우며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고행을 했다. 한국불교사상 발달에 크게 기여해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 시호를 내려 지금도 분황사 터에 대성화쟁국사비를 건립했던 대좌가 남아 있다.문무왕 시대 661년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당항성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등의 100여 종 2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박으로 무애를 만들어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설파했다. 누구나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 백성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다.고선사에 머물며 참선을 하기도 했다. 기림사를 창건해 머물다 혈사에서 686년 신문왕 6년 70세 일기로 입적했다. 아들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했다.발생과 소멸,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 어떠한 실재도 없다는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다.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사파: 신라 왕경의 흥륜사 금당에 소상으로 모셔진 10명의 성인 중 하나다. 사복으로도 불렸다. 사복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원효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7세기에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동국이상국집 23권 남행월일기에 사복은 원효의 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진영이 원효와 진표의 진영과 함께 소래사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유명 승려로 분석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가 전생에서 사파를 만나다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전국을 떠돌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걸인의 행색으로 동냥을 얻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거들며 끼니를 얻어먹는 일꾼의 일도 줄곧 했다.설악산 큰 절에서 땔나무를 베어오고, 부엌의 일을 거드는 불목하니로 일을 하기도 했다. 원효가 강원도 어느 절에서 불목하니로 있을 때였다. 강원도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절에서는 민가와 마찬가지로 겨울에 땔 나무를 늦가을에 이미 산더미처럼 쌓아두어야 한다.그런데 그 절에 미리 불목하니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던 황소고집으로 소문 난 사복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사복은 어릴 때부터 왼쪽 팔과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불구였지만 힘이 장사이고 고집이 남달라 자신의 일을 거들어주는 것도 싫어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그의 일에는 간섭을 하려하지 않았다.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물을 길어올 때면 물동이의 절반이 출렁거리며 넘쳐 다른 사람들이 다섯 번 길어오면 될 일을 사복은 열 번은 왕복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사복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말없이 혼자 해내었다.원효가 불목하니로 들어왔을 때, 사복은 심하게 그를 구박했다. 이전에 하지 않았던 불손한 언행으로 원효를 부려먹었다. 그가 불문율처럼 행하던 물 긷는 작업과 땔 나무 베는 일도 대부분 원효에게 시켰다. 원효는 말없이 사복이 시키는 일을 해냈다. 그러고 잠자리에 들면서 늦도록 불법의 이치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고집쟁이 장애인 불목하니로 관심 밖에 있던 사복은 의외로 불법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그의 선문답 같은 질문에 가끔 공양시간에 만나는 주지스님도 당황해 했지만 사복의 불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차츰 원효와 죽이 맞은 사복은 겨울철 땔 나무를 준비하는 작업에도 원효와 함께 하길 즐겨했다. 아침 공양을 마친 사복은 여느 때처럼 원효를 불러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산에서는 장작을 마련할 마땅한 나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땔 나무를 실어 날랐지만 이골이 난 사복과 원효는 매일 수레 가득 나무를 실어왔다.늦가을 어느 날 때 이른 눈이 내린 길에 수레가 계곡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사복과 원효가 매달렸지만 속수무책으로 열길 낭떠러지로 함께 떨어져버렸다. 원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사복의 배를 뚫고 나온 썩은 대나무 줄기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구나. 다음 생에 또 만나세”라는 말을 남기며 사복은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원효는 사복의 미소 띤 죽음에서 또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8) 백률사

삼국유사 전체 총론적인 성격을 가진 기이편에서 신라의 흥망성쇠를 더듬어 보고, 각론이자 본론이라 설명하는 흥법편에서 불교의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본격적인 불교사를 통해 전해지는 불국토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탑상편을 소개한다.탑상편은 황룡사, 영묘사, 흥륜사, 백률사, 천룡사, 무장사, 민장사, 생의사 등의 유명 사찰과 종, 탑 등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삼국유사 탑상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가섭불연좌석에 이어 황룡사 장육, 황룡사 9층탑, 황룡사종과 분황사종, 흥륜사 금당십성 등의 내용이 나타나지만 기행 순서에 따라 백률사편을 먼저 소개한다.◆삼국유사: 백률사계림의 북쪽 산은 금강령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 대비상이 서 있는데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신령스런 이적이 자못 많았다. 어떤 이는 중국의 뛰어난 기술자가 중생사의 불상을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백률사 앞의 바위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두고 사람들은 “이것은 대성이 일찍이 하늘의 도리천에서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돌 위를 걸어간 발자국이다. 이제까지 문드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례랑을 구출해 돌아올 때 나타난 자취”라고도 말한다.천수 3년은 임진년(692)인데 9월7일에 효소왕이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다. 1천여 명의 무리가 따랐는데 안상과 특히 가까이 지냈다. 천수 4년 계사년 늦봄에 무리를 이끌고 금란에 놀러 가다 북명 경계에 이르렀는데 말갈족에게 잡혀가니 무리가 모두 하릴없이 돌아왔으나 안상만 뒤쫓아갔다. 이때가 3월11일이다.왕이 이를 듣고 놀라 “아버님께서 신령스런 피리를 받아 내게 전해 주셨다.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안 창고에 간직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로 국선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단 말이냐, 이럴 어떻게 할꼬”라고 말했다.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뒤덮었다. 왕이 또 깜짝 놀라 창고 안을 살펴보라 했더니 가야금과 피리 두 보배가 없어졌다. “내 어찌 이다지 챙기지 못하여 국선을 잃더니 또 가야금과 피리를 잃어버렸단 말이냐”며 한탄했다.이에 창고지기 김정고 등 다섯 사람을 가두었다. 4월에 전국적으로 “가야금과 피리를 찾는 자에게 상으로 1년치 세금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다.5월15일, 낭의 두 부모가 백률사의 대비상 앞에 가서 정성들여 여러 날을 기도했다. 그러자 홀연히 상 위에 가야금과 피리가 나타나고, 낭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두 부모가 엎어질 듯이 기뻐하며 오게 된 경로를 물었다.“제가 잡혀가 적국에서 목장 일을 하는데 갑작스레 단정한 스님이 손에 가야금과 피리를 들고 나타나 나를 따라오느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안상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이 피리가 둘로 나눠져 두 사람이 각각 하나씩을 타고, 스님은 가야금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서 돌아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고 했다.이런 경위를 들은 왕은 크게 놀라며 낭을 맞아들이고, 가야금과 피리를 안으로 들였다. 금과 은으로 만든 각각 무게가 50냥 되는 다섯 가지 그릇 두 벌, 마납가사 다섯 벌, 굵은 명주 3천 필과 밭 1만 경을 절에 바쳐 부처님 은혜에 보답했다.나라 안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관련된 사람에게 직위를 3급씩 높여주고, 백성들에게 세금 1년치를 면제해 주었다. 절의 주지승은 봉성사로 옮기고, 낭은 대각간에 임명했다. 아버지 대현 아찬은 태대각간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았다. 안상 스님은 대통으로 삼고, 창고지기 다섯 사람은 풀어주면서 각각 5급의 벼슬을 내려주었다.6월12일 혜성이 나타나 동쪽 방면이 어두워지고, 17일에는 또 서쪽 방면이 어두워졌다. 일관이 “가야금과 피리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그러자 혜성이 사라졌다. 그 뒤에 영험스런 이적이 많으나 글이 길어져 싣지 않는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과 고구려 출신 장군의 충돌효소왕 때 화랑의 국선이 되었던 부례랑은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부례랑은 국선이 된 이후 1천여 명의 낭도들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며 낭도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한편 전술훈련 등으로 호연지기를 키웠다.부례랑 일행은 강원도 강릉을 지나 설악산에 이르러 산수를 즐기며 전술훈련을 하기로 했다. 설악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계곡이 깊어 전쟁에 대한 훈련을 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그러나 당시 설악산 일대에는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가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며 1만여 명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설악산 일원에서는 신라의 조정보다 대막호리의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치고 있었다.대막호리는 장군의 후손답게 덩치가 우람하면서 무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덕이 있어 주민들이 모두 잘 따랐다. 그는 일대 목장과 농업, 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자신의 휘하에 두고, 2천여 명의 청년을 군사훈련 시키며 사병으로 키워 외부침입에 대한 방어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 부례랑 일당이 전술훈련을 하면서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대막호리 영역의 가축들을 놀라게 하는 한편 일부에서 농작물을 훼손하기도 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대막호리는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에 크게 분노해 국선 부례랑과 안산 등의 우두머리 20여 명을 체포해 가두어버렸다.당황한 부례랑이 “우리는 신라의 화랑도들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지역을 익히고 전술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으나 대막호리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풀어주지 않았다.대막호리는 “너희들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준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말을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해 세금을 바친 것으로 배부르게 먹고살면서 고마움은 모르고 오히려 핍박하다니 가당찮다”고 꾸짖으며 화를 냈다.부례랑은 대막호리의 단호함에 전령을 불러 궁중으로 급파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를 설득할 수 있는 군사나 강력한 힘을 가진 장수가 필요하다”고 짧게 사연을 적었다.효소왕은 국선 부례랑이 국내에서 볼모로 잡혔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통일 이후 신라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군사가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신문왕에 이어 효소왕 대까지는 당나라와도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교류하며 감히 신라를 넘보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국선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그때 백률사의 주지 스님은 고구려 출신 혜통 국사의 배움을 이어받은 정혜스님이었다. 