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가을철, 피부건조증 주의

피부는 대개 지성과 건성으로 나눈다.지성피부는 피지선의 분비가 왕성해 피부표면에 기름기가 많고 번들거리며 여드름이 잘 생기는 피부다.건성은 피부가 건조하며 각질이 일어나고 트기 쉬운 피부로 특히 팔, 다리의 바깥쪽이 건조되기 쉽다.가을 겨울철에 주로 문제가 되는 피부는 건성피부이다.지성인 사람도 부위에 따라서는 피부 건조증세를 보일 수 있다.일반인들은 흔히 피부가 거칠어지면 건조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거친 정도와 건조함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엄밀하게는 피부가 건조하다는 것은 각질층의 수분함량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피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각종 유해물질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고 인체내부의 수분과 전해질의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다.세포는 60~70%가 수분이므로 수분이 소실되면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수분유지를 위해 피부는 각질화과정을 통해 약 10㎛ 두께의 각질층을 만든다.각질층은 견고한 단백질로 기와모양의 세포와 이를 둘러싼 기름 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기름 층이 수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 각질층이 파괴되면 피부를 통한 수분손실이 15~20배 증가하게 되며 가려움증이 발생한다.한번 파괴된 각질층은 해부학적인 복구가 일어나는데 1-2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자주 때를 미는 것은 가려움증과 피부염 발생의 첩경이라 할 수 있다. ◆지방막 습윤보존도 중요환절기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수록 피부의 지방막이 결핍되고 습기가 부족하면 피부각질층이 거칠어진다.거칠어진 부위가 자주 찬바람에 노출되거나 물에 젖으면 피부는 쉽게 트고 갈라지게 된다. 심해지면 피나 진물이 나고 세균감염을 받게 되면 염증이 일어난다. 예방을 위해서는 피부의 습윤과 지방막을 위한 크림 등을 발라준다.피부의 적절한 상대습도는 60~70%이나 대부분의 생활 및 업무공간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 피부건조의 또 하나의 악화요인은 잘못된 목욕습관이다. 흔히 목욕은 피부에 수분을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비누 및 때밀이 습관 때문에 목욕 후 급격히 수분을 상실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가을은 건선 악화 계절건선의 원인은 아직 불명확하나 발병소인이 유전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외상, 감염, 내분비인자들, 기후 및 정서적 긴장 등의 유발인자가 관여한다. 또 병인에는 피부조직 자체의 구조적 변화와 생화학적 변화 및 환자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면역학적 변화가 원인으로 작용한다.건선의 증상은 은백색의 인설로 덮여있고 경계가 뚜렷하며 크기가 다양한 홍반성 구진을 특징으로 때로 가려움증을 수반하는 것.병변은 서로 융합돼 커지며 때로는 전신의 피부를 침범하는 수도 있다. 병의 경과는 다양하여 예측하기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만성이며 재발이 빈번하다.건선이 발생되지 않는 부위는 없으나 특히 외부의 자극을 빈번히 받는다고 생각되는 팔꿈치, 무릎, 둔부, 두피, 그 외 사지의 바깥쪽에 많이 발생한다.계절적으로 자외선이 강한 여름에 호전됐다가 자외선이 적고 습도가 낮은 겨울철에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심한 정서적인 자극을 받는 상태에서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만성 재발성질환이므로 계절적 요인, 외상이나 감염, 정신적 긴장 등의 유발인자들을 염두에 두어 예방하거나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건선은 자체의 다양한 양상과 경과에 따라서 치료법도 다양하다.과거 또는 현재에 사용되는 치료의 작용기전은 대부분 건선으로 증가된 표피의 과형성을 억제하는 것이다.건선의 치료는 영구히 치유를 시키는 것이 아니고 가능한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회복을 의미한다.일반적으로 체중이 과다한 환자는 체중을 줄이면 치료에 도움이 되고 급성기에는 가능한 한 정서적 긴장을 줄여야 한다. ◆올바른 목욕 상식 중요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1주일에 1회 정도 목욕탕에 가는 정도였다. 이후 아파트가 대량 보급되고 24시간 온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하루에도 1~2회씩 목욕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또 과거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1주에 1회 정도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본격적인 목욕도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피부는 대개 과도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가려움증과 건조증 나아가서 습진증상까지도 나타나게 된다.각질층이 한번 손상되면 완전 복구에 1~2주의 시간이 걸리므로 때를 심하게 밀었을 때는 1~2주간 피부 관리에 신경을 쓰고 목욕을 조심해야 한다.특히 노인의 경우 피부 건조가 심하게 올 수 있으며 팔다리의 바깥쪽은 가장 건성습진이 잘 나타나는 부위이므로 때를 밀지 않도록 한다.건조해지는 가을철에는 목욕을 주 2~3회로 한정하고 목욕 시간도 1회에 15분 정도 해야 한다.특히 중년 남성은 피로회복의 차원에서 매일 뜨거운 온탕 목욕이나 사우나를 즐기는데 이것은 피부보호막을 손상시켜 가려움증을 유발하고 피부노화를 촉진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세안 시에도 너무 더운물 보다는 미지근한 온수로 마지막엔 찬물로 헹구는 것이 피부노화를 막는 길이다. ◆피부 가려움증의 가정요법-떼를 밀지 말고 미지근한 욕탕이나 샤워하며 항상 피부를 차게 한다.-입욕제나 자극이 강한 비누는 사용하지 않는다.-피부가 지나치게 건조할 때는 손에 바르는 로션을 바르거나 목욕 후 스킨오일을 바른다.-하의는 면제품을 사용하고 모직이나 나일론은 직접 피부에 닿지 않도록 한다. 도움말=민복기 올포스킨피부과 대표원장(대구시의사회부회장, 대구·경북피부과의사회장)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4명 중 1명 평생 한 번 이상 경험…팽진 원인 찾아 없애야

-고운미 피부과 김호연 원장 두드러기는 4명 중 1명이 평생 한 번 이상 경험하는 흔한 질환이다.두드러기의 진단은 임상 증상만으로도 비교적 쉽게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만성 두드러기는 진찰 당시 팽진을 관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자세한 병력 파악해 진단하거나 평상시에 발생하는 두드러기를 찍은 사진으로 진단하기도 한다.◆두드러기의 증상두드러기 증상은 벌레에 물렸을 때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은 팽진이 특징적이다.팽진은 피부의 진피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부종에 의한 것으로 부종이 진피 상부에 국한될 경우에는 두드러기로 나타난다.부종이 심부 진피, 피하, 점막하 조직에 침범하면 맥관부종이 생긴다.다양한 크기의 중심부 부종과 주변의 홍반, 가려움 혹은 따끔거리거나 작열감이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일반적인 두드러기는 보통 30분에서 24시간 안에 없어지거나 호전되기 때문에 실제 병원을 찾은 당시에는 두드러기 증상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만성 두드러기란?편의상 두드러기는 급성과 만성으로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되다가 완전히 소실되는 경우를 급성 두드러기, 6주 그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만성 두드러기라고 합니다.매일 발생하는 지속형, 불규칙한 간격으로 발생하는 간헐형, 특정한 자극에 대해 일관되고 재현 가능하게 유발되는 유발성, 이러한 유발 요인이 없는 특발성 두드러기로 구분한다.◆두드러기의 원인각종 음식물과 꽃가루나 먼지 같은 흡입제, 세균이나 진균, 바이러스 같은 감염증,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나 방사선 조영제 등의 다양한 원인이 있다.찬 공기나 찬물 등 차가운 온도에 반응하는 한랭두드러기, 열이 가해지는 부위에 발생하는 열두드러기, 무거운 물건을 팔로 들거나 졸리는 양말이나 속옷 등의 압박에 의해 발생하는 압박두드러기도 있다.햇빛이 원인인 일광두드러기와 물이 닿는 부위에 발생하는 수성두드러기로 구분하기도 한다.◆두드러기 치료두드러기 치료의 기본 원칙은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거나 피하는 것. 그러나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여러 가지 대증요법을 시행한다.항히스타민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사용한다.전통적인 1세대 항히스타민제는 졸림이나 입마름 등의 부작용이 컸으나 최근에 개발된 2세대 항히스타민제는 효과는 유사하나 부작용이 적다.항히스타민제는 증상에 따라 단독 혹은 복합으로 투여한다.두드러기의 급성 악화나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단기적으로 전신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기도 한다.항히스타민제에 반응하지 않는 만성 특발성 두드러기에는 여러 가지 면역 조절제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만성 두드러기는 드물지 않은 질환이며 수년간 지속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두드러기는 증상이 소실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치료 용량을 유지하며 증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장기간의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경우 부작용이 적으면서 효과적이고 안전한 약제를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따라서 조기에 피부과 전문의의 진료와 상담을 받고 치료 방향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1)동부

