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그의 꿈(78)패션디자이너 김선자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라는 브랜드를 열고 패션디자이너로서 36년간 활동했다. 뉴욕과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100여 차례 컬렉션을 열면서 대구 패션의 발전을 이끌었고 자신의 이름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그의 패션은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시대적 감각을 선도했다. 특히 드레스는 동양의 아름다움과 서양의 세련미를 고루 갖춰, 뉴욕 현지 언론으로부터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2008년 6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김선자를 사랑하고 그녀 옷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열정만으로 시작한 디자이너의 길김선자는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아버지 김형식과 어머니 김순이 사이에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무작정 옷이 좋아 부모 몰래 양재 학원에 다니며 디자인을 배웠을 정도다. 여고시절 경북대 교정을 찾은 김선자(왼쪽 2번째). 소재가 풍부하지 않았던 60년대 말 아버지의 낡은 포플린 셔츠의 컬러를 떼어내고 변형시켜 새로운 옷을 만들거나, 구제품 시장에서 옷을 구해다가 밤새 디자인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패션에 더 엄격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미스 김테일러’ 매장을 첫 선보인 1971년. 의상실에서 서 있는 이가 김선자. 대구시 중구 동문동에 있던 패션 샵에서 일할 무렵 그는 남편 임창곤을 만나 결혼한다. 결혼 후 1년 만인 1971년 중구 동문동 시청 부근에 ‘미스 김테일러’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오픈했다.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은 내심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평소 사근사근하거나 남에게 이런저런 옷을 권할 만큼 사교적이지도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리자마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우아한 여성미를 단순화하고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옷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품질 소량생산 전략도 적중했다.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고집이 고객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옷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입히지 않았다.◆승승장구하다 패션쇼 후 모델들과 함께 한 김선자. 미스김테일러는 조금씩 번창해 갔다. 1973년 한·미 국제부인회 초청 쇼를 시작으로 1974년 신세계백화점 가을 겨울 컬렉션에 참여했고 1983년에는 그 당시 보기 드물었던 개인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대구에서 패션쇼를 할 만한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경주의 호텔에서 쇼를 가졌다. 대구에서 그녀의 패션쇼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자동차가 행렬을 이뤄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호응이 좋아 1985년 앙코르 쇼를 가지기도 했다.그녀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패션의 흐름을 읽는 직관력이 있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로지 패션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금은 타고난 감각과 운’이 작용한듯하다. 김선자는 기존의 중년층 고객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품위 있는 스타일의 옷을 제작했고, 여기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트렌디한 젊은 감각의 옷을 만들어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하게 했다.세일을 남발하지 않고 오랫동안 고객과 쌓은 신뢰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점 윈도에 한 번도 세일한다고 내건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 최고라는 자존심으로 일을 했다. 자신의 패션쇼를 보러온 엄맹란과 이덕화와 함께. 1987년 파리국제페스티벌 출품을 계기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고급 기성복)와 뉴욕 프레타 포르테, 중국 청도패션쇼, 미국 애틀랜타 패션쇼 등 국제 행사에 참여했다. 90년대 중반에는 1년에 6회 이상의 패션쇼를 미국과 대구, 서울에서 열며 전성기를 맞는다.◆신사옥을 짓다1973년 동아백화점 앞 동문동으로 가게를 옮긴 그녀는 1983년 동인호텔 뒤편 중구 공평동에 신사옥을 짓는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패션 샵이었다. 크기뿐 아니라 기성복과 맞춤복을 함께하는 복합매장으로 꾸며 고객들을 모았다.그녀의 샵은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여성들로 항상 넘쳐났다. 김선자 패션을 입어야 대구에서 성공한 여성으로 비칠 정도로 ‘그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대구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영과 사교 방법으로 자신의 매장을 고급스러우며 우아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1993년에는 서울 청담동에 가게를 오픈했다. 당시 청담동에 가게를 열자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구가 본점이고 서울은 분점일 뿐이다’고 강조했다.롯데월드 매장에 입점할 때 입점 조건으로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반대했다. 대구에서 30년 정도 대구시민을 위해 패션을 했는데 서울매장에 입점하기 위해 본점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입점을 했지만, 그녀는 늘 당당했고 시골 사람을 쉽게 보는 서울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기 위해 더 열심히 옷을 만들었다.다음 해인 1994년 대봉동으로 사옥을 옮긴다. 그녀는 이곳을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경남 센트로 팰리스가 들어서면서 아파트 부지로 편입돼 2007년 길 건너편으로 다시 사옥을 옮기게 된다.◆대한민국 톱 디자이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 국제로타리 초청행사 패션쇼에서 인도출신의 라제드라 배부 국제로타리 회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1995년 그녀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회원이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톱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회원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1996년 스파서울컬렉션에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대구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지방에 있다고 해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결과는 성공이었다. 또 그해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그녀의 옷을 입고 출연하자 ‘황신혜가 입은 옷’이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KBS‘열린 음악회’ 사회자 황수경씨가 그녀의 드레스를 자주 입어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황수경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그녀의 서울패션쇼에 빠짐없이 나타나 축하해주었다. 탤런트 김수미, 강부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수미가 어려울 때 김선자씨를 찾아와 같이 위로를 나누며 자매처럼 우정을 이어갔다.김선자는 섬유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한국패션협회 회원, 세계패션그룹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대한민국 최고라 자부하던 박윤수, 진태옥, 한혜자 , 설윤형, 박항치 등과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한혜자씨는 여행을 할 때면 룸메이트를 할 만큼 친밀했다.이 당시 그녀와 함께 대구 패션을 이끈 박동준씨는 “서로가 경쟁하며 발전했다. 이 시기가 대구 패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대구 최고의 패션을 선보인 이들 둘은 동지였으며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들이 있어 대구 패션은 꽃을 피웠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대학강단에 서다1997년 김선자는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를 두고 말도 많았고 뒷이야기도 무성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신이 있었고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27년간 쌓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섬유 도시의 미래를 이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밝히기도 했다.1등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을 가진 그녀는 강의를 통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한사람이라도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패션행사로 인해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애썼다. 뉴욕에서 패션쇼가 있었던 2001년 9월,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를 탄 덕에 테러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모처럼 가족이 함께 했다. 오른쪽부터 큰 아들 내외. 둘째아들. 김선자 부부. 딸 내외. 김선자는 디자이너로 성공했고 2남 1녀 아이들을 잘 키웠다. 큰아들은 삼성의 임원이 됐고 사진을 전공한 둘째 아들은 정교수가 됐다. 그녀는 자기 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디자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았다.자녀들이 외국 유학을 할 때는 봄이면 모든 일을 접고 직접 가서 옷이나 침구를 손수 갈아줄 정도였다. 딸은 미술대학을 나와 파리 에스모드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국내서 패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뒤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딸이 같은 길을 가기를 내심 원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모두가 부러워한 성공을 이뤘던 그녀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7년 2월 패션 세계그룹 한국협회 회장을 맡아 대구 디자이너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으나, 병마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와 행운을 주지 않았다. 2008년 10월. 그녀는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고맙심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내 아내 김선자남편 임창곤(82.전 한국패션센터 이사장)씨는 아내 김선자를 ‘패션만 알고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해내는 아주 독특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제자가 그린 김선자 캐리컬처. 해야 할 일이면 혼자서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 이러한 고집과 집념이 대구 패션에 이름 석 자를 남긴 힘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자기 일에는 아주 철저하고 고집스러웠지만 집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의 모난 기질도 잘 참아주었으며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자녀들의 의견을 따랐고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며 생활했다.그녀는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간섭받지 않았다. 패션은 아내가 알아서 하고, 나머지 비즈니스는 남편이 맡는 식이다. 요리할 때도 간섭이 싫어 부엌문을 닫고 혼자서 요리책을 펴놓고 음식을 만들 정도였다.일벌레인 그녀는 TV 볼 시간이 없어 배우 김수미씨가 대구가게에 왔을 때도 그녀의 얼굴을 몰라 ‘김수미씨 계십니꺼’ 라며 찾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김순재 언론인김선자 연보1947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서 출생1971년 ‘미스 김 테일러’ 패션 브랜드 설립1973년 한미 부인회 초청패션쇼. 신세계 대구 오프닝 기념 쇼1983년 중구 공평동 동인호텔 뒤편 사옥 오픈1985년 김선자 개인 컬렉션(신작 발표회)1988년 파리, 뉴욕 프레타포르테 출품1990년 섬유와 예술의 만남 전1993년 강남구 청담동 서울매장 오픈1994년 중구 대봉동 사옥 오픈1994년 중국 청도 패션쇼. 애틀랜타 패션쇼1996년 S.F.A.A 서울 컬렉션 참가1997년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2005년까지)2000년 밀레니엄 여성 경제인 패션 대전 유명디자이너 20인 선정2001년 뉴욕컬렉션 참가2003년 제13회 한국섬유 대상 패션디자인 부문 수상2007년 세계패션그룹 한국협회 회장 취임2007년 중구 대봉동 신사옥 오픈2008년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특임교수2008년 10월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경주 여근곡’ 왜 가렸나

