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꽃 피운 찬란한 시절 끝 꺾여버린 국운…‘혼란의 시대’ 들어서

신라 35대 경덕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첫째 아들이 태자로 책정되었다가 왕비 폐위에 이어 사라졌다. 어떤 기록에는 죽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은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이름이 알려진 김교각이 첫째 아들이라 전한다.성덕왕이 새 왕비를 맞아들이면서 뒤늦게 태어난 둘째 아들이 효성왕이다.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도 귀족들의 정치세력 다툼에 따라 진행된 요식절차와 같았다. 그러나 경덕왕은 23년, 비교적 긴 시간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의 강화를 통한 안정적인 정치를 하려고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경덕왕은 통일신라 가장 화려한 중대 말기의 왕이다. 불교문화의 극치를 이루고, 문화예술적으로도 가장 최고 정점에 이르렀던 시대로 평가된다. 불국사와 석굴암 등의 뛰어난 문화예술과 과학적 기술력은 오히려 현대적 과학을 앞선다고도 평가된다.그러나 아들을 얻기 위해 왕비를 몰아내고 새로운 부인을 얻는 등의 상당히 무리한 정치로 신라 중기를 끝내고 하대로 이어지는 시대를 맞는 부덕한 왕이 되고 말았다.충담과 표훈 같은 고승과의 대화에서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와 말기정치로 이어지는 엇갈림을 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충담사당나라 사신이 도덕경 등을 보내와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아들였다.옹이 다스린 지 24년째였다. 5악과 3산의 신들이 간혹 어전의 뜰에 나타나곤 했다. 3월3일. 왕이 귀정문의 다락에 올라 주위 신하들에게 “누가 거리에 나가 좋은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그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엄 있게 잘 차려입고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다가 왕 앞에 보였지만 “내가 말하는 좋은 스님이 아니다”고 했다.다시 한 스님이 허름한 중 옷을 입고 앵통을 진 채 남쪽에서 왔다.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다락 위로 불러오게 했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가 가득했다.“그대는 뉘신가?”“충담이라 하옵니다.”“어디 다녀오시는겐가?”“저는 매번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지금 막 바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과인에게도 차 한 잔 주실 수 있는가?”충담은 곧 차를 끓여 바쳤다. 차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자욱했다.“짐은 일찍이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그렇습니다.”“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잘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주실 수 있는가?”충담은 곧바로 명령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좋다’ 하고 왕사에 봉하였다. 충담은 거듭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노래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하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 찬기파랑가는 또 다음과 같다.구름 장막을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에/ 기파랑의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 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랑이시여.◆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명을 고치고 행정 관제를 정비했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삽량주를 양주로 고쳤다. 청주는 강주, 한산주는 한주, 웅천주는 웅주, 하서주는 면주, 완산주는 전주, 무진주는 무주로 고쳐 지금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관직명도 크게 고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국사, 석굴암을 지으면서 불교중흥을 꾀하는 한편 당나라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유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려는 고심한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충담 스님을 궁궐로 불러 백성을 위한 정치를 물어 ‘안민가’를 받아들고 충담을 왕사로 초빙하려 했다. 충담이 간곡히 사양하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충담은 매이는 것을 싫어하며 혼자 공부하고, 거리낌 없이 행하기를 즐겨 했다.충담은 도력이 높았다. 한 번 발걸음에 30여m의 거리를 내닫고, 범인들이 아무리 달려 따라가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흔적을 못 찾게 되었다. 남산의 삼화령을 오르내리며 미륵세존에 공양을 하곤 했지만 남산 신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남루한 의복으로 경덕왕에게 나타나 안민가를 지어 바친 것도 일부러 백성을 위한 임금의 의지를 시험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충담은 나라의 대들보로 기능하고 있던 화랑들을 격려하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시로 지도하는 일도 비밀스럽게 맡아 했다. 훌륭한 기파랑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어 화랑들의 표상으로 삼게도 했다.경덕왕은 관리들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 관리들을 감찰하는 기구를 두어 소홀한 관리는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파면하기도 했다. 이어 충성스런 신하들의 바른말은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천재지변이 일자 상대등 김사인이 상소를 올려 정치의 잘잘못을 이야기하자 경덕왕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순이 풍악을 즐긴다는 왕에 대해 충고했다. “제가 듣기로 중국 하나라 주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오락을 즐겨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 아뢰었다. 경덕왕은 이후 풍악을 그치게 하고 이순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다.경덕왕은 백성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살폈다. 웅천주(공주)에 사는 향덕이란 백성이 너무 가난해서 아버지를 모시기 어려워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봉양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많은 선물을 내리고 정표문을 세우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만약 태양이 사라진다면 지구엔 어떤 일이 펼쳐질까

지구에 서서 태양의 오르내림을 살핀다. 해를 향한다는 ‘해바라기’에 ‘순정’을 입히고, 태양과 같은 젊은이에 ‘열정’을 대입한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가끔 눈을 찌푸려 보지만, 하릴없는 가난에 내몰린 이들에게 태양빛은 오직 한 줄기일 뿐. 그래서 더 간절하다.태양은 뜨겁고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를 뜨거운 태양이 감싸 안는다. 이 순수해 마지않는 원론적 원리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또 우리가 살며 느끼는 태양과 지구의 정체성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무지한 것은 더욱 아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이 정도의 인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해 특별히 공부하고 연구할 리 없다. 그저 ‘어머니’란 단어 하나로 통칭되고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태양 이야기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 그 외 수많은 무명의 별들. 이 모든 행성들의 전체집합이 바로 ‘태양’이다.태양은 태양 하나로 설명된다.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유일의 행성이기 때문으로. 더불어 지구 입장에서는 만물을 소생케 하는 이른바 ‘GOD(신)’와 같은 존재다.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약 1억5천만㎞다.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빛의 속도를 수치화하면 초속 30만㎞에 이른다. 이것을 다시 시간으로 환산하면 시간당 10억 ㎞를 이동하는 셈이다. 단 1초의 시간으로 지구 둘레를 8바퀴 가까이 돌 수 있는 속도다.이 지점에서 지구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바로 ‘생명체 존립의 최적지’라는 것인데, 학계에서는 태양과 약 2억5천만㎞ 떨어진 행성과 약 1억3천만㎞ 이내 위치한 지점에서는 물 생성 가능성을 희박하게 본다. 얼어 버리거나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자리 잡은 지구는 70%의 물로 이뤄져 있다.태양의 컬러는 ‘레드’로 상징된다. 태양이 붉은색으로 보이는 것은 ‘레일리 산란’의 원인인데, 레일리 산란이란 빛의 파장 대비 극소량의 분자와 입자들에 의한 산란작용을 의미한다. 실제 태양은 백색 혹은 매우 옅은 청백색을 띤다.태양의 지름은 약 139만㎞이다. 이는 지구 대비 110배 가까이 큰 규모이며, 그 무게만 해도지구 질량의 약 33만 배에 이른다.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을 다 더한 질량보다도 800배 가까이 무거운 수준. 가히 ‘태양계의 어머니’라는 심벌이 예사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태양의 내부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핵과 복사층, 대류층으로 각각 이뤄진다. 태양의 핵은 태양 중심을 기준으로 20% 범위에 위치하는 지점으로 태양계 전체를 아울러 가장 뜨거운 부분이다. 약 1억5천만℃다.태양 복사층은 태양 핵으로 말미암아 파생한 에너지를 복사 형태로 대류층에 연계하는 지점이다. 대류층은 상승기류가 뜨거운 물질을 광구까지 올려보냄으로써 발생하는 포인트다. 광구란 ‘태양의 표면’을 의미하며 복사층의 상층부로부터 열을 전달받는다.태양의 밝기는 독보적이라 할만하다. 밝기는 실시등급 -26.8 수준인데 절대 등급 기준으로는 10pc(거리로 보는 절대기준)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보름달과 견줘보자. 보름달의 실시등급이 -12.5 정도임을 상기해보면 5등급 정도의 차이가 난다. 등급별로 20배 정도의 차이임을 감안할 때 태양과 달의 밝기 차이는 100배 정도 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태양은 태양계 행성은 물론이거니와 지구 입장에서도 ‘만물소생’의 근원과도 같은 존재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지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은 태양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열과 빛에 의존, 생존을 영위해 간다.그렇다면 태양의 소멸로 인해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46억년을 지내온 태양이 만약 사라진다면 결론부터 알아보자. 우리는 ‘지구의 멸망’을 하릴없이 만끽해야 할 순간을 오롯이 맞이해야 할 터.태양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태양의 인력 범주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인력은 다른 말로 ‘중력’이라고도 하는데, 인력은 ‘운동에너지’의 발생 근원이다. 다시 말해 태양 인력의 영향으로 물체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과 같이 낙하운동을 하고, 고기압은 위로 저기압은 아래로 상승하는 것이다.만약 지구에서의 인력이 소멸된다면 각종 빌딩과 또 다른 지각층은 우주 세계로 일거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간 중력의 영향을 받아온 대기권 역시 원치 않는 우주유영을 해야 할 것이며, 종국에는 지구의 내부구조가 다방면으로 분열되는 초유의 사태마저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쉽게 말해 태양의 인력으로 고정돼 온 지구가 일순간 태양의 손을 놓쳐버린다면 지구는 공전속도에 버금가는 초속 30㎞의 속도로 광활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주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행성과의 충격을 그 어떠한 제어 없이 수용해야 한다면, 그저 끔찍할 따름이다.비 역시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지구 대기의 ‘대류현상’은 태양열로부터 비롯되는데 태양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구름은 생성되지 않을 것이고, 식물의 생성을 촉진시키는 수분공급도 비가 오지 않음으로써 일 순간 정지돼 버릴 것.대류란 뜨거운 물은 온도가 올라가면서 밀도가 작아짐에 따라 부피가 팽창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했듯 뜨거운 것은 위로,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을 뜻한다.태양빛이 없다면 광합성도 기대할 수 없다. 광합성은 녹색식물이 태양 에너지를 이용,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부터 포도당 등의 유기물을 생성시킨 후, 산소를 분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식물들이 광합성을 수용할 수 없으니 생육 자체는 불가해질 것이다. 초식동물 들은 주요 먹거리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의 존립이 힘들어 짊은 자명하다. ‘사시사철’의 의미도 퇴색될 듯하다. 우주의 평균온도가 영하 280℃에 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태양이 없는 지구에서의 냉기류는 쉬 가늠하기 힘들 만큼의 고통이다. ◆지구 이야기지구가 태양계 유일의 ‘생존 적지’라 일컬어지는 데엔 ‘물’의 매개가 전체를 차지한다. 지구는 물의 행성이자, 태양과의 이상적 범주 내 위치해 있음에 따라 삶이 가능한 기온 분포를 보인다. 물론 지구에 존재하는 물의 97%가 바닷물이다 보니 음용으로의 물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단 2~3%의 물로 지구는 자가 호흡이 가능한 독보적 행성으로 인식된다.지구의 표면은 ‘지각’으로 대신할 수 있다. 지각은 크게 ‘해양지각’과 ‘대륙지각’으로 나뉜다. 해양지각은 해양범위에 맞물린 암석권의 일정 부분을 의미한다. ‘모호면’을 통해 그 하부에 위치한 ‘연약권’과 구별, 지각평형을 통해 연약권 상부에 위치한다. 모호면은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라도 불리는데, 지각과 맨틀의 경계 부를 뜻한다. 그리고 연약권은 명칭 그대로 지표면 아래 100~200㎞ 사이에 분포된 유연한 암석층이다.학계에선 지구의 유래를 약 45억 년 이전으로 본다. 이는 1950년 중반 활동한 영국과 미국의 지질학계로부터 비롯된 가설인데, 측정치는 지구 암반을 대상으로 한 ‘방사성연대측정법’을 통해 밝혀졌다.방사성연대측정의 원리는 이렇다. 지구에 분포돼있는 100t가량의 방사성 탄소를 통해 우주방사선을 활용, 그 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생물의 들·날숨 등 체내 방사성탄소 양 역시 대동소이한 수준으로 일정화한다. 이후 호흡이 멈추는 상황을 체크, 탄소의 양이 줄어드는 시점을 파악해 내는 원리다. 이를 통해 지구 또는 각종 고대 유기물 등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고대 그리스에선 ‘천동설’을 믿었다. 당시 대표적 과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파에서 주창한 학설이었는데 천동설이란 말 그대로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보고, 모든 행성은 (태양 포함)지구를 주체로 해 그 주위를 돈다는 논리다.하지만 이후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금의 ‘공전’, 다시 말해 태양주위를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이 이른바 ‘혁명적 가설’로 각광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지동설 이론은 코페르니쿠스 발표 이후 50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지구가 둥글다는 불세출의 원론은 16세기 망원경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의외로 신변잡기적 발견으로 비롯됐는데 당시 해안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평선 너머까지 운항하는 선박의 몸체가 돛보다 먼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 이를 통해 지구의 모양이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글·사진 군월드 IT 사업팀

