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유교마을에 뿌리 내린 기독교 정신

안동은 경북 북부의 관문으로 내륙으로 들어서는 사방의 길이 다 열려있다. 20세기 초엽까지는 더욱 그랬다. 동쪽의 울진, 영덕에서 국토 안으로 깊숙하게 접어들려면 안동을 거쳐야 한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나그네들은 통상 두 가지 길을 선택하는데 영남좌로인 죽령을 넘어 영주-안동으로 들어서기도 하고 중로인 새재-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안동의 북쪽과 서쪽 길이 모두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런 안동을 조망해 보면 지역 구성이 자못 흥미롭다. 시 외곽에는 400~500년 족히 넘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내앞마을, 하회와 소산마을 그리고 봉정암과 학봉종택 등이 안동 외곽의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그들 고택군을 지나 한걸음 안동시내 중심으로 들어서면 다른 지역의 도심과 마찬가지로 높고 낮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속에 유독 두 개의 건물은 고건축물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 중 하나는 목조 건물인 태사묘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풍의 석조 건물인 안동교회다. 태사묘가 고려 건국 공신 세 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라면 11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안동교회(안동시 화성동, 등록문화재 654호)는 기독교 예배당이다. 결국 안동지역은 동심원 속의 바깥원은 전통의 고택마을, 중간원은 현대식 생활 건물군 그리고 중심원은 사원 건물로 배치된 듯하다. 안동의 여러 고건축물들은 하나 같이 제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지켜온 시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유학의 본산인 안동에 세워진 안동교회의 내력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기독의 길을 연 김병우 김병우는 안동의 서쪽 풍천 어담골의 한미한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기부터 밭을 갈고 논을 메면서 평범한 촌부로 성장했으나 짬짬이 가학으로 사장의 글귀만은 놓치지 않았다. 청년기에 이르도록 김병우의 생활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집 밖의 세상사는 물살같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일본 경찰들이 들어와 상투머리를 짤막하게 깎으라고 윽박지르는가 하면 조선이 곧 일본의 속국이 되고 말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또한 서당이 없어지고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글방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의성과 일직 그리고 풍산 지역에도 서양 사람들이 만든 야소교를 믿는 장소가 생긴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병우는 문득 문득 마당 밖 넓은 곳으로 뛰쳐나가 달라져 가는 세상사를 보고 싶었다. 그냥 묵묵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맨몸으로 변화의 물결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닮은 채로 꽁꽁 묶고 있는, 고루하고 낡은 것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늦봄, 하얀 솜가락 같던 싸리꽃이 지고 산도화가 화사하게 피어나던 날 청년 병우는 풍산 장터에 나갔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대장간 앞에서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키가 크고 콧날이 오뚝할 뿐 아니라 머릿결이 노랗고 눈빛이 파란 게 아주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둘러싼 장터의 여러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이 어찌 저리도 하얄까. 참 별 사람이 다 있네. 어디서 온 사람일꼬.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인가 보네’, ‘아니야 구라파 사람이지’라며 한 마디씩 수군거렸다. 그러나 병우는 그 서양사람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이 어리고 있음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지만 결국 한 마디의 말도 섞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 혼을 빼앗긴 바라보았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는 1893년 4월, 부산에 입향해 한 달 동안 경북 북부지방까지 기독교의 미답지역을 여행하고 돌아간 영남의 최초 선교사 배위량(W.M.Baird)이었다. 그 후 김병우는 처음 만났던 그 이국 사람의 얼굴이 문득문득 빛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야소교인가 하고 상상해 보면서 은연중 자신을 채찍질하며 독백하는 버릇이 생겼다. -두려워 말고 이곳을 떠나리라. 나의 집안과 나의 방 그리고 나의 관습과 과거로부터 벗어나 맨몸으로 떠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1903년, 김병우는 대구선교부 경북북부 지역 책임자인 방위렴(W.M.Barrett)을 만나 신세계나 다름 없는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 풍산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만난 병우는 복음을 맞이한 댓가를 톡톡하게 치러야 했다. 대문간에 십자가를 내 걸고 찬송가를 부르던 병우를 마을 사람들은 숫제 역귀로 몰아세웠다. 가까운 친인척까지 합세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우리 마을이 역귀에 들었습니다. 야소교도의 집을 불태워 버립시다.” “병우를 잡아 마을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십자가를 붙인 병우의 초가집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병우는 더 이상 마을에 머물 곳도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마을사람들의 등살에 밀려난 김병우는 풍천과 인접한 소산 마을로 들어갔다. 일가들이 사는 곳이었지만 그곳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추웠지만 하나님이 자신과 동행한다는 믿음으로 가는 길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더 넓은 마을로 나가자.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안동 읍내로 나가 오직 예수님과 함께 살리라….’ 믿음을 향한 김병우의 신념은 더 굳건해져 나갔다. ◆안동교회의 첫 예배 교회중심에 있는 유적지 안내도. 땅거미가 풀리기 시작하는 새벽, 그래도 골목길에는 어둠이 사라지지 않았다. 말끔하게 세수를 한 김병우는 참빗으로 머리를 다듬고 틀어 올렸다. 그리고 지난 날 방위렴에게 얻은 청나라 판 성경책을 펼쳤다. 문풍지를 타고 들어오는 바람결에 등잔불이 일렁거렸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의 한 구절을 읽고 묵상하던 병우는 그날따라 지난 날, 예수를 좇다 갖은 수모를 이겨 내고 안동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묵상을 멈추고 난 병우는 성경을 덮고 머리맡에 둔 둥그란 소가죽 북을 꺼내 둥둥 울렸다. 그리고 말끔한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옆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금새 찾아든 7명의 교도들을 정중하게 맞이한다. 자신을 포함해 남자 넷, 여자 넷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환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기도문을 봉송하였다. 1909년 8월, 안동 서문 밖 기독서원 다섯 칸짜리 방에서 김병우를 비롯한 8명이 처음 하나님을 경배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안동교회는 김병우를 필두로 안동지역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본산이 된 것이다. 한해 두 해 세월이 지나갈수록 성도의 수가 75명, 200명, 400여 명에 이르도록 급증해 나갔다. 그 다수가 안동의 양반 자제들이고 조선시대 관리의 후손들이다. 예배의 자리가 비좁기만 하였다. 1937년 이른 봄, 안동읍내의 꽤나 번잡한 거리인 화성동에 화강암 석조 2층 건물이 서서히 지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높이 쌓아져 가는 큰 집의 외벽을 구경하느라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곤 한다. 한참 쳐다보던 어떤 이는 ‘무슨 집이 돌집이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렇게 높은 집인데 대문은 측면에 있나 보네’ 하면서 자신들이 처음 마주하는 익숙지 않은 느낌을 숨기지 않고 내뱉곤 한다. 안동교회로 사용될 이 건축물은 주변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단순히 외형뿐만 아니라 높이와 지붕 모양 그리고 부재로 쓴 석물까지 단연 눈에 확 띈다. 우리네의 전통 집 형태와 전혀 다른 대문 등은 모두 보는 이들을 낯설게 한다. 성도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예배처소를 넓혀 나가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그 여섯 번째로 지어진 것이 곧 현재 모습의 2층 돌집 예배당인 안동교회이다. 서울 태생으로 안동에서 15년째 담임목사로 있는 김승학 목사는 교인들이 순후하고 신실하다고 말한다. 그와 장시간 교회의 내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전통의 추로지향(鄒魯之鄕)에 기독교가 그렇게 일찍 접목될 수 있었던 연유가 이해되면서 의구심이 풀렸다. 오랜 세월 동안 유학적 선비문화가 깊이 밴 안동 지역사회는 기독교를 배타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신학문 세계로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학습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식을 잘 습득하는 훈련된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오히려 더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들불 속 주인 구하다 죽은 개 이야기…사람들 감동해 ‘구분방’ 이름 붙였다네

