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56) 후백제 견훤 (하) 후백제 멸망

후백제 견훤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들들에게 고려에 투항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아들들은 오히려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맏아들 신검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견훤은 금산사에서 지키는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병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고려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의탁했다.견훤의 사위가 왕건에게 내부에서 협조할 것을 공모하며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힘입어 왕건은 쉽게 후백제를 점령하고 이어 후삼국을 통일했다.견훤은 아들들을 죽이고자 했지만 왕건이 그들을 용서하는 바람에 화가 치밀어 결국 등창으로 70세 일기로 죽음을 맞았다. 후백제는 견훤이 전주에서 나라를 일으킨 지 47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병신년(936) 정월에 견훤이 그의 아들에게 “이 늙은 아비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워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 군보다 두 배가 되나 오히려 불리할 뿐이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힘을 빌려주는 것 같다.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의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 셋은 모두 듣지 않았다.견훤은 처첩이 많아서 아들을 10여 명이나 두었다. 넷째 아들 금강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이 이를 알고 몹시 근심했다.이때 양검이 강주도독이 되고 용검이 무주도독이 되어 신검만 견훤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강주와 무주의 두 주에 사람을 보내 모의하여 청태 2년 을미(935) 봄 3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 불당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살해했다. 신검은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멀리 대궐 뜰에서 함성이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왕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의 군사업무와 정치에 어두워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하였다 하여 여러 장수가 축하하는 환호성입니다”고 했다. 얼마 후 아버지를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으로 지키게 했다.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사람과 시비 및 나인 능우남 등과 갇혀 있었다. 4월에 술을 빚어 지키는 군사 30명에게 취하도록 먹였다. 그리고 도망해 고려에 도착하자 견훤이 태조보다 10년이나 연상이라 하여 존칭으로 상부라 하고 남궁에 편안히 살도록 했다.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는 그의 처에게 “대왕이 40여 년간 노력한 끝에 대업의 성과가 이루어졌는데 하루아침에 가족 간의 불화로 나라를 잃고 고려로 가셨소이다. 고려의 왕공은 인자하고 후덕하며 겸손하고 검소해서 민심을 얻었소. 고려 왕공에게 공손하게 처신하여 뒷날 돌아올 복을 도모합시다” 하니 그의 처가 “당신의 말씀은 바로 저의 뜻입니다”고 했다.이에 936년 2월에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왕께서 정의의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데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의 사자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어 보내면서 영규에게 “만약 은혜를 입게 되어 하나로 합세해서 길이 막히지 않게 되면 바로 장군을 먼저 뵌 후에 대청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형님으로 섬기고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라고 했다.6월 견훤이 태조에게 “늙은 이 몸이 전하에게 의탁한 까닭은 전하의 신령스런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을 빌려주시어 적자난신을 섬멸하게 하시면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외다”고 했다.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며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를 시켜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서둘러 가도록 했다.가을 9월 태조는 3군을 거느리고 천안으로 가서 군사들을 합하여 일선으로 진군하니 신검이 군사들로 대항했다.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태조의 군대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방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병영을 바라보니 홀연히 검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일어나 우리 군대 쪽에서 적진 쪽으로 향하여 갔다. 이에 북을 치며 행군하여 진격하니 백제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고려군의 위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지 앞에 와서 항복했다. 태조가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총대장인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고 했다.태조가 장군 공훤 등에게 명하여 삼군이 일시에 협공하여 진격하게 하니 백제 군사가 궤멸하여 패주했다. 황산 탄현에 오니 신검이 두 아우와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와서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도 모두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처자들과 함께 상경할 것을 허락했다.태조가 능환을 문책하여 “처음에 양검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운 것은 너의 꾀였으니 신하가 된 의리로 보아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니 능환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명령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신검이 참람되게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의 위협이었지 그의 본심이 아니었고 게다가 항복하여 죄를 빌었으니 특별히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해 주었다. 견훤이 이를 분하게 여겨 등에 종기가 생겨 수일 만에 황산 불사에서 죽었다. 9월8일이며 나이는 70세였다.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안도하며 늙은이나 젊은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세워 진나라 천복 원년(936)까지 도합 45년 만인 병신년에 멸망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백제의 몰락견훤은 신라 사람이다. 그는 타고난 체질이 강건하고 굳세어 전쟁터를 누비는 무장으로 성장했다. 신라 비장으로 승진해 전쟁터를 누볐지만 자신의 꿈에는 미치지 못했다. 전장에서는 성난 호랑이와 같이 지칠 줄 모르고 적을 몰아붙이는 견훤의 용맹스런 기세에 군사들도 저절로 힘을 얻어 연전연승하며 부하들이 그를 따랐다.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든 것은 자신의 상사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그의 무공과 용맹스런 기질에 반해 따르는 군사가 많아지자 이를 시샘한 장군이 논공행상에서 견훤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 견훤은 어느 날 전쟁에서 승리하고 회포를 푸는 축제장에서 노골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장군의 목을 베어 버리고 따르는 군사들과 함께 신라를 등졌다.더욱이 이날 전쟁터에서 자신을 도와 날랜 모습을 보이던 병사가 남장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인은 견훤이 장군의 목을 베어 넘긴 자리에서 평생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자 부인으로 삼았다. 여인이 신라에 한을 품은 백제 장군의 딸, 무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견훤은 고려를 견제하면서 기필코 신라를 멸망시키리라 다짐하고 신라 공략에 치밀한 전략을 세워 기어이 경애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견훤이 신라를 치는 과정에서 유독 횡포를 심하게 부렸던 까닭도 그가 아끼는 무념의 복수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그러나 견훤도 오랜 전쟁에 지쳤다. 또 전쟁터에서 만난 그의 다섯째 부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궁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군사력도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아들들의 후계 구도에 대한 경쟁이 심해지면서 군의 기강도 해이해지기 시작했다.또 넷째 아들인 금강을 가장 신임하며 후계자로 삼을 뜻이 있었는데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계구도를 두고 아들들의 경쟁으로 후백제의 운명이 엇갈리는 결과를 빚었다.935년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함에 따라 견훤은 태조에게 투항하고, 그의 아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936년 견훤이 왕건과 함께 손잡고 일선 군에서 싸워 후백제가 멸망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55) 후백제 견훤 (중) 왕건과의 싸움

견훤은 신라 사람이지만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건국해 스스로 왕이 되었다. 후백제 왕이 된 견훤은 당시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왕건의 고려와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였다.외교적으로는 후백제나 고려도 중국에 사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견훤과 왕건이 서로 전쟁을 하면서 주고받은 편지글에도 사대적인 사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견훤은 왕건과의 전쟁에서 크게 우세한 힘을 과시했다.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는 유명 장수들을 잃고 혼자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그러나 후백제는 건국 40여년 만에 패망하고 고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말았다. 견훤은 전쟁에 이겼으나 정치에서 졌다는 사가들의 평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견훤과 왕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요약 소개한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왕건은 918년에 수도인 철원의 민심이 변하면서 추대되어 고려 태조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공작의 깃털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 등을 선물했다. 견훤은 태조와 상극이었지만 화친하는 체하여 태조에게 푸르고 흰빛이 나는 명마도 선물로 보냈다.925년 10월에 견훤이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도착하자 태조도 역시 정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승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태조는 작전상 화친해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려고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왕건은 4촌 아우인 왕신을 볼모로 보내고, 견훤도 역시 생질인 진호를 인질로 교환했다.12월에 견훤이 거서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신을 후당에 보내 변국으로 자처하니 후당이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의 벼슬을 주고,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으로 하고 식읍을 2천500호로 했다.견훤은 926년 고려에서 진호가 갑자기 죽자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해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돌려보냈다.927년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빼앗아 그 성에 불을 지르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군사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에 견훤은 고울부(지금의 울주)를 습격해 빼앗고 시림으로 진격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진격했다. 신라 왕과 그의 부인은 포석정에 나가 놀이를 할 때여서 크게 패하였다.태조가 날랜 기병 5천으로써 공산 아래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인 김락과 신숭겸이 여기서 죽고, 모든 군사가 패배해 태조도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망했다. 견훤이 승리한 여세를 몰아 방향을 돌려 대목성(지금의 약목)과 경산부와 강주를 약탈하고 부곡성을 쳤다.930년에 견훤이 고창군(지금의 안동)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에서 여러 번 싸웠지만 패하여 시랑 김악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수습하여 순주성을 습격해 깨뜨리니 성주 원봉은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쳤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그 고을의 격을 떨어뜨려 하지현으로 만들었다.-견훤의 편지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퇴한 말기가 되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우므로 태조를 이끌어 들여 우호를 맺고 후원으로 삼으려 했다. 견훤이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지난번에 신라 재상 김응렴 등이 족하를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요. 나는 6부 백성에게는 올바른 교화로써 타일렀더니 뜻밖에 간신은 피하여 도망가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소. 경명왕의 외4촌 아우인 헌강왕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니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은 모시게 하여 이제야 자리가 잡혔소.족하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단지 유언비어만 듣고 온갖 계책을 다 써서 틈을 노리며 여러 방면으로 침략했으나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소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중략)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말에게 패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오.그런데 지난달 오월국의 사신이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기를 “근래 양쪽의 볼모가 죽게 되어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관계를 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해 싸움이 그치지 않으므로 이제 이 일을 전담하는 사신을 경의 본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냈으니 각기 서로 친하게 지내서 영원히 믿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노라”고 했소.내가 의리로는 왕을 높이 받들고 정리로는 대국을 충실히 섬기는 터에 왕이 타이르는 조칙을 듣고 즉시 공경하게 받들려고 하나 족하가 싸움을 그만둘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오히려 싸우려고 하는 것을 염려하오. (중략) 마땅히 미혹하여 거듭 잘못되는 것을 경계해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라오.-왕건의 답장927년 정월에 태조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냈다.삼가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전한 조서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가 보낸 긴 사연의 편지도 받아보았소. 오월국의 조서를 받아 비록 감격은 더 했으나 편지를 펴보고 의심스런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소. 금번 돌아가는 사신 편에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근래에는 삼한이 액운을 만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도적떼가 되고, 논밭은 황폐하게 되지 않은 곳이 없소. 