경주는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도시로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문화재로 넘쳐나는 노천박물관이다. 명실 공히 경주는 우리나라 역사문화관광 1번지다.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2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경주의 역사문화유적과 빼어난 풍광, 문화관광 자원 등이 풍부하다을 자랑하려면 끝이 없다.경주의 역사문화 관광자원을 동, 서, 남, 북, 중부 등 5개 권역으로 나눠 소개한다.경주의 동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단지로 1970년대에 조성된 보문관광단지가 위치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중심으로 형성된 토함산, 해파랑길로 이어진 동해안도 포함된다. 보문동, 불국동, 감포읍과 양남·북면이 동부지역이다.1. 불국사와 석굴암경주 관광의 대명사로 부동의 관광1번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국내외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다.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세계의 문화자산이다.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했다.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돔 위에 흙을 덮은 석굴 형식이다. ‘돌로 비단을 짜듯 감실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말해주듯 거친 화강암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조각은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백미로 손꼽힌다.2. 경주보문관광단지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관광단지로 숙박, 오락, 문화체험, 학술대회, 박물관, 식당 등 다양한 위락시설이 결집해 있는 관광의 종합선물세트장이다. 보문호반산책로는 다양한 절경을 즐길 수 있는 힐링타운의 결정체다. 콜롯세움, 경주자동차박물관, 한국대중음악박물관, 화폐박물관, 테디박물관, 솔거미술관, 화백컨벤션센터 등의 문화자산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경주월드에서 경주엑스포와 블루원으로 이어져 동부사적지와 경주 관광1번지를 다툰다. 국내 최고 수준의 5성급 호텔(4천600실)들이 보문호수를 에워싸고 있다.3.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지구촌을 하나로 이어주는 문화체험의 장으로 운영되는 힐링공간이다. 황룡사 9층목탑을 형상화해 건축한 경주타워, 미술계의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 상시 전시되는 솔거미술관, 시계공원, 세계화석박물관, 상설 문화전시 공연장 문화센터, 백결공연장 등의 다양한 문화체험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경주의 브랜드공연 플라잉과 에밀레 넌버벌공연이 상설 운영되고 있다.4. 기림사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중창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국찰로 불국사를 말사로 두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승병들의 본부로 기능했던 응진전이 아직도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경내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대적광전을 비롯해 목탑지, 삼층석탑과 건칠보상좌상(보물 제415호)등의 문화유적이 많다.5. 골굴사신라시대 인도의 광유선사가 수도하며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있다.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보물 마애여래좌상이 눈길을 끈다. 원효대사가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을 미루어 골굴사의 위치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지금은 선무도와 템플스테이로 고정적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해외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6. 나정고운모래해변감포의 지정해수욕장이다. 넓은 백사장의 잔잔한 모래와 동해의 청정해역, 여유 있는 주변 공간과 인근에 편의시설이 다양하다.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해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해수탕이 있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해수탕 옆은 주차공간과 송림이 개방되어 있다. 또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다.7. 문무대왕릉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은 백성을 위한 선정으로 오래 기억되고 있다. 문무왕릉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동해바다 가운데 무덤을 조성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으로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기둥 모양의 바위들이 십자형 수로를 이루고 있으며,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바닷물이 잔잔하게 흐른다.8. 감은사지삼층석탑감은사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직접 터를 잡아 건축물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들 신문왕이 부왕에 대한 효심으로 완성했다 하여 감은사로 이름이 붙여졌다. 건축물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게 수로를 조성해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마주보고 서있는 삼층석탑은 안정감과 상승감이 동시에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양식이다.9.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읍천항 벽화마을 입구에서 하서항까지 해안선을 따라 왕복 3.4㎞ 구간의 파도소리 길은 곳곳에 아름다운 해안 풍경과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부채꼴 주상절리를 만날 수 있다. 출렁다리와 다양한 야생화들이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꾸민다. 전망탑이 세워져 한 눈에 주상절리 절경을 감상하면서 동해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10. 감포깍지길감포읍에서 개설한 스토리를 입혀 조성한 ‘감포깍지길’은 대본리에서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걷거나, 내륙쪽의 볼거리들을 아울러 둘러볼 수 있는 탐방로가 아름답다. 해안길, 읍내골목길, 바닷길 등 8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다. 도로로는 감포항 활어직판장~솟대길 감포시장 등으로 이어지는 4구간을 추천할 만하다. 해변을 끼고 조성된 산책로에 용굴, 해국 등이 신비감을 주는 풍경을 선사한다. 감포항을 지나 동해안으로 쑥 들어간 소나무숲과 감은사지삼층석탑을 모델로 만든 등대가 있는 송대말도 인기 탐방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귀족 권력 다툼에 13세의 어린 왕은 왕비마저 빼앗기고

신라 33대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 효소왕이 702년 17살의 나이로 죽자 성덕왕 또한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성덕왕은 35년간 왕위에 있었다. 전쟁이 없어 신라 중기의 가장 평화로운 시대로 평가되는 시기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개발했다. 그러나 형 효소왕이 17세에 사망하고, 성덕왕도 세자 책봉의 과정 없이 어린 나이에 국인들의 추천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 의한 왕손들이 자리에 오르고 내렸던 것으로 국정이 귀족들에 의해 움직여 왕권은 약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성덕왕이 첫 번째 왕비를 내치고 김순원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성덕왕의 아들 34대 효성왕도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김순원의 권력이 조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은 성덕왕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김교각 지장의 본래 이름이 중경이었다는 기록과 성덕왕의 첫 번째 세자 중경이라는 이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김교각이 성덕왕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성덕왕과 수로부인에 대한 삼국유사를 소개하고,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김교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는다.◆삼국유사: 성덕왕과 수로부인-성덕왕: 제33대 성덕왕 때인 신룡 2년 병오년(706)에 벼가 알곡을 맺지 않아 백성의 굶주림이 심했다. 정미년(707) 정월 첫날부터 7월30일까지 백성을 구하려 세곡을 풀었는데, 한 사람당 하루 3되씩을 기준으로 삼아 나누어주었다. 일이 끝나 계산해 보니 합계 30만500석 이었다.왕은 태종대왕을 위해 봉덕사를 짓고, 인왕도량을 7일간 베풀면서 대사면을 내렸다. 처음 시중직을 만들었다.-수로부인: 성덕왕 때였다.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 바위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는 데 높이가 1천 길이나 되었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어 공의 부인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꽃을 꺾어 바칠 사람 누구 없나요?”“사람의 발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곳입니다요.”