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 순장<殉葬> / 허정진

“산 위에 저게 뭣꼬!” 1560년쯤 조선, 남명 조식이 고령 주산성 남쪽 능선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대가야 왕릉을 보고 놀라서 외친 말이다. 가야 6국 중 하나인 대가야는 서기 400년경부터 562년 사이에 고령을 중심으로 영호남에서 크게 성장한 국가이다.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리 44호와 45호를 비롯하여 왕족과 귀족들의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이 낙타 등처럼 울끈불끈 솟아 있다. 왜 가야는 신라와 다르게 왕을 평지가 아니라 하늘 아래 언덕에 묻었을까. 망자의 영혼이 하늘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죽어서도 높은 곳에서 도읍지를 내려다보며 백성을 지켜주려는 순정한 뜻이었을까. 능선 위쪽 높은 곳으로 갈수록 규모가 크고 신분이 높은 왕족이고, 아래쪽 낮은 곳일수록 귀족들의 무덤인 걸로 봐서는 권력을 상징하는 일종의 계급의식인지도 모른다. 봉분은 바다 위에 드러난 섬이다. 고분은 가야의 역사를 전해주는 언어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기록문화가 남아있지 않는 가야로서는 그 섬 아래 그들의 삶과 풍습과 정서를 읽을 수 있는 든든한 물증을 가지고 있다. 섬은 흔들리지 않는다. 갯바람과 거친 파도에도 묵묵히 버티는 섬처럼 세월이 가고 사람이 바뀌어도 역사는 변함이 없다. 봉우리 틈새마다 대가야의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대가야 왕릉전시관에 들어선다. 돌덧널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돌방구조 등 모형과 실물을 통해 실제 발굴된 무덤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실증 그대로, 거리낌 없는 세세한 표현에 고분을 직접 발굴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 든다. 오늘날 무덤과는 많이 다르다. 순장(殉葬)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애 터지게 한 목소리로 부르고 대답하는 곳이다. 적게는 5~6명에서 많게는 40여 명까지 순장을 당했다. 가야뿐 아니라 초기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풍습이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이나 그리스, 중국, 일본 등에도 흔한 사실이다. 순장. 사람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 같이 묻히는 일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강제로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세상인들, 어느 누구인들 죽음 앞에 두렵지 않은 자 있을까. 통치자나 남편이 죽었을 때 원하지 않아도 신하나 아내가 죽어 같이 묻혀야 했다. 지배층에게 생사여탈권을 장악당한 피지배층의 낮은 사회적 지위 때문이다. 지배층은 죽어서도 살아서와 같은 생활을 누려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사후세계에 필요한 일꾼이나 시종, 호위무사, 첩이나 신하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말 고대사회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을까. 순장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혼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묘는 자매가 나란히 누워 있기도 하고, 부부가 서로 머리를 반대편으로 두고 외출에서 돌아와 쉬듯 누워 있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어린 딸을 배 위에 누이고 함께 죽은 아버지도 있다. 애처롭다. 평소 “아버지 죽으면 나도 죽을 끼다! 참말이다, 참말!”하며 응석부리던 어린 딸의 목소리가 쟁쟁 들려오는 것 같다. 순장자가 혹시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운명처럼 받아들였거나, 두려워 도망갔거나, 아니면 한번쯤 억울함을 호소할 수나 있었을까. 무덤 속은 얼마나 어두울까. 도망을 간들 호위무사가 쫓아올 텐데 순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먹구름 같았을까. 무덤 속만 무서운 게 아니다. 지배계급이 가진 칼날의 그늘 아래 죽어서도 피지배계급으로 살기 위해 생목숨을 바쳐야 했던 우리들의 삶이 두렵고 비참하다. 현재의 시각으로 순장의 부당성을 판단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 의미의 해석은 아직도 유효하다.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제약 때문에 남편에게 필부종사한 조선의 여성들은 어떠한가. 남편이나 연인의 뒤를 따라 죽는 여인의 절개를 열녀로 칭송하였지만 그 불평등과 불합리가 반생명적인 관습의 미덕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의 ‘갑질’은 또 어떤가. 그런 것들이 어쩌면 현대판 순장은 아닐까. 나의 판단과 의지를 접고 윗사람이나 조직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상황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족을 위해 모멸감도 참아내야 하고 먹고살기 위해 자존감도 견뎌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어야 하는데 상처와 멍에를 홀로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일들, 억울하고 부당한 일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참아야 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아직도 많다. 고분군 능선을 따라 멀리 가야의 바람이 분다. 매미의 우화(羽化)처럼 저 깊은 땅속의 순장자들도 오래된 고통의 침묵에서 깨어나 세상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비상하기를 기대한다. 닫힌 세상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건너뛰라고 위로하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다. 이곳에도 시차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삶과 죽음 앞에 무력하기만 했을 순장 무덤을 보니 그동안 잘 살아왔는지,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이 먹먹해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삶 그 후를 지금 삶에 넣어보면 훨씬 삶의 폭이 넓어질 것 같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 살았는지 되돌아볼 기회” 수상소감 가야의 왕릉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령 대가야 봉분의 규모나 수량도 그렇지만 산등선을 따라 낙타 등처럼 줄지어 솟아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그것도 잠시. 유적지 입구 순장묘 전시관에 들어서자 갑자기 죽음에 의문이 일어서고 삶이 수상해졌다. 현세의 삶이 죽어서도 이어진다는 계세사상, 그 신념이 미더웠던 것이 아니라 그 특권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생명을 내놓아야 했던,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사회구조가 순간 열패와 자폐를 가져왔다. 1500년 전, 과거의 일만은 아니었다.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먹고살기 위해서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집단과 이념을 우선으로 자유로운 삶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없고 남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여름이 꿈틀, 지나가고 있었다.뜻 깊은 상을 받게 돼 기쁘다. 수필대전 참여를 계기로 앞으로 경북지역 여행길에서는 모든 유적이나 유물마다 더 깊은 관심과 애착을 갖고 대하게 될 것 같다. △함양 출생△단국대 사학과 졸업△뉴욕문학 수필 등단△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려상 - 모암 / 최승관

틈이 없다. 투박한 돌이지만 정교하게 맞춰져 있다. 빈틈이 생긴 곳엔 빼곡하게 잔돌이 채워져 공간을 메웠다. 사찰에 닿으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이다. 돌 기초 위에 우뚝 안개를 두른 일주문이 홀연히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소백산 용문사 이끼가 낀 초석 위의 붉은 기둥은 단청이 고운 지붕을 이고 당당히 나를 맞았다. 내륙의 중심인 예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문사 천 년을 만나는 순간이다. 사찰까지 차로가 되어 있지만 입구의 마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온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돌다리를 건너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절 마당에 들어서서 다시 한번 놀란다. 예상치 않게 넓은 경내엔 두 탑이 안개에 싸인 뿌연 하늘에 닿아 있었다. 순간 세상이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가고 전생의 기억이 살아나듯 천 년 전의 세상으로 몰입됐다. 신라 870년에 창건되었다니 족히 천 년하고도 백 년이 더 지난 것이다. 안개 속에서 용이 불현듯 나타나 느긋하게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할 것만 같다. 층층의 석축은 견고하게 쌓아져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집안의 기초가 바뀌게 된 시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농사일과 이발을 하는 아버지가 결핵이 심해져 일을 놓을 때까지 농촌 생활의 어린 시절은 즐겁고 행복했다. 그 후 재봉틀 일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서대문 밖 달동네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기초가 바뀌고 낯선 도시 생활은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줄곧 상위권이었던 성적은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나름 기술도 습득하고 일찌감치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학벌의 부족함을 점점 느끼게 되면서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되었다. 용문사는 긴 석축이 계단식으로 쌓여져 많은 건물을 받쳐주고 있다. 경사가 급한 지형에 여러 채의 법당을 건축하려니 자연히 석축을 많이 쌓게 되어 그 웅장함을 더 한다. 한편으론 아기자기한 고향마을을 연상하게도 해준다. 오래되어 보이는 석축은 자연석이 중심을 이루고 돌쌓기는 모두 면 쌓기 방식이다. 직육면체의 돌로 쌓은 곳이 있는가 하면 모양이 각기 다른 평범한 모양의 돌로 이뤄진 석축도 있다. 전면 긴 구간의 석축은 막돌을 사용하였는데 큰 틈 없이 잘 맞추어져 놀라울 정도로 면이 반듯하고 고르다. 더욱이 이끼가 살아있고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져 녹색 옷을 입은 듯 깔끔하고 정갈해 보인다. 석축의 견고성은 돌끼리 맞물리는 데 있다. 틈새가 생긴 곳은 반드시 작은 돌을 맞게 끼워 흔들림이 없이 괴어졌다. 따라서 틈새를 맞춘 작은 돌들은 아랫돌과 윗돌의 버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접착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순수 자연미를 살리는 데 도움을 주지만 석축이 지지한 집터의 지면에 숨을 쉬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처음 집터를 닦아 성토를 하고 지면을 고르면 자연히 시간이 흘러 다져지면서 물줄기가 생겨나면 석축 틈은 배수로 역할을 하게 되고 틈 사이에 이끼와 잡풀이 자라면서 견고성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사찰의 돌담 역시 마찬가지다. 얇은 돌을 옆으로 깔아 쌓기도 하지만 막돌을 엇갈려 쌓아 튼튼하게 했고 마무리는 기와를 올려 자연미와 인공미를 가미한다. 석축 담을 천천히 걸으며 면면을 살펴본다. 돌 틈 사이에 벌레도 살고 잡풀도 산다. 공생의 교훈이 저절로 완성된다.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가 우선이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호기심으로 해외취업 도장을 찍었다. 중동바람은 가난한 많은 근로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일반직이라 면접 볼 때 모래자루를 메고 30미터를 왕복하는 신체이상 여부만으로 합격 불합격을 판단했다. 시간을 재는 면접관이 내겐 구세주였다. 온 힘을 다한 끝에 당당히 합격하고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었다. 해외 취업은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는 가정의 기초가 되었다. 15년 동안 이어진 반복의 중동 취업, 두 여동생은 대학을 졸업했고 장남인 형은 교사가 되었다. 스물일곱에 시작하여 마흔둘이 되어서야 지겨운 출국을 마감했다. 내 도움은 작은 일부분이었지만 부모님이 쌓았던 가정의 작은 부분을 이어주어 마무리하는 건물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혼도 못한 사십 중반의 내게 남겨진 것은 없었다. 이제 나 자신의 기초를 쌓아야 될 차례다. 요행히 중동 취업 중 배운 기술이 도움이 되어 쉽게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돌로 된 기초는 생명이 길다. 고대로부터 잘 보존되는 유적들은 대다수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돌의 건축물은 시공 방식만 다를 뿐 재료는 여전히 한 가지다. 그런 면에서 사찰에 사용된 돌 다루기에 옛날에는 일일이 망치와 정만으로 제련했을 테니 시간과 노력이 몇 배로 들었을 것이다. 사찰을 방문할 때 주로 문화재나 웅장한 건축물만 보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의 저변에는 돌 기초가 있음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물론 탑도 돌로 만들어져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멀쩡하게 우리 앞에 그 위용을 자랑한다. 돌에 새겨진 망치나 정 자국들 속에 석공들의 장인 정신이 깃든 땀방울을 보아야 할 것이다. 돌에 시간과 역사가 새겨지기 때문이다. 세수한 듯 깨끗한 보광명전 뒤쪽의 돌계단은 보물이 있는 대장전으로 이어져 있다. 보물인 삼존목불좌상과 목각탱을 모신 귀한 곳이다. 보물보다 자꾸 돌계단과 석축에 눈이 더 간다. 동쪽에 있는 진영당과 명부전을 참배하고 위쪽에 위치한 16나한상을 모신 전각 응진전, 다시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원동전과 극락보전, 그리고 응향각을 보고 앞마당으로 내려왔다. 자운루와 해운루, 범종각, 그리고 영남제일강원은 같은 위치에 있다. 요사채와 박물관 사이에 서서 경내 전체를 바라보았다. 갖가지 역사와 많은 사연을 담고 있었지만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석축을 쌓듯 나이가 늘어 사십 중반이 되었지만 늙은 총각으로 포기 상태에서 네 살 아래인 아내를 만났다.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결혼허락 1호가 되었다. 서로가 처녀, 총각으로 다 늙어 결혼한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구세주가 되었다고 했다. 어렵게 살아왔던 과거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이해 차원을 훨씬 넘는 새 가정의 기초는 튼튼하고 견고하다. 결혼 15년 만에 환갑이 되었다. 그 사이 시골마을 누옥으로 이사하여 일용직으로 일하며 다 못한 공부도 하고 작은 농사도 짓고 있다. 부모님이 주신 성실함을 기초로 꾸준히 일하며 돈은 없어도 가난하진 않았다. 형형색색 단청의 건물은 형용키 어려운 감탄을 자아낸다. 나무와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춘 기둥과 서까래는 못 하나 없이도 견고하다. 그 건물의 무게와 중심을 지탱해주는 초석이 있음을 안다. 올려다보는 것도 좋겠지만 내려다볼 때 겸손과 자비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수많은 세월 동안 전쟁과 천재지변 속에서 고귀한 문화재를 간직한 사찰과 건물을 지켜온 시간의 파수꾼은 누구였을까. 별 탈 없이 잘 지켜주는 것은 물론, 화마로 인해 소실된 건축물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초석이 되어 준 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의 파도 속에서 잠시 항해를 멈추고 다가간 예천 용문사에서 천년의 자비를 만나고 겸손의 돌을 본다.“각기 다른 삶 배운다는 마음으로 경북문화알리기 앞장”수상소감 수필이라서 그렇습니다. 가슴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기쁨 보다는 아픔이 훨씬 많은 까닭입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내 삶속 어디엔가 깊은 상처로 남겨질 수 있으니까요. 당선소식을 받고 밤새 뒤척이다 새벽을 만났습니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주셔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북을 자주 가게 된 것은 처가가 대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경유하는 곳곳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 많아 일부러 찾게 되고 감탄과 경이를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회로 경북문화에 관한 관심을 갖고 더욱 수필에 정진하게 될 것입니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을 알아가고 배워 간다는 마음으로 경북문화를 아끼고 널리 알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수상의 영예를 주신 ‘경북문화체험수필대전’ 관계자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2012년 월간 ‘신문예’ 동화 신인상△2012년 제23회 월하시조백일장 장원△2017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9월 장원△2018년 샘터시조 당선

