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수필대전, 돌의 포옹

입선 조미정 바윗돌들이 허공에 넙죽 엎드려 있다. 뼈마디 툭툭 불거진 장대석들이 육중한 등을 구부려 오체투지의 절을 하는 것 같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팔다리도 없이 몸통만 남은 돌들이 두 가닥으로 다닥다닥 엮여서는 서로의 몸을 잇대었다. 마음을 나누는 듯, 어깨를 기댄 듯 타래를 이룬 돌들의 둥근 맞물림이 포옹처럼 따스하다.숙종 39년(1713)에 축조된 청도 석빙고를 보러 갔다가 만난 네 개의 홍예다. 돌을 틀어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다리가 가로 15미터, 세로 5미터의 네모반듯한 빙실 위에 둥실 떠 있다. 삼백 년 남짓한 빙고도 모진 세월엔 장사 없었나 보다. 숱 많던 봉토는 유실되고 지붕을 덮었던 판석들도 대부분 사라져 돌방무덤 같은 속이 휑하니 들여다보인다. 골격은 그대로다. 홍예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걸까. 못을 박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중력을 과감히 거스르는 불가사의한 비밀을 범부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열쇠를 푸는 실마리는 돌의 생김새에 있었다. 사다리꼴을 엎어 놓은 듯 아랫변이 윗변보다 좁게 생긴 홍예석을 양쪽에서 차곡차곡 쌓다 보면 단단하기로 소문 난 쑥돌도 꽃봉오리처럼 모양이 오므려진다. 좌우의 비례가 딱딱 맞다 싶더니 갑자기 맨 꼭대기 자리 하나가 텅 비며 성마른 가슴을 만지고 간다. 놓칠세라 최후의 홍예석을 쐐기처럼 박아 넣는다. 홍예를 완성하는 그 마지막 돌을 석공들은 특별히 이맛돌이라고 불렀다.어깨가 유달리 넓어 보이는 이맛돌은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중심에 딱 서서 다른 돌들을 단단히 잡아주는 지지대 역할을 자처한다. 사방에서 누르는 힘을 이쪽저쪽으로 분산시킬 뿐 아니라 다른 홍예석을 뻑뻑할 정도로 끌어안는다. 떠오르거나 내려가는 이탈을 막기 위해서다. 만약 이맛돌이 없었다면 돌들은 서로 샅바를 잡고 힘자랑만 실컷 하다가 안다리걸기 한방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어릴 적 우리 집에는 원석이 여럿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박힌 책을 표지가 너덜해질 때까지 읽어 대고,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할 때도 우르르 함께 몰려다녔다. 오며 가며 인사성도 밝으니 동네 사람들은 될성부른 떡잎이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도 훗날 우리가 대들보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흙다짐 위에 넙데데한 널돌을 깔아 바닥을 만들고, 막돌을 빼곡히 쌓아 벽을 세워서 바윗돌들의 든든한 요람이 되어주었다.돌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경영학을 전공한 오빠가 저만의 사업을 시작한 후부터다. 부지를 매입하고 공장을 짓기 위해 제 살던 집도 팔았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던지 친정집까지 담보하려 들자 어머니의 근심이 깊어졌다. 오빠는 선뜻 손 내밀어주지 않은 부모님이 몹시 서운했던 모양이다. 어렵사리 사업이 자리 잡은 후로도 데면데면 잘 웃지 않았다.석빙고는 홍예를 쌓아 천장을 둥글게 만든 후 진흙과 잔디로 두툼한 봉분을 얹는다. 햇볕 차단 효과를 넘어서 청도천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을 입구 아래쪽으로, 더운 공기는 위쪽으로 자연스레 흘려보내기 위해서다. 홍예보 사이사이의 움푹한 공간에 가둬진 공기는 웅성거리기 무섭게 천장에 뚫린 환기구로 쑥 빠져나갔다. 덕분에 빙실 안은 염천 삼복중에도 적정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세상만사 공기 흐르듯 소통했어야 했는데 요령도 대화도 없었던 그 무렵의 우리들은 사방이 꽉 막힌 직육면체 상자나 다름없었다. 나는 나대로 장남이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싶어 퉁퉁거렸다. 섭섭함이 마음속 동굴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한 세월은 무관심을 낳고 그 무관심은 다시 몽우리 맺힌 원망으로 순환한다. 그 사이 지난날 그토록 투명하고 단단했던 띠앗은 진창으로 녹아 질척거리고 있었다.시 그르고 때늦어, 우리들이 덥석 손 내밀며 마주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깊은 병에 든 후였다. 빙고의 바닥이 경사진 이유는 녹은 얼음물을 수로 밖으로 즉시 흘려보내기 위해서다. 어머니의 빙고는 그러질 못했다. 행여 자식들이 책잡힐까 혼자 시름시름 가슴 앓느라 변변한 배출구 하나 갖지 못했다. 마침내 얼음 저장고로서의 기능이 거의 멈추다시피 한 후에야 화들짝 놀란 바윗돌들은 반쯤 무너진 빙고 곁에 앉아 뻐근한 가슴팍만 두드렸다.언젠가부터 돌과 돌들이 깍지를 끼기 시작했다. 돌들을 가장 먼저 아우른 사람은 다름 아닌 오빠였다. 팔백 리 떨어진 길도 마다치 않고 주말마다 내려와 어머니 얼굴을 정성스레 어루만지더니 돌아가신 후에는 남은 가족들까지 토닥거렸다. 대소사는 물론 동생들의 힘든 일도 발 벗고 나서서 해결했으며, 때로는 왁자그르르 열여섯 대가족의 모임이나 여행을 주선했다. 기댈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기자 흩어져 있던 돌들도 하나둘 한자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 정이 소록소록 되살아나며 웃음꽃은 활짝 피어났다.홍예석이 우리 형제들이라면 이맛돌은 오빠이다. 그간의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미안하다, 고맙다”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으니 우리가 모르는 동안 크고 아름다운 홍예 하나 만들어지고 있었다. 세느강의 다리나 로마의 콜로세움 못지않은 아름다움에는 직선을 고집하지 않은 휘어짐과 더불어 무조건적인 껴안음도 한몫했으리라. 꼭 가슴 부분을 포개야만 포옹이랴. 어깨든 등이든 단지 끌어안는 행위만으로도 각자가 지닌 능력 이상의 견고함을 발휘하는 홍예를 보면 앞으로 또 어떤 고난과 아픔이 닥친다 해도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항상 초승달 같은 모습으로 웃고 있는 홍예는 결속과 포용의 상징 아닐까. 숭례문이나 불국사의 백운교처럼 돌을 아우르거나 하중을 감당해야 하는 곳엔 언제나 둥근 껴안음이 있었다. 산자락을 뚫는 터널이나 몸을 지탱하는 발의 뼈도 알고 보면 반원의 아치다. 모으고, 끌어안고, 버티는 포옹의 힘! 거기에 살포시 곁들인 미소까지 돌의 숨은 매력은 한정 없다 싶다.살을 붙이고 뼈 구조를 가늠하며 수백 년 전의 풍경을 떠올려 본다. 장빙제를 지낸 울력꾼들이 강에서 뜬 얼음을 소달구지에 가득 싣고 석빙고로 향하나 보다. 엿가락 같은 운빙 행렬이 천변을 따라 출렁이고 있다. 얼음을 잔뜩 먹은 빙고는 이내 배가 부를 테지. 사람 사는 세상 대척점에 서기보다 끌어안음이 중요하다고 삶의 정수 하나 깨달은 내 얼굴에도 무지개 닮은 미소가 방실 떠오른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천년지애

입선 이장희 무덤.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다 묻고 간다고 해서 무덤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산 위의 웅장한 고분도 그 속에 품고 있는 사연은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꽃내음 향긋한 숲길, 주위가 고즈넉하다. 녹색 이끼가 피어있는 돌계단에서 천년의 흔적이 묻어난다. 십여 분 걸었을까, 잡풀이 무성한 고분이 발길을 가로막는다. 어느 왕조의 서글픈 유물처럼. 주위에는 두꺼운 갑옷을 입은 아름드리 굴참나무와 소나무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마치 적의 위협으로부터 주군을 지켜주려는 호위무사들처럼.6세기경에 축조된 가야지역에서의 유일한 벽화고분. 고령 고아동벽화고분(高衙洞壁畫古墳)(사적 제165호)이 대가야읍 남쪽, 인적 드문 나지막한 산등성이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주산(主山)의 높은 능선 위에서 천하를 호령하듯 내려다보고 있는 지산동 고분과는 1㎞ 정도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어느 누구의 침입도 받지 않으려는 듯 입구는 녹색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철문 옆에서 마치 수문장처럼 부동자세로 서있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옛 대가야 무덤인 돌덧널무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아동벽화고분은 굴식 돌방무덤이다. 합장(合葬)을 하기 위해 만든 무덤으로 요즘 납골묘와 닮았다.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을 안치할 수 있는 방을 여러 개 만들고, 그 위에 천장돌을 얹고 흙을 덮어 봉분을 올린 것이다. 천장은 돌이 서로 맞물리게 하여 위로 갈수록 점점 좁혀지면서 활과 같은 곡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바깥의 뜨거운 열이나 습기가 침투하여 내부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얀 석회를 벽과 천장에 두껍게 칠했다.고분 속에 연도를 만들어 이승과 저승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삶과 죽음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죽어서도 인간 세상과 교류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우리 고유의 정신세계인 영통(靈通)과 혼교(魂交) 사상을 엿볼 수 있다.벽과 천장에는 연꽃을 그려 놓았다. 고분 주인의 내세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벽에 그려놓은 연꽃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지금은 널방 천장에 1개의 연꽃 그림이, 널길 천장에 11개의 연꽃 그림만이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널방 동쪽에는 아내의 관, 서쪽에는 남편의 관이 사이좋게 나란히 놓여 있다. 부부가 누워있는 남북으로 수로(水路)도 파 놓았다. 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백제 무령왕릉과 흡사 닮은꼴이다.남아있는 유물은 거의 없다. 수차례 도굴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청동과 쇠못, 인골과 토기 조각들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고분의 하단을 두르는 돌과 봉토 사이에서 대가야 토기가 출토되었지만, 이 토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봉토할 때 흙에 섞여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고분 주인은 대체 누구일까. 왜 백제 양식의 고분이 대가야 심장부에 자리 잡고 있을까.크기와 규모로 봐서는 왕족의 고분일 것 같다. 만약에 고분 주인이 대가야 왕족이 아니라면, 대가야와 군사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인질로 잡혀 온 백제 왕족의 무덤은 아닐까. 젊은 나이에 인질로 잡혀 온 그는 대가야 왕족 여인과 정략결혼까지 했지만, 그는 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살았을 것이다.머나먼 이국땅에서 오직 믿고 의지할 사람은 아내밖에 더 있었겠는가. 늘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이는 이곳에서 그의 몸과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고향이 그리울 때는 따뜻한 어머니 품이 되어주고, 외로움에 몸부림 칠 때에는 곁에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 아내.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때는 생사를 함께한 동지였던 그녀가 있어 삶에 얼마나 위로가 되고 든든한 방패가 되었겠는가.당신 옆에 아내의 쉼터를 마련해 두었다. 쉼터에는 온통 연화문(蓮花紋)으로 치장했다. 간난의 세월을 함께한 아내와 극락왕생을 하기 위해서 일게다. 쉼터 옆에는 남북으로 수로도 파 놓았다. 수로에 물이 차면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영혼이라도 그리운 고국인 백제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가서 아내와 이제라도 고통 없는 삶을 살고 싶었을 게다.고아동벽화고분은 이제 새 삶을 시작하는 부부의 둥지이자 연화장 세계였다.‘부부는 사랑의 주름살 속에 산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밭고랑같이 깊게 파인 주름살 속에는 평생을 함께한 부부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평생의 반려자라 하는가 보다. 부부의 연을 지탱해 준 힘은 그 간난의 세월이 주름살 속에 사랑으로 온유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고분 옆에 누워본다. 이름 모를 부부의 천년의 사랑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려오는 것 같다. 한 쌍의 뭉게구름이 하트를 그리고 있다.*‘천년지애’는 SBS TV의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제목에서 인용.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두 얼굴

