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 시집『해가 많이 짧아졌다』(솔, 2004) ............................................................................................................... 시인의 제5시집 제목을 이 시의 마지막 행 ‘해가 많이 짧아졌다’로 붙였다. 하지에서 동지로 넘어가는 사이의 계절이니 해가 짧아지는 것은 지당한 자연현상이다. 시인이 생의 감각으로 포착한 이 문장은 양의 기운이 쇠락해가고 남은 날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로서의 여운이 짙게 드리웠다. 척추동물과 새들은 해가 짧아지고 일조량이 줄어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곧 들이닥칠 겨울을 채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가 절기상 ‘한로’였다. 철새들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척추동물은 추위를 피해 웅크릴 수 있는 안전지대를 찾는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바람이 차졌다. 더욱 깊숙한 가을을 향해 잰걸음이다. 덧없이 그림자가 길어지는 사이 먼 곳은 더욱 가까워졌다. 비 그친 뒤 청명한 대기가 시정거리를 늘린 탓이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 마냥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세상이 잘 보이는 것만큼 나 자신의 남루도 또렷이 감각된다. 시인이 이 시를 쓸 무렵은 70대 중반쯤이라 짐작된다.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늙음에 대한 자각은 세월이 갈수록 명료하다. 이런 것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전조 현상이다. 아직은 간신히 푸른 기운을 붙들고 있는 저 나뭇잎도 곧 붉게 물들고 연이어 낙엽이 될 것이다. 짧아진 해를 생의 주기로 감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지만 새벽에 자주 잠을 깨고, 시계의 초침소리가 또박또박 들린다. 그 소리는 가차없고 집요하다. 우주 저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듯 엄정하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현악기의 선율이 깊게 패고, 그리움의 긴 팔은 멀리 뻗지 못하고 안으로 접혀진다. 켜놓고 잠든 텔레비전에서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동백꽃처럼 꺾어진다. 꺾인 소리가 담벼락 너머 내 수면 속으로 반쯤 흘러든다. 몸속의 단백질이 묽어지고 부신은 피로하다며 자꾸 졸음을 부른다. 돌연 변이된 세포가 몸속 어딘가에 쌓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동창생의 부고를 듣는다. 내 그림자가 더욱 엷어지고 저벅저벅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온 힘을 다하여 삶을 사랑하였을까. 마음을 다 바쳐 어제를 살았을까. 해내지 못한 숙제는 쌓인 채 먼지를 덮어쓰고 이별은 도처에서 온다. 그리고서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이 왔다.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가을이다. 시인은 1년 6개월 전 세상을 떠나, 내 어머니보다 1년 빨리 와서 1년 늦게 가셨다. 3년 전 가을만 해도 어머니는 아파트 베란다의 강 건너 미루나무숲을 지긋이 건너다보고 계셨다. 시인과 비슷한 감상으로 “애비야, 올해는 나 좀 태워서 아무 데나 단풍 좋은 곳에 꼭 좀 데려가 다오.” “올가을이 마지막일지 어이 알겠노.” “별 소릴 다 하고 그래요, 뒷날 좋은 곳에 모시고 갈 테니 올핸 강 건너 공원에나 다녀옵시다.” 그러고서 겨우 동네 한 바퀴하고 내 볼일에 동행하여 시내 중앙도서관에 다녀온 게 고작이었다. 그토록 엄마의 해가 짧아졌는지는 몰랐다. 창대했던 것들이 불현듯 쇠락할 줄 불효자는 예감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정든 병 /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 시집『혼자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1992) ............................................................................................................. 사람에게 느끼는 정이란 마냥 어여쁘고 보기만 해도 좋은 고운 정이 있는가 하면, 귀찮고 마땅찮지만 허물없고 만만하여 물리치지 못하는 미운 정도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주구장창 어화둥둥 고운 정으로만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란 어려운 법이지요. 그래서 미운 정까지 들어서야 제대로 정이 숙성되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완숙의 경지에 도달하겠는데요. 단맛만 취하고 쓴맛은 서로 뱉어내는 사랑이란 자칫 그 관계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뿐 아니라 지속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남녀 사이의 애정만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우정이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정든 사람들은 백번을 안녕하고 인사해봤자 돌아서면 또 보고프고 맘이 짠한 걸 어쩌란 말입니까. 대책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게지요.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도저히 안녕하지 못하는 너와 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생이란 그렇게 허무의 심연을 감추며 끌어안고 사는 것인가요. 세월이 흐르면서 들었던 정이 세월이 흐르면서 잊히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일까요 무리수일까요. 정이 들었다는 것은 서로에게 길들여짐일 텐데요. 그것은 곧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 아니겠는지요. 지금 어디서 무얼 할까, 표정은 어떨까, 활짝 웃을까 찡그리고 있을까,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정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걱정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아프지는 않을까, 혼자서 힘든 일로 끙끙대지는 않을까. 외로움이나 괴로움에 지치지는 않았을까.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깊은 정이 들었다는 것은 나보다 당신이 덜 아프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당신의 아픔이 나를 아프게 하고 당신의 슬픔이 나를 눈물짓게 하기에, 언제나 초조하고 긴장하게 됩니다. 일찍이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은 그리움, 영원한 초조’라고 말했지요. 그러므로 사랑으로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일일이 말 못할 가슴앓이가 내 몸 안에서도 한 짐입니다. 하지만 속수무책의 버려진 몸이며 마음들이 아무리 즐비해도 그들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대책 없는 밤이 흐르고 내일이 오고 또 미래가 온다 해도 ‘정든 병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어둑어둑 대책 없습니다.’ 26년 동안 독일 생활을 해오면서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특히 여성성 짙은 언어로 여성 독자들의 감수성을 심하게 건드렸던 허수경 시인이 지난주 독일에서 위암 투병 중에 별세했습니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의 구절들이 가슴에 저미어옵니다.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창백한 빛을 머금고 저 별로 스러져간 그대 부디 잘 가시길….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 / 이상국

