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존재들에 잠깐이라도 눈부신 시 쓰고파”

이규리 시인은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작품 세계 역시 ‘눈’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은 내릴 때는 눈부시지만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내가 쓴 시도 눈처럼 상처받은 여린 존재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어린 소녀는 책이 가득한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괴테 등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도 언니 방에서였다. 소녀에게 언니는 보통의 존재가 아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저렇겠구나’ 생각할 정도로 언니의 생각이나 언니가 쓰는 말, 행동은 언제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노을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에 홀로 앉아 울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종종 봤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슬픈 감성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듯 언니는 명랑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거든요.” 소녀는 그저 ‘한없이 맑고 밝기만 한 우리 언니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있나보다’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규리(63) 시인은 “언니가 글도 잘 쓰고 재능이 참 많았어요. 부모님께서 고등학생인 언니에게 단독 시화전을 두 번이나 열어 줄만큼 언니는 시적 재능이 뛰어났죠”라고 떠올렸다. 집에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언니가 까닭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다. 언니의 죽음 이후 이 시인의 생각은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슬픔을 덜어드리는 것에 향해있었다. 글을 써서 언니가 다하지 못한 것을 대신 해보고 싶었다. 문학잡지를 늘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등단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도 언니였어요. 언니가 못다 이루고 간 꿈을 이룬 것 같아 매우 기뻤어요. 첫시집을 내고 난 뒤에야 ‘언니가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겠다’생각했죠. 이후부터는 제 마음속에 언니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언니를 떠올렸을 때 눈물 짓지 않게 됐어요.” ◆ ‘눈’같은 시 쓰고 싶어 이규리 시인은 문학이나 시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는 “문학이나 시가 추구해야 할 것은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인데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름다움을 위해 진실을 추구하면 가장 정확한 길이되지만 그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이 시인은 주로 혼자 작업하는 시간을 갖는 편이다. 하루종일 6시간씩 책상에 앉아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 시간이 한 달 이상 이어질 때도 있다. 그는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오롯이 느낄 때 사물이 된 것만 같다. ‘아 나도 사물처럼 고요하게 앉아있는것을 조금은 흉내내는 구나’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는데, 가능하다면 사물을 닮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릴케의 시 한 구절 ‘저 사람은 너무나 고요하여 사물과 같다’를 인용하며 “릴케도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니 사물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는 사물 중에서도 유리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유리는 투명해서 존재하되 부재하는 것 같고, 안과 밖을 구획해주고 구획하되, 구속하지도 않아요. 있는 그대로 다 비춰주는 것 때문에 유리가 좋고, 마지막으로 ‘쨍그랑’ 크게 울면서 부서질 때도 빛을 내는 것도 좋아요. 흑막이 있는 것보다 유리같이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죠.” 최근에는 노르웨이의 시인 올라브 하우게의 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통해 더 좋아하는 사물이 생겼다고 했다. 내릴 때는 눈부시지만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눈’이다.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작품 세계 역시 눈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눈부셨는데, 누구에게도 갈등이나 질시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없었던 듯 왔다가 가는 시를 쓰고 싶어요. 길이길이 남기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쓴 시가 있는 한, 어딘가 눈에 띠는 잠깐이라도 눈부신 존재가 되고, 보잘 것 없고 상처받은 여린 존재들에게 아무 흠이나 부담이 되지 않고 없었던 듯 녹아지는 ‘눈’같은 시를 쓰고 싶어요.” ◆시인은 ‘아름다움을 쓰는 사람’ 이 시인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하면서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엄마’, ‘아내’로서의 역할에 우선순위를 두면서도 시집과 문학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은 무의미하게 여겨질 만큼 시 쓰기에 몰입했어요. 하지만 늘 혼자였던 기분이 들었고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은 이어졌고 이성복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그간 느끼고 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죠. 갈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갈증보다는 내 길을 찾아서 물꼬를 터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같아요.” 이 시인은 언어에는 대단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글은 아름다움과 도구와 흉기가 될 수 있다. 아름다움과 도구, 흉기가 같은 것이 될 수 있을지라도 시인은 아름다움을 쓰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생각이 아름다운 것을 쓰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평소 틈틈이 떠오른 말들을 적어 둔 메모를 시의 원천으로 삼는 편이다. “가장 절실할때 메모했던 그 순간을 놓칠 수 있기에 수첩에 메모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말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고나면 향기와 색깔이 날아가버려요. 순간의 언어, 사진 같이 순간의 말을 잡아서 써야 하는데 그걸 메모를 통해 잡아둘 수 있는거죠.” 이규리 시인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그는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찾기도 한다. 실천하는 것이 문학이고 그 삶을 사는 것이 문학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이규리 시인 약력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시전문지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4년 1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출간 2005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2시집 ‘뒷모습’ 출간 2006년 제16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2007∼2013년 계명대학교, 구미대학 평생교육원, 구미도서관 시창작 강의 2014년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출간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정형성 속의 가변성, 시조의 매력이죠”

박기섭 시조시인은 “시조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형식에 얽매임으로써 시조만이 가지는 자유의 공간이 있다. 형식을 지키려는 그 속에서 가변성이 있는 것이다. 곧 창작의 공간을 무한대로 열어주는 것이다”고 말했다. 무더운 여름 어느날 한 줄기 바람이 스치더니 이내 소낙비가 쏟아진다. ‘탁, 타닥, 타닥 탁’ 빗방울들이 양철 지붕 위를 때리듯 떨어지더니 집안 가득했던 더위를 몰아낸다. 툇마루에 걸터앉아있던 중학생 까까머리 소년은 소낙비 소리를 들으며 시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지만 처음 마주한 시상이 그저 반가웠기에 여름 한낮 들이닥친 소낙비의 모습을 한 편의 시로 읊조리고픈 소년의 바람은 간절했다. 그날 이후 소년의 모든 관심은 문학에 쏠렸고, 오로지 시 쓰는데 빠져 있었다. 당시 책이라곤 교과서밖에 없었기에 시를 찾아 읽고, 그날의 감정을 시로 써보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또래들은 어떻게 시를 쓰는지 알고 싶어 친구들을 불러 모아 동네 백일장을 열었다. 시제를 내고 써보라고 하는 등 제한적이기만 했던 시적 공간을 넓혀나갔다. 박기섭(64) 시조시인은 “당시 시마가 나를 덮쳤던 것 같다. 문학도 일종의 열병같은 것인데 시마는 몸으로 겪는 초기증세가 감기몸살과 비슷하다. 아픈데 없이 아프고, 시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굉장히 답답해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동인 활동 하며 꾸준히 창작에 매진고등학교 입학 후 주눅이 들어 문예반에 가입하지도 못했던 그에게 교내 백일장에서의 입상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계기가 됐다. 부상으로 받은 노트를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나도 시를 쓰면 잘 쓸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이 그때 생겼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문과보다 이과 쪽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적성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시를 쓰기 위해 문과를 선택했다. “적성이 아니어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알았어요. 이과 성향이 워낙 뚜렷해 무조건 이과를 선택해야 한다는 진학 상담 선생님의 조언이 있었지만 시 말고는 흥미가 없었죠. 관심 있는 문학을 공부하고 시를 계속 쓰려면 문과를 가야 할 것 같았어요.” 학창시절부터 줄곧 자유시를 쓰던 그가 시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직장생활 중 교양지 ‘샘터’에 투고하면서다. “샘터시조 심사위원이었던 정완영 선생의 추천으로 영남시조문학회 낙강 동인에서 기성 시인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었어요. 동갑내기 이정환 시조시인과의 만남도 샘터 덕분이었죠. 이 시조시인이 당시 샘터에 실린 제 시조를 보고 직장 근처까지 찾아왔더라구요.” 이후 이정환 시조시인과의 인연은 2인 시조집 ‘덧니’ 출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박 시조시인은 “2인 시조집은 새로운 시조의 길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루하고 형식이 닫힌 시조가 아닌 현대시의 바탕에서 시조 형식으로 수렴해 내는 시조의 세계가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등단을 했지만 2∼3년이 지나고도 원고청탁 소식은 드문드문 찾아왔다. 1년에 4∼5편 정도 쓰면 더 쓸 일이 없었다. 이정환 시조시인과 문무학 시조시인, 노중석 시인, 민병도 시인 등과 함께 뜻을 모아 ‘오류동인’을 결성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오류’는 다섯 갈래라는 뜻도 있지만, 일류, 이류를 초월한 새로운 시조의 길을 열어보겠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1994년까지 10년을 오류동인에서 활발히 활동을 이어나갔다. 매월 정기 모임을 갖고 치열하게 토론도 하고 시조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다. 특히 표절문제 등 시조단의 여러 문제 현상에 쓴소리를 했고 한국 시조단 전체에 파장을 일으켰다. 날선 지성과 감각, 문제의식을 가지고 활동한 동인으로는 유일무이했다”고 말했다. ◆형식에 갇힌 시 아닌 형식을 갖춘 시박기섭 시조시인은 우리 고유시이자 전통시인 시조가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 우리말이 만들어낸 시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역사와 문화의 엄존성이 없이는 바탕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 그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다. 시조는 우리 정서를 담는데 가장 유효한 문학적인 그릇이고 양식이다. 누가 언제부터 어떻게 쓰자고 약속하고 쓴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우리네 정서를 만나 자연발생적으로 하나의 형식으로 갖춰진 정형시이면서 전형이다”고 전했다. 이어 “시조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형식에 얽매임으로써 자유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 정형을 지키려는 그 속에서 가변성이 있는 것이다. 정형성 속에 가변성인 것”이라며 “창작의 공간을 무한대로 열고 있다”며 시조의 매력에 대해 설명했다. 박 시조시인은 올해 안에 시집 두 권을 낼 계획이다. 한 출판사의 제안으로 가을께 새 시집 한 권을 내고, 절판된 첫 시집 ‘키작은 나귀타고’ 복간본을 낼 예정이다.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 시인들은 퇴고를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시집 내는 것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냈던 작품을 일괄적으로 퇴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퇴고를 통해 후회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시에 사색이 곁들여진 산문들을 모아서 산문집도 내고 싶어요.”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박기섭 시조시인 약력1954년 대구 달성 출생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1984∼1994년 오류동인으로 활동1990년 시집 ‘키작은 나귀타고’1990년 대구문학상 수상1995년 시집 ‘묵언집’(默言集)1996년 오늘의시조문학상 수상1996년 시조산책 ‘가다 만 듯 아니 간 듯’2000년 중앙일보시조대상 수상2001년 시집 ‘비단 헝겊’2003년 시집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2004년 이호우시조문학상 수상2008년 시집 ‘엮음 수심가(愁心歌)’2008년 고산문학대상 수상 2010년 시집 ‘달의 문하(門下)’2015년 ‘각북’(角北)가람상, 백수문학상, 외솔시조문학상 등 수상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의장 역임현 갤러리 품 대표