입선 이순혜 얼굴은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표정은 수시로 바뀐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온화해지고 흉측한 것을 보면 일그러진다. 화가 치밀면 미간에 날이 서고 부끄러우면 볼이 발개진다. 누군가를 마주 본다는 것은 마음을 맞대는 일이다.경주 남산에는 많은 얼굴이 있다. 감실부처, 석불입상, 탑골 마애불상군,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마애관음보살 등 바위마다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형상은 같은 것 같지만 가만히 비교해보면 다 다르다. 얼굴에서 손의 위치까지 나름의 의미를 품고 있는데, 오늘은 아직 못 본 부처님을 찾아 비탈길을 오른다.열암 골짜기 7부 능선쯤 축대에 오르자, 시커먼 그늘막이 가로막는다. 얼굴을 바투 당기니 그 안에 커다란 너럭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 좀 더 자세히 보려 허리를 숙이고 다가갔다. 아랫면에 얼굴이 있었다. 코가 땅에 닿을 듯 말 듯 5cm 차이로 땅을 바라보고 있다. 말로만 듣던 엎어진 부처님이다.한눈에 보기에도 부처님은 잘 생겼다. 오뚝하게 솟은 코와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는 타원형 얼굴을 잘 받쳐준다.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에 후덕한 성정이 도드라져 보인다.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목주름(三道)이 보여준다. 가슴이 당당한 어깨는 그 품이 한 아름이다. 풍화가 비켜 간 얼굴은 너무도 말짱해서 오히려 신비롭게 느껴진다.이렇게 수려한 부처님이면 오롯이 서서 세상을 향해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엎어져 천년이 넘도록 땅을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이 골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언제, 누가 또 어떻게 발견했을까.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지만, 문제는 바로 풀리지 않는다.저만치 언덕 위에 석불좌상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멀리서 보던 모습과 다르다. 여러 조각을 잇고 붙여 원형을 복원했으나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석불좌상은 목이 잘리고 광배 자락이 동강이 났다. 새는 어깨에 앉았다가 똥이나 싸고 가고 비는 깨끗이 씻어줄 것이다. 그런데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누군가의 소행이 틀림없다. 부처님의 이지러진 입을 보면서 나도 안타까워 얼굴이 일그러지고 만다.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 매년 이곳을 찾는 등산객이 무엇에 홀린 듯 앉아 있다가 동강 난 석불좌상의 불두를 발견했다. 그래서 당국에 신고했고 문화재 담당관이 근처를 돌며 깨진 부처님의 잔해를 찾았다.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쉴 겸 숨을 고르는데 그 아래 빈 곳이 있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가지런히 모은 손이 보였다고 한다. 엎어진 부처님은 그렇게 발견되었다.세상의 얼굴이 험상궂을 때였다. 못 배우고 힘없는 백성은 귀족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일하고도 제대로 품삯을 셈하지 못해 허방에 농사를 짓는 날이 많았다. 가난은 가난을 물고 늘어지고 배부른 귀족의 배는 나날이 불러갔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불공정한 세상을 나무라지 않았다. 분노에 찬 백성들은 들고일어나 무엇이든 두드려 부수었다.‘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고 그 소리가 성난 우렛소리처럼 커서 말이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조선명종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한반도에도 지진이 일어났다. 어느 날 땅이 흔들렸다. 기왓장이 떨어지고 담장이 무너졌다. 천재지변은 곧 하늘이 내리는 벌이다. 여진으로 땅이 밤낮없이 몸을 떨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인간 세상이 험악해지자 분노를 참지 못한 하늘이 세상을 흔들어버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부처님도 지진으로 엎어졌다고 추정된다. 엎어진 김에 쉰다고 오늘까지 쉬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꼴 보기 싫은 세상인데 일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외면한 부처는 천년 넘도록 얼굴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다. 두 눈 부릅뜨고 나무라던 석불좌상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인간의 두 얼굴이 만들어낸 아이러니다.세상에는 숱한 얼굴이 있다. 요람에서 나비잠을 자는 아이의 얼굴,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간청하는 아이의 얼굴, 그런 손자를 바라보는 백발이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 단번에 일확천금을 노리며 돈을 좇는 얼굴, 분노가 철철 넘치는 얼굴, 무엇이라도 잡아 삼킬 것 같은 얼굴, 모두 인간의 얼굴이며 내 안에도 이러한 얼굴이 잠재해 있다.이지러진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석불좌상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것이 바로 너희 세상의 얼굴이라고 꾸짖는 것일까. 아니면 너희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면 나 하나쯤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다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일까. 문득, 어리석은 백성을 용서하시라 무릎 꿇고 싶다.내려오는 길에 엎어진 부처님을 다시 본다. 부처님이 일어나 만신창이가 된 부처님을 보면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이제는 일어나세요. 청하자니 세상의 얼굴이 부끄럽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개목(開目)

입선 윤미영 안동 서후면의 아침은 황금빛 바다다. 순한 햇살이 들녘을 비추면 기지개를 켠다. 사람들은 추수 날을 손꼽으며 숱한 고비에 허리가 굽었다. 그날까지 무탈하기를 비손한다. 봄 파종 이후 잠을 설치며 애타게 기다림은 정점을 향한 안간힘이다. 풍요로운 들녘을 두리번거리는 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은 고요하다.두 갈래의 갈림길 위에 섰다. 왼쪽은 세계문화유산인 봉정사, 오른쪽은 개목사開目寺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는 차도 걸음도 잠시 멎지만 머뭇거리지 않는다. 마음은 K 작가의 라는 글향을 따라 앞서가고 있다. 길은 끝없이 유연한 가지를 뻗어서 열어준다. 투박한 발자국 소리에 먹이 찾던 어미 새가 놀랐는지 푸드덕 날아오른다.갈빛의 숲은 깊어진다. 산기슭을 돌 때마다 절정을 맞은 붉은 단풍의 자태가 고매하다. 날갯짓에 는개비 낙엽비가 흩날리며 몸을 떤다. 나뭇잎들이 무대에서 내려올 시간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때를 맞추어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사뿐하다. 미련과 집착도 이미 떨쳤다. 몸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소란스레 물을 필요가 없다. 발끝을 곧추세워서 수없이 딛고 차올랐을 봄의 비상과 여름내 쏟았던 푸른 열정을 기억한다. 낙엽이 피멍 흥건히 배인 발을 닮았다. 자연 속에서는 제각기 맡은 배역을 말없이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가을에는 길을 잃고 헤매어도 좋겠다. 몸을 쭉 늘이고 낙엽수 사이를 오가면 나도 숲 사람이 되려나. 낙엽의 구수한 향기에 눈과 귀가 맑아진다. 여태 개목사의 용마루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툇마루의 향내는 언제쯤 맡을 수 있을까. 귀한 것일수록 그리운 것일수록 마음의 애를 태운다는 말이 맞다. 이정표가 없는 길이다. 얼마나 남았는지 더 지치기 전에 오르막 그루터기에서 쉬어간다.마을이 저만치 엎드려 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래전 극심한 눈병이 역병처럼 돌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눈을 잃었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별빛만 반짝이는 마을에 한숨소리, 허리 굽혀 길 찾는 소리에 귀를 세운다. 갑자기 만난 갈림길에선 여지없이 길을 잃고 넘어지고 아우성이다. 눈먼 자들의 동네로 변해갔다. 마을의 고샅마다 생사의 소릿길이 생겼다. 변주곡이었다.지팡이가 눈이다. 순이 아버지는 딸과 살면서 목수 일을 했다. 심성이 곧았던 그는 나무 지팡이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쥐어주었다. 하지만 그도 눈병을 얻으면서 딸의 손을 놓았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순이의 울음이 메아리처럼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눈병은 애간장 녹이는 재앙이었고 겨울은 길고 추웠다. 신음은 담을 넘고 넘어 산속의 절 앞에서 멎었다. 개목開目사 앞마당은 변곡점이다. 노승의 기도로 눈병은 시나브로 잦아들었고 서후면의 하늘은 다시 맑아졌다. 태풍처럼 마을을 휩쓸고 간 아픔도 시간이 약이다. 사람들도 굽은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저곳이다! 속설의 진원지다. 개목사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소박하고 고적하다. 바람 한 점 없는 천등산 아래 아늑한 은신처처럼 느껴진다. 해바라기는 무거운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앞마당의 은행나무는 몇백을 훌쩍 넘긴 듯하다. 꼿꼿한 허리는 세월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성정을 보이는가 싶다. 객을 보고 쿰쿰한 냄새를 풍기지만 던적스럽지 않은 인정스러움이다.개목사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조선 세조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은 온돌을 놓아 조선 전기 건축으로는 보기 드문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원통전 안은 누구라도 마음자리 쉬어갈 수 있게 온기가 돈다.절간은 일주문도 해탈문도 없다. 문지방으로 햇살만 넘나든다. 글 속의 그날도, 오늘도 주지스님은 툇마루만 따끈하게 데워두고 출타 중이다. 풍경도 옮아온 듯 서먹하지 않다.툇마루 깊숙이 걸터앉는다. 손 등으로 결을 쓸어보면 할머니댁에 이른다. 할머니는 읍내 장에서 사 온 아기 얼굴만 한 수박을 우물물에 담가 두셨다. 점심을 먹은 후 수박을 반으로 쪼개면 하얀 속살의 단맛은 시원했다. 도시에서 온 손녀에게 주신 푸짐한 간식이었다, 마루는 그때나 지금도 넉넉하고 순박한 정을 나누는 곳이다.은행나무는 구릿한 냄새를 풍기며 객을 졸졸 따라다닌다. 눈길을 주지 않는 객의 어깨 위에 노란 잎을 훅~ 날린다. 옷깃을 당기며 장난치는 짓궂은 아이 같다. 혹시 주지스님이 당부했는지 모른다. 문은 활짝 열어 두고 객이 오면 반갑게 맞고 절간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은행알을 한적한 길섶에 떨어뜨린다. ‘정몽주’의 시비가 있는 옆 마당이다. 선생은 천등산의 변화무쌍한 기운을 입어 십 년간 수행과 학문을 연마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고려에 대한 애국충절을 지키다 죽음을 맞았던 그를 보게 하려고 그런 거였다. 선죽교의 햇살도 오늘처럼 붉고 선연했을까. 그가 주지스님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던 시 한 편이 더욱 쓸쓸해 보인다.은행나무는 하세월 우직하게 버틴다. 숭숭한 둥치의 구멍들은 입동을 앞둔 바람 앞에서 관절마다 쑤실 것이다. 심한 골다증이라도 끙끙 앓는 사람처럼. 문득 ‘은행나무가 개목사를 지키는 큰 스님’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어느 주지스님처럼 삼천 배를 해야 만날 수 있는 위엄을 갖춘 건 아니다. 인정어린 스님이다. 항상 바쁜 작은 스님을 대신해서 문지방을 넘나들며 절간을 살피는 것이 느껴진다.법당 앞 툇마루에 다시 앉았다. 따끈한 툇마루가 불이문不二門이다. 견물생심, 비우고 비워야 한다는 그것마저 욕심이다. 욕심도 소유가 아니던가. 나는 요즘 속살이 갓 차오르는 글심에 욕심이 부푼다. 무거워지는 글눈을 뜨기 위해 개목사를 찾았다. ‘안다고 하여 무엇을 알며 본다고 하여 진정 무엇을 보았는지.’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는 죽비 같은 은행나무 한 알이 발아래 떨어진다. 큰스님의 일침이다.오후의 햇살이 수터에 일렁인다. 물 한 바가지를 들이킨다. 눈을 씻는다. 세상을 보는 눈을 제대로 뜨라는 ‘개목開目’이다. 나는 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걸음질 친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양동 풍경