장려상 - 최고의 접목 / 조현연

보름께의 달이다. 언저리가 환하다. 달빛에 의지해 한밤의 추위와 어둠 가득한 터미널을 빠져나온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발 앞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점점이 불그스름한 물체가 그림자에 박혀 도드라진다. 놀란 마음이 걸음을 막지만 발은 이미 그림자 속에 들어선다. 달빛이 환할수록 그림자는 길고 짙다. 그림자가 된 몸이 그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닥의 물체를 밟지 않기 위해 매트릭스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허우적이며 림보를 하는 순간에야 넋을 잃는다. 쭉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풍성한 잎사귀와 알알이 매달린 감들이 달빛 쟁반 위에서 빛난다. 머잖아 곶감이 되고 홍시가 될 수많은 열매를 만들어 낸 나무의 자태는 밤이 주는 위용에 힘입어 더욱 아름답다. 절정을 향해 가는 열매 역시 그림자만큼이나 힘이 있다. 단단하다. 곱다. 축제가 끝난 도시, 술 취한 이들의 소란만 아니었다면 달빛이 비추는 나무 아래 좀 더 머물렀을 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밤이 새도록 감을 세고 있었을 게다. 사뭇 깨져 버린 감흥이 낯선 도시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회한을 몰고 온다. 분명 나는, 옹골져서 돌아가겠노라 했다. 사표를 쓰고 귀농의 도시에 머물기로 한 건 기능을 상실한 몸보다 한 발짝 먼저 엎어져버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함이 컸다. 귀농·귀촌 도시가 당연하게 나를 농부로 만들어 줄듯이 단단한 열매를 맺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툭. 가을이 더욱 깊어가고 있건만 여물지 못한 열매가 힘겨운 듯 떨어져 내린다. 의지란 갖기보다 갖지 않기가 쉽다. 더 쉬운 쪽에 기대어 방기했던 날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이를 보는 나무의 마음이 나와 같을까. 나는 묻는다. 열매 하나와 감나무, 어디에다 실패를 덧씌워야 할지를. 내 오랜 침묵과 칩거는 실패라는 단어에서 헤어나지 못한 결과인지 원인인지를. 그 나무가 보고 싶다 생각한 건 순간이다. 새벽녘, 몰아치는 비바람이 아물지 않은 감을 떨구던 때였으니 줄곧 존시(Johnsy)로서 그 나무를 보고파 했는지도 모른다. 하늘 아래 첫 감나무라 했던가. 750년 세월을 먹은 감나무라 했다. 가로수도 감나무인 곶감의 도시, 곶감특구로 지정된 상주 외남면에는 임금께 진상된 곶감 나무로 알려진 감나무가 있다. 1468년 조선 예종실록 속 곶감을 영글었던 감나무는 지금까지도 수천 개의 감을 내어놓고 있다. 비바람이 몰아쳤으니 마지막 잎새 하나 힘차게 펄럭일 때 그제야 병상에서 일어나겠다는 존시라면 고목의 위용보다 감나무가 감을 지켜 안고 있을까가 더 궁금할 테다. 가는 길, 부랴부랴 찾아본 기사에서 하늘 아래 첫 감나무는 200여 년이 젊어져 있다. 2010년 산림과학원 유전자 분석에서는 530년생 최고령 접목나무로 감정되었다 한다. 그만큼 젊어졌으니 수천 개 열매 맺기쯤이야 뭐가 어려우랴. 자연스레 흘러가는 삶이 노화이고 퇴화일진대 병증에 흔들리고 소멸하는 것 또한 당연할 터, 무어 욕심으로 지금껏 감꽃을 피우는 청춘이냐고 나는 따질 터였다. 베어먼 할아버지라도 다녀갔을까 두려움을 안고서, 존시로 살던 내 삶을 정당화하고 연장하려는 발버둥이었을까. 햇볕이 옹골차게 들이차는 곳에 자리한 감나무는 쉬이 지나칠 만큼 평범했다. 오랜 수령을 자랑한다면 내 복부만큼이나 커다란 둘레와 마천루만큼이나 높은 키를 자랑해야 했다. 최고란 수식어에 그저 크게, 화려하게만 여기며 반발을 품고 온 게 무색할 만큼 야윈 노목에 멍해진다. 밑동은 썩고 줄기는 갈라진 채 확연히 늙음을 드러낸 나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여물어가는 감을 받치고 선 굽은 가지가 증손주를 안고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를 노래하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행복하게 더 오래 사세요, 할머니께 하던 말인데 사실 늙음은 소멸이라 마음에 품고 있었다 말할 수 있을까. 아니 하나의 생명이 존재를 다한 채 빛을 발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응당 그것이 삶이거니 그런 삶의 황홀을 맞보기를 바라기에 일찍 찾아든 병에 쉬이 무너졌던 것이구나 생각한다. 그때야 다른 멀쩡한 몸의 기능마저도 퇴화시켜버린 나의 태만을 오만을 자책한다. 예사로 넘긴 접목묘의 이미지를 그려보며 수백 년을 거슬러 그때의 감나무를 상상한다. 지금 숨결이 사그라들 듯한 몸으로도 찬란히 감을 머금고 풍성한 감잎을 흩날리고 있는 감나무의 지난 생애를. 어쩌면 그때, 젊은 감나무에게도 질병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상처 입은 나무는 열매 맺지 못하거나 아물기도 전에 수두룩 떨어지는 열매를 봐야 했을 게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조선 시대 농부의 마음에도 깊은 그늘이 드리웠을 게다. 한 개의 감이 온전히 가지를 벗어나는 것은 흐르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같은 가지에 있다고 모두 감이 되어 떠나는 것도 아니다. 먼 꼭대기든 담벼락에 얹힌 가지에 있든 옮길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감이 되려 달빛과 별빛과 햇빛과 바람과 또 술 취한 이들의 손길을 견디어야 한다. 그럼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안녕을 말하려는 감나무의 안녕을 찾는 일, 그래야 감이 존재할 수 있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감나무가 열매를 맺기 바라던 농민은 어떤 이였을까. 상처 입은 감나무를 위해 밤낮의 노력을 쏟아 찾아낸 조선 시대 농부의 비결, 그것은 힘을 낼 수 있기 위한 보다 힘을 낼 수 있는 것들과의 접목. 농부는 감나무와 고욤나무 묘목을 덧대어 하나의 감나무를 만들어낸다. 병든 나무를 살려내고 보다 풍부한 과실을 얻기 위해 서로 다른 나무를 접목시킬 발상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아니 병들었다고 포기하지 않은 그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실로 놀라운 농부의 정성과 기술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접목묘가 된 하늘 아래 첫 감나무는 질병을 이겨내고 오래도록 살아남아 농부의 바람을 이어온다. 썩은 줄기로도 여전히 수많은 열매를 맺는 최고(最高)의 감나무로 수백 년 전부터 외남면 소은리 그 자리에서 감꽃을, 감을 피워내고 있다. 하늘 아래 첫 감나무에서 열린 감으로 빚은 곶감은 최고가의 상품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다 한다. 최고, 최초, 이런 수식어가 붙으면 상품가격은 오른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내놓지 못한 상품이 된 나를 세상에서 유폐시켰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최고도 최초도 젊음도 늙음도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수사(修辭)쯤으로 여겨진다. 이런 감정과 생각에 빠진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최고가, 최초, 최고, 실패 이런 단어가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단어들이 내게로 달려오는 이 순간을. 나는 묻는다. 과거에서만 첨벙하던 내게 미래를 묻는다. 질문은 엉키어 또 질문을 만들어내고 늘 한결같은 대답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더 이상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분명 미래에 관한 질문이 접목되어 나의 현재를 단단하게 붙들려 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낮의 햇볕 한 줌이 내 그림자를 만든다. 홍시가 되려는지 곶감이 되려는지 감이 대롱대롱 흔들릴 때마다 그 빛깔이 완연하다. 햇살은 노목의 생채기를 뚜렷이 비춘다. 노목의 감나무에게 그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목 옆으로 나는 더 다가선다.“꽃 피우고 열매 맺는 글쓰기 위해 더욱 정진할 것”수상소감 가지치기가 한창인 아파트의 소음이 물러가고 나니 휑한 나무가 확연합니다. 잘려진 나뭇가지들이 나무 아래 수북하게 쌓여있습니다. 어떤 나무인지 알아맞히기도 쉽지 않습니다. 꽃피고 열매 맺는 건 머언 날의 일이라 당장은 잘려나간 나뭇가지에 키마저 줄어든 나무가 안쓰러워집니다.글쓰기도 그러하겠지요. 아직은 휑하고 아쉬움만 가득한 글일지라도 스스로를 더욱 더 가지치기 하다보면 더 채워지고 옹골져 가겠지요. 좀더 아름답고 시들지 않게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 가겠지요. 아직 충분히 가지치기 하지 못한 나무이기에 쑥스럽다가도 글쓰는 일에 즐거움과 흥미를 느끼는 일을 지속할 수 있다면 부끄러움은 조금 멀리 두고 상을 즐기겠습니다. 경북문화체험 수필대전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장려상 - 딱재이 / 조미정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문경아 새재는 웬 고갠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구성진 가락에 문경새재 높은 고갯마루도 가쁜 숨을 쉬어간다. 소백산맥 준봉들이 흘려놓은 산 부스러기가 고봉을 엎어놓은 듯 작은 들판 위에서 봉긋하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던 길이 기역자로 꺾어지는 농암천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여남은 채 되는 농가 끄트머리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파란 지붕이 푼더분하다. 사라져가는 것들은 모두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야 하나 보다. 문경 농암면 내서리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문경한지장전수관은 개 짖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 앉아 있다. 지대석 위에 ‘삼식지소’라고 돋을새김한 비석이 없었다면 잰걸음으로 그냥 되돌아나갔을지도 모른다. 허름하게 기운 옛 작업장이 그대로다. 집 앞에는 여름 한 철 울창하던 닥밭이 겨울 햇살 속에 누워 민숭민숭한 털을 고르고 있다. 흙 가마 위에 켜켜이 쌓아놓은 닥나무 몇 단만이 코끝이 매콤한 겨울바람을 이기고 있다. 낯선 방문객을 목전에 세워놓고 무형문화재 김삼식 선생의 손길이 분주하다. 한 며칠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어 닥 껍질 벗기기 좋은 날이란다. 어른 키만큼 자란 닥나무가 된서리를 맞고 누런 잎이 지면 밑동까지 바짝 잘라 가마의 뜨거운 증기로 여덟 시간씩 푹 찐다. ‘닥무지’의 과정을 거쳐 껍질이 흐물흐물해진 닥은 닥칼로 쓱쓱 민다. 이때 뱀 허물처럼 벗겨지는 겉껍질을 피닥이라고 한다. 정어리처럼 매끈한 가지는 구들을 뜨듯하게 데울 장작으로 들어가고 거무튀튀한 나무껍질이 종이가 된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닥 껍질 벗기기가 한창인 작업장 바로 옆 난간에 피닥들이 치렁치렁 널려있다. 물을 뿌려가며 얼렸다가 다시 빠닥빠닥 말리는 중이다. 날이 추워야 단단한 껍질이 잘 벗겨진다니 아이러니하다. 월동을 해야 꽃나무에 꽃이 피듯 닥도 겨울을 나야 종이로 거듭날 수 있는 모양이다. 나무의 본성을 그대로 지닌 채 얼었다가 녹는 과정을 반복하는 피닥을 보고 있자니 나를 보는 듯 친숙하다. 음력 시월 열여드렛날, 분만실에서 밤새도록 힘을 주던 나는 난간에 널어놓은 피닥처럼 맥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열 시간 남짓한 진통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내려오기는커녕 거꾸로 돌아앉으며 가슴께를 치받기 때문이었다. 생사가 오가는 분만실 문을 밀고 들어온 촌부가 의사의 가운자락을 애타게 붙잡았다. 손이 귀한 집안의 외동 며느리인 어머님이셨다. “아들이겠능교, 딸이겠능교?” 딸이면 남우세스럽다며 수술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셨다. 간호사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남편의 동의 끝에 수술은 정오가 다 돼서야 이루어졌다. 그날의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낳고 덤으로 주먹만 한 종양이 앉은 난소 한쪽도 떼어냈다. 하지만 골라내고 또 골라내도 종이에 남은 한 점 티끌처럼 마음 구석에는 남모르는 서러움이 조그맣게 박혀 있었다. 수북한 피닥을 앞에 두고 동굴 속 곰처럼 웅크리고 앉는다. 크게 숨을 들이쉰다. 마음속에 들러붙은 흑피를 빡빡 긁어내면 닥 껍질은 가려져 있던 뽀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속껍질인 백닥이다. 한지장은 물에 불린 백닥을 콩대와 고춧대를 태워 만든 잿물에 넣고 푹 삶은 후 오래도록 뜸을 들인다. 재의 알칼리 성분이 한지를 더욱 탄력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증해’의 과정을 거친 닥은 다시 흐르는 물에 사나흘 담가두었다가 햇볕에 내어놓는다. 햇살에 바래지며 닥은 더욱 뽀얗게 거듭난다. 그 위로 가끔 내게 보여주신 어머님의 내리사랑도 겹쳐진다. 퇴근 시간보다 더 일찍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를 거둬주시기도 하고, 새색시라는 타이틀이 떨어진 지 오래되었어도 냉장고의 반찬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치를 담가주기도 하셨다. 어머님의 정성에 감복하여 딴에는 잘해보겠다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 맏며느리도 거들지 않는 제사상을 차리거나 자주 찾아뵈어 곰살궂게 다가서려 애썼다. 십수 년간은 피닥처럼 추리한 나도 말간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 하얗게 표백되었으리라. 한지를 만들 때 가장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시간이 백닥을 만들기까지다. 지난한 공을 들였다고 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춘 건 아니다. 닥 돌 위에 올려놓고 닥 방망이로 곤죽이 되도록 두들기는 ‘고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혹독해 보여도 비로소 딱딱한 나무의 본성을 버린 닥이 마지막 고치를 만드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수백 수천 번의 짓이김을 통해 야들야들해진 닥 섬유를 보면 그 고통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대견하기만 하다. 문득 고통스러웠던 지난 일이 생각난다. 남편의 실수로 우리 식구가 거리로 내쫓길 상황에 놓였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아들에게 바가지를 긁을까 봐 지레 염려가 되신 어머님이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친정어머니에게까지 모진 말을 쏟아냈다. 천만 갈래로 마음이 찢겨진 내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발끈한 것은 일종의 쿠데타였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쌓인 그간의 서러움이 폭발한 나는 그날 이후로 어머님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선 내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홀로 제사 지내는 어머님이 안타까워 슬쩍슬쩍 눈길을 돌리곤 했다. 불똥거리는 서운함과 싸우느라 스스로를 짓이기던 시간은 어쩌면 나를 한층 더 성숙시키기 위한 날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해를 거친 닥 섬유를 물이 가득한 지통에 풀어 긴 막대로 휘휘 저어가며 풀대친다. ‘해리’의 과정에서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이 닥풀이다. 서리 내리기 전의 황촉규 뿌리를 짓이겨 만든 끈끈한 점액질을 닥물에 섞으면 닥 섬유가 물에 가라앉지 않고 고루 퍼진다. 양떼구름처럼 동동 떠다니는 닥 섬유를 한 움큼 뜨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촉이 미끌미끌하다. 은근슬쩍 마음을 토닥여준 시누님들 손길 같다. 덕분에 맺힌 응어리도 조금씩 풀어졌는지 흐르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적당한 종이 두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듯하다. 가끔 어머님께 안부전화를 한다. 그러면 불효한 지난 일은 다 묻어두고 백발성성한 어머님의 목소리가 성근 가슴속으로 들어앉는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종이를 뜰 수 있을까? 결심 끝에 공중에 매단 줄 하나에 의지한 틀을 전후좌우로 흔든다. 어느 종이보다 한지가 질긴 이유는 담아두는 법 없이 종이 물을 곧바로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앞으로 떠서 뒤로 흘려보내고 좌로 떠서 우로, 우로 떠서 좌로 흘려보내는 외발뜨기를 통해 유난히 긴 닥의 섬유질은 얽히고설켜 단단한 고를 이룬다. 고부간도 마찬가지이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서로의 허물을 감싸 안을 때 사이는 더욱 돈독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만 더 유연할걸. 매사 지나치게 뻣뻣했던 내가 후회스럽다. 지난 세월이 덧없어진 나는 차곡차곡 포개어둔 습지 위에 묵직한 돌을 얹어 물기를 쭉 뺀다. 그러고는 다시 달군 철판 위에 얹어 여분의 눈물을 건조시킨다. 바싹 마른 종이는 상처를 머금었던 후유증으로 아직도 표면이 우툴두툴하다. 홍두깨로 두들겨 거친 표면을 다시 매끄럽게 다듬는다. ‘도침’의 과정을 통해 그간의 케케묵은 감정의 찌꺼기는 모조리 여과되리라. “딱재이여. 한지 만드는 사람을 경상도 사투리로 그리 불러.” 나를 향해 불쑥 던진 한지장의 주름진 미소가 따습다. 윤기 자르르하고 유난히 질긴 한지를 닮아 굴곡진 인생이 은은하게 투영되어 보인다. 한 그루의 닥나무가 변하여 한지가 되듯 세상을 대하는 내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지고 넉넉해지는 듯하다. 얽히고설키며 오늘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나 역시 종이를 뜨는 ‘딱재이’인 것을.“포기하지 말고 글쓰기 도전하라는 용기 얻어”수상소감 참 덥고 지루한 여름이었다. 나 혼자만 더우면 짜증이라도 내겠는데 저 하늘 전체가 들끓고 있으니 뭐라고 불평도 못했다. 비단 날씨만 그랬을까. 건강에 대한 염려로 오랫동안 연필을 놓고 있으면서도 마음 언저리는 늘 수필에 가 있었다. 하지만 글은 점점 더 멀어졌다. 혼자 글을 쓰다 보니 당겨주는 문우가 없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그러다가 바람도 선선해진 구월, 가족들과의 여행으로 문경에 들렀다. 천년 종이 한지를 만났다. 한 그루의 닥나무가 한 장의 종이가 되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우리네 삶과 무에 다르랴. 다녀와서 올해 처음으로 연필을 긁적였다. 공모전 마감 날짜가 바로 코앞이라 빠듯했지만 며칠 만에 글 한 편이 만들어져서 정말 좋았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해마다 경북문화체험에 공모하는 이유는 문화체험을 워낙 좋아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큰 상을 한번 받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였다. 글쓰기를 시작한지 어느덧 8년. 그동안 잠시 절필했던 몇 년을 제하고라도 장독 하나 깼을만한 시간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상을 받았지만 늘 목이 말랐다. 그럴듯한 대표작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올해 역시 내 성에는 차지 않는다. 하지만 또 한 번의 귀한 상을 주셔서 무척 감사하다.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더 글을 쓰라고 용기를 주신 듯하다. 종이를 만들 듯 앞으로는 꾸준히 글을 쓰겠다.△ 1967년 출생△ 제6회 철도문학상 우수상(2014)△ 제6회 시흥문학상 우수상(2014)△ 제1회 여자의 행복 수기공모전 대상(2015)△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2015)△ 제4회 등대문학상 우수상(2016)△ 제7회 독도문예대전 최우수상(2017)△ 제11회 해양문학상 은상(2017)