정혜스님은 국내는 물론 국제 정세에 밝을 뿐 아니라 특히 고구려 신민들의 세계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백률사는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에 이은 국가적인 사찰로 왕실에서도 잦은 법회를 주관하는 신라의 주요사찰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효소왕 또한 백률사 주지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부례랑의 소식을 접하고 바로 정혜스님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왕의 밀지를 받아든 정혜스님은 무승 셋을 대동해 빠르게 설악산으로 이동했다. 화랑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자칫 갈등관계가 깊어질 뻔했던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정혜스님의 주선으로 깨끗하게 오해를 풀고 친하게 되었다.“신라에는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이고, 튼튼하고 건강한 나라를 위한 훈련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는 서로가 이해해야 합니다”는 스님의 말에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경계를 풀고 호탕한 건배를 나누며 뜨거운 관계로 발전해 나라를 위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기로 다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7)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29대 법왕은 28대 혜왕과 같이 즉위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아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당시 삼국시대는 각국이 상대국가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많이 활용했다. 잘못된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방면으로 여러 첩자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강한 나라로 자리를 굳혀가자 고구려와 백제는 앞다투어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백제 법왕은 신라가 황룡사, 분황사, 흥륜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통한 불교를 장려하고, 화랑제도를 통한 교육을 강화해 국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분석해 불교 장려정책을 쓰기로 했다.그러나 법왕의 노력은 짧은 재위기간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30대 무왕이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강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무왕은 법왕의 불교장려 정책에 따라 왕흥사를 대대적인 국찰로 완공했다. 이어 불법을 장려해 나라의 힘을 키워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다.◆삼국유사: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백제 제29대 법왕은 이름이 선이고,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황 10년 기미년(599)에 왕위에 올랐다. 이해 겨울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주며 천렵질 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 했다.다음해 경신년에는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내리고, 그때 도읍지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지으려다 기초만 닦고 돌아가셨다.무왕이 이어 아버지가 기초를 놓은 곳에 기둥을 올려 여러 해 지나 완성을 보았다. 그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며 꽃나무가 빼어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왕은 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짐승들에게도 베푼 너그러움은 온 산에 도탑고/ 돼지며 물고기도 흡족한 혜택에 사해가 인자롭다/ 갑작스레 별세했다 섭섭히 말하지 말라/ 상계 도솔천은 바야흐로 꽃다운 봄이리니.◆백제 법왕과 무왕-법왕은 백제 제29대 왕으로 신라 진평왕 시대인 599년부터 600년까지 1년 남짓 왕위에 있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여선(餘宣) 등으로 전한다. 제28대 혜왕의 맏아들, 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다.법왕은 혜왕과 같이 재위 기간이 짧아 전해지는 기록은 많지 않다. 시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불교를 숭상해 왕위에 오른 599년 12월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모두 놓아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그리고 이듬해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600년에 창건하기 시작해 무왕 때인 634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 때에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흙으로 덮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7년 충남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는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왕흥사가 법왕 이전인 위덕왕 때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법왕에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라 641년까지 집권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장(璋)으로 수나라 기록에는 여장(餘璋)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사서에는 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으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래서 신라와는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무왕은 특히 623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627년에는 무왕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에 머무르며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대규모 정벌은 실현되지 못했다.무왕은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다.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다. 611년에는 수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침공에 대해 의논했다.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관륵을 보내 천문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는데 630년에 사비의 궁궐을 중수했다.또 무왕은 삼국유사에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용의 아들로 탄생해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무왕은 재위 42년째인 641년 3월에 죽고,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이 왕위를 계승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왕과 무왕의 신라 베끼기백제 법왕은 급성장한 신라의 국력에 당황하면서도 황당해하는 한편 그 힘의 바탕에 의문을 가졌다. 백제는 다소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고 자부하던 입장에서 공격을 받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은 이후 반성의 시간을 가진데 이어 만회의 기회를 노렸다.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신라의 성장배경과 힘의 원동력, 허점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첩자를 심어 정보를 수집했다. 결국 신라가 성장한 배경에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탄탄한 정신적 결집을 찾아냈다. 또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의 교육철학이 끊임없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잡기에 나섰다.법왕은 먼저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가는 길을 불교적 심리전파라고 결론짓고, 불교중흥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법왕은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절을 짓기로 하고, 나라의 중심에 거대한 사찰 왕흥사 건설에 나섰다. 왕은 곧 나라이다는 생각에 절을 왕궁처럼 거대하게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하면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또 전국에 불교적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가장 먼저 사냥을 금지하며 살생을 못하게 했다. 백성들이 마음속에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상징적으로 엄격하게 불교적 이념을 전파했다. 지명법사와 같은 유명 고승을 초빙하고, 승려들의 공부를 지원했다.법왕의 이러한 판단은 신라가 흥륜사 건축에 이어 왕궁에 버금가는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영흥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나라의 중심부에 줄줄이 세워 운영하는데 영향을 받았다.법왕의 불교 진흥정책은 다음 무왕에 그대로 전해졌다. 무왕은 신라의 중심부까지 숨어들어 정책은 물론 지리적인 특성까지 속속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파악하고 있었다.무왕은 결국 왕흥사를 완공하고, 온 국민이 하나로 기원하며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동서 쌍탑을 건립했다. 왕흥사는 국민적 염원을 들어주는 미륵불을 안치하면서 미륵사로 이름을 바꾸어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6) 법흥왕의 불교

법흥왕은 안정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율령을 제정, 공포하는 등의 다양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불교를 공인해 나라의 국정이념으로 삼고 흥륜사를 건설하면서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법흥왕은 키가 7자나 되는 거인으로 마음도 후덕해 금관가야를 합병하고도 왕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융화정책을 펼쳤다.그러나 기존 귀족들을 중심으로 두텁게 깔렸던 민간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는 왕실 중심으로 진행하는 불교정책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법흥왕은 왕위를 물려주면서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주지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공덕을 쌓는 법회를 주관하다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도 왕권의 강화를 위해 황룡사를 지어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정복군주로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진흥왕도 말년에는 거칠부 등 귀족들의 힘에 밀려 전대 법흥왕의 뒤를 이어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삼국유사: 탑탑안항 사사성장진흥대왕이 즉위한 지 5년인 갑자년(544)에 대흥륜사를 지었다. 547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지고 왔으며, 565년에 진나라 사신 유사가 승 명관과 함께 내경을 받들고 왔다. 이제는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서 있었다. 절의 깃발을 세우고 범봉을 걸며, 불상과 승려들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밭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문이 나라 안에 자애로운 구름으로 덮였다.불국토로부터 보살이 세상에 나오고,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내려오니, 이런 까닭에 세 민족을 통일해 나라를 만들고 사해를 껴안아 한 집을 이루었다. 그래서 덕 있는 이름은 천구의 나무에 쓰고, 신령스런 자취는 은하수에 비추었으니, 어찌 세 분 성인(아도, 법흥왕, 이차돈)의 위엄으로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그 뒤에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억 등이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때는 원화 12년 정유년(817) 8월5일이다. 이때는 제41대 헌덕대왕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그 무덤에 예불하는 신도들을 모아 결사를 만들고, 매달 5일마다 그 영혼의 아름다운 소원을 위해 단을 마련하고 법회를 베풀었다.또 향전에서는 시골 노인들이 그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했는데 5일이 바로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을 따르던 날이다.