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최전선에서 한국적 ‘자주인 사상’ 자율공동체 꿈꾸다

2002년 6월 고향 안의면 안의공원에서 동료ㆍ후학 130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덕비 제막식이 열렸다. 학덕비에는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라는 제자 김주완 교수(경산대)가 스승 하기락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은 하 교수의 4남 하영선(전 대구대 식품공학과 교수) 부부. 하기락은 영어ㆍ일어ㆍ독일어ㆍ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1980년대 경북대 대학원 과정에 개설된 동양철학 강좌에서 한문 원문으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근사록’ 등을 강의했다.그는 1980년대 후반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 읽기 모임을 만들어 정확한 번역과 해설로 후학들의 이해를 도왔다.그는 80세 때인 1992년 ‘조선철학사’를 발간했다. 서양철학자인 그가 한국역사를 1만 년까지 끌어올려 상고시대부터 근세까지 철학을 기(氣)의 관점에서 풀어쓴 것이다.1997년 2월3일 그는 대구 만촌동 집을 나서다 쓰러졌다. 국제평화협회지 ‘평협’을 돌리려 집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그는 경북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그는 언제나 약자 편이었다. 누구에게나 겸손했고, 평생을 청빈했다. 광복 후 한국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한국 현대철학 1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였으나 학술원 회원도 되지 못했고 훈장이나 상조차 받은 적이 없다. 늘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후학들은 그를 전설처럼 말하고 있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 • 1912년 1월26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 • 1922년 안의공립보통학교 입학 • 1927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입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시위 주동으로 퇴학 • 1934년 최재전과 결혼 • 1935년 일본 밀항/일본 동경 상지대 예과 입학 • 1937년 와세다대 철학과 입학 • 1939년 12월 창씨개명 비판, 3개월 구류처분 • 1941년 대학 졸업/황해도 재령상고 교사 • 1946년 부산 ‘자유민보’ 주필 • 1946년 4월 안의 전국아나키스트대회 개최 • 1947~52년 옛 대구대 교수 • 1951년 안의고교 설립 • 1952~68년 2월 경북대 철학과 교수 • 1963년 한국칸트학회 설립 주도 • 1973년 민주통일당 정책위의장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 1987년 제3회 전국아나키스트대회 대회장 • 1988년 서울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 • 1992년 12월 조선철학사 발간 • 1997년 2월3일 별세 연보

전쟁고아·소외이웃 돌보며 지역 문화예술의 초석 다져

포항 수도산 덕수공원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비 전면에 새겨진 옛 포항시민의 노래는 1971년 포항문화원장을 지낸 이명석 선생이 작사하고 아들인 이진우 전 국회 의원이 작곡했다. 재생의 거룩하고 뜻깊은 애린정신은 지난 1998년 2월28일 포항지역 문인들이 중심이 돼 생전에 자주 거닐던 수도산 덕수공원에 세운 재생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비문에서 잘 드러난다. 문화공덕비 앞 잔디밭에서는 해마다 재생의 공덕을 기리는 추모식이 후학과 시민들에 의해 열린다.이에 때맞춰 그의 아호를 본뜬 재생백일장이 함께 열려 지역 문인과 문학을 지망하는 청소년들의 참여가 줄 잇고 있다. 이러한 행사는 어렵고 힘든 시절 지역사회에 홀로 일궈놓은 재생의 삶과 발자취에 대해 깊이 되새겨보는 뜻깊은 시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부도 재생이 포항지역에 끼친 위대한 공로를 인정, ‘인간 상록수 훈장’을 수여했다. 곁에서 내조한 부인 도우술 여사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재생은 지난 1979년 9월 향년 76세를 일기로 미국 시카고 인근 록퍼드에 있는 차남 집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그동안 유해가 이국땅 미국에 안치됐다가 31년 만인 지난 2010년 10월2일 경북 포항 덕수공원에 재안장됐다. 재생은 슬하에 진우(작고), 매리(82), 태우(79), 대공(76) 등 3남 1녀를 두었다.◆막내아들이 문화·예술 열정과 이웃사랑 이어그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문화사업에 일절 손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처럼 아들 대공씨는 부친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이웃사랑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대공씨는 사재로 1998년 6월 보건복지부 인가를 받아 애린문화복지재단을 설립, 지금까지 가난한 이웃은 물론 불우한 청소년 장학금 전달 등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특히 포항지역 문화발전에 공이 큰 인물을 선발해 ‘애린문화상’을 수여하고 해마다 재생백일장에는 많은 성금을 내놓는 등 결코 쉽지 않은 봉사를 해오고 있다. ‘애린’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뜻으로 재생이 지었는데 그대로 복지재단의 이름이 됐다. 대공씨는 포스코 홍보실장,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2011년 11월부터 3년간 제7대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오늘날 포항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후학들과 시민들은 재생이 남기고 간 고귀한 뜻을 기억하며 따르려고 노력한다. 재생이 남긴 고귀한 뜻은 지금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도시, 전통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로 포항 시민헌장에 오롯이 담겨 있다.박이득 전 포항예총 회장은 젊은 시절 재생을 따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예술과 문학을 논했다.박 전 회장은 재생의 삶을 “남에게 봉사하는 생활 타자에게 나눔의 생활 문화를 애호하는 정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 투명한 이성을 실천하는 행동,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온 정신 온몸으로 보여주고 가신 어른”이라며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김상조 언론인연보• 1904년 영덕 강구면 삼사리 출생• 1924년 대구 교남학원(현 대륜고) 중•고등과 수료• 1925~1927년 일본 관서미술원• 1928년 도우술과 결혼• 1933년 영덕에서 포항으로 이주• 1939년 포항 기독교 신사참배 행사 무산시킴• 1946년 포항문화협회 조직• 1953년 선린복지재단 정식 인가 등록• 1958년 선린애육원 제4대 법인 이사장• 1961년 포항문인협회 창립• 1963년 한국예총 포항지부장• 1965년 포항문화원 원장• 1966년 ‘포항개항제’ 개최• 1979년 미국에서 76세를 일기로 소천• 1988년 이명석 선생 문화공덕비 건립