장려상 - 달빛 풍경 / 정영태

빨리 일어나라는 신호인가. 늦가을 햇살이 슬그머니 창문을 넘어온다. 거실 안으로 들여놓은 갯국화는 진한 향기를 뿜으며 코끝을 간질인다.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을 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요동친다. 단김에 청암사 단풍놀이를 가기로 마음먹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물이 맑아 바위가 푸르게 보인다는 청암사. 성주 무흘구곡을 지나 청암사 들머리에서부터 흥분된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고샅길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는 물감을 쏟아 부은 듯 휘황찬란하게 변신해 있었다. 다래다래 붙은 나뭇잎은 가지가 좁다고 아우성을 질렀다. 이른 봄에는 연둣빛 새순이 상큼하게 다가오더니 가을에는 하늘을 뒤덮은 단풍이 고즈넉한 숲길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한 걸음씩 발길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붓한 길로 들어서니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굵직한 금강송 여남은 그루가 대장군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청암사 일주문은 늦가을 햇볕을 푸근하게 쬐고 있었다. 청암사를 알게 된 지는 십여 년이 넘었다. 어느 해 이른 봄, 김천 수도산으로 등산을 갔다. 봄이라 산 아래는 파릇한 나뭇잎이 골짜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산 위로 오를수록 겨울의 잔재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도산 정상에 도착하니 해는 벌써 서쪽 하늘에 뉘엿뉘엿 걸려 있었다. 산속이라 해 떨어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섬광과 같은 둥근달이 휘영청 올랐다. 머리 위로는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고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은 산길의 길잡이가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산새들조차 고요히 잠든 시간에 멀리서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절이 있을까 하며 소리를 따라 내려가니 달빛 속에 비치는 아늑한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깊은 산중에 사찰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구름 속에서 벗어난 보름달이 사찰 경내를 비출 때는 섬뜩했다. 기와지붕 용마루에 올라앉은 이문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용솟음칠 것 같은 위엄 있는 자세로 포효하고 있었다. 그나마 간간이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이곳이 사찰임을 짐작하게 했다. 집에 돌아온 후로는 어둠 속에 보았던 그 사찰에 대해 궁금증이 곰비임비 쌓여만 갔다. 밤 풍경이 아름다웠던 그곳은 청암사였다. 경북 김천시 증산면 불령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청암사. 소소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이곳은 대한불교 조계종 직지사 말사로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다. 천 년 전, 신라 헌안왕 때 도선 국사가 주춧돌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인조와 정조 때 화재로 모두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1900년 초 대운 스님이 복구하여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청암사 들머리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감돌았다. 우거진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공기는 삶에 찌든 정신까지 말끔히 씻어 주었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까지 가는 길은 크고 작은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그 옆에 조선 시대 정혜스님의 일생을 적어 놓은 비문이 있었다. 사찰로 가는 길목에 작은 샘이 나왔다. 돌에 ‘우비샘’이라고 새겨 놓았는데 청암사는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란다. 대웅전이 있는 곳이 소의 머리라면 이곳은 코에 해당한다고 적어 놓았다. 바가지에 물이 넘치도록 퍼서 마셔보니 물맛이 달고 차가웠다. 향기로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속은 이내 푸르게 젖어 들었다. 우비샘과 마주하고 있는 바위에는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사연을 안고 이름을 팠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후대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암사는 인현왕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숙종의 정비였던 그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 후궁 장희빈에게 왕후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폐서인이 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왔으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한옥을 다시 지었다. 그곳이 지금의 극락전이다. 청암사에 오게 된 연유는 친정어머니 외가가 이 부근에 있었다. 청암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서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에서 복위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청암사에는 시간조차도 멈추어 있는 듯했다. 사찰은 여느 양반집같이 오밀조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육화전에서는 승가대학 비구니 스님이 모여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낭랑하면서도 차랑차랑한 음성이 청암사 경내를 휘돌아 감았다. 그 광경을 보느라 한동안 서 있다가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을 햇살을 받은 목조 석가여래좌상 얼굴에는 동그마니 미소가 번져 나갔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인현왕후도 소슬바람을 가슴에 안고 이 길을 걸었으리라.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단풍잎도 하나둘씩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뒹굴고 있다. 느직느직 청암사 경내를 돌고 나니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던 번뇌가 조금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해는 서산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을 무렵 청암사를 빠져나왔다.“기억 속 글감을 더듬어 한 편의 좋은 추억 기록”수상소감 가을이 무르익는 냄새인가요, 흩어지는 바람 속에 미묘한 향기가 묻어옵니다. 낮에는 불볕더위, 밤이면 열대야. 좀처럼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더위도 계절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낮게 떠도는 새털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높게만 보입니다. 길섶에 줄지어 피어 있는 코스모스는 가는 바람에도 허리를 휘청거리며 은은한 향기를 뿌립니다.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결실의 계절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경북문화체험 전국 수필 대전에 입상했다는 소식은 저에게 상큼한 청량제가 됐습니다.나들이하러 다니면서 눈여겨보았던 것을 글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글감이 되겠냐 싶다가도 기억을 더듬어 펜을 잡으면 한 편의 좋은 추억으로 기록됐습니다.부족한 글이지만 당선시켜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아울러 함께 한 지인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계간 문장 신인상△문장 작가회 회원△대구수필가협회 회원△대구문인협회 회원△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장려상 / 창이 있는 미술관-이행희