입선 송시내 여름 한낮, 양동은 정적이 흐른다. 강렬한 햇살이 무색하도록 마을은 숙연한 분위기다.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온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시간은 언제부터 멈추었을까. 낡은 흑백사진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양동 풍경마을 입구에부터 구릉의 언덕배기를 올라가며 자리 잡은 기와집들이 주변의 풍경과 더불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같은 공간이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은 단순히‘좋다’와‘나쁘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울림이 있다. 관가정(보물 제442호)과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 향단(보물 제412호), 무첨당(보물 제411호)까지 사대부의 고택들이 처음 건축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단정하게 서 있다. 담이 나지막한 골목을 걷다 보면 대문이 열리고 열 살 무렵의 댕기를 두른 아씨가 얼굴을 내밀 것만 같다. 키 큰 접시꽃이 호기심 가득한 아씨처럼 담장 밖을 구경한다.아마도 소작인의 집이었을까, 한길 쪽으로 반쯤 열린 나무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끌린 듯 다가가서 문안을 들여다본다. 가르마처럼 정갈하게 가꾼 텃밭과 반질반질하게 손질한 장독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잔디를 심은 조그만 마당을 가운데 두고 기와지붕의 본채와 슬레이트 지붕의 아래채가 얌전하게 앉아있다. 모든 것이 친숙한 풍경이다. 방학이면 찾아가던 외할머니댁이 연상된다. 그 집에서 하루를 묵기로 결정한다.볼이 발그레한 주인 할머니는 열아홉에 영천에서 시집와서 육십여 년을 양동에서만 살고 있다고 하신다. ‘평생을 양동에서만 사셨으면 세월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지 않았을까?’나는 알고 있다. 우물 안의 세상은 고요해서 작은 바람에도 오히려 더 크게 흔들린다는 것을.하얀 머리칼을 곱게 넘겨 짧은 은비녀로 쪽을 찌던 외할머니도 그랬다. 일제 강점기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외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낮엔 국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오던 질곡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라 주변으로 곁눈질 한번 할 틈이 없었다. 자녀들이 성장해서 모두 출가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허리를 펴고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중동에서 생때같은 아들을 잃었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며느리는 아들이 남긴 보상금을 챙겨 손주를 앞세우고 떠났다. 평생을 그리움 속에 살던 외할머니는 모든 기억을 놓아버리고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하셨다.주인 할머니 얼굴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얼굴이 중첩되어 보인다. 이분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500년 동안 관습에 굳어진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그것이 안온한 삶이었을까? 외할머니의 삶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될 수 없듯 이 집 할머니의 삶도 편안한 삶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곳간에 쌀이 얼마나 있는지,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하다못해 지난 장날에 사온 치마의 붉은색조차 숨길 수 없는 집성촌에서 개인의 삶은 언제나 집단에 귀속되어 왔을 것이다. 옆집 숙부댁, 뒷집 할머니댁, 여강 이 씨, 월성 손 씨의 삶 하나하나는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양동마을 500년의 역사가 되어온 것이 아닐까.‘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용어가 있다. ‘생물체 내부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거나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말이다. 이는 외부 환경이 변하더라도 내부 환경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성의 개념은 사회체계와 가족에도 적용된다.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응해 사회체계와 가정생활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집단은 그 구성원들에게 협력과 보충을 요구한다. 적당한 통제와 사회화가 공동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500년 동안 마을은 하나의 생물체처럼 항상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의식은 변화하였지만, 마을 자체가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애쓰지 않았을까.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해서 양동 정신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까. 기쁨과 슬픔이 연대되어 평생을 그루터기처럼 마을을 지키는 양동의 정신이 되어온 것이 아니었을까.담장엔 봉숭아가 피고, 마당엔 살구나무가, 텃밭에는 오이가 자란다.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다. 저녁이 되면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도마 소리가 난다. 젊은 새댁은 분꽃을 꺾어 꽃술을 길게 늘어뜨린 귀고리를 만들어 내 귀에 걸어준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낡은 이불을 반듯하게 개어 놓으신다. 할머니의 할머니는 사각사각 속삭이는 소리가 나는 이불을 덮고 누우셨을 것이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품 안 같은 햇살 냄새가 난다.밤새 꿈을 꾸었나 보다. 문 밖에선 바지런한 주인 할머니의 비질 소리가 들린다. 몇 번쯤은 목이 꺾이었을 낡은 선풍기는 그 밤 내내 밭은기침처럼 바람을 토해내고 있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취한대(翠寒臺)

입선 배해주 성리학의 갈라파고스를 찾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된 소수서원이다. 장마가 꼬리를 감추고 대지가 고열에 지쳐 비지땀을 흘리는 8월 첫날이다. 예전에 주마간산으로 들른 곳이지만 세계유산으로 격이 높아지고는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발걸음에 설렘이 실려 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은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선생의 사표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그 후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명종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성리학의 큰 산맥인 퇴계 선생의 많은 제자가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4천여 명의 유생들을 배출한 성리학의 보고다. 안동의 도산서원 등 9개 서원이 14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중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원이다.입구에 들어서자 하늘로 솟은 학자 수림이 먼저 세상의 더위에 지친 길손을 반긴다. 한 줄기 바람이 전하는 솔향은 선비의 기개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서원에는 안향 선생의 초상이 국보 제1111호 지정되어 있고, 보물 제1403호인 강학당을 비롯한 보물 4점, 명종의 어필인 소수서원 현판 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5점이 있다. 예쁘면서도 마음씨까지 고운 여인처럼 서원의 품격에다가 문화재로서의 가치까지 품고 있는 귀한 곳이다. 서원 안에는 강학당, 장서각, 전사청, 영정각,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와 지락재, 경렴정, 취한대 등 오밀조밀 어깨를 부딪치듯 배치된 전각이 정겹다. 건물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와 상징성이 있지만, 지남철이 당기듯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한 것이 있다. 바로 취한대다. 서원 경내가 아닌 죽계 건너에 혼자 다소곳이 자리 잡았다. 서원 쪽에서 보면 잔잔히 흐르는 죽계에 거울처럼 투영되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취한대는 학문에 심취한 유생들이 잠시 여유를 즐기던 곳이다. 취한(翠寒)은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반변천의 상류인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퇴계 선생이 옛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와 차가울 한(寒)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취한대는 8개의 둥근 기둥 위에 팔작지붕이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며 편안하게 앉아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1칸 반 겹집의 목재 건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본연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바로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의 순수함이 취한대의 백미가 아닐까? 서원 경내 쪽에서 보면 단아함에 서기가 서려 있는 듯하고, 취한대에 앉아 죽계 건너를 보면 금방 시 한 수가 떠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마루에는 여성 몇 분이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간간이 번지는 그들의 미소와 여유로움에서 지난날의 유생들을 보는 듯하다.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나도 발걸음을 조용히 하며 나름의 여유를 즐긴다. 송림에서는 매미가 여름을 노래하고, 연화산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가 더위를 쫓는다. 이에 질세라 죽계의 맑은 물은 조용히 시어를 토해낸다. 순간 폭염도 잠시 잊었다. 분위기가 주는 귀한 선물이다. 잠시 눈을 감으면 5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나도 유생이 되어 있는 듯 환상에 빠진다. 주변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간다는데 이렇듯 고즈넉한 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쓰며 학문을 닦았던 유생들은 어찌 충과 효가 깊지 않았으랴. 맹모삼천지교의 깊은 뜻을 이곳에서 다시 음미해 본다.그곳이 어디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폭포수 아래에 서면 떨어지는 물처럼 가슴이 요동을 치고, 높은 산에 오르면 자신도 모르게 높은 기개가 가슴에 안겨 온다. 망망대해로 나가면 아무리 큰 배에 몸을 실어도 나뭇잎같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또한 현란한 조명에 싸이키 음악이 울리는 클럽에서는 평온을 찾을 수 없지만, 풍경 소리 들리는 가람에서 부처님 앞에 엎드리며 방하착(放下着)은 덤으로 얻어진다. 성리학의 서기가 서린 취한대에서 눈으로는 송림의 기개와 민얼굴의 순수를 느낄 수 있고, 조용히 흐르는 죽계의 물소리는 소음에 찌든 귀를 정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땅과 하늘, 숲과 물이 맑은 곳이다. 맑은 곳에서 맑은 마음이 생기고, 맑은 언어와 맑은 행동이 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곳은 지그시 눈만 감아도 자연의 본성까지도 느낄 수 있는 학문의 전당이다, 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충과 효를 실천했던 유생들을 생각하고 몇 날이라도 살아야겠다. 이것이 취한대가 주는 교훈이다. 매미들의 합창을 뒤로하고 조용히 귀를 모으면 죽계의 물소리는 더 청아해진다. 나뭇잎 하나가 물 위로 사뿐히 내려앉아 수류거(隨流去) 한다. 참으로 사위가 맑은 곳이다. 세상이 답답하고 삭막할 때, 조용한 취한대에 앉아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충과 효를 되새김질해 보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맛이자 지혜이리라.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수필대전 과메기 오브제

