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수필대전 과메기 오브제

입선 박하성 수천수만의 연등이 묵언수행 중이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홍련을 닮았다. 저들은 얼마 전 이승에서의 마지막 푸른 유영을 끝냈다. 바닷바람과 햇살이 잘 드는 곳을 골라 다비식을 치르기 전 의식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거침없이 어디에든 닿았던 족속이었다. 저들은 너른 초원의 전쟁터를 폭풍처럼 누비고 휩쓸던 유목 부족의 기마 전사들이었다. 푸른 지느러미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사방팔방으로 대양을 내달리던 온전한 자유이자 절대자였다.이제 저들은 안식에 들 것이다. 죄 없는 칼이 일찍이 머리를 잘라 번뇌를 끊고, 뼈를 발라 업을 끊어주었다. 창자를 도려내어 미혹함을 버렸으니, 이젠 넘나들어야 할 경계가 없다. 오로지 혹독한 수행을 거쳐 열반에 들 일만 남았다.비린 생이 치러야 하는 의식이다. 살아서는 닿지 못했던 공중에 가부좌를 틀고 비릿하게 말라가는 수행에 들었다. 더욱 정진하라고 하늘법당 큰스님은 햇살 죽비로 등짝을 때린다. 수십 길 바다 속에서 보았을 때는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답던 햇빛이었던가. 그 햇살이 이제는 죽비가 되어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어깨며 등짝에 가시처럼 내리 꽂힌다.동해 찬바람은 속살을 아리게 후벼 판다. 더 비우라고 자꾸만 다그친다. 속내를 다 덜어냈는데 무엇을 또 비우라는 말인가. 남은 건 꾸덕꾸덕해지는 껍질과 알맞게 간이 밴 검붉은 속살뿐인데 또 비울 것이 있단 말인가. 질기디질긴 숨비소리조차 마지막으로 토해내지 않았던가.하지만 비울 게 없을 것 같아도 비워지는 게 있다. 채 버리지 못한 욕심 찌꺼기가 꾸역꾸역 기름으로 흘러나온다. 백팔 번 얼었다가 백팔 번 녹으면 해탈의 경지에 드는가. 어는 것도 고통이지만 녹는 것도 사뭇 고통이다.관목청어貫目靑魚라고 했다.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뚫고 꿰어 말렸다는 뜻이다. ‘목'이 ‘메기'가 되어 관메기가 되고, 관에서 ㄴ이 탈락해 과메기가 되었다고 한다.청어가 많이 잡히지 않으면 꽁치를 사용한다. 제조법도 전통적인 방법과 달라졌으나, 동해안 구룡포의 과메기는 한국의 특산품이 된 지 오래다. 과메기의 계절 겨울이 오면 포항과 구룡포 일대는 문전성시를 이룬다.의식을 다 치르고 난 과메기를 공양으로 올린다. 사람들은 김, 파, 미역, 배추, 마늘 따위로 과메기를 치장하고 공양을 한다. 육신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비린 생의 내력들은 뒷맛으로 남는다.거칠 것 없는 온전한 자유가 저들의 속성이었다. 누구나 누리고 싶은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란 남에 의한 구속뿐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속박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자유를 누리되 분별없이 방만해선 안 되고, 자신을 놓아주되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도전하되 무모하지 말 것이다.부단히 수행하고 비우는 것은 또 어떤가. 나는 지금까지 ‘나중에’란 생각이나 행동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아왔다. 무슨 계획을 세우는 것도‘나중에’, 오늘 당장 해야 할 일도 ‘나중에’ 식이었다. 심지어 효도도 ‘나중에’, 좋은 일을 하는 것도 ‘나중에’였다.하지만 그 ‘나중에’ 란 날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것 대신 온 것은 오직 뼈아픈 후회뿐이었다. 나중에 해야지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 책무를 미루어버리는 짓이었다.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이 단순해 보이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렸다.수행이라고 무슨 거창한 것이겠는가. 항상 바른 생각을 지니고,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제때 해야 할 옳은 일을 바르게 하는 것도 훌륭한 수행일 것이다. 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참다운 삶이라면 거룩한 수행일 터이다.자신을 비우는 것은 또 어떤가. 내 안에 산패(酸敗)되어 있는 묵은 기름 찌꺼기조차 버리려 하지 않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머리와 뼈, 내장을 버린 저들은 몸으로 엄중하게 보여주고 있다.역경과 난관도 견디고 극복하란다. 남을 짓밟고 딛고 서기 위한 승리가 아니라, 내 정당한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라는 것이다. 시련을 겪어야 진정한 삶에 가까워질 수 있고, 고난을 이겨낸 삶은 한층 빛날 것이다.꽁치들이 날아오른다, 푸른 바다에서의 유영을 마치고 푸른 하늘로 비상한다. 한 생을 마치고, 동해에서 발원한 비린 목숨들이 저들의 육신을 가뭇없이 공양하고 간다. 비린 생을 살고도 속 깊이 잘 우러난 향기를 남기고 간다. 나도 향기를 남기고 가고 싶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대나무꽃

입선 박선영 길을 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황금빛 물결이 시선을 붙든 탓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파도가 일듯 바람에 밀려온 빛에 나는 갇혀버렸다. 언젠가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꽹과리와 북소리도 둥둥~ 울렸다. 그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따사로운 햇볕 속에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선영씨, 뭐 하세요? 빨리 와요.” 하는 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어디에도 황금물결은 없었다. 단지 푸른 대숲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려왔다. 나를 부르며 손짓하던 회원은 저만치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뛰어갔더니 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대나무꽃을 본 거 같아서요.”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대나무꽃을 본 적이 없다며 그런 꽃도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대나무꽃이 궁금하다며 찾아보겠다고 했다.글공부를 하고 있는 문학회에서 문학 탐방여행으로 경주에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반가웠다. 불국사나 석굴암은 어머니와 인연이 깊어 언제라도 가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 석굴암보다 천마총 대릉원 가는 길목에서 나는 어머니를 만났다. 대나무 산책로를 걷다 말고 대나무를 올려다본 순간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대나무밭에서 소원을 빌며 치성을 드리고 있는 젊은 여인, 탐스러운 머리를 매끈하게 빗어 쪽을 찌고 낭자에 옥비녀를 꽂은 어머니가 날 향해 웃고 있었다.백여 호가 넘는 집성촌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종가였던 우리 집은 울타리를 대나무로 엮었다. 집 뒤에 대밭이 있어 대나무가 흔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대나무를 보고 자란 우리에게 대나무밭은 놀이터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울기 좋은 곳이었다. 종부의 시름을 어머니는 대나무밭에 풀어놓곤 했다.어느 핸가 마을에 경사가 났다. 바로 우리 집 대나무밭에 대나무꽃이 핀 것이다.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윗동네 아랫동네는 물론이고 타촌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꽹과리와 북을 치며 흥겨워했다. 그때 마을에서 제일 높은 어른인 동배 할배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이 대나무꽃은 상서로운 징조일세. 나라에 큰일이 있었을 때는 꼭 꽃이 피었다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을 때에도,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도 피었어. 이번에도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본데….” 할배 말에 친척들 시선이 아버지, 어머니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종가종손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어머니는 종가살림을 지혜롭게 잘 꾸려나갔다. 동네 애경사에도 어머니가 빠지면 안 될 만큼 어머니는 과방(果房)을 잘 관리했다. 배고픈 시절이라 과방에서 인심 난다고,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잘 나눠주는 역할이 중요했다. 바느질 솜씨도 야무져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종가의 대를 이를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가에서 제례나 시제를 지낼 때 반드시 종가의 자손이 있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죄인이 된 어머니는 대나무밭으로 숨었다.대나무는 영험한 나무이기도 하지만 생활에도 쓸모가 많았다. 종가에는 손님이 많았다. 손님 접대용으로 죽순은 톡톡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술 빚는 솜씨도 뛰어났다. 솔잎을 넣고 지에밥을 쪄 식힌 다음 누룩을 섞어 술 항아리에 담았다. 항아리 위에는 대나무 잎을 덮었다. 이틀간 아랫목에 두었다가 대나무밭에 저장했다. 쌀알이 동동 뜬 달착지근한 막걸리를 아버지는 아주 좋아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막걸리를 되들잇병에 담고 댓잎으로 병마개를 해 놓아두면 발효 식초가 되었다. 미나리 초무침은 까다로운 할머니까지도 웃게 하였다. 된장, 고추장, 김치, 장 항아리에도 댓잎을 덮었다. 그러면 골마지가 끼지 않는다고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리밥을 해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부엌 천장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해 대나무를 베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물고기 담는 그릇에도 댓잎을 넣으면 비린내가 사라졌다. 대나무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름에는 돗자리를 만들어 깔았고 대나무로 만든 평상은 가족의 놀이터였다. 겨울에는 대나무를 쪼개 태극기 창호지를 붙여 태극 연을 만들었다. 방천에 나가 아랫바람이 불면 연을 높이 날려 소원을 빌기도 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 대나무밭은 삶의 원천 같은 곳이었다.어머니는 당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결국 작은댁을 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손수 짠 베로 이불을 만들고 베개를 마련해 신방을 차려주었다. 아버지를 그 방에 들여보내고 어머니는 결연히 대나무밭에 섰다. 몸을 정갈히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옥빛 비녀를 꽂았다. 대쪽같이 퍼런 어머니의 모습을 만월이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그런 달을 삼켰다. 흡월정(吸月精)을 하기 위해서였다.흡월정이란 달의 기운을 몸속으로 빨아들이는 걸 말한다. 동지섣달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부풀어 오를 때 갓 떠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선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를 생성해 주는 달을 삼키는 것이다. 여인이 달의 음기를 채우면 그 힘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어머니가 흡월정을 할 때는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강한 기를 모아야 했기에 어머니는 후들거리며 대나무를 붙잡았다.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로 곧추섰다. 다음날은 어김없이 불국사를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 삼천 배를 하고 석굴암을 찾아 마음을 닦았다. 어머니의 간절함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가슴에 박힌 옹이를 빼기 위한 몸부림, 어머니의 일념은 온통 한곳에 꽂혀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또렷한 보름달이 대나무밭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얼른 치마를 벌려 달을 받아 안았다. 어머니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지 어머니는 일 년 뒤 아들을 낳았다. 대나무꽃이 핀 건 우연이었지만, 어머니가 보름달을 안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지만 대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느낀다. 천마총 대릉원 대나무 길에서 만난 어머니는 그 후 오래도록 내 안에 살아 있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구름이 머무는 절 운부암