“시 앞에 무릎 꿇고 열정 쏟는 것이 시적재능”

장옥관 시인은 “시적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곧 재능”이라며 “문인이라면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시 앞에 무릎 꿇고, 또 시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낸 심경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시를 읽으며 다독였다. ‘못잊어’, ‘그리워’ 등 김소월의 시를 차분히 읊조리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듬었다. 시에 온전히 의지한 채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의 나이 열 살, 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 “나이 서른둘에 남편을 잃고 아이 셋과 세상에 남겨진 어머니의 심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시가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구원했던 것 같아요. 시를 직접 만난 것은 아니지만 시라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장옥관(63) 시인의 삶 가운데 시는 꽤 낯설었지만, 매우 익숙하게, 그리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시를 쓰며 보낸 학창시절 장옥관 시인이 직접 시를 만나고,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교내 시화전에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시화로 그려낸 친구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예서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넣은 시화를 보고 시를 공부하고 쓰는 일이 멋진 것이구나 하고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가 배우는 공부 말고도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 같다. 그 후 습작을 하며 문학의 세계에 점차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대륜고교 재학 시절에는 교내백일장에서 입상한 경력으로 각 학교에서 단 두 명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구 지역 고교 연합 문학써클 회귀선에 들어가 고교 3년 내내 활동했다. “대륜고 문예반 벽에는 ‘문학, 심취해서 목매달아도 좋을 나무’라고 쓰여있었어요. 선배들은 목숨걸고 시 아니면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시를 공부하고 쓰라고 강조했죠. 그땐 오직 문학으로만 살았던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살겠다’ 다짐한 것도 그때부터였죠.”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린 동생 두명을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연히 연이 닿은 독일인 신부의 등록금 지원으로 계명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문학을 하려고 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국문과에 입학했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계명대 학보사에서 활동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입학하자마자 계명대 학보사 주관 현상공모에서 수상하고, 2학년때는 경북대 신문사 현상공모에서 입상하는 등 대학신문사 현상공모에서 두각을 보이며 문학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대학 3학년 때는 고교 동창생들과 함께 동성로 전원다방에서 3인 시화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처음 도전한 지역 신문사 주관 신춘문예 여러 곳에서 쓴맛을 본 이후 ‘시를 쓰지 않겠다’ 결단하고, 시로 보낸 학창시절을 마쳤다. “나이가 어려야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했던 것 같아요. 시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한탄하며 시 쓰기를 작파했죠. 가장 가까이 뒀던 시를 멀리 하기 시작했어요. 치기 어린 오기였죠.” ◆구미 지역 문화예술 선도 경북 왜관 순심여자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1년 남짓 교편을 잡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시절 학보사에서의 활동을 경력 삼아 한국산업단지 공단의 전신인 구미수출산업공단 홍보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문학 등 예술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히 구미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 선도에 앞장섰다. 문화예술위원회와 연계해 국립합창단, 국립무용단, 발레단 등 국립예술단체 공연 기획이 대표적이었다. 그의 주도로 구미수출공단은 지역 문화예술의 구심체가 돼 국립예술단체를 초청하고, 구미 지역 기업체의 후원을 이끌어내는 등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 구미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변시인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 기업체를 통해 자생적으로 이뤄졌다는 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 시인은 “당시 구미에 제대로 된 공연장도 없어 청소년 회관에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문화예술분야를 강화해나가면서 구미수출공단 홍보실이 문화예술홍보실로 개칭되고, 부서 개편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대학시절 그만뒀던 시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984년 문학 동인 활동을 함께 해보자는 친구 김재진 시인의 권유로 ‘오늘의 시’ 동인 활동을 시작한 것. “그당시 시중에 나왔던 시집, 책들을 다 읽고 그때부터 다시 습작을 했어요. 시에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오후 5시45분에 일을 마치고,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 오후 11시 반까지 시를 쓰고 퇴근을 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기에 새벽 1시에 자서 새벽 5시에 일어났어요. 체력 단련차 매일 아침 앞산에 올랐다 출근하는 생활을 4년간 반복하며 시에 매달렸어요.” 1996년 구미수출공단이 전국 조직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2005년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되기까지 전업시인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시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시에 미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시인은 “시적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곧 재능이다. 7년동안 매일 시를 주고받는 시인들이 있는가하면 퇴근해 독서실로 달려가 시에 몰두하는 시인들도 있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시 앞에서 무릎 꿇고 모든 걸 할 수 있느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고 말했다. 그는 ‘장옥관표’ 시를 쓰기 위해 늘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2년 내 출간을 목표로 남이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동시집도 써내려 가고 있는 중이다. “문인이라면 무의식 안의 근본적인 것을 건드릴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시가 탄력이 있고, 영혼의 흔들림이 새겨질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자기자랑에 불과해요.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삶이 변화되기를 바라요. 끝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늘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충격을 주고, 존재를 바꿔줄 수 있어야 하죠.”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음악 속 문학의 발견, 시 쓰는 원동력 됐어요”

서영처 시인은 “음악이 곧 인문학이다. 음악과 문학 사이에는 닮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리듬 정도가 아니라 겹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 묘사하고 설명하고 논증하는 것이 음악 속에도 다 들어있다”고 말했다. “‘메기의 추억’은 미국 민요임에도 한국인이 좋아하는 애창곡 1위에 오르기도 했어요. 떠오르는 이미지나 이야기, 향수가 굉장히 짙어 세대를 아울러 공유하는 추억의 노래가 됐죠. 메기의 추억이 우리의 노래가 되면서 그 속에 함축돼 있는 이미지를 찾아보게 됐어요. 노래의 진폭을 따라 그 시대의 메기라 할 수 있는 이웃 언니의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었죠.” 서영처(54)시인은 ‘메기의 추억’에서 영감을 얻어 ‘옛날의 금잔디’라는 시를 썼다. 그는 메모해 둔 시어를 살 찌워 시로 키워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따금 음악을 듣다가 시적 영감을 떠올린다고 했다. 음악적 이야기를 시에 담아 2006년 펴낸 첫 번째 시집 ‘피아노 악어’를 시작으로 ‘옛날의 금잔디’와 같이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쓴 시를 엮은 ‘말뚝에 묶인 피아노’(2015년)로 우리나라 문단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 시인은 “첫 시집을 냈을 당시 얼떨떨할 정도로 조명을 많이 받았다”고 떠올렸다. ◆음악이 곧 인문학 처음부터 시와 음악을 함께 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은 늘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때는 세계문장대백과사전, 세계의 명시산책 등 전집류를 연속 간행한 삼중당문고에서 나온 200원짜리 포켓북을 자주 사서 읽었죠.”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그였지만 문학보다 음악을 먼저 접했다. 음악에서 시적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오랫동안 음악을 곁에 두고 있었던 이유가 컸다. 어린시절 교회에서 배우게 된 피아노를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해 대학 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전공으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문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3년 시인으로 등단 후 국문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다. 음악과 문학 사이를 과감히 뛰어넘은 그의 행보는 늘 주목받았다. 서 시인은 “음악을 공부했던 사람이 문학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은 경우는 있지만 시쓰고 창작하는 경우는 드물다보니 특별한 케이스로 보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알고보면 유명한 작가들 중에도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던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국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하는 사람이 음악을 알면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등단 하자마자 국문학 박사 과정에 들어갔어요. 중간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불현듯 ‘잘할 수 있겠다’싶었어요. 역사성과 사회성, 예술성, 문학성 등이 고루 갖춰진 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온 것이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는 음악이 곧 인문학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문학 사이에는 닮아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서 시인은 “음악과 문학이라고 하면 리듬 정도가 아니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묘사와 설명, 논증이 음악 속에 다 들어있다. 음악에는 주인공, 스토리텔링 등이 다 들어있다. 희로애락, 시기 질투, 반목, 군중심리 등 온갖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음악은 추상적이면서 굉장히 포괄적이어서 지시하는 것 이상을 내포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문학도 그렇듯 음악에서도 비유와 은유가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선율이 곧 하나의 문장 서 시인은 2015년부터 계명대 타블라라사 칼리지에서 글쓰기 강좌를 맡고 있다. 글쓰기 기초와 명저ㆍ고전 읽기 등을 통해 생각을 체계적으로 글로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음악 관련 산문집 두 권을 펴내기도 했다. 서 시인은 “음악을 제대로 해석한 책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작곡가가 누구이고 그 시대는 어땠는지 등이 다였다. 그것은 작곡가의 에피소드 밖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음악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것을 인문학적으로 읽어낼 줄 아는 방법을 전하고자 펴낸 것이 클래식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이다. “대부분 클래식 음악이 문학 텍스트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에요. 독일 가곡은 거의 100%죠. 관현악곡이나 오케스트라 곡, 실내악곡도 문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쓰여진 게 굉장히 많아요. 선율이 있으면 선율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하나의 선율이 하나의 문장이 될 수 있고, 하나의 테마가 돼 주인공이 될 수도 있죠.” 지난해부터는 영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스토리텔링 기법과 음악적 구성양식’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음악을 공부한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음악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자리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스토리텔링 기법이나 연결되는 부분을 연구하기도 했다. 내용도 재미있지만 서로 일치하는 점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내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방학시인’이라 일컫는다. 학기 중 바쁜 틈에서 벗어나 방학 후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을 오롯이 가질 수 있어서다. “앞으로는 시를 의도적으로 읽고 쓰고 생활화하려고 해요. 다른 일에 쫓기다 보면 시가 와주기를 기다리게 되는데 더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시인, 훌륭한 교수가 되기 위해, 그리고 더 좋은 문학을 위해 시를 열심히 써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서영처 시인 약력 1964년 영천 출생 2003년 ‘문학/판’으로 등단 2006년 시집 ‘피아노 악어’ 출간 2012년 산문집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2015년 시집 ‘말뚝에 묶인 피아노’, 산문집 ‘노래의 시대’ 출간 현 계명대 타블라라사 칼리지 교수