바람이 불었다. 떨어진 나뭇잎이 고분군을 덮고 있었다.고분군 사이 길에 쌓인 떡갈나무 낙엽을 밟는 발걸음이 포근했다. 낙엽은 나뭇잎의 주검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들이 떨어진 낙엽을 보고 있었다.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잎 돋아나 녹음의 한때를 출렁일 것이다. ‘순환’이란 말이 떠올랐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삶을 위한 죽음은 장엄하고, 죽음을 위한 삶은 처연하다. 자연사든 인간사든 무릇 생명가진 것들의 가치 있는 운신(運身)은 장엄하고 처연하다. 역사 속에 누워 있는 고분군이, 고분군을 뒤덮은 나뭇잎의 주검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살피게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죽음은 삶을 되 비추는 거울임이 분명하다. 의구총을 찾는 길에 고분군에 들렀다. 사적 제336호로 지정된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은 의구총과 지척에 있었다.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이라고 한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낙동강 동편 해발 700m의 구릉지대에 1번에서 205번까지 이름 대신 번호표를 달고 누워 있었다. 원래 낙산 일대는 가야시대와 신라 진흥왕 때 일선주(一善州)의 소재지로서 대규모의 가야, 신라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곳, 금동제 귀고리와 가야시대 등잔, 토기 등의 부장품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낙산리 고분군은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 묘지로 추정된다. 그 이유야 무엇이었든지 불문하고 그 흔한 비석과 비문, 근사한 문체로 새긴 이름 석자가 없는 무명씨(無名氏)들의 무덤이어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덤의 주인들인 토착지배 세력들 간의 크기를 가늠할 길 없으므로 죽음은 참 공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년 세월을 거슬러 우리 곁을 찾아온 선사시대 정경처럼 고분군이 주는 조용하고 포근한 느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는 개의 무덤이다. 개 무덤 뒤에 있는 의구도 네 폭은 주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친 개의 충직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떨어진 나뭇잎은 새봄을 약속하고 이름 없는 고분군은 삶과 죽음의 공평함을 일깨운다. 의구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1994년 9월29일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된 의구총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 25번 국도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든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연향(延香, 지금의 해평 산양)에 사는 우리(郵吏) 노성원(盧聲遠)은 영리한 개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노성원이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때 들불이 나서 주인이 타죽을 위험에 처하자 개가 꼬리에 물을 적셔와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는 기진하여 죽었다. 깨어난 노성원이 감동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다. 후세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칭송하여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고 불렀다. 원래 있던 의구총 자리는 1952년 도로에 편입되어 공사 중 비(碑)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아울러 수습하여 일선리(一善里) 마을 뒷산으로 옮겼다. 그러다 또다시 일선리 마을이 조성되자 1993년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현 위치로 옮겼다.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의열도’에 있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이고,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의구 설화는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구미의 의구 설화는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유형, 즉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에 속한다. 이러한 전설은 여러 지방에 전하고 있지만 봉분이 남아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1994년 선산군에서 향토문화재 보전과 국민의 사회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정비하였다. 의구의 이야기는 사람 사는 세상에 크게 귀감이 되는 것이어서 1665년(현종 6) 선산부사 안응창이 고을 노인에게 의구 이야기를 듣고 ‘의구전(義狗傳)’을 지었고, 1745년 박익령이 화공에게 약가(藥哥)의 정열(貞烈)을 그린 ‘의열도(義烈圖)’ 4폭과 함께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하여 ‘의열도’에 첨부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낙산리 의구총에 관한 이야기는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청구야담’, ‘파수록’, ‘한거잡록’, 심상직의 ‘죽서유고’ 등에 기록, 전승되고 있다. 주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의구설화의 유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분포 지역 또한 광범위하다. 의구설화의 소중함을 보존, 전승하려는 노력과 필요성이 오랫동안 널리 있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곳 없이 개만큼도 못한 인간사의 행태가 그만큼 누적되어 왔다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하겠다. 고려시대 최자가 그 노래의 창작 동기를 ‘보한집’에 기록한 바, 무덤을 만들어 죽은 개를 장사 지내고 김개인은 아래와 같은 ‘견분곡(犬墳曲)’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人恥時爲畜)/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公然負大恩)/ 주인이 위태로울 때 주인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主危身不死)/ 어찌 족히 개와 한 가지로 논할 수 있겠는가(安足犬同論)//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의구설화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처럼 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또한 오래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대표적 욕설인 개**에서부터, 제 버릇 개 못 준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드린다, 개밥에 도토리, 개 팔자가 상팔자, 개가 똥을 마다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죽 쒀서 개 준다, 개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등의 속담을 지나, 무질서와 중구난방과 오합지졸을 지칭하는 개판, 여의도 정치를 두고 흔히 사용하는 야합이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무수하다. 개가 폄하의 대명사가 된 것은 웬일일까. 개의 생태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편견으로 말미암은 것일까. 개의 잘못일까, 사람의 잘못일까. 