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에너지…연극이 좋아요”

‘내복’, ‘마담’, ‘유리’, ‘평강공주’, ‘민메이’, ‘박소영’, ‘여자’, ‘김인영’, ‘정윤’, ‘어린영자’, ‘엘레나’, ‘은실’, ‘점례’, ‘수림’, ‘늙은여자’, ‘시벨베인’….배우 권민희(34)가 그동안 맡은 역할들이다. 그동안 했던 작품만 해도 40여 편에 이른다. 연극배우로 데뷔한 지 어언 13년. 중견배우가 되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그가 연극과 인연을 맺은 건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작정 연기가 배우고 싶어서 연극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고.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에 중학교 때는 동아리 문조차 두드리지 못했다.그게 연극과의 첫 인연이다. 무대 위에서 권민희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무대에서 내적 에너지를 표출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다.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는 심했다. ‘비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년간의 끈질긴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냈다.“‘잠깐 하다 말겠지’라는 생각으로 허락을 하셨던 거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연극을 할 거라고 생각도 못하셨을 거에요.”그렇게 계명대학교 연극예술과 연극뮤지컬전공에 입학했다. 공연에 미쳐있었던 시기였다.“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저 공연하는 게 재미있어서 수업은 빠져도 공연 연습할 때는 빠지지 않았죠. 교수님이 넌 야간학생이냐고 했을 정도였어요.”대학교 졸업 후 2008년 극단 동성로에 들어갔다. 극단 동성로는 그에게 의미가 큰 곳이다. 학생이 아니 프로로 첫 무대에 올랐던 곳이 극단 동성로였기 때문이다.그는 배우 최정운에 대해서 언급했다. 최정운은 2014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로 사망한 배우다. 권민희의 스승이었다고.“고등학교때 저에게 연기를 가르쳐줬던 선생님이셨어요. 대학교때 다시 만나면서 인연이 이어졌죠. 저에게는 스승님이자 멘토였어요. 힘든일이 있으면 항상 선생님을 생각해요. 선생님이었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말이죠.”권민희는 최종운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공부를 다시 하게 된 배경 역시 선생님도 끊임없이 공부했기 때문이라고.그가 다시 펜을 잡은 건 2013년도였다. 2008년 대학교 졸업 후 공연에만 몰두했다.“5년 넘게 공연에만 몰두하니 뭔가 고갈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공부해서 채워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해 동대학 석사과정을 시작했어요.”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연극학과 박사과정도 수료했다.“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세계적으로 공연 스타일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요. 해외 작품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관련 내용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는 그동안 작업했던 연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냐 아저씨’와 ‘기억해줘’를 꼽았다.바냐 아저씨는 권민희가 2014년과 2015년 두 번에 걸쳐서 했던 작품이다. 그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작가를 원래 너무 좋아했어요. 또 연기했던 엘레나 역이 너무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라며 “모든 남자들이 이 여자를 사모하지만 늙은 남편과 결혼한 여자, 무료해하고 따분하고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상황이 많이 공감됐어요. 첫 공연 이후 많이 아쉬웠는데 또다시 기회가 와서 기억에 오래 남는 작품이 됐어요”라고 했다. 이어 “기억해줘 작품은 서울 대학로에서 진행했던 창작 연극이었어요. 거기에서 주인공이 아닌 감초 역할을 했었는데 평소 해보지 않았던 역할이어서 새롭고 즐거웠던 기억이 많아요”라고 덧붙였다.그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다고 했다. 권민희는 “아직 도전을 못 해본 게 너무 많아요. 연출도 안 해봤고 극작도 아직 못 해봤어요. 좋은 연극을 만들고 싶다는 꿈도 있어요”라며 “공부를 하고 있으니깐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학자로서 책도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라고 했다.“연극이 너무 좋아요. 무조건 배우를 해야겠다가 아니라 하다 보니깐 너무 좋아져 버렸어요. 그래서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내가 배운 걸 대구에서 많이 나누고 싶어요. 대구 연극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해요.”앞으로도 다양한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는 배우 권민희는 현재 범어스트리트에서 진행 중인 연극 더 트레블에 출연 중이다. 또 다음달 서울 대학로에서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심장소리 닮아 끌려 늘 창작하는 예술가 되고파”

향토문화청년(19)타악기 연주자 이상준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 연주자를 보고 클래식 초보자들은 ‘나도 치겠다’는 생각을 쉽게 가진다. 다른 악기에 비해 연주 시간이 짧은 데다 주법도 간단해 보이기 때문이다.수십 명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타악기는 주요 선율을 담당하는 현악기나 관악기에 비하면 비중이 크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음악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최고조에 다다르게 하는 팀파니나 베이스 드럼과 같은 타악기의 역할은 그 어떤 악기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연극 무대에 비유해 설명하면, 타악기는 극의 주연을 맡고 있지는 않지만 주연 못지않게 인상적인 조연을 맡고 있는 것이다.타악기 연주자는 팀파니, 비브라폰, 마림바, 스내어드럼 등 두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섭렵해야 한다.마림바나 비브라폰과 같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말렛 악기(Mallet Instrument)는 솔로 악기로도 유명하다.그런 의미에서 이상준(32) 연주자는 ‘멀티맨’이다. 그의 연습실에는 팀파니, 비브라폰, 마림바, 스내어드럼 등 많은 악기가 놓여 있었다.그는 “처음에는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는 악기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고 돈도 많이 드는 악기”라고 소개하며 웃었다.그는 1번의 무대를 위해 한 달이 넘는 시간을 고민하고 해석하고 연습해야 한다고.“그 시간이 힘들어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잠깐하지만 무대에서 관객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그 시간 때문에 계속 연주자로 살아갈 수 있는 거 같다.”지난해 독일에서 귀국 후 타악기 연주자로 굵직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이상준은 ‘타악기 작곡가’가 꿈이라고 했다.실제 그의 무대는 일반 타악기 연주자의 무대와는 조금 다르다. 그의 연주회는 기존 곡들에 이상준의 색깔을 입혀 편곡한 곡들로 이뤄진다. 클래식부터, 재즈, 대중가요까지 곡 종류도 다양하다.특히 직접 작곡한 곡들도 15곡에 이른다. 솔리스트로도 다양한 활동을 선보이지만 피아노,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들과 앙상블도 즐긴다. 현재 CM오케스트라 수석 단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그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러두고 재미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며 “기술가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어서 늘 창작적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클래식을 좋아하셨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익혔다.가장 먼저 배운 악기는 피아노였다. 3형제 중 막내였던 그가 태어난 날 아버지는 피아노를 사주셨다고.근데 왜 타악기였을까. 그는 “피아노를 너무 좋아했지만 막상 입시로 피아노를 하려니 스트레스가 심했다. 피아노를 평생 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었다”고 했다.인문계를 진학하겠다고 결정한 후 우연히 접한 악기가 타악기 마림바였다.“재미있었다. 피아노보다 흥미로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클래식 악기지만 팝과 재즈 등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심장 박동소리를 닮은 타악기소리에 매료돼 스틱을 잡기 시작했고 타악기 전공으로 경북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악기에 입문했다. 그후 영남대, 계명대, 한국음학협회 등 여러 콩쿠르에 입상하면서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대구시립교향악단, 영남대학교오케스트라, 대구스트링스, 공군군악대 등 여러 연주단체와의 협연으로 솔리스트로서의 가능성도 보여주며 전문 퍼커셔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영남대학교 졸업 후에는 독일 에센국립음악대학교에서 전문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최고점으로 입학하고 졸업도 최고점으로 했다.폴란드 브로츠와프 카롤 리핀스키 음악원의 국제현대음악 앙상블 프로젝트 타악기연주자로 초청받아 연주했고, 독일 여러 독립음대의 교수진으로 구성된 E.MEX 앙상블에 객원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살아있는 거장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감독하에 Essen필하모니에서 열린 대규모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에 타악기 연주자로 참여하는 등 오케스트라와 실내악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다. 또 세월호 추모를 위한 곡 등을 만드는 등 다양한 창작활동도 했다.독일에서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또 다른 삶의 기대감으로 한국에 돌아왔다는 그는 “한국에서 내가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며 “독일에서 쌓은 음악적 지식을 한국에서 많이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그는 앞으로의 계획도 전했다. 