울진 봉평비-6세기 신라역사의 다양한 면모 새겨…가장 오래되고 가장 귀한 ‘고비’

1988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거주하는 주민이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다가 옛날부터 그의 논에 박혀 있던 애물단지 큰 돌을 굴삭기로 파서 논둑에 버렸다.얼마 뒤 비가 내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석비의 흙이 씻겨 내리자 조경석으로 사용하려고 살펴보니 뜻밖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이 석비가 발견 당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비(古碑)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울진봉평리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이다.법흥왕 11년(524)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봉평비는 1989년 발견된 냉수리비(503년)와 2009년 발견된 중성리비(501년)에 최고비의 왕좌는 물려주었지만 내용과 크기 및 서체미에 있어서 6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석비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현재 봉평비는 2008년 8월 봉평리 521번지에 신축된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은 기존의 비각 바로 앞에 지어졌다. 봉평비를 찾아가려면 국도 7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죽변교차로에서 우회전해 300m를 직진하면 시야에 전시관이 들어오고 동남쪽 지척에는 봉평해수욕장이 있다.◆1500년 묵은 봉평비가 발굴된 사연봉평비는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1월20일 세상에 비신을 드러냈다.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 118번지 주두원씨 소유의 논에 비의 아랫부분 일부만 드러난 채 비면이 거꾸로 박혀 있어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교적 글자가 잘 판독된다.같은 해 3월20일께 마을 이장 권대선씨가 농로에 방치된 석비의 흙이 봄비에 씻겨 내리면서 글자가 보인다고 면사무소와 군청에 신고했다. 담당 공무원은 경북도청에 보고했다.4월7일 서예가인 윤현수씨가 울진군청 직원과 함께 초탁본을 떠서 서실에서 판독해 보니 임신서기석의 글자와 유사한 서풍으로 씌어진 서체임을 직감했다. 법흥왕을 지칭하는 매금왕과 신라육부라는 글자를 보고 신라고비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고 한다.4월15일 매일신문에 비의 발견상황이 보도됐고 4월16일 한국고대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의 옛 명칭)의 교수와 전문가들이 비문을 탁본하고 현장조사를 했다. 5월5일 재조사 때 비를 캐내면서 떨어져 나간 비편이 현장에서 발견돼 완형을 갖추게 됐다.7월22일과 23일 이틀간에 거쳐서 계명대학교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봉평비에 대한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4월께 출토된 위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비좌(碑座)를 찾지 못해 8월에 비의 모형을 만들어 활용하도록 했다.한편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비의 정식명칭을 울진봉평신라비로 부르기로 했고 학술대회 결과를 이듬해 1989년 ‘한국고대사연구’ 2호에 특집으로 꾸며 간행했다. 이런 성과들이 모여서 마침내 울진의 어느 논에서 잠자든 봉평비는 문화재청에 의해 1988년 11월4일 ‘울진 봉평 신라비(국보 242호)’로 지정됐고, 2010년 12월27일 ‘울진 봉평리 신라비’로 명칭이 변경됐다.◆ 신라사 연구에 소중한 금석문봉평비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됐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기에 이를 피해 글자를 새겼다.긴 세월을 땅속에 있었던 탓인지 고르지 않은 네 면 중 한 면을 다듬은 뒤 음각으로 글자를 새겨놓았기 때문에 원형의 파손이 그리 심하지 않다.비의 높이는 204㎝, 윗너비 32㎝, 가운데 너비 36㎝, 밑너비 54.5㎝로 밑 부분은 비교적 둥근 편이고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의 긴 사각형으로 비문의 글자는 세로로 배치돼 있다. 글자 수는 행마다 다르고 글자 사이의 간격도 차이가 난다. 전체 구성은 10행으로 현재 학계에서 판독한 글자 수는 399자이다.서체는 예서에서 해서로 진행되는 과도기의 것으로 6세기 냉수리비나 중성리비 그리고 임신서기석의 글자와 유사한 글꼴을 보인다.비문의 글자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고 또 일부는 마멸돼 읽기 어려운 글자가 있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하기에 애매한 곳이 적지 않다.비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비문의 요지는 법흥왕 11년(524) 1월15일에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중앙 고위 귀족들이 모여 명을 내린다.직전 해인 523년 거벌모라(울진지역 중심지)와 남미지(울진지역촌) 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에 울진주민들이 길이 좁고 험한 이야개성에 불을 내고 성을 침범하는 등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에서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大軍·중앙군)으로 반란을 진압한다.신라육부는 사후처리로 칡소(얼룩소)를 죽여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한다. 관련된 자에게 장 육십(杖六十)대와 장 백(杖百)대 등의 형벌을 내리고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하늘에서 죄를 얻게 될 것임을 주지시킨 내용을 빗돌에 새겨 놓았다.6세기 초에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마주할 때 삼척이 최전선이었는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울진은 경주에서 도사(道使)가 파견돼 다스렸으나 신라와 친한 주민과 고구려와 친한 주민들이 공존하고 있었다.신라의 중앙정부도 포상과 징벌을 적절하게 활용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기도 했다. 봉평비는 이러한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여겨진다.봉평비가 발견됨으로써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에게 부족했던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왜냐하면 다른 신라비보다 글자 수가 많고 내용이 풍부해 문헌자료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기에 6세기 신라의 역사 연구에 도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예컨대 삼국사기의 율령반포 기록이 사실임이 확인되며, 신라 육부와 관등체계 및 지방통치조직과 촌락구조, 부(部)를 초월하지 못하는 왕권의 실태, 재판에 얼룩소를 잡았던 행위, 신라의 영역, 관료제도 등 법흥왕 때 신라의 정치·경제·사회의 다양한 시대상황을 광범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비는 어떤 신라고비보다 귀한 금석문으로 평가되고 있다.◆봉평비에서 느끼는 무기교의 기교와 무관심성근대 시기 서구미학을 수용한 뒤 이를 기초로 한국미학의 정초를 놓은 한국미론의 선구자 고유섭(1905~1944)은 한국미술의 전통이라 할 만한 성격적 특성을 ‘무기교의 기교’나 ‘무관심성’ 등으로 규정했다.기교나 개성이 강조되지 않았던 6세기 신라인들의 글씨, 구체적으로 봉평비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고유섭의 미론에 동감하게 된다. 글자의 크기나 결구도 고려하지 않고 척척 써 내려간 치졸한 맛은 기교가 없는 듯 보이지만 살펴볼수록 은근히 기교가 녹아있음이 읽혀진다.1500년 전 봉평비를 휘호한 사람은 인위적인 기교를 추구하거나 치밀한 구성을 위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의 글씨는 바로 무기교 속에 고도의 기교가 스며든 궁극의 미학이라고 여겨진다.무관심성은 언뜻 보면 세부적이고 세련되지 못해 거칠고 서툴러 보이지만 기계로 찍어낸 듯한 통일감을 추구하지 않고, 세부의 치밀하지 아니한 분위기가 더 크게 전체를 포용하는 구수한 큰 맛을 불러일으킨다. 봉평비는 자연석의 생긴 원형을 살려 글자를 배치하고 글자의 크기도 자유자재로 처리해 천진난만한 무관심성을 보여주니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의 멋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금석물의 보고인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국보로 지정된 봉평비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울진군에서는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을 건립해 제1전시실에 봉평비를 전시하고 있다.제2전시실은 삼국시대의 비라는 주제로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의 주요한 비 10기를 실물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제3전시실은 금석문과 한글이라는 주제로 금석학의 계보 및 금석문의 역사,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비석의 양식과 특징 그리고 한자의 서체,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 기록, 한글의 미래와 비전 등을 소개하고 있다.전시관 뒤편에 조성된 야외비석공원은 우리나라 지도모양으로 조성됐다. 광개토대왕비,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원주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보 및 보물급 비석 25기가 실물 형태로 제작돼 전시되고 있다.울진은 백암온천과 금강송에 월송정과 불영사로 널리 알려진 동해안 휴양관광도시이다. 그러나 하늘 맑은 가을날. 7번 국도를 달려 6세기 신라역사의 비밀을 여는 봉평비를 둘러보는 것도 마음을 살찌우는 좋은 역사문화여행이 될 것이다.정태수(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2)서부