입선 박하성 수천수만의 연등이 묵언수행 중이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 홍련을 닮았다. 저들은 얼마 전 이승에서의 마지막 푸른 유영을 끝냈다. 바닷바람과 햇살이 잘 드는 곳을 골라 다비식을 치르기 전 의식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거침없이 어디에든 닿았던 족속이었다. 저들은 너른 초원의 전쟁터를 폭풍처럼 누비고 휩쓸던 유목 부족의 기마 전사들이었다. 푸른 지느러미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사방팔방으로 대양을 내달리던 온전한 자유이자 절대자였다.이제 저들은 안식에 들 것이다. 죄 없는 칼이 일찍이 머리를 잘라 번뇌를 끊고, 뼈를 발라 업을 끊어주었다. 창자를 도려내어 미혹함을 버렸으니, 이젠 넘나들어야 할 경계가 없다. 오로지 혹독한 수행을 거쳐 열반에 들 일만 남았다.비린 생이 치러야 하는 의식이다. 살아서는 닿지 못했던 공중에 가부좌를 틀고 비릿하게 말라가는 수행에 들었다. 더욱 정진하라고 하늘법당 큰스님은 햇살 죽비로 등짝을 때린다. 수십 길 바다 속에서 보았을 때는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답던 햇빛이었던가. 그 햇살이 이제는 죽비가 되어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어깨며 등짝에 가시처럼 내리 꽂힌다.동해 찬바람은 속살을 아리게 후벼 판다. 더 비우라고 자꾸만 다그친다. 속내를 다 덜어냈는데 무엇을 또 비우라는 말인가. 남은 건 꾸덕꾸덕해지는 껍질과 알맞게 간이 밴 검붉은 속살뿐인데 또 비울 것이 있단 말인가. 질기디질긴 숨비소리조차 마지막으로 토해내지 않았던가.하지만 비울 게 없을 것 같아도 비워지는 게 있다. 채 버리지 못한 욕심 찌꺼기가 꾸역꾸역 기름으로 흘러나온다. 백팔 번 얼었다가 백팔 번 녹으면 해탈의 경지에 드는가. 어는 것도 고통이지만 녹는 것도 사뭇 고통이다.관목청어貫目靑魚라고 했다.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뚫고 꿰어 말렸다는 뜻이다. ‘목'이 ‘메기'가 되어 관메기가 되고, 관에서 ㄴ이 탈락해 과메기가 되었다고 한다.청어가 많이 잡히지 않으면 꽁치를 사용한다. 제조법도 전통적인 방법과 달라졌으나, 동해안 구룡포의 과메기는 한국의 특산품이 된 지 오래다. 과메기의 계절 겨울이 오면 포항과 구룡포 일대는 문전성시를 이룬다.의식을 다 치르고 난 과메기를 공양으로 올린다. 사람들은 김, 파, 미역, 배추, 마늘 따위로 과메기를 치장하고 공양을 한다. 육신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비린 생의 내력들은 뒷맛으로 남는다.거칠 것 없는 온전한 자유가 저들의 속성이었다. 누구나 누리고 싶은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란 남에 의한 구속뿐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속박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자유를 누리되 분별없이 방만해선 안 되고, 자신을 놓아주되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도전하되 무모하지 말 것이다.부단히 수행하고 비우는 것은 또 어떤가. 나는 지금까지 ‘나중에’란 생각이나 행동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아왔다. 무슨 계획을 세우는 것도‘나중에’, 오늘 당장 해야 할 일도 ‘나중에’ 식이었다. 심지어 효도도 ‘나중에’, 좋은 일을 하는 것도 ‘나중에’였다.하지만 그 ‘나중에’ 란 날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것 대신 온 것은 오직 뼈아픈 후회뿐이었다. 나중에 해야지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 책무를 미루어버리는 짓이었다.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이 단순해 보이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버렸다.수행이라고 무슨 거창한 것이겠는가. 항상 바른 생각을 지니고,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제때 해야 할 옳은 일을 바르게 하는 것도 훌륭한 수행일 것이다. 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참다운 삶이라면 거룩한 수행일 터이다.자신을 비우는 것은 또 어떤가. 내 안에 산패(酸敗)되어 있는 묵은 기름 찌꺼기조차 버리려 하지 않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머리와 뼈, 내장을 버린 저들은 몸으로 엄중하게 보여주고 있다.역경과 난관도 견디고 극복하란다. 남을 짓밟고 딛고 서기 위한 승리가 아니라, 내 정당한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라는 것이다. 시련을 겪어야 진정한 삶에 가까워질 수 있고, 고난을 이겨낸 삶은 한층 빛날 것이다.꽁치들이 날아오른다, 푸른 바다에서의 유영을 마치고 푸른 하늘로 비상한다. 한 생을 마치고, 동해에서 발원한 비린 목숨들이 저들의 육신을 가뭇없이 공양하고 간다. 비린 생을 살고도 속 깊이 잘 우러난 향기를 남기고 간다. 나도 향기를 남기고 가고 싶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대나무꽃

입선 박선영 길을 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황금빛 물결이 시선을 붙든 탓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파도가 일듯 바람에 밀려온 빛에 나는 갇혀버렸다. 언젠가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꽹과리와 북소리도 둥둥~ 울렸다. 그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따사로운 햇볕 속에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선영씨, 뭐 하세요? 빨리 와요.” 하는 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어디에도 황금물결은 없었다. 단지 푸른 대숲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들려왔다. 나를 부르며 손짓하던 회원은 저만치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뛰어갔더니 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대나무꽃을 본 거 같아서요.”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대나무꽃을 본 적이 없다며 그런 꽃도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대나무꽃이 궁금하다며 찾아보겠다고 했다.글공부를 하고 있는 문학회에서 문학 탐방여행으로 경주에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내심 반가웠다. 불국사나 석굴암은 어머니와 인연이 깊어 언제라도 가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 석굴암보다 천마총 대릉원 가는 길목에서 나는 어머니를 만났다. 대나무 산책로를 걷다 말고 대나무를 올려다본 순간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대나무밭에서 소원을 빌며 치성을 드리고 있는 젊은 여인, 탐스러운 머리를 매끈하게 빗어 쪽을 찌고 낭자에 옥비녀를 꽂은 어머니가 날 향해 웃고 있었다.백여 호가 넘는 집성촌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종가였던 우리 집은 울타리를 대나무로 엮었다. 집 뒤에 대밭이 있어 대나무가 흔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대나무를 보고 자란 우리에게 대나무밭은 놀이터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울기 좋은 곳이었다. 종부의 시름을 어머니는 대나무밭에 풀어놓곤 했다.어느 핸가 마을에 경사가 났다. 바로 우리 집 대나무밭에 대나무꽃이 핀 것이다.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윗동네 아랫동네는 물론이고 타촌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꽹과리와 북을 치며 흥겨워했다. 그때 마을에서 제일 높은 어른인 동배 할배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이 대나무꽃은 상서로운 징조일세. 나라에 큰일이 있었을 때는 꼭 꽃이 피었다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쳤을 때에도,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에도 피었어. 이번에도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본데….” 할배 말에 친척들 시선이 아버지, 어머니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종가종손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어머니는 종가살림을 지혜롭게 잘 꾸려나갔다. 동네 애경사에도 어머니가 빠지면 안 될 만큼 어머니는 과방(果房)을 잘 관리했다. 배고픈 시절이라 과방에서 인심 난다고,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잘 나눠주는 역할이 중요했다. 바느질 솜씨도 야무져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종가의 대를 이를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가에서 제례나 시제를 지낼 때 반드시 종가의 자손이 있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죄인이 된 어머니는 대나무밭으로 숨었다.대나무는 영험한 나무이기도 하지만 생활에도 쓸모가 많았다. 종가에는 손님이 많았다. 손님 접대용으로 죽순은 톡톡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술 빚는 솜씨도 뛰어났다. 솔잎을 넣고 지에밥을 쪄 식힌 다음 누룩을 섞어 술 항아리에 담았다. 항아리 위에는 대나무 잎을 덮었다. 이틀간 아랫목에 두었다가 대나무밭에 저장했다. 쌀알이 동동 뜬 달착지근한 막걸리를 아버지는 아주 좋아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막걸리를 되들잇병에 담고 댓잎으로 병마개를 해 놓아두면 발효 식초가 되었다. 미나리 초무침은 까다로운 할머니까지도 웃게 하였다. 된장, 고추장, 김치, 장 항아리에도 댓잎을 덮었다. 그러면 골마지가 끼지 않는다고 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리밥을 해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부엌 천장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아버지는 낚시를 좋아해 대나무를 베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물고기 담는 그릇에도 댓잎을 넣으면 비린내가 사라졌다. 대나무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름에는 돗자리를 만들어 깔았고 대나무로 만든 평상은 가족의 놀이터였다. 겨울에는 대나무를 쪼개 태극기 창호지를 붙여 태극 연을 만들었다. 방천에 나가 아랫바람이 불면 연을 높이 날려 소원을 빌기도 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 대나무밭은 삶의 원천 같은 곳이었다.어머니는 당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결국 작은댁을 들여야 했다. 어머니는 손수 짠 베로 이불을 만들고 베개를 마련해 신방을 차려주었다. 아버지를 그 방에 들여보내고 어머니는 결연히 대나무밭에 섰다. 몸을 정갈히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옥빛 비녀를 꽂았다. 대쪽같이 퍼런 어머니의 모습을 만월이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그런 달을 삼켰다. 흡월정(吸月精)을 하기 위해서였다.흡월정이란 달의 기운을 몸속으로 빨아들이는 걸 말한다. 동지섣달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부풀어 오를 때 갓 떠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선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를 생성해 주는 달을 삼키는 것이다. 여인이 달의 음기를 채우면 그 힘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어머니가 흡월정을 할 때는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강한 기를 모아야 했기에 어머니는 후들거리며 대나무를 붙잡았다.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로 곧추섰다. 다음날은 어김없이 불국사를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 삼천 배를 하고 석굴암을 찾아 마음을 닦았다. 어머니의 간절함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가슴에 박힌 옹이를 빼기 위한 몸부림, 어머니의 일념은 온통 한곳에 꽂혀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또렷한 보름달이 대나무밭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얼른 치마를 벌려 달을 받아 안았다. 어머니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던지 어머니는 일 년 뒤 아들을 낳았다. 대나무꽃이 핀 건 우연이었지만, 어머니가 보름달을 안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었지만 대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느낀다. 천마총 대릉원 대나무 길에서 만난 어머니는 그 후 오래도록 내 안에 살아 있었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구름이 머무는 절 운부암

