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 해 안녕하셨습니까

세밑이다. 2018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10여 전쯤만 해도 12월 초만 되면 성탄절이 아직 멀었지만 길거리에 캐럴이 들리고 연말이라는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연말이라는 시간은 지나간 것에 대한 추억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가 교차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고, 서로의 안부와 덕담을 나누었던 관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저작권법 때문인지 캐럴도 들리지 않고, 과거와 같은 연말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보다 각종 ‘망년회’와 술자리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들리는 캐럴과 건하게 한잔한 직장인들이 가족들에게 갖다 줄 호떡과 붕어빵을 사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런 모습들이 사라진 것 같다. 연말이라고 해서 우리의 일상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20세기의 세밑이 더 정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지난주 18일에 수능시험을 마친 고3 학생들이 강릉에 바람을 쐬러 갔다가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가스중독으로 일행 중 3명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원인은 무자격 보일러 설치업자가 시공한 배기통 이음부에서 가스가 누출되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어릴 적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람들이 죽었다는 뉴스는 겨울철만 되면 흔한 사건이었지만, 보일러 배기통 가스 누출로 인한 일산화탄소 사고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달 11일에는 태안화력발전소의 하청노동자 김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하청업체 직원인 김용균씨는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2인 1조로 근무해야 하지만 위험한 근무환경 속에서 혼자 근무하다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태안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서부발전은 3년째 ‘무재해사업장’으로 정부인증을 받았다고 하니 이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다. 2016년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으로 10대의 청년이 사망한 사고를 기억할 것이다. 기업들이 위험한 업무들을 모두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다 보니,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정규직으로 고용해 직접 관리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19세 청년의 죽음에도 지금까지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1건도 없다고 한다. 이달 4일에는 경기도 고양시 백석역 근처에서 온수관 파열사고로 인해 결혼을 앞둔 딸과 예비사위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60대 남성이 화상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 9월에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20대 초반의 청년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음주운전을 가중 처벌 하는 일명 윤창호법이 통과되었다는 점이다. 사망사고를 낸 음주 운전자에게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한 윤창호법이 18일부터 발효되었지만, 법안 발효 첫날 인천에서 60대 여성이 음주운전 차량에 들이받혀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가끔 서울에 회의 참석을 위해 KTX를 타고 갈 때가 있다. 시속 300km에 내 몸을 맡기고 가는 것이 괜찮을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기차에 몸을 실을 때가 종종 있다. 며칠 전, 서울 출장을 가면서 이달 초에 발생했던 KTX 열차 탈선 사고는 내가 탄 기차와는 상관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차를 이용해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세밑에 덕담과 위로를 하겠다는 필자의 글은 이달 들어 발생한 사고들의 기록으로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억울하고 황망한 죽음들의 기록들이다. 위에 언급한 사고들로부터 우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안전사고 불감증과 사고 공화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삶이다. 돈을 조금 더 아껴서 내 돈 벌려는 욕심으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내가 불편하고 귀찮으니 그냥 하던 대로 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내가 직접 관련된 일도 아닌데 누군가는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 타인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비도덕 주의로 인해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많은 사건ㆍ사고들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저녁이 있는 삶,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바라는 것도 욕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프다. “독자 여러분! 2018년 한 해 안녕하셨습니까? 2019년은 올해보다는 더 나은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신창환 경북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대학헌장과 대학의 자율성

볼로냐는 인구 40만에 불과한 이탈리아의 조그만 중소도시이다. 이 도시가 유명한 것은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추정되는 볼로냐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1988년 9월 18일 이곳에서 세계 430여개 대학의 수장들이 모였다. 볼로냐 대학의 창립 9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더 중요한 행사는 바로 그곳에서 EU 주도 대학헌장에 이들 총장들이 서명을 하는 것이었다. 이 대학헌장은 1987년 유럽 대학 연합체의 총장이었던 카민 롬만치(Carmine Romanzi)의 후원하에 EU 몇몇 대학의 총장들에 의해 초안 되었고 그날 최종적인 비준으로 대학의 이념과 가치에 대해 규정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가 되었다. 현재까지 전 세계 88개 국가의 889개 대학이 이 헌장에 서명했지만 한국의 대학은 하나도 그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대학헌장의 기본적 내용이 학문의 자유와 이를 위한 대학의 자율성을 규정하는 것이었기에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던 한국의 대학이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지금 2018년 현재에도 한국의 대학들이 이 헌장에 참여하고 있지 않을까? 그 의문은 사실 이 대학 헌장의 내용과 지금의 한국 대학이 처한 현실을 비교하면 너무 쉽게 풀려버린다. 대학헌장에서 가장 중요시 되고 있는 원칙은 대학의 자율이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 문화를 창출하고 점검하고 전승시킨다. 이 헌장은 이러한 기능의 충족이 대학이 정치적 권위나 경제적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권위주의 정권 이후의 한국 대학은 이러한 점에서 당당한가? 많은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대학이 교육부의 산하기관으로 전락했고 교육부는 정권의 충실한 대리인이었다는 것이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권의 정치적 견해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며 다수의 역사학자에게 좌익이라는 굴레를 씌운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의 총장 선출에까지 관여하여 대학의 구성원들에 의한 민주적 총장 선출을 막았고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 많은 대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 전 이명박 정권에서는 대학의 교수들에게 상호 약탈적인 성과급적 연봉제를 비롯한 다양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지금 대학에서는 논문 쓰기 바빠서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견 성과급적 연봉제는 교수들을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사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연구는 논문의 편수로 계량될 수 없다. 같은 전공 내에서도 어떤 연구는 몇 년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연구는 몇 달 만에 간단히 그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물며 수많은 상이한 전공들 간의 개량적인 상호평가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런 식이라면 어떤 연구자가 몇 달 만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를 제쳐두고 몇 년이 걸릴 수 있는 힘든 주제를 선택하겠는가? 이러한 정부개입이 계속된다면 우리나라에는 관제학문을 하는 관제대학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대학의 근본이념과 목적은 고등교육법에 수록되어 있지만 추상적 개념으로 여러 법 조항에 산재해 있고 대학의 운영과 관련한 기본적 내용은 국립학교 설치령 등에 총장이 교무를 통할한다는 규정이 전부다. 극히 행정 편의주의적인 생각에서 대학이 정의되고 있고 대학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파악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논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 보인다. 최근 몇몇 국립대학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무국장의 문제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모든 부분에서 교육부의 통제가 개입되고 있고 이 상황에서 그 매개자가 대학의 사무국장이니 대학의 실권자는 사실상 총장이 아니라 사무국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행정상 교육부 하부기구로 전락한 결과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이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가 아님은 분명한 것 같은데 대학의 자율성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교육부는 중등교육을 교육청에서 관할하므로 대학 교육 관리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바도 있다. 그러나 EU 주도 대학헌장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대학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하는 기관이다. 이는 대학이 자율성이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간섭과 통제는 오히려 학문의 자유를 해칠 뿐이다. 교육부가 이러한 일을 제외하고는 할 일이 없다면 이전 모 대통령 후보가 한 말처럼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최인철경북대 영어교육과 교수