“고정된 자신 흔들어 생동감 있는 글 쓰려 노력”

김은주 수필가는 “수필은 꼭 ‘나’라는 화자가 중심에 있어야 하고 경험한 바, 체험한 바, 본 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르다. 힘이 닿는 데까지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하면서 꾸준히 글을 쓸 계획이다”고 말했다. 엄마로서 1남1녀의 자녀를 충실히 키우고, 맏며느리로서 매년 여덟차례의 제사와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등 늘 몸과 마음, 생각이 가정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고 했다.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 글을 쓰면서부터다. 김은주(56) 수필가는 “수필을 쓰면서부터 내 안에서 끓고 있던 용암같은 것들이 분출하듯 일어났다. 삶 가운데 굉장히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추석과 설 등 명절 전후로 두달가량 강정과 한과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틈틈이 글을 쓰면서 3년 전부터는 바느질과 뜨개질을 함께 하고 있다. “세상에 평범하고 뻔한 얘기는 너무 많잖아요. SNS로 소통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누구나 하는 말을 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것 같았죠. 스스로 낯선 얘기는 늘 했던 것 같아요. 끊임없이 무언가를 썼고, 남들과 다르게, 낯설게 쓰고자 했죠.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 같고 지금처럼 일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수필’로 나를 깨우다 “글을 쓰기 전에는 읽는 것 자체를 즐겼어요. 장르 구분없이 중독된 것처럼 엄청나게 읽었죠.” 김은주 수필가는 특히 소설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였다. 그래서일까. 독자들은 그의 수필이 단편소설 같다고 말하곤 한다. “소설에 천착했던 시간들이 무의식적으로 녹아 나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만의 이야기를 한 것뿐인데, 사람들이 제 수필에 소설의 향이 물씬 풍긴다고들 하죠. 이런걸 보면 마음이나 의식 안에 있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수필을 쓰기 전 소설을 먼저 시작했다는 그는 소설 동호회도 들락거리고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고 했다. 2000년 수필을 쓰면서부터는 다른 장르는 일절 넘보지 않았다.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점점 깊이 있게 써내려 갔다. 무엇인가에 한 번 빠지면 본격적으로 해내고야 마는 성격과 예사롭게 보지 않는 눈, 늘 샘솟는 호기심이 한 몫 했다. 그에 따른 결실로 2005∼2007년 신춘문예 당선 등 연거푸 상을 받기 시작했다. 수필을 쓰기로 한 것은 문학 비전공자가 그나마 쉽게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수필이 결코 가벼운 장르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김 수필가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이 넓어 사유의 확장이 가능한 다른 장르와는 달리 수필은 꼭 ‘나’라는 화자가 중심에 있어야 하고, 경험과 체험, 본 바를 토대로 써나가야 하다보니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소재의 고갈이 빨리 오는 장르가 수필이다”고 했다. 김 수필가는 주로 새벽녘 글을 쓰는 편이다. 의식을 깨우기 위한 도구로 매주 월요일 새벽 5시 경전을 읽기도 하고 108배를 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작업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뇌가 구태의연하게 고정된 상태로 늙어가는데 흔들어 깨워주지 않으면 정말 말도 안되게 뻔한 얘기만 쓰게 될 거예요. 흔들어 깨워줘야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오지 가라앉아있는 상태로는 변화무쌍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는 게 글쓰기에요. 분명한 것밖에 쓰지 못하죠.” ◆다가올 환갑 반갑고 설레기만 해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분출된 욕구는 음식만들기와 함께 뜨개질과 바느질로 이어졌다. 김 수필가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내 안의 욕구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새로운 방향으로 끊임없이 치솟다보니 그 틈 사이에서 글이 계속해서 나온다. 맏며느리의 삶을 다룬 수필과는 전혀 다른 색깔의 음식 관련 수필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겨울이면 눈이 오는 등 계절이 똑같이 반복되는데 그 얘기를 20년 동안 주절거리고 있다면 독자들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현재 바느질이 가장 즐겁다는 그는 바느질에 관련된 수필 원고가 쌓여 한 권 분량이 되면 수필집 한 권을 펴낼 계획이다. 그는 따뜻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어느 분야든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일부러 수필 소재를 찾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연스럽게 즐기다 보니 빠져들어 갔고, 수필의 소재가 됐다는 것. “글을 놓지 않고 20년 넘게 꾸준히 쓴 것을 보면 삶이 한 곳에 한정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삶과 환경, 일이 끊임없이 바뀌어 갔죠. 한 가지 일만 끊임없이 했다면, 10년이나 15년 쓰다 중단되지 않았을까요? 돌아보니, 어느 소실점에서 멈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좋아하는 무언가에 마음이 꽂히면 대충하는 법이 없는 그는 바느질 다음에 또 무엇에 가슴 설레고 마음을 다하게 될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서는 다가올 환갑을 어떻게 맞이하고, 얼마나 설레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부쩍 많아졌다. 책 한 권을 다시 꾸리든지 좋아하는 음식과 바느질 공간을 가져볼까 싶다. 환갑잔치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하게 맞이하고 싶은 설렘이 있다”며 웃었다. 김 수필가는 기운이 있는 동안까지는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찾으면서,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글도 ‘이제 그만 써야겠다’ 느껴지는 날이 오겠죠. 지금은 글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계속 쓰고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도 옅어지고 글의 색깔이나 깊이도 점점 스스로 판단했을 때 아니다 싶은 순간이 오면 그만 써야겠죠.”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김은주 수필가 약력 1963년 경북 경산 출생 2005년 평사리 토지문학 수필부문 대상 2007년 부산일보, 전북일보 신춘문예당선 2008년 불교문학상 수상 수필집 ‘미뢰’, ‘분첩’, ‘다만, 오직, 그냥’ 현 김은주 수제강정 운영

“삶의 단면 쪼개고 분석해 써낸 글이 문학이죠”

문학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한다는 공진영 수필가는 “문학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학을 할 때에는 종교를 믿는 신념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원로 수필가 공진영(86) 선생과 그 형제들의 화두는 언제나 ‘문학’ 또는 ‘교육’이다. 3남2녀 중 삼형제 모두 문인이자 국어교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창원문인협회장을 지낸 공영해 시조시인과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낸 공영구 시인 모두 맏형인 공 수필가의 뒤를 쫓아 문인이자 국어교사의 삶을 살아왔다. 공 수필가와 형제들은 삼형제 문집 ‘방앗간집 아이들’ 1, 2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동생들의 권유로 칠순을 기념해 2002년 첫 번째 문집을 내고, 팔순을 맞아 2011년 두 번째 문집을 발간했다. 최근에는 맏아들이 수필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 형제들과 가족들이 우애를 다질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공진영 수필가는 ‘착하고 튼튼하고 똑똑하고 부지런하게 살아라’라는 뜻이 담긴 ‘착튼똑부’를 가훈으로 내걸었다. 지독하리만큼 다사다난했던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어린 동생들과 가족들에게 누누이 강조한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공 수필가를 시작으로 그의 집안은 교육자 집안이 됐다. 삼형제 모두 교직생활을 한 데 이어 공 수필가의 막내 여동생이 현재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왜관 석적고등학교 교장인 맏딸과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외손녀는 공 수필가의 길을 고스란히 밟았다. 3대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차례로 졸업한 것. 이밖에도 둘째 동생 공영구 시인이 초등 교사 출신 백금태 수필가를 아내로 맞았고, 둘째 딸이 부산동아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둘째 아들이 구미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맏손자는 과학교사로 재직 중이다. ◆다사다난했던 학창시절영천에서 태어난 공진영 수필가가 대구에 온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집 얻을 돈이 없어 태평로 인근 대구역 사창가 내 방 한 칸을 어렵사리 얻었다. ‘경북고학생(苦學生)연맹’에 가입해 생활용품을 팔아 생계에 보태야 했기에 대구 상업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가 죽기살기로 공부에 매달린 것도 이때부터였다. 주린 배를 안고 공부에 매진한 결과 학교 특별장학생이 됐고, 졸업한 선배들의 후원으로 학비와 책값 등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6.25전쟁이 일어났고, 학교는 임시 휴업을 하게 됐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됐을 때에는 어려운 형편 탓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약전골목의 한 약방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전쟁통에 꿀이 굉장히 귀했는데, 우연한 기회로 엄청난 양의 꿀을 손에 넣으면서 아버지께 정미소를 차려드릴 만큼 돈을 벌게 됐고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사친회장 추천으로 수성 양조장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면서 순탄하게 졸업할 수 있었죠.”우수한 성적과 방정한 품행으로 고 3때는 대구상고 총연대장을 지내면서 대구 지역 내 전체 학생들이 모일 때면 선두에서 지휘했다.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교장선생님께 찾아가 예산을 얻어 교지 창간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계성고, 경북고, 경북여고 등 지역 내 학교마다 교지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만 교지가 없었다. 우리도 내야 한다고 주장해 ‘상혼’이라는 이름의 문예지를 처음 냈다. 이후 문예지는 ‘상원’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발간됐다”고 말했다. 공 수필가는 수필보다 소설을 먼저 썼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2학년 재학 시절 쓴 단편소설 ‘혈후’가 경북대학교 학보사 주관 전국 대학생 대상 현상 공모에 당선된 것. 하지만 같은해 농촌계몽운동의 하나로 흥농학당 운영에 앞장서면서 대학 3년간 자연히 문학과 멀어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는 데 매진했다. 교직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오직 학생들에게만 매여 문학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경북도교육청 장학사로 활동하면서다. 교육청 추천으로 지역 신문 주간지의 생활수필란에 3년간 교육을 주제로 한 칼럼을 썼다.◆삼형제 세 번째 문집 발간 계획 지역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대구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그가 수필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90년 영남수필문학회에 들어가면서다. 그는 주로 자연에서 글감을 찾는 편이라고 했다. 공 수필가는 “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주로 자연과 인간관계의 조화를 수필에 녹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순경과의 싸움으로 아버지가 만주로 피신 가시고 홀로 울며 자식들을 길러내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문학적 소양이 피어나던 시기가 그때였던 것 같다. 스물서너 살이었던 어머니가 달빛 아래 앉아 외로워하고, 고독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문학적 감성이 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한다. “인생의 단면을 그대로 담으면 문학이라고 볼 수 없어요. 작가 나름대로 분해하고, 쪼개고, 빻아도 보고 조각별로 분석해놓고 그 조각들을 아름답게, 재미있게 재구성 해야 하죠. 또 읽었을 때 흥미도 있어야 하고 감동도 있어야 해요. 사람을 끌어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죠.”공 수필가는 후배 수필가들에게 수필을 쓸 때에는 더 고민해서 써야 할 것을 조언했다. 그는 “요즘에는 수필의 양은 많아졌지만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수필 하나를 쓸 때에는 뼈가 녹고 살이 저미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맡을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이론을 갖춰야 한다. 문학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종교를 믿는 신념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년 뒤면 미수를 맞는다는 그는 “미수가 되면 삼형제 문집 방앗간집 아이들 세 번째 문집을 내고, 개인 수필집 한 권을 출간할 계획이다”고 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공진영 수필가 약력1933년 경북 영천 출생1955년 대구상업고등학교 졸업1955~1959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및 졸업1957년 제1회 경북대 현상공모 소설 입상1959년 신녕농업고등학교 교사 1984년 경북도교육청 장학사 1990년 대구문학으로 수필 등단 1998년 수필집 ‘청진아래와 인절미’ 출간1999년 안동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2002년 형제문집 ‘방앗간집 아이들1’ 발간2011년 형제문집 ‘방앗간집 아이들2’ 발간2014∼2015년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시조, 늘 새로운 감각으로 가득차길 희망해요”