최근 경부고속도로 영천~언양 구간이 왕복 6차로로 확장됐다. 영천에서 경주 쪽으로 달리다 경주터널을 500m쯤 지나면 오른쪽에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이 구간을 지날 때면 동승자에게 여근곡을 설명하며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고속도로 확장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여근곡 쪽에 쳐진 방음벽 때문이다. 민가와 축사 등의 소음피해를 막기 위해 높이 3~4m의 방음벽이 도로를 따라 길게 쳐져 있다. 종전에는 고개를 15도 정도만 돌려도 여근곡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운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방음벽 때문에 100여m쯤 지나 고개를 120도 정도 완전히 뒤로 돌려야 겨우 볼 수 있다. 그나마 방음벽이 끊어진 사이를 통해 1~2초 정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여근곡을 찾다 고속 주행 중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운 상황이다. 정말 아쉽다. 별다른 홍보나 돈을 들이지 않고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는 많은 사람에게 여근곡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알다시피 여근곡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경주시 건천읍의 부산(富山)은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3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여근곡이다. 지형이 여자의 성기처럼 생겨서 여근곡이라 불린다. 계곡의 중앙에는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이 있다. 옥문지에는 사시사철 샘물이 솟아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선덕여왕 5년(636) 어느 깊은 겨울. 옥문지에서 개구리 떼가 여러 날 울어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여왕은 정병 2천 명을 뽑아 여근곡을 찾아가서 적병을 치도록 명령했다. 군사들이 그곳에 이르니 과연 백제군사 500명이 매복해 있어 그들을 포위하고 전멸시켰다. 이에 감탄한 신하들이 물으니 여왕은 “개구리가 노한 모습은 병사의 형상인데 때아닌 겨울에 운 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옥문은 여자의 성기이고 이는 음이며, 백색이고, 서방이다. 따라서 서쪽의 옥문과 같은 지형에 적병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또 남자의 성기는 여자의 성기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므로 여근곡에서 적을 쉽게 처치할 줄 알았다”고 했다. 지구촌 지자체마다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별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전설이나 이야깃거리, 바위, 무덤 등에다 스토리텔링을 입혀 관광자원화 하는 것이 작금의 추세다. 자기 동네 소소한 사물이나 역사에 이야기를 입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벨기에의 대표적 관광자원의 하나인 ‘오줌 누는 소년상’은 실제 보면 대부분 실망한다. 골목 안에 서 있는 소년상은 진품이 아닌 데다 60㎝ 정도로 크기가 작다. 진품은 브뤼셀 시립박물관에 있다. 골목 입구에는 상점만 즐비하다. ‘레드존’으로도 불리는 암스테르담 홍등가는 네덜란드의 대표적 관광지 가운데 하나다. 관광객들은 운하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성매매 업소를 흘낏거리며 지나간다. 그것이 전부다. 암스테르담 시 당국이 지난해 말부터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찾아 관광 규제에 들어갈 정도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2리 마비정(馬飛亭) ‘벽화마을’과 경북 봉화군의 분천역 산타 마을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보면 여근곡은 어마어마한 역사 관광자원이다. 다양한 극적 요소가 있어 관광자원화 하기에 충분하다. 선덕여왕의 지혜를 엿볼 수 있고, 신라사람들의 성에 대한 의식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골짜기 아래 옥문지 이야기는 성적 판타지를 더해준다. 그러나 확장공사를 실시한 도로공사는 멀쩡하게 잘 보이던 관광자원을 방음벽으로 차단해버렸다. ‘피해’를 입은 경주시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 해결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방음벽이 차량 소음으로부터 인근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투명한 아크릴 소재로 바꾸기만 해도 된다. 그러면 지나는 운전자들이 여근곡을 볼 수 있다.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

점입가경이다. 결국 탈이 났다. 갑질의 결과다. 가뜩이나 외유성 해외연수에 대한 국민들의 눈길이 곱지 않은 터에 덜컥 사달을 내고 말았다. 가이드 폭행과 여성 접대부를 불러달라는 추태로 국가적인 망신을 샀다. 방송과 유튜브 등을 통해 CCTV에 폭행 장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비난 여론이 펄펄 끓고 있다. 경북 예천군 의원들이 해외에 나가 벌인 추태가 국민 공분을 사고 있다. 해당 의원은 사과와 함께 부의장직을 내놓았다. 의회는 연수비용을 모두 게워내고 임기 동안 해외연수를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여론 무마에 나섰다. 하지만 버스 지나간 뒤에 손들기다. 예천 군민들은 군민 명예를 훼손했다며 군 의원 전원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 청원이 이어지면서 지방의원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해당 의원은 군 의장이 자신과 초선 의원들을 험담하고 가이드가 동조하는 바람에 홧김에 폭행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사건 경위야 어떻게 됐든 비난의 화살은 군 의원에게로 향하고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경북 도내 시ㆍ군 의장들이 베트남 연수를 떠난 것. 여론이 악화하자 하루 만에 보따리를 싸 돌아왔다. 지방의원들의 행태에 경북도민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정신 나간 짓이다. 지방의회 무용론까지 나오는 상황에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다. 자질론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다. 애꿎은 기초ㆍ광역의원은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당하게 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도랑을 다 흐려 놓았다. 집행부 감시와 견제라는 본연의 목적은 뒷전인 채 온갖 일탈을 일삼는 지방의원을 없애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위기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이래 28년이 지났다. 그동안 모두 7차례나 선거를 치르면서 기초와 광역 의원들을 주민 손으로 뽑았다. 하지만 초기 지방의회부터 시작된 지방의원들의 일탈은 끝 가는 데를 모른다. 지방의회마다 바람 잘 날이 없다. 부정ㆍ비리에서부터 각종 추문까지 끊임없는 지방 의원들의 빗나간 행태는 국민 불신의 원인이다. 권력에 기대어 행세하고 공무원을 종 부리듯 하는 지방의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이 기회에 방안을 찾아야 한다. KB국민은행 노조가 파업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평균 연봉 9천100만 원에 달하는 거대 조직의 파업을 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이자수익으로 돈 잔치를 벌이는 것 아니냐’며 싸늘하기만 했다. 후유증도 만만찮다. 파업해도 큰 불편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되레 금융권의 감원 바람에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물론 금융권의 감원은 인터넷 및 폰뱅킹 등의 활성화와 인터넷 전문은행의 등장으로 굳이 은행 창구를 찾을 필요가 없어진 사회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금융권 구조조정의 명분을 줬다. KB국민은행의 직원들은 성과급 등 달콤한 파업 과실을 챙겼지만, 희망퇴직제에 합의하며 감원 회오리에 휩쓸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됐다. 국민들은 이미 대기업 귀족노조의 행태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정부는 대놓고 내밀고 있는 민노총의 촛불 청구서에 당혹해하고 있다. 청와대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서른네 살짜리 청와대 5급 행정관이 장관급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내 군 인사를 논의, 지탄받았다. 청와대는 “행정관이 육참총장 못 만날 이유 없다”고 해명, 가뜩이나 눈꼴시려 하던 야당에 공격 빌미만 제공했다. 국방부는 참모총장이 행정관을 국방부 인근으로 불렀다는 궁색한 입장을 내놓았다. 말장난이라는 비아냥만 샀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저만 살겠다고 나대는 마당이다. 가진 자의 오만과 무례가 차고 넘친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공질서와 도덕 윤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세계 12위권의 경제 강국과 K팝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의 위상을 갉아먹는 일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다. 제 발등 찍기는 이제 그만하자.홍석봉논설위원