이리저리 뻗은 소나무 줄기 사이로 커다랗고 펑퍼짐한 봉분이 자리했다. 공원 입구 양쪽에 자리한 거대한 무덤이 여기가 천년고도임을 몸으로 보여준다. 펄럭이는 깃발과 번잡한 행사장을 지나가니 숲이 우거진 언덕이다. 송두리째 몸을 내밀어 손님을 반기는 굽은 소나무 아래로 나무계단을 오른다. 시정의 어수선한 소리들이 일순 모두 사라진다. 다른 시공간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하다. 해묵은 왕벚나무 길을 따라가니 나지막한 장방형 건물이 나타난다. 좁고 긴 나무 막대기들을 이어 붙인 벽면이 친근하다. 90도로 꺾여 연결되는 넓은 벽은 나뭇결이 새겨진 길쭉한 황토빛 블록을 세워 붙여, 나무판자로 지은 듯한 느낌을 준다. 질박한 구조물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편안하게 녹아 있다. 오랜 세월 무던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바윗덩이 같기도 하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 경주 솔거미술관이다. 건축가 승효상, 그는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선구자 김수근 문하를 거쳐 현재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를 운영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의 자택인 수졸당,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등을 설계하였으며 국내뿐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지역과 미국, 유럽 곳곳에 그가 디자인한 구조물이 있다. 어느 날 남루한 달동네를 지나던 그는 가진 게 적은 이들이 많은 부분을 서로 나누며 살고 있는 공간 구조에 감탄한다. 그리고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평생의 화두로 삼아 작업 중이다. ‘빈자의 미학’이란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이라고 역설한다. 가난할 줄 안다는 것은 바로 비우고 나눌 줄 안다는 뜻이렷다. 솔거미술관은 한국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이 수백 점의 작품을 기증하여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 아평지 연못가에 지어졌다. 신라 시대의 유명한 화가 솔거率居의 이름을 따, 2015년 문을 연 공립미술관이다.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은 몸통이 비늘처럼 터져 주름졌고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굽어 새가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설화가 유명하다. 훗날 색이 바래어 단청으로 덧칠을 했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은 세월 따라 모두 훼손되어 사라지고 설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전시실로 들어가자 낙락장송 한 그루와 맞닥뜨린다. 벽면을 뒤덮은 소산 박대성 화백의 대작이다. 밝은 만월 아래 침엽 한 잎 한 잎이 선명하고 풍성하다. 수묵으로 그린 흑백의 세계에 노란 달이 빛을 뿌린다. 힘차게 뻗은 가지에는 굴하지 않는 화가의 기개가 어려 있다. 달빛 아래 소나무만큼 먹물과 어울리는 소재가 또 있을까. 맞은 편 벽도 온통 소나무 숲이다. 커다란 노송들이 전시실 마루에서 천장까지 솟았다. 옛 문인화의 한 편에 시구를 적어 넣듯 화백은 소나무 발치에 자신의 이야기를 한글로 풀어 놓았다. 서체가 유려했다. 유년시절 들은 신라의 솔거 이야기를 평생 가슴 속에 품어왔다는 그는 이 그림을 그리고서야 그의 꿈을 이루었다고 했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소나무를 그리려 평생을 노력해 왔을 그의 집념이 가슴 아리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그림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구불구불한 노송들의 자태에서 기가 뻗어났다. 소산의 염원에 감응한 솔거의 넋이 천 년의 시간을 건너와 그의 손을 움직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산은 십여 년 전부터 경주 남산에 터를 잡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시실 가운데 놓인 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작품을 감상한다. 마치 남산기슭 소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는 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바깥세상을 잊는다. 경사진 회랑을 따라 오르내리고 중정에서 잠시 쉬기도 하며 차례로 전시실을 찾아간다. 웅장한 산수화와 섬세한 화조화를 감상하며 걷다 보니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네모난 유리창이 하나 나타난다. 바닥에서부터 사람 키 높이만큼 트여 있다. 창 밖에 있는 연못과 하늘, 그리고 나무와 풀을 담담하게 품고 있다. 창은 건축가 승효상이 미술관에 선물한 작품으로, 날씨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이라는 해설사의 설명이 함축적이다. 고쳐 그리지 않아도 되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 안은 겸손한 그림이다. 인간의 작품이 어찌 자연을 넘어설까. 거기다 시간의 흐름까지 담아내다니, 오늘 마주한 그림들 중 가장 훌륭한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자욱하게 비 오는 날 이 창 앞에 서고 싶다. 그러고 보면 그림도 창이다. 그림을 통해 화가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나타내고, 우리는 화가의 사유와 감성을 미루어 짐작한다. 작품은 그가 자신을 보여주고 우리가 그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솔거미술관에서 승효상의 창과 소산의 창을 보았다. 이들은 모두 지극히 한국적이고 자연친화적이었다. 정답고 편안했다.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테라스로 나온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건축물을 이어주는 트인 공간이다. 한 쪽은 사무실과 상설 전시실이 있는 큰 구조물이고 다른 쪽은 기획전시실이 있는 작은 공간이다. 테라스는 우리 전통 주택에서 바깥채와 안채를 연결해 주는 마당 역할을 한다. 여기에 서면 아래편 연못과 문화엑스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황룡사 9층탑을 음각으로 새긴 경주타워가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그 뒤편으로 경주타워에서 빠져나간 듯, 황룡사 9층탑 모양의 건물이 양각으로 서 있다. 마치 서로를 끌어당기는 모양새로 서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승효상의 창이 품었던 아평지 연못으로 향한다. 신라 때 군마에게 물을 먹이던 곳으로 추정되는 아평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운치 있고 아늑한 못이 되었다. 연꽃이 곱게 피어 있고 못을 둘러싼 나무들이 나지막하게 물 위로 가지를 뻗고 있다. 바람이 분다. 못 앞의 기다란 풀잎들이 다 같이 눕는다. 바람을 따라 굽이치는 푸른 곡선의 흐름이 소산의 그림 속 굽은 소나무 가지를 어루만지던 바람과 같다. 천년고도의 산기슭을 감아 흐르는 구름의 결도 곡선이다. 내 가슴에 바람 흐르는 창이 하나 열린다.“수필 쓰기 통해 세상을 보는 폭 더 깊고 넓어져”수상소감 공모전에 처음으로 응모해 봤습니다. 장려상을 받게 됐습니다. ‘장려’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좋은 일에 힘쓰도록 북돋아 줌’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계속하도록 초대받은 셈이라 무척 기쁩니다.수필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쓰고 싶은 것을 끄적이기 시작했더랬습니다.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냥 썼습니다. 어떤 것은 생각보다 쉽게 써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풀어나가기가 너무 힘이 들어 마무리도 못 하고 기진맥진하기도 했습니다. 글이 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계속 이것저것 써갔습니다.막연하기만 했던 시간이 지나가면서 글쓰기를 잘 시작했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더군요.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돼, 세상을 보는 폭이 조금 더 넓고 깊어진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 자신이 크고 깊어지는 일이었고 스스로 잘 몰랐던 저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수필 쓰기는 그냥 좋은 일을 넘어서 참 좋은 일인 듯합니다.참 좋은 일, 수필 쓰기에 힘쓰도록 북돋움을 받았으니 열심히 꾸준하게 작업해보겠습니다. 뽑아주셔서, 북돋아 주셔서 고맙습니다.△2013년 ‘수필과비평’ 등단△부산문인협회, 부경수필문인협회 회원△수필집 ‘노을을 잡다’

장려상 - 일곱 웅덩이에 별이 뜨면 / 이순혜

오랜 옛날 인간은 무엇으로 소원을 빌었을까. 역사에서 배웠지만 직접 만져보고 느끼지는 못했기에 그들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기원(祈願)의 기원(起源)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 동해안 칠포리 일대에는 암각화가 곳곳에 있다. 비바람에 지워져 암각화인지 모르는 것도 있고, 언덕이나 골짜기에 있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게 많다. 길을 만들며 가야 하는 여정이지만, 발품을 파는 만큼 얻는 게 있으리라는 생각에 신발 끈을 야무지게 조인다. 칠포해수욕장을 조금 벗어나자 야트막한 산 초입에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그 뒤에 큰 가마솥만 한 바위가 보인다. 안내판이 없다면 하릴없이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바위로 여길 것이다. 수풀을 헤치고 들여다본다. 거무튀튀한 표면에 희끗희끗한 돌꽃이 피었고, 군데군데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점을 찍어놓은 듯하고 상형문자 같기도 하다. 오랜 비바람에 씻긴 탓에 원형을 또렷이 분간하기 어렵다. 다른 암각화를 찾아 산모퉁이를 도는데, 안내판이 다시 걸음을 붙잡는다. 야트막한 산을 오르자 이번에는 제법 큰 바위가 보인다. 평면은 물론 경사면에도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일부는 닳고 닳아 문양인지 비바람이 새긴 흔적인지 알 수가 없다. 빛의 음영을 살펴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바꾸어 본다. 손끝으로 문양을 하나씩 짚어가자 비로소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까마득한 옛날, 그러니까 겨우 쇠붙이로 연모를 만들 줄 알던 때, 이 땅에 조상들이 새겨놓은 문양들이다. 사다리꼴, 윷판, 북두칠성, 그리고 의미 모를 문양들…. 피라미드 밀실에 보존된 벽화처럼 내세관이 그려진 것도 아니고 반구대 벽화처럼 장엄한 스토리가 새겨진 것도 아니다. 이 문양은 울퉁불퉁한 돌 위에 점을 찍은 듯 줄을 그은 듯 투박하게 새겨져 있다. 더 큰 호기심을 품고 내륙으로 차를 돌린다. 곤륜산 동쪽을 끼고 개천을 따라간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더는 길이 없어 차를 버리고 걷는다. 안내판 저만치 묵정밭 한가운데에 거북처럼 웅크린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너럭바위는 갈라지고 일부는 부스러졌지만, 성혈과 별자리, 그리고 여성 성기 모양의 문양이 또렷하다. 기도문을 읽듯 문양을 하나씩 손으로 짚는다. 나와 선사시대 사람과 세월의 거리는 삼천 년이다.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기도문이 내 손끝에 닿았을까, 아이를 많이 점지해 달라는 어머니, 사냥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하는 아버지, 배곯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들, 비를 내려 가뭄을 물리쳐 달라는 제사장,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내 손끝으로 전해오는 것 같다. 자동차를 곤륜산 서쪽으로 향하니 ‘오줌바위’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달바위, 학바위, 장군바위, 세상에는 멋진 이름이 많다만 왜 하필이면 오줌바위인지 궁금하다. 이정표를 따라 신흥리 북골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려 골짜기를 따라 걷는 동안에도 바위의 이름이 지어진 내력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왼편 산비탈에 묘한 풍경 한 점이 보인다. 오줌바위다. 검고 누르스름한 바위가 골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가까이 올라가서 보니 바위에 굴곡이 만들어지고 웅덩이가 있다. 마치 강이 흐르는 모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의문이 풀린다. 바위가 아래로 길게 누웠는데 마치 오줌이 흘러내린 형상이다. 오줌바위에 올라, 한 발 한 발 떼면서 바닥을 살핀다. 오래도록 물이 흐르면서 물길을 냈고, 그 물길 따라 자그마한 웅덩이가 생겼다. 걸음을 옮기니 군데군데 윷판형 그림과 별자리 고누판, 그리고 기하학적 문양이 보인다. 하늘의 말씀을 공손히 담고 제단에 음식을 바치는 의식을 치러낸 흔적이다. 우리네 어머니의 기도가 그랬다. 늦은 밤이면 어머니는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리 없이 바깥으로 나갔다. 우물에서 맑은 물 한 그릇 길어 뒤란 장독대에 올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생명은 하늘이 점지해 준다고 믿은 어머니는 금자동아 은자동아 참한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삼신할매에게 빌고 또 빌었다. 우리네 어머니는 칠성별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삶을 지탱하는 신념이었다. 어머니는 하늘을 향해 손을 모았다. 객지에 있는 딸 무사히 돌아오게 하소서. 기도로 낳은 병약한 아들 아프지 않게 하소서. 밥벌이하러 나간 남편 무사하게 하소서. 생을 다하는 날까지 기도하던 어머니는 별이 되었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나 또한 기원의 두 손을 모은다. 모든 기도는 하늘로 올라간다. 산과 강을 누비며 수렵을 하던 원시의 기도가 그랬고, 무엇이든 이룰 것 같은 문명 시대의 기도도 그렇다. 인간의 힘이 한계에 닿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문명의 빛이 세상을 환히 밝혀도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한량없이 작은, 자연의 힘에 비하면 아주 나약한, 게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어딘가에 기대왔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던 사람들은 하늘이 있어 팍팍하고 거친 삶을 위안할 수 있었다. 어느새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든다. 사람들은 고단한 일상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발에서부터 올라온 피로가 허리까지 번져도 마음은 한결 가볍다. 종일 발품을 판 소득이 풍성하다는 충만감 때문이리라. 암각화는 하늘과 소통하는 플랫폼이다. 어둠이 세상을 덮으면, 암각화 일곱 웅덩이에 고인 물에 별이 뜨겠지. 그러면 기원은 하늘로 올라가고 칠성별은 지상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반짝일 것이다.“내 인생의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수필”수상소감 처음 사랑은 수필이었습니다.내 몸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문학에 대한 그 어떠함을 길러내는 일은 퍼즐 맞추기와 같았습니다. 그리움이라는 조각을 가운데 두고, 각기 다르게 존재한 아픔을 귀퉁이에 두고, 하나씩 그림을 만들어가며 많은 날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날은 웃었습니다. 그렇게 내 삶에 수필은 존재했습니다.수필로 인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낙선의 쓴잔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이라는 끈을 붙잡고 있을 때,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루 중에 제일 분주한 시간이었습니다. 분명, 더 정진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느슨하게 묶은 운동화 끈을 다잡아 맸습니다.컴퓨터 화면에 수필 방이 깜빡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몸을 낮추고 있는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저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습니다.아마도 마지막 사랑도 수필이 될 것 같습니다.△포항 출생△대구은행백일장 수상△2013포항소재수필 최우수상△2017년 호국보훈문예 추모헌시 최우수상△포항수필사랑회원