이씨는 “오는 18일 콘서트하우스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주 공연이 예정돼 있다. 또 6월에는 사회소외계층을 위한 자선음악회도 예정돼 있다. 공연 후 독일에 간다. 함께 유학했던 친구와 앙상블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그는 마지막으로 “타악기가 대중적인 악기지만 사람들이 잘 모른다. 사람들이 타악기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스마트 시대에 만난 고흐·피카소 어때요?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배문경(31) 작가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자 이같이 답했다.그는 대학시절부터 쉼 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쳤지만 그가 작업을 멈춘 적은 없었다. 해가 거듭될 수록 참가하는 전시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그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30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진행했다.왜 그렇게 작업에 몰두하냐고 물어보자 그는 “기회가 왔을 때 열심히 계속 작업을 하고 싶다”며 “혹시나 임신과 출산으로 공백이 생기면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을까봐 이어서 전시를 진행하고 계속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다.그의 작업실에는 3D 프린터 기기가 쉼없이 작동하고 있었다. 올 하반기에도 개인전이 예정돼 있어서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고.배문경 작가는 미디어아트 작가다. 익히 보아온 친숙한 회화를 차용한 평면이미지를 입체화 시킨 오브제에 영상을 투사한 작품을 선보인다.스마트한 시대의 도구를 사용해 이전 시대의 화가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3D 프린터라는 가장 현대적 디지털도구를 이용해 입체조형물로 재탄생한 다양한 피사체에 영상을 비춰 원작과는 또 다른 생동감을 덧씌우는 것이다.현재 주로 작업하고 있는 작품은 민화 속 동물들이다. 우리나라 민화 속 방아 찧는 토끼, 익살스런 호랑이, 봉황을 본 딴 피사체에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한 영상작업을 더해 3차원으로 재탄생시켜 상상의 동물과의 조우를 성사시킨다.그림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호랑이와 토끼 등은 다양한 색과 크기로 출력된다. 영감을 받은 동물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동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리 사이에 꼬리를 잡아 빼고 날카로운 발톱마저 감춘 장난스러운 포즈의 호랑이는 큰 고양이처럼 생겼다. 까치 호랑이라고 알려진 원래의 그림 속 호랑이는 맹수의 왕 같은 위용보다는 친근한 모습이다.배 작가의 작품에는 익살스러운 표정이 남아있다. 오방색의 화려한 색은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기에 영상작업을 더해 3차원으로 재탄생시킨다.그는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어서 전시가 됐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 크다”며 “머릿속으로 결과물에 대해서 예상은 하지만 최종 결과물로 봤을 때 느끼는 감동은 훨씬 큰 것 같다”고 했다.이전에는 명화를 주제로 작업을 했다. 반 고흐의 카페, 방, 세잔의 정물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이다. 서양 명화의 경우 참조 대상에 충실한 사실주의보다는 참조 대상의 왜곡과 변형이 심한 표현주의나 입체주의 풍의 작품을 선택하곤 했다. 3D 프린터를 붓으로 삼아 다시 그리는 작품은 단순히 건축의 추소모델 같은 것이 아니다.배 작가는 경북대학교과 동대학원에서 미술학과를 전공했다. 서양화가 그의 주 전공이었다. 그랬던 그는 대학시절 다양한 수업을 거치면서 설치와 미디어아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에 빠졌다. 결국 박사는 디지털미디어아트학과로 진학했다.그는 “명화나 민화의 평면이미지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데 입체로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며 “흔한 사실적인 그림이 아닌 입체가 되고, 재구성이 되면 어떨까를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걸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고 했다.미술의 그의 삶 전부였다. 초등학교 시절 시작한 미술은 박사수료까지 이어졌다. 부모님도 그도 예상하지 못했었다고.그는 “좋으니깐 계속했다. 미술로 대학 진학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말했을 때 부모님은 미술이 아닌 일반 대학으로 가면 안되겠느냐고 말하셨다. 미래가 불투명하니깐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고 했다.지금도 그저 좋아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그는 “수익이 나는 작업이 아니다보니 힘들때도 많다. 또 미디어나 기술적인 부분은 계속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며 “부지런히 계속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하다보면 제가하고 싶은 환경도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작품으로 시민들과 소통할 때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시민들과 계속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클래식 기반 전자음악…나만의 소리 만들어내”

“대구 시민들에게 다양하고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요.”전복기(28) 사운드디자이너의 목표다. 사운드디자이너는 눈에 보지 않는 소리를 디자인하는 직업이다. 그는 클래식을 기반으로 전자음악을 만든다고 설명했다.전씨는 영남대학교 음악대학교 작곡과에서 클래식과 세부적으로 미디어음악을 전공했다.그가 미디어음악을 전공하게 된 건 군대시절의 선임 때문이었다. 그는 “군대에서 음향 장비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선임은 전자음악 전공자였다.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했다.그게 미디어음악으로 전공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그는 “음악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술음악이 꼭 컴퓨터로 이뤄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전자음악에 클래식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했다.대학교 재학 당시 그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학생이었다. 일렉기타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섞는 작업을 했고, 국악과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섞기도 했다.그는 새롭게 도전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고. 그는 “현대음악은 일반 대중들이 느끼기에 어려움이 많다. 대중이 내 음악을 인상깊게 생각했으면 좋겠고, 먼가 임팩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그가 음악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멀고 어렵게 느껴졌던 음악이 한순간의 계기로 가까워지면서 크게 흥미를 느꼈다고.전씨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자기가 만든 벨소리와 컬러링을 자랑했다. 그때 아 나도 음악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너무 별게 아니라서 조금 쑥스럽다며 웃어 보였다.음악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했을 때 부모님은 크게 반대를 했다. 공부를 하던 아들이 갑자기 음악을 하겠다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거실에 놓여 있던 피아노 앞에 앉아 색바랜 피아노 책을 꺼내 꾸준히 연습도 했다. 아들의 노력에 부모님은 결국 허락을 했다.그렇게 본격 작곡과 진학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스스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음악을 하겠다고 말을 뱉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고 했다.어렵게 시작한 음악은 그에게 ‘즐거움’이었다. 음악적 이론, 화성, 작곡 기법 등 알면 알수록 더욱 재미가 있었다고.그에게 사운드디자이너의 매력이 뭐냐고 물어보자 ‘남들이 낼 수 없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그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가지고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저만의 매력과 특색이 생기니깐 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사운드디자이너는 서울, 경기도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에게 서울이 아닌 왜 대구에서 활동하느냐고 물어보자 “이제는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이 생겨서 대구에서도 충분히 음악활동을 할 수 있다”며 “대구에서도 내가 배울 수 있는 점들이 많다. 서울에서 나를 찾을 때 그때 가고싶다”고 했다.그는 지난해 대학 졸업 후 어울아트센터, 수창청츈맨션, 대구콘서트하우스 등에서 일렉트로닉과 영상, 클래식 등 다양한 협연을 진행했다. 올해는 댄스 뮤직 IDM( 인텔리전트 댄스 뮤직) 디지털 싱글 앨범 발매도 계획하고 있다고.그는 앞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하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전씨는 “현재 45records 소속 아티스트다. 대학교 선배와 2인조 일렉트로닉 듀오(FFRD) 팀을 결성해 활동도 하고 있다”며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하고 싶다. 클래식 틀 안에서 노는 것보다 다양하게 폭넓게 활동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밝혔다.그는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청년으로서 음악활동을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며 “대구는 서울과 비교해 너무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늘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데 무대에 서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다양하고 새로운 음악을 하는 청년들에게도 대구 시민들에게 보여줄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흙으로 만든 형태서 또 다른 소재로 전환”

