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획 다짐하는 연말 학생들의 모든 도전 응원해

인간은 늘 정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정점은 산과 탑 등의 가장 높은 지점을 이르는 말이란 점에서 우리는 늘 정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곳을 향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이것은 더더욱 구체화된다. 에베레스트 등정과 북극점 그리고 남극으로 이어지는 극한 지역으로의 탐험은 인간의 욕망과 시대적 기술의 발달이 맞물려 만들어진 것이다. 얼어붙은 땅으로 불리는 북극은 인간에겐 미지의 땅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항해술과 지도가 미비했던 고대 시대에는 신들이 지배하는 신비한 땅으로 받아 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8세기 아일랜드 출신 카톨릭 수사들의 아이슬란드 방문과 9세기말 노르만족의 바이킹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북극을 향한 전초기지가 이뤄진 셈이 되었다. 중세시대로 들어오면서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경쟁적인 식민지 정책과 극동 아시아, 아프리카와의 교역의 필요성은 최단거리의 항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북극 탐사는 개인의 탐험 욕구만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결합되면서 북극의 정점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항해술의 발달과 지도의 정밀성이 가져온 쾌거였고 미지의 세계를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으로 개척해 간 인간의 승리였다. 남극 탐험 또한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남극에 최초로 도달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문센이 실제로는 북극 탐험을 목표로 했다는 점은 참으로 재미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09년 북극 탐험을 계획하고 있던 그에게 피어리가 이미 북극에 도달했다는 소식은 또 다른 미지의 땅인 남극을 향하게 만들었고 그가 정복한 남극 대륙은 현재 우리나라의 남극 세종 기지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기지가 설치되어 자원과 자연 환경의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남극을 정복한 아문센이 비행기를 이용해 북극을 처음으로 횡단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정점에 대한 욕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일 높은 곳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향한 길에는 늘 위험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과 국가 그리고 세상의 필요에 의한 도전을 탐험이나 탐사라고 부른다. 그러한 극한의 도전이 세상을 바꾸어 왔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 왔음이 사실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의 시점에서 우리가 꿈꾸는 욕망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매너리즘에 익숙한 자신을 일깨우고 지나온 시간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계획하는 시간들이기에 이 시기를 맞이하는 우리는 숙연할 수밖에 없다. 피어리가 정복한 북극점은 이미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아문센이 향하던 남극은 이제 과학 전초기지로서 인간의 미래를 위한 주춧돌을 세우고 있다. 학원가에선 1월2일을 기점으로 새해의 학사일정을 계획한다. 매년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사일정이지만 필자의 눈에는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학생들 하나하나가 다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의지와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엿보인다. 처음으로 가는 길이기에, 그리고 세상을 향해 떠나기 전 자신의 능력을 갖추는 시기기에 그들에겐 더없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점을 향한 그들의 도전에 부모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박수와 격려가 반드시 필요한 시기 또한 지금임을 명심하고자 한다.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 김시욱

대입 준비과정 속 희비교차 늦은 결실이 더 달 수 있어

지금쯤이면 까치밥으로 남긴 과일들이 익다 못해 검붉게 빛깔을 내뿜을 계절이다. 배고프던 유년 시절, 집안의 재산 1호인 소에게 먹일 소죽거리로 호박 줄기, 고구마 줄기를 지게에 싣고 땀을 식히다 보면 가지 끝에 달린 까치밥을 보게 된다. 가끔은 감이기도 하고 더러는 횡재처럼 사과이기도 하다. 지게 작대기만큼의 높이에 있는 한 알을 따서 입에 물면 그 달콤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과즙의 당도가 꿀물처럼 달디달다. 겨울바람을 ‘단바람’이라고 요리 연구가들은 부르기도 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채소나 과일들은 살이 단단해지고 단맛이 더 강해지는 까닭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독일의 유명한 와인인 ‘아이스와인’ 역시 이와 유사한 원리 속에서 탄생한 고급 와인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정상적 수확기보다 한참이나 늦은 시기까지 나무에 포도송이를 남겨 두었다가 서리가 내린 후에야 따서 포도주로 담는 것이 아이스와인의 특징이다. 온전히 손으로 수확하는 아이스 와인은 온도가 영하 8도 이하로 떨어지고 포도들이 자연적으로 덩굴위에 얼려 있어야 수확을 시작한다고 한다. 자연의 적절한 조건과 적은 양이 가지는 생산량의 희소성은 고가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현재는 독일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칠레, 캐나다 등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캐나다 관광이 유행하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것은 캐나다산 아이스와인이다. 이름 그대로 제조과정의 차가움 못지않게 차게 마셔야 더 진한 향과 뛰어난 맛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가까운 우리 지역의 청도 와인터널에서도 감으로 만든 아이스와인이 생산되고 있는데 수확과 그 제조과정은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과 무관치 않다. 바다에서 자라는 생선들과 해산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을 맞이하면서 산란을 염두에 둔 해산물들은 영양분을 비축하고 그로인해 단단한 육질을 형성하게 된다. 횟감으로 사용되는 방어가 그러하고 흔히 겨울철 밥상에 오르는 동태나 과메기가 그러하다. 자연이 주는 식도락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진리는 단순하다. 다소 늦은 듯 추위와 찬바람을 맞이한 동식물의 결실은 제철에 수확한 결실보다 더 달콤하고 깊은 맛과 질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겨울이 더 깊어지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이맘때면 수험생들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결실을 평가하고 희비의 순간들을 맞이한다. 수시발표와 정시원서 접수 그리고 정시발표로 이어지는 학사과정 속에서 지나온 한해에 대한 후회로 절망과 회한의 눈물을 쏟기도 한다. 더구나 자기비하의 극단적 감정 속에서 삶이라는 긴 여정을 중단한 채 고정된 틀 속에 갇히는 경우도 있다. 자신에게만 다가온 불행인 것처럼 세상을 탓하며 단절의 문을 닫기도 한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단순히 늦어진 행운’이 분명코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 보인다. 인간이면 누구나 삶의 의미 그리고 욕망과 희망을 가지며 신의 축복을 기다려 온 것은 당연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버킷 리스트는 죽음을 앞둔 노년기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이뤄가야 할 꿈의 목록들인 까닭으로 다가올 한 해와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준비하는 역동성이 필요하다. 세상은 닫힌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하물며 어느 것이 진리라는 고정된 삶의 모습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들에 시간을 할애하고 노력할 때 긍정적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음은 사실이다. 까치밥으로 둔 여유로움과 오히려 늦은 수확의 결실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왔음을 배워가는 이 겨울이 되길 기대해 본다.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 김시욱