한국 1세대 사진작가… 지역넘어 일본·만주까지 1930~40년대 휩쓸어

1942년 백두산 조사대원이 되어 찍은 백두산 등반 사진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산악인 활동은 그의 사진 세계를 넓혀주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대구에는 조선산악회 대구ㆍ경북지부가 결성돼 있었으며 그는 여기에 참여해 산악등정과 사진 활동을 함께했다.1942년 역사적인 백두산 등정은 최계복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 해방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만큼 일본의 탄압은 극에 이르던 시기였다.1942년 7월 서울에서 출발한 백두산 등반대는 각 분야의 학술조사단을 비롯해 많은 영역의 조사단이 있었으나 그는 수송대 및 사진 기록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다. 최계복은 등정 도중에 음식을 잘못 먹어 급성 이질에 걸렸으나 오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민족의 영산을 카메라에 반드시 담겠다는 신념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훗날 그는 미국 이민 생활 중 교포신문(1983년)에 이 당시 등정기를 연재하면서 애국심과 열정으로 넘쳐나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해방되자 조선산악회는 곧바로 재정비를 끝내고 산악활동을 재개했다. 1946년 대구·경북지부가 결성된 후 첫 번째 큰 행사가 국토 구명 사업인 울릉도·독도 종합답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사진 보도반에 편성된 최계복은 현일영ㆍ임주식ㆍ박종대ㆍ김득조ㆍ고희성 등과 함께 울릉도 독도를 촬영했다. 결과물은 1947년 10월10일부터 열흘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이때의 사진들은 6ㆍ25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지만 그가 간직한 몇 점의 사진은 당시의 독도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찍은 독도 사진은 2009년 9월23일 매일신문에 게재돼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언자의 역할을 해냈다.◆해방과 함께 찾아온 변화들최계복의 사진 활동은 해방을 맞으며 변화를 겪게 된다. 1945년 계철순과 함께 경북사진 문화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하고 첫 사진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최계복은 예술 사진뿐 아니라 신문 사진, 현장 중심의 사진, 광고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국 최초를 시도했다. 그는 한국사진의 새로운 개척자 역할을 자처했고 이러한 노력은 한국사진사에 중요한 업적으로 이어졌다. 그는 사진작가연맹 대표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작품심사와 강의, 후진 양성 등에 힘을 기울였다최계복은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영화에도 상당한 애착을 보였는데 영남일보 1947년 3월5일자에 ‘그가 필름 작업을 통해 천연색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과를 냈다’는 기사가 실릴 만큼 관심이 컸다.1950년 그는 사진기점을 사진관으로 바꾸었다. 1952년 전쟁 통에는 2층 사진관을 개조해 일생의 신념과 꿈인 사진작가로서의 기술과 자세를 가르치는 한국사진예술학원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들 최승언의 기억에 의하면 ‘학원에 있는 책상과 의자는 고급스러웠으며 전국의 쟁쟁한 사진작가들이 강의했다’고 기억했다. 이 당시 강사는 박필호를 비롯하여 서동진ㆍ김원영ㆍ이윤강ㆍ강영호ㆍ김동사ㆍ박병수 등 대한민국 최고로 구성됐다.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수강했으나 점차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서울 등을 다니며 학원을 유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학원 문을 닫고 1958년 서울로 떠나게 된다. 서울로 옮기면서 그는 영화스틸사진 분야 일에 전념했다. 6년 뒤인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사진역사연구소 소장이었던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최인진씨(작고)는 ‘사진학원을 살려보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좌절감이 미국 이민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진 듯하다’고 기록했다.최계복은 평생 사진작가로 살아오며 사진은 값싼 예술이란 인식이 퍼져있던 그 시기에 제대로 대접받는 사진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이유로 후학을 기르고 가르치려는 노력이 무산되자 미련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과 연락이 두절된 채 그는 2002년 미국에서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다시 행적을 찾다최계복에 대한 사진 관련 활동이 마지막으로 언론에 소개된 것은 1965년 3월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후학들이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특히 사진역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작고.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과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은 2006년부터 최계복 선생의 행적을 찾아 대구 중구청 등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권정호 전 부장이 최계복 선생의 생질인 정은규(몬시뇰) 신부를 통해 최 선생의 둘째 아들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소를 입수하게 된다.최계복 선생 탄생 100년을 맞는 2009년 작품전을 열기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다수의 사진작품을 갖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 최계복의 사진은 반세기를 훌쩍 넘어 국내에서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됐다.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지난해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영구 보존의 길을 얻었다. 기증된 작품은 1933년 그가 첫 촬영한 ‘영선못의 봄’을 포함한 원본사진 81점과 원본 필름 169점(원판 네거티브)이었다.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예술기법 연마 300시간 수업미국 이민후에도 사진 ‘열정’아들이 본 아버지 최계복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 최승언은 ‘최계복 사진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는 늘 무뚝뚝했고 고집이 세어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이 없을 만큼 분명하고 정확했다. 식구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으나 바깥에서는 한없이 인자하고 이해심이 넓은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웠고 항상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같이하지는 못했다고 기억했다. 1950년대 후반 서울로 옮긴 후 영화 스틸사진을 찍느라 아버지는 늦게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곤 했다. 특히 겨울철 아버지가 좋아하는 브라운색 털이 있는 가죽점퍼를 입고 촬영 나간다면서 카메라 몇 대를 메고 집을 나서던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1964년 미국으로 옮겨온 아버지는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학 다닐 때 미식축구를 했던 최승언은 아버지가 가끔 관중석에 앉아 280mm 렌즈를 부착한 아사히 펜탁스를 감각 대에 설치하고 큼지막한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무서운 아버지에서 자상한 아버지로 바뀌었던 것이다. 아버지 최계복은 사진 찍기 전에 항상 노출계로 피사체에 가까이 가서 빛을 재며 정확하게 노출을 계산해서 사진을 찍었노라고 했다.미국으로 이민 와서도 최계복은 예술적 사진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300시간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동양의 사진을 서양에 알리려고 애썼다고 아들 최승언은 기록했다. 미국에서도 최계복은 활동 분야가 폭넓고 다양해 사진 단체 활동은 물론 정구도 하고 심지어 로터리 클럽 등 여러 가지 모임에도 참가했다. 뉴욕 한인 테니스협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으로 지냈고, 한인 천주교성당에서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75세 무렵에는 정구를 그만두고 골프만 18년간 하면서 건강을 돌봤다고 아들은 기억했다. 김순재 언론인연보1909년 10월28일 대구에서 출생1925년 일본유학. 교토에서 사진기 필름현상 사진인화 등 연구1933년 귀국. 종로1가에서 최계복 사진기점 개점. ‘영선못의 봄’ 사진 촬영.1934년 대구 아마추어 사우회 결성1937년 오사카 아사히신문 사진 공모전 준 특선1938년 조선일보사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에서 ‘여름교외’로 1등 당선1939년 조선일보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 1등 당선1942년 백두산 천지 촬영1946년 조선산악회 대구지부장. 대구 사우회 결성.1947년 독도 촬영1950년 동문로에서 최계복 사진점 개점1952년 한국사진예술학원 설립1956년 경북사진작가연맹 결성 대표 최고위원 추대1961년 한국사진협회 고문(1970년까지)1964년 미국 이민1965년 미국 시카고 Public Library에서 최계복 사진전 개최1970년 미국 뉴욕 Public Library에서 사진전 개최2002년 3월1일 뉴저지에서 사망

