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6>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

혜통은 신라 신문왕 시대에 널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해 효소왕 시대에 국사까지 지낸 고승으로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것으로 삼국유사는 소개한다. 혜통은 신라에 밀교를 뿌리 내리게 한 명랑법사와 같이 서남산 남간마을이 고향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가족에 대한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며 무외삼장법사의 제자로 많은 공부를 하고 신라로 돌아와 금광사에서 기거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지금까지 남은 그의 흔적이 담긴 유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주 서남산 자락의 남간마을은 남간사라는 절이 있었다 해 마을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남간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논 가운데 우뚝 서있고, 마을안길에 신라시대의 돌우물이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남간마을에는 지금도 집집마다 석탑이나 석등, 주춧돌 등의 신라시대 절이나 건축물에 사용됐을 석재들을 곳곳에 쌓아두고, 집의 주춧돌이나 부뚜막의 기초석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삼국유사: 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승려 혜통은 그의 가족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속인으로 있을 때 집은 남산의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지금의 남간사 동쪽 마을이다)에 있었다. 하루는 집의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 가보니 뼈는 옛날에 살던 굴속으로 돌아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바라보고 놀라 한참이나 이상히 여기며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느낀바가 커 속세를 버리고 승려가 돼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혜통은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을 찾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말하기를 “신라 사람이 어찌 감히 불법을 닦을 그릇이 되겠느냐”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혜통이 알고 싶어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있으니 조금 후에 이마가 터지면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무외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고는 화로를 치우고 터진 곳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신비스런 주문을 외우자 상처가 아물어 전과 같이 됐으나 왕 자 무늬의 흉터가 생겼다. 이로 인해 왕화상으로 불렀다. 혜통의 재질이 뛰어나므로 삼장이 심법의 비결을 전해 줬다. 이때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이 나서 고종이 무외삼장에게 치료를 청하니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혜통이 고종의 명을 받고 별실에 거처하면서 흰콩 한 말을 은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흰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여 병마를 쫓으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또다시 검은콩 한 말을 금으로 된 그릇에 담고 주문을 외우자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흰색과 검은색의 병사들이 힘을 합쳐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이 뛰쳐나오고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신라의 문잉림으로 가서 매우 심하게 사람을 헤쳤다.이때에 정공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혜통을 보고 말하기를 “스님이 쫓아낸 독룡이 우리나라로 와서 심한 해를 끼치니 속히 가셔서 없애 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혜통은 정공과 함께 인덕 2년 을축(665)에 본국으로 돌아와 용을 내쫓았다.용이 또 정공을 원망해 이번에는 정씨의 문밖에 있는 버드나무에 의탁해 살고 있었으나 정공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나무가 무성한 것만 좋아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신문왕이 세상을 뜨니 효소왕이 즉위해 신문왕의 무덤을 만들고자 장사지낼 길을 내는데 정씨의 버드나무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관원이 그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했다. 정공이 성을 내어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이 나무는 못벤다”고 하자 관원이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왕이 크게 노해 법을 집행하는 관원에게 “정공이 왕화상의 신비스런 술법을 믿고 장차 불손한 일을 꾸미려고 왕명를 업신여겨 거역하며 제 목을 베라 하니 좋아하는 대로 해주어라”고 명령했다.이리해 그를 목 베어 죽이고 그의 집을 흙으로 묻어버렸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므로 필시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당히 그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한 후 즉시 병사를 소집해 그를 찾아 잡게 했다. 혜통은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지붕으로 올라가 사기병과 붉은색 먹을 묻힌 붓을 들고 병사들에게 “내가 하는 것을 보라”고 하며 병의 목에 한 획을 긋고 “너희들은 각자의 목을 보거라”라고 했다. 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고 깜짝 놀랐다.혜통이 또 “만약 병목을 자르면 응당 너희들의 목도 잘릴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호통쳤다. 병사들이 황망히 달아나 붉은 줄이 그어진 목을 한 채 왕 앞으로 달려 나아가자 왕이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 할 수 있겠느냐”하고 말 한 후 그대로 내버려뒀다. 왕녀가 갑자기 병이 나자 혜통을 불러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자 혜통이 말하기를 “정공이 독룡의 해를 입어 나라의 형벌에 억울하게 당했습니다”고 했다.왕이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후회해 즉시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용은 정공에게 원한을 갚고 기장산으로 가서 곰신이 되어 해독을 심하게 끼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혜통이 그 산속으로 들어가 용을 타이르고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줬더니 곰신이 된 용의 해가 그제야 없어졌다. 신문왕이 등에 종기가 생겨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했다.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나았다.그러자 혜통이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양민인 신충을 잘못 판결해 종으로 했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어 윤회환생할 때마다 보복을 하는 것이옵니다. 지금의 몹쓸 종기도 신충 탓입니다. 신충을 위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어 그의 원한을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옳게 여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했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임금께서 절을 세워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나게 됐으므로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외치는 소리가 났던 곳에는 절원당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밀본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용궁에 들어가서 신인을 얻어 처음으로 신유림에 절(지금의 천왕사)을 세우고 여러 번 이웃나라의 침입을 기도로 막았다. 이후 명랑스님이 무외삼장법사의 핵심사상을 전하고 속세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만물을 감화시켰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통의 신통력혜통은 경주 서남산 기슭의 남간마을에서 태어났다.어릴 때 수달 한 마리를 죽여 개울 옆에 버렸다.다음날 그 수달이 없어져 핏자국을 따라 가보았더니 뼈만 남은 수달이 새끼를 끌어안고 있었다.그 이후 충격을 받아 삶에 대한 궁극적인 고뇌에 빠져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깎고 불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혜통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스승을 찾아 공부를 하다가 당나라 무외삼장법사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혜통은 문전박대하는 무외삼장에게 화로를 머리에 이고 버티면서 자질을 인정받아 제자가 됐다. 혜통은 당 고종의 여식을 단지 주문으로만 치료하면서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 이름을 떨쳤다. 신문왕 때 다시 신라로 돌아온 혜통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문제 있는 곳에 나타나 해결해주는 만통법사로 통했다. 특히 혜통은 살아 있는 것은 철저하게 그 목숨을 보호해 주기로 유명했다. 혜통과 마주 앉아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스스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겨 갈등은 저절로 풀렸다. 혜통이 기장 장안사에서 머무는 동안 소문을 듣고 민원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혜통이 늦은 시간 장안사로 돌아오는 길에 불광산의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나무토막을 던져 줬다.토끼는 도망가고 나무토막을 냉큼 받아 문 호랑이는 나무토막을 질겅질겅 씹어 삼켰다. 그 다음부터 호랑이는 장안사를 맴돌며 혜통이 던져주는 나무토막으로 연명하며 살생을 잊고, 장안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5>밀본법사가 귀신을 물리치다

여기부터 삼국유사 제5권 신주편이다.신주는 3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는데 신비한 주문이라고 해석된다.주문은 밀교에서 행하던 세 가지 의식 중의 하나로 진언을 의미한다.어떤 책은 다라니경도 주문의 하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신주편에서는 밀본, 혜통, 명랑법사 등의 승려를 통해 밀교에 대한 신비스런 주문과 그 힘을 소개한다.신라 선덕여왕대부터 시작해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까지 이어지며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 등 사회적 분위기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밀본은 삼국유사 전체를 통틀어 여기에서만 등장한다.밀본이 법사의 이름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밀교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학자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만들어진 가공의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사천왕사에서 명랑법사와 유가명승들이 주문을 외워 당나라의 50만 대군을 수장시킨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밀교의 한 부분을 삼국유사가 소개하는 신주편에서 엿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밀본 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선덕왕 덕만이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자 흥륜사 승려 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의 치료를 맡은 지 오래 됐으나 효험이 없었다.이때 밀본법사의 덕행이 온 나라에 소문나 있으므로 측근 신하들이 법척을 밀본법사와 바꾸기를 왕에게 청했다. 왕이 조서를 내려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밀본은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을 읽었다. 경을 다 읽자마자 가지고 있던 육환장(고리가 여섯 개인 지팡이)이 왕의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던져 거꾸러뜨리니 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이때에 밀본의 머리 위로 다섯 색깔의 신비로운 빛이 뻗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또 승상 김양도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김양도가 늘 보니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거느리고 와서 집안의 상 위에 있는 음식들을 맛보고 먹으면서, 무당이 와서 제사 지내면 떼를 지어 모여들어 저마다 욕했다. 양도는 귀신들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싶었으나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부친이 법류사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승려를 청하여 경을 읽게 하자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시켜 쇠몽둥이로 승려의 머리를 쳐 땅에 넘어뜨리니 승려는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 며칠 후에 사람을 보내 밀본법사를 맞아오게 했다.그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밀본법사가 우리 청을 받아들여 곧 올 것입니다”라 하자 귀신의 무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색이 변했다.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오면 이로울 것이 없으니 그를 피하는 것이 어쩌면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고 말했다.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며 태연하게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는가”고 답했다. 조금 뒤에 사방에서 모두 쇠로 된 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한 대력신이 와서 귀신의 무리들을 잡아 묶어서 갔다. 그 다음에는 수 많은 천신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후에 밀본이 도착해 경을 펼 사이도 없이 양도의 병은 즉시 나아서 말을 하고 몸도 움직일 수 있게 되니 지난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했다.이로 인해 양도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서 한평생 게으르지 않았으니 흥륜사 법당의 주불인 미타부처상과 좌우보살을 빚어 만들었으며 아울러 법당 안에 금빛으로 벽화를 가득 그렸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에 머물렀다.또 김유신은 연배가 높은 거사 한 분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이때 유신공의 친척 되는 수천이 나쁜 병에 걸린 지 오래 돼 공이 거사를 보내 진찰해 보도록 했다. 마침 수천의 친구인 인혜라는 이름의 승려가 중악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기면서 말했다.“그대의 형상과 거동을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찌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거사가 말하기를 “나는 김유신 공의 명을 받고 부득이 왔을 뿐이외다”고 답했다. 인혜가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신통력을 보라”고 한 후 즉시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자 조금 뒤 오색구름이 그의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천화가 흩어져 떨어졌다. 거사가 말하기를 “스님의 신통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제자도 또한 변변찮은 재주가 있으니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스님께서는 잠깐만 제 앞에 서 계십시오”고 하니 인혜는 그의 말에 따랐다.거사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소리를 내자 인혜가 공중으로 한 길 높이 가량 거꾸로 떠오르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에 박혀 말뚝을 박은 것처럼 우뚝 섰다. 옆에 사람이 밀거나 당겨도 꼼짝하지 않았다. 거사가 떠나가니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로 밤을 세웠다. 이튿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유신공에게 알리자 유신공이 거사를 보내 그를 풀어 구해 줬다. 인혜는 다시는 재주부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밀본법사의 육환장밀본법사는 신라 궁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깊은 계곡의 금곡사에 거주하며 일반인들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그가 외출할 때는 늘 대나무로 만든 육환장을 들고 다녔다. 밀본법사는 앉거나 서거나 걸어다닐 때조차 늘 중얼중얼 거리며 입안에 무슨 소리를 외고 다닌다. 법사가 걸어다닐 때 그의 발을 자세히 본 사람이라면 그의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살짝 떠다닌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그는 이미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 살생을 즐겨하지 않아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자신의 육신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려고 걸을 때도 땅을 밟지 않았던 것이다. 밀본법사는 찾아오는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거나 살아갈 방도에 대해 족집게처럼 도움을 주어 삶을 평화롭게 하는데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러한 소문으로 험한 산길을 헤치고 금곡사를 방문하는 발길이 줄을 이었지만 밀본을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미 밀본이 알아차리고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본은 수련을 위해 바위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도 모르게 많은 곳을 다니며 이적을 행사했다.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도 알게 모르게 많은 일을 하고 다녔다.특히 일본이 바다 건너 침략해 오는 것은 밀본이 미리 예방해 당시에는 왜구들이 신라땅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했다.밀본은 해변마을 지형에 변형을 주고 주문을 걸어 바다에서 아예 접근을 못하게 했다. 왜구들이 배를 타고 동해안 신라의 땅으로 들어올라치면 노를 젓고 저어도 가까워지지 않아 한 번도 신라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해변 마을 산과 들에 밀본이 박아 둔 육환장이 이해하지 못할 방향으로 이곳저곳에 꽂혀 있었다. 도적을 물리치거나 나쁜 귀신을 쫓는 일에는 반드시 밀본의 육환장이 활약을 했다.그의 손발이 직접 움직이는 일은 좀체 볼 수가 없었다.밀본의 육환장이 움직이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워낙 빠르고 강한 힘을 바탕으로 움직여 아무리 힘이 좋은 장군이라 해도 그의 육환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선덕여왕을 괴롭히던 귀신은 무리를 거느린 힘이 강한 대장귀신으로 우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자신의 힘을 과신한 그 대장귀신 우괴는 겁이 없었으며, 자만심에 빠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조건 해치우고 보는 성미였다. 때문에 선덕여왕과 충신 김양도를 괴롭히며 자신들의 권역을 넓혀가던 중에 밀본법사가 왕의 부름을 받고 자신들을 잡으러 온다고 해도 대책을 세우지 않고 거만을 떨다가 법사에게 낭패를 당했다. 밀본은 우괴의 거만함을 미리 알고는 궁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 육환장을 던져 우괴의 늑골을 후려쳐 일어서지도 못하고 꿇어앉게 했다.부지불식간에 당한 우괴는 밀본이 도포자락을 끌며 여왕 앞에 목례로 인사를 하면서도 빈틈없이 단단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절망했다. 우괴는 그의 부하 귀신들을 모조리 궁궐에서 철수시켜 변방으로 달아나면서 밀본의 육환장이 또 날아올까봐 전전긍긍하며 신라 쪽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4>심지가 진표조사를 계승

