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 임을 고백하는 하루

당신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하루신영재미 시인·칼럼니스트긴 비행시간이 이유였을까. 한국을 다녀와 2주 후쯤 갑작스러운 생리현상에 어쩔 줄을 몰라 했던 일이다.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 어느 곳에 가든지 새로운 곳에서의 음식을 마다하지 않고 먹는 편이고, 잠도 잘자는 편이었으며 아침저녁으로 화장실을 가는 일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10여 년 전부터 교회의 선교사역도 여러 번 다녀왔지만, 다른 교인들에 비해 별 불편함이 없이 다녀와 같이 간 다른 분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박 2일의 종주산행을 가서도 마찬가지였고 타국이나 타 주의 장시간 산행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해왔었다.한국을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났는데 시차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한 이틀 정도면 시차 극복이 되는가 싶은데, 이상하리만치 미국 집에 돌아오면 일주일은 힘들어한다. 물론 남편의 꾸지람 섞인 뒷말도 이어진다. 한국에 갈 때는 신바람이 나서 시차 극복이 쉬운데, 집에 도착하면 귀찮아서 그런다는 핀잔 섞인 말을 흘린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니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집에서 주로 내 할 일을 하는 나는 자유로운 것이 문제였음을 말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밤잠을 못 자면 낮잠을 잔 이유였다.물론 잠자는 시간이 남다르긴 하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 정리를 하더라도 환한 대낮보다는 조용한 새벽 시간이나 늦은 밤 시간을 많이 택하니 말이다. 여하튼 이유를 불문하고 내게 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남편이 일을 나가고 혼자 있는 아침 시간이었다. 남편이랑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주했으니 자연스럽게 커피 잔을 씻고 볼일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무엇인가 수월치 않음을 직감했다. 이리저리 애를 써보는데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사건이 내게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 되고 말았다.문득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25여 년 전 한국에서 시아버님 친하신 친구분 아드님이 화장실에서 큰 볼일을 보다가 30대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일이 있었다.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보통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본능적 행동도 스스럼없이 해보면서 별 생각을 다 했다. 남편을 되돌아오라고 할 수도 없고 가깝게 사는 친구를 부를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 친구도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니 그냥 마음에서 접고 말았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몇 있다는 것이 내게는 또한 감사이고 축복이었다.눈이 펑펑 내리던 날의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다급한 마음에 가깝게 사시는 우리 교회 여자 부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급한 대로 관장약을 부탁드린다고 염치불고하고 말씀을 드린 것이다. 머리와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목사님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눈길이라 운전하시기 힘드시니, 바깥 목사님이 운전을 해주시고 두 아이를 태우고 온 가족이 눈이 펑펑 오는 날 오셨다. 자동차의 눈을 치우시랴 두 아이 챙겨서 차에 태우시랴 얼마나 바쁘셨을까. 생각하니 너무도 감사하고 송구스런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렇듯 생각지 못한 생리적 현상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시간이 내게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머리와 몸에서 식은땀이 나는 때에 이러다 큰 일이 생길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순간 너무도 나약한 나를 또 만난다. 내 몸에서 열린 구멍 하나 막히면 이렇듯 온몸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눈과 귀와 코(콧구멍) 그리고 입과 생식기의 모든 호흡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고 감사한 선물인지 다시 또 '당신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었다. 어디 그뿐일까.'당신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하루'였다. 그리고 다급한 상황에서 내 곁에 누가 있는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곁에 있는 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음을 서로 보듬어주고 기대어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생임을 다시 또 생각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연로하신 어른들을 그리고 홀로 사시는 어른들을 잠시 또 생각했다. 이렇듯 급한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감사한 축복이 또 있을까. 지금 호흡하는 이 시간이 또 감사한 것을.

사랑의 온기, 흰죽

사랑의 온기, 흰죽이성숙재미 수필가캘리포니아에서 맞은 독감예방 백신이 서울의 혹한을 이기기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서울에 다녀온 후 앓아누워 버렸다.방에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부엌에서 참기름 냄새가 날아온다. 남편이 흰죽을 끓여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릴 때, 별다른 약이 없던 때에 엄마는 몸살만 나도 흰죽을 끓여주었다. 뜨끈한 보리차와 흰죽, 밤을 새워 곁을 지켜주던 엄마의 손길로 바이러스를 이겨내곤 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말간 흰죽이 그리 고소할 수가 없었다.결혼을 하니 남편이 감기만 걸려도 죽을 끓여준다. 엄마처럼 흰 쌀만으로 끓이지 않고 여러 가지 재료를 넣는다는 게 다른 점이지만. 그는 죽 조리법을 이미 대여섯 가지 갖고 있다. 새우죽, 야채죽, 소고기죽, 버섯죽에 미국 사람들이 배탈 나거나 감기 걸릴 때 자주 찾는 닭죽 등이다. 이번에 그는 은행 알을 볶아 넣어 흰죽을 끓였다. 흰 도자기 사발에 흰 쌀죽, 노란 은행이 수채화처럼 떠 있고 다진 쪽파 몇 조각이 무늬를 이루고 있다. 연한 색의 조합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쟁반에는 간장 종지와 조미 안 된 구운 김이 함께 놓여 있다. 간장은 참기름을 안 띄운 생간장이다. 친정 이모가 보내 준 햇김은 아직 바다냄새를 안고 있다. 담백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던 나는 중환자처럼 느리게 몸을 일으켜 흰죽에 간장을 조금씩 찍어 삼킨다. 목은 부드러워지고 위장은 따듯하게 데워진다. 좋다. 침대 위에서 그의 무릎에 놓인 쟁반 위의 흰죽을 나는 깨작거리며 천천히 먹어 치운다. 그는 내 엄살을 묵인하며 오작동하는 기계를 다루듯 내게 물도 건네주고 김도 부수어 준다. 죽 한 그릇을 비운 후 나는 다시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그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다독이더니 빈 그릇을 챙겨 들고 나간다.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 나는 이불 속에서 혼자 해죽거리다 꿀 같은 수면에 빠진다. 왜 진작 앓아누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현대 사회학의 거장 앤서니 기든스는 사랑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앞뒤 안 가리는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을 열정적 사랑,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을 낭만적 사랑, 자신을 타자에게 열어 보이는 것으로 구속이 없는 합류적 사랑이 그것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뇌의 화학작용 지속 기간은 30개월 미만이다. 항간에는 이를 두고 열정적 사랑의 유효기간이라고도 한다. 뜨겁고 짧은 사랑. 추억이 되는 모든 사랑이다. 합류적 사랑이란 우정 같은 것일지 모른다. 기든스는 일부일처일 필요도 없는 형태가 합류적 사랑이라고 했다. 낭만적 사랑이란 일부일처를 요구하며 뜨겁지 않고 은근하나 식지 않는 사랑이다. 상대는 자신의 결여를 메워주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는 내 허술함을 아는 사람이다.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부자가 되고 어떻게 출세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산다. 남편은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어떻게 입맛을 돋울 것인가,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그는 흰죽을 위해 1시간 전부터 쌀을 불려두었다. 식은 밥에 물을 붓고 끓이는 것은 밥이 부드러워져서 먹기에 편하게 되는 것이지 죽이 아니라는 게 그의 견해다. 생쌀로 끓인 죽이라야 밥알이 탱글탱글하고 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는 불린 쌀을 참기름에 볶아 물을 붓고 죽을 만든다. 쌀을 저어가며 잘 볶는 게 죽 맛의 비결, 그런 후 물을 붓고 다시 저어가며 끓여 흰죽을 완성한다. 마지막에 볶아 둔 은행을 넣고 한 번 더 끓인 후 다진 파를 고명으로 올려준다. 더운 가스레인지 앞에 한 시간은 족히 붙들려 있어야 완성되는 음식이 흰죽이다. 만드는 사람의 정성 없이 가능한 메뉴가 아니다. 먹을 때도 특별하다. 흰죽을 먹을 때는 좀 툴툴 거려도 좋고 수발을 받으며 왕후처럼 굴어도 좋다. 음식치고는 희한한 음식이다.또한 흰죽만한 위로가 없으니 그리 먹고 나면 면역이 다져져서 병은 어느새 낫고야 만다. 대상만 있다면 엄살과 위로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엄살을 부리는 사람은 아무데서나 그리 하는 게 아니다. 위로 받고 싶은 사람 앞에서 엄살을 부린다. 위로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상황일 때 위로 받고 싶은 방식으로 엄살하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한다.내게 흰죽을 끓여 주던 엄마는 이제 자신의 몸도 돌보기 어려운 노구가 되었다. 어제는 서울의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오메가 쓰리 좀 주문해 달라고 전화를 했더라는 얘기다. 엄마는 자신의 기억력이 자꾸 떨어진다며 뇌혈관에 문제 있는 거 같다며 오메가 쓰리를 사고 싶어 했다고 한다. 친정집 식탁에는 각종 영양보조제가 즐비하다. 오메가 쓰리도 아직 남아 있다. 엄마는 아마도 오메가 쓰리가 필요해서 전화한 게 아니다. 그녀는 지금 엄살을 부리는 것이다. 자식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엄마는 어쩌면 흰죽이 먹고 싶은지도 모른다. 제 살기 바쁜 자식들은 엄마의 엄살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휘력 떨어지는 번역기처럼 오메가 쓰리는 ‘보고 싶다, 외롭다’로 전송되지 못하고 ‘뇌혈관에 좋다’로 오역된다. 동생은 남아 있는 오메가 쓰리 먼저 드시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기억력 감퇴한 우리 엄마, 며칠 후면 내게도 전화를 걸어올지 모른다. 오메가 쓰리 주문해 달라고.그러나, 엄마에게 필요한 건 흰죽이다, 흰죽.