혹시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는지/ 집집마다 걸려 있는 오징어를 본 적이 있는지/ 오징어 배를 가르면/ 원산이나 청진의 아침햇살이/ 퍼들쩍거리며 튀어오르는 걸 본 적이 있는지/ 그 납작한 몸뚱이 속의/ 춤추는 동해를 떠올리거나/ 통통배 연기 자욱하던 갯배머리를 생각할 수 있는지/ 눈 내리는 함경도를 상상할 수 있는지/ (중략)/ 오징어 배를 가르는 사람들의 고향을 아는지/ 그 청호동이라는 떠도는 섬 깊이/ 수장당한 어부들을 보았거나/ 신포 과부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는지/ 누가 청호동에 와/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오징어를 보며/ 납작할 대로 납작해진 한반도를 상상한 적은 없는지/ 혹시 청호동을 아는지 -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 1998) .............................................................................................................. 청호동에 가본 적이 있다.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도 먹고 알이 통통 밴 도루묵찌개의 맛도 잊지 못한다. 몇 해 전 이 마을로 가기 위해 이용했던 ‘갯배’의 삯은 편도 200원이었다. 지금은 동명항과 청호동 사이에 다리가 생겨 차로 건널 수 있지만 이전에는 무동력선인 갯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속초 시내에서 청호동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청호동은 1ㆍ4후퇴 때 함경도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허허 백사장이 실향민 마을로 형성된 곳이다. 통일이 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고향과 가장 가까운 이곳 속초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게 오늘날의 청호동 ‘아바이 마을’이다. 실향민 1세대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세상을 등지면서 2~3세대가 6천여 명 살고 있다. 실향민이란 고향을 떠난 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말한다. 피난 오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실향민들도 ‘속초에 가면 고향 사람들이 많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들은 짐을 풀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돌아갈 고향이 있어서 더욱 악착같이 살아왔던 실향민의 고단하고 애잔한 삶의 사연이 청호동에 흐른다. 집집이 배를 갈라 널어놓은 오징어가 그들의 눈물보다 짭조름할까. 실향민 1세대들의 눈물이 말라가는 지금 ‘누가 청호동에 와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오징어를 보며 납작할 대로 납작해진 한반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청호동은 이제 ‘은서네 마을’로 알려진 지 오래다. 18년 전 방영된 ‘가을동화’의 기억이 앞서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얼른 달려가기 위해 간이로 옹기종기 지었던 지붕 낮은 집들도 하나둘씩 새 건물로 바뀌고 있다. 함경도 고향마을의 이름을 상호로 붙인 ‘북청○○’이나 ‘신포○○’보다는 ‘은서네 슈퍼’가 훨씬 친숙해져 있다. ‘1박2일’에서 강호동 이승기가 다녀간 이후 수제 아바이순대는 사라지고 우후죽순 생겨난 식당들은 공장 순대 맛으로 통일되어 버렸다. 이제 청호동은 알아도 드라마와 연예인과 그들 배경만을 떠올릴 뿐. 그러나 ‘납작해진 한반도’가 가로 늦게 꿈틀대고 있다. 3차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후 민간부문에서 협력할 일은 얼마든지 있음을 확인했다. 역시 가장 기대가 큰 분야가 다양한 방식의 이산가족 상봉이다. 실향민 1세대들이 다 눈을 감기 전에 고향 길을 한번 터줄 수는 없을까. 청호동 아바이 마을 사람들을 함경도로, 그리고 평안도와 황해도로 권역별 고향방문단 관광버스 몇 대 대절하는 타협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 힘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인각사에서 / 정경화