장려상 - 직지사의 오유지족(吾唯知足)-윤미영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생을 한 번 더 사는 것”이라고 한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놓쳤던 지난 일들을 갈무리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이 기쁨은 올해 팔순을 맞으신 친정어머니께 온전히 드리고 싶습니다.어느 날 황악산 산행을 마치고 고찰 직지사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대웅전을 돌아서는 길목에서 단아한 약수터 앞에 멈추었지요. 오유지족(吾唯知足). 네 글자가 섬광처럼 ‘연’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물 위에 비친 건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어머니가 언제까지 기다려 주실지 모른다’ 는 조바심은 저의 얕은 글밭을 채근했습니다. 글길이 잘 풀리지 않으면 새벽을 달려 오유지족을 찾아갔습니다.부족한 글밭에 튼실한 알곡 하나 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철없는 글심을 냉엄하게 때로는 뜨거운 목소리로 담금질해 주시는 교수님 감사합니다. 늘 격려해 주신 문우님들과 가족 친구 감사합니다.△수필과 비평 등단△부산문인협회 회원△부산수필과비평작가회 회원△부경수필문인협회 회원

장려상 - 쉼표 하나 찍고 / 유진선

오래된 사찰이나 교회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 수도자들의 맑은 영혼이 가득한 곳이라 그런 것일까. 그곳에 들어설 때면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특히 수도원은 세상과는 동떨어진 다른 사람들이 은거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왜관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찾은 건 이른 봄날이었다. 귀촌 후에 같은 일상이 단조로워지면 사찰이나 성당을 보러 다녔다. 깊은 산중이나 호젓한 길 끝의 여느 곳과는 달리 수도원은 시내 가운데 있었다. 가톨릭 수도원은 그들만의 색깔이 있다. 무채색의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 고요한 가운데 나름의 기품을 안고 있다.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사찰과 다르지 않지만, 명칭부터 세상과 떨어져 오롯이 자신을 찾는 일에 전념하는 곳이라는 느낌이다. 종교가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야 함은 공통된 과제인 것일까. 살다가 쉼표 하나쯤 찍고 싶을 때 쉬어 가라는 안내가 반갑게 느껴진다.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공동체로 백여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수도회의 수사나 신부는 공동생활을 하고 독신으로 지내며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다. 삭발하고 정진하는 스님의 삶도 같을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수도생활은 어떤 것일까. 호기심이 인다. 연륜이 쌓인 고찰이나 성당은 문화재로 지정되곤 한다. 그러나 성당은 이국적인 외관 때문인지 신도가 아닌 사람이 선뜻 다가가기 쉽지 않다. 마당 한가운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구 성당으로 갔다. 문고리를 당겨본다. 잠겨 있는 문틈으로 세월을 품고 있는 마룻바닥과 가지런히 놓인 의자들이 보인다. 한낮이 지나 기울어진 햇살이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아지랑이로 흔들리는 그것이 음표로 바뀌어 우아한 칸타타의 음률이 흘러나올 듯하다. 문을 열면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던 기억 속의 소년을 만날 것만 같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절의 단청은 다른 듯 닮았다. 단청이 목재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고 사찰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알리려 했다면, 여러 종류의 색유리를 짜 맞추어 그림이나 무늬를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는 종교적 의미가 더해진다. 성서를 쉽게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것은 성모를 상징하는 장미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화려하게 보이는 조각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뜻을 담고 있다고 하니 무심하게 바라보곤 했던 창문의 의미가 새롭다.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곳곳에 수도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일터가 보인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원의 지침이다. 이곳은 전국의 수도원에서 필요한 성물을 제작 공급하여 자족하는 공동체로 살아간다. 유리공예를 하는 곳도 있고 성작을 만드는 금속공예와 *이콘을 제작하는 작업실도 눈에 띈다. 몇 년 전 화재로 곳곳이 무너져 새로 지은 본당 앞에는 베네딕도 성인이 동상으로 재현되어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 층의 대성당에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신부들의 연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은 얼마나 긴 혼돈의 시간이던가. 파란 눈의 신부도, 젊음을 바친 수사의 모습도 보인다. 세상의 유혹을 노동과 기도로 지켰던 그들. 사진 속 그때도 교회의 종은 울렸고 기도는 노래가 되었으리라. 실내에는 수도원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주일에는 그윽하고 웅장한 성가가 천상의 소리처럼 울려 퍼지겠지. 본당을 나오면 침묵으로 이어진 복도 끝에 전시관이 보인다. 겸재의 산수화 스물한 점이 이곳의 역사가 담긴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수도원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산수화는 성물이나 라틴어 문서와 함께 묘한 일치를 이룬다. 수도원을 돌아보던 중에 산책하던 수사 두 분과 마주쳤다.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반갑게 내미는 투박한 손에서 노동의 흔적이 전해진다. 좋은 시간 되라는 인사와 함께 들고 있던 묵주를 선물로 쥐여 주고는 총총히 사라진다. 긴 *수단자락을 펄럭이며 돌아서 가는 뒷모습에 흐릿하게 감춰져 있던 모습 하나가 겹쳐진다. 여러 개의 댐이 감싸 안은 춘천은 어디를 가든 그림자 같은 안개가 따라왔다. 가끔 가방을 받아주던 남학생이 일부러 나를 기다렸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았다. 나 역시 아침 안개로 가려진 길 저 편에 모자를 눌러쓴 소년의 모습이 보이면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소나기에 우산을 건네기도 하고 소월의 시집을 수줍게 내밀기도 했다. 대학 진학 후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고 수도원으로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고 잊혀졌다. 지금은 만난다 해도 기억나지 않겠지만, 해질녘 어느 날 골목 어귀에서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소년의 맑은 눈빛만큼은 어제처럼 떠오른다. 그도 아까 만난 수사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리라. 무엇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런 곳으로 오게 했을까. 젊음의 뜨거운 가슴을 기도로 채우게 한 힘은 무엇일까. 가난과 정결, 그리고 순종의 삶을 스스로 택한 심연의 마음을 어찌 짐작할 수 있을 것인가. 깊은 묵상의 가치가 가슴을 울린다. 수도원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쉽게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찰에 비해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벽이 높았다. 수도원을 돌아보면서 그곳이 평화로운 휴식의 장소임을 알게 된 것은 귀한 발견이었다. 지친 여행길에 동네 어귀에 있는 강건한 느티나무 그늘을 만나 쉬어 가듯 마음 밑바닥에서 청량한 바람이 일렁인다. 느린 걸음에 여유로움으로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소란스럽지 않게 오롯이 나를 만날 수 있어서 더 소중했다. 봄이 찾아드는 수도원 뜨락에 때 늦은 봄눈이 꽃잎처럼 날린다. 막 푸른 잎을 내미는 고운 잔디밭에 살며시 내려앉은 눈꽃은 잠시 머물다가 금세 물방울로 몸을 바꾸어 버렸다. 그 시절, 내 곁을 스친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이콘: 성모님이나 그리스도, 또는 성인들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일컫는다. *수단: 가톨릭 사제들이 입는 길이가 발목까지 오는 정복. 겨울에는 검정, 여름엔 흰색을 입는다.“마음에 휴식 찾아준 수도원의 고요함에 감사”수상소감 그날은 꽃잎 같은 봄눈이 내렸드랬습니다. 오늘은 꽃잎 같은 낙엽이 내립니다. 수도원 뜰을 걸으면서 한없는 정적 속에 내 마음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그날의 느낌을 글로 옮겨 보려 했지만 다는 옮길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제 능력의 한계이기도 하고 채 여물지 않은 마음의 끝이기도 하겠지요.그런 글을 여러 편의 글 중에서 올려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더 잘 해 보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든든한 지원자 남편이랑 두 아이와 기쁨과 고마움을 나누겠습니다.이번 겨울엔 다시 수도원을 찾아 순백의 고요함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라도 올려야겠습니다.수고하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대구일보 담당 선생님, 고맙습니다!!△서울 출생△대구 수필문예대학 22기 수료△2014, 2016년 등대 문학상 입상△2014년 주부수필 입상△2018년 수필미학 등단

장려상 - 무량수전, 극락정토에 살다 / 신은영

부석사 무량수전은 어머니같은 포근함을 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쉴 새 없이 떠올랐습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깊고 슬픕니다.나는 무량수전에 조용히 말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무량수전을 위로했습니다. 오랜 세월 그곳에서 흔들리는 중생들에게 위로를 건넸을 무량수전을 토닥여주고 싶었습니다.부석사를 나서는 길, 무량수전이 내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무량수전이 바라보고 있는 극락정토에 어머니가 계시다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속세의 고통을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계시다고 합니다. 내 마음속 깊은 슬픔이 덕분에 씻겨 내려갔습니다. 다시 힘을 내어 살아보겠다 다짐하며 부석사를 떠났습니다. 또다시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엔 부석사 무량수전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주부△ 부산대 철학과 졸업