그 원인과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낙산리 의구총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이 야속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야속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아도 좋겠다. 보신탕집 옛 자리에 동물병원이 들어서고, 애완견은 이제 한 가족, 한 식구가 되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가는 반려동물의 대명사가 되어있지 않은가.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애완견에게 항렬자를 따서 이름을 지어주고, 그가 죽으면 조상들을 모신 선산에 묻겠다는 이웃도 한둘이 아니다. 이와 같은 개의 지위향상(?)이 의구총 주인의 살신성인 공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되풀이 하거니와,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고분군의 낙엽과 의구총의 전설이 내게 물었다. 저밖에 모르는 야박한 인심, 궁핍한 세태를 행해 컹, 컹, 컹, 꾸짖듯 물었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우뚝 솟은 ‘범종루’ 절의 위용·규모 자랑 정체 모를 보물 품어 호기심 자아낸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된 대곡사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집 양식으로 팔작지붕 중층 누각이다. 종루에 있었던 종은 예천 용연사에 가 있다고 한다. 지금의 종은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목우 운판 법고 등과 함께 2009년 새로 건립한 범종각에 있다.워낙 규모가 커서 절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전위누각이다.2층 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 지붕이다. 특히 2층 처마 밑에는 지붕을 받치는 다포 양식에 연꽃을 조각했는데 등목 주지스님은 범종루에 새겨진 연화대야말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자랑한다.건축가들은 이 범종루가 대웅전과 같은 건축 양식이어서 대웅전 조각 수법을 모방해 건립된 것으로 본다. 범종루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대웅전은 오래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단청을 했던 기억조차 없어 보였다.대웅전과 범종루는 각각 경북도 유형문화재 160, 161호였으나 대웅전만 2014년 보물 1831호로 승격됐다.건물은 자연석을 허튼 쌓기로 해서 높은 기단 위에 동향으로 들어서 있다. 대웅전 안 천장과 벽의 단청들도 낡아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대곡사에서 펴낸 사찰지 대곡사에는 대웅전 지붕 암막새에 조선 선조 37년(1604년)을 나타내는 명문이 적혀 있어 중창시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설명한다.대웅전 벽에는 대곡사가 자랑하는 보물이라 할 53불을 그리고 이름들을 써 놓았는데 오래 돼 읽을 수가 없었다.앞문은 모두 창호지를 발라 겨울을 대비했으나 출입문이 있는 옆 벽은 기둥과 벽체 사이의 벌어진 틈새로 겨울이면 황소바람이 들어올 것 같다. 마루바닥은 조심해서 걸어도 삐걱 소리를 내면서 그 연륜을 자랑하고 있다.대웅전 앞마당에는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13층 청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연화대좌, 높이 108cm의 탑신부만 남아있다. 작은 탑이지만 전국에 12개 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경북도 문화재자료 405호)으로 범종각과 함께 보물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화강암 기단부를 시멘트로 수리하면서 아쉽게도 원형이 훼손됐다. 일부 문헌에 탑신부가 원래 13층이었으나 현재는 12층이라 했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13층이다.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 같다.범종각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면 오른쪽에 명부전이 왼쪽에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경북도 지방문화재 439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과 사자, 판관, 왕방울눈의 금강역사상이 봉안되어 있다.그러나 이들 불상과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가 불확실하고 자리조차 연구되지 않아 앞으로 대곡사의 숙제 중 하나라고 등목 스님은 말한다.◆유일하게 남은 암자 적조암대곡사에는 한때 9개의 암자가 있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절이었다.그러나 지금은 대곡사 위 1km쯤 거리의 비봉산 중턱에 있는 적조암만 남아 있다. 적조암 구포루(경북도 문화재자료 626호)는 한 모퉁이가 잘려 나갔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은 남아 비봉산의 최대 절경을 바라고 있다.자연 그대로의 원목을 사용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누각 형태의 구포루는 지금의 극락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불상을 모신 법당의 역할을 했다. 대곡사의 9개 암자는 염불암 적멸암 원적암 보덕암 양진암 봉서암 구암 회동암 그리고 적조암이었다.햇볕 잘 드는 양지에 편편하게 자리잡은 적조암은 봄이면 꽃동산이 된다고 적조암 주지 홍법 스님은 말한다. 적조암에서 맞는 아침 풍경이 정말 좋다고 한다.비봉산이 명당이라면 그중에서도 명당이 바로 적조암이라고 다인면 출향인 김부일씨는 주장한다.특히 적조암에서 아침 안개가 올라오는 맞은편 산을 보면 임산부가 막 아기를 낳는 것 같고 그 임산부의 머리에 문필봉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명당터라는 것이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대곡사를 찾아 명문 시구들을 남겼는데 그 지리나 위치로 보아 대곡사는 적조암 터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그래서인지 의성 다인에서 수많은 문인 급제자가 근세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출신 인사들을 살펴보니 검찰총장, 대법관에서부터 장관 박사 등 수없이 많다. 김부일씨도 “이곳 출신은 모두 대곡사와 인연을 맺었다”고 단언한다.비봉산이 명당이었던 것은 비봉산에서 수많은 기우제가 올려졌던 데서도 알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명곡 최석정이나 대동운부군옥을 남긴 문신 초간 권정해, 낙파 김용한 등의 비봉산 기우제문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대곡사는 대국사였다대곡사는 처음엔 대국사였다. 많은 기록들은 태행산 대국사 등으로 기록했다.지공선사와 나옹화상이 왕명으로 사찰을 건립했고 공민왕이 대국사란 이름을 내려 보냈다는 거다. 이 후 임란으로 불탄 뒤 조선 숙종조에 태전선사가 중창하고 대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김부일씨는 고려시태 국사인 나옹선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초제사찰이었고 그 이름이 대국사였으나 후에 대곡사로 바꿨다고 주장한다.그런가 하면 마을에서는 암행어사가 “대국인 중국을 두고 절 이름을 대국사로 해서는 안 된다”는 꾸중에 대곡사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대국사라고 표시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대곡사를 방문하고 쓴 이규보의 시가 동국이상국집에는 대곡사이지만 범종루 현판에는 대국사로 써서 걸려있다는 것이다.이규보는 낙동강을 따라 선산에 왔다가 대곡사에서 하루 머물며 ‘17일 대곡사에 들어가다’라는 시를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후대 사람들은 이 시가 명종 26년(1196년) 29살의 이규보가 낙동강을 따라 선산에 왔다가 8월 17일 대곡사에서 하루 묵고는 예천 용궁과 풍양을 거쳐 간 것으로 밝혀냈다. 이로써 대곡사가 공양왕 이전에 건립된 것은 확실해졌다.대곡사를 소재로 시를 남긴 사람들은 대곡사가 낙동강과 비봉산을 안고 있는 명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과 우복 정경세를 비롯한 당대 명문대가들이 모두 대곡사 관련 글을 남겼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대곡사를 찾았고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하나씩 고증해야 할 숙제가 되고 있다고 주지 등목스님은 말한다.◆배불숭유정책의 현장이었던 대곡사대곡사는 배불숭유정책의 조선시대 유림으로부터 많은 수난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시절이 그러했고 대곡사가 위치한 낙동강변 비봉산도 유림들의 세력 한복판이었고 보면 많은 문인들이 공부 보다는 풍류삼아 대곡사를 찾은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우리나라 산중 사찰이 대개 절 입구에서부터 절 뒤 산까지 넓은 토지를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곡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규모에 비해 절터가 아주 좁은 편이다.