심지가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에서 동화사를 창건했다.동화사에는 창건 후 1천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심지가 세운 삼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의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비로암의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형식으로 건축돼 대부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고,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큰 훼손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보물 제247호와 24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심지스님은 삼국유사에서는 헌덕대왕의 아들이라며 우애가 있었다고 표현해 형제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대부분의 사서는 헌덕왕은 아들이 없어 동생 흥덕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엇갈리는 부분이다. 왕자가 궁궐을 벗어나 천년이 지나도록 만인이 우러러보는 고승이 됐던 심지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삶의 기술을 배우는 길이 될 듯하다. ◆삼국유사: 심지가 진표조사를 계승하다승려 심지는 진한 제41대 임금인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온화하고 슬기로웠다. 나이 15세에 세속의 옷을 벗고 스승을 따라 부지런히 불도를 닦으며 중악에 머물렀다. 마침 속리산에 있던 영심공이 진표율사의 부처님 뼈로 된 간자를 전해 받아 과증법회를 연다는 소문을 들었다.심지는 뜻을 결정해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례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땅에 자리를 펴고 마당을 치면서 여러 무리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이레가 지나자 하늘에서 비와 눈이 몹시 내렸으나 심지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사방 열자 가량은 눈이 휘날리면서도 내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신기함과 기이함을 보고 불당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했다.심지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방 안으로 물러가 당을 향해 예배하는데 팔꿈치와 이마 모두에서 피가 흘러 진표율사가 선계산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다. 지장보살이 날마다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두 개의 간자가 옷깃 사이에 붙어있는 것을 봤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영심에게 고하니 영심이 말하기를 “간자가 함 속에 있는데 어찌 여기에 있겠소?” 하면서 검사했다.함을 봉한 표시는 예전과 다름없는데 열어보니 간자가 없었다. 영심이 매우 이상히 여겨 간자를 겹겹이 싸서 보관했다. 심지가 다시 가는데 먼저와 같았다.또다시 돌아가 고하자 영심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가 받들어 봉행할지어다”라고 하면서 곧바로 간자를 줬다. 심지가 간자를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오자 산신이 두 선자를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맞아 심지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 그들은 바위 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공손히 정계를 받았다. 심지가 말하기를 “이제 터를 골라 불타의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우리들은 터를 정할 수가 없소이다. 청컨대 세 분과 함께 높은 곳에서 간자를 던져 점을 칩시다”고 말하고 즉시 산신들과 함께 봉우리 꼭대기로 올라가 서쪽으로 간자를 던졌다. 간자는 곧 바람에 날려갔다. 이때 신선이 노래를 이렇게 지어 불렀다. ‘막힌 바위 저멀리 물러가니 편편해지고, 낙엽 날아 흩어지니 나타나는 선명함이여, 부처님 뼈로 된 간자 찾아 얻어서, 정결한 곳 맞이하여 정성을 바치리라.’ 노래를 부르고 나서 숲 속에 있는 우물 안에서 간자를 찾아 즉시 그 자리에 불당을 지어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의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곳이다. 고려조의 예종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대궐로 맞아들여 우러러보며 경배했으나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한 개를 잃어버리고 상아로 대신 만들어 본래 뒀던 절로 보냈다. 지금은 점점 변해 같은 빛깔이 돼 새것과 옛것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그 바탕은 상아도 아니고 옥도 아니다. 점찰경 상권을 살펴보면 189개의 간자 이름이 기록돼 있는데 1은 상승을 구해서 불퇴위를 얻음이며, 2는 구하는 과가 마땅한 증을 보이는 것이다.제3과 제4는 중승과 하승을 구해 불퇴위를 얻는 것이다. 5는 신통을 구해서 성취하는 것이다.6은 사범을 닦아서 성취하는 것이고, 7은 세간의 선을 닦아 성취하는 것이다.8은 받고 싶던 묘계를 얻음이고, 9는 일찍이 받은 계를 다시 얻음이며, 10은 하승을 구해 신앙을 확보하지 못 함이다.그 다음은 중승을 구해 신앙을 얻지 못 함이다. 이렇게 해 172까지는 모두 전생과 이생 사이에 더러는 착하기도 하고 더러는 악하기도 하며 얻기도 하며 잃기도 하는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간 것이다.174는 죽어서 이미 축생이 된 것이다.이렇게 해 아귀, 아수라, 인, 인왕, 천, 천왕, 문법, 출가, 성승을 만나보는 것,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 정토에 태어나는 것, 부처를 찾고, 하승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을 얻음에 이르기까지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3세의 선악 과보를 차별하는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보아서 마음이 행하려고 하는 것과 간자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얻게 되면 감응이 되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지극하지 못한 마음이니 이름하여 허류라고 한다.그렇다면 8과 9의 두 개의 간자는 단지 189개의 간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문사 김관의가 편찬한 왕대종록 2권에서 말하기를 신라 말기에 신라의 큰스님 석충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 189개를 바쳤다고 했다. 지금 동화사에 전해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자의 출가심지는 신라 41대 헌덕왕의 아들이다. 헌덕왕은 이름이 언승으로 원성왕 큰 아들의 둘째 아들이다. 언승은 형과 두 동생, 4형제로 일찍부터 할아버지 원성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서 나라일을 배웠다. 원성왕이 죽은 다음 언승의 형이 신라 39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소성왕의 동생이었던 언승과 수종, 충공 3형제도 맏형의 일을 도와 조정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맡아하는 대신이 됐다. 소성왕이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죽자, 동생이었던 언승은 조카 청명을 신라 제40대 애장왕으로 즉위하게 하고 실질적인 군주가 돼 섭정에 나섰다. 심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언승이 숙부들과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라일에 대해 의논하는 모습들을 눈여겨 보면서 자랐다.그리고 4촌 형제였던 애장왕과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같이 친하게 살갑게 지냈다. 특히 애장왕 청명의 누이 장미와는 소꿉장난을 하면서 부부 흉내를 내어가며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심지는 아버지와 삼촌들의 밀담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아버지의 처소 앞을 지나는데 아버지와 삼촌들이 조카인 애장왕을 없애고 왕위를 빼앗자고 모의하는 이야기를 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시 심지의 아버지 언승은 상대등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정과 병력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조카 애장왕의 왕권도 마음대로 휘둘렀다.언승의 동생들인 수종과 충공도 형의 말에는 아무런 저항없이 잘 따르는 편이었다. 언승은 동생들과 함께 조카 애장왕을 제거하고, 먼저 언승이 왕위에 오른 다음 아들이 아닌 동생들에게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심지는 친구처럼 지냈던 애장왕의 불행을 차마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하다 불문에 귀의하기로 마음먹고 아버님에게 나라를 돌아보며 백성들의 삶과 지역의 실정을 살펴보고 싶다고 아뢰어 허락을 얻었다. 그길로 심지는 거추장스런 일행들을 따돌리고 팔공산 깊숙이 들어가 계곡에서 수행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속리산 법주사에서 진표율사가 계승한 부처님의 뼈로 된 간자를 두고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을 재촉해 그 법회에 참석했다. 심지는 진표율사가 수행했던 점찰법을 따라 수행하며 법회에 참가했다가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으로 돌아와 동화사를 창건했다. 심지는 마음속의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꿈에서 보았던 부처님의 모습을 손수 정을 들고 바위에 그대로 조각했다. 동화사 일주문 앞의 암벽에 새겨진 유희좌상의 마애불좌상이다. 심지스님의 작품 마애불은 천년 세월을 지나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3>승전법사와 갈항사 돌무더기

김천 갈항사는 신라시대 승전 법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다.지금은 사라진 절터에서 불상과 석탑 등의 문화재가 출토됐다.동서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에 발견되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동서석탑 중 동쪽석탑 기단에 조성연대와 조성한 인물 등의 내용이 기록돼 금석문 등의 역사학계에 중요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석탑을 조성한 인물이 원성왕의 생모와 이모, 외삼촌 등 왕족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이어서 신라시대 왕실에서 외부의 사찰에 대한 지원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갈항사는 신라시대 창건돼 중요 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 승전촉루 갈항사승려 승전은 그 내력이 자세하지 않다.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의 강석에 나아가 배웠다. 현묘한 말을 받아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사색을 쌓았다.보는 것이 슬기롭고 매우 빼어나 숨은 것을 깊이 음미해 찾고, 그 묘함과 깊음을 구하는 데 구석구석까지 진력을 다했다.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 감응을 받고자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 처음에 현수가 의상과 함께 공부하면서 지엄화상의 자애로운 가르침을 모두 받았다.현수는 스승의 학설에 따라 뜻을 여러 부분으로 기술했던 바 승전법사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편에 이를 보냈다.의상도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한다. 별도로 봉한 서신은 이렇다.‘탑현기 20권 중에 두 권은 미완성입니다. 교분기 세 권, 현의장 등 잡의 한 권, 화엄범어 한 권, 기신소 두 권, 십이문소 한 권, 법계무차별론소 한 권, 이렇게 모두를 승전법사가 간추려 베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번에 신라의 승려 효충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이것은 스님께서 보낸 것이라 했는데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으나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 서쪽 나라의 물병과 대야 한 개를 올려 작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올립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와 편지를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이 법장의 글을 펴보니 마치 지엄의 가르침을 귀로 듣는 것만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구하고 검토해 문하의 제자들에게 주면서 이 글을 널리 펴게 했다.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이 글을 살펴보면 원만하고 융통한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것은 진실로 승전법사의 공로이다.그 후 승려 범수가 멀리 당나라로 가서 새로이 번역된 후분화엄경, 관사의소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퍼뜨리고 가르쳤다.이때가 기묘년(799)이었다. 이 또한 불법을 구해 널리 유포시킨 것이라 하겠다. 승전은 바로 상주 영내에 있는 개령군 지역에 절을 짓고 돌들을 제자로 삼아 화엄경의 강의를 열었다.신라 승려 가귀가 자못 총명하고 불법의 이치를 알아 법통을 이어 심원장을 저술하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승전법사가 돌무더기를 데리고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을 했으니 지금의 갈항사였다.그돌 80여 개를 지금까지도 절의 주지가 전해 주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러움과 신이함이 있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갈항사경북 김천시 남면 오봉리의 갈항사는 신라시대 성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 처음에는 작은 절로 개창했지만 758년 경덕왕 대에 중창된 당시 중요사찰로 손꼽힌다.갈항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전해지지만 언제 폐사됐는 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사찰의 흔적도 없는 갈항사지에서 주요 유적들이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동서 삼층석탑이 발굴되어 경복궁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이 석탑은 국보 제99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석탑의 보존상태가 깨끗할 뿐 아니라 동탑의 기단석에 이두로 새겨진 명문이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기단석에 새겨진 내용은 신라 원성왕의 생모 계오부인과 이모, 외삼촌 등 3명이 758년에 이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원성왕의 외삼촌은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다. 석탑이 발견됐던 김천 갈항사지에는 석탑이 있었던 곳을 표시하는 표지석 2기가 과수원 가운데 동서로 나뉘어 우뚝 서 있다. 갈항사지에서 발견된 오봉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얼굴부분을 빼고는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다.지금은 전각을 지어 보호관리하고 있다. 왼쪽 팔 일부가 일본인에 의해 부서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신라시대 석조유물로 보물 제245호로 지정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갈항사의 돌신라시대 갈항사의 승전법사는 한 번 기도에 들어가면 보통 10일씩은 물도 거의 마시지 않고 몰입한다.법사가 기도할 때면 다섯 명의 비슷하게 생긴 건장한 신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주변을 지켰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도 절을 방문하는 사람이 없는데 법사가 강의를 할 때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80여 명의 무리가 엎드려 함께 공부하고 염불을 외웠다. 그러다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다. 또 억울한 일이 있거나 간절한 소원이 있는 중생들이 가끔 갈항사를 찾아와 법사에게 하소연하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중생의 뒤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했다.중생이 돌아보면 갈색 옷을 입고 기도하던 사람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중생이 따라가 이것저것 캐물으면 깨알같이 대답하며 소원을 이루도록 했다. 법사 옆을 지키는 갈색 옷을 입은 신도들은 갈항사 뒤를 에워싸고 있는 돌담의 돌들이었다.갈색돌들은 밤이 돼 산짐승이 들어오려 하면 높은 담으로 변해 법당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막았다. 눈보라가 치면 또 법당을 울처럼 막아 초가지붕이 흐트러지지 않게 했다. 한번은 도적 10여 명이 깊은 밤을 틈타 떼로 몰려왔을 때 갈색옷을 입은 무장들이 하나같이 긴 창을 들고 법당을 에워싸고 지켰다. 도적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승전법사가 먼 길을 떠날 때는 돌담의 돌이 갈색옷을 입은 신도가 되어 뒤따르며 지켰다. 깊은 물을 건널 때면 갈색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법사의 발이 젖지 않게 했다. 갈항사의 돌담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승전법사의 친구이자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고, 그를 지켜주는 호법신이기도 했다. 갈항사에서 기도를 올린 사람들의 기도는 한가지 소원은 꼭 이뤄졌다.이러한 소문이 퍼지면서 갈항사를 찾는 신도들의 발길이 하나둘씩 늘어나 원성왕 때에는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 됐다. 그러나 승전법사가 입적한 이후로는 갈색돌담을 이루던 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해 몇 해가 지나 모두 없어져 버렸다. 승전법사의 고향은 어디인지 언제 입적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부석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갈항사를 창건하고 돌무더기와 공부하며 법화경을 강론했다는 설만 전해지고 있다. 승전법사 이후 갈항사는 원성왕의 친어머니 삼남매가 동서 삼층석탑을 세우고, 황금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중창하면서 더욱 번창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2>진표율사

