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민 작가 “일상이 머물렀던 장소, 그때의 감정 덧입혀 작품으로”

‘경기장’ ‘부지런한 작가.’ 지역에서는 신준민(35) 작가를 이렇게 부른다. 2015년 영남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후 끊임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 매년 개인전, 단체전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림의 소재는 대부분 ‘대구’다. 일상을 주제로 그리는 신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장소를 내면화한 풍경을 그린다. 그는 “장소들은 회화의 소재로서 인위적으로 선택되기보다는 일상 행위가 이뤄졌던 장소에서 우연히 유년의 기억을 상기하거나 문득 떠오른 감정이 환기되면서 회화에 중첩된다”고 소개했다. 자신의 시각망 속에 들어온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그 장소를 다르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림의 대상은 내가 가진 정서적 파장과 비슷한 에너지를 지닌 그 무엇들과의 만남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목적이 내재한 소유 혹은 채집된 대상이 아니다. 우연한 조우의 대상이기에 이것을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그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특성을 이끌어내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지역 유명 장소가 배경이었다. 첫 개인전 주제는 ‘달성공원’이었다. 이 개인전을 위해 그는 1년 동안 달성공원을 찾았다. 달성공원을 관찰하고 아름다운 동물원이기보다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밝고 경쾌한 동물원의 이미지보다는 텅 빈 공원의 모습과 쓸쓸한 정적이 담겨 있다. 신 작가는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을 때, 달성공원을 찾았다. 도심 속에 있는 달성공원은 자연의 순리대로 끊임없이 변모했다”며 “좁고 낙후된 우리(cage)와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은 야생성을 박탈당한 채 적막함과 한적함을 내뿜으며 전시된 자연으로 남아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시민운동장’이었다. 경기뿐만 아니라 그곳에 배치된 조형적인 요소와 상황에 따라 들려오는 풍경의 소리가 그를 매료시켰다고. 그는 “녹색 잔디 위에 그어진 흰 선은 광활하게 펼쳐진 그라운드에 긴장감을 부여했다. 관중석에 반복적으로 나열된 의자와 그물망은 경기장 내의 다양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며 “경기의 상황에 따라 열광하는 사람들의 함성만큼 쏟아져 내리는 공간 속 조명 빛의 작렬함이나 그에 비례해 엄습하는 텅 빈 야구장의 묵직한 공기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려오는 다양한 감각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곳 역시 1년 가까이 찾았다. 신 작가의 기억 속의 시민운동장은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사람이 없는 텅 빈 공간에 집중했다. 2016년부터 일상을 ‘모험’으로 설정해 새로운 에너지를 가진 풍경이나 대상을 그렸다. 특정한 파장을 가진 대상이나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이에 그 주제들은 더욱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주로 산책하던 유천교 일대부터 작업실 주변까지 발을 딛인 곳을 그렸다. “그리려고 보는 게 아니고 야구장 다음에 뭘 그릴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갑자기 소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특정 장소를 그리지 않고 일상 속에서 거닐면서 반복적으로 와닿는 소재를 그렸다.” 천상 화가를 꿈꿨을 것 같은 신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 꿈은 만화가였다. 고등학교 시절 만화동아리에서 만화를 그리다가 회화과에 가면 좀 더 풍성하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그는 “당시 좋아했던 만화가들이 대부분 회화과를 나왔다. 만화도 재밌었지만 미술은 아름답다는 느낌과 표현이 무한해 뭔가 열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며 “알 수 없는 유화의 맛인거 같기도 하고 재료에 매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신 작가는 그림의 매력으로 ‘정답이 없는 점’을 꼽았다. 그는 “연애와 그림이 비슷한 것 같다. 어떤 날은 정말 잘 그려지고 어떤 날은 좋았던 부분까지 싫어지는 경우가 있다”며 “캔버스와 밀당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부분이 매력적이다”고 했다. 지난해 연말에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도 했다. 범어아트스트리트에서 ‘범어길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다. 시각 분야 기획자로 참석한 신 작가는 시각 작가 7명과 협업해 연극 무대가 될 9개의 공간을 탄생시켰다. 그는 “새로운 도전이라서 바빴지만 작가, 배우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힘을 합쳐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끊임없이 달려온 그는 지금이 ‘변화의 기점’이라고 했다. 신 작가는 “졸업 후 6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표현하는 장소를 아무리 바꿔도 한두 작품에서 영혼 없이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며 “새로운 표현이 나오지 않고 스스로를 뛰어넘지 못하니깐 스스로 내실을 다지고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 후 줄곧 그림만을 그려왔던 그는 지난해부터는 모교에서 강의도 겸하고 있다. 어떤 화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신 작가는 “환경이 변해도 그 뿌리는 변하고 싶지 않다”며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범주 안에서 계속 확장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지금은 소외되더라도 본인을 더 들여다보고 내실을 다지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이다솜 연출가 “관객을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 연극의 묘미죠”

범어아트스트리트에서 펼쳐진 ‘도리언 그레이와 9개의 방’ 출연배우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연극을 지켜보는 모습. 지난해 12월21일 오후 6시, 그림, 조각, 설치미술 등 다채로운 예술 작품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 범어아트스트리트가 연극무대로 변하는 순간이다. 11개의 작품 스튜디오는 연극무대로 바뀌었다. 그 흔한 좌석도 없다. 관객들은 주인공 뒤를 따라다니면서 연극을 관람했다. 20명의 관객은 물론 오가는 시민들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는 대구에서는 첫선을 보인 ‘이동하는 연극’이다. 배우들의 퇴장도 없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무대 뒤는 당연히 없다. 암전도 없다. 관객들이 눈을 돌리며 배우들은 저마다 방법으로 연극무대를 지키고 있다.이다솜(29) 연출가의 작품이다. 아름다운 외모의 집착이 부른 비극을 드러낸 원작(도리언 그레이 초상)과 달리 연극 도리언 그레이와 9개의 방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예술가가 겪는 고통과 희생 등 비극적인 숙명을 보여줬다.“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외국에서는 이동하는 연극이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명하지 않아서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연극이 끝난 후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어요.”반응은 어땠을까? “감격스러워서 잠을 못 잤다”는 이 연출가의 말에 관객들의 반응을 실감할 수 있었다.이 연출가의 연극은 이색적이기로 유명하다. 배우 퇴장이 없고, 암전도 없다. 좌석이 없기도 하고, 런웨이식으로 의자를 배치하기도 한다. 참여하는 배우들은 퇴장이 없다는 것을 늘 각오한다.그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연극에 더 집중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늘 고민한다”고 했다. 이게 연극의 묘미란다.실험적인 도전은 처음이 아니다. 이 연출가는 지역의 유휴공간이자 사회문제로 떠오른 빈집을 무대로 연극 ‘빈집으로의 초대’를 기획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시선과 연출가 눈에 들어온 빈집에 대한 인상을 예술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집주인이 떠난 빈집을 지키는 성주신과 그를 데려가려는 죽음 사이의 조용한 전쟁을 보여주는 짧은 퍼포먼스 형태의 공연이다.