권도중 시조시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시는 정리할 수 없고 정답이 없는 것”이라며 “단 한 줄의 시구가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그 시는 좋은 시다. 감동을 주고, 행복을 준다면 ‘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도중(68) 시조시인이 문학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시조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이영도 시조시인을 스승으로 모시면서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그는 입대 전까지 수성못 인근 ‘대구수성관광호텔’에서 일을 했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전국문예백일장 등에서 두각을 드러냈기에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과 서울 유명 출판사 채용 추천이 있었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쉽사리 대구를 떠날 수 없었다. 그와 문학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움켜쥔 이는 이영도 시조시인이었다. 권 시조시인은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영도 선생님께 막연히 작품을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때부터 작품 첨삭 등 지도해주시며 제자로 삼아 주셨다. 이영도 선생님의 오빠 이호우 선생님을 고교시절 문학동인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이영도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는 좋은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선생님은 아끼는 만년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며 이영도 시인과의 만남을 추억했다. 이영도 시인의 가르침은 1974년 ‘현대시학’을 통한 등단으로 이어졌다. “시조에 대해 알지 못했던 당시에는 자유시를 썼지만, 이영도 선생님께서는 내게 시조의 매력을 가르쳐주시며 시조 쓰기를 권하셨어요. 군에 있을 때 선생님께서 편찮으실 때였는데 편지로 작품을 보내지 않느냐며 재촉하시곤 했어요. 그해 8월과 12월 연속 2회 추천을 받아 등단하게 됐죠.” ◆회귀선문학동인회를 이끌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시작됐다. 재미삼아 투고한 글이 당시 유명했던 청소년 잡지 ‘학생’이나 ‘여학생’에 실리는가 하면 학원문학상을 타는 등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대구상고 재학 중에는 지역에서 최초로 태동한 대구 지역 고교생 문학동인 ‘회귀선문학동인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회귀선문학동인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문학도들의 독려로 1968년 탄생한 고교 문학 써클이다. 경북고, 계성고, 대륜고, 대구고, 영남고, 대구상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원화여고, 제일여상 등 문예반 학생 2명씩으로 구성됐다. 권 시조시인은 “불법써클 단속과 학생들의 교외활동 통제가 심했던 당시 회귀선문학동인회 결성을 위해 김춘수, 이호우, 이응창 선생님이 고문을, 여영택, 김시헌, 이성수 선생님이 지도를 맡아주셨다. 초창기 모임은 주로 방과 후 원화여고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이뤄졌으나, 나중에는 각 학교장의 허가로 각 학교에서 돌아가면서 진행됐다”고 떠올렸다. 동인회는 그해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주축이 됐고 권 시조시인이 회장직을 맡아 이끌었다. 이듬해 11월22일 ‘회귀선’이라는 제호의 동인지 제1집이 발행됐다. 이 동인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는 속간되지 못했다. 권 시조시인은 “회귀선문학동인회가 생겨난 이후 대건고, 대구고, 대륜고, 대구상고 등에서 경쟁적으로 학교별 문학동인회가 활성화됨으로, 회귀선문학동인회는 소멸의 길로 갔다. 회귀선문학동인회가 지금은 소멸되고 없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아쉽다. 현재는 당시 2, 3대 회원 몇몇과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 기억 속에 잠겼다”고 말했다. ◆시조를 안식처로 삼다 “30여 년 동안 사업에만 갇혀 있다 보니 깡통이 돼 있구나 싶었어요. 사업을 정리하고, 10년 전쯤부터 시조를 쓰며 충전을 하고 있어요.” 권도중 시조시인은 2008년 다시 시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부동산 회사, 건설 회사 등에 근무하며 문학은 젖혀둘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 문단에서 자연스레 멀어졌던 그였다. “사업에만 매달렸던 시간을 되새기면 후회가 밀려오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글은 남지만, 돈을 남긴다고 해도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지요. 회사가 굉장히 잘됐다면 문단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요. 상처를 받고 슬픔이 있어야 시상이 싹튼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권 시조시인은 문학을 통해 이 세상에 없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된 기표 이전의 모습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문학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이며 꿈이 향하는 끝없는 고투라 생각한다. 저녁이 핏빛으로 물들며 사라지듯이 한 인간의 생각이 그것처럼 보이고 펼쳐지며 머물다가 사라지기 마련인데, 그 과정이 없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시조에서 현대적(시대적) 감각이 살아있기를 항상 유념하고 희망한다고 말한다. “시조는 인간의 삶에서 시간 속에 있는 리듬을 현재화하는 시(詩), 그래서 시조(時調)라 호명합니다. 전통은 새로운 감각이어야 예술이 됩니다. 예술은 파괴하는 것이고, 파괴는 창조행위이며, 이러한 전통이 한국인의 숨 속에, 핏속에 천 년을 내려오며 존재하고 있어요. 시조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창조돼야 하고, 곧 시상, 이미지가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죠.” 내년이면 등단 45주년을 맞는 그는 시집 ‘비어하는 가득하다’ 이후 발표작으로 시집 한 권을 더 내고 싶다고 했다. 권 시조시인은 “시상은 가장 바쁠 때 아침 출근길, 시간이 없는 약속시간 앞에, 불현듯 왔다가 가버린다. 언제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단 한 줄의 시구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권도중 시조시인 약력 1950년 안동 출생 1968년 회귀선문학동인회 초대 회장 1969년 현대율 활동 1974년 현대시학 ‘북소리’ 추천 완료 2008년 시조집 ‘네 이름으로 흘러가는 강’ 2008년 시집 ‘혼자 가는 긴 강만으로는’ 2010년 시조집 ‘낮은직선’ 2015년 시조집 ‘비어 하늘 가득하다’ 2015년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2017년 시조선집 ‘세상은 넓어 슬픔 갈 곳이 너무나 많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중앙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시인협회 회원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지역 고유의 정서 담은 탯말 알리고 싶었죠”

심인자 시조시인은 “탯말은 우리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의 제대혈이자 지역 고유의 삶과 정서, 역사와 관습이 녹아있는 우리 문화적 유산이다. 탯말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탯말의 의미와 매력을 시조에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보미 할무이/저 꽃 보이소 할무이랑 꼭 닮았니더//아이구 야이야 맞다 저거 내 캉 똑 같다 흐물흐물 잘도 널찌네 나도 탱실탱실 하디마는 우짜다 쭈구렁바가지 되가꼬 오그라지네 세월이 퍼떡이다 띠금박질한기 아인데 눈 감은 거 맨치로 마카다 아련하네 저저저, 저거 좀 잡아라 우짠다꼬 자꾸 벗노 우야꼬, 참말로 우야꼬 저기 저 목련꽃은 봄이 되면 다시 피는데 나는 언제 다시 피긋노?//그케요, 아침 이슬 저녁노을 자고 자도 모르겠니더 심인자(58) 시조시인의 시 ‘그케’다. 상대방의 말에 공감한다는 표현인 ‘그케’는 ‘그래’, ‘그러게’의 경북 북부 지방 사투리다. 이처럼 그가 쓴 시조는 표준말로 쓰인 것보다 탯말로 쓰인 것이 더 많다. ‘탯말’은 어머니가 들려줘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말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지역 방언을 말한다. 그가 탯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책 ‘경상도 우리 탯말’ 집필 당시 탯말 독해를 맡으면서다. 그는 자갈치 시장 등 장터와 농촌 마을을 다니며 탯말을 채록했다. “탯말이 사라지고 잊혀가는 것이 안타깝다. 탯말을 알리고 싶어 탯말의 의미와 매력을 살리면서 시조를 쓰고 있다. 탯말은 우리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의 제대혈이자 지역 고유의 삶과 정서, 역사와 관습이 녹아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우리는 반드시 탯말을 지켜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시 쓰는 요양보호사 심인자 시인은 올해로 12년차 베테랑 요양보호사다. 2006년 대구 북구 태전동의 복음실버타운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그는 주ㆍ야간근무로 하루 평균 4∼6명의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교회 봉사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봉사활동을 통해 어르신들의 손발이 돼 드리면서 어느 순간 표정이 밝아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밝았고, 어르신들의 곁에서 일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시에 담고 싶었다.”심 시조시인의 작품에 탯말과 함께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내가 쓴 시조 대다수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을 받아 쓴 것이라고 보면 된다. 어르신들께서는 지나가듯 하시는 말씀일테지만 그 말 속에는 삶이 녹아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시를 쓸 수 있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일 것”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탯말’은 치매를 앓는 어르신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좋은 치료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탯말을 어르신들께 읽어드리면 매우 좋아하신다. 탯말과 함께 예전 풍습을 들려드리면 ‘아, 그래 맞아 그랬었지’하시며 반가워하시고 이내 이야기 보따리를 잔뜩 풀어놓곤 하신다.”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 생의 끈을 놓으려는 사람들의 소리를 많이 듣게 됐다는 그는 참고 인내하면서도 가슴을 닫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려온다고 했다. “문학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바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을 통해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알리고 싶고, 그들의 아픔을 만져주고 싶다. 시조를 쓸 때에도 우리 삶의 근본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편이다.”심 시조시인은 시조와 함께 수필도 틈틈이 쓰고 있다. “수필도 놓지 않고 쓰고 있다. 수필과 시조를 함께 쓰니 수필을 시조로 압축시킬 수 있고, 시조에서 담지 못한 것을 수필에 담을 수 있어 좋다. 계간으로 나오는 사보에 ‘복음동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써 어르신들과 보호자들에게 들려드리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복음동 사람들’과 함께 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 써 놓은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묶어내고 싶다” ◆시조의 매력은 함축“시조는 나만의 동굴이었다가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시조를 통해 일상 속 활력을 얻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그는 “시조의 매력은 ‘함축’이다. 3장6구12음보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게 쉽지 않고 또 탯말로 쓰다보면 음보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어 어려움이 따르지만 시조는 잘라내는 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타공인 메모광이다. 밤이고, 새벽이고 자다가도 일어나 메모를 하는가하면 천천히 걸어도 8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출근길 아침 떠오른 시상을 모두 적어뒀다 한가한 날 꺼내어 시조로 엮어낸다. “지나가면 잊어버리니까 계속 메모했다가 모아둔다. 바빠서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시상은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기약 없는 손님과 같다. 항상 맞이할 준비를 하고, 매의 눈으로 순간에 낚아 올려야 한다.” 휴무일이나 짬이 날 때는 팔공산 남원리의 농막에서 꽃과 채소를 가꾸며 시간을 보낸다는 심 시조시인은 자신 안의 소리를 듣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라고 했다. “사람 곁에 있을 때는 오지 않던 시어들이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 신기하게 가슴으로 오기 마련이다. 그저 사람 속에서 잔잔한 것을 엮어내고 싶다. 마음 아프고 쓰린 이야기들을 노래하지만 희망이 담긴 시조를 쓰고 싶다.”심인자 시조시인 약력1960년 경남 진주 출생2006년 경상도 우리 탯말 공저2009년 수필과 비평 등단2012년 ‘오누이시조’ 공모전 신인상 당선2015년 시조집 ‘거기, 너’2017년 토지문학제 하동소재 작품상 수상복음실버타운 요양보호사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지역 문화계 사랑방 역할 할 수 있도록 운영”