대구·경북 그랜드디자인 다시 그려야

새해가 밝은지 어느덧 1주일. 예년 같으면 작심삼일이 되든 말든 너나없이 모두가 새로운 각오를 다질 때다. 그러나 세상이 답답해서인지 그 흔한 금연결심조차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역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다. 새해에 거는 희망도, 기대감도 실종된 듯하다. 서민경제가 어려운 불경기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대구ㆍ경북은 꿈을 잃어가고 있다.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다수의 시ㆍ도민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불만만 커져가는 모습이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대구ㆍ경북이 외면받고 입지가 위축되면서 지역민들의 자존감도 비례해 상처를 입고 있다. 정치는 꿈을 줘야 한다. 중앙정치가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하면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야 한다.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는 행정가이기도 하지만 표를 얻어 당선된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ㆍ도민들이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민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개혁이어도 좋고, 개발계획이어도 좋고, 복지여도 좋다. 위안을 주는 이벤트라도 괜찮다. 그 모두를 아우른 그랜드 디자인이면 더욱 좋다. 광역ㆍ기초 자치단체장들은 매년 연말과 연초 장밋빛 새로운 시정 계획을 앞다투어 발표한다. 그러나 시ㆍ도민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3일 시무식에서 “공직자들이 지난해 열심히 했으나 도민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폐청산의 큰 흐름에 휩쓸려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내륙의 수출기지로 자타가 공인해온 구미공단은 체감경기가 더욱 악화하고 있다. 구미상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BSI(경기 실사지수)는 68에 그쳤다. 내수경기 침체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다. 2014년까지만 해도 가동률이 80%를 넘었으나 지난해 전반기엔 60% 초반대로 떨어졌다. 특히 50인 미만 소기업의 가동률은 39%에 머물러 심각성을 더했다. 대구 3공단에는 문을 닫는 제조업체가 늘고 있다. 곳곳에 공장 임대, 급매매 현수막이 나부낀다. 업종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성서공단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대구지역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현상이 지속하고 있다. 사실상 서울을 빼곤 전국 유일의 가격 상승지역이다. 집 없는 서민들을 괴롭히고, 새로 결혼해 내 집 마련을 하려는 젊은 사람들을 좌절케 한다. 대구가 타지 투기꾼들의 타깃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 지 오래다. 대구경북 신공항은 논의 자체가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말까지 새 공항 입지가 결정된다고 했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지역에서는 아직 ‘군공항만 옮겨야 한다’, ‘민간공항과 군공항을 같이 옮겨야 한다’는 시비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에서는 이미 폐기된 것 같았던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다시 들고나오는 형국이다. 중앙정부에서는 굳이 영남지역에 2개 거점 공항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여전히 품고 있는 듯하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끼리 떠들다 마는 우스운 꼴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대구 취수원 구미 이전은 공단 폐수 무방류 시스템이 가능한지 검증결과가 나올 때까지 논의 자체가 1년간 유보됐다. 대구시청사 이전도 지역사회 내 구 단위 지역 간 의견충돌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북구 산격동 구 경북도청사 자리의 활용을 싸고 여전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확정된 대구법원ㆍ검찰 청사 이전은 아직 시간은 남아있지만 후적지 상가경기 침체 등으로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벌써부터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같은 지방이라도 상황이 다른 곳도 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적지 않은 진통을 겪고 있다. 성사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아 보인다. 지역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새해 시ㆍ도정 계획에는 지역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그랜드 디자인을 그렸으면 한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새로운 꿈을 가지게 해야 한다. 지역발전의 새로운 각오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지국현논설실장

무술년을 보내며

무술(戊戌)년이 저문다. 해마다 연말이면 되풀이하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단어가 올해만큼 절절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온 국민이 어두운 터널 속을 이리 차이고 저리 치이며 손을 더듬어 겨우 빠져나온 기분이다. 2018년 무술년은 ‘평화’와 ‘인권’ 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전쟁 일보직전까지 치달으며 긴장 사태가 극에 달했던 남북관계가 2018년 무술년에 접어들면서 전기를 마련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화해의 서광이 비친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김정은 위원장의 한국 방문은 불발됐지만 종전 합의 등으로 희망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온 국민이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국가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은 무술년 최대의 사건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시험과 핵 실험을 하며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던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을 하며 일시에 전쟁 공포를 잠재웠다. 양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고 표준시를 통일하면서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천명했다. 특히 뒤이어 이뤄진 북미 정상의 사상 첫 만남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온 국민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진 남북 평화 무드는 남북 철도연결 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곧장 이뤄질 것 같던 김정은의 한국 방문은 결국 해를 넘기고 말았다. 뜨거워졌던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남북관계가 이만큼이라도 대화 분위기로 이어진 것은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하지만 북한만 바라보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짝사랑이 자칫 일방적인 퍼주기가 될 가능성도 농후해 걱정하는 국민이 많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목 죄기’가 핵 폐기라는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2017년 정유년이 촛불 민심으로 법치의 의미를 일깨웠던 한 해였다면 2018년 무술년은 국민의 권리를 재인식하게 했던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다. ‘미투’와 ‘갑질’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2017년 미국서 시작된 ‘미투(#MeTooㆍ나도 피해자다)’ 운동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지난 1월 현직 검사가 검찰 내의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했다. 이후 연극연출가 이윤택에게 성추행당했다는 고발이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퍼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고발 움직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시인 고은을 비롯해 극작가와 배우는 물론 안희정 등 정계 인사로까지 불똥이 튀었다. 경북대 등 지역 대학가에서도 미투 고발이 이어지는 등 큰 위세를 떨쳤다. 급기야 중고교까지 번져 교육현장이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미투로 촉발된 여성의 권리 찾기는 이후 남성 혐오 운동인 ‘워마드’로 표출돼 또 다른 논란을 낳기도 했다. ‘갑질’과 ‘을의 반란’도 무술년의 대표적인 화두다. 갑질은 곧 패가망신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됐다. 갑질 중의 갑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집안으로 전 국민의 원성을 샀다. 조 회장의 막내딸 조현민 전무의 ‘물컵 갑질’에 이어 조 전무의 어머니는 공사 인부들에게 퍼부은 폭언과 폭력으로 지탄을 받았다. 조 전무의 언니 조현아 부사장은 2014년 ‘땅콩 회항’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진그룹 일가의 갑질은 이래저래 가진 자의 횡포로 주목받았다. 한 언론사 대표의 열 살짜리 딸은 50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퍼부어 온 국민을 경악게 했다. 연말엔 직원들에게 엽기적인 갑질을 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갑질’ 피날레를 장식했다. 2019년은 기해(己亥)년 ‘황금 돼지의 해’다. 황금 돼지는 재물과 복, 다산을 상징한다. 새해에는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가 정착되고 인간다운 권리를 구가하며 모두가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홍석봉논설위원

“국책은행 본점 대구 유치 나서야”