“대명공연문화거리 인근에 빈집 거리를 초소형 극장으로 꾸미는 제2의 오프브로드웨이의 꿈을 가지게 됐어요. 빈집을 섭외하기 위해 대명3동 행정복지센터 마을계획단 회의에 매주 참석했습니다. 통장님, 상인분들 주민분들을 만나 빈집의 위치나 활용 계획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어요. 주민 극단 신뜨름 대표이자 통장이신 조상용 어르신을 설득해 집주인 동의하에 빈집을 섭외할 수 있었습니다.”빈집의 대문을 열었을 때 그 충격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마당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고양이 주검에 벌레들까지 거기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끊긴 전기와 수도…. 여기서 대체 어떤 공연을 할 수 있을까”했다고.이 연출가는 고민하다가 받았던 충격을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빈 집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알리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무너진 지붕에 비가 오는 날이면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또는 우산을 들고 공연을 지켜봐야 하기도 했다.“빈집 주변 이웃에서 공구와 청소도구, 그리고 전기도 빌려주셔서 조명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찾은 주민들도 무서운 빈집이 극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신기해하고 응원을 해줬어요. 마을계획단에 같이 참여했던 한 주민은 공연 관람 후 모두가 무관심했던 빈집 문제를 조명해줘 고맙다는 인사도 전해주셨어요.”연출가를 꿈꾸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그는 “미국 드라마 프렌즈 메이킹 필름을 우연히 봤는데 녹화현장에 관객석을 채워놓고 막을 올려 관객 반응이 좋으면 그대로 내보내고, 아니면 새롭게 고치기 위해 모든 스태프가 회의하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을 보고 저렇게 살면 원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대구콘서트하우스가 되기 전 시민회관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음악을 트는 일을 맡았다. 수많은 관객이 함께 우리가 준비한 공연에 반응하고 배우들도 나의 음향 큐사인에 따라 감정이 폭발할 때 또 마지막으로 커튼콜 때 박수와 환호소리를 들었을 때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마음이 먹먹할 만큼 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이었다”고 했다.이미 다음 공연도 기획하고 있다. 그는 “첫 빈집 공연이 끝난 후 남구 이천로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ㆍ김수용 감독)’ 영화 촬영지였던 빈 한옥과 연결됐다”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극장으로 고쳐 올해에도 새 연극을 선보일 것 같다”고 했다.현재 계명대학교 예술대학원 연극뮤지컬학과 과정 중인 그는 앞으로도 지역에서 활동하며 우리가 처한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하고 싶다고 했다.이 연출가는 “소재가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다”며 “그것이 연극이 가야 하는 길이다. 먼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마주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그저 피아노가 좋았어요…클래식 다양화 꿈꾸고 있죠”

앙상블 율트리오 “관객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연주를 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습니다.” 7살부터 피아노를 쳤던 최효진에게 피아노는 친구이며 삶의 전부였다. 5살부터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던 그에게 7살이 되면 피아노학원을 보내주겠다는 부모님의 말에 7살이 된 1월1일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고. 그리고 28년 후 피아니스트 최효진(35)이 됐다. “그저 피아노가 좋았어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중학교 진학 당시 부모님이 피아노를 그만 하고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지만 불과 몇 개 월 만에 다시 피아노를 찾았어요.” 피아노로 이루고 싶은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가 너무 좋아서 피아노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입시위주로 연습하기보다는 치고 싶은 곡을 쳤다. 김천예고에 진학 후 본격적으로 피아노에 집중했다. 그리고 참가하는 대회에서 잇따라 수상을 하며 최효진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계명대콩쿠르에서 수상하며 장학증서까지 받았다. 그리고 경희대학교 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피아노에 한번 미쳐보자는 생각에 독일 유학을 결정했다. 최씨는 “앙상블과 반주를 좋아해서 반주과로 진학을 할까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다”며 “김준차(현 서울챔버앙상블 지휘자) 선생님이 ‘피아노에 미쳐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그게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무작정 독일로 떠났다. 대학입학을 위해서는 어학증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어학을 공부하면서 독일 함부르크 음대에서 학생인 척 몰래 피아노 연습을 하기도 했다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스스로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6개월 후 독일 뤼백 국립음대에서 전문연주자과정에 합격했다.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에도 한 번에 합격했다. 유학 당시에도 이탈리아 바리에서 열린 ‘DON VINCENZO VITTI’ 콩쿠르 솔로 2등, 실내악(피아노 트리오) 1등을 하는 등 유럽에서 다양한 연주 활동을 하며 연주자로서 기량을 쌓았다. 2012년 귀국연주회 후 김준차 선생님이 협업을 제안해 서울챔버앙상블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피아니스트 최효진이 된 건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컸다”며 “선생님이 귀국연주회를 보시고 협업을 제안하셨다. 당시 선생님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너무 좋았다”고 했다. 2014년부터는 앙상블 율트리오(바이올린 김채인, 첼로 성수빈)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최씨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좋지만 앙상블은 피아노 혼자서 낼 수 없는 소리를 낸다는 매력이 있다”며 “또 각자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다”고 했다. 율트리오는 대구콘서트하우스 기획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바이올린ㆍ첼로ㆍ피아노 트리오의 연주를 기반으로 추리극과 영상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콘서트로 선보였다. 모차르트를 다룬 영화 중 최고라고 평가받는 ‘아마데우스’의 영화내용을 기본으로 시나리오를 재구성해 지역의 연극배우,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영상도 보여줘 더욱 쉽게 관객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클래식과 대중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했다. 최씨는 “최근 진행한 독주회에서 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협연 또는 피아노 솔로로 연주되는 곡을 피아노 솔로 버전에 클라리넷과 타악기를 더해 새롭게 편곡해 선보였더니 관객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며 “새로운 시도로 사람들이 클래식을 보다 쉽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했다. 내년 6월9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앙상블 공연이 예정돼 있다. 관객들에게 클래식을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1부는 익숙한 소품곡 위주로 구성했고 2부는 학구적인 곡들로 기획하고 있다고. 앞으로 대구에서 개인 독주회, 앙상블 등 다양한 공연으로 인사할 계획이라고. 후학 양성에도 공을 들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금 모교(김천예고)에서 실기강사를 하고 있다. 또 대구에서 개인 레슨도 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정형화된 음악보다 진짜 음악을 즐기고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작업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클래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싶다.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고 흥미로운 연주를 기획할 것”이라며 “그리고 생각보다 롱런하는 연주자가 많지 않은데, 꾸준히 지치지 않고 정진해서 오랫동안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김혜성 기자