이하석 시인이 지난 15일 대구문학관 초대관장으로 위촉됐다. 이 시인은 “대구문학관은 특정 단체나 개인의 것이 아니다. 어떤 단체라든가 특정 장르로 치우치지 않고 모든 장르가 녹아들 수 있도록 운영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가지가 촘촘히 우거진 나무를 닮았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등단 후 50년가량 흐른 지금 그 가지와 잎은 우리나라 전역에 드리웠다. 거목이 된 이하석(69) 시인은 지역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나무가 제 속에 나이테를 그려넣듯 그는 ‘투명한 속’을 비롯해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 산문집을 품어냈다. 천연 항균물질인 피톤치드를 내뿜어 힐링을 돕고, 비가 오면 고유의 향내를 진하게 퍼뜨리는 나무처럼 시어를 흩뿌려 우리네 마음을 어루만지고 노래하고 있다. ◆글쓰기, 그의 삶이 되다그의 글쓰기는 유소년기부터 시작됐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이어졌고 대학시절 등단해 시인이 됐다. 이하석 시인의 삶은 글쓰기의 연속이었다. 생계를 위해 지역 언론사 기자를 본업으로 삼고 문학활동을 병행했다. 삶 속에 글쓰기가 있었고 글쓰기 속에 그의 삶이 있었다. 이 시인은 “문학만 하다가는 행여 가족들을 굶길 수 있겠다 싶어 직업을 갖게 됐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당시 지역 내 젊은 기자들이 대거 매일신문사로 옮겨야 했다. 매일신문사에서 8년을 근무하다가 이후 복간한 영남일보로 돌아와서 근무했다”며 파란만장했던 언론 생활을 떠올렸다. 그는 신문사 2사회부, 여성부 등을 두루 거쳤고, 주로 문화부에 근무하면서 지역 문인들의 소식통으로 지역 문단을 이끌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기에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신문사 입사 후 현실을 보는 시각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현실을 언어로 반영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떤 면에서는 회오리치는 태풍의 눈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 시각을 틔웠고, 글 쓰는데 상당히 도움이 됐다.”언론 생활은 1980년 그의 첫 시집 ‘투명한 속’ 발간으로 이어졌다. 입사 직후 미술담당 기자를 맡았던 당시 대구현대미술제 취재는 그가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 등 새로운 미술사조에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됐고, ‘미술이 가지고 있는 현대성을 문학에 적용할 수 없을까’ 고심한 끝에 첫 시집 ‘투명한 속’을 펴내게 됐다. 반면 언론에 있었던 것은 글 쓰는데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한 면도 있었다. “기사와 문학은 굉장히 달랐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환상적인 문체가 어떻게 나왔냐’는 물음에 ‘내가 기자를 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사는 과장이 심하다. 리얼리티의 문제에서 기사는 맹점이 많다는 것을 기사를 쓰면서 느꼈다. 기사는 기사이고, 문학은 문학이기에 그 경계를 분명히 구별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최근들어 시를 더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퇴직 후 전보다 작업량이 늘었다. 작품활동은 계속 해오는 것이고, 문학은 여럿이 하는 게 아닌 개인적으로 이뤄진다. 글쓰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대구문학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이하석 시인은 지난 15일 대구문학관 초대 관장으로 위촉됐다. 이 시인은 우선 대구문학관이 문화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운영할 복안이다. “대구문학관을 중심으로 지역 문인들, 시민들과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 대구에는 문학관련 단체가 많다. 그 단체들과 연계해서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이 시인은 대구문학관의 주요 역할로 작고 문인 현창 사업과 현재 문인 조명 두 가지를 꼽았다. 그는 “작고 문인들을 선별해서 수용하는 것은 물론 작고 문인들을 현창하고 대구문화재단의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활용한 기획전을 구상하고 있다. 또 대구에서는 아동문학, 시조, 시 등 장르 전반에 걸쳐 해마다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연간 기획전과 북토크 콘서트 등을 통해 현재의 문인들을 조명하고 다각도로 자료를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고 전했다. 지역 문단에서 거론되는 대구문학관 확대ㆍ이전에 대해서는 이견을 나타냈다. “문학관 확대 및 이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크게 짓는다고 문학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대구문학관의 입지 조건은 매우 좋다. 이상화, 이장희, 현진건 등 개인 문학관이 생긴다면 대구문학관이 중심이 돼 소규모 문학관과 연계해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면 좋을 것 같다.”이 시인은 대구시의 열악한 재정 지원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는 “대구시의 문화 예산 책정이 아쉽다. 대구문학관에 책정되는 예산 대부분이 인건비 등 사업 외적인 쪽으로 쓰여 정작 문화사업에는 적게 사용되고 있다. 예산 지원이 이전보다 많아져 대구문학관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는 데 사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대구문학관 관장이 갖춰야 할 점으로는 ‘균형감각’을 강조했다. “지역 작가들을 두루 포용하고 수용하는 등 균형감각을 유지하는게 굉장히 중요하다. 특정 단체나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단체라든가 특정 장르로 치우치지 않고 아동문학, 시조 등 모든 장르가 고루 녹아들 수 있도록 하겠다.”이하석 시인 약력1948년 경북 고령 출생1971년 현대시학 등단1978∼2006년 영남일보 기자,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실장 1980년 시집 ‘투명한 속’1984년 시집 ‘김씨의 옆얼굴’1987년 시선집 ‘유리 속의 폭풍’ 1987∼1994년 대구경북민족문학회 공동대표1989년 시집 ‘우리 낯선 사람들’1990년 김수영문학상1991년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비밀’1991년 도천문학상 1992년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1993년 김달진문학상 1995년 산문집 ‘삼국유사의 현장’1996년 시집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1996∼2000년 대구민예총 회장1997년 시선집 ‘고추잠자리’1998년 대구문학상 1998년 어른들을 위한 동화 ‘꽃의 이름을 묻다’2000년 시집 ‘녹’2001∼2003년 대구작가회의지회장2002년 대구시 문화상2002년 시집 ‘고령을 그리다’2002∼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2004∼2007년 대구시인협회 회장 2005년 산문집 ‘늪을 헤매는 거대한 수레’2006년 시집 ‘것들’2007년 산문집 ‘우울과 광휘’2011년 시집 ‘상응’2012년 시선집 ‘환한 밤’2015년 시집 ‘연애 간’2016년 시집 ‘천둥의 뿌리’2016년 김광협문학상 2012년 육필시집 ‘부서진 활주로’2017년 이육사문학상 2018년 대구문화재단 대구문학관 초대 관장 취임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지역문화와 함께 발전하는 시인 되고 싶죠”