김병문(38) 작가의 미술 인생은 간절함과 치열함이 공존했다. 조금은 늦은 시작과 남들과는 다른 눈, 6년여의 일본 유학 생활 등 치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일본 유학 생활을 끝내고 경산에 다시 돌아온 지 어언 2년 그는 한국의 주조 기술을 되살리고 학술적으로 남기고 싶다는 목표를 전했다.◆간절함으로 시작한 미술그가 미술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미술을 했던 누나의 영향이 컸다.하지만 미술을 하고싶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김 작가는 “부모님이 미술을 하는 누나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셔서 차마 하고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며 “누나가 다니던 학원을 갔다가 나도 모르게 하고 싶다는 눈빛을 미술학원 선생님에게 보낸 거 같다.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권유해주셔서 미술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남들보다는 조금 늦은 시작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미술을 시작했지만 또 다른 시련이 그에게 닥쳤다. 바로 색약(색을 분별하는 능력이 정상보다 부족한 증상).“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입시 미술을 시작하고 탁색계통으로 가면서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그렇게 회화가 아닌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그게 공예였다. 유독 손으로 작품을 만들기 좋아하던 김 작가는 대구대학교 공예과에 입학했다.그는 공예과 선택에 대해 “디자인 계열과 공예과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손으로 만지는 게 더 좋았다. 눈에 대한 약점 역시 공예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섬유, 금속, 도자, 목칠 4가지 중 금속을 선택한 이유 역시 도자기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가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금속공예는 처음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또 다른 소재로 전환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금속 표면 질감이나 착색 후의 광택 등이 도자기에서 표현할 수 없는 빛깔들이었다. ‘이거다’라고 생각했다.”◆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일본 유학생활일본과의 인연은 동 대학원을 입학 하면서 시작됐다. 석사 1년차가 끝날 때쯤 일본 동경예술대학 금속공예과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석사과정 중이었지만 학부생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다. 그는 “정말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학부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한국과는 수업과정 자체가 달랐다”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보내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한 것 같다”고 했다.그는 그 시간을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했다. 1년의 유학 생활 후 한국에 돌아와 대구대 석사과정을 마쳤다.그는 일본에서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그는 “주조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앞선다. 하지만 지금 현존해있는 학술자료 유물은 일본이 매우 잘 정리가 돼 있다. 우리나라는 정리가 안 돼 있고 학술적 자료도 없었다”며 “일본 주조 방식도 결국은 우리나라에서 온 방식인데 이거라도 배워서 학술적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그렇게 일본으로 다시 갔다. 동경예술대학 금속공예과 석사 시험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어학이 큰 걸림돌이었다. 실기시험은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필기였다. 6개월간 어학 공부에 매진했다. 예상 문제를 달달 외웠다.합격은 기대하지 않았다. 석사 시험에 응시한 사람 중 김 작가는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비결에 대해 그는 “교수님께서 전공실기 점수가 가장 높았다고 이야기했다. 저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 같다”고 했다.그는 일본 유학시절 스스로 금속공예에 완전 미쳐 있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가서 먼가 해야 되는 데 그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석사와 박사 총 6년6개월의 시간의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했다. 향수병에 걸려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그는 “주말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일에는 오후 6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했다”며 “생활비, 재료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당시 힘든 시간은 그의 작품에 투영됐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보금자리, 고향의 냄새, 소리 등 순간에 떠오르는 것들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다”며 “초기 작품들 대부분 일본 유학시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설명했다.그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고향에 대한 추억과 향수가 작품에 투영된 순수작품이다. 하지만 최근 작품들은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쓰임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지금 현재 대구대학교 금속공예과에서 후학양성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일본에서 10여 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진행한 그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 진토 주조기법을 일본에서 배워왔다. 진토에 대해서 실험중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없어졌던 기법을 다시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서 개인전도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 다양한 작품으로 시민들과 소통으로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배움에 대한 갈증…플루트 하나 들고 맨땅에 헤딩

‘타고난 음악가.’플루티스트 김영주(30)씨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경북예고 실기 1등, 계명대학교 음악공연예술대학교 관현악과 장학생, 프랑스 시립음악원 조기졸업, 생모 국립음악원 전문 연주자 과정(DEM complet)·최고연주자 과정 졸업, MBC 교향악단 플루트 수석주자 등 그의 이력만 보면 타고난 음악가 기질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성과 뒤에는 그의 성실함과 노력이 있었다.◆우연히 시작하게 된 플루트그가 플루트를 시작한 건 어린시절 부모님의 권유였다. 악기를 하나쯤 다룰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처음 플루트를 배웠다.부모님은 딸이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재능을 보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처음으로 나간 콩쿠르에서 1위를 한 것이다.그는 “나가는 대회마다 잇따라 수상을 하니깐 이게 내 길인가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플루트를 그만뒀다”고 했다.하지만 운명이었을까. 그의 재능을 일찍이 눈치 챈 플루트 선생님이 다시 플루트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해왔다.그는 “중학교 때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플루트를 다시 하면 안 되느냐고 졸랐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권유로 엄마가 다시 플루트를 배워보라고 하셨다. 그게 플루트를 다시 시작한 계기였다”고 말했다.그렇게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됐다. 경북예고 입한 후에는 학교에서 실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대구예술영재원 플루트 수석단원으로 합격했고 대구시립교향악단 청소년 협주곡의 밤에도 대학생들을 이기고 플루티스트 중 유일하게 협연자로 선정됐다. 계명대학교 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하고 계명대학교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했다.◆8년 유학, 시련 후 한 단계 더 성장말그대로 탄탄대로였다. 최고의 성적으로 대학교를 마쳤고 유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마스터클래스 수업을 통해 프랑스 생모리스 시립음악원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그가 로익 풀랑 선생님이었다. 당시 그의 권유로 시험을 쳤고 대학교 졸업 전에 입학이 결정돼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입학 후 불과 4개월 만에 생모리스 시립음악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고 점수를 획득, 조기 졸업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프랑스에 있는 국립음악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수에 대한 정보와 레슨, 입학을 위한 일정을 일일이 알아봤다.그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무모했을까 싶다. 정말 맨땅의 헤딩이었다”며 “당시 프랑스대학교는 홈페이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국립음악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했다.거절의 연속이었다. 개인정보 보호의 이유로 교수의 연락처를 알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교수 수업이 있는 날 문 앞에서 기다렸다. 두 달 동안 계속됐다.그렇게 입학한 곳이 생모 국립음악원이었다. 전문연주자과정 입학 첫해 학년 말 시험에서 전체 학년 1등을 했다.그렇게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유학생활에도 위기가 있었다. 