[{IMG01}]◆(2)서부경주지역은 대부분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구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사적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더욱 관심이 높다. 어디를 가든 역사문화사적으로 문화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서부지역은 선도산, 화랑, 단석산 등의 국립공원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그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고 또 역사문화사적들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선도동, 건천읍, 서면, 산내면 지역이다.1. 태종무열왕릉경주 서악지구 국립공원에 위치해 있다. 왕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된 왕릉이다. 삼국통일의 주역 3인방에 가장 앞자리에 두는 김춘추 태종무열왕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다.무열왕릉은 소나무 숲 속에 대형고분으로 조성돼 있다. 그 뒤로 능선을 따라 4기의 고분이 나란히 위치해 고분공원을 이루고 있다.2. 서악서원 경북도기념물 제19호.조선시대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으나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됐다.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라 이름 짓고 직접 글씨를 써 현판을 달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2년에 묘우(廟宇)를 새로 짓고 1610년에 강당과 재사를 중건했다.3. 서악리 삼층석탑 보물 65호무열왕릉 북동쪽 경사지에 있는 신라시대 삼층모전석탑이다. 1층 탑신 정면 중앙에 문짝무늬, 그 양쪽에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에 비해 옥개석이 커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눈길을 끈다. 쉰등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고분 중심에 위치해 전체 균형을 맞추고 있다.4. 선도산 마애삼존입상선도산은 경주시 서쪽에 있는 높이 390m의 낮은 산이지만 국립공원이다. 산에는 신라 건국설화와 관련된 선도산 성모가 신라 개국 이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신라를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선도산 기슭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진흥왕릉, 문성왕릉, 서악리삼층석탑 등의 문화유적이 즐비하다.무열왕릉 입구에서 걸어서 1.5㎞ 정도 올라간 선도산 정상에 보물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삼존불상이 암벽에 두텁게 새겨져 있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가팔라 숨 가쁘게 올라야 한다.5. 김유신 장군묘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장군이다. 죽은 이후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다. 김유신 장군묘는 진위 여부를 두고 시비가 있지만 왕릉급으로 대규모로 조성됐으며 12지신상 등으로 화려하게 조성했다.직경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웅장하다. 봉문 아래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을 설치했고 호석 중간중간에는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을 배치했다. 특히 쥐와 용의 호석이 여의주를 들고 있어 특이하다. 장군묘 아래로 흥무공원을 조성해 관광객과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6. 법흥왕릉 사적 제176호경주의 서악으로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법흥왕릉은 수많은 대소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경주시내의 평지고분군을 벗어나 처음으로 교외에 조성된 왕릉이다. 무열왕릉을 지나 주택지에서 살짝 벗어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길로 접어들 때 논에서 개구리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은 특별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산책로가 인기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법흥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분의 남쪽에는 신라 하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다. 애공사지삼층석탑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효현리 삼층석탑으로 보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7. 금척고분군경주 중심부 서쪽 4번 국도변 건천읍 금척리에는 크고 작은 40여 기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앉아있다. 신라 박혁거세가 고분 어딘가에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신통한 금으로 만든 자, 금척를 묻었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하려 시도했다. 작업을 하려는데 난데없이 천둥벼락이 치면서 폭우가 1주일이나 쏟아져 발굴을 포기했다. 고분군 주변에 개망초가 군락을 지어 달밤이면 장관을 이룬다.8. 율동 마애삼존불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을 거쳐 약 2.7㎞를 지나가면 왼쪽으로 벽도산 아래에 두대리 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삼존불이 서 있고 불상 앞쪽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높이 2.5m 크기의 당당한 대장부 같은 몸체에 풍만한 얼굴, 미소를 머금은 자비에 넘치는 본존불의 표정은 합장 예배할 마음을 절로 우러나오게 한다. 화려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으며,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예술적 향기가 짙은 8세기 중엽 신라문화 전성기의 작품이다.9. 산내면 천룡폭포산내면은 경주에서 가장 오지에 속한다. 면소재지로 들어서면 마을 입구를 에둘러 흐르는 맑은 하천이 넓은 강변에 제법 깊은 소를 형성한다. 강변에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고, 청룡폭포가 산 위에서 물줄기를 형성해 떨어져 내리면서 비산하는 물보라가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땀을 식혀 준다. 바닥의 조약돌이 선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넷물에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과 다슬기를 줍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름 최고의 힐링명소로 알려지고 있다.10. 단석산국립공원건천읍과 산내면을 잇는 고갯길을 형성하고 있는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해발 1천m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서면 경주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연결된 등산로가 좋아 방문객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동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중턱에 신선사와 문화재로 등록된 신라시대 마애불상군이 있다. 또 정상에는 김유신 장군이 청년기에 수도하면서 신선에게 하사받은 보검으로 단칼에 베었다는 단석이 있다. *선도동: 충효동, 서악동, 효현동, 광명동*건천읍: 건천, 천포, 송선, 신평, 용명, 대곡, 화천, 모량, 방내, 금척, 조전리*서면: 아화, 도계, 천촌, 서오, 심곡, 도리, 사라, 운대리*산내면: 의곡, 내일, 대현, 일부, 신원, 외칠, 내칠, 우라, 감산리-경주시 행정지도-경주시 전경 사진-경주 전경사진 서악동[{IMG01}]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대했던 꿈 어디가고 이룬 것 없이 사라져 되풀이 되는 역사 씁쓸한 뒷모습만

신라 34대 효성왕과 35대 경덕왕은 32대 효소왕과 33대 성덕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너무나 닮았다. 효소왕과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이자 형제다. 효소왕이 즉위 10년 만에 죽자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35년간 나라 살림을 돌봤다.효성왕과 경덕왕 역시 성덕왕의 아들이면서 형제로 효성왕이 5년간의 짧은 기간 왕위에 있다가 물러나고 동생인 경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24년간 나라의 살림을 책임졌다.두 형제 모두 처음에는 귀족들의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 성공하고, 차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경덕왕도 성덕왕과 비슷한 입장이었다.이러다 보니 효성왕도 효소왕과 같이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 가야 했다. 삼국유사 효성왕조에 효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성덕왕 당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관문성 이야기와 관문성과 관련된 원원사 이야기를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재구성해 본다.◆삼국유사: 효성왕개원 10년은 임술년(722)인데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을 지었다. 지금 모화촌은 경주의 동남쪽 경계에 속하고, 일본을 방어하던 요새이다. 둘레가 6천792보이고 높이가 5척이다. 일한 사람이 3만9천262명이며, 맡아서 한 이는 원진 각간이다.개원 21년은 계유년(733)인데 당나라가 북쪽 오랑캐를 치고자 신라에 군대를 청하러 사신 604명이 왔다가 돌아갔다.-역사: 관산성을 쌓은 722년과 당나라 사신이 다녀간 733년은 성덕왕 때이다. 성덕왕은 702년에 즉위해 7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복형인 태자 중경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궁궐을 나가자 성덕왕에 이어 34대 왕으로 737년 즉위해 742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었다.효성왕은 김순원의 딸,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와 결혼했다. 김순원 세력의 외압에 의한 강제적인 왕비 책봉이었다. 때문에 왕비에 대한 사랑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효성왕이 영종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왕비가 이를 질투해 후궁을 죽였다. 영종이 이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다.효성왕은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동생을 태자에 책봉했다. 효성왕의 동생이 35대 경덕왕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문성과 원원사지-원원사(遠願寺)는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점에 문무왕 당시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 건립됐다. 김유신과 김의원, 김술종 등의 대신들과 밀교의 종파인 신인종을 신라에 들여온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 낭융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호국사찰이다.사찰에서는 법회를 이어가며 국운을 강하게 하는 주문을 외웠다.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는 공부를 하는 한편 무술을 익혀 뛰어난 병사로 양성되었다.원원사지 동서 쌍탑은 가운데 석등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펼치는 진법의 중심 설치물로 건립됐다. 삼층석탑의 상층기단 면마다 3구씩 십이지상을 새기고, 탑신에는 악을 물리치는 사천왕상을 입체적으로 두텁게 새겨 넣었다. 사천왕과 12지신은 불교의 대표적 신장상으로 불법을 수호함과 동시에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문두루비법이 펼쳐지면 신장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구름을 타고 날아가 적들을 물리친다. 탑에 새겨진 신장상들은 지금도 금방 튀어나올 듯이 현실적으로 새겨졌을 뿐 아니라 붓으로 그린 듯이 섬세하게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김유신과 김술종은 명랑이 사천왕사를 지어 당나라 대군을 방어한 법력을 지켜보고, 왜군들이 신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경계지점에 호국사찰을 짓는데 직접 나섰다.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를 막기 위해서는 사천왕사가 제 몫을 하고 있지만 왜군을 막기 위해서는 별도의 군사적 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원원사를 서둘러 건립했다.사천왕사는 양지스님과 명랑법사가 법회를 이어가고, 원원사에는 명랑의 제자 안혜와 낭융 등이 주지하며 호국불법을 펼치게 했다.성덕왕 18년인 719년에 왜병들이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해왔다. 당나라를 섬기면서 왜나라와는 교류를 단절하고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명랑으로부터 술법을 이어받은 안혜와 낭융 등이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 이들의 술법은 법력이 약해 왜군 절반은 바다에서 침몰했으나 절반은 육지로 올라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관문성: 성덕왕은 원원사의 법력을 보완하기 위해 치술령 줄기를 따라 울산 바다로 이어지는 띠처럼 12㎞의 장성을 쌓았다. 산과 산을 잇고, 계곡을 메워 성을 길게 쌓아 신라의 만리장성이라 불렀다.성덕왕은 백성들의 안위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성덕왕은 궁궐 내부에서 김순원과 김순정 형제가 득세해 온갖 모략을 펼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리를 하지 못했다.단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수시로 평복으로 갈아입고 암행에 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필요한 정책들을 입안해 실천하곤 했다.울산과 양남지역 등의 동해안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역적으로 방어벽을 쌓아 올렸다. 만리장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이 4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덕을 등지고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외벽에서는 15m 이상 높았지만 내벽에서는 대부분 쉽게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쌓아 성을 방어하기에 쉽도록 했다.-성덕왕 18년 대규모 군함을 끌고와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병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병들의 목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꺾어버리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적의 화살과 칼질을 막는 갑옷도 입지 않았다. 머리에 절간의 화부가 두르는 두건을 질끈 두르고 여자라 할 정도로 날씬하게 허리에 끈을 묶고 있었다.기림사 광유선승의 절기를 이어받은 유천이었다. 유천은 김유신과 천관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천관이 몰래 낳아 기른 김유신의 아들이다. 유천은 본래 자질이 뛰어난 데다 기림사에서 글공부와 무학을 깊이 있게 갈고 닦아 성취가 높았다.유천은 기림사와 골굴사로 이어지는 혈사에서 우연히 광유선승의 깨달음을 얻는 기연으로 환골탈태했다.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지경에 이르는 도학을 깨우쳐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다.천관이 죽음에 이르러 유신과의 관계를 차분히 일러 주었다. “네 아버지는 나라의 기둥이신 김유신 장군 이시다.”유천은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에 품고, 김유신 장군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매초성전투에 참가해 먼발치에서 싸움에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유천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는 아버지와 해후했다. 이어 아버지가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 화부로 들어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묵묵히 이어갔다. 왜구들은 유천의 용보다 크고 원귀와도 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백 년 간 원원사와 관문성 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제2의 지구·목자의 별·청록빛 서늘한 행성…태양계 행성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던데?