헤밍웨이의 다락방

헤밍웨이의 다락방이현숙재미수필가나무가 양편으로 줄을 맞춰 서 있는 한적한 동네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는 이름에 맞게 나무가 많아서 동네 입구부터 마음이 풍성해진다.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태어나 자란 집 앞이다. 초록빛 잔디를 앞치마처럼 두른 단아한 빅토리아풍의 2층 집은 큰 나무 옆에 ‘헤밍웨이의 생가 1899’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밑에 헤밍웨이의 출생지라고 새긴 명판이 비스듬히 누워 햇볕을 쬔다. 왼쪽에 둥근 탑 모양의 지붕이 작은 성처럼 붙어 동화의 나라에 온 듯했다.생가는 헤밍웨이의 외할아버지가 지은 집으로 3대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인 클리렌스 헤밍웨이는 사냥과 낚시를 즐겼던 산부인과 의사고 어머니는 성악가다. 그에게는 누나 하나에 세 명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는 그가 다섯 살까지 여장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당시 사진이나 이야기가 나오면 싫어했단다. 3세 때 낚싯대를 10세 때에 사냥총을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받았은 것이 그의 평생 취미가 되었다. 4세에 라틴어 학명으로 된 새 이름을 250개나 외워 아버지는 히포크라테스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자랑을 했단다. 어머니는 첼로를 가르쳤는데 연습때문에 학교까지 결석시키자 어깃장을 놓으려 권투를 배웠다. 어머니에게 신앙을 물려받고 성악과 악기 연주를 배운 것이 예술적 감성으로 아버지에서 물려받은 지식과 방랑성이 그의 문학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헤밍웨이 생가의 문은 잠겨 있었다. 휴장하는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온 것이 실수다. 그가 꿈을 키웠던 다락방을 보고 싶었는데 어디쯤 있을까. 그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지만, 알 수가 없다. 허탈해서 다리의 힘이 빠졌다. 비둘기색으로 칠해진 계단에 앉았다. 넋 놓고 있는데 남자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그 뒤를 엄마인 듯한 여인이 따르며 나에게 “Hi”하며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헤밍웨이도 이 마당에서 뛰어놀며 꿈을 키웠겠지.얼마 전에 헤밍웨이가 10살 때 쓴 단편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헤밍웨이의 오랜 친구였던 토비 브루스의 자손들이 관리해오던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의 한 문서보관시설에 보관돼 있었다. 얼룩진 노트에 헤밍웨이의 육필로 쓰인 작품에는 제목이 없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1년에 한 번씩 아일랜드의 ‘로스 성’(Ross Castle)에 나타나 야간 축제를 열고, 날이 밝아지면 무덤으로 돌아가는 죽은 남성 ‘오도나에’의 얘기를 썼다고 한다. 총 14쪽 분량에는 이 작품뿐 아니라 헤밍웨이의 시(詩)와 문법 관련 규칙을 적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스페니어 교수는 “헤밍웨이가 작품에서 한결같이 ‘상상적 얘기’(imaginative narrative)를 펼친 것을 본 것은 처음으로 정말 놀랍고 두드러진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상상 속의 이야기일까? 린 호숫가 로스 성에는 요즘도 밤에 문이 닫히는 소리와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얼마 전 세계에서 유령이 나오는 장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는데 110년 전에, 그것도 10살짜리 아이가 먼 곳의 이야기를 어떻게 썼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도 교내 편집을 도맡아 해서 6개월 동안 30편 이상의 작품을 교내 신문에 게재할 정도로 뛰어난 문학 천재였다.그는 다락방에서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데 그때의 기억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가 훗날 작품 속에서 다시 날개를 펼쳤는지도 모른다. 독서를 좋아했으니 엎드려 책을 읽었을 것이다. 누워서 새의 이름을 달달 외우며 발을 까닥거리다가 지칠 때 쯤 작은 창으로 하늘을 보고 구름에 그림을 그렸을지도, 햇살에 날아다니는 먼지의 난무를 따라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다녔을 수도 있다. 다락방은 그 어감에서 은밀하고 자잘한 추억과 낡은 보물을 보관할 수 있다는 특별한 느낌이 든다.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다락방을 무료로 사용하는 ‘라이터 인 레지던스’(Writer in Residence) 프로그램이 생겼다. 일 년간 집필 공간을 제공하는데 나이 제한이나 신인·기성 구분 없이 창의적인 작품을 써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원할 수 있다. 내 영어 실력이나 문학성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기에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문향이라도 맡으려는 했는데 지나친 욕심이었나. 대문호가 문학의 싹을 키운 다락방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가 보다.헤밍웨이는 절제된 표현 방법인 간결한 문체로 소설을 썼다. 글에 작가의 진실성이 담기면 독자는 작가가 생략한 것들을 더욱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모험적인 삶과 강한 남성미를 풍기며 연예인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킨 미국의 대표 작가 헤밍웨이. “그것을 하러 찾아갔다.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해내면 된다.” 헤밍웨이가 한 말이다. 내가 원했던 그것은 무엇일까. 화두로 가슴에 남는다.