종들이 그렇게 말하고 모두 손을 내저었다. 곁에 한 노인이 암소를 몰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서 노래까지 지어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이틀쯤 길을 간 다음이었다. 또 바다 가까이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바다 용이 잽싸게 부인을 끌어다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공은 뒹굴며 땅을 쳤건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옛사람의 말에 ‘뭇 입은 쇠라도 녹인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저 바다의 방자한 놈이라도 어찌 뭇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다가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두드리면 부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공이 그대로 따랐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가는 고충을 겪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교각의 새옹지마김교각은 통일신라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성덕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타고난 행운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시대는 짧았다.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잠잠해 백성이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농업과 상업 등의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권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효소왕을 17세에 몰아내고 성덕왕을 왕위에 올린 세력들은 다시 주도권 싸움을 시작했다. 이찬 김순원은 일찍이 자신의 딸 소덕을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덕왕 15년에 중경과 수충을 낳은 성정왕후를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잠재운다는 등의 이유로 궁에서 내보냈다. 다음해인 717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성덕왕은 집권 7년을 넘어서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보다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군으로 소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지역을 직접 돌아보는 행보를 자주 가졌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결국 왕비를 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서 태자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성덕왕은 김순원 세력의 정치적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태자인 아들 중경의 생명이 위험함을 직감하고, 왕은 중경을 내실로 불러 눈물의 이별을 고했다. “아들아, 아비가 못나 네 신병을 편하게 돌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비밀호위 일곱을 각자 너로 분장해 중국으로 피신하게 할 터이니 그중 하나와 승려로 위장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다시는 신라로 돌아올 생각도 말고.”어머니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본 중경은 왕인 아버지의 늘어진 어깨를 힘없이 바라보다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산소에 절을 올린 중경은 호위무사 김진과 함께 유람하듯 오히려 추적자의 뒤를 밟으며 중국으로 도망가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중경의 뒤를 추적하던 김순원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중국 경계지역에서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더이상 추적하지 마시오. 나는 살아서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중경’이라는 목간을 받아들었다. 김순원도 일곱 갈래로 추적했던 대원들이 같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자 추적을 포기했다.성덕왕은 거짓 신분을 위장한 시신을 화장하고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순원 세력도 태자에 대한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태자의 사망 소식을 공식화하는데 동의했다. 이어 자신의 딸을 소덕왕후로 삼게 했다. 김순원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갈수록 심해져 성덕왕이 죽자 소덕왕후의 아들을 34대 효성왕에 오르게 했다. 또 그는 다른 딸을 효성왕에게 시집보내 왕후로 삼게 했다. 효성왕은 결국 이모와 결혼해 왕비로 삼아야 했다.중경은 이름을 김교각으로 바꾸어 도망할 때 입었던 승복을 그대로 걸치고 수도에 정진했다. 그는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지어 불법을 전파하는데 열중했다. 김교각의 명성이 지장보살로 널리 퍼지면서 그의 설법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김교각은 794년 99세 되는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하고 참선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그의 시신이 3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아 등신불이 되었다. 구화산 지장보전에는 아직도 그의 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다.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소재가 되어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그는 죽어 등신불이 되었고, 중국의 신도들이 제작한 입상으로 고향 땅 경주로 돌아와 대중을 만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나에게 맞는 렌즈로 시력 교정 스타일리시한 패션은 덤으로 이제는 스마트까지 갖춘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안경’은 ‘선택’이 아닌 ‘필수 사양’이었다. 자신의 눈 건강이 적신호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양 부끄러움마저 느껴야 했다. 학창시절 안경을 낀 친구를 상대로 소위 ‘안경 잽이’라는 속어를 남발하던 그때는 분명 그랬다.오로지 ‘시력교정’을 위함이었다. 눈 상태에 맞게 ‘볼록렌즈’냐, ‘오목렌즈’냐, 또는 시력에 맞춘 렌즈를 찾아 두께 감을 조정하는 ‘반 의학적’ 요소, 더할 나위 없이 그 정도였다. 안경의 용도란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리고 렌즈를 감싸는 테의 활용성은 말 그대로 렌즈를 보호하는 ‘Zip’의 역할에 불과했다.4차 산업혁명의 시류에 안경 산업도 더불어 유영하고 있다. 시력 보정의 원초적 벨류를 넘어 패션, 레저, 문화, 3D, 증강현실(AR)에 이르기까지 안경의 확장범주는 무한대다. 침대는 과학이고 스포츠도 과학이라는데, 안경을 과학과 분리시켜버린다면 영 어색할 노릇이다. ◆조선시대 불경의 상징안경의 근원을 서양의 네로 황제냐, 고대 중국에 이르냐에 따른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사에 의거한 추정일 뿐 정설로 비춰 볼 때 안경의 시발은 이탈리아로 본다. 그에 따른 근거는 렌즈의 어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렌즈는 이탈리어어 ‘렌티지에’서부터 비롯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우리에게 익숙한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는 13세기와 18세기 무렵에 각 발명됐다. 하지만 안경의 대중성은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당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유럽 전역을 강타하면서 수천만 권의 책자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과 궤를 함께한다.책의 기하급수적 공급과 맞물려 인쇄본을 접하려는 수요 역시도 동반 상승의 조짐을 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시력의 중요성을 간과해 온 사람들도 사물의 분간 여부를 넘어 독서라는 선명성을 띤 채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우리나라 안경의 시초는 어디서 비롯됐을까.그 시작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의 안경은 중국식 어투로 ‘애체’라 불렸다. 또 다른 말로는 당시 페르시아어 ‘왜납’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왜납이 구전을 통해 지금의 안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고증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사실 조선시대의 안경은 ‘불경’의 상징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담배’와도 비슷한 예법이 적용되는데 자신보다 지위나 연령이 높은 사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안경 착용이 엄격히 금지됐다.임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적인 행사나 회의 자리에서는 군주 역시도 안경을 벗고 참석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옛 조선의 안경문화는 이렇듯 소극적이었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우리 역시도 수백 년에 걸친 안경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그에 따른 사료가 미흡할 수밖에 없던 이유, 바로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다. ◆3D안경의 모토는 입체감과 모방안경렌즈의 원리는 ‘거리 콘트롤’로 설명할 수 있다. 