전쟁의 위험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려고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었더니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 치는 일을 즐기고 병사들은 7~8년을 한가롭게 쉬었소.925년이 되자 이해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겨 교전하게까지 되었소. 족하가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바로 진격해 왔으나 이는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처럼 하다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후퇴하였으니 이는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았소. 그리고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한 후 하늘을 가리키면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즐겁게 화목할 것이며 만약에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죽일 것이다”고 했소.내 또한 창칼을 쓰지 않는 무를 숭상하고 죽이지 않는 어진 것을 추구하여 드디어는 여러 겹 에워싸던 포위를 풀고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한 것은 남쪽 사람들에게 큰 은덕을 준 것이었소. (중략) 나의 마음에는 어떠한 악함도 품지 않고 왕실을 받드는 뜻만 간절하여 신라 조정에 도움을 주어 나라의 위기를 구해보려 했소.그런데 족하는 털끝 같은 조그만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을 목 베어 죽이며 궁궐을 불태우고 대신들을 참혹하게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도륙하였소. (중략) 나는 해를 뒷걸음치게 할 만한 깊은 정성과 큰 매가 새매를 쫓는 것을 본받아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하기로 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킨 지 두 해가 지났소. (중략)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훈계하는 교서를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족하도 삼가 명철한 조서를 받들어 흉악한 전쟁을 모두 멈춘다면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리 강토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고칠 수 없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글은 최치원이 쓴 것이다.)-막바지 전쟁932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이 태조에게 항복하자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붙잡아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서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은 일길을 시켜 수군으로 고려의 예성강에 침입토록 하여 사흘 동안 머물면서 염주, 백주, 정주 등의 배 100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한다.934년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정예병사를 선발해 새벽 일찍 밥을 먹여 급습도록 했다. 영루에 닿기도 전에 고려 장군 유금필이 강력한 기병으로 이를 쳐서 3천여 명의 목 베자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 종훈과 의원 지겸, 용장인 상달, 최필 등도 태조에게 항복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4) 후백제 견훤 (상) 후백제 건국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신라 사람이었다. 삼국유사는 그를 진흥왕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전주 지방에서 추종자를 모아 궁궐을 짓고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려 왕건을 압박하는 한편 신라의 성을 공격해 영토를 넓혀 후삼국의 구도를 형성하면서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반세기에도 못 미치는 시간에 후백제는 고려에 항복하면서 후삼국통일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며 멸망했다.삼국유사는 후백제 견훤을 길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견훤을 뛰어난 인물이라 소개하고 있지만 지렁이 아들로 은근히 비하하며 상대적으로 고려 왕건을 훌륭한 인물로 추켜세우고 있다. 후백제 역사는 견훤의 일대기로 기록된다. 후백제 건국, 고려와의 전쟁, 후백제 멸망 세 단락으로 나누어 후백제 견훤을 알아본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885~887년에 사불성(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 아들은 넷으로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견훤은 지혜와 책략이 많아서 출중하게 뛰어났다.이제가기 기록에는 진흥대왕의 비 사도의 시호는 백숭부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은 구륜공이고, 구륜공의 아들은 파진간 선품이다.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의 처 왕교파리가 각간 원선을 낳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다.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이고 둘째 부인이 남원부인이다.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맏아들이 상부 견훤이다.또 고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광주 북촌에 사는 한 부자가 딸 하나를 두었는데 태도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마다 저의 침실에 와서 관계를 합니다” 하니 아버지가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고 했다.딸이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실은 북쪽 담장 아래에서 찾았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 후 임신하게 되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일컬었다.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서 강보에 있을 때에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밥을 나르면서 어린아이를 숲 속에 뉘어 놓았더니 호랑이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였다.아이가 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과 기품이 활달하고 비범했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쪽에 가서 바다를 지킬 때는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기개가 항상 군사들의 앞장이 되니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892) 신라 진성왕 6년에 총애받은 신하가 왕의 곁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국권을 농간하니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거기에 기근이 더해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이에 견훤이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쪽에 있는 주와 현을 공격하자 가는 곳마다 호응해서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이나 되었다.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으로 자처했다.견훤은 서쪽으로 순행해 완산주에 도착하자 그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며 위로했다. 인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견훤은 “백제가 나라를 세운 지 600여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서 수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고, 신라 김유신이 휩쓸어 황산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도읍을 세워 묵은 원한을 풀겠다”면서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칭하고 관직을 설치해 직책을 나누었다. 이때가 당나라 광화 3년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견훤은 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들에서 일하다가 점심을 먹고 잠깐 졸았는데 마당 우물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오더니 몸이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자라면서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하늘을 향해 천둥소리처럼 포효했다.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이어 태기가 있더니 낳은 아이가 견훤이다. 아자개의 첫 번째 아들이다.견훤은 어릴 때부터 재치가 뛰어나고 체격이 크며 힘이 장사였다. 나이 열여덟에 무과에 급제해 전쟁터를 누비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는 장군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맹수같이 휘저어 아군의 병사들은 크게 다치는 일도 없이 쉽게 승리하곤 했다.견훤은 뛰어난 전술과 무술 실력을 인정받아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비장이 되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곧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곳곳에서 도적이 들끓기 시작했다. 삼년을 연이어 흉년이 들고, 매관매직으로 부패한 관리들이 설치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견훤이 비장이 된 이후 명령을 받은 일은 줄곧 도적을 소탕하라는 일이었다. 도적을 잡는 일은 여반장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비장의 일에 조금씩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도적들이 전문적인 군사도 아니고, 대부분이 먹을 것이 없어 폭정을 피해 달아난 백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견훤이 전주에서 민심을 교란시키며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폭정을 일삼는 현령을 숙청하고, 임시 현령의 직을 맡아 보살피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강물이 점점 끓어오르더니 배가 녹아 없어지고 자신의 몸이 용이 되어 전주성으로 날아올랐다. 이어 거대한 이무기 두 마리를 잡아먹고는 아홉 개의 알을 낳았는데 모두 용으로 바뀌어 서로 싸우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러자 전주성이 폭삭 내려앉더니 사방으로 불길이 번져나갔다.견훤이 같은 꿈을 사흘 연속해서 꾸었다. 심상치 않아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가 꿈에 대한 해석을 부탁했다. 견훤이 꿈을 털어놓자 점술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쪽문을 열고 승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오더니 점술가의 목을 한 손에 틀어쥐고 죽여버렸다. 이어 견훤에게 엎드려 세 번 절하고는 “저를 책사로 삼으신다면 큰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견훤이 승복 입은 사람과 성으로 돌아왔다. 만찬이 끝날 무렵 책사 최승우가 다시 견훤 앞에 엎드려 꿈을 풀이하며 “왕이 될 꿈이옵니다. 그러나 자식들을 잘 다스려야 나라가 오래갈 것입니다”라며 함께 일을 도모할 것을 청했다.견훤은 그날부터 최승우를 책사로 삼아 전라도 일대 성을 공격해 수하로 삼으며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전주에 궁궐을 지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백제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구려 땅에서도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왕건이 뒤를 이어 고려라고 나라 이름을 고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견훤과 곳곳에서 맞부딪쳤다.견훤은 지혜롭고 용맹스러웠다. 한편 책사 최승우의 말에 귀를 기울여 대부분 그의 말을 따랐다. 최승우는 가까이는 물론 먼 훗날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져 그의 전술과 책략에 견훤도 깜짝깜짝 놀라며 감탄했다.견훤은 부인이 여럿이었다. 아들도 아홉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성장하면서 장군이 되고, 지혜롭기도 하여 가까이에서 견훤을 보좌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3) 의자왕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 왕조사는 56왕 중 36왕에 대해 길게 이어 기록하고 있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하다. 678년 백제 역사를 남부여시대, 무왕, 그리고 후백제 이야기로 줄이고 있다. 백제 멸망의 역사 의자왕 20년은 쥐꼬리만큼도 언급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백제 마지막 왕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백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의자왕은 어릴 때는 효심이 깊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으며 지혜로워 동방의 해동증자로 불렸다.수수께끼의 서동,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삼십 대에 세자로 책봉됐다. 의자왕으로 왕좌에 오르면서 선정을 베풀며 성군 소리를 듣는 한편 직접 신라 정복전쟁에 나서 3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무왕에 이어 나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여색에 빠져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678년 백제의 막을 내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의자왕이 신라의 주적이 되어 삼국통일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던 것은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성문에 내걸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춘추의 뿌리 깊은 원한으로 결국 의자왕은 백마강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투신해 꽃 무리로 지는 전설을 남기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역사: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출생: 백제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해동의 증자로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두터웠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인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595년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설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라고 설명한다.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는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한편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지역 유력한 호족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 무왕 33년의 일이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의자왕 즉위: 의자왕은 641년 왕위에 오른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의자왕은 즉위한 그해부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나서 직접 전쟁에 나서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전쟁의 선봉에 서서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그러나 백제 멸망을 가져온 원인도 이때 비롯됐다.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을 비참하게 죽였다는 데 있었다. 딸과 사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어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의자왕은 집권 전반기에 곳곳에서 신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의자왕의 타락: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은 크게 변했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스러웠다.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의자왕 17년에는 왕이 아들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려주기도 했다.