입선 박두흥 가을이 저물기 전, 단풍이 안내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또 걸어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절집에 도착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면 이곳을 찾는다. 팔공산 비로봉 용맥이 암자의 뒷등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좌우 능선이 청룡 백호가 되어 포근히 감싸주는 절. 그 품에 들어서면 시름이 사라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가림줄이 쳐져 있는 입구에서 범종 모양의 표지석이 먼저 중생을 맞는다. 가운데 ‘운부 선원’이란 이름이 크고 하얀 글씨로 아로새겨 있다. 그 좌우에 ‘천하명당’과 ‘조사 도량’이란 파란색 글귀가 또렷하고, 작은 글씨로 새긴‘북 마하 남 운부’란 말이 눈으로 성큼 뛰어든다. 스스로 천하명당이라 일컫고 남쪽 최고의 수행처라 할 만큼 바위에 글을 새긴 사람의 자부심이 느껴진다.팔공산의 정기가 모인 이곳은 선승들의 참선 도량으로 유명하다. 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명당을 찾듯이 선승들이 깨달음에 가까이 가고자 명당인 이곳을 찾아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 중에는 근․현대의 선지식인 경허, 성철과 같은 큰스님도 계신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수행이 더 깊어졌으며 이미 오도송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설도 전해진다.세상과 단절되고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이 수행 공간에서 스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적막한 밤의 유일한 벗은 경전이었을 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풍광과 물소리를 벗 삼아 자신을 성찰했으리라. 돌아보면, 곱게 키운 난초가 긴 기다림 끝에 꽃봉오리를 터트렸을 때, 나는 그 기쁨을 뭐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스님은 평생의 꿈인 불도의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 벅찬 마음이 어떠했을까? 스님께서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토해냈던 오도송 한 구절을 되뇌며 짐작만 해 본다. ‘황하가 역류하여 곤륜산 정상으로 치솟고,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이 꺼지도다.……. ’절 앞에는 계곡물을 막아 조성한 연못이 있다. 하늘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물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까지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못 안쪽에 화강암을 깎아 세운 달마상이 보인다. 머리까지 덮는 긴 승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털북숭이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입까지 굳게 다문 채 두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 적정(寂靜)에 들었다. 범상치 않은 형상에 한참을 바라보며 달마가 이곳에 현신(現身)한 이유를 생각한다. 아상(我想)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이 가련했음인가? 아니면 이곳 선승들의 외롭고 힘든 싸움에 등불이 되어주려 했음인가?궁금증을 안고 ‘불이문(不二門)’으로 다가간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기뿐이다. 문은 세상을 단절시키기도 하고, 또 두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문기둥에 새겨진 주련(柱聯)을 소리 내어 읽는다. ‘탐진치심 내려놓고, 번뇌 망상은 연못에 두고 가라.’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뇌성처럼 정수리를 친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켜야 번뇌도 망상도 없는 불국토에 닿을 수 있다는 지혜의 말씀이다. 그 지혜를 찾아 얼마나 많은 선승이 이 해탈의 문을 통과했을까.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을 들인다. 돌계단을 올라 마주한 보화루, 단청이 없다. 소박한 게 꾸밈없는 선승을 닮았다. 이름이 보화루인 것은 이 절에 선불교가 퇴락하면서 잠시 화엄사상이 지배했던 자취를 보여준다.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누각에 오른다. 가운데 대들보에는 큰북이 매달려 있고 구석진 곳의 다탁 위에는 찻잔이 가지런하다. 그 옆 벽면에 ‘喫茶去(끽다거)’라 쓴 예쁜 나무판이 중생에게 차를 권한다.한 잔 가득 우려낸 차를 마시며 단아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는 원통전으로 향했다. 법당 안에 정좌하고 있는 청동관음보살상(보물 제514호)의 자애로운 미소가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왼쪽에 ‘운부난야(雲浮蘭若)’란 편액이 걸린 선방이 있다. 흘려 쓴 글씨에 기운이 넘친다. 그 아래 툇마루에 걸터앉아 보화루 지붕 너머 하늘을 바라본다. 풍덩 빠져들고 싶은 푸른 하늘이다. 언뜻 사십오 년 전, 처음 참선을 익히던 시절이 그 하늘에 그림처럼 펼쳐진다.포교당 법당의 차가운 마루에 어린 학생들이 둘러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다. 인생이 무엇인지,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기보다 또래와 어울리는 게 더 좋았다. 눈을 반쯤 내리감고 시선은 발 앞에 고정시켰다. 어깨 힘을 빼고 단전으로 호흡했다. 생각을 한 곳에 모으고 화두참구를 하는데 몰려오는 수마를 극복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캄캄한 내면에서 방황하다 탁, 탁, 탁! 따끔한 죽비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곤 했다.차츰 고요 속에서 마음이 집중되었다. 문득, 나는 처음인데도 힘이 드는데 스님들은 이 고행을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뇌가 생길 때마다 쫓고 또 내쫓고, 모든 것을 비워내야만 부처가 말한 청정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데…. 그날 나는 부처님의 손안에 앉아 어이없게도 수행자들을 걱정했다. 철없던 그때의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했는데도 자신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각 진 마음이 언제쯤 저 둥글한 산등성이를 닮을지 가끔 내밀한 내 속내가 궁금해진다.영천 은해사의 부속 암자이자 수행처로 알려진 운부암. 711년(성덕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809년(헌덕왕) 때 혜철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년이 넘도록 계절만 오고 갈 뿐, 암자는 조용히 그 자리에 부처님처럼 앉아 있다.고승들은 수행의 자취를 남기고 떠나갔지만 암자는 여전히 산의 품에서 수행하라는 묵묵한 울림을 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어갔을까. 상서로운 구름이 머무는 절, 운부암은 중생들의 고뇌를 안고 이렇게 또 한 계절을 보낸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

입선 문은주 선글라스를 벗어 던졌다. 깊은 산 속을 파고드는 가파른 길 끝에 고라니 한 쌍이 구름처럼 노닌다. 산허리를 감돌아 오를 때마다 두루마리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풍경의 무상함에 넋을 놓는다. 느닷없는 불청객이 귀찮은 듯 칡 넝쿨손이 자꾸만 자동차를 건드린다.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재활용 수거함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문의 기사 한 줄은 나의 일상을 방해할 만큼 생각을 지배했다.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안동지례예술촌’이라는 제목과 함께 산과 호수를 품은 고택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택을 방문한 호주 기자의 일화가 적혀 있다. 가만히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듣고 있냐?”고 물었다는 이 집 주인장의 말을 듣고 나중에 그 말이 기사 제목으로 쓰이면서 많은 외국인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임하댐 건설로 지례마을은 수몰 위기에 처한다. 그곳에는 400여 년의 얼이 담긴 지촌 김방걸의 종택과 지산서당이 있었다. 13대손 김원길은 가문의 터전을 보전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 여기며 그것들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마을 뒷산 중턱으로 옮겨지었다. 시인으로 활동한 그는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고택이 예술가들의 활동지로 제격이라 여겨 ‘지례예술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연과 어우러진 고택은 무엇과도 대신하기 어려운 귀한 건축물로 거듭났다. 수장되어 멈출 뻔했던 지촌종택의 역사는 또 다른 스토리를 전개하며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나의 고향 마을은 문씨 집성촌이다. 그곳에는 ‘연화당’이라는 종택이 있다.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왁자지껄한 종갓집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품었지만 지난한 시간은 종택의 모습을 바꾸었다. 사람의 온기가 떠난 기와집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흘렀던 대청마루는 주저앉고 구부러진 처마 밑에 볼썽사나운 말벌집이 차지했다. 세월의 틈을 메우지 못한 기와는 헐렁거렸다. 떡메를 치던 아재의 인심 좋은 웃음, 솥뚜껑에 전을 지지던 친척 아지매의 모습도 없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고 모여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삐걱거리는 정지문으로 달아난다. 안간힘을 쓰며 세월을 견디고 있는 종갓집에는 차곡차곡 쟁여 둔 이야기보따리가 그득한데 누구 하나 들어주는 이 없다. 제멋대로 자란 질경이가 주인 행세를 하며 바람을 붙잡는다.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돌계단을 올라가니 홍살을 설치한 솟을대문이 보인다. 그 아래에 있는 의자 두 개, 사람의 출입을 방해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의자를 갖다 놓은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의자에 앉으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숨을 멎게 할 정도의 기품 있는 풍광이었다. 산을 품고 있는 호수는 다양한 색채를 풀어내며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윤슬을 낚는다. 여름의 선명하고 힘찬 기운이 고스란히 마음에 들앉는다. 어쩌면 한 번도 닫을 수 없었던 문이었는지 모른다. 문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이 집 전체로 향하고 있다.다급히 들어선 걸음이 마당의 고요를 깨운다. 엎드려 있던 백구 한 마리가 낯선 이의 방문에 고개를 든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나의 마음을 들킨 거 같아 미안하다. 개의 눈빛이 온화하다. 맴돌이하는 제비의 날갯짓을 쳐다보는 백구가 초승달처럼 웃는다.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을 싣는 순간, 손님들은 신발 끈처럼 꽉 매어진 세상을 향했던 몸과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지고 종택의 식구가 된다. 별당에 머물렀던 아씨, 사랑채의 손님, 행랑채에 기거하는 머슴이 된다. 방마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구조는 자연의 힘을 빌려 비로소 완성한다. 사방에 열린 문마다 들어오는 풍경은 번잡한 욕심을 거두어 가더니 고요한 마음을 돌려준다. 누구나 공평하게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을 깨쳐준다.우리는 지산서당에서의 하룻밤을 허락받았다. 안동 선비의 기품을 깨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을 닮은 서당은 반듯하고 고풍스럽다. 기둥의 강건함, 대들보의 묵직함, 서까래의 유연함은 어느 것 하나 돌출됨 없이 제자리를 맞추어 서당의 품격을 높인다. 겹처마가 드리운 긴 그림자가 나그네의 옷자락을 붙든다.고택 담장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서 내려다본 ㅁ자형의 종택은 한 폭의 수묵화다. 개방하지 않아 더 은밀하고 숨은 공간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종손의 안채 살림은 긴 세월을 감내한 인내의 시간이어라. 대대손손 지킨 그 공간에는 15대손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 아이들의 발걸음에 지례예술촌의 아름다운 동행도 계속될 것이다.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사람들은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들었을까! 나는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차례대로 돋아나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본다. 유년 시절, 평상에서 바라본 은하수의 물결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 내 앞에 있을까. 문풍지를 타고 올라가는 장수하늘소의 발걸음이 귓전에서 사각거린다. 모두가 쉬이 잠들지 못한 밤이다.“Mom, what's this?”네 살쯤 되었을까.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하얀 고무신에는 다육식물이 촘촘하다. 기둥을 살피고 마루의 나뭇결을 만져보던 외국인 부부가 평온한 얼굴로 소녀를 쳐다본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찾아온 그 아이의 눈에는 이 고택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사람의 온기가 가득한 깊은 산속의 고택에서 나는 고향 마을의 쓸쓸한 종택을 떠올리며 먼 산을 쳐다본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장니(障泥)’