솔 한 그루 거느려도 저리 슬프지 않을 것을/ 조밭머리 흐느적대는 눈 먼 바람만이/ 학소대 갇힌 물소리를 진양조로 풀었다.// 세월의 뒤안에서는 석탑마저 안거(安居)에 드나/ 법당 안 딛은 발을 내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말없이 청산을 넘는 구름법문(法問)을 듣는다.// 유사(遺事)의 어느 상류, 희미하게 떠돌다 가는/ 큰스님 발자국 곁에 젖은 신발을 벗으면/ 뿔 고운 기린 한 마리 장경(長徑) 속을 걸어 나오고. - 시조집『풀잎』(동학사,2007) ................................................................................................................ 올해가 단군기원 4천351년이다. 정부 수립 후 한동안 국가 연호로 단군기원을 썼으나 5ㆍ16 군사정변 후 서기를 공용 연호로 쓰기 시작했다. 단군 조선을 인정치 않으려는 분위기가 사학계에 확산되면서 단군의 존재는 일반의 의식에서도 차츰 옅어져 갔다. 하지만 단군의 존재와 단군 조선은 우리 한민족 역사 속에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건국신화를 최초로 기록한 서책이 ‘삼국유사’이고, 군위 인각사는 일연이 민족의 위대한 기록문화유산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곳이다. 편찬은 청도 운문사 주지로 계실 때였고 탈고는 비슬산 용천사에서 했으리라 추정된다. 시인은 큰 스님이 온 힘을 쏟아 부은 절터에서 세 수의 시조로 그 감회에 젖어들었다. 일연이 유사를 저술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40여 년간 긴 몽골과의 전쟁으로 엄청난 역사 유물이 소실되고, 고려인의 민족적 자긍심이 상처받고 중심을 잃은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속세를 떠난 신분이었지만 민족적 자존심을 잃어가던 민중들에게 호국사상과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자 저술을 결심했던 것이다. 집필은 70대 후반부터 8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져 실로 어마어마한 노익장이었다. 사찰 뒤편 산줄기가 전설 속 동물인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인각(麟角)이라 이름 지어진 사찰 앞에는 수많은 백학이 살아 이름 붙여진 학소대가 있다. ‘진양조’로 풀려 흐르는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퇴락하여 거의 폐사가 되다시피 했는데, 특히 인각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심하게 훼손됐다. 그런 처지의 인각사는 사실 이렇다 할 볼거리도, 변변한 소나무 한 그루도 없는 초라한 사찰에 불과하다. 수년 전 절 구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어 지금은 면모가 달라졌으리라 짐작된다. 어쨌거나 인각사에 얽힌 관심은 역시 삼국유사다. 조선시대 내내 허황한 야사라며 성리학에 가려 홀대를 받다가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임란 때 약탈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도쿠가와에 의해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후였다. 도쿠가와가 아니었으면 그 위상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삼국유사가 아니었으면 숱한 그 감동의 스토리를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교육의 이념이 과연 존재할 수나 있었을까. 결국 세월이 흘러 뒤에 남는 것은 세상을 벌벌 떨게 한 권력도, 화려하고 장엄한 사찰 건물도 아니었다.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가 없듯이 우리는 단군조선과 삼국유사의 가치를 확장시켜 후세에 전달할 책무가 있다.

이슬을 낚는 거미는 배가 고프다 / 권경업

아침 산책길 숲속 거미줄에/ 이슬이 걸려 있다/ 다들 눈부셔라, 눈부셔라 하지만/ 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잇감도 걸리지 않을/ 다 드러나 버린 거미줄// 안개 낀 삶의 막막함에, 때로는/ 밥보다 시가 더 필요한 날도 있겠지만/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을 낚으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다 - 계간「전망」2005년 봄호 ................................................................................................................ 아침 산책길, 이슬 걸린 거미줄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찍고 싶을 만큼 눈부신 피사체다. 그러나 거미로서는 먹이 활동의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 별로 재미없는 상황이다. 이슬이 맺히면 먹이 부착 공간이 줄어드는데다가 접착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진동수가 적어져서 먹이 감지 능력도 저하된다. 더는 은밀한 거물망의 구실을 못할 터이므로‘이슬이 마를 동안 눈먼 먹잇감도 걸리지 않을’ 게 뻔하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침 햇살에 증발할 때까지 맥없이 기다리지 않고 거미가 직접 발가락이나 입을 사용해 이슬 제거에 나선다. 시인은 ‘안개 낀 삶의 막막함’이 엄습할 때, 거미에겐 먹이보다 이슬 한 방울이, 사람에겐 ‘밥보다 시가 더 필요한 날도 있겠지만’ 내내 이슬만 먹고살 수야 없지 않으냐고 말한다. 밤낮없이 ‘허공의 어둠을 훑어’ 이슬이나 낚는다면 ‘틀림없이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데, 시인은 배가 고픈데 다시 이슬을 찾는다. 참으로 딱한 숙명이고 미련한 사랑이다. 사람들은 시인이 돈과 명예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갖는 것도 흉이라 생각한다. 시인은 어느 경우든 순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주적 관점에서 가장 풍성한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시인 아니냐고 치켜세운다. 때로 시인은 밥벌이 수단에서조차 적지 않은 제약이 따른다. 시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는 무거운지라 밥보다 이슬이 우선일 리는 만무하다. 선택 못 할 직업은 없으나 정작 해서는 안 될 일은 따로 있다. 탐욕적인 수준의 부동산 투기에 가담하는 따위가 그렇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기도 하겠으나, 이는 사람 사는 세상의 생태계 교란 행위에 가깝다. 다른 거미줄 죄다 거둬내고 자신만 목 좋은 곳에 큼지막한 거미줄을 치거나 이곳저곳 오만상 거미줄을 걸어두는 행위와 진배없다. 이러한 환경 착취는 결국 인류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부동산 값은 늘 높은 상승률을 보이며 투기 시장을 형성했지만,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70년대 대기업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마구 땅(비업무용 토지)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대개의 사람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간다. DTI나 LTV가 뭔지도 모른다. 여윳돈이 있으면 싼 이자에도 은행에 갖다 맡기는 게 고작이다. 돈을 누가 빌려가서 어디에 사용하는지 몰라도 나라 경제에 기여하리라 믿는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맞서는 일은 상상조차 못한다. 이 땅의 부동산 문제는 수요공급이 주원인은 아니다. 순리를 거스르는 천박하리만큼 불순한 욕망과 지역 격차가 가져온 결과다. 권경업 시인은 산악인이자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이다. ‘자연 주권주의’를 부르짖는 그는 산을 통해서 나눔과 절제, 비움과 공생의 미학을 배운다고 말한다. 세상살이에도 그대로 접목시킨다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 가끔은 이슬만 먹고도 배고프지 않은 세상이 되리라 믿는다.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중략)/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중략)/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중략)/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 시집『받들어 꽃』 (미래사, 1991) .............................................................................................................. 어른에서부터 아이까지 전 국민의 전투태세가 지극히 당연시되던 노태우 군사정부 시절에 발표된 시다. 이 시는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더욱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게 와 닿는다. ‘총’ 대신 ‘꽃’을 받들고 종전선언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완전하고 영구적인 평화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가 아닌가. 정전이라는 위태로운 쉼표에서 마침표를 찍는 종전선언은 그 자체로 ‘한반도 평화 시대의 선포’이다. 8천만 겨레가 염원하는 ‘받들어 꽃’을 마다할 자 누가 있겠는가. 전쟁보다는 평화를, 미움보다는 사랑을 거부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우리 아이들을 평화주의 정신으로 교육하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우리 아이들에게 군국주의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예방접종과 같다. 나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가르치고, 증오보다는 사랑을 가르칠 것이다.”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정한 ‘국군의 날’ 행사도 형식과 내용에서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하나 유감인 것은 ‘10월 1일’이 국군의 상징성과 대표성을 표현하는 날로 타당하냐는 것이다. 딱 부러지게 이 날짜로 정한 배경이 없는 가운데 한국전쟁 당시 육군이 38선 돌파를 기념한 날이란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멸공’의 의미가 깃들어 있어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지난해부터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기념일인 9월 17일로 옮기는 것이 정통성 측면에서 적합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야당은 그 변경 시도가 독립 세력과 건국 세력의 편가름 행위라며 반대하고 있다. ‘국군의 생일’은 국가의 정체성과 국군의 정통성, 역사관 등이 총체적으로 걸쳐 있는 문제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9월 17일이 더 타당성은 있어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일제의 대한제국군 해산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한국군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는 “광복군은 일찍이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에 곧이어 성립한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광복군 창군의 역사적 전통을 구한국군 해산과 그 의병에 연결시킨 이치에 닿는 해석이다. 나는 여기에 한 표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정미의병, 그들이 우리 국군의 1세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들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도록 ‘받들어 꽃!’.