시민의 관심 밖인 선거제도

오늘은 시민의 관심 밖 주제, 그러나 국회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인 선거제도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선거제도가 시민의 관심 밖 주제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제도가 국회의원의 첫 번째 관심사인 이유도 너무나 명백하다. 내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선거제도 파행으로 인해 소수 야당 대표들이 단식 중이다. 예산과 함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같이 처리하기를 소원했으나, 예산만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들에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될까? 잘 알려지다시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면, 소수 정당 의석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정당에 의석수를 할당한 후, 자당의 지역구 승자에게 의석을 주고, 그래도 남은 의석이 있으면 비례대표에게 의석을 나누어 주는 방식이다. 이때 정당 득표율은 전국 차원에서의 득표율일 수도 있고, 권역에 따른 정당 득표율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할 때 주요 정당의 문제점은 비례대표 의석을 한 석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비례대표 의석을 사전에 할당하지 않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운용할 경우, 주요 정당 후보자는 거의 모든 지역구에서 다수표를 획득하기 때문에 비례대표에게 줄 의석이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지역구 의석 200석, 비례대표 의석 100석이다. 비례대표 의석을 먼저 할당한 후, 지역구 의석에서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하자는 안이다. 대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역구 의석이 253석에서 200석으로 줄기 때문에 국회의원들끼리, 때로는 같은 당 소속의 국회의원들끼리 선거를 치러야 하고, 그러면 국회의원 중 누군가는 반드시 낙선한다는 것이다. 과연 주요 정당이 이런 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까? 세 번째 나온 대안은 국회의원 의석수를 증원하자는 안인데, 이 안은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사그라졌다. 학계를 비롯한 다수 인사가 국회의원 연봉을 삭감하는 방식의 의석수 증원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당연히 국회의원에 대한 냉소, 국회의원 불신의 발로이다. 얼마 전 끝난 예산안 처리 과정을 보면, 시민의 냉소적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스톱워치로 재가며 3분당 1건을 통과시키는 졸속 처리 과정, 그리고 비상사태로 명명되는 경제 불황 속에서도 국회의원 연봉은 거듭 상승했다. 물론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국회의원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주요 정당에서도, 소수 정당에서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어떻게 시행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과 정당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시민은 관심이 없다. 시민의 관심은 자신의 생계, 내 아이들의 보육과 교육에 있지, 선거제도 입법에 있지 않다. 혹자는 선거제도 변화에 따라 시민의 삶이 달라질 수 있으니, 시민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국회의원이 연봉을 받는 이유이다. 유권자가 국회의원에게 입법의 책임을 맡기고, 나라를 위해 입법을 하라고 세금을 내어 연봉을 주고 있다. 자당의 사활도 아닌, 자신의 재선도 아닌, 나라와 유권자를 위해 입법의 책임을 맡기고 있다. 이번 정권은 촛불로 만들어진 정권이다. 시민의 여망을 담아,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지방의 일꾼들이 선출되었다. 시민은 각자의 직업이 있으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이러하기에 시민은 자신을 대표할 사람들을 선출해서 입법과 집행을 하도록 했다. 따라서 정치인의 직업은 정치인 스스로에 대한 돌봄이 아닌 시민의 안위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정당과 의원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일 수 있긴 하나, 이는 유권자가 정치인을 선출한 이유가 아니다. 이제 1년 4개월여가 지나면,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있다. 벌써부터 정치적 피곤이 언급되며, 현역의원 대거 교체 등이 회자하고 있다. 과연 이런 방안이 효과적일까? 시민이 대표자를 선출한 이유는 명확하다. 시민을 위한 대표이어야 한다. 시민의 기대에 못 미친 정권이 어떻게 됐는지는 충분히 학습 됐으리라 본다. 지난 몇 년 사이 대통령이 교체되었고, 지방선거에서 격변이 일어났다. 이제 제21대 국회의원선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격변이 일어날지는 정치인의 손에 달려 있다.엄기홍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시? 안 믿으마 우짤낀데?

“요새 우째사노? 내 느그 학교 근처다. 가도 되나?” 오랜만에 연락이 온 고등학교 친구다. 여름에 봤을 때 큰 애가 고3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입시철이니 이런저런 답답함에 그래도 대학교수로 있는 친구를 일부러 찾아온 것이리라. “내가 우리 현우 금마 카는 소리는 하나도 몬 알아듣겠더라. 대학을 우째 가야 되는지 니가 쫌 갈키도” 교수 연구실로 맞이하니, 아니나 다를까 들어오는 첫마디가 아들 대학 걱정이다. 나: 힘들재? 그래도 현우는 공부 잘한다 카드만 무슨 걱정이고? 친구: 지 엄마가 시켜서 공부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니 대학 어디 갈래? 물으니 수시니 학종이니 교과니 정시니 납치니 이상한 소리만 해서. 나: 진짜 잘 모르는구나? 쉬운 거부터 하자. 정시는 11월에 치는 수능시험 점수로 대학가는 거 알고 있재? 각각 다른 대학에 원서를 세 군데 정도 낼 수 있고. 친구: 우리 때는 한 군데만 냈잖아? 많이 좋아졌네? 나: 응 기회는 많아졌지. 만약에 정시로 뽑는 인원이 10명이면 지원자 중에 점수로 상위 10명에게 ‘최초합’ 통보가 간다. 그런데 최초합격자 중에 등록을 안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후보’ 번호도 알려준다. 친구: 후보? 지 앞에서 등록 안 하면 후보한테 기회가 온다는 거지? 대기표 같은 거네? 나: 그렇지. 그렇게 후보로 있다가 합격하는 걸 ‘추합’이라고 한다. 1차 추합을 발표했는데 후보 중에서도 등록을 안 하면 그 인원만큼 또 2차 추합을 하고, 그래도 안 채워지면 3차를 하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전화로 등록을 할 건지 연락을 한다. 추합철이 되면 그래서 혹시 연락이 올까 봐 전화도 오래 못하고 기다려 보는 거지. 친구: 야, 어쨌든 기회가 많으니까 지 점수는 다 찾아 묵겠네? 우리 때는 미달나는데 찾는다고 원서 내는 게 전쟁이었잖아? 나: 지금도 여전히 원서가 중요하지. 점수가 평소보다 많이 내려가는 걸 ‘빵꾸’라고 부르는데 그게 우리 때 미달 같은거다. 작년에 어디가 폭발이고 어디가 빵구인지, 그리고 올해 내게 유리한 점수를 주는 대학이 어딘지를 다 일일이 살피고 공부해서 원서를 내야하는데 그게 만만하지가 않거든? 그래서 정시 원서 내는 일을 수능 6교시 ‘원서영역’이라고 부르기도 해. 친구: 유리한 점수? 수능 점수는 다 똑 같은거 아니가? 나: 원점수는 다 똑같지. 그런데 과탐같이 8개 과목 중에 2개만 선택해서 치는 시험은 우연히 난이도가 낮은 시험을 친 사람이 유리해지니까 ‘표점’이라고 과목별 평균과 표준편차를 반영한 점수가 있다. 여기에 대학별로 더 중요하게 쳐서 점수를 더 주는 과목이 서로 다 다르고, 계산을 백분위로 하는지 표점으로 하는지에 따라서 대학별로 내 점수가 달라지는거야. 친구: 아이고 머리 아프다. 그래서 우리 아도 시험 안치고 수시로 대학 갈라 캤구나! 나: 수시 합격자도 몇 과목의 수능 등급이 얼마 이상이 되어야 입학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수시에 붙어도 수능을 쳐야한다. 그걸 수능 ‘최저등급’이라고 해. 친구: 그런데 아들 친구들은 수시 붙으니까 공부 안한다 카던데? 나: 물론 최저등급이 없는 수시 전형도 많이 있어. 그건 대학들이 사정에 따라서 결정하는 거야. 친구: 나는 수시 그거 시험 안치고 대학가니까 좋다 싶더라. 고등학교 때 공부말고 뭐를 했는지 하고 취미나 특기는 뭔지? 그런 걸로 대학가면 되니까 새벽까지 학원 뺑뺑이 안 돌아도 되고, 부모는 돈도 덜 들고. 나: 내가 시간이 없어서 결론만 딱 이야기할께. 누가 수시에 대해서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혹은 어떤 전형이 누구를 어떻게 뽑는다고 광고를 하든지 간에, 크게 보면 수시는 고등학교 내신 성적으로 판가름이 난다. 고등학교 생기부고 자소서는 그냥 참고사항이다 친구: 응? 진짜가? 하기야 우리 애도 지가 지 생기부 쓰고 있더라. 웃기데? 나: 생각해봐라. 그러니 생기부 그거를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되겠냐? 이래저래 빼고 나면 결국 믿을 건 고등학교 내신성적 밖에 없다. 친구: 그런데 고등학교 내신 그게 공평하나? 뉴스도 그렇고 내가 봐도 그거 비리 많겠던데? 나: 그래도 대부분은 내신을 공평하게 하겠지. 진짜 전국에서 뉴스 나오는 한 두 군데에만 문제가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친구: 니도 학교에 있다 보이 많이 순진해졌네? 진짜 한두 군데만 문제라고 믿나? 나: 안 믿으마 우짤낀데? 그냥 믿자. 아니면 너무 서글프잖아?신재호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증오와 독설의 시대