또 대곡사 대웅전 기둥에 지금까지 새겨진 이름 낙서들도 그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하회마을 화경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에 ‘대국사는 지공선사의 도량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문서는 양반 선비들의 출입금지 경고장 같다.양반들이 절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출입을 금해달라는 문서일 것이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명문조각도 발견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공선사에서 나옹선사와 무학대사에 이르는 삼화상의 영정이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과 함께 대곡사 적조암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고승들의 뚜렷한 법계가 대곡사에서 이어지고 있었음은 대곡사를 지켜온 선사들의 불심과 대곡사의 사세가 이루어 낸 성과라고 짐작한다.삼화상을 한 폭에 담은 영정은 유례가 없는 데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대 영정 중 가장 오래되고 보관 상태도 좋아 현재 보물로 승격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수많은 보물이 보관돼 있고 알려진 것보다 연구하고 밝혀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미지의 사찰 대곡사다.등목 스님은 “절의 중요한 시기인 근세 200~300년 역사가 실종된 사찰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스님은 최근 대곡사 관련 사적과 시문 등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대곡사’로 발간하고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

갈색 적삼 걸친 목조각장 자신과 닮은 불상 어루만지며 “세월 가는대로 흐르듯 왔지요”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채 연꽃을 쥐고 있는 관세음보살상. 영천시 청통면 새학길 62. 지난 10월18일 경북무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 받은 목조각장 조병현의 집이다. 문패는 물론 공방을 알리는 현판이나 길을 안내하는 입간판마저 따로 없다. 마을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찾아간 그 집 앞에 이르자 순간 발걸음이 머뭇거려진다. 불그레하게 물든 담쟁이덩굴과 활짝 피어난 보랏빛 나팔꽃 줄기로 뒤덮인 지붕과 벽이 동굴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마을 동쪽 끝자락에 선 이 동굴 같은 50평짜리 한 칸이 목조각장 조병현의 공방이자 살림집이다. ◆나무토막의 변신, 그 재미를 좇아 50년 공방 한쪽 끝에 28번째 보리달마(달마대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공방이 어지럽다. 크고 작은 나무토막과 전기톱을 비롯한 다양한 공구들 그리고 겨울 화로와 깎아내린 나무의 속살들. 나무에서 풍겨나는 목향이 방안의 너즈레함을 덮어준다. 완성된 두어 개의 목조각 불상이 눈에 띈다. 짙은 갈색 적삼을 걸치고 평상에 선 달마대사의 길게 늘어뜨린 법의에 옷주름이 선명하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나한불 목각 하나가 그 옆에서 새로 조각하고 있는 조병현의 손놀림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목조각장 조병현은 파내던 칼질을 멈추고 찾아든 방문객에게 둥글게 자른 통나무 둥치를 내밀면서 앉으라 권한다. “지금 조각하고 있는 것도 불상입니까?” “네, 그렇고 말고요. 나는 불상 이외에 다른 조각은 할 줄 모릅니다.” 명장은 어슴프레 윤곽이 드러난 불상의 머리 부분을 쓰다듬어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구렛나루로 얼굴을 온통 뒤덮은 초로의 조 명장, 그는 자신을 닮은 듯한 얼굴선의 불상을 놀이감처럼 만지고 깎으며 마음에 담은 형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미소가 닮았어요. 조 명장님의 분신인 듯도 하고….” “글쎄요. 나는 오로지 조선 후기 불상 조각 양식을 이어나가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고유한 예술 의지를 키워나가는데 만족합니다.” 조 명장은 말을 아끼 듯 아니면 방문자의 말문을 막으려는 듯 한 마디 덧붙인다. “별 이유는 없지만 그저 인연따라 긴 세월 그렇게 살아온 것이지요.” 소년 병현은 맏형이 너무나 부러웠다. 경기도 양평,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별다른 놀이감이 없었다. 그래서 헛간채 밖에 땔감으로 널부러진 장작개비를 채곡채곡 쌓았다 허물었다 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톱으로 썰어보기도 하고 자귀로 나무 속을 홈처럼 파 보기도 하였다. 가지런하게 포개어 올린 장작더미는 마치 흙담을 쌓은 둣 매끈하였고, 톱으로 켠 나무 토막은 일정하게 잘라 놓은 절편 같았다. 형은 톱과 끌 등 몇 개의 연장으로 무엇이든 잘도 만들어냈다. 지게며 함지며…. 형이 만든 것들은 모두 농가에서 편리하게 사용되는 물건이 되었다. 한번은 적절하게 마른 소나무를 잘라 속을 파내고 다듬어 마치 큰 박을 갈라놓은 듯이 알곡을 담을 수 있는 매끈한 나무 바가지를 뚝딱 만들어냈다. 아궁이에서 재가 되고 말 어줍잖은 나무 토막들이지만 형의 손을 거치면서 변신한 그 모습들이 어린 병현의 마음을 현묘하게 끌어 당겼기에 병현도 눈만 뜨면 나무토막을 만지고 놀았다. “얘들아, 너희는 타고 난 손재주가 있나보다.” “어머니, 병현이는 어리지만 저보다 더 잘 합니다.” “그래, 둘다 솜씨가 좋구나!!” 병현의 형은 다만 겸양과 칭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무토막에 대패질과 끌질을 하는 자신을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병현이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터이다. 나무를 켜고 쪼개고, 깎고 결을 파내는 일에 몰두하던 형을 따라 병현은 자신도 모르게 마치 화가의 모사 단계처럼 그렇게 초보 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비릿하면서 향긋한 내음과 따뜻하고 촉촉한 질감을 주는 나무 위에 내 손길이 모아지면 순간 하나의 쓰임새 있는 물건으로 바뀝니다. 나는 그 변신이 끌어당기는 호기심에서 도망쳐 나오지를 못했지요. 나무를 만지는 일은 어린 내가 폭 빠질 만큼 재미가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가야할 나이가 되었지만 공부는 뒷전으로 멀리 밀쳐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다 열다섯 살이 된 병현에게 아주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서울에서 이름 난 목공장인 김성수 선생(타계·노년까지 목조각 교육에 헌신)이 양평으로 내려와 목공 학원을 낸 것이다. 병현은 중학교 진학 대신 그 목공학원을 찾아 목조각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목불상의 태줄받이, 명장의 손목 나팔꽃 줄기로 뒤덮인 지붕과 벽이 동굴을 연상케 하는 조병현 목불명장의 공방. 작업실 입구에는 문패는 물론 공방을 알리는 현판이나 입간판 하나 없다. 조각은 오로지 손으로 한다. 명장은 손을 혹사(?)시킨다고 해야 옳다. 그러나 그의 손은 목불상을 받아내는 태받이 손이기에 신비롭고도 숭고하다. 불상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손이라 할 만하다. 조병현 명장의 손바닥엔 차돌처럼 단단한 굳은살이 깊게 배어있다. 50여 년 동안 끌과 조각칼을 잡은 아름다운 흔적이요 훈장이리라. 명장의 손놀림은 쉼이 없다. 원목은 큰 톱으로 켠다. 그후 잘라 낸 나무토막의 쓰임새를 재단하고는 다시 작은 톱으로 켠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의 끌과 조각칼로 나무결을 밀고 당겨서 각(角)을 없앤다. 그것이 조각의 시작이요 끝이기도 하다. 사포질을 하듯이 칼로써 불상의 몸매를 매끈하고 부드럽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조병현 명장은 늘 현재의 순간이 곧 시작이라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이제부터 나만의 세계를 더 천착해 나가야지요.” “명장이 추구하는 ‘나만의 세계’를 한번 엿들어 봐도 될까요?” “사실 초심자일 때는 하나의 목불상에 온갖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불상이 걸친 옷의 주름과 매듭의 정교함은 물론이고 다양한 수인(手印:불상의 손의 모양)을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기교를 부렸지요. 한 각 한 각을 뜨내는 데 숨가쁘게 매달렸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훨씬 단순해졌습니다. 선이 굵어졌다 할까요, 각의 숨을 느리게한다 할까요. 나의 귀착점은 곧 조선불을 조각하는 것입니다. 조선불상은 장식이 화려하지 않고 표정도 그리 환하지 않지만 그 수수함과 소박함에서 오히려 친근함을 느끼게 합니다. 예컨대, 법의의 주름 넓이라든가 채색의 단조로움 그리고 미소를 잃지 않고 현세를 극복해 나가는 단순하고도 강인한 겉모습이 그러합니다. 기교가 없는 것이 매력이지요. 나는 끊임없이 그런 불상을 내 조각칼로 다듬어 내고 싶습니다.” 조각칼을 잡을 때마다 조명장은 붓다의 거룩한 얼굴을 시대상황에 맞게 재현해보리라 다짐한다. 둥글고 밋밋하지만 턱과 빰에 약간 살이 오른 얼굴 형상에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로 하고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게 조형한다. 입은 콧망울보다 조금 넓게 표현하면서 꼭 다문 모습으로 그리고 양쪽 입술은 살짝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그는 밑그림이 없는 목조각을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밀고 당기는 칼질을 멈추지 않는다. 