정시, 수시제도 문제점 보완 수능 난이도 조절 가장 중요

어느새 2019년의 마감을 알리는 한장의 달력과 마주한다. 일출과 새해의 흥분을 전해온 지인들의 소식으로 시작했던 이 지면이 어느새 그 끝을 향하고 있다. 한주마다 교육의 일면과 필자의 일상을 반추하고자 했지만 의도와 달리 감성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입 학사 일정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올해 수능과 합격선을 예측하기란 쉽지 않지만 중하위권의 약세가 유독 눈에 띄는 상황이다. 하물며 최저등급마저 맞추지 못해 불합격이라는 수시모집 결과를 받은 학생들의 참담한 심정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느 누가 합격을 원하지 않겠는가! 대학별 순위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자신의 점수보다 높은 대학의 합격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요행을 바란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욕망이기에 ‘소신 지원’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자녀들의 수능 결과에 따른 가정의 충격 또한 만만치 않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수시발표에서 다행히 합격통지서를 받은 경우라면 그 기쁨은 배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은 또다시 정시 지원에 매달려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다. 예측 가능성을 담보한 수능이 되지 못했기에 중상위권보다 중하위권의 진학 포기로 재수생이 늘어날까 두려운 현실이다. 개개인 가정의 경제적 부담은 차치하더라도 당사자인 학생과 가족 구성원들이 겪을 1년의 시간은 어떻게 보상될 것인가! ‘노력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따른다’ 라는 평범한 진리마저 의문시되는 현재 상황에서 재수 생활을 권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학생 개개인의 학력 차이를 전제하는 것이 시험이지만 이번 수능은 난이도 조절실패와 수험시간의 촉박함 탓으로 합리적 판단보다는 막연한 근거의 ‘찍기’식 답안 제출이 됐다는 점은 참으로 아쉽다. 가채점을 위한 자기 답안 쓸 시간마저 없었다며 푸념하는 학생들에게서 수능시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대학 입시제도가 수시모집과 정시 모집으로 나뉘어져 있는 상황에서 수시 모집이 차지하는 비율이 76%를 넘어가고 있다. 최상위권 대학과 국립대가 요구하는 수능 최저등급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능 시험의 중요성을 다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사교육과 교육특구의 지나친 과열을 막고 일반고 진학률을 올린다는 취지로 시작된 수시 모집에서 단연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교과전형과 학생부 종합전형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숙명여고 사태를 통해 그 폐단이 나타나듯이 교과 평가에 대한 자의적 적용과 학교별 평가 기준의 객관성 부족은 학생들의 진정한 학력을 가늠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학생부 종합 전형은 비교과 활동을 통한 진학이란 점에서 학생들의 사교육비를 줄이고 진취성과 사회성을 높인다는 좋은 취지와 특목고와 일반고의 격차를 줄인다는 순기능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 취지가 무색하리만치 강남특구와 특목고의 진학률을 높이고 있는 것은 학생부 종합전형임을 알 수 있다. 비교과 활동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은 특권 계층의 사교육비 증가와 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수시 제도의 문제점이 노출된 현재 상황에서 가장 비용 효율적 대체 제도는 정시 제도임이 분명하다. 지나친 난이도는 정시 제도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현실에서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 2020년 수능은 학생들의 학력 수준에 대한 면밀한 평가과정을 통해 수능 문제가 출제되길 기대해 본다.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 김시욱

인생이라는 기나긴 게임 속 수능 성적은 작은 성패일 뿐

간혹 우리는 인생을 게임(game)에 비유한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삶 속에서 선택의 순간과 더불어 의도한 방향이든 아니든 인과관계로 보이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력의 여부가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전개과정으로 낭패의 결과를 마주하기도 한다. 게임이라는 단어에 인생이라는 철학적 문제를 대입하는 순간 ‘어떤 삶이 가치로운가?’라는 원론적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게임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다양하다. 일상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설과 종교적 행위의 연장선상이라는 설 그리고 전쟁을 예비한 군사 훈련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등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이론들이 그것이다. 게임의 본질은 생존과 관련된 경쟁과 결과에 대한 획득이라는 점에서 전쟁과 관련된 기원설에 방점을 두고 싶다. 게임(game)의 영어 사전적 의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놀이’뿐만 아니라 경기, 운동, 승부, 책략, 농담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 중에서 필자는 유독 ‘사냥감’이라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작은 물고기부터 거대한 맘모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냥감은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생존을 위한 게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부족이 보다 큰 범위의 국가를 형성하고 그 구성원들의 생존은 더 큰 영토와 더 많은 사냥감을 필요로 한 것은 분명하다. 부족 안에서 힘의 우위를 과시하던 단순한 경쟁을 벗어나 전쟁을 통한 전리품의 획득과 패전국 백성을 노예화한 고대 국가의 전통은 전쟁을 게임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더불어 현대 스포츠의 여러 종목에서 나타나는 전쟁 도구와 전쟁 기술은 이를 더욱 명확히 하고 있다. 실제적 전쟁이 가져오는 인류의 패망과 잔혹함의 현실대신 그 외적요소로서 흥미와 재미를 게임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게임(game)이라는 단어가 붙는 용어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치킨게임’이다.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미리 핸들을 꺾어 피하는 사람이 겁쟁이(chicken)로 취급받는 게임이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을 전제로 한 부정적 의미의 용어지만 생존 본능을 드러내는 게임임은 분명하다. 교육 철학자 프뢰벨은 ‘놀이와 게임을 통해 아이의 영혼에 있는 것이 자유롭게 표현된다’라는 말을 한다. 유아 교육에서 이러한 접근은 일반화된 교수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불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흔히 우리는 게임하듯 공부를 즐기란 말을 쓰기도 한다. 지나친 경쟁의식에서 오는 압박과 좌절을 격려하고자 하는 의도임을 알기에 그들 또한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온전히 게임하듯 공부하는 학생들이 몇이나 될까 싶다. 게임의 법칙은 이미 승자와 패자 그리고 환희와 좌절로 구분해 오고 있지 않은가. 생존을 전제로 시작된 게임은 외형적 모습만 변했을 뿐 승전국이 가지던 전리품처럼 메달과 꽃다발 그리고 명예를 승자에게만 부여하고 있다. 노력한 과정에 대한 보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수능 성적결과가 발표됐다. 학교와 학원들의 현장 스케치로 내보낸 메스미디어의 영상과 기사에는 이미 서울소재 상위권 대학들의 예상 커트라인과 지원 가능 점수를 쏟아내고 있다. ‘불수능’이라던 올해 시험에서도 환호하는 학생과 울음을 터뜨리는 학생의 모습이 대비된다. 누구를 칭찬하고 누구를 위로해야할지 현장에 있는 필자마저 혼동스럽다. 그들이 받아들일 절망과 상실감을 잘 알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인생이라는 긴 게임 속에서 단지 작은 패배였음을 인정하라고만 전하고 싶다.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김시욱