입선 박두흥 가을이 저물기 전, 단풍이 안내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걷고 또 걸어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절집에 도착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면 이곳을 찾는다. 팔공산 비로봉 용맥이 암자의 뒷등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좌우 능선이 청룡 백호가 되어 포근히 감싸주는 절. 그 품에 들어서면 시름이 사라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가림줄이 쳐져 있는 입구에서 범종 모양의 표지석이 먼저 중생을 맞는다. 가운데 ‘운부 선원’이란 이름이 크고 하얀 글씨로 아로새겨 있다. 그 좌우에 ‘천하명당’과 ‘조사 도량’이란 파란색 글귀가 또렷하고, 작은 글씨로 새긴‘북 마하 남 운부’란 말이 눈으로 성큼 뛰어든다. 스스로 천하명당이라 일컫고 남쪽 최고의 수행처라 할 만큼 바위에 글을 새긴 사람의 자부심이 느껴진다.팔공산의 정기가 모인 이곳은 선승들의 참선 도량으로 유명하다. 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명당을 찾듯이 선승들이 깨달음에 가까이 가고자 명당인 이곳을 찾아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 중에는 근․현대의 선지식인 경허, 성철과 같은 큰스님도 계신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수행이 더 깊어졌으며 이미 오도송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설도 전해진다.세상과 단절되고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이 수행 공간에서 스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적막한 밤의 유일한 벗은 경전이었을 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풍광과 물소리를 벗 삼아 자신을 성찰했으리라. 돌아보면, 곱게 키운 난초가 긴 기다림 끝에 꽃봉오리를 터트렸을 때, 나는 그 기쁨을 뭐라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스님은 평생의 꿈인 불도의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 벅찬 마음이 어떠했을까? 스님께서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토해냈던 오도송 한 구절을 되뇌며 짐작만 해 본다. ‘황하가 역류하여 곤륜산 정상으로 치솟고,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이 꺼지도다.……. ’절 앞에는 계곡물을 막아 조성한 연못이 있다. 하늘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물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까지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못 안쪽에 화강암을 깎아 세운 달마상이 보인다. 머리까지 덮는 긴 승복으로 온몸을 감싸고, 털북숭이의 우락부락한 얼굴에 입까지 굳게 다문 채 두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 적정(寂靜)에 들었다. 범상치 않은 형상에 한참을 바라보며 달마가 이곳에 현신(現身)한 이유를 생각한다. 아상(我想)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이 가련했음인가? 아니면 이곳 선승들의 외롭고 힘든 싸움에 등불이 되어주려 했음인가?궁금증을 안고 ‘불이문(不二門)’으로 다가간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기뿐이다. 문은 세상을 단절시키기도 하고, 또 두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문기둥에 새겨진 주련(柱聯)을 소리 내어 읽는다. ‘탐진치심 내려놓고, 번뇌 망상은 연못에 두고 가라.’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뇌성처럼 정수리를 친다.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켜야 번뇌도 망상도 없는 불국토에 닿을 수 있다는 지혜의 말씀이다. 그 지혜를 찾아 얼마나 많은 선승이 이 해탈의 문을 통과했을까.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을 들인다. 돌계단을 올라 마주한 보화루, 단청이 없다. 소박한 게 꾸밈없는 선승을 닮았다. 이름이 보화루인 것은 이 절에 선불교가 퇴락하면서 잠시 화엄사상이 지배했던 자취를 보여준다.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누각에 오른다. 가운데 대들보에는 큰북이 매달려 있고 구석진 곳의 다탁 위에는 찻잔이 가지런하다. 그 옆 벽면에 ‘喫茶去(끽다거)’라 쓴 예쁜 나무판이 중생에게 차를 권한다.한 잔 가득 우려낸 차를 마시며 단아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는 원통전으로 향했다. 법당 안에 정좌하고 있는 청동관음보살상(보물 제514호)의 자애로운 미소가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왼쪽에 ‘운부난야(雲浮蘭若)’란 편액이 걸린 선방이 있다. 흘려 쓴 글씨에 기운이 넘친다. 그 아래 툇마루에 걸터앉아 보화루 지붕 너머 하늘을 바라본다. 풍덩 빠져들고 싶은 푸른 하늘이다. 언뜻 사십오 년 전, 처음 참선을 익히던 시절이 그 하늘에 그림처럼 펼쳐진다.포교당 법당의 차가운 마루에 어린 학생들이 둘러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다. 인생이 무엇인지,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기보다 또래와 어울리는 게 더 좋았다. 눈을 반쯤 내리감고 시선은 발 앞에 고정시켰다. 어깨 힘을 빼고 단전으로 호흡했다. 생각을 한 곳에 모으고 화두참구를 하는데 몰려오는 수마를 극복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캄캄한 내면에서 방황하다 탁, 탁, 탁! 따끔한 죽비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곤 했다.차츰 고요 속에서 마음이 집중되었다. 문득, 나는 처음인데도 힘이 드는데 스님들은 이 고행을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뇌가 생길 때마다 쫓고 또 내쫓고, 모든 것을 비워내야만 부처가 말한 청정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데…. 그날 나는 부처님의 손안에 앉아 어이없게도 수행자들을 걱정했다. 철없던 그때의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했는데도 자신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각 진 마음이 언제쯤 저 둥글한 산등성이를 닮을지 가끔 내밀한 내 속내가 궁금해진다.영천 은해사의 부속 암자이자 수행처로 알려진 운부암. 711년(성덕왕) 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809년(헌덕왕) 때 혜철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천년이 넘도록 계절만 오고 갈 뿐, 암자는 조용히 그 자리에 부처님처럼 앉아 있다.고승들은 수행의 자취를 남기고 떠나갔지만 암자는 여전히 산의 품에서 수행하라는 묵묵한 울림을 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어갔을까. 상서로운 구름이 머무는 절, 운부암은 중생들의 고뇌를 안고 이렇게 또 한 계절을 보낸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