너무 굳어져 ‘관용적 표현’이 자연스럽다. ‘샛별’처럼 반짝이는 누군가의 눈망울이 그랬고 둘레를 감싸 도는 고리문양에 흠뻑 도취된다.또 SF영화의 단골배경이 되기도 푸른 빛의 상징쯤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태양계를 둘러싼 행성은 개별로 가진 사연들이 있단다. 물과 공기의 유무에서부터 생명체의 생존 여부, 지구에서는 생각하지도, 구태여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행성만의 고유 사례와 형태, 정체성을 비록 신비롭지만 그저 신변잡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수성태양의 온도는 1억5천만℃를 육박한다. 물론 태양 전 방위의 평균 온도는 아니다. 핵 중심을 기준으로 ‘핵융합 반응’에 의해 발발하는 최고치다. 오만했던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를 일거에 녹여버렸던 태양의 열정에 ‘수성’은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태양과 수성과의 거리는 5천791만㎞다.그렇다고 수성이 가장 뜨거운 행성이라고 하기 엔 어폐가 있다. 사실 켜켜이 쌓인 이산화탄소로 인해 열 순환이 이뤄지지 않는 ‘금성’이 한 걸음 떨어져 있음에도 갑절로 뜨겁다. 반면 수성은 태양과 근접해 있으나 열의 원활한 방출로 인해 금방 식어버린다.사실 수성 관측은 타 행성에 비해 여의치 않다. 태양과 워낙 붙어있다 보니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시간을 피한 일출과 일몰시간에만 그 자태를 드러낸다. 형태상 싱크로율을 따져보면 ‘달’과 가장 유사하다.수성은 작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기준으로 해서다. 전체 질량은 지구 대비 5% 내외 수준이지만 밀도로 따지면 100% 가까이 지구와 일치한다.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기온은 변화무쌍하다. 흔히들 말하는 ‘일교차’란 수성에서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영하 200℃에서 영상 450℃까지 이른바 고·저의 극점을 각각 달린다.이유는 간단하다. 수성에는 공기가 없다. 그리고 자전 속도 또한 0.003㎞/s로 느리다. 공기가 없으니 당연히 눈·비와 같은 대기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씻겨 내려가는 과정이 없다 보니 운석 간 충격으로 발생한 구덩이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구덩이가 바로 ‘크레이터’다.이를 수치화해보자. 수성의 자전 속도를 기준으로 주기를 나눠보면 59일 정도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24시간, 하루인 점을 감안해볼 때, 수성의 하루는 60일 가까이 되는 셈이다. 참고로 수성의 1년은 90일 정도다. 다시 말해 수성에서의 일출과 일몰은 지구 입장에선 2년 가까이 걸리는 꼴이다.조선시대에는 수성을 ‘진성’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특이하게도 수성을 두 개의 행성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새벽의 수성을 ‘아폴로’, 밤에 보이는 수성을 ‘헤르메스’라고 각각 칭했다고 전해진다. ◆금성흔히들 아름답거나 예쁜 눈을 두고 ‘샛별’ 같다고 한다. 샛별의 원주인이 바로 ‘금성’이다. 이름값을 하듯 금성의 또 다른 이름은 미의 여신 ‘비너스’다. 그리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금성은 어두운 우주 험로를 비춰준다고 해 ‘길라잡이’, ‘목자의 별’ 등으로 통칭된다.위에서 언급했듯 금성은 이산화탄소의 결집체다. 그렇다 보니 천체 망원경으로는 관측이 쉽지 않다. 하지만 절기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달과 같이 금성 또한 그 형태를 달리한다. 물론 뿌연 점 정도로 보이는 게 맹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금성의 관측을 위해선 긴 파장의 전파 기술이 필수다.금성도 지구에 비하면 소규모다. 지구 대비 약 700㎞ 정도의 작은 크기다. 금성과 지구는 가까운 듯 반대다. 지구와 가장 근접한 위치까지 접근하는 행성이자, 지구와 달리 서쪽에서 해가 뜨는 특징을 보인다. 금성의 하루는 지구의 반년을 훌쩍 넘는 250여 일이며 묘하게도 공전보다 자전의 시간이 더 길다. 이것은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화성영화 ‘마션’을 비롯한 각종 공상과학 영화의 주요 무대다. 그도 그럴 것이 화성의 또 다른 정체성이 바로 ‘제2의 지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사(NASA)는 화성에 흐르는 물줄기를 공식 인정·발표했고 이로 말미암아 대체 지구의 선봉장쯤으로 인식되고 있다.하지만 화성 역시 공기량은 절대 부족이다. 대기가 모자란 이유는 턱없이 작은 중력이 주요 원인이다. 화성의 중력은 지구의 40% 수준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1t 트럭이 화성에 간다면 400㎏를 넘기지 못할 정도다. 실제 화성의 평균 온도는 영하 90°C에 육박한다. 공기가 없기에 당연히 열을 머금을 수 있는 여건은 전무하다.화성의 컬러 이미지는 붉다. 열정적이자 선동성이 짙다. 그렇다 보니 고대 그리스에선 화성을 ‘아레스’라고 불렀다. 아레스는 전쟁의 영웅이자 신으로 상징된다. 화성의 하루는 제2의 지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지구와 대동소이하다. 40분 정도 더 길다고 보면 된다. 다만 화성에서의 1년은 지구로써는 2년이다. 공전 주기가 2배인 셈이다. ◆목성‘자이언트 행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태양계 행성 중 가장 크다. 그리고 무겁다. 지구 기준으로 부피는 자그만 치 1천400배를 훌쩍 넘긴다. 하지만 부피 대비 질량은 작은 편이다. ‘암석형’인 지구와 달리 목성은 ‘뜨거운 가스형’이기 때문이다.목성에는 거대한 붉은 포인트가 나타난다. ‘대적반’이라고 불리는데, ‘적갈색 소용돌이’라고 흔히들 부른다. 지구의 5배나 되는 큰 저기압의 구름 소용돌이로 대적반은 지구 2개를 포함시킬 만큼의 크기다.목성의 자전 속도는 태양계 행성 중 단연 수위다. 약 12.6㎞/s로 목성의 하루는 10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다. 목성의 형질은 기본적으로 기체로 구성돼 있다. 그렇다 보니 태양과 마찬가지로 ‘차등 자전’을 한다. 차등 자전은 한 천체 내 위치나 거리에 따라 자전주기가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목성은 그 크기만큼이나 많은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위성 수만 해도 63개에 이른다. 다른 말로 ‘목성계’라고도 부르는데 이 위성들은 크게 목성의 인력으로 인해 생성된 ‘불규칙 위성’과 목성의 탄생과 아울러 형성된 ‘규칙 위성’으로 나뉜다. ◆토성·천왕성·해왕성우선 환상적이다. 통상 행성을 떠올리거나 이미지화할 때 가장 먼저 각인되는 것이 바로 ‘토성’이다. 지구보다 10배가 큰 토성이 이처럼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토성을 감싸고 있는 ‘띠’가 그것이다.토성의 띠는 다른 말로 ‘고리’라고 하는데, 이는 주변 소행성의 잔해물이나 먼지, 얼음 조각들이 모여 생성된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참고로 토성의 고리와 같이 선명하지 않을 뿐 목성과 해왕성에도 황토색, 얼음조각 등으로 둘러싸인 고리를 각각 지니고 있다.천왕성의 캐치 프레이는 ‘청록빛깔의 서늘한 행성’이다. 이는 태양빛의 적색 파장을 흡수, 이로 인해 청· 녹색 파장들의 많은 양을 반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의 한 천문학자로부터 발견된 이 행성은 평균온도 영하 215°C를 유지할 만큼 추운 행성이다. 천왕성의 특이점은 자전형태로 살펴봐야 한다.일반 행성의 자전방향은 서에서 동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공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천왕성의 자전축은 마치 누워있는 듯 기울어져 있어 자전과 공전의 방향이 반대로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천왕성을 ‘거꾸로 행성’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해왕성은 행성계의 막내다. 최근 명왕성이 작은 크기와 궤도의 불규칙성을 이유로 사실상 행성계에서 퇴출된 이후 해왕성은 명실공히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으로 이름을 올렸다.해왕성은 푸르다. 그 이유는 공기 중에 포함된 ‘메테인’의 영향인데, 메테인은 탄소 하나와 수소 네 개로 이뤄진 탄화수소, 알케인 화합물을 의미한다. 흔히들 ‘메탄’이라고도 부른다. 해왕성 표면에는 ‘대흑점’이 있는데 이는 해왕성에서 일고 있는 ‘반 시계 방향’ 의 거대 폭풍이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매캐한 메탄가스와 흡사 ‘블랙홀’과 같은 대흑점이 해왕성을 ‘아름다운 행성’으로 꼽는 이유가 된다. 그저 ‘서글픈 인생’을 빗대는 듯하다. 마치 멀리서 보면 ‘희극’이되 가까이 살펴보면 ‘비극’인 듯 말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건조한 가을철, 피부건조증 주의

피부는 대개 지성과 건성으로 나눈다.지성피부는 피지선의 분비가 왕성해 피부표면에 기름기가 많고 번들거리며 여드름이 잘 생기는 피부다.건성은 피부가 건조하며 각질이 일어나고 트기 쉬운 피부로 특히 팔, 다리의 바깥쪽이 건조되기 쉽다.가을 겨울철에 주로 문제가 되는 피부는 건성피부이다.지성인 사람도 부위에 따라서는 피부 건조증세를 보일 수 있다.일반인들은 흔히 피부가 거칠어지면 건조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거친 정도와 건조함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엄밀하게는 피부가 건조하다는 것은 각질층의 수분함량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피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각종 유해물질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고 인체내부의 수분과 전해질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다.세포는 60~70%가 수분이므로 수분이 소실되면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수분유지를 위해 피부는 각질화과정을 통해 약 10㎛ 두께의 각질층을 만든다.각질층은 견고한 단백질로 기와모양의 세포와 이를 둘러싼 기름 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기름 층이 수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 각질층이 파괴되면 피부를 통한 수분손실이 15~20배 증가하게 되며 가려움증이 발생한다.한번 파괴된 각질층은 해부학적인 복구가 일어나는데 1-2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자주 때를 미는 것은 가려움증과 피부염 발생의 첩경이라 할 수 있다. ◆지방막 습윤보존도 중요환절기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수록 피부의 지방막이 결핍되고 습기가 부족하면 피부각질층이 거칠어진다.거칠어진 부위가 자주 찬바람에 노출되거나 물에 젖으면 피부는 쉽게 트고 갈라지게 된다. 심해지면 피나 진물이 나고 세균감염을 받게 되면 염증이 일어난다. 예방을 위해서는 피부의 습윤과 지방막을 위한 크림 등을 발라준다.피부의 적절한 상대습도는 60~70%이나 대부분의 생활 및 업무공간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 피부건조의 또 하나의 악화요인은 잘못된 목욕습관이다. 흔히 목욕은 피부에 수분을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비누 및 때밀이 습관 때문에 목욕 후 급격히 수분을 상실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가을은 건선 악화 계절건선의 원인은 아직 불명확하나 발병소인이 유전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외상, 감염, 내분비인자들, 기후 및 정서적 긴장 등의 유발인자가 관여한다. 또 병인에는 피부조직 자체의 구조적 변화와 생화학적 변화 및 환자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면역학적 변화가 원인으로 작용한다.건선의 증상은 은백색의 인설로 덮여있고 경계가 뚜렷하며 크기가 다양한 홍반성 구진을 특징으로 때로 가려움증을 수반하는 것.병변은 서로 융합돼 커지며 때로는 전신의 피부를 침범하는 수도 있다. 병의 경과는 다양하여 예측하기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만성이며 재발이 빈번하다.건선이 발생되지 않는 부위는 없으나 특히 외부의 자극을 빈번히 받는다고 생각되는 팔꿈치, 무릎, 둔부, 두피, 그 외 사지의 바깥쪽에 많이 발생한다.계절적으로 자외선이 강한 여름에 호전됐다가 자외선이 적고 습도가 낮은 겨울철에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심한 정서적인 자극을 받는 상태에서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만성 재발성질환이므로 계절적 요인, 외상이나 감염, 정신적 긴장 등의 유발인자들을 염두에 두어 예방하거나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건선은 자체의 다양한 양상과 경과에 따라서 치료법도 다양하다.과거 또는 현재에 사용되는 치료의 작용기전은 대부분 건선으로 증가된 표피의 과형성을 억제하는 것이다.건선의 치료는 영구히 치유를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능한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회복을 의미한다.일반적으로 체중이 과다한 환자는 체중을 줄이면 치료에 도움이 되고 급성기에는 가능한 한 정서적 긴장을 줄여야 한다. ◆올바른 목욕 상식 중요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1주일에 1회 정도 목욕탕에 가는 정도였다. 이후 아파트가 대량 보급되고 24시간 온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하루에도 1~2회씩 목욕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또 과거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1주에 1회 정도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본격적인 목욕도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피부는 대개 과도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가려움증과 건조증 나아가서 습진증상까지도 나타나게 된다.각질층이 한번 손상되면 완전 복구에 1~2주의 시간이 걸리므로 때를 심하게 밀었을 때는 1~2주간 피부 관리에 신경을 쓰고 목욕을 조심해야 한다.특히 노인의 경우 피부 건조가 심하게 올 수 있으며 팔다리의 바깥쪽은 가장 건성습진이 잘 나타나는 부위이므로 때를 밀지 않도록 한다.건조해지는 가을철에는 목욕을 주 2~3회로 한정하고 목욕 시간도 1회에 15분 정도 해야 한다.특히 중년 남성은 피로회복의 차원에서 매일 뜨거운 온탕 목욕이나 사우나를 즐기는데 이것은 피부보호막을 손상시켜 가려움증을 유발하고 피부노화를 촉진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세안 시에도 너무 더운물 보다는 미지근한 온수로 마지막엔 찬물로 헹구는 것이 피부노화를 막는 길이다. ◆피부 가려움증의 가정요법-떼를 밀지 말고 미지근한 욕탕이나 샤워하며 항상 피부를 차게 한다.-입욕제나 자극이 강한 비누는 사용하지 않는다.-피부가 지나치게 건조할 때는 손에 바르는 로션을 바르거나 목욕 후 스킨오일을 바른다.-하의는 면제품을 사용하고 모직이나 나일론은 직접 피부에 닿지 않도록 한다. 도움말=민복기 올포스킨피부과 대표원장(대구시의사회부회장, 대구·경북피부과의사회장)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4명 중 1명 평생 한 번 이상 경험…팽진 원인 찾아 없애야