입선 류현서 넓은 평지에 능들이 즐비하게 둘러앉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둥그런 산봉우리를 담아와 옹기종기 엎어놓은 듯하다. 널찍한 대릉원을 돌아보며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천마총 앞에 섰다.시간의 저편을 고요히 더듬어 본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서원과 왕릉이 있다. 서원은 유교의 뜻을 따라 옛 성현을 받드는 장소다.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 서원이다. 그렇다면 고분은 무엇인가. 능을 거닐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고분은 나에게 답을 주기는커녕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모든 사람은 생사를 거친다. 죽음은 누구나 다다를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없는 진실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경험을 쌓고 쌓아 저 봉분만큼 높다는 걸까. 신라고분은 평생 겪은 일들을 뭉쳐서 이렇게 높게 쌓아 올려 준 것일까. 아니면 이승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사후세계에 가서 마무리하여 차곡차곡 저장시키라는 뜻에서, 넓은 공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천마총 안으로 들어섰다. 목관을 비롯하여 발굴 당시의 현장 그대로 진열해 놓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발굴된 무덤에서 피장자가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띠를 허리에 두른 채로 출토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관 밖에서는 금제 꾸미기와, 금제 족집게, 자루 달린 솥, 다리미, 청동 용기류, 굽다리접시, 토기, 유리 배, 굽은 옥, 등 껴묻거리가 다양하다.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력을 누리는 신라인, 여기 고분에서 죽은 자의 권력을 반추해본다. 천마와 금관과 수많은 껴묻거리에서 알 수 있다. 황금으로 만든 다양한 생활용품들은 아름다운 문화의 반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땅이 넓지 않고 작은 나라이지만, 겁 없이 화려했고 통 큰 문명국가였음을 직감한다.한발 한발 고분 깊숙이 들어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렸다. 장님 냇물 건너가듯 한참을 더듬거리며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하고 살폈다. 섬광이 번뜩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장니를 매단 천마가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달리고 있다.장니는 말 탄 사람의 옷에 흙이나 물이 튀지 않게 안장 양쪽에 달아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친 뒤, 그 위에 다시 고운 수피로 누벼 가장자리엔 가죽을 대었다. 볼수록 화려한 장니가 천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에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흙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자작나무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쭉쭉 뻗어 자라는 게 특징이다. 다른 나무와 달리 몸체와 잎이 은색이다. 자작나무에 바람이 스칠 때면 하얀 이파리가 마치 은으로 지은 옷같이 반짝거린다. 은 옷을 입은 하늘나라 신선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나무와 달리 영생을 기원하는 나무로 신성시 여겨왔을 테다. 그러했기에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천마도를 그린 것이리라. 옛적 선조들이 누구를 위해 고운 수피로 장니를 만들었을까. 필경 인간계에서 삶을 마치고 다다른 사후세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칸트는 “죽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고 말했다. 죽음은 무거운 육신을 버리고, 가벼운 영혼으로 자유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겐가. 인간이 유한한 이승에서 무한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게 무덤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닐는지.천마총에 들어오니 어디쯤이 하늘이고 어디쯤이 지상인지 헷갈린다. 발 디딘 곳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장자는‘우물의 물은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내다봤다. 어쩌면 무덤은 지하로 내려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육체는 땅에 묻히면 흙이 되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정신세계는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죽어야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걸까. 인간의 혼이 저승에 도착하면 천마는 즉시 하늘로 실어 나르는 수행을 맡았을 것이다. 공중으로 향해 뛰는 모습이 엄중하면서도 날렵하다. 입으로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하얀 털이 바람에 휘날린다. 고분 속에서 말이 하늘로 달리고 있을 줄이야. 흰 말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깊은 지하에서 높은 하늘로 오고 갔으리라. 높고 낮은 산을 넘고 여러 개의 내 (川)를 건너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 말발굽에서 흙탕물이 튀어 올라 옷이 더럽혀질까 봐 장니를 달았던 게다. 오랜 시간을 건너왔건만 희어서 너무 희어서 눈이 부신 천마도. 목화솜같이 희고 때가 묻지 않은 것은 장니가 있었기 때문이리라.천마가 사후세계의 긴요한 교통수단이라면, 이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 수단이 자동차다. 천마가 저승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면, 자동차는 이승의 육신을 태워 다닌다. 천마의 장니가 하얀 나무수피로 만든 것이라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하얀 유리로 되어있다. 수피로 만든 장니나 유리로 된 장니나 흙탕물을 튀지 않게 막아준다.자동차가 없던 때에 말(馬)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어떤 동물이나 짐승 중에서도 흰색을 지닌 동물을 더욱 신성시 여겨왔다. 전쟁을 치를 때도 날쌘 백마를 최상의 무기로 삼았다. 일상생활에서조차 흰말은 풍요와 행운을 몰고 오는 상징물로 꼽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이 화이트카를 가장 선호하는 것과 같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여러 색의 자동차 중에서 흰색이 가장 많다. 흰색의 차는 재물을 상징한다. 그래서 속담에도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면, “백말 타고 장가드는 행운을 얻었네”라고 한다.과거를 모르는 백성은 미래도 없다고 한다. 역사를 논하는 사람은 인간을 세계의 시간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철학인은 인간과 역경을 세계의 시공간적인 무시대성으로 말한다. 천마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놓은 게 아니겠는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시대를 뛰어넘은 천마도. 시간과 공간을 망라한 신라의 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고요히 흐르고 있다.고분에서 나와 높고 둥근 능을 바라본다. 고요도 힘겨워 차갑게 가라앉는 듯하다. 품이 너른 능들이 봄에는 연옥이불,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불을 덮는다. 가을에는 황금이불, 겨울에는 은이불을, 자연이 철철이 갈아주는 이불을 덮고 잠에 취해 있다.여느 왕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천마총에는 없다. 곰곰이 생각에 젖었다. 천마총은 저승에 도착하는 즉시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굳이 무인석을 세울 필요가 없었던 거다. 만약에 무인석과 문인석을 좌우로 세웠다면 장니가 출토되었을까.엄전한 대릉원이 후세에게 지난 역사를 되새기게 만든다. 긴 역사에 외부세력으로부터 이런저런 수모를 당해도, 마른버짐이 핀 배롱나무가 능을 지켜온 산 증인이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칠불암에 달이 뜨면’

입선 김태선 비구름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솔밭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발걸음을 재촉했어도 꼬리가 잡혀 나는 흠뻑 젖은 채 남산 자락을 걸었다. 저 구름이 몸을 풀어 후련하게 비를 다 쏟아버려야 하늘이 다시 밝아지리라.칠불암 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다닐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길게 이어진 오솔길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도 여전하다. 물길은 끊어지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끊어져서 한참은 물소리만 따라온다. 그 물길 끝에 옹달샘이 나온다. 샘물로 목을 축이고 대나무 숲 터널을 지나 아늑한 돌축담에 올라선다. 거기서 마침내 부처님을 뵙는다. 바위에 새겨진 일곱 부처님이 저 아래 서라벌 들판과 토함산, 동해를 굽어본다.나는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처음부터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외갓집 뒤꼍에 있던 큰 바위가 생각났다. 외갓집의 바위는 원래 하나였는데 오래전 벼락에 갈라져 세 개가 되었다고 한다. 갈라진 그 바위들 모양이 멀리서 보면 농부가 김을 매는 것 같기도, 엎드려 절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외할머니와 두 딸, 세 모녀가 오순도순 사는 모습이 흡사 바위를 닮았다며 외갓집을 세바우집이라 불렀다.방학이면 우리는 외갓집으로 몰려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물과 뒤꼍의 바위는 색다른 풍경이었고 한두 살 터울의 이종사촌들은 좋은 친구였다. 외할머니는 위험하다며 바위 근처에 얼씬 못하게 했지만, 호기심 많은 우리에게는 더없는 놀이터였다. 놀다가 다치기도 했다. 내가 바위에 이마를 긁히고, 오빠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팔이 찢겼다. 그러다 큰일이 터졌다. 어느 날 같이 놀던 이종사촌 여동생이 바위에서 떨어졌다. 동생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이모는 고명딸을 앗아간 바위를 미워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다 다 소용없다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소중히 여기던 신줏단지까지 내다 버렸다. 외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고, 차라리 바위를 파내고 싶다 했다. 그 후 외갓집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어느 초겨울, 외할머니가 바위에 켜둔 촛불이 바람에 넘어져 뒷산에 불이 났다. 불은 집까지 태웠다. 혼자 있던 외할머니는 혼비백산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줄을 놓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모는 친정과 왕래를 끊었고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어머니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치료 후에도 말이 어둔하고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치매 초기였다. 그 소식을 듣고 이모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모는 내가 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멍하니 앉은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이렇게 오면 만날 걸, 왜 그토록 오랜 세월 골을 파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무슨 소리를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어머니가 칠불암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곳에 가고 싶냐고 묻는 이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날 이모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칠불암에 올랐다. 나는 칠불 앞에 서서 어머니를 위해 빌고 또 빌었다. 바위를 향해 앉은 이모의 눈빛도 간절했다. 그때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까. 그런 우리 옆에서 어머니도 무엇인가를 빌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머니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내 결혼과 동생들 학업성취를 기원하고 있었다.옛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날이 개고 하늘에 달이 떴다. 빗물에 씻긴 달빛은 유난히 밝고 산 기운에 씻긴 내 마음도 퍽이나 가벼웠다. 내 마음이 가벼우니 그날따라 아미타여래불이 빙그레 웃으셨다. 삼라만상이 잠든 고요한 밤 부처님 미소 속에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도 젊어서부터 칠불암을 좋아했다. 당신도 나처럼 이곳에 와서 근심을 내려놓았을까.나는 한때 칠불암에 매달렸다. 집안일이며 직장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마다 칠불암을 찾았다. 사방불을 돌며 절하다 보면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텄다. 안개가 걷히면서 눈부신 새날이 펼쳐지고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생각이 하나둘 가닥이 잡혔다. 뿌듯했다. 아, 어머니는 부처님께 소원만 빌러 다닌 게 아니었구나.칠불암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또 있다. 그는 암자에 오를 때마다 옹달샘을 쳐내고 있었다. 한 방울 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샘 바닥이 드러나도록 바가지 든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암자에 있는 사람이려니 했는데 나처럼 가끔 칠불암을 찾는다고 했다.“물이 말갛게 보여도 자주 청소를 해야 합니다. 하나둘 떨어져 내린 돌 부스러기도 쌓이면 물을 흐리게 합니다.”번뇌에 가득 찬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말 같았다.칠불암에서 내처 신선암에 오를 수 있다. 칠불암에서 올려다보면 저 위로 툭 튀어나온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신선암이다. 마음이 가벼우면 몸도 가벼워지는 법, 신선암까지 오른다. 돌계단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점을 찍듯 오른다. 숨이 차오를 즈음 이번에는 좁디좁은 난간 길, 바위를 안고 가재걸음을 걸어야 한다. 이마와 손에 닿는 차가운 바위의 감촉을 생명줄처럼 힘껏 껴안는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아찔하다. 늘 깨어있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리라.칠불암을 등지고 휘적휘적 내려오는데 지게를 진 남자가 후딱 내 옆을 지나쳤다. 암자에 짐을 날라다 주는 듯했다. 맨발이었다. 저이는 발도 아프지 않을까? 힘이 들 텐데 어쩌면 저렇게 편안한 얼굴일까. 나는 얻으러 가는 마음이었으니 다리가 무거웠는가. 스스로의 물음에 멈칫하는데 칠불암 은은한 달빛이 내 등을 토닥였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능지탑 문무왕을 찾아서’

