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 가죽

얼룩말 가죽/ 문인수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백.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 가죽, 호피같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 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이/ 뿔처럼/ 험악한 수피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 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중략) 어려 보이는 한 교통순경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덜컹거리는 법 감정이, 시꺼먼 길/ 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히/ 풍금처럼 흐르는 저, 모법(母法)이 있다.- 시집 『배꼽』 (창비, 2008)................................................아닌 게 아니라 도색이 선명한 흑백 횡단보도를 보면 얼룩말 무늬 같다. ‘법원 앞 횡단보도’의 흑백 얼룩무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위법과 준법, 불의와 정의, 인치와 법치 따위의 대칭일 수도 있고, 시민 권력과 그 대척에 있는 사법 권력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법치도 좋고 사법 권력도 좋은데,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타당성, 집행의 투명성, 정의에 대한 복종, 예측가능성의 제공, 합리적 과정을 통한 사법 환경의 개혁 등이 전제되어야할 것이다. 법질서 확립의 형태가 정부나 검경, 법원의 자의적 법해석과 법적용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법치는 국민들이 법을 잘 지키고 준수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자들이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들이 법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통치자의 개입과 검찰 등이 자의적으로 남용한다는 말이다. 지난 정권을 들추어보자면 퍼뜩 이명박 정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명박산성과 촛불집회 탄압, 불매운동 처벌, 공안사건 획책, 미네르바 구속, 용산 참사 초래, 집시법 개악, 사이버모욕죄 등 온라인 탄압, 기타 MB 악법 추진 등 그 퇴행적 법치 행각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그런 정부를 윤 검찰총장은 자기가 경험한 바로 가장 ‘쿨한’ 정권이라고 했다. 힘이 다 빠진 정권 말기에 구체적 증거가 세상으로 다 드러난 사건의 사례를 들어 그딴 식으로 발언하는 윤 총장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 그에게서 정의감이나 균형감각은커녕 손톱만큼의 역사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망나니 완장을 찬 ‘산적 두목’같다고나 할까. 그의 ‘정무감각 없다’는 말은 ‘난 무대뽀’라는 말로 들리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국민들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다시 들린다.법치를 앞세운 이명박 정부의 폭압적 사건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지금도 분노한다. 그 시절이 좋았노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검찰총장에게서 우리는 섬뜩함을 느낀다. 죄를 짓지 않아도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까닥하다가는 없는 죄도 뒤집어쓸 판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이러한 법 감정에서 언제나 놓여날 수 있을까. 법원 앞 횡단보도를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구부정 느리게 걸어가는 ‘저 할머니’처럼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 쯤 되면 몰라도...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임현정인부들이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데// 숲 속 공터에// 책이 꽂힌 책상이며/ 손때 묻은 소파까지/ 여자가 살던 집처럼 해놓고// 남자는 너럭바위에 앉아/ 생무를 베어 먹은 것처럼/ 달지도 쓰지도 않게/ 웃었다고 합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는데/ 경비 아저씨의 푸른 모자가/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습니다- 시집『꼭 같이 사는 것처럼』(문학동네, 2012) .................................................... 2012년에 나온 이 시의 수록 시집이 1년 뒤 반짝 화제가 된 것은 그해 방영된 ‘상속자들’이란 TV드라마의 영향이었다. 드라마 제작사와 간접광고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책들이 계속 노출되는 가운데 시집이 극중 남자 주인공의 침대 맡에 놓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고맙다 고맙다. 나를 허락해줘서, 고맙다 고맙다 당신의 발치에서 울게 해줘서.’ 시에 대한 무한신뢰와 사랑을 보여준 이 말에 드라마 작가의 필이 꽂혔던 것 같다. 침대에 누운 남자주인공은 이 시집 제목의 ‘사’자에 작대기를 그어 ‘꼭 같이 자는 것처럼’으로 고친 다음 표지사진을 찍어 여자주인공에게 보낸다. 처음 PPL 계약을 할 때부터 책 노출 조건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정하고, 책은 출판사에서 홍보하고 싶은 책과 작가가 드라마 전개상 녹이고 싶은 책을 절충해 선정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대목은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의 일부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튼 한 인터넷서점에 의하면 TV 나오기 전 2주간에는 달랑 한 권 팔렸던 책이 방영 다음날 바로 60여 권의 주문이 들어왔고 이후 매일 주문량이 늘었다고 한다. 새삼 대중영상매체의 힘이 놀랍다. 하지만 시집은 다른 교양서적이나 소설에 비해 반응이 더디고 미지근한 편이다. 몇 년 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김수현이 읽었던 책들은 모조리 대박을 쳤다. 물론 책들의 간접광고 효과는 다른 패션의류나 상품에 비하면 잽도 안 된다. 특히 책의 경우는 다른 상품과 달리 단순한 노출만으로 구매를 유도하기 어렵다. 가령 출판사가 드라마의 배경일 경우 아무런 개연성 없이 그저 책장에 꽂혀 노출된 것만으로는 약발을 받지 못한다.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해당 책을 염두에 두고 줄거리에 녹여내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얼마 전 유시민 이사장이 출연한 라디오방송을 우연히 듣다가 ‘맞아, 유시민은 작가였지’ 불현 듯 각성하였다. 스스로 밝혔듯이 그의 주요소득원은 인세이고, 직업으로서 작가의 의무를 다하고 생계를 유지하자면 일 년에 책 한권은 내야한다는 말이 꽂혔던 것이다. 현역으로서 유시민 작가만큼 간접광고에 빈번히 노출되는 사례를 드물 것이다. 방송에 나와 한마디 할 때마다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니 매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의 자유분방한 지적 행보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그가 쓴 책을 한권도 사본 적이 없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오래전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 솔직히 전부였으니 생각하면 민망한 노릇이다. 다음에 시내 나가면 서점에 들러 잊어먹지 말고 ‘글쓰기’ 책이든 최근의 ‘유럽 도시 기행’이든 꼭 한 권은 사줘야겠다. 그래야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