낯선 바다 떠돌던 ‘검은 갈매기’ 남녘 타향 포항에 문학의 씨 뿌려

포항 호미곶 해맞이로에 있는 흑구문학관 전경. 해마다 4월이면 이 일대는 넘실거리는 청보리로 장관을 이룬다. 2009년 5월엔 호미곶에 ’흑구문학관‘도 개관됐다. 전국에서 가장 작은 문학관이다. 한켠에 재현된 서재에는 앉은뱅이 책상, 육필원고, 안경, 다구(茶具), 그리고 태극기가 걸려 있다. ‘덕불고’(德不孤:덕은 외롭지 않다)가 쓰여진 액자에서 그의 외로움이 느껴진다.◆문학적 성과 지역에 머물러 아쉬워안타까운 것은 흑구 한세광이라는 인물과 문학적 성과가 아직 지역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지척의 대구만해도 ‘한흑구’라는 이름조차 생소해 한다. 장호병 이사장도 “한흑구 선생은 작품활동에 비해 너무 안 알려져 있다. 보다 적극적인 재조명 작업이 아쉽다”고 말했다.30년간 뿌리내리고 살면서 제2의 고향이 된 포항.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팔팔한 젊은 시절 떠나온 고향 평양에 대한 그리움이 늘 고여있었다. ‘한흑구 문학선집 Ⅱ’에 실린 수필 ‘모란봉의 봄’은 작고 1년전(1978)에 발표한 작품이다.“~산천도 변하고 인심도 변하였으니 이제 어디서 내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라며 안타까움을 피력하면서도 한가닥 소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어린애의 손가락 끝같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꽃망울들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고향의 산천을 곱게 물들이고 있을 새로운 봄을 또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보경사 ‘한흑구 문학비’의 앞면에 새겨진 ‘보리’의 마지막 문장은 남녘 타향에 뿌리내린 한흑구 자신의 생명력과 인내를 말해주는듯 하다.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해마다 4월이면 호미곶은 언제나처럼 청보리 바다가 된다. 작은 문학관이 있고 보리들의 향연이 일렁이는 그곳에서 ‘한흑구’의 향기를 만나봄이 어떨는지….전경옥 언론인연보1909년 평양시 하수구리 출생1923년 평양 숭덕보통학교 졸업1928년 평양 숭인상업학교 졸업, 보성전문 상과 입학1929년 미국 시카고 노스파크대학 입학1930년 ‘우라키’에 시 ‘그러한 봄은 또 왔는가’ 등 발표1932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신문학과 전학1934년 모친 위독으로 귀향 전영택과 ‘대평양(大平壤)’ 창간1939년 흥사단 사건으로 1년간 투옥1945년 평양에서 서울로 이주1948년 포항으로 이주1958년 포항수산대학 교수1971년 첫 수필집 ‘동해산문’ 발간1974년 두 번째 수필집 ‘인생산문’ 발간 포항수산대학 정년 퇴임1975~1977년 효성여대 출강1979년 11월 7일, 70세로 작고