입선 김춘기 낭산 서쪽에 위치한 능지탑을 찾았다. 낭산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울산 방향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104m 높이의 나지막한 야산이다. 신유림이라 불리기도 한 신령스러운 성산으로 정상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남쪽은 사천왕사지가 있다. 이 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이 화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4각모양의 2층탑으로 여느 탑과는 달라서 얼른 탑이라고 납득하기에는 색다른 모습이다. 기단을 복원하고 상부를 쌓았는데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5층탑이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탑 뒤에 성격이 규명되지 않는 토단이 있다. 혹시 토단 위에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유해를 얻어 태웠을까? 그 연기는 용의 형상으로 동해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거슬러 신라를 더듬어 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지키려는 왕의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탑돌이를 하면서 왕을 찾는다.문무왕은 신라 30대 왕으로 아버지 김춘추의 뜻을 이어 삼국통일을 꿈꾼다. 통일을 이룬 후에도 이 땅을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싸움을 걸어오는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고 물리쳐서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그 후 왕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뜻을 담아 사천왕사를 지어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하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왕은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인도식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서 유해를 동해의 바위에 장사지냈다. 최초의 수중 무덤 대왕암이 그것이다.신라왕들은 대부분 사후에도 편히 살기 위해 많은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경주는 고분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도심에 산처럼 높이 만들어진 능(총)들이 널려있다. 대부분 신라왕과 왕비의 능이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부장품을 가져가려고 무덤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껴묻거리(함께 묻을 도구) 상자를 넣을 방을 나무덧널로 설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들었다. 많은 물건을 넣고 물건을 도난당하지 않기 위한 양식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금관, 장신구, 무기, 마(馬)구, 그릇 등 엄청난 양이다. 심지어 어떤 마립간(왕)은 심부름할 소녀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살아서 누린 권력과 재력을 사후까지 누리겠다는 끝없는 욕심이 빚은 제도이다. 사(死)자의 권력과 지위에 따라, 때로는 산자의 권력에 따라 껴묻는 부장품의 양이 늘어났으니 사후에도 지위를 누리며 땅속에서 죽음을 살고 있다. 정작 부장품들은 주검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 사용된 흔적은 없다.불교에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한다. 빈 몸으로 떠남이 마땅하다. 이승의 것은 산자의 몫, 떠나는 이들이 행여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법정스님은 이승의 삶에서조차 무소유를 설파했다. 불교를 국교로 받들던 신라의 왕이라면 그 정도의 철학은 지녔어야 왕이다. 산처럼 높이 쌓은 능 안에서 이승의 도구로 저승의 삶을 살기 위해 채움은 불교의 교리도 아니고 지도자의 영도력도 아니다. 이승의 도구가 저승에서도 맞겠는가? 모두가 비움의 미학을 알지 못한 인간의 짧은 생각과 욕심이 만들어낸 관습이다.문무왕은 오로지 이 땅만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죽음에까지 이어진다. 극성스러운 왜구가 해안을 토색질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기에 부처님 힘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자신을 불태워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왕은 깨달음도 남달랐다. 죽음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알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지난날의 영웅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능을 크게 만들어도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기가 굴을 팔 것이다.’ 라는 기록만 봐도 그의 깨달음은 천년을 뛰어넘는 위대한 통찰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지의법사에게 늘 자신은 죽어 호국 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말했다. 지의법사가 “용은 축생보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하니 왕은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인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 라고 답한다. 이처럼 왕은 짐승으로 환생하는 업보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호국’의 길만을 생각했던 것이다.감포 바다 수중 왕릉 대왕암 앞에 섰다. 생즉사 사즉생의 문구가 눈앞에 일렁거린다. 사후까지 잘살아 보겠다던 숱한 왕들은 땅속에서 무거운 침묵에 빠져 죽음을 살고 있고, 뜨거운 장작불에 몸을 불살라 나라를 지키려던 문무왕은 후손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살아가고 있다. 끝나버린 죽음과 천년을 살아온 죽음이 오롯이 대비를 이룬다. 요즘처럼 일본과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왕이 보내준 보물 만파식적이 그립다. 피리소리에 묘책이 얹혀 달려오기라도 한다면 위기를 넘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여행자의 가슴에 청량제가 된다. 하얀 포말을 담은 푸른빛 바다를 거느리고 오늘도 문무왕은 나라를 지키는 작전회의 중일 것이라는 믿음을 위안 삼으니 돌아오는 발길이 한결 가벼워진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서원(書院)과 오백 년 은행나무

입선 김복건 가을이 노란 은행잎으로 유혹한다. 갑자기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든다. 나뭇잎은 지난날들의 사연을 가지에 걸어두고 함께 떠나자며 내려앉는다.은행나무는 자기 보호를 위해 본능적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수나무는 냄새가 없다. 그래서 노란 잎이 되어 떨어진 황금카펫 길을 걸으면 참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잎들은 이곳저곳에서 나비가 되어 춤을 춘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바람과 어울려 춤사위를 하는 나비를 한참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젖어든다. 옛 직장에서 사표를 내고 쉴 때다. 매일 출근하였던 사람이 집에 있자니 갑갑하고 서성이자니 실업자라는 이미지를 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아들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 직장을 잃었으니 맛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줄 수 없었다.무료하게 집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저녁, 아내는 바람에 날려 떨어진 은행 열매를 주워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빡빡 문질러 겉껍질을 벗겨 냈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통마늘과 함께 달달 볶아 내가 좋아하는 맥주 안주를 만들었다. “여보! 힘내세요.”하며 차려진 조그마한 상에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려 노릇노릇 구워진 은행 열매가 있었다. 그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은행나무가 소수서원 입구에서 오백 년을 버티고 서 있다. 서원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첫걸음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차원에서 보고 느끼는 ‘생각의 서원’에 들어선다.우리 민족은 위계질서와 단체생활을 중히 여겼다. 크고 많은 것보다 작아도 알찬 생활을 하였으며, 은행잎처럼 따스한 색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원인 것이다. 풍기지역 사람들이 향촌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곳으로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훼손되지 않고 남은 서원 중 한 곳이다.고려 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안향 선생이 돌아와 주자학을 알렸기에 주세봉 선생은 위폐를 봉안하고 체계를 갖춘 것이 백운동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향교의 성격을 띠었지만 학문을 배우고 전수하는 지방 사립대학 수준이었다. 걸어서 안으로 들어서니 직선으로 일신재, 지락재, 학구재가 배열되어 있다.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각각 별도의 경계 건물도 없고 갑을 관계의 흔적도 없음이 예사롭지 않았다.지금 시절에는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별도의 방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의견충돌이라도 있으면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 시절에 스승과 한공간의 마당을 사용하였으며 함께 거닐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과히 획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내가 첫 직장생활 할 때만 하여도 대표자와 윗선의 간부 그리고 중간 간부들의 방은 별도였다. 윗선의 간부와 의논하고 업무를 추진한 후에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경영주에게 문책을 당하는 것은 윗선의 간부가 아닌 실무를 보는 중간 간부였기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과거가 되었다. 함께 거닐고 좀 더 진지하게 즉시즉시 문제를 푸는 대화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더 현명한 판단의 결과를 이뤘을 것이다.경험 많은 현인을 뒤따르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헤매지도 않을 것 같은 배움의 공간에 닿았다. 학구재 옆에 스승의 공방인 직방재와 일신재를 우측에 두고 나란히 세우지 않고 약간 뒤로 물려 사제지간의 예의를 엿볼 수 있게 한 건축물. 통상적으로 지체 높은 사람들은 별채 혹은 뒤쪽의 별도 건물을 사용하건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로 배움의 공간은 동쪽에 두고 제향은 서쪽에 세웠다. 스승과 제자가 한 대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가시적인 질서 없이 일렬로 배열한 것 같으면서도 통일되고, 단아한 모습 속에 위계질서를 느낄 수 있었다.당시 선비들이 학문을 배우면서 심신이 피로할 때, 잠시 거닐었을 것 같은 마당 한쪽의 소나무 아래 이르러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선비처럼 먼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 저 멀리 흰 구름이 흘러간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흐트러진 몸맵시를 바로 하라는 듯 모자를 흔든다. 햇볕을 가리려 비뚤하게 쓴 모자를 고쳐 쓴다.옛 선비의 문화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것을 찾고 싶은 나의 마음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일까? 다시 천천히 걷는다. 선조들의 서책과 영정이 모셔진 곳에 이르러 우측에서 좌측으로 옛 사람들의 예의 방식을 지키며 한발 한발 옮겼다. 당시 유생들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더 많이 느끼기 위함에서이다.오백 년 전 세월에서 한참이나 머물다 입구로 돌아왔다. 그사이 서원으로 들 때 맞아 주었던 나무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서 있었다.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노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큰 결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면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음을 나무는 말하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세대를 지켜보았던 나무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지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매화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도 않고, 고운 향을 풍기지도 않지만 천년을 살아가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다. 그런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힘이 났다. 남편에게 용기를 주려고 구운 열매가 생각나서인지도 모른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열매를 구우면서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맺히는 수천수만의 열매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나무는 오래되고 자랄수록 더 큰 보답으로 되돌려 준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오백 년의 역사를 읽었고, 의견 충돌로 어려움에 처했던 지난 시절도 오늘을 바로 세우는 기틀이 되었음을 인지하였다.석양에 물들어가는 귀갓길에 아내의 눈물 같았던 오백 년의 토실한 황금 열매가 톡톡 떨어진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삼강주막 외상장부’