벌초 / 이홍섭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 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 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 시집 『터미널』(문학동네, 2011) ............................................................................................................. 조상 묘를 방치해 두면 자손 된 도리와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벌초가 행해져 왔다. 이를 한 해만 걸러도 잡풀이 무성하여 볼썽사납고 봉분을 인식 못 할 때가 있다. 지금의 우리 대에는 ‘벌받는 초입’처럼 해오던 대로 이를 행한다 해도, 장차에는 어찌 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2천여 만기의 묘 가운데 무연고가 절반쯤 된다고 한다. 현행 법령은 개인이건 공동이건 묘지 사용을 최장 60년으로 제한하고 있고, 화장의 보편화 추세를 감안하면 머잖아 벌초 문화는 사라질 것이다. 벌초가 없는데 성묘가 지속될 리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대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섭리를 뒤늦게 인식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성가시기 때문이다. 조상의 묘를 찾을 때면 죽음은 만인을 평등하게 하고 만물을 소통케 하는 절차임을 새삼 깨닫는다. 비로소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온전히 자연의 일부가 됨을 확인한다. 지난 추석 무렵 마음의 평안을 위해 벌초를 다녀왔지만 사실상 육촌들이 예초기를 돌려 해놓은 상태에서 삐죽 올라온 풀을 손으로 몇 개 뽑는 게 다였다. 그래도 살짝 면피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조상께 후손들 잘 보살펴달라고 빌지는 않았다. 그 옛날, 지맥이 좋은 곳에 조상 묘를 쓰면 자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온다는 속설에 따라 너도나도 명당자리를 탐했다는데, 내 조상 산소들이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내세울 만한 큰 인물이 없는 걸 보면 지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자기 조상 묘를 남의 명당 산소를 파헤쳐 투장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조상의 묘소를 가끔 살피러 가면서부터 성묘 문화가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상 묘를 살피러 갔다가 산소의 풀을 베기 시작한 게 벌초의 기원이다. 그게 또 함부로 남의 묘 넘보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그런 벌초가 지금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기계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옛날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어디 감히 조상님의 묘에 불경한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성의없이 기계를 들이댄단 말인가. 점차 벌초에 참석하는 사람도 줄고 먼 곳에 있으면 대행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무리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기복의 의미가 있다 한들 성가신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좋은 것은 있다. 모처럼 아들과 고기를 구워 반주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삶이 내 한 몸의 태어남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느꼈다.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이 아니어도 그것으로 복 하나는 건지지 않았는가.