진표율사는 전주 사람이다.진표는 깨달음을 얻고자 처절할 정도로 몸을 혹사하며 수련했다.오체를 돌에 던져 팔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에서 피가 터져흘러도 수행을 이어갔다.이러한 목숨을 버려 정진하는 모습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감응해 현신해 계를 줬다는 기록이다. 이런 깨우침을 얻어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창건하고, 속리산을 돌아보며 절을 지을 곳을 표시한 다음 제자들에게 그곳에 절을 지어 법을 널리 펼치게 했다. 지금의 법주사가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현재 법주사에서는 그러한 기록이 드러난 곳을 찾기 어렵다. 일연은 기록을 통해 진표율사의 몸을 던져 도를 구하는 점찰법에 대해 주의해서 행해야 할 것이라 경계하기도 했다. ◆삼국유사: 관동 풍악 발연수 석기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나이 열두 살이 돼 승려가 될 뜻을 가지자 그의 아버지가 이를 허락했다.진표율사는 순제법사가 머물고 있는 금산의 절로 가서 세속을 떠나 승려가 됐다.순제가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비법 한 권과 점찰선악업보경 두 권을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해 직접 계법을 받아 세상에 펴도록 하라”고 말했다. 율사가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해 물러 나와 이름 있는 산을 두루 돌아다녔다.나이 27세 되던 상원 원년 경자(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에 가서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으로 들어갔다.쌀 다섯 홉을 하루 양식으로 삼되 한 홉의 쌀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가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를 받지 못하자 결단을 내려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율사를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모셔 놓았다. 율사가 다시 뜻을 내어 원하는 바를 구해 21일간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했다.돌로 오체를 두드리면서 참회했더니 사흘이 되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떨어져 나갔다.이레째 되던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쇠로 된 지팡이를 흔들며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됐다. 보살이 드디어 가사와 바리떼를 줬다. 율사는 영험이 따르는 것에 감복해 더욱더 정진했다.21일이 되자 바로 천안을 얻어 도솔천의 무리들이 오는 광경을 보게 됐다.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율사의 앞에 현신했는데 미륵보살은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훌륭하여라.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기 위해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는구나”라고 말했고 지장보살은 계본을 줬다. 미륵보살도 다시 간자 두 개를 줬는데 하나는 9라고 쓰여 있는 것이고 하나는 8이라고 쓰여 있었다.미륵이 율사에게 말하기를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다. 이것은 시각과 본각의 두 각을 비유한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이다. 이것으로써 마땅히 인과응보를 알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곧 사라지니 때는 임인(762) 4월27일 이었다. 율사가 교법을 받은 후 금산사를 세우고자 산에서 내려왔다.대연진에 도착했을 때 홀연히 용왕이 나오더니 옥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을 거느리고 금산수로 모시고 가자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며칠 되지 않아 절이 완성됐다.다시 감응이 있어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을 줬다. 율사는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유해 쇳물을 부어 미륵장륙상을 만들었다.또 미륵보살이 내려와 계율을 주는 장엄한 모습을 금당의 남쪽 벽에 그렸다.갑진(764) 6월9일에 장륙상이 완성됐고 병오(766) 5월1일에 금당에 모시니 이해가 대력 원년이었다. 율사가 금산을 떠나 속리산 골짜기에 도착했다.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표를 해둔 후 명주 해변으로 돌아와 천천히 가는 도중에 물고기와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을 향하여 몸을 잇대어 엮어 육지처럼 만들어 줬다. 율사가 그들을 밟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계법을 외워주고 되돌아왔다. 그가 고성군으로 와서는 개골산에 들어가 처음으로 발연수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곳에 머무른지 7년 되는 때에 명주 지방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가 이들을 위하여 계법을 설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니면서 삼보에 극진히 공경했다. 얼마 후 갑자기 고성해변에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서 먹을 것을 마련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가 발연수를 떠나 다시 불사의방으로 갔다. 그후에 집이 있는 고을에 가서 아버지를 찾아뵙기도 하고 진문대덕의 처소에 머물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큰스님인 영심대덕이 융종대적, 불타 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청하기를 “우리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을 주소서”라고 했다. 율사가 잠자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아니하자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했다.율사가 그제야 교를 전해 관정을 해주며,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 공양차제비법 한 권과 점찰선악업보경 두 권, 간자 189개를 줬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제 줬으니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면 길상초가 난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 널리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후세에 전파하라”라고 말했다.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어 즉시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라고 칭했다.영심이 여기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수에 가서 같이 도를 닦으며 끝까지 효도했다.율사는 세상을 떠날 때 절의 동쪽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가 입적했다.제자들이 진표의 유해를 옮기지 않고 공양하다가 해골이 되어 흩어져 떨어질 때가 돼서야 흙으로 덮어 묻고 이로써 무덤을 만드니 곧 푸른 소나무가 났다. 세월이 오래 지나자 말라 죽고 다시 나무 하나가 나고, 그 후 또 한 그루가 자라났는데 두 그루의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두 그루의 나무가 쌍으로 서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표율사와 범마실진표율사는 목숨을 도외시하고 처절하게 자신의 몸까지 학대해가며 기도를 올리며 수행하는 법승으로 유명하다.율사가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도록 오체를 바위에 던져가며 기도를 올려 드디어 미래불을 만나 금산사를 지었다. 율사는 드디어 천안통을 얻어 가만히 앉아서 천리 밖을 내다보는 힘을 가지게 됐다. 율사는 미래불을 만났지만 현세에서 편안한 삶을 얻고자 수련에 더욱 정진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 남쪽계곡에 범이 출몰하는 범마실이 있었다. 범마실에 다섯 아들을 둔 과수댁은 매일 떡을 팔아 연명했다. 새벽에 일어나 떡을 빚어 이마 위에 이고는 백리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떡을 팔아 생필품을 샀다. 어느 날 밤이 이슥하도록 떡을 못다판 과수댁이 지친 다리를 끌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을 입구에서 범을 만났다.모악산의 대장 범이었다. 과수댁은 황소만한 범이 큰 입을 벌리는 것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범이 과수댁을 삼키기 직전에 푸른 빛과 함께 뭉클한 바람이 범의 목을 두드렸다. 뒤로 한발 물러선 범이 과수댁 뒤에 우뚝 서 있는 육환장을 보았다. 육환장은 진표율사가 들고 다니는 물푸레나무로 만든 지팡이였다. 이어서 “이제부터는 사람을 잡아먹으는 안된다”는 묵직한 말이 범의 귀를 파고들었다. 흰 수염이 가슴 아래까지 내려온 진표율사의 얼굴이 육환장 뒤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범의 시야에 가득찼다. 범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고 다시는 사람을 헤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꼬리를 내렸다. 과수댁도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진표율사에게 삼배를 하고 고개를 들자 율사는 빙긋 웃고는 금산사 쪽으로 사라졌다. 과수댁은 범에게 남은 떡을 던져주고는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 왕범은 범마실 사람들이 밤늦게 귀가하는 길을 지켜주는 길 안내자가 됐다. 마을 사람들은 과수댁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금산사를 찾아가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하나씩 이뤄졌다. 범마실 이름이 그 이후 금산사에 원을 하면 이루어지는 마을이라 하여 청원마을로 바꿨다. 청원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어김없이 금산사를 찾아 기도를 올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1>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의 불교를 꽃피운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의상과 원효는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종교인이면서 사상가이자 철학자, 정치인이며 성인으로 손꼽힌다.의상과 원효는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승으로 전해지며 기록이 남아있는 국제적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상은 중국에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배워 신라에 그 뿌리를 내렸다.원효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를 꽃피우는 일에 앞장섰다.이 때문에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의상과 원효의 이름이 없는 사찰이 없을 정도다. 원효와 의상 두 성인 모두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부처의 길을 안내했다.원효가 스스로 실천적으로 민중과 함께 살다간 수행자라면 의상은 실천적 불교에 힘쓰면서 제자들을 길러 제자들이 전국 십대사찰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한 교사적 성인이었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입적과 시기를 같이해 중국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왕실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호국승려이기도 하다. 의상은 양양의 낙산사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탁월한 십대제자를 길러내 신라의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워 국사, 법사, 대사 등으로 불린다. ◆삼국유사: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의상법사의 아버지는 한신이며, 성은 김씨이다.나이 스물아홉에 서울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해,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다가 국경의 수비군이 간첩으로 오인해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영휘 초년(650)에 때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 배에 편승해 중국으로 들어갔다.처음에 양주에 있었는데 양주의 장군 유지인이 청해 의상을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 지엄을 만났다.지엄이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와 중국까지 덮었는데 나무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 청소를 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바로 도착하는 것이었다.극진한 예절로 그를 맞이하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어제 꾼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의상이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그윽하고 미묘한 데까지 해석하니, 지엄은 학문을 서로 이야기할 동반자를 만나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 김흠순(인문이라고도 한다)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갇혀 있었는데 당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유하여 먼저 돌아가게 했다. 의상이 함형 원년 경오(670)에 귀국해 이 일을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의 고승 명랑을 시켜 임시로 밀교의식을 행할 단을 세우고 비법으로 기도하니,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의봉 원년(676)에 의상이 태백산으로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자 영험스런 감응이 뚜렷이 나타났다. 종남산 지엄의 제자였던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면서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도 함께 보냈는데 글은 이러하다. ‘서경의 숭복사 중 법장이 해동 신라의 화엄법사님의 시종을 드는 분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년이 됐으나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과 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중략)’ ‘우러러 받들건대 스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끝없는 연기를 드날리시고 겹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하니 기쁨이 뛸 듯이 깊어집니다. (중략)’ ‘분수에 따라 전수받아 가진 것을 버려둘 수도 없어서 이 공부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다만 스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결해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래서 스님의 은미한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를 만들었습니다. 근래에 승전법사가 옮겨 써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오니 스님께서는 좋고 나쁜 점을 상세히 검토하시어 경계해야 할 바와 깨우쳐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중략)’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였습니다.’의상은 이에 10여 곳의 사찰로 불법을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남악의 화엄사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지으니 일승의 중추가 되는 요점을 모두 실어 천년의 귀감이 되게 했으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었다.이 밖에는 저술이 없지만 솥 안의 고기 맛을 보는데 한 점의 고기로도 충분할 것이다.법계도서인은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됐으며 이 해에 지엄도 입적했으니 이는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간에 전해지기로 의상은 바로 부처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인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열 명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승려들이 우두머리가 됐다.