전문연주자과정 졸업 시험 일주일을 앞두고 플루트가 고장이 난 것이다. 급하게 악기를 고치러 갔지만 악기상에서는 졸업 연주 전에 고쳐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고장난 악기로 졸업 시험에 임했고 결국 유급이 됐다.첫 좌절이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플루트가 인생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며 “악기도 고쳐야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한국에 왔다”고 했다.첫 좌절 이후 그의 인생도 달라졌다.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각종 콩쿠르 대회에 출전했다. 레오폴드 벨랑 국제콩쿠르에서 3위, 르 빠르나스 콩쿠르 1위, 에피날 콩쿠르에서 1위없는 2위 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잇따라 수상했다.또 본인이 겪었던 유학시절 어려움을 후배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멘토를 자처하기도 했다.그는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는데 유급으로 시간이 나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며 “후배들을 도와주면서 저 또한 한단계 더 성장했던 거 같다”고 했다.생모 국립음악원 전문 연주자 과정과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친 후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음악에 대한 깊이 있고 체계적인 전문성을 쌓기 위해 베르사유 국립대학교에 진학해 음악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역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실기가 주를 이뤘던 국립음악원과 달리 국립대학교는 언어에 대한 깊이 없이는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그는 “2년이라는 시간 역시 저를 시험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 ‘19세기 프랑스에서의 뵘 플루트의 영향’은 우수 논문에 선정되기도 했다.유학 생활만 약 8년. 그는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했다.그는 “이제 막 귀국독주회를 했고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앞으로 저의 연주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목관 5중주 팀을 만들 계획도 하고 있고, 후학 양성에 대한 욕심도 있다”고 했다. 이어 “열심히 공부하고 왔으니 저의 재능을 많은 사람들과 나눴으면 좋겠다. 좋은 자리에서 제 음악을 많이 들려 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최초’·‘최연소 신화… “음악은 날 표현할 유일한 도구”

‘최초’, ‘최연소’성악가 장경욱(27)을 따라다니는 말이다.그는 25살에 대구오페라축제 무대로 데뷔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 ‘리골레토’의 ‘스파라푸칠레’ 역이었다. 대학생이 오디션을 통해 오페라 축제 무대 데뷔는 처음있는 일이었다.대구오페라하우스 관계자는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고 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저음 목소리를 높게 평가했다.장씨는 리골레토뿐만 아니라 투란도트에도 동시 캐스팅이 됐다.당시 그의 나이는 25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당시 우연히 본 오디션이었다. 합격은 기대하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오디션 시간이 앞당겨져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하고 허둥지둥 오디션에 참가했다. 제대로 목도 풀지 못한 상태였다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가득 참여했던 오디션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대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배역을 당당히 거머쥐었다.“처음에는 얼떨떨했어요. 친구가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있다고 이야기해줬지만 믿기지 않았어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아서 친구한테 몇 번이고 다시 물어봤어요.”꿈과 같은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었던 그에게 오페라는 새로운 도전이었다.“정말 죽을 것 처럼 연습했던 거 같아요. 아침에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연습만 했어요.”이런 근성 때문일까. 회를 거듭할 수록 오페라 무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그는 “처음에는 이렇게 어리고 경험도 없는데 잘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저를 많이 보셨다”며 “하지만 마지막에는 선배님들이 한마디씩 칭찬을 해주신다. 그때 정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2017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성악가대회에서 외국인 성악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성악가대회는 캐나다 퀘벡주가 주최하는 국제적 규모의 대회다. 이 대회에는 젊은 성악가 29명이 참가했다. 만 18세에서 35세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이 대회에 그는 최연소로 참가했고 예술감독들이 현장 투표를 통해 선발한 외국인 성악가상을 수상했다.그 후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라 보엠, 살로메, 라 트라비아타 등에서 잇따라 주조연을 꿰찼다. 불과 2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검정고시 출신, 음악이 인생의 전부그에게 음악은 삶 전부였다.“음악이 없으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음악은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장씨는 17살에 성악을 시작했다. 성악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6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기타, 첼로, 플루트 등 각종 악기를 섭렵했다. 그리고 변성기가 지나자마자 성악을 시작했다.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업과 음악을 병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자퇴라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보다 노래에 집중하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다.오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오후에는 레슨을 다녔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레슨비와 용돈도 충당했다. 그렇게 남들과는 다르게 조금 특별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당시에는 내가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조금 더 일찍 자퇴를 했을 거 같아요.”◆세계무대에서 활동 목표지난해 8월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를 졸업한 그는 세계무대를 목표로 새로운 도약 준비를 하고 있다.먼저 오는 7월 이탈리아 페사로의 로시니 아카데미에 참가한다. 프로그램 관계자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 그의 샬로메 공연을 보고 캐스팅이 됐다.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축제인 2019 이탈리아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로시니 아카데미는 테너 프랑코 코렐리,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를 길러 낸 유서깊은 교육의 장이다.그는 한 달 동안 아카데미 수업을 받게 됐다. 이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면 8월 로시니 페스티벌의 영아티스트 프로그램 중 하나인 ‘랭스 여행’ 무대에 설 수 있다. 다음달 29일에는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사랑의 묘약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가을쯤에는 독일 오페라 극장 진출 오디션에도 참가할 계획이다.“독일 오페라 극장 등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며 더욱 성장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는 음악으로 선교활동을 하는게 꿈이에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도전하고 매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누군가의 마음 속에 엽서 한 장처럼 내 그림 있었으면…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을 볼 때만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이은비(31) 작가의 작품은 밝은 색채가 특징적이다. 색은 오묘하고 붓의 터치에는 힘이 느껴졌다. 자연에 대해 순수하고 가식 없는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듯했다.수성아트피아에서 진행 중인 신진작가 기획전시 ‘Onehundred%’에서 선보인 이 작가의 작품은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다.100호 캔버스를 가득 채운 하늘의 풍경(로맨틱 sky)은 계절의 흐름과 장소에 따른 차이점, 그에 따른 작가적 감정을 색과 분위기, 리듬감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하늘의 여러가지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훨씬 크자나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아름다운 하늘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고 싶었어요.”이 작가 작품의 주요 소재는 자연이다. 자연이 주는 생동감, 그 힘을 표현하고자 한다. 거대한 자연, 그리고 일상 속 자연에서 느끼는 모든 부분들의 기록이 바로 영감을 주는 요소다.“나라는 존재의 배경이 되는 곳의 자연을 자각하고, 그 풍경 속에서 자유롭게 이뤄지는 정서적 교감과 그 속에서 마주하는 감성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자연의 어울림 속에서 스며들고 닿는 부분,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여러가지 변화들, 장소적 특징에 따른 차이 같은 부분들은 시선을 멈추게 하는 소재들이죠.”단국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한 그는 진로에 대한 고민속에서 졸업 후 학교에 취업했다. 