그 기준은 통상 눈의 망막과 수정체의 위치 및 거리로 두는데, 개별로 지닌 눈의 특성에 따라 렌즈를 선택, 그 렌즈가 눈의 거리와 반사각 등을 잡아 시야를 밝게, 아울러 넓혀주는 것이다. ‘원시’와 ‘근시’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원시는 보통 중년 이상의 연령대에서 주로 나타나곤 하는데, 말 그대로 먼 곳은 잘 보이되 가까운 사물은 선명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원시는 망막과 수정체의 거리가 짧아진 탓에 물체의 상이 망막 뒤편으로 맺힘에 따라 발생한다. 어르신들이 신문이나 가까이 있는 물체를 식별할 때 안경을 들어 보이거나 돋보기를 착용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 돋보기가 바로 볼록렌즈다.근시는 원시의 반대 개념으로 보면 된다. 먼 곳에 있는 물체가 흐릿하게 퍼져 보이는 현상이다. 이는 ‘난시’와도 비슷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근시는 수정체와 망막의 거리가 원시와 달리 멀어 그 중간에 상이 맺힌 상태를 의미한다. 다른 이유로는 수정체의 형태를 들 수 있는데, 수정체가 정상 대비 볼록한 형태를 띠면 이 또한 근시라고 판명한다. 근시 교정에는 오목렌즈가 이용된다.우리의 눈은 ‘입체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실물과 사진, 그리고 거울은 개별의 특성과 형태에 맞게 각자의 입체성을 다르게 표현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눈은 두 개고 사진의 렌즈는 하나이며, 사진은 사물의 입체성을 평면화하는 대신, 눈은 입체 본연의 구조를 온전히 수용해 낸다는 원리다.‘제2의 눈’으로 대변되는 안경에 입체감을 부여하려는 시도란 꽤나 고무적이었다. ‘3D’와 안경의 접점을 찾기 위한 그간의 노력은 바야흐로 ‘3D안경’이라는 아이덴티티로 발현되기에 이른다.3D안경의 모토는 입체감과 ‘모방’에 있다. 인간의 입체적 시각을 오롯이 재현한다는 것이 3D안경이 품은 기술력이다. 사람은 한쪽 눈만으로는 입체감을 느낄 수 없다. 바로 ‘시야각’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D안경 역시 양쪽 눈과 눈 사이의 거리 제어가 기술의 주요 포인트다.다채로운 3차원 이미지를 한데 결집시키기 위해선 사람의 좌·우 뇌가 동시다발적으로 입력돼야 한다. 그러한 설계가 이뤄질 때 양쪽 시각을 통해 투영된 이미지와 이벤트, 형태와 거리감 등을 현실감 있게 인식해 낼 수 있는 것이다.‘3D 영화’ 또한 비슷한 원리다. 안경 대신 카메라의 거리 각을 조정해낸 후 양쪽 카메라의 병렬적 이미지를 결집해 하나의 영상으로 비출 때 입체감을 품은 3D 스크린이 탄생하게 된다. ◆미래 안경은 ‘눈에 걸치는 옷’안경 산업과 4차 산업의 콜라보로 말미암아 다양한 형태와 용도를 띤 안경이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죽했으면 안경을 ‘아이웨어’, 다시 말해 ‘눈에 걸치는 옷’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안경은 과학이자 패션이며, 시력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하나 쯤는 소유하고 있을, 약간의 과장을 보태 ‘공공재’적 성격마저 품고 있다.매운 여름, 유난히 눈이 시리다면 ‘선글라스’부터 찾는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공인이나 연예인서부터 내리쬐는 햇빛과 그 속에 담긴 자외선으로부터 내 눈을 보호하겠다는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선글라스는 휴대폰 만큼이나 수요량이 높은 ‘필수품’이 돼버렸다.이외에도 스포츠나 레저에 적합한 고글이나, 패션을 위시한 아이템으로의 각종 안경들, 그리고 전투상황이나 비행기 조종 등의 특수목적을 띤 기능성 안경에 이르기까지, 안경은 그 역사와 더불어 시대와 시류에 따라 그 종류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이제는 ‘똑똑한 안경’이다. 스마트의 이름을 딴 ‘스마트 안경’이 대중 속으로 잠입해 가고 있다. 스마트 안경에는 별도의 ‘이어폰’이 필요하지 않다. ‘골전도’의 기술력으로 음악과 동영상을 자유자재로 감상한다.전화를 할 수 있고, 안경의 위치를 파악한다. 시간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쯤 되면 스마트 안경의 형태에 관한 의구심이 들만도 하다. 인공지능의 기술이 투영된 스마트 안경의 외관을 한 번 떠올려보자.공상과학영화에서나 봄직한, 좋은 말로 그럴듯하되 부담스런 모양쯤으로 그려본다면 오산이다. 스마트의 정점은 ‘퍼블릭’이다. 대중적이며 보편화된 외형, 하지만 ‘웨어러블’의 기술력이 담긴 안경이야말로 스마트 안경의 진면목이라 볼 수 있다.설계도를 펼치지 않은 채 복잡한 배선을 정리한다. 수천 개로 얽혀있는 비행기 내부 전선을 쉼 없이 작업해 낸다. 대신 이 작업자는 설계도를 살피는 대신 안경을 착용한다. AR안경, 그 너머에 배선위치가 지정돼 있고 안내도를 판독해낸다. 그 덕에 작업속도는 30%가량 빨라졌고, 그에 따른 효용 가치는 기대 이상이다. 증강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다만 현실감을 십분발휘한 후 현실 아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세계 유수의 리서치업체에 따르면 2024년까지 안경 관련 산업군의 성장률을 연평균 5.1% 정도로 전망했다. 안경의 스마트화와 더불어 ‘패션 아이템’으로의 위치가 향후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는 방증이 수치화된 셈이다.대구를 일컬어 ‘안경의 도시’라고 한다. 이번 주말에는 ‘안경 거리’에서 데이트를 해보자. 더불어 내년에 열릴 예정인 ‘대구국제안경전’에 한번쯤 둘러보는 애향심을 발휘해봐야 할 때다. 대구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만큼은 안경이란 ‘수구초심’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idaegu.com

특정한 동작할 때만 어깨 쿡쿡 쑤신다면 ‘회전근개’ 손상 의심

어깨 통증은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꼭 경험을 해보기 마련이다. 어깨 통증이 다른 부위의 통증보다 유난히 발생 빈도가 높다.이 같은 이유를 설명하려면 관절에 대해 알아야 한다. 관절이란 뼈와 뼈가 연결되는 부분을 말한다.그렇다고 단순히 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뼈 사이의 공간에 윤활액이 차여있는 관절낭이 있어 관절 운동을 수월하게 해준다.하지만 뼈와 관절낭만 있다면 그 관절은 매우 불안정할 것이다. 관절 주위의 근육과 힘줄이 관절을 지지한다.이 중 어깨 관절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어깨 관절은 몸의 여러 관절 중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가장 다양하다.예를 들면 무릎이나 팔꿈치 관절은 굽히고 펴는 정도만 가능하다. 고관절도 여러 방향으로 운동이 가능하지만 가능한 운동의 각도 범위가 어깨 관절보다 훨씬 좁다.어깨 관절이 넓은 운동 범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어깨 관절을 구성하는 뼈 사이의 접촉 단면적이 좁기 때문이다.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어깨 관절은 견갑골과 상완골이 만나서 생기는 관절이다. 이 두개 뼈가 만나는 접촉 면적은 흡사 골프공이 골프티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매우 작다.이런 작은 접촉면 때문에 운동 범위는 더 넓어지지만 반대로 그만큼 어깨 관절은 불안정하다. 여러 어깨 주위의 근육들이 관절 안정성에 관여하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근육들이 회전근개이다.◆회전근개 손상회전근개는 어깨 관절을 이루는 두 뼈에 관절낭을 감싸듯 붙는 네 개의 근육이다. 불안정한 어깨 관절의 안정화에 가장 중요한 근육이므로 어깨에 가해진 외상이나 반복적인 어깨 사용에 의한 미세 손상에 의해 자주 다치게 된다.어깨 통증의 10-62%를 차지하고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라 빈도도 증가하는 추세다. 회전근개 손상의 가장 특징적인 증상은 특정 동작 시 발생하는 어깨 통증이다.회전근개는 네 가지의 근육으로 구성돼 있는데 근육들은 서로 다른 어깨 운동을 맡는다.그래서 특정 동작 시 발생하는 어깨 통증은 그 동작을 담당하는 근육의 손상을 의심할 수 있다.손상의 정도는 가볍게 염증이 있는 건병증에서부터 시작해 건의 부분 또는 전층 파열까지 있다.진단을 위해서는 다친 경험은 없는지 또는 일상생활에서 같은 동작을 자주 반복하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이학적 검사를 통해 각각의 회전근의 움직임을 유도해 통증이 유발되는지도 봐야 한다.이후 단순방사선 검사나 초음파 및 MRI 검사 등을 통해 손상 부위를 직접 볼 수 있다. 치료는 우선 통증의 조절을 위해 약물 또는 물리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물리치료는 핫팩이나 초단파와 같은 열치료나 전기치료, 고주파치료 등이다. 이만약 통증이 조절이 된다면 운동치료를 해야 한다.여러 운동 중에서도 특히 근력 운동이 회전근개 손상에서는 중요하다.하지만 근력 운동의 포인트는 회전근개 근육들을 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전근개 외에 어깨 관절의 안정성에 관여하는 근육들을 키워야 한다는 것.삼각근이나 승모근, 큰 마름근이 이 근육들이다. 근력운동을 통해 회전근개가 어깨 관절 안정화에 기여하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근력운동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이러한 치료로도 어깨 통증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어깨 부위의 주사치료와 심하면 경우 수술까지 고려해야 한다.◆오십견동결견 또는 유착성 관절낭염으로도 불리는 오십견의 사전적 정의는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전 방향 수동적·능동적 관절운동 제한’으로 ‘방사선학적 검사 상에서 이상이 없는’이다.1차성 오십견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2차성 오십견의 원인은 당뇨 등과 같은 전신질환이나 어깨 손상 등이다.오십견의 대표적인 증상은 어깨 관절의 모든 운동 방향의 운동 범위에서 수동적, 능동적인 제한이다.오십견은 매우 특징적인 자연경과 증상이 있다.초기(통증기)에는 관절 운동범위의 제한은 심하지 않으나 어깨 통증이 최대 관절 운동범위에서 발생하는 시기이다.이 시기가 지나면 진행기(동결기)가 오는데 이때는 통증보다 관절 운동 범위의 제한이 뚜렷해진다.주로 옆으로 들어 올리거나 바깥으로 돌릴 때 가장 심하다.이후 말기(해동기)가 되면 관절 운동 범위의 제한이 회복이 되고 통증 또한 나아진다. 오십견의 진단을 위해서는 오십견을 유발할 수 있는 외상 등의 인자들이 있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고 앞서 언급한 특징적인 증상들의 변화 추이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이후 영상학적인 검사를 통해서 유발인자 및 동반 질환도 검사해야 한다.