성악가 전태현 “오늘만 노래하고 안 할 사람처럼 온힘 다해”

2015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바르톨로 역을 맡았다. “브라보!” 그의 노래가 끝나자 오디션장은 미국과 대만, 홍콩 출신 심사위원들의 환호와 찬사로 가득했다. 무대가 아닌 오디션장에서 박수가 터져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그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약장수의 노래’를 불렀다. 심사위원들에게는 약장수 둘카마라가 돼 약 대신 준비해 간 코카콜라 캔을 내밀었다. 두 번째 오페라 ‘카르멘’의 ‘투우사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꽃을 대신할 빨간펜을 심사위원 한 명에게 빌린 후 건넸다. 유쾌한 퍼포먼스는 그의 노래에 더욱 힘을 실었다. 지난 9월 세계 유명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이 오페라가수를 발굴하기 위해 한국에서 열린 나얍(NYIOPㆍNew York International Opera Audition Program)에서 전태현(38) 성악가는 실력을 발휘했고, 인정받았다. 미국 뉴욕시티오페라, 캐나다 밴쿠버오페라, 미국 스폴레토 페스티벌, 대만 가오슝 필하모닉, 서울시오페라단 등 세계 유수 극장 5곳에서 러브콜을 받은 것. 이들 극장 및 단체와의 계약은 스케줄 조정과 작품 협의를 통해 이르면 내년께 성사될 예정이다. 그는 “‘저 좀 봐주세요’라는 발악의 흔적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박수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오디션에서 수없이 떨어졌고, 거절을 많이 당해봐서 아직 얼떨떨하다”고 했다. 성악가의 꿈은 중학교 시절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재능을 눈여겨 본 음악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저는 노래를 잘하는 줄도 몰랐어요. 선생님께서는 2학년 형들이 아닌 저를 단장으로 세워주셨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공부도, 운동도 딱히 잘한다는 게 없었거든요. 무언가를 잘 한다고 인정 받아본 게 처음이었는데 그게 노래였던 거죠.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격려해주시며 예고 진학을 권하셨어요.” 그는 타고난 음색으로 고1 때 이미 베이스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경북예고 성악과로 진학 후 첫 시험인 예고 실기시험에서 남자 1등을 했다. ◆혹독했던 유학 시절 나얍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유학생활 당시 수백 번이 넘는 도전과 좌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할 무렵, 갑작스런 화재로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가세가 기운 가운데 아내와 함께 떠난 유학길이었기에 취업에도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원해주고 싶어도 지원해줄 수 없는 부모님의 심경은 오죽했겠어요. 강직하셨던 아버지가 어느날 국제전화를 걸어와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베를린 국립 음대에 합격해 다니면서도 극장 전속 가수가 되기 위해 수도없이 오디션을 봤지만 매번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탈락 이유를 알기위해 오디션에 들어갈 때마다 녹음을 했고, 어떤 것들이 문제였는지 파악하려 했다. 오페라 오디션을 통해 그는 노래가 아닌 연기를 곁들인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사, 도배, 운전, 가이드까지 닥치는대로 일해야 했죠. 둘째 아이가 생겼을 때는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 때문에 못할 게 없었고 두려울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졸업 연주 이틀 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서 600㎞ 떨어진 뒤셸도르프까지 갔다가 결국 졸업연주회 당일 무대에서 코피를 쏟기도 했다. 그는 “같은 실력이면 절대 될 수가 없고, 월등히 뛰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금 압박도 있었고, 다음달 집세 걱정을 안해 본 적이 없었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합격 소식을 듣고는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있으면서 오페라 무대에만 250여 회 올랐다. 공연을 위해 아침 내내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무대에 서야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초심 잃지 않으려 노력 한국 무대는 2015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하던 중 그 실력을 알아본 대구오페라하우스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면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바르톨로 박사 역으로 한국에서의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이어 서울시오페라단 30주년 기념 괴테 작품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 펠레스 역할을 맡으면서 한국 오페라 무대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메피스토 펠레스 역은 음역대를 아우를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연기도 잘해야 했다. 코믹함과 악랄한 모습 등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걸 표현해내는 역할이었다. 베이스가 맡을 수 있는 고난이도의 역할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러브콜이 이어지기 시작, 전국 각지를 누비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는 15일 성주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 무대와 21~22일 울산현대예술관 대공연장 국립오페라단 제작 오페라 ‘라보엠’ 공연, 내년 1월 중에는 대구시립합창단 공연 ‘천지창조’에서 협연자로 나설 예정이다. 전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경북예고, 서울예고 출강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성악을 시작 후 분한 역할만 40여 개가 넘지만 그의 신조는 변함없다.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큰 무대, 작은 무대를 떠나 중요하지 않은 무대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늘만 노래하고 안할 사람처럼 노래하는 게 제 신조에요. 사람이 변한다는 게 가장 무섭다고 하잖아요. 초심을 잃지 않기위해 노력할 거예요. 지켜봐주세요.”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천진난만 피리부는 도깨비…뮤지션 한형동 “슬픈 존재 아우르고 싶어”