좋은 곳에 취업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취업 후 그림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퇴근 후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지만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있었다.“그때 ‘아 내가 그림을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를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늘 그림이 옆에 있어서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거 같아요.”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다. 부모님이 꿈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부모님이 반대하셨으면 못했을 거에요. 늘 옆에서 묵묵히 제 꿈을 지지해주시는 분들입니다.”2016년 대구미술광장 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 작가의 나이는 28살,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캔버스 앞을 지켰다.이 작가는 대학 시절 그림은 주로 추상화였다. 4학년 졸업 작품을 보면 유독 기호들이 많다. 또 색감 역시 많이 어두운 편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복잡한 심경을 기호적인 패턴으로 표현했고 색감은 감정선을 표현했다.진로에 대한 고민과 복잡한 심경이 해소되자 이 작가의 그림은 한층 밝아졌다. 표현법도 더 다양해졌다. 붓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테이핑, 물감뿌리기, 퍼트리기 등 다양한 표현법을 구사했다. 이 작가 그림 빛은 더 오묘해졌다.그림도 반추상화로 바뀌었다. 처음 그린 작품은 ‘시작의 설렘’이었다. 봄을 기다리면서 그린 작품으로 미술광장 주변 자연경관에 감명을 받고 그렸다고.“다양한 색깔을 덧칠해 표현하는 만큼 색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색은 섬세하게 접근하지만 대신 붓질은 시원시원하게 하는 걸 좋아해요. 또 물감 뿌리기, 테이핑 등 다양한 표현법을 사용하는 걸 좋아해요.”잇따라 시리즈 물을 계획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 그에게 대구미술광장은 스튜디오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었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 당시 원더랜드 시리즈와 그린벨트 시리즈 등을 시작했다. 특히 그린벨트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12점을 그렸고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린벨트 시리즈 작품을 띠처럼 연결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싶은 목표도 있다.작업에 몰입하면서 2016년부터 개인전시와 그룹전시에 잇따라 참여했다. ‘새로운 약속, ANG아트앤갤러리, 대구’, ‘뤼미에르 행복한 빛, 대구미술광장, 대구’, ‘이은비 초대전, 갤러리 h, 서울’, ‘Vivid Diary 초대전, 갤러리탐’ 등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그는 본인 그림의 매력으로는 ‘밝은 에너지’를 꼽았다.“나도 가끔 내 그림을 보고 힐링을 할 때가 있어요. 제가 느끼는 감정을 관객들도 느꼈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엽서 한 장처럼 제 그림 한 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힘들 때 이은비 작가의 작품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요.”그리고 싶은 그림이 너무 많다는 이 작가는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제 그림을 더 많이 선보이고 싶다”며 “그런 기회를 많이 만들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신준민 작가 “일상이 머물렀던 장소, 그때의 감정 덧입혀 작품으로”

‘부지런한 작가.’ 지역에서는 신준민(35) 작가를 이렇게 부른다. 2015년 영남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후 끊임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 매년 개인전, 단체전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림의 소재는 대부분 ‘대구’다. 일상을 주제로 그리는 신 작가는 지극히 평범한 장소를 내면화한 풍경을 그린다. 그는 “장소들은 회화의 소재로서 인위적으로 선택되기보다는 일상 행위가 이뤄졌던 장소에서 우연히 유년의 기억을 상기하거나 문득 떠오른 감정이 환기되면서 회화에 중첩된다”고 소개했다. 자신의 시각망 속에 들어온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그 장소를 다르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림의 대상은 내가 가진 정서적 파장과 비슷한 에너지를 지닌 그 무엇들과의 만남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목적이 내재한 소유 혹은 채집된 대상이 아니다. 우연한 조우의 대상이기에 이것을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그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특성을 이끌어내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지역 유명 장소가 배경이었다. 첫 개인전 주제는 ‘달성공원’이었다. 이 개인전을 위해 그는 1년 동안 달성공원을 찾았다. 달성공원을 관찰하고 아름다운 동물원이기보다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밝고 경쾌한 동물원의 이미지보다는 텅 빈 공원의 모습과 쓸쓸한 정적이 담겨 있다. 신 작가는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을 때, 달성공원을 찾았다. 도심 속에 있는 달성공원은 자연의 순리대로 끊임없이 변모했다”며 “좁고 낙후된 우리(cage)와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은 야생성을 박탈당한 채 적막함과 한적함을 내뿜으며 전시된 자연으로 남아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는 ‘시민운동장’이었다. 경기뿐만 아니라 그곳에 배치된 조형적인 요소와 상황에 따라 들려오는 풍경의 소리가 그를 매료시켰다고. 그는 “녹색 잔디 위에 그어진 흰 선은 광활하게 펼쳐진 그라운드에 긴장감을 부여했다. 관중석에 반복적으로 나열된 의자와 그물망은 경기장 내의 다양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며 “경기의 상황에 따라 열광하는 사람들의 함성만큼 쏟아져 내리는 공간 속 조명 빛의 작렬함이나 그에 비례해 엄습하는 텅 빈 야구장의 묵직한 공기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려오는 다양한 감각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곳 역시 1년 가까이 찾았다. 신 작가의 기억 속의 시민운동장은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사람이 없는 텅 빈 공간에 집중했다. 2016년부터 일상을 ‘모험’으로 설정해 새로운 에너지를 가진 풍경이나 대상을 그렸다. 특정한 파장을 가진 대상이나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이에 그 주제들은 더욱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주로 산책하던 유천교 일대부터 작업실 주변까지 발을 딛인 곳을 그렸다. “그리려고 보는 게 아니고 야구장 다음에 뭘 그릴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갑자기 소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특정 장소를 그리지 않고 일상 속에서 거닐면서 반복적으로 와닿는 소재를 그렸다.” 천상 화가를 꿈꿨을 것 같은 신 작가의 고등학교 시절 꿈은 만화가였다. 고등학교 시절 만화동아리에서 만화를 그리다가 회화과에 가면 좀 더 풍성하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에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그는 “당시 좋아했던 만화가들이 대부분 회화과를 나왔다. 만화도 재밌었지만 미술은 아름답다는 느낌과 표현이 무한해 뭔가 열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며 “알 수 없는 유화의 맛인거 같기도 하고 재료에 매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신 작가는 그림의 매력으로 ‘정답이 없는 점’을 꼽았다. 그는 “연애와 그림이 비슷한 것 같다. 어떤 날은 정말 잘 그려지고 어떤 날은 좋았던 부분까지 싫어지는 경우가 있다”며 “캔버스와 밀당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부분이 매력적이다”고 했다. 지난해 연말에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도 했다. 범어아트스트리트에서 ‘범어길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다. 시각 분야 기획자로 참석한 신 작가는 시각 작가 7명과 협업해 연극 무대가 될 9개의 공간을 탄생시켰다. 그는 “새로운 도전이라서 바빴지만 작가, 배우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힘을 합쳐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끊임없이 달려온 그는 지금이 ‘변화의 기점’이라고 했다. 신 작가는 “졸업 후 6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표현하는 장소를 아무리 바꿔도 한두 작품에서 영혼 없이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며 “새로운 표현이 나오지 않고 스스로를 뛰어넘지 못하니깐 스스로 내실을 다지고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 후 줄곧 그림만을 그려왔던 그는 지난해부터는 모교에서 강의도 겸하고 있다. 어떤 화가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신 작가는 “환경이 변해도 그 뿌리는 변하고 싶지 않다”며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범주 안에서 계속 확장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지금은 소외되더라도 본인을 더 들여다보고 내실을 다지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이다솜 연출가 “관객을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 연극의 묘미죠”