대구ㆍ경북 지역민들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가운데 지난 11월23일 우리 지역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됐다. ‘한국산업은행법’과 ‘중소기업은행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그것이다. 현행 이들 법률 4조 1항에는 이들 은행의 본점을 ‘서울특별시에 둔다’고 각각 명시하고 있다. ‘이런 것까지 법률로 정하나’라고 의아해할 사람이 많을 듯하다. 개정안은 김두관(더불어민주당ㆍ경기 김포) 의원 등 10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했다. ‘본점 소재지를 특정 지역으로 한정하는 것보다 정관으로 정하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다. 이들 은행의 본점을 지방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해석된다. 부산과 광주에서는 특히 산업은행 유치를 위한 물밑작업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법률이 아닌 정관으로 본점 소재지를 정할 수 있으면 이사회의 결정만으로 지방 이전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들 법률개정안은 지난 9일 정기국회 폐회 때까지 관할 정무위원회에 상정되지 않았다. 새해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각 정당 간 첨예한 대치와 국회법상 상임위 의안 상정제한 규정(숙려기간 확보를 위해 ‘일부개정 법률안’은 15일이 지나야 상정) 등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두관 의원 측은 “개정안을 12월 임시국회나 내년 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공기관 2차 지방 이전(122개)은 지난 9월 초 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주장하면서 불이 붙었다. 전국의 모든 지자체는 그간 알짜배기 공공기관 유치를 위해 치열하게 물밑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 대표의 발표 후 민주당 관계자는 “특성상 지방으로 내려갈 수 없는 기관들이 있다.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은 다른 기관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참여정부 때도 검토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공공기관 이전의 목적을 도외시한 방침일 뿐 아니라 고사해가는 지방의 실정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라는 비수도권 주민들의 비난에 직면했다. 변수는 이뿐이 아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11일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공공기관 추가 이전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 이해찬 대표가 의지를 밝혔지만 깊이 있는 검토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도 정부 측의 반대로 국책은행 본점 지방 이전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2020년 4월에 21대 총선이 실시된다. 총선에 앞서 ‘지방화’를 내세우고 있는 정부ㆍ여당이 국책은행 지방이전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지금은 21세기 정보화 시대다. 부산으로 이전한 한국거래소도 잘만 돌아가고 있다.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설치하자는 의견도 갈수록 관심을 끌고 있다. 국책은행 본점을 지방으로 이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구는 국책은행 지방 이전을 다음 총선 공약으로 추진하라고 각 정당에 전방위 압박을 가해야 한다. 지역에도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산업은행은 부산과 광주가 계속 경합하게 던져두고, 대구는 기업은행 유치에 올인하는 방안도 있다. 대구는 동대구로 일대가 금융허브로서 입지여건이 충분하다. 향후 KTX 속도가 시속 300㎞ 이상 되면 대구는 서울과 시간 거리가 1시간 이내로 좁혀진다. 부산보다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이다. 가시화 되고 있는 도시철도 엑스코 선(수성구민운동장~동대구역~엑스코)이 건설되면 KTX가 서는 동대구역과 1~2개 정거장 이내로 연결된다. 전국 어느 도시에도 그만한 접근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은행 종사자들도 이왕 본점이 지방으로 이전한다면 대구를 선호할 것이다. 동대구 지역에 국책은행 본점이 유치되면 지역 발전의 새로운 모멘텀이 된다. 국책은행 이전 효과는 엄청나다. 기업은행의 경우 본점과 캐피털, 투자증권, 연금보험 등 7개 자회사 근무자 수천 명이 한꺼번에 내려오면 쇠퇴하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양한 가능성에 대비해 치밀한 유치전략을 세워야 할 시점이다.지국현논설실장

초전지 기념관 3만 명 다녀가…발우공양·민속놀이 남녀노소의 ‘쉼터’

신라불교 초전지는 2017년 10월13일 경북도 3대 문화권 전략 조성사업에 선정돼 국도비와 시비 등 400억 원을 들여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일원에 조성됐다. 신라와 통일신라, 천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유래를 찾기 힘들다. 특히 한 나라의 국교가 천 년 가까이 지속된 나라도 흔치 않다. 불국토(佛國土). 현대인들은 신라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의 신라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진 곳은 어디일까? 구미시 도개면 도개2리 모례마을 신라불교 초전지. 초전지라는 말은 ‘처음으로 전해진 땅’ 이란 뜻이다. 이곳이 바로 ‘신라불교초전지’이다. ◆신라불교 초전지 신라불교 초전지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가옥체험관에서 진행하는 한옥문화예술공연 모습. 신라불교 초전지는 경북도 3대 문화권(유교ㆍ신라ㆍ불교권) 조성 전략 사업에 선정돼 국ㆍ도비와 시비 등 400억 원을 들여 2017년 10월13일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일원에 개관했다. 3만6천여㎡(1만1천 평)의 부지에 초전기념관, 전통한옥체험관, 대강당, 불교음식체험관, 단체생활관과 전시가옥 등 대규모 시설이 들어서 있다. 특히 초전지 기념관은 올해만 약 3만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기념관은 총 3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관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2관은 성국공주의 병을 향으로 치료한 아도화상의 행적을 보여주면서 도리사 창건에 대한 과정을 소개하고, 아도화상의 입적지를 재현했다. 3관은 신라불교가 국교로 승인된 과정과 구미(선산)지역의 불교문화 유산을 상세히 설명했다. 특히 탁본과 염주 만들기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체험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미디어실은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명상을 할 수 있는 5분짜리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 휴식과 힐링의 공간 신라불교 초전지가 진행하는 ‘초전지 데이, 초전지에서 놀자’ 프로그램은 가족 단위의 체험객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신라불교초전지는 개관과 동시에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개관 일 년 만에 3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불교 성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시민의 ‘휴식과 힐링’을 책임질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다. 신라불교 초전지를 관리하는 구미시설공단은 이런 호응에 힘입어 각종 체험 행사와 숙박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초전지 데이(day), 초전지에서 놀자!’ 프로그램은 가족단위 체험객이 주를 이룬다. 신라불교 초전지를 찾은 아이들이 전통 놀이를 즐기고 있다. 설날을 전후한 떡국 만들기 체험은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다. 또 전통방식의 떡메치기를 통한 인절미 만들기, 진달래 피는 3월의 화전놀이 등은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특별한 프로그램이다. 그 외에도 전통 먹거리 체험과 대보름 다리밟기, 천연염색, 부채만들기 등 민속체험을 연중 실시하고 있다. 모례마을 초전지정보화마을과 연계한 옥수수따기 체험, 메뚜기잡기 체험 등 농촌체험활동도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다. ‘미션! 초전지의 비밀을 찾아라’ 는 초전지를 방문한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다. 저마다 미션지를 들고 초전지에 숨은 아홉 가지의 비밀을 찾으러 떠나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공부와 휴대폰이 일상이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우리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산교육이 되고 있다. 미션을 완료하면 선물도 증정한다. 특히, ‘일상에서 쉼표 하나’ 프로그램은 기존 사찰 템플스테이와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이다. 불교체험 프로그램인 예불, 108배 등은 기본이고, 최근 사찰에서도 진행하지 않는 발우공양체험을 제공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사찰식 템플스테이와는 다르게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명상’ 등 특별한 템플라이프 형태로 진행되는 ‘일상에서 쉼표 하나’ 프로그램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힐링시키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점심이면, 점심 공양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초전지 전역에 울린다. 신라불교 초전지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전통사찰식 발우공양 체험을 진행해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 사찰식 ‘발우공양’ 체험이다. 지난 9월부터 시작한 ‘발우공양’ 체험은 초전지 프로그램 중 손꼽을 만큼 인기가 좋다. 어른 7천 원, 초등이상 4천 원의 저렴한 체험비로 전통사찰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는 한 끼 식사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도 자리하고 있다. 매달 발우공양 레시피가 공개되고, 체험객은 취향에 맞는 날짜를 골라 신청하면 된다. 초전지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이 가능하며 현장 신청도 가능하다. 단 프로그램 운영의 특성상 20명 선착순으로 운영한다. ◆전통가옥에서 하룻밤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전통가옥체험’ 이다. 고풍스러운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다. 성불, 자비, 오도, 대각, 득도관 등 고품격 전통 한옥으로 건축된 멋들어진 한옥에서 가족과의 1박 2일을 보낼 수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멀리 서울 인근에서도 체험관을 찾고 있다. 멀리 도리사의 태조산 정상이 바라다보이는 고즈넉한 청화산 아래 초전지 전통가옥체험관의 하루는 도심에서 찌들은 일상을 털고 휴식과 힐링을 찾아가기에 딱 알맞다. 아이들은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고 옥자놀이, 투호, 제기차기, 팽이치기, 굴렁쇠 돌리기 등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다. 왕 윷놀이는 어른들을 동심의 세계로 초대한다. 또한 각 동마다 울력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텃밭 데크가 조성돼 숙박객 스스로 농사를 짓고 수확할 수 있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구미시설공단(이사장 권순서)이 운영하는 신라불교초전지는 도개정보화마을과 업무협약을 맺고 딸기따기 체험, 옥수수따기, 곶감만들기 등 농촌체험활동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도개리 등 농촌 지역사회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초전지발전협의체를 발족시켜 보다 전문적이고 특색 있는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참여 회원단체는 아도모례원, 도개 문수사, 아도문화진흥원, 경북과학대학 겨레문화사업단, 초전지정보화마을 등 5개 단체이다. 초전지발전협의체는 2019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5월 한 달간 ‘초전지 나들이 행사’를 보다 확대해 주최하고, 시민 명상프로그램 운영 등 초전지만의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한 달 동안의 나들이 행사 기간에는 연등축제, 야간 연등 산책로 조성, 한옥문화예술공연 등이 이어진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곳에 자리 잡은 신라불교 초전지는 불교성지로서 구미문화의 우수성을 지켜가며 시민문화교육센터의 역할은 물론,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동시에 제공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프로그램 문의는 구미시설공단 문화레저운영팀(054-480-2140), 프로그램 신청은 홈페이지(http://www.ginco.or.kr/silla/)로 하면 된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야트막한 매봉산에 ‘폭’ 안겨있는 보천사…해운사 절벽 위엔 도선이 득도한 ‘천연 동굴’