“저는 언제나 우울하고 슬픈 존재였어요. 어떤 식으로 얘기를 풀어갈까 생각하던 와중에 도깨비가 떠올랐죠. 무대에서 만큼은 ‘귀신 같은 한맺힌 슬픈 존재를 아우르는 도깨비’가 되고 싶었어요. 사람들의 일그러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도깨비 말이에요.”뮤지션 한형동(33)씨는 ‘피리깨비’라는 예명으로 그룹 ‘구담’, ‘브릴리언트’, ‘데우스’ 등에 속해 향피리, 아일랜드 관악기 캘틱 휘슬,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몽골리안 흐미 등 전세계의 관악기를 연주하고 있다.‘슬픔이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도깨비’라는 가면을 쓰고자 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은 동화 속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천진하게 피리부는 도깨비’의 모습이었다. 이래나저래나 ‘피리깨비’다.그가 음악인의 삶을 살아야겠다 결심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관악기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향피리를 불기 시작했고 그 매력에 매료됐다. 교사셨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예고 진학을 준비했다.“경북예고에 진학해 전세계의 음악단체가 오르는 무대를 접하면서 시야를 넓혔던 것 같아요. 세상에 다른 음악, 내가 몰랐던 음악이 많다는 것을 알았죠. 전세계 전통악기로 연주한 음악,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음악 안에서 악기들의 기법과 연주를 할 때 연주법 등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특히 관악기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종류가 많으면서도 크기가 작아 들고 다니기 편하고 악기별로 소리내는 방법이 다르다보니 그 원리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사 모으기도 하면서 파고들었다. 단순히 좋아 시작한 음악이었지만 그는 음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어린시절 좋지 못했던 가정환경으로 마음에 생긴 생채기를 갖고 있었던 저처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치유해주고 싶었어요. 음악을 통해 ‘그 아픔을 나도 알고 있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음악을 만들고 싶었고 지금은 고민하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요.”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둘러 금과 은을 만들어 내듯 진정 ‘피리깨비’가 돼 음악으로 사람들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던 것.국악음악치료학과를 졸업하고 음악치료사 자격증인 임상음악재활전문가 자격을 취득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악기를 수리하고, 다시 만들어보고 꾸미는 것도 다양한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특성을 살려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였다.한씨는 “피리 두개 세개를 붙여보기도 하면서 이 선율이 이 음악에 맞을까. 또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며 악기를 만지고 있다. 심리가 어떻게 변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과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악기를 수리하고 매만졌다”고 전했다.전세계 음악을 퓨전으로 작업해 연주하고 있는 그의 음악 철학은 분명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국악을 베이스로 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 미국 등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국악을 통해 한국 전통 알리기에도 한 몫하고 있다.그는 “외국은 특히 우리나라 전통 오리지널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 제대로된 전통 연주를 보여주면 감동해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다. 한 달 전 쯤 다녀온 미국 공연에서도 한국 전통으로만 보여달라는 요청이 있어 장구, 태평소, 향피리, 가야금 등 민요와 국악 등 전통음악만 연주하고 왔다”고 말했다.현재 그는 계명문화대, 학생문화센터 영재원에 출강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힘겨워도 버텨야 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후학 양성도 좋지만 지쳐 쓰러지더라도 무대에 있고 싶어요. 그리고 음악을 듣는 분들이 언제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전에 없던 무언가, 그게 뭐가 될지 모르기에 계속해서 고민하고 나아갈 거예요.”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배우 박세기 “트루먼쇼 같은 내 인생, 사람이 주체되는 연극 꿈꾸죠”

올해로 13년째 연극 무대에 서고 있는 배우 박세기(35)씨는 오늘날 자신이 있기까지 영화 ‘트루먼쇼’와 같았다고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기이하리만큼 펼쳐지고 있어서다.내성적인 성격에 영화나 연극 등 연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 연기는 불현듯 찾아왔다. 군대시절 연극하다 온 후임병을 제대 직전 만나면서다.“야간 근무 중 그 친구에게 연기를 해보라고 했는데, 어둠 속 연기를 하는 그의 눈빛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때 나도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하니 그 친구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집을 전해주더라구요. 이후 말년 휴가 나왔을 때도 서점에 가서 연극 서적을 찾아볼 정도로 순식간에 매료됐던 것 같아요.”제대 후 연극을 하기 위해 막연히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찾아간 곳이 극단 고도였다.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시작했던 것 같다. 아동극 무대를 시작으로 1년 뒤 성인극 무대에 섰다”고 떠올렸다.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2008년 대구연극제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2009년 전국연극제 연기상 수상으로 이어졌다.대중적으로 누구나 하는 걸 싫어했기에 연극을 하면서도 어떤 역할이라도 개성있는 캐릭터를 입혀냈다.대구연극제 신인연기상을 안겨준 연극 ‘발자국 안에서’에서 노인 역을 비롯해 ‘녹차 정원’에서는 장애인 역할, ‘아일랜드’의 ‘흑인죄수’ 역할 등에는 그만이 낼 수 있는 색깔이 묻어 있었다.이밖에도 뇌세포, 늑대인간, 게이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냈다.박씨는 “흔한 역이라도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이 하는 것, 대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지어 극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표현하는 방식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을 하고 다르게 연기를 했다”고 전했다.2010년 더 넓은 연극 무대를 꿈꾸며 서울로 향했다.그는 “연극을 전공한 게 아니기에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고, 다양한 연출과 작품을 만나고 싶어 고민하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얼음조각 일을 하셨던 외삼촌의 일을 도우면서 살 곳을 마련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여러 오디션을 보고 극단에도 속해 활동했다. 힘들긴 했지만 다양하게 많은 것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수도 없이 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음악하는 사람도, 미술하는 사람도, 무용하는 사람도 다 주체가 돼서 하는데, 왜 연극은 연극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항상 오디션을 봐야 하고, 누군가에 의해 쓰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을 때 나라는 사람이 주체가 돼서 연극을 해볼 순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그저 1인극이 아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쉽게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장소나 무대 등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서든 나의 생각이나 나의 예술성을 보여줄 수 없을까 고민 끝에 퍼포먼스나 미술적인 콘셉트를 이용해 찾거나 만들어 나갔다.지난해 대구문화재단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해서는 미술가와 무용가 등 다른 장르의 작가들과 협업하기도 했다. 단순히 장르끼리의 콜라보에서 벗어나 미술가가 연극을 해보고, 연극배우가 무용을 해보고, 무용가가 미술을 해보는 방식이다.그는 이를 ‘독립공연예술’이라 명명했다. 연극을 베이스로 하지만 최대한 연극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독립공연예술은 자신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칭찬 보다는 ‘그게 연극이냐’고 우려의 소리를 많이 들어요. 제게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정체성이 없는게 제 정체성인 것 같아요’라고 답하곤 하죠.”최근에는 인형극에도 뛰어들었다. 실직자가 된 가장의 무게를 그린 인형극 ‘구두의 요정’ 연출을 맡아 서울 가리봉동에서 열린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해 공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그의 최종 목표는 하나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이라고 했다.“‘나만의 방식, 연극은 이렇다, 예술은 이렇다’라는 걸 확립시킬 것이고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요. 새로운 사람들, 미술, 음악 할 것 없이 새로운 장르의 사람들을 만나고 작품을 접하면서 계속 공부해 나가고 싶어요.”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심윤 작가 “그저 그리고 싶어 시작…큰 그림 압도감에 매료됐죠”