인류의 역사 중 가장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는 시대, 하지만 정신적으로 가장 빈곤한 시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시간일까?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시대일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45억 년 이라는 지구의 역사, 그리고 7만 년이 넘는 현 인류의 조상이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지금 이 시대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곤 한다. 2018년 현재, 인류 역사상 가장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지구의 어느 한 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먹을 것이 없어 굶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다수의 인류가 이렇게 역사상 물질적으로 풍족했던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이렇게 빈곤한 시대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증오와 독설, 요즘 사회현상을 보면서 필자의 머릿속을 떠도는 단어이다. 정치권도, 일반시민도, 학교, 회사도 모두 나와 다른 것이 있으면 적이 되고, 내가 눌러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서울 이수역 근처 주점에서 남녀 폭행사건이 발생하였다.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이 SNS에 자신의 폭행당한 상처를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행 사건으로 규정되는 듯했다. 그런데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다가가 말다툼을 하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폭행 사건의 진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이수역 폭행 사건을 둘러싼 청원이 성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여성이 심한 욕설과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남혐범죄’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비 끝에 남성의 폭행으로 인해 여성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는 ‘여혐범죄’라고 규정짓고 있다. 국회의원과 정치인, 페미니즘 운동가, 래퍼까지 가세하면서 양상은 점입가경이다. 이수역 폭행사건은 동일한 사건이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프레임이 부딪히는 사례이다. 단순한 쌍방폭행사건으로 보는 시각과 젠더적 관점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여성에게 가한 일방적인 혐오와 폭력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부딪히고 있다. 한쪽의 주장대로 여성을 비하하면서 싸움이 촉발되었는지 혹은 반대쪽의 주장대로 남성을 비하면서 싸움이 촉발되었는지 진실은 아직 알 수 없다. 여론의 관심과 청원인 숫자가 확대되면서 경찰도 부담스러운 입장인 듯 예전과는 달리 수사진행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일방의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상대방에 대한 독설을 낳고, 그 독설은 상대방의 일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관심을 받는 사건이나 문제가 생기면 곧장 증오와 독설이 온라인을 점령한다. 온라인 상에서 서로 증오와 독설이 오가고, 상대방에 비방과 혐오를 증폭시키는 현상이 반복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어떤 시대로 기록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증오와 독설의 시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한 시대이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공동체 구성원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건의 진실 규명보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의 이념과 정치적 지향을 논쟁으로 확대 재생산하려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판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진실보다는 각자의 주장과 편견만 온라인을 지배하기에 객관적인 판단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다 옳을 수 있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도 문제지만, 나만 옳다는 극단적 절대주의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치관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극단적 절대주의와 나와 다른 상대방은 모두 적이라는 정글논리의 피아구별주의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정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보면서 갖게 되는 생각이다. 미래의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2018년 대한민국을 어떻게 기록할까?신창환경북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대학평의원회, 자율성 보장해야