정작 그는

정작 그는/ 천양희죽음만이 자유의지라고 말한 쇼펜하우어/ 정작 그는/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렸고요/ 자녀 교육의 지침서인 『에밀』을 쓴 루소/ 정작 그는/ 다섯 자식을 고아원에 맡겼다네요/ 백지의 공포란 말로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고백한 말라르메/ 정작 그는/ 다른 시인보다 평생을 고통없이 살았고요/ 『행복론』을 써서 여덟 가지 행복을 말한 괴테/ 정작 그는/ 일생 동안 열일곱 시간밖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네요// 정작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변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확하다는 것을요/ 정작 그는 또 알고 있었을까요/ 위대한 사상은 비둘기 같은 걸음걸이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을요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삶이란 꿈과 현실이 다르고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예상한 대로 굴러가지 않으며 규칙적이지도 않다. 그 불균형은 유명한 석학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이러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남긴 창작자의 삶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는 경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다. 셰익스피어는 매점매석과 고리대금으로 돈을 벌고 탈세를 일삼았다. 불우한 유년기를 거쳐 절대왕정 말기 프랑스에 정착한 루소는 모순적 인물의 극치였다. 그의 사회계약개념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으로 이어져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고, 자연주의적 교육관이 담긴 소설 ‘에밀’은 자녀교육의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정작 루소 자신은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내다버렸다. 더구나 그 아이들의 엄마를 처음 만난 것도 잠깐 재미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말 루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이었다면 ‘에밀’의 가치도 다시 평가되어야할까. 세상에는 인격적으로 개차반인 자가 만든 걸작도 있고 성인군자의 졸작도 있다. 만약 사람과 업적이 분리될 수 없다면 루소의 걸작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저자와 저서를 구분하는 게 타당하지만, 공적인 판단을 요구할 때 창작자와 창작물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리라. 아무리 위대한 작품을 썼다한들 작품의 위대함을 방패삼아 작가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명성은 높았지만 그의 삶은 불안정했다. 당대 계몽사상파들과 틀어졌고, 정부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피해망상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이곳저곳 먼지처럼 부유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간신히 시골농원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식물학에 빠져들었고 채집과 산책을 즐기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루소의 사후에 발간한 ‘참회록’은 자연 그대로의 자기 모습이라고 선언한 자서전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배신과 방기, 도둑질, 중상모략 등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여성에게 볼기짝을 맞으며 쾌감을 느낀 일까지 서슴없이 고백한다. 그렇듯 철학사에서 루소만큼 말이 많고 평가가 다층적인 인물도 드물다. ‘변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확하다’ 위대한 사상은 사소한 발견에서 온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처럼, 위대한 창작 또한 조그만 영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루소는 오랫동안 방광염을 앓았다. 자연히 많은 시간을 변기 위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의 위대한 사상도 화장실에서의 명상이 기초가 되었으리라. 위대한 사상과 예술은 어쩌면 ‘비둘기 같은 걸음걸이’로 이 세상에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를 위한 기도