지난해 12월21일 오후 6시, 그림, 조각, 설치미술 등 다채로운 예술 작품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했다. 범어아트스트리트가 연극무대로 변하는 순간이다. 11개의 작품 스튜디오는 연극무대로 바뀌었다. 그 흔한 좌석도 없다. 관객들은 주인공 뒤를 따라다니면서 연극을 관람했다. 20명의 관객은 물론 오가는 시민들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는 대구에서는 첫선을 보인 ‘이동하는 연극’이다. 배우들의 퇴장도 없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무대 뒤는 당연히 없다. 암전도 없다. 관객들이 눈을 돌리며 배우들은 저마다 방법으로 연극무대를 지키고 있다.이다솜(29) 연출가의 작품이다. 아름다운 외모의 집착이 부른 비극을 드러낸 원작(도리언 그레이 초상)과 달리 연극 도리언 그레이와 9개의 방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예술가가 겪는 고통과 희생 등 비극적인 숙명을 보여줬다.“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외국에서는 이동하는 연극이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명하지 않아서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연극이 끝난 후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어요.”반응은 어땠을까? “감격스러워서 잠을 못 잤다”는 이 연출가의 말에 관객들의 반응을 실감할 수 있었다.이 연출가의 연극은 이색적이기로 유명하다. 배우 퇴장이 없고, 암전도 없다. 좌석이 없기도 하고, 런웨이식으로 의자를 배치하기도 한다. 참여하는 배우들은 퇴장이 없다는 것을 늘 각오한다.그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연극에 더 집중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늘 고민한다”고 했다. 이게 연극의 묘미란다.실험적인 도전은 처음이 아니다. 이 연출가는 지역의 유휴공간이자 사회문제로 떠오른 빈집을 무대로 연극 ‘빈집으로의 초대’를 기획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시선과 연출가 눈에 들어온 빈집에 대한 인상을 예술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집주인이 떠난 빈집을 지키는 성주신과 그를 데려가려는 죽음 사이의 조용한 전쟁을 보여주는 짧은 퍼포먼스 형태의 공연이다.“대명공연문화거리 인근에 빈집 거리를 초소형 극장으로 꾸미는 제2의 오프브로드웨이의 꿈을 가지게 됐어요. 빈집을 섭외하기 위해 대명3동 행정복지센터 마을계획단 회의에 매주 참석했습니다. 통장님, 상인분들 주민분들을 만나 빈집의 위치나 활용 계획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어요. 주민 극단 신뜨름 대표이자 통장이신 조상용 어르신을 설득해 집주인 동의하에 빈집을 섭외할 수 있었습니다.”빈집의 대문을 열었을 때 그 충격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마당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고양이 주검에 벌레들까지 거기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끊긴 전기와 수도…. 여기서 대체 어떤 공연을 할 수 있을까”했다고.이 연출가는 고민하다가 받았던 충격을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빈 집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알리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무너진 지붕에 비가 오는 날이면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또는 우산을 들고 공연을 지켜봐야 하기도 했다.“빈집 주변 이웃에서 공구와 청소도구, 그리고 전기도 빌려주셔서 조명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찾은 주민들도 무서운 빈집이 극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신기해하고 응원을 해줬어요. 마을계획단에 같이 참여했던 한 주민은 공연 관람 후 모두가 무관심했던 빈집 문제를 조명해줘 고맙다는 인사도 전해주셨어요.”연출가를 꿈꾸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그는 “미국 드라마 프렌즈 메이킹 필름을 우연히 봤는데 녹화현장에 관객석을 채워놓고 막을 올려 관객 반응이 좋으면 그대로 내보내고, 아니면 새롭게 고치기 위해 모든 스태프가 회의하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을 보고 저렇게 살면 원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대구콘서트하우스가 되기 전 시민회관 마지막 공연을 하는데 음악을 트는 일을 맡았다. 수많은 관객이 함께 우리가 준비한 공연에 반응하고 배우들도 나의 음향 큐사인에 따라 감정이 폭발할 때 또 마지막으로 커튼콜 때 박수와 환호소리를 들었을 때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마음이 먹먹할 만큼 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이었다”고 했다.이미 다음 공연도 기획하고 있다. 그는 “첫 빈집 공연이 끝난 후 남구 이천로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ㆍ김수용 감독)’ 영화 촬영지였던 빈 한옥과 연결됐다”며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극장으로 고쳐 올해에도 새 연극을 선보일 것 같다”고 했다.현재 계명대학교 예술대학원 연극뮤지컬학과 과정 중인 그는 앞으로도 지역에서 활동하며 우리가 처한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하고 싶다고 했다.이 연출가는 “소재가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다”며 “그것이 연극이 가야 하는 길이다. 먼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마주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그저 피아노가 좋았어요…클래식 다양화 꿈꾸고 있죠”

“관객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연주를 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습니다.” 7살부터 피아노를 쳤던 최효진에게 피아노는 친구이며 삶의 전부였다. 5살부터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던 그에게 7살이 되면 피아노학원을 보내주겠다는 부모님의 말에 7살이 된 1월1일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고. 그리고 28년 후 피아니스트 최효진(35)이 됐다. “그저 피아노가 좋았어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중학교 진학 당시 부모님이 피아노를 그만 하고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지만 불과 몇 개 월 만에 다시 피아노를 찾았어요.” 피아노로 이루고 싶은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가 너무 좋아서 피아노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입시위주로 연습하기보다는 치고 싶은 곡을 쳤다. 김천예고에 진학 후 본격적으로 피아노에 집중했다. 그리고 참가하는 대회에서 잇따라 수상을 하며 최효진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계명대콩쿠르에서 수상하며 장학증서까지 받았다. 그리고 경희대학교 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피아노에 한번 미쳐보자는 생각에 독일 유학을 결정했다. 최씨는 “앙상블과 반주를 좋아해서 반주과로 진학을 할까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다”며 “김준차(현 서울챔버앙상블 지휘자) 선생님이 ‘피아노에 미쳐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그게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무작정 독일로 떠났다. 대학입학을 위해서는 어학증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어학을 공부하면서 독일 함부르크 음대에서 학생인 척 몰래 피아노 연습을 하기도 했다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스스로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6개월 후 독일 뤼백 국립음대에서 전문연주자과정에 합격했다.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에도 한 번에 합격했다. 유학 당시에도 이탈리아 바리에서 열린 ‘DON VINCENZO VITTI’ 콩쿠르 솔로 2등, 실내악(피아노 트리오) 1등을 하는 등 유럽에서 다양한 연주 활동을 하며 연주자로서 기량을 쌓았다. 2012년 귀국연주회 후 김준차 선생님이 협업을 제안해 서울챔버앙상블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피아니스트 최효진이 된 건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컸다”며 “선생님이 귀국연주회를 보시고 협업을 제안하셨다. 당시 선생님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 너무 좋았다”고 했다. 2014년부터는 앙상블 율트리오(바이올린 김채인, 첼로 성수빈)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최씨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좋지만 앙상블은 피아노 혼자서 낼 수 없는 소리를 낸다는 매력이 있다”며 “또 각자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다”고 했다. 율트리오는 대구콘서트하우스 기획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바이올린ㆍ첼로ㆍ피아노 트리오의 연주를 기반으로 추리극과 영상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콘서트로 선보였다. 모차르트를 다룬 영화 중 최고라고 평가받는 ‘아마데우스’의 영화내용을 기본으로 시나리오를 재구성해 지역의 연극배우,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영상도 보여줘 더욱 쉽게 관객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클래식과 대중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했다. 최씨는 “최근 진행한 독주회에서 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협연 또는 피아노 솔로로 연주되는 곡을 피아노 솔로 버전에 클라리넷과 타악기를 더해 새롭게 편곡해 선보였더니 관객들 반응이 너무 좋았다”며 “새로운 시도로 사람들이 클래식을 보다 쉽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했다. 내년 6월9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앙상블 공연이 예정돼 있다. 관객들에게 클래식을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1부는 익숙한 소품곡 위주로 구성했고 2부는 학구적인 곡들로 기획하고 있다고. 앞으로 대구에서 개인 독주회, 앙상블 등 다양한 공연으로 인사할 계획이라고. 후학 양성에도 공을 들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금 모교(김천예고)에서 실기강사를 하고 있다. 또 대구에서 개인 레슨도 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정형화된 음악보다 진짜 음악을 즐기고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작업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클래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싶다.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고 흥미로운 연주를 기획할 것”이라며 “그리고 생각보다 롱런하는 연주자가 많지 않은데, 꾸준히 지치지 않고 정진해서 오랫동안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김혜성 기자