올해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 ‘시험의 기능’ 깊이 고민해야

어느새 1년의 막바지를 향하는 시점이다. 풍요를 약속하던 결실의 계절을 뒤로하고 휴식기를 준비하는 논밭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움을 기대한다.필자의 일상 또한 다르지 않다. 다가올 기말고사와 겨울방학을 염두에 두고 학습 자료를 준비한다. 1년간의 진행된 커리큘럼의 막바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말고사 후 결과를 분석하고 새롭게 맞이해야 할 신학기를 위해 휴식기인 겨울방학은 더없이 중요한 시점이다.학생들 개개인마다의 능력의 차이가 있기에 개략적인 틀 속에 세부적인 학습 내용을 추가하다 보면 지난 시간들의 오류들이 발견된다. 그러한 오류들은 시험 결과에 실망하고 있을 학생들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무릇 모든 일은 결과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전제로 행해진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안정된 삶을 위한 필수조건이며 선제되어야 할 과제다. 국가 정책과 그 시행들이 가져야 할 요건이 바로 이것이다. 결과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세밀한 분석과 수많은 변수마저 간과할 수 없기에 전문가 집단을 필요로 한다.지난 수능 시험을 돌이켜 보면 ‘난이도와 예측 가능성’이라는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시험은 필연적으로 성적을 통해 순위를 산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정된 인적 자원을 선출하는 과정임은 분명하다.개인의 타고난 능력에 대한 절대적 평가가 아니라 객관화된 기준 속에서 상대적 기회 평등이라는 룰이 적용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그리고 더 깊이 있게 공부한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하기 위해 문제의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것이 변별력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경우라면 이는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요행을 통한 ‘줄세우기’와 다르지 않다.한국교육과정 평가원은 매년 수험생 전체를 대상으로 6월과 9월 모의고사를 치르고 있다. 이러한 절차는 단순히 수험생들의 예비 시험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배려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수능 시험문제 출제에 대한 평가원의 난이도 조절과 예측 가능성을 위한 목적이 보다 큰 의미가 아닐까 싶다.특히 교육청 시행 모의고사와는 달리 재수생을 포함한 수험생 전체가 응시하는 모의고사라는 점에서 그러한 점은 더욱 분명하다. 전체 수험생들의 숫자와 학력을 짐작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문제 적응력을 평가함으로써 난이도 조절과 예측 가능성을 충분히 담보할 수 있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수능 시험은 그 어느 때보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선례를 만들고 말았다. 가채점 결과 국어 과목의 31번은 연필 굴려서 맞출 확률보다 낮은 정답률이라는 전문 교육기관의 발표는 시험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내용에 따르면 영어 과목 또한 예외는 아니다. 원어민이 풀기에도 어려운 문제였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시험이라는 의미가 퇴색된 절대 평가제의 영어시험은 이미 ‘구색 맞추기’ 과목으로 전락한지 오래다.우스갯소리로 0과 9라는 숫자가 같은 가치로 평가되는 절대 평가제에서 90점 맞은 학생이 100점 맞은 학생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말이 많고 힘든 2019년 수능 시험이었기에 수능 시험에 대한 보다 면밀한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김시욱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시간 수험생들 노력에 박수 보내