-고운미 피부과 김호연 원장 두드러기는 4명 중 1명이 평생 한 번 이상 경험하는 흔한 질환이다.두드러기의 진단은 임상 증상만으로도 비교적 쉽게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만성 두드러기는 진찰 당시 팽진을 관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자세한 병력 파악해 진단하거나 평상시에 발생하는 두드러기를 찍은 사진으로 진단하기도 한다.◆두드러기의 증상두드러기 증상은 벌레에 물렸을 때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은 팽진이 특징적이다.팽진은 피부의 진피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부종에 의한 것으로 부종이 진피 상부에 국한될 경우에는 두드러기로 나타난다.부종이 심부 진피, 피하, 점막하 조직에 침범하면 맥관부종이 생긴다.다양한 크기의 중심부 부종과 주변의 홍반, 가려움 혹은 따끔거리거나 작열감이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일반적인 두드러기는 보통 30분에서 24시간 안에 없어지거나 호전되기 때문에 실제 병원을 찾은 당시에는 두드러기 증상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만성 두드러기란?편의상 두드러기는 급성과 만성으로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되다가 완전히 소실되는 경우를 급성 두드러기, 6주 그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만성 두드러기라고 합니다.매일 발생하는 지속형, 불규칙한 간격으로 발생하는 간헐형, 특정한 자극에 대해 일관되고 재현 가능하게 유발되는 유발성, 이러한 유발 요인이 없는 특발성 두드러기로 구분한다.◆두드러기의 원인각종 음식물과 꽃가루나 먼지 같은 흡입제, 세균이나 진균, 바이러스 같은 감염증,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나 방사선 조영제 등의 다양한 원인이 있다.찬 공기나 찬물 등 차가운 온도에 반응하는 한랭두드러기, 열이 가해지는 부위에 발생하는 열두드러기, 무거운 물건을 팔로 들거나 졸리는 양말이나 속옷 등의 압박에 의해 발생하는 압박두드러기도 있다.햇빛이 원인인 일광두드러기와 물이 닿는 부위에 발생하는 수성두드러기로 구분하기도 한다.◆두드러기 치료두드러기 치료의 기본 원칙은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거나 피하는 것. 그러나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여러 가지 대증요법을 시행한다.항히스타민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사용한다.전통적인 1세대 항히스타민제는 졸림이나 입마름 등의 부작용이 컸으나 최근에 개발된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효과는 유사하나 부작용이 적다.항히스타민제는 증상에 따라 단독 혹은 복합으로 투여한다.두드러기의 급성 악화나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단기적으로 전신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기도 한다.항히스타민제에 반응하지 않는 만성 특발성 두드러기에는 여러 가지 면역 조절제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만성 두드러기는 드물지 않은 질환이며 수년간 지속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두드러기는 증상이 소실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치료 용량을 유지하며 증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장기간의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경우 부작용이 적으면서 효과적이고 안전한 약제를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따라서 조기에 피부과 전문의의 진료와 상담을 받고 치료 방향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1)동부

경주는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도시로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문화재로 넘쳐나는 노천박물관이다. 명실 공히 경주는 우리나라 역사문화관광 1번지다.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2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경주의 역사문화유적과 빼어난 풍광, 문화관광 자원 등이 풍부하다을 자랑하려면 끝이 없다.경주의 역사문화 관광자원을 동, 서, 남, 북, 중부 등 5개 권역으로 나눠 소개한다.경주의 동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단지로 1970년대에 조성된 보문관광단지가 위치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중심으로 형성된 토함산, 해파랑길로 이어진 동해안도 포함된다. 보문동, 불국동, 감포읍과 양남·북면이 동부지역이다.1. 불국사와 석굴암경주 관광의 대명사로 부동의 관광1번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다.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세계의 문화자산이다.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했다.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돔 위에 흙을 덮은 석굴 형식이다. ‘돌로 비단을 짜듯 감실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말해주듯 거친 화강암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조각은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백미로 손꼽힌다.2. 경주보문관광단지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관광단지로 숙박, 오락, 문화체험, 학술대회, 박물관, 식당 등 다양한 위락시설이 결집해 있는 관광의 종합선물세트장이다. 보문호반산책로는 다양한 절경을 즐길 수 있는 힐링타운의 결정체다. 콜롯세움, 경주자동차박물관, 한국대중음악박물관, 화폐박물관, 테디박물관, 솔거미술관, 화백컨벤션센터 등의 문화자산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경주월드에서 경주엑스포와 블루원으로 이어져 동부사적지와 경주 관광1번지를 다툰다. 국내 최고 수준의 5성급 호텔(4천600실)들이 보문호수를 에워싸고 있다.3.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지구촌을 하나로 이어주는 문화체험의 장으로 운영되는 힐링공간이다. 황룡사 9층목탑을 형상화해 건축한 경주타워, 미술계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 상시 전시되는 솔거미술관, 시계공원, 세계화석박물관, 상설 문화전시 공연장 문화센터, 백결공연장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경주의 브랜드공연 플라잉과 에밀레 넌버벌공연이 상설 운영되고 있다.4. 기림사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중창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국찰로 불국사를 말사로 두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승병들의 본부로 기능했던 응진전이 아직도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경내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대적광전을 비롯해 목탑지, 삼층석탑과 건칠보상좌상(보물 제415호)등의 문화유적이 많다.5. 골굴사신라시대 인도의 광유선사가 수도하며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있다.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보물 마애여래좌상이 눈길을 끈다. 원효대사가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을 미루어 골굴사의 위치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지금은 선무도와 템플스테이로 고정적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해외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6. 나정고운모래해변감포의 지정해수욕장이다. 넓은 백사장의 잔잔한 모래와 동해의 청정해역, 여유 있는 주변 공간과 인근에 편의시설이 다양하다.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해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해수탕이 있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해수탕 옆은 주차공간과 송림이 개방되어 있다. 또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다.7. 문무대왕릉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은 백성을 위한 선정으로 오래 기억되고 있다. 문무왕릉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 가운데 무덤을 조성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으로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기둥 모양의 바위들이 십자형 수로를 이루고 있으며,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바닷물이 잔잔하게 흐른다.8. 감은사지삼층석탑감은사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직접 터를 잡아 건축물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들 신문왕이 부왕에 대한 효심으로 완성했다 하여 감은사로 이름이 붙여졌다. 건축물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게 수로를 조성해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마주보고 서있는 삼층석탑은 안정감과 상승감이 동시에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양식이다.9.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읍천항 벽화마을 입구에서 하서항까지 해안선을 따라 왕복 3.4㎞ 구간의 파도소리 길은 곳곳에 아름다운 해안 풍경과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부채꼴 주상절리를 만날 수 있다. 출렁다리와 다양한 야생화들이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꾸민다. 전망탑이 세워져 한 눈에 주상절리 절경을 감상하면서 동해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10. 감포깍지길감포읍에서 개설한 스토리를 입혀 조성한 ‘감포깍지길’은 대본리에서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걷거나, 내륙쪽의 볼거리들을 아울러 둘러볼 수 있는 탐방로가 아름답다. 해안길, 읍내골목길, 바닷길 등 8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다. 도로로는 감포항 활어직판장~솟대길 감포시장 등으로 이어지는 4구간을 추천할 만하다. 해변을 끼고 조성된 산책로에 용굴, 해국 등이 신비감을 주는 풍경을 선사한다. 감포항을 지나 동해안으로 쑥 들어간 소나무숲과 감은사지삼층석탑을 모델로 만든 등대가 있는 송대말도 인기 탐방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귀족 권력 다툼에 13세의 어린 왕은 왕비마저 빼앗기고