아, 이런 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신하도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다면 이런 공덕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서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법흥왕은 이미 없어졌던 터에 절을 세웠으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방포를 입었다. 궁중의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대중을 널리 교화시키는 일을 맡았다.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이어받은 성인으로 왕위를 계승해 위엄으로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자 모두 순종하며 잘 따랐다. 이어 법흥왕이 머물렀던 흥륜사에 대왕흥륜사라는 편액을 내렸다.법흥왕의 성은 김씨이고,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책부원구에서는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고 했다.왕이 처음 큰 공사를 시작하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영흥사를 창건하면서, 첫 비구니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을 묘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부서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진흥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고 하였다.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역사서가 적지 않은 것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임금의 교훈이 아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또 대통 원년은 정미년(527)인데 법흥왕은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응천주에 절을 짓고 대통사라 이름하였다. 성스런 지혜는 만세의 큰일을 꾀하게 마련이나/ 구구한 입방아는 추호 같은 뜻을 기만할 뿐이다/ 법륜이 풀려 나와 금륜을 굴러가니/ 순임금 같은 시절 바야흐로 부처님의 시대로 높아지네// -원종 법흥왕에 대한 글이다.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 흰 젖 더욱 깊이 느껴지네/ 어느덧 한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 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염촉 이차돈에 대한 글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흥왕의 뜻을 이은 진흥왕법흥왕은 왕비를 여럿 두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로 시샘한 왕비들의 투기로 아들이 태어날 기미만 보이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렸다.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왕실에서부터 서서히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해 국가이념으로 삼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경영하고 싶었다. 특히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으로부터도 독립한 당당한 나라로 서고자 했다.이를 위해 왕위를 물려받을 적자는 성골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왕족끼리 결혼을 추진했다. 왕은 자신의 딸을 동생과 결혼시켜 왕족, 성골의 신분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다.아들이 없었던 법흥왕은 동생의 아들이자 딸의 아들인 삼맥종을 지극히 사랑해 아들처럼 곁에 두었다. 결국 조카 삼맥종을 태자로 삼았다. 왕의 뜻에 따라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펼 수 있는 어린 삼맥종을 진흥왕으로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법흥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자신이 세운 흥륜사에서 승복을 입고 주지가 되어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홍복을 빌다 입적했다.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10여 년을 보내며 나름대로 국정 운영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진흥왕은 18세가 되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강한 나라를 주장하며 연호를 개국이라 바꾸고 정복군주로 나섰다.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황초령, 마운령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특히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궁궐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후궁 미실의 반대로 황룡사로 바꾸어 건설하고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팔관회를 여는 등으로 불교 진흥정책에 힘을 썼다.진흥왕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제한했던 일반백성들도 공부하고 승려가 될 수 있게 했다. 원광법사 등의 이름 높은 승려가 배출되는 기반을 조성했다.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에서 훗날 사람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미륵불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 지배하는 전륜성왕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의 이름도 동륜과 사륜으로 짓고 스스로 불교를 깊이 믿었다.아울러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를 크게 활성화 시켰다. 화랑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동량으로 키우는 데 성공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그러나 진흥왕은 후궁 미실의 사심이 가득한 전략에 밀려나는 운명을 맞았다. 미실이 진흥왕의 아들 태자 동륜과 정을 나누다 동륜이 다른 후궁에 눈을 돌리자 거칠부와 손을 잡고 제거했다. 이어 진지왕과 관계를 맺으며 왕비로 간택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진지왕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그마저 제거하고, 다시 진흥왕의 손자였던 진평왕을 옹립했다.진흥왕은 죽은 태자 동륜을 위한 추도식을 전대 법흥왕이 입적했던 흥륜사에서 올리다가 미실과 거칠부의 계략에 의해 연금되어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고,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4) 칠처가람 (5·끝) 영묘사

신라는 전불시대에 이미 일곱 곳에 절이 있었다. 불국토로 발전할 인연이 있는 땅이었던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을 설명하는 칠처가람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칠처가람은 황룡사, 분황사와 같이 지금도 크게 울림을 주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사천왕사는 천왕사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 등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국립사찰로 이름이 전해져 유명하다.반면 영흥사와 담암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담암사는 오릉의 남쪽이라는 기록과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영흥사는 절터조차 분명하지 않다.◆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 중 하나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 중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다.현재 흥륜사가 있는 곳이다. 이 절터에서 금당터를 비롯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있었던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출토되면서 지금의 흥륜사가 있는 곳이 영묘사 터로 밝혀졌다.영묘사의 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영묘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개구리가 3, 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의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들었음을 알아채고 병사를 보내 소탕했다는 기록이 있다.영묘사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풍요라는 향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이것이 일할 때 일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작업능률을 올리는 노동요의 시초였다고 한다.경덕왕 23년 764년에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을 개금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세조 6년 1460년에 봉덕사의 신종을 이 절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영묘사는 조선 초기까지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담암사담암사는 담엄사(曇嚴寺)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전불 칠처가람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청전(壻請田)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진다. 절은 신문왕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청전은 사위를 맞아들인 밭이라는 뜻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 오릉 남쪽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고려 중기까지 7대 사찰의 하나로 중시되어 오다가 차차 퇴락해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담엄사지에는 삼층석탑 1기와 당간지주,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담엄사지 중앙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절터는 거의 파괴되고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당간지주와 초석 등의 남은 석재들은 박혁거세의 제전인 숭덕전을 건립하면서 홍살문과 기초 석 등으로 사용했다. 파손된 탑의 팔부신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당간지주 1기는 오릉 내부의 숲에 방치되어 있다.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농경지와 오릉 주차장 부지로 변했으나 신라시대 육부촌 시절에는 이곳에 알영양산촌이 있었다고 전한다.◆영흥사영흥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경주시 황남동에 있었던 절이라 전한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다.기록으로는 세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사학자들은 지금의 서천변 야구장 일대를 영흥사지로 본다.신라 법흥왕 22년 535년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영흥사를 창건했다. 2년 뒤 법흥왕이 왕위를 물리고 출가하자 파도부인도 법명을 묘법이라 하고 이 절에 출가해 머물렀다.진흥왕 33년 572년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부인도 법명을 묘주라 하고는 역시 영흥사에 출가했다.신문왕 4년 684년에 이 절을 관리하는 성전을 설치했다. 경덕왕 18년 759년에 감영흥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지귀의 사랑진평왕 말기에 서라벌 장터에 노리개를 팔아 노모를 봉양하는 훤칠하게 잘 생긴 청년이 살았다.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집과 일터를 오가며 땅만 살피는 사람이라 하여 지귀라는 별명이 붙었다.봄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오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는데 지귀의 점포에 곱게 단장한 아가씨 둘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봄처녀들은 솜사탕을 손에 들고 제비처럼 조잘되며 지귀 점포의 노리개를 요리조리 살폈다.지귀는 손님들의 시중을 곧잘 들며 비위를 잘 맞춰 웬만한 손님은 모두 뭐라도 하나쯤 사들고 가도록 하는 장사의 신이다. 그런 지귀의 상술은 장터에 이미 쫙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로 그의 입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손님이 들면 손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날씨 타령, 허접한 이웃 부부의 싸움 이야기라도 늘어놓는다. 손님이 없을 때는 노래로 흥을 돋우며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기도 한다.그런데 봄비 내리는 그날 운명처럼 찾아온 두 여인의 모습에 지귀는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말 한마디 못하고 아가씨들이 노리개를 들고 재잘대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가격을 묻는 손님의 말도 듣지 못했다.“이거 얼마예요” 방울 노리개와 토끼모양 머리핀을 하나씩 들고 지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쫑알거리는 두 아가씨의 추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귀가 더듬더듬 횡설수설했다.