심윤 작가의 작업 모습. 벽면을 가득 채운 그의 작품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200호 변형 사이즈 3개를 합쳐놓은 거대한 크기뿐 아니라 작품에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섬세한 표현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삼키듯 압도한다. 그 섬세함은 질감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진을 인화해 걸어 놓은 듯 뚜렷하면서도 희뿌연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어둡고 짙은 색감은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더욱 크고 선명하게 만들어낸다. 심윤(39)작가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게 없다면 작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고 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이미지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 색도 걷어냈다. 자칫 색이 이미지를 산만하게 할 수 있어서다”고 전했다. 줄곧 대작들을 그려온 이유에 대해서는 큰 그림이 주는 압도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큰 그림을 보고 매료돼 큰 그림 작업을 시도했던 것 같다. 작업실 여건만 된다면 더 큰 그림도 그리고 싶다. 작품 수가 늘어나면서 보관하다보니 작업 공간이 좁아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말하며 웃었다. 심 작가는 남들보다 늦다면 늦은 시기,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과는 거리가 먼 이과대학 화학과에 진학했어요.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학사경고를 두 번 맞고 제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그림에 대한 목마름은 이어졌고 군 제대 후 재수를 결심하고 미술학원에 다니며 미대 입학을 준비했다. 묘사하고 표현하는 데 흥미를 가졌기에 영남대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학부 졸업 후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미술 공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동대학교 대학원 서양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심 작가는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 영화나, 다큐를 보기 좋아한다. 보다가 사로잡는 이미지들을 캡쳐해놓고 작품에 활용한다. 또 직접 사진으로 찍어 두는 등 수집해놓은 이미지를 전시에 따라 작품화한다. 유화 물감을 희석해 도료를 넣고 그리는데 주로 붓으로 그림을 그린 후 뿌연 효과와 함께 묘사가 가능한 에어브러쉬로 마무리한다. 붓터치 흔적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말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해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창 개인전 ‘리틀 보이’를 준비 중이다. 다음달 4일부터 열흘간 대구예술발전소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단어의 이중성에 대한 신작 10여 점으로 구성된다. 전시명 ‘리틀 보이’는 1954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인류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에서 따온 것으로, 군인이나 무기 등 전쟁의 이미지를 작업화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다음달 21일부터는 대구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청년미술프로젝트 ‘YAP’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의 미술 공부를 향한 열정은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다. 왕성한 작품 활동뿐 아니라 2013년 경북예고 디자인과 출강을 시작으로 영남대학교 회화과에 출강해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는 것. 심윤 작가는 “여러 기법을 통해 나만의 고유성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나가는 작업이 무게감 있는 작품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속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정진경 작가 “판화의 묘한 매력 ‘우연성’에 푹 빠졌죠”

정진경 작가의 작품활동 모습 일자리를 찾아, 꿈을 찾아 수도권으로 향하는 지역 청년들이 급증하는 가운데 꿈을 펼치고자 고향을 찾은 청년작가가 있다. 홍익대에서 판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일반대학원 판화과 과정을 마친 정진경(37) 작가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이후 10년간 서울에서 작가활동을 하다가 2016년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10월부터는 대구문화재단 입주작가로 선발돼 범어아트스트리트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저 미술이 좋아 미술을 공부하게 됐다는 정 작가가 미술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동네 화실에 다니면서다. 하지만 넉넉치않은 형편 등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열의로 가득했던 그는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다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4남매가 모두 미술에 소질을 보였지만 그 중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1남3녀 중 막내인 정 작가뿐인 것도 이 때문이다. “남들보다 늦었다는 생각은 접어둔 채 미대 진학을 목표로 실력을 쌓아나갔어요.”대학 1학년, 드로잉, 조소, 동양화 등과 함께 판화도 재미있는 미술의 한 분야로 생각하고 거부감 없이 배우고 접했다. 그는 “판화는 테크닉적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이 있다 보니 처음엔 어렵기도 했지만,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판화는 의도한 대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유화나 아크릴화와 비교하면 수정도 쉽지 않고, 준비과정과 자료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100% 나오기란 힘들다는 사실을 확실히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무수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연성이라는 판화가 가진 매력에 이끌렸다고 했다. 정 작가는 “우연성이 판화의 매력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판화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다는 것도 판화의 매력이지만 판화의 묘한 매력은 우연성에서 나온다. 판화를 하시는 분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했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노동이 들어가게 되고, 결과를 얻기까지 그 과정이 너무 길다는 점이 판화의 어려운 점으로 꼽히지만 정 작가는 이 점을 오히려 활용해 확장을 시키려고 하는 편이라고 했다. 판화로 100장, 200장, 많게는 1천 장 이상 만들어 설치 작품을 구성한다든지 디스플레이를 다르게 해 대형 회화작품을 만드는 등 그의 작품에는 판화의 반복 요소들이 곳곳에 들어간다. 정 작가는 판화뿐 아니라 드로잉, 회화, 설치 등 다양한 표현으로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판화의 요소를 활용한 현대미술 회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한 가지 방법만 고수하기보다 표현하고 싶은 느낌에 따라 혼합해 작업하는 편이에요. 일상의 사물을 주로 표현하기 위해 연필이나 펜, 아크릴물감을 활용, 작은 무늬나 모양의 변화, 선 같은 것을 디테일하게 표현해내고자 하는 편이죠. 멀리서 보면 하나의 이미지이고 색이지만 들여다보면 미세한 텍스쳐가 느껴질 수 있도록 해요.”