입선 문은주 선글라스를 벗어 던졌다. 깊은 산 속을 파고드는 가파른 길 끝에 고라니 한 쌍이 구름처럼 노닌다. 산허리를 감돌아 오를 때마다 두루마리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풍경의 무상함에 넋을 놓는다. 느닷없는 불청객이 귀찮은 듯 칡 넝쿨손이 자꾸만 자동차를 건드린다.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재활용 수거함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문의 기사 한 줄은 나의 일상을 방해할 만큼 생각을 지배했다.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안동지례예술촌’이라는 제목과 함께 산과 호수를 품은 고택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택을 방문한 호주 기자의 일화가 적혀 있다. 가만히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듣고 있냐?”고 물었다는 이 집 주인장의 말을 듣고 나중에 그 말이 기사 제목으로 쓰이면서 많은 외국인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임하댐 건설로 지례마을은 수몰 위기에 처한다. 그곳에는 400여 년의 얼이 담긴 지촌 김방걸의 종택과 지산서당이 있었다. 13대손 김원길은 가문의 터전을 보전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라 여기며 그것들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마을 뒷산 중턱으로 옮겨지었다. 시인으로 활동한 그는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고택이 예술가들의 활동지로 제격이라 여겨 ‘지례예술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연과 어우러진 고택은 무엇과도 대신하기 어려운 귀한 건축물로 거듭났다. 수장되어 멈출 뻔했던 지촌종택의 역사는 또 다른 스토리를 전개하며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나의 고향 마을은 문씨 집성촌이다. 그곳에는 ‘연화당’이라는 종택이 있다.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왁자지껄한 종갓집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품었지만 지난한 시간은 종택의 모습을 바꾸었다. 사람의 온기가 떠난 기와집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흘렀던 대청마루는 주저앉고 구부러진 처마 밑에 볼썽사나운 말벌집이 차지했다. 세월의 틈을 메우지 못한 기와는 헐렁거렸다. 떡메를 치던 아재의 인심 좋은 웃음, 솥뚜껑에 전을 지지던 친척 아지매의 모습도 없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고 모여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삐걱거리는 정지문으로 달아난다. 안간힘을 쓰며 세월을 견디고 있는 종갓집에는 차곡차곡 쟁여 둔 이야기보따리가 그득한데 누구 하나 들어주는 이 없다. 제멋대로 자란 질경이가 주인 행세를 하며 바람을 붙잡는다.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돌계단을 올라가니 홍살을 설치한 솟을대문이 보인다. 그 아래에 있는 의자 두 개, 사람의 출입을 방해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의자를 갖다 놓은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의자에 앉으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숨을 멎게 할 정도의 기품 있는 풍광이었다. 산을 품고 있는 호수는 다양한 색채를 풀어내며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윤슬을 낚는다. 여름의 선명하고 힘찬 기운이 고스란히 마음에 들앉는다. 어쩌면 한 번도 닫을 수 없었던 문이었는지 모른다. 문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이 집 전체로 향하고 있다.다급히 들어선 걸음이 마당의 고요를 깨운다. 엎드려 있던 백구 한 마리가 낯선 이의 방문에 고개를 든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나의 마음을 들킨 거 같아 미안하다. 개의 눈빛이 온화하다. 맴돌이하는 제비의 날갯짓을 쳐다보는 백구가 초승달처럼 웃는다.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을 싣는 순간, 손님들은 신발 끈처럼 꽉 매어진 세상을 향했던 몸과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지고 종택의 식구가 된다. 별당에 머물렀던 아씨, 사랑채의 손님, 행랑채에 기거하는 머슴이 된다. 방마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구조는 자연의 힘을 빌려 비로소 완성한다. 사방에 열린 문마다 들어오는 풍경은 번잡한 욕심을 거두어 가더니 고요한 마음을 돌려준다. 누구나 공평하게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음을 깨쳐준다.우리는 지산서당에서의 하룻밤을 허락받았다. 안동 선비의 기품을 깨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을 닮은 서당은 반듯하고 고풍스럽다. 기둥의 강건함, 대들보의 묵직함, 서까래의 유연함은 어느 것 하나 돌출됨 없이 제자리를 맞추어 서당의 품격을 높인다. 겹처마가 드리운 긴 그림자가 나그네의 옷자락을 붙든다.고택 담장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서 내려다본 ㅁ자형의 종택은 한 폭의 수묵화다. 개방하지 않아 더 은밀하고 숨은 공간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종손의 안채 살림은 긴 세월을 감내한 인내의 시간이어라. 대대손손 지킨 그 공간에는 15대손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 아이들의 발걸음에 지례예술촌의 아름다운 동행도 계속될 것이다.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사람들은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들었을까! 나는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차례대로 돋아나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본다. 유년 시절, 평상에서 바라본 은하수의 물결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 내 앞에 있을까. 문풍지를 타고 올라가는 장수하늘소의 발걸음이 귓전에서 사각거린다. 모두가 쉬이 잠들지 못한 밤이다.“Mom, what's this?”네 살쯤 되었을까.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하얀 고무신에는 다육식물이 촘촘하다. 기둥을 살피고 마루의 나뭇결을 만져보던 외국인 부부가 평온한 얼굴로 소녀를 쳐다본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찾아온 그 아이의 눈에는 이 고택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사람의 온기가 가득한 깊은 산속의 고택에서 나는 고향 마을의 쓸쓸한 종택을 떠올리며 먼 산을 쳐다본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장니(障泥)’

입선 류현서 넓은 평지에 능들이 즐비하게 둘러앉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둥그런 산봉우리를 담아와 옹기종기 엎어놓은 듯하다. 널찍한 대릉원을 돌아보며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천마총 앞에 섰다.시간의 저편을 고요히 더듬어 본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서원과 왕릉이 있다. 서원은 유교의 뜻을 따라 옛 성현을 받드는 장소다. 사회의 인재 양성과 미풍양속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 서원이다. 그렇다면 고분은 무엇인가. 능을 거닐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고분은 나에게 답을 주기는커녕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모든 사람은 생사를 거친다. 죽음은 누구나 다다를 수밖에 없는 귀결이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늙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없는 진실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경험을 쌓고 쌓아 저 봉분만큼 높다는 걸까. 신라고분은 평생 겪은 일들을 뭉쳐서 이렇게 높게 쌓아 올려 준 것일까. 아니면 이승에서 못다 한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사후세계에 가서 마무리하여 차곡차곡 저장시키라는 뜻에서, 넓은 공간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천마총 안으로 들어섰다. 목관을 비롯하여 발굴 당시의 현장 그대로 진열해 놓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발굴된 무덤에서 피장자가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띠를 허리에 두른 채로 출토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관 밖에서는 금제 꾸미기와, 금제 족집게, 자루 달린 솥, 다리미, 청동 용기류, 굽다리접시, 토기, 유리 배, 굽은 옥, 등 껴묻거리가 다양하다.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력을 누리는 신라인, 여기 고분에서 죽은 자의 권력을 반추해본다. 천마와 금관과 수많은 껴묻거리에서 알 수 있다. 황금으로 만든 다양한 생활용품들은 아름다운 문화의 반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땅이 넓지 않고 작은 나라이지만, 겁 없이 화려했고 통 큰 문명국가였음을 직감한다.한발 한발 고분 깊숙이 들어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렸다. 장님 냇물 건너가듯 한참을 더듬거리며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하고 살폈다. 섬광이 번뜩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장니를 매단 천마가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달리고 있다.장니는 말 탄 사람의 옷에 흙이나 물이 튀지 않게 안장 양쪽에 달아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친 뒤, 그 위에 다시 고운 수피로 누벼 가장자리엔 가죽을 대었다. 볼수록 화려한 장니가 천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에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흙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자작나무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쭉쭉 뻗어 자라는 게 특징이다. 다른 나무와 달리 몸체와 잎이 은색이다. 자작나무에 바람이 스칠 때면 하얀 이파리가 마치 은으로 지은 옷같이 반짝거린다. 은 옷을 입은 하늘나라 신선들이 나풀나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나무와 달리 영생을 기원하는 나무로 신성시 여겨왔을 테다. 그러했기에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천마도를 그린 것이리라. 옛적 선조들이 누구를 위해 고운 수피로 장니를 만들었을까. 필경 인간계에서 삶을 마치고 다다른 사후세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칸트는 “죽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고 말했다. 죽음은 무거운 육신을 버리고, 가벼운 영혼으로 자유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겐가. 인간이 유한한 이승에서 무한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게 무덤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닐는지.천마총에 들어오니 어디쯤이 하늘이고 어디쯤이 지상인지 헷갈린다. 발 디딘 곳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장자는‘우물의 물은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내다봤다. 어쩌면 무덤은 지하로 내려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육체는 땅에 묻히면 흙이 되었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정신세계는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죽어야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걸까. 인간의 혼이 저승에 도착하면 천마는 즉시 하늘로 실어 나르는 수행을 맡았을 것이다. 공중으로 향해 뛰는 모습이 엄중하면서도 날렵하다. 입으로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하얀 털이 바람에 휘날린다. 고분 속에서 말이 하늘로 달리고 있을 줄이야. 흰 말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깊은 지하에서 높은 하늘로 오고 갔으리라. 높고 낮은 산을 넘고 여러 개의 내 (川)를 건너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 말발굽에서 흙탕물이 튀어 올라 옷이 더럽혀질까 봐 장니를 달았던 게다. 오랜 시간을 건너왔건만 희어서 너무 희어서 눈이 부신 천마도. 목화솜같이 희고 때가 묻지 않은 것은 장니가 있었기 때문이리라.천마가 사후세계의 긴요한 교통수단이라면, 이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 수단이 자동차다. 천마가 저승의 영혼을 실어 나른다면, 자동차는 이승의 육신을 태워 다닌다. 천마의 장니가 하얀 나무수피로 만든 것이라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하얀 유리로 되어있다. 수피로 만든 장니나 유리로 된 장니나 흙탕물을 튀지 않게 막아준다.자동차가 없던 때에 말(馬)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어떤 동물이나 짐승 중에서도 흰색을 지닌 동물을 더욱 신성시 여겨왔다. 전쟁을 치를 때도 날쌘 백마를 최상의 무기로 삼았다. 일상생활에서조차 흰말은 풍요와 행운을 몰고 오는 상징물로 꼽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이 화이트카를 가장 선호하는 것과 같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여러 색의 자동차 중에서 흰색이 가장 많다. 흰색의 차는 재물을 상징한다. 그래서 속담에도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면, “백말 타고 장가드는 행운을 얻었네”라고 한다.과거를 모르는 백성은 미래도 없다고 한다. 역사를 논하는 사람은 인간을 세계의 시간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철학인은 인간과 역경을 세계의 시공간적인 무시대성으로 말한다. 천마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놓은 게 아니겠는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시대를 뛰어넘은 천마도. 시간과 공간을 망라한 신라의 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고요히 흐르고 있다.고분에서 나와 높고 둥근 능을 바라본다. 고요도 힘겨워 차갑게 가라앉는 듯하다. 품이 너른 능들이 봄에는 연옥이불,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불을 덮는다. 가을에는 황금이불, 겨울에는 은이불을, 자연이 철철이 갈아주는 이불을 덮고 잠에 취해 있다.여느 왕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천마총에는 없다. 곰곰이 생각에 젖었다. 천마총은 저승에 도착하는 즉시 천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굳이 무인석을 세울 필요가 없었던 거다. 만약에 무인석과 문인석을 좌우로 세웠다면 장니가 출토되었을까.엄전한 대릉원이 후세에게 지난 역사를 되새기게 만든다. 긴 역사에 외부세력으로부터 이런저런 수모를 당해도, 마른버짐이 핀 배롱나무가 능을 지켜온 산 증인이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칠불암에 달이 뜨면’