변해가는 추수감사절

변해가는 추수감사절성민희재미수필가 오븐에서 연기가 솔솔 난다. 해마다 한 번씩 맡는 냄새다. 터키 굽는 냄새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진하게 냄새가 풍겨 와도 감각이 없더니 이제는 눈을 감고 그 속에 푹 잠기고 싶은 향기가 되었다. 딸이 정성껏 요리한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소금, 후추, 설탕과 버터를 넣어 잘 으깬 매쉬드 포테이토, 샛노랗고 부드러운 미국고구마에 머쉬멜로를 넣어서 구운 야미, 크림콘, 그린빈, 그레이비, 스태핑, 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디너롤 등이 알록달록 식탁을 채운다. 흩어져 있던 가족이 모두 모여 한 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 만찬식탁이다.딸은 모든 음식을 본인이 할 테니까 사촌들은 디저트와 음료수만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김치와 잡채를 배당 받았다. 양식을 실컷 먹고도 뒤늦게 끓여낸 김치찌개와 밥을 반가워하던 어른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할 때는 보이지 않던 와인바도 세련되게 차려졌다. 갖가지 종류의 치즈와 잘 쪄진 브로클리와 당근, 블랙베리, 페퍼로니, 올리브와 땅콩 등 미국사람들 파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시간이 되자 식구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모두 빈손으로 오라고 했는데도 들고 온 과일 박스와 과자 상자가 한쪽 벽 밑에 쌓인다. 보스톤에서 날아온 조카는 공부하느라 힘이 들었는지 얼굴이 더 창백해 졌고, 첫 직장을 잡은 막내 조카는 청바지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얌전한 치마 아래로 스타킹까지 신었다. 올 봄에 결혼한 조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은 모습이 의젓하다. 딸은 집을 휘젓고 뛰어 다니는 두 꼬마를 붙잡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한다. 제법 엄마 티가 난다. 갈색으로 잘 익은 터키를 오븐에서 꺼낸 사위가 양손에 칼을 쥐고 나선다. 남편과 오빠와 남동생, 나와 올케들과 여동생이 하던 일이 모두 아이들 손으로 넘어갔다.어머니 대신 남편이 감사기도를 한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는 본인도 힘들고 곁에 사람에게도 폐가 된다며 아예 오시지 않았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모든 가정을 한 바퀴 돌던 느리고 평온하던 기도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알아듣든 말든 상관이 없던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하던 기도는 짧고 간단한 영어 기도로 바뀌었다.할머니의 긴 감사 기도를 견디지 못하고 킥킥 팔꿈치로 서로 찔러대던 아이. 높은 식탁에 팔이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하고 서서 애를 태우던 아이. 여드름이 퐁퐁 솟은 얼굴에 노랗게 물든 머리를 하고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래키던 아이가 모두 사라졌다. 보이프렌드와 걸프렌드를 수줍게 소개하던 아이도 이제는 아예 배우자를 따라 가버리거나 먼 나라에서 전화 목소리만 들려주는 어른으로 변했다. 커다란 냄비를 든 엄마 뒤를 쫄랑쫄랑 따라 들어오던 꼬마들이 어느새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식탁도 그대로고 그릇도 그대로고 그 때 켰던 그 촛불도 변치 않았는데, 아니, 우리도 모두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미국 온 첫 해의 추수감사절 날에 지인의 초대를 받았다. 어떻게 지내는 미국의 명절일까 막연한 설레임으로 나와 남편은 한국 배를 한 상자 사 들고 갔다. 그날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은 도무지 낯설었다. 말로만 듣던 터키는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어느 요리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커다란 접시에 터키와 햄을 듬뿍 얹고 그 위에 그래이비를 끼얹어 잘도 먹던데 나는 으깬 감자와 달콤한 크랜베리 소스만 먹고 돌아왔다. 추수감사절 만찬이 어떤 건지 비로소 알게 된 늦은 저녁. 우리는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얼큰한 라면을 또 끓여 먹었다.모든 상점이 일체 휴업을 하던 그때와는 달리 요즈음은 문을 여는 상점이 늘어난다. 집에서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만찬을 즐기던 풍조가 조금씩 사라지고 요즘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가족도 많아졌다. 집에서 구워야만 하는 줄로 알았던 터키와 햄은 주문만 하면 배달되기도 한다. 현지 언론이 조사한 결과 올해는 한인타운의 상점도 90%정도가 문을 연다고 한다. 타지에서 온 가족들이 아예 한인타운의 식당에서 만나 먹고 샤핑도 즐긴다는 소식이다. 차도 사람도 없던 추수감사절 거리가 이제는 오히려 분주해졌다. 어떤 가게는 오후 4시부터 오픈하여 이른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한다고도 한다.비릿한 냄새가 느껴져 한 입도 못 먹던 터키를 40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은 고향처럼 정다우니 아이들이 변했다고, 세상이 변했다고 쓸쓸해 할 일이 아니다.

'대략난감(大略難堪)'

‘대략난감’(大略難堪)신 영재미 시인·칼럼니스트당황하다 못해 황당한 때를 일컫는 것일 게다. 바로 어제 아침 그런 일을 겪었다. 한국 방문 중 인천 송도에 사는 시댁에 머물까 싶었는데, 시부모께서 중국 여행 중이라 일산의 작은 언니 집으로 정하고 조카와 조카며느리 그리고 언니가 공항에 픽업을 와 주었다. 며칠 그렇게 일산에 머무르다가 친정 부모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기 위해 경기도 의정부로 향했다. 며칠 막내 언니 집에서 머무르다 예비전도사 상담학 특강이 있어 1호선 전철을 타고 시청에서 내려 사당역을 가기 위해 2호선 순환선으로 환승하는 때였다.아뿔싸. 작은 여행용 가방의 지퍼가 터진 것이다. 보통 때는 편안한 차림으로 다니는데 특강이 있는 날이라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도 챙겨 신은 상태였으니 여러 가지 조건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상황이었다. 작은 가방을 챙겼던 이유는 건강 검진을 받고 싶어서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옷가지와 신학공부를 하는 예비 전도사들과 두 교수님께 내 산문집 몇 권을 전해드리고 싶어 욕심을 냈던 것이다. 그리고 랩탑과 편안한 부츠를 넣고 있었으니 가방 속은 여유없는 폭발 직전이었던 것이다.계단을 몇 내려가다가 퍽 소리와 함께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말 ‘대략난감’ 상황이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잠깐이지만,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도움을 주겠다며 지퍼가 열린 무거운 가방을 애써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와 급하게 가방 안에 있던 산문집 ‘자유로운 영혼의 노래를 부르며’를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전해주었다. 그렇게 그 학생은 끝까지 도움을 주며 2호선 순환선에 내 가방을 실어주고 떠났다. 고마운 마음이 스쳐 지났다. 이렇게 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준 그 마음과 행동에 감사했다.2호선 순환선이 사당역을 향해 가고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난다. 사람이 앉을 좌석에 올려진 툭 터진 저 가방을 또 어떻게 사당역에서 내릴까를 머릿속에 되뇌며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우선 내리는 것이 우선이니 내 힘으로는 어려울 것 같고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아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한 젊은 남자분이 있었다. 때마침 사당역 도착 전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그 남자분이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좌석에 놔둔 가방을 그대로 둔 채로 그분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니 흔쾌히 받아주었다.그나마 사당역에서 내린 곳은 에스칼레이터가 있어 다행이었다. 도움을 준 분에게 산문집 한 권을 챙겨드리려니 괜찮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오가는 인파들 속에서 가방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머물렀다. 일단 밖에 나가면 캐리어를 찾아 옮겨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도 그 나중의 일이다. 지금의 지하에서 지상을 오르는 저 짧은 거리까지의 이동이 중요한 것이다. ‘대처능력’의 순간이 필요한 때였다. 문득, 가방을 묶을 양말이 떠올랐다. 양말과 래깅스를 이용해 십자로 묶었다. 참으로 급한 상황에서의 대처법이 그럴싸하지 않은가.이렇듯 우리의 삶에서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던가. 일어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어난 일을 대처할 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또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사자성어처럼 삶에서나 인생에서도 과욕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여행용 가방에 욕심을 내어 많은 물건을 넣은 이유였다.하지만 또 그 난감하고 황당한 상황에서 하나를 배웠으니 감사한 하루였다. 특강을 마치고 학생 한 분이 여기저기 셀폰으로 검색을 해보더니 홈플러스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안내해 주어 또 도움을 받았다.병원 건강검진을 위해 움직여야 하니 강의를 마친 저녁은 병원과 가까운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건강검진을 마친 후 화곡동의 큰 언니 집으로 이동할 계획이고 아직 남은 일정은 캐리어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하는 까닭에 캐리어의 바퀴가 튼튼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홈플러스에서 물건을 고르다 제일 비싼 가격의 캐리어를 구매했다. 오래도록 나와 동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캐리어 바퀴를 찬찬히 들여다 본다. 이렇듯 늘 함께 동행하는 가족이나 친구 등 삶에서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사전 의료지시서’를 받아 들고

