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당공원으로 이전된 ‘청년 독립운동 중심지’

대구 중구 달성공원 앞에 자리한 달성빌딩. 이곳은 광복을 맞아 대구에서 처음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조양회관이 있던 자리지만 안내 표지판조차 없다. 사진 오른쪽은 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경상도 지방을 순행한 순종황제 동상. 20일 오전 10시 대구 중구 달성공원 순종동상 앞. 화려한 대례복을 차려입은 순종동상 옆에는 오래된 옛 원화여고의 건물이 있다. 지금은 달성빌딩이 자리한 이곳은 사실 독립운동의 성지 조양회관이 있었던 터다. 아침 조(朝), 볕 양(陽). ‘조선의 빛을 본다’는 독립의지를 이름으로 삼은 조양회관은 그 이름답게 1945년 8월15일 조국의 광복 소식을 대구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곳이다. 당시 조양회관에서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던 청년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처럼 대구ㆍ경북 청년들이 모여 민족사상을 기르고 계몽운동을 펼친 것은 물론 광복을 맞아 대구에서 처음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하지만 그 흔한 ‘○○○터가 있었던 곳’이라는 안내표지판조차 없다. 조양회관 터 위에 있는 달성빌딩에는 만물상, 식당, 자동차부품 대리점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일제 강점기 대구청년들의 독립운동 중심활동지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조양회관 터에서 상가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52)씨는 “옛 원화여고 건물로만 알고 있다”며 “20년간 장사하면서 조양회관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의아해했다. 반면 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경상도 지방을 순행한 순종황제의 동상은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었다. 순행 자체가 일본이 조선의 왕을 앞세워 일본에 저항하는 백성에게 순응할 것을 전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더욱이 달성공원 내 천황 요배전 앞에서 기생 공연을 관람한 순종을 위한 동상이 독립운동의 성지에 지어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조양회관은 대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동암 서상일 선생이 거의 홀로 짓다시피 했다. 1917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암은 귀국해 3ㆍ1운동에 참여했다가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이후 감옥에서 출소 후 인재 양성과 국민의식 진작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1922년 조양회관을 지었다. 이후 동암은 조양회관을 대구 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지로 만들었다.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뿐만 아니라 회의실, 인쇄공장, 사진부 등을 갖춘 조양회관에는 각종 강연회가 줄을 이었고 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도 했다. 조양회관은 현재 동구 효목동에 있는 망우당공원에 복원돼 있다. 이대영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사무처장은 “조양회관이 망우당공원으로 원형 그대로 복원된 것은 큰 의의가 있지만 대구의 청년들이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본래의 터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며 “조양회관의 옛 터에도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지나 안내판 등을 갖춰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oo@idaegu.com

흔적도 없는 대구 유일 마을 단위 독립운동지

대구 동구 미대동 여봉산은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독립만세’ 운동 장소다. 하지만 여봉산 정상에는 나무만 무성할 뿐 독립운동 안내 표식과 기념탑, 비석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난 17일 오후 2시께 대구 동구 미대동 747-15번지.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독립만세’ 운동 장소인 여봉산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여봉산을 올라가는 안내 표식은 물론 산길조차 없었다. 여봉산은 수풀이 우거져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려웠고 주변 나무는 거미줄로 가득했다. 또 비탈길을 헤쳐 올라가는 동안 이름 모를 묘지도 가득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수풀을 헤치고 힘들게 산에 오른 지 30분가량이 지나 일제 강점기 시절 미대동 청년들이 ‘독립 만세’를 외쳤던 여봉산 정상에 도착했다. 힘들게 정상에 올랐지만 독립운동 기념탑이나 비석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무만 무성해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사유지로 변해 그 어디에도 당시의 항일운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독립운동정신 계승사업회에 따르면 여봉산은 대구 유일의 마을 단위 궐기의 독립운동지로 8인의 마을 청년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곳이다. 1919년 4월26일 오후 10시께 채갑원, 채봉식, 채학기, 채의각 등 미대동 청년 4명은 마을 동쪽 옆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여봉산은 얕은 산봉우리가 있어 신속히 독립만세 운동의 시작을 알리고 마을 사람들의 동참을 권유하기 위한 적합한 장소였다. 이틀 뒤인 기존 4명을 포함한 8명의 청년이 같은 장소에 올랐다. 이들은 산봉우리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동네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대한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하지만 이날 독립을 외치던 마을청년 8인은 모두 구속됐다. 당시 일제 강점기인 터라 식민지의 청년들이 독립을 외치는 행동은 중대한 범죄였다. 이처럼 나라를 되찾고자 온 힘을 다해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여봉산 궐기는 기억하는 이조차 없고 기록조차 묻혀 있는 상태다. 현재 마을 주민도 여봉산에서 이뤄진 독립운동과 만세 운동을 주도한 8명의 열사에 대한 미담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여봉산은 팔공산에서 이어지는 능선 중 하나로만 알고 있을 뿐. 배한동 독립운동정신 계승사업회 상임대표는 “여봉산 독립운동은 8인의 청년들이 일제에 맞서 마을 주민들을 계몽하고자 펼친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지금이라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대구 독립 영웅들의 넋을 기리고 제대로 된 역사를 알리는 기록물을 남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린 ‘학생 항일운동 본거지’