치료는 우선 통증 호전을 위해 약물·물리치료를 하고 이후 통증이 조절이 된다면 운동치료로 전환한다. 주로 스트레칭 운동이 적용된다.모든 운동 방향에서 통증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스트레칭 운동을 해야 한다. 통증 조절이 쉽지 않는 경우 관절강내 주사를 맞기도 한다.◆석회성 건염석회성 건염은 어깨 회전근의 인대에 생긴 석회에 의한 염증이다. 석회성 건염의 통증이 앞서 설명한 두 질환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어 ‘환자들이 어깨에 불이 난 것 같다’고 할 정도다.‘잠을 잘 때 자세를 바꾸지를 못한다’, ‘어깨를 만지지도 못하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심한 통증 때문에 이학적 검사는 쉽지가 않으며 단순방사선 검사나 초음파 검사를 통해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대부분의 석회성 건염 경우 단순방사선 검사를 해보면 석회에 의해 생긴 하얀 음영이 회전근개의 인대가 있는 위치에 보이고 같은 부위를 초음파로 보면 뼈가 같은 음영이 관찰된다.석회성 건염의 치료는 통증치료를 위주로 한다.일반적인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시도해보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럴 때는 체외충격파 치료나 스테로이드를 이용한 주사치료를 해볼 수 있다.만약 이런 치료로도 통증이 조절이 안 되는 경우에는 굵은 바늘을 석회가 있는 곳에 위치시키고 생리식염수를 사용하여 석회덩어리를 파괴하는 세척흡인술을 해볼 수 있다. ◆어깨 통증의 재활운동어깨 통증의 재활운동은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이 있다.대표적인 스트레칭은 코드만 운동이다.의자와 테이블을 통증이 없는 팔로 잡고 몸을 지탱한 상태에서 아픈 어깨를 여러 방향으로 운동시켜 운동 범위의 제한을 회복하는 것.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건강한 어깨의 도움을 받아 관절 운동 범위 운동을 할 수 도 있다.수건을 이용한 운동이나 벽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다가가는 벽 오르기 운동도 간단히 할 수 있는 어깨 스트레칭 운동 중 하나이다.어깨 통증을 위한 근력 운동은 견갑골 안정화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회전근개가 아닌 어깨 주위의 근육들을 강화시키는 운동이다.스탠딩 로우 운동, 삼각근 강화 운동, 엎드려 수평 외전 운동, 견갑골 조절 운동 등의 대표적인 근력운동이다.도움말=대구 파티마병원 재활의학과 이병주 과장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영주시(하)

영주시는 유불문화의 본 고장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석사, 소수서원을 비롯해 무섬마을 등 전 지역에 걸쳐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사람을 살리는 산, 소백산 아래 자리해 천혜의 자연환경과 빼어난 경관으로도 유명하다.일교차가 큰 소백산자락에서 생산된 영주사과와 풍기인삼, 영주한우 등은 전국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또 냉장고섬유로 불리는 풍기인견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금선정(풍기읍)금계 황준량이 즐겨 거닐던 곳으로 퇴계학파 유학자였던 금계 황준량을 기리고자 지은 정자다. 정자 바로 위편에 드높은 푸른 절벽이 있고 절벽 앞에는 나지막한 폭포가 있어 떨어지는 시원한 물소리는 사시사철 우렁차다.또 기암괴석으로 벽을 맑은 못이 배포되어 수면에 어리우는 정자 그림자가 그대로 한 혹 운모 그림같이 경관이 아름답다.뒤쪽 산 중턱에는 황준량이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다는 금양정사(경북유형문화재 제388호)가 있다. △용암산(안정면)안정면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해발 637m의 용암산은 안정면 봉암리에서 여륵리를 이으며 봉현면과 경계를 이루는 아담한 산이다. 갖가지 전설을 간직한 바위가 많고 산이 높지 않고 험하지 않다.산행길 전체에 소나무 숲 그늘이 이어져 가족·친지들과 함께 등산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많은 시민이 찾고 있다. △돗밤실둘레길(이산면)돗밤실 둘레길은 이산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망월봉, 약수봉, 흑석사 옛길, 흑석사 제비봉 명학봉, 묘봉을 거쳐 이산치안센터로 이어지는 약 5.6㎞의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돗밤실의 어원은 마을주변에 졸참나무가 많아 굴밤마을로 알려졌다. 굴밤(도토리)은 돼지밤이라고도 불리며 윷판에도 나오는 도(돗)는 돼지의 옛말이다. 밤마을이 합쳐져 돗밤실로 불리며 코스 입구에 행복의 종과 제비봉과 명학봉 사이에 출렁다리가 있다. △영주호오토캠핑장(평은면)영주댐 아래에 위치한 영주호 오토캠핑장은 약 10만㎡의 면적에 캐라반 15동, 캐빈하우스 5동과 텐트을 설치할 수 있는 130면의 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인근에 영주댐 물문화관, 무섬 전통마을도 있다. 주변에 조성 중인 영주호 문화관광 체험단지가 완성되면 영주의 새로운 대표관광지로 자리잡을 수 있을것으로 전망된다. △무섬마을(문수면)‘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고 해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마을 주변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르는 대표적인 물동이마을로 민속문화재 제278호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있다.무섬마을은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매년 가을에 실시되는 무섬 외나무다리 축제는 많은 관광객들의 볼거리로 자리잡고 있다. △장말손유물각(장수면)장말손의 자는 경윤(景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조선 전기 문신으로 1467년 이시애 난때 예조좌랑으로 진북장군 강순을 따라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됐다.유물각에는 장계 홍패 및 장말손 백패 홍패(보물 501호), 장말손 초상 (보물 502호), 장말손 적개공신교서 (보물 604호), 장말손 유품(보물 881호), 장말손 종가 고문서(보물1005호)가 있다. △국립산림치유원 다스림(봉현면)영주시와 예천군에 걸쳐 조성된 국립산림치유원은 숲에 존재하는 많은 환경요소를 활용해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시키는 산림치유를 목적으로 설립됐다.약 2천889ha의 면적의 숲 속에 데크로드가 설치돼 있다. 건강증진센터, 수치유센터, 산림치유문화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홍유한 선생 유적지(단산면)홍유한 선생 유적지는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차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홍유한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1784년보다 30여년 전에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평신도 가운데 신앙을 위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사람)로 알려졌다. 농은은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천주교를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 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대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부석사(浮石寺)(부석면)우리나라에서 13번째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는 세계인이 함께 보존할 가치를 가진 사찰로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다.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 낭자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와 무량수전, 조사당 등 국보 5점과 보물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저녁 무렵 낙조와 가을 은행나무 길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소수서원(순흥면)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는 백운동서원이라고 했다.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요청에 의해 명종에게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사액을 하사받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어졌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주은 기자 juwuery@idaegu.com