신라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 효소왕이 702년 17살의 나이로 죽자 성덕왕 또한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성덕왕은 35년간 왕위에 있었다. 전쟁이 없어 신라 중기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로 평가되는 시기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개발했다. 그러나 형 효소왕이 17세에 사망하고, 성덕왕도 세자 책봉의 과정 없이 어린 나이에 국인들의 추천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의한 왕손들이 자리에 오르고 내렸던 것으로 국정이 귀족들에 의해 움직여 왕권은 약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성덕왕이 첫 번째 왕비를 내치고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성덕왕의 아들 34대 효성왕도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김순원의 권력이 조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은 성덕왕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의 본래 이름이 중경이었다는 기록과 성덕왕의 첫 번째 세자 중경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성덕왕과 수로부인에 대한 삼국유사를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김교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는다.◆삼국유사: 성덕왕과 수로부인-성덕왕: 제33대 성덕왕 때인 신룡 2년 병오년(706)에 벼가 알곡을 맺지 않아 백성의 굶주림이 심했다. 정미년(707) 정월 첫날부터 7월30일까지 백성을 구하려 세곡을 풀었는데, 한 사람당 하루 3되씩을 기준으로 삼아 나누어주었다. 일이 끝나 계산해 보니 합계 30만500석 이었다.왕은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를 짓고, 인왕도량을 7일간 베풀면서 대사면을 내렸다. 처음 시중직을 만들었다.-수로부인: 성덕왕 때였다.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 바위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데 높이가 1천 길이나 되었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어 공의 부인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 없나요?”“사람의 발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종들이 그렇게 말하고 모두 손을 내저었다. 곁에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서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이틀쯤 길을 간 다음이었다. 또 바다 가까이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바다 용이 잽싸게 부인을 끌어다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공은 뒹굴며 땅을 쳤건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옛사람의 말에 ‘뭇 입은 쇠라도 녹인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한 놈이라도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가는 고충을 겪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교각의 새옹지마김교각은 통일신라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타고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시대는 짧았다.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 백성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농업과 상업 등의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효소왕을 17세에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다시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이찬 김순원은 일찍이 자신의 딸 소덕을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내보냈다. 다음해인 717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성덕왕은 집권 7년을 넘어서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으로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지역을 직접 돌아보는 행보를 자주 가졌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결국 왕비를 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태자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성덕왕은 김순원 세력의 정치적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태자인 아들 중경의 생명이 위험함을 직감하고, 왕은 중경을 내실로 불러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아들아, 아비가 못나 네 신병을 편하게 돌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비밀호위 일곱을 각자 너로 분장해 중국으로 피신하게 할 터이니 그중 하나와 승려로 위장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다시는 신라로 돌아올 생각도 말고.”어머니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본 중경은 왕인 아버지의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바라보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산소에 절을 올린 중경은 호위무사 김진과 함께 유람하듯 오히려 추적자의 뒤를 밟으며 중국으로 도망가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중경의 뒤를 추적하던 김순원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중국 경계지역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더이상 추적하지 마시오. 나는 살아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중경’이라는 목간을 받아들었다. 김순원도 일곱 갈래로 추적했던 대원들이 같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자 추적을 포기했다.성덕왕은 거짓 신분을 위장한 시신을 화장하고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순원 세력도 태자에 대한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태자의 사망 소식을 공식화하는데 동의했다. 이어 자신의 딸을 소덕왕후로 삼게 했다. 김순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심해져 성덕왕이 죽자 소덕왕후의 아들을 34대 효성왕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다른 딸을 효성왕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결혼해 왕비로 삼아야 했다.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어 도망할 때 입었던 승복을 그대로 걸치고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법을 전파하는데 열중했다. 김교각의 명성이 지장보살로 널리 퍼지면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김교각은 794년 99세 되는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하고 참선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그의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되었다.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아직도 그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다.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어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중국의 신도들이 제작한 입상으로 고향 땅 경주로 돌아와 대중을 만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나에게 맞는 렌즈로 시력 교정 스타일리시한 패션은 덤으로 이제는 스마트까지 갖춘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안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 사양’이었다. 자신의 눈 건강이 적신호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양 부끄러움마저 느껴야 했다. 학창시절 안경을 낀 친구를 상대로 소위 ‘안경 잽이’라는 속어를 남발하던 그때는 분명 그랬다.오로지 ‘시력교정’을 위함이었다. 눈 상태에 맞게 ‘볼록렌즈’냐, ‘오목렌즈’냐, 또는 시력에 맞춘 렌즈를 찾아 두께 감을 조정하는 ‘반 의학적’ 요소, 더할 나위 없이 그 정도였다. 안경의 용도란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리고 렌즈를 감싸는 테의 활용성은 말 그대로 렌즈를 보호하는 ‘Zip’의 역할에 불과했다.4차 산업혁명의 시류에 안경 산업도 더불어 유영하고 있다. 시력 보정의 원초적 벨류를 넘어 패션, 레저, 문화, 3D, 증강현실(AR)에 이르기까지 안경의 확장범주는 무한대다. 침대는 과학이고 스포츠도 과학이라는데, 안경을 과학과 분리시켜버린다면 영 어색할 노릇이다. ◆조선시대 불경의 상징안경의 근원을 서양의 네로 황제냐, 고대 중국에 이르냐에 따른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사에 의거한 추정일 뿐 정설로 비춰 볼 때 안경의 시발은 이탈리아로 본다. 그에 따른 근거는 렌즈의 어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렌즈는 이탈리어어 ‘렌티지에’서부터 비롯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우리에게 익숙한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는 13세기와 18세기 무렵에 각 발명됐다. 하지만 안경의 대중성은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유럽 전역을 강타하면서 수천만 권의 책자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과 궤를 함께한다.책의 기하급수적 공급과 맞물려 인쇄본을 접하려는 수요 역시도 동반 상승의 조짐을 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시력의 중요성을 간과해 온 사람들도 사물의 분간 여부를 넘어 독서라는 선명성을 띤 채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우리나라 안경의 시초는 어디서 비롯됐을까.그 시작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의 안경은 중국식 어투로 ‘애체’라 불렸다. 또 다른 말로는 당시 페르시아어 ‘왜납’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왜납이 구전을 통해 지금의 안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고증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사실 조선시대의 안경은 ‘불경’의 상징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담배’와도 비슷한 예법이 적용되는데 자신보다 지위나 연령이 높은 사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안경 착용이 엄격히 금지됐다.임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적인 행사나 회의 자리에서는 군주 역시도 안경을 벗고 참석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옛 조선의 안경문화는 이렇듯 소극적이었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우리 역시도 수백 년에 걸친 안경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그에 따른 사료가 미흡할 수밖에 없던 이유, 바로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다. ◆3D안경의 모토는 입체감과 모방안경렌즈의 원리는 ‘거리 콘트롤’로 설명할 수 있다. 그 기준은 통상 눈의 망막과 수정체의 위치 및 거리로 두는데, 개별로 지닌 눈의 특성에 따라 렌즈를 선택, 그 렌즈가 눈의 거리와 반사각 등을 잡아 시야를 밝게, 아울러 넓혀주는 것이다. ‘원시’와 ‘근시’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원시는 보통 중년 이상의 연령대에서 주로 나타나곤 하는데, 말 그대로 먼 곳은 잘 보이되 가까운 사물은 선명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원시는 망막과 수정체의 거리가 짧아진 탓에 물체의 상이 망막 뒤편으로 맺힘에 따라 발생한다. 어르신들이 신문이나 가까이 있는 물체를 식별할 때 안경을 들어 보이거나 돋보기를 착용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 돋보기가 바로 볼록렌즈다.근시는 원시의 반대 개념으로 보면 된다. 먼 곳에 있는 물체가 흐릿하게 퍼져 보이는 현상이다. 이는 ‘난시’와도 비슷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근시는 수정체와 망막의 거리가 원시와 달리 멀어 그 중간에 상이 맺힌 상태를 의미한다. 다른 이유로는 수정체의 형태를 들 수 있는데, 수정체가 정상 대비 볼록한 형태를 띠면 이 또한 근시라고 판명한다. 근시 교정에는 오목렌즈가 이용된다.우리의 눈은 ‘입체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실물과 사진, 그리고 거울은 개별의 특성과 형태에 맞게 각자의 입체성을 다르게 표현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눈은 두 개고 사진의 렌즈는 하나이며, 사진은 사물의 입체성을 평면화하는 대신, 눈은 입체 본연의 구조를 온전히 수용해 낸다는 원리다.‘제2의 눈’으로 대변되는 안경에 입체감을 부여하려는 시도란 꽤나 고무적이었다. ‘3D’와 안경의 접점을 찾기 위한 그간의 노력은 바야흐로 ‘3D안경’이라는 아이덴티티로 발현되기에 이른다.3D안경의 모토는 입체감과 ‘모방’에 있다. 인간의 입체적 시각을 오롯이 재현한다는 것이 3D안경이 품은 기술력이다. 사람은 한쪽 눈만으로는 입체감을 느낄 수 없다. 바로 ‘시야각’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D안경 역시 양쪽 눈과 눈 사이의 거리 제어가 기술의 주요 포인트다.다채로운 3차원 이미지를 한데 결집시키기 위해선 사람의 좌·우 뇌가 동시다발적으로 입력돼야 한다. 그러한 설계가 이뤄질 때 양쪽 시각을 통해 투영된 이미지와 이벤트, 형태와 거리감 등을 현실감 있게 인식해 낼 수 있는 것이다.‘3D 영화’ 또한 비슷한 원리다. 안경 대신 카메라의 거리 각을 조정해낸 후 양쪽 카메라의 병렬적 이미지를 결집해 하나의 영상으로 비출 때 입체감을 품은 3D 스크린이 탄생하게 된다. ◆미래 안경은 ‘눈에 걸치는 옷’안경 산업과 4차 산업의 콜라보로 말미암아 다양한 형태와 용도를 띤 안경이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죽했으면 안경을 ‘아이웨어’, 다시 말해 ‘눈에 걸치는 옷’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안경은 과학이자 패션이며,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하나 쯤는 소유하고 있을, 약간의 과장을 보태 ‘공공재’적 성격마저 품고 있다.매운 여름, 유난히 눈이 시리다면 ‘선글라스’부터 찾는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공인이나 연예인서부터 내리쬐는 햇빛과 그 속에 담긴 자외선으로부터 내 눈을 보호하겠다는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선글라스는 휴대폰 만큼이나 수요량이 높은 ‘필수품’이 돼버렸다.이외에도 스포츠나 레저에 적합한 고글이나, 패션을 위시한 아이템으로의 각종 안경들, 그리고 전투상황이나 비행기 조종 등의 특수목적을 띤 기능성 안경에 이르기까지, 안경은 그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시류에 따라 그 종류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이제는 ‘똑똑한 안경’이다. 스마트의 이름을 딴 ‘스마트 안경’이 대중 속으로 잠입해 가고 있다. 스마트 안경에는 별도의 ‘이어폰’이 필요하지 않다. ‘골전도’의 기술력으로 음악과 동영상을 자유자재로 감상한다.전화를 할 수 있고, 안경의 위치를 파악한다. 시간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쯤 되면 스마트 안경의 형태에 관한 의구심이 들만도 하다. 인공지능의 기술이 투영된 스마트 안경의 외관을 한 번 떠올려보자.공상과학영화에서나 봄직한, 좋은 말로 그럴듯하되 부담스런 모양쯤으로 그려본다면 오산이다. 스마트의 정점은 ‘퍼블릭’이다. 대중적이며 보편화된 외형, 하지만 ‘웨어러블’의 기술력이 담긴 안경이야말로 스마트 안경의 진면목이라 볼 수 있다.설계도를 펼치지 않은 채 복잡한 배선을 정리한다. 수천 개로 얽혀있는 비행기 내부 전선을 쉼 없이 작업해 낸다. 대신 이 작업자는 설계도를 살피는 대신 안경을 착용한다. AR안경, 그 너머에 배선위치가 지정돼 있고 안내도를 판독해낸다. 그 덕에 작업속도는 30%가량 빨라졌고, 그에 따른 효용 가치는 기대 이상이다. 증강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다만 현실감을 십분발휘한 후 현실 아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세계 유수의 리서치업체에 따르면 2024년까지 안경 관련 산업군의 성장률을 연평균 5.1% 정도로 전망했다. 안경의 스마트화와 더불어 ‘패션 아이템’으로의 위치가 향후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는 방증이 수치화된 셈이다.대구를 일컬어 ‘안경의 도시’라고 한다. 이번 주말에는 ‘안경 거리’에서 데이트를 해보자. 더불어 내년에 열릴 예정인 ‘대구국제안경전’에 한번쯤 둘러보는 애향심을 발휘해봐야 할 때다. 대구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만큼은 안경이란 ‘수구초심’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