입선 김태선 비구름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솔밭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발걸음을 재촉했어도 꼬리가 잡혀 나는 흠뻑 젖은 채 남산 자락을 걸었다. 저 구름이 몸을 풀어 후련하게 비를 다 쏟아버려야 하늘이 다시 밝아지리라.칠불암 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다닐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길게 이어진 오솔길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도 여전하다. 물길은 끊어지다 이어지고 이어지다 끊어져서 한참은 물소리만 따라온다. 그 물길 끝에 옹달샘이 나온다. 샘물로 목을 축이고 대나무 숲 터널을 지나 아늑한 돌축담에 올라선다. 거기서 마침내 부처님을 뵙는다. 바위에 새겨진 일곱 부처님이 저 아래 서라벌 들판과 토함산, 동해를 굽어본다.나는 마애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처음부터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외갓집 뒤꼍에 있던 큰 바위가 생각났다. 외갓집의 바위는 원래 하나였는데 오래전 벼락에 갈라져 세 개가 되었다고 한다. 갈라진 그 바위들 모양이 멀리서 보면 농부가 김을 매는 것 같기도, 엎드려 절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외할머니와 두 딸, 세 모녀가 오순도순 사는 모습이 흡사 바위를 닮았다며 외갓집을 세바우집이라 불렀다.방학이면 우리는 외갓집으로 몰려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물과 뒤꼍의 바위는 색다른 풍경이었고 한두 살 터울의 이종사촌들은 좋은 친구였다. 외할머니는 위험하다며 바위 근처에 얼씬 못하게 했지만, 호기심 많은 우리에게는 더없는 놀이터였다. 놀다가 다치기도 했다. 내가 바위에 이마를 긁히고, 오빠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팔이 찢겼다. 그러다 큰일이 터졌다. 어느 날 같이 놀던 이종사촌 여동생이 바위에서 떨어졌다. 동생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이모는 고명딸을 앗아간 바위를 미워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다 다 소용없다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소중히 여기던 신줏단지까지 내다 버렸다. 외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고, 차라리 바위를 파내고 싶다 했다. 그 후 외갓집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어느 초겨울, 외할머니가 바위에 켜둔 촛불이 바람에 넘어져 뒷산에 불이 났다. 불은 집까지 태웠다. 혼자 있던 외할머니는 혼비백산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줄을 놓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모는 친정과 왕래를 끊었고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어머니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치료 후에도 말이 어둔하고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치매 초기였다. 그 소식을 듣고 이모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모는 내가 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멍하니 앉은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이렇게 오면 만날 걸, 왜 그토록 오랜 세월 골을 파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무슨 소리를 해도 별 반응이 없던 어머니가 칠불암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곳에 가고 싶냐고 묻는 이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날 이모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칠불암에 올랐다. 나는 칠불 앞에 서서 어머니를 위해 빌고 또 빌었다. 바위를 향해 앉은 이모의 눈빛도 간절했다. 그때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까. 그런 우리 옆에서 어머니도 무엇인가를 빌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어머니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내 결혼과 동생들 학업성취를 기원하고 있었다.옛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날이 개고 하늘에 달이 떴다. 빗물에 씻긴 달빛은 유난히 밝고 산 기운에 씻긴 내 마음도 퍽이나 가벼웠다. 내 마음이 가벼우니 그날따라 아미타여래불이 빙그레 웃으셨다. 삼라만상이 잠든 고요한 밤 부처님 미소 속에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도 젊어서부터 칠불암을 좋아했다. 당신도 나처럼 이곳에 와서 근심을 내려놓았을까.나는 한때 칠불암에 매달렸다. 집안일이며 직장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마다 칠불암을 찾았다. 사방불을 돌며 절하다 보면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텄다. 안개가 걷히면서 눈부신 새날이 펼쳐지고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생각이 하나둘 가닥이 잡혔다. 뿌듯했다. 아, 어머니는 부처님께 소원만 빌러 다닌 게 아니었구나.칠불암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또 있다. 그는 암자에 오를 때마다 옹달샘을 쳐내고 있었다. 한 방울 물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샘 바닥이 드러나도록 바가지 든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암자에 있는 사람이려니 했는데 나처럼 가끔 칠불암을 찾는다고 했다.“물이 말갛게 보여도 자주 청소를 해야 합니다. 하나둘 떨어져 내린 돌 부스러기도 쌓이면 물을 흐리게 합니다.”번뇌에 가득 찬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말 같았다.칠불암에서 내처 신선암에 오를 수 있다. 칠불암에서 올려다보면 저 위로 툭 튀어나온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신선암이다. 마음이 가벼우면 몸도 가벼워지는 법, 신선암까지 오른다. 돌계단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점을 찍듯 오른다. 숨이 차오를 즈음 이번에는 좁디좁은 난간 길, 바위를 안고 가재걸음을 걸어야 한다. 이마와 손에 닿는 차가운 바위의 감촉을 생명줄처럼 힘껏 껴안는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아찔하다. 늘 깨어있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리라.칠불암을 등지고 휘적휘적 내려오는데 지게를 진 남자가 후딱 내 옆을 지나쳤다. 암자에 짐을 날라다 주는 듯했다. 맨발이었다. 저이는 발도 아프지 않을까? 힘이 들 텐데 어쩌면 저렇게 편안한 얼굴일까. 나는 얻으러 가는 마음이었으니 다리가 무거웠는가. 스스로의 물음에 멈칫하는데 칠불암 은은한 달빛이 내 등을 토닥였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능지탑 문무왕을 찾아서’

입선 김춘기 낭산 서쪽에 위치한 능지탑을 찾았다. 낭산은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울산 방향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104m 높이의 나지막한 야산이다. 신유림이라 불리기도 한 신령스러운 성산으로 정상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남쪽은 사천왕사지가 있다. 이 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이 화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4각모양의 2층탑으로 여느 탑과는 달라서 얼른 탑이라고 납득하기에는 색다른 모습이다. 기단을 복원하고 상부를 쌓았는데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면 5층탑이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탑 뒤에 성격이 규명되지 않는 토단이 있다. 혹시 토단 위에 장작을 쌓고 그 위에 유해를 얻어 태웠을까? 그 연기는 용의 형상으로 동해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거슬러 신라를 더듬어 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지키려는 왕의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아 탑돌이를 하면서 왕을 찾는다.문무왕은 신라 30대 왕으로 아버지 김춘추의 뜻을 이어 삼국통일을 꿈꾼다. 통일을 이룬 후에도 이 땅을 차지하려는 야욕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싸움을 걸어오는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고 물리쳐서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그 후 왕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뜻을 담아 사천왕사를 지어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하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전쟁으로 피폐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왕은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인도식에 따라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서 유해를 동해의 바위에 장사지냈다. 최초의 수중 무덤 대왕암이 그것이다.신라왕들은 대부분 사후에도 편히 살기 위해 많은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경주는 고분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도심에 산처럼 높이 만들어진 능(총)들이 널려있다. 대부분 신라왕과 왕비의 능이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부장품을 가져가려고 무덤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껴묻거리(함께 묻을 도구) 상자를 넣을 방을 나무덧널로 설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들었다. 많은 물건을 넣고 물건을 도난당하지 않기 위한 양식이다. 천마총에서 출토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금관, 장신구, 무기, 마(馬)구, 그릇 등 엄청난 양이다. 심지어 어떤 마립간(왕)은 심부름할 소녀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살아서 누린 권력과 재력을 사후까지 누리겠다는 끝없는 욕심이 빚은 제도이다. 사(死)자의 권력과 지위에 따라, 때로는 산자의 권력에 따라 껴묻는 부장품의 양이 늘어났으니 사후에도 지위를 누리며 땅속에서 죽음을 살고 있다. 정작 부장품들은 주검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 사용된 흔적은 없다.불교에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한다. 빈 몸으로 떠남이 마땅하다. 이승의 것은 산자의 몫, 떠나는 이들이 행여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법정스님은 이승의 삶에서조차 무소유를 설파했다. 불교를 국교로 받들던 신라의 왕이라면 그 정도의 철학은 지녔어야 왕이다. 산처럼 높이 쌓은 능 안에서 이승의 도구로 저승의 삶을 살기 위해 채움은 불교의 교리도 아니고 지도자의 영도력도 아니다. 이승의 도구가 저승에서도 맞겠는가? 모두가 비움의 미학을 알지 못한 인간의 짧은 생각과 욕심이 만들어낸 관습이다.문무왕은 오로지 이 땅만을 생각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죽음에까지 이어진다. 극성스러운 왜구가 해안을 토색질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기에 부처님 힘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자신을 불태워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왕은 깨달음도 남달랐다. 죽음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감을 알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지난날의 영웅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능을 크게 만들어도 세월이 흐르면 나무꾼과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기가 굴을 팔 것이다.’ 라는 기록만 봐도 그의 깨달음은 천년을 뛰어넘는 위대한 통찰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지의법사에게 늘 자신은 죽어 호국 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말했다. 지의법사가 “용은 축생보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하니 왕은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인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 라고 답한다. 이처럼 왕은 짐승으로 환생하는 업보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호국’의 길만을 생각했던 것이다.감포 바다 수중 왕릉 대왕암 앞에 섰다. 생즉사 사즉생의 문구가 눈앞에 일렁거린다. 사후까지 잘살아 보겠다던 숱한 왕들은 땅속에서 무거운 침묵에 빠져 죽음을 살고 있고, 뜨거운 장작불에 몸을 불살라 나라를 지키려던 문무왕은 후손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살아가고 있다. 끝나버린 죽음과 천년을 살아온 죽음이 오롯이 대비를 이룬다. 요즘처럼 일본과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왕이 보내준 보물 만파식적이 그립다. 피리소리에 묘책이 얹혀 달려오기라도 한다면 위기를 넘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여행자의 가슴에 청량제가 된다. 하얀 포말을 담은 푸른빛 바다를 거느리고 오늘도 문무왕은 나라를 지키는 작전회의 중일 것이라는 믿음을 위안 삼으니 돌아오는 발길이 한결 가벼워진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서원(書院)과 오백 년 은행나무