그들 모두가 성인과 버금가며 각자 전기가 남아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의 골암사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지통이 추동기를 지었는데 직접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의 글에는 오묘한 경지에 이른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머물면서 항상 천궁을 오갔다.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이 함께 탑을 돌면서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탑에는 사다리와 돌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계단에서 3자나 떨어져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그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시 괴이하다고 여길 터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과 선묘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선묘 낭자를 만났다.선묘는 의상의 인물됨에 한눈에 푹 빠져버렸다.그러나 이미 불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의상과의 세속적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선묘는 그냥 의상의 옆에서 머물기로 작심하고 그를 돌보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이 고국 신라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중요한 정보를 들고 선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신라로 떠나는 배에 올라버렸다.의상이 신라로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묘는 용이 돼 뒤따르며 풍랑을 잠재워가며 의상의 뱃길을 인도했다. 의상이 신라에서 국왕을 만나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낱낱이 보고했다.이어 낙산으로 올라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뜻에 따라 낙산사를 건립했다.또 신라 국왕의 명을 받아 영주 부석사를 건립했다. 부석사에서 불법에 매달리는 의상을 보살피기 위해 선묘는 용이 돼 밤이면 암자에 운무를 드리우고 지붕에 똬리를 틀어 도적이든 짐승이든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며 의상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선묘는 밤이 늦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당당한 자세의 의상을 보다가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선묘의 눈에는 의상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낭군이었다. 그날따라 의상의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여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의상도 그날따라 선묘를 내치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줬다. 선묘는 그만 황홀경에 빠져 극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벽에 머리를 꽝 부딪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지만 생생한 느낌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선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선묘의 품에는 의상의 목침이 안겨있고, 어깨 위에는 그의 도포가 덮여있었다. 의상은 꼿꼿한 자세로 아미타불 앞에서 여전히 염불을 암송하고 있었다. 선묘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덮고 있던 의상의 도포를 곱게 개켜 두고는 지붕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선묘는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낭군님은 이미 불가의 제자다. 임의 공부에 방해가 돼서는 아니 된다. 나를 다스려야겠다’고 재차 다짐한 선묘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바위로 바꿔 버렸다. 스스로 욕심을 억제하고, 임의 옆에 머물며 돌볼 수 있는 부석이 돼 천 년 만 년 대사의 옆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100>원효와 요석.<하>

원효는 신라시대 경산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총명해 주변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지혜를 선보였다.일찍 화랑으로 전쟁터를 누비다가 승려가 돼 세상을 구하려는 공부에 빠져들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요석공주를 만나 시대의 문장가 설총을 낳고, 자신은 또 더 큰 세상을 위해 분황사, 황룡사, 고선사, 기림사를 거쳐 끝내 혈사에서 육신의 삶을 마감했다. 기림사에 머물 당시에 이미 그는 몸을 백으로 분신하는 재주를 지녔다.그러다 더 큰 세상을 구하기 위해 혈사에서 수련하다 그대로 입적했다.육신의 껍질만 남기고 그는 영원히 자유로운 몸이 됐다. ◆삼국유사: 원효의 길 원효는 이미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다행히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의 현인 열 명 중 한 사람이 됐다.설총은 방언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방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고 사리를 깨달아 6경과 문학의 뜻을 풀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전수하고 있다. 원효는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다. 그 모양이 진기해 그 형상에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 있는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무애라 이름 짓고 이에 따라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오니 가난뱅이는 물론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무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됐다.그들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읊게 됐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했다.스스로의 이름을 새벽 원효라 한 것은 아마 부처님 광명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새벽 원효라는 이름도 역시 방언인데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말로 원효를 새벽이라고 불렀다.그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편찬하던 중 제40 회향품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놓았다.또 일찍이 송사로 인해 몸을 1백 소나무에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위계의 초지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유와 임금의 조서로 길가에서 삼매경소를 지었다.그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은 연유로 각승이라 했는데 이 또한 본각과 시각의 오묘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대안법사가 펄럭이며 와서 종이를 붙여 순서를 바로잡았는데, 원효의 마음을 알아 서로 뜻이 맞았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이 그의 유해를 부숴 그의 진용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흠모해 극도의 슬픈 뜻을 표하였다.설총이 곁에서 예배할 때 소상이 갑자기 뒤돌아봤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거처하던 혈사 근처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의 깨달음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네 살에 벌써 사서삼경을 터득하고 마을에서 보이는 책이란 책은 모두 섭렵해 모르는 것이 없는 신동으로 통했다. 원효는 사람들을 거느리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호연지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무술을 익혔다.서민의 위치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길은 전쟁영웅이 되는 방법이 가장 빨랐다. 그래서 화랑이 돼 물 만난 승냥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전쟁터를 누볐다. 원효의 활약은 눈부셔 금방 상관들의 눈에 들어 빠르게 승진했다.그의 호탕한 성격과 뛰어난 실력 때문에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와 함께 하는 전쟁은 백전백승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후 그의 생각은 크게 바꿨다.세상이 모두 허무했다.장군도 재상의 자리도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죽으면 그만인 세상에 무엇 하러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서로 죽이고 죽어 가는지, 자신이 왜 그렇게 전쟁터에서 칼을 휘둘렀었던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고뇌에 빠졌다. 드디어 원효는 의상과 함께 고구려 보덕스님을 찾아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기 위한 공부에 매달렸다.당시 보덕스님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법문에 밝은 승려로 가장 이름이 높았다. 보덕에게서 5년을 공부한 원효와 의상은 신라에 걸맞은 자신들이 찾는 이념을 만족시켜줄 공부를 위해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에서는 더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배우기로 하고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도중에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다음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해골을 본 순간 원효의 마음은 환하게 밝아왔다.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내 마음속에 부처가 살고 있으므로 내가 바로 부처다.스스로 부처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라고 생각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방울장수도 부처요, 주막집 주모도 부처요, 나무꾼도 부처, 부랑자 거지도 부처다. 단지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내가 가르쳐준다면 백성들은 모두 부처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미친 듯이 웃기도 하고, 혼자 울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춤을 추며 길거리를 쏘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등을 치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원효는 백성들의 삶 속에서 뒹굴면서 다시 고민이 찾아왔다. 나 혼자 행복하고, 나 혼자 부처가 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 없다.모든 백성들이 부처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혼자 떠돌며 일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원효는 결국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요석공주와 일가를 이룬다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낸 것이다. 그 이후 원효는 분황사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많은 책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대승기승론을 비롯해 그의 생각이 붓끝에서 말 달리듯 쏟아져 나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써내려갔다. 원효는 책을 쓰면서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아무리 훌륭한 이론이 있고, 그를 백성들에게 알려도 욕심을 앞세운 사람들의 권력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진실로 모든 백성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어 잘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또 고민에 빠졌다. 더 깊은 고민으로 온 백성들을 위한 실천적 학문을 익히기 위해 원효는 고선사로 자리를 옮겼다.고요하게 깊은 토함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길의 태동을 보며 고선사에서 참선에 들었다.저잣거리를 떠돌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유랑하던 원효의 자세가 돌변한 것이다.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화두에서 더 깊이 들어가 마음이 머무는 곳에 육신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참선에 들었던 원효는 육천통의 실마리를 잡고 토함산 능선을 넘어 임정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그리고 임정사를 크게 중창하고,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와 첫 글자를 따서 기림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효는 기림사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고민에 빠졌다.갖가지 방식의 참선과 이웃 항사사 혜공스님을 찾아가 문답으로 궁금증을 풀어보는 수행을 이어갔다.그러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선승이 득도한 흔적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육천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 밖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경지를 체험하면서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원효는 드디어 육천통에 이르렀다. 천시통, 천후통, 천미통, 천촉통, 천이통, 천심통의 능력을 오롯이 갖게 됐다. 원효는 시간을 거슬러 전생에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다시 내세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혈사에서 석 달 열흘을 벽만 마주하고 참선에서 들어 깨어나지 않았다.영원히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이미 육신은 의미가 없는 껍질에 불과했던 것이다.나무가 되고, 참새가 되었다가 토끼, 노루가 되는 것도 이미 마음만 먹으면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직 혈사에 남은 것은 원효의 정신이 빠져나간 육신일 뿐이다. 영원을 사는 생명체가 돼 지금도 신라의 터를 부유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9>원효와 요석 (상)

원효대사는 이미 신라 흥륜사십성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그의 행보가 광범위 하고 이루어 놓은 실적이 많아 다시 상편과 하편으로 나눠 소개한다. 상편에서는 그가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의 과정과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내력을 이야기한다. 하편에서 ‘원효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통틀어 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원효는 신라시대 경산지역에서 평범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인사들은 대부분 왕족으로 부유하고 귀한 신분의 젊은이들이었다.원효는 의상의 사형이라는 신분으로 의상과 함께 두 차례나 중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원효는 신분의 벽을 넘어 불교에 대한 갈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서 깨달음을 얻어 신라로 되돌아와 대중 불교를 퍼뜨리는데 열중했다.귀족불교에서 대중 불교로의 전환은 원효의 신분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국유사: 원효와 요석성사 원효의 세속 성은 설씨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인데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적대라는 연못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날내말이다. 원효는 처음 압량군의 남쪽에 있는 불지촌 북쪽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이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이라고도 한다. 사라수에 대해 세간에서는 말하기를 스님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다.그의 어머니가 임신을 해 만삭이 됐을 때 마침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밤나무 아래에서 갑자기 해산했다.너무 급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만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 부른다고 했다.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의 것과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 줬더니 종이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다.관리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 조사해보니 밤알 하나가 밥그릇에 가득 찼다.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그래서 이름을 밤나무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스님은 출가하자 그의 집을 희사해서 절로 만들고 이름을 초개사라 하고 사라수 나무 옆에 세운 절을 사라사라 했다.스님의 행장에는 서울사람이다라 했으나 이것은 그의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다.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 사람이다라고 했다. 살펴보면 인덕 2년(665) 무렵에 문무왕이 상주와 하주의 땅을 떼어 삽량주를 설치했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녕군이다.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다.상주(上州)는 지금의 상주(尙州)로서 또한 상주(湘州)로도 쓴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에 속해 있으며 이는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것이다. 