입선 김미경 누구의 외상 줄이었을까. 선명하게 그어진 흙벽 위의 빗금들. 어느 선사시대 상형문자들 같기도 하다. 빈 주막 부엌 벽에는 아직도 외상을 갚지 못한 이들을 빗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목마르던 뱃사공이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남긴 외상일 수도, 과거 길의 가난한 선비가 과거 급제하고 오면 꼭 갚겠다던 외상 표시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늦은 오후 갑자기 방랑벽이 도졌다. 무작정 떠나고 싶어 달려간 곳, 예천 삼강주막이다. 주막 초입에는 현대식 주막이 새색시처럼 단장하고서 관광객들을 먼저 맞이한다. 파전이나 두부, 도토리묵 등이 솔솔 냄새를 풍기며 발길을 끌어당긴다. 원초적인 유혹을 잠시 뒤로하고, 옛날 주막부터 고개를 디밀었다.삼강주막은 백여 년의 시간을 간직한 채, 늙은 주모처럼 오도카니 앉아있다. 마치 북적거렸던 옛 손님들을 아직 기다리는 것처럼. 주막 부엌으로 먼저 들어선다. 조그마하다. 주모 혼자 발 동동거리기엔 안성맞춤일 수도 있었겠다. 낙동강 칠백 리에 마지막 남은 주막인 삼강주막은 그 옛날 봇짐장수들이나 나그네들이 서글픔과 같았을 허기를 달래고, 하룻밤 묵어도 갈 수 있었던 숙식처였다.부뚜막에 작은 찬장이 놓여있다. 그 안의 식기들은 뽀얀 먼지를 인 채로 깊은 잠에 빠져있다. 옛 주인의 따스한 손길이 닿으면 금방이라도 딸그락거리며 깨어날 것만 같다. 아궁이에는 두 개의 가마솥이 올려져 있다. 손님들로 넘쳐나던 주막집 살림을 짐작게 한다. 국솥에서는 뜨끈뜨끈한 국이 금방 끓어 넘칠 것 같다. 밥솥에서는 구수한 밥내도 솔솔 묻어나는 듯하다. 눈치도 없이 도는 시장기를 외면하듯 부엌 벽으로 눈길을 돌린다. 유리로 덮여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빗금들이다. 주막집 부엌을 여태까지 사선으로 보초 세워둔 저 빗금들.그 옛날 주막집 주모의 외상장부다. 엄대라고도 했다. 예전 글을 모르던 평민들은 셈을 빗금으로 표시했다. 어느 아무개가 얼마란 표시는 전혀 없다. 길고 짧은 빗금들이 전부다. 갚은 것은 가로로 다시 그어져 있다. 오직 주모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것이다. 조그마한 부엌 흙벽을 외상 빗금으로 가득 채웠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주모는 빗금 그어둔 저 빚들을 모두 되받을 거라는 기대라도 했을까. 허기진 나그네들이 배불리 먹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배가 더 부르진 않았을까.어디선가 불이 켜지듯 옛 뱃사공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막걸리 한 사발을 급하게 주문한다. 반은 흘리듯 꿀꺽꿀꺽 마시더니 ‘주모 외상!’을 외치고는 또 다시 뛰쳐나간다. 주모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뱃길 조심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순간 빗금들이 일제히 일어나 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저 빗금들을 남기진 않았던가. 돌이켜보니 빚지지 않은 곳이 없다. 숨 쉬고 살아가는 자연과 공기도 빚이다. 낳아주신 부모님에게는 더 말하여 뭣할까. 목숨까지도 빚졌다. 그뿐이랴. 생각해보면 이 세상 모두가 살아가는 우리에겐 빚이다. 어느 것 하나도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한순간 마음이 무겁다. 빚진 자는 기억조차 못하고 사는 동안, 그 누군가는 저 빗금들을 그어놓고 되갚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걸어온 길이 아득하다. 한 인연이 떠오른다. 믿었던 만큼 나름대로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가슴에는 풀지 못할 매듭만 남겨두었다. 속상한 마음은 외상장부에다 빗금들을 마구 그어대고 있었다. 그 빗금들이 화살이 되어 나를 찌르는 줄도 모르고.마음의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주막 뒤편에 나루터로 올라가는 길이 좁다랗게 보인다. 삼강나루터는 문경 주흘산맥과 안동 학가산맥, 대구 팔공산맥의 끝자락이 만나는 지점이다. 게다가 봉화에서 흐르는 내성천과 문경의 금천, 강원 황지에서 흐른 낙동강 원류가 합류하는 곳이다. 바로 수륙 교통의 요충지다.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었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갈 때도 반드시 가쁜 숨을 잠시 내려놓던 쉼터였다.삼강나루터에 올라서니 개선장군 같은 황포돛대가 늠름하게 매여져 있다. 돛의 색깔이 누렇다. 돛의 재료인 광목에 황톳물을 들여 방수와 방충을 했던 조상의 지혜가 바람에 펄럭인다. 한순간 웅성거림이 뒤에서 몰려온다. 관광객들이다. 기다렸단 듯 황포돛대가 금방이라도 노를 저을 기세로 펄럭거린다. 옛적에는 강물 위를 주름잡았던 몸임을 의기양양하게 뽐내면서.나루터 옆으로 오백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묵묵하다. 시끌벅적했던 나루터의 일대기를 모두 안다는 듯 바람에 연신 머리를 주억거린다. 서산마루가 벌써 불그스레해졌다. 강에도 산 그림자가 내려앉는 중이다. 무작정 달려온 삼강주막 나루터에 걸터앉아 마음의 외상장부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가두었던 마음의 빗금 하나를 그제야 지워버린다.빈손으로 와서 이 정도면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베푼 것은 베푼 것으로 족할 일이다. 그만큼 하늘 외상장부에는 가로의 줄로 그어져 있겠지. 나 자신도 그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조심히 돌아보며 살아야 할 일이다. 멀리서 주막 파전 냄새가 어서 내려오라며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백지로 말한다’

입선 김규인참닥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공방으로 들어가며 하늘을 쳐다본다. 청송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옅게 드리운다. 하얀 구름과 흰색 한지 그리고 무엇을 보게 될까. 궁금증을 앞세워 공방 앞에 닿는다. 몸은 가칫하지만 눈빛이 까만 무형문화재 이자성 한지장이 나를 맞는다.장인이 차 한 잔 내놓으며 자신의 이력을 들려준다. 자부심 서린 어투 간간이 회한이 묻어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한지 만드는 일을 시작한 장인은 고된 일이 싫어 탄광과 농사일, 타이어 회사에 근무하다가 아버지의 부름에 다시 한지를 만들었다. 신라에서 시작한 한지의 질긴 유전인자가 장인의 몸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장인은 수천 가지의 흰색 중에서 신라 천 년의 흰색을 만든다. 참닥나무의 갈색 껍질이 흰색의 한지가 되기까지 장인은 손을 허투루 놀리지 않는다. 한눈을 팔면 점이 찍히기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손길과 눈길이 수백 번 더해져야 온전한 백지(白紙)를 얻는다. 흰색을 만드는 것은 잡다한 색깔이 들어간 세상에서 때 묻은 마음을 털어내는 일이다.한지, 그 시작은 물이다. 지하 260m 바위틈에서 철분과 석회 성분이 없는 물을 길어 올린다. 다음은 섬유질이 부드러운 일년생 참닥나무다. 미생물에 의한 변색을 막고자 한겨울 청송 골짜기 찬바람이 더해진다. 장인의 한지는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맑고 푸른 청송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하루하루가 고단한 몸짓이다. 찐 참닥나무의 밑동을 잡고 벗긴 잿빛 껍질을 찬물에 불린 후 닥칼로 겉껍질을 벗겨내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닥칼로 잿물에도 녹지 않는 흑피와 청피를 긁어내고 잡티를 골라낸다. 장인은 하얗게 변하는 닥섬유만 쳐다볼 뿐 들어간 손길의 수는 헤아리지 않는다. 백닥을 다듬는 손이 점점 검어져도 하얀빛을 찾아가는 기쁨은 하루하루 쌓인다.검은 잿물에도 백닥은 검어지지 않는다. 콩대의 타고난 강한 알칼리성의 잿물은 불순한 색을 빼낸다. 남은 잿물을 흐르는 물로 씻어내면 섬유의 광택이 은은하다. 그래도 장인은 만족하지 못한다. 수천 가지가 넘는 흰색 중에 참된 한지의 흰색을 찾는다. 골고루 빛을 받도록 백닥을 뒤집어서 당분, 회분, 기름을 날려 햇빛이 준 흰색을 얻는다. 자연의 화학과 물리를 넘어 흰색에 다가서는 장인의 의지는 끈질기다.닥돌 위에 백닥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겨 풀어낸다. 황촉규 뿌리의 점액질을 넣어 막대로 저으며 가는 실 한 올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본다. 막대에 부딪히는 촉감으로 닥풀의 양과 한지의 두께를 가늠하고 외발을 들고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줄 하나에 의지해 앞뒤 좌우로 지물을 흘리며 몸으로 우물 정(井)자를 그린다. 합판같이 질기고 견고하게 짜인 하얀 한지를 꿈꾼다.한지에도 더하고 빼는 법칙이 들어있다. 화학과 물리를 앞세워 눈에 보이지 않는 얼룩의 원인을 없애고 마지막으로 물을 빼낸다. 찌고, 긁고, 골라내고, 삶고, 두들기고, 뜨고, 빼고, 말리고, 다듬는 과정은 모두 빼기이다. 빼기만 한 것 같지만 더하는 것도 있다. 물과 햇빛과 바람 그리고 장인의 땀과 정성에 간절한 기다림이다.한지를 만들 때 물은 어느 공정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물은 시작부터 끝까지 흰색 한지를 만들기만 할 뿐 자신을 위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한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장인의 모습과 닮았다.백 번의 손길을 거친 한지는 장인의 마음을 닮은 순수한 흰색이다. 하얗다와 희다, 외면과 내면을 보고 모든 빛을 반사하는 무채색. 그래서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다. 장인은 하얀 한지를 백 장씩 포개어 보관한다. 백 번의 손길이 들어간 백색의 한지를 백 장씩 포개면서 장인은 숱한 노고를 위로받는다.백지는 빛깔이 희고 고와서 흰 백(白)자를 쓴다. 장인은 일백 백(百)자에서 일(一)을 빼서 얇은 한지를 만드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한다. 간절한 기도를 담아서 만들기에 한지를 태우면 색깔만 검을 뿐 고운 결은 그대로 남는다. 태워서 남은 한지의 검은 결은 불도 산화시키지 못하는데, 그것이 바로 명장의 자존심이다.한지를 만드는 일은 지난하다. 베고, 찌고, 쬐고, 지겹도록 피닥을 긁고 어깨가 빠지도록 백닥을 두들겨야 한다. 그뿐인가, 추운 겨울에 물질하고 뜨거운 여름에도 불을 때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격하고 고단한 여정이 장인의 길인 것을···.장인의 노력을 활자로 치면 책 한 권 분량을 채우고도 남는다. 한지는 자신의 작품이지만 낙관도 찍을 수 없다. 바늘구멍만 한 점조차 찍을 수 없다. 사람의 일상에 요긴하게 쓰이지만,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한지는 장인의 노고를 몸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하얀 백지로 사람이 하지 못한 말을 한다.장인은 단지 백지로만 말한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첫사랑 같은 그곳, 가송리