‘사전 의료지시서’를 받아 들고이성숙재미수필가캘리포니아에 존엄사가 허용된 지 5년째다. 이제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존엄사, 안락사 또는 다소 자극적 적극적 의미의 조력자살이라는 표현도 쓴다. 법안은 아마도 가장 경건하고 순한 느낌을 주는 ‘존엄’을 선택한 듯하다. 따라서 용어는 객관적으로 존엄사(Death with Dignity)로 정리되었다. 존엄사법은 의료수준의 발달로 회생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그만 두어야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법안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현재도 논란이 남아 있기는 하다. 법 제정 의도와 달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가능성이 남아 있고, 환자 입장에서는 죽음을 강요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결정한 남은 가족에게는 정서적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필자는 과거 한 신문에서 존엄사에 대해 지면 대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논의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죽음에 대한 이해나 태도는 한심할만큼 무지한 수준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순간 병원에서 ‘사전 의료지시서’라는 것을 준다. 내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게 되었을 순간에 가족이나 누군가가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조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갖는다는 매우 진보적 조치이나 이 사전 의료지시서를 받고 며칠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종이를 받아들고 내용을 검토하는데 마음이 왜 이리 착잡한지, 생에 대한 집착이 이리 큰 건지, 나는 새삼 이기심과 옹졸함에 놀라고 있다. 나를 망설이게 하는 질문 항목 몇 가지를 살펴본다.‘장기를 기증할 것인가?’ 망설인다. ‘어느 부위를 기증할 것인가?’ 멍하다.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원하나?’ 글쎄다.이것이 현재 나의 상황이다.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질이 중요하지 연명치료는 해서 뭣하나 하며 큰소리치던 나다. 대담을 진행하던 몇 년 전만 해도 뇌사를 했다면 장기 기증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공익과 박애적 측면에서 그렇고 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공헌하는 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나를 향해 하게 되니 두려움뿐이다. 어떤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손가락질을 하는데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 세 개가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나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얼마나 엉성한 것이었던가. 화장을 원하는가 매장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도 있다. 평소에 나는 화장이 옳다고 믿었다. 땅도 좁아드는데 양지 바른 곳에 죄다 묘지를 둘 것이 뭐 있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웬걸, 살점이 터지면서 탁탁 불꽃이 튀는 화장장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나는 일주일을 넘기며 ‘죽음 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마침내 매우 이성적인 답안지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연명치료는 필요 없고 건강한 장기를 모두 기증할 것이며 주검은 화장하라.아직 불편한 마음까지 씻어낸 건 아니다. 나는 사전 의료지시서를 제출하기 전 간호사에게 몇 번이나 물어야 했다.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고. 간호사가 나를 위로하며 답을 건넨다. 언제든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비로소 내게 안정이 온다. 의학이 쓸데없이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옛날처럼,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고 그저 앓다가 가면 좋을 것을 이라는 허탈한 생각도 든다. 수명이 환갑을 넘기기가 어렵던 때에 비하면 현대인의 수명은 거의 두 배나 늘었다. 덕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화두가 된 세상이다. 잘 먹고 잘 살다가 남은 것이 있어 나눌 수 있다면 축복이리라.사실 죽음이란 그리 먼 미래가 아닐지 모른다.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그것을 못 깨닫고 사는 것이지. 그래서 축복이라고들 하나보다. 사전 의료지시서를 써 내고 보니 건강한 하루가 이리 새삼스러울 수가 없다.

미시시피강에서 자아 찾기

미시시피강에서 자아 찾기이현숙재미수필가마크 트웨인 작품의 원천인 미시시피강이 보고 싶어 미주리주의 작은 마을, 한니발에 왔다. 그의 대표적인 3부작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미시시피강의 생활’에서는 미시시피강 줄기가 흐르며 그의 숨결이 담긴 소중한 곳이다. 마을 전체가 마크 트웨인과 톰의 그늘에 있다. 거리는 온통 소설 속의 세인트피터즈버그 마을로 변했다. 톰 소여의 모험 첫 장에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은 그 대부분이 실제로 일었던 일’이라고 명시했듯이 마크 트웨인이 자란 고향이 바로 소설의 배경이다.마크 트웨인이 살던 집은 박물관이 되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마크 트웨인 서재로 꾸며 놓은 작은 공간이다. 의자에 마크 트웨인이 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다. 그의 시선은 마주한 의자의 톰을 향했다. 톰은 맨발로 특유의 멜빵바지를 입고 턱을 고인 채 애도 어른도 아닌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마크 트웨인의 뒤에는 남자아이가 그의 어깨너머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한참을 머물며 들여다보았다. 그가 사용했던 물건과 작품이 빈틈없이 채워져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길거리로 나와 골동품을 파는 상점들을 지나 카티프 언덕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톰과 허클베리 핀의 동상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관광객이 몰려다니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그 옆을 스쳐 계단을 오른다. 하얀 등대가 보인다. 저곳에 가면 혹시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발 한발 올랐다. 숨이 헉헉 막힌다.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에 질려 몇 번 멈추기도 했다. 뒤로 밀려난 계단보다 올라갈 길이 더 짧다고 부추겨가며 겨우 정상에 올랐다. 등대를 빙 두른 보호 난간에 몸을 기대고 미시시피강을 내려다봤다.강의 넓은 폭을 푸르른 숲이 양쪽에서 아우르고 그 사이로 잔잔한 물결이 여유롭게 흐른다. 이곳에서 마크 트웨인은 소년기의 꿈을 키웠다. 아니 필명을 사용하기 전, 어릴 적 이름은 사무엘 랭흔 클레멘스이니 샘이라 불릴 때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이 언덕에서 돌멩이를 굴리며 놀다가 먼 옛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해적 선장이었으니 자신도 해적이 되고 싶어 했다. 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을 보면서 수로 안내인이, 또 배를 타고 세계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던 곳이다.마크 트웨인은 학교의 정규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독학과 꾸준한 독서 그리고 기자로 세계 각국을 돌며 겪은 풍부한 경험이 그의 작품 안에 담겨 있다. 미국의 사회상을 해학과 풍자를 담은 필치로 예리하게 그려내 ‘미국적 리얼리즘’과 ‘지역적 리얼리즘’이 결합한 형태라는 평을 받는다. 헤밍웨이는 그를 두고 ‘미국 현대문학은 허클베리 핀이라는 소설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라고 극찬했다. 그의 필명인 마크 트웨인에 담긴 의미처럼 그는 ‘두 길’만 한 길이로 미국 문학을 세계에 알렸다.미시시피강은 조용히 흐른다. 지금은 증기선이 부지런히 오르내리지 않는다. 톰이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강가를 따라 걷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톰과 허클베리 핀, 두 개구쟁이가 뗏목을 타고 물살을 거슬러 강을 오르내리던 꿈을 꾸며 그들을 그려본다. 오래전에 한 소년이 이곳에서 꿈을 이야기로 남기며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일로 만들었다.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기에 그의 작품은 세대를 넘어 끊이지 않고 읽힌다.“거의 맞는 단어와 확실히 맞는 단어의 차이는 크다. 그것은 번개와 개똥벌레의 차이다.”마크 트웨인이 한 말을 내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거의’와 ‘확실한’이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차이는 근소한 것 같은데 ‘번개’와 ‘개똥벌레’는 하늘과 땅처럼 멀리 갈라진다. 좋아하던 일을 잘하는 일로 만들어낸 그 뒤에는 치열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대충 쓴 글이 아니라 온 힘을 기울여 고심하며 찾아낸 확실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만들어나갔기에 그의 작품은 명작으로 꼽힌다. 그가 들인 노력과 쏟아부은 열정이 이룬 성과다. 소설가로 연설가로 발명가로도 그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마크 트웨인에게 영감을 준 미시시피강을 바라본다.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내 글을 읽고 누군가가 공감해 준다면, 한 줄의 문장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살자. 매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안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글로 옮기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키워나가고 싶다. 꾸미고 내세우기보다 바닥에 침전된 흉허물까지 끌어 올려 진정한 나를 만나야겠다. 빙빙 겉도는 ‘거의’가 아닌 ‘확실한’ 나를 찾자. 나도 꿈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난간에 기대어 미시시피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깊이들이 마신다.