친구를 위한 기도/ 박인희주여, 쓸데없이 남의 얘기 하지 않게 하소서/ 친구의 아픔을 붕대로 싸매어 주지는 못할망정/ 잘 모르면서도 아는척/ 남에게까지 옮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도/ 속으론 철철 피를 흘리는 사람/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사람/ 차마 울 수도 없는 사람/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 사람에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가슴 속 얘기/ 털어내 놓지 못하는 사람/ 가엾은 사람/ 어디하나 성한데 없이/ 찢긴 상처에/ 저마다 두팔 벌려/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말에서 뿜어나오는 독으로/ 남을 찌르지 않게 하소서/ 움츠리고 기죽어/ 행여 남이 알까 두려워/ 떨고 있는 친구의 아픈 심장에/ 한번 더/ 화살을 당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기도시집 『기도하면 열리리라』(율도국, 2010)..............................................1969년 숙명여대 불문과 재학 중 포크듀엣 ‘뚜와에 무아’로 데뷔해 ‘모닥불’ ‘그리운 사람끼리’ ‘세월이 가면’ ‘약속’ ‘방랑자’ 등을 히트시킨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는 1981년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난 2016년 35년 만에 귀국해 컴백 콘서트를 가진 박인희는 ‘목마와 숙녀’를 부르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로 시작되는 ‘얼굴’이란 자작시도 낭송했다. 그녀는 최초로 시낭송 음반까지 히트를 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기도 시도 ‘뚜와에 무와’로 활동할 당시 쓴 것이다.많은 곡을 직접 작사 작곡해 싱어 송 라이터로 주목받은 그녀는 긴 머리와 청바지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70년대 아이유’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다. 박인희는 3년 전 공연을 마친 뒤 내년에 다시 오겠노라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현재 LA에 거주하면서 예전처럼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은둔중이다. 박인희는 이해인 수녀와 풍문여중 때부터 단짝이었고 두터운 우정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우정은 보통사람과 달리 주로 편지로써 서로의 생각과 우정을 교환하는 좀 특이한 관계였는데, 이해인이 수녀가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중1때부터 정작 학교에선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다가 집에 가서야 서로 편지를 끊임없이 써댔다고 한다. 둘의 우정이 남다르게 무르익은 건 사실이지만 둘 다 성격이 안으로 꽉 들어차 글로서 깊은 교류가 이루어지다보니 더러는 우리가 상상되지 않는 영적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보통사람 이상의 섬세하고 민감한 성격 때문에 예기치 않은 감정 마찰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 시가 이해인 수녀를 직접 겨냥한 글은 아니라고 한다. 주위의 친구가 겪은 아픔을 대신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이 다른 친구에게 받은 상처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사람에게는 남의 불행이나 잘못을 은밀히 즐기는 심리가 있다. 인터넷 시대에 남녀 불문 수다와 뒷담화의 유혹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자신의 커뮤니티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의 반영 정도면 넘어가겠는데, 문제는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악의적인 가십의 유포까지 포함되었다는데 있다. ‘말에서 뿜어 나오는 독으로 남을 찔러’ 상처가 상처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친구의 아픈 심장에 한번 더 화살을 당겨’ 기어이 죽음까지 몰아간다. 자기반성과 성찰을 하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집단의 내홍에 더욱 깊이 빠져들 것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중략)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1999).................................................................시를 읽으며 배경음악으로 김현식 버전의 ‘이별의 종착역’을 듣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 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노래방의 내 후순위 애창곡이기도 하다. 시인의 비극적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시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시달려온 시적 화자(이런 표현은 가급적 쓰고 싶지 않지만)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간 많은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황량한 추억과 상실감만을 안고서 마음의 한 정거장에 당도한다. 어쩌면 죽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상태를 우울하면서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어쩌다가 집을 떠나와’ ‘저녁의 정거장’에서 서성거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갈 길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고 추억은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몰려와 멎고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대뜸 시의 첫 행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했다. 실존하는 희망의 길을 찾기보다는 죽음을 예감했던 것은 아닐까? 시에서는 시종 어떠한 희망의 조짐도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으며’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기’만 하다.결국은 지금껏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오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니’ ‘주저앉으면 그뿐’이라고. 이제 더는 불안 따위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시인은 그것을 희망이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뭇잎과 우주와 자연의 비밀을 캐내려 했으나 끝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홀연히 닫히고 만다. 이번 조국 장관의 돌연 사퇴를 보면서 한편으론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면서도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프로이트는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사람에겐 ‘죽음의 본능’도 있다고 했다. 그는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란 성격의 3층 구조를 말했다. 이드는 본능, 자아가 본능 조절능력이며, 초자아는 양심이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자아가 이드의 힘을 통제하고, 그 자아를 초자아가 감시한다. 초자아는 자신을 비판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며 죄책감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엄격한 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그러나 몹시 독한 초자아는 인간을 자학하게 만든다. 이럴 때 심각한 자살충동이나 자기파괴 욕구를 유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조국에게도 그 초자아가 툭툭 치고 지나갔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가을의 소원