불상에는 시대정신과 부처님을 향한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투영되기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 이렇게 불상을 고집하는 조 명장의 조각 세계이지만 한 곳에 머물러 있다거나 자기만족으로 정체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맥주캔 같은 향긋한 나무 조각통 한 개를 집어 들어 보이며 “감실불(龕室佛)입니다”하고 내민다. 20㎝ 높이에 지름이 70㎝ 정도의 원형의 전단나무 통을 열자 고유한 나무향이 풍겨났다. 촘촘하게 목불이 새겨진 세폭병풍 양식이다. 가운데 약사여래불을 비롯하여 좌우에 10대 제자불과 12위의 신장불을 새기고 법당 내의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여래불과 보살 그리고 나한들의 표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신구이다. 감실불은 그 섬세한 조각미가 으뜸이지만 실용성도 빠지지 않는다. 바랑이나 핸드백에 넣어 휴대하기에 알맞은 크기의 감실불은 산승이나 재가 불자들이 여행할 때 사용하는 휴대불이기도 하다. 조각의 이력이 깊어갈수록 단순미를 좇는다고 하던 조 명장의 작품세계와 전혀 다른 양식을 만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정체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명장의 면면을 볼수 있었다. 다듬다 만 불상 앞에 다시 앉은 조 명장은, 영조시대 도화서의 화원이자 스님이던 의겸에서 비롯된 조선불화의 맥을 김일섭과 임석정 스님이 이어갔고 그리고 자신이 사숙한 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송헌 전기만이 그 뒤를 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송헌의 수제자이자 현재 전수조교로 있는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후계자를 기르고 싶다던 그에게 곧 인연이 닿는 젊은이가 찾아 들 것이라 기원해 주며 하직인사를 나누었다. 공방문을 나서는 방문자의 등 뒤로 유정 조병현 명장의 초승달 같이 굽은 조각칼 미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건조된 나무살을 깎아내는 소리가 마치 단감을 깎는 소리인냥 정겹기 그지 없다. 김정식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편안한 하루하루 누구 덕일까…한쪽 눈 뽑히는 고문 당하고도 끝끝내 싸웠던 의병대장 있었지

1908년 8월 17일 대전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의병장 노병대 체포에 관한 문서. “노병대(1856~1913)선생의 항일행적에는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쪽 눈을 빼어버리는 혹독한 고문에도 초지를 꺾지 않고 항거했다는 점이고, 셋째는 항일의 표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입니다.”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 열사’를 편찬한 상주문화원장 김철수 박사의 설명이었다. 노병대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것도 다 노병대 선생 같은 분이 나라를 지켜준 덕분이라며 상주가 낳은 인물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김 박사는 “선생이 남긴 글이나 문서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소실돼 선생의 생애를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노병대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 선생의 아우, 후재 노극신 선생의 13대 주손으로 1856년 12월4일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재조(才操)와 기국(基局)이 범인과 달라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며 성장했다.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의 행적은 존성상현(尊聖尙賢)하려는 유학자로서의 자세와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대장으로서의 활동으로 요약된다. 1895년 선생은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고 1898년 정월 허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진사 허운과 함께 도움을 청하러 중국 곡부를 찾아간다. 사람을 시켜 성묘(聖廟)일을 고했으나 공자의 72세 손 연성공은 병을 핑계 삼아 나타나지 않는다. “부자(夫子)의 가학(家學)이 어찌 이토록 오만하기에 이르렀는가?” 선생은 편지로써 연성공의 무례함을 꾸짖는다. 선생의 기개에 놀란 연성공은 사과를 하고 옛 친구처럼 맞아 수 십 편의 시(詩)를 주고받으며 교유한다. 연성공의 편지를 받아 조정과 태학(太學)에 전했지만 향교 향사의 회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림의 법도를 지키려는 선생의 발걸음은 멈춤이 없었다. 호남지방에는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을 정도로 당시 향교 부근에는 범장(犯葬)된 묘가 많았다. 선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해 모두 옮겨가도록 한다. 이렇듯 선생은 유학자로서 반듯한 자세와 숭고한 정신은 철저한 것이었다. 나라 안의 일을 나라 밖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는 자세나 향교에 대한 배타적 존중에 대한 옮고 그름에 대해 살피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학자로서 선생은 주자주의에 눌러앉은 공리공론의 관념론자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고종으로부터 밀조 받아 노병대선생과 500여 명의 의병들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던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전투를 벌인 후 의병들은 상주로 철수했다. 선생의 의병활동 일지의 대강은 이렇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참정대신 민영환은 자결하고, 지사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황성신문에 발표한다. 조야는 물끓듯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노도처럼 일어난다. 선생은 북향통곡하고 상경해 전 판서 이용원을 만난다.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를 하겠다”고 간청한 끝에 선생은 고종 임금으로부터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비서원 비서승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를 받는다. 1907년 8월20일 해산된 진위대 2백여 명을 규합, 속리산 계곡에서 창의한다. 해산병 수백 명이 추가로 합세해 의병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른다. 선생의 의병대는 충북 보은에서 적 2명을 사로잡고, 청주 미원에서는 5명의 적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린다. 적의 공격을 피해 상주 청계사로 진을 옮겼으나 적병의 급습을 받아 진영을 미원으로 옮긴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경북 성주, 경남 안의, 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투쟁을 하다가 거창의 우두령에서 크게 패한다. 속리산으로 귀환했을 때 남은 의병은 겨우 50여 명이었다. 1908년 7월13일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하던 중 보은군 관기면에서 왜군 수비대에게 체포된다. 왜군의 문초에도 선생은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는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희들의 종자를 없애고자 창의하였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의병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서 온갖 고문을 다했으나 자백하지 않자 왜군은 왼쪽 눈을 뽑는 만행을 저지른다. 1908년 9월1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기소돼 10년의 유형을 선고 받는다. 재판부는 선생에게 “이런 형벌은 너희 임금이 시행하는 것이니 우리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하자 선생은 대노하여 “우리 임금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으랴?”하고 꾸짖는다. 분을 참지 못한 왜적들은 선생을 형무소로 보내는 한편, 종자(從者)들을 시켜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에 있는 공의 야로당(野老堂) 종택을 불태워 버린다. 