지금 한국의 대학들은 전쟁 중이다. 바로 대학평의원회 설치를 두고 각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지난 5월 29일자로 고등교육법이 개정되어 각 대학에서는 교원, 직원, 학생 등으로 구성되는 평의원회를 설치하고 학칙 및 교육의 중요사항을 이 평의원회에서 심의하여야 한다. 그 구성도 한쪽이 과반을 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일견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대학에 접목시키려는 교육부와 입법부의 노력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일괄적인 입법을 통해 대학에 어떤 제도를 강제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법을 입안했던 국회의원이나 교육부의 관료들 입장에서는 이 법이 대학 재단의 과도한 개입 혹은 횡포를 막고 대학 구성원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대학운영에 반영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효과적인 법안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효용성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대학은 제각기 상황에 따라 그 처지가 다르다. 우리 경북대학교를 포함하여 많은 국공립대학교는 이미 고등교육법이 제시하고 있는 법안의 내용보다 더 선진적 의사결정 구조를 확립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경북대학교의 경우 학칙의 제ㆍ개정뿐 아니라 대학 본부 보직자의 임명, 규정의 제ㆍ개정에서도 교수들로 이루어진 교수 평의회에서 실질적인 의결권을 행사해왔다. 단순 심의ㆍ자문의 기능을 넘어서 실질적인 의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의결권은 학칙에 의결권이라는 명칭 대신 ‘교수회평의회를 거쳐’라는 표현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간 민주적 과정을 통해 선출되었던 거의 모든 총장이 존중해왔고, 대학의 구성원들에게도 교수들이 대학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가 되어왔다. 지금 고등 교육법의 대학평의원회 규정은 이러한 대학의 민주적 전통을 무시하는 일방적 처사임이 분명하다. 혹자는 그냥 교수회평의회의 기능을 대학평의원회로 넘기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평의원회의 규정으로는 총장 혹은 대학본부의 독임을 견제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대학의 본질인 교육과 학문적 진실의 추구에도 한계를 가진다. 고등교육법상의 대학평의원회의 설치 근거에는 ‘대학발전계획에 대한 심의’와 ‘학칙의 제ㆍ개정’, 그리고 ‘교육에 관한 중요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모든 내용의 중심에 서야 할 대학의 구성원은 물론 교수이다. 교육의 소비자이자 수혜자인 학생과 행정을 주 임무로 하는 교직원들도 물론 어느 정도 대학운영의 참여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대학 운영의 본질적 부분과 교수만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현행 대학평의원회의 규정으로는 총장 혹은 재단의 전횡을 견제하기 어렵다. 총장은 고등교육법상 교무관할권을 가진다. 이는 대학의 의사결정과 그 집행 과정에서 총장이 모든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는 ‘총장 독임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총장의 과도한 권력 집중으로 인해 나타나는 각종 문제를 효과적으로 견제했던 세력이 교수집단이었다. 지금의 대학평의원회 관련법에서 규정된 된 바와 같이 절반 이하의 구성으로서는 이러한 견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 것임이 분명하다. 더 의아한 것은 이러한 구성이 법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등교육법이 아닌 ‘서울대학법’의 적용을 받는 서울대학교의 경우 전체 50명의 대학평의원 수에서 교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90%에 육박하는 44명이다. ‘인천대학법’의 적용을 받는 인천대학교도 30명 중 27명이 교수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이러한 인적 구성이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법의 내용에 일관성도 없으면서 각 대학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전체 대학에 일괄적으로 적용시키려 하는 정부의 의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대학에서 총장 혹은 대학 본부에 의해 기존의 교수회가 가지고 있던 민주적 권한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고 그 근거가 고등교육법에 신설된 대학평의원회 관련 법안들이 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법의 무리한 일괄적 적용이 가져온 당연한 부작용이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31조 제4항에서는 대학의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함을 규정하고 있고 이는 곧 헌법적 권리인 학문의 자유가 대학의 자치를 통해 보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대학은 정부가 관여된 여러 기관 중에서 최고의 지성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간섭이 아닌 구성원들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적 운영 체계를 정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단체인 것이다. 설사 정부가 개입을 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그 개입의 범위가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평의원회 설치는 고등교육법으로 이미 규정되었지만 그 과정과 내용에 관해서는 대학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정착시켜 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최인철경북대 영어교육과 교수

상상만으로 그치기엔 아쉬운 현실

수업시간이었다. 집단의 권리란 주제로 토론을 하다 보니, 지방과 중앙의 불균형이란 화두로 흘러가게 되었고, 이의 문제점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토론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란 무엇인가, 전공이란 무엇인가? 왜 대학교에 가야 하지?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는 초등학교가 대학을 결정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어느 초등학교가 좋고, 어느 학원이 좋은지가 주요 관심사라 한다. 당연히 중학교는 더 심해지고, 고등학교는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의 상당한 관심이 ‘어떤’ 대학에 가는지에 몰려 있다. 그래서 대학교 학생들에게 물었다. 왜 경북대학교 A학과에 왔는지? 솔직한 학생들의 답이 좋았다. 좋은 곳에 취직하고 싶어서, 남들한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등등. 이 중 한 학생의 대답은 더욱 멋졌다. 지금까지의 고생과 노력이 어떤 대학교에 입학했는지에 따라 평가받기 때문에. 그렇지만 학생들 대답 어디에도, A학과에 온 이유는 없었다. 그 이유를 한 학생의 대답에서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의 관심은 어떤 대학에 입학했는지에 있지, 어떤 학과에 입학했는지에는 없다고. 사실 학과보다 대학이 우선시 되는 풍토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학번인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도 어떤 대학교인지가 중요하지, 전공하는 학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의 관심사와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할지라도, 대학교 이름이 중요하다고 했다. 80년대에도 나의 관심사나 소명(召命)보다는 대학교의 위상이 훨씬 중요한 분위기는 여전히 유효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 아마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관심과는 다른 공부를 하고, 자신의 관심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은 공무원이다. 우려되는 점은 공무원이란 직종이 다수의 전공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10대를 모두 투자한 결과가 자신의 관심과 거리가 먼 직종을 택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물론 학생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직장 내 갑질이 들려오고, 조기 퇴직이 일상화되고, 퇴직 후 연금이 불확실한 현실에서, 나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지만 안정적인 삶이 좋을 수 있다. 마치 전공보다는 누가 들어도 아는 대학교 이름이 훨씬 가치가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직장에 다니고자 태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생을 마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물론 살기 위해서는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고, 그래서 다소의 금전이 필요하지만, 금전을 내 삶의 목표로 두고 싶지는 않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상당 기간 유지했다. 행복지수는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근로시간은 평균보다 길다. 그렇게 우리는 OECD 국가 평균보다 더 일하고, 덜 행복하며, 많은 이들이 자살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긴 시간 동안 하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으며, 그래서 삶에 큰 연민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과연 대안이 있을까? 치솟는 집값에, 대학 등록금으로 허리가 휘고, 직장에 대한 불확실성도 큰 대한민국 학생들을 위한 대안이 있을까? 물론 필자도 뚜렷한 대안은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지금의 현실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상상해 본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더 배울 필요가 있고, 그래서 그 ‘전공’을 잘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교를 졸업해도 나의 갈망은 여전하기에 이에 맞는 직업과 직장을 택한다. 물론 현실의 삶들은 이런 것을 상상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도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고 싶다.엄기홍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비출산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BC 2만1년 10월의 어느 날. 훗날 울산으로 불릴 아늑한 어느 한반도 끝자락의 항구마을에서 네안데르탈인 남녀 한 쌍이 가쁜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 그들은 사피엔스인들이 갈무리해 준 침실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침실의 뒤편에는 이들을 신으로 모시는 사피엔스인들이 새겨 놓은 고래며, 물고기며, 거북이,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이 반구대에 병풍처럼 암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대대로 네안데르탈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새겨진 그림이었다. 네안데르탈인 남: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군. 이번 겨울은 우리 둘 다 넘기기 힘들겠지? 네안데르탈인 여: 그렇겠지. 작년 겨울도 마지막 남은 면역 강화제로 겨우 넘겼으니까. 남: 우리가 이 세상의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이겠지? 여: 맞아. 살아있으면 매년 동짓날 저녁에 쏘아 올리기로 한 폭죽을 쏘는 것은 이제 우리뿐인 것 같으니까. 남: 다른 네안데르탈인들도 다 같은 운명이었을까? 이렇게 문명을 진보시키고도, 심지어 사피엔스에게 도구 사용법을 가르쳤던 우리의 최후가 이렇게 허무하다니… . 우리가 사피엔스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여: 아니, 우리가 우월했던 것은 확실해. 역사를 보면 우리 선조들은 사피엔스보다 훨씬 먼저 아프리카에서 유럽의 검은 숲으로 진출했어. 혹독한 환경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후에도 끊임없이 신대륙을 찾아 나갔지. 우리는 사피엔스보다 훨씬 우수한 체력과 지능과 진취성을 가지고 환경에 적응했어. 우리는 사피엔스에 비해 짧은 30년의 수명을 가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진화를 촉진했지. 남: 하지만 지금 세상을 둘러보라고! 우리는 이렇게 멸종해가고 있는데, 아프리카를 벗어나면 병에 걸려 죽던 병약하고 겁이 많던 사피엔스는 이제 온 세상에 퍼져 나가고 있는 중이야! 여: 그건 우리가 병균이나 혹독한 환경과 싸우며 획득한 저항력이 사피엔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야. 지금의 사피엔스는 대부분 우리 선조와의 교배를 통해 전해진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남: 사피엔스의 번영은 우리가 환영할 일이잖아? 그들은 우리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모시고 받들어주니까.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사피엔스의 충성어린 수발 덕분에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아도 되었고, 덕택에 훨씬 높은 지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어. 여: 하지만 난 그게 우리의 멸종을 가속시켰다고 생각해. 우리가 모든 육체노동에서 해방되고 나니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에만 집착했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은 점점 개인의 성취를 방해하는 일이 되어버렸어. 남: 수천 년 전에 출산율이 2 이하가 되어서 인구 감소가 확실했을 때, 아니 어쩌면 수백 년 전에 출산율이 1 이하로 떨어졌을 때라도 우리 선조들은 반드시 어떤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어. 여: 하지만 대책이란 결국 아이를 낳아서 기르라는 것인데, 문명을 획득하고 별과 우주를 바라보던 현명한 네안데르탈인에게 개인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겠지. 우리 둘도 평생 아이를 가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잖아? 남: 네안데르탈인이 이룬 이 철학과 수학, 과학의 발견과 발전, 사람과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모두 헛된 일이 되다니. 우리가 멸종하고 나면, 아직도 문자를 가지지 못한 사피엔스가 우리의 수준에 도달할 날이 올까? 여: 나는 오래전부터 그 생각을 하고 준비해 왔어. 우리의 모든 지식을 어떻게 문자도 없는 사피엔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말이야. 남: 준비? 그래서 결론에 도달했나? 여: 응, 나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우리에게 매일 제사를 지내러 오는 사피엔스 제사장에게 궁극의 지식 한 가지를 가르칠 수 있었어. 아마 그 사실이 사피엔스들 사이에 퍼지기만 하면,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문명이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남: 궁극의 지식? 궁금해지는군. 그래 그동안 제사장에게 뭘 가르쳤어? 여: 사피엔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제사장에게도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 중에서 딱 한 가지 밖에 가르칠 수가 없었어. 그것은 바로 “세상 모든 것은 더는 쪼갤 수 없는 원자로 되어 있다”였어. BC 2만1년, 사피엔스에게 둘러싸인 채, 신이 되어 안락한 삶을 영위하던 마지막 한 쌍의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들은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발달한 문명으로 사피엔스를 지배하던 그들의 비출산 문화는, 과학기술로도 피할 수 없는 멸종을 초래한 것이다. 이제 남겨진 호모 사피엔스들은, 스스로 문명을 건설하고 번영하며 멸종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신재호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공공성과 사익성의 경계는