고향은 그리워도 / 심훈

나는 내 고향을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五代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後苑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중략) /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며 어찌 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 시집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 1949) .............................................................................................................. 1932년 10월 추석 즈음하여 발표한 시다. 심훈은 이듬해 1933년 ‘그날이 오면’ 출간이 일제의 검열로 좌절되자 그리워도 가지 않겠다던 그 고향 당진으로 낙향한다. 파헤친 뒷동산에 왜놈 주택이 들어섰고, 조상 모시던 사당 자리에는 왜놈 귀신 모시는 신사가 들어선 기막힌 꼴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5대를 내려오며 오순도순 살았던 고향 땅에 왜놈들이 난장판을 쳤으니 속이 뒤집히기도 했을 것이다. ‘빈 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고’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가슴에 안는 ‘그날이 오면’ 찾겠다던 심훈은 그날을 보지 못한 채 1936년 9월 16일 36세로 급서하고 말았다. 그의 소설 ‘상록수’를 직접 각색ㆍ감독해 영화로 만들려던 꿈과 함께 그의 고향 땅 상록의 꿈도 묻혀버렸다. 1949년 발간된 ‘그날이 오면’은 그의 유고시집이다. 심훈은 이상과 함께 시, 소설 두 장르의 대표작 모두 교과서에 실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애를 끓이다가 울병이 생겨 세상을 서둘러 떠나간 이가 어찌 심훈만이랴.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북한 체제의 변화에 대한 기대로 노심초사하며 지낸 세월이 얼마이던가. 살아생전 통일이 와서 고향땅을 밟아볼 수 있으려나 꿈만 꾸다 무정하게 세월은 가고, 그렇게 사람도 가고 그리움마저 화석이 되어 버린 사무친 시대를 살아왔다. 평양이 고향인 이모부는 혈혈단신 월남한 분이지만 생전 이산가족 상봉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심훈이 고향에 가지 않겠다는 이유와 비슷했다.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에 희망이 자꾸만 뒷걸음질칠 때 “이제 글렀다”며 3년 전 아주 눈을 감으셨다. 김동길 박사와 평양고보 동창이며 월남하여 육군 장교로 복무하신 분이라 보수 성향이 뚜렷했지만 통일의 염원은 간절했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남북 화해와 통일에 대한 기대를 누구보다 반기고 꿈에 부풀었으리라. 보수 진보 불문하고 통일의 열망을 가진 정부야말로 마땅하고 정당한 정권이라 했다. 비록 심훈과 내 이모부와 수많은 실향민은 퇴색된 꿈을 안고 먼저 떠났지만, 긴 세월 견뎌온 분들에게는 차오르는 달빛 아래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는 고향이어라.

불혹의 추석 / 천상병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 시집 『새』 (조광출판사, 1971) .............................................................................................................. 1930년생인 시인이 불혹에 즈음한 1969년에 쓴 시다. 이 시가 수록된 ‘새’는 살아있는 시인의 시집이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첫 사례였다. 여기에는 물론 기막힌 곡절이 있지만 그보다도 문단 데뷔 당시의 일화가 흥미롭다. 서울상대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1954년 어느 날, 그는 학장으로부터 “상과대학 석차 5위 안의 학생은 한국은행에 공짜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이 5번 안의 성적임을 암시받은 것이다. 그러나 천상병은 1952년에 이미 추천 완료되었고 당시 문예지에도 시를 발표하고 있었으므로 안정된 직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오로지 시인으로만 살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훗날에도 시인 이상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결심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후회는 없다고 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도 이유의 하나겠으나 일찌감치 이런 특별한 결단과 그의 시, 삶의 방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천진무구한 순수시인, 기인으로 기억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천승세는 일찍이 기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인은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들은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다. 매우 진실하게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이다.” 천상병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그에게 당시 왁자지껄했을 추석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겠으나 쓸쓸하긴 했나 보다. 그러나 그것이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임을 스스로 잘 안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에서의 제사는 따분한 인습이나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형식의 예복을 벗어던지고, 인간을 정해진 틀에 끼워 넣으려는 획일적 사회구조에 등을 돌린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제의였으리라. 소설가 김훈은 그의 기행을 “이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열어버리는 놀라운 개방성”이라고 표현했다. 상대를 나온 그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조소로 일관한 삶을 산 것도 일반의 눈으로 보면 아이러니하다. 그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가난도 행복의 일부분이라 여기면서 가난을 즐겼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자유와 무욕의 삶은 이윽고 추석날 ‘노자’의 말씀을 되새기기에 이른다.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는 시종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며 자조한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은 화의 근원임을 깨닫는다. 조용하면서 은근히 다른 존재들과 동화하는 ‘현동(玄同)’의 삶을 살아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는 물질의 가난뿐 아니라 말의 가난을 삶의 전략으로 채택하기로 마음먹는다. 49년 전 추석의 일이다.