스님의 처음 아명은 서당이며 또 하나의 이름은 신당이었다.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해산할 즈음에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이때가 진평왕 39년(617), 대업 13년 정축이었다.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스승을 좇지 않고 학문을 닦았다.스님이 여러 지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전체의 내력과 불교를 널리 편 많은 업적들은 당전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사적만 기록한다. 스님은 언젠가 하루는 상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어느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그 누구도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이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이 스님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나라의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데려오게 했다.왕의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러간 관리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만나게 됐다.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다.관리는 원효성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겨 말리게 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했더니 공주가 그만 임신해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의 현인 열명 중 한 사람이 됐다. 설총은 방언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방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고 사리를 깨달아 6경과 문학의 뜻을 풀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전수하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다. 그 모양이 진기해 그 형상에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 있는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무애라 이름 짓고 이에 따라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오니 가난뱅이는 물론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무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됐고, 그들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읊게 됐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의 선택 원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가족은 물론 마을에서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적극 추천해 12세가 되기 바쁘게 원효는 화랑이 되어 청소년들과 전국을 여행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16세부터 전쟁터에 나가 화랑도의 정신을 누구보다 앞장서 실천했다. 평소에 온화하고 따뜻하던 그의 성품은 전쟁터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적의 목에 창을 박아 넣는 일에도 한 치의 서슴이 없었다. “적군을 죽이지 않으면 동료이자 내 친구들이 죽기 때문”이라며 원효는 전쟁터에서는 가장 앞줄에 서서 적진으로 뛰어들어 막무가내로 창칼을 휘둘렀다. 원효의 동분서주하는 공격은 적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원효가 군인으로 전쟁터에 참전한지 2년도 되지 않아 그의 용맹함은 신라군은 물론 백제, 고구려까지 널리 소문이 났다. 신라에는 영웅, 적군들에게는 악마요 저승사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웅담은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죽은 전우의 시신을 혈혈단신으로 달려 들어가 등에 업고 돌아온 사건 이후로 봄바람에 들불처럼 번졌다. 그로부터 원효는 화랑들의 세계에 영원한 전설이 됐다. 그러나 원효의 영웅시대는 길게 가지 못했다. 원효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화랑과 전쟁의 활극은 완전히 잊었다. 오로지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원효는 친구들조차 만나지 않았다. 먹는 것도 하루 한 끼 정도 겨우 주변의 권유에 의해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는 정도였다. 삼년상을 치른 원효는 바로 머리를 깎고 구도의 길을 택했다. 건장하던 그의 어깨는 어느새 구부정하게 휘어져갔다. 한 번 생각에 빠져들면 1주일씩 몸이 홀쭉해지도록 끼니를 건너가며 무서울 정도로 면벽수행을 이어갔다. 원효는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다.일체유심조,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문득 깨우치고는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외치고 다녔다. 거지와 함께 자기도 하고, 부녀자든 어린이든 만나면 노래하고 웃으며 아미타불을 암송하게 했다. 그러다 원효는 문득 혼자 성불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불가함을 깨닫고 왕실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그래서 요석공주와 관계를 맺어 왕실의 재력으로 백성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나눠 주기로 했다. 이즈음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을 앞두고 무열왕은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정치적 이념을 체계화할 인물을 찾던 중 원효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원효와 태종 무열왕의 뜻이 맞아 설총이 태어났다.요석공주도 결혼하고 불과 3일 밤을 보내고 전쟁터에서 주검이 돼 돌아온 남편보다 그를 업고 온 건장한 원효의 얼굴이 가슴에 계속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그의 뜻이 요석공주의 떨치지 못한 꿈과도 합치한 것이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이론을 책으로 펴내는데 심혈을 기울이게 됐고, 요석은 설총을 낳아 세계적인 문장가로 키웠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8>보양과 배나무

삼국유사 이야기는 한자로 쓰여졌다.당시 기록이 한자 이외의 방법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과는 다르게 음과 훈으로 구성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보양과 배나무편에서 말하는 배나무는 당시 한자로 표기하면 이목(李木)이 된다.이목은 우리말로 읽어보면 이무기가 되기도 한다.보양화상이 이무기를 찾는 천제의 사자에게 이목, 배나무를 가리킨 것은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 돼 그의 친구 이무기를 살린 것이다. 이러한 표기법에 따라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진실들이 삼국유사 안에 얼마나 많이 들어있을지 고민해 볼 일이다. 이무기를 찾는 하늘의 사자에게 이목을 가리켜 난을 피해간 지혜를 배우고 싶은 장이다.또 가진 재주를 무턱대고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교훈도 엿듣게 하는 편이다. ◆삼국유사: 보양과 배나무승려 보양의 전기에는 고향과 족보가 실리지 않았으나 청도군에 보관된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기재돼 있다.운문산 선원의 장생 표시에 의하면 남쪽은 아니점이며 동쪽은 가서현이다.절의 간부 승려 중 주된 사람은 보양화상이자, 선원의 주인은 현회장로이며, 선원의 일은 현량상좌가 담당하고 직세는 신원선사이다. 정릉 6년(1161) 신사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에 의하면 이러하다.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절로서 작갑사와 그 밖의 크고 작은 절이 있었지만 후삼국이 싸우는 동안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다섯 갑의 절이 모두 무너져 없어지니, 다섯 갑의 절 기둥을 모두 모아서 대작갑사에 뒀다. 이 절의 시조 되는 스님인 지식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받아 돌아오는 길에 서해 바다 가운데에서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이고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시주했다.겸해 그의 아들 이목도 바치며 그를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지금 삼국이 어지럽고 난리가 일어나 아직은 불법에 귀의하는 임금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에 절을 짓고 거기에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몇 해가 안 돼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현명한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용왕이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 이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홀연히 노승이 나타나 스스로 원광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 그에게 주고는 사라졌다. 이에 보양법사가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어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흔적이 없었다.다시 올라가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그제야 서해의 용왕이 작갑이라 했던 말이 생각나 그곳을 찾아가 땅을 파보자 과연 옛날의 벽돌들이 많이 있었다.이것을 모아서 높이 쌓으니 탑이 완성됐는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이에 이곳이 이전의 절터임을 깨닫고 절을 세우고는 거기에 머무르며 절의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는 보양법사가 여기 와서 절을 짓고 머무른다는 말을 듣고 즉시 다섯 갑의 전체 전답 500결을 이 절에 바쳤다.그리고 청태 4년 정유(937)에 운문선사라는 현판을 내리고 가사의 신령스런 음덕을 받들게 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남몰래 도왔다.갑자기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말라서 타 죽으므로 보양법사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한 고을이 흡족해졌다. 천제가 그의 소임이 아닌 일을 했다 해 이목을 죽이려하자 이목이 황급히 법사에게 알렸다.법사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자 조금 뒤에 하늘의 사자가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했다.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리키니 사자는 그곳에 벼락을 친 후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배나무가 시들고 부러졌으나 용이 어루만지자 곧 살아났다.그 나무가 근년에 땅에 쓰러지니 어떤 사람이 문을 걸어 잠그는 방망이를 만들어 법당과 식당에 뒀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먼저 추화군에 있는 봉성사에 머물렀다.마침 태조가 동쪽지방을 정벌해 청도까지 진출했으나 산적들이 견성에 모여 교만을 부리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도착하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었다.법사가 “대개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은 지키고 뒤는 잊어버리니 마땅히 낮에 그 뒤를 쳐야 할 것입니다”라 대답했다. 태조가 그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적이 패하고 항복했다.태조가 법사의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주변 고을에서 세금으로 받는 벼 50석을 줘 예불하는데 쓰게 했다.이로써 절에 두 분 성인의 초상을 모셨다. 이런 연유로 절 이름을 봉성사라 했다. 그 뒤에 법사는 작갑사로 옮겨서 절을 크게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리지 않았으나 세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석굴사의 비허사와 형제가 됐다.봉성사, 석굴사, 운문사의 세 절이 연접된 봉우리에 늘어서 있으므로 서로 왕래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보양화상과 이목이 막은 몽고난몽고군은 신라말부터 고려시대까지 수시로 넘나들며 약탈해갔다.몽고군은 이미 고려의 방방곡곡 풍수지리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그래서 말을 타고 속도전으로 밀고 들어와 고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몽고군의 본격적인 침략전쟁은 1231년부터 1270년까지 40여 년간 줄기차게 이어졌다.몽고군은 잔인해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성하게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초가에 불을 놓아 모두 태워 생활의 근거지조차 흔적을 남기지 않고 뿌리를 뽑았다. 몽고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라도 돌라치면 백성들은 일찌감치 괴나리봇짐을 싸서 집을 버리고 산골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정도였다. 몽고의 실세 오고타이칸은 장수 살리타에게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살리타는 활의 명수였다. 말을 달리면서 마상에서 쏘는 화살이 뛰어가는 고려군사의 다리와 등에 정확하게 날아와 박혔다. 살리타는 순식간에 귀주성을 함락하고, 남쪽으로 말을 달려 한양을 공격했다. 잇따라 한강을 넘어 용인, 안동, 달구벌 대구, 서라벌 경주까지 휩쓸었다. 살리타가 달구벌에서 재를 넘어 청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불도가 높은 대작갑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살리타는 직접 선두에 서서 대작갑사로 말을 달렸다. 대작갑사 앞에서 화살촉에 불을 붙여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살리타의 화살은 대작갑사 담을 넘지 못하고 공중에서 불이 꺼진 채로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몽고병사들이 소나기처럼 쏜 화살은 모두 낙엽비가 되어 대작갑사 일주문 앞에 장작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였다. 살리타가 놀란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창을 들어 군사들과 절 안으로 말을 달리려 할 때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면서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리고 일주문 위로 거대한 이무기가 용의 모습으로 꼬리춤을 추면서 입으로 불을 뿜어댔다. 이를 본 몽고병사들은 아연실색해 말을 돌렸다.살리타 장수의 말도 앞발을 들었다가 뒷걸음치다 고꾸라졌다.몽고군은 그대로 후퇴해 달구벌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청도 쪽으로는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영천 방향으로 진격해 경주로 이름이 바뀐 서라벌을 공격했다. 몽고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보양화상의 주문과 이무기의 협치다.몽고군을 물리친 대작갑사의 소식을 들은 고려왕실에서는 왕이 직접 ‘운문선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선사로 불린다. 청도에서 놀라고, 화가 치민 살리타는 경주에서 화풀이를 했다.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였다.신라 삼국통일의 근원이자 고려의 상징으로 우뚝 솟은 황룡사구층목탑도 이때 화마에 휩싸여 잿더미가 됐다.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해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의 역사로 이뤄진 황룡사는 주춧돌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타버렸다. 몽고전쟁의 가장 큰 손실이라면 황룡사 소실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7>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양지 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소개하기 이전부터 녹유신장상의 복원 등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스님이다.삼국유사를 통해 양지 스님의 숨겨진 재주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한다.스님이자 조각가, 서예가 등을 총칭한 종합예술가라고 해야겠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지 스님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지팡이다.석장이 혼자 자루를 걸머지고 도깨비처럼 마을을 날아다니며 탁발하는 장면은 신화 이상의 신비로움과 재미를 선사한다. 기와조각과 석재가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는 양지 스님이 머물렀다던 석장사 터에서 영묘사 장륙존상, 사천왕상, 전각, 탑, 삼천불을 조각하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를 쓰는 양지 스님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따로 보관하고 있던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의 조각을 퍼즐 맞추듯 완벽하게 재현해낸 역사적인 사건을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다. ◆삼국유사: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승려 양지의 조상과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다만 신라 선덕여왕 대에 그의 행적이 나타났을 뿐이다.지팡이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가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었다.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이 때문에 그가 머물고 있던 절을 석장사라고 이름지었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이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았다.그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두루 능통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또 글씨와 그림을 잘 그렸다.영묘사의 장륙삼존 및 사천왕상과 아울러 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 및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부처 3천 불을 조각해 그 탑 안에 안치하고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예를 올렸다.