장려상 - 연심, 회연 뜰에 피다/백후자

누구를 향한 몸짓인가. 하얀 꽃망울이 수줍게 몸을 비튼다. 노르스름한 꽃술 안으로 봄빛 한가득 머금고 방싯거린다. 쭉쭉 뻗은 가지 따라 피워낸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품새가 고혹적이다. 다소곳한 손짓에 이끌리듯 따라간다. 회연서원의 봄이 백매화 향기로 그득하다. 한강 정구선생이 심은 백 그루의 매화 중 아흔아홉 그루는 세월 속에 묻혀갔지만, 그들을 대신하는 또 다른 매화가 서원의 앞뜰과 담장을 수놓는다. 고즈넉한 서원의 운치와 어우러진 화조풍월(花鳥風月)에 취해본다.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선생이 학문적 기초를 닦고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서원 경내로 들어서니 사당과 강당, 그리고 동서재가 고색의 풍취를 자랑한다. 강당은 선생이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회연초당의 옛터이며, 선생의 문집판인『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다. 반듯하면서도 유려한 필체에서 담담한 선비의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서원 안쪽으로 살짝 돌아가니 숭모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을 비롯하여 유물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경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능통한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대부분 소실되고 소량만 전해진다니, 마치 내 역사를 잃어버린 양 안타깝다. 선생의 초상화 앞에 멈춰 섰다. 인물이 훤했다. 과연 뭇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을만했다. 학식과 덕망을 겸비하고도 인물까지 더했으니 오죽했으랴. 어쩌면 숱한 여인들의 발길이 서원 주변을 서성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강 선생은 매화에도 애착이 많았다. 백매원을 만들어 백 그루의 매화를 심어 가꾸었는데, 지금은 오직 한 그루만 남았다. 그 매화나무에는 ‘한강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봄의 정취 속에서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매무새를 정돈하고 그 앞에 서 보니 기분이 묘하다. 금방이라도 하얀 도포 자락 들어 올려 손을 내밀며 반길 것만 같다. 근방에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몇 그루의 나무에도 같은 팻말이 붙어 있다. “이 매화도 순종 한강매인가요.” “이건 한강매라 할 수 없습니다. 문중에서 한강매라 칭하고 있긴 하지만 현재 한강매는 딱 한 그루뿐입니다.” 원예를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해설사의 설명에 귀가 번쩍 뜨인다. 벌과 나비, 바람에 의해 수정된 씨앗으로 번식된 매화는, 순종이 될 수 없기에 한강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구한 나날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온 한 그루의 한강매에 다시 시선이 머문다. 사연 많은 세월을 버텨 온 흔적이 역력하다. 매화에 서린 넋을 쫓다 보니 어느새 봉비암이다. 봉비암은 봉비연(鳳飛淵)에서 유래되었는데, 봉비연은 봉비가 춤을 추다가 돌연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곳이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사방을 둘러본다. 기암절벽 아래로 펼쳐진 대가천은 이들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봉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한강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흠모하였다. 그의 곁이면 어디든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처지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없는 그곳은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그의 손길이 닿는 매화가 되고 싶었다. 그를 향한 그리움이 그의 뼛속으로 스며들어 싹이 트고 꽃이 되어 피기를 원했다. 매화 꽃비 찬란한 날, 백매원 뒤뜰에서는 연회가 무르익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그녀가 춤을 추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춤성으로 흘러내렸다. 손끝에 그를 두었고 눈빛에 그를 담았다. 함께 가지 못하는 그의 애달픈 마음이 그녀의 가냘픈 몸짓 안에서 설움으로 배어났다. 어둠이 깔렸다. 춤을 추던 매화 꽃잎은 뜰아래로 내려앉았다. 흥도 가라앉고 연회는 갈무리 되고 있었다. 그는 떠나고 빈자리만 휑하였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던 그녀의 몸이 매화 꽃잎 떨어지듯 연당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더는 그녀의 춤사위를 볼 수 없었다. 이듬해부터, 매화가 소보록하게 핀 백매원 뜰에 나비가 제집인 양 날아들었다. 나비는 천년을 살 것처럼 매화에 마음을 쏟았다. 나비의 연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 매화의 향기는 사그라지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매화나무의 잎이 마르고 생기가 빠지며 조금씩 시들어갔다. 나비는 아흔아홉의 매화를 잃는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마지막 딱 한 그루, 그를 본 것인가. 나비는 농염한 자태로 날개를 팔랑거렸다. 선비의 기품을 물씬 풍기며 그가 서원 뜰을 거닐고 있다. 얼마나 고대했던 날인가. 이날만을 위하여 온몸을 던졌지 않았던가. 억겁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 몽실한 바람이 매화 가지를 흔들었다. 백 그루의 매화가 바람을 탔다. 한 여인의 넋을 생각하며 회연 뜰을 걷는다. 다시 매화가 핀 뜰에 머물러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꽃으로 피고 그 향기는 매혹적이다. 피었으되 홀로 피었다가 홀연 물속으로 져버린, 그 연정에 연민이 밀려와 짠하면서 아프다. 매화는 한 번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이 아니다. 매년 때를 잊지 않고 고아(高雅)하게 피어난다. 하물며, 오랜 그리움이야 어떠하랴. 금방 피었다가 져버릴 연심(戀心)이 아니기에 그 애틋함이 날로 더해간다. 행여 늑장이라도 부리면 보고 싶은 임을 만나지 못할까 봐 일찌감치 서두르는 것이리라. 이른 봄에 얹힌 바람이 꽃잎을 스쳐 간다. 봉비의 넋이려나. 매화 한 닢 살포시 내려앉는다. 사모하던 임이 깃든 한강매를 지키며, 나비 되어 하늘거리다 드디어 그의 꽃이 되었나. 사백여 년 그의 곁을 맴돌던 넋, 그녀가 방시레 웃는다. 하얗게 피어난 여심(女心)이 향기롭다.“마음에 집중하며 쓴 글, 온전한 나만의 시간 느껴”수상소감 무한한 여백을 가진 가을 하늘이 사색의 공간을 내어줍니다.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뭔가로 채워야 할 것 같습니다.대지가 풍성합니다. 뿌리에 줄줄이 매달린 열매와 가지에 주렁주렁 늘어트린 결실이 넉넉하게 다가옵니다. 펼쳐진 황금 들판만큼이나 평온한 시간입니다.늘 시간에 쫓기듯이 살았습니다. 이제는 내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습니다. 편하게 쓰면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생각의 저장고가 열리면서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멋진 가을날,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습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써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알고 노력하겠습니다.아직은 미약하지만 걸어오는 길에 힘이 되어주신 분이 많습니다. 늘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눈길 한 번 더 가게 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차근차근 채워나가겠습니다.△경북 청송 출생△계간 ‘문장’ 신인상 수상△문장작가회, 달구벌수필문학회, 한국수필문학회 회원

장려상 - 왕피천 봇도랑 길 / 배재록

주상절리를 닮으면서도 포석정 같은 길, 원시적이면서 생명의 의미가 담긴 길이 있다. 강의 맥박을 느끼며 기암절벽 아래를 걷는 그 길이 왕피천 봇도랑 길이다. 봇도랑은 들판에 물을 끌어들이는 전통농업의 문화유산이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력으로 지렛대와 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쪼개고 굴을 뚫어 봇도랑을 만들었다. 천수답에 생명의 젖을 내어주는 봇도랑이다. 이 길이 유명한 것은 자연박물관을 방불하게 하는 최적의 탐방 코스이기 때문이다. 삶에 덧난 상처를 치유해 주는 신력 같은 길이다. 왕피천의 웃음 같은 어쩌면 눈물 같은 물길 앞에 섰다. 걷는 행위는 원초의 즐거움이 따랐다. 걸으면서 다리를 흔들어 놓으니 사유가 생겼다. 대자연의 스튜디오에 초대받았으니 잠자던 잠재력이 무더기로 뛰쳐나와 진한 사유를 종용했다. 눈길을 줄 때마다 다르게 보이고, 상상력을 자극해 글을 만들어주었다. 그 위대한 자연이 전하는 공명을 받아 적으며 묵직한 수필로 옮겼다.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길 아래는 지치지 않고 흐르는 왕피천 물이 은빛 물비늘을 일으키며 우렁우렁 흐른다. 좁다란 외줄기 봇도랑 길을 따라가면 치솟은 산과 하늘과 은빛 강물의 풍광이 무던하던 가슴을 감동하게 만든다. 절벽, 봇도랑, 강물, 모래톱과 자갈이 어우러진 모습은 별천지다. 노천에 핀 꽃이 되어 감흥을 자극한다. 왕피천 봇도랑 길, 일명 은어길은 2억 년의 시간을 지내왔다는 동굴 성류굴을 1.5km 지나 근남면 구산2리 성산지 못에서 출발한다. 은어가 산란을 위해 바다에서 왕피천으로 거슬러 올 때는 장관이라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차로 아홉 구비 길을 돌아야 도착하는 마을인 굴구지까지 2.2km 길이다. 출발에 앞서 지하금강이라 불리는 성류굴 탐방을 하여 안성맞춤이었다. 은하천오작교 등 12개의 광장에 저마다 종유석과 석순이 270m 펼쳐져 비경을 뽐내며 호강을 시켜주었다. 굴 탐방 소요 시간은 30여 분이면 충분했다. 탐방로가 개발되기 전에는 태풍 매미로 봇도랑은 파손이 되어 제 기능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다. 울진군에서 특색 있는 걷기와 탐방코스로 다시 개발하여 가는 곳마다 풍경과 역사와 사색을 하게 했다. 출발지인 백발 소는 마을 아이들이 소를 풀어놓고 멱을 감고 놀던 곳이다. 해맑은 내 유년의 기억과 꿈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왕피천을 풀어 놓고 높은 산 앞섶에 숨겨져 있는 추억을 불러내 본다. 코에서 물이 나오도록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추억이 은빛 물줄기를 따라 일어선다. ‘구보 소’, ‘종대방우 아가리’, ‘ 까치 소’, ‘긴 언덕 아래 소’는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온 지명이다. 대자연에 걸맞게 이름조차 그대로 사용했다. 은어길 일부 구간은 봇도랑에 모래를 채워 예쁜 길을 만든 곳도 있다. 탐방로 가에는 안전을 위해 지지대를 만들거나 데크를 깐 곳도 여러 곳이다. 터널로 된 구간이 3곳이 있는데 길이 25m, 높이 130cm 정도 크기이다. 지렛대로 구멍을 뚫고 정으로 단단한 바위를 뚫었다. 왕피천 물줄기를 따라서 절벽 아래를 왕복 2시간 걸었다. 걷기는 풍경을 선물했다. 역사를 음미하고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주었다. 민가도 없고, 인간의 때가 묻지 않고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곳. 한반도 이남에서 가장 험준한 오지 중의 오지 왕피천 봇도랑 길이다. 병풍처럼 불쑥 솟아오른 기암절벽은 산양이 사는 곳이다. 척박한 돌 틈 사이에서 나무들이 녹색 치맛자락 휘날리며 싱싱한 생명력을 뽐낸다. 1급수 왕피천의 물을 마시고 자란 식물의 풍경이 그래서 절색인가 보다. 내 유년에 멱 감고, 천렵하며, 꿀꺽꿀꺽 마셨던 강물이라 감회가 새롭다. 왕피천은 나에게 가난의 기억과 절망의 시간이 배어 있는 고향이기도 하다. 야수 같은 물줄기가 바위를 넘으며 높이 솟구친 뒤 들쭉날쭉 암초 위로 산산이 부서진다. 물줄기의 일부는 봇도랑으로 흘러 젖줄 같은 생명수로 변한다. 그 생명수 봇도랑에 들어선 물고기들을 잡으며 놀던 추억이 얼핏 스쳐 간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금강송의 아름다움이 감흥의 샘을 한껏 퍼 올린다. 아름다움은 숲 사이로 따라오며 시원한 눈 맛을 선사한다. 숲이 주는 피톤치드에 맑아오는 기운이 편린을 몰아내기 시작하고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뭐든지 다해 줄 것 같다. 메아리의 진한 여운이 감흥의 뇌세포를 자극한다. 사람들 시선에서 벗어나 둘만의 럭셔리함과 프라이빗함을 즐길 수 있는 곳. ‘신들의 정원’이라 해도 좋은 자연 그대로가 숨 쉬는 곳이다. 고요한 자연의 땅. 때 묻지 않은 왕피천이 흐르는 곳에 있는 봇도랑 길을 걷는다. 왕피천은 영양군 수비면 금장산(849m)에서 발원하여 총 61km를 굽이굽이 동해로 흘러가는 1급수 물길이다. 일반 민물어종은 물론 수달, 까막딱따구리, 딱새, 황어, 은어 등 희귀동식물들을 키워준 생태의 보모다. 쉼 없이 흐르는 왕피천 물결은 억겁의 시간을 두드려 바위를 매끈하게 다듬었다. 스스로 바위를 타고 넘느라 하얀 물결을 만든다. 물길을 방해하면 분노 색을 띠나 보다. 듬성듬성 놓여 있는 용의 알 같은 둥근 바위들이 고운 결을 드러낸다. 마치 연못에 피는 연꽃같이 아름답다. 산이 높아 왕피천 봇도랑은 홍수를 피하려고 강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봇도랑은 강과 평형이 되는 곳까지 길게 이어져야 물을 댈 수 있다. 강에 보를 만들고 그 통로를 인력으로 만든 봇도랑이다. 총길이 2km인 왕피천 봇도랑은 논배미에 줄 생명의 젖을 묵묵히 실어 날랐을 것이다. 왕피천의 험준한 굴곡을 고스란히 본떠서 끊어질 듯 아스라하게 이어지는 봇도랑 길이 산에 흰색 테두리를 쳐놓은 것 같다. 굽이치는 곡선 묘미가 관능적이다. 달리 보면 마치 꾸불꾸불 기어가는 구렁이를 닮았다. 작년에 일본 교토 ‘철학의 길’을 걸었다. 2.5km 하천을 따라 걸으며 사색해서‘교토학파’를 낳은 길이다. 이에 비해서 왕피천 봇도랑 길은 ‘농자천하지대본’ 생명의 젖을 실어 날랐던 위대한 길이 아닌가. 하류의 왕피천은 더 낮게 흐르기 위해 깊은 소를 곳곳에 만들었다. 그래야만 수많은 생명체에 젖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웅숭깊어진 시퍼런 소가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 늘 겸손하고 속 깊은 정을 베푸는 소를 닮을 일이다. 왕피천 물결은 자유를 찾아 자연스러운 형상을 드러내며 아래로 흐른다. 유려한 곡선과 특유의 물색을 띠며 장애물을 유연하게 뛰어넘으며 우렁우렁 흘러 동해로 여행 간다. 물줄기도 때로는 잠시 멈추어 쉬었다 다시 흐른다. 미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멈춘다. 그래야 고요할 수 있고 앞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치유하며 ‘일신우일신’ 나아간다. 더러는 고요한 물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아 명경지수와 같은 풍광이 보인다. 괴암절벽에 서서 바람에 춤추는 소나무가 물속에 비쳐 최고조 풍경을 준다. 산천은 자연적인 캠핑장과 청소년 야외수련장을 만들어 놓았다. 말을 타고 달렸던 화랑들이 놀던 자리도 이곳만은 못했을 것이다. 절벽 바위가 수억 년 동안 떨어져 쌓인 곳 ‘테일러스’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봇도랑 길의 장관에 눈과 마음은 호사를 누린다. 왕년에 생명의 젖줄이었던 왕피천 봇도랑 길을 걸었다. 수려하고 신력 같은 풍경에 구겨진 마음 자락까지 치유가 되어 기분은 날아갈 듯 행복하다. 오지여서 숨어 있던 원시적인 자연환경. 봇도랑 길은 최고의 힐링이었다.“날선 인식 바탕으로 희망과 지성이 되는 글 쓰고파”수상소감 내 안태고향 울진 왕피천 ‘봇도랑 길’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전통농업의 유산이 힐링 농업으로 관광자원으로 변모한 성공사례가 사유를 하게했다. 사라져가는 농업의 현실을 직시하고 변신의 미래를 엿보게 수필로 표현을 했다.자음과 모음을 잘 엮은 촉수로 전통농업 부흥의 날선 소회를 피력했다. 감성을 희롱하는 원시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왕피천의 역동적인 풍경을 묘사했다. 대자연 가르침을 준 우렁우렁 흐르는 왕피천이 일필휘지를 하게 했다. 생명의 젖줄을 간직한 향수가 글쓰기 본능을 자극해 문화체험 수필응모로 이어졌다. 매혹적인 봇도랑 길에 거는 장밋빛 미래가 앞장서 유혹하며 퇴고를 종용했다.자유를 꿈꾸며 흐르는 왕피천처럼 희망과 지성이 되는 글을 쓸 각오다. 날선 인식과 형상화 훈련으로 그윽한 문향을 맡는 날까지 오체투지로 글을 쓸 참이다.정진의 기회로 수상을 안겨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힘찬 폭포가 되게 다리를 놓아주신 문우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에세이문예, 울산공단문학, 곰솔문학, 울산문인협회 문우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경북 울진 출생△2017년 제9회 목포문학상 수필 본상수상△2018년 제13회 머니투데이경제 신춘문예 당선