'시인과 촌장' 하덕규 목사의 삶과 노래

‘시인과 촌장’ 하덕규 목사의 삶과 노래신영재미 시인·칼럼니스트 지난 여름의 날. 토요일과 일요일에 North Andover 소재 다문화 선교교회에서 ‘시인과 촌장’으로 알려졌던 음유시인 ‘가시나무’ 작시·작곡자인 하덕규 목사를 초청한 간증집회가 있었다. 가시나무 노랫말이 좋아 꼭 참석하고 싶다. 행사를 앞두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조용한 가운데 차분한 목소리의 하덕규 목사의 인사가 있었다.하덕규 목사의 노랫말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그는 첫 노래 사랑해요라고 쓴다를 선사했다. 이 노래의 노랫말도 곱지만, 삶 속에 깊이 녹아 있는 얘기들을 보석처럼 꺼내어 모두에게 나눠주는 듯 했다. 시절이 어려울 때라 삶이 고달프지만, 어린아이들의 천진스러운 웃음과 눈망울 속 말간 세상을 본 것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이마에도 ‘사랑해요’라고 쓰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나그네의 늘어진 어깨에도 ‘사랑해요’라고 쓴다고 말이다. 동시처럼 맑고 청아한 짤막한 시어들 속 깊은 여운은 가슴 속 깊은 영혼의 샘터에 동심원을 그리며 며칠을 내 속에 머물러 나를 울렁이게 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작은 기타 음으로 시작되는 ‘가시나무’의 노래 첫 가사이다. 가끔 이 노래의 제목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들었던 노래이다. 물론 미국에 살았던 내게 그 노래를 그리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15여 년 전쯤이었을까 싶다. 한국을 방문해 ‘명상테라피’ 그룹에 참여해 며칠 공부를 할 때였다. 그 수업 시작의 날과 끝나는 날까지 이 ‘가시나무’ 노래를 수 십번 들려주었던 기억이다. 그래서 더욱이 ‘가시나무’ 노랫말에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내 영혼 깊이 박힌 영혼의 숲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하덕규 목사는 이날 기타와 연주 노래와 찬양 간증 집회에서 ‘가시나무’를 쓰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내 속이 너무도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내 안의 죄성을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괴로움을 밖에 있는 숲을 보면서 그리고 내 안을 보면서 깊은 생각과 마주했다고 한다. “그분이 내 안에 오셔서 가시나무와 같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가시에 찔리면서 가시를 뽑아주시고 끝까지 품어주셨다”고 했다. 내 안의 ‘죄성’이 바로 ‘가시’라는 말과 함께서다. ‘가시나무’ 노래는 가시나무 덩굴 속 피 흘리고 계신 예수님이 떠올라 곡을 쓰기 시작한 지 30분 안에 곡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곡을 내게 주셨다.”고 간증하는 것이다. 노랫말이 어찌나 좋던지 간증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가시나무’ 노래를 다시 찾아 들었다. 그리고 하 목사는 9년 전 ‘위암’ 진단을 받았는데, 믿기지 않았지만 2~3기 정도였다고 한다. 병원의 진단을 받고 온 남편에게 묻는 아내에게 “내가 암이래”라고 얘기를 했더니 펑펑 울더란다. 우는 아내를 다독이며 몇 년만 투병하면 괜찮을 거라고 달래주었다고 한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것들을 너무 많이 사랑했다.”고 그는 간증한다. 그저 ‘선물’만을 기다리고 좋아했다고 말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보다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선물만 좋아했다고 말이다. 하 목사의 간증은 나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때로는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필요에 따라 치장하는 악세서리처럼 여기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귀한 간증을 통해 내 속의 깊은 나를 들여다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유의 땅, 용자(勇者)의 나라

자유의 땅, 용자(勇者)의 나라이성숙거울처럼 눈부신 하늘이다. 당장이라도 하늘이 부서져 유리 파편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오랜만에 캘리포니아 날씨가 정상을 찾았다. 한동안 서울의 초가을 날씨처럼 선들선들해서 사람들의 걱정을 사던 날씨가 열기와 명도를 안고 돌아왔다.가까운 해변으로 나들이를 했다. 역에 차를 세웠다. 미국에 살면서 해 봐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국립공원 내 캠핑과 대륙횡단 여행, 그리고 기차여행이다. 그 중 한 가지를 실천하는 날이다. 기차여행은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묘한 매력을 준다. 비행기처럼 빠르게 당도하지 않아 좋고, 자동차처럼 조바심 낼 필요가 없어 좋다. 생활이 주는 가파른 긴장에서 놓여나게 하고 세상과 사람을 구경하는 여유를 누리게도 한다. 기차로 미국 대륙횡단을 해야겠다는 모종의 꿈을 안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부에나 팍 기차역에는 매표소가 없다. 티켓 자동판매기 앞에서 사용법을 읽었다. 알파벳 첫 글자를 찍은 후 해당 역 이름을 찾으면 모니터에 가격이 뜨고 결제를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엘에이 유니온 역까지 간 후 메트로 선을 갈아타고 산타모니카 역까지 가는 게 목표다. 유니온까지는 약 20분, 유니온에서 산타모니카까지는 1시간 반이 걸린다. 왕복으로 티켓을 샀다.메트로 링크는 엘에이 외곽을 운행하는 라인이다. 엘에이 도심을 오가는 메트로 라인을 중심으로 메트로 링크가 방사선으로 뻗어 있다. 각 노선은 색으로 구별되어 있다. 메트로 선으로 갈아타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엘에이 북쪽 외곽인 샌 버나디노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오렌지 라인의 남쪽 끝은 샌디에이고까지 이어진다. 이 코스는 해안을 따라 놓여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갈 수 있다니 조만간 시도해 볼 생각이다.매트로 링크 내부는 좌석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도록 되어 있는 열과 한 방향으로 놓인 열이 반씩이다. 기차에는 부랑걸인이 많이 탄다고 해서 내심 겁을 먹었으나 오전이라 그런지 험상궂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열차 내부는 서울의 지하철보다 깨끗하다. 열차 내에서 음식을 팔지는 않는다. 유니온에서 커피나 프레즐을 사들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테이블 있는 좌석에 가방을 내려놓자 아들을 데리고 탄 흑인 부인이 함께 앉아도 좋겠는지 묻는다.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부인은 특유의 곱슬머리를 정성스럽게 땋고 머리카락 끝에 장식을 달았다. 그러고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대각선에는 수염에 염주 같은 것을 매단 청년이 전화통화 중이다. 청년의 어깨를 드러낸 몸에는 거의 빈틈없이 문신이 있다. 목덜미와 허리춤에도 젊은 끼가 새겨져 있다. 맞은편 좌석이 비어 있지만 다리를 뻗어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일상 보아 오던 모습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같지 않으면 이상하거나 어색했던, 무례함이 통하던 서울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젊은 흑인 부인은 아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간다고 한다. 이날은 독립기념일이다. 해마다 이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는 대형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그래서 인지 기차는 만원이다. 나는 만원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녀는 기차가 붐빈다며 약간 불편해 한다. 서울처럼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서야 할 정도는 아니다. 평소에는 빈자리가 많다는데 이날은 서 가는 사람이 대여섯 명 있는 정도다.인구밀도 높은 한국에서 차 안이 붐빈다고 하면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빽빽이 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미국 사람은 좌석이 다 차서 몇 사람이 서 있는 상태를 붐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서울의 만원버스나 전철을 생각하면서 혼자 웃었다. 서로 다른 경험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낳나 보다.산타모니카 역을 빠져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공통의 목표를 가진 듯 일제히 한 방향으로 걷는다. 콜로라도 블러바드를 따라 10여 분, 나도 그들 사이에 섞여 해변으로 걷는다. 성조기 문양의 옷차림도 많다. 차량이 통제된 거리에 자전거와 세그웨이가 달려 나간다. 사람들은 아무데나 자전거를 세워둔 채 가버리고 또 다른 사람이 길에 세워진 자전거나 세그웨이를 타고 떠난다. 이곳은 일찌감치 공유경제가 실현되고 있다.슬리퍼를 벗어 들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바다에 이른다. 바닷물이 발끝을 적신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이고 섰는데도 바닷물 냉기에 몸이 흠칫 놀란다. 이내 솜처럼 흡수력 좋은 심장으로 바다가 스민다.몇 시간 후면 이곳에서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제트 스키를 타는 사람, 모래 위에서 커피를 홀짝 거리는 사람, 음성 높낮이가 만들어 내는 화음. 멋들어지게 자유를 누리는 이들이 부럽고 경이롭다.