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을 만들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했다.그래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퉈 진흙을 나르면서 그가 지은 풍요를 불렀다. 지금까지 이 지방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힘든 일을 할 때에 다들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대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불상을 만들 때 든 비용은 곡식 2만3천700석이었다. 논평해서 말한다.양지 스님은 재주를 다 갖췄고 덕행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큰 인물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재 마친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정적 깃든 오리 모양 향로에 홀로 향불 피우네/ 남은 불경 읽고 나니 더 할 일 없어/ 부처님 모습 빚어 합장하고 뵈오리.’ ◆100년 잠에서 깨어난 녹유신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국립경주박물관과 공동으로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의 3가지 유형을 사천왕사지 발굴이 시작된 지 100년 만에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문화재연구소와 경주박물관이 학술교류 협약을 체결하고 각각 보관하던 7점의 파편을 복원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통일신라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백년의 잠에서 깨어났다.사천왕사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깨어진 채 발견되고도 제자리를 못 찾고 기다리다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 사천왕사는 679년에 문무왕이 경주 낭산 신유림에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승려 명랑의 밀교의식을 실행하며 건립한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은 1915년 최초 발견 당시 세 종류의 벽전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깨어진 조각만이 사천왕사 목탑 자리에 묻혀 있었다.큰 눈과 콧수염, 날개가 달린 투구와 화려한 갑옷, 신발 또는 맨발로 칼 혹은 화살을 든 무장 3명이 험악한 표정의 생령을 깔고 앉아 보는 이를 주시한다.앞을 지나가면 각기 달라져 보이는 장수의 표정에서 이들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에 사천왕사 발굴을 개시했고 1922년부터 고적발굴조사사업의 하나로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했다.이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발굴로 사찰과 녹유신장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발굴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벽전 파편을 조립한 결과 왼손에 칼을 든 신장과 활과 화살을 든 신장 등 두 종류의 신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을 거쳐 200여 점의 파편을 3차원 입체 3D로 스캔하고 이를 참고로 세 종류의 신장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또 이들이 사천왕사지 동서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은 세 종류의 신장이 한 묶음으로 탑 한 면에 두 묶음씩, 동서 목탑 기단에 16개의 묶음으로 배치되어 녹유신장으로 이루어진 벽전은 모두 48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하단부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서탑지 북편에서 발굴 수습한 상단부 6점이 같은 상이었음을 확인했다.201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7점의 파편을 조립하고 빠진 부분은 같은 유형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파편을 참고하여 벽전을 복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처음 사천왕사 발굴을 진행한 지 100년 만에 최초로 원래 짝을 찾아 복원된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을 비롯해 3쌍의 녹유신장상을 전시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양지스님의 지팡이석장사는 양지 스님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스님의 지팡이는 100년 묵은 대나무로 만들어 가벼웠다.오래되기도 했지만 스님이 다니다 절로 돌아와서는 굴뚝에 세워두기 때문에 연기를 먹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님의 지팡이는 현명하여 스님이 불공을 드리는 시간을 아끼도록 매월 1일과 15일이면 혼자 포대를 짊어지고 날아가 시주를 해 돌아와 스님이 공양을 거르지 않도록 했다. 서라벌의 왈패들이 지팡이와 양지 스님의 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힘깨나 쓴다는 왈패들이 3월 보름에 자루가 두둑하도록 탁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지팡이를 잡았다.그리고 탁발한 자루를 빼앗으려고 다섯 명의 장정이 달려들었으나 결국 석장에서 자루를 벗기지 못했다.지팡이는 돌로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석장이 자루를 움켜잡은 채 장정들을 떠밀어 모두 북천의 찬물에 빠뜨려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며 춤추듯 날아 가버렸다. 왈패들은 그날 이후로 지팡이가 나타나면 멀찌감치 떨어져 큰절을 하고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리고 스님의 지팡이가 돌보다 더 단단하다고 하여 석장(石杖)이라고 불렀다. 또 석장이 가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당시 서라벌에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민가에서는 해가 지면 아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석장사는 깊은 산중에 있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수시로 나타났다.이를 경계해 양지 스님은 석장에 주문을 걸었다.굴뚝에 세워둔 지팡이가 어두워지면 석장의 크기로 길어져 괴물의 모습이 됐다.간혹 날카로운 울음을 울기도 하며 가까이 오는 짐승들을 물리쳤다. 두세 차례 호랑이가 접근했지만 석장이 크게 울며 다가가자 호랑이는 그 이후로 석장사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사람들이 양지 스님의 지팡이가 석장의 크기로 늘어난다 하여 석장이라 불렀다. 석장을 가지고 도를 닦는 양지 스님이 사는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석장사라고 불렀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6>원광법사. 하

삼국유사는 원광법사편에서 당의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그대로 싣고,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도 옮겨 놓았다.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어 다 나열하니 독자가 판단하라고 주석을 달았다. 수이전에서 원광법사는 설씨이며 혼자 살면서 삼기산에서 조용히 불법을 배웠다.속고승전에는 박씨이며 중국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드러난다.수이전은 또 원광법사의 도력을 나타내면서 여우가 신의 목소리로 원광에게 후세에 서로 계를 주기로 약속하는 장면을 그려 신비롭다. 법사의 글재주가 뛰어나 나라에서도 인정받았다는 내용은 같다.삼국사기 열전에서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평생의 지표를 삼을 세속오계를 내렸다는 내용을 소개해 지금까지 그 뜻이 전하고 있다. 속고승전의 99세 입적과 다르게 수이전은 84세에 입적한 것으로 기록하고, 삼국사기 열전은 80세쯤에 입적해 금곡사에 부도탑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고 기록했다.지금 경주 금곡사의 부도탑을 원광법사의 흔적으로 이해하고 학자들도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고 있다. 경주시는 석장동에 청소년수련시설 화랑마을을 건설했다.다양한 체험과 공부를 통해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날 청소년 심신단련의 장을 마련하고,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공개하고 있다. ◆삼국유사: 원광법사동경(경주)의 안일호장인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의 원광법사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서울 사람이다.처음에 승려가 돼 불법을 배웠는데 30살이 되자 조용히 살면서 수도할 것을 생각하고 홀로 삼기산에 살았다.그 후 4년이 지나 어떤 비구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다.그의 사람됨이 모질고 사나웠으며 주술로 수련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광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우는데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대의 수행은 참으로 좋구나. 대체로 수행하는 자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 이웃에 있는 비구는 주술을 닦고 있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다른 사람의 고요한 사념을 뒤흔들고,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돼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다. 법사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사람에게 말을 해 옮겨가게 해 주게나. 만일 오래 머문다면 어쩌면 내가 갑자기 죄 되는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했다. 이튿날 법사가 가서 “제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그 비구가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 현혹됩니까? 법사께서는 어찌하여 여우귀신의 말을 듣고 근심합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날 밤 신이 다시 와서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 비구는 무어라고 대답하던가?”라 묻자 법사는 신이 크게 화를 낼까 두려워하여 “아직 말을 못했으나 만약 굳이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신이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째서 말을 보태는가? 그대는 단지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게나”라고 말 한 후 가버렸다.밤중에 벼락 같은 소리가 났다.그 다음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거처하던 암자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신이 “법사가 이곳에만 있으면 자기는 이로운 수행을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덕은 없을 것이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취하여 이 나라의 갈 길을 못 찾는 무리를 인도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법사가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이 저의 소원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험해서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고 답하자 신이 중국으로 갈 계책을 자세히 가르쳐 줬다.법사가 그 말을 따라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에 널리 통달하고 겸하여 유학도 배웠다. 진평왕 22년(600) 경신에 법사가 신라로 돌아올 행장을 정리해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법사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중에 신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의 길을 다녀옴이 어떠하던가?”라고 하니 법사가 “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고 대답했다.신이 “나 또한 법사에게 계율을 주겠네”라고 하면서 윤회하는 세상에서 서로 구해주자는 약속을 했다. 신이 “3천 년을 살아왔지만 덧없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고개에 이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게나”라는 말을 남겼다.약속한 날을 기다려 법사가 가서 보니 옻칠한 것과 같은 검고 늙은 여우 한 마리가 헐떡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 조정의 왕과 신하들이 그를 매우 존경해 스승으로 모시니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론했다.이때에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략하므로 왕이 이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에게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짓게 했다.황제가 그 글을 보고 30만 명의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정벌했다.이로부터 법사가 유술까지도 두루 통달했음이 알려졌다.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 서쪽에서 장사를 지냈다. 또 삼국사기 열전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귀산이라고 하는 현명한 분은 사량부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과 친구가 됐다.두 사람이 서로 “우리들이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진 분을 찾아가서 도를 물어보자”라고 했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그의 처소에 나아가 “속된 사람들이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 해주시면 평생의 지표로 삼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이에 원광이 “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 첫째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가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친구를 사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서 해야 하니,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이 말씀을 받들어 행해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 후 두 사람이 싸움터에 나아가 모두 국가에 특출한 공을 세웠다. 또 건복 30년(613) 계유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와서 황룡사에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서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원광은 성품이 텅 비고 허정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성내는 기색이 없었다.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져 수레를 타고 대궐 안까지 들어가니 당시 덕망과 인의를 갖춘 훌륭한 분이 많았지만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그의 뛰어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일 정도였다. 나이 80세께 정관 연간에 세상을 뜨니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당전에서는 황륭사에서 입적했다고 했으나 그 장소가 분명하지 못하다.아마도 황룡사가 잘못 전해진 듯하니 이는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로 한 예와 같다. 진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불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고 설혹 있다 하더라고 크게 떨치지 못했다.원광 이후에는 중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어졌으니 이는 바로 원광이 길을 열었던 것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화랑 귀산과 추항이 힘들게 공부하고 수련에 매진했다.3년이 지난 어느 날 두 친구는 “이제 제법 실력을 갖췄는데 우리 스스로 노력으로는 한계에 부딪쳤다.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얻어야 더 발전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이들은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하고 먼저 법사의 실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두 화랑은 법사가 왕궁에서 황룡사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급습했다.그러나 법사는 여덟 명의 법사로 나뉘어 귀산과 추항을 거꾸로 공격해 꼼짝하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 꿇어앉게 했다. 귀산과 추항이 그제야 엎드려 절하며 높은 경지에 이른 법사의 덕을 칭송하며 배우고 싶은 열망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죄하고, 자신들을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곡하게 청했다. 법사는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와 “부족한 솜씨로 스승을 시험하려는 것은 잘못된 예절”이라며 꾸짖고 반대로 그들을 시험했다.얼음을 깨고 물속에서 3일을 버티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귀산과 추항은 이를 견뎌 원광법사에게 무술 가르침을 받은 최초의 제자가 됐다. 법사는 제자들에게 심신을 함께 수련하게 하며, 평생 갖춰야 할 덕목으로 세속오계를 일러줬다.귀산과 추항은 법사의 가르침을 평생의 계율로 삼아 다시 수련에 매진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5>원광법사(상)