나의 꿈 나의 날개 / 김남주

하늘을 나는 새가 나를 비웃네/ 날개도 없는 주제에 내 꿈의 높이가 하늘에 있는 줄 알고/ 그 꿈 키우다가 땅에 떨어져 이런 신세 철창신세 면치 못한 줄 알고/ 그러나 웃지 마라 새야/ (중략)/ 나에게도 날개가 있단다 꿈의 날개가/ (중략)/ 햇님의 은총을 받아 기름진 대지에/ 달무리의 원을 그리며 씨를 뿌리고/ 만인의 입술에 가을의 결실을 가져다주는/ 노동의 날개가 있단다/ (중략)/ 가장 높아야 내 꿈의 날개는/ 하늘 아래 첫동네 백두산에 있단다/ 그 산기슭에서 강가에서 숲 속에서/ 재롱을 피우며 자작나무 가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다람쥐의 꼬리에 있단다/ 팔팔하게 뛰노는 붕어의 지느러미에 있단다/ (중략)/ 기차로 한나절쯤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청천강 푸른 물결 위에 있단다/ 그 물결 위에 아롱진 이름이여 아침의 나라여/ “조국은 하나다”에 있단다/ “조국은 하나다”에 있단다 - 시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미래사, 1991) .............................................................................................................. 평생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살다간 김남주 시인의 꿈은 당연히 조국이 하나 되는 일이다. 그 꿈은 물론 그만의 꿈이 아니다. 우리 모두 조국의 하나 됨을 위해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소홀했던 시기도 없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반외세 민족통일의 기치를 들었던 그 정신을 이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자주통일을 외친 그에게 올가미를 씌워 철장에 가두고, 쉰도 되기 전에 그를 세상에서 떠나게 했다. 그의 시 ‘조국은 하나다’에서는 피 토하듯 절규한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인 삼팔선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김남주는 이렇듯 미국이 분단의 원인이고 통일의 걸림돌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한 민족의 통일도 이룰 수 없다고 호소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 미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휴전 70년이 되어가는 지금껏 종전 선언조차 못 하고 있다. 북한을 주적으로 유지하며 이를 핑계로 막강해져 가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아시아 정책 때문이다. 더욱 슬픈 일은 이에 편승하여 평화통일의 길에 재를 뿌리고 어깃장을 놓는 일부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랜 적대 관계를 단숨에 청산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앞에 쩨쩨하게 구는 일은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다. 평화통일과 한반도의 번영에 방해만 될 뿐, 그들의 미래조차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무엇으로도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 어제 능라경기장에서 행한 문 대통령의 역사적인 연설, 백두산 천지에서 서로 손을 잡아 치켜올린 양 정상의 모습, 김정숙 여사가 천지의 물을 담을 때 이설주 여사가 옷이 물에 젖을까 봐 살짝 옷깃을 잡아주던 모습 등 감동적인 순간들 앞에서 찔끔찔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혼자라서 몰래 울기도 좋았다. ‘나의 꿈 나의 날개’도 퍼덕였다. “조국은 하나”였다.

조치원(鳥致院)을 지나며 / 송유미

밤 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중략)/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조치원은 충청지역의 중앙에 위치하여 각 지역과 국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다. 조치원이란 지명은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조선 초기 역원제도에서 비롯하였다. 주요 도로를 따라서 숙박과 교통기능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을 말하며, ‘원’에서는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 전달, 지방 파견, 출장 등을 위해 길 떠난 관리와 상인들에게 주로 숙식을 제공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원은 거의 폐지되었고 사리원, 장호원, 이태원 같은 몇몇 지명만 그 흔적으로 남았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이래로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른 군사적인 목적과 지방통치를 위한 행정적인 요구로 다양한 형태의 지도들이 제작되었고, 제작기술 또한 크게 발전하였다. 대항해시대 때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지도제작 붐이 제작기술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도 전해졌던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김정호는 꼼꼼한 실사와 정밀한 검증을 거쳐 철종 때인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게 된다.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씩 22층으로 나누고, 층별 동서 80리 간격의 총 22첩으로 구성된 목판본 지도이다. 이를 펼치면 세로 6.7m 가로 3.8m 크기의 초대형 전국지도가 된다. 다양한 인문지리 정보와 함께 1만1천500개의 지명이 수록된 이 지도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체 지도라 하겠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선물로 준비해간 대동여지도는 그 영인본이다. 이어진 길을 따라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 교류 협력을 증진하고, 번영과 평화를 이루자는 의미를 담아 휴전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완전체 지도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선물했다. 문 대통령은 고산자가 그랬듯이 산 넘고 물 건너 백두에서 한라까지 험한 길 마다치 않고 부르튼 발로 지도를 완성해내고 싶은 것이다. 가다가 정 힘들면 조치원 같은 ‘원’에서 잠시 쉬어는 갈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고산자는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이 다를지 몰라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지도 속 세상은 살아서 다르지 않으며 달라져서도 안 된다. 어제 남북 정상 간의 합의 내용으로 미뤄보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우리 국토의 동맥 속으로 흐르는 민족의 뜨거운 피를 다시금 느낀다. 12년 전 금강산 말고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들이 꿈틀거린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킬로미터/ 목포까지 414킬로미터/ 강릉까지 374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중략)/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 계간 《애지》 2015년 여름호 ........................................................................................................... 막힌 길은 뚫어야 하고 뚫린 길은 닦아야 한다. 닦아놓은 길에서 왔다갔다 잘 다니기만 하면 모든 일은 형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늘길로 1시간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언젠가는 김포공항에서도 평양행 국내(Domestic) 노선이 개설되리라. 닦아놓은 모든 길 위에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나래를 활짝 펼칠 수 있다면 8천만 겨레에게는 다시없는 축복이고 선물이 아니랴. 항공이 출발지점과 목적지점 간 점과 점의 연결이라면, 육로는 그보다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풍경과 사람과 풍성한 스토리의 선으로 이어지는 이동 수단이다. 1990년대에 발표된 신형원의 노래 가사처럼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 요금 5만 원’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느냐고 당시 택시요금으로 환산한 ‘5만 원’만큼의 가까운 길, 지금이야 대절요금으로 20만 원은 줘야겠지만 길만 열린다면야 북녘 어딘들 가지 못하랴. 남북 정상회담이 몇 번 더 열리고 남북교류가 확대되어 획기적 계기만 마련된다면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택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리라. 서울에서 평양까지 육로 250km 거리를 달려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평양냉면 한 그릇 말아먹고 돌아오는 길의 행복은 어디에다 견주랴. 이번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선발대는 경의선 육로를 따라 시속 60㎞로 달려 서울 출발 4시간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개성부터 평양까지 왕복 4차선 고속도로 곳곳이 최근 폭우로 파인 탓에 더 이상 속도 내기가 불가능했다. 서울에서 전주보다 가까운 거리지만 더 천천히, 더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말한 대로 ‘잘 정비되지 않은 도로’였다. 지금 북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교통 인프라 사업임을 알 수 있다. 순안공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특별히 김현미 장관을 소개하는 장면을 눈여겨보았다. 북한은 도로만 낙후한 것이 아니다. 철로가 하나뿐인 단선이 97%에 이르며 선로의 유지 보수 또한 형편없다. 길만 잘 닦아놓으면 나진이든, 선봉이든, 신의주든, 원산이든지 간에 개성공단과 같은 공단을 10개만 더 조성하면 남북통일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그리고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까지 마음껏 선을 이어 가는 자유로운 여행도 머지않으리라.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 안도현