가을의 소원 / 이시영내 나이 마흔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시집 『사이』 (창비, 1996)....................................................신경림 시인의 어느 시에서처럼 가을엔 어디를 가다 이쯤에서 길을 탁 잃어버리고 마냥 떠돌이가 되어 한 열흘 아무렇게나 쏘다니다 왔으면 좋겠다. 기차와 도보를 결합한 여행도 좋고 몇 해 전 출시된 고속버스 프리패스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 서울 부산 왕복 심야고속 요금에도 미치지 않은 금액인 75,000원이면 평일 4일 동안 전국 고속버스가 다니는 어느 곳에나 횟수와 시간 등급 관계없이 맘대로 이용할 수 있다니 노선계획만 잘 세우면 다른 교통수단보다 일단은 가성비가 괜찮은 것 같다.어디에 메이지 않은 후줄근한 신분이면 더욱 편하겠다.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따라 가다 압록 다리께 식당에 들어 다슬기수제비 한 그릇 사먹을 돈에다가 걷다, 기어이 다리 곤해지면 아무렇게나 시골버스 잡아탈 노잣돈이나 마련하여 쑤셔 넣으면 그만이겠다. 휴대폰은 두고 가면 더 좋겠지만 자칫 불필요한 오해가 있을 수 있어 가지고는 가겠는데 배터리 충전에 신경을 곤두세우진 않으리라. 그리 높지 않은 산길을 걷다 가지가 많이 뻗은 방향으로 작정 없이 전진하리라.가다가다 물빛이 반짝이는 곳, 엉덩이 얹어도 아프지 않을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조각구름을 보다 마침 된장잠자리가 북상하는 길을 따라 함께 매진한들 어떠랴. 길을 잃고 다시 사람 그리운 세상의 물가 어디쯤 오대천 골지천 몸을 섞는 아우라지 나루터에나 가볼까. 예순 중턱 고갯마루를 넘어 슬금슬금 기어가는 몸, 노을빛 흔들리는 철든 바닷가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 어린 꿈을 꿀까. 나 마찬가지로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하니 서두러거나 조바심 낼일 따위는 없으리라.돌아오는 길 충주 지나 이천 땅을 거쳐 곤지암 쯤에 당도하면 맑은 공기 다 뱉어내고 사는 일이 막막한 그 까닭 시시콜콜 묻지 않은 채 나도 소처럼 씩 한번 웃어보는 일, 그것 ‘맑디맑은 공기 속에서’ 이 가을의 소원이라고 해두자. 옛날엔 나라와 조정이 어지럽거나 만사 복장이 뒤틀릴 때는 낙향하여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들이 많았다. 하지만 녹을 먹는 신분도 아니고 장차에도 일 없으니 그저 침 한번 뱉어내고 자유로운 떠돌이면 족하리라. 돌아다니다 부러 누굴 만날 일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 정도 호사를 구가하기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이 있긴 있다. 지나치게 구차하지 않을 만큼만 돈으로부터의 자유, 팍팍한 시간으로부터의 자유,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 그렇다, 무엇보다 심장과 다리가 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다. 그리고 또 하나, 주위의 시선과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다. 올해는 꼭 ‘가을의 소원’을 실행에 옮겨볼 참이다.

작명의 즐거움

작명의 즐거움/ 이정록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올챙이그물, 방망이투명망토, 육봉두루마기, 똘똘이하이바, 꿀방망이장갑, 거시기골무, (중략)//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중략)/ 애보기글렀네, 짱뚱어우비, 개불장화를 나란히 써놓고/ 머릿속 뻘구녕만 들락거려보는 것이었다- 시집『정말』(창비, 2010)...............................................북한의 대남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가 몇 년 전 우리 한글날에 ‘우리말과 글이 천시당하는 비극적 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남조선의 외래어 남용은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독’이라며 대한민국의 언어문화를 비난하고 나선 일이 있다. 당시 언론매체를 ‘안 좋은 예’의 주범으로 꼽으면서 ‘인사이드 월드’, ‘뉴스메이커’, ‘뉴스피플’, ‘뉴스라인’, ‘뉴스투데이’, ‘뉴스이브닝’ 등 잡지와 방송의 보도관련 제목, 출판물, 간판들의 외래어 사례를 지적했다. 한글의 보존과 발전만큼은 자기네들이 우리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벌인 선전일 터이다.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대꾸할 구실이 궁색한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여전히 우리사회 곳곳에선 외래어로 표기해야 좀 더 그럴듯하고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언젠가 국회의 법안 협상과정에서 한 의원이 “여당의 입장이 클리어해진 뒤에야 그 다음 스텝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있는 걸 보았다. 이런 언어습관 자체로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분발을 좀 해야겠다. 처음엔 어색한 느낌이 들어도 자꾸자꾸 쓰다보면 이내 친숙해질 것이다.하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언어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것까지 억지로 다른 말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으리라. 지금은 단일민족이니 배달민족이니 하는 인종순혈주의를 포기한 지 오래인 다문화사회이다. 언어는 시대와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한 민족의 국민정신을 이끄는 시발점이면서 문화발전의 토대를 이룬다. ‘콘돔’을 ‘똘이옷’이나 ‘거시기 골무’라 칭하듯 작명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유연한 언어정책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전문가들은 남한과 북한의 언어 차이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북한에서는 외래어와 한자를 우리말로 많이 바꾸었고, 남한에서는 외국어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북이 사용하는 낱말의 30% 이상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없다(괜찮다)’, ‘방조하다(도와주다)’, ‘소행(칭찬할만한 행동)’ 등 남한에서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말이 북한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남북한 언어의 격차가 심해진 가장 큰 원인은 그동안의 언어 정책은 물론 생활환경과 의식 구조의 차이가 심화된 탓이다.지난 한글날 이낙연 국무총리는 남북이 겨레말 큰사전 공동 편찬을 위해 다시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사용하는 말이 다르면 상호 불신과 위화감이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여 언어의 차이를 좁히는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겨레말사전편찬사업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때다.