묘령의 두 여인은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의 삶 속으로 여행을 즐기는 진평왕의 공주 선덕과 시녀 만주였다. 지귀의 모습에 재미를 느낀 시녀 만주가 넌지시 장난을 걸었다. “우리 아씨 예쁘지요”라며 눈을 찡긋하자 홍당무가 된 지귀가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노리개를 포장하는 손을 심하게 떨었다.지귀는 선덕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도 설쳤다. 이튿날부터 장터에 나온 지귀는 혹여 그 처녀들이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느라 말을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선덕과 만주는 지귀의 노리개를 사가는 단골이 되었다. 지귀는 어느새 마음속 깊이 선덕을 앉히고 매번 그가 만든 노리개를 선물로 준비해 건네곤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지귀는 그만의 체취가 묻어나는 독특한 인형들을 만들었다. 지귀가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인형들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살아있는 것 같아 선덕도 매우 좋아했다.선덕이 자신이 만든 인형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지귀는 행복에 겨워 밤을 낮 삼아 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진평왕의 죽음으로 맏딸이었던 선덕여왕은 왕위를 이어받아 장례와 국정을 살피는 바쁜 일정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갈 수가 없었다.선덕여왕이 즉위 1년을 맞아 진평왕릉으로 인사차 하는 나들이 행렬을 바라보다 지귀는 까무러치게 놀라버렸다. 자신이 밤낮으로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여인이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 만주도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여왕의 곁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선덕여왕은 즉위 3주년을 맞아 영묘사로 제를 올리러 가면서 만주를 통해 지귀에게 아버지를 닮은 실물크기의 인형을 주문했다. 그 이후 지귀가 깎은 나무인형들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채 영묘사 법당에 하나씩 쌓여갔다. 마침내 지귀는 법당을 가득 채운 인형을 끌어안고 행복한 꿈을 꾸다 심화가 일으킨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3) 칠처가람 (4) 사천왕사

경주 사천왕사는 낭산자락 선덕여왕릉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호국불교의 의미를 가장 크게 충족시키는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설명된다.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대책을 주문했다. 명랑은 절을 지어 대응하려 했지만 시간이 급박하자 풀과 비단으로 절을 짓고, 12명의 유가명승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바다에 풍랑을 일으켜 적군을 수장시켰다.사천왕사는 나라를 지킨 호국사찰로 이름을 내걸었고 양지, 월명 등의 유명스님들이 거쳐 간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사찰의 터에는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 당간지주, 두 기의 귀부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목탑의 기단에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녹유신장상이 발굴 100년 만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전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양지 스님의 조각솜씨로 전해지는 녹유신장상은 북쪽의 다문천왕상이 없이 3기의 천왕을 면마다 6기씩 잇따라 배치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문무왕의 삼국통일, 호국의지와 맞물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전해지는 사천왕사는 여전히 칠처가람의 하나로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호국사찰 사천왕사신라 호국사찰 사천왕사는 경주시 낭산자락에 문무왕 19년 679년에 창건되었다.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일으켜 674년 신라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불교의 힘으로 막아내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낭산 꼭대기 선덕여왕릉과 남쪽 신문왕릉 사이에 위치해 금당과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당간지주, 귀부 2기 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사적 제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신라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해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 밀당을 펼치고 있을 무렵 674년 2월. 당나라에 인질로 있던 김인문으로부터 의상대사를 통해 신라조정에 급보가 날아들었다.백제와 고구려 자리에 도호부와 도독부를 설치해 야욕을 꿈꾸던 당나라가 그들의 도호부와 도독부를 공격한다는 빌미를 꼬투리 삼아 50만 대군을 앞세워 신라를 치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대책을 물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군의 침략이 빠르게 진행되자 절을 지을 시간이 없었다. 이에 명랑은 풀과 비단으로 오방신상을 만들고, 12명의 유가명승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으로 전해지는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문두루비법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당나라 군사들이 신라의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 풍랑이 크게 일어나 그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당의 고종은 다음해에 다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명랑대사가 또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신라 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바다에서 몽땅 수장시켜 버렸다.문두루비법을 시전한 단석이 고려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절은 금당 앞에 1기의 탑을 세우는 일탑일가람제로 운영되었다. 사천왕사는 신라 최초의 쌍탑가람으로 발전하는 형식을 보인다.사천왕사에는 명랑과 양지, 경덕왕 당시 피리를 잘 불어 달조차 멈추었다고 전해지는 월명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덕장 법민과 문두루비법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신라를 가장 신라답게 만든 왕으로 손꼽힌다.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이다. 법민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덕망과 지혜를 갖춘 장군으로 키워졌다. 아버지는 무열왕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이다.법민은 아버지의 의도적인 교육법으로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으로부터 무예수업을 전수받았다. 외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어머니와 박사들에게서 경전공부, 김유신으로부터는 무예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 김춘추의 영리함과 장군으로의 기질을 이어받은 법민은 덕을 갖춘 장수로 자랐다.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백제와의 전쟁터를 누비면서 법민은 논밭에 널브러진 백성들의 시신을 보면서 속으로 다짐을 했다. ‘나는 기필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하겠다.’문무왕은 그러한 다짐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면서 전쟁터에서는 악착같이 군사들이 적게 다치면서 이기는 전략을 구사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무술을 연마할 때는 가르치는 김유신이 오히려 만류할 정도로 지독하게 매달렸다. “훈련할 때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전쟁터에서 아군의 피 한 말은 될 것입니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실전보다 더 맹렬하게 훈련했다.전쟁터에서 법민은 김유신 뒤에서 그를 보좌하는 한편 그의 전술과 전략을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김유신의 도법과 창술 등의 무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 김유신의 무예를 고스란히 전수받은 법민의 무예 실력도 나중에는 김유신에 버금갈 만큼 뛰어나 적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법민은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었다. 아버지와 외삼촌이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킨 데 이어 고구려 멸망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백제를 정벌하면서 입은 상처로 아버지 김춘추 무열왕이 661년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문무왕으로 즉위한 법민은 전장에 나가면서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갑옷 속에 상복을 입고 투구 안에 두건 쓰는 것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문무왕이었기 때문이다.문무왕은 이기는 전쟁의 비법은 첫 번째가 적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적의 정보를 먼저 분석하는 철칙을 지켰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신라의 충실한 인재들을 알게 모르게 대거 파견해 그들로부터 정보를 입수, 분석했다.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고구려를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문무왕의 전략적 승리다. 적군 깊숙이 심어둔 첩자들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이간질하고, 전력을 약화시켜 결정적인 시기에 총공을 통해 승기를 잡았다.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물리친 문무왕은 당나라의 흑심을 알아채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짜 노골적으로 자극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문무왕은 당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 인문의 안부를 놓치지 않고 물으면서 당나라의 내정에 대한 정보를 얻어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의상대사를 비롯한 자질이 뛰어난 승려와 신하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당나라로 보내 정보를 깨알같이 챙겼다.문무왕은 당나라의 고종과 후궁에서 황비로 등극한 측천무후의 조정에 대한 장악력과 영향력까지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 군사를 빌려 삼국통일의 염원을 이룩했다. 다시 그들을 축출해 독립적인 국가로 우뚝 서는 기틀을 완벽하게 마련했다.문무왕은 측천무후의 측량하기 어려운 심기와 그의 변화무쌍한 성격이 가져오는 신라에 대한 공격성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측천무후의 심기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김인문을 비롯한 당의 조정 깊숙이 첩자를 심어두었다.문무왕의 세심한 전략 덕분에 당나라 군사의 대규모 이동을 파악하고, 빠르게 대응해 그들이 신라 땅을 밟기 전에 모두 수장시켜 난을 피했다. 2년 연속으로 바다를 통해 쳐들어오는 당군을 완벽하게 물리쳤다. 잇따른 해전에서의 패배는 당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게 했다.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문무왕은 절대적 무공을 익힌 비밀결사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평화를 위해 문무왕의 숨은 비책은 대를 이어 왕실에 숨은 전략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2) 칠처가람(3) 분황사