정 작가는 주로 주변에서 만나는 것을 작품 소재로 삼는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표현하고 무엇을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주변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을 소재로 삼았다. 작업초기 그릇이나 주방기구 등 사물 이미지가 많이 들어간 것도 이 때문”이라며 “이후 메마르고 낡은 이미지를 재구성, 역시 주변의 것을 담아내고 있다. 투명하게 색을 썼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들어 색이 많이 선명해지긴 했다. 톤 다운된 원색, 채도가 떨어진 색감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대학 졸업 후 10년을 서울ㆍ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한 그는 이달 말까지 아트마켓, 유니온아트페어, 파주에서의 전시를 진행중이다. 대구에서의 첫 개인전은 내년 봉산문화회관에서 판화를 활용한 설치작품으로 지역민과 대면하게 된다. 그는 지역에서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힘쓸 계획이다. 정진경 작가는 “판화를 조금만 알아도 재밌게 할 수 있지만 접할 기회가 흔치 않다보니 판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대구에도 판화의 장점을 이용해 저렴한 가격으로 재밌있게 체험 할 수 있는 공방이 있다.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사람들이 판화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기획해보고 싶다”고 전했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자신보다 타인 생각…삶에서 놓치는 부분에 대해 전하고파”

‘노마디즘’.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노마드’에서 시작된 용어로,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한다. 김현준(32) 작가는 ‘노마디즘’을 지향한다고 했다. 특정한 가치나 방식에 얽매이지 않은 채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며 새로운 자아를 찾아나선다. 그에게서 색다른 느낌의 작품이 계속해서 나오는 비결이다. 물론 작품간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는 존재한다. 보는 이의 마음 상태나 느낌에 따라 멈춘 것 같으면서도 곧 움직일 것만 같은 동작이나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울고 있는 것 같은 복잡미묘한 표정 등 작품간 서로 같은 듯 다른, 다르면서도 닮아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일 터. “유목적 사고로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가는 것을 중요시하는 편이에요. 열린 사고라도 일말의 틀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목 생활에서도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거나 편평한 땅이어야 한다거나 먹을거리가 있는 곳이라야 하잖아요. 제 작업에서도 저만의 요소는 있죠.”지난 7일부터 ‘2018강정대구현대미술제’에서 선보이고 있는 최신작 ‘나를 너라고 부르는 너는 누구니?’에도 그만의 방식이 깃들어 있다. 김현준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삶에서 놓치는 무언가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고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그들에게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어요.”그가 조각가의 삶을 살기까지는 고등학교 2학년, 미대 진학 준비에 늦다면 늦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 그의 미적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의 권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하신 어머니께서는 데생 등 미술의 기초부터 차근히 접하도록 하셨다. 기초를 다져놔야 응용할 수 있고 색을 쓰더라도 감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고 떠올렸다. 꼬박 1년을 미술 기초 공부에 매진하고서야 조소를 전공하기로 했다. 다른 장르에 비해 비교적 활동적인 조소 작업이 흥미로웠고 적성에도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동대학교 대학원(조소 전공)을 졸업했다. “당시 대학원 진학은 과연 내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도전과도 같았죠. 끊임없이 길을 찾아 고민했고 철저히 작품 내면을 보고자 노력했어요. 몸부림 치고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 맞춰가다 보니 예술을 하고 싶다는 절실함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자연스럽게 조각가의 길로 이어지면서 김천예고와 모교인 예술대학 조소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후학 양성은 물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목조를 택한 것도 뒤틀림이나 터짐 등으로 작업하기 까다로운 소재로 꼽히지만, 나무가 인간사를 담기에 가까운 소재라고 생각해서였다. “나무에는 생명을 다시 재생시키는 힘이 있어요. 섬유질이라서 결이 있고 잘라놔도 계속 숨을 쉬어요. 이끼도 자랄 수 있죠. 나무는 생명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소재라고 생각해요.”작품 아이디어는 주로 책을 읽거나 대화를 하면서, 또 티비를 보면서 얻는 편이다. 그렇다고 문득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 감정 그대로를 무작정 작업에 옮기지는 않는다. 김 작가는 “그 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번뜩이는 순간을 곱씹고, 다듬고 다듬어 작품화하고자 한다. 의미 자체가 달라져 모양이 바뀔 수도, 또 확대되고 축소될 수도 있어서다. 철학은 예술처럼 하고 예술은 철학처럼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때로는 너무 쉽게 예술화하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고 했다. 보는 순간 마음에 감동이 일어 먹먹함을 전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굳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더라도 제 작품을 보고 먹먹한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러한 감정을 느꼈다는 건 내가 만든 작품이 그 사람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졌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작품을 보고 그대로 주저앉아 눈물짓는 사람을 만난다면 조용히 자리를 내어주고 작품과 온전히 교감할 수 있도록 둘 것 같아요.”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한 권의 책이 된 사람의 이야기 함께 나눠요”

박성익 아울러 대표 활동 모습. “대구는 ‘덕후의 도시’에요. 한 번 신뢰를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신뢰가 형성되면 굉장히 오래 가죠.”아울러 박성익(34) 대표는 “본질적이고, 철학적이면서 인권적인 활동을 하는 대표적 사례를 보면 대구에서 주로 시작이 되더라”며 “새터민, 다문화, 쪽방촌 등 약자나 인권 쪽은 전국 최강으로 대구는 인권감수성이 굉장히 강한 도시다. 이러한 것은 지역 정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정서 덕에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발판이 됐고, 지금의 ‘아울러’를 있게 했다”고 말했다. 2011년 4월1일 창간 이후 전국에서는 독보적으로, 사람책 교육 서비스를 운영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한 아울러는 개개인의 ‘특별한’ 경험담을 공유하는 노하우를 전하고,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이 돼,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박 대표가 2009년 유럽여행 중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라는 사람책 관련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이 아울러의 시작이었다. 사람도서관은 덴마크 사회활동가 ‘로니 에버겔’이 2000년 시작한 운동으로, ‘무지로 인해 편견이 발생한다’는 생각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장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사람도서관은 10명 내외의 소수 인원이 둘러앉아 사람책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아울러는 ‘심층 인터뷰’를 통해 사람책을 제작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대학생이나 주부, 할머니 할아버지, 청소년 등 강연자로서 익숙하지 않거나 숙달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착안, 인터뷰를 통해 정리를 도와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발표자료를 직접 만들어 주고 있다. “성공의 경험 없이 타인 앞에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강박 아닌 강박이 있는 것을 보고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 사람의 어떤 부분을 정리하면 남들 앞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맡대니 누구나 다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더라구요. 