맥도날드 햄버거의 아이러니

맥도날드 햄버거의 아이러니이현숙재미수필가엘에이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커다란 노란색 M자 아치가 자주 눈에 띈다. 미국을 대표하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맥도날드다. 교통의 요지와 고속도로 주변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사람을 부른다. 이민 초기인 1980년, 처음 먹어본 맥도날드의 빅맥 햄버거는 너무 맛있었다. 진한 향수병에 시달렸을 때도 내 손에 들려 태평양 바닷가에 함께 갔다. 가족들의 이름을 모래사장에 썼다 지우며 눈물을 흘리다가 누런 봉투에서 식어버린 빅맥을 꺼내 먹고는 했다. 삶의 허기를 달랬던 눈물 젖은 빵인 셈이다.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를 잡고 있기에 맥도날드는 눈을 들면 보인다는 표현도 있다. 창립자인 레이 클록은 로케이션이 사업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체인점의 부지와 위치결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안목과 관찰력은 대단해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서면 그 주위로 경쟁업체들이 자리를 잡으며 상권이 형성된다. 그래서 맥도날드는 가장 비싼 거리와 교차로에 땅을 갖고 있다고 한다.지나며 쉽게 만나게 되는 맥도날드의 숨겨진 이야기를 영화 ‘파운더’를 보고 알게 되었다. 미국 최대 햄버거 프랜차이즈인 맥도날드 창립자는 레이 클록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다른 두 명의 주인공이 더 나온다. 모리스와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다. 그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의 작은 승차 구매(Drive-Thru) 시스템의 식당을 운영했다. 햄버거 조리를 분업화하여 30초 만에 만들어냈는데 값이 저렴하고 품질과 맛은 최고였다. 맥도날드 형제가 직원들과 테니스코트에서 주방 위치를 분필로 그려가며 몇 개월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개발한 자동 시스템 덕분이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 모델 T형 생산라인을 재구성한 방식으로 당시 획기적이었고, 현재까지 미국 패스트푸드 주방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밀크셰이크 판매원이던 레이는 이런 맥도날드의 효율적인 운영방식에 반했다. 햄버거를 사기 위해서 끝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보고 그의 욕망은 끓어올랐다. 교회의 십자가만큼이나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를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게 하겠다며 끈질기게 형제를 설득했다. 1955년 일리노이주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1호점을 시작으로 레이의 질주는 멈출 줄 모른다. 가족 경영을 내세우며 재료의 신선함, 음식의 품질관리에 신경 쓰는 형제와의 마찰은 점점 커졌다. 결국, 1961년에 270만 달러와 연 이익의 1.9%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상표권을 레이에게 팔았다. 그러나 연 이익금인 로열티는 구두로 한 계약이라 받지 못했다. 오직 하나, 자신들이 시작한 맥도날드 식당만은 남겨달라는 부탁도 거절당했다. 결국 ‘The Big M’이라는 상호로 바꾸었는데 근처에 맥도날드 체인점이 들어오며 망했다. 합법적으로 강탈당하고 난 후 두 형제의 허탈해하는 표정이 화면을 꽉 채우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했다. 현재 세계 119개국에 3만4천여 개의 매장을 소유한 글로벌 기업의 진정한 창업자는 누구일까.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며 사업 확장을 한 적극적인 레이 클록인가. 그는 자신이 1955년에 설립한 첫 프랜차이즈 식당을 1호점이라 부르고, 후에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햄버거를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삼켜버렸다.’ 한국판 영화 포스터에 한마디로 정리가 됐다. 맥도날드 햄버거의 창시자는 두 형제지만, '맥도날드 기업'의 설립자는 자신이라는 것이다.아니 진정한 원조는 품질 우선을 앞세운 맥도날드 형제가 아닐까. 창립 정신은 가족이지 돈이 아니라는 순박하고 고지식한 형제가 만약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맥도날드 형제는 자신들이 개발한 아이디어로 그 지역에서 안전하게 장사를 했을 것이다. 레이는 그저 그런 시골 레스토랑으로 남을 수 있다고 형제를 비꼬는 내용이 영화에 나온다. 지역의 맛 집 정도로 알려질 수도 있었다.레이는 야수처럼 탐나는 먹이를 잽싸게 낚아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그 영역을 넓혔다. 야비해 보이지만 그를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은 소비자인 내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바로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그런 사업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역주의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기 힘들거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가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아직도 그 아이러니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민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사업가 기질이 없는 나는 레시피를 만들고 땀 흘려 기초를 다진 형제가 창립자라고 생각한다. 맥도날드는 모든 곳에 있어야 한다며 가능성을 알아보고 키운 레이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가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확실하니까.역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맞다. 알고 나니 온전하게 빅맥의 맛을 즐길 수가 없으니 말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를 만나다

테네시 윌리엄스를 만나다성민희재미수필가너무 덥다. 담장을 타고 오른 부겐베리아 꽃잎도 바싹 말랐다. 컴퓨터를 켠다. 여행을 다녀온 뒤 덮어두었던 사진이랑 메모지를 뒤적여 테네시 윌리엄스를 화면에 불러내니 함께 했던 얼굴들이 그의 묘비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그날은 시카고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가가 있는 콜럼버스에 도착했다. GPS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지만 유명작가 생가라는 안내 표지가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때는 유리 동물원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발표하여 전 세계의 연극은 물론 영화계까지 들썩거리게 만들던 작가로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다.한 시간 남짓 더 달려서 도착한 곳은 엄청나게 큰 공원묘지였다. 안내소는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라, 묘지의 위치도 모른 채 무작정 입구로 들어갔다. “이 넓은 곳 어디에 가서 테네시 윌리엄스를 찾나.” 서로 수런거리는데 세 명의 인부가 나뭇잎을 쓸고 있었다.테네시 윌리엄스의 묘를 찾는다고 하니 그 자리에 서서 손가락으로 비석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긴 사각형의 회색 돌에 ‘테네시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큰 글씨로 찍힌 묘비였다. 시인, 극작가라는 설명도 있다. 원래 테네시 주의 주지사, 상원의원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몰락해 구두 외판원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전형적인 남부지역 여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뉴욕의 허름한 호텔에서 사망하기까지 1911~1983년이라는 기간도 표기 되었다. 그의 죽음은 파티에서 코케인을 섞은 와인을 마신 때문이다.알콜 중독자인 그가 만취 상태로 토하다가 질식해서 죽었다, 혹은 병뚜껑이 목에 걸려 죽었다는 등 이유도 분분하지만 어찌 되었든 미국 극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작품의 저자, 체호프 이 후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칭송을 받았던 사람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평범했다. 꽃 한 송이 없이 먼지만 뒤집어쓴 채 도로와의 경계 자리에 서 있는 묘비는 자폐증과 절망,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했던 주인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는 듯했다.사진을 찍는데 비석 아래쪽의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The violet in the mountains have broken the rocks’ 란 문구다. 그의 작품에서 한 말이다. 직역을 하면 ‘산의 바이올렛 꽃이 바위를 부순다.’ 로 무슨 메타포일까 한참 생각했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지니 어떤 여자가 미국 여배우 패트리샤 클락슨의 연설에서 이 구절을 듣고 감격해서 썼다는 에세이가 나왔다. 여배우가 말했다고 했다. “이 글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나를 압박하는 어떤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과 자연과 화려함과 살아있는 것(beautiful, nature, colorful, alive)의 힘에 의해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바위를 부수는 바이올렛 한 다발이 있습니다.” 글을 쓴 여자는 자기에게 바이올렛은 무엇이며 바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겠지만 테네시 윌리엄스에게 있어서의 바위는 무엇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따라다니던 질병, 가정불화, 누나의 정신병, 동성애라는 자아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정, 작가로서의 명성이 주는 불안감, 우울증 등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것을 이겨보려고 글을 쓰며 극 중 인물을 통하여 그의 내면을 분출하고 치유하려고 애를 썼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고뇌에 무엇이 바이올렛이 되어주었을까. 그는 얼마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를 지나 영혼의 고향 ‘엘리지안 필드’에 내리고 싶었을까.그는 과거에 대한 집착,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술과 섹스를 탐닉하는 작품 속의 인물을 통해 ‘인간 본연의 고독과 욕구를 시정적인 언어로 잘 형상화했다’는 평은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과 냉혹함을 능숙하고 무리 없이 조율하여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천박한 주제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비난도 받았다. 세상의 평가가 어찌되었던 비석에 새겨진 글에서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은 아름다움과 순결을 갈망한다는 그의 생각을 읽는다.어느덧 해가 지고. 우리는 서둘러 묘지를 빠져나와 허름한 서민 아파트 앞에 섰다. 마구 자라난 누런 잔디 위에 ‘테네시의 어린 시절 집’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어느 층 몇 호에 살았는지 전혀 안내도 없는, 그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낌도 없는 누군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플래쉬를 터뜨려가며 우리는 회색빛 낡은 건물 사진을 찍었다. 한 때는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와도 우정을 나누던 옛 영광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마구 카메라 셔트를 눌렀다.