입선 권옥희 가을날처럼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떠 있는 날씨는 여행하기에 아주 좋았다. 나비 한 마리 앉히려고 있는 대로 잎을 펼쳐 멀대처럼 키를 키우는 접시꽃이 한창인 것을 보니 곧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다. 장마 오기 전에 고향을 안동에 둔 사람들의 모임인 영영회에서 내 고향 안동이자 남 선배의 고향인 오지 중의 오지, 도산의 가송리를 찾았다. 지금이야 차들이 수시로 다니고 살기 좋아졌다고 하지만 몇십 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닐 땐 하도 가난해서 꿀밤을 점심 도시락으로 싸갔다가 꿀밤돼지라고 놀림도 엄청나게 받았다고 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지금도 도토리묵을 안 드셨다.정신문화의 수도 하면 안동. 그 정신문화의 수도 중심지이자 시발지가 안동시 도산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비의 문화가 그대로 살아 있는 도산서원이 있고 농암종택이 있는 그 도산면 중에서도 가장 오지(奧地)에 속한다는 가송리는 퇴계선생이 지나다가 도산구곡에 늘어선 소나무가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해서 가송리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다. 어디든 걷고 걷는 물길과 산길이 절대적인 곳. 때 묻지 않게 숨겨두고 싶은 곳. 선배가 설 명절이라고 고향 찾았다가 늦은 밤 버스는 끊기고 안동역에서부터 걸어서 얼음이 쩌렁쩌렁 우는 물길 따라 어둠을 헤치며 가송리 집에 갈 때는 등골을 잡아당기는 무서움에 추운 줄도 몰랐다고 했다. 건지산 중턱 외딴집의 흐릿한 불빛 보고 찾아들었다가 집주인장의 호의로 얌전한 처자가 차려주는 밥 한 그릇 달게 얻어먹고 비로소 집으로 갈 수 있었다던 선배는 그 후 첫사랑이 된 그 처자를 마음에 묻고 산다고 했다.우린 첫사랑 같은 그 아름다운 가송리에서 훌륭하신 선현들의 얼을 되새기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다. 선배의 사촌동생이 운영하는 펜션에 짐을 풀고 바로 옆의 농암종택으로 들어갔다. 당대를 휘어잡으며 떠날 줄을 아는 뒷모습이 아름답던 선비는 가고 없어도 그가 남긴 집은 65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누대에 걸쳐 새로운 주인이 바뀌면서 집을 잘 지켜온 덕에 오늘날 우리 앞에 집은 이런 거다! 하며 보여 주고 있다. 몇 번을 봐도 그대로 훔쳐 가고 싶은 긍구당. 금침이 깔려 있어 신혼 첫날밤을 치르면 딱 좋을 것 같은 그 방 툇마루에 앉아 맞은편의 강각을 바라보니 대청 위에 놓인 의자 두 개가 참 평화롭게 보였다. 저 의자에 앉아 가송리를 휘돌아 나가는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소나무에 둘러싸인 적벽인 백련암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신선이 아니겠는가?건지산에 올라 학이 머물던 자리 학소대를 보고 가려고 도란도란 걸으며 오디도 따먹고 산딸기도 따먹으면서 오지체험 하는 재미가 막 들 무렵 청량산 너머로 밀려오는 검은 구름을 예감은 했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여우비로 바뀌더니 순식간에 소나기를 퍼붓고 비에 젖어 초라해진 모습들을 영화의 한 장면인 양 서로 바라보며 웃느라 정신없을 때 어찌 알고 선배의 동생이 트럭을 몰고 산길을 올라왔다. 일부는 안에 타고 일부는 짐칸에 올라타서 밀림 같은 숲길을 헤치며 덜컹덜컹 올미재 산봉우리를 휘딱 넘을 땐 쓰고 있던 우산도 찌그러져 버리고 오금이 저려 비명이 절로 솟았다. 그런데 이런, 펜션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해가 났다.젖은 옷을 갈아입고 낙동강 물길을 잠시나마 잡아 가두는 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 퇴계의 문하생인 성성재금난수 선생의 고산정으로 갔다. 다리를 건너기 전 깎아지른 적벽 밑에서 물수제비뜨기가 한판 벌어졌다. 손을 튕겨져 나간 돌이 통통통 튀며 우리보다 먼저 고산정 기슭까지 닿는다. 숱한 세월 흘러도 변함없이 흐르는 낙동강의 유유함을 바라보며 산자락 밑에 까만 점 하나처럼 들어앉아 있는 이 정자에서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을 당시 선비들의 절개를 닮은 듯 고산정을 지키는 앞뜨락의 소나무 한 그루가 청청하다.비 오는 밤을 보낸 가송은 새벽 물안개가 피어올라 마을도 종택도 고산정도 안개 속에 가두었다. 햇살이 안개 속에서 피어나며 세상을 드러냈을 때 세상 조용한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싶었다. 흐르는 것은 물과 바람.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오늘은 고산정 뒷길로 맹개마을까지 트레킹을 간다. 정글의 법칙처럼 오지가 따로 없다. 온갖 야생화와 새소리의 환영을 받으며 나뭇잎 사이에서 보일 듯 말 듯 빨갛게 유혹하는 산딸기로 새콤달콤하게 입맛을 다시는 재미가 그대로 웃음이다. 축축한 이끼에 미끄러질까 봐 발목에 힘을 주며 걸어가는 산길은 그냥 밀림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이어지고 마치 협곡을 지나듯 절벽 바위 밑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기도 했다. 강물을 만났다가 다시 밀어내기도 하면서 힘들다고 하기보다는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자연과의 만남과 교감이 신비로웠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은 저 산봉우리에 놓인 하늘다리가 아련히 보였다. 신비의 명산인 청량산을 위쪽에 두고 도산구곡으로 이어지는 가송리의 이웃마을인 쏘두들과 가사리와 우리가 소나기와 싸우느라 오줌 지리며 넘어왔던 올미재, 그리고 주변의 한 번쯤은 찾아봐야 할 단천리와 백운지와 왕모산 맹개마을의 메밀밭과 공룡 발자국, 월명당과 백련암 장구목과 학소대 모두 오염되지 않고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천혜의 보고였다. 농암종택까지 강물을 건너오려고 바지까지 걷어 올렸다가 돌멩이들이 미끄러워서 바퀴 큰 트랙터를 불러 타고 건넜다. 생전 체험해보지 못한 트랙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재미가 남달랐다. 강 건너 저 산비탈에 내 첫사랑 청자 씨가 살던 집터가 보인다면서 남 선배가 손끝을 가리켰다.유난히도 옛 선조들의 발자취가 많이 서린 곳. 퇴계가 걷던 길을 따라가 보면 숙연함과 초연함을 넘어 그리움과 낭만에 젖는 아련함마저 느껴진다. 남 선배가 아니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와보고 경험하지 못했을 오지체험이 가슴에만 담아두기에는 너무 벅차다. 늘 시간에 쫓겨 바삐 사는 내게 첫사랑 같은 그곳 가송리 추억은 오래도록 꺼내 봐도 그 새로움이 더해질 것 같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봉정사 영산암

입선 강대식 비가 흐느적거리며 내린 다음 날 찾은 봉정사 영산암은 고요하기만 하다. 일요일이라 방문객이 많을 법도 한데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이상하리만큼 사람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영산암을 혼자 차지한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이런 큰 횡재를 언제 해 보았던가. 평소에 큰 공덕을 쌓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 행운이 따라온 것이다.툇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평화롭게 하늘을 유영한다. 나만큼이나 한가롭다. 살아오면서 앞만 보고 뛰다 보니 잠시 여유를 가지고 뒤를 돌아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하지 않아도 일할 사람은 많고, 세상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왜 몰랐던 것일까. 내가 직접 처리해야만 직성이 풀리고 안심이 되었기 때문에 힘이 들어도 누구의 손을 빌리기보다 직접 처리하려고 애썼다. 그런 고집스러움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고 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가족들과 같이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별로 없다. 가족들과의 추억이 없다는 것은 아이들이 다 성장하고 떠나가니 더 허망하게 다가온다. 아이들 손이라도 붙잡고 해외는 아니더라도 국내여행이라도 해둘 걸 그 흔한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무관심이 미안하고 미안하다. 아비로서 아이들에게 가족여행이라는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가슴을 친다. 자꾸만 속에서 솟아오르는 부화가 가슴을 두드린다. 둥둥 북소리가 날 것 같다. 힘차게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의 손놀림처럼 더 심장의 울림이 커져간다. 이런 산사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찾아왔었더라면 하는 늦은 후회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혼자인 줄 알았는데 스님이 안에 계셨나 보다. 객이 주인인 양 허세를 부리고 앉아 있었다는 죄스러움이 두 손을 모으게 한다. 편한 옷차림으로 나오셨던 스님도 툇마루에 제집처럼 편안하게 걸터앉은 처사를 보고 당황하셨는지 합장을 하시더니 이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신다. 아마도 객이 누리고 있는 이 평화와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가 보다.영산암 출입문인 우화루 밑을 지나면 한옥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해 내며 건축된 ㅁ자 모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작은 마당에는 한쪽 귀퉁이를 할애하여 만든 화단과 건물에 비하여 큰 암석 위에 자리한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 가지는 송암당 하늘을 모두 가릴 정도로 자라 내부가 옹색해 보여도 건물의 멋들어진 배치는 인상적이었다. 마당에는 작은 석등이 앙증스럽게 서 있다. 오랜 세월 암자와 함께 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화강석을 다듬어 동서남북 구멍을 내고 머리에는 갓을 올려놓았다. 단아하고 우아한 것이 기품이 서려 있다. 석등은 이 암자의 세월만큼이나 세상의 희로애락을 보고 들어왔을 게다. 오래전 내가 처음 이 암자에 왔을 때 난 한눈에 석등에 반해 버렸다. 나한전 앞에 온몸이 온통 녹색 이끼를 덮어쓴 모습이었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의 흐름을 읽게 해 주었던 석등은 여느 사찰의 석등과 다르게 정겨웠고 편안했다. 영산암을 찾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맞이해 주는 역할을 맡았는지 입구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서 있다. 오랜 시간 석등과 대화하며 촬영을 하였고 사진을 인화하여 전시회에 출품했던 인연도 있다. 고전미나 세월의 흔적이 없었다면 촬영조차 하지 않았을 게다. 웅장하지는 않았어도 한국의 전통적인 미美와 수백 년 세월을 비바람을 맞으며 감내하며 왔다는 사실에 더 정(情)이 갔고 고귀한 품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존경하는 미덕(美德)이 많이 줄어들었다. 뭐든지 새롭고 빠르게 반응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이 든 어른들을 꼰대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세상이 변하면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어 살아야 하겠지만 늙고 지친 몸이 어디 젊은이처럼 빠르겠는가. 그렇다고 모두 폐물(廢物)은 아니다. 어른들이 살아오면서 몸으로 습득하고 익힌 노하우는 삶의 지혜가 녹아든 소중한 경험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젊은이들보다 쉽게 대처하고 해결한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힘만으로 할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내쳐서는 안 된다.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건축물이나 문화유적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새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나.세계인들이 인정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봉정사에 있다. 그 속에 수줍은 아낙네처럼 요사채 뒤편 끝자락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야 나타나는 영산암은 우리에게 보물처럼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대를 이어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영산암 툇마루에 쏟아지는 맑은 햇살의 눈부심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고 배려이다. 내려가는 길, 소담스럽게 피어난 수국의 풍요로움이 달콤한 향에 실려 달려온다. 머릿속도 개운해진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금오신화의 산실을 찾아서’