어제도 나는 강가에 나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오시려나, 하고요/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가슴으로 눌러두고/ 당신 계시는 쪽 하늘 바라보며 혼자 울었습니다/ 강물도 제 울음소리를 들키지 않고/ 강가에 물자국만 남겨놓고 흘러갔습니다// 당신하고 떨어져 사는 동안/ 강둑에 철마다 꽃이 피었다가 져도/ 나는 이별 때문에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도란도란 열매가 맺히는 것을/ 해마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별은 풀잎 끝에 앉았다가 가는 물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벼운 것임을/ 당신을 기다리며 알았습니다// 물에 비친 산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던/ 그 뻐꾸기 소리가 당신이었던가요/ 내 발끝을 마구 간질이던 그 잔물결들이 당신이었던가요/ 온종일 햇볕을 끌어안고 뒹굴다가/ 몸이 따끈따끈해진 그 많은 조약돌들이/ 아아, 바로 당신이었던가요// (중략)/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현대문학북스, 2001) .............................................................................................................. 헤어진 임을 그리워하며 만남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내용의 연시다. 연애편지에 써먹으면 딱 좋을 애절함이 넝쿨째 주렁주렁 이어졌다. 안도현 시인이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시 때문이리라. 시는 처음 읽을 때의 느낌 그대로 음미하는 것이 가장 좋다. 교과서에서처럼 너무 숨은 뜻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은유와 상징에 갇혀버리면 서정적 자아의 혼란만 가져와 시 감상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서정적 자아를 살펴 읽는 것이 바람직할 때가 있다. 투철한 민족의식과 뚜렷한 역사인식을 견지해온 시인임을 감안하면 이 시는 의미를 확장하여 얼마든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먼저 남북의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는 상황을 상정하면서 그 축원으로 쓴 시라 해도 수긍이 가고, ‘당신’을 북녘 동포나 통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물론 쉽게 ‘가을’이라 대체해 읽어도 통하고 간절히 바라는 어떤 성취라 해도 어색하지 않겠다. 죽도록 사랑하는 ‘내 마음 아실 이’ 그대를 이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에서 만나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은 열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운명의 분탕질로 비록 헤어져 있긴 하지만 흩어진 가족의 상봉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의 통일만큼 설레고 간절한 일이 어디 있으랴. 한반도에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만남이 또 있으랴. 이번 방북 수행 문화예술계 인사 가운데는 언론이 다뤄주지 않아 그렇지 문학인도 여럿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주무부처 장관인 도종환 시인 외에도 안도현 시인이 눈에 띄고, 백낙청, 염무웅 두 분 문학평론가와 유홍준 교수도 보인다. 백낙청 교수는 남북정상회담 자문단 일원으로, 염무웅 교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장’ 자격으로 함께 한다. 대중 가수의 공연도 좋으나, 안도현 시인이 시를 한 편 낭송하는 것은 어떨까. 겨레말을 함께 쓰는 북측 인민들이 서정의 격차를 느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지코와 에일리의 노래처럼 ‘세련된’ 언어 감각이 순간 생경하게 들릴 수는 있겠으나 ‘그리운 당신’에 사무치지 않을 도리는 없으리라.