아침상에 보리굴비가 올라와 있다. 새삼 생선요리 앞에 감동이 일어나는 까닭은 지난 주말 재수학원 졸업을 하고 떠난 제자가 필자에게 보낸 감사의 선물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까치 머리에 남성상이 짙은 남학생이었다. 그러하기에 투박한 글자체지만 조그마한 쪽지편지에 써 보낸 글들은 더없는 감동이었다. 자신이 흔들릴 마다 잡아준 고마움과 영어 성적이 올라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곁들인 손편지였다. 아마도 자신의 용돈을 아껴 선물을 준비했나 보다. 보리 굴비에서 나오는 향기가 새삼 진하게 느껴진다. 사전적 의미로 ‘보리굴비’는 조기를 4일~5일 소금에 절여 15일 넘게 바싹 말린 다음 통보리 뒤주 속에 넣어 보관해 꼬리 부분을 잡고 찢으면 북어포처럼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철분, 무기질이 풍부해 기력회복에 좋고 비타민 A와 D가 많아 야맹증을 예방하기도 한다. 특히 피로로 지친 몸을 회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조기의 품종이 아니라 저장성에 기준을 둔 이름이란 점이 이채롭다. 더불어 서민적으로 친숙한 보리를 이용한 기능적 변화란 점에서 의미가 큰 듯하다. 비록 원래의 한자 이름이 아니라 우리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지만 조기라는 이름 자체도 한자로 도울 조(助)에, 기운 기(氣)자를 쓰는 것으로 보아 참으로 인간에게 유용한 생선임에 틀림없다. 기운 차리는 것을 돕는다는 뜻이니 한자로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나 싶다. 여름철 입맛을 잃게 하는 무더위 속에서 전라도 영광 사람들은 잘 말린 보리굴비를 쭉쭉 찢어 고추장에 찍은 후 물에 만 보리밥에 얹어 입으로 가져가면 잃은 기운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 임금도 입맛을 잃었을 때 조기를 먹고 입맛을 찾았다고 나온다. 조기는 성질이 순하고 맛이 달아 음식 맛을 나게 하고 소화가 잘되며 기운을 보충한다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인간을 이롭게 하는 생선임은 분명하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름의 유래를 굴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쓰고 있는 ‘굴비’란 말이 생선을 짚으로 엮어 매달면 물고기가 구부러지는데 그 굽은 모양을 뜻하는 고어, 구비(仇非)에서 굴비라는 말이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굴비란 이름에 대한 다른 설도 많지만 왠지 이런 근거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친숙함’이란 단어 속에 법성포 항구가 떠오른다. 삼십 중반 영광 법성포를 다녀온 적이 있다.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과 백사장이 있는 법성포 앞바다는 차라리 바다란 사실을 잊게 했었다. 제자가 보내 준 ‘보리굴비’로 새삼 그 기억을 추억해 보는 참으로 행복한 아침상이다. 보리굴비로 시작된 기억들 뒤로 다시금 현실의 모습이 교차한다. 먼 길이었다. 1여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수많은 일들에도 묵묵히 견뎌낸 수험생들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를 돌아본다. 남겨진 노트 위 수학공식도 보이고 빼곡하게 채워진 영어 문장들도 남아있다. 글자체만 보아도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한 명씩 한 명씩 이름을 되뇌어 본다.김시욱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 객관적 사실 통해 키워야

인간이 가진 내면의 세계는 의식적으로 진실을 드러내지 않은 한 파악하기 쉽지 않다. 언어는 의식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이지만 언어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으로 오히려 진실을 향한 접근을 막을 수도 있다.더불어 인간의 몸짓을 비롯한 여러 행위적 요소들 또한 의식적 실체와 가식이라는 양면적 표현행위가 가능한 까닭으로 우리는 늘 진의 파악에 안간힘을 쓴다.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인간 행위에 대한 진의 파악을 위해 많은 이론과 모델을 제시해 왔다.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고리를 찾고 외면을 통한 내면을 추론해 나가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학창시절 삼삼오오 둘러앉아 ‘진실게임’을 하곤 했다. 상대방의 드러내지 않은 진의를 알아내고자 질문자의 의도는 보다 정교하고 허를 찌르는 내용의 질문으로 답을 유도하고자 한다.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벌칙이 뒤따랐고 그에 따라 공수 선공이 바뀌는 진실게임은 ‘무응답’과 ‘무작위’가 진의를 대신한다고 믿게 한다.‘몇 가지 거짓에 사실을 섞여 말하여 거짓과 사실을 구분하기 어렵게 하는 게임’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나타나듯이 ‘진실게임’은 이미 거짓이 전제된 상황 속에서 진실을 짐작할 뿐 그 어느 것도 진실 자체는 아니다.수년간 지속된 세월호 사건과 최근에 이슈화된 사립유치원 지원금 문제, 광주항쟁과 국방부 장관의 사과 등 수많은 문제들이 불거지는 현재의 상황에서 ‘진실게임’이 떠오르는 것은 필연이 아닐까 한다.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현재 정권의 정당성은 전임 두 대통령을 ‘죄수’라는 이름으로 단두대에 올렸다. 정의란 어떠한 상황과 그 어떤 권력자에게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가치란 점을 기치로 내세운 듯하다.그것을 촛불 혁명이란 이름으로 이제는 국민들 스스로 축제의 장으로 기리기도 한다. 단호하고 명쾌한 흐름처럼 보인다. 새로운 역사를 세워나가는 오직 정의만을 내세운 혁명의 역사처럼 비춰진다.하지만 우리가 주시해야 할 점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전라도와 경상도의 동서 지역갈등이 어느새 신구 갈등과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갈등으로 고착화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상대방에 대한 진의 파악은 애초에 무시하고 접근한다. 오직 절대선의 입장에서 악을 응징한다는 이분법적 접근으로 총칼 대신 펜과 컴퓨터 자판을 통해 SNS라는 전쟁터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진실은 말과 글로써만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표현되지 않은 내면의 의식이 진정한 사실임에도 우리는 말과 글 그리고 표현된 행동에 전부를 기대하는 오류를 범하고는 있지 않은가 싶다. 진실은 어느 곳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정치와 현실 경제의 문제는 연예인들에게 던지는 ‘아니면 말고’식의 댓글처럼 접근해서는 안 된다.우리 교육 현실에서 영어 수학 과목 못지않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대한 가르침이 더더욱 필요한 시점이다.이념적 접근으로의 교육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통해 개개인의 생각을 묻고 상대방의 진실을 찾아 나가는 토론ㆍ모둠식 교육이 필요하다.김시욱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시험 없는 세상 ‘유토피아’…잠시 상상하며 위안 삼자