“이 일대가 일본강점기 당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장소라는 사실을 아세요.”16일 오전 대구 중구 대봉동 센트로팰리스 앞. 이 아파트 입주민에게 질문을 하자 “아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혹시 태극단(太極團)은 알고 있나요” 그는 “처음 듣는데요”라고 답했다.이 일대를 돌아보니 이해가 됐다. 이곳 어디에도 당시의 항일운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흔한 표지석 하나 없다.센트로팰리스와 대구문화재단이 위치한 이곳은 1923년 건립된 대구공립상업학교 부지였다.대구시 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된 대구문화재단 건물은 당시 학교 본관으로 사용됐다.대구상업학교는 항일운동을 벌인 구국투쟁의 역사적인 장소다. 광복 3년 전 1942년 일제의 압제 속에서 당시 학교 학생들은 태극단을 결성했다. 조국 광복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 매우 치밀한 행동강령으로 조직적 항일투쟁을 벌였다.1943년 5월 태극단장(이상호)외 단원 25명 전원이 체포됐다. 이 중 6명은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고 희생됐다.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은 3ㆍ1운동과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대구의 위대한 학생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하지만 이 일대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이를 알고 있는 시민은 많지 않다.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경북고교) 부지였던 청운맨션(중구 대봉동)도 마찬가지다.대구고등보통학교도 일제에 맞서 학생들이 동맹휴학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 장소다. 하지만 아파트가 들어선 청운맨션 어디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식은 없다.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조선인은 야만인’ 발언을 한 일본인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며 등교를 거부했다. 하지만 15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하면서 동맹휴교는 실패로 끝났다.이후 1927년 11월 일부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해 독립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우동맹’을 조직하며 활동하기도 했다.1928년 10월에는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민족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또 한 번 동맹휴교를 하다 182명 무기정학, 18명 퇴학, 105명 검거, 24명 실형 등의 처분받았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관계자는 “순국선열의 숨결과 피땀이 서린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지자체의 관리부실 속에 쓸쓸히 잊혀져 가고 있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이제라도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석,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안내판 등을 갖춰 항일 유적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혜림 기자 lhl@idaegu.com

독립투사 순국한 성지…지금은 안내판도 없이 쓸쓸

대구시 중구 삼덕동 대구형무소 자리에 세워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로비에서 교회 관계자가 형무소에 투옥됐던 이육사 시인의 부조 전시물을 가리키고 있다. 1910년 대구시 중구 삼덕동 일원에 세워진 대구형무소는 수많은 독립투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성지다.순국선열들의 핏빛으로 물든 대구형무소가 이곳에 있었다고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이 유일하다.대구형무소는 1908년 대구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1910년 삼덕동으로 이전했다. 처음에는 1만2천540㎡(3천800평) 규모였으나 1924년 증축을 통해 2만5천740㎡(7천800평)으로 확대됐다.지금의 삼덕동 지도로 보면 북쪽 끝에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동쪽으로는 진석타워, 서쪽 끝은 더플라워뷔페(구 일신학원), 경북대치과대학병원 등이 포함된 정도의 크기다.1919년 3월 독립만세 운동 이후 대구형무소에 5천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갇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대구ㆍ경북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했던 미국인 브루엔의 저서 ‘아 대구! 브루엔 선교사의 한국 생활 40년’에는 1919년 3월8일 대구독립만세운동 목격담 중 대구형무소의 당시 상황이 표시돼 있다.흑역사로 볼 수 있는 대구형무소가 성지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도 있다.지난달 대구 독립운동유적 90곳을 집대성 발표한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는 “대구형무소 터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순국한 핏빛의 유허(遺墟)”라고 밝혔다.사업회 측은 “대구형무소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의 장진홍 의사 등 무수한 독립투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순국 성지다. 그러나 지금 현장에는 안내판 하나 없다”고 지적했다.대구형무소 터를 알 수 있는 곳은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로비다.기념관은 2016년 12월 완공됐다. 중구청의 요청으로 1층에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던 이육사 시인의 얼굴과 상반신, 그의 시 ‘황혼’, 대구형무소 전경이 표현된 부조가 전시돼 있다. 옆에는 대구형무소 배치도도 그려져 있다.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이 있는 곳은 대구형무소 북쪽 끝이다. 대구형무소 배치도에 따르면 기념관은 과거 사형장 위치다.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은 교회 기념관 내부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1층에 커피숍이 있어 사람들은 이육사 부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이들조차도 이곳에 왜 이육사 부조가 전시돼 있는지 잘 모른다.삼덕교회 측은 현재 진행 중인 교회당 공사가 끝나면 기념관에 대구형무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전시실을 꾸미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삼덕교회 관계자는 “60주년 기념관 공사 당시 중구청으로부터 대구형무소 이야기는 들었으나 구청조차도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이육사 시인 부조만 전시하게 됐다”며 “앞으로 고증된 역사적 자료들이 수집된다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대구형무소와 관련한 전시공간 마련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그냥 지나친 음식점이 독립운동 유적?