원광법사는 신라십성에 이름은 오르지 않아도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의 조정에서조차 그의 공부를 높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신라 진평왕이 중국에 원광법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돌아왔다. 원광법사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들의 수련지침을 마련했다.청소년들이 수련하는 지침으로 삼았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표상으로 삼을 계율로 전해온다.그는 당시 중국으로 보내는 나라의 문서는 물론 왕실에서 작성하는 모든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삼국유사는 그의 일대기에 대해 당나라의 속고승전과 수이전 두 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각각 소개했다.두 기록은 원광법사의 성이 박씨와 설씨로 다르게, 또 죽음에 이른 나이도 99세, 84세로 다르게 전한다. 속고승전과 수이전에 전하는 원광법사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원광법사당나라 속고승전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씨 이다.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집안 대대로 이 땅에 살았다.또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도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해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연구했다. 그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다.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도 모자라지 않았다.끝내 스물다섯 살에 친척과 벗들을 떠나 배를 타고 중국 금릉으로 갔다.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불릴 때였다.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다.원광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했더니 칙명으로 허락했다.이렇게 해서 그가 처음으로 승려가 돼 구족계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해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연구는 8정에 통해 선한 일을 밝힘은 쉽게 행해지고, 질박하고 정직함은 어그러짐이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당시 산 밑에 살고 있던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했다.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해 마음에 꼭 들어 했다.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나라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하였다.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게 되어 잡혀 죽게 될 참이었다.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했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다.원광이 위기에 임해 감응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나라와 진나라의 문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개황 9년(589)에 수나라 임금이 있는 서울로 와서 지냈다.이때는 불법의 초회를 맞아 섭론종이 처음으로 일어나니 경전의 오묘한 말씀을 삼가 받들어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의 명성이 서울에 높이 드날렸다. 멀리 신라 본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했다.신라의 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해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온 나라가 그에게 쏠려 떠받들었고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교화하는 도리도 그에게 물었다.벼슬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실상은 나라를 통틀어 돌아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기회 있는 대로 교훈을 널리 펴서 지금까지도 모범으로 내려오고 있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99세이니 바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었다. 임종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 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진평왕은 신하들과 사냥하기를 좋아해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말을 타고 고성 숲을 내달렸다.진평왕 35년 초여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꿩이나 노루 멧돼지도 새끼를 낳아 번식이 한창일 때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은 활을 둘러매고 숲으로 들어갔다.이때는 봄 가뭄이 길어 농작물이 타들어가 백성들이 농사에 힘겨워 할 때였다. 몰이꾼들이 이리저리 뛰며 짐승들을 몰아대는데 훤칠하게 키 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은 아니하고 장미덩쿨 주변을 맴돌았다.진평왕은 시위를 당겨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노루가 가슴과 목에 살을 맞고 숲속으로 들어가 고꾸라졌다. 왕이 대신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목과 가슴에 통증이 심해져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어의가 백방으로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왕이 전국에 방을 붙여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고 점점 깊어져 수라상조차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이때 내인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원광법사의 내력이 심후해 만사에 통달했으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건의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광이 궁으로 들어와 불법에 대한 강론을 벌인지 7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거뜬하게 나아버렸다.원광법사가 강론을 펼칠 때는 가끔 몸체에서 신비한 광채가 나면서 방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기도 했다. 병이 완전히 나은 왕은 그때부터 원광법사를 곁에 두고 불법에 대한 강론은 물론 국사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하며 국사로 모셨다. 특히 호시탐탐 나라의 경계를 넘보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의 병력지원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원광이 작성했는데, 이를 읽어본 중국황제가 문장에 감탄하며 대뜸 병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치게 했다. 원광은 왕의 지나칠 정도의 존경과 대우를 받아 입적할 때까지 왕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나랏일을 도왔다. 법사는 100세가 되는 날에 황룡사 법당에서 고요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10일이나 공중에 뜬 채로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어 사방에서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4> 백엄사 석탑사리

백엄사의 창건연대는 삼국유사에서조차 신라시대 라는 정도만 추정하며 자세히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지금은 창건연대는 물론 폐사된 시기와 정확한 절터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전설 같은 절이다. 단지 석불좌상과 석등만 빈터에 뒹구는 것을 복원해 세워두고 있을 뿐이다.백엄사는 백암사, 대동사 등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폐사된 절터에 보물 제381호 백암리석등과 경남 유형문화재 제42호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이 남아있다. 석등의 갓등 아래 팔각형의 조각된 화사층이 네 곳의 창을 내고, 창과 창 사이에 사천왕상을 방위별로 각각 양각으로 조각해 특별한 양식을 볼 수 있다. 또 석불좌상의 형식도 특이한 면이 있다.상중하대 3층으로 나누어 조성한 불상 대좌의 중대를 팔각기둥으로 세우고, 면마다 팔부신중상을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새겼다.석등과 석불의 대좌에 새겨진 조각의 예술성이 섬세하고 아주 뛰어나 눈길을 끈다. 다만 삼국유사 기록에 있는 진신사리를 보관한 오층석탑의 흔적은 발굴 과정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유사: 백엄사 석탑사리 개운 3년 병오(946년) 10월29일에 강주지역의 임도대감이라는 문서에 기록돼 있다. 선종의 백엄사는 초팔현에 있으며 절의 승려 간유상좌는 나이 39세라 했으나 절을 처음 세운 때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전 시대인 신라 때에 북택청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으나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로 있었다.지난 병인년(1026년) 중에 사목곡의 양부화상이 고쳐 지어 그곳의 주지가 됐다가 정축(103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1045)에 희양산의 긍양화상이 와서 10년간 머물다가 을미년(1055)에 다시 희양산으로 돌아가자 때마침 신탁화상이 남원 백암수에서 이 절로 와서 규정대로 주지를 했다. 또 함옹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와 승려 수립이 절에서 항상 지켜야할 10조를 정하고 새로이 5층 석탑을 세워서 진신 불사리 42과를 맞아 봉안했다. 사재를 털어 밑천으로 적립해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과, 특히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승려 엄흔, 백흔 두 분의 명신과 근악 등 세 분 앞에 제사를 지낼 밑천을 모아 공양할 조항과,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주발에 매달 초하루마다 공양미를 갈아 놓는 조항을 정했다. 이하 조항은 기록하지 않는다. ◆백엄사 백엄사는 백암사, 대동사로도 불린다. 태종대 88개의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고려시대) 절은 사라지고 석불좌상과 석등이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창건과 고려시대 기록이 수록돼 있다.신라 때 백흔(伯欣)과 엄흔(嚴欣)이 살던 집을 희사해 창건하고 백엄사라 했다고 한다.또는 신라 때 북택청 터를 희사해 창건했다고도 한다.창건 후 백엄사는 한때 폐허화됐지만, 906년(신라 효공왕 10)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가 중창하고 주지로 있으면서 선종의 중심 사찰이 됐다. 통일신라말 희양산문의 정진 대사 긍양(兢讓)이 스승 양부의 뜻을 이어 10년 동안 백암사에서 후학을 지도했다.고려시대인 1026년(고려 현종 17)에 중건했고, 1065년(고려 문종 19) 11월 수립(秀立)이 주지로 부임해 절의 규율 원중상규 10조를 정했다.또 5층 석탑을 세워 진신사리 42과를 봉안하고 사재로 보를 세워 개창조를 위해 공양하는 등의 내용을 기약했다. 태종실록에는 1407년(태종 7년) 12월, 초계(草溪) 백암사가 천태종의 자복사찰로 지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 혹은 12개에서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초계 백암사는 천태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하거나 건립한 사찰이었다. 통일신라말에 창건돼 고려시대를 거쳐 선종의 중심 사찰로 발전한 백엄사가 조선 초에도 지방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천태종으로 바뀐 점도 주목된다.이후 백엄사의 연혁은 전하지 않아 폐사된 시기도 알 수 없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2006년 경남문화재연구원은 백엄사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한 1차 발굴 조사를 시행했다.조사를 통해 금동불입상과 청동제 사리구, 유리제 사리병편, 금박편, 막새 등 와류와 청자편 등이 발굴됐다.또 건물의 구조와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초석과 3동의 건물지, 기단석열, 배수로 등이 드러났다. 폐사된 백엄사의 절터인 백엄사지 혹은 대동사지에는 보물 제381호 백암리석등과 경남 유형문화재 제42호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이 남아있다. 석조여래좌상은 150㎝ 높이로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지만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불상 일부는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 대좌는 상중하대로 나눠 있는데 특이하게 중대를 팔각기둥으로 세우고 면마다 팔부신중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백암리석등은 기본형인 8각 석등으로 상륜부는 없어졌고 나머지 다른 부재는 거의 완전하다.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후반의 석등으로 추정하고 있다.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층은 네 개의 창과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을 섬세하게 새긴 것이 특징이다.화사석의 지붕은 팔각으로 조각했다. 석등이 세워져 있는 곳은 백엄사지라고 전해오나 분명하지 않다.석등이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백엄사 기적백엄사는 처음 신라시대 선승이 불도를 닦으려 깊은 계곡으로 들어와 10년이나 암자를 지어 혼자 공부를 했던 절이다.암자 북쪽 벽에는 계곡의 돌로 깎은 스님 체구와 비슷한 크기의 석불좌상이 앉아 있었다. 선승이 계곡의 물을 공양수로 불상 앞에 올리고 기도를 끝낼 즈음이면 공양수에 쌀밥이 가득 채워지곤 했다.누구도 찾지 않았지만 선승은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공양수를 올리며 석불이 주는 쌀밥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신라시대 헌덕왕 때에 애장왕의 동생이 삼촌인 헌덕왕의 칼을 피해 숨어들어 혼자 불법을 공부하며 암자를 세우고, 부처를 손수 깎아 모시고 불공을 드렸던 것이다.선승은 삼촌 언승의 손에 죽은 애장왕 청명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청계라고 불렸다. 청계는 형이 왕이 됐지만 숙부인 언승이 실권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접고, 몰래 불법을 공부해왔다.어느 날 숙부 언승이 나중에 흥덕왕이 된 동생 수종 등과 애장왕을 죽이려 내실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청계는 혼자 몰래 도망 나왔다. 청계가 평민의 옷을 입고 산과 계곡으로만 피해 다니다가 찾아온 곳이 백양이다.청계는 형의 복수 같은 것은 처음부터 마음에 없었다.인간의 권력과 명예 등의 욕심에 대해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데 쉬웠을 것도 같다. 청계가 머무는 암자는 계곡의 중심에서 멀지 않아 홍수가 지면 암자 일대는 물바다가 된다.백양 일대에는 크게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많지 않았다.청계가 백암에 자리를 잡은 후 11년 되던 해부터 3년 연속으로 7일간이나 소나기가 내려 계곡이 크게 범람했지만 절에는 물이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청계 주지스님은 홍수가 퍼부을 때도 여전히 염불을 외고 있었다.염불소리는 마을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뒷산으로 올라가 있을 때에도 그치지 않고 마을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 이후로 마을 사람들이 암자로 달려와 시주해 절을 크게 지어 대동사라 불렀다.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청계 스님의 모습은 대동사에서 사라지고, 마을 전체로 울려 퍼지던 염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나 절은 폐사가 됐지만 석불만 여전히 혼자 앉아 있는 터에 백흔과 엄흔이 절을 중창해 백엄사라 부르며 불사를 이어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3>오대산 오만진신

오대산에는 지금도 유명한 절이 곳곳에 위치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역사학도, 문화관광탐방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가장 먼저 절을 지어 부처를 공양한 것은 자장법사다.자장법사가 선덕여왕 대에 오대산에서 진신을 친견하고자 했던 곳이 월정사이고, 처음 부처를 친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다시 들어간 곳이 정암사이다.월정사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상원사가 나오고, 사자암, 적멸보궁이 차례로 나타난다.적멸보궁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하는 산길이다. 자장법사 이후에 신라의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가 무리에서 벗어나 오대산으로 숨어 수련에 매진했다.효명태자는 다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그를 성덕왕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보천태자는 왕권조차 외면하고 오로지 수련에 매달려 울진 장천굴(지금의 성류굴)과 오대산을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보천은 입적에 들면서 글을 남겨 오대산에 원통사, 금강사, 수정사, 백련사, 화엄사, 법륜사, 문수갑사 등의 절을 지어 밤낮으로 예참하라며 경비를 세금으로 충당하게 했다. ◆삼국유사: 오대산 오만진신산중고전을 살펴보면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처음으로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려고 선덕왕 대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중국으로 들어갔다.중국의 태화지 못가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홀연히 문수보살이 네 구절로 된 게를 줬다.자장이 꿈에서 깨어나 게를 기억할 수는 있었으나 모두 범어라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홀연히 승려 한 분이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가 사용하던 밥그릇 한 벌 및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으로 와서 “무엇 때문에 수심에 잠겨 있느냐”라고 물었다. 법사가 “꿈에 게 네 구절을 받았는데 범어라서 그 뜻을 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답했다.그 스님이 “가라파좌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것이며 달예치구야라는 무소유라는 말이고, 낭가희가낭은 이와 같은 법성을 알았다는 것이며, 달예노사나란 노사나불을 곧 친견한다는 말이다”라 번역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가사 등을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이신 석가세존이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보관하도록 하라”고 말했다.또 “그대 본국의 동북방에 있는 명주 땅 오대산에 1만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라”고 말을 하고는 사라졌다. 