길거리로 내몰린 가족들은 호구지책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의 출옥은 기약도 없고, 집도 가재도 모두 잃은 부인 김씨는 사랑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1905년부터 8년간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답 300두락과 산 8필지 약 250정보 등 많은 재산을 모두 소진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특사로 강제 출옥 된다. “너희들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 “나는 내 나라를 구하려다 도적떼와 같은 너희에게 체포되어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옥중에서 죽어 금수만도 못한 네놈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며 끝까지 저항한다. 출옥 후 선생은 의병활동을 위해 군자금 모집을 시작한다. 1912년 11월 18일,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류참봉가에 군자금 협조를 부탁하고 왜병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총기를 휴대시켜 잠입시킨다. 총기 휴대 사실이 누설되어 1913년 3월12일 강도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돼 1913년 6월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는다.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한다. 1913년 6월6일 피를 토하며 감옥에서 순국한다. 선생의 나이 58세, 단식 28일만의 일이었다. 왜군들은 “강도 노병직(그의 옛 이름)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라고 발표한다. 정부에서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노병대 의병대장 알지 못해 안타까워 현재 포도밭으로 변한 생가터. 해질 무렵 화동면 이소1길 선생의 추모각 앞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후손 노진영(68)씨를 만났다.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는 뜻으로 추모각 대문에 늘 태극기를 걸어둔다고 했다. 1년에 한 차례씩 거행하는 추모행사 때 교통정리를 해주는 지구대 경찰들마저도 할아버지가 무엇을 한 분인지 모른다며 섭섭해 했다. 선생의 의로움을 돌에 새긴 순국비의 끝부분은 이렇다. “빛나는 노공이시여!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었도다. 다만 나라가 있음만 알고 내 몸은 생각하지 아니하였구나. 해를 꿰뚫는 곧은 충의는 문폐(文陛)와 같은 차례이다. 비석에 크게 새겨서 이로써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노라.”(장병규, 열사 금포 광선노공, 순국비명 부분) ‘다만 내 몸이 있음만 알고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못난 후손들을 채찍질하는 아픈 훈계이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오체투지하듯 40년째 엎드려 작업…흙·나무·베 재료로 마음속 부처님 그려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불화 그리는 일을 하늘의 소명이라 여겼다. 한 번 붓을 들면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는 줄 몰랐다. 하나의 색을 내기 위해 서너 번의 채색. 다시 색을 입히기까지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몸과 마음을 닦고 오체투지 하듯 엎어져 작업한 지 40년. 마음속 부처님을 꺼낼 정도로 내공이 여물어 갔다.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불화작업을 해온 김종섭씨는 지난 2016년 5월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39호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불화 분야로는 도내에서 유일하다. 전국에서 무형문화재 불화장으로 지정된 장인은 모두 네 명으로 김씨는 그 중 한 명이다. 불화장은 불화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단청장으로서 모든 일을 했기에 금어(金魚)나 화승(畵僧), 화사(畵師) 등으로 불렸다. 한동안 불화는 단청장 보유자에 의해 전승됐다. 그러나 종목 특성상 2006년부터 단일종목으로 분리돼 무형문화재로 불화장이 지정됐다. 김종섭 장인은 하늘재 아래 고요한 산중에 묻혀 불화를 그리며 홀로 지낸다. 그는 충남에서 태어나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불화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스님으로 출가해 3년 정도 수행한 적이 있는데 군종법사로 제대를 하고 동국대, 불교대 등 대학에서 불교미술 강사로 활동해 왔다. 보응 문성스님, 1972년 단청장으로 지정됐던 일섭스님, 그의 수제자인 김익홍으로 이어지는 사승관계를 거쳤다. 불화를 그리는 이는 종교적 열정뿐 아니라 예술적 자질이 조화를 이뤄야 진정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형문화재 불화장이 되기까지는 그만큼 신심이 맺혀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의 불화 및 근현대기 불화승의 초본과 유작을 바탕으로 전통불화의 기법을 재현한다. 자신의 작업장에 ‘관음불교미술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며 불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불교 미술을 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모든 것을 다 전해줄려고 준비하고 있으나 불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가 문경읍 관음리에 자리 잡은 연유는 지명이 관세음보살의 발음과 같아 마음에 들었다. 또 다른 이유는 오래전부터 불교관련 화맥으로 이름 높은 사불산 대승사와 운달산 김룡사가 가까워 이 땅에 왔다고 한다. 3년에 걸쳐 완성한 ‘500 나한도’는 길이 21m에 달하는 불화 작품인데 모두 다른 나한상이 담겨 있다.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그린 수많은 불화들은 우리나라 전국 곳곳 절집 법당의 내ㆍ외부를 장식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10년 전에 그린 ‘500 나한도’는 지금도 불화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21m에 달하는 이 불화는 3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제각각 모두 다른 500의 나한상이 한 폭에 담겨 있다. 김종섭 불화장은 가능하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물감을 사용한다. 포항 장기면에서 구한 돌을 갈아서 낸 석채. 청록색을 낸다. 수많은 불화를 작업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한 가지가 있다. 가능하면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장 앞에는 전국을 다니며 구한 돌과 흙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화학안료와 달리 자연안료는 돌을 갈아서 낸 석채로 색을 낸다. 인체에 유익한 기가 발산되는 걸로 알려져 예부터 유용하게 이용됐다. 불화의 바탕은 흙, 나무, 베, 종이, 금속, 돌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하다. 이러한 재료의 성질은 불화의 기능은 물론 교리적인 면에까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보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불화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압축하여 표현한 그림으로, 불탑과 불상 등과 함께 불교 신앙의 대상이다.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벽화와 탱화, 경전에 그린 그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이나 비단 또는 삼베에 불교 경전 내용을 그려 벽면에 걸도록 하는 탱화가 주류를 이룬다. 불화는 단순히 아름다움이나 선함만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며 불교 이념에 따른 내용을 그려야 하는 성스러운 분야이다. 좁은 의미로는 법당에 걸어 놓고 예배하기 위한 그림을 말한다. 경전의 내용을 설명적으로 나타낸 그림과 법당의 내 외부를 장식하는 그림도 넓은 의미의 불화에 속한다. 불교가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가장 성공적인 불화는 이러한 장면을 가장 멋지게 그린 그림이 가장 명작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불화들은 대부분 18~19세기의 것이다. 오히려 일본 등 외국에 고려시대나 조선 초기의 불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불화는 권문세족과 관련되어 귀족적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고 고귀한 금선과 밝고 찬란한 채색을 주로 해서 그려져 있다. 이들 불화는 고귀하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불화의 특성은 비슷한 색상과 좌우 대칭으로 볼 수 있다. 빨강ㆍ녹청ㆍ군청이 주조색이면서 황토와 백록색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대체적으로 안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중앙에 그 불화의 주인공을 크게 표현하고 좌우에 여러 보살과 신들을 대칭되게 그려 넣는다. 김종섭 장인은 불화와 파랑새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었다. 지금부터 약 5백 년 전의 일인데 강진 무위사 주지스님은 곤혹스러웠다. 완공된 극락보전에 벽화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었다. 