아침 출근시간에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들이 아파트 입구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면서 차량을 기다리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장면이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아이들과 엄마들을 보면서 누리과정으로 조금은 나아졌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로 한 바탕 파문이 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박용진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시도교육청 감사에서 적발된 이른바 비리 유치원 명단을 공개하였다. 경기도 동탄의 환희유치원에서는 원장과 운영에 참여한 두 아들이 교비 6억4천만 원을 빼돌려 명품 가방을 구매하고 노래방과 성인용품점에서까지 결제했다고 한다. 더구나 환희유치원 원장은 지난해 회계비리로 교육청에서 원장직 파면까지 결정한 상황에서 학부모들에게 알리지 않고 두 아들을 내세워 실질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도덕적 해이를 넘어선 불법행위이다. 화가 난 동탄의 학부모들은 거리로 나서서 비리 유치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고 유치원의 재정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론도 정부와 박 의원에게 쏠리는 모양새다. 이에 교육부는 비리 유치원 명단을 공개하기로 하였고, 사립 유치원장들의 이익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는 명단공개금지 가처분 신청을 준비하고 대형 로펌을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하고 총력전을 벌일 태세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고, 세금이 쓰인 곳에는 당연히 감사가 있어야 한다”는 박용진 국회의원의 주장과, “사립 유치원을 모두 비리 유치원으로 매도하면서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사립 유치원의 자율성을 억압하기 위한 정책적 의도가 있다”라는 한유총의 주장이 맞서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원을 한 축으로, 유관단체를 한 축으로 하며 쌍방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공적 재정이 투입된 유치원은 공적인 감시를 받아야 하는 곳이라는 주장과 사립 유치원은 개인의 투자와 노력으로 형성된 재산권이 보장받아야 할 곳이라는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 이번 사립 유치원 사태를 보면서 터질 것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안의 본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공공성과 사익성의 충돌이다. 단순히 유치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집도, 대부분의 사회복지시설도 해당하는 문제이다. 누리과정은 국가적 보육ㆍ교육 과정이지만 누리과정의 영유아 대상 보육ㆍ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들은 절대다수가 민간시설이다. 다시 말해 국공립 시설보다는 사립 시설에 의존한 서비스를 제공해온 것이다. 보육ㆍ교육ㆍ복지 서비스는 공공 서비스이지만, 민간시설과 인력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이다. 유치원, 어린이집, 사회복지시설이 건립부터 운영까지 모두 100% 공적 재원으로 된다면 문제가 간단하겠지만, 대부분의 보육ㆍ교육ㆍ복지시설은 민간의 사유재산이 일정 부분 투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정부가 사유재산권에 해당하는 만큼 보상을 해준다면 일정 부분 해소될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장기간의 계획과 엄청난 예산을 요하는 것이라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서비스원이라는 기구도 원래는 이런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가 예산 부족으로 다른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민의 세금이 사용되는 곳이라면 투명한 회계 처리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감사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傳家 寶刀)도 아니다. 또한 특정 개인의 일탈이나, 집단이기주의로 일방적으로 문제를 단순화시켜서 될 성격의 문제도 아니다. 차제에 사립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국가보조금의 투입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보조금이 아닌 성격의 지원금이라면 어떤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국민에게 알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평가와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근대국가의 역사가 짧고 공공성의 역할이 미약했기에 민간의 자원과 역할을 활용하여 공공서비스를 확대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민간의 각종 공공서비스 제공은 우리 사회에서 국가 역할의 공백을 메워왔다. 그렇기에 의료, 교육, 복지와 같은 우리 삶의 필수적인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마다 정부와 관련 단체가 서로 갈등하면서 공공성이 훼손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신창환경북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국립대학 지원 육성이 출발점이다