특정한 동작할 때만 어깨 쿡쿡 쑤신다면 ‘회전근개’ 손상 의심

어깨 통증은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꼭 경험을 해보기 마련이다. 어깨 통증이 다른 부위의 통증보다 유난히 발생 빈도가 높다.이 같은 이유를 설명하려면 관절에 대해 알아야 한다. 관절이란 뼈와 뼈가 연결되는 부분을 말한다.그렇다고 단순히 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뼈 사이의 공간에 윤활액이 차여있는 관절낭이 있어 관절 운동을 수월하게 해준다.하지만 뼈와 관절낭만 있다면 그 관절은 매우 불안정할 것이다. 관절 주위의 근육과 힘줄이 관절을 지지한다.이 중 어깨 관절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어깨 관절은 몸의 여러 관절 중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가장 다양하다.예를 들면 무릎이나 팔꿈치 관절은 굽히고 펴는 정도만 가능하다. 고관절도 여러 방향으로 운동이 가능하지만 가능한 운동의 각도 범위가 어깨 관절보다 훨씬 좁다.어깨 관절이 넓은 운동 범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어깨 관절을 구성하는 뼈 사이의 접촉 단면적이 좁기 때문이다.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어깨 관절은 견갑골과 상완골이 만나서 생기는 관절이다. 이 두개 뼈가 만나는 접촉 면적은 흡사 골프공이 골프티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매우 작다.이런 작은 접촉면 때문에 운동 범위는 더 넓어지지만 반대로 그만큼 어깨 관절은 불안정하다. 여러 어깨 주위의 근육들이 관절 안정성에 관여하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근육들이 회전근개이다.◆회전근개 손상회전근개는 어깨 관절을 이루는 두 뼈에 관절낭을 감싸듯 붙는 네 개의 근육이다. 불안정한 어깨 관절의 안정화에 가장 중요한 근육이므로 어깨에 가해진 외상이나 반복적인 어깨 사용에 의한 미세 손상에 의해 자주 다치게 된다.어깨 통증의 10-62%를 차지하고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라 빈도도 증가하는 추세다. 회전근개 손상의 가장 특징적인 증상은 특정 동작 시 발생하는 어깨 통증이다.회전근개는 네 가지의 근육으로 구성돼 있는데 근육들은 서로 다른 어깨 운동을 맡는다.그래서 특정 동작 시 발생하는 어깨 통증은 그 동작을 담당하는 근육의 손상을 의심할 수 있다.손상의 정도는 가볍게 염증이 있는 건병증에서부터 시작해 건의 부분 또는 전층 파열까지 있다.진단을 위해서는 다친 경험은 없는지 또는 일상생활에서 같은 동작을 자주 반복하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이학적 검사를 통해 각각의 회전근의 움직임을 유도해 통증이 유발되는지도 봐야 한다.이후 단순방사선 검사나 초음파 및 MRI 검사 등을 통해 손상 부위를 직접 볼 수 있다. 치료는 우선 통증의 조절을 위해 약물 또는 물리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물리치료는 핫팩이나 초단파와 같은 열치료나 전기치료, 고주파치료 등이다. 이만약 통증이 조절이 된다면 운동치료를 해야 한다.여러 운동 중에서도 특히 근력 운동이 회전근개 손상에서는 중요하다.하지만 근력 운동의 포인트는 회전근개 근육들을 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전근개 외에 어깨 관절의 안정성에 관여하는 근육들을 키워야 한다는 것.삼각근이나 승모근, 큰 마름근이 이 근육들이다. 근력운동을 통해 회전근개가 어깨 관절 안정화에 기여하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근력운동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이러한 치료로도 어깨 통증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어깨 부위의 주사치료와 심하면 경우 수술까지 고려해야 한다.◆오십견동결견 또는 유착성 관절낭염으로도 불리는 오십견의 사전적 정의는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전 방향 수동적·능동적 관절운동 제한’으로 ‘방사선학적 검사 상에서 이상이 없는’이다.1차성 오십견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2차성 오십견의 원인은 당뇨 등과 같은 전신질환이나 어깨 손상 등이다.오십견의 대표적인 증상은 어깨 관절의 모든 운동 방향의 운동 범위에서 수동적, 능동적인 제한이다.오십견은 매우 특징적인 자연경과 증상이 있다.초기(통증기)에는 관절 운동범위의 제한은 심하지 않으나 어깨 통증이 최대 관절 운동범위에서 발생하는 시기이다.이 시기가 지나면 진행기(동결기)가 오는데 이때는 통증보다 관절 운동 범위의 제한이 뚜렷해진다.주로 옆으로 들어 올리거나 바깥으로 돌릴 때 가장 심하다.이후 말기(해동기)가 되면 관절 운동 범위의 제한이 회복이 되고 통증 또한 나아진다. 오십견의 진단을 위해서는 오십견을 유발할 수 있는 외상 등의 인자들이 있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고 앞서 언급한 특징적인 증상들의 변화 추이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이후 영상학적인 검사를 통해서 유발인자 및 동반 질환도 검사해야 한다.치료는 우선 통증 호전을 위해 약물·물리치료를 하고 이후 통증이 조절이 된다면 운동치료로 전환한다. 주로 스트레칭 운동이 적용된다.모든 운동 방향에서 통증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스트레칭 운동을 해야 한다. 통증 조절이 쉽지 않는 경우 관절강내 주사를 맞기도 한다.◆석회성 건염석회성 건염은 어깨 회전근의 인대에 생긴 석회에 의한 염증이다. 석회성 건염의 통증이 앞서 설명한 두 질환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어 ‘환자들이 어깨에 불이 난 것 같다’고 할 정도다.‘잠을 잘 때 자세를 바꾸지를 못한다’, ‘어깨를 만지지도 못하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심한 통증 때문에 이학적 검사는 쉽지가 않으며 단순방사선 검사나 초음파 검사를 통해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대부분의 석회성 건염 경우 단순방사선 검사를 해보면 석회에 의해 생긴 하얀 음영이 회전근개의 인대가 있는 위치에 보이고 같은 부위를 초음파로 보면 뼈가 같은 음영이 관찰된다.석회성 건염의 치료는 통증치료를 위주로 한다.일반적인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시도해보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럴 때는 체외충격파 치료나 스테로이드를 이용한 주사치료를 해볼 수 있다.만약 이런 치료로도 통증이 조절이 안 되는 경우에는 굵은 바늘을 석회가 있는 곳에 위치시키고 생리식염수를 사용하여 석회덩어리를 파괴하는 세척흡인술을 해볼 수 있다. ◆어깨 통증의 재활운동어깨 통증의 재활운동은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이 있다.대표적인 스트레칭은 코드만 운동이다.의자와 테이블을 통증이 없는 팔로 잡고 몸을 지탱한 상태에서 아픈 어깨를 여러 방향으로 운동시켜 운동 범위의 제한을 회복하는 것.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건강한 어깨의 도움을 받아 관절 운동 범위 운동을 할 수 도 있다.수건을 이용한 운동이나 벽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다가가는 벽 오르기 운동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어깨 스트레칭 운동 중 하나이다.어깨 통증을 위한 근력 운동은 견갑골 안정화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회전근개가 아닌 어깨 주위의 근육들을 강화시키는 운동이다.스탠딩 로우 운동, 삼각근 강화 운동, 엎드려 수평 외전 운동, 견갑골 조절 운동 등의 대표적인 근력운동이다.도움말=대구 파티마병원 재활의학과 이병주 과장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영주시(하)

영주시는 유불문화의 본 고장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석사, 소수서원을 비롯해 무섬마을 등 전 지역에 걸쳐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사람을 살리는 산, 소백산 아래 자리해 천혜의 자연환경과 빼어난 경관으로도 유명하다.일교차가 큰 소백산자락에서 생산된 영주사과와 풍기인삼, 영주한우 등은 전국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또 냉장고섬유로 불리는 풍기인견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금선정(풍기읍)금계 황준량이 즐겨 거닐던 곳으로 퇴계학파 유학자였던 금계 황준량을 기리고자 지은 정자다. 정자 바로 위편에 드높은 푸른 절벽이 있고 절벽 앞에는 나지막한 폭포가 있어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는 사시사철 우렁차다.또 기암괴석으로 벽을 맑은 못이 배포되어 수면에 어리우는 정자 그림자가 그대로 한 혹 운모 그림같이 경관이 아름답다.뒤쪽 산 중턱에는 황준량이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다는 금양정사(경북유형문화재 제388호)가 있다. △용암산(안정면)안정면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해발 637m의 용암산은 안정면 봉암리에서 여륵리를 이으며 봉현면과 경계를 이루는 아담한 산이다. 갖가지 전설을 간직한 바위가 많고 산이 높지 않고 험하지 않다.산행길 전체에 소나무 숲 그늘이 이어져 가족·친지들과 함께 등산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돗밤실둘레길(이산면)돗밤실 둘레길은 이산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망월봉, 약수봉, 흑석사 옛길, 흑석사 제비봉 명학봉, 묘봉을 거쳐 이산치안센터로 이어지는 약 5.6㎞의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돗밤실의 어원은 마을주변에 졸참나무가 많아 굴밤마을로 알려졌다. 굴밤(도토리)은 돼지밤이라고도 불리며 윷판에도 나오는 도(돗)는 돼지의 옛말이다. 밤마을이 합쳐져 돗밤실로 불리며 코스 입구에 행복의 종과 제비봉과 명학봉 사이에 출렁다리가 있다. △영주호오토캠핑장(평은면)영주댐 아래에 위치한 영주호 오토캠핑장은 약 10만㎡의 면적에 캐라반 15동, 캐빈하우스 5동과 텐트을 설치할 수 있는 130면의 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인근에 영주댐 물문화관, 무섬 전통마을도 있다. 주변에 조성 중인 영주호 문화관광 체험단지가 완성되면 영주의 새로운 대표관광지로 자리잡을 수 있을것으로 전망된다. △무섬마을(문수면)‘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고 해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마을 주변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르는 대표적인 물동이마을로 민속문화재 제278호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있다.무섬마을은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매년 가을에 실시되는 무섬 외나무다리 축제는 많은 관광객들의 볼거리로 자리잡고 있다. △장말손유물각(장수면)장말손의 자는 경윤(景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조선 전기 문신으로 1467년 이시애 난때 예조좌랑으로 진북장군 강순을 따라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됐다.유물각에는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 홍패(보물 501호), 장말손 초상 (보물 502호), 장말손 적개공신교서 (보물 604호), 장말손 유품(보물 881호), 장말손 종가 고문서(보물1005호)가 있다. △국립산림치유원 다스림(봉현면)영주시와 예천군에 걸쳐 조성된 국립산림치유원은 숲에 존재하는 많은 환경요소를 활용해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시키는 산림치유를 목적으로 설립됐다.약 2천889ha의 면적의 숲 속에 데크로드가 설치돼 있다. 건강증진센터, 수치유센터, 산림치유문화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홍유한 선생 유적지(단산면)홍유한 선생 유적지는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차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홍유한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1784년보다 30여년 전에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평신도 가운데 신앙을 위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사람)로 알려졌다. 농은은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천주교를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대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부석사(浮石寺)(부석면)우리나라에서 13번째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는 세계인이 함께 보존할 가치를 가진 사찰로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다.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 낭자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와 무량수전, 조사당 등 국보 5점과 보물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저녁 무렵 낙조와 가을 은행나무 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소수서원(순흥면)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는 백운동서원이라고 했다.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요청에 의해 명종에게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사액을 하사받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어졌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주은 기자 juwuery@idaegu.com