이선욱 시인은 “대구는 굉장히 재미있고 매력적인 도시다. 자생적인 지역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춰져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 여지가 인천보다는 대구가 훨씬 더 크다는 판단이 들어 대구로 내려오게 됐다”고 말했다. 지역 문인 중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다. 직장에 다니면서 취미삼아 틈틈이 써둔 시로 대형 출판사에서 신인상을 받아 등단하는가 하면, 지역에 있다가도 소위 말하는 ‘중앙’으로 향하는 문인들이 많은 가운데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다. 드물다 못해 귀한 케이스다. 그는 국어를 좋아하긴 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교과서를 제외하고 책이라곤 제대로 읽어본 적 없었다고 했다. 특별한 뜻이 있어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것도 아니었다. 대학 입학 후 ‘시를 공부하다 보니 성향이 맞구나’ 생각한 것이 다였다. 이선욱(35ㆍ본명 이승욱) 시인은 “그저 자유롭겠거니 하고 선택한 전공이 적성에 꼭 맞았다. 시간 내 계속 집중해야 하는 소설책이나 영화와는 달리 시집은 읽고 싶을 때 폈다가, 덮었다가 나중에 또다시 펴 읽을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대학 다니면서 시집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구는 문학하기 좋은 도시 시도 좋아했지만 시 쓰면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등 예술 작가들의 삶이었다. 시집 뒤편에 나오는 연표를 통해 시인들마다 다른 다양한 삶의 패턴에 주목했다. 그래서였을까. 서른을 전환점 삼아 사표를 던지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후 이 시인이 대구로 온 것은 2014년 결혼을 하면서다. 그는 태어나 아홉 살 때까지 대구에서 살다가 집안 사정으로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근무하는 등 지역문화에 관심이 있던 차 우연한 기회로 그해 가을부터 ‘대구문화’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대구로 내려오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지역문화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대구는 굉장히 재미있고 매력적인 도시다. 자생적인 지역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조건들이 돼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 여지가 인천보다는 대구가 훨씬 더 크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시인은 대구 지역 작가들은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데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역 사회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오히려 보편적인 고민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구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쟁력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대구에 얽혀 있는 세대 간, 정치ㆍ 경제적인 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나라 전체가 가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지역 작가들이 지역의 삶이나 지역민의 삶에 대한 고민이 투철해져 지역에 대한 고민이 녹아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면 대구에서도 통용되지만 동시에 한국, 더 나아가 넓은 세계로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을 할 때는 본명인 ‘이승욱’으로, 시를 쓸 때는 필명인 ‘이선욱’으로 살고 있다. “이름이 두 개라 처음엔 두 개의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결국엔 하나더라. 그 영역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사람의 스펙트럼도 넓어지는 것 같다. 시를 쓰는 것도 그 일환인 것 같다. 이름이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글쓰기와 시쓰기, 일과 문학으로 나뉘어 있지만 지역문화에 어떤 도움이 되기 위해 일을 하는 것도 결국엔 시쓰기에 연관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시로 세계 이해하고 나를 확장시킨다 비둘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소. 푸른 날씨는 좋소. 난 가끔 이 거대한 도시가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오.이선욱 시인의 시 ‘시민’이다. 그의 시 특징적인 것 중 하나가 고유명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통 어디 시민인지 알 수 없다. 고유명사가 있으면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려버리기 때문에 주지 않기 위해 지워버리는 작업을 한다. 형식적으로는 구어체를 많이 취하는 편이다. ‘∼하네’, ‘∼했소’와 같이 요즘엔 잘 안쓰는 말투를 많이 쓰는 이유는 시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첫 시집 ‘탁, 탁, 탁’을 내고 난 이후 그의 시는 변화를 맞았다. 가장 큰 변화는 위의 시처럼 대체로 시가 짧아졌다는 점이다. 첫 시집에서는 인물들의 정황을 보여주고, 그려내고자 했다면 최근 시들은 주로 말하듯이 써내려 간다. 화자는 여자가 될 때도 있고 남자가 될 때도 있다. 또 어린아이, 할아버지, 외국인이 될 때도 있다. 인물들이 말하듯이, 대사 한 토막 같은 시를 쓰고 있다. 그는 “편마다 다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한다. 세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인물이 돼서 대사를 한다 해도 생각이 결국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나를 확장시키는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가 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시를 쓰고 있을까’, ‘왜 살까’하는 존재에 대한 고민들로 작품을 쓰는 것 같다. 시에는 결국 그러한 고민들이 담겨있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다른 작가들도 궁극적으론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작품이 나올 지 궁금해 시를 쓰는 것 같다.”그에게는 두 번째 시집을 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대구문화와 함께하는 저녁의 시인들’이다. 그는 2016년 3월부터 2년 동안 안상학, 장옥관, 배창환, 권기덕, 김사람, 엄원태, 박기섭, 이중기, 이규리, 류경무, 정훈교 시인 등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22명을 조명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저녁에 행사가 펼쳐지는 것과 지역문학이 저녁인 것처럼 현재 오늘날 시인들이 저녁에 머물러 있다는 안타까운 의미를 담아 ‘저녁의 시인들’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이기도 했다. “‘저녁의 시인들’을 진행해오면서 행사 중 작품 낭독과 해설, 시에 대한 생각 등을 빠짐없이 녹취했다. 이를 바탕으로 상반기 중 출간을 목표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지역 시단에 있어 이러한 자료가 나온 적이 없었던 만큼 개인적으로도 의미있고, 지역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선욱 시인 약력1983년 대구 출생2009년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2015년 시집 ‘탁, 탁, 탁’ 출간현 월간 ‘대구문화’ 취재기자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수필쓰기는 정답보다 해법 찾는 과정”

장호병 수필가는 “문학은 신선해야 한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읽어야 한다. 문학은 세상을 보는 렌즈인데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늘 오늘의 렌즈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 탓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는 그는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다고 했다. 1980년대 초반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줄곧 그랬다. 장호병 수필가는 좋아하는 글쓰기를 후회 없이 하는 등 문학 관련 활동을 해왔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구문인협회장직을 성실히 수행하고, 최근에는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는 남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문학을 통해 발견하고 마주할 때 행복을 느낀다. “내가 모르는 나, 남이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문학적 영역이다. 문학을 하면서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문학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고 많은 이에게 전하고 싶다.”◆삶은 기도, 문학은 기도문1980년 교육개혁 조치에 따라 학원ㆍ과외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전까지 그는 학원에서 고등학생, 재수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를 했다. 이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지역 문인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수필과의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수필의 매력에 이끌렸다고 했다. 수필의 특성상 ‘붓 가는 대로’ 수필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붓 가는 데로’ 수필을 쓰기까지 질문하고 답하고, 질문하고 답하고를 끊임없이 반복해 나갔다. 장 수필가는 살아간다는 것은 기도이고, 문학은 기도문이라고 말한다. 글쓰기도 일종의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자기완성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본다면 삶이 기도고, 한 편의 수필은 기도문이라는 것. 그는 “평소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오늘 내 삶이 기도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삶이 먼저 닿아야 한다. 아무리 해주십사 간절히 기원한다 해도 그 이상으로 삶이 먼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꿈꾸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단순히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의 길로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 수필가의 문학강좌를 거친 사람만 600명에 달한다. 그는 강연에서 수필은 배워서 쓴다기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수필가는 “문학은 신선해야 한다. 삶의 문제는 2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같을지 몰라도 답은 다르다. 지성보다는 감성 훈련이 중요한 이유다”라며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느냐가 결국 자기 문학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완성도를 기했느냐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렌즈로 어떤 새로운 점을 발견됐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수필 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을 찾기보다 해법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살아가면서 늘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데 정답이 아니고 해법이다. 그 해법이 때로는 명답이 되는 것”이라며 “세상에 하나뿐인 ‘정답’과 달리 ‘해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다. 가장 맞는 길을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지고 이에 합당한 해답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참여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던 그의 수필은 이후 변모하기 시작, 자연의 모습과 닮아갔다. 그는 자연에서 글감을 찾는 편이다. “문학적 영감은 주로 자연 속에서 찾고자 한다.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면서 자연과 대화를 하다보니 질문과 답이 조물주와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4월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취임장호병 수필가는 지난해까지 3년간 대구문인협회장을 맡으면서 지역 문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특히 원고료 인상과 대구문학의 외연 확장 등 대구문인협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발로 뛰었다. 그는 “대구문인협회장으로 있으면서 대구문학관 확대 개편과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지정 등 기반을 만들고자 했고, 이후에라도 결실이 이뤄질 수 있도록 차기 회장에 인계했다”고 전했다. 오는 4월부터는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직을 맡게 된다. 대구문인협회를 이끈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으로서 임기 3년 동안 수필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한국수필가협회는 1971년 창립, 1천여 명의 수필가들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장호병 수필가는 한국수필가협회의 자립을 최대 과제로 제시했다. “취약한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메세나 활동과 출판부 활성화, 전자책 보급 등을 위해 힘쓰겠다. 질적 향상을 위해 전국적 모임, 지역별 심포지엄 개최 등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한 교류 활성화에도 주력할 방침이다.”무엇보다도 그는 지역 수필가들의 가입과 참여를 독려하는 등 영ㆍ호남 지역 문학을 연계하는 네트워킹의 주체로서 역할을 해나갈 복안이다. 그는 “지역에 있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정보 통신, 교통의 발달로 지역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자신이 쌓아올린 탑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문학적 완성도, 우리 시대에 맞는 가치를 문학에 담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호병 수필가 약력1952년 경북 청송 출생 1994년 수필집 ‘웃는 연습’1999년 대구수필문학상 수상 2001년 대구과학대학교 멀티미디어과 겸임교수2002년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출판학 전공 2005년 수필과 지성(대구교대 평생교육원) 강좌 운영2005년 수필집 ‘하프 플라워’2007년 대구문학상 수상2009년 대구수필가협회장 취임2012년 죽순문학회장 취임2011년 수필집 ‘실키의 어느 하루’ 2014년 수필집 ‘너인 듯한 나’ 2014년 평론집 ‘로고스 @ 카오스’2015년 대구문인협회장 취임2018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취임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시에 덧입힌 미학…난해하지만 늘 새로워”