그저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던 거죠.”이러한 만남을 통해 완성된 사람책은 현재 350권에 달한다. 매년 평균 50∼60명이 사람책으로 제작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한 권의 사람책이 나오기까지 2∼3차례의 인터뷰를 거쳐 3∼4주가 걸린다. 사람도서관과 강연의 차이점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 있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관계가 좋은가’, ‘나는 어떤 순간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가’ 등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전했다. 박 대표는 아울러의 지향 가치는 ‘회복탄력성’이라고 말한다. “회복탄력성이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인터뷰이고 그 인터뷰를 공유하는 것이 사람도서관인 셈이에요. 회복탄력성은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점프업’하는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극복하고 성장해나갔던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인터뷰의 목적인 거죠. 성장했던 원동력을 찾아내니까 오히려 고통이 자기를 성장시키게 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라는 결론이 도출되고,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고 회복탄력성을 발견해내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2014년부터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람책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칠곡, 고령, 경주 등의 마을을 찾아 주민이 직접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타인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람책이 된 마을 주민들은 마을 해설사가 돼 마을 이야기뿐 아니라 유년시절의 경험이나 추억, 가족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웃의 삶을 돌아보며 그들을 더욱 이해하고, 또 격려하고 응원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2015년부터는 매주 1회 대구한의대학교에서 특강 ‘DHU 사람도서관’을 맡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진행 중이다. “대학생들은 인근 중ㆍ고등학교를 찾아 대학 생활이나 전공 이야기, 부모님과의 관계 등을 전하도록 해요. 재밌는 것은 올해는 사람책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던 여고생이 같은 대학에 들어와서 자기가 사람책이 돼서 들어온 사례도 있었죠.”아울러를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에 대해서는 지적재산권 문제를 꼽았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지식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 가장 힘들었다. 팀 또는 단체의 지식재산권에 대한 인정, 배려가 부족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들을 듣고 정리하고 발굴해내고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이 관건”이라며 “그러한 노하우를 국제간 교류를 통해 쌓아가고 싶다. 실제 그러한 계획들을 세워나가고 있다. 국가의 비영리 단체와 아울러가 서로가 가진 노하우나 서비스를 교류하고 협력해 다른 나라에도 사람도서관이 생겨날 수 있도록 기술지원을 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어 “혈연, 지연, 학연 관계가 아니면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만들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사람책을 통해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끈을 만들어주고 싶다. 아울러 사람도서관은 매월 셋째 주 화요일 열리고 있다. 새로운 사람책을 발굴하거나 기존 사람책 분들에게 공유의 기회를 주고 있으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문의: 053-953-0401.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박성익 아울러 대표는 “아울러는 회복탄력성이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인터뷰이고 그 인터뷰를 공유하는 것이 사람도서관인 셈이다. 회복탄력성은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점프업’하는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극복하고 성장해나갔던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인터뷰의 목적이다”고 전했다.

“듣는 이와 연주자가 소통하는 재밌는 국악 만들어요”

이어랑 단체 사진.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소통이에요.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얼마나 편안한 음악을 즐겁게 연주하느냐가 가장 중요하죠. 여러 사람이 모여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기까지 합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음악을 할 수가 없어요. 개개인이 모여 이어랑이 만들어졌고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되면서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퓨전국악단체 이어랑 이자영(32) 대표는 ‘이어랑’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영어로 귀를 뜻하는 이어(Ear)와 ‘누구누구와’라는 함축적 의미의 ‘랑’이 결합하면서 명명된 ‘이어랑’에는 듣는이의 귀와 함께 편안한 음악을 연주한다는 뜻이 담겼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피리, 드럼, 신디, 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퓨전국악단체 이어랑은 올해로 창립 9주년을 맞았다. 올해는 대구시 문화교류 사업 파트너로서 베트남 다낭과 대만 가오슝에서 해외교류 공연에도 참여하는가 하면 오는 10월에는 요르단 대사관 초청으로 단독 콘서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하루에만 두세 개씩 공연하는 등 연간 300회 이상 공연을 소화하며 인정받는 기업형 퓨전국악단체가 되기까지는 이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술고등학교와 예술대학에 진학해 판소리를 전공했지만 어떤 연주를 해야하는지 방향을 잡을 순 없었던 것에 갈증을 느끼고 2006년 예고 동창생 3명과 함께 팀을 꾸린 것이 ‘이어랑’의 시작이었다. ‘오브리’라는 작은 공연에서 시작해 서울 유명 팀의 공연을 보고 따라 하는 모창밴드로 활동했다. 이후 2009년 1월1일로 창단 연일로 정하고 ‘이어랑’을 결성,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왔다. 이 대표는 “현재는 대구시 전문단체로 인정을 받으며 내년에는 ‘사단법인 이어랑’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지만 결성 초에만 해도 회의하고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10∼15만 원짜리 지하 셋 방을 빌려야 했다. 단원들이 생기고, 공연을 하면서 수익이 창출되면서 직접 곡을 만들 수 있었다”고 전했다. ‘퓨전국악’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저 쉽고 재밌게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 “하다보니 ‘퓨전’이라는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듣는 이마다 추구하는 음악적인 스타일이 다르고, 무엇인가 퓨전이라는 것을 접목시키다보니 길을 잡는 것이 어려워 아직도 공부 하는 중이에요.”20대 중후반 30대 초반 연령대로 구성된 이어랑에는 10명 가운데 여성 단원이 6명으로, 그 중 4명이 이 대표를 비롯해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경험한 워킹맘이다. 이 대표는 일곱살과 여덟살 아이 둘을 뒀다. 