새벽 등교에 나서는 고3 수험생들과 어김없이 출근길에서 만난다. 2주 앞으로 다가온 수능 시험일이라 그런지 그들의 모습에는 더없이 초조함이 묻어있다. 파릇한 새싹이 움트던 어느 봄날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새로운 친구와 고3이라는 다소의 흥분됨을 감추지 못하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등굣길은 상기된 목소리와 부산함으로 거리마다 활력을 불어넣었다. 계절이 바뀌는 순환 속에 알록달록한 가을 단풍이 시리도록 눈 안으로 들어오지만, 그 아름다움보단 핏빛 절망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수험생들의 모습이 뇌리를 가득 채운다. 시험 없는 세상이 오면 그들은 행복할까? 작은 가랑잎 하나 떨어지는 모습에도 깔깔대는 여고생들의 가슴 속에는 어떤 꿈을 간직하고 살아갈까?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는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극단의 소망일 것이다. 신이 준 ‘에덴동산’이 유토피아적 지상낙원이기에 그곳으로부터 쫓겨난 순간부터 우리 인간은 어딘가 있을 또 다른 유토피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정치체제에 대한 모순과 비리 그리고 그에 대한 불만은 현실부정을 초래하게 된다. 16세기 초, 모어는 ‘유토피아’1권을 통해 유럽 그리스도국가들의 모순과 타락을 비판하며 2권을 통해 이성에 의한 정책과 지배를 강조하는 이상주의적 정치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특히 이교도의 공산주의 도시국가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라파엘 하이슬러디의 “공산주의만이 사적, 공적 생활에 만연해 있는 이기심을 치유하는 유일한 치유책”이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 이론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체제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 ‘유토피아’는 실패로 나타났고 순수한 공산주의 정치체제는 허상임을 드러내고 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변형된 이름의 저서는 참으로 다양하다. 프란체스코 도니의 ‘여러 사회들’, 프란체스코 파트리치의 ‘행복의 나라’,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섬’ 등이 인본주의 주제와 철학적 접근으로 이것을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나오는 ‘율도국’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갖는 어원이 그리스어로 ‘없는 장소(nowhere)’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미 아이러니한 전제가 아닐 수 없다.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꿈꾸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현실을 부정하고 비난하며 기존의 제도와 체제를 부정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다소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현실 속 체제의 부조리와 타락에 대한 냉소적 풍자가 ‘유토피아’가 아닌가 싶다. 실생활에서 나타나는 유토피아에 대한 막연한 갈망은 수많은 생필품과 레저 산업에서 -pia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실례로써 드러나듯이 허구이든 풍자이든 우리는 늘 최상의 세상이 ‘유토피아’라는 기대치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시험이 없는 세상은 학생들에게 특히, 수능 시험을 2주 앞둔 수험생에게 최상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하루하루 피 말리는 긴장감을 일시에 떨쳐 버릴 수 있는 환희의 순간이자 해방의 탈출구이다. 그것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편안함을 준다면 그것을 상상해 보라. 상상하는 그 순간만큼은 여러분의 ‘유토피아’가 열리고 있음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유토피아’란 사유의 존재일 뿐 현실이 아니란 점에서 잠시 위안의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다시 남은 2주의 결전을 준비해야 한다. 김시욱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사립유치원의 지원금 비리 교육자 없고 장사꾼만 있어

‘비꼼’과 ‘속임수’는 비언어적 의미와 언어적 표현을 가지고 있다.비꼼은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외형보다 비언어적 숨겨진 의미가 목적이다. 속임은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의미로 상대방을 속이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교육사업과 이 말은 무관치 않다. 이들 단어가 가지는 언어적 의미는 단순히 사업의 종류를 나타내는 의미와 교육을 우선시하는 교육철학을 가진 사업이라는 점에서 다르다.비록 사교육이라는 한계가 있다지만 국가의 한 축을 담당한 사교육 담당자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받는다.특히 유아와 초등학생을 담당하는 교육 분야는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피교육자를 가르친다는 노고와 노력에 대해 학부모들과 사회로부터 격려와 존중을 받고 있다. 현대 사회의 핵가족화와 부모의 경제 활동 참여는 어린이집 및 유치원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우스갯소리로 스승의 날이면 영ㆍ유아 교육기관 앞에 학부모가 진을 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한 자녀 가정’의 현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교육자였고 산과 들이 교육 현장이었던 지난 시절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회적 구조이기에 미취학 아동 교육은 국가와 학부모의 걱정과 관심의 중심에 있다. 최근에 불거진 사립유치원 사태는 교육사업이라는 언어적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교육사업을 두고 교육과 사업의 이중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개인의 설립과 재산을 기반으로 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란 점에서는 사립유치원은 사적 재산 영역이다. 창출된 수익으로 개인의 소비지출과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를 한다 해도 비난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공익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사교육에 대한 전면적 금지의 근거 또한 있을 수 없기에 사립유치원 설립자들의 항변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시각으로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마치 사유재산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권리의 충돌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하지만 영유아 교육기관인 사립유치원에 대해 정부예산이 매년 2조 원 이상 투입되고 있다. 단순 계산으로 유치원당 5억 원에 가까운 돈이 지원되고 있다는 점은 사유재산이라는 논리로 항변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회계 시스템의 미비와 자의적 소비는 사유재산의 처분이 아니라 공적 자금 유용임이 분명하다. 특히 일부 사립유치원의 지원금 사용처와 구매 물품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영유아 교육의 지원책으로 지원한 자금을 자신의 쌈짓돈으로 착각한 훌륭한 교육자(?)의 경제철학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물며 국가의 회계감사 예고와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에 대해 폐원과 신규 원아 모집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사고의 발상은 역설적으로 용감한 참교육의 선구자로 보인다.폐원을 결정한 모 사립유치원 원장은 “5세 미만 친구들은 받지 않아요. 폐원을 결정한 시점에서 우리 친구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잖아요”라는 말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비꼼’과 ‘속임수’의 언어적 표출과 의미의 모순처럼 자신을 참교육자로 알고 있는 이들의 착각을 보노라면 교육자는 없고 ‘훌륭하고 용감한 장사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잘못된 관행을 인정하고 다시금 영유아의 미소를 닮은 참교육자로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김시욱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수능을 향한 마지막 준비 뛰기보다 천천히 살필 때