장려상 황영선금오신화의 산실 용장사지를 찾아가는 길이다.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 용장 계곡으로 흐르는 낮은 물소리가 글 읽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길이 은적골로 가는 길임을 알려주듯 길의 초입에 김시습이 은거하며 쓴 시가 발걸음을 붙든다.시대와의 불화를 글로 쓰며 은둔과 방랑을 선택한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독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가 이곳에서 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용장골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가는 바람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으라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앉았는데깰 줄을 모르는구나 억새 처마 밑에서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설잠 김시습)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지조를 지키며 은둔의 길을 걸어간 고독했던 옛 시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길이다. 물소리는 돌돌돌 흘러 밖으로 길을 내는데, 뭇 꽃과 봄빛을 누리지 않고 세간의 불의에 등을 돌린 채 홀로 지조를 지키려 했던 매월당의 향기를 찾아간다.경주 남산은 가는 곳마다 돌부처가 말을 건다. 이곳은 골짜기 이름조차 절골, 열반골이다. 이 길을 곧장 걸어가면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김시습이 승려가 되어 찾아든 은적골로 들어서면 바위 속에 집을 짓고 웃고 있는 부처를 만날 수가 있다. 김시습의 삶의 궤적은 신라 말 전국을 유랑하며 수많은 글을 남긴 비운의 천재 최치원을 떠올리게 한다.경주 내남 용장골로 들어서서 풀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을 놓치지 않게 설잠교가 나온다. 설잠은 김시습의 법명이다. 골짜기에서 올려다보면 산정 높이 산을 기단으로 한 용장사 3층 석탑이 아득하게 보인다. 아! 하고 탄성이 새어 나오게 만드는 산과 한 몸이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그 석탑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용장골을 벗어나 계곡을 건너 은적골로 향한다.골짜기를 따라 휘적휘적 걷노라면 집에서 한 짐 지고 나온 무겁던 상념들이 사라지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듯 생각이 맑아진다. 이 기슭 어디엔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듯 깨어진 돌절구가 보인다. 숨이 살짝 가빠질 무렵 대숲에 둘러싸인 공터가 나온다. 매월당이 은거하며 우리나라 최초 소설 금오신화를 썼다는 바로 그곳이다.그가 머물던 암자도 사라지고 절도 사라진 빈터에 무슨 인연으로 와 이렇듯 서성이는 것일까? 시대와의 불화를 글로 풀어내었던 고독한 시인이자 소설가. 대숲을 둘러봐도 은적암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암자를 앉히기 위해 쌓았던 축대와 무너진 석탑들이 골짜기에 나뒹군다. 폐허에 불을 밝히듯 양지바른 한쪽에 달맞이꽃이 피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그는 이 적막함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어둠을 갈아 글을 썼으리라. 우리나라 최초의 기전체 한문 소설 금오신화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무엇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내면에 불을 밝히며 글을 쓰게 하였을까? 전국을 떠돌며 은둔의 길을 걸었던 매월당이 이곳에 6년여 머물며 금오신화를 썼으니, 방랑자도 발을 멈추게 하는 매력이 이 은적골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은근히 이어지는 오르막 산길이 때론 숨 가쁘고, 좌우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길만 보며 걸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내내 오르막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시야를 확 틔우며 쉬어가라는 듯 반석이 나오고, 먼 곳을 내다보며 살라는 듯이 하늘이 숨통을 틔워준다. 건너 고위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능선이 눈앞에 다가선다.은적골을 올라서면 맷돌을 쌓아 올린 듯한 삼륜대좌 위에 앉은 석조여래와 바위에 은거한 마애여래불이 나온다. 신라 고승 대현 스님이 염불을 하며 탑을 돌면, 석불도 고승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전하는 그 여래불이다. 그러나 얼굴이 사라지고 없다. 그 옆 바위 속에 은거한 여래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남아있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고 손을 내밀어 위로해줄 것만 같다. 지워질 듯 희미한 바윗길을 따라 오르면 아래쪽에서 우러러보았던 삼층석탑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김시습은 경주의 유적을 돌아보며 흥망성쇠는 끝없이 반복되는 법이며, 옛일과 지금 일로 미래를 추론한다는 의미깊은 말을 남겼다. 무너진 담에 봄비가 내려 풀이 무성한 그곳에 나그네의 한이 머문다고 했으니, 매월당이 경주 용장사지로 찾아든 까닭을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는 이곳에서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처럼 지조를 지키며 은둔의 세월을 소설을 쓰고 시를 지으며 견뎠다.그는 유독 매화를 사랑했다. 뜰에 매화를 심고 당호를 매월당이라고 지었으며, 글을 쓸 때도 매월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는 매화를 보며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연 속에 피어나는 매화에 이끌려 무심의 경지에 가 닿고 싶어 하던 그. 세한의 시절을 견디며 매화꽃 향기 같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을 집필했다.매화는 차가운 겨울을 이겨 내는 고결하고도 지조를 지키는 고독한 꽃이다. 세한은 올바른 이념이 실현되지 못하는 시대를 상징한다. 세한에 홀로 피어난 매화는 곧 지조를 지키는 고결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뜻하니, 매월당은 지조를 지키며 은둔한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매화에 투영하고 위로받았음이 분명하다.은적골에 눈이 내리면 사방은 적막강산이 되고, 찾아드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불을 보며 찾아든 산짐승을 서로 측은하게 바라보며 외로움을 나눴을 은자! 전국 명산대찰을 돌며 방랑과 은둔의 길 곳곳에서 글을 써서 남겼다. 냉철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에 등을 돌린 불꽃 같은 성정의 그.탈출구를 찾듯 미친 듯이 시를 읊었고, 누군가 읽어주는 시를 들으며 울음 우는 눈물 많은 남자였다. 단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사흘간 통곡한 뒤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불가에 입문해 승복을 입고 전국을 떠돌았던 김시습. 지조도 절개도 없이 꺾이는 변절자들을 보며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고 세상에 등을 돌리고 은둔의 길을 걸었던 그는 시인이요, 소설가요, 고독한 선각자였다.산정의 흰 눈처럼 깨끗하지만 고독했던 사람 설잠(雪岑)! 그는 이곳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인생무상을 글로 쓰며 폐허가 된 자신을 수습하였는지도 모른다. 구름처럼 전국을 떠돌며 방랑을 하던 조선 시대 생육신 김시습. 그가 금오신화를 집필했던 산실 용장사지에서 차 한잔을 올린다.매화처럼 절개를 지키며 달처럼 은둔의 길을 걸어간 매월당. 그가 고뇌에 찬 얼굴로 굴갓을 눌러쓰고 산길을 걸어가고 있다. 뻥 뚫린 가슴의 구멍에 손을 얹으면 대숲이 대금 소리를 낼 것 같은 적막이다. 그가 머물던 금오산 기슭 은적골에 대숲 그림자가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사슴이 와 창가에 머물다 갔다는 절터에 바람이 불고 있다.나뭇잎에 시를 써서 강물에 띄워 보낸 시는 어디쯤 가 닿았을까? 그가 불태운 수많은 시는 불씨가 되어 수많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밭둑가의 쑥대처럼 떠돌아도 세상 살아가는 길이 험하고 위태로워 꽃떨기 냄새나 맡으며 말없이 지내겠다던 그는 글 속에 할 말을 쏟아 부었는지 모른다. 거름통 같은 세상을 벗어나 글 속에 아름다운 산천을 담고, 고통에 신음하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남겼다.그가 머물렀던 매월당은 빈 원고지처럼 남아있다. 절은 사라지고 없지만, 아직도 남은 이야기가 많다는 듯이 용장사지 곳곳에 깨어진 돌탑들이 뒹군다. 흩어진 탑신을 찾아 다시 일으켜 세우듯 용장사지 금오신화의 산실을 찾아 걸었다. 종교를 아우르는 사유와 빼어난 문장가였던 그가 말을 걸어오고 있다. 신화를 꿈꾸듯 금오신화를 썼던 대숲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바람결에 사운댄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수필대전 ‘시할머니 노래’