제 사람 귀한 줄 알았던 죽지랑, 화랑 137인 거느리고 ‘득오’ 찾아나서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6세에 즉위해 어머니 신목왕후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나이가 어려 섭정으로 정치가 진행되면서 효소왕의 에피소드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 전해진다.효소왕은 즉위해 11년 만에 죽어 이렇다 할 업적은 없다. 낭산 동쪽에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확인되고 있지만 어머니의 주문으로 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망덕사 법회에서 진신석가와의 이야기, 만파식적 보물 잃어버린 것과 죽지랑, 부례랑 등 화랑들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효소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고, 33대 왕으로 동생 성덕왕이 즉위해 35년간 집권한다.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 이야기의 요약과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두 가지로 나누어 써본다.◆삼국유사: 효소왕대의 죽지랑제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 급간이 있었다. 이름을 화랑의 명부에 올리고 날마다 나오더니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득오의 어머니가 “당전 모량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발령했습니다. 서둘러 가야 할 길이 급해 낭께 사직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었지요”라고 답했다.죽지랑은 떡 한 바구니와 술 한 병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득오를 위로하러 갔다. 낭도 137인이 또한 의식을 갖춰 따르며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물었다.“득오가 어디 있느냐?”“익선의 밭에서 순서에 따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죽지랑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솔과 떡을 먹이려고 익선에게 시간을 달라 하면서 함께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익선은 완강하게 막으면서 내주지 않았다.마침 관원 간진이 퇴화군에서 세금 30석을 거두어 서울로 옮기다가 낭이 낭도를 귀중히 여기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익선의 꽉 막힌 태도를 답답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사지 진절이 타고 가던 말에서 안장을 풀어주자 그때서야 허락을 했다.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익선을 잡아 그 더럽고 추악한 때를 씻어 주라 하니, 익선이 도망가 숨어버렸다. 그러자 겨울에 익선의 아들을 잡아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어 죽게 했다.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데 때마침 온 나라가 전쟁통이라 기병 3천 명으로 지켜주게 하였다.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그 고개의 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거사 또한 공의 떨치는 기세가 매우 엄중함을 좋게 여겼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공이 삭주에 부임해 다스린 지 보름쯤 지나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어 더욱 놀라,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게 했더니 죽었다. 그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다” 하고, 다시 아랫사람들을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모셨다.아내는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태어나자 죽지라 이름 지었다. 어른이 되어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했다.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발전시켰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죽지랑과 망덕사-망덕사 유감: 망덕사는 경주시가지와 불국사역을 잇는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사천왕사와 마주보고 있다. 사천왕사터에서 동남산의 화랑교육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화랑교가 나오는데 다리 남쪽으로 펼쳐지는 논두렁 사이에 망덕사터가 있다.망덕사는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감추기 위해 갑자기 지은 호국사찰이다. 당나라 고종이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잇따라 실패하자 김인문과 함께 옥에 가두었던 박문준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다. 박문준은 당나라에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주 낭산 남쪽에 새로 절을 지었다고 들었다고만 대답했다. 고종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신라에 보냈다. 당으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사천왕사 남쪽에 새로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도착한 당의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안내했더니 그 사신이 문밖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하고 절로 들어서지도 않고 돌아섰다. 신라는 황금 천 냥을 주고 사신을 매수했다. 사신이 “신라에서는 과연 사천왕사를 지어 황수를 비옵디다”하고 거짓 보고했다. 새로 지은 절의 이름은 그 사신의 말대로 망덕사라했다.효소왕이 망덕사 법회에 참석했다.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왕에게 법회 참석을 부탁해 효소왕은 허락했다. 법회가 끝날 즈음 어렸던 효소왕이 스님에게 농담조로 “스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고 답했다.“스님은 돌아가시면 왕이 친히 공양하는 음식을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왕께서도 석가의 진신에게 정성을 바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 말하고 스님은 몸을 날려 남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효소왕은 크게 놀라 부끄러워하며 남산쪽으로 절을 하고, 스님을 찾아오게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스님을 찾지 못하고, 지팡이와 발우만 찾았다고 보고했다. 왕은 남산 비파암에 석가사를 세우고 스님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발우를 나누어 모셨다.-모량 참사: 죽지랑은 아버지 술종공으로부터 가전 무술을 이어받아 훌륭한 전사로 자랐다. 때문에 화랑도로 전쟁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죽지랑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법정과 함께 짝이 되어 김유신 장군의 전술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당나라를 몰아내는 매소성전투에서 죽지랑이 위험에 빠졌다. 이때 화랑 득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죽지는 득오를 끔찍하게 보살펴 주는 후원자가 되었다.삼국통일 이후 세력이 커진 모량의 익선이 화랑과 인재들을 포섭하면서 죽지랑의 군사였던 득오를 데려가 가둬 버렸다. 이에 격분한 죽지랑이 화랑들과 함께 모량으로 진격해 싸움을 벌였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 죽지랑은 상처 입은 몸으로 성으로부터 화랑과 군사적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익선이 도망가면서 그의 세력은 와해되고, 득오를 구해냈다.득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지랑이 상처를 입으면서 끝까지 싸움을 지휘한 데 감복해 더욱 충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중 나선 구조’의 신비로움…인류의 삶 한 단계 진전시키다

죽은 자도 말은 있다. 비록 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지만 죽은 이는 억울함을 남긴다. 그리고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음 아닌 ‘유전자’라는 매개로 말이다. 유전자는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현재를 토로하고 아울러 미래를 제시한다. 숨기고 싶어도 결코 숨겨지지 않는 유전자의 속성이다.유전자 감식의 시작은 1980년대 중반, 영국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후 이 같은 감식 법은 강력범죄나 친자감정, 유해 발굴의 사안 등에 전 방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전자 감식이 범죄 판별의 첫 사례로 등극한 것은 1987년 미국에서부터였다. 이를 시초로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유전자 감식의 신뢰도는 점차 제고되기에 이른다.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세기말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유전자 감식이 사건 현장 곳곳에 도입됐다. 당시 지존파 사건이나 삼풍백화점 참사 등 굵직한 사건에서 유전자 식별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유전자는 ‘명확성’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켜켜이 쌓인 ‘심증’이 모여 부정할 수 없는 ‘물증’으로 발현되는 셈이다. 그것은 유전자가 지닌 개별의 고유성에 기인한다. 유전자는 ‘우리’가 아닌 유일한 ‘나’이다. 이는 곧 진실과 마주할 시간을 유전자가 주선함을 의미한다. ◆이중나선 구조의 DNA‘DNA’ , deoxyribonucleic acid의 약어다. 흔히들 유전자와 DNA를 동일선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DNA는 핵산의 범주로 히스톤 단백질과 더불어 염색체를 형성, 유전자를 이루는 물질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전자가 ‘전체집합’이라면 DNA는 그에 속한 부분 요소쯤 되는 셈이다.DNA의 원리는 1950년대 초반 ‘이중나선 구조’가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밝혀진다. 이중나선은 유전자 간 콘트롤을 영위하는 DNA의 속성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모양이 마치 나선형 사다리를 세워놓은 것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우리의 정체성은 각자의 몸에 잠식돼 있는 ‘세포’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을 DNA를 통해 인지해 낸다. 살아있는 모든 만물은 ‘염색체’를 지닌다. 그중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로 구성돼 있으며, 개별 개체가 품고 있는 유전 정보를 바로 ‘게놈’이라고 부른다.유전자는 바로 DNA가 품은 최소 단위의 게놈을 의미한다. DNA에는 총 4개에 이르는 염기가 포함돼 있는데, 염기의 형태에 따라 인간 개별의 다채로운 성질을 띠게 되는 것이다. 