질란드와 들꽃향기

질란드와 들꽃향기신영재미 시인·칼럼니스트뉴잉글랜드 지방 매사추세츠주 보스턴과 뉴햄프셔주 인근에 산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날이다. 1시간 남짓 운전으로 가면 바다가 있고 2시간 정도 가면 산을 만난다.매사추세츠주 동쪽으로 대서양과 접하고 북쪽으로 버몬트주와 뉴햄프셔주, 남쪽으로 로드아일랜드주와 코네티컷주, 서쪽으로 뉴욕주와 접한다. 영국 청교도들이 정착했던 탓에 그들의 정신문화가 깊이 박혀 있으며 매사추세츠주는 유서 깊은 교육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더 좋은 것은 자연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우거진 숲과 산과 바다가 많다는 것이 참으로 축복이다.지난주 토요일 ‘보스톤산악회’ 정기산행이 있어 다녀왔다. 산악회에서는 닉네임을 정해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어떤 모임에서처럼 그는 누구(학연, 지연 지위 등)라는 수식어의 필요성을 접고 산(자연)이 좋아 만나고 나누는 그저 자연의 한 사람으로 만나자는 취지에서의 시작이라고 한다.필자의 내 닉네임은 ‘하늘’이다. 그리고 이번 정기산행을 주관했던 분의 닉네임은 ‘들꽃향기’였다. 들꽃향기님은 산을 오른 지 10년이 된 산사람이고, 나는 2011년부터 시작했으니 만 8년차의 산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0년이 가깝도록 함께 산을 오르내리니 나이와는 상관없이 편안한 친구가 되었다.10여 년이 다되도록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뉴햄프셔주 화이트 마운틴 지역을 지나칠 때면 산들이 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온다. 부르지 않아도 익혀진 이름으로 가슴을 파고든다. 그 계절마다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추억과 버거웠던 산행의 힘듦 속에서의 추억들이 곰실거리며 가슴을 헤집고 파고드는 것이다. 이렇듯 정해놓고 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화이트 마운틴(White Mountains) 안에 4,000 피트 넘는 산이 48개가 된다고 하는데 35개 이상을 올랐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지난해였다. 가을 산을 오르며 닉네임이 들꽃향기는 필자에게 말했다. ‘하늘, 우리 4,000ft 이상의 48개 산행을 마무리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래서 그것 참 기분 좋은 일이겠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지내다 이번 산행지 질란드(Mt. Zealand·4,260ft)는 ‘보스톤산악회’에서 10년 만에 두 번째로 오르는 산이라고 했다.산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거의 7시간이 넘게 걸릴 수 있는 긴 산행지였기에 선뜻 정하지 못했던 산행지였다. 겨울 계절이면 엄두도 못 낼 산행지였지만, 여름 계절이라 가능했던 곳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산을 올랐다.산은 정상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산을 하나둘 오르면 오를수록 깨달아 간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너무도 광활하고 신비로운 자연에서 크신 창조주를 만나고 너무도 작은 피조물인 나를 만나게 되는 까닭이다.그래서 산을 오르면 더욱더 겸손한 마음이 절로 차오르고 삶에서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닌 나의 탓을 깨닫게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자연의 한 일부부인 이유일 것이다. 계절마다 만나는 바람은 내 배꼽 밑의 오랜 신음마저 끌어올려 주어 깊은 호흡을 만나게 한다. 새로운 호흡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다.이번 산행지인 질란드를 오르며 4.6 마일 지점에서 Zealand Fall(AMC Hut)을 만났다. 이때부터는 험하고 가파른 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힘겨운 걸음으로 한참을 올라 갈림길 사이 Zeacliff(7.0 miles) 지점에 도착했다.눈 앞에 펼쳐진 진분홍 들꽃(철쭉과)들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또다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질란드 정상에 도착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빠른 걸음으로 산에서 내려오니 7시간 만의 산행이었다.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된 질란드와 들꽃향기 그리고 들꽃향기님이 기억은 오랜세월 간직하고 싶다.

경마를 보며 배운 한 수

경마를 보며 배운 한 수이현숙재미수필가말이 힘차게 달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말을 사진에 담으려는데 총알처럼 지나갔다. 100m 기록이 약 5초이고, 시속 60∼70㎞ 정도라더니 실감 났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아케디아에 위치한 산타애니타 파크 경마장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다. 최근 2달 사이 경주마 20마리가 이유 없이 숨졌기에 일시적으로 폐쇄했다가 열어서인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조카는 경마 정보지를 검토하며 우승마를 예상했다. 또 보조 경기장에 가서 경주마와 기수가 자신을 뽑아달라며 몸매를 자랑하는 모습을 살폈다. 걸음걸이가 힘이 있는지, 몸의 균형과 털의 윤기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경기 전에 출전마들이 관람객들에게 선을 보이는 절차는 우승 예상마 판단에 도움이 된다. 마권을 발급받는 기계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경마 준비를 알리는 안내방송에 따라 관람석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1~2분 이내에 승부가 갈리는 스피드의 세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자신이 예상한 우승마가 1등으로 들어오기를 응원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단단한 근육을 움직이며 박진감 넘치게 달린 말은 순식간에 결승선에 도달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따라 승리의 환호성과 우승이 빗나가 한탄하는 소리가 엇갈렸다. 다음 경주를 준비하는 동안 사람들은 TV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열두 개의 다른 도시에서 생중계로 진행되는 경마에 다시 배팅했다. 나는 말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내 생일이 있는 달이라는 이유를 달며 2불이나 5불씩을 걸었다. 번번이 돈을 잃었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기준을 정하고 했기에 큰 부담 없이 즐겼다. 그래도 아쉽기는 했다.승패에 격하게 반응하던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화가 났는지 마권을 꾸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미 휴지가 되어버린 마권이 이리저리 뒹굴며 누군가의 지갑을 텅텅 비게 한 흉물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발길에 차였다. 일확천금을 노렸기 때문인가. 저게 다 돈인데. 아니 돈이었는데. 원수진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으면 경마를 가르치라던 말이 떠올랐다. 중독성이 강해 예로부터 패가망신하는 길이라고 했다. 몸을 푹 담그지 말고 적당히 한다면 스트레스를 푸는 오락이 될 터인데 아쉬웠다. 달리는 말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닐까.지난달 미국 최고의 경마대회인 켄터키 더비에서 챔피언이 실격된 사건으로 사람들은 경악했다. 145년 역사상 처음이다. 7번 말(맥시멈 세큐리티)이 열여덟 마리의 경쟁을 따돌리고 결승선에 들어섰다. 20번 말(컨트리 하우스)이 그 뒤를 따랐다. 일등을 한 기수와 조련사는 꿈을 이뤘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축하의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2등을 한 기수가 감독관에게 이견을 제소했다. 진로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판정 결과가 나오기까지 20여 분을 기다리는 동안 두 기수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첫 번째로 들어온 7번 말의 기수는 관람객들이 내지르는 환성에다 비도 오고 땅이 미끄러워 말이 당황해 살짝 진로를 비켜 나간 것일 뿐, 잠시 리듬이 깨졌던 것일 뿐, 문제 될 일이 아니라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입술에 계속 침을 바르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것이 불안해 보였다. 반면 차등으로 들어온 기수는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의 대조적인 모습이 TV 화면을 반으로 가르며 비교가 되었다.비디오를 돌려본 감독관들은 다른 말의 진로를 방해했다고 판정을 내렸다. 결국 실격 처리되며 7번 말(맥시멈 세큐리티)은 1등에서 17위로 밀려났다. 우승의 기쁨도 잠시 반칙했다는 불명예로 비난을 받았다. 2위에서 1위가 된 경주마는 우승확률이 65분의 1로 미미했었다. 이 뜻밖의 우승으로 마주는 186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고, 단 2달러로 이 말에 우승을 걸었던 사람들은 65배인 132.40달러의 이익을 챙겼단다. 켄터키 역사상 두 번째로 알찬 횡재라고 뉴스 미디어는 신나서 알렸다. 생애 최초 켄터키 더비 우승컵을 들어 올린 말의 조련사는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경마라고 했다.새옹지마.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다. 켄터키 더비 경마대회를 보며 불확실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한 수 배웠다. 잠시의 눈속임으로 이득을 취할지 모르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뛰어봐야 안다. 그리고 끝까지 가도 그곳이 끝이 아닐 수 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따라올 것이다. 인생은 한방이 아니다. 미래의 행운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경주마는 끊임없는 훈련으로 다져진 몸과 온 힘을 다해 결승점을 향한다. 한눈을 팔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고 달린다. 그거다.