장려상 이홍선 문패 밑에는 ‘유공자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시할머니는 사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먼산바라기를 하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말리는 사람도 물어보는 사람도 없지만 늘 그렇게 앉아 있었다. 가늘게 들리는 그 소리는 염불 같기도, 때로는 구슬픈 노랫가락 같기도 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칠곡호국평화기념관 중앙 홀의 큰 철모 조형물을 마주한다. 6월이면 전쟁의 상흔을 더듬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총탄이 관통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표면에는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와 전쟁 지휘관의 이름이 적혀있다. 6·25전쟁 당시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전투에서 산화해간 용사들을 기리는 곳이다. 칠곡군청의 현직 때 내 업무와 연관된 일로 자주 찾곤 했는데 오늘은 문우들과 함께다.철모를 에워 돌며 55일간의 낙동강 전사를 읽는다. 낙동강 방어선, 55일, 시산혈하, 다부동 전투, 정일권 참모총장, 워커 중장, 유학산 전투, 왜관철교 폭파, 융단 폭격, 백선엽 준장, 자고산 전투, 워커 라인, 게이 소장, 인천상륙작전, 328고지 전투, 노무대, 볼링앨리, 수암산 전투, 맥아더 장군, 약목나루 전투의 20개의 이야기가 돋을새김으로 6월의 추모객들을 붙든다. 선생님을 따라나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재잘거림이 무명용사를 흔들어 깨우는 초혼가처럼 울리고, 수많은 시할머니의 아픈 노랫가락이 환청처럼 따라붙는다.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은 전투는 치열했다. 무수한 공방전 끝에 전세를 역전시키며 승기를 잡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연결되어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되돌려 놓은 역사적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오늘도 이어진다.시할머니의 21살 맏아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자원입대했다. 피난 갔다 돌아와 때늦은 모심기를 하는 들판으로 하얀 보자기에 싸인 조그만 상자를 들고 한 병사가 찾아왔다.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아들을 만난 시할머니는 혼절하고 말았다. 입대한 지 채 1개월도 되지 않아 포항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23육군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짧은 삶을 놓았다.19살이던 둘째도 피난길에 전쟁터로 붙들려 간 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따금 전쟁 때의 일을 녹음기처럼 들려주는 지금의 시아버지다. 길고 긴 그 이야기에는 늘 시할머니의 아픈 노랫가락 읊조림이 꼭지에 있었다.시아버지는 대구농림학교에서 7일간 군사훈련만 마치고 신령 갑령재에 배치되었다. 15일쯤 되었을 때 인민군의 공격 소식이 전해졌다. 산 위에서 보초 근무를 서는데 왜관 쪽에서 비행기가 하늘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폭격 소리가 들리고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고 한다. 낙동강 전투의 서막이었다.그 후 시아버지는 전쟁의 한가운데로 밀려들어 갔다. 인천상륙작전의 승전보가 전해오자 6사단 2,000여 명 장병의 한 사람으로 트럭을 타고 북진했다.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20일간 계속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초순에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했다. 강 건너 모래사장이 조용하고 평화스럽기까지 해 통일을 이루는 줄 알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3일 만에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포위되었다. 총알이 쏟아지는, 겹겹이 싸인 포위망을 28일 만에 벗어났다. 살아남은 사람은 150명 중대원 중에 시아버지와 파편에 한쪽 팔이 떨어진, 남해가 고향인 병사 두 사람뿐이었다. 민간복으로 군번만 몸속에 숨긴 채 거지행세로 얻어먹으며 남쪽으로 내려왔다.전시관의 녹슨 무기와 전리품과 전쟁 기록영화가 아리다. 흑백 영상의 잔영 뒤로 시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흐르고, 문득 오늘 휴전선의 집총한 병사들이 떠오른다. 베트남 미북 회담 결렬 후에 혼미해진 남북 관계에 대한 의견이 좌우로 갈려 온통 시끄럽다. 정치는 밀려나고 거리에선 깃발과 삿대질로 상대를 몰아세기만 하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 강둑 언저리에서 사라진 무명용사의 의미는 무엇이며, 옆 문우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시아버지의 말을 또 찾아 쫓는다. 12월 초에 평양에서 다시 후퇴하다 인민군의 폭격으로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을 다쳤다. 걸을 수가 없으니 낙오병이 되었다. 피난민의 지게에 실려 대동강을 건넜고 서울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수없는 군인들이 죽어 갔고 시체실 칸으로 던져졌다.절단해야 한다고 했던 다리는 대드는 시아버지의 발버둥으로 억지 수술 끝에 깁스하는 걸로 보전했다. 3개월 뒤 걸음도 못 걷는 상태로 복귀하여 부대를 전전했고, 제주도 자동차 학교에서 조교로 근무 중에 결혼했다. 그 전쟁의 와중에도 군수, 면장, 동장의 도장을 받아 시할아버지는 관보를 보내주었다. 둘째도 맏자식 같아질까 후손을 받아두려는 조바심이었고 내 남편이 세상에 나온 인연이었다. 결혼식 다음 날 바로 귀대하여 1955년 1월 제대할 때까지 3년 동안 집에 오지 못했다. 지금도 시아버지의 방에는 참전용사의 옷과 모자와 군번줄이 걸려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기념관 전망대의 앞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 걸린 왜관철교가 바라보인다.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폭파하여 끊어버린 그 다리다. 오늘 전적지의 명소가 된 철교를 건너 오가는 사람들은 강물에 역사의 소리를 들으며 이곳 전시관으로 몰려든다. 6월 현충일을 앞둔 토요일, 망나니처럼 휘둘러대는 북의 도발에 나서지도 못하고, 되레 감싸려는 나랏일의 행방이 아연하다.제대하지 못한, 그때의 무명 병사가 남긴 군번 인식표가 불빛 아래 말없이 누웠다. 남북군사합의서는 정녕 평화의 길이 될 것인가. 자꾸 의뭉스럽다. 굴종과 족쇄의 길 끝에 다시 낙동강 언저리에 말 없는 군번줄을 묻을 날이 되면 어쩔까 싶어진다. 시할머니의 아픈 노래가 오늘 더 크게 울린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수필대전 ‘백상아제’

장려상 이윤희 포탄에 찢겨 휘어진 철골 기둥이 교각의 상판을 아리게 붙들고 있다. 여기저기 스친 탄흔들이 그날의 생채기를 풀어헤치기라도 하는 듯 허공에 노니는 햇살을 튕겨낸다. 솜구름 조각들이 푸른 강물에 빠져 흐르고 오래전 상흔을 잊고자 철교는 연두색으로 화사하게 단장했다.옛 왜관철교다. 6·25 전쟁 때 폭파되어 수많은 피난민이 희생된 애환의 전적지다.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역과 왜관역 사이의 낙동강을 가로지른다. 당시 파죽지세의 북한군 전진을 막아 승리한 이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은 북진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 연유로 ‘호국의 다리’로 부른다.오늘은 하늘이 높기만 한데 그날은 온통 포연으로 자욱했으리라. 내게 전이되는 아릿한 통증을 뿌리치지 못해 송두리째 파묻힌 이곳의 잔상들을 꺼내 보려고 보챈다.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다리의 철골이 바람 소리를 낸다. 그 아래로 어우렁더우렁 출렁이는 강물은 휩쓸려간 수많은 넋의 아우성을 가둔 채 말이 없다.백상아제를 생각했다. 피붙이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마을에서는 이름 대신 성씨 뒤에‘상’자를 붙여 불렀다. 농사일이 많은 옆집 일손이 되어 평생을 보냈다. 우리 집 뒤편 작은 땅뙈기에 일자형 집 한 채를 지어 기거하게 했다. 동녘이 허옇게 밝아질 때면 가장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백상이었다. 옆집 식솔이지만 우리 집 식구와도 친했다. 부침개 한 장을 부쳐도 백상을 불러 막걸리 한 사발 건넸던 일들이 떠오른다. 한여름에도 한쪽 다리는 천으로 칭칭 감고 있었다. 6·25 전쟁 때 총탄에 맞아 입은 상처였다. 진물이 배어나며 검게 변한 부위에 아버지와 할머니가 약을 발라주는 걸 자주 보았다. 어릴 때였지만 아저씨를 볼 때마다 짠했다. 가족은 이북에 두고 혼자 왔다. 전쟁포로였다. 가끔 함께 남으로 넘어온 사람들을 만나러 외지에 다녀오곤 했다. 입은 옷이라고는 물 빠진 옅은 국방색 작업복에다 정수리 부분이 눌려 후줄근한 챙모자 하나가 모두였다. 상처에 물기가 젖어들까 봐 늘 장화를 신고 다녔다.우리가 도회지로 나온 뒤에도 가끔 안부를 물어왔다. 결혼식 날, 신부대기실에 아제가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들어왔다. “아이고 윤희가 요렇게 커서 시집가는구나, 참 이쁘다. 잘살아라. 알았제.” 많은 지인이 들락거렸지만,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며 좋아하던 백상아제의 모습이 가장 오래 남는다. 아제도 북에 딸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애잔한 마음이 일었다. 폭이 큰 웨딩드레스로 치장하고 손에 부케를 든 나는 불쌍한 백상아제의 손을 잡아 드리지도 못했다.초여름 산들바람이 내리쬐는 햇살을 흔든다. 호국의 다리를 걸으며 강을 훑어가는 바람을 마신다.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다. 아제도 인민군 대열에서 이 다리를 넘으려 했을까.다리 북쪽 작은 공원에서 폭파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안내판을 마주한다. 참혹한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군의 고뇌를 읽는다. 아물지 않는 동족상잔의 상처에 다시 통증이 아려온다. 지금 호국의 다리란 이름 앞에 관광객이 몰려들지만, 또 끊어질 일을 우리가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머리가 무겁기만 하다.다리를 되돌아 건너 산기슭 언덕에 올랐다. 호국평화기념관이 우람하게 자리 잡았다. 옥상엔 하늘을 덮을 듯 장대한 태극기가 휘날린다. 그날 낙동강 전선의 승전보를 알리는 산화한 영령들의 몸짓처럼 펄럭댄다. 내부엔 전쟁의 참상이 빚어낸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가슴을 울리며 지금의 살아가는 이유를 곱씹어보라고 한다. 총탄이 관통한 구멍 난 철모 앞에 멈췄다. 고개가 숙여진다. 쓰러져간 영령들 앞에 때늦은 애도를 바친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무명용사의 절규가 들린다. 선생님 손에 끌려 기념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꼬마들의 눈빛이 초롱인다. 이 언덕을 지켜낸 용사들의 대를 이을 아이들이다.눈 아래 낙동강 전망을 눈조리개로 죽 당겨 들인다. 왜관철교, 칠곡보, 양안 둔덕의 생태 공원, 관허산성 둘레길, 강변의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푸르게 이어졌다. 칠곡군이 전쟁의 모진 역사를 붙잡아두려 팔을 걷어붙였다. 이 전적지 일대에 평화 공원을 조성하여‘호국의 메카’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지나치기만 했던 왜관철교의 풍경이 6월의 한가운데서야 찾아온 나의 무심함에 매질을 한다.멀리 다리를 되돌아본다. 강은 은빛 물비늘을 만들며 유유히 흘러내린다. 강물에 사라진 사람들은 말이 없다, 산자의 애틋함만 강바람을 탄다. 백상아제의 눈물을 이제야 제대로 가슴에 담는다. 본래 아군 적군이 어디 있었겠는가. 반도의 같은 사람들이 나라 만드는 생각이 달라 벌인 싸움이었다. 힘센 객군들에 휘둘린 역사의 아픔이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