지난여름 대입제도 개편을 놓고 국민의 관심이 뜨거웠다. 당시 공론화위원회에서는 정시를 우선할 것인가 수시를 우선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실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그 누가 나선다 하더라도 대입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을 깨끗하게 해결할 수 없다. 문제의 시발점이 대입의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대학만 들어가면 만사가 해결되는 우리 한국이 처한 독특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모든 관심은 대학의 이름에 쏠려 있다. 이는 ‘우리 아이가 대학에서 어떤 교육을 받아 어떤 인재로 성장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어떤 대학을 졸업하였는가’의 문제가 그 아이의 장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인재에 대한 관점은 현재의 모습과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과거 한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이러니 정부도 정치권도 고교 교육을 통해 대학에 입학하는 것까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정작 국가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대학 자체의 교육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대입제도를 개편한다고 해서 과열된 대학입시경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순진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최근 서울의 집값이 어마무시하게 올라버렸다. 서울살이를 접고 대구에 정착한 지 이제 14년째이다. 처음 경북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부모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요즈음 가끔 허무감과 무력감에 빠져드는 때가 있다. 난 이제 아파트 대출도 다 갚고 살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년을 해도 대구에서 계속 살아야 할 것 같다. 내 집을 팔아도 서울 가면 전세 보증금은커녕 월세 보증금이라도 될까 싶다. 물론 대구도 정이 들었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내 일을 사랑하기에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부모님 형제 친구들도 다 서울에 있기에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 개인의 문제를 떠나 서울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가고 지방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재화와 용역은 정해져 있는 것이기에 어느 재화의 가치가 상승하였다면 다른 쪽 재화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한 것이다. 서울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부자가 되고 지방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괜찮은 수입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국가의 문제인가? 나라 전체가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이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에 대해 언급하며 지방경제에 활력을 줄 정책을 펴나가겠다고 한 바 있다. 앞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대학입시 문제와 수도권 부동산 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그 해결의 단초가 이 지방을 되살리는 것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괜찮은 먹거리들도 직업도 모두 서울에만 몰려 있고 그러다 보니 서울에 있는 대학들만 더 명문으로 성장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떤 입시정책도 부동산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나는 지방을 되살리는 정책의 시작이 지방의 거점 국립대학을 이전의 그 명문 대학들로 되돌려 놓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을 가던 무렵 혹은 그 이전의 세대들에게 경북대학교는 서울대학에 못지않은 지역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지역의 인재들도 구태여 서울로 가기보다는 경북대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러할까? 일단 졸업을 하고도 이 지역 내에서 갈 수 있는 괜찮은 직업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그간 지속하여왔던 국립대의 재정지원 축소와 등록금 규제 등은 그나마 어렵던 국립대학의 경쟁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지역의 거점 국립대학들의 교수 평균 대학원생 수 비율이 6명이라면 수도권 주요 사립대의 대학원생 수는 9명이다. 연구비의 비율도 국립대 전임교원이 수도권 사립대의 절반에 불과하다. 또한 국립대의 교원 확보율은 사립대학에 비해 7% 정도 부족한 상황이고 학생 1인당 교육비는 수도권 사립대학에 비해 30%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 없이는 국립대의 발전은 물론이고 지역의 발전도 요원하다. 국민이 지역의 거점 대학들에서 잘 교육받고 이후 그 지역의 좋은 직장에서 잘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면 누가 구태여 서울의 명문대학에 가려고 발버둥칠 것이며 왜 서울로 몰려들어 서울의 집값을 올려놓겠는가? 이제 집권당의 대표가 국회에서 뜻깊은 정책을 발표하였으니 그 정책이 잘 실천되고 그로 인해 지역의 대학과 지역의 산업이 발전하기를 정화수라도 떠놓고 빌고 싶은 심정이다. 그것이 또한 과열된 대입경쟁과 수도권 부동산 가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최인철경북대 영어교육과 교수

라이프, 상식과 배려

Life is living.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주제가 하나 있다.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마도 중학교 때였으리라.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수필이 이런 주제를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 필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살고 있었다. 가끔은 “왜 사세요?”란 질문, "Why do you live?"란 질문을 했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를 마치 돈키호테를 보는 듯한 주위의 시선을 느껴왔다. 지금은 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설혹 그 질문에 오늘 확신을 갖고 답한다 할지라도, 10년 후에는 그 답이 틀렸다고 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쉽지 않은 질문을 갖고 오늘도 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은 그렇게 살아진다는 것이다. 삶은 하루하루, 매시간, 매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특정한 방향이나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표의 존재 여부에 상관없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이다. 내가 계획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하루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필자의 주위에는 목표와 계획 없이 사는 삶이 훨씬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의 삶에서 행복을 찾곤 한다.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기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바로 내 가정의 안전과 행복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나의 부모님, 배우자, 아이가 안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생활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전제들 때문에 무위자연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주변의 환경이 안전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다시 중학교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서의 사고는 끊이지 않고, 인도에는 이륜차들이 질주하고 있으며, 불법주차한 차들 사이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내가 먼저 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치고, 내 통화가 중요하기에 버스에서 마음껏 이야기하고, 내가 먹은 음료수가 귀찮아 있던 자리에 그냥 놓고 간다.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대학입학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고, 대학생은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직장인들은 노후 생활을 걱정하고 있다. 과연 내 가정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달리 이야기하면, 소중한 내 가족의 안전을 해치는 위험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고, 내 가족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상당하고, 나의 아이들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닌 주위의 시선에 의하여 길러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구나. 내가 무위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나의 편함을 양보하고, 상식에 맞게 주위를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구나.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고,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남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 결국 나와 내 가정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것이구나. 이런 생각들이 결론으로 다가온다. 이런 생각의 종점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내 탓이오’란 슬로건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가? 나는 상식을 지키고, 남을 배려하고 있는가? 나만의 편함을 위해 원칙을 지키지 않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건 아닌가? 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바를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식에 맞는 배려를 하고 있는가? 오늘도 ‘내 탓이오’란 말을 상기하며, 자성하고 있다. Life is living을 위해.엄기홍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어머니의 투자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이스차카란 작은 섬에서 열리는 ‘국제 극한미생물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켰다. 교수라면 누구나 반드시 국제학회에서 최신의 연구 결과를 교류해야 한다. 아까운 세금으로 마련된 연구비를 이미 유행이 지나가버린 연구에 소진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도, 스마트폰 업데이트 주기처럼 변화가 빨라진 수업 내용을 최신형으로 업데이트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요즘엔 국제학회의 연사 목록에 국적을 표시하는 것이 유행이다. 내 이름 뒤에 달린 ‘KOR’이 외롭게 CHI나 JAN 마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페이지에 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 우리나라 학자들의 국제학회 참석은 정말 적구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연구발표 때나 리셉션 때 일부러 좀 더 과장된 언어와 몸짓으로 발표, 질문, 의견 교환을 활발히 하는 편이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한국인 과학자도 있다는 존재감을 기어이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결코 영어를 잘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 오해 마시라. 내가 말하는 문장을 누가 녹음해서 글로 풀어놓으면 여지없이 문법 파괴 수준일 것이다. 그래도 ‘당신들이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니 어쩌겠나?’란 생각으로 열심히 단어를 주워 모으면, 다들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내가 자기들 앞에서 침을 튀기며 열심히 떠드니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나는 강의실로 들어올 때 매번 긴장된다고 했더니 전부 “에이…” 하며 못 믿는 눈치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잘 떠들고, 당당하고, 낯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단다. 기가 막혔다. 내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많은 사람 앞에서 혼자 떠들어야 하는데 긴장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 나의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은 성격이 아주 괄괄한 장부 스타일의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학기 초에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온 자리에서 출근을 미룬 어머니가 내놓은 보리차를 한 잔 들이켜고는 다짜고짜 어머니에게 혹시 계모인지를 물었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시며 틀림없이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밝히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느냐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고 늘 주눅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틀림없이 계모 밑에서 크는 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에피소드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나는 혼자 논 기억밖에 없다. 학교 마치면 바로 집으로 와서 혼자 공상하고 뭘 만들고 부수고 하던 것이 일과였다. 어쩌면 상대적인 가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굶은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모두 가지고 있던 ‘전자완구 제미니’를 나는 끝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소리지만, 교수가 되고 나서 제일 좋았던 것이, 주머니에 달랑 차비만 가지고 화려한 백화점 매장에 들어가도 움츠러들거나 겁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난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사람을 위축되고 못살게 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정방문일에 어머니는, 새벽에 3교대 근무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잠을 못 이루신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에 늘 풍국주정에 함께 다니시던 옆집 아주머니께 오늘도 몸이 아파 못 나간다고 했다. 그 소리를 문틈으로 듣고는 방과 후에 집에 오면 엄마가 있으리라 생각하니, 등굣길이 즐거웠다. 다음 주였나? 어머니는 향촌동 대보백화점에 나를 데리고 가서 보이스카우트 옷이랑 항건이랑 호루라기 등을 사 주셨다. 모두 6만 원이었다. 아버지 월급이 10만 원을 넘었다고 좋아하시던 게 몇 달 전이었고, 사춘기 중학생 누나가 3년 내내 단벌로 여기저기 기워 입고 다니면서 새로 사 달라고 칭얼대던 교복값이 9천 원이었으니,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 초등학생 생각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옷은, 늘 행동에 자신감이 넘치고 선생님들이 잘 봐주는 애들인 보이스카우트에 소속되는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왜 그런 큰돈을 나에게 쓰는지는 충분히 알았던 것 같다. 그 뒤로는 어디 가서도 일부러 앞자리를 찾아서 앉고, 질문 생각만으로도 귀에서 쿵쾅거리며 들리는 심장을 애써 짓누르고, 어지러움까지 느끼며 질문을 했다. 정말 기를 쓰고 질문을 하고, 발표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마음먹고 몇 년을 악착같이 그렇게 살았다. 가족에게 정말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으며, 충격이었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소심하고 숫기없이 내성적이었던 아들은, 이제는 세계 곳곳에 반가이 맞이하는 얼굴들이 생긴 국제적 ‘인싸’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불려다니고 있다. 이게 다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일탈 덕분이었다.신재호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우리는 얼마나 빨리, 많이 커져야 할까