제 사람 귀한 줄 알았던 죽지랑, 화랑 137인 거느리고 ‘득오’ 찾아나서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6세에 즉위해 어머니 신목왕후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나이가 어려 섭정으로 정치가 진행되면서 효소왕의 에피소드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 전해진다.효소왕은 즉위해 11년 만에 죽어 이렇다 할 업적은 없다. 낭산 동쪽에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확인되고 있지만 어머니의 주문으로 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망덕사 법회에서 진신석가와의 이야기, 만파식적 보물 잃어버린 것과 죽지랑, 부례랑 등 화랑들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효소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고, 33대 왕으로 동생 성덕왕이 즉위해 35년간 집권한다.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 이야기의 요약과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두 가지로 나누어 써본다.◆삼국유사: 효소왕대의 죽지랑제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 급간이 있었다. 이름을 화랑의 명부에 올리고 날마다 나오더니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득오의 어머니가 “당전 모량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발령했습니다. 서둘러 가야 할 길이 급해 낭께 사직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었지요”라고 답했다.죽지랑은 떡 한 바구니와 술 한 병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득오를 위로하러 갔다. 낭도 137인이 또한 의식을 갖춰 따르며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물었다.“득오가 어디 있느냐?”“익선의 밭에서 순서에 따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죽지랑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솔과 떡을 먹이려고 익선에게 시간을 달라 하면서 함께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익선은 완강하게 막으면서 내주지 않았다.마침 관원 간진이 퇴화군에서 세금 30석을 거두어 서울로 옮기다가 낭이 낭도를 귀중히 여기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익선의 꽉 막힌 태도를 답답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사지 진절이 타고 가던 말에서 안장을 풀어주자 그때서야 허락을 했다.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익선을 잡아 그 더럽고 추악한 때를 씻어 주라 하니, 익선이 도망가 숨어버렸다. 그러자 겨울에 익선의 아들을 잡아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어 죽게 했다.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데 때마침 온 나라가 전쟁통이라 기병 3천 명으로 지켜주게 하였다.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그 고개의 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거사 또한 공의 떨치는 기세가 매우 엄중함을 좋게 여겼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공이 삭주에 부임해 다스린 지 보름쯤 지나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어 더욱 놀라,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게 했더니 죽었다. 그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다” 하고, 다시 아랫사람들을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모셨다.아내는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태어나자 죽지라 이름 지었다. 어른이 되어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했다.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발전시켰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죽지랑과 망덕사-망덕사 유감: 망덕사는 경주시가지와 불국사역을 잇는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사천왕사와 마주보고 있다. 사천왕사터에서 동남산의 화랑교육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화랑교가 나오는데 다리 남쪽으로 펼쳐지는 논두렁 사이에 망덕사터가 있다.망덕사는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감추기 위해 갑자기 지은 호국사찰이다. 당나라 고종이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잇따라 실패하자 김인문과 함께 옥에 가두었던 박문준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다. 박문준은 당나라에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주 낭산 남쪽에 새로 절을 지었다고 들었다고만 대답했다. 고종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신라에 보냈다. 당으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사천왕사 남쪽에 새로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도착한 당의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안내했더니 그 사신이 문밖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하고 절로 들어서지도 않고 돌아섰다. 신라는 황금 천 냥을 주고 사신을 매수했다. 사신이 “신라에서는 과연 사천왕사를 지어 황수를 비옵디다”하고 거짓 보고했다. 새로 지은 절의 이름은 그 사신의 말대로 망덕사라했다.효소왕이 망덕사 법회에 참석했다.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왕에게 법회 참석을 부탁해 효소왕은 허락했다. 법회가 끝날 즈음 어렸던 효소왕이 스님에게 농담조로 “스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고 답했다.“스님은 돌아가시면 왕이 친히 공양하는 음식을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왕께서도 석가의 진신에게 정성을 바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 말하고 스님은 몸을 날려 남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효소왕은 크게 놀라 부끄러워하며 남산쪽으로 절을 하고, 스님을 찾아오게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스님을 찾지 못하고, 지팡이와 발우만 찾았다고 보고했다. 왕은 남산 비파암에 석가사를 세우고 스님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발우를 나누어 모셨다.-모량 참사: 죽지랑은 아버지 술종공으로부터 가전 무술을 이어받아 훌륭한 전사로 자랐다. 때문에 화랑도로 전쟁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죽지랑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법정과 함께 짝이 되어 김유신 장군의 전술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당나라를 몰아내는 매소성전투에서 죽지랑이 위험에 빠졌다. 이때 화랑 득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죽지는 득오를 끔찍하게 보살펴 주는 후원자가 되었다.삼국통일 이후 세력이 커진 모량의 익선이 화랑과 인재들을 포섭하면서 죽지랑의 군사였던 득오를 데려가 가둬 버렸다. 이에 격분한 죽지랑이 화랑들과 함께 모량으로 진격해 싸움을 벌였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 죽지랑은 상처 입은 몸으로 성으로부터 화랑과 군사적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익선이 도망가면서 그의 세력은 와해되고, 득오를 구해냈다.득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지랑이 상처를 입으면서 끝까지 싸움을 지휘한 데 감복해 더욱 충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중 나선 구조’의 신비로움…인류의 삶 한 단계 진전시키다

죽은 자도 말은 있다. 비록 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지만 죽은 이는 억울함을 남긴다. 그리고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음 아닌 ‘유전자’라는 매개로 말이다. 유전자는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현재를 토로하고 아울러 미래를 제시한다. 숨기고 싶어도 결코 숨겨지지 않는 유전자의 속성이다.유전자 감식의 시작은 1980년대 중반, 영국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 이 같은 감식 법은 강력범죄나 친자감정, 유해 발굴의 사안 등에 전 방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전자 감식이 범죄 판별의 첫 사례로 등극한 것은 1987년 미국에서부터였다. 이를 시초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유전자 감식의 신뢰도는 점차 제고되기에 이른다.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세기말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유전자 감식이 사건 현장 곳곳에 도입됐다. 당시 지존파 사건이나 삼풍백화점 참사 등 굵직한 사건에서 유전자 식별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유전자는 ‘명확성’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켜켜이 쌓인 ‘심증’이 모여 부정할 수 없는 ‘물증’으로 발현되는 셈이다. 그것은 유전자가 지닌 개별의 고유성에 기인한다. 유전자는 ‘우리’가 아닌 유일한 ‘나’이다. 이는 곧 진실과 마주할 시간을 유전자가 주선함을 의미한다. ◆이중나선 구조의 DNA‘DNA’ , deoxyribonucleic acid의 약어다. 흔히들 유전자와 DNA를 동일선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DNA는 핵산의 범주로 히스톤 단백질과 더불어 염색체를 형성, 유전자를 이루는 물질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전자가 ‘전체집합’이라면 DNA는 그에 속한 부분 요소쯤 되는 셈이다.DNA의 원리는 1950년대 초반 ‘이중나선 구조’가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밝혀진다. 이중나선은 유전자 간 콘트롤을 영위하는 DNA의 속성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모양이 마치 나선형 사다리를 세워놓은 것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우리의 정체성은 각자의 몸에 잠식돼 있는 ‘세포’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을 DNA를 통해 인지해 낸다.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염색체’를 지닌다. 그중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로 구성돼 있으며, 개별 개체가 품고 있는 유전 정보를 바로 ‘게놈’이라고 부른다.유전자는 바로 DNA가 품은 최소 단위의 게놈을 의미한다. DNA에는 총 4개에 이르는 염기가 포함돼 있는데, 염기의 형태에 따라 인간 개별의 다채로운 성질을 띠게 되는 것이다. 동일 유전자를 가진 형제일지라도 겉모습은 조금씩 틀리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DNA를 이용한 다양한 활용법빠른 결론을 내리자면 유전자는 인간 개별의 특성을 가장 정확히 체크할 수 있는 ‘나만의 산물’이다. 이에 각종 사건·사고 및 발굴 과정에서도 유전자 감식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사기법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대한민국과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동원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최근 손을 맞잡았다. ‘유해봉환사업’으로 명시된 이 공조 프로젝트는, 전쟁 중 상흔을 입고 행방이 묘연해진 양국 전사자의 신원 파악과 유해 발굴을 위해 개시됐다. 이를 위해 양국은 전사자를 상대로 한 ‘DNA 추출’ 프로세서 및 빅데이터 공유 등 ‘디지털 수사’ 전반으로의 협력체계를 구축했다.국방부는 최근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초병의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사전 등록됐던 초병의 유전자가 유해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됐고, 신원을 확보한 군이 군사분계선 인근에 잠들어 있던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해 냈던 것이다.수십 년간 그리움에 사무쳐야 했던 부녀의 극적인 상봉에도 유전자의 힘은 발현됐다. 30년 전 딸의 손을 놓친 후 하릴없이 이별을 맞이해야만 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딸의 생사라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관할 경찰을 통해 접수했다. 이후 전국의 경찰망을 활용, 타 지역에서 본인과 일치되는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후 딸과의 재회를 만끽할 수 있었다.범죄 해결 과정에서도 유전자 감식은 능동적 초동수사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발발한 ‘한강 토막 살인사건’의 수사 과정에서도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의 ‘유전자 합일 여부’가 주요쟁점으로 부각된 바 있다. 최근 전 남편을 살해·유기한 강력 사건 간에도 발견된 뼛조각의 유전자 식별 과정으로 말미암아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는 중심 단서로 대두되고 있다.위와 같은 강력 사건뿐 아니라 각종 절도사건 등에서도 현장 감식 중 범인이 남기고 간 타액이나 배설물, 담배꽁초 등의 흔적을 수집, 수집된 성분을 토대로 유전자 감식을 벌여 범인의 신원을 파악한다는 사례는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 접한 바 있다.우리의 안심 밥상을 책임지고 있는 먹거리 수사에도 유전자 감식의 성과는 실로 고무적이다. 특히 명절 등 대목을 앞둔 시점, 소고기나 계란, 달걀 등의 이력을 허위 기재함으로써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는 미리 채취해 둔 식품의 유전자 샘플을 바탕, 유통시장에 내놓은 상품과의 엄격한 비교·대조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처럼 식품 관련 유전자 감식 역시도 소비자들로 하여금 안전 먹거리 시장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나의 내부 정체성, DNA유전자 감식 자체가 특수성을 내포하다 보니 일반인들에게는 쉬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가까이 있어 친숙하지만 실생활에서 만큼은 일정 부분의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자소송’에 관한 사안만큼은 감식의 신변잡기적 성질이 일정 부분 통용된다.위에서 언급한 가족 간 상봉뿐 아니라 양육권을 갖기 위한 절차나 친자확인 등의 소송 관련이 바로 그것이다.몇 해 전 검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이 불거지면서 유전자 감식의 중요성이 다시금 대두되기 시작했다. 다만 99%에 달하는 유전자 감식 기술의 정확도에 관해 자칫 ‘사적 영역’을 ‘공적 범주’에 편입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그렇다면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감식의 절차는 어떠할까. 이는 예상외로 단순하다. 법리 다툼의 요지가 있는 특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메일 또는 유선으로도 감식을 위한 신청이 가능하다. 유전자 샘플은 우편 등을 통해 송달하면 된다.송달된 샘플은 외부 물질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고유장치에 보관된다. 온전한 상태로 보관된 유전자 샘플은 각종 시약을 활용, 추출해내고 유전자 개체를 확장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이후 확장된 샘플은 ‘유전자 분석기’로 보내진다. 분석기 내 장착된 ‘분광 장치’가 유전자 관련 정보를 취합해냄으로써 15개에 이르는 유전자 항목을 비교 및 대조하는 과정은 마무리되는 것이다.전문가들은 친자의 확정 수치를 99% 정도로 본다. 이 정도 수치라면 동일 염색체를 가진 가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감식 중 오류 발생의 경우는 과연 없을까. 전문가들은 단언컨대 “NO”라고 답한다. 굳이 (오류 가능치를)꼽아보자면 그 가능성을 80억~90억 분의 1 수준으로 내다보는 정도다.유전자 감식에 드는 비용은 예전 대비 상당히 줄어든 추세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독자적 기술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과거에는 유전자 감식에 필요한 시약을 미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해 왔다.하지만 최근 (시약의)국내 독자 개발을 성공해냄으로써 기존 100만 원에 달하던 감식비용이 현재 들어 15만 원 내외 수준으로 줄어든 결과를 낳았다. 개발 배경은 고액의 (유전자)감식 비용 절감을 위한 ‘DNA 감식 국산화 및 선진화 사업’의 일환으로 풀이된다.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나를 상징하는 ‘외부적 요소’라면 유전자는 나를 대변하는 ‘내부의 정체성’이다. 이름은 자의에 따라 개명과 개선 등이 가능하지만 유전자만큼은 그 어떠한 시류 속에서도 꼿꼿이 나를 대표해 간다.유전자는 예스러운 구호인 듯하나 ‘명랑사회’ 구축과 개개인의 인격과 자존감을 고취시켜 줄 주요 단서다. 우리는 수십억분의 하나를 뚫고 소중한 유전자를 받아낸 개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모두는 좋은 방향의 ‘이기적인 유전자’임이 틀림없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