인간은 수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또 하나의 게임이다. 엄격히 승자와 패자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임이다. 무승부는 용납되지 않는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승부가 우리 삶의 일상이다.게임의 또 하나의 의미인 ‘사냥감’이란 말에서 나타나듯 이미 생존과 더불어 고대로부터 시작된 희소자원에 대한 획득이 명예와 부와 권력을 보장하는 경쟁구도로 고착화된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오락 그리고 시합이나 경기의 의미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수많은 경쟁으로 나타나는 경기들을 우리는 흔히 인생에 비유한다. “야구는 9회 말 2아웃 이후부터”라는 말로 인생역전을 강변한다.마라톤은 우리 인간의 일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다양한 코스로 이루어지는 마라톤은 인간한계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규칙을 어기지 않는 이상 승자가 비난받는 일은 없다. 승자는 세상을 구한 영웅처럼 시상대 위에서 포효한다. 심판이라는 게임의 지배자가 있지만 그의 역할이 가장 최소화한 것이 육상경기가 아닐까 한다. 육상경기는 필드경기와 트랙경기로 나뉜다. 멀리 그리고 높이를 측정해서 우위를 가르는 것이 필드경기라면 트랙경기는 주어진 거리를 누가 더 빠르게 달리는가에 달려있다. 쉽게 말해 ‘누가 더 빨리 뛰느냐’가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근력을 키우고 시합에 앞서 수십 번 예정된 거리에 맞춰 기록을 관리한다. 빙상경기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직 경쟁자들의 최고 기록을 앞서야만 시상대 위에서 영광의 웃음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 바로 속도 경기인 트랙경기인 것이다.다른 스포츠에 비해 룰도 단순하다. 출발 시 부정행위나 트랙 이탈을 제외하면 그 어떤 규칙도 제한도 없다. 심판의 주관적인 판단이 게임에 영향을 주는 불합리함도 없다. 참으로 단순하게 출발의 총성을 듣고 오직 목표점을 향해 달리면 되는 게임이 바로 육상의 트랙경기다.간혹 중장거리 선수들은 달리며 이웃하는 트랙의 경쟁자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단거리 시합에선 그것은 차라리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철저히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라기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다.1908년 올림픽 경기에 남자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경보경기는 트랙경기의 새로운 영역이 아닐까 싶다. 빠르기를 기준으로 우승자를 가린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뛰는 것이 아니라 걸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흔히 트랙경기에 쓰이는 ‘달리기’는 아니다.특히 한쪽 발은 항상 땅에 닿아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엄격히 말해 빨리 ‘걷기’ 시합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경기가 아닐 수 없다. 엄연히 뛰는 것과 걷는 것은 그 용도가 다름에도 빨리 걷기를 강요하듯 한 이 시합을 보노라면 안타깝기조차 하다. 일그러진 얼굴과 뒤뚱대는 특이한 모양의 뒤태는 경보선수들에 대한 연민이 생기게 한다.앞만 보고 뛰어야 할 때가 있다면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며 소통해야 하는 것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경쟁만이 삶의 전부일 수 없듯이 게임이 가지는 오락과 즐거움의 목적으로 즐겨야 할 때도 있다.짧지 않은 수험생활이었지만 긴 인생의 여정 속에서 그것은 단거리에 불과하다. 편법이나 불법이 아닌 공정한 룰 속에서 경쟁할 그대들에게 찬사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번쯤 돌아서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느리게 걷기를 부탁한다. 빠뜨린 부분이 없는지 주변과 소통하며 마지막 피치에 대비하길 바래본다. 김시욱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진정한 자기 정체성 찾아 원하는 삶 개척해 나가야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늘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의문을 제시하며 살아간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정체성 정립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필연적 과정이다. 방탄소년단이 유엔아동기금의 청년 어젠다 ‘제너레이션 언리미티드’ 발표 행사에 참석해 연설했다는 기사를 접한다. 국가 원수나 외교대표가 아닌 K-POP 아이돌 그룹이 국제기관에서 대표 연설을 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7명 모두 연단에 올라 방탄소년단의 리더 RM(김남준)의 목소리로 실시간 세계 전역으로 방송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서둘러 연설 원문을 구해서 읽어본다. 울컥 가슴이 미어지는 감동에 필자의 나이와 체면을 잊을 뻔했다. 10대 소년 시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꿈을 잃어 버렸다는 RM의 자기고백은 정체성 상실의 안타까움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이 만든 틀 속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으로,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는 말은 획일적 기준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자신의 정체성이 타인의 시각으로 재단되고 만들어지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지금의 모습이 자신인가 하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지난해 초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진입한 방탄소년단의 소식을 듣고 필자의 두 딸은 멤버들 각자의 프로필을 읊조리고 있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후 대중문화 소비시장의 메카인 미국을 점령한 K-POP이었기에 문화 중심 세대인 청소년을 비롯한 전 국민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에서 단계적 상승을 통해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이 더욱 특이하다. 반짝하고 사라지는 일회성 인기가 아니라 유엔아동기금의 연단에 올라 세계 청소년들에게 미래와 꿈을 전하는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이 시대 리더의 면모를 갖춘 그룹이라고 만할 수 있다. K-POP은 화려한 볼거리와 빠른 비트로 이어지는 노래 속에서 중독성 깃든 중복 음절의 반복은 팬덤이라 불리는 독특한 청소년 문화를 형성한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불타오르네(FIRE)’라는 곡을 들어보라고 필자는 권하고 싶다. “니 멋대로 살어 어차피 니 꺼야. 애쓰지 좀 말어 져도 괜찮아. 새벽이 다 갈 때까지. 그냥 살아도 돼 우린 젊기에. 그 말하는 넌 뭔 수저길래 수저수저 거려 난 사람인데.” 자신의 정체성과 젊은 세대의 동일한 시대적 고민을 찾아가며 해답을 제시하는 노랫말이 아닌가 싶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관 부재의 맹목적 삶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특권을 통해 두려움을 불태워 버리라고 방탄소년단은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 노랫말은 사회구조 속에 함몰된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라는 메시지였고 입시의 교실 현장을 거부하는 혁명의 목소리였다. 연설의 말미에 리더 RM(김재준)은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도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결점과 그보다 더 많은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끌어안고 최대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임을 전하고 있다. 필자 또한 자기 이름으로 자신의 길을 향해갈 때 진정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기에 방탄소년단의 마지막 말을 대신 전하고 싶다. What is your name? Speak yourself. 김시욱 영어전문학원(Enoch) 원장