고등학생인 아들의 요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키가 얼마나 더 클 것인가이다. 친구들을 보면 180cm를 넘는 아이들도 꽤 있는데 아들 자신의 키가 크지 않다면서 그 원인은 다 아빠 탓이라고 불평한다. 유전적 요인을 무시하지 못하니 괜스레 미안해진다. 아빠가 나보다 더 작아도 아들의 키가 꽤 큰 경우도 많은데…. 먹지만 말고 키 크는 운동을 열심히 해보라며 아들의 불평에 대꾸를 해본다. 아무튼, 아들의 관심은 성장이다. 우리 사회의 주된 관심사도 성장인 듯하다. 경제성장! 먹고사는 민생의 문제와 직결되니 역사와 시대를 막론하고 주된 관심사인 것은 당연지사이다. 뜨거웠던 여름의 불볕더위만큼이나 여전히 식지 않는 논쟁의 핵심은 ‘성장’이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라는 실업률, 감소하는 저소득층의 소득분배율, 자영업 위기, 사상최대의 가계부채, 치솟는 서울의 아파트가격 상승률 등 발표되는 통계치는 성장과는 거리가 먼 결과물들만 보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현실화 등 현 정부가 공약으로 제시했던 정책들을 시행한 것도 오히려 현재의 경제상황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미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현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은 연일 뭇매를 맞고 있다. 최근 보도되고 있는 통계치 앞에서는 정부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소득주도로 성장할 것인가? 여기서 소득은 근로소득을 말한다. 일자리 확대와 근로소득의 증가를 통해 가계소득을 증가시켜 소비를 촉진하고, 경제성장을 도모하자는 논리이다. 경제학 이론에도 없는 성장론이라며 비판받는다. 하지만 분수효과라는 유사한 논리는 이미 경제학에서도 언급되고 있던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던 야당의 원내대표가 출산하면 성인 때까지 1억 원을 파격적으로 제공하는 ‘출산주도성장’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주장하였다. 주장의 파격성만큼 이를 두고 후폭풍이 적지 않았다. 출산의 문제를 단순히 돈의 문제로만 보는 시각은 차치하고, 우리 사회의 성장에 대한 관점과 집착을 보여주는 듯해서 기사를 접하고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출산율의 저하는 장기적으로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로 이어져 잠재성장력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출산과 성장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출산을 성장의 수단으로,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기 위해 제시하는 주장이 얼마나 국민의 가슴에 와 닿을지 의문이다. 교섭단체의 대표로서 정기국회에서 연설을 하는 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국정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의 발전과 성장에 대한 건설적인 담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 경제는 자본과 노동의 투입량의 단순증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의 수준은 이미 지났다. 자본과 노동의 단순투입의 증가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면 경제의 체질개선을 위한 구조조정이나 기술력 향상을 통한 성장의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간 우리는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안 찾기를 위한 사회적 숙의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영향도 있겠지만, 1980~90년대의 양적 성장의 시기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성장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이의 키가 크면 성장통은 겪게 마련이다. 우리 경제도 이만큼 성장했으니 성장통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전과 달리 향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장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회적 숙의가 여야의 당파적 이해관계와 노사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 제안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더 세련된 정치가 아닐까? 그리고 제안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이를 낳지 않는 우리 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 아닐까? 자고 나면 키가 크는 사춘기 아이처럼 성장하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은 아닌지, 더 키가 클 여지가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영양분을 더 섭취해야 할지, 운동을 통해서 성장판을 자극해야 할지, 외형적인 키가 다 컸다면 근육을 키워 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18일은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는 날이다. 평화와 통일로 가는 여정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진정한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통일주도 성장론마저 나오지 않을까? 아! 착각했다. 이미 통일대박론이 있었으니.신창환경북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재정지원 없는 ‘강사법’은 속 빈 강정