해운사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는 높이 28m의 대혜폭포.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해 ‘명금폭포’라고도 불린다. 해운사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높이가 28m나 되는 대혜폭포가 있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해 ‘명금폭포’라고도 부른다.이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인 도지사가 이곳에 들렸다가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석수에게 시켜 암벽에 ‘명금폭(鳴金瀑)’이라고 새긴 것을 등산객들이 보고 붙인 이름이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청 학예사사진=한태덕 전문 사진기자

일제강점기 모든 암자 해체되고 불상 옮겨가는 수난 속 꿋꿋이 기개 지켜온 호국사찰

대둔사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인 446년에 창건했다. 이후 화재 등으로 불에 탄 것을 여러 차례 중건했다. 조선시대 들어 사명대사가 중건하고, 승병 10만 명을 주둔시켰다. 현재 사찰 터는 당초 대둔사 터가 아니라,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곳이다. 불교는 왕족들이 민심을 달래고 하나로 모으기 위한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온전히 이 땅에 뿌리내린 불교는, 그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며 국교의 위치까지 오른다. 세상살이의 팍팍함을 달래주고 연회를 베풀어, 백성들에게 짧은 순간이나마 미래에 대한 기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했다. 왕족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성장한 불교는, 외세 침략기에는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에도 불구하고, 목탁과 염주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외세와 맞서며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켰다. 호국 불교의 역할을 든든히 한 셈이다. ◆호국 사찰 대둔사, 사명대사 10만 승군 주둔 구미시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기슭 평평한 곳에 앉은 대둔사는 호국 사찰이다. 사명대사 유정이 조선 선조 39년(1606) 중건한 후, 10만 명의 승군을 주둔시켰다고 한다. 구미시 무을면 수다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둔사는 신라 눌지왕 때인 446년,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는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 이후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의 침략으로 불탄 것을 충렬왕 때 왕자 왕소군이 출가해 중창하고, 유불교체기 다시 폐허가 된 것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가 암자를 10개나 거느린 큰 규모의 사찰로 중건했다. 사명대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둔사의 시련은 계속됐다. 일본 강점기 때는 사찰의 모든 암자가 해체되고, 시왕전의 불상마저 진주의 어느 사찰로 옮겨 가는 수난을 겪었다. 최근 들어 신도들의 모금으로 여러차례 중수해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현재 전각이 놓인 위치는 당초 대둔사가 있던 자리가 아닌,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자리다. 대둔사 터는 여기서 서남쪽으로 300여 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대웅전과 명부전, 응진전, 요사채, 삼성각 등의 전각이 남아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말사다. ◆유물, 유적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33호)은 종이와 삼베를 몇 겹씩 발라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불상이다. 대둔사에는 2점의 보물이 있다. 하나는 보물 제1633호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난해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한 대웅전(제1945호)이다.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종이와 삼베를 몇 겹씩 발라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건칠 불상이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왕자 왕소군이 출가해 대둔사를 중창할 당시에 조성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불상의 형태로 보아 이보다 좀 더 늦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양손만 나무로 제작하고 나머지는 모두 건칠로 제작됐다.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은 나주의 심향사 건칠여래상 등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만 확인됐는데, 대둔사의 아미타여래좌상의 등장으로 경북도에서도 고려 후기 건칠여래상이 조성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특히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그 규모가 1m가 넘는 큰 규모로 관심을 끌고 있다. 대둔사 대웅전은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11월 보물 제1945호로 지정됐다. 1987년 대웅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상량문에는 광해군 6년(1614년)에서 순조 4년(1804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수리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웅전은 지형이 낮은 앞쪽에 석축을 높이 쌓고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대둔사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이다. 건립 당시의 단청과 문양이 남아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하고, 자연석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이다. 내부는 우물천장을 하고 있고, 닫집의 조각이 섬세하다. 대웅전의 꽃살 여닫이문. 대둔사 대웅전은 2017년 11월 보물로 지정됐다. 대웅전 정면에 있는 꽃살 여닫이문과 뒷면 오른쪽의 영쌍창(창호 가운데 기둥이 있는 창)이 고전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건립 당시의 단청문양이 잘 보존돼 있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둔사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층집이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는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층이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의 또 다른 이름은 지장전이다. 윤회 과정에서 지옥 중생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 구원해 내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다. 명부전에는 망자를 심판하는 열 명의 심판관이 있어 시왕전(十王殿)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대둔사 명부전에는 ‘유명도’ 1폭과 역대 제선사의 진영 5폭이 봉안돼 있다. 건물의 조성연대는 대웅전과 비슷할 것으로 짐작된다. 대둔사의 대웅전 북쪽 언덕에 응진전이 있다. 17세기 후반 조성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집이다. 응진전 안에는 토제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돼 있으며, 중앙 본존을 비롯한 협시보살상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부전 옆에 있는 소형의 당간지주. 당간지주석의 북쪽 측면에 ‘강희5년병오(康熙五年丙午)’라는 글귀가 있어, 1666년(현종 7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명부전 옆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소형인 대둔사 당간지주는 북쪽 측면에 ‘강희5년병오(현종 7년, 1666년)’ 라는 글귀가 있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 ◆대둔사 가는 길 대둔사는 선산에서 상주 낙동까지 선상서로를 따라가다, 옥성면 구봉리 못미처 왼쪽으로 난 산촌옥관로를 따라 3.5㎞를 더 가면 된다. 산촌옥관로를 따라가다 보면, 밭이었는지 논이었는지 알 수 없는 농지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을 쌓아 둔 곳이 있다. ‘돌무지’라고 표기한 큰 입석이 아니더라도, 그 수와 규모만으로도 눈길을 끈다. 이곳을 지나 좀 더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둔사 700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작은 다리를 건너, 산을 오른다. 서늘한 늦가을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훑고 지나간다. 대둔사는 복우산 중턱에 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은 대둔사 마당에 서면 감탄사로 바뀐다. 탁 트인 전망에 멀리 보이는 첩첩의 산맥들과 골짜기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고찰 대둔사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장막을 친 복우산 품에 안겨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대웅전 처마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고요한 산사를 깨운다. 원래 대둔사는 이보다 서남쪽 30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터는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곳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전각이다. 석가모니부처는 모든 번뇌를 쓸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었기에 위대한 승리자요,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대웅)에서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불렀다. 석가모니 부처와 함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협시보살로 모신 경우를 높여서 ‘대웅보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둔사의 대웅전은 다포계, 겹처마 아래 독특한 문양과 조각을 갖추고 있다. 색 바랜 단청과 문양들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눈길을 끈다. 이 큰 나무와 부재들을 일일이 조각조각 깎아 서로 맞물리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했을까. 대웅전과 명부전을 돌아 절 앞마당에 섰다. 늦가을이라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 만도 한데, 깨끗하다. 이 사찰 주인의 깔끔한 성품이 너른 절 마당에 비쳐든 듯하다. 내 마음의 뜨락도 저절로 정갈해진다. 조용한 산사를 말없이 거닐다 보면, 어느새 들뜨고 복잡한 세상이 좀 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복잡하기만 한 세상 때문에 우리의 몸은 온종일 세파에 시달리고 있다. 잠시라도 세상의 일은 잊어버리고, 의미 없는 온갖 화려한 시각적인 자극을 멀리한 채 이렇게 조용한 산사의 뜰을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걷노라면, 잠시동안 이나마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또 다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대둔사 마당 한쪽 화단에 제철을 잊은 채 피어난 불두화.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찰의 주인은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마당 끝에 화단을 만들고, 메리골드라고 부르는 천수국과 맨드라미, 천일홍, 국화 등 여러 종류의 꽃을 심었다. 진한 자주색의 맨드라미보다, 잎을 모두 떨구고 제철을 잊은 채 두어 송이 하얀색 꽃을 피워 낸 불두화에 눈길이 간다.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백당나무를 개량한 종인데, 백당나무 꽃에서 암술과 수술을 없애고 꽃잎만 겹겹이 자라게 한 원예품종이다. 이 때문에 꽃 속에 꿀샘이 없고, 번식할 필요가 없어 향기도 없다. 꿀샘이 없으니, 벌과 나비도 외면해 생명이 없는 조화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꽃들은 피기 전이나 피어나면서 꽃잎을 활짝 열지만, 불두화는 꽃을 피운 상태에서 계속 꽃을 키우고, 연초록에서 흰색으로 색깔을 바꾼다. 철모르고 핀 대둔사 마당의 불두화를 보면서 모든 식물이 겨울잠을 재촉하는 이 시기에 왜? 꽃을 피웠는지 궁금해진다. ◆주변 관광지 구미 옥성면에 있는 대둔사는 상주시 낙동면의 경계지역에 있다. 근처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구미시 승마장이 있다. 인근 낙동면을 가면, 낙단보를 둘러보고 강변에 줄지어 들어선 한우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한우를 맛볼 수 있다. 또 대둔산에서 내려와 만나는 산촌옥관로는 선산까지 이어진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져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청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기자