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는 은고라는 여인이 의자왕의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 때문이다.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왕권이 안정되자 긴장감이 풀어진 탓이라는 해석도 있다.-백제의 멸망: 백제가 이러한 분열을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13만 대군을 이끈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에 정박했고,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백제의 동부 전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해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당나라 군사까지 사비성에 들이닥치자 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웅진성을 지키고 있던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하게 했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었다. 태자 효를 비롯 왕자들과 대신, 장병, 그리고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삼천궁녀: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에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전쟁의 승자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왜곡되고 있다.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의 여자의자왕은 지혜롭고 용맹했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수업을 받으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그러나 무왕이 백제 귀족들의 전략에 따라 많은 후궁을 들여 50여 명의 자식을 두게 되면서 후계구도가 복잡하게 경쟁적인 형상으로 전개됐다.왕실에 여식을 들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제각각 외손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권모술수를 펼치며 의자왕의 태자 책봉에 태클을 걸었다. 의자왕이 신라인의 핏줄이라는 것이 가장 큰 핑계로 거론되었다.무왕의 안정적인 왕권 유지를 위한 강력한 의지로 결국 의자왕은 삼십 대 후반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의자왕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태자 책봉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세력들은 거침없이 숙청을 단행했다. 또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신라를 보란 듯이 짓밟는 전쟁의 정복군주가 되었다.의자왕은 15년간 강력한 이미지를 풍기는 전쟁의 왕으로 군림하다, 아비 대신 전쟁터에 나온 여장부 은고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적진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어 칼춤을 추다 위험에 빠진 은고를 구해낸 의자왕의 부하 사랑에 감동한 은고는 그날부터 온전히 의자왕의 여인이 되었다.은고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의자왕은 이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고, 온전히 목숨을 바쳐 헌신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여장부 은고의 치마폭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전쟁에서 돌아온 의자왕은 사비성을 환락의 성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성의 동북쪽 경계이자 천연요새로 만든 백마강 언덕 낙화암에 정자를 짓고, 궁궐의 남쪽에는 인공연못을 만들어 궁남지를 꾸며 고구려와 신라 등 삼국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정원 예술을 기록했다.의자왕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은고와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 나랏일을 잊은 5년, 귀족들의 문란한 정치가 낙화암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기며 백제의 문을 닫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2) 무왕

백제 30대 무왕은 탄생과 아버지, 왕비, 즉위 과정 등등 무성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왕이다. 아버지가 법왕이었다는 이야기와 몰락한 왕족, 위덕왕, 심지어 용이라는 이야기까지 여러 가지 설화 같은 이야기로 상상 속의 주인공이다.무왕이 즉위 당시 왕궁은 사비성, 지금의 부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왕은 익산에 집착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익산에 미륵사를 건립한 것과 그가 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익산에 마련한 것도 그중의 하나다.삼국유사에서 미륵사지는 무왕이 선화공주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영기에서 무왕의 왕비는 당시 최고의 귀족 사씨 가문의 딸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미륵사 서원의 발원 주체라고 명시하고 있다.무왕은 41년간이나 왕위에 있었고, 미륵사 서탑은 무왕 39년에 세워졌다. 또 고구려가 왕비를 여러 명 두었던 것처럼 무왕도 왕비가 여럿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어 선화공주의 존재를 긍정하게 한다.무왕 시기에 백제는 신라와 13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당시 접경지역의 백성들은 신랑과 각시처럼 평화적인 분위기를 희망해 서동 설화를 꾸몄을 가능성이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익산에서 발굴된 대왕묘는 무왕의 묘이고, 쌍릉으로 불리는 서쪽의 소왕묘는 당연히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전해졌다. 고려사에서 익산에 말통대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고 뒷받침한다. 전주박물관의 익산 쌍릉발굴보고서에는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20~40세 여성의 치아가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이라 주장하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단순한 설화가 아닌 역사라고 해설하기도 한다.◆삼국유사: 무왕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이다.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려서 이름은 서동(薯童)인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서 팔아 생활했으므로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세상에서 둘도 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었더니, 아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꾀어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노래는 서울에 쫙 퍼지고 대궐까지 들리게 되었다. 신하들이 강력히 요청해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되었다. 결국 공주가 떠나게 되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서동이 나타나 절하고는 모시고 가려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지만 우연이라 믿고 기뻐했다. 그래서 서동이 공주를 따라가게 되고 몰래 정도 통하였다. 그런 후에야 공주는 서동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노래대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체험에 놀랐다.그들은 함께 백제로 갔다.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어 살아갈 길을 의논하려 하자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게 무슨 물건이오”라고 묻자 “이건 금인데 백년은 부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고 했다.서동이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처럼 쌓여 있소”라 하자 공주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랍니다. 그 보물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궁궐로 실어보내는 것이 어떨지요”라고 제의했다.서동은 그러자 했다. 그래서 그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용화산의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법을 물었더니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라고 했다.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궐로 금을 보냈다. 진평왕은 신통한 조화를 기이하게 여기고 높이 받들어 주면서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거동하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했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고 말했다.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일에 대해 묻자 신통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륵상 셋과 전각, 탑 및 회랑을 각기 세 곳에 세운 다음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이 온갖 기술자들을 보내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무왕은 백제의 첩자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이다. 위덕왕이 궁궐 남쪽 연못가에서 연회를 즐기다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출생해 궁궐 밖에서 성장했다. 위덕왕은 당시 아버지 성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해 국권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아들들의 불화를 우려해 궁궐 밖에서 무왕을 돌보면서 무예는 물론 왕족으로서 자질을 키울 수 있도록 많은 교육도 받도록 지원했다.무왕은 뛰어났던 성왕과 위덕왕의 자질을 타고 태어나 매우 현명했다. 신체적 조건 또한 늠름한 모습에다 무술을 연마하기에 최적의 상태를 갖추어 기마술, 창과 칼, 활 솜씨까지 빼어나게 뛰어났다.위덕왕은 무왕이 18세에 이르자 그를 신라에 첩자로 보냈다. 마를 캐는 서동으로 변장시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신라에서 활동하며 궁궐 내부 사정까지 다양한 정보를 캐내어 보고하도록 했다.서동은 신라의 서울, 궁궐에까지 드나들면서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의 빼어난 미모를 흠모하여 사랑에 빠져버렸다.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된 서동과 선화공주는 꾀를 내어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선화공주가 남몰래 밤마다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궁궐에서 쫓겨나는 공주를 서동이 백제로 데려와 결혼하게 되었다.서동은 어머니와 마를 캐면서 발견했던 금맥을 이용해 진평왕의 환심을 샀다. 이어 이복형 혜왕과 조카 법왕이 왕위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물러나자 왕족임을 내세워 30대 무왕으로 즉위했다. 무왕은 위덕왕의 뜻을 이어받아 사비성은 물론 익산을 전방기지로 삼아 군사력을 튼튼하게 키웠다.무왕의 선화공주에 대한 사랑은 끔찍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밤낮 왕비를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집무실에서조차 옆에서 말동무 삼아 나랏일도 함께 의논했다. 선화공주 또한 지혜로워 무왕의 집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무왕이 고구려와 한강 유역을 두고 전쟁을 하면서 신라와의 전쟁도 피할 수 없어 13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공격은 선화공주, 왕비와 지혜를 모아 적절한 선에서 치고 물러나는 형식적인 전쟁으로 끌어갔다.신라 진평왕 또한 선화공주가 왕비로 즉위해 있는 동안 백제와의 전쟁은 그렇게 악착같은 마음으로 전개하지 않았다.무왕은 서동으로 신라에서 첩자 노릇을 하면서 지리와 기후, 풍습까지 깨알같이 파악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선화공주와의 묵계로 신라와는 서로 피를 흘리는 소모적인 전쟁은 피하기로 했다.무왕은 600년에 즉위해 41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위덕왕의 패권정치에 유연함을 더해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하며 평화의 시대를 이끌었다. 백제의 멸망을 부른 31대 의자왕은 무왕의 자질을 이어받아 뛰어난 인물로 훌륭한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주색에 빠져 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1) 남부여와 전 백제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 마지막 왕 김부대왕에 대해 소개한 데 이어 느닷없이 백제의 처음도 아닌 한참이나 진행된 남부여로 불리던 시기를 늘어놓고 있다.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러나 백제를 234년부터 286년까지 52년이나 다스렸던 8대 고이왕을 사실적인 시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의 역사서 주서에서 백제의 시조를 고이왕으로 보는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 이와 함께 고이왕이 백제의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강화시킨 업적이 그를 시조로 모시게 한다.백제시대를 연 사람들을 온조, 고이왕, 근초고왕, 근수구왕, 개로왕 등으로 본다. 이어 백제중흥기에 이어 멸망에 이른 동성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30대 무왕, 31대 의자왕이 역사서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무령왕은 무녕왕으로 표기되며 501년부터 523년까지 25대 백제왕으로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해양으로 멀리까지 진출해 백제의 위상을 크게 높인 왕이다. 최근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학계 연구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무녕왕의 아들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백제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백제는 한강유역 위례성에서 시작해 백마강 일대 사비성에서 678년 역사의 문을 내린다. 31대 의자왕의 굴욕, 삼천궁녀의 낙화암 전설과 함께 비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삼국유사: 남부여와 전 백제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이다. 소부리군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 성왕 26년은 무오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지명은 소부리이고,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다. 소부리라는 것은 부여의 다른 이름이다.한편 여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부여군 서쪽 자복사의 높은 자리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여주 공덕대사가 수놓은 휘장이기 때문이다. 또 옛날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백제지리지에 ‘후한서에 삼한이 모두 78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사(北史)에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와 닿아 있고,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한강에 닿았다고 한다.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 한다. 고마성이라 하는 이도 있다. 그밖에 또 오방성이 있다.통전에는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까지 미쳤다’고 경계를 설명한다.구당서에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를 건너 월주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그 왕이 사는 곳에는 동서로 두 성이 있다’고 전한다.신당서는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를 경계삼고, 남쪽에는 왜국이 있는데, 모두 바다 건너서이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설명한다.사기의 본기는 백제 시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두 아들을 낳았는 데 큰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이들은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과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그들이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부아악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년(BC 18) 이었다.