그간 수많은 논란과 혼동을 초래하며 네 차례나 유예되었던 시간강사법의 개선안이 지난 9월 3일 강사제도개선협의회에 의해 발표되었다. 강사법은 지난 2010년 조선대 고 서정민 박사의 자살을 통해 드러난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우로 인해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듬해에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강사들의 대량실직 등의 문제점들 때문에 사회적 논란만 불러일으키고 계속 그 실시가 유예되어왔다. 이번 개선안은 강사단체, 대학 그리고 국회의 추천 위원들에 의해 합의되었고 그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해왔던 강사 단체들도 찬성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국회를 통과해 입법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이번에 발표된 개선안의 주 내용은 강사 임용의 계약조건을 1년 이상을 원칙으로 하되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최소 3년간의 재임용을 보장하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강사를 교원의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시간강사에게 교수와 마찬가지로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한 내용이다. 이 외에도 수업이 없는 방학기간에도 임금을 지불받고 건강보험과 퇴직금을 보장받는 등의 진일보한 내용이 담겨 있다.대학의 시간강사들은 대학교육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해왔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경북대학교의 시간강사 강의담당 비율은 2016년 기준으로 31% 정도인데 다른 거점 국립대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받는 강사료는 경북대의 경우 9만 원보다 조금 더 되는 수준인데 전국에서 가장 높은 시간 강사료에 속한다. 일반 사립대의 경우 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허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대학교의 경우 강사의 평균 강좌담당 수가 1.76 과목인데 시간으로는 주당 5.3 시간 정도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계산했을 때 이들 시간강사의 1년 추정 수입은 1천400만 원에 불과하다. 2인 가족 기준으로 할 때 중위소득인 2천800만 원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다. 이는 다른 수입이 없다는 가정하에서 경북대 강사의 평균 수입이 사실상 빈곤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사립대학의 강사들은 이보다 훨씬 더 열악한 처우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박사학위 취득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감안할 때 이들이 매우 낮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새로이 제안된 개선안이 이러한 시간강사들의 곤궁한 상황들을 해결하고 대학교육을 정상화시키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시간강사법만으로 시간강사들과 한국의 대학교육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시간강사에 대한 적합한 경제적 보장과 복리후생의 문제를 도외시한 채 몇 가지 법안만 만든다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법안만 덩그러니 만들어 놓고 정부가 그 모든 책임을 대학에 떠맡긴다면 시간강사 문제는 한 치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대학에 따라 이월금과 적립금을 충분히 쌓아놓고도 낮은 시간강사료를 고집하며 강사들의 복지와 인권을 도외시하는 곳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일부의 상황을 전체 대학으로 일반화시키고 새 강사법의 시행에 따른 부담을 대학에만 떠맡긴다면 시간강사법은 허울뿐인 법안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이 자체 재정으로 지금의 개선안 정신을 충분히 살리며 강사법을 시행하기에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획재정부의 내년 예산안에서 강사법과 관련된 사업 예산이 삭감되었다 하니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에는 반값 등록금과 평가에 따른 지원 축소 등의 행ㆍ재정적 규제와 통제를 가하면서 강사법에 따른 부담은 스스로 지라고 하는 것은 양질의 대학교육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이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지원 대책을 강구하기 바란다. 대학 시간강사의 문제는 대학교육의 공공성 강화라는 차원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대학 교육의 질을 제고하는 것 또한 우수한 교수 확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일 것이다. 우리 대학 교육의 30% 이상을 담당하는 이들 시간강사를 외면하고 빈곤선에 머물게 하면서 교육의 질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공허하고 터무니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학교육을 방치하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더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이다.최인철경북대 영어교육과 교수

익숙함과 고유함의 가치

필자는 서해안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비록 두살배기 어릴 때 어머니의 등에 안겨 서울로 상경했지만, 내 유전자 어딘가에는 서해안의 흔적이 담겨 있다. 아마도 그래서인가 보다. 회보다는 소라가 좋고, 문어보다는 주꾸미에 손이 간다. 소라를 맛있게 먹는 방법과 주꾸미를 잘 데치는 방법도 안다. 태어난 곳의 흔적이, 길러진 역사에 묻혀 나오나 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다니던 길은 지금도 가끔 꿈에서 나온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길을 찾을 수 있고, 낯선 이가 길을 물으면 답할 수 있다. 비록 유년 시절의 장소를 떠난 지가 30년이 다 돼가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들은 지금도 생생하여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가장 빠른 길을 말해 줄 수 있다. 필자의 전공은 미국 선거이다. 그렇지만 낯선 미국은 단지 책으로만 배워왔다. 그래서 그럴까. 아무리 박사과정을 마쳤다 할지라도, 미국 선거에 한 번도 투표를 한 적이 없어 어떤 주(state)의 시장 이름을 질문받을 때마다 긴장하곤 했다. 한국에 와서는 편하다. 전공이 선거이다 보니, 미국 선거를 전공했어도 한국 선거를 묻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익숙한 정치인의 익숙한 공약과 업적이 떠오른다.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이 한 주장이나 업적들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떠오른다. 역사 속에 사라진 수많은 정당 이름들도, 어떤 정당이 어떤 정당으로 변화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어렵다. 선거를 조금만 벗어난 주제들, 심지어 정치를 조금만 벗어난 주제를 물으면, 당황하곤 한다. 심지어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 7년간 공부하고 있는 프로그램 언어는 지금도 힘들기만 하다. 이렇듯 익숙한 것은 편하고 자신 있으며, 낯선 것은 불편하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 자동차에 대해 묻는다든가, 미술에 대해 묻는다든가, 아니면 천문학에 대하여 묻는다면, 필자는 많이 망설일 것이다. 아니, 말할 자신도 없을 것이다. 사람도 그렇지만, 기업도 그러하고, 지역도 그러하며, 나라도 그러할 것이다. 자신이 잘 아는 것은 편하고 자신감이 있으며, 신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지역이, 그리고 나라가 잘 모르는 것을 할 경우, 허둥대고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물론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지만, 그 새로움에 대한 도전도 나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시작해야 잘할 수 있고 자신감이 있을 수 있다. 비교우위란 말이 있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이 있다. 개인, 기업, 지역, 그리고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비교우위가 있는 것을 선택하여 집중해야 한다. 자원이 무한하지 않으니, 우리가 그래도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하지 않던 낯선 것이 비교우위가 있을까, 아니면 익숙해서 잘할 수 있는 것이 비교우위가 있을까? 달리 이야기하면, 전혀 새로운 것을 개발하여 비교우위를 찾는 것이 바람직할까, 아니면 익숙하고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에서 비교우위를 찾는 것이 적절할까? ‘대프리카’란 단어는 이젠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대구 폭염을 상징하는 이 말은 대구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로서, 대구를 비롯하여 한국 전역에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이런 대프리카에서 치맥을 하는 것이 좋아, 많은 이들이 대구에 오고 있다. 대구 시민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더위, 우리가 유달리 심하게 겪고 있는 더위가 타지인들로 하여금 대구를 찾아오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물론 대프리카에서의 치맥이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산업일 수 있고, 단기간에 끝나는 행사일 수도 있다. 또한 다른 것이 훨씬 이득이 되는 산업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프리카의 익숙함과 고유함이 많은 타지인이 대구를 방문하게 되는 원인이란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익숙함과 고유함이 대구시민으로 하여금 “우리도 이런 게 있다”란 말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대구의 또 다른 익숙함과 고유함은 무엇일까? 어떤 지역에서 교육도시를 내세우니, 다른 지역도 따라하는 교육도시 말고, 무엇이 우리에게만 있는 익숙한 고유함일까? 대구시민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고, 자신 있게 행할 수 있는 그 익숙함과 고유함이 무엇일까? 이렇게 익숙하고 고유한 것을 찾아 그런 부분을 지역이 잘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 지방정부의 역할이 아닐까?엄기홍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