이상정 장군은 대구가 낳은 독립지사지만 그에 대한 예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진은 대구 중구 서성로 1가에 있는 장군의 고택. 현재 음식점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에는 관련 콘텐츠가 전무해 근대문화골목을 방문한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오른쪽 끝부분 입간판 1개와 낡은 철제 안내판 1개가 설명의 전부다. 광복 73주년이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1945년 광복하기까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그로부터 73년이 지난 2018년 8월15일.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지사와 독립운동 관련 유적의 관리 실태는 참담하기만 하다. 독립운동정신 계승사업회가 발표한 ‘대구 독립운동 유적 90곳 집대성’에 따르면 90곳 중 30곳 정도가 ‘매우 부실한 상태’라고 조사됐다.유적에 안내판이 없는 것은 기본이며, 흔적조차 온데간데 없고 잊혀진 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곳도 있다.14일 오전 11시 대구 중구 서성로 1가. 계산성당에서 계산오거리 방향으로 20m 정도 가니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대구가 낳은 근대인물과 관련된 벽화가 나왔다. 벽화를 따라가니 곧이어 대구 대표 관광지인 근대골목 제2코스 근대문화골목이 전개된다. 근대문화골목에서는 민족시인 이상화 관련 벽화와 시인의 고택을 볼 수 있다. 또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사이로 조금 걷자 또 다른 고택이 나타났다. 흔히 볼 수 있는 기와집이고 평범한 음식점이었다. 근대문화골목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유적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상정 고택’.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사이에 있는 음식점이 이상정 고택이다.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에 따르면 이상정 장군은 이상화 시인의 맏형으로 1896년 6월 대구에서 출생했다. 일본국학원대학을 졸업한 이상정은 대구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서울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지하 조직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했다.이후 1923년 만주로 망명해 장개석(장제스) 부대의 중국 국민당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활동하게 된다.이상정 장군은 윤봉길 의사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김구, 김규식과 같은 독립지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40년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적극 돕기도 했다. 이상정 장군의 부인은 한국인 최초 여자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 지사다.지난해 4월 국가보훈처는 이상정 장군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그럼에도 근대문화골목에서 이상정 장군에 대한 예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라를 되찾고자 혼신을 다바쳐 독립운동을 펼쳤음에도 ‘푸대접’이 역력했다.근대문화골목 약도에 ‘이상정 장군 고택’이라는 안내 한 구절만 있을 뿐 관련 콘텐츠는 하나도 없었다.이상정 장군에 대한 설명은 고택 한쪽에 설치된 안내판 2개가 전부다. 그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으며 음식물 쓰레기통이 앞에 있어 눈길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오히려 이상정 장군 고택과 가까이 있는 두사충(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였다가 귀화한 무장)에 관한 벽화가 더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 보니 이 길을 걷는 방문객 대부분은 이상정 장군보다 두사충을 더 많이 아는 듯했다. 음식점을 자주 찾는 손님들도 이곳이 이상정 장군의 고택인 것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이대영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사무처장은 “대구의 독립운동가와 관련 유적은 대구의 정신이자 상징이지만 알려지지 않고 방치된 곳이 많다. 이런 데 만약 나라가 어려워진다면 누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겠느냐”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잊혀진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고 유적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