성악가 전태현 “오늘만 노래하고 안 할 사람처럼 온힘 다해”

“브라보!” 그의 노래가 끝나자 오디션장은 미국과 대만, 홍콩 출신 심사위원들의 환호와 찬사로 가득했다. 무대가 아닌 오디션장에서 박수가 터져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그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약장수의 노래’를 불렀다. 심사위원들에게는 약장수 둘카마라가 돼 약 대신 준비해 간 코카콜라 캔을 내밀었다. 두 번째 오페라 ‘카르멘’의 ‘투우사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꽃을 대신할 빨간펜을 심사위원 한 명에게 빌린 후 건넸다. 유쾌한 퍼포먼스는 그의 노래에 더욱 힘을 실었다. 지난 9월 세계 유명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이 오페라가수를 발굴하기 위해 한국에서 열린 나얍(NYIOPㆍNew York International Opera Audition Program)에서 전태현(38) 성악가는 실력을 발휘했고, 인정받았다. 미국 뉴욕시티오페라, 캐나다 밴쿠버오페라, 미국 스폴레토 페스티벌, 대만 가오슝 필하모닉, 서울시오페라단 등 세계 유수 극장 5곳에서 러브콜을 받은 것. 이들 극장 및 단체와의 계약은 스케줄 조정과 작품 협의를 통해 이르면 내년께 성사될 예정이다. 그는 “‘저 좀 봐주세요’라는 발악의 흔적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박수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오디션에서 수없이 떨어졌고, 거절을 많이 당해봐서 아직 얼떨떨하다”고 했다. 성악가의 꿈은 중학교 시절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재능을 눈여겨 본 음악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저는 노래를 잘하는 줄도 몰랐어요. 선생님께서는 2학년 형들이 아닌 저를 단장으로 세워주셨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공부도, 운동도 딱히 잘한다는 게 없었거든요. 무언가를 잘 한다고 인정 받아본 게 처음이었는데 그게 노래였던 거죠.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격려해주시며 예고 진학을 권하셨어요.” 그는 타고난 음색으로 고1 때 이미 베이스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경북예고 성악과로 진학 후 첫 시험인 예고 실기시험에서 남자 1등을 했다. ◆혹독했던 유학 시절 나얍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유학생활 당시 수백 번이 넘는 도전과 좌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할 무렵, 갑작스런 화재로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가세가 기운 가운데 아내와 함께 떠난 유학길이었기에 취업에도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원해주고 싶어도 지원해줄 수 없는 부모님의 심경은 오죽했겠어요. 강직하셨던 아버지가 어느날 국제전화를 걸어와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베를린 국립 음대에 합격해 다니면서도 극장 전속 가수가 되기 위해 수도없이 오디션을 봤지만 매번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탈락 이유를 알기위해 오디션에 들어갈 때마다 녹음을 했고, 어떤 것들이 문제였는지 파악하려 했다. 오페라 오디션을 통해 그는 노래가 아닌 연기를 곁들인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사, 도배, 운전, 가이드까지 닥치는대로 일해야 했죠. 둘째 아이가 생겼을 때는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감 때문에 못할 게 없었고 두려울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졸업 연주 이틀 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서 600㎞ 떨어진 뒤셸도르프까지 갔다가 결국 졸업연주회 당일 무대에서 코피를 쏟기도 했다. 그는 “같은 실력이면 절대 될 수가 없고, 월등히 뛰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금 압박도 있었고, 다음달 집세 걱정을 안해 본 적이 없었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합격 소식을 듣고는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있으면서 오페라 무대에만 250여 회 올랐다. 공연을 위해 아침 내내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무대에 서야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초심 잃지 않으려 노력 한국 무대는 2015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하던 중 그 실력을 알아본 대구오페라하우스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면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바르톨로 박사 역으로 한국에서의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이어 서울시오페라단 30주년 기념 괴테 작품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 펠레스 역할을 맡으면서 한국 오페라 무대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메피스토 펠레스 역은 음역대를 아우를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연기도 잘해야 했다. 코믹함과 악랄한 모습 등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걸 표현해내는 역할이었다. 베이스가 맡을 수 있는 고난이도의 역할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러브콜이 이어지기 시작, 전국 각지를 누비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는 15일 성주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 무대와 21~22일 울산현대예술관 대공연장 국립오페라단 제작 오페라 ‘라보엠’ 공연, 내년 1월 중에는 대구시립합창단 공연 ‘천지창조’에서 협연자로 나설 예정이다. 전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경북예고, 서울예고 출강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성악을 시작 후 분한 역할만 40여 개가 넘지만 그의 신조는 변함없다. “무대에 서는 사람에게 큰 무대, 작은 무대를 떠나 중요하지 않은 무대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늘만 노래하고 안할 사람처럼 노래하는 게 제 신조에요. 사람이 변한다는 게 가장 무섭다고 하잖아요. 초심을 잃지 않기위해 노력할 거예요. 지켜봐주세요.”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천진난만 피리부는 도깨비…뮤지션 한형동 “슬픈 존재 아우르고 싶어”

“저는 언제나 우울하고 슬픈 존재였어요. 어떤 식으로 얘기를 풀어갈까 생각하던 와중에 도깨비가 떠올랐죠. 무대에서 만큼은 ‘귀신 같은 한맺힌 슬픈 존재를 아우르는 도깨비’가 되고 싶었어요. 사람들의 일그러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도깨비 말이에요.”뮤지션 한형동(33)씨는 ‘피리깨비’라는 예명으로 그룹 ‘구담’, ‘브릴리언트’, ‘데우스’ 등에 속해 향피리, 아일랜드 관악기 캘틱 휘슬,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몽골리안 흐미 등 전세계의 관악기를 연주하고 있다.‘슬픔이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도깨비’라는 가면을 쓰고자 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은 동화 속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천진하게 피리부는 도깨비’의 모습이었다. 이래나저래나 ‘피리깨비’다.그가 음악인의 삶을 살아야겠다 결심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관악기를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향피리를 불기 시작했고 그 매력에 매료됐다. 교사셨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예고 진학을 준비했다.“경북예고에 진학해 전세계의 음악단체가 오르는 무대를 접하면서 시야를 넓혔던 것 같아요. 세상에 다른 음악, 내가 몰랐던 음악이 많다는 것을 알았죠. 전세계 전통악기로 연주한 음악,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음악 안에서 악기들의 기법과 연주를 할 때 연주법 등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특히 관악기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종류가 많으면서도 크기가 작아 들고 다니기 편하고 악기별로 소리내는 방법이 다르다보니 그 원리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사 모으기도 하면서 파고들었다. 단순히 좋아 시작한 음악이었지만 그는 음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어린시절 좋지 못했던 가정환경으로 마음에 생긴 생채기를 갖고 있었던 저처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치유해주고 싶었어요. 음악을 통해 ‘그 아픔을 나도 알고 있고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음악을 만들고 싶었고 지금은 고민하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요.”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둘러 금과 은을 만들어 내듯 진정 ‘피리깨비’가 돼 음악으로 사람들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던 것.국악음악치료학과를 졸업하고 음악치료사 자격증인 임상음악재활전문가 자격을 취득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악기를 수리하고, 다시 만들어보고 꾸미는 것도 다양한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특성을 살려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였다.한씨는 “피리 두개 세개를 붙여보기도 하면서 이 선율이 이 음악에 맞을까. 또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며 악기를 만지고 있다. 심리가 어떻게 변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과정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악기를 수리하고 매만졌다”고 전했다.전세계 음악을 퓨전으로 작업해 연주하고 있는 그의 음악 철학은 분명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국악을 베이스로 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 미국 등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국악을 통해 한국 전통 알리기에도 한 몫하고 있다.그는 “외국은 특히 우리나라 전통 오리지널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 제대로된 전통 연주를 보여주면 감동해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다. 한 달 전 쯤 다녀온 미국 공연에서도 한국 전통으로만 보여달라는 요청이 있어 장구, 태평소, 향피리, 가야금 등 민요와 국악 등 전통음악만 연주하고 왔다”고 말했다.현재 그는 계명문화대, 학생문화센터 영재원에 출강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힘겨워도 버텨야 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후학 양성도 좋지만 지쳐 쓰러지더라도 무대에 있고 싶어요. 그리고 음악을 듣는 분들이 언제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전에 없던 무언가, 그게 뭐가 될지 모르기에 계속해서 고민하고 나아갈 거예요.”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배우 박세기 “트루먼쇼 같은 내 인생, 사람이 주체되는 연극 꿈꾸죠”