경주 분황사는 황룡사와 이웃해 있으면서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의 하나로 손꼽힌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634년에 건립해 자장, 원효와 같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유명 사찰이다.황룡사가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였다면 분황사는 서민들을 위한 불법을 실천했던 대중불교의 산실이었다는 차이점을 들 수 있다.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분황사에서도 불법(佛法)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원효가 많은 저술활동을 펼쳤고, 약사여래입상, 모전석탑,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 우물 등의 유적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다.설총과 고개를 돌렸다는 원효의 소상 이야기, 원성왕이 당나라 사신들에게서 되찾아 온 분황사의 용에 대한 전설, 도천수대비가를 낳은 기적 같은 영험의 이야기도 분황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신라의 불교 칠처가람, 분황사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황룡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분황사가 건립됐다.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과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오자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주석하게 했다. 이어 원효가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의 1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썼다.경덕왕 당시에 조성해 봉양했던 30만6천700근에 이르는 약사여래입상,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 등은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유실됐다.분황사에는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 남아 있다. 분황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에 파괴됐지만 조선시대에 수리하려다 오히려 더욱 파손되었는데 1915년에 다시 수리했다. 지금은 3층으로 남아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7층 또는 9층으로 추정된다.석탑의 기단에 배치된 수호상도 이색적이다. 내륙을 향한 곳에는 사자상, 동해 방향에는 물개를 힘이 넘치는 역동적인 조각상으로 세워두고 있다.석탑의 면마다 감실을 설치하고 금강역사 2구씩을 새겨 수호신으로 세웠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국보 제3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분황사에는 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돌우물이 있다. 이 우물의 외형은 팔각형으로 다듬어져 있고, 내부는 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불법에서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우물로 원불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 용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인 795년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의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병에 넣어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빼앗아왔다고 한다. 이후부터 분황사의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 부른다.분황사 우물 동편에는 고려시대 조성한 원효의 화쟁국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의 좌대가 남아 있다. 비석좌대에는 조선시대 김정희가 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분황사와 원효원효의 아명은 서당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신체적 발달과 성숙한 지혜로 주변 어른들이 깜짝깜짝 놀랄 행동을 보였다. 활달한 성격으로 무예 연마하기를 좋아하는 한편 책 읽기를 좋아했다.일찍 화랑도가 되어 천하를 떠돌며 수련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김유신의 귀신 같은 몸놀림과 칼의 춤을 본 이후로 무예수업에 심취하기도 했다.그러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불교에 천착하게 됐다. 불교에 귀의하면서 스스로 법명을 원효라 짓고 불교적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서적을 섭렵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 당의 앞선 지식을 배우며 불법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결국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요동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에게 첩자로 오인 붙잡혀 신라로 돌아와야 했다.혜공 등의 선사들에게서 불법을 익히면서 또 한계를 느껴 의상과 다시 당나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당항성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라 깨닫고는 혼자 신라로 되돌아왔다.유학길에서 돌아온 원효는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귀족중심의 왕실불교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원효는 온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방법을 찾는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이때 진덕여왕 승만이 원효의 그릇이 한없이 크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황룡사에 주석하게 하고, 수시로 황룡사에서 원효의 강론에 참여했다.원효의 거침없는 달변과 그의 훤칠한 외모에 진덕여왕은 점점 인간적인 감정에 빠져들었다. 진덕여왕과 함께 강론을 듣던 요석 또한 원효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어하면서도 때론 그것에 매달리곤 했다.진덕여왕은 원효의 강의와 인간적인 매력에 푹 빠져 황룡사 나들이를 자주하는 한편 수시로 원효를 궁으로 불러들여 국사에 대한 고견을 청취하기도 했다.진덕여왕이 말년에 이르러 원효에게 국사를 운영하는 어려움과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놓으며 곁에 머물러 주기를 당부했다. “혼자 걷는 길은 너무나 멀고 힘들게 느껴지네요. 가까이에서 손잡고 이끌어 주시길 감히 청하옵니다”며 승만은 직접적인 고백을 털어놓았다.원효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여왕을 응시하다가 “이 몸은 이미 불법에 귀의한 처지라 한 곳에 마음을 둘 수 없다 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특별한 하나의 존재에 미치기도 하지만 결국 만물에 머무는 근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라며 조용히 왕실을 벗어났다.원효는 궁에서 나와 주석하던 황룡사 금당에서 사흘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곡기를 끊은 채 오로지 염불만 외다 달이 이끄는 길을 따라 사라져버렸다.진덕여왕은 원효가 황룡사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여왕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끝내 원효를 다시 대면하지 못했다.깊은 산 속에서 도를 구하다, 나라의 곳곳을 다니며 걸식하며 불법을 전하기도 하고, 공부를 이어가던 원효는 진덕여왕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는 다시 서라벌로 돌아왔다.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고,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원효는 불법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할 방안을 모색했다.원효는 걸인의 행색으로 서라벌 거리를 떠돌며 무애춤을 추고 다녔다. 아이들과는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준다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세울 텐데”라는 노래를 불러 궁궐에까지 들리게 했다.당시 무열왕은 백제를 정벌해 사위와 딸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쳐 삼국통일을 이룩하려면 먼저 국민들의 여론을 하나로 묶고, 나라의 방향을 전달하는 이념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이때 노래를 들은 왕은 원효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요석궁으로 불러들여 딸과 인연을 맺어 주었다.원효는 요석과의 해후를 통해 설총을 낳고, 궁궐의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분황사에서 세상을 구할 이론을 하나로 엮어 책을 쓰는 일에 열중했다. “존재의 특별함은 있다. 또 없다. 마음의 근원을 따라가면 만물은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 차별 없이 자비의 마음을 가진다면 누구나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해 백성들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원효대사가 분황사에서 대중불교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1) 칠처가람 (2) 황룡사

황룡사는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나서면서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바꿔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황룡사는 진흥왕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했지만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선덕여왕 때에 구층목탑을 지으면서 현재의 사찰 규모로 발전했다.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황룡사 구층목탑과 장륙존상은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것만 보아도 황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드러난 황룡사의 역사 이면에 미실이라는 신라의 여걸이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발휘한 권력지상주의의 내력이 적힌 야사를 들어보는 것도 호사롭다.◆역사 속의 칠처가람, 황룡사황룡사는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황룡사는 칠처가람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다.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553년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이를 고쳐 사찰로 지으면서 황룡사라 했다. 공사는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했다.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는 황룡사를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고, 그들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바로 신라의 땅이라 인식했다.현재까지 발굴에 따르면 황룡사 부지는 약 8만여㎡에 달한다. 유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사역지 주변에는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남아 있다.삼국시대 가람 배치의 정형인 일탑에 일금당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일렬로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 공히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황룡사에는 신라 삼보 중에서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고, 화성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어 절의 품격을 짐작하게 한다. 또 황룡사의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도 유명하다.역대의 왕들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황룡사에 친행해 100명의 고승이 모여 백고좌강회를 열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황룡사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지 옆을 지날 때 신인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큰아들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 탑을 지으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라고 했다.자장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귀국해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했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 건축했다.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탑의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했다.황룡사 구층목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의 아홉 나라를 상징한다. 이는 이들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목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했다. 고종 25년인 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다.황룡사에는 또 장륙존상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에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 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 남아 있다.황룡사에는 또 성덕대왕 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몽고군이 침략해 방화로 없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황룡사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황룡사와 미실황룡사는 진흥왕이 왕권의 위상을 드러내고, 불교를 통한 국가통치이념을 정립해 안정적인 국가 경영, 귀족과 백성들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건립한 국가사찰이다.