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위례성으로 되돌아 왔다. 나라이름을 고쳐 백제라 했다.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를 성씨로 삼았다.오랜 뒤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부여군이다. 옛 전기에서는 동명의 셋째 아들 온조가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14년은 병진년(BC 5)인데 도읍을 한산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고, 제13대 근초고왕 때인 함안 원년(37)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얻고 북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105년을 지냈다.제22대 문주왕이 즉위한 원휘 3년은 을묘년(475)인데, 도읍을 웅천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제26대 성왕에 이르러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했다.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그곳에서 지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산성 전투의 교훈백제는 BC 18년 온조가 창건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678년간 한반도에서 삼국의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면서 특별한 문화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현대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도자기 생산 기술은 지금까지 일본 등지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백제는 26대 성왕이 공주에서 지금의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한 것을 포함해 다섯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 처음 한강유역 위례성에서 백마강 유역의 시대로 크게 나누어 지지만 성왕은 사비성으로 천도해 나라 이름을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치고, 중국 양나라와의 교류에 이어 일본과의 교류도 두텁게 펼치며 나라의 힘을 키웠다.성왕이 신라와의 화친을 통해 부여에서 힘을 키워 고구려의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자 고구려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견제했다.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 백제와의 맹약을 버렸다. 이어 고구려에서 빼앗은 한강유역을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빼앗아 영토를 넓혀버렸다.성왕은 아들 창을 앞세워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펼쳤다. 이미 기세가 오른 신라를 백제는 당하지 못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죽음에 이르렀다. 아들 창 또한 왜나라에서 온 장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했지만 백제는 크게 패했다.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크게 분노했다. 아들 창에게 왕좌를 넘기고 거짓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도움을 청하러 왜나라로 달려갔다. 성왕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택했다. 국내에서는 27대 위덕왕으로 즉위한 아들 창이 아버지 성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승려 100명을 선발해 3년간 위로법회를 열게 했다. 겉으로는 승려들의 법회였지만 이들은 전쟁을 치를 무서운 장수를 키우는 훈련원이었다.또 왜나라 후쿠오카 지역으로 100여 명의 청년을 몰래 데리고 건너가 무술 수업을 하면서 힘을 기르는 한편 신라를 협공하기 위한 병력을 지원받기 위해 불법과 도예, 건축 기술 등의 선진문화를 전파했다.성왕의 길은 멀고 험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백제와 가까웠던 소가시 세력이 모노노베시 세력에 밀려 지원할 여력을 잃었다. 가까스로 성왕의 지원으로 소가시 세력이 3년이 지나 겨우 모노노베시 세력을 몰아내고 후쿠오카지역의 실력자로 자리를 회복했다. 이어 백제를 지원해 1천여 명의 군사를 신라로 보냈지만 이미 성왕은 병으로 사망하고,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다시 군사를 일으킬 힘이 없었다. 결국 성왕은 재기에 실패하고 이역만리 왜나라에서 눈을 뜬 채 세상을 하직했다.성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위덕왕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 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신라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무왕시대로 이어지는 제2의 부흥기를 마련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0) 김부대왕 (하) 신라와 남산의 신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는 기원전(BC) 57년에 건국해 935년까지 화려한 문화를 일구었다. 그 시작은 지금의 경주 남산자락이었다. 현재 경주시 행정구역이 신라가 고대국가로 출발할 때의 영토와 비슷하다.신라는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와 삼국의 견제 형태에서 가장 힘이 약한 나라로 손꼽히며 때로는 백제와, 때로는 고구려와 손을 잡아 나라를 유지해 왔다. 그러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주인공이 되었다.신라는 일찍이 불교를 국가적인 정신문화로 발전시켜 국론을 통일하는 정신문화자산으로 육성하고, 화랑정신을 청소년들에게 파급시켜 뛰어난 인재를 육성하는 정치적 전략을 도입해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나라의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이뤄냈다. 문무왕과 신문왕과 같은 훌륭한 군주와 원효, 자장, 의상, 원광, 혜공 등의 유명한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다.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한때 세계 최고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망과 향락에 젖어버린 지도층의 타락은 신라를 패망의 길을 걷게 했다. 신라는 붕괴하면서 다행스럽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위험을 예방하는 길을 택했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이 가져온 새로운 평화였다. 신라의 국정 운영 방향이 기울어질 때마다 남산의 신이 나타나 경계했던 이야기는 역사 전반에 전설처럼 전해온다.◆삼국유사: 김부대왕사론에서는 이렇게 논했다. 신라는 박씨와 석씨가 알에서 태어났는데 김씨는 하늘로부터 금궤에 담겨 내려왔다. 어떤 이는 금수레를 탔다고 하나, 이는 더욱 괴이해 믿을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그렇게 전하며 사실로 믿고 있다.이제 그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철저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며, 관리는 적게, 일은 간단히 처리했다. 지성스레 중국을 모셔 험난할지라도 사신이 오가는 것을 끊이지 않았고, 늘 자제를 보내 그곳 조정에 나가 지키며,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익히고, 거친 풍속을 고쳐 예의를 갖춘 나라로 만들었다.또 중국 군대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두었으니, 가장 번성할 때이다.그러나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했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오.게다가 경애왕은 이보다 더해 나쁜 놀이에 빠졌다. 여러 궁인과 함께 포석정에 놀러 나가 술 마시며 늘어지게 즐기다 견훤이 쳐들어온 것도 몰랐다. 문밖의 한금호와 누각 위의 장려화 사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경순왕이 태조에게 항복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어 그랬다고 하나 잘한 일이다. 그때 만약 죽을 힘을 다해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부치고 세력이 다했다면 왕족이 몰살당하고 피해는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왕궁의 창고를 닫고 군현의 문서를 만들어 항복했으니, 새로운 조정에 끼친 공로와 백성들에게 끼친 덕이 매우 크다.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왔을 때 소동파가 그를 충신이라고 했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크다.우리 태조 임금은 비와 빈이 매우 여럿이고 그 자손 또한 많지만 현종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다. 이후 왕권이 이어진 것이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랴.이미 신라가 강토를 바치고 나라가 없어진 다음이었다. 아간 신회는 외직을 끝내고 돌아와 허물어진 도성을 바라보며 ‘서리리’ 같은 탄식을 하다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 년 신라의 종말천 년 신라의 출발은 서남산자락 나정이다. 육부 촌장들이 힘을 합해 나라의 건설에 합의하고 훌륭한 자질을 가진 혁거세를 첫 번째 왕으로 옹립했다. 서남산자락에 궁궐을 짓고 고대국가로의 출발을 선언했다.혁거세는 남산신의 아들이다. 신성한 땅, 남산 일대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들을 인간의 리더로 보냈다. 혁거세는 60여 년 신라를 다스리며 절대적인 힘과 덕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열었다.혁거세로부터 신라인들은 양보하고 이해하는 덕목으로 서로 배려하는 이웃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실천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에서 힘의 균형을 깨뜨리려는 도전을 계속해오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전쟁이 다시 이어졌다.남산신은 수시로 신라왕 앞에 나타나 경계의 메시지를 전했다. 소지왕이 궁궐을 수리하고, 명활성에서 다시 월성으로 들어갈 때 서출지에서 편지를 전해 왕의 시해를 막았다. 선덕여왕 이후 급격하게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김유신 장군을 통한 절대적인 무도를 전해 나라를 안정에 들게 했다. 절대적 강한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고 폭넓은 평화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또 망덕사 낙성식에서 어린 효소왕 앞에 남루한 승려의 모습으로 남산신이 나타났다. 지혜를 동원해 나라를 보살필 것을 경계했다. 원성왕 때에는 죽은 충신의 입을 통해 경계 메시지를 전해 왕이 사냥을 그만두고 국정을 보살피는 데 전념하게 했다.헌안왕과 헌강왕 때에도 용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랏일을 돕기도 하고, 잔치판에 나서 왕의 눈에만 보이는 춤으로 경계하게 했다.그러나 신라의 지도자들은 남산신의 직접적인 경계와 간접적인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향락에 빠져 국력이 쇠락하며 급기야 패망하고 말았다. 남산신은 신라 사람들을 아껴 나라의 평화를 추구했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신라사람들은 처음부터 남산에 의존해 살았다. 남산에 첫 궁궐을 지어 나라의 살림을 시작한 데 이어 삼국통일을 이루고, 남산중턱에 대규모 산성을 짓고 창고를 건설해 풍요로운 삶을 이어가도록 상징적인 장치로 삼기도 했다.그러나 하대에 이르러 서남산에 포석정을 지어 향락에 빠졌다. 남산신은 이를 경계하기 위해 춤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를 망각한 퇴폐적인 국정으로 망국의 길을 가게 됐다. 남산에 신라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를 반면교사로 삼게 한다.남산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오천만 년 전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경주 남산은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바람과 눈, 비로 씻고 다듬어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고, 다람쥐와 노루가 뛰어놀게 했다.500m의 키 낮은 산이지만 오묘하고 신비로운 기운을 가진 산이다. 바위산이 연출하는 풍경은 금강산에 비추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갖가지 형상으로 계절별로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고, 계곡과 바위마다 공부될만한 전설을 품고 있다.오늘날도 경주와 내국인은 물론 전 세계에서 남산을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도 남산신의 보살핌과 무관하지 않다. 험난한 코스, 특히 칠불암에서 암벽을 타고 오르면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하고 있는 신선암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그 많은 탐방객이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누구도 절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다. 남산신의 보살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9) 김부대왕 (중) 서라벌에서 개경으로

경순왕은 처음부터 나라를 지켜낼 의지를 잃었다. 신라는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를 고려에 의존해온 지 오래였다. 영토는 벌써 경산과 영천지역까지 축소되었고, 군사력과 경제력도 모두 바닥 수준이었다.결국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백기를 들어 천 년 신라의 막을 내리는 치욕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 투항한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백성들의 피 흘림을 막기 위한 성군적 선택이었다는 엇갈리는 해석이 지금도 합의되지 않고 있다.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는 외적의 침입으로 왕궁이 무너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문을 닫았다. 왕궁을 지키던 비밀결사대, 사천왕들은 왕이 투항하면서 할 일을 잃었다.경순왕은 나라를 헌납한 대가로 서라벌이 아닌 개경에서 고려의 신하이지만 제2인자의 지위를 보장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서라벌, 전 신라 백성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왕의 선택으로 피 흘리지 않고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는 데 고마움을 품고 있던 백성들이 그의 죽음에 함께 오열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삼국유사: 김부대왕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라벌 인근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뭇 신하와 밖에까지 나와 영접하고 궁궐로 들어가 정성스럽게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술자리가 무르익자 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와 태조도 눈물 흘렸다. 왕건은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신라 사람들이 칭찬하며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이어 935년 경순왕은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면서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로 갖추어 태조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태조는 글을 받고 태상 왕철을 보내 맞아들이게 하였다. 경순왕이 뭇 신하를 데리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는데 찬란하게 장식된 마차가 30리에 길을 가득 메우고, 구경꾼이 담처럼 서 있었다.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며 위로하고,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주었다.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면서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산다고 하여 난세에 비유해 신란공주라고 고쳐 부르고, 시호를 효목이라 하였다. 또 정승의 자리에 앉혔는데 이는 태자보다 윗자리였고, 1천 석을 봉급으로 주었다. 따라온 신하들은 모두 쓰게 하였다.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공의 식읍지로 삼았다.처음에 왕이 땅을 바쳐 항복하러 올 때였다. 태조가 매우 기뻐하며 “지금 왕께서 나라를 과인에게 주시니 그 베푸심이 큽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을 해 영원히 처남 매부로서 즐거움을 누리시지요.”경순왕도 “나의 큰아버지 억렴에게 딸이 있는데 미모와 덕이 모두 훌륭하오. 그가 아니라면 궁궐 안 살림을 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태조는 그를 아내로 맞았다. 곧 신성왕후 김씨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 주가 정승공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곧 헌숙황후이다. 그래서 정승공을 상보로 삼았다.무인년(978)에 경순왕이 죽었다. 