장려상 - 천구도 / 박홍

산새들의 재잘거림을 벗 삼아 발걸음을 옮긴다. 수련으로 들어찬 연못가에 다다르니 서쪽 천축산 능선에 우뚝 선 부처바위의 그림자가 맨 먼저 길손을 맞는다. 잔잔한 물결 위로 살포시 숨었다 얼굴 내미는 수줍음에 도량 넓은 자비의 마음까지 풍겨나 한층 고아(高雅)하다. 부처님의 손길 따라 대웅전으로 향하는 마음이 몹시 설렌다. 낯선 이를 만나러 수백 리를 달려온 길이다. 법당에 들어서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 다음, 고개를 들어 한참이나 천장을 살펴본다. 두 대들보에 한 마리씩 붙어 있는 금빛의 작은 거북이가 눈에 들어온다. 잃어버렸던 자식을 겨우 찾아낸 듯 희열이 감돈다. 거꾸로 매달린 채, 목까지 없어도 너무나 안온해 보인다. 순교(殉敎)의 혼이라도 지닌 듯 흩어짐 하나 없는 의연한 모습이다. 애처로움과 동정심에 의문까지 덮친다. “혹여 화공이 잘못 그린 건 아닌지요.” 옆에 있는 스님에게 물어보았다. 스님의 대답인즉슨, “이곳은 화기가 승하여 수호신(水護神)으로 거북이를 모셔 불이 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원하는 답 대신 의아심만 곧추세운다. 스님의 마음엔 애오라지 의상대사가 창건한 아주 먼 옛적의 이 절집에 잦았던 화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불심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실마리라도 잡힐지 경내로 나가본다. 대웅보전 기단 밑 좌우 쪽에 처형당한 죄인의 목처럼 댕그라니 머리만 남아 있는 두 거북이의 모습이 애잔하게 보인다. 죽어서도 날아들 화마를 지켜내려는 듯 하늘로 치켜든 기상이 가상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화기를 막는 방도라지만 몸통과 머리를 떼어 놓은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이 연줄처럼 이어진다. 얼마 전 일이다. 정결하고 웅장해 보이는 단양 대흥사를 찾은 적이 있다. 대웅보전이란 편액의 큰 글씨가 본당에 걸맞게 무게감을 더했다. 여느 절집과 다른 이름 ‘대웅전(大雄殿)’이 아니라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쓰인 글귀에 선뜻 물음표가 그려졌다. 본당 뜰 옆엔 낯선 스님과 거사 한 분이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곁으로 다가가 넌지시 물어 보았다. “묻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보세요.” 옆에 앉은 거사가 퉁명스러운 투로 말을 받는다.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한다. “같은 뜻이라.” 보다 못한 스님의 대답이다. 상냥스러운 말씨 속에 자비로운 부처님의 모습까지 내비친다. 비록 거칠긴 했어도 가슴 깊이 파고들게 하려는 거사의 충고로 들렸다. 순간 “염(念)하면 각(覺)한다”는 어느 법사의 설법도 생각났다. 장고(長考)에 빠져든 한순간이다. 부처바위가 비춰준 그림자 따라 보고 들은 것을 가슴 깊이 숙성시켜 대중에게 베풀라는 부처님의 혜안을 거북이에 심어놓았으리란 여실지견(如實知見)의 한소식이 뇌리를 치고 든다. 어찌 그뿐이랴. 큰 스님들의 말씀처럼 ‘이 세상 만물 중에 어느 하나 천한 것이 없거늘’ 진정 자비는 생각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천장의 좁은 대들보에 그려져 있는 가련한 두 마리 거북이, 하늘의 계시를 받지 않고서는 어찌 그 큰 뜻을 이 거북이에 심어놓을 수 있었을까. 이름 하여 나는 이 거북이 그림을 주저 없이 천구도(天龜圖)라 부른다. 큰 보물이라도 얻은 듯 가슴이 콩닥거린다. 1994년에 이곳 울진군 불영사의 대웅보전(국가지정 보물 제1201호)과 후불탱화(보물 제1272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천장의 대들보에 붙어 있는 그 두 마리 거북이, 오랜 세월 지치지도 않았는지 일그러짐 하나 없다. 커다란 탱화에 눌리어 지내온 무명의 작은 용사들이 아닌가. 비록 왜소한 가슴에 새겨 담은 심오한 뜻은 하늘을 감복시키고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큰 나무에 가리어 작은 숲에 담긴 진수를 놓치고 있지나 않은지……. 안타까운 마음에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찾는다. 어쩌면 오늘날 서양문화의 뿌리를 이룬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그림처럼 영겁으로 불성(佛性)을 잇는 불신(佛神)의 몫까지 다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험한 일도 당하기 십상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자주 절집을 찾는다. 좀처럼 울분을 참기 힘들 때는 아침저녁 끼니때마다 ‘용서하며 살라’는 발원문을 봉독한다. 뼈저린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시방세계를 불국정토로 만들려는 천구의 가르침도 새겨본다. 사르르 녹아든 가슴에 푸른 하늘마저 담아본다. 참 시원하다. 퇴직하고 나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다. 잘못한 것들이 더 많아 보인다. 때론 꿈에까지 나타나 잠을 설친 일도 있다. 좀 더 잘할 걸, 좀 더 사랑해 줄 걸, 좀 더 베풀 걸.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 별안간 몇 해 전 입적하신 혜운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다량의 맑은 물로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듯, 남모르게 저지른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업(善業)을 베푸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 어찌 세상을 밝힐 수 있단 말이냐.” “탐욕과 미움을 버리고 용서와 배려로 자신의 삶을 살아 나가라.” 저 멀리서 목탁소리에 젖어든 스님의 다그치는 말씀이 천구의 소리되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인도의 성녀 마더 테레사의 말도 따라나섰다. ‘최선의 미덕은 봉사’라고, 마음이 열리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봉사도 선업이요, 한 가닥 자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그렇다. ‘어지러운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봉사의 길을 찾아 나서자.’ 굳게 다진 마음가짐으로 복지센터를 찾아 나섰다. 때마침 20여 명의 회원들이 ‘연극을 하자.’며 소매를 걷어 젖힌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소비자 피해를 줄여주자는 내용이다. 대본을 외우고 연출까지 하는 데 몇 해를 보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속을 태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도 터져 나왔다. 가슴을 열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강산이 한번 바뀔만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서로 간의 기쁨이 쌓일수록 보람 또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젠 힘이 떨어진 가위개미가 되었지만 무재칠시(無財七施)로 작은 것 하나에도 부처님의 마음을 그리며 정성으로 이어 나간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하늘의 높은 뜻을 대오(大悟)했을지언정 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내 비록 이름 없는 촌로에 지나지 않지만, 세파에서 찌든 영혼을 갈고 닦는다. 자주 찾는 절집이지만 오늘처럼 맑고 밝은 기운을 가져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재잘거리는 새들의 노랫소리, 이름 모를 풀잎의 속삭임마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흘러내리는 불영계곡의 수정 같은 물이 보름달처럼 환하다. 세상을 밝히는 것은 머리에 담긴 생각이 아니라 가슴을 적시는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비심이리라. 거북이의 거룩한 혼이 계곡에 녹아 들려오는 것만 같다. 오랜 세월 묵묵히 절집을 지키는 소방수이자, 한소식으로 불국정토를 만들어 가려는 천구도(天龜圖)의 높은 뜻에 불을 지핀다.“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글쓰기 임할 것”수상소감 눈도 정신도 흐릿해 문화체험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할지 허덕인 날이 참 많았다. 그런데 입상소식을 듣고 나니 저 멀리 가물거리던 산이 내 곁으로 가까이 찾아온 기분이 든다. 지난 여름 무더운 날씨를 참아가며 쓴 글을 지우고 고치고 또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얻은 결과이기도 하리라.한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2년 여의 시간을 보냈다는 어느 유명한 시인의 말을 빌려본다. 이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 외형만 보지 말고 깊이 숨어있는 속살까지를 찾아내라는 깨우침이 찾아 온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준 대구일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전직 초등교원△실버연극 배우 겸 독도사랑교육 강사로 역임△2016 좋은 생각 장려상 수상