[미주통신] 미국발 르네상스 ‘거리 예술’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 예술)만큼 미국을 설명하기 좋은 예술 영역도 없다. 스트리트 아트의 원조는 원색의 그래피티, 거리의 낙서라고 할 수 있다. 음지문화였던 셈이다. 음지의 낙서가 예술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미국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낙서는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그려져 있다. 대부분의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 소음에 가깝다. 15, 16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이란 왕실과 귀족, 성직자의 전유물이었을 뿐 아니라 모름지기 고상한 정신 활동의 소산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 후 부르주아(중산층) 계층이 생겨나면서 개성이 가미된 그림이 소비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규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집스런 중세미술의 눈에 거리 미술이 ‘예술’로 대접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거리 미술은 독백같은 형태를 띤다. 혼잣말의 생동감과 구체성, 그 무경계의 자유분방함이 펼쳐진다. 스트리트 아트는 1960년대 시작하여 80년대에 붐을 이루었다. 이 음지의 낙서에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회화적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고, 신흥 예술 장르로 발전한 것이다. 스트리트 아트에는 숭고함이 해체된 발랄함, 개인적 정서, 반항해도 좋은 미국적 유연함이 깊이 배어 있다. 이것들을 회의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 출생 배경 때문인지 스트리트 아트를 반달리즘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지만 작가가 살고 있는 도시나 시대를 가장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스트리트 아트이기도 하다. 역사가에게 그 시대를 기록할 의무가 있다면 예술가에게는 그들이 살아 있는 시대와 소통할 책무가 있다. 스트리트 아트는 아부나 비방이 아닌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예술의 소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관객의 상식을 파괴한 예술, 익명의 예술. 스트리트 아트는 익명성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고발성과 반항성이 농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화나 초상화, 잘 알려진 성지 등을 그렸던 이전의 미술이 왕실과 귀족에 봉사한 예술이었다면 스트리트 아트의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봉사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는 모방에서 기인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그들은 스스로 오리지널이 되어 스트리트 아트의 권위를 확장하고 있다. 미국의 토양이 이들을 자라게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스트리트 아트의 선구는 로스앤젤레스다. 시(City)는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벽을 제공하고 작가 정보와 작품을 직접 관리한다. 로스앤젤레스는 도시 전체에 수천 개의 벽화를 보유하고 있다. 다운타운에 있는 앤젤 시티 양조장 벽면을 중심으로 벽화가 펼쳐져 있다. 이 거대한 캔버스 앞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지날 수는 없다.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다보면 ‘로스앤젤레스 심장(안티 걸 작품)’이나 ‘도시의 주름(JR 작품)’, 그 옆으로 펼쳐진 ‘나는 보톡스 중독자였다(트리스탄 이튼 작)’, ‘비누 거품을 부는 여인(킴 웨스트 작)’ 등 지역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는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옥션을 뒤흔든 뱅시((Banksy)의 작품도 이곳에서 만난다. 벽화 작품은 매달 바뀐다. 여기서 좀 떨어진 웨스트 8가, 메이시스 백화점 코너를 돌면 대형 천사의 날개가 그려져 있다. 날개 옆에는 ‘천사의 도시에 살고 있는 당신은 여신이다’라는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즐거운 상상은 덤이다.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들은 스트리트 기법을 작업실에서도 구현하여 전 세계 아트페어에서도 스트리트 아트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는 원색의 거친 터치로 강렬하게 그려진 캔버스 앞에 서면 그 자유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한다. 주제들이 현실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거기에는 해학과 풍자, 익살이 스며있다. 웃음이 나는 것이다.일주일 간격으로 두 곳 전시회에 다녀왔다. 먼저는 산타모니카 에어포트 아트 페어로 산타모니카 지역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하는 오픈 전시였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영국 사치 갤러리가 주목하는 작가 140인 전이 열리는 디 아더 아트 페어였다. 산타모니카 아트 페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작가가 한 데 모인 디 아더 아트페어에서도 스트리트 아트는 다양한 재료와 주제로 사람들 시선을 잡았다.미국은 역동적이다. 그들은 젊다. 미국에 살면서 이들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자신감에 넘쳐 있다. 노예제 폐지, 끝없는 서부로의 개척정신, 사회 전반에 두텁게 형성된 기부문화, 드라이브 스루, 스트리트 아트까지 미국발 르네상스가 확산하고 있다.호기심이 대접받는 나라. 아메리칸 드림이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진 말이 아니다. 여전히 미국은 꿈이 실현되는 땅이다. 인간의 도전과 창의력을 높이 사는 국가정신은 앞으로도 미국을 문명주도국으로 남게 할 것이다.

[미주통신] 이제 청년들의 무대는 세계다

입사를 6개월 앞 둔 아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나섰다. 동남아 쪽을 둘러보고 한국 여행도 하겠다고 했다. 인생은 긴데. 세계 곳곳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며 집 떠나는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배웅했다.아들은 어느날은 베트남에서, 또 어느 날은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나라가 바뀔 때마다 이메일을 보내왔다. 전화도 되지 않고 연락처도 없으니 어느 곳에서 밥을 먹는지 잠을 자는지 어떤 사람이랑 어울리는지 답답하지만 그저 믿는 마음으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나자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어느날 토론이 벌어졌다. 아들에게 물었다. 미국과 영국이 싸우면 어느 나라를 편들겠냐고. 당연히 미국이라고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또 물었다. 만약에 한국과 미국이 싸우면 어쩌겠냐고. 아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싸우는 이슈에 따라서 결정을 하겠다고 한다. 한국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것인지, 한국 사람인 동시에 미국사람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들은 지난 몇 달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유스호스텔을 묵었다. 세계 각국의 배낭여행 청년들이 모여 각자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제일 먼저 묻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름보다 국적을 더 궁금해한다. 당연히 아들은 아메리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모두 고개를 갸웃하더란다. 너는 동양인이지 않느냐고.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대학까지 마쳤으니 당연히 미국사람이라고, 아무런 느낌 없이 말했더니 너의 부모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었냐고 또 묻더란다. 원래 한국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미국 시민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너는 한국 사람이라고 못을 박아버리더란다. 아들은 한국말보다 영어가 쉽고 한국문화보다 미국문화에 익숙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들은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시선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가 또래의 사촌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리 한국말을 잘 해도 미국인 취급을 하더란다. 아들은 자기와 똑같이 생긴 한국 아이들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생각과 문화의 차이를 발견했다. 외국인은 아들을 한국 사람으로 인정하는데 오히려 한국 사람은 외국인이라며 더 어려워했다. 미국에서는 전혀 가지지 않았던 정체성의 혼란을 부모의 나라 한국에서 느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미국에서 사는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과연 미국에 온 것이 잘 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몇 년 전 남편 회사의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캐나다의 벤퍼 스프링스 호텔에서 며칠을 보낸 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였다. 각 주에서 온 네 쌍의 부부 여덟 명이 테이블에 함께 했다. 우리 옆에는 미조리주의 어느 시골에서 왔다는 노부부가 앉았다. 그들은 동양인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등장을 신기해했다. 부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엘에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태어난 나라가 어디냐고 다시 물었다. 엘에이라는 말에는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다. 코리아라는 내 말에 또 North? South? 했다. 음식이 나오자 “너희들 음식 괜찮니? 입에 맞니?” 미국 온지 40년이 다 되었다고 누누이 설명 했는데도 여전히 걱정을 했다. 우리가 미국화 되어 불편이 없다고 말해도 이 사람들 눈에는 도무지 미국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 사람일 뿐이었다. 어린아이 보살피듯 도와주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이들 걱정이 되었다. 우리 2세가 능력이 있다고 한들 주류 사회에 들어가서 어떻게 이 벽을 뚫고 우뚝 설 수 있을까. 그들의 눈에는 외국인인데 싶었다.미국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올린 방탄소년단의 공연을 보며 생각한다. 그들이 던지는 메세지 ‘나는 누구인가 평생 물어온 질문/ 아마 평생 정답은 찾지 못할 그 질문’ 세계의 모든 젊은이가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춤과 노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의 모든 젊은이를 하나로 사로잡는 힘은 그들의 화두를 함께 고민하고 위로하기 때문이 아닌가. 시대가 주는 정서는 국적을 따지며 나라를 들먹일 수준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물리적 거리나 장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방탄소년 그들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이듯이 내 아이들의 무대도 미국이 아닌 전 세계다. 방탄소년단에 환호하는 노랑머리 청년들을 보며, 아이들이 내 나라 내 땅에서 주인 노릇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줄 걸 하던 좁은 마음을 날려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