교육·정치·언론 다방면 명성…나라 곳곳에 발전 토대 쌓아

지난 2월 열린 김성곤 선생 43주기 추도식 모습. 그의 정치 인생과 함께 따라다니는 구설은 남로당과 관련한 ‘신분세탁’과 관련된 문제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는 1950년 6ㆍ25 당시 금성방직 사옥에서 인민군에 납치됐다가 탈출했고, 1951년에는 UN 종군기자 자격을 취득했으며 1958년에는 자유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으로 기재돼 있다.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승부수를 던질 배짱이 있었다는 것이다. ‘통 큰 정치인’, ‘협상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었다.그는 슬하에 3남3녀를 두었고 그의 유해는 두 차례의 이장 후 달성군 구지면에 안장됐다. 홍종흠 본사 객원편집위원

한국전쟁 중 입북해 ‘종전’ 촉구…일평생 “통일이 진정한 광복” 신념지켜

2005년 서울시 중구 필동 한국의 집에서 가진 미수(88세) 축하 모임(앞줄 중앙 백발머리를 한 이가 박진목). 2010년 박진목은 경기도 하남시에서 92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부인 이영숙씨와의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다. 그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유택(幽宅) 아래 남한산성 민족정기탑 앞에 묻혔다.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연보1918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출생연도미상-의성에서 보통학교 졸업 뒤 대구로 나감1938년 대구 달성군 구지면 오설리에서 양조장 경영, 현풍 곽씨와 결혼1942년 형 박시목을 따라 독립운동 투신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연행, 구속1945년 대구 달성군 건국준비위원회 활동1946년 남로당 달성군 조직책, 경북도당 간부1951년 서울서 북 이승엽과 회합(1월), 평양서 이승엽과 2차 회합(8월)1952년 평양 방문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1953년 만기 출소1954년 독립운동가 모임 원호회 이사, 야권통합운동1961년 5·16 군사혁명 감찰부 조사(무혐의 석방)1967년 영남일보 상임이사1970년 민족정기회 이사1972년 통일촉진회 참여2010년 7월13일 별세

‘86 아시아경기·88 서울올림픽’ 한국 스포츠 감동의 기적 주역

올림픽을 성공으로 이끈 김집은 그해 12월 체육부 장관이 됐다. 김집 장관은 엘리트 체육의 체제는 잡았다고 보고 생활체육 발전에 집중했다.김 장관은 조기 축구, 배드민턴, 등산 등을 생활체육으로 장려했다. 그는 특히 청소년 체육 문제에 몰두했다. 김집은 서울올림픽에서 절감한 3천500억 원의 예산을 국민 체육에 쏟아부었다. 그동안 체육계는 돈이 없어 기업들에 구걸하기 일쑤였다.김집은 시도별로 국민 생활관을 짓고, 체육관ㆍ수영장을 넣도록 했다. 2년마다 교포 1천여 명을 초청, 한민족 체육대회를 개최했다.1990년 3월 체육부 장관을 물러난 김집은 한국 청소년연맹 총재가 됐다.그는 청소년들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에 주력했고, 특히 효 사상을 최고 이념으로 가르쳤다.재임을 통해 1998년까지 총재를 역임한 김집은 그 해 은퇴했다.은퇴 후 경기도 수원 실버타운에서 아내와 함께 생활하던 그는 2012년 2월4일 86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서울대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연보1926년 2월18일 경북 상주군 함창면 출생1938년 상주 함창보통학교 졸업1944년 경기중학교(현 경기고) 졸업1948년 대구의과대(현 경북대 의대) 졸업1948년 대구동산병원 수련의1949년 11월30일 김인덕과 결혼1950년 자원입대, 군의관 종군1957년 6월 미국 에모리 대 소아과 유학1961년 미국 피츠버그 대 소아과 전문의 획득1961년 일본 요코하마 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1962년 귀국, 동산병원 복직1963~1980년 18년간 경북대 의과대 외래교수1970년 김집 소아과 의원 개원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전국구, 체육계 대표)1985년 제12대 국회의원1986년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선수단장1988년 서울 올림픽 선수단장1988년 12월 ~1990년 3월 체육부 장관1990~1998년 한국청소년연맹 총재2012년 2월4일 별세