마침 한 노스님이 찾아왔다. “그 벽화는 내가 그릴 테니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그는 한 달이 지나도 법당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궁금했던 주지는 48일째 일을 그르쳤다. 문틈으로 몰래 안을 엿봤는데 노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파랑새는 사라졌다. 관세음보살의 점안만 남겨둔 상태였다. 김 불화장의 작업실에 놓여있는 수많은 붓. 그는 이 붓에 정성을 담아 불화 작업에 임한다. 국보 제313호 후불탱화 아미타여래삼존불도에 묘사된 관세음보살에는 현재 눈이 없다. 왜 하필 관음보살이고 파랑새일까. 불화에 걸린 화두이다. 붓끝에 서린 신심으로 부처님을 그리는 그 정성에 사심이 끼어선 안 된다는 경책으로 본다. 사람의 능력 밖에서 지극정성으로 그린 까닭에 관음보살의 분신인 파랑새를 등장시킨다.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막힘없이 그린 그림을 불화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김씨는 제일 그리기 어려운 부분이 부처님 얼굴 상호 부분이라고 한다. 불화 작업 중 언제나 마지막에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소중하게 다뤄야 할 부분인 만큼 마지막에 정성 들여 기도하고 지극한 마음이 채워질 때 붓질을 한다. 그래서 하루에 3, 4번이라도 별도로 마련한 불단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한다. “삼가 귀의하옵고, 무지랭이의 손길 따위로 어찌 부처님 존안을 더럽히겠습니까마는, 어차피 색즉시공이니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더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당신의 밝은 눈만이 색을 깨치고 공을 채웁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림에 기운이 깃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파랑새 설화는 삿된 마음으로 하는 붓질은 안 될 일이고 붓끝에 정신을 집중하여 표현한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작가 자신이 느끼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불화는 극적인 순간을 보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불화를 그리는 일이 불자의 수행과 같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가 현재 작업실로 쓰고 있는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사이 하늘재는 예로부터 군사요충지였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전쟁터였고 임진왜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의병이 숨진 곳이었다. 수천의 한이 서린 곳에서 불화를 그리는 그는 2005년부터 매년 11월 사비를 들여 하늘재에서 불교식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영혼들의 원혼을 달래고 극락왕생을 비는 이 일을 하늘재와 맺은 인연의 업보쯤으로 여긴다. 장인의 작업 모습을 본다. 엎드린 자세로 가늘고 긴 선을 그려내려면 장시간 고도의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종일 엎드려 작업하다 보니 허리가 휘고 관절이 아프지만, 그는 불화장을 천직이라 생각한다. 조심스럽고 경건한 이 시간이 행복하다. 극도의 섬세한 붓질로 표현한다. 삼각형, 마름모, 원의 기하학적 패턴이 중중무진으로 중첩하고 무한히 연속한다. 연기법계의 그물망이다. 그의 불화에는 성스러움의 영성이 충만하다. 선 하나하나에도 정신과 혼을 담아 시대의 문화재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초월한 장엄의 성스러움으로 한국 불화의 맥을 이어 나간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대종 있다는 감포앞바다 바람 불면 ‘웅~’ 우는 소리…“나 구해달라” 간절하게 들리네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최윤섭 전 경주 부시장을 만났다. 보물이 실렸다는 러시아 선박 돈스코이호 인양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무렵 황룡사 대종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황룡사 대종이 아직도 감포 앞바다에 묻혀 있느냐고 물었다. 머뭇거림 없이, 노력과 기술이 부족해서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들려준 황룡사 대종 찾기 전말은 이렇다. “이상 물체 발견!” 레이더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크기 2m가량의 타원형 물체가 레이더에 잡혔다는 보고를 받은 함장은 즉시 침투조 5명을 투입시켰다. 배를 타고 뒤쫓던 모 방송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룡사 대종이 천 년의 비밀을 벗고 세상에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97년 5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 타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만든 장엄한 평화의 대종소리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에 땀이 났다. 침투조가 황룡사 대종 발견 소식을 들고 나올 6~7분 안팎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망망한 바다 위를 밭이랑 갈 듯 누비던 허탈과 실망의 나날들, 20여 일의 가슴 졸이던 일들이 무성영화처럼 흘러갔다. 해군 탐사선의 작전 허락 기간이 닷새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는 소주 한 병과 북어 포 한 마리를 사들고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 제발,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세요. 어머니는 제가 바라는 것 다 들어주셨잖아요.” 경주 일대의 사찰들이 간절하게 올리는 불공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독교 신자의 조언도, 대종 찾기를 바라는 언론의 관심도, 마을 어른들의 전언도 끝내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지 못한 뒤의 일이었다.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어머니께 우리 집엔 왜 용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뒤뜰 항아리를 열고 용을 보여주셨다. 몸체는 꿈틀거리는 용이었으나 완성되지 못한 입 모양이 특이했다. 병아리 부리처럼 노란 입으로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이한 꿈이었다. 어느 날보다 더 환한 아침이 밝았다. 분명 오늘은 대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를 설레게 했다. 종뉴(鐘紐)는 모두 용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는 함장에게 문무수중왕릉 뒤쪽을 샅샅이 살펴보자며 탐사선에 올랐다. 용이 있었던 뒤뜰이 수중왕릉 뒤쪽과 겹쳐보였던 것이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룡사 대종 삼국유사에도 전해져 타원형 모양의 2m 크기의 이상 물체는 황룡사 대종이 분명할 것이었다. 삼국유사권3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만든 황룡사 종은 그 무게가 49만7천581근이나 되는 실로 거대한 종이었다. 종뉴의 길이를 제하고 나면 그 크기는 2m 정도로 추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투조가 확인한 이상물체는 타원형의 바위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꿈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렁이는 바다가 야속하기만 했다. 허망했다. 그의 고향은 경주시 양북면이다. 마을 어른들로부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봉길리 바다 쪽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 또한 멱을 감으며 놀다가 바다 쪽에서 웅~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 종소리는 고래가 우는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목소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종 이야기를 쓰고 있다. 황룡사 대종은 에밀레종(사진)보다 5배 이상 컸다.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을 불태운 몽고군이 황룡사 대종을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대종은 에밀레종보다 무게가 5배 이상일 정도로 컸다. 이 작전은 바닷길이 아니고는 운반이 불가능해 대종을 뗏목에 싣고 강에 띄워 바닷가로 운반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바닷가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만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았고 이후 이 하천을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황룡사의 역사를 읽고 여몽전쟁사를 공부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창건이 시작되어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이르기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동양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근대에 가장 높았던 80m가량의 9층 목탑과 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 그리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대종으로 유명하다.