장려상 - 선비와 이매 / 박혜경

호탕하게 웃어젖히자 선비의 턱이 들썩인다. 선비탈은 이마와 코에 찡그린 주름살이 있어 항상 고민과 상념을 달고 사는 듯하다. 세속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풍부한 학식과 위엄을 지닌 선비의 성품이 곤두선 눈썹에 박혀 있다. 굵고 뭉툭한 코를 중심으로 비대칭적인 얼굴은 보는 시각에 따라 지고지순한 학자가 되었다가 이내 욕망의 덫에서 허덕이는 속물로 변한다. 역삼각형의 얼굴과 부릅뜬 눈매에서 대쪽 같은 지조와 강인함이 뿜어져 나온다. 학문에만 몰두한 채 세상일에는 관심이 멀었음을 푹 꺼진 볼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학식이야 부릅뜬 눈 속에 가득하지만 비쩍 마른 볼에는 배고픔이 서려 있다. 선비에게 질 좋은 가죽신은 얼룩진 놋그릇과 다름없었으리라. 선비 곁에는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비틀대고 걷는 하인 이매가 있다. 이매는 종이 아니라 하인의 신분으로 세습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신분이 달라질 수 있다. 곤두선 눈썹에 부릅뜬 눈을 지닌 선비탈과 대조적으로 이매탈은 측은할 정도로 순박한 표정을 지녔다. 눈 아래까지 길게 처진 짙은 눈썹은 두 개의 높은 산처럼 정겹다. 그 사이를 계곡처럼 주름살이 깊게 흐른다. 이매가 비틀거리며 웃어넘기자 두 개의 큰 산이 춤을 춘다. 이매탈은 찌그러진 언청이에 다리까지 절룩거린다. 코는 비틀어져 있고 턱은 아예 없다. 항상 순진하게 웃고 있는 이매탈은 턱이 없기에 가만히 있어도 피에로처럼 웃는 모습이다. 선비가 바보스런 이매를 하인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날카롭고 모난 성격을 잘 받아주고 상쇄해줄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옷고름을 풀어헤친 채 얼굴까지 살짝 옆으로 틀어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매탈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슬픔 따위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매의 웃음소리가 깻단을 털듯이 나를 흔들어 해묵은 먼지를 털어낸다. 사람들은 이매를 놀리고 비웃지만 문득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런 바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보였던 이매는 서서히 내게 다가와 관대하고 자비심 많은 전능하신 분으로 성숙을 거듭했다. 눈썹 터럭이 올곧게 새겨진 선비탈의 모습에서 그 옛날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양반의 고장이라는 안동에서 나고 자라셨다. 대장부처럼 몸집이 크신데다 눈썹 털이 소나무 솔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셨고 가문에 대한 자존심과 고집이 세어 집안의 아녀자들은 늘 속앓이를 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 대소사에 집안의 법도까지 마치 장군처럼 진두지휘하셨다.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어려운 한문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도 누구네 집에 우환이 있으면 가장 먼저 달려가셨고 곳간을 털어 가난한 집을 돕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혹독한 세월을 살아남기 위해 우리 집안은 냉철하고 학식을 갖춘 선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기꺼이 선비탈을 쓰셨다. 할아버지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지지하고 순응해줄 온순한 이매도 필요했다. 할머니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이매탈을 썼다. 할머니는 자신의 힘들고 서러운 감정은 내팽개치고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웃고 순종하는 이매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곳간을 털어 다른 집에 쌀을 퍼다 주면 할머니는 말없이 국수를 미셨다. 할아버지가 누구네 집 장례식에서 날밤을 지새울 때 할머니는 묵묵히 들밭을 지켰다. 대쪽 같은 성품에 고집이 세고 자존심만 앞세우는 선비 할아버지 곁에는 언제나 허허 미소만 짓는 이매 할머니가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할아버지가 사고라도 치면 할머니는 묵묵히 그것을 수습하고 해결하셨다. 왜 그랬냐는 잔소리도 없이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할머니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턱 밑에 붙어 살아왔다. 학식과 예의범절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새겨왔던 우리 집안은 이성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감정은 가슴속에 꽁꽁 숨겨야 하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천대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할아버지에게 사소한 일로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건 선비로서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의 감정은 더 깊숙한 곳으로 숨겨져 곰팡이가 피고 썩어갔다. 어느덧 감정은 몇 가지로 단순해지고 급기야 사라져버렸다. 할머니의 불안과 슬픔은 이매탈 속에 가려지고 오로지 웃음만 강요되었다. 이매탈은 여느 하회탈과 달리 턱이 없다. 턱이 없어 웃을 때면 더욱 바보스럽다. 왜 턱이 없을까? 허 도령의 전설에서 이매는 미완성의 탈로 전해진다. 하지만 선비에게는 방정맞게 말하고 촐랑거리며 대드는 양반의 종 초랭이보다 그저 조용히 웃고만 있는 하인이 필요했을 것도 같다. 선비는 자신의 날카로운 성품과 고집을 붙잡아주고 말없이 자신을 지지해줄 안전지대가 중요했을 것이다. 심성이 착한 이매는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코마저 빼앗기지만 웃음만은 끝내 양보하지 않고 지켜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도 턱없는 일이 벌어졌다. 큰아들과 셋째 아들을 병으로 앞세운 것이다. 핏덩이 손주들을 남긴 채 건장한 두 아들이 세상을 뜨자 할머니는 이매탈을 벗어던졌다. 꽃상여가 산언덕을 올라가는 순간 더 이상 할머니는 이매가 아니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예민하게 쏘아붙였다. 둥근 산처럼 정답던 할머니의 눈썹은 날카롭게 솟아나고 눈빛도 사나워졌다. 뒤주에는 쌀가마니 대신 술병이 채워지고 죽은 아들 무덤가에서 잠이 든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말없이 업고 오기를 여러 달 반복했다. 할머니는 공허한 가슴을 매일 술로 채웠지만 갈증은 더욱 깊어갔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슬픔과 분노를 표현할 줄 몰랐다.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어떻게 통제하고 다루어야 하는지를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한평생 할아버지의 턱밑에 숨어 살아왔다. 가슴에 타오르는 불덩이는 그렇게 할머니의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 곁에서 할아버지도 더 이상 선비이기를 포기하셨다. 천하를 호령하던 할아버지의 올곧은 눈썹들이 서리 맞은 부추처럼 꼬꾸라졌다. 할 말이 많았지만 할아버지는 언청이처럼 제대로 말을 쏟아내지 못했다. 할머니가 턱없는 일로 마구 쏘아붙이고 성을 내도 할아버지는 묵묵히 그냥 듣고만 있었다. 턱없는 이매처럼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모진 세월은 할아버지를 이매로, 할머니를 강인한 선비로 바꿔버렸다. 우리는 누구나 탈을 쓰고 살아간다. 선비탈과 이매탈은 좌우를 비대칭적으로 만들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표정으로 읽힌다. 화가 날 때 선비탈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외로울 때 이매탈은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와 어깨를 다독인다. 마찬가지로 나의 탈도 어떨 때는 선비가 되고 어떨 때는 이매가 되기도 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다양한 감정들을 읽어내고 그런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며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깡그리 잊은 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같은 탈을 쓰고 피에로처럼 웃어야 하는 세상, 상대방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는 발버둥 치고 있다. 두려움과 슬픔은 턱밑에 숨겨둔 채 다른 사람의 탈을 쓰고 삶을 구걸하며 살아간다. 나의 탈을 쓰자. 빌려온 탈을 벗어던지고 세상 풍파에 찌들어 추해진 민낯을 깨끗이 씻고 다듬어내자. 나의 소신을 용기 있게 펼쳐나가는 나만의 민낯을 만들자. 하나의 표정으로 굳어진 탈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그에 맞춰 탈바꿈을 해야 한다. 가끔은 턱없이 웃고만 있는 이매탈이 되고 냉철한 이성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선비탈이 될 때도 있어야 한다. 또 사랑과 애정이 듬뿍 담긴 어미탈도 되고 정의와 도덕을 지키는 시민탈도 써보자. 탈은 필요에 따라 능숙하게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민낯, 그래서 탈은 아름답다. 가면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빌려온 것이지만 탈은 오롯이 자신의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액운을 쫓기 위해 탈을 썼다지만 우리는 자신의 감성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해지기 위해 탈을 쓰자. 내면이 강하고 순수한 사람은 그 빛이 투영되어 민낯도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낙엽처럼 알록달록 물든 어여쁜 글 쓰고파”수상소감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언제였나 싶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붑니다. 글을 쓰는 이에게 시간은 최고의 선물인 듯 합니다. 알록달록 낙엽을 밟으면서 오늘도 글쟁이가 돼 봅니다.시간이 지나면 글도 낙엽처럼 알록달록 예쁘게 물이 들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제 글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오늘도 낙엽이 흐드러진 숲길을 걸어봅니다.항상 힘이 돼주는 사랑하는 가족과 선·후배님,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제9회 목포문학상 남도작상(수필부문)△제9회 공무원문예대전 금상-국무총리상(수필부분 1위)△2011년 일자리창출 우수사례 및 성공취업수기 공모전 (우수상)△2010 신문사랑 전국 NIE공모전(우수상)

장려상 - 헛제삿밥 / 박종희

놋그릇에 나물이 얌전하게 둘러앉았다. 마치 절 받을 준비가 된 제사상처럼 고춧가루를 넣은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시금치나물 등 눈에 익은 나물무침과 하얀 쌀밥, 부침개, 두부부침, 호박전, 삶은 계란, 고기 한 점, 고등어구이와 맑은 탕국 한 그릇이 다였다. 누런 놋 제기 위에 담긴 헛제삿밥은 30여 년 전 내가 처음 만났던 헛제삿밥하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양념을 많이 하지 않고 깨소금에 무쳐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나물에 쌀밥을 넣고 간장으로 쓱쓱 비볐다. 탕국을 좋아하는 남편은 국이 슴슴해 비빔밥과 같이 먹기 좋다고 했다. 딸애는 30년 전에 나처럼 먹을 게 없다고 구시렁거렸지만, 시장기 때문인지 비빔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을 앞에 두니 이상하게도 경건한 마음이 들어 시아버님의 첫 제삿날이 생각났다. 20여 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맞는 첫 제삿날이었다. 시집와서 처음 제사상을 차리는 거라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던 명란젓과 잡채, 갈비찜을 해서 올렸다. 고사리와 도라지, 숙주나물, 무나물, 시금치 등 나물도 다섯 가지를 무쳤다. 남편은 아버님이 생전에 그토록 좋아하시던 광어회도 한 접시 떠왔다. 제사상을 본 시누들과 시어머님은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유난히 형식을 따지는 시누들은 제사상에 회를 올리고 명란젓을 올리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남편과 내 생각은 달랐다. 돌아가신 분이 음식을 드시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음식을 차려놓고 고인을 추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제사의 바른 의미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친정집은 제사가 많았다. 일 년에 일곱 번이나 제사를 지냈으니 친정어머니는 거의 두 달 건너 한 번씩 제사상을 차린 셈이다. 그때만 해도 제사는 꼭 자정이 되어야 지냈다. 그 바람에 제삿날이 오히려 배를 곯는 날이기도 했다. 초저녁부터 제삿밥을 기다리느라 밥을 굶고 자는 날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장손이라 하루 전에 도착하는 친척들 때문에 친정집은 항상 비좁았다. 그날은 제사를 지내는 의식보다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의 날 같기도 했다. 그 많은 친척도 제사를 지내기 전까지는 입맛을 다시지 못했다. 부엌에서 지지고 볶는 기름 냄새가 담을 넘어도 제사 음식이라 손도 댈 수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 늦은 시간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음식을 담아 이웃집에 돌렸다. 없이 살던 그 시절에 제사 음식은 특별했기에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먹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어렵게 살던 때가 오히려 사람 사는 정은 더 깊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이웃과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던 것처럼 헛제삿밥도 조선 시대에 과거 공부하던 선비들이 있지도 않은 제사를 지내고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해서 유래된 전통음식이다. 먹을 것이 부족해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하는 유생들이 어떻게 하면 배부르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하는 궁리를 하다가 제사음식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유생들은 잘 먹지 못해 늘 허기지고 헛헛했다. 그들이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으면 거짓 제사를 다 생각해 냈을까. 하긴 그 시절에 제사 음식만큼 푸짐하고 정성이 담긴 음식이 또 있었을까. 음식을 차려놓고 그들은 어떤 넋을 위로하며 헛제삿밥을 나누어 먹었을까. 유생들이 제사를 가장하고 차려먹은 헛제삿밥은 바로 우리 시누들이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날을 빌미로 만들어 낸 헛제삿밥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잔재미가 없는 시부모님 밑에서 자란 시누들은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다. 정에 굶주려 무슨 건수라도 잡아 모임을 만드는 시누들은 부모님의 제삿날이나 명절날이면 우르르 몰려왔다. 사실 시누들이 기다리는 제삿날은 아버님을 추억하는 날이기보다는 식구들이 모이기 위한 구실 같은 헛제삿밥을 먹는 날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형까지 떠나보낸 남편도 동생들과 먹고 웃으며 지내는 시간을 은근히 즐겼다. 그때는 손님 치르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 그런 시간도 한때였던 것 같다. 이제는 자식들이 장성하여 다 같이 모이기도 어렵고 제사의 의미도 옅어지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바빠지는 생활과 어려워지는 경제 때문인지 주변에도 제사를 챙기는 집이 줄어들고 있다. 우리 집도 제사를 간소화시켰다. 우리 집에서 지내던 제사를 몇 년 전에 장손 조카가 가져갔지만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모아서 모시기로 했다. 남편과 딸애와 같이 헛제삿밥을 먹으면서 조선 시대 과거 공부하던 선비들을 생각했다. 그 시절에 그들은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을까. 점점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세상으로 변하는 요즘에 정작 헛제삿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돈 들여 형식을 갖추고 푸짐하게 차리는 것만 제사상이 아니다. 헛제삿밥처럼 나물 무치고 전 몇 가지 부치더라도 정이 있는 밥상이면 충분하다. 일 년에 한 번 형제들 얼굴 보기도 어렵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이 허허로운 세상에 헛제삿밥 한 그릇으로 서로를 위로하면 어떨까. 고단한 삶과 정에 굶주려 벼랑 끝에 서는 사람들과 헛제삿밥을 빌미로 따뜻한 정을 나누면 좋겠다. 맵거나 짜지 않아 슴슴하고 담백한 헛제삿밥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안동은 양반의 도시답게 깨끗하고 고풍스러웠다. 세월이 지나 다시 먹는 헛제삿밥은 예전의 내 혀가 기억하던 그 맛과 달랐다. 나물 맛을 모르던 아가씨의 입에서 겉돌던 싱거운 맛이 아니었다. 그만큼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스물다섯 살의 아가씨는 나물을 먹을 줄 몰라 헛제삿밥이 맛없다고 느꼈는데 오십 대 중반의 아줌마 입에 씹히는 나물은 그렇게 구수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도 헛제삿밥이라는 음식 이름 때문에 서먹했는데 담백하고 부담 없어 먹기 좋다며 우리 고장에도 이런 음식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하회마을을 둘러보며 하마터면 양반의 고장인 안동의 아흔아홉 칸 종갓집 며느리가 될 뻔했다는 안동 남자와 맞선 본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과 딸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잠자던 글쓰기 감각 일깨운 소중한 계기”수상소감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글 쓰는 것을 잊고 살았는데 수상 소식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자던 감각기관을 깨웠으니 앞으로 좋은 글 열심히 쓰겠습니다.△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시흥문학상 수상△매월당 문학상 수상△등대문학상 수상△동양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외 다수 수상△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