태조는 그를 상보로 책봉하며 글을 내렸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천 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벼슬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영명함으로는 세상을 초월할 만한 높은 기상을 떨쳤고, 문장으로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반열에 올랐다. 부는 춘추로 계속되었고, 귀는 봉토를 누렸다. 육도와 삼략이 가슴속에 들어 있고, 칠종과 오신을 손바닥에서 운용했다.태조는 초년에 이웃 나라와 친목을 닦아 일찍이 그 분위기를 알았고, 때를 기다렸다가 부마의 혼인을 반포해 안으로 큰 절차를 이뤘다. 가국이 이미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에 합쳤다.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널리 전하고, 그 아름다운 풍채를 빛낼지어다.그에게 상보 도성령의 호를 더하고, 이어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내린다. 훈작과 봉호는 예전과 같고, 식읍은 모두 1만 호로 정한다. 일을 맡은 이가 좋은 날을 골라 예식을 갖춰 책명하노니, 주무자는 시행하라.◆새로 쓰는 삼국유사: 사천왕의 선택천 년이나 이어져 오던 성을 지키는 사천왕들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경순왕이 왕궁을 비우고 개경으로 종살이를 간다는 것이었다. 이제 무엇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백수건달이 되어버렸다.문무왕 이후 성의 사방을 지켜온 사대천왕들은 북문을 지키는 라다문천왕이 전체를 이끄는 리더역을 맡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북문의 천왕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유신검법과 명랑의 술법까지 고스란히 전수받은 후계자다.동문을 사수하고 있는 라지국천왕은 음공의 귀재다. 비파를 뜯으며 웃음으로 적의 허를 찌르며 수하의 팔부신장들도 모두 악기를 무기로 삼고 있다.남쪽을 지키는 라증장천왕은 아주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있으며 큰 창과 칼을 무기로 쓴다. 병기들이 모두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워 일반 장수들은 드는 것조차 버겁다. 적들은 그의 험상궂은 얼굴만 보아도 기가 죽는다.서쪽의 수호신은 라광목천왕으로 술법을 잘 쓰는 도인이다. 이름에서처럼 부리부리한 큰 눈이 특징이다. 용, 호랑이, 늑대 등의 짐승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동서남북의 사대천왕들은 각자 여덟 명의 신장들을 거느리고 있다. 36명의 귀신같은 솜씨를 가진 무장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어 누구도 신라의 월성을 침입해 왕의 옷깃을 밟을 수가 없었다. 이들의 천하무적 힘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졌다.라다문은 천왕들을 모아두고 “이제 우리의 임무는 소멸했다. 단지 경순왕이 고려왕을 만나기까지, 개경으로 입성하는 시간까지 궁을 대신해 왕의 신변을 지킨다”고 마지막 임무를 명하고 “그 이후는 각자가 원하는 길로 가면 될 것”이라며 홀연히 자리를 떴다.사대천왕을 비롯한 팔부신장들은 대부분 첫 나들이가 마지막 나들이가 되어 천 년 궁성과 작별하게 되었다.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왕의 식솔은 물론 시중들과 6두품에 이르기까지 궁궐에서 나라의 일을 보던 신하들은 모두 그의 가족들을 대동해 하나에서 열까지 마차에 짐을 실어 북으로 항복의 행렬을 이었다.여정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여인과 노인, 어린아이들이 지쳐 가끔 병치레를 하는 이외에는 조용하게 행군이 이어졌다. 경순왕조차 사대천왕이 숨은 그림자로 호위하며 따른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사대천왕의 일은 문무왕 이후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를 이어 라다문천왕이 이끄는 대로 오로지 왕궁을 사수하는 일만 수행할 뿐이었다.일은 달구벌을 지날 때와 죽령을 넘을 때였다. 견훤의 사랑을 받았던 군사들이 후백제의 뜻을 저버리고 고려에 귀속하는 데 원한을 품고 살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척후병으로 전방 백리를 앞서가던 팔부신중들의 첩보를 받은 39명의 신장이 소리도 없이 200의 적군들을 잠재워 버렸다. 또 죽령에 숨어 복수의 칼을 갈던 김주원의 후손과 그를 따르는 50여 명의 날랜 검객들도 신장들의 바람 같은 솜씨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풀잎에 머리를 눕혔다.개경에서 경순왕의 엎드린 모습을 일견한 라다문천왕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눈짓으로 천왕과 팔부신장들의 해산을 명했다. 이후 기림사에서 라지국천왕의 신장들이 비파를 뜯으며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드러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8) 김부대왕 (상) 항복이냐 항전이냐

신라 최후의 왕 56대 경순왕은 삼국유사에서 그의 이름을 빌려 김부대왕으로 쓰였다. 김부대왕은 55대 경애왕과 이종사촌 간이다. 경애왕과 경순왕의 어머니가 모두 헌강왕의 딸이기 때문이다. 신라 천 년의 종말을 가져온 후손들인 셈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은 촉망받는 화랑으로 헌강왕의 맏사위였다. 경애왕의 아버지 신덕왕 또한 헌강왕의 둘째 사위였다.경순왕은 자신을 왕으로 앉혀준 후백제 견훤을 배신하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927년 왕위에 올라 8년째인 935년 일이다.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는 후백제 견훤은 이미 그의 아들들에게 유폐되어 있다가 도망해 고려 왕건에 의탁하고 있었다. 또 고려는 후백제가 지배하던 웅진과 운주 등 충남지역은 물론 인접한 경산, 영천지역까지 빼앗아 그 세력이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신라는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의 침략과 남하하는 고려의 세력에 버티기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신라 궁성에서는 끝까지 전쟁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연일 지루하게 열렸다. 결국 경순왕은 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항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도모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삼국유사: 김부대왕제56대 김부대왕은 시호가 경순이다. 천성 2년은 정해년(927)인데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울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서 구해주라 하였다.이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라벌로 들이닥쳤다. 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다. 견훤은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다음해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술자리가 무르익자 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라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와 태조도 눈물 흘렸다.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하는 말이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에는 마치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마치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청태 2년은 을미년(935)인데 10월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것이 되고, 나라가 약해져 이제 더는 무엇으로 버틸 수 없게 되자, 여러 신하가 나라를 태조에게 맡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신하들은 가부 간의 결정을 내리느라 의견이 분분해 마지않았다.태자가 “나라가 서고 망하기는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렸습니다. 마땅히 충신과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민심을 거두고 힘을 다한 다음이라야 그만둘 것이오. 어찌 1천 년 사직을 그다지 가벼이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왕은 “위태롭기가 이 같으니 판세를 보아도 보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미 강해지지도 못하거니와 약해질 것도 없어, 무고한 백성들의 살이 으깨지는 것만은 내 차마 할 수 없구나”면서 시랑 김봉휴를 시켜 글로 갖추어 태조에게 항복하겠노라 전하였다.태자는 크게 울며 왕에게 사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법명은 범공이었다. 나중에 법수사와 해운사에 머물렀다고 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망한 나라 궁성 지키는 사천왕경애왕과 이종사촌이었던 김부는 적군인 후백제 견훤의 추대로 왕좌에 앉았지만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애왕의 형인 경명왕 때부터 신라는 고려에 의존하며 급속하게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급기야 경애왕 8년에는 후백제로부터 왕과 궁인들까지 잡혀 죽임을 당해 실질적인 나라의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그러나 견훤이 강력하게 세력을 키워 성장하는 고려를 상대하면서 서라벌만 접수한 신라까지 통치할 힘이 없었다. 신라를 친고려 세력에서 후백제를 지원하는 세력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그러나 성격이 급했던 견훤은 신라를 정복했지만 내치에 실패해 아들들에 의해 유폐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후백제의 내란은 결국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견훤이 아들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왕건에 투항하며 자신이 세우고, 아들이 다스리는 후백제 정복에 앞장섰다. 후백제를 평정한 고려 왕건은 느긋하게 기다리며 세력을 안정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신라의 수도 서라벌과 인접한 경산과 영천지역의 장수들까지 후백제와 고려에 투항하고, 후백제까지 평정한 고려는 세력이 크게 불어나며 안정화되었다. 반면 신라는 크게 위축된 영토와 함께 백성들도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경순왕은 이미 나라의 세력이 진한으로 출발할 당시보다 좁혀지며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까지 감소하자 최종적인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나라를 경영해 나갈 여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결국 935년 중요 대신들을 어전에 불러 의견을 물었다. “짐이 부덕하여 백성들이 헐벗고, 불안에 떨게 했다. 우리 힘으로 고려와 전쟁할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며 왕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태자가 떨치고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신라는 천 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의 뜻입니다.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를 덥석 바친다는 것은 치욕이요, 조상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라며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태자의 동생과 젊은 장수 몇몇도 울분을 토하며 전쟁에 나설 뜻을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 중신은 차마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경순왕은 무겁게 그러나 결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어차피 이 나라든 저 나라든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잘 먹고 잘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군주는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며 “전쟁을 하면 백성들은 또다시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고려에 항복하겠다”고 선언하고 시랑 김봉휴에게 고려에 항복의 문서를 전하라 명했다.경순왕은 이미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국력회복의 시기가 늦었음을 절감하고, 재위 4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치고 왕도를 방문했을 때 임해전에서 후하게 대접하며 항복의 의사를 타전했다. 그 때문에 왕건도 느긋하게 신라의 항복을 기다리며 고려를 안정적인 나라로 경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경순왕이 항복의 뜻을 밝히고 문서를 작성해 고려에 바치게 하자,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생활하다 생을 마감했다.월성을 지키던 사천왕들은 왕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궁성을 침범하는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한 그들은 그 어떤 소용돌이에도 나서지 않았다. 오로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궁성과 당시 왕의 안위를 보살필 뿐이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7) 경애왕

신라 55대 경애왕의 이름은 위응으로 경명왕의 동생이다. 형이 죽자 924년에 즉위해 927년 견훤의 침략으로 죽을 때까지 3년여의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다.경애왕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을 잃고, 고려에 의탁해 위축된 신라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후백제 견훤의 공격에 경애왕이 목숨을 잃었다. 신라는 경애왕의 죽음으로 실질적으로 망했다고 해석하는 사학자들의 목소리도 최근들어 높아지고 있다.포석정에서 견훤의 침략을 만나게 된 경애왕은 당시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후백제가 침략해 올 당시는 음력 11월 엄동설한이요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점이라는 점 등을 들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제를 올리고 있었다는 해석이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경애왕이 천 년 신라 박씨 왕가에 종지부를 찍었고, 나라가 패망에 이르게 만든 왕이라는 비난의 노골적인 목소리도 그의 꼬리표로 이어지고 있다.◆삼국유사: 경애왕제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은 갑신년(924)인데 2월19일에 황룡사에 백좌를 설치하고 경전을 읽었으며, 이와 함께 신승 300명을 대접했다.대왕이 몸소 가서 향을 살라 정성을 바쳤다. 이 백좌가 선종과 교종이 함께 한 처음이라 한다.-경애왕의 죽음: 천성 2년은 정해년(927)인데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와 고을부(현재 영천)에 이르자 경애왕은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날쌘 병사 1만 명을 보내서 구해주라 하였다.이 구원병이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울(경주)로 들이닥쳤다. 왕과 여러 부인 그리고 종친들은 포석정에서 흐드러지게 놀고 있었다. 군사가 코앞에 이르렀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엄벙덤벙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들은 후궁으로 달아나다 적에게 잡혔다.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엎드려 노비로라도 살려주길 구걸했고, 견훤은 군사를 풀어 공사간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다.왕궁으로 들어가서는 신하들에게 왕을 찾아내라 명하였다. 왕과 부인 그리고 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종용을 받았고, 왕비는 강제로 당했다. 첩들은 그 아랫것들에게 수난을 입었다.견훤은 왕의 동생 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김부대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경애왕의 시신이 서당에 안치되자 여러 신하가 모두 통곡해 마지않았다. 고려 태조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다음해 무자년(928) 봄 3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데리고 서울 인근에 이르렀다. 경순왕은 뭇 신하와 함께 밖에까지 나와 영접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마주 대하는데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경순왕이 “나는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니 이런 화가 미치는 것 아닌가요? 견훤은 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를 멍들게 했소. 참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라며 통탄했다.그러면서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니, 주변의 신하들이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태조 또한 눈물 흘렸다. 