권기덕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시를 쓰는 것이 목표다. 그는 “쓸쓸하고 외롭지만 내가 찾은 길들이 계속 이어져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귤껍질에서 검은 빛이 떠오를 때/나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하늘을 난다는 건/검은 연기가 몸속에 가득 차는 것//그럼 제 몸을 태우겠습니다//내 몸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 나는 혼잡한 자동차들이 보이는 도로를 지나 빌딩을 지나 집으로 간다 내 몸은 일정하지 않다 단지 바람에게 검은 눈동자를 맡긴 채 흐른다 저 투명한 유리창에 당신을 가두고 나는 겨우 작은 어둠이 되었을뿐,//나는 괴물입니까?//붉은 저녁이 오고 있다 저녁이 저녁의 구름을 물고 없는 그림자를 저녁에 묻고 하늘 위 까마득한 어둠에 날개가 점점 커지도록 저녁이 오고 있다//나는 어느새 작은 마을을 덮는 새가 되어간다 권기덕 시인의 시 ‘세컨드 라이프’ 전문이다. 시를 읽자 시어가 머릿속에 새겨지더니 이내 둥둥 떠오른다. 시어는 자연스레 이미지가 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시를 읽었는데 마치 한 편의 그림을 본 듯하다. 권 시인이 시를 쓰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사물이나 현실 경험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하나의 내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그리고 두 번째는 다양한 미적 구성의 방식이다. 예술지향주의적이라는 그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또 다르게 만들어보고, 다양한 미적 구성의 방식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권 시인은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시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또 다른 모양, 내용의 시를 쓰고 있다. ◆시에 미학을 덧입히다그는 늘 실험적이고 혁명적인 글쓰기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 시작은 동인 ‘리비도’ 활동을 하면서였다. 문예창작을 전공 하지 않았지만 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교 3학년 어느 겨울, 눈내리는 모습을 보고 막연하게나마 시를 써보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고 떠올렸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서른쯤이었다. 대구에 있는 여러 문예창작 강좌를 기웃거렸지만 쉽지 않았다. 대구는 젊은 친구들이 시 또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제시해 주는 것이 부족한 편이었다.” 2009년 등단 후 간간이 작품 청탁이 들어오곤 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이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중 2011년께 대구의 젊은 시인 몇몇이 모이는 자리에 나가게 됐다. 그 중심에는 여정, 김사람, 정훈교, 김하늘 등 젊은 시인들이 있었다. ‘시’를 통해 알게 된 이들과 동인 ‘리비도’를 결성해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칠성시장 인근에서 모였다. 십시일반으로 사글세를 모아 방천시장에 작업실을 꾸미기도 했다. 함께 시집을 읽고, 글쓰기 방법 등을 토의하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시도하고 도전했다. 지방에 있다는 한계에서 벗어나 좋은 글,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치열하게 합평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시에는 그만의 색깔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권 시인의 시에는 초현실주의, 콜라주, 포토몽타주, 리포토그래피, 미니멀아트, 추상표현주의 등 미술기법이 덧대여지면서 형태 또한 다른 일반적인 시들과 달리 표현됐다. 권 시인은 “동인 활동을 하면서 시를 잘 쓰는 방법보다는 시를 버리는 법을 알게 됐다. 등단 후 초창기 시들은 다 버렸다. 쓰고 싶었던 시를 썼고 새로운 것들을 지향하다 보니 그동안 썼던 시를 부정하기 시작했다”며 “대학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미학을 시에 덧입혔다. 시가 아방가르드해지면서, 형식도 내용도 난해해졌다”고 했다. 그저 잘 쓰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쓰고 싶었던 시를 썼다는 권 시인은 2015년 ‘문예중앙’을 통해 첫 시집을 펴냈다. 지방 무명 시인이지만 편견을 깼다는데 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를 끊임없이 해나가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은 하지 않지만 지금의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나보고자 한다. 반대편에 있는 것을 찾고 있다.”동시를 쓰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는 지난해 제9회 창비어린이 동시부문 신인문학상 받으면서 등단하기도 했다.◆자신만의 시 세계를 만나다그는 시를 쓰기 전 외로움, 쓸쓸함을 찾는다. 주변 풍경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롭게 만들어 자신 안의 또 다른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자신만의 시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쫓아서일까. 그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다른 시들과 달리 취해진 형식이나 내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흠칫 놀라곤 한다. 권 시인은 “시를 잘 쓰기 위해 시를 썼다면 독자를 의식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시를 썼을 것이다. 시를 써야만 살아가는 사람, 시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듯 시를 쓰는 이유가 다양한 것처럼 시를 읽고 접근하는 방식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각자 자기만의 세계가 있기에 자기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고 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해하거나 해석하기 어렵게 쓰인 시 때문에 시를 읽는 이들이 줄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시가 난해해졌기 때문에 시를 읽는 인구가 줄었다고 할 수 없다. 세상 자체가 난해해졌다. 정서와 감각이 달라지고 여러 매체 자체가 달라졌다”며 “그에 맞는 감각이나 글쓰기 자체가 맞지 않겠느냐”며 반문했다. 이어 “정답을 찾으려고만 하다 보면 시가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시인의 의도와 달라도 생각하는 대로, 보는 대로 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 누가 읽더라도 정해진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해석을 하고, 다른 제목을 붙이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시의 매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권 시인의 목표는 계속해서 자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시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늘 현실을 부정하면서 시를 써나가야 하기에 시 쓰기 방식은 계속해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 예술의 난해성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에게는 대중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 대한 조절능력이 없다. 단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뿐’이라고 말한 미니멀 아티스트 스텔라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쓸쓸하고 외롭지만 내가 찾은 길들이 계속 이어져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란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권기덕 시인 약력-대구교대 미술교육과 졸업-2009년 ‘서정시학’에 시 당선-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수혜-2015년 시집 ‘P’(문예중앙)-2017년 제9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에 동시 당선

“어른들도 동심 있어…동시는 인간 위한 문학”

하청호 아동문학가는 “시를 쓰는 사람은 사물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독자에게 전해주는 메신저다. 사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어야 한다. 사고 체계에 의해 나온 시는 감동이 없다”며 “미모사 같은 예리함으로 영감이 올 때 빠르게 감성을 캐치할 줄 아는 민첩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어깨를 내어주는 것은/사랑입니다/졸고 있는 사람에게/어깨를 내어주는 것도/사랑입니다//가장 빛나는 사랑은/기대고 싶어도/기댈 어깨가 없는 사람에게/제 어깨를 아낌없이/내어주는 사람입니다. 하청호(76) 아동문학가의 동시 ‘어깨 내어주기’다. 이 동시는 동심과 시심의 조화가 잘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와 동시의 구분은 따로 없다. 동시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동심은 신화같은 역할을 한다. 동심은 어린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 다함께 좋아하면 된다.” 동심과 시심의 균형을 잡는 일은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과제였다고 그는 말한다. “동심을 주축으로 하는 가운데 동시에는 문학성도 있어야 하고 동심도 있어야 한다. 동심에 치우치면 문학적 향훈이 옅고, 시심에 기울어지면 이해와 공감에 문제가 드러난다.” ◆동시 사랑 어린이 사랑 하청호 아동문학가의 동시 사랑은 1963년 교단에 서면서 시작됐다. 문예부를 맡아 지도하면서 자연히 아동문학 쪽에 관심을 두게 된 것. 이후 1972년 29세에 등단이후 2006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40여 년을 교직생활과 동시에 아동문학가의 길을 올곧이 걸어왔다. 동심을 바탕으로 한 창작은 오랫동안 아이들과 생활해왔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않았다. 그는 시심과 동심을 조화롭게 엮었듯 교직생활과 문학활동을 조화롭게 해냈다. 틈틈이 동시를 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한국교육자대상(1982)을 받는가하면 한국교육개발원 초등국어 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그가 쓴 동시 ‘폭포’, ‘그늘’, ‘돌다리’, ‘여름날 숲 속에서’, ‘들깨 털기’ 등이 초등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동시를 쓰다보면 마음이 늙지 않는다고 말한다. “원초적인 마음을 동심이라 일컫는다. 어른이 되면서 욕심이 때가 돼 순수한 마음을 감싸면서 동심 발현이 잘 되지 않는다. 동시는 1차원적으론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지만 결국엔 인간을 위한 문학이다. 순수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하 아동문학가는 동시뿐 아니라 어린이 노래극 방송대본을 쓰는가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를 위한 수필집 ‘큰 나무가 작은 나무에게’(1990)를 발간하는 등 어린이 문학과 관련된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각종 문학상과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 그는 동시를 쓰는 이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동시를 쓰기 전에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동문학에서는 상상력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세계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상상력을 갖고 보면 된다. 상상력은 인류를 발전시켜주는 원동력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상상력이 줄어드는 과정이다. 과학적 상상력을 앞지르는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다”고 말했다. 이어 “시인은 사물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독자에게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사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눈이 있어야 한다. 사고 체계에 의해 나온 시는 감동이 없다. 짜인 시밖에 되지 않는 것”이라며 “들리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하고, 보이는 것보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모사 같은 예리함으로 영감이 올 때 빠르게 캐치 할 줄 아는 민첩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06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는 동시집 발간과 함께 전국을 무대로 더욱 활발한 문단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말 동시집 출간 계획 한낮이다/아이들이 놀고 있는/마당에 먼지가 자욱하다//-안 되겠다/저 먼지를 좀 재워야겠어//하늘에서/살짝/먼지잼이 왔다. 하 아동문학가가 ‘비가 겨우 먼지를 재울만큼 옴’이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 ‘먼지잼’을 소재로 한 동시 ‘먼지잼’이다. 그는 사라져가는 우리 옛말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 가을께 세 번째 우리말 동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하 아동문학가가 우리말을 찾아 동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군위군 부계면 산골에 마련한 서재에서 ‘으아리 꽃’을 보고 영감을 얻으면서다. 그는 “손바닥만 하게 큰 ‘으아리 꽃’을 본 사람들이라면 ‘으악’하는 말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며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찾아 동시를 쓰고 있다. 문학적 향기를 주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어휘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새로운 시어를 발굴하고 지음으로써 사람들의 어휘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2011년 낸 우리말 동시집 ‘바늘귀는 귀가 참 밝다’는 이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에게 문학은 정신적인 지주다. “문학은 결국 자기 정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을 때마다 독려해준 것이 문학이었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더 큰 감동을 받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시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떠올려야 한다. 여유를 가지고 자연현상을 바라보면 비에서도 하나의 생명을 볼 수 있다.” 하청호 아동문학가는 시든 동시든 산문처럼 읽으면 시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시 분위기와 상황에 몰입을 해서 읽지 않으면 언어의 나열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나 동시를 너무 해석하려 하지 말고 정서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번씩 소리 내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분위기나 말의 아름다움 등 시인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하청호 아동문학가 약력 -1943년 경북 영천 출생 -197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부문 ‘둥지 속 아기새’로 당선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 ‘봄에’로 당선 -1974년 첫 동시집 ‘둥지 속 아기새’ 발간 -1976년 현대시학에 시 ‘오동나무’외 1편으로 추천 -1976년 동시집 ‘빛과 잠’으로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1989년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2005년 대구시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 -2006년 윤석중 문학상 수상 -2011년 대구 동구 도동, 서울 용두공원에 ‘어머니의 등’ 시비 세워짐 -2015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취임 -2017년 동시집 ‘데칼코마니’ 발간 -2017년 제18회 김영일아동문학상 수상 -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대구문학관 운영위원, 어린이 문화운동단체 ‘새싹회’ 이사

윤경희 시조시인…“6년간 맡은 교정작업 덕에 사고범위 넓어져”