추수 끝나면 이삭줍듯 수능 마무리 공부 중요

유종의 미가 절실한 시기이다. 벌초를 위해 떠나는 고향의 들녘엔 노란 색조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다. 가뭄과 태풍 그리고 장맛비로 애지중지 키워온 농작물을 잃고 망연자실하던 농부의 피해와 아픔이 어느새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가야 한 톨의 쌀이 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삶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이처럼 피땀이 배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 있을까 싶다. 벼 이삭을 틔어 모판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모종을 심고 수확하는 과정까지 농부의 손과 애정이 필요하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농작물의 웃자람을 보고 좋은 수확을 예측한다. 하지만 과도한 수분과 질소 그리고 일조량의 부족에 다른 결과임을 안다면 인간의 판단과 노력만으로 최상의 결과를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자연의 적절한 조력이 특히 필요한 까닭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자연에 대한 도전과 극복은 인간의 문명으로 발전해 왔고 그것은 인간의 편의성을 보장해 왔음이 사실이다. 시련을 통한 축복은 또 다른 기술의 발전과 환경 친화적 개발을 통한 인간과 자연의 유기체적 삶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재해를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원인으로서 접근해 가야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유기체적 하나로서 환경을 받아들일 때 예측되는 재해를 막을 수 있다. 지난해 수능 시험일을 앞둔 포항지진의 발생과 시험일 연기는 자연재해가 인간의 일상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좋은 실례였다. 연간계획 아래 학습의 결과와 자신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 온 수험생들이 예측하지 못한 지진과 한 주 연기된 시험으로 시험을 망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일한 조건하에서 치른 시험이기에 그 결과는 오롯이 수험생 각자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정히 바라보면 동일한 조건이란 허구일 뿐이다. 지진 진원지와 가까운 지역들의 수험생들은 재해 대피소나 친척집을 전전하며 시험을 준비했으며 수십 차례의 여진은 그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시험 당일까지 고사장의 변경을 고민해야 했던 당시의 환경 속에서 포항을 비롯한 근거리 지역 수험생들의 불안과 당혹감은 최상의 결과를 담보할 수 없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연유로 국가주도의 시험관리 콘트롤이 상시 준비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2019년 대학 수능일이 50여 앞으로 다가왔다. 수험생들의 유종의 미와 꼼꼼한 자기 관리가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이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와 수시 원서 접수로 불안과 어수선한 감정이 더없이 큰 시기인지라 평소의 안정적 리듬마저 잃어버릴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의 성격은 출제자와 수험생 모두에게 수능을 짐작하게 하는 난이도와 출제성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라 하겠다. 각 과목에 대한 오답정리를 통해 단원별 입체적 공부와 출제 가능 범위를 예측하는 것은 난이도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문제풀이 중심의 양적 공부보다는 중요 이론과 연계된 약점 분석과 단원별 유기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최근에는 트랙터와 경운기 등의 기계식 농법이 주가 되고 있지만 가을걷이가 끝나면 늘 이삭줍기로 마무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1여 년 간 길러온 농작물을 수확하고 빠뜨리거나 미처 베어내지 못한 이삭들을 작은 포대기에 담아가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삭줍기가 수험생에게도 필요한 시기가 지금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꼼꼼히 마무리하는 중요성을 결과에서 느끼길 바래본다.김시욱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학생들 격려 필요한 시점, 말 대신 한 번 안아주자

하루 동안 사용한 말들이 얼마나 될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탓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보다는 다소 많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루 사용하는 단어 수는 평균적으로 1만5천에서 1만6천이라고 한다. 이 연구결과의 부수적인 재미는 ‘여자가 남자보다 수다스럽다.’라는 속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시 원서를 시작으로 수험생들의 일정이 무척 바쁘고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내신이 부족한 학생들마저도 6개의 수시원서 기회를 마냥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6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입 수능시험을 앞두고 수험생들의 심리상태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더구나 한 번 실패의 경험을 안고 있는 재수생들의 마음은 차라리 헤아려 주기조차 안타까울 때도 있다. ‘힘내! 자신을 믿으렴. 노력의 보상은 반드시 널 기쁘게 할 거야….’ 어느새 일과 속 한 부분으로 자리한 격려의 말들이 수험생에게 분명코 필요함을 알면서도 그 효용성에 의문이 생긴다. 정말 그 말들이 그들에게 힘을 주는 말들일까? 흔한 상투적인 말에 지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필자의 안타까움은 언어의 한계성을 느낀다. 인간이 가진 문명의 산물인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은 한다. 소통을 통한 조직 문화의 정체성 역시 언어의 역할을 통해 일어난다. 언어가 갖는 모호함은 늘 진정한 뜻을 갖고 표현한 것임을 반복해 말하고 묻는 형태로 표시된다. “내 말은 진정 널 위한 말이야!” “네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가 뭐야?” “정말이니?” 이처럼 일상 속 대화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말들은 언어의 이중성과 의미전달의 모호함을 잘 드러낸다. 하물며 이러한 모호함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을 정치 9단이라며 추켜세우기까지 하며 외교관계에서는 그러한 모호함을 고단수의 기술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결국 인간의 의식적 내면을 표현하는 도구인 언어는 전달의 과정을 통해 의도된 왜곡과 받아들이는 쪽의 편의적 해석으로 의도된 방향이 아닌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시기인 수험생들에게 한마디의 말조차 건네기 쉽지 않은 이유가 이러한 언어의 한계성에 있다.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던지는 가벼운 말이 자칫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 될 수도 있기에 상투적인 말로 대신하는 무성의함이 못내 아쉬운 까닭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상담의 기본 방법으로 내담자의 말 못지않게 몸짓으로 이뤄지는 행동의 작은 부분도 집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가진 의사전달의 수단은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대화의 진정성을 파악하기 위해 상대의 눈을 바라보라는 말은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장된 몸짓과 손짓으로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자 하더라도 의식적 조정이 힘든 눈빛은 진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아침이 오기 무섭게 무거운 책가방을 챙겨 떠나는 아들딸들이 밤늦은 시각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힘겨운 일상의 계절이다. 폭염이 끝나고 시원한 가을바람과 상쾌한 공기를 불러오는 가을이 왔다는 사실이 그나마 그들에겐 위안이 된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의 결과에 희비가 엇갈린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격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진의가 오히려 왜곡되어 그들에게 비수가 될 수 있는 예민한 시기이기에 말없이 한번 안아 주기만 하자. 그것마저 힘들면 가슴 속 애정과 안타까움으로 응원의 눈빛을 보내길 부탁해 본다. 김시욱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