왕건이 몇 십일을 머물다 돌아가는데, 아랫사람들이 모두 정숙하고 터럭만큼도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며 “예전에 견훤이란 자가 왔을 때는 이리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이르자 부모를 만나 뵌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람을 시켜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보내주고, 여러 신하와 장수들에게 차등을 두어 선물을 내렸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애왕의 죽음과 월성의 전설경명왕이 즉위 7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들이 어려 동생이었던 위응이 경애왕으로 즉위했다. 경애왕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에 급급했다.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화되고 있던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애왕은 경명왕과 같은 외교정책을 택했다. 막무가내로 신라 영토를 침략해오는 견훤을 견제하면서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 친화전략을 필사적으로 펼쳤다.그러나 왕건도 고려를 건국한 초기에는 후백제 견훤이 북쪽 경계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내미는 악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경애왕은 안정적인 후삼국 구도를 지키기 위해 신라에 보다 친화적인 고려와 손을 잡는 전략을 택해야 했다. 지속적으로 공격해오는 후백제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택한 궁여지책이었다.그런데 왕건이 견훤의 조카 진호를 볼모로 받아들이고, 후백제와도 화해정책을 펼치자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밀리에 자객을 고려로 급파해 견훤의 조카 진호를 살해했다. 고려 군사세력에 살해된 것처럼 은근슬쩍 증거를 조작했다. 성격이 급한 견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고려를 원수로 간주하고 화친조약을 파기하고, 바로 고려와 전쟁을 선포하고 신라로 향하던 말머리의 상당한 전력을 고려 쪽으로 돌렸다.견훤은 “왕건이 내 조카 진호를 죽였다. 왕건이 나의 성의를 무시하고 후백제와 싸우자는 것이다. 내가 이를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왕건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경애왕의 대 고려 외교는 일단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고려와의 전쟁에 큰 이득을 내지 못하고 지루하게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견훤은 공격의 창을 다시 신라로 돌렸다. 견훤의 군사가 고을부를 점령하고 다시 금성 쪽으로 남하하는 속도를 높였다.경애왕은 다급해져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견훤의 신라에 대한 공격 속도는 너무 빨랐다. 왕건의 후원군사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경애왕이 신하들과 머물러 있던 포석정으로 몰려왔다. 경애왕은 왕비와 후궁들을 피난시키면서 자신도 정신없이 도망하는 신세가 됐다. 월성 안으로 들어서면 사천왕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당시 신라 천 년의 궁성 월성은 사천왕들이 각자 팔부중신들을 거느리고 사방을 지키고 있어 철옹성이었다. 어떠한 외부 침략도 월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이 신라의 세 가지 보물과 함께 동서남북 4대 성문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전설적인 힘을 가진 사천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궁성은 천 년 동안 외세의 침입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부적인 다툼으로 왕좌가 바뀌는 경우는 있어도 외세의 힘으로 월성이 함락된 일은 없었다.경애왕은 이러한 월성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월성까지만 들어가면 안전하다고 믿고 월성으로 기를 쓰고 도망 길을 찾았다. 경애왕을 호위하던 무사들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견훤의 군사들에게 맥없이 쓰러졌다. 목숨으로 퇴로를 열던 호위 무사들은 경애왕의 길을 50보, 100보씩 거리를 확보하는데 그쳤다.경애왕의 퇴로를 확보하는 마지막 길에는 후궁 비려의 칼이 있었다. 비려는 무가의 여식이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려로 잠입해 견훤의 조카 호진의 목을 취한 자객 ‘무심’이 비려의 아비였다. 무심의 공을 높이 사 경애왕이 비려를 가까이에 두고 정을 주었던 것이다. 경애왕을 앞서 보내고 뒤를 지키려 검은 복면을 쓴 비려는 단도 수십여 개를 몸에 지니고 긴 칼을 양손에 들고 견훤의 사내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거친 사내들의 힘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장렬한 비려의 죽음에 대한 보람도 없이 경애왕은 월정교를 넘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들에게 잡혀 치욕의 죽음을 맞았다. 천 년 신라의 막이 그렇게 내렸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6) 경명왕

경명왕은 신라 하대 다시 시작된 박씨 왕가의 두 번째 왕이었다.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54대 왕좌에 올라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신라를 이끌었다.경명왕대에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또 궁예의 침략에도 상당히 많은 고을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다 왕건이 후고구려의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면서부터 경명왕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정책을 추진했다.결국 경명왕대에 신라는 경상도 지역 정도의 영토를 가진 열세의 나라로 전락했다. 내부 반란에 이어 지속되는 외세 침략을 감당하기에 신라의 국력은 이미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도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기는 등으로 향락에 빠져 신라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왕실 스스로 나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형세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경명왕이 죽기 1년 전에는 경산부 등의 신라 장군에게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실정들이 역사 기록으로 전하기도 한다.◆삼국유사: 경명왕제54대 경명왕 때인 정명 5년은 무인년(918)인데 사천왕사의 벽화에 그려진 개가 짖었다. 3일간이나 경전을 읽어 겨우 물리쳤으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또 짖었다.7년은 경진년(920)인데 2월에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정원에 거꾸로 서 있기를 열흘간이나 했다.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에 그려진 개가 뜰로 나와 달리다가 벽으로 다시 들어갔다.◆경명왕경명왕 이름은 승영이고, 신덕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헌강왕의 둘째 딸 의성왕후다. 경명왕은 동생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는데 위응이 나중에 55대 경애왕으로 즉위했다.경명왕은 917년부터 924년까지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국력이 극심하게 쇠퇴하는 과정을 겪었다. 경명왕 2년에 현승의 반란으로 신라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궁예의 압박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경명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수교하며 후백제를 물리치는데 군사적 도움을 받으면서 고려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이러한 경명왕의 국정 운영 방향에 따라 변경의 장군들은 고려에 앞다투어 항복해 신라의 국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심지어 경명왕은 경산부 양문 장군 등에게 고려에 항복하도록 명령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경명왕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매사냥을 즐겼다. 삼국유사 등에는 경명왕 때에 사천왕사에 있던 벽화 속의 개가 짖고, 흙으로 빚은 신상의 활줄이 끊어지고,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열흘 동안이나 거꾸로 서는 등의 천재지변과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반면 경명왕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시도하려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사망했다.역사서에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밀양 박씨 족보에 의하면 경명왕이 석씨와 결혼해 밀성대군, 고양대군, 속함대군, 죽성대군, 사벌대군, 완산대군, 강남대군, 월성대군 등 여덟 아들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명왕의 실정신라 53대 신덕왕의 아들 박승영은 917년 54대 경명왕으로 즉위했다. 경명왕은 즉위하면서 동생 박위응을 상대등으로, 유렴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화랑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며 나라 살림살이의 주체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그러나 즉위 2년에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는 어수선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후백제 견훤이 공격의 수위를 높여 대야성까지 함락되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도 한강 이남까지 밀고 내려와 신라의 영토는 결국 현재 경상도 정도의 영역으로 좁혀졌다.신라는 진성여왕 당시 위홍의 정치에 이어 김예겸의 손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면서 왕권은 사실상 실추되고 권위를 잃었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신덕왕이 왕좌에 오르기까지 왕위 선양도 모두 예겸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의 입김으로 진행되었다.경명왕은 이렇게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동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실권 회복에 나섰지만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고, 외세의 침략전쟁 등으로 나라는 저항의 힘을 잃고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경명왕의 측근세력 위주 인사정책으로 왕실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세력들 대다수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 지방으로 내려가 후백제나 고려에 투항해 신라의 국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를 세우자 경명왕은 고려를 나라로 인정하고 사신을 보내 친화정책을 도모했다. 왕건도 고려에 친화적인 신라와 손을 잡고 후백제 견훤을 손쉽게 견제하는 후삼국 형태가 갖추어졌다.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신라와 친화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신라의 지방세력들은 앞다투어 고려에 투항했다. 경명왕 말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도 시도했지만 성사하지는 못했다. 경명왕은 스스로 나라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고려에 의존하면서 경산부의 장군에게도 고려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후삼국의 형태에서 신라 왕실은 군사력을 키워 백성의 안위를 지키고, 나라의 영토를 확립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명왕은 즉위 초기 1~2년을 지나면서 귀족들과 대신들의 힘을 규합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경명왕은 오히려 매사냥에 나서는 취미활동을 즐기는 등으로 나랏일을 돌보는데 태만했다.경명왕시대의 신라는 고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경명왕의 정책 중에도 가장 큰 실정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자연재해도 잇따라 일어났다. 당시 중국과 발해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기온저하, 가뭄 등으로 기후가 변화하면서 자연재해로 독자적인 생산활동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실을 비롯한 왕경지역에서는 지방의 물자 유입이 필요했지만 지방세력들의 투항으로 이마저 어려웠다.경명왕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군사력을 잃은 것은 오래되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백성의 민심 또한 흔들렸다. 신라가 스스로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경명왕은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압박해오자 고려 왕건에게 아찬 김률을 사신으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왕건이 “신라에는 장육존상과 황룡사 구층목탑, 진평왕옥대 등의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옥대는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다. 김률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돌아와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황룡사의 노승만이 이를 알고 전해주었다.경명왕은 옥대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재해와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보물의 힘이라는 것이라 믿고, 비밀리에 보물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경명왕의 이러한 정치형태는 경애왕으로 이어져 신라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기보다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락했다. 결국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종교적인 힘을 구하려다 견훤의 칼에 나라를 잃게 됐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5) 효공왕