외눈

외눈/ 정다혜간호사는 의식 없는 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한쪽 들어내겠다는/ 수술동의서에 도장 찍었다/ 그건 동의가 아닌 최후의 통보/ 나는 여자답게 거부해 보지 못하고/ 절망의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눈 하나 잃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생의 빈자리/ 신경조차 차단된 죽음의 빈자리에/ 보지 못하는 새 눈 들어섰지만/ 그 눈에는 더 이상 풍경 담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의안/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깜깜한 고요 속에/ 다행히 눈물샘은 마르지 않아/ 바다 같은 눈물 출렁출렁 퍼내 쓰고도/ 눈물은 아직 강물처럼 남아 펑펑 흐른다/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나는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다 (후략)- 시집 『스피노자의 안경』 (고요아침.2007).............................................. 시력의 불편을 겪어보지 않으면 눈의 소중함을 느끼기 어려운데, 요즘은 그 소중함을 모른 척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세상이 번잡스럽고 컴퓨터와 휴대폰의 전자파에 일찌감치 노출되어 일찌감치 시력 보조도구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몸에 불필요한 기관은 없다. 그 가운데 눈은 신체 중 가장 예민한 기관이며 눈의 피로는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 눈의 건강은 필수이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한쪽 눈이 부옇게 보여 안과에 갔더니 백내장 진단을 받고 난생 처음 수술이란 걸 받은 바 있다. 시인은 30년 전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졸지에 한쪽 눈과 사랑하는 딸을 동시에 잃었다. 그리고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수술을 거쳐 오늘까지 힘겹게 살아남았다. 시인은 오직 시를 통해 그동안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보지 못하고 삼켰던 울음을, 그리고 딸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을 토해내곤 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고통 속에서는 “잃어버린 한쪽 눈보다 더 밝은 빛이 되어주는 스피노자의 안경”과 같은 남편이 있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눈을 반짝인다. 시인은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시인은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던 것이다. 요즘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정 모교수의 경우도 젊은 나이에 한쪽 눈을 잃는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외눈을 가지고도 끄떡없이 살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공전과 자전을 거듭했을까 짐작된다. 죄가 없다면 ‘외눈’으로 맞이하는 ‘축복의 봄’은 반드시 오겠지만... 매년 10월 둘째 목요일로 지정되어 실명과 시각장애에 대한 인식을 알리기 위해 제정된 ‘세계 눈의 날’이 어제(10월10일)였다. 그리고 11월11일도 또 다른 ‘세계 눈의 날’이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빈번히 찾아오는 황반변성은 치료시기를 놓치면 자칫 실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의 날을 맞아 실명질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나도 양안의 백내장 수술로 전보다 보기가 나아졌지만 당뇨성 망막변증이 또 걱정된다.

식민지의 국어시간

식민지의 국어시간/ 문병란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하략) - 시집 『땅의 연가』(창비, 1981).......................................................몰라도 상관없지만 시에서 ‘히노마루’는 일장기, ‘기타나이’는 더러운 놈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일본에 의해 빼앗긴 우리말과 글을 되찾아 채 가꾸고 다듬기도 전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영어를 배워야 했던 현실이 시인으로서는 못내 부끄럽고 서글프다. 출세하려면 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잘 알아야 하는 풍토가 시인으로서는 못마땅하다. 이 시가 발표된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렇지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말 가꾸기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글로벌 환경에 쫓아가지 못해 뒤떨어진 사람의 넋두리로 받아들이는 세상이다.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겨레의 바탕인 우리말의 힘을 깨닫기보다는 여전히 외국어를 더 중시하는 환경과 생각의 똬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점방이나 아파트, 심지어 공공시설의 이름도 외국어로 지어야 멋있다고 여긴다. 아파트 이름은 죄다 외국어이거나 외래어 풍으로 꼬부린 우리말이다. 멀쩡한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아파트 가치가 상승하리라 믿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온통 ‘빌’ 아니면 ‘뷰’고 ‘타운’이니 ‘파크’, ‘타워’와 ‘캐슬’이 되었다. 요즘은 이것도 한물가서 불어에다 라틴어까지 동원되고 있다.말과 글의 우리 것은 여전히 홀대받으며 국가기관이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 형국이다. 행정용어에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 한자조어가 수두룩하게 남아있고 새로 만들어지는 용어들은 죄다 어려운 영어다. 글로벌도 좋고 국제화도 이해하지만 덮어놓고 이러는 거는 아니라 본다. 지나친 외래어 남용은 국가 정체성과도 무관치 않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구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이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아무리 미국에 기대고 눈치를 보는 처지로서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언가.2003년 강원국 청와대 연설 비서관을 처음 만난 노무현 대통령은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 말로 최대 적이네” “평소에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이 좋네, 영토보다는 땅, 식사보다는 밥, 치하보다는 칭찬이 낮지 않을까?” 국가원수의 우리말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수문 양반 왕자지