파리 한복부티크·뉴욕 한복박물관…한복의 아름다움 세계에 알리다

한복 입은 마이클 잭슨의 모습. 이영희는 부시 전 대통령의 두루마기도 손수 만들었고, 힐러리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의 한복을 보고 감탄해 나중에 인디언 핑크로 따로 마련해 주기도 했다.연예인 중에는 하지원이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물론 외손자 며느리인 전지현의 한복 맵시도 아름답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전지현은 시할머니가 만들어준 한복을 외국 파티나 명절 때 꼭 입고 나타났다.특히 친척 결혼식에 한복을 아름답게 입고 나타나 시할머니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이영희는 전지현이 여러 색깔의 한복 중 오렌지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예술인 중에는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와 바이올린 연주자 정경화 등이 그녀의 옷을 입었다. 정경화는 한복의 인연으로 이영희가 10대 때 배웠던 오래된 바이올린을 수리해주기도 했다.소프라노 황수미는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이영희의 한복을 입고 ‘올림픽 찬가’를 불러 선녀 같다는 찬사를 받았다.세계적인 인물들도 그녀의 한복을 좋아했다. 마이클 잭슨은 이영희 한복을 입은 채 찍은 사진을 그녀에게 직접 보내줄 정도였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도 그녀의 한복을 입고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옷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김정일 한복도 만들었다. 2001년 평양에서 패션쇼를 할 때 체구가 비슷한 사람이 와서 치수를 대신 쟀는데 키가 아주 작았다고 기억했다. 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연보1936년 대구에서 출생1955년 경북여고 졸업1956년 결혼1976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이영희 한국 의상’을 열고 의상실 시작1981년 신라호텔서 첫 개인 한복패션쇼 개최1983년 백악관 초청으로 해외 첫 한복패션쇼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개·폐막 패션쇼 개최1993년 한국디자이너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회원으로 선정1994년 파리 중심가에 한복 부티크 ‘메종 드 이영희’ 오픈1996년 아시아 최고 디자이너로 선정2000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한복 패션쇼 ‘역사의 바람’개최2001년 평양서 이영희 민속의상전 개최2004년 뉴욕 ‘이영희 한국문화박물관’ 오픈2007년 이영희 한복 열두 벌이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특별소장품으로 선정.2008년 구글이 뽑은 ‘세계 60인 아티스트’에 선정2008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수상2009년 옥관문화훈장 수상2010년 한복 최초로 프랑스 파리의 오트 쿠튀르에 참가 2011년 독도의 날에 독도에서 패션쇼 개최2018년 5월17일 별세2018년 10월 15일 금관문화훈장 추서

‘1960년대 대중음악계 선도… ‘열아홉 순정’ 이미자 발굴하고 ‘이정표’ 남일해 스타덤에 올려

김천 직지공원안의 형제 노래비. 고려성 작사 ‘나그네 설움’과 나화랑 작곡 ‘무너진 사랑탑’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나화랑기념사업회(회장 민경탁ㆍ67)는 2014년 신인가수 등용문이자 나화랑의 가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제1회 ‘나화랑 가요제’를 개최했다.한국대중음악학회 회원이기도 한 민경탁 회장은 “그간 여러 사정으로 중단됐던 이 가요제를 속개해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밝혔다.또한 기념사업회는 2018 ‘나화랑 가요무대’를 지난 16일 김천시문화회관에서 개최했다. 2015년부터 매년 추모음악제로 열고 있다.김천 직지 문화공원에는 ‘고려성·나화랑 형제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 새겨진 ‘나그네 설움’과 ‘무너진 사랑탑’ 을 한 번쯤 흥얼거려봐도 좋으리라. 어쩌면 두 형제는 생전처럼 하늘에서도 함께 작사·작곡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전경옥 언론인자료제공: 민경탁 가요사학자연보 1921년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에서 출생1935년 김천고등보통학교 입학·학교 브라스밴드 악단장 활동.1940년 일본 동경 중앙음악학원 입학(바이올린 전공)1943년 ‘삼각산 손님’ 으로 작곡 데뷔1945년 김천여자중학교 음악교사 부임1948년 교직 사임 후 서울레코드사 창설 멤버로 입사 1952년 육군본부 군예대 입대해 악단장 활동1954년 킹스타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겸 문예부장1956년 KBS 서울 중앙방송국 경음악단 상임 지휘자 취임·대한레코드작가협회 창립 이사 선임1962년 라미라레코드사 창립1964~1980년 지구레코드사, 그랜드레코드사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활동1983년 11월17일 향년 62세로 타계

제3공화국 정치 주역…‘3선 개헌’ 앞장 ‘10·2 항명 파동’ 4인방

‘10ㆍ2 항명 파동’의 빌미가 됐던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당시 정계의 지형을 바꾼 ‘10ㆍ2 항명 파동’은 권력의 속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다. ‘10ㆍ2 항명 파동’은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1971년 국회 본회의에서 여당 일부 세력이 주도적으로 가결시켰던 사건이다.‘실미도사건’은 특수부대가 실미도에서 북파를 위해 지옥훈련을 받던 중, 인천으로 진출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진입하려던 사건이다. 그 후, ’실미도사건은 소설과 영화로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그 진상은 아직 베일에 쌓여있다.‘광주대단지사건(廣州大團地 事件)’은 1971년 8월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해 일으킨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이는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10ㆍ2 항명 파동’은 일견 중대한 사건을 책임지고 있던 소관 장관에 대한 일종의 책임 추궁이었으나 실상은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한 항명 사건이었다. 항명을 주도한 인사들은 당시 공화당 실세 4인방으로 불렸던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이었다. 삼선개헌을 주도한 공을 내세워 4인방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자 박 대통령은 친 김종필 계 구주류였던 오치성을 내무부장관에 기용해 4인방을 견제할 요량이었다.이에 4인방이 일대 반격을 가한 것이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사건이었다. 반격 찬스를 노리던 중, 야당이 빌미를 제공했고 4인방이 거사에 성공한 셈이었다.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신주류 4인방 중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계를 은퇴해야 했고, 백남억과 김진만은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야 했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10ㆍ2 항명 파동’을 유신체제를 도입해 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백남억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천ㆍ상주 선거구에서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이때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백남억은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겸 총재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정계 은퇴1978년 백남억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천에서 출마했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백남억은 정계를 은퇴했다.1988년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에 취임했고, 1991년 서봉문화재단(성균관대학교 운영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9월15일 백남억은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고향인 김천의 금릉공원 묘지에 묻혔다. 유족으로 백종현(白種玹) 전 국민대 경상대학장 등 3남 1녀가 있다. ‘단독범의 이론’, ‘형법총론’ 등 저서를 남겼다.오철환 칼럼니스트연보1914년 11월11일 김천에서 아버지 백낙준과 어머니 김금옥 사이에 출생1928년 봉계공립보통학교 졸업1931년 대구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시, 독서회사건으로 퇴교1936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1939년 일본 규슈제국대학교 법문학부 졸업, 평양철도국 입사1941년 부산철도국 재직·박갑규 여사와 결혼1947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조교수1955년 교환교수로 도미,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형사법 연구1958년 경북문화상(학술부문) 수상1959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대학원장1960~1973년 제5, 6, 7, 8, 9대 국회의원1964년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1970년 민주공화당 의장1973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1988년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1991년 서봉문화재단(성균관대 운영재단) 이사장2009년 9월15일 87세를 일기로 작고