이어랑이 국악 인형극을 만들게 된 것도 지역에는 아이들과 함께 즐길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팀 내에서 공감을 얻으면서였다. 이 대표는 “이어랑의 가장 큰 장점은 자체 공연 프로그램을 연출한다는 것과 이어랑 내에서 콘셉과 조명, 음량,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 가능하다는 점이다. 무료로 공연을 하더라도 알찬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인형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싶었다. 특히 문화소외계층의 아이들을 위한 공연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뚜렷하다. 2년 전부터 4대 보험 적용과 퇴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지만 이어랑이 더욱 안정적으로 자리잡아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 즉 예술인들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면서 안정된 보장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아직도 일용직 공연자로 살면서 대중없이, 느닷없이 10만∼20만 원을 받고 공연에 섭외되는 일들이 많아요. 예술인들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지원해주는 동시에 음악적 기량을 펼치고 계속해서 음악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더 성장해 더 많은 인원을 발굴하고, 경상도의 국악 시장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활동의 장을 여는 데 앞장서고 싶어요.” 그는 국악의 문화가 폭넓게 여러 곳에서 자리매김하고 국악인들이 강사가 돼 국악을 가르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음악대학원에 다니는 등 학업도 병행하고 있다. 이 대표는 “대구가 교육적으로 국악이 불모지라는 말이 있다. 내년쯤엔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음악적인 기술과 기반으로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국악아카데미를 운영할 계획이다. 훗날에는 세계적인 월드뮤직을 할 수 있는 이어랑이 되고 싶다. 이어랑의 성향과 색깔을 담은 편곡을 통해 세계의 전통음악을 국악기로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전시 문턱 낮춰 모두가 즐거운 관람, 기획자의 역할이죠”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실력을 쌓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에겐 사회적 출세나 명예, 지위보다 자신의 재능과 적성, 꿈이 먼저다. 지역 내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20∼40대 초반 ‘문화청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응원하고자 한다. 전시기획자 겸 큐레이터 김다은(28ㆍ여)씨는 전시기획에 앞서 ‘모두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고 했다.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이 그림을 보고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관람객들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작품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해 사람들이 일상에서 영화를 보러 가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처럼 전시도 자연스럽게 즐기는 문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전시장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야말로 전시기획자의 역할인 것 같아요.” 지난해 그가 처음으로 기획한 전시 ‘스위트 하우스’(Sweet House)도 이같은 이유에서 나왔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새로운 개념의 전시로, ‘스위트 하우스’전은 상상 속에서나 있던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빵, 초코릿, 쿠키 등 여러 가지 디저트와 관련된 재료를 사용한 작품으로 꾸며졌다. 전시는 디저트의 작품화를 통해 재탄생의 의미와 새로운 의미, 예술적 가치를 높인 전시로 반향을 일으켰다. 김씨가 전시기획 일을 시작한 것은 2016년 7월부터 대구현대미술가협회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면서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 미술을 준비하는 등 미술을 꾸준히 공부했기에 전시기획 일을 쉽게 배우고, 적응할 수 있었다. “전시기획 일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접하게 됐어요. 대학시절부터 가죽 공예와 재봉을 배워 직접 디자인한 가방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하다가 잠시 일을 쉬던 중 시작한 것이 대구현대미술가협회 스페이스129에서의 큐레이터 일이었죠.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좋아하고 하고싶은 일’이 될 줄 몰랐어요. 전시기획 일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배우다 보니 기획하는 것도, 작가님들과의 만남도 너무 좋았어요.” 본격적으로 전시기획 일을 해보고자 지난해 9월 현대미술가협회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대구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차세대 문화기획자 양성과정을 이수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김씨는 전시기획자로서 전시 주제 선정 및 작가 섭외, 전시 서문 작성, 전시 구상, 작품 설명, 전시 홍보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전시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로 첫 단계인 ‘주제 선정’을 꼽는다.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느냐에 따라 작가, 작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단계인 만큼 주제 선정이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작품들이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작품을 염두에 두고 주제를 정하기도 하죠. 전시 주제에 따라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수도 달라지니 신중할 수 밖에 없어요.” 지역에서 또래들과 비교하면 먼저 전시기획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그는 대구현대미술가협회에서의 실전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현대미술가협회에서 일을 하면서 단시간에 전시기획 일을 배운 것은 물론 협회이다 보니 갤러리에 비해 지역 중견작가들과의 만남이 자연스레 이뤄지면서 친분도 쌓을 수 있었던 것. 만 3년차인 그는 다양한 경험과 경력, 배움을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올해 초부터는 대구문화재단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 프로그램 첫 큐레이터로 발탁돼 활동하고 있는가하면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에서 학업도 병행하고 있다. 김씨는 “미술에 대한 배움, 경험이 있어야 관람객을 배려하면서 깊이있는 전시를 기획할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시도를 해야 하는 때이기에 졸업 후에는 사회학과 계열로 진학해 공부할 계획이다. 특성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울 수 있고 색다른 전시를 기획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모토대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음달에는 가창창작스튜디오 스페이스 가창에서 아이와 엄마를 대상으로 한 기획전을 앞두고 있다.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기존의 전시에서 벗어나 작품을 직접 만져보고 듣고, 느끼며 작품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감미술관을 기획한 것. 작가들에게도 특별히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운 작품 작업을 요청해 놓은 상태다. “아이들 기준에서 봤을 때 전시가 재미있으면 어른들도 재미있어 할 것이라 생각해요. 제 손에서 새로운 전시가 탄생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람객들이 재미를 느낄 때 사명감이랄까, 보람을 많이 느껴요. 앞으로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어요.”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