진흥왕의 이 같은 황룡사 건립에 대한 생각은 후궁 미실의 욕심과 딱 맞아떨어졌다.미실은 신라시대 왕실의 여인을 배출하는 대원신통이라는 혈통의 계승자로 왕실의 여인이었다. 미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옥진에게 색공을 교육받았고, 출중한 외모에다 왕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 학문을 익혔다. 뿐만 아니라 음악과 다양한 기예를 익혀 뛰어난 인물로 왕실은 물론 저잣거리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미실은 자신이 타고난 미모와 자질을 십분 활용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의 재주에 못지않은 욕심이 왕의 권세와 화랑도까지 손아귀에 넣고 당대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게 했다.미실은 처음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과 일가를 이루었으나 뛰쳐나와 화랑 사다함과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왕가로 돌아와 진흥왕의 후궁이 되어 본격적인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미실의 욕심은 진흥왕의 뜻과 교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진흥왕은 미실의 뜻에 따라 정복군주로 백제와 고구려 땅을 침략해 영토를 넓히는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황룡사도 미실의 입김으로 태어났다. 진흥왕 심맥종이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궁을 크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미실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할 나라의 사찰을 크게 일으킨다면 왕의 권위는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에 마음을 바꿔 황룡사를 지었다.미실은 황룡사 금당 옆에 왕실의 복을 비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미실은 궁궐과 황룡사를 오가며 권력의 최고 실세로 행세해 진흥왕 이후 진지왕 옹립과 폐위, 진평왕 옹립에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었다.미실의 탁월한 정치력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색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진흥왕이 직접 칼을 들고 백제, 고구려 정복전쟁의 선두에 나서고 있을 때 태자로 임명되었던 진흥왕의 큰아들 동륜도 미실의 치마폭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미실의 정치적 사랑방은 황룡사 사당이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도 황룡사에서 피로를 풀며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해소해 정치적인 불만을 잠재웠다.미실의 정치적 야욕은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다. 거칠부와 손잡고 진흥왕을 흥륜사로 유폐시킨 이후 진지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미실을 왕비로 책봉하겠다던 진지왕이 약속을 어기고 여색을 탐하자 진지왕도 미실의 손에 처참하게 왕좌에서 쫓겨나야 했다.미실은 황룡사 사당에서의 정치로 가야출신 노리부와 손잡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그리고는 다시 왕의 여자로 실력을 행사하다 진평왕 10년 609년에 병들어 죽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0) 칠처가람 (1) 흥륜사

신라에 불교가 시작된 시기는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고 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시기는 미추왕과 눌지왕 때로 추정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신라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왕실에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라에서 최초로 창건한 사찰은 흥륜사라는 기록이 있다. 흥륜사에서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이 법회를 주관했다. 나중에는 진흥왕에 이어 법흥왕까지 승복을 입고 흥륜사 주지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지금 알려지고 있는 흥륜사는 발굴 과정에서 영묘사 명문의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 자리로 추정되고, 경주공고 자리가 흥륜사 터로 짐작된다.신라는 불국토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에, 석가모니가 불법을 전파하기 이전에 신라에 불법을 전했던 일곱 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칠처가람이다. 전법시대의 불적 칠처가람을 둘러본다.◆삼국유사: 칠처가람아도본비에 아도의 불법 공부와 칠처가람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인데 정시 연간 240~248년에 조조의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를 가까이해 아도를 낳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출가하라 하였고, 열여섯에 위나라로 가서 굴마를 만나 뵌 다음 현창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다.열아홉 살에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이 나라는 이제껏 불교를 모르고 있다. 지금부터 3천여 달이 지난 다음, 계림국에 성왕이 나타나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라며 칠처가람에 대해 이야기했다.서울 안에 일곱 군데의 가람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 둘째는 삼천기, 셋째는 용궁의 남쪽, 넷째는 용궁의 북쪽, 다섯째는 사천의 끝, 여섯째는 신유림, 일곱째는 서청전이다.모두 전생의 부처님 때 가람터요 불법의 물이 오래도록 흐를 땅이다. 너는 거기에 가서 큰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마땅히 동쪽에서 부처님 앞에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아도는 불교를 전파하러 계림에 이르러 왕성의 서쪽 마을 지금의 엄장사에 머물렀다. 그때는 미추왕이 즉위한 지 2년인 계미년(263)이었다.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가르치겠다고 청했으나 이전에 보지 못한 바라 꺼리며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피신하여 속림에 있는 모록의 집에 숨었다.미추왕 3년에 성국공주가 병에 걸렸으나 무당과 의사가 고치질 못하자 사방으로 신하를 보내 의사를 찾았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대궐로 나아가 그 병을 깨끗이 고쳤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물었다.“하찮은 중은 아무것도 얻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자 할 따름입니다.”왕은 허락하였다. 명령을 내려 공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풍속이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집을 세우고 살면서 가르쳤다. 때때로 하늘에서 꽃이 땅에 내리기도 했다. 이 절의 이름이 흥륜사이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인데 스님에게 와서 비구니가 되었다. 삼천지에도 영흥사라는 절을 짓고 살았다.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 아도화상이 입적한 이후로 신라에 전파되었던 불교도 사라지게 되었다.◆칠처가람: 천경림 흥륜사흥륜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미추왕 때 창건했다는 설과 눌지왕 때에 창건했다는 설이 부딪치고 있다. 대부분 눌지왕 때로 보는 것이 정설로 통용된다.신라시대 당시에는 흥륜사도 국가사찰로 건립, 운영됐지만 여전히 초가로 검소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사찰이 건립되어 운영되었지만 왕이 죽고 자연히 폐허가 되었다.흥륜사는 법흥왕 당시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었다. 이차돈의 죽음에 따른 이적에 놀라고, 감탄해 천경림에 대가람을 중창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진흥왕 5년 544년에야 완공해 대왕흥륜사라 했다.그리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승려 되기를 해제하고, 일반 백성에게 출가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진흥왕은 만년에 스스로 삭발하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아 흥륜사의 주지가 되었다.흥륜사는 나라가 주관하는 도량으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거나 복을 비는 가람으로 발전했다.흥륜사와 관련된 전설과 설화도 다양하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전 재산을 보시해 재상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절이 흥륜사다. 또 호랑이 처녀와 인연을 맺어 출세가도를 걷게 된 나무꾼 청년 김현의 이야기도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염불하는 복회에서 비롯된다.흥륜사가 유명한 것은 금당에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의상·혜숙·안함의 그림이 있었고,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자장·혜공·사파의 상이 그려져 있었다.흥륜사 금당의 좌우에는 행랑이 있었고, 좌경루와 남지 연못과 탑이 있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길달문은 귀교를 건축했다는 비형의 무리 중 길달이라는 도깨비가 지었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흥륜사는 방화와 중수를 거쳐 여러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된 이후 완전히 폐사되었다.남은 유물로 석조와 배례석이 있다. 흥륜사 석조는 신라의 석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조선시대 동헌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흥륜사의 비사흥륜사는 창건할 때부터 국가의 사찰로 승려는 물론 법회에 참석하는 인사들이 왕을 비롯한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어서 경비도 삼엄했다. 때문에 경비를 담당하는 부서도 정부의 병부에서 직접 관여했다.진흥왕은 화랑도를 결성하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힘을 키우는 기본으로 삼았다.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의 세력에 힘입어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그러나 진흥왕 33년에 태자로 간택했던 아들 동륜이 죽자 흥륜사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선봉에 서서 전장을 누비던 정복자로서의 당당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당시 진흥왕 하반기 정국의 전반에 실질적인 권력자로 행세하던 거칠부는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떠올랐다. 거칠부는 진흥왕이 자주 드나드는 흥륜사 경비부터 자신의 직속 부하들로 전면 교체했다.이어 진흥왕의 후계자로 둘째아들 사륜을 옹립하는 절차를 서둘렀다. 거칠부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미실에게 사륜을 왕으로 추대하면 왕후로 간택하겠다는 밀약을 하고 진흥왕 제거 수순을 밟았다.거칠부는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동륜태자의 네 번째 제를 올리는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진흥왕이 제를 올리는 시간에 거칠부의 부하들은 진흥왕의 호위 무사들을 소리없이 제압했다. 그리고 흥륜사 출입을 완전히 폐쇄하면서 진흥왕을 감금하고 영원히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거칠부는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둘째 아들 사륜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진지왕이다.거칠부는 상대등의 지위에 올라 진지왕을 조정하며 나라의 살림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진지왕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일찍 체념하고 향락에 빠져버렸다. 미실 또한 향락에 빠진 진지왕이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노리부와 진흥왕의 유서를 핑계로 진지왕을 폐위하고, 진흥왕의 첫째 아들이자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인 백정을 진평왕으로 옹립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8) 가락국가 (하) 대가야