가을이 사뿐 내려앉은 길…앙증맞은 산사, 반가이 객을 맞다

수다사 명부전(경북도유형문화재 제139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담백한 모습이다. 대웅전을 신축하면서 그 부재를 이용해 지었다고 한다. 명부전(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39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대웅전의 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모양을 내려고 애쓴 흔적보다는 용도에 딱 알맞게 지은 그런 담백한 건물이다.하지만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 점을 고려하면, 당초 크기는 이보다 좀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대웅전을 신축하면서 그 부재를 이용해 지었다고 한다.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 등 여러 불상이 모셔져 있다. 또 1771년에 그린 여러 폭의 칠왕지옥도가 걸려 있는데 보존 상태가 완전하다.이 밖에 조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동종이 있다.종의 정상부에 쌍룡이 입에 한 개씩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 동종에는 건륭 37년(영조 48년, 1772)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인근 관광지 수다사가 있는 구미시 무을면은 도농 복합도시인 구미지역에서도 특작이 활성화된 농업지역이다. 주변에 사과 과수원과 버섯 재배사 등이 곳곳에 있다.수다사 바로 아래 무을저수지(안곡지)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최근 이곳 안곡리 일원에 정부 지원을 받은 ‘무을6차림 돌배나무 특화림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덕분에 봄이면 안곡리 일원이 돌배꽃으로 하얗게 물들어 관광객들을 유혹한다.또 수다사로부터 2㎞쯤 떨어진 안곡리에 쌉싸름한 맛이 일품인 유명한 묵 집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펜션이 하나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자문=권삼문 전 구미시청 학예사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비봉산 널따란 품에 안겨 우뚝 솟은 죽장사 오층석탑…자애로운 큰스님 같구나

죽장사 경내에 있는 선산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제130호다. 높이가 10여m나 되며 현존하는 오층석탑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백 개나 되는 돌이 쌓여 만들어진 이 탑에는 서로 먼저 탑을 쌓겠다며 내기를 한 남매의 전설이 서려있다. 죽장사에는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130호 오층석탑이 있다.이 석탑이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탑의 높이가 10여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탑이기 때문이다.현존하는 오층석탑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그래서 사다리 없이는 정상부까지 올라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대석부터 정상부인 노반까지 수백 개의 석재가 쓰였을 것으로 추산된다.규모를 고려하면 한 개인이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사회적 배경과 국력, 불교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 불교미술계의 최초 정점인 통일신라시대 건립됐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이 탑에는 두 남매의 전설이 전한다.통일신라시대 두 남매가 서로 재주를 자랑하다가 오빠는 다른 곳에서, 누이동생은 죽장사에서 석탑을 먼저 세우는 내기를 했는데, 누이동생이 먼저 이 오층석탑을 쌓았다고 전한다.오층석탑은 안정적이면서도 장엄하지만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마치 자애로운 큰 스님의 모습이랄까.어떤 이는 이 석탑을 보고 “부드러운 힘이 충만해 온종일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다”고 표현한다.신라불교가 처음 전해진 구미(일선, 선산)의 불교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주변 관광지 죽장사는 현재 구미시 선산출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인근에 선산 재래시장이 있다. 2일과 7일에 전통시장이 선다. 경북 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 오일장이다.선산 재래시장에서 조금 더 가면, 조선 시대 관아였던 선사 객사(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와 선산 향교가 있다.또 조선전기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 선생 유허비(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와 묘가 죽장사 부근에 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자문=권삼문 전 구미시청 학예사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01번 사진]기획-신라불교 초전지 구미-4)옛 영광은 어디가고 흔적만 남아-죽장사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비봉산 품에 앉은 죽장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절이다. 조선 중종 25년인 1539년까지 존속한 후 폐허가 됐다가, 1954년 암자가 들어서고 명효스님이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중창했다. 오층석탑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며 ,왼쪽은 종무소 역할을 하는 원각당이다.[02번 사진]기획-신라불교 초전지 구미-4)옛 영화는 어디가고 흔적만 남아-죽장사오층석탑을 배경으로 멀리 금오산과 작은 봉오리들이 보인다. 죽장사는 답답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만큼 탁 트인 전망을 선물한다. 멀리 감천을 따라 펼쳐진 선산들도 눈에 들어온다.[03번 사진]기획-신라불교 초전지 구미-4)옛 영화는 어디가고 흔적만 남아-죽장사죽장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신 사찰 입구를 표시하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불화가 그려진 깃발을 걸어 두는 기둥으로 선사시대의 솟대나 일본 신사의 도리와도 성격이 유사하다. 죽장사의 당간지주는 경내에서 600여m 떨어진 대나무밭에 외롭게 서 있다.[04번 사진]기획-신라불교 초전지 구미-4)옛 영화는 어디가고 흔적만 남아-죽장사죽장사 경내에 있는 선산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제130호다. 높이가 10여m나 되며 현존하는 오층석탑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백 개나 되는 돌이 쌓여 만들어진 이 탑에는 서로 먼저 탑을 쌓겠다며 내기를 한 남매의 전설이 있다.[05번 사진]기획-신라불교 초전지 구미-4)옛 영화는 어디가고 흔적만 남아죽장사 오층석탑 오른편에 있는 주춧돌. 최근 절을 중창하는 과정에서 나온 주춧돌을 모아 둔 것이라고 한다. 주춧돌의 크기가 보통 사찰 주춧돌의 2배에 이르는 것도 있어 당시 죽장사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한겨울 복숭아꽃 핀 산 중턱에 지은 절 ‘도리사’…화재로 소실된 후 부속 암자로 옮겨