입선 김복건 가을이 노란 은행잎으로 유혹한다. 갑자기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든다. 나뭇잎은 지난날들의 사연을 가지에 걸어두고 함께 떠나자며 내려앉는다.은행나무는 자기 보호를 위해 본능적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수나무는 냄새가 없다. 그래서 노란 잎이 되어 떨어진 황금카펫 길을 걸으면 참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잎들은 이곳저곳에서 나비가 되어 춤을 춘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바람과 어울려 춤사위를 하는 나비를 한참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젖어든다. 옛 직장에서 사표를 내고 쉴 때다. 매일 출근하였던 사람이 집에 있자니 갑갑하고 서성이자니 실업자라는 이미지를 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아들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 직장을 잃었으니 맛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줄 수 없었다.무료하게 집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저녁, 아내는 바람에 날려 떨어진 은행 열매를 주워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빡빡 문질러 겉껍질을 벗겨 냈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통마늘과 함께 달달 볶아 내가 좋아하는 맥주 안주를 만들었다. “여보! 힘내세요.”하며 차려진 조그마한 상에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려 노릇노릇 구워진 은행 열매가 있었다. 그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은행나무가 소수서원 입구에서 오백 년을 버티고 서 있다. 서원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첫걸음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차원에서 보고 느끼는 ‘생각의 서원’에 들어선다.우리 민족은 위계질서와 단체생활을 중히 여겼다. 크고 많은 것보다 작아도 알찬 생활을 하였으며, 은행잎처럼 따스한 색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원인 것이다. 풍기지역 사람들이 향촌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곳으로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훼손되지 않고 남은 서원 중 한 곳이다.고려 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안향 선생이 돌아와 주자학을 알렸기에 주세봉 선생은 위폐를 봉안하고 체계를 갖춘 것이 백운동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향교의 성격을 띠었지만 학문을 배우고 전수하는 지방 사립대학 수준이었다. 걸어서 안으로 들어서니 직선으로 일신재, 지락재, 학구재가 배열되어 있다.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각각 별도의 경계 건물도 없고 갑을 관계의 흔적도 없음이 예사롭지 않았다.지금 시절에는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별도의 방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의견충돌이라도 있으면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 시절에 스승과 한공간의 마당을 사용하였으며 함께 거닐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과히 획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내가 첫 직장생활 할 때만 하여도 대표자와 윗선의 간부 그리고 중간 간부들의 방은 별도였다. 윗선의 간부와 의논하고 업무를 추진한 후에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경영주에게 문책을 당하는 것은 윗선의 간부가 아닌 실무를 보는 중간 간부였기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나로서는 가슴 아픈 과거가 되었다. 함께 거닐고 좀 더 진지하게 즉시즉시 문제를 푸는 대화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더 현명한 판단의 결과를 이뤘을 것이다.경험 많은 현인을 뒤따르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헤매지도 않을 것 같은 배움의 공간에 닿았다. 학구재 옆에 스승의 공방인 직방재와 일신재를 우측에 두고 나란히 세우지 않고 약간 뒤로 물려 사제지간의 예의를 엿볼 수 있게 한 건축물. 통상적으로 지체 높은 사람들은 별채 혹은 뒤쪽의 별도 건물을 사용하건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로 배움의 공간은 동쪽에 두고 제향은 서쪽에 세웠다. 스승과 제자가 한 대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가시적인 질서 없이 일렬로 배열한 것 같으면서도 통일되고, 단아한 모습 속에 위계질서를 느낄 수 있었다.당시 선비들이 학문을 배우면서 심신이 피로할 때, 잠시 거닐었을 것 같은 마당 한쪽의 소나무 아래 이르러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선비처럼 먼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 저 멀리 흰 구름이 흘러간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흐트러진 몸맵시를 바로 하라는 듯 모자를 흔든다. 햇볕을 가리려 비뚤하게 쓴 모자를 고쳐 쓴다.옛 선비의 문화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것을 찾고 싶은 나의 마음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일까? 다시 천천히 걷는다. 선조들의 서책과 영정이 모셔진 곳에 이르러 우측에서 좌측으로 옛 사람들의 예의 방식을 지키며 한발 한발 옮겼다. 당시 유생들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더 많이 느끼기 위함에서이다.오백 년 전 세월에서 한참이나 머물다 입구로 돌아왔다. 그사이 서원으로 들 때 맞아 주었던 나무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서 있었다.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노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큰 결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열면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음을 나무는 말하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세대를 지켜보았던 나무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을지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하고 싶었나 보다.매화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도 않고, 고운 향을 풍기지도 않지만 천년을 살아가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다. 그런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힘이 났다. 남편에게 용기를 주려고 구운 열매가 생각나서인지도 모른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열매를 구우면서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맺히는 수천수만의 열매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나무는 오래되고 자랄수록 더 큰 보답으로 되돌려 준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오백 년의 역사를 읽었고, 의견 충돌로 어려움에 처했던 지난 시절도 오늘을 바로 세우는 기틀이 되었음을 인지하였다.석양에 물들어가는 귀갓길에 아내의 눈물 같았던 오백 년의 토실한 황금 열매가 톡톡 떨어진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2019 수필대전 ‘삼강주막 외상장부’

입선 김미경 누구의 외상 줄이었을까. 선명하게 그어진 흙벽 위의 빗금들. 어느 선사시대 상형문자들 같기도 하다. 빈 주막 부엌 벽에는 아직도 외상을 갚지 못한 이들을 빗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목마르던 뱃사공이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남긴 외상일 수도, 과거 길의 가난한 선비가 과거 급제하고 오면 꼭 갚겠다던 외상 표시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늦은 오후 갑자기 방랑벽이 도졌다. 무작정 떠나고 싶어 달려간 곳, 예천 삼강주막이다. 주막 초입에는 현대식 주막이 새색시처럼 단장하고서 관광객들을 먼저 맞이한다. 파전이나 두부, 도토리묵 등이 솔솔 냄새를 풍기며 발길을 끌어당긴다. 원초적인 유혹을 잠시 뒤로하고, 옛날 주막부터 고개를 디밀었다.삼강주막은 백여 년의 시간을 간직한 채, 늙은 주모처럼 오도카니 앉아있다. 마치 북적거렸던 옛 손님들을 아직 기다리는 것처럼. 주막 부엌으로 먼저 들어선다. 조그마하다. 주모 혼자 발 동동거리기엔 안성맞춤일 수도 있었겠다. 낙동강 칠백 리에 마지막 남은 주막인 삼강주막은 그 옛날 봇짐장수들이나 나그네들이 서글픔과 같았을 허기를 달래고, 하룻밤 묵어도 갈 수 있었던 숙식처였다.부뚜막에 작은 찬장이 놓여있다. 그 안의 식기들은 뽀얀 먼지를 인 채로 깊은 잠에 빠져있다. 옛 주인의 따스한 손길이 닿으면 금방이라도 딸그락거리며 깨어날 것만 같다. 아궁이에는 두 개의 가마솥이 올려져 있다. 손님들로 넘쳐나던 주막집 살림을 짐작게 한다. 국솥에서는 뜨끈뜨끈한 국이 금방 끓어 넘칠 것 같다. 밥솥에서는 구수한 밥내도 솔솔 묻어나는 듯하다. 눈치도 없이 도는 시장기를 외면하듯 부엌 벽으로 눈길을 돌린다. 유리로 덮여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본다. 빗금들이다. 주막집 부엌을 여태까지 사선으로 보초 세워둔 저 빗금들.그 옛날 주막집 주모의 외상장부다. 엄대라고도 했다. 예전 글을 모르던 평민들은 셈을 빗금으로 표시했다. 어느 아무개가 얼마란 표시는 전혀 없다. 길고 짧은 빗금들이 전부다. 갚은 것은 가로로 다시 그어져 있다. 오직 주모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것이다. 조그마한 부엌 흙벽을 외상 빗금으로 가득 채웠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주모는 빗금 그어둔 저 빚들을 모두 되받을 거라는 기대라도 했을까. 허기진 나그네들이 배불리 먹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배가 더 부르진 않았을까.어디선가 불이 켜지듯 옛 뱃사공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막걸리 한 사발을 급하게 주문한다. 반은 흘리듯 꿀꺽꿀꺽 마시더니 ‘주모 외상!’을 외치고는 또 다시 뛰쳐나간다. 주모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뱃길 조심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순간 빗금들이 일제히 일어나 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저 빗금들을 남기진 않았던가. 돌이켜보니 빚지지 않은 곳이 없다. 숨 쉬고 살아가는 자연과 공기도 빚이다. 낳아주신 부모님에게는 더 말하여 뭣할까. 목숨까지도 빚졌다. 그뿐이랴. 생각해보면 이 세상 모두가 살아가는 우리에겐 빚이다. 어느 것 하나도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한순간 마음이 무겁다. 빚진 자는 기억조차 못하고 사는 동안, 그 누군가는 저 빗금들을 그어놓고 되갚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걸어온 길이 아득하다. 한 인연이 떠오른다. 믿었던 만큼 나름대로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가슴에는 풀지 못할 매듭만 남겨두었다. 속상한 마음은 외상장부에다 빗금들을 마구 그어대고 있었다. 그 빗금들이 화살이 되어 나를 찌르는 줄도 모르고.마음의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주막 뒤편에 나루터로 올라가는 길이 좁다랗게 보인다. 삼강나루터는 문경 주흘산맥과 안동 학가산맥, 대구 팔공산맥의 끝자락이 만나는 지점이다. 게다가 봉화에서 흐르는 내성천과 문경의 금천, 강원 황지에서 흐른 낙동강 원류가 합류하는 곳이다. 바로 수륙 교통의 요충지다.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었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갈 때도 반드시 가쁜 숨을 잠시 내려놓던 쉼터였다.삼강나루터에 올라서니 개선장군 같은 황포돛대가 늠름하게 매여져 있다. 돛의 색깔이 누렇다. 돛의 재료인 광목에 황톳물을 들여 방수와 방충을 했던 조상의 지혜가 바람에 펄럭인다. 한순간 웅성거림이 뒤에서 몰려온다. 관광객들이다. 기다렸단 듯 황포돛대가 금방이라도 노를 저을 기세로 펄럭거린다. 옛적에는 강물 위를 주름잡았던 몸임을 의기양양하게 뽐내면서.나루터 옆으로 오백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묵묵하다. 시끌벅적했던 나루터의 일대기를 모두 안다는 듯 바람에 연신 머리를 주억거린다. 서산마루가 벌써 불그스레해졌다. 강에도 산 그림자가 내려앉는 중이다. 무작정 달려온 삼강주막 나루터에 걸터앉아 마음의 외상장부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가두었던 마음의 빗금 하나를 그제야 지워버린다.빈손으로 와서 이 정도면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베푼 것은 베푼 것으로 족할 일이다. 그만큼 하늘 외상장부에는 가로의 줄로 그어져 있겠지. 나 자신도 그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조심히 돌아보며 살아야 할 일이다. 멀리서 주막 파전 냄새가 어서 내려오라며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