수문 양반 왕자지/ 이대흠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과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시집 『귀가 서럽다 』(창비, 2010)........................................................이 시에서의 수문댁은 예순 넘어 한글을 배우긴 했으나,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하고 ‘쎄바닥’이 여간 엉키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치 과거 영국인들의 16진법으로 잘 써오던 일상이 10진법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겪는 혼란처럼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입에 달라붙지 않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런데 아마도 먼저 간 영감을 겨냥하고 누가 그전에 써놓았지 싶은 변소 옆 낙서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던 것이다.그래서 ‘왕자 거튼 사램’이라 읽고 먼저 간 남편을 하늘같은 사람으로 왕자 같은 사람으로 받들어 추억하긴 했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오역인가. 익숙하게 써왔던 말이 사투리든 외래어든 바르게 고쳐 사용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벤또’를 도시락으로, ‘다꾸앙’을 단무지로 바꿔 말하기는 그다지 큰 저항이 아닌데 ‘오뎅’은 어묵꼬치가 아니라 여전히 ‘오뎅’으로 불러야 제 맛이 나는 건 사실이다. 우리 김치가 그들에게 ‘기무치’가 아니라 ‘김치’라 불리기를 바란다면 그 정도의 용인은 가하지 싶은데도 요즘의 분위기로는 그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짬뽕도 일본어 ‘잔폰’에서 유래되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짬뽕이 우리말처럼 굳어졌기 때문에 굳이 순화하라고 하진 않는데 ‘초마면’이란 우리말 표현이 있긴 하다. 어원도 의미도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왜색 낱말이 부지기수다. 이를테면 ‘18번’은 에도시대에 ‘가부끼’를 하던 한 가문의 잘하던 레퍼토리가 18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말로 가장 잘하는 장기의 의미로 통용하고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어 잔재는 한글 정신을 무색케 한다. 일본제품 불매운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상생활에 뿌리내린 일본식 잔재 용어를 배격하는 일이다.‘곰보빵’이 표준어인 일본어 ‘소보로’, 생선에 채소 따위를 넣어 맑게 끓인 국을 일컫는 ‘지리’도 ‘싱건탕’으로 순화되어야할 말이다. 우리말 속어처럼 사용되는 ‘뽀록나다’도 일본어 ‘보로’(ぼろ)에서 온 말이다. ‘드러나다’또는 ‘들통 나다’로 순화해서 써야 할 말이다. ‘비까번쩍하다’란 말 역시 일본어 ‘비까’(ぷか)가 국어의 의태어 ‘번쩍’과 결합한 말이다. ‘번쩍번쩍하다’로 순화해서 그냥 쓰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쓸 말은 아니다. 일본어만이 아니라 영어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한글날 광화문 세종대왕상 앞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것은 또 무언가.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가을, 지리산, 인연에 대하여 한 말씀/ 박남준저기 저 숲을 타고 스며드는/ 갓 구운 햇살을 고요히 바라보는 것/ 노을처럼 번져오는 구름바다에 몸을 싣고/ 옷소매를 날개 펼쳐 기엄둥실 노 저어 가보는 것/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 김치 사진 찍고 있는 것/ 그리하여 물봉숭아 꽃씨가 간지럼밥을 끝내 참지 못하고/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나무들이 초록의 몸속에서/ 붉고 노란 물레의 실을 이윽고 뽑아내는 것/ 뚜벅뚜벅 그 잎새들 내 안에 들어와/ 꾹꾹 손도장을 눌러주는 것이다/ 아니다 다 쓸데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실천문학사, 2010)...................................................... ‘흰 구절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치김치 사진 찍고 있는’ 언덕 빼기마다 ‘바람은 춤추고 우주는 반짝인다.’ 정읍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구절초 축제’가 한창이다. 구절초는 이 계절 우리 산하 모든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구절초를 다른 꽃과 변별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안도현의 ‘무식한 놈’이란 시가 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길을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나도 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고 들을 때뿐이지 확실하게 가려내지 못했다. 안도현 시인도 그 후로 꽃과 나무의 이름에 대하여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 완전하게 결별했다고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무식한 놈’을 면치 못하고 있어 쑥부쟁이와 구절초 정도는 가려낸다 해도 숱한 야생화의 이름들을 헷갈려한다. 구절초는 꽃대 하나에 하나의 꽃만 피우고 희거나 엷은 분홍색을 띄는데 비해, 쑥부쟁이는 길가 아무데나 볼 수 있고 향기가 별로 없는 연보라색 꽃이란 정도는 들어 알고 있으나 아직도 자신만만하지는 않다. 그 지경이다 보니 지금까지 꽃을 제재로 시를 쓴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감국 산국 벌개미취 개미취 등의 가을꽃들을 뭉뚱그려 ‘들국화’라고 흔히 부르는데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란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깊게 따지지 않으면 모두 들에 피는 국화과의 꽃이어서 틀린 이름도 아니다. 높지 않은 산길에 그리고 호젓한 못 둑에 소박하고 수수하게 피어있는 가을꽃들은 모두가 그놈이 그놈 같다. 그 가운데 구절초는 좀 더 한갓진 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음력 9월9일(바로 어제)이면 아홉 마디가 되어 꽃을 채취한다 해서 구절초라 불렸고 바로 이 시기가 그 절정이라는 의미이다. 청초하게 피어있는 그 가녀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감성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불현 듯 ‘까르르르 세상을 향해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하겠다. 자연히 시공을 거슬러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되면 ‘지금 여기 당신과 나, 마주 앉아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는 것’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 ‘인연은 그런 것이다’ 구절초는 흰 꽃잎이 신선보다 더 돋보인다 하여 ‘선모초’라고도 하는데,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다른 생각