신라 제52대 효공왕은 49대 헌강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왕궁 밖에서 자랐다. 진성여왕이 이를 전해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명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효공왕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7세까지 15년간 재위하는 동안 군주로서 제대로 기능을 펼쳐보지 못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휘말리고, 후반기에는 여자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아 신하가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신라의 조정은 어지러워지고 국력이 약해졌다. 견훤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일으키고, 침략해와 신라의 영토는 크게 위축되었다. 효공왕이 아들 없이 죽자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 즉위했다. 신덕왕은 박씨였지만 헌강왕의 딸과 결혼해, 경덕왕가의 사위라는 신분에 힘입어 국인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신덕왕대에 이르러 많은 자연재해가 발생한 기록이 전한다. 5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승영과 위응을 낳아 54대와 55대 경명, 경애왕으로 오르게 함으로써 신라하대의 박씨왕가 세습을 재현했다. ◆삼국유사: 효공왕제52대 효공왕 때인 광화 15년은 임신년(912)인데 봉성사 바깥문의 동서쪽 21칸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된 을해년(915)에 영묘사 안쪽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였다. 또 3월에 서리가 다시 내리는가 하면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간이나 서로 싸웠다. ◆효공왕과 신덕왕-효공왕은 895년 진성여왕 9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897년 진성여왕 11년에 신라 제52대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12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경문왕 이후부터 왕권을 둘러싸고 두텁게 포진하고 있던 화랑세력들에 맞선 예겸 등의 세력들이 추대하는 형식이었다. 이찬 예겸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여 더욱 세력을 굳혔다. 왕실을 둘러싼 세력 다툼이 알게 모르게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어린 효공왕은 실권을 휘두르지 못했다. 당시 견훤은 완산주에 터전을 잡고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신라 땅을 꾸준히 침략해 영토를 확보했다. 궁예도 이 시기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라 나라이름을 짓고 스스로 왕좌에 앉았다. 궁예 또한 남하해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신라의 입지는 전반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차제에 효공왕은 애첩에게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신하들이 궐기해 왕의 애첩을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신라 53대 신덕왕은 8대 아달라왕 후손으로 박씨에 이름은 경휘다. 912년 효공왕에 이어 즉위해 917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아들들이 경명왕, 경애왕으로 대를 잇게 해 신라말기 박씨 왕가를 이루었다. 신덕왕은 엄연히 박씨 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예겸의 눈에 들어 예겸이 의자(義子)로 삼아 사위 효공왕에 이어 왕위를 잇도록 후견인의 역할을 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맏사위이자 화랑이었던 효종에 비해 왕위를 차지하기에는 입지가 한참 밀렸다. 그러나 의부였던 예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하는 덕을 누렸다. 신덕왕 때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지진과 때아닌 서리, 해일 등의 자연재난이 다양하게 많이 발생하고,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침략도 잦아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렸다. ◆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경주시 성건동 남천의 끝부분에 있었던 절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도화상이 과거칠불 중의 제5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 지명했던 곳이다. 선덕여왕 때에 두두리 라는 도깨비 무리가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한 곳으로 전한다. 영묘사는 사천왕사를 지었던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금당의 장육존상을 비롯해 천왕상과 목탑, 기와, 편액의 글씨도 양지의 솜씨였다. 영묘사 장육삼존불은 경덕왕이 개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이 절로 옮겨 안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지금 흥륜사터로 알려지며 사적 15호로 지정된 경주시 사정동 일대에서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고,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최근 영묘사(靈妙寺) 또는 영묘사(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영묘사가 있던 곳으로 밝혀졌다. 신덕왕 때에 영묘사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소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삼국시대의 도래천년의 사직을 이어오던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효공왕과 신덕왕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효공왕과 신덕왕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대로 왕노릇 한번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효공왕이 12세에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 왕비로 간택하게 하며 실질적인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던 사람은 김예겸이다. 김예겸은 인물이 훤칠하게 잘생겼고, 키도 6장의 장신이었다.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람이 많아 지도자로 군림했다. 예겸은 진성여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화랑들의 품에 안겨 실정을 쏟아내자 귀족들과 세력을 모아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예겸은 헌강왕이 사냥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데려와 진성여왕에게 천거했다. 결국 진성여왕은 효공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예겸은 재빠르게 자신의 딸을 효공왕에게 추천해 왕비로 간택하게 했다. 이어 왕실에 자신의 세력을 깊숙하게 심어 화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있는 효종 등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회를 노렸다. 900년을 전후해 견훤과 궁예가 서쪽과 북쪽에서 나라를 세워 후백제, 후고구려라 칭하며 스스로 왕이 되어 신라를 압박하는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효공왕이 왕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세력들은 하나 둘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투항하며 살길을 찾아 떠났다.이때 차기 왕으로 등극할 후보는 효종과 경휘가 유력했다. 효종은 화랑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났다. 거기에다 헌강왕의 맏사위로 경문왕가의 튼튼한 줄을 잡고 있었다. 경휘는 헌강왕의 둘째 사위로 아달라왕의 후손이었다. 역시 왕가의 후손이었지만 효종보다 명분으로 한겹 접어야 했다. 그러나 예겸은 경휘를 자신의 의자(義子)로 삼아 기회를 만들었다. 예겸은 전쟁이 산발적으로 신라 곳곳에서 일어나자 효종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나라를 구할 사람은 화랑도뿐이다”며 효종을 부추겨 전쟁의 선봉에 나서게 했다. 결국 효종은 대야성 전투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효공왕의 뒤를 이어 신라 53대 왕은 김예겸의 의자인 박경휘가 물려받았다. 후삼국시대에 멸망의 길을 걷는 기울어가는 신라의 왕실은 효공왕에 이어 신덕왕까지 예겸의 입김으로 움직였다. 효공왕은 예겸의 사위이고, 신덕왕은 예겸의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예겸의 세상은 기울어가는 신라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3) 처용랑과 망해사

헌강왕은 신라 하대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 가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해마다 풍년이 들고, 거리에는 노랫소리 그치지 않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다.이는 헌강왕의 아버지 경문왕이 화랑세력과 고승들을 동원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면서 백성의 안녕과 나라의 평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결실이 나타났던 덕이라는 평이다.헌강왕 당시에는 많은 신이 현신했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용왕을 만난 것과 남산 포석정에서 남산신을 따라 춤춘 일, 금강령에서 북악의 산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며 경계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국운이 다함을 신들이 나타나 경고를 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상서로운 일로 잘못 해석하고 더욱 나태해 결국 나라가 망했다. 신들의 춤을 따라 추었던 헌강왕 시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제49대 헌강왕 때였다.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연주와 노랫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주었다.이때 대왕이 개운포로 놀이를 나갔다. 왕이 가마를 돌려 돌아오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들려는 참이었다. 홀연히 운무가 가득하여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곁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이는 동해 용이 조화를 부린 것입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만 풀리겠습니다”고 했다.이에 신하에게 명령해 용을 위해 가까운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운무가 걷히며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불린다. 동해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가마 앞에 나타나 덕을 칭송하면서 춤추고 곡을 연주했다.그 아들 하나는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정을 보좌했는데, 처용이라 불렀다. 왕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여 그의 마음을 붙잡아두고자 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다. 역신이 이 여자에게 푹 빠져 사람으로 변장하고 밤에 그 집에 들어와 남몰래 함께 자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이르러 침상에서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대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앞에 나와 무릎 꿇고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세컨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이 때문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맞아들이려 했다.왕은 돌아온 다음, 영축산의 동쪽 기슭이 좋다 하여 절을 짓고 망해사라 불렀다. 신방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용을 위해 지은 것이다.또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이다.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는데 곁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왕만이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서서 춤추니, 왕이 손수 따라 춤을 추며 형상으로 보여주었다.신의 이름을 상심이라고도 하므로 지금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면서 임금이 춘 상심 또는 임금이 춘 산신이라 한다. 신이 나타나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 본 따 기술자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대에 보여주었으므로 상심이라고도 하였다. 또는 상염무라 하는데 이는 곧 그 모양을 보고 지은 것이다.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데 옥도검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에서 연회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지백급간이라 불렀다.어법집에 “그때 산신이 춤을 추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노래한 것은 나라 안에 지혜롭게 다스리는 자들이 미리 알고 도망을 가 도읍이 무너질 것’을 이르는 바였다”고 한다.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고했던 것이다. 나라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탐락에 극심하게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하고 말았다.◆다시 쓰는 삼국유사: 헌강왕의 정치헌강왕은 15세에 즉위해 철이 없었다. 단지 성격이 호쾌하고 활달해 화랑들과 무예를 즐기며 사냥과 놀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는데 게을리했다.황성숲에서 사냥을 즐겼다. 사냥터에서 만난 여인의 미모에 빠져 그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여인이 그곳에 기거하게 했다. 이 여인이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나중에 52대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53대 신덕왕의 왕비가 되어 54대 경명왕과 55대 경애왕을 낳았다. 신덕왕이 박씨 성을 가졌으나 김씨 왕가의 사위로, 결국 김씨 왕의 세습이 이어진 셈이다.또 헌강왕이 배를 타고 개운포로 나들이를 갔다가 해적의 난을 만났다. 위기에 처했을 때 인도 상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헌강왕은 인도 상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어 개운포에 인도 상인들을 위한 전용 상가를 개설하게 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헌강왕은 또 틈만 나면 연회를 열어 신하들과 함께 즐기기를 좋아했다. 왕궁과 가까운 남산으로 나들이도 잦았다.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어 용포가 젖도록 술을 마시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하곤 했다.헌강왕이 20세를 맞아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오르고 흥이 지나치자 남산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이때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헌강왕을 숨어서 따르던 화랑들의 힘에 제압됐다.헌강왕은 유흥에 빠져 있었지만 주변에 실력이 뛰어난 화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버지 경문왕의 뜻에 따라 그들을 중용해 신임을 두텁게 얻고 있었다. 이어 경문왕 때부터 장려해왔던 국학을 발전시켜 6두품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하도록 해 신흥세력의 지지 또한 두텁게 받아 강한 국운을 이어갈 수 있었다.아버지 경문왕이 불교를 장려하며 고승들을 각 고을로 배치해 백성을 두루 교화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화랑과 6두품 신흥세력들을 고루 등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중앙집권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헌강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평성대한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복된 군주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10여 년에 이르는 문란한 정치로 훌륭한 기반도 급격하게 기울어 나라의 패망을 막을 수 없었다.나약했던 동생이 50대 정강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2년 만에 죽었다. 여동생 김만이 51대 진성여왕으로 등극해 상대등이었던 삼촌 위홍과 결혼했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화랑 두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다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듯 스스로 물러났다. 이러한 신라의 왕권이 실추되는 시기를 틈타 후백제와 고려가 세력을 키웠다. 신라는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2) 경문왕