윤경희 시조시인은 “갖춰진 틀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그 기쁨을 만끽하는 것, 그것이 시조의 매력이다”며 “일정한 형식과 규칙이 있는 시조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묘미가 있다”고 했다. ‘아직도/저만치/먼 거리에 서 있는//그대에게 다가섭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허기진 마음들을 펼쳐//그대 향해 좇아갑니다’윤경희 시조시인은 지난해 10월 펴낸 시선집 ‘도시 민들레’ 머리에 이같이 썼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이 또 있을까. 윤 시조시인은 매일 시조를 바라보면서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시집의 자전적 시론에서 ‘언제부터인가 버릇처럼 시작된 저녁 외출, 중독된 일과처럼 빌딩과 빌딩 사이를 헤집고 걷는다’라고 얘기한 것처럼 그는 걸으면서 떠오르는 숱한 생각들을 즐긴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간간이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이미지는 시조 속에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향내를 간직한 꽃으로 피어난다. ◆감수(監修) 통해 문학의 깊이 알아시조 창작에 몰두하게 된 것은 2002년 우연히 시조단의 거장 이정환 시조시인을 만나면서부터다. 자유시를 쓰고 수필을 써왔지만, 시조의 매력은 한순간 그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윤경희 시조시인은 진정한 자유가 없듯 작은 공간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그 가운데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시조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일정한 형식과 규칙이 있는 정형시인 시조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묘미가 있다. 그 속에서 글자 수를 맞춰야 하고 동시에 깊이나 의미도 줘야 한다. 틀 없이 자유롭기만 하다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듯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 같다.” 이후 배흘림동인 활동을 시작으로 2006년 영언동인 창단에 앞장서고 제주 정드리문학회와의 교류를 통해 ‘동검은이오름에서’로 유심신인문학상을 받는 등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단단히 하고 확장해 왔다. 2002년부터는 대구문학협회에서 협회 격월간지 대구문학의 편집국장 겸 사무국장을 지내며 6년여 간 교정작업과 편집일을 도맡았다. 원고 청탁부터 편집 장르별 구분, 출판사 송고, 임시편집하고 교정을 보는 작업이었다. 한 번 만들 때마다 봐야 하는 글이 100여 편 가까이 됐다. 이러한 작업은 문학하는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시, 소설, 희곡 모든 장르를 접하다 보니 글을 보는 시각과 사고의 범위가 넓어졌다. 글의 흐름, 비문, 오탈자 등을 걸러내다 보니 띄어쓰기와 문법, 오탈자 보는 법을 자연히 익힐 수 있었다”고 했다. 대구예총의 계간지 ‘대구예술’ 편집일도 올해로 5년째 맡고 있다. 그의 책임감과 꼼꼼한 실력이 입증되면서 감수를 봐달라는 제의가 곳곳에서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달 중순에는 직접 감수하고 교정을 본 ‘사자성어 삼국지’가 출간될 예정이다. 윤 시조시인은 “감수뿐 아니라 삼국지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직접 쓴 시조 3편도 함께 실린 책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며 “조만간에는 중국 4대 명작 중 하나인 홍루몽 시편 ‘한시산책’에 공동작업으로 참여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마음을 울리고, 움직이는 시조보이지 않는 길에서 오래 서성거렸다/깊이도 모를 너를 가마득히 기다리며/그 멈춘 시간 속으로 온몸이 빠져들었다//결코 닿을 수 없음을 물풀들은 아는지/끝없는 수면 위에 견고한 성을 쌓는다/불현듯 잔잔한 떨림 푸른 늪이 차오르고 윤경희 시조시인인 최근 발표한 시조 ‘그 여름 우포’다. 그의 시조에서 늪은 곧 우리 삶의 터전이다. 그는 주로 사소하게 지나치는 것들, 일상에서 늘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시조 소재로 삼는 편이라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보이지 않는 길이다. 어쩔 수 없이 고통과 환희, 그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것은 끝이 보일 듯, 어느 경계에 닿을 듯 견고한 성을 쌓는/깊이도 모를 너를/ 즉 우리의 한 생이다.”길을 걷다가 보도블록 사이 끼어 핀 민들레를 보고 시상이 떠올라 쓴 시조가 최근 펴낸 시집의 이름이 되기도 한 시조 ‘도시 민들레’다. 민들레는 요양원의 홀로 사는 노인 등 우리네 소외된 계층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는 “말로서 다하지 못하는 언어의 표현, 감정을 공유하고 그 감정을 풀어내 누구나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매체가 문학이다. 인간이 가진 내면 끝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있다. 심정, 마음을 움직이고 울리는 글이어야 한다”고 전했다. 윤 시조시인은 감정의 깊이를 측도할 수는 없지만, 시로 풀어놓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인이라면 글쓰기에 몰두해야 한다.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라며 “문학 곧 예술은 그 나라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문학인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문인이라면 열심히 글을 쓰는 것뿐이다”고 강조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윤경희 시조시인 약력>-경북 경주 출생-2003년 ‘생각과느낌’ 수필 등단 -2006 ‘동검은이오름에서’로 유심신인문학상 -시집 ‘비의 시간’, ‘붉은 편지’, ‘태양의 혀’, 시선집 ‘도시 민들레’-2014년 대구예술상-2015년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2016년 대구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한국시조시인협회운영위원,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이사-현 대구예술총연합회 편집위원 -대구문협시조분과위원장 -유심시조ㆍ영언시조 동인

“우리나라 최초 5행시집 조만간 펴낼 예정”

이구락 시인은 “시어는 가장 고차원적인 수준의 언어다. 시(詩)가 언어의 사원(言+寺)이라면, 내게 주어진 삶의 의미는 ‘언어의 사원’ 하나를 작지만 튼튼하게 지어놓고 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루에 시 한 편 쓰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지 않겠습니다.”2013년 교직 정년 퇴임을 기념해 가진 문집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이구락 시인은 말한대로 이뤄진다고 믿는 언령(言靈)사상 신봉자다. 그에게 말은 곧 정신이었고 말이 가지고 있는 염력이 그 사람을 변화시켜준다는 것을 믿었기에 한 말이었다. 그 결과는 최근 펴낸 시집 ‘꽃댕강나무’로 이어졌다. 퇴임 후 3년, 시선집 발간 이후 7년 만에 낸 네 번째 시집이었다.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집필실과 전라도 담양의 ‘글을 낳는 집’, 그리고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의 개인집필실 등에서 전념한 끝에 맺은 옹골찬 수확물이었다. 열 살 때 울다가 안긴 옆집 누나의 젖가슴//살 냄새,//바람결에 불쑥 풍겨와//무심코 돌아보니//담장가 꽃댕강나무 달빛 아래 하얗게 모여 있다시집의 제목으로 따온 5행시 ‘꽃댕강나무’ 전문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5행시에 주목을 하고 보니 빼어난 시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는 시 ‘꽃댕강나무’처럼 5행시를 써 우리나라 최초의 ‘5행시집’도 조만간 펴낼 계획이다. ◆언어의 사원 짓는 것이 꿈처음부터 그가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문과 입학 후 2년여는 오직 소설에만 매달렸다. 대학에 갓 들어가 어렵기만 했던 시와 달리 산문인 소설은 명쾌하고 구체적인 것은 물론 어떻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쓰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 습작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작 주위에는 소설강좌도, 소설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친구들이 모두 시에 매달려 있었기에 홀로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소설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를 시인의 길로 이끈 것은 은사였던 김춘수 시인의 시론 강좌와 중국 고전 장자였다. 3학년이 되면서 ‘장자’를 읽기 시작했고, 2학기 들어 김춘수 선생의 논리적이고 격조있는 시론을 들으면서 시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장자 외편 천도편이 그의 마음을 시 세계로 잡아끌었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다’에서 출발해 ‘정말 귀한 것은 책 속의 말이고, 더 귀한 것은 말 속의 뜻이고, 뜻 속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말로선 알릴수 없고 말로서 알릴 수 있는 것은 다만 사실의 이름과 소리에 지나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의 모양과 빛깔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점층법적 논리에 마음을 빼앗겼다.”이 시인은 장자가 한 말을 ‘시는 산문이 끝나는 데서 출발한다’고 의역했다. 그는 “인간만의 특징인 언어도 일상어와 문학어로 크게 나눌 때 문학어 중에서도 사적 언어 즉 시어는 가장 고차원적인 수준의 언어다”라면서 “시(詩)가 언어의 사원(言+寺)이라면, 내게 주어진 삶의 의미는 ‘언어의 사원’ 하나를 작지만 튼튼하게 지어놓고 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그가 생각하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197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면서 이 시인은 “사랑없이 이웃을 보고 사랑없이 사물을 본다는 것이 이제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는 등단 이후 39년간 그의 시 정신으로 깃들었다. ◆이웃의 아픔 보듬는 것이 문학의 역할 그는 40년 동안 올랐던 교단에서 내려오면서 전업시인이 됐다. 이구락 시인에게는 늘 학교가 우선이었고 시는 그 이후였다.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책임감이 강하고 남부터 배려하는 특유의 기질이 늘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선공후사의 정신은 교사로서는 바람직했지만 시인으로서는 결격사유에 해당될 수도 있었다. 대도시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 교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생활 없는 고된 직장이다.”교직 은퇴 후에는 주로 문학 레지던시에 참가하거나 사찰 등 집필공간을 물색하며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목표는 5행시집과 민족서사시 1편, 서정시집 등 세 권의 시집을 더 내는 것과 함께 여행과 글쓰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는 좋은 작품으로 시대와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고양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 중심에 시인이 있어야 한다. 가장 예민한 안테나 구실을 해내는 시인이 되고 싶다. 흔히 대구를 시의 고장이라 칭한다. 그 도시가 문화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와 시민과 예술가가 삼위일체가 돼야 한다. 그리고 언론이 이를 엮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후배 시인을 위한 조언으로 이 시인은 “언어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연마하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와 모든 예술은 새롭거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명제 사이에서 늘 고민하고 서성거려야 한다”면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조하기도 하고 자신의 창조품이 인류문화의 자산으로 길이 남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이구락 시인 약력>-1951년 경북 의성 출생-경북대학교 인문대 국문학과 졸업. 대구가톨릭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졸업-197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1980∼1988년 ‘형상’ 시동인 활동-1986년 시집 ‘서쪽 마을의 불빛’ 출간-2002년 시집 ‘그 해 가을’ 출간-2002년 제12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2008년∼현재 상화문학제 조직위원-2008∼2010년 제9대 대구시인협회 회장 -2009년 ‘대구를 노래하다’(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기념 엔솔리지) 발간-2010년 시선집 ‘와선’ 출간-2010년 제30회 대구시문화상(문학) 수상-2013년 대륜고등학교 정년 퇴임-2013년 문집 ‘길 위의 시간들’ 출간-2017년 시집 ‘꽃댕강나무’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