도리사 찾아가는 길에 만난 태풍 ‘콩레이’가 만든 폭포.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는 최초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지은 사찰이다. 아쉽게도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그 도리사는 아니다. 17세기 중엽 원인을 알 수 없는 큰불로 도리사가 모두 불에 타면서 불상을 도리사 위쪽에 있던 금당암으로 옮겨 이름을 도리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리사는 냉산 중턱 아름드리 소나무가 둘러쳐진 양지바른 곳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태조산 도리사’라고 쓰여 있지만, 기록에는 ‘냉산 도리사’라고 전해진다.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가 직접 구미시 해평면 냉산 아래 지은 사찰이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중국 양나라에서 전해져 온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향으로 성국공주의 병을 고친 이적을 기념하고자 매년 ‘향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도리사의 흥망성쇠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아도가 당시 신라의 수도인 계림을 다녀오던 중 한겨울에 산 중턱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자두꽃)이 핀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가 눌지왕 2년(418)이다. 이후 신라불교 성지가 된 구미(당시 일선)에는 도리사를 중심으로 주륵사, 죽림사, 법륜사, 보천사 등 큰 사찰이 잇따라 세워졌다. 이와 더불어 죽장리 5층 석탑, 낙산리 3층 석탑, 도리사 화엄석탑, 원리 3층 석탑, 주륵사 석탑, 등 거대한 석탑들이 들어섰다. 아마도 신라불교 최초 전래자인 아도가 창건한 절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불교가 꽃을 피웠던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많은 신도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1천여 년 넘게 이어 온 도리사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도리사의 쇠퇴와 관련한 전설이 하나 있다. 도리사 절 옆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이 샘의 물을 마시면 힘이 장사가 된다는 것. 이 샘물을 마신 한 스님이 매번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렸는데, 한 선비가 이를 보다 못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도리사에 들어가 “앞산에 큰 돌산을 하나 만들면 절이 더욱 흥하리라”고 선동했다. 결국, 샘물을 마시고 힘이 남아돌던 스님들이 스스로 돌을 나르기 시작해 불과 일 년여 만에 몇 개의 돌산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돌산이 생겨난 후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화재까지 발생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도리사는 배가 떠 있는 등선형인데, 돌산을 만들어 배가 침몰한 형국이 됐다는 것.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이 돌산은 1958년 낙동강 호안공사를 하면서 모두 옮겨져 현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마지막 돌을 옮길 당시, 천둥과 폭풍우가 심했다고 한다. 돌산이 없어진 후인 1976년과 1977년 석승상과 세존사리가 발견돼 많은 불교인들에게 경사를 안겨줬다. 설화지만 어찌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도리사는 숙종 3년(1677) 큰 불로 모든 건물이 재가 됐다. 물론, 도리사의 창건과 쇠퇴는 우리나라 불교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왕권에 의해 들어온 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고려후기 신진사대부들이 수입한 성리학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서서히 그 존재감을 잃어갔다.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도리사는 현대에 들어서야 그 빛을 보게 됐다. 등선형의 도리사를 짓누르고 있던 돌산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금동 6각 사리함과 그 속에 세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보관돼 온 세존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면서다. 도굴로 방치돼 절 밖에 있던 석종형 사리탑을 경내로 옮겨 와 복원공사를 하던 중, 1977년 4월18일 그 속에 금동사리함과 진신사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불교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리함은 6각으로 표면에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음각 돼 있는데, 기존에 발견된 사리함이 사각형이거나 8각형인데 비해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조성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 가져온 진신사리로 추정된다. ◆도리사 가는 길 도리사의 시작은 일주문부터다. 도리사는 이 일주문에서 5㎞쯤 떨어져 있다. ‘신라최고가람 태조산도리사’라는 일주문 현판 아래를 지나면,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2㎞쯤 이어진다. 한국의 가로수길 62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가로수 길이다. 일주문이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시작점이라면, 전성기 때 도리사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2㎞에 걸쳐 길게 늘어선 이 느티나무 가로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터널을 이뤄 도리사를 찾는 방문객들을 온전히 도리사 한곳으로만 집중시킨다. 누가 있어 신라 최초 가람 도리사 방문을 이리 환영해 줄까? 이 길을 지나가려면 마치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설렘과 호기심, 그리움이 교차한다. 그래서 사찰의 일주문은 ‘속세와 내세를 가르는 경계’라고 하는가 보다.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끝나면 도리사까지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다. 꽤 큰 주차장을 갖춘 이곳엔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전통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들어서더니, 최근엔 유행을 타고 현대적 감각을 갖춘 커피숍까지 생겨났다. 절 아래는 조용하더니 경내는 제법 사람들로 북적인다. 많은 절들이 점점 주는 신도들을 붙잡고 새로운 신도들을 모으고자 음악회나 법회, 축제 등을 여는 것이 요즘 추세다. 불교 용어로 ‘야단법석’을 여는 셈이다. 도리사 역시 가을로 접어들면서 많은 가을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유물과 유적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 조선 숙종 때 도리사가 전소되자 새로 금칠을 한 후 산내 암자였던 금당암 본당(지금의 극락전)으로 옮겨졌다.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는 특이하게 생긴 석탑이 하나 있다. 최근 보수 작업을 마친 도리사 석탑이다. 화엄석탑이라고도 부른다. 보물 제470호로 신라시대 때 만들었다. 높이 4.5m, 기단 높이 1.3m, 기단너비 3m 규모로 화강암이 주 재료다. 쉽게 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이다. 마치 전탑처럼 흙벽돌을 구워서 쌓은 듯한 이 석탑은 기교는 없지만, 깊은 신앙으로 우직하게 만든 석공의 마음이 깃든 듯하다. 이 탑을 바라보고 앉은 전각이 극락전(문화재자료 제318호,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6호)이다. 당초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 극락전 안의 불상이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이다. 17세기경 나무로 조성한 것으로 여러 차례 개금 불사(금으로 새로 칠함)를 한 사실이 복장유물을 통해 밝혀졌다. 극락전과 화엄석탑 아래 작은 등산길을 따라가면 아도화상의 좌선대와 사적비가 있다. 아도화상이 앉아서 좌선했던 곳으로 너른 바위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쇠잔해 가던 도리사가 최근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세존 사리탑의 발견 때문이다. 극락전 뒤편에 높이 1.3m 남짓의 크기로 세상을 놀라게 한 석종형 부도, 곧 세존사리탑이 있다. 도굴돼 방치됐던 이 탑을 다시 경내로 옮겨와 세우는 과정에서 독특한 모양의 금동 6각 사리함(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사리함, 국보 제208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과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도리사에도 변화가 생겼다. 도리사의 원래 본당은 금당암의 본당인 극락전이었다. 하지만, 세존진신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본당이 적멸보궁으로 바뀐 것. 불교에 있어 존엄의 대상은 경전에서 불상, 진신사리 순으로 높아간다. 사찰 가장 뒤쪽에 자리한 도리사 적멸보궁에는 통상 본당에 있어야 할 불상이나 탱화가 없다. 대신 투명한 유리가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 유리 너머로 세존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다. 도리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적멸보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아득하다. 어느 곳 하나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마도 세상을 등지고 ‘나’를 찾고자 했던 고승들의 마음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적멸보궁에서 멀리 세상을 굽어본다. 첩첩 산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길게 이어진다. 어느 때는 바다처럼, 또 어느 때는 파도처럼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오랫동안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선지 낡아 보이는 전각이 초록빛 한결같은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적멸보궁 옆엔 마음을 내려놓고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에 육신의 때를 벗길 수 있는 소나무 숲이 있다. 그곳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백의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이라는 한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의역하면 ‘그대에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니, 단지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고 마음만 한가롭구나. 복사꽃을 띄운 물은 아득히 흘러가는데, 이곳이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구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대가 있다. 서대는 산책하던 아도화상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절을 세우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점지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가 가리킨 곳이 지금의 직지사다. 아마도 아도화상은 이미 세상 막히는 것이 없는 자유인이었던 모양이다. ◆인근 관광지 도리사 적멸보궁 옆 소나무 숲. 바쁜 일상에 지친 방문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도리사를 찾는 이라면 일주문 안팎 식당에서 삼겹살과 진한 향의 미나리 맛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하수로 재배해 청정하고 쌉싸래한 향이 일품이다. 도리사 인근엔 즐길 거리도 많다. 산악자전거와 유유자적 걷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임도가 있고, 암벽타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냉산 산악 레포츠 공원이 바로 인근에 있다. 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냉산 산림욕장과 선사시대 유적인 낙산리 고분군, 주인을 위해 의롭게 죽은 개를 위로하기 위한 의구총, 임하댐 수몰로 고향을 떠난 전주 류씨 무실파가 고향에서 살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마을을 만든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도 가까이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소·양 1천 마리씩 키우며 모례장자네 5년간 머슴살이한 아도…집터·우물 아직 남아있어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곳으로 알려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일원. 현재 신라불교 초전지가 조성돼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는 공식적인 국가사절 등 외교통로를 통해 이뤄졌다. 이에 비해 양국에 둘러싸여 있던 신라는 외교적 고립은 물론, 내부 귀족과 왕족의 갈등 등 지배체제가 정착되지 않아 국가사절을 통한 불교 전래는 늦어졌다. 