사방 100리 최부자 땅 광복·교육에 모두 바쳐… 경주 300년 만석꾼 ‘육훈’에 깃든 자취만

경주시 교동 최부잣집의 사랑채. 최창호 이사의 안내로 경주시 교동 최부잣집에 들렀다. 공식 명칭은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 생가’(국가민속문화재 27호)다. 휴일을 맞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 불이 난 사랑채 ‘용암고택’은 최근 복원됐다. “의친왕(義親王)이 여기서 머문 적이 있어요. 문파란 호를 지었습니다. 신라(문천)의 언덕이란 뜻이지요.”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중간에 이 집에 내려오는 육훈(六訓)이 적혀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의 여섯 가지 행동지침이다.“안채엔 살림이 있고, 여름에는 주손이 내려와 한 번씩 주무십니다.” 처음엔 그 말뜻을 몰랐다. 문파 생가 최부잣집 역시 지금은 영남학원 소유가 됐다. 후손은 생가의 지상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문파 최준은 300년간 이어진 이른바 9대 진사 10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1884년 경주 교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경서와 사기 등을 읽고 서예를 익혔다. 아버지 최현식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1910년 이후 가사 일체를 문파에게 맡긴다. 그는 24세에 묘비에 새겨진 장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한 채 제사를 받들고 과객에 숙식을 제공하는 등 벼슬보다 사람의 도리를 중시했다.◆백산상회 설립, 독립운동 자금 조달문파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민족 계몽이 시급하다며 간이학교를 설립해 무료로 배우게 했다. 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1914년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와 함께 부산에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해 사장을 맡는다.백산상회는 겉으로는 무역회사지만 국내외 독립운동가의 연락소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백산상회는 1919년 자본금 100만 원을 증자해 주식회사로 개편한다. 문파는 경주 집을 담보로 35만 원을 넣었다.이후 무역을 구실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100여만 원을 보낸다. 백산무역은 이후 부도가 난다. 문파는 전 재산이 차압될 위기에 몰렸다. 또 비밀이 탄로나 그는 공주헌병대에서 옥살이를 한다.그 무렵 일제는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3·1만세운동 이후다. 총독부는 인심을 얻고 있는 최부잣집을 파산시켰다간 어떤 저항에 봉착할지 모른다는 판단을 한다.마침내 문파의 채무 상환을 10년간 유예하는 조치가 내려진다. 최 옹은 “경주 최부잣집에 머무른 의친왕이 일본 식산(殖産)은행장에게 상환 연기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설에 가깝다”고 덧붙였다.덕분에 최부자의 전 재산 9천 석은 1935년 조선신탁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상환 기일이 돌아오기 전 용케 광복을 맞이했다. 최부자의 재산은 최종 3천 석이 남아 있었다. 문파는 그걸 교육사업으로 모두 돌린다. 왜 그 길을 택했을까.최 옹의 증언. “할아버지가 한번은 저에게 의견을 물어요. 최부자 재산이 영원히 내려갈 수는 없다. 그 자취를 교육사업에 영원히 남기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손자는 “할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답했다. 그래서 남은 재산은 모두 교육사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집 한 채 상속 받은 게 없어요.”◆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문파는 1915년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선다. 광복 뒤 1946년 2월에는 경교장을 찾아 존경하던 백범 김구를 만난다. 백범이 칭찬한다.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 준 최 선생의 공로야말로 3천 만 동포가 우러러볼 것입니다.” 문파는 그때서야 자신이 송금한 자금이 안희제를 통해 어김없이 임시정부에 들어간 걸 백범의 서류에서 확인했다고 한다. 최준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여기서 불편한 이야기 하나. 의혹이 제기된 내용이다. 대한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박상진 의사의 재산과 관련해서다. 문파는 박 의사의 사촌 처남이다. 가까운 관계여서 박 의사는 문파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 박 의사가 순국한 뒤 유족은 그가 미쓰이물산에 저당한 토지를 문파가 매수한데 대해 불복 신청을 한다. 문파가 박 의사 집안을 몰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최창호 이사는 “오해”라고 덧붙인다.◆문화에 대한 탁월한 식견, 기업인으로서도 맹활약문파는 문화에도 식견이 있었다. 1920년 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아 문화재 지키기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33년에는 여러 문중과 손잡고 풍속·습관·토산 등 경주지역 현황을 밝힌 ‘동경통지(東京通誌)’ 14권을 발간한다.또 1920년 그는 동아일보의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중앙학원재단 이사로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도서관 설립기금을 다액 기부하기도 한다.기업가로도 활동한다. 문파는 1919년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주주 겸 창립위원을 지낸다. 1920년대엔 고려요업주식회사와 대동무역회사를 창립하고 한성은행과 경남은행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그 무렵 조선 총독은 3·1운동 이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문파를 중추원 참의와 문교부장을 맡도록 회유했으나 그는 “우매한 촌로일 뿐”이라며 끝내 거절한다.경주 최부잣집 앞에는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 건물이 있다. 최부자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경주시가 땅을 매입해 지었다. 사방 100리 최부자 땅은 광복과 지역 인재 양성에 모두 쓰이고 이제 육훈을 전할 공간만 남은 것이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연보1884년 경주시 교동에서 경주 최씨 최현식과 풍산 류씨의 맏아들로 출생1898년 안동의 풍산 김씨 김석윤과 결혼 1904년 아버지로부터 가사(家事)를 물려받음1908년 장릉(단종의 능) 참봉1912년 경남은행 발기인, 이사 선임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단원, 광복회 재무부장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 취체역 사장, 광복회사건으로 체포돼 재판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 경상북도 평의원, 경주고적보존회 이사장1922년 중앙학교 보성학교 재단이사 1933년 ‘동경통지’ 편찬 주관1945년 경북종합대학 기성회 회장 1947년 대구대학 설립 1955년 문파교육재단·계림학숙 설립1957년 대구대학·계림학숙 합병1970년 타계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식민지 백성 설움 담은 노래 너도나도 따라불러