반복 / 신평

이제 막 날갯짓 하려는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같은 방법/ 아버지와 달리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다// 구부려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깨너머/ 그가 겪어나갈 신산(辛酸)의 세월이 겹겹이 둘러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세상은 차갑고 무섭단다// 내 힘 한 점 소용없을 때까지/ 네 기력을 돋울 군불이 되고 싶건만// 이미 달빛이 된 아버지/ 나도 곧 달빛으로 오른다/ 아들은 그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 가르치며/ 그 옛날 자신의 숨결과 닿았던 내 숨결을 기억하리// 생의 반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다 - 시집 『산방에서』 (책만드는집, 2012) ........................................................................................................................................ 프로이트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모방과 동경, 동시에 질투와 경외의 대상’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통해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규범과 이성적 사고를 배운다. 아버지의 꾸짖음을 통해 제멋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닫는다. 청소년기까지 끊임없이 아버지에 반항하며 그 반항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권위를 통해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습득한다. 따라서 아버지는 한 사람의 성격 전반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학습장이다. 아버지는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같은 방법’으로 아들에게 가르치고 그 학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으로 체득되고 ‘반복’할 것이다. 오늘날 가정의 많은 문제와 나아가 ‘세대 갈등’은 바로 아버지와 자식이 지나치게 만만한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데서 생겨났다고들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절대 친구 관계가 아니다. 17세기 사상가 존 로크도 ‘부모는 자식에 대해 절대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응석을 받아주고 꾸짖지도 않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할 리가 없다. 아이들은 권위가 없는 사람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서울 법대를 나온 전직 법관이고 변호사를 하다가 경북대 로스쿨 교수를 지낸 법학자인 만큼 시인보다는 교수란 호칭이 더 자연스럽겠다. 신 교수는 10남매 중 막내로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꾸준히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었고 지난 개각 때는 박범계 의원과 함께 법무장관 하마평에 오를 정도로 다채로운 경력과 실력을 갖춘 분이다. 그만한 능력과 권위를 갖추었기에 아들에게 신뢰와 애정 어린 숨결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사랑하기만 할 뿐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가 많은 요즘 현실에서, 이처럼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의 틀을 반복 유전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다. 재벌 3세 갑질 사건에서도 느꼈듯이,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성 교육은 자식의 귓불에 닿는 아버지의 숨결에서부터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겸손과 배려를 잊지 말라고 귀띔해줘야 한다. 기본을 지키고 바른길을 가라며 넥타이 매듭을 마무리했으리라. 법관 재직 시 사법부를 비판했다가 재임용 탈락하였으며, 로스쿨 재직 중에도 로스쿨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신 교수는 늘 원칙과 정의를 앞세웠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소신은 처음 넥타이를 맬 때의 초심 그대로다. 우리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물려줘야 할 세상도 바로 그 정의로운 세상이다. 귓불에 스쳤던 아버지의 말씀은 넥타이를 매주던 그 손길의 온기와 함께 오래 기억되리라.

결혼에 대해서 / 칼릴 지브란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도다. 그러니 그대들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어 버리는 날에도 그대들은 함께 있을지어다. 아니, 그대들은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까지도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나 그대들의 함께 함에는 떨어진 사이가 있어야 할진저.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들이 그대 사이에서 춤을 추게 할지어다. 서로서로 사랑은 하되 사랑으로 얽어매지는 말게 할지어다. (중략) 마치 거문고의 줄들이 비록 한 가락에 떨릴지라도 줄은 서로 간섭을 받지 않듯이. 그대들 진심을 바칠지어다. 그러나 서로서로 아주 내맡기지는 말지어다. 오직 위대한 <생명>의 손만이 그대들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것. 함께 서되 너무 가까이는 말지어다. 사원의 기둥은 서로 떨어져 서는 것이요. 또 참나무도 실편백 나무도 서로서로의 그늘 밑에서는 자라지 않는 법. The Prophet (1923) 예언자 가운데 .............................................................................................................. 과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외면받았던 시가 근년 새롭게 조명받는다. 한때 ‘사랑과 전쟁’이란 드라마에서도 보았듯이 단호한 결별이 적당한 타협보다 더 지지받는 이 시대에 유용한 텍스트가 된 것이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주례사에서 군소리 주절대기보다는 깔끔하게 이 시 한 편 낭독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결혼식장에서 시를 다시 만난 게 10년쯤 전 친구 딸 결혼식에서다. 주례를 선 유자효 시인이 부산고 동창인 신부 아버지와의 인연을 소개한 후 안주머니에서 A4 한 장을 꺼내더니 시를 읽어 내려갔다. 방송인 출신의 미성이니 오죽 분위기가 살았겠나. 그야말로 문학의 향기가 식장 가득 퍼져 나가는 듯했다. 윤후명 작가 등 하객 가운데는 문인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인이 된 신부의 아버지가 알려진 소설가 박영한씨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머나먼 쏭바강’의 작가 박영한은 ‘인간의 새벽’ ‘노천에서’ ‘지상의 방 한 칸’을 비롯하여 ‘왕룽일가’ ‘우묵배미 사랑’ 등 드라마를 통해 친숙한 작가인데, 그가 아니라 그의 아내 방인숙이 친구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박영한 작가의 12주기였던가 보다. 아무튼 그때의 인상적인 기억이 있어 나도 이를 흉내 낸 적이 있다. 몇 해 전 가당찮게도 ‘털’은 괜찮지 않느냐며 한 친구가 아들의 주례를 부탁하기에 ‘에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극구 사양했건만 옆에서 딴 친구들이 펌프질하는 통에 농담처럼 승낙해버렸다. 요즘 주례사는 5분이면 족하다고는 하지만 면허증도 없는 무면허 주례인지라 막상 닥쳐보니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나는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인지를 먼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합니다, 눈으로 사랑과 믿음과 존경을 담아서 천천히 경례’ 맞절을 시키고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 낭독까지 별 무리없이 마친 뒤 미리 프린트해간 ‘인디언 결혼 축시’를 후딱 읽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로 시작하여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마치 진짜 시인처럼, 아파치 추장처럼 주문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