동일 유전자를 가진 형제일지라도 겉모습은 조금씩 틀리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DNA를 이용한 다양한 활용법빠른 결론을 내리자면 유전자는 인간 개별의 특성을 가장 정확히 체크할 수 있는 ‘나만의 산물’이다. 이에 각종 사건·사고 및 발굴 과정에서도 유전자 감식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사기법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대한민국과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동원으로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최근 손을 맞잡았다. ‘유해봉환사업’으로 명시된 이 공조 프로젝트는, 전쟁 중 상흔을 입고 행방이 묘연해진 양국 전사자의 신원 파악과 유해 발굴을 위해 개시됐다. 이를 위해 양국은 전사자를 상대로 한 ‘DNA 추출’ 프로세서 및 빅데이터 공유 등 ‘디지털 수사’ 전반으로의 협력체계를 구축했다.국방부는 최근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초병의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사전 등록됐던 초병의 유전자가 유해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됐고, 신원을 확보한 군이 군사분계선 인근에 잠들어 있던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해 냈던 것이다.수십 년간 그리움에 사무쳐야 했던 부녀의 극적인 상봉에도 유전자의 힘은 발현됐다. 30년 전 딸의 손을 놓친 후 하릴없이 이별을 맞이해야만 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딸의 생사라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관할 경찰을 통해 접수했다. 이후 전국의 경찰망을 활용, 타 지역에서 본인과 일치되는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한 후 딸과의 재회를 만끽할 수 있었다.범죄 해결 과정에서도 유전자 감식은 능동적 초동수사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발발한 ‘한강 토막 살인사건’의 수사 과정에서도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의 ‘유전자 합일 여부’가 주요쟁점으로 부각된 바 있다. 최근 전 남편을 살해·유기한 강력 사건 간에도 발견된 뼛조각의 유전자 식별 과정으로 말미암아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는 중심 단서로 대두되고 있다.위와 같은 강력 사건뿐 아니라 각종 절도사건 등에서도 현장 감식 중 범인이 남기고 간 타액이나 배설물, 담배꽁초 등의 흔적을 수집, 수집된 성분을 토대로 유전자 감식을 벌여 범인의 신원을 파악한다는 사례는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 접한 바 있다.우리의 안심 밥상을 책임지고 있는 먹거리 수사에도 유전자 감식의 성과는 실로 고무적이다. 특히 명절 등 대목을 앞둔 시점, 소고기나 계란, 달걀 등의 이력을 허위 기재함으로써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는 미리 채취해 둔 식품의 유전자 샘플을 바탕, 유통시장에 내놓은 상품과의 엄격한 비교·대조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처럼 식품 관련 유전자 감식 역시도 소비자들로 하여금 안전 먹거리 시장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나의 내부 정체성, DNA유전자 감식 자체가 특수성을 내포하다 보니 일반인들에게는 쉬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가까이 있어 친숙하지만 실생활에서 만큼은 일정 부분의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자소송’에 관한 사안만큼은 감식의 신변잡기적 성질이 일정 부분 통용된다.위에서 언급한 가족 간 상봉뿐 아니라 양육권을 갖기 위한 절차나 친자확인 등의 소송 관련이 바로 그것이다.몇 해 전 검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이 불거지면서 유전자 감식의 중요성이 다시금 대두되기 시작했다. 다만 99%에 달하는 유전자 감식 기술의 정확도에 관해 자칫 ‘사적 영역’을 ‘공적 범주’에 편입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그렇다면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감식의 절차는 어떠할까. 이는 예상외로 단순하다. 법리 다툼의 요지가 있는 특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메일 또는 유선으로도 감식을 위한 신청이 가능하다. 유전자 샘플은 우편 등을 통해 송달하면 된다.송달된 샘플은 외부 물질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고유장치에 보관된다. 온전한 상태로 보관된 유전자 샘플은 각종 시약을 활용, 추출해내고 유전자 개체를 확장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이후 확장된 샘플은 ‘유전자 분석기’로 보내진다. 분석기 내 장착된 ‘분광 장치’가 유전자 관련 정보를 취합해냄으로써 15개에 이르는 유전자 항목을 비교 및 대조하는 과정은 마무리되는 것이다.전문가들은 친자의 확정 수치를 99% 정도로 본다. 이 정도 수치라면 동일 염색체를 가진 가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감식 중 오류 발생의 경우는 과연 없을까. 전문가들은 단언컨대 “NO”라고 답한다. 굳이 (오류 가능치를)꼽아보자면 그 가능성을 80억~90억 분의 1 수준으로 내다보는 정도다.유전자 감식에 드는 비용은 예전 대비 상당히 줄어든 추세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독자적 기술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과거에는 유전자 감식에 필요한 시약을 미국으로부터 전량 수입해 왔다.하지만 최근 (시약의)국내 독자 개발을 성공해냄으로써 기존 100만 원에 달하던 감식비용이 현재 들어 15만 원 내외 수준으로 줄어든 결과를 낳았다. 개발 배경은 고액의 (유전자)감식 비용 절감을 위한 ‘DNA 감식 국산화 및 선진화 사업’의 일환으로 풀이된다.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나를 상징하는 ‘외부적 요소’라면 유전자는 나를 대변하는 ‘내부의 정체성’이다. 이름은 자의에 따라 개명과 개선 등이 가능하지만 유전자만큼은 그 어떠한 시류 속에서도 꼿꼿이 나를 대표해 간다.유전자는 예스러운 구호인 듯하나 ‘명랑사회’ 구축과 개개인의 인격과 자존감을 고취시켜 줄 주요 단서다. 우리는 수십억분의 하나를 뚫고 소중한 유전자를 받아낸 개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모두는 좋은 방향의 ‘이기적인 유전자’임이 틀림없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벼슬 버리고 강산에 살기를 노래하던 가문 외세의 위협 앞에서는 목숨까지 내던져

기차 소리가 한낮의 고요를 깨뜨린다.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6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앞에는 시퍼런 낙동강이, 뒤로는 태백산 줄기 영남산(映南山)이 에워싼 배산임수의 명승절경에 자리 잡은 임청각(臨淸閣)은 그러나 잘려나간 마당에 가림막이 둘러쳐져 낙동강 조망을 막아 버렸다. 낙동강은 가까이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합수돼 남해로 긴 물줄기를 이룬다.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임청각(안동시 임청각길 63)은 뻔한 위치임에도 정작 가는 길은 꽤나 복잡하다. 안동역에서 임청각길을 따라 안동댐으로 가다가 법흥육거리에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따라가면 만난다. ◆임청-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임청각은 고성이씨 12세 이증의 셋째아들 이명(李洺)이 의흥군수를 내려놓고 중형 이굉(李宏)과 함께 중종 때인 1515년 건립했다. 고려 밀직부사를 지낸 이황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향헌공 이원의 여섯째 아들 참판공 이증(李增)이 관직을 버리고 안동에 이거한 것이 정착의 시작이다.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동쪽 언덕 위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임청’을 따왔다. 당초 99칸이었는데 1940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강제로 행랑채와 부속채 등이 철거되고 현재 70여 칸만 남았다. 이명의 아들 이굉(李肱)도 벼슬보다는 산수 간의 풍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한다. 백부가 지은 귀래정(歸來亭)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한 것이다. 그 아들 이용(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니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것이다. 3대가 과거급제 아닌 귀거래를 실천했으니 ‘고성이씨삼세유허비’가 세워졌을 만하다.중앙선 철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고택 임청각에 들어서면 ‘국무령이상룡생가’라는 커다란 문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단칸 맞배지붕의 문지방 없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바로 눈앞으로 군자정이 보인다.왼쪽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서 임청각 정침 마당에 선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이 마당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임청각이 들어선 자리가 산비탈 청석자리여서인지 깊지 않은 우물물이 맑다.석주 선생의 종손 이창수(55)씨는 “우물 앞에 있는 사랑채는 3명의 정승이 난다는 태실이다. 석주와 철종 때 좌의정이었던 낙파 유후조가 여기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후 외손들은 이 방에서 해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집 전체 구조는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친 용(用)자 형태로 지어졌다. 해와 달을 지상으로 불러내려 그 정기를 받으려는 염원이 건축에도 담겨 있다. 동쪽으로 담장 샛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다. 