고향 성주에 있는 백년설 노래비. 은퇴 후 평소 언론계 친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추천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차례 입원과 수술을 했으며 마침내 1978년 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공항에 나온 선후배들의 배웅을 받자 그는 “가고 싶지 않다”고 큰 소리로 외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국생활은 말 그대로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1980년 12월6일. 그는 나그네 길을 떠나듯 이국에서 먼 길을 떠났다. 고향의 눈을 그리워하며.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백년설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꼭 주막집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눈 오는 마당을 혼곤히 넋을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구성지며 부드러운 성음이 있을 수 있는지 감탄 할 수밖에 없다.”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연보1915년 5월19일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출생1931년 성주 농업보습학교 졸업1935년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작사 시작1939년 노래 ‘유랑극단’ 출반. 예명 ‘백년설’로 가수 데뷔1940년 ‘나그네 설움’ 출반. ‘번지 없는 주막’ 히트1941년 이한옥과 결혼. ‘대지의 항구’ 등 히트1942년 오케레코드사로 이적.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1948년 대구로 이주1950년 고아원 청동원(靑童園) 운영1953년 부인 이한옥 사망,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경북사회사업연합회 회장1955년 가수 심연옥과 결혼1958년 백민영화사 창설1960년 가수협회 초대회장1963년 한국연예단장협회 초대회장. 서울 시민회관서 은퇴공연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백년설 독집’ 발매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1980년 12월6일 타계2002년 문화훈장 보관장 수훈백년설의 에피소드#1. 1950년대 중반 백년설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초청받았다. 평소 이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고 아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측근 보좌관이 백년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하도록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백년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노래만 부를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 백년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도 생일 축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었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고 한번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력에 눈치 보며 아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 큰 형인 이판룡씨가 1956년 사망했을 때였다. 백년설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 성주로 향했으나 상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상객과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을 막으며 ‘노래를 한 곡 먼저 불러주고 상가에 가라’는 것이었다. 백년설은 문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화까지 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백년설은 형 상가 앞에서 ‘한잔 술에 한잔 사랑’을 부르고 나서야 상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3. 화류계에서도 백년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방공연을 마치면 그를 초청하고자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 슬쩍 빠져나가 혼자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만 있으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진수성찬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순재 언론인

삶이 고된 사람들에 ‘신바람 박사’표 처방 행복과 웃음으로 마음의 건강 회복

황수관 박사는 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로 임명됐다. 사진은 이듬 해 초 필리핀을 방문, 결핵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고난의 길을 헤쳐 온 황수관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우 이웃들에 대한 기부와 봉사를 쉬지 않았다.태안반도 기름때 제거, 백령도 주민 위로 강연, 오지 주택 보수까지 그는 틈만 나면 봉사에 나섰다.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로 임명돼 르완다, 필리핀 등 외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다.그는 의외로 정치권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황 박사가 권세까지 탐한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정치가 봉사와 애국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그는 1999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음 해 그는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마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이회창 총재의 간청으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경주 국회의원 보선과 비례대표 공천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성공할 것으로 낙관했다.◆느닷없는 종말2012년 12월11일 건강했던 그가 갑자기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로 서울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진단 결과 간농양으로 밝혀져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입원 20일 만인 30일 병이 악화돼 합병증인 급성 패혈증으로 숨졌다. 만 67세, 느닷없는 종말이었다. 유족으로 부인 손정자 씨와 세 자녀가 있다. ‘황수관 박사의 웰빙 건강법’ 등 저서 20여 편과 운동ㆍ건강 관련 논문 100여 편을 남겼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연보1945년 8월30일 일본 히로시마 부근 출생1957년 안강북부초등학교 졸업, 포항 영일중 입학1960년 안강중 졸업1963년 안강농고 졸업1966년 대구교대 졸업1968년 손정자와 결혼1966년 3월~1979년 10월 초등학교 교사1978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야간) 졸업1980년 경북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야간) 졸업1981년 5월~1987년 2월 경북대 의대 연구원1990년 국민대 대학원 생리학 박사 취득1987년 10월~1999년 10월 12년 간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교수1997년 SBS 예능 프로그램 ‘호기심 천국’ 출연1999년 새천년민주당 입당2000년 4월 제16대 총선 서울 마포 을 지역구 출마, 낙선2009년 3월 경북 경주 국회의원 재선거 한나라당 공천 탈락2010년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 임명, 해외 봉사 활동2012년 12월30일 67세로 별세