불확실성의 시대 극복 위해 공익·사회질서 중요성 자각

흔히 현대사회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부른다. 1970년대 후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용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함축하고 있다. 갤브레이스는 책을 통해 20세기를 지탱해 온 아담 스미스와 케인즈의 경제에 관한 철학과 원리의 유효성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상황은 다변화되고 막다른 상황에 이르렀음을 강변한다. 실제 다국적 기업의 등장은 어느 하나의 특정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새로운 경제 프레임을 소비자인 우리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기업적 이미지를 사회적 기업의 선행처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현대 경제의 불투명성을 대표한다. 불확실성은 이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적용되는 하나의 원리처럼 응용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불확실성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불확실성의 근본적 원인은 급격한 변화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빠른 시간적 흐름이다.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대한 예측들이 기존의 지표로서 사용되던 요인들의 예상외적 변화로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사회 구조 속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에 느린 분야를 우리는 쉽게 법률과 그 제반 조직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최근 국정농단과 적폐청산이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법원의 판결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은 극에 달하고 있다. 심지어 법원의 판결 내용뿐만 아니라 양형에 대한 부정과 담당판사의 신상 털기마저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적 정의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면서부터 수많은 사회규범을 통해 기준을 만들어 가게 되고 그러한 규범 속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 법이란 이러한 사회규범들 중에서도 의식적 행위규범으로서 국가에 의한 강제성과 법적 제재가 보장되고 있다. 이는 곧 개인의 권리에 대한 법률을 통한 제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법적 안정성의 핵심적 내용이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내용의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은 필연적이어야 한다. 더불어 법적 안정성은 그 내용의 만족 여부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준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적 안정성을 담보로 국민의 일반적인 법의식과 괴리가 있는 법원의 판결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적 법해석으로 법원을 재단하고 비난하는 ‘국민들의 법감정’이라는 떼법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이익집단의 빈번한 집단시위와 SNS를 통한 분노와 법원에 대한 공격은 결코 정당한 의사표현이라 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권 세력은 개혁과 부패청산이라는 슬로건 아래 언론과 법원마저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현실 속에서 개혁에 대한 주체는 국민이어야 하며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토대와 원칙을 엄격히 확립해야만 한다. 개혁에 앞서 법치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결코 떼법이 불확실성의 정당화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부터 수능 필수과목으로 한국사가 들어온 취지만큼이나 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개인의 권리 못지않은 공익과 사회질서의 중요성을 자각할 때 불확실성 시대를 다소나마 극복하는 확실성의 전제가 아닐까 한다. 김시욱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

소시민 자처하는 영웅들 진정한 대의 누가 품을까

어느새 자본과 재화가 이 시대 영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그 수단적 존재로 자리한 지 오래다. 인간 본연의 가치는 능력과 실적이라는 평가적 잣대에 의해 돈으로 환산된 듯하다.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몸값이 대중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으며 하물며 교육현장에서 조차 억대 강사라는 타이틀로 수강생을 유인하고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것이 왜 문제인가?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철저한 시장원리 속에서 인간의 능력에 따라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품화된 인간 역시 구매자의 욕구와 기호에 맞아야만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나’란 실체는 철저하게 타인들의 평가에 의해 자리매김하며 그들의 선택에서 멀어지는 순간 존재는 폐기되는 물건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이 시대의 영웅들은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이다. 영웅들의 시시콜콜한 일상마저 필수 암기사항이 된 오늘날의 대중문화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보여지는 모습에 환호하며 눈물짓는다.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인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화려한 영웅들의 일상에 종속되어 대중문화의 객체로 전략하고 만다. 어느 사회든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영웅은 새로운 동기이며 명분이며 그 사회의 구심점을 형성한다.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도 영웅은 존재해 왔다.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이 그러하며 홍길동과 이순신 그리고 안중근이 그러하다. 역사적 인물이든 허구적 인물이든 중요치 않다. 하나로 된 국민성을 이끌어 내고 그들이 처한 현실을 위로하고 극복하게 해 줄 카타르시스의 원천이면 그만인 것이다. 수많은 갈등구조와 가치관 혼재의 현대 사회에서 영웅의 모습은 여러 모습으로 변형을 거듭해 왔다. 국민들을 앞세워 그들은 늘 대의를 부르짖는다. 가난한 소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역경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들은 늘 국민을 위해 살아왔음을 강조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청소년들의 아이돌들 또한 그에 못지않다. 연습생 시절 힘겨운 연습과 끼니조차 잇기 힘든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었음을 강변한다. 감성적 홍보에 중점을 둔 기획이라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도 없다. 이 시대의 영웅은 누구이어야 하는가? 또 시대적 역할은 무엇인가? 원론적인 담론이지만 시대적 흐름 속에서 반드시 논의될 부분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아는 한 스스로 대의를 말하던 사람 치고 진정한 대의를 가슴에 품었던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국민과 민족 그리고 대중이라는 말을 앞세워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해 온 권력지향형 무리가 정의의 투사이 듯 영웅을 들먹이며 시대와 역사를 지배해 왔음이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는 말이 있지만 그와 더불어 간웅들이 득세하는 시기도 동일하다. 분명한 것은 권력을 쟁취한 자가 그리고 가진 자가 영웅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권력과 인기를 얻기 위해 소시민임을 자처하며 필요할 때마다 국민과 대중을 부르짖는다. 그들은 진정한 영웅은 아니다. 늘 우리는 화려한 행위에 그리고 그 결과에 중점을 두고 영웅을 그려가는 오류를 범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시욱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