올해로 13년째 연극 무대에 서고 있는 배우 박세기(35)씨는 오늘날 자신이 있기까지 영화 ‘트루먼쇼’와 같았다고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기이하리만큼 펼쳐지고 있어서다.내성적인 성격에 영화나 연극 등 연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 연기는 불현듯 찾아왔다. 군대시절 연극하다 온 후임병을 제대 직전 만나면서다.“야간 근무 중 그 친구에게 연기를 해보라고 했는데, 어둠 속 연기를 하는 그의 눈빛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때 나도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하니 그 친구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집을 전해주더라구요. 이후 말년 휴가 나왔을 때도 서점에 가서 연극 서적을 찾아볼 정도로 순식간에 매료됐던 것 같아요.”제대 후 연극을 하기 위해 막연히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찾아간 곳이 극단 고도였다.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시작했던 것 같다. 아동극 무대를 시작으로 1년 뒤 성인극 무대에 섰다”고 떠올렸다.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2008년 대구연극제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2009년 전국연극제 연기상 수상으로 이어졌다.대중적으로 누구나 하는 걸 싫어했기에 연극을 하면서도 어떤 역할이라도 개성있는 캐릭터를 입혀냈다.대구연극제 신인연기상을 안겨준 연극 ‘발자국 안에서’에서 노인 역을 비롯해 ‘녹차 정원’에서는 장애인 역할, ‘아일랜드’의 ‘흑인죄수’ 역할 등에는 그만이 낼 수 있는 색깔이 묻어 있었다.이밖에도 뇌세포, 늑대인간, 게이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냈다.박씨는 “흔한 역이라도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이 하는 것, 대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지어 극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표현하는 방식이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을 하고 다르게 연기를 했다”고 전했다.2010년 더 넓은 연극 무대를 꿈꾸며 서울로 향했다.그는 “연극을 전공한 게 아니기에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고, 다양한 연출과 작품을 만나고 싶어 고민하다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얼음조각 일을 하셨던 외삼촌의 일을 도우면서 살 곳을 마련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여러 오디션을 보고 극단에도 속해 활동했다. 힘들긴 했지만 다양하게 많은 것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수도 없이 많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음악하는 사람도, 미술하는 사람도, 무용하는 사람도 다 주체가 돼서 하는데, 왜 연극은 연극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항상 오디션을 봐야 하고, 누군가에 의해 쓰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을 때 나라는 사람이 주체가 돼서 연극을 해볼 순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그저 1인극이 아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쉽게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장소나 무대 등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서든 나의 생각이나 나의 예술성을 보여줄 수 없을까 고민 끝에 퍼포먼스나 미술적인 콘셉트를 이용해 찾거나 만들어 나갔다.지난해 대구문화재단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해서는 미술가와 무용가 등 다른 장르의 작가들과 협업하기도 했다. 단순히 장르끼리의 콜라보에서 벗어나 미술가가 연극을 해보고, 연극배우가 무용을 해보고, 무용가가 미술을 해보는 방식이다.그는 이를 ‘독립공연예술’이라 명명했다. 연극을 베이스로 하지만 최대한 연극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독립공연예술은 자신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칭찬 보다는 ‘그게 연극이냐’고 우려의 소리를 많이 들어요. 제게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정체성이 없는게 제 정체성인 것 같아요’라고 답하곤 하죠.”최근에는 인형극에도 뛰어들었다. 실직자가 된 가장의 무게를 그린 인형극 ‘구두의 요정’ 연출을 맡아 서울 가리봉동에서 열린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해 공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그의 최종 목표는 하나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이라고 했다.“‘나만의 방식, 연극은 이렇다, 예술은 이렇다’라는 걸 확립시킬 것이고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요. 새로운 사람들, 미술, 음악 할 것 없이 새로운 장르의 사람들을 만나고 작품을 접하면서 계속 공부해 나가고 싶어요.”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심윤 작가 “그저 그리고 싶어 시작…큰 그림 압도감에 매료됐죠”

벽면을 가득 채운 그의 작품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200호 변형 사이즈 3개를 합쳐놓은 거대한 크기뿐 아니라 작품에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섬세한 표현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삼키듯 압도한다. 그 섬세함은 질감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진을 인화해 걸어 놓은 듯 뚜렷하면서도 희뿌연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어둡고 짙은 색감은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더욱 크고 선명하게 만들어낸다. 심윤(39)작가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게 없다면 작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고 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이미지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 색도 걷어냈다. 자칫 색이 이미지를 산만하게 할 수 있어서다”고 전했다. 줄곧 대작들을 그려온 이유에 대해서는 큰 그림이 주는 압도감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큰 그림을 보고 매료돼 큰 그림 작업을 시도했던 것 같다. 작업실 여건만 된다면 더 큰 그림도 그리고 싶다. 작품 수가 늘어나면서 보관하다보니 작업 공간이 좁아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말하며 웃었다. 심 작가는 남들보다 늦다면 늦은 시기,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과는 거리가 먼 이과대학 화학과에 진학했어요.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고 학사경고를 두 번 맞고 제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그림에 대한 목마름은 이어졌고 군 제대 후 재수를 결심하고 미술학원에 다니며 미대 입학을 준비했다. 묘사하고 표현하는 데 흥미를 가졌기에 영남대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학부 졸업 후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미술 공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동대학교 대학원 서양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심 작가는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 영화나, 다큐를 보기 좋아한다. 보다가 사로잡는 이미지들을 캡쳐해놓고 작품에 활용한다. 또 직접 사진으로 찍어 두는 등 수집해놓은 이미지를 전시에 따라 작품화한다. 유화 물감을 희석해 도료를 넣고 그리는데 주로 붓으로 그림을 그린 후 뿌연 효과와 함께 묘사가 가능한 에어브러쉬로 마무리한다. 붓터치 흔적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말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해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창 개인전 ‘리틀 보이’를 준비 중이다. 다음달 4일부터 열흘간 대구예술발전소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단어의 이중성에 대한 신작 10여 점으로 구성된다. 전시명 ‘리틀 보이’는 1954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인류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에서 따온 것으로, 군인이나 무기 등 전쟁의 이미지를 작업화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또 다음달 21일부터는 대구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청년미술프로젝트 ‘YAP’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의 미술 공부를 향한 열정은 가르침으로 이어지고 있다. 왕성한 작품 활동뿐 아니라 2013년 경북예고 디자인과 출강을 시작으로 영남대학교 회화과에 출강해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는 것. 심윤 작가는 “여러 기법을 통해 나만의 고유성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나가는 작업이 무게감 있는 작품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속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