또 다른 생각/ 이수익뭉개지는 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묻은 배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조금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소리를 버럭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도 참으로 소중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 구역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중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경계하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한 시인이여. - 시집『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시작, 2007)........................................................서로 주장이 달라 각을 세워 말다툼 하더라도 ‘이게 무슨 먹고 살 일이라고’ 그 생각이 파고들면 한 발 물러서기도 하고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그렇게 세상은 굴러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적당히 넘어가는 게 신상에 이로운 경우가 많고, ‘뭉개지는 것도 방법’인 일도 적지 않다. 더구나 너의 편안을 위해 나를 망가트려 각의 날을 지우는 것은 어쩌면 겸손, 유연, 양보, 비움 등등으로 요약되는 선한 덕목이기도 하다.‘선창에서 기름때 젖은 배들끼리 서로 부딪치듯,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더러 얼룩도 생기듯’ 다투다가도 네 숟가락 휘젓던 된장국물을 내가 후루룩 떠마시듯이 내가 먼저 ‘졌다 졌어!’ 두 손 들고 각을 허물어뜨리는 것도 파국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이 시는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과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의 ‘또 다른 생각’에 주목하며, 그것에 더 후한 가치를 쳐주고 있다. 시인이란 족속은 특히 그렇다는 것이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구역을 만들어내는 일’‘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의 ‘매우 소중한 덕목’은 시인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다. 타성에 쉬 물들지 않으며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경계하고 저주’한다. 그들은 대개 비주류며 집단추종을 거부한다. 묻고 따지지 않는다며 누구든 오케이라는 권유를 사양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롭고 진실한 양심의 외침이 확대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들은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그러나 현실상황의 뚜렷한 인식이 부족할 경우에는 자칫 그 생각이 옹알이로 그치거나 악화에 의해 구축된 양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지금의 조국 사태는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 공정과 불공정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한다. 결자해지하라며 대통령에게 조국 장관의 해임을 요구한다. 검찰과 언론을 통해 유통된 정보들이 비대칭으로 부풀려지면서 사태를 확산시켰다든가, 처음부터 조국을 지렛대 삼아 정치적 생명력을 충전시켜보자는 일부 야당의 전략이 통했다는 사실 등을 간과한다면, 일견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먹고 살 일이라고’ 서초동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우아한 지성보다 원시적 감각의 또 다른 우려가 있기 때문이리라.

시월

시월/ 황동규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중략) /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중략)/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월간「현대문학」1958년 11월호....................................................... 이 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즐거운 편지’와 함께 나이 스물 황동규 시인의 ‘현대문학’ 등단작이다. 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이때 시인이란 꼭 시를 쓰지 않더라도 눈동자에 힘 빼고 하늘의 뭉게구름을 얼마간 바라본다든지 단풍이나 노란 은행잎, 또는 낙엽에 사유가 잠시 걸쳐있는 것만으로도 시인의 성정을 갖는다는 뜻이리라. 더불어 이 땅에 살다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시인들이 남긴 가을의 절창 가운데 한두 편 되살려보려고 애쓴다면 우리 모두 이 가을에 시인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으리. 그러는 동안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첫 소절이라도 문득 떠오른다면 그대에게 붙여진 시인의 칭호는 자랑스럽기도 하여라.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물론 한 편의 시로 가을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빛나는 가을의 시어들이 있기에 가을은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계절이다. 살면서 시인의 촉촉한 습성으로 가을을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히 시인이다. 하늘은 더 푸르러 보이고 산은 보다 확연해진다. 지긋지긋한 ‘조국’의 파장과 꼬리를 물고 뿅뿅 두더지처럼 솟아오르는 어이없는 뉴스들에서 벗어나 가까운 산에라도 한번 올라보자. 그 산의 물이 덜 든 단풍잎 하나 달려와 당신께 속삭이며 추파를 던지리라. ‘우리 활활 불 한번 질러보는 건 어떤가요?' 그럴 때 태풍이 몰아쳐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고약한 마음도 스르르 사라질 것이고, 광장에 모인 숫자에 국가의 명운이라도 걸린 듯, 멀쩡한 하늘에 태풍을 일으켜 나라를 뒤엎어보자는 심산 따위도 어느새 마음 안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월의 강물’이 저토록 짙어지는데 공연히 국력이 낭비되고 사람들마다의 진을 빼며 에스컬레이터 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다. 비탈에서 간신히 버티던 욕망들도 이제는 속절없이 계곡으로 쏟아져 내려올 때다. 단풍 들고 이어서 낙엽이 계곡의 골들을 메우겠지만 그들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으리라. 사람과 다람쥐에게 미처 눈에 띠지 않은 밤톨과 도토리들이 햇살에 말라가면서도 나무 하나씩을 살려낼 것이다.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에도 안토시안이 풍부한 잎들은 각자의 아름다움을 뽐낼 것이리.