가난한 농가 출신 성실함으로 채운 삶…‘기업가·정치인·육영사업가’로 우뚝

198 2년 부산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뒤 가족과 함께 한 이동녕 부부. 이 같은 호황에 힘입어 1953년 그가 동창실업의 사장에 취임하면서 봉명광업은 흑연 채굴량 월 2천t을 반은 내수용으로 반은 수출할 만큼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1956년에는 동창실업이 수출실적 20만 달러 이상의 실적을 가진 19개 업체에 랭킹 됨으로써 재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무역업체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창행사에서 수상했고 무역협회의 이사로 피선됐다. 이같이 사업이 순조롭게 번창해가자 그는 젊었을 때의 꿈인 육영사업에 관심을 갖고 1955년 사단법인 문경여자학원을 설립, 문경여중과 문경여고를 차례로 개교함으로써 자신이 이룩한 재산과 부를 고향주민을 위해 돌려주기 시작했다. 이 무렵 대전에서 대흥양조주식회사와 부국연료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민간연구기관으로 국내 최초인 광일생산기술연구소를 창설했고 삼신해운주식회사와 한국규조토공업주식회사도 설립했다. 특히 봉명광업은 종업원 복지를 위해 단일사업장으로는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것이 당시 업계의 귀감이 됐다. 사업에만 전념하던 서봉은 문경지역의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 윤만석이 탈당함으로써 뜻밖에 이정림씨의 추천으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이 지역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게 됐다. 정치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던 차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국회의원직을 사임했지만 5ㆍ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권유로 6, 7대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재개하게 된다.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 졸업후 첫 발령지가 문경보통학교였고 서봉이 그 학교의 학부모로서 오랜 인연을 맺었던 터라 거절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8대 총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출마를 종용했으나 그는 무투표 당선됐던 지역구를 기어코 후진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그는 정부의 축산장려책에 따라 경주 보문지구에 삼주개발을 설립하고 목축과 유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게 됐고 이와 함께 관광레저를 겸한 주식회사 도투락을 설립했다. 서울역 앞에는 20층 규모로 삼주개발의 오피스 건물을 지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건물이었다. 광산과 함께 봉명의 2대 사업인 ‘충북시멘트’를 인수해 확장시키면서 아세아시멘트로 사명을 바꿨다. 이 같이 서봉은 나라의 경제성장에 맞춰 사업확장을 하는 한편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1968년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합쳐 영남대학을 건립해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9년에는 성균관대학을 인수해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고향 문경에서는 문경여중고뿐만 아니라 인문계고인 문창고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았다.88세에 작고한 서봉은 슬하에 4남2녀를 두었고 아들들에게 사업체를 나눠 경영하게 했다. 묘소는 점촌 문창고교 뒷산에 있다.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연보1905년 문경군 문경읍 팔영리에서 출생1914년 문경공립보통학교입학1922년 문경군청근무1935년 경북도청 회계과로 전근1940년 경북도산림과 지방주사 사임1942년 봉명흑연광업소 총무부장1947년 봉명흑연광업소 관리인1950년 동창실업주식회사 설립1955년 재단법인 문경여자학원 설립1957년 봉명광업소 불하 매입1958년 제4대 민의원 당선(문경)1960년 민의원 사임, 동창연료주식회사 설립1963년 제6대 국회의원당선(문경), 광일생산기술연구소 설립1967년 제7대국회의원 당선(문경), 삼주개발주식회사 설립1968년 학교법인 영남학원 초대이사장 취임, 충북시멘트 인수1969년 삼주빌딩 기공(1970년 완공), 문창종합고등학교 설립인가1972년 정계은퇴1974년 주식회사 도투락 설립1976년 대영전기, 대영주공 인수1979년 성균관대학재단 이사장 취임1981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1983년 대한판지주식회사 인수1992년 타계

쪽진 머리·고운 한복의 ‘예인’…까만 선글라스 낀 ‘여장부’로 소리꾼 인생 정점을 찍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 어귀 작은 공원에 세워진 박록주 명창 기념비. 뒷면에 그녀가 은퇴무대에서 불러 관객들을 눈물 흘리게 했던 ‘백발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박록주를 기리는 사업으로 (사)박록주기념사업회(회장 석영복)가 2001년부터 매년 5월 구미에서 ‘전국국악대전’을 열고 있다. 학술대회를 통해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1979년 5월26일, 박록주는 향년 74세로 영면에 들었다. 선산읍 노상리 마을 어귀 소공원의 기념비에는 은퇴무대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불렀던 ‘백발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인생 백년이 어찌 이리 허망하냐/ 엊그제 청춘 홍안이 오늘 백발이로다~~’ 판소리 외길을 걸어간 예인(藝人) 박록주! 우렁우렁한 소리 한 대목이 가을바람결에 실려오는듯 하다.전경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