법사가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서 재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을 올렸다.그러자 용이 법사에게 “지난번에 게를 전한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고 했다. 자장법사는 정관 17년(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와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다시 원녕사에 머물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뵙게 됐다고 한다.그후 칡넝쿨이 얽혀 있는 곳으로 갔으니 지금의 정암사이다. 그 뒤에 범일의 제자인 승려 신의가 자장이 휴식하던 곳으로 찾아와서 암자를 세우고 거처했다.신의가 죽자 암자 또한 오랫동안 버려져 못쓰게 됐는데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다시 암자를 세우고 거처했으니 지금의 월정사가 바로 이 절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온 후 정신대왕의 태자인 보천, 효명 두 형제가 하서부에 와서 각간 세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그 다음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편으로 가서 여러 날 동안 유람했다. 어느 날 저녁에 두 형제는 속세를 벗어날 뜻을 두고 은밀하게 약속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도망해 오대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모시고 호위하던 자들은 태자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해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었다.형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니 이것을 보천암이라 했다.여기서 동북쪽을 향해 600여 걸음을 가면 북대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아우 효명이 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면서 저마다 부지런히 불도를 닦았다. 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올리려 하던 차에 동쪽 대인 만월산에 1만 명의 관음보살 진신이, 남쪽 대인 기린산에는 여덟 분의 큰 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서쪽 대인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북쪽 대인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명의 대아라한이, 중앙의 대인 풍로산은 혹은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부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 명이나 되는 보살의 진신께 일일이 예를 올렸다. 매일 새벽이면 문수보살이 진여원, 즉 지금의 상원에 와서 서른여섯 가지 형상으로 변하여 나타났다.때로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보주 모양이 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부처의 눈 모습으로도 된다.또는 부처의 손 모습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 모양, 또는 신통 모양, 또는 금으로 된 누각 모습이 되기도 한다.또 금륜형 모양, 혹은 금강저 모양, 금으로 된 항아리 모양, 금비녀 모양, 혹은 부처의 발 모양, 번개 모양, 여래가 솟아오르는 모양, 지신이 솟아오르는 모양으로도 됐다. 두 태자가 매일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달여 올리고 밤이 되면 각자 암자에서 수도했다. 문수보살이 때로는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부어주는 의식으로 성도기별을 주기도 했다.보천이 세상을 떠나는 날, 후에 이 산중에서 시행할 행사로서 국가에 도움이 될 일들을 기록하여 남겨 놓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보살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다.청색 방위인 동쪽 대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쪽 대의 남쪽 기슭 끝에 마땅히 관음방을 설치해 원만하신 모습의 관음보살상과 푸른 바탕에 1만 명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여덟 권의 금경과 인왕반야경과 천수다라니를 읽고 밤에는 관음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원통사로 하라. 적색방위인 남대 남쪽면에는 지장방을 설치해 원만한 모습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8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점찰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금강사라 하라. 백색방위인 서대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을 설치해 원만하신 모습의 무량수여래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여덟 권의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아미타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수정사라 하라. 흑색방위인 북대의 남면에는 나한당을 설치하고 원만하신 석가여래상과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 나한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도록 하고 밤에는 열반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백련사라 하라. 황색방위인 중대의 진여원에는 가운데에 문수보살과 부동명왕의 소상을 모시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서른여섯 가지로 변화하는 형상을 그려서 모시도록 하라.법력 있는 승려 다섯 분으로 하여금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분수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화엄사로 하라. 보천암을 고쳐 화장사라 하고 원만하신 모습의 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모셔라.법력 있는 승려 다섯 분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외우게 하라.해마다 100일 동안 화엄회를 베풀고 그곳을 법륜사라 하라.이 화장사를 오대사의 본사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행실이 깨끗하고 법력이 높은 승려로 하여금 경건하게 길이 공양을 하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릴 것이며 백성이 평안할 것이고 문무가 모두 화평하며 온갖 곡식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갑사를 더 배치해 결사의 본산으로 삼고 법력 있는 승려 일곱 분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의 예참을 행하게 할 것이다.이상 승려 37명이 재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의 도내 여덟 고을의 조세로써 네 가지의 일에 들어가는 자금으로 충당할 것이다.이렇게 대대로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문왕 폐비의 한신문왕은 왕위에 올라 1년이 되지 않은 상복을 입고 있는 때에 김흠돌의 반란조짐을 알아채고 일당을 잡아 사형을 집행했다.반란의 수괴였던 김흠돌의 일족과 동조했던 무리들도 3~4일만에 모두 잡아 처형했다.김흠돌의 반란을 알면서도 징계하지 않았던 병부령도 그의 아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그러나 김흠돌의 딸이었던 왕비는 차마 참하지 못하고 궁궐에서 내쫓았다.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천, 효명 왕자 형제는 곁에 두고 나라의 일을 살피도록 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는 수모를 잊을 수가 없었다.특히 궁궐의 두 아들이 보고싶어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수모를 갚을 일을 생각했다.폐비는 궁궐에서 손이 닿지 않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아무도 몰래 군사를 길렀다.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던 윤홍 장군이 주축이 돼 흩어졌던 세력들을 하나하나 규합해 군사훈련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보천과 효명태자 형제는 신문왕 말기에 훈련을 핑계로 강원도지역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해후했다.두 태자의 어머니 폐비는 신문왕이 죽기 직전에 먼저 세상을 등졌다. 10년, 20년의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갔다.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신문왕이 죽고,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에게서 난 이홍이 효소왕으로 즉위했다. 윤홍 장군은 효소왕이 어렸지만 신문왕이 심어놓은 세력들이 궁궐을 튼튼하게 지키고 있어 그들의 힘이 흩어진 702년에 거사를 일으켜 성공했다.보천은 이미 권력에 욕심을 버리고 불법에 귀화했다. 둘째 효명태자가 궁궐로 입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2>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도 죽음을 앞두고 왕권 이양 이후 반란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민이 컸다.이 때문에 왕은 눈을 감으면서도 왕위를 이을 아들에게 관 앞에서 바로 즉위할 것을 유지로 남겼다.문무왕이 걱정했던 것처럼 신문왕은 즉위하면서부터 김흠돌을 비롯한 반란세력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왕은 왕비의 아버지이자 장인인 반란수괴 김흠돌의 목을 치고, 왕비는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명분으로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쫓겨난 왕비에게서는 두 아들이 있었다.보천태자와 효명태자가 그들이다. 신문왕은 새로 맞은 왕비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임명해야 했다.왕비 세력의 강압 때문에 전 왕비의 아들에게 명했던 태자를 파했다.충격에 빠진 보천과 효명태자는 화랑들과 어울려 군사훈련에 몰입하다 오대산으로 잠적해버렸다. 신문왕이 죽고 7세에 불과한 효소왕이 왕위를 이었다.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폐비된 김흠돌의 여식을 둘러싼 세력들이 왕권에 도전해 왕실은 늘 불안했다.결국 효소왕은 11년 만에 김흠돌의 세력들에 의해 왕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삼국유사: 명주 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질도가 그의 아우 효명태자와 함께 하서부에 있는 각간 세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재를 넘었다.그들은 각기 1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으로 가서 며칠을 유람하다가 태화 원년(648) 8월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무리들 가운데 시중을 들고 호위하던 자들이 샅샅이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왔다. 형인 태자는 오대산 중대의 남쪽 아래에 있는 진여원 터 아래 산 가장자리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거처했다. 아우인 효명도 오대산 북대의 남쪽 산 가장자리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역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두 형제는 예불과 염불로 수행하며 오대에 나아가 삼가 예배를 드리니 푸른색 방위인 동쪽 대의 보름달 모양의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 1만 명이 항상 머무르고, 붉은색 방위인 남쪽 대의 기린산에는 8대 보살을 우두머리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항상 머물렀다. 또 흰색 방위인 서쪽대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항상 머무르고, 검은색 방위인 북쪽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명의 대아라한이 항상 머물렀다. 황색 방위가 차지하고 있는 중앙대의 풍로산은 지로산이라고도 한다.이곳에는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항상 있었다.진여원 터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서른여섯 가지 형상으로 변화해 현신하니 두 태자가 함께 예배했다.매일 아침 일찍 골짜기의 물을 길러 차를 달여 1만 명의 문수보살 진신에 공양했다. 정신왕의 태자이며 아우인 부군이 신라에서 왕위를 다투다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냈다.그들이 오대산으로 가서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부르니 즉시 오색구름이 오대산으로부터 신라의 서울까지 뻗쳐 7일 밤낮 동안 광명이 떠돌았다. 나라 사람들이 빛을 찾아 오대산으로 가서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보질도태자가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있은 지 10여 년인 신룡 원년(705) 3월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보질도태자는 골짜기의 영험한 물을 항상 마시더니 육신이 허공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도착하여 울진대국에 있는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진신이 항상 머무르고 있다. ◆우통수와 장천굴 신문왕의 본처에게서 태어났던 보천태자는 외할아버지가 역적이 돼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왕궁에서 쫓겨난 이후 태자에서도 폐위되고 험한 길을 걸어야 했다.권력에 대한 허망함을 느끼고 밖으로 나돌다 오대산에 들어가 불법에 귀의해 버렸다.보천태자가 수련하면서 마시고 부처에게 공양했던 물을 우통수라 부른다.김시습의 시가 전한다. ▲생육신 김시습의 우통수‘서산의 높은 봉우리 외롭게도 끊겼는데/ 우통의 물은 기운이 맑고 차네/ 상인은 병가지고 손수 차를 달이고/ 서방의 극락세계 부처님께 예배하네.’‘우통의 정화수는 깨끗함이 옥 같은데/ 상서로운 향화는 바퀴같이 큼이라/ 희미한 여러 봉이 구름 속에 보이니/ 천녀가 옷깃 여미고 천신에게 공양하네.’ 보천태자는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완전히 불법에 귀의해 깨달음을 얻었다.오대산에서 울진 장천굴까지 날아다니며 수양했다. 그 장천굴은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석회동굴이다.지금은 총 연장 870m에 이르는 굴로 부처가 머물렀던 굴이어서 성류굴로 불리며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의 예언 일은 걱정하는 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문무왕의 걱정이 그랬다.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하고도 백성들의 평화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절절이 느꼈다.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전쟁터에서 죽을판 살판 칼을 휘둘렀던 문무왕이다.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왜구들뿐 아니라 권력을 향해 부질없이 욕심을 키우는 무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한 때부터 문무왕의 걱정은 속으로 커져갔다. 문무왕은 왜구의 침략도 걱정이 되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김흠돌 장군의 움직임에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병권의 3분의 1이나 거머쥐고 있는 김흠돌 장군이 모반의 뜻을 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라는 순식간에 피바다에 잠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심증만으로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치는 척하는 장군을 감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킬 터이니 동해 앞바다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며 “왕좌는 한시라도 비워두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으니 내 관 앞에서 즉위식을 갖도록 하라”고 했다. 왕의 유지에 따라 정명은 아비의 주검 앞에서 왕관을 썼다.그리고 화장해 동해 앞바다에 장례를 치렀다.신문왕은 국상 중에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는 정황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장군들에게 명하여 김흠돌 세력의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바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신문왕은 반란의 수괴 김흠돌 일당을 거사 하루 전에 모조리 잡아 들였다.왕은 장인이지만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김흠돌의 목을 가차없이 베었다.반란군의 딸인 왕비도 폐비하고, 왕궁 밖으로 내쫓았다.그러나 태자로 임명한 보천태자와 태자의 동생 효명왕자는 신문왕이 끔찍이 사랑해 곁에 뒀다. 보천과 효명 형제는 어머니가 쫓겨나고 외할아버지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맘을 졸였다.그러던 중 신문왕이 김흠운의 여식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새 왕비가 아들을 낳자 형제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새왕비의 친인척들이 왕실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태자 형제들에게 가하는 압박도 점차 수위가 높아지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신문왕은 왕비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보천태자를 폐하고, 세 살 난 왕비의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보천과 효명 형제는 스스로 외부군부에 나갈 것을 청했다.왕은 못이기는 척 형제들을 가까운 성에서 근무할 수 있게 인사조서에 명을 내렸다.두 형제는 군사훈련을 핑계로 강원도 지역을 순찰하던 중 군사들 모르게 오대산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형제는 왕권에 대한 욕심은 진작 버렸다.아비인 신문왕이 수시로 형제를 불러 근황을 물으며 걱정하곤 했지만 왕비 측근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한 미련도 진작부터 버리고 싶었다.형제들은 권력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도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산으로 숨어들어 부처님에게 귀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를 따르던 세력들이 암중에 힘을 키워 어린 효소왕의 세력이 내분을 일으켜 권력이 분산되는 기회를 틈타 왕권을 빼앗고, 효명태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