시월 하늘

시월 하늘/ 김석규철새 돌아오는 때를 알아 누가 하늘 대문을 열어 놓았나/ 태풍에 허리를 다친 풀잎들은 시든 채 오솔길을 걷고/ 황홀했던 구름의 흰 궁전도 하나둘 스러져 간 강변/ 시월 하늘 눈이 시리도록 너무 높고 맑고 푸르러/ 어디에 하늘 한 만 평쯤 장만할 수 있을지/ 주민등록증하고 인감도장을 챙겨 들고 나가 봐야겠다.- 시집 『백성의 흰 옷』(신라출판사, 1976).................................................... 가을이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우리 속담에 ‘가을이 되면 말발굽에 고인 물도 마실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시월의 가을은 그만큼 기상환경이 좋아져서 하늘이 맑고 푸르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시월 하늘이 유난히 ‘눈이 시리도록 너무 높고 맑고 푸르러’ 하늘에 안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얼까. 기상과학을 한번 들여다보자. 적란운 등에서 보듯 여름하늘의 구름은 수직으로 발달하게 되고 때에 따라 집중호우를 쏟아낸다. 반면 가을하늘의 구름은 드러누운 모양인 수평으로 발달한다. 새털구름 양떼구름이 이에 해당하며, 이는 대기가 매우 안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대기가 안정되면 지상의 먼지가 상공으로 잘 올라가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가을하늘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파랗고 높게 보인다. 우리 눈은 태양빛 중에서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다. 가시광선은 대기를 통과하면서 대기 중의 질소, 산소 분자들에 의해 빛이 흩어지는데 산란 정도는 보라색이 가장 양이 많고 파란색·녹색·노란색·주황색·빨간색 순서로 이어진다. 19세기 영국의 레일리가 처음으로 ‘빛의 산란’ 이론을 바탕으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했다. 보라색은 우리 눈에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파란색을 주로 인식하여 하늘이 푸른빛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왜 흰색을 띠고 있을까. 파도의 물보라나 흰 구름은 여러 크기의 물방울로 되어 있다. 크기가 다른 물방울들은 진동수가 다른 빛을 산란시킨다. 큰 물방울은 낮은 진동수인 빨강 쪽의 빛을, 작은 물방울은 높은 진동수인 보라 쪽의 빛을 산란시킨다. 그 결과 모든 빛을 산란시켜 우리에게는 흰색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모든 색의 빛을 합하면 흰색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이렇게 기상과학을 알고 보면 그저 감상적으로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올려다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오묘한 섭리와 과학적 규칙들이 새삼 더 신비롭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갔지만 대체로 가을엔 강수량이 줄어들고 습도도 낮아진다. 또 태양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지표면 부근에서는 강한 바람이 생기지 않아 대기층의 대류가 안정적이다. 상공의 미세먼지도 낙하해서 하늘은 더 맑아진다. 이런 하늘 아래 산하는 어떤가. 설악산에는 이미 단풍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든 가을 산의 풍경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강물, 그리고 높이를 알 수 없는 푸른 하늘은 불현듯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우리는 너무 가열 차고 팍팍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지.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의 시월 하늘을 올려다보고 오늘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품어보는 어떨까. ‘어디에 하늘 한 만 평쯤 장만할 수 있을지 주민등록증하고 인감도장을 챙겨 들고 나가 봐야겠다.’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시집 『이 時代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개 같은 가을’이라니. 시를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라 믿고서 낙천적인 언어습관에 길들여진 이들에겐 참으로 난폭하고 도발적이며 냉소적인 직유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라고 했던 시인.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며 서슴없이 저주받은 운명을 말하던 시인. ‘내가 살아있다는 건 루머’라고 했던 그가 지독한 절망의 끝에서 본 가을은 신산하기 그지없다. 건조해져가는 산과 차가워지는 바람의 우울, 낙엽의 조락처럼 쓸쓸한 풍경들이 이유 없는 고통으로 체험될 때 가을은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지 않는다. 깡마른 풍경으로 사물들은 방치되고 몸과 마음의 운신 또한 덩달아 힘겨우리라. 누구도 연결해내지 못하는 언어만이 꿈과 현실에서 떠나간 애인들을 기억할 뿐. ‘말 오줌 냄새’를 풍기며 폐수로 고이는 가을이란 막다른 현실. 그 끝에서 황혼을 업은 강물이 마비된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찾아가는 바다. 그 바다가 기어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을 믿으므로 더없이 충만한 고통 속에서 묻는다. 여기가 어디냐고. 언제쯤 이 불구의 마음과 지류의 삶이 무한의 바다에서 죽음처럼 고요해질 수 있느냐고. 마음에 추를 달아 끝없이 추락케 하는 ‘개 같은 가을’에 나는 무엇이냐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이 구차하게 번져가는 ‘매독 같은’ 저주의 가을로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그 풍경 다 받아내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뭐냐고. 이 시대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개처럼 쳐들어온 가을을 맞아야 하나. 지난 시대의 추문들에 일일이 분노하기에도 지쳐 삶은 허무로 깊게 패이고 있다. 수확할 게 없는 이들에겐 절망이 낙엽처럼 쌓일 것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철저한 소외의 계절이 될 것이다. 풍경은 아름답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밝게 웃을 것이나 몸과 마음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개 같은 가을’이다. ‘허무의 사제’ 최승자 시인은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만 존재했다. 그는 세상을 혹독하게 앓으며 시를 과격하게 써댔다. 그러나 시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 같은 가을’에 ‘절망의 끝, 허무의 끝, 죽음의 끝까지 가봤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우두망찰할 밖에. 이 개 같은 가을도 혼란의 연속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전부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의심하는 나 자신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명제를 부여안고서 이 가을을 견뎌도 좋을까. 강물이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