가야는 52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 묻혀 우리의 기억에도 희미하다. 최근 고분군에서도 가야의 섬세하고 화려한 역사문화가 발견되면서 가야의 존재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가야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 삼국 사이에 끼어 약소국의 설움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신라에 흡수 통합되면서 가야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혀 잊히고 있었다.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흡수하면서 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대로 그 땅을 다스리며 신라의 일부 조직처럼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다. 때문에 문무왕이 모계 쪽으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15세손이라 스스로 칭했다.가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라에 병합되어 영원히 존속하며 지금까지 정신과 핏줄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삼국유사: 가락국가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수로왕은 내게 15대 시조가 된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 남아 있으니, 신라 종묘에 합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그리고는 사당에서 가까운 좋은 밭 30경을 주어 제사지낼 비용으로 쓰게 하고, 이를 왕위전이라 불러 본토에 부속시켰다. 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관장하며 여러 가지 제물을 갖춰 제사를 지냈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다음부터 용삭원년 신유에 이르는 60년 동안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거르기도 하였다. 문무왕이 조상을 받들어 효성을 다하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서 다시 받들게 했다.신라 말년에 충지 잡간이란 이가 있었다. 금관성을 쳐서 성주장군이 되었는데 영규 아간이 성주장군의 위세를 빌어 사당에 제사지내는 것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지냈다. 단오날 사당에 고하는데 들보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부러져 거기에 눌려 죽었다.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쳐서 사당으로 달려오더니, 간원이 차린 제물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리고서 제사지냈다. 그러나 세 번째 잔을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 집으로 가자마자 죽었다.옛 사람의 말에 “함부로 지내는 제사는 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했다. 또 도적들이 “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다”고 하면서 훔쳐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활에다 화살을 메긴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방을 향해 비 오듯 화살을 쏘았다. 7~8명을 맞춰 죽이자 나머지 도적의 무리가 달아났다. 그들이 며칠 뒤 다시 왔을 때에는 30여 척이나 되는 큰 구렁이가 눈빛을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사당 곁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였다.건안 4년 기묘년(199)에 처음 사당을 세운 다음부터 지금 왕이 즉위한 지 31년 되는 대강 2년 병진(1076)에 이르기까지 무릇 878년이 지났다. 그러나 쌓아올린 흙이 무너지지 않았고, 그때 심은 나무도 말라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안에 벌려놓은 수많은 옥 조각들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순화 2년(991)에 김해부 양전사였던 조문선이 “수로왕 묘에 소속된 전답의 결수가 많습니다. 마땅히 15결로 해서 옛 관례에 따르고, 그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들에 나눠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조사 보고했다.그때 조정에서 “하늘에서 내린 알이 성군으로 변하여 왕위에 올라 158세나 되었으니 저 삼황 이후로는 어깨를 겨룰 자가 드물다. 왕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선대로부터 사당에 전답을 소속게 했는데 지금 줄인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라며 왕의 뜻을 전했다.양전사가 거듭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맞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 두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김해부에 부역하는 호정들에게 지급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양전사의 꿈에 7~8명의 귀신이 밧줄과 칼을 들고 나타나 “네가 큰 죄를 지었으니 죽여야겠다”며 꾸짖었다.양전사가 형벌을 받는 줄 알고 괴로워하다가 깜짝 놀라 깨었다. 그리고는 이내 병이 들어 밤중에 달아나다가 병이 심해져서 관문을 지나다 죽고 말았다.가야는 수로왕이 건설해 아들 거등왕, 마품왕, 거질미왕, 이시품왕, 좌지왕, 취희왕, 질지왕, 겸지왕을 거쳐 10대 구형왕 42년 임오년(562)에 신라에 항복하며 나라가 없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야는 멸망하지 않았다신라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18세부터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하게 되면서 정복군주로 탈바꿈했다. 정복군주로 나설 때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던 장군 이사부와 손잡고 가야를 합병하고 백제, 고구려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진흥왕은 친정체제에 접어들어서도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에 휘둘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서히 주변 세력들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가장 깊숙이 손을 잡은 세력이 가야국의 왕족들이다. 가야 구형왕의 맏아들 노리부는 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며 특히 무술을 잘하는 용맹스런 장수였다.진흥왕은 항상 노리부를 자기 옆에 두고, 국정을 살피는 일이나 정복전쟁에 나설 때도 노리부와 함께 했다. 병부령에서부터 가야의 귀족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기존 귀족층들을 견제하게 했다.미실이 진흥왕의 힘을 등에 업고, 뒤로는 거칠부와 손잡고 진지왕을 옹립했다. 이때 노리부는 한발짝 뒤로 물러나야 했다. 진지왕이 여색에 빠지고, 거칠부가 상대등에 올라 실권을 휘두르자 미실은 노리부를 불러들여 다시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옹립했다.노리부가 직접 실력행사를 통해 거칠부를 제거하고, 진평왕을 옹립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해 상대등에 올랐다. 노리부가 진평왕을 옹립한 것은 미실의 영향도 있었지만 진흥왕이 일찍부터 가야 왕족들을 가까이 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보살핌에 대한 은혜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야는 멸망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가야의 중심인물들은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를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성장 발전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도 노리부의 손녀 사위이자 가야 출신인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7) 가락국가 (상) 금관가야

가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삼국유사에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이 사람으로 변해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김수로왕이 최초로 가야의 시조가 되었다. 금관가야가 초기에는 6가야국의 맹주였다. 신라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후기에는 대가야가 가야의 맹주로 떠올랐다.가야는 520여 년간 지속되면서 상당히 세련된 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금관가야 유적지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화려한 목걸이, 팔찌, 청동거울과 철제 제품들, 섬세하게 다듬은 토기류가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가야가 신라에 정복되었지만 왕족과 백성들이 신라의 귀족으로, 정부 주요 대신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가야의 후손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삼국유사는 가야국가에 대해 제법 길게 소개하고 있지만 금관가야와 대가야 두 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삼국유사: 가락국가천지가 처음 열린 후로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란 없었다. 또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있다는 것이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무릇 1만 호에 7만5천 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산과 들에 살면서 스스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농사를 지었다.마침내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42) 3월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의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2~300명의 무리가 여기에 모였더니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누가 없는가”라고 했다.9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있습니다” 하니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고”라고 했다. “구지입니다”라 대답하자 또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에게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한 까닭으로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고 했다.9간들이 그 말대로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보랏빛 줄만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아 있었다. 줄 끝을 찾으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으로 된 합이 보여, 그것을 열어 보자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여러 사람이 모두 다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 얼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아두고 무리는 각자 흩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여러 사람이 다시 모여 합을 열었더니 여섯 개의 알이 변하여 용모가 매우 뛰어난 어린아이로 되었다.이들이 나날이 자라 10여 주야를 지나니 키가 9자로 은나라 천을과 같은 얼굴이 용 같아 한나라의 고조라 할 수 있었다. 눈썹이 여덟 가지 빛깔인 것은 도당의 요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의 순임금과 같았다.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하여 이름을 수로 또는 수릉(수릉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시호이다.) 이라고도 했다.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도 하였으니 곧 여섯가야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가야의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질박과 검소를 바랄 뿐으로 집에 이은 이엉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된 계단도 3자였다.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서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시조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런 이는 오직 그 분일까 한다. 그런데 그가 나라를 새로 다스리고 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다. 경들은 반드시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꿈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오히려 귀에 쟁쟁할 뿐이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 멀리 남해에 가서 찾기도 하였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보잘것없는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라 했다.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아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는 청이 있었으나 기어코 듣지 않았소이다.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요”라고 했다.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보냈다.