신라 48대 경문왕은 화랑 출신으로 헌앙왕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 행운아라고도 할 수 있다. 경문왕대에 이르러 원성왕부터 피비린내를 풍겼던 왕권을 둘러싼 전쟁은 잦아들었다. 원성왕의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왕좌는 경문왕부터 다시 50여 년간 그의 직계들이 차지했다. 물론 헌안왕과 경문왕도 원성왕의 직계 후손이다.경문왕은 861년부터 875년까지 14년간 왕좌에 있었지만 남아 있는 업적이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그의 왕릉조차 비정되지 않아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그러나 최근들어 경문왕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불법을 확산하는 노력을 다양하게 전개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경문왕은 왕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던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고, 숭복사를 중창했다.경문왕은 또 동화사에 민애왕의 추숭 복업을 위한 석탑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당시 동화사 주지 심지를 끌어들여 진표의 미륵신앙과는 또 다른 미륵신앙을 수용하려 했다. 왕은 동화사 심지대사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한편 지방의 선종과 선승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도 적극 펼쳤다. 왕은 선승 낭혜무염을 국사로 임명하고, 그를 상주로 내려 보내 불만세력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화랑이 왕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풀기 위한 노력은 그가 화랑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수련했던 심신의 단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분제도 철폐를 비롯 화랑들의 중앙무대 진출, 불교정책을 통한 왕권강화와 안정을 도모했던 경문왕의 길을 돌아본다.◆삼국유사: 경문왕-화랑 응렴 왕이 되다: 왕의 이름은 응렴인데 열여덟 살에 국선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자 헌안대왕이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며 “낭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어떤 재미있는 일을 보았느냐”고 물었다.응렴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사람들보다 겸손하게 사는 이가 첫째요, 큰 부자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는 이가 둘째요, 본디 귀하고 힘이 있으면서 그 위세를 쓰지 않는 이가 셋째이옵니다”고 했다.왕은 그 말을 듣고 그의 어진 성품을 알아보고 “내게 딸이 둘 있거니와 그들이 수발을 들도록 하겠노라”고 말했다.응렴은 자리를 벗어나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 나와 부모에게 아뢰었다. 부모는 놀라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다. “큰 공주는 얼굴이 매우 못생겼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를 맞아들이면 좋겠다.”응렴의 무리 가운데 범교라는 스님이 “낭께서 동생을 맞으신다면 저는 반드시 낭의 앞에서 죽을 것이로되, 언니를 맞으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명심하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응렴은 범교 스님의 뜻에 따라 큰딸과 결혼했다.한 달 보름쯤 지난 다음 왕이 큰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짐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소. 장례를 치른 다음 마땅히 큰딸의 남편 응렴이 잇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다음날 왕이 돌아가시자 응렴은 왕의 뜻을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이때 범교가 왕에게 나아와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여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고 말했다.왕은 그 말을 치하하여 대덕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돌아가시자 시호를 경문이라 하였다.-뱀의 왕: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구나. 막지 말아라.”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당나귀의 귀: 경문왕은 왕위에 올라선 다음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았다. 왕후와 궁인들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두건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만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죽을 무렵, 도림사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바라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는 소리가 들리자, 왕이 이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 들렸다.-화랑들의 노래: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숙종랑 등이 금란에 가서 놀다가 적이 군주를 위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뜻을 담아 노래 가사 세 편을 지었다. 심필 사지를 시켜, 가사가 적힌 원고를 대구화상이 있는 곳에 보내 세 노래를 짓도록 하였다.처음은 현금포곡, 둘째는 대도곡, 셋째는 문군곡이다. 왕에게 들어가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칭찬하였다. 노래는 자세하지 않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의 맹세김응렴의 길은 낭염화상을 만나면서 크게 달라졌다. 응렴은 낭도들과 수련을 위해 아름다운 산천을 주유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라를 위한 일이든 자신을 위한 일이든 지혜를 바탕으로 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자신의 지혜와 무예에 대한 실력은 만족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응렴은 이러한 정신적 부담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훈련과 진리탐구에 매달렸다. 눈을 뜨면서부터 책을 들고, 밥을 먹으면서도 주먹을 내지르는 훈련의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과 지혜가 나날이 눈에 뜨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응렴 스스로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답답해하며 훈련의 강도를 갈수록 높여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낭염화상이 어느 날 천 길 낭떠러지로 황하처럼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폭포 아래로 응렴을 밀어 넣었다. 소용돌이가 심해 무술을 익힌 청년이라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겨우 헤엄쳐 나오면 낭염화상은 사정없이 다시 물줄기가 떨어지는 가운데로 밀어 넣어 버렸다.완전히 지쳐버린 응렴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무렵 낭염은 그를 건졌다. 낭염화상은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른 도승이었지만 화랑도들의 틈에 끼어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자 길을 찾고 있었다.기운을 회복한 응렴은 낭염화상 앞에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세속오계를 실천할 것을 맹세하고, 그의 제자가 되어 정신적 훈련과 무예수업을 새로운 각도에서 속성으로 익혔다. 응렴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골격을 타고 태어났으며 지혜로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미 닦아온 기초가 튼튼해 낭염의 지도는 줄탁동시가 되어 나날이 성장하는 속도가 빨랐다. 괄목할만한 응렴의 실력은 가르치는 낭염화상조차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낭염의 엄격하고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가르침은 빼어난 응렴의 자질을 부추겨 어느덧 깨달음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목검을 잡고 상대를 노려볼 때는 짐승의 불빛 같은 안광을 쏘아냈으나 승복을 걸치면 그의 눈은 깊은 바다보다 고요하게 가라앉아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했다.응렴은 헌안왕의 눈에 들어 48대 경문왕으로 즉위해 원성왕 이후 이어지던 왕권 다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 화랑들의 교육을 정예화시키고, 인재를 키워 대거 등용했다. 이어 불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수련이 깊은 승려들을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파견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평화스러운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경문왕의 노력은 결국 아들 헌강왕이 즉위했을 때 빛을 발해 전국에 풍년이 들고, 백성의 마음에도 평화가 깃들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1) 장보고

장보고는 신라인이지만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 더욱 유명한 인사로 기록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다.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당나라로 들어가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장군이 되었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백성을 돌보는 해상왕으로 이름을 날렸다.반란군으로 낙인이 찍혀 허망한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결코 반란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장보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왕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였다는 내용은 없다. 간신배들의 혀 때문에 충신의 허망한 죽음이 생산된 것이다.해상왕 장보고의 충의와 강직한 신념으로 펼쳤던 업적,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미쳤던 그의 활달한 외교의 흔적을 찾아 오늘날 교훈으로 곱씹어본다.◆역사 속의 장보고장보고의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이라 전한다. 삼국유사는 궁파(弓巴)로 기록하고 있다. 모두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보고(張保皐)는 궁복이라는 이름의 한자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변환해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부터 부른 것으로 풀이된다.장보고는 780년대 후반에 완도에서 태어나 84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과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그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828년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해 허락을 얻었다. 청해진 대사로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해상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그의 전력은 왜구의 노략질과 당나라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쳐 제압하고, 멀리 인도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까지 포용해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했다.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했다.845년 장보고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은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이러한 내용이 역사의 주된 줄거리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더 확인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신라 궁성에서는 장보고의 죽음에 이어 청해진을 없애고, 병사들과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동북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신라의 아성은 이후로 무너져내렸다.◆완도 청해진 장보고유적지장보고는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시설, 다양한 생활시설과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신라하대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항만시설과 유적들이 대거 발굴됐다.청해진은 완도에서도 썰물, 밀물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작은 섬이 되는 장도를 위주로 성을 쌓고, 접안시설 등의 수비와 공격이 용이한 요새로 만들었다. 지금도 목재 다리를 만들어 걸어서 장도를 둘러볼 수 있게 했다.신라시대 청해진유적지 장도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입구까지 330여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는 소나무 말뚝, 목책이 박혀 있다. 방어용이었거나 접안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우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최근 당시 모양을 살려 복원한 우물이 장도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청해진 입구에 외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내성문을 설치해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를 설치해 두고 있다.청해진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도 일대는 사적지 제30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청해진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바다의 삼면을 살필 수 있어 접근하는 선박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이다.◆중국 위해 적산법화원중국의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설치한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주변에 신라인의 집단거주지 신라방이 있었다.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 있을 당시 823년경에 창건했다. 이 사찰은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한 것으로 장보고가 나중 무역활동을 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신앙적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장소로 활용되었다. 신라와 연락을 하는 기관의 역할도 담당하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 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특히 이곳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옌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장보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글을 남겼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장보고의 전쟁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과 승마, 창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신라의 계급사회에서 뜻을 펼치는데 한계를 느끼고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인이 되었다.그는 뛰어난 무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받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무령군이 감축되면서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지키기로 했다.흥덕왕을 찾아가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백성이 외국으로 팔려가는 일을 막고, 해상으로 침투해오는 왜구와 당나라 해적들을 토벌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청원을 했다.흥덕왕이 이를 허락하여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 되었다. 그는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남방으로부터 침략해오는 일본과 중국반도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서역까지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거상으로 성장했다.장보고는 또 중국 위해지역까지 진출해 신라인들이 편안하게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 적산법화원을 세워 운영했다.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우징이 왕권쟁탈전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의탁해오면서 운명의 여신은 불길한 기운을 함께 던져주었다.김명이 뜻을 함께했던 희강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해 민애왕으로 등극하자, 우징은 장보고에게 “하늘을 두고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이때 장보고는 “흥덕왕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소. 나는 바다를 지켜 신라의 백성을 돌보기로 했소.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면서 친구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불의한 임금을 제거하도록 했다.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신무왕의 아들이 문성왕으로 즉위해 아버지가 장보고와 한 약속을 지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보고는 이에 대한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보고의 세력을 우려한 왕의 측근들은 간사한 계략으로 장보고를 제거키로 하고 염장을 파견했다.장보고는 왕의 신하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왕이 신하의 목숨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겠소”라며 문성왕의 밀지를 받고 달려온 염장의 칼끝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다.결국 간사한 무리들의 혀로 인해 해상왕 장보고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세계 해상왕의 명성과 함께 청해진의 철옹성도 함께 무너졌다. 신라가 주름잡았던 해상 무역권까지 힘을 잃고 백성의 안위까지 담보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