결국, 법흥왕 8년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에 의해 신라 왕실에 불교가 전해졌다. 불교를 수용한 법흥왕은 이를 장려하려 노력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러했듯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족과 갈등관계에 있던 귀족의 반대로 국가 차원의 불교 확산은 실패했다. 급기야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 백성들은 이미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변방부터 불교가 차츰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 구미(일선)가 있다. ◆구미(선산 또는 일선) 신라 불교의 초전법륜지 우리가 늘 배워온 것처럼, 신라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됐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눌지왕 때 구미(선산 또는 일선)에 불교가 처음 전래됐다는 기록이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이 기록과 오랫동안 한국불교 문화를 연구해 온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학논집 제24편에서 ‘선산을 포함한 구미지역이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 논문에서 “선산(구미) 지역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로 주목돼 왔다”며 “문헌의 기록과 현지의 전설, 각 지역의 유적ㆍ유물 등을 종합해 신라불교의 초전지역 또는 발상지역으로 심증을 굳혔다”고 밝혔다. 특히 1968년과 1997년 두 차례 이곳에 대한 조사에서 전시대를 통해 많은 불교 유적ㆍ유물이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의 두 번에 걸친 현지 조사와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불교가 구미 도개에 전해지는 과정은 이렇다. ◆고구려 사람 ‘아도’, 구미로 향하다. 지금의 도리사 극락전과 도리사 석탑 인근 소나무 숲에 있는 아도화상 좌선대와 사적비. 집까지 이어진 칡줄기를 따라 냉산에 오른 모례장자가 아도를 만난 곳이다. 뒤로 보이는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 6 년)에 세운 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이 적혀있다. 아도화상은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 모례장자네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양 1천 마리와 소 1천 마리를 기르며 5년간 일해 주고 이곳을 떠났는데, 품삯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모례가 섭섭한 마음에 아도가 가는 길을 물으니 어디라고 밝히지는 않고 “얼마 후 칡순이 모례의 집에 내려올 것이니, 그 칡순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났다. 이후 정월 엄동설한에 칡순이 모례의 집 문턱에 들어오자, 모례는 놀라 그 줄기를 따라 올라가니 그곳에 아도가 있었다. 그가 있던 자리가 바로 도리사 자리다.(현재의 도리사 위치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 도리사는 도리사 부속 암자인 금당암을 새로 지은 것이다.) 아도는 모례장자에게 두 말쯤 들어가는 자그마한 망태기를 주며 시주를 부탁했다. 선뜻 이를 받아들인 모례는 곧 후회를 하게 된다. 두말 쯤 들어갈 정도의 망태기가 몇 섬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례는 망태기를 가득 채우지 못한 채 망태기를 아도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아도는 이를 종자로 삼아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지었다. 그 후 도리사는 번성하고 승려도 크게 늘었다. 하루는 모례가 시주를 나온 탁발승에게 “더욱 부자가 되는 길이 없느냐”고 묻자, 시주는 하지 않고 욕심만 부리는 모례가 미웠던 탁발승은 “이곳 지형이 배 모양이므로 여기는 돛을 세우면 더욱 좋고 부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모례가 이 말을 믿고 석비 셋을 세웠는데,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어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아도가 양과 소 1천 마리씩을 키웠다고 전하는데, 도개면 신림리와 다곡리에 실제로 양천골, 소천골(또 소골, 우실, 쇠골)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있다”며 “마을 한쪽에 모례장자의 집터가 있고, 모례장자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다”고 말했다. 도개2리 마을 어귀에 있는 석주. 시주에 인색한 모례를 골탕먹일 생각에 도리사 스님이 세울 것을 권유한 석주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례의 집안을 망친 이 입석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라의 미소라고 불릴 만큼 자연스런 미소를 간직한 불상의 모습을 품고 있다. ‘모례정(井)’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인데, 1천600여 년의 내력을 지닌 이 샘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돼 있다. 샘 모양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해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우물 깊이는 3m, 둘레는 단면이 원형이며, 종단면은 가운데가 배가 부르고 상하가 좁다.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들었는데, 그 나무판자가 아직도 썩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정 교수는 “또 마을 어귀에 석주 하나가 있는데, 이 입석이 모례의 집안을 망쳤다는 문제의 석주삼좌 중 하나”라며 이들 지형과 유적, 유물 등이 아도가 구미 도개면에 신라 불교를 처음 전한 흔적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선산 지역을 답사하는 과정에 도리사를 중심으로 한 주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절터를 10여 곳이나 발견해 조사했다”며 “이런 사실을 미뤄보면 신라의 불교는 삼국 중 가장 뒤늦게 공인됐지만, 그 근원은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라고 강조했다. ◆기록에 등장하는 ‘아도’ 아도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고구려 승려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 묵호자가 일선군에 등장해 고을 사람인 모례가 자기 집에 머물게 했으며, 비천왕 때에는 아도화상이 시중을 드는 사람 3명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나타났는데,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와 각훈의 해동고승전은 아도가 263년 19세에 신라로 들어가 계림 왕성 서쪽에서 생활하며 임금에게 불법 시행을 건의했다가 음해당하자 이를 피해 속림(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지냈으며, 미추왕이 죽은 뒤 아도도 입적하고 다시 불교가 폐하여졌다고 전한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묵호자와 아도가 신라에 온 시기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일연은 묵호자와 아도는 동일인물이며, 아도가 일선군에 온 것은 눌지왕 때일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도, 아두, 묵호자 등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승려’를 뜻하는 말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스님을 뜻하는 ‘승(僧)’을 몰라서 ‘아두삼마’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삭발한 중’이라는 뜻으로 당시 신라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불법을 전하는 포교승들이 숨어서 활동했었음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들 기록 모두에서 아도나 묵호자가 당시 신라의 땅인 구미(일선) 모례에 집에서 생활하거나 숨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내용을 같이하고 있다. ◆구미(일선·선산의 옛 고을 이름)를 선택한 이유 모례장자의 집이 있었던 ‘도개’는 신라시대 때 일선군에 속했다. 이는 ‘불도가 열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모례의 집을 중심으로 아도가 신라 땅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개지역은 불교문화의 전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도는 불교 전도를 왜 왕성이 있는 계림(지금의 경주)이 아닌, 일선군 도개에서 시작했을까?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는 내물왕 때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왜국을 물리치고, 실성왕과 눌지왕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선군(지금의 구미)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왕경인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토착신앙과 왕권과 귀족 간 갈등 등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계림(경주)에 비해, 교통상 군사적 요충지인 일선에서 신라 불교가 시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문에 아도가 신라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력을 따라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유물로 본 신라불교 초전지 정영호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구미가 예부터 불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봤다. 금오산 일대에 현존하는 수 개의 사찰은 물론, 산 정상과 산기슭에 20여 개의 폐사지가 있다. 또 아도화상의 이야기와 주륵사 폐사지, 죽장사 오층석탑, 낙산동 삼층석탑 등 찬란했던 불교 유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등에도 신라 불교가 처음 시작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과 현재 전해지는 유물, 유적, 전설 등으로 현재 도개면 도개2리 일대가 신라 불교의 초전지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국보 제182호와 183, 184호로 각각 지정된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과 구미 선산읍 금동관음보살입상 2점은 1976년 도개리와 그다지 멀지 않은 구미시 고아읍에서 사방공사 도중 발견됐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삼국시대 후기 전형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발견 당시 주변에 기와와 토기 조각이 상당수 발견돼 아마도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불교가 국교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 불교 신자들이 처음 불교가 전해진 구미(선산, 일선)지역을 순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신자와 승려들이 찾던 구미(선산)의 불교는 고려를 거치면서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조선시대 들어 영남학파의 근간이 된 성리학의 번성지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면서 급격히 위축된 후 오늘에 이른다. 구미 도개지역이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재조명된 것은 근세 들어서다.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도개가 신라불교 초전지로 우리나라 불교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재조명하면서다.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운동에 앞장선 용성스님은 스승 혜월스님의 유훈에 따라 신라불교 초전지인 도개리를 찾아 수행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수행한 용성 스님은 “신라 불교가 처음 전래된 모례마을을 가꿔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서 불법 전파”…고구려와 가깝던 ‘일선’ 불교 먼저 꽃피워

중국 동진의 스님 마라난타가 백제 사신과 함께 발을 디딘 곳으로 알려진 법성포 인근에 전남 영광군이 조성한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전경. 연간 13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불교는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함께해 오면서 각종 생활풍습 속에도 녹아들었다. 또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산, 물, 바람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산 중에 남아있는 창건 수백 년을 넘긴 사찰들은 가끔 산과 사찰을 찾는 대중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치유를 선물한다.물론 전남 영광군은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을 통해 지역을 관광지로 변모시켜 가고 있다.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구미(일선)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수백 곳에 사찰이 들어설 만큼 불교가 번성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