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된 황룡사지에는 건물과 탑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들만 남아 있다. 1963년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6호로 지정되고,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7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기와를 비롯한 금동불, 풍탁(처마 끝에 매다는 장식물), 금동귀고리, 유리 등 유물 4만여 점이 출토됐다. 몽골군들은 왜 50만 근에 이르는 그 무거운 종을 가져가려 했을까? 세계정벌에 필요한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서? 군사적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가 욕심이 나서? 오랑캐 종족에게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그만한 이해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왜 전란의 와중에 무거운 종을 메고 토함산을 넘었을까? 내 궁금한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리 짓밟아도 끝내 짓밟히지 않는 고려인들의 대몽항쟁, 그 원동력의 불가사의한 출처를 황룡사 대종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요? “섬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면서 백성과 장정을 칼과 화살에 죽게 만들고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와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장계(長計)가 아니다” 라고 조정의 강화도 천도를 저지하려던 종2품 문신 참지정사 유승단의 기개, 서슬 푸른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의 집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군사 양식이 풍족하니 천도는 불가하다”고 외치다 그 자리에 참수당한 삼별초 부대장 김세충의 결사항전의 용맹이 대종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그의 추정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지만 대몽항쟁은 끝없이 전개되었다. 1206년 건국 이후 불과 50년 만에 모스크바를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집어삼킨 몽골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은 나라 고려를 정복하지 못했다. 국토를 초토화하고 백성을 짓이겨도 항복을 거부했다. 고려는 몽골에게 불가사의한 나라였던 것이다. 외세를 무찌르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과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킨 문무대왕의 문두루비법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몽골 군사들에게 황룡사 대종은 예사롭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꼈을지 모를 일이었다. ◆종은 국태민안의 상징 종이란 무엇인가? 종이 울지 않자 한 여인의 무남독녀를 쇳물 가마에 넣어 만들자 울었다는 에밀레종,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자 나타났다는 돌종, 부부가 그 돌종을 치자 웅숭깊은 소리가 왕에게까지 들려 집 한 채와 벼 50석을 하사받았다는 모량리 사람 손순의 종. 불가에서는 우주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무병장수와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종을 친다고 한다. 종이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국태민안의 상징이다. 그것이 황룡사 대종을 찾아야 할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서 최윤섭 전 부시장에게 소주 한 잔 하자고 권했다. 건강검진이 약속되어 있어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황룡사 대종 찾기를 다시 하겠냐 물었다. “전설 속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 기록했다는 것으로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습니다.” 구전되는 전설은 구전자와 함께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의 대종탐사기는 기록되어 있어 지워지지 않을 테니 다행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돈벌이와 관계없이, 감포 앞바다에서 벌였던 순정한 그의 대종탐사기가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나무 밑동 금줄 마디마디 ‘하얀 소원’… 백발 삼신할매 벙긋 웃으며 들어줄듯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하회마을을 조감하면 마치 한 조각의 감나무 잎 같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감나무 잎은 잎몸이 타원형이고 둘레가 부드럽다. 잎자루가 단단하고 잎맥이 고루 대칭을 이루면서 잘 발달되어 있다. 감나무 잎자루를 손거울 잡듯 바로 잡고 잎 속을 들여다보면 실핏줄 같은 잎맥이 중심선을 기준으로 좌우, 가로ㆍ세로로 살아서 움직인다. 감잎 형태의 하회마을 가운데 잎맥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오른쪽 끝단에 충효당이 그리고 왼쪽 끝단에 양진당이 자리하고 그 중심에 삼신당(三神堂)이 위치한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지나갔다. 일행 3명이 하회마을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하회를 처음 찾는 이들이었다. 일행들은 물병 하나를 든 채 마을을 샅샅이 살피듯이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골목길로 숨어들어 마침내 출구를 찾지 못한다. 미로를 헤매듯 했다. 땀이 젖은 얼굴을 서로 마주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그린다. 130여 호 남짓한 집들과 흙담, 그리고 담 사이사이 실개천 같은 골목길에서 일행은 모두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등줄기와 가슴팍에는 이미 땀으로 강물이 되어 흠뻑 젖어 있었다. 일행들은 어느 막다른 골목길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지도를 손에 쥐고 있던 여행작가 김청운 선생이 마을 지도를 펼치면서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구조가 절묘하네요. 모두들 마을 당나무를 찾아갑시다.” 그는 지도에 표시된 삼신당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삼신당에는 반드시 크고 오래된 나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마을의 중심 터일 것이니 빠져나가는 길 표시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일행은 하회의 남촌댁 북쪽으로 난 흙담 길을 따라 삼신당이 있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정오의 햇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른 흙담조차 녹아내릴 것만 같다. 담을 덮어 놓은 숫기와 위로 하얗게 마른 석화가 피어났다. 붉은 모래흙으로 된 길바닥에서 작은 먼지가 일었지만 싫지 않았다. 도회에서 좀처럼 체감할 수 없는 황토가루, 일행 중 한 사람이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기 시작하자 모두 따라했다. 발바닥 찜질이다. 마침내 일행들은 자신들의 키보다 높은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의 담과 솟을대문 앞을 돌아 마을 한가운데 있는 삼신당에 이르렀다. 당집이 아니라 느티나무다. 높이가 15m, 몸 둘레가 5.4m가 되는 당나무는 노목인데 새끼 금줄로 자신의 허리둘레를 동여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찾아드는 모든 사람들이 영험이 있는 신목으로 믿고 있다. 당나무는 600여 년 전 이 마을의 입향조 류종혜가 심었다는 전설을 안고 성장한 건강한 나무다. 하회마을의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는 이 당나무는 그 자체가 삼신당이요 성황당(서낭당)이다. 그래서 하회마을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무병 그리고 풍년을 비는 동신제를 모신다. 하회별신굿 탈놀이(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에서 탈춤판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 당나무 아래에서다. ◆기원(祈願)의 신목, 하회 삼신당 김정식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