이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거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공로는 마치 도산이 하나라를 돕고 당원이 교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그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서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영제 중평 6년은 기사년(189)인데 3월1일에 왕후가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는 157세.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진 것처럼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왕은 늘 베개 위에서 홀아비의 슬픔을 노래하며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10년이 지난 헌제 건안 4년은 기묘년(199)인데 3월23일에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는 158세. 나라 안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비통해 했는데 왕후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했다. 곧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00보 되는 빈궁을 세웠다. 여기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라 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금관가야김수로왕이 가야국을 건국하고 모두 6개 이웃과 연맹체제를 맺어 철기를 활용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야는 풍부한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치기도 했다. 일본과의 교류도 넓혀 한때는 신라, 백제, 고구려와 함께 4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가야는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어렵게 나라를 유지해야 했다.김수로왕은 서역으로부터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침략해온 석탈해군단을 맞아 전쟁을 치렀다. 석탈해는 거대한 체구에다 큰 환두대도를 수수깡 다루듯 자유롭게 휘두르며 뛰어난 무술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수로왕의 실력과 전술전략에 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법흥왕 시대에 신라는 가야를 공격해 상당 부분 토지를 빼앗고, 신라에 복속시켰다. 이때 법흥왕은 가야왕을 그대로 영토를 다스리도록 했다. 당시 가야 후손들이 신라의 중심귀족으로 성장하고, 대신으로 활약하기도 했다.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전하는 구형왕의 후손 김유신 장군은 신라의 장군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진흥왕이 금관가야를 비롯 가야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신라에 합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신라의 중신으로 등용해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운영했다.진흥왕의 가야귀족 우대정책은 결국 진흥왕의 적자승계 원칙을 고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진흥왕의 후의를 입은 가야의 귀족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흥왕의 장자 동륜의 적자 진평왕을 옹립했다.가야라는 나라 이름은 사라졌지만 가야인들은 신라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김해김씨,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어 대대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6) 후백제 견훤 (하) 후백제 멸망

후백제 견훤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들들에게 고려에 투항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아들들은 오히려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맏아들 신검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견훤은 금산사에서 지키는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병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고려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의탁했다.견훤의 사위가 왕건에게 내부에서 협조할 것을 공모하며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힘입어 왕건은 쉽게 후백제를 점령하고 이어 후삼국을 통일했다.견훤은 아들들을 죽이고자 했지만 왕건이 그들을 용서하는 바람에 화가 치밀어 결국 등창으로 70세 일기로 죽음을 맞았다. 후백제는 견훤이 전주에서 나라를 일으킨 지 47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병신년(936) 정월에 견훤이 그의 아들에게 “이 늙은 아비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워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 군보다 두 배가 되나 오히려 불리할 뿐이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힘을 빌려주는 것 같다.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의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 셋은 모두 듣지 않았다.견훤은 처첩이 많아서 아들을 10여 명이나 두었다. 넷째 아들 금강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이 이를 알고 몹시 근심했다.이때 양검이 강주도독이 되고 용검이 무주도독이 되어 신검만 견훤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강주와 무주의 두 주에 사람을 보내 모의하여 청태 2년 을미(935) 봄 3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 불당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살해했다. 신검은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멀리 대궐 뜰에서 함성이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왕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의 군사업무와 정치에 어두워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하였다 하여 여러 장수가 축하하는 환호성입니다”고 했다. 얼마 후 아버지를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으로 지키게 했다.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사람과 시비 및 나인 능우남 등과 갇혀 있었다. 4월에 술을 빚어 지키는 군사 30명에게 취하도록 먹였다. 그리고 도망해 고려에 도착하자 견훤이 태조보다 10년이나 연상이라 하여 존칭으로 상부라 하고 남궁에 편안히 살도록 했다.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는 그의 처에게 “대왕이 40여 년간 노력한 끝에 대업의 성과가 이루어졌는데 하루아침에 가족 간의 불화로 나라를 잃고 고려로 가셨소이다. 고려의 왕공은 인자하고 후덕하며 겸손하고 검소해서 민심을 얻었소. 고려 왕공에게 공손하게 처신하여 뒷날 돌아올 복을 도모합시다” 하니 그의 처가 “당신의 말씀은 바로 저의 뜻입니다”고 했다.이에 936년 2월에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왕께서 정의의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데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의 사자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어 보내면서 영규에게 “만약 은혜를 입게 되어 하나로 합세해서 길이 막히지 않게 되면 바로 장군을 먼저 뵌 후에 대청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형님으로 섬기고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라고 했다.6월 견훤이 태조에게 “늙은 이 몸이 전하에게 의탁한 까닭은 전하의 신령스런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을 빌려주시어 적자난신을 섬멸하게 하시면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외다”고 했다.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며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를 시켜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서둘러 가도록 했다.가을 9월 태조는 3군을 거느리고 천안으로 가서 군사들을 합하여 일선으로 진군하니 신검이 군사들로 대항했다.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태조의 군대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방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병영을 바라보니 홀연히 검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일어나 우리 군대 쪽에서 적진 쪽으로 향하여 갔다. 이에 북을 치며 행군하여 진격하니 백제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고려군의 위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지 앞에 와서 항복했다. 태조가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총대장인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고 했다.태조가 장군 공훤 등에게 명하여 삼군이 일시에 협공하여 진격하게 하니 백제 군사가 궤멸하여 패주했다. 황산 탄현에 오니 신검이 두 아우와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와서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도 모두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처자들과 함께 상경할 것을 허락했다.태조가 능환을 문책하여 “처음에 양검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운 것은 너의 꾀였으니 신하가 된 의리로 보아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니 능환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명령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신검이 참람되게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의 위협이었지 그의 본심이 아니었고 게다가 항복하여 죄를 빌었으니 특별히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해 주었다. 견훤이 이를 분하게 여겨 등에 종기가 생겨 수일 만에 황산 불사에서 죽었다. 9월8일이며 나이는 70세였다.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안도하며 늙은이나 젊은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세워 진나라 천복 원년(936)까지 도합 45년 만인 병신년에 멸망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백제의 몰락견훤은 신라 사람이다. 그는 타고난 체질이 강건하고 굳세어 전쟁터를 누비는 무장으로 성장했다. 신라 비장으로 승진해 전쟁터를 누볐지만 자신의 꿈에는 미치지 못했다. 전장에서는 성난 호랑이와 같이 지칠 줄 모르고 적을 몰아붙이는 견훤의 용맹스런 기세에 군사들도 저절로 힘을 얻어 연전연승하며 부하들이 그를 따랐다.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든 것은 자신의 상사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그의 무공과 용맹스런 기질에 반해 따르는 군사가 많아지자 이를 시샘한 장군이 논공행상에서 견훤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 견훤은 어느 날 전쟁에서 승리하고 회포를 푸는 축제장에서 노골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장군의 목을 베어 버리고 따르는 군사들과 함께 신라를 등졌다.더욱이 이날 전쟁터에서 자신을 도와 날랜 모습을 보이던 병사가 남장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인은 견훤이 장군의 목을 베어 넘긴 자리에서 평생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자 부인으로 삼았다. 여인이 신라에 한을 품은 백제 장군의 딸, 무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견훤은 고려를 견제하면서 기필코 신라를 멸망시키리라 다짐하고 신라 공략에 치밀한 전략을 세워 기어이 경애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견훤이 신라를 치는 과정에서 유독 횡포를 심하게 부렸던 까닭도 그가 아끼는 무념의 복수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그러나 견훤도 오랜 전쟁에 지쳤다. 또 전쟁터에서 만난 그의 다섯째 부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궁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군사력도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아들들의 후계 구도에 대한 경쟁이 심해지면서 군의 기강도 해이해지기 시작했다.또 넷째 아들인 금강을 가장 신임하며 후계자로 삼을 뜻이 있었는데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계구도를 두고 아들들의 경쟁으로 후백제의 운명이 엇갈리는 결과를 빚었다.935년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함에 따라 견훤은 태조에게 투항하고, 그의 아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936년 견훤이 왕건과 함께 손잡고 일선 군에서 싸워 후백제가 멸망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