현판 글씨는 퇴계가 썼다. 별당 건물로 기단 위에 누상주와 주하주로 구성된 군자정 누마루는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지어졌다. 넒은 마루에는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 과정이 영상물로 볼 수 있도록 했다.군자정에 있는 많은 현판은 임청각의 역사와 임청각을 지켜온 후손들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 석주가 남긴 거국음(去國吟)과 아들 이준형의 피가 묻은 유서에서부터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의병장 고경명, 백사 윤훤, 파서 이집두 등의 시가 걸려 있다.임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과 고성이씨 16세 이복원은 사돈간이었다. 고경명의 시 ‘제임청각’은 임란 직전 동래부사였던 고경명이 이복원의 회갑연에 참석해 임청각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시판에는 고경명의 또 다른 별호 고태헌(高苔軒)이라 서명했다. 고경명은 두 아들과 함께 왜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내려다 삼부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의 아내 고성이씨는 16살인 시동생 고용후를 비롯한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친정 임청각으로 피란 와서 지냈다.“당시에는 영호남 간 혼인으로 교류했으니 지역감정은 없었음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이창수씨는 말한다. 이후 안동에 피란 왔던 고용후가 과거에 급제하고 안동부사가 되어 내려왔다. 그는 피란 당시 은혜를 입었던 고성이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 일가 등 사람들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종손 이창수씨는 임청각에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3가지를 빌리지 않았으니 첫째가 자식의 대를 끊이지 않음이요, 둘째는 글을 빌리지 않았고 셋째는 돈을 빌리지 않았다고 자존심을 내건다. 분재기에 따르면 한 때는 노비만도 408명이나 되는 대가였고 한문공부도 나름 했는데 현재는 자신의 아버지(이철증)가 넷째였고 자신은 먼저 돌아가신 종손 (이도증)의 맥을 이었으니 삼불차도 이제 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성지임청각은 보물(182호)이기도 하거니와 근세에 와서 독립운동의 성지로 그 존재가치를 드높였으니 정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한 곳이기도 하다.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을 비롯,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다. 석주의 부인 김우락과 동생(이상동·봉희), 조카(이형국·운형·광민), 당숙 이승화, 손부 허은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된다. 석주는 구한말 1905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고 지회장이 돼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과 국민 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해 간도로 망명한다.54세의 나이에 아우 봉희와 외아들 준형, 조카 형국과 문형 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유학 서적을 접어놓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난다. 이때 조상의 신주도 땅에 묻어 버려 임청각 사당에는 위패가 없다. 이런 석주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만주에서는 길림성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2년에는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고 1919년 한족회를 조직해서 자치활동에 힘썼다.서로군정서를 조직해서 독판(督辦)으로 활약했고 1926년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싸웠다. 69세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선 뒤 1928년 전민족 항일단체 통합에 노력하다가 1932년 5월12일 김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석주가 순국한 뒤 귀국한 아들 동구 이준형은 일제의 추적에 월곡면 도곡리로 피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만주로 망명한 석주가 임청각을 매각한 계약금을 갖고 갔다. 그러나 집안에서 계약금을 두 배나 주고 임청각을 되찾았다. 이를 두고 이창수씨는 “계약을 ‘물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당시 석주의 가족들은 호적을 만들지 않았고 임청각이 4명의 문중 대표 이름으로 소유권을 명의신탁했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가 명의자 4명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1명은 끝내 거절했다. 석주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80·이창수의 숙부)이 최근까지 10여 년간 뛰어다니며 후손들을 상대로 소유권 말소 판결은 얻어냈으나 소유권 등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공중에 뜬 상태다. 이항증 선생은 “보수적인 선비였던 석주가 종중 씨나락까지 팔진 않았다”며 일부의 임청각 소유권 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법원 소송에 비용도 많이 들었고 몸도 지쳤다”며 임청각의 소유권 문제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도 한 방법임을 시사했다. ◆탑동파임청각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탑동고택은 앞마당에 국보 16호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두고 있어 탑동파 고택이라 부른다. 신라 시대 법흥사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고성이씨 12세 참판공파 이증의 3남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안동에 정착한 뒤 그의 손자 이복원은 다섯 아들을 둔다. 그 중 셋째 이적 (李適)은 처음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에 분가했다가 다시 임청각 기슭 영남산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니 그가 탑동파의 파조가 된다.탑동고택은 1천여 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정자인 북정 등과 잘 꾸며진 연못을 둔 아름다운 고택이다.조선 숙종 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이 안채를 건축하고 손자 이원미가 1719년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했다. 대청 북쪽에 영조 때인 1775년 진사 이종주가 건립한 북정이 있다.임청각과 탑동종택이 모두 일제때 군부대가 수용되거나 철도 건설 당시 인부들 숙소로 이용되었는가 하면 철도 건설로 철거 훼손돼 옛날의 풍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탑동파 종손 이재익(80)씨는 어릴 때 넓은 백사장에서 멱감고 놀았던 낙동강이 댐 건설과 환경변화로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됐다고 아쉬워 한다. 2025년이면 중앙선 철로가 현 경북도청 쪽으로 이설되면 임청각과 탑동고택이 옛 풍경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메이크업 가짓수 줄여 자극 최소화…전신질환 유무 확인해야

최근 미세먼지, 꽃가루, 환경 오염 등과 관련해 민감성 피부를 호소하며 피부과를 내원하는 환자가 늘고 있다.민감 피부의 치료와 피부관리는 원인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째 원인이 되는 기저질환인 피부질환이나 전신질환을 치료하면서 피부를 잘 관리해야 하는 경우이다.둘째는 질환은 없으나 유발원인이나 악화인자가 있으므로 그것을 피하고 피부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셋째 특별한 원인이나 악화인자를 찾을 수 없어 단순히 피부를 잘 관리해야 하는 때로 구분한다.민감성 피부는 일반적으로 자극에 대해 정상인의 피부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해 당김, 따가움, 화끈거림, 통증 및 가려움증 등의 특징적인 자각증상을 보이는 피부를 말한다.자극이 가해졌을 때 증상이 일시적으로 발생하거나 눈으로 보이는 피부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나 자외선, 화장품, 스트레스 등 다양한 일상적 요인에 의해 증상이 악화될 수 있어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최근 피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 민감성 피부에 대한 화장품 회사들의 연구와 제품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관심에 비해 민감성 피부에 대한 명확한 피부과적 정의 및 진단법이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민감성 피부의 경우 피부 자극에 대한 신경감각 반응이 증가되어 일반적으로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 정도의 낮은 자극에도 주관적 혹은 객관적인 피부 증상이 발생하거나 일반적인 자극에 대해서도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또 외부 항원에 대한 면역반응도 정상피부에 비해 증가된다고 보고된다.피부 장벽기능이 손상돼 이러한 항원과 자극원이 쉽게 피부에 침투하고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민감성 피부를 위한 화장품을 선택할 때에는 제품에 포함된 성분을 살펴보는 것뿐만 아니라 화장품의 도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또 같은 피부 타입을 가진 환자에서도 계절에 따라서도 제품을 다르게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여름에는 일반적으로 피지 분비가 증가하고 피부 수화 정도가 좋아지는 반면 겨울에는 피부 자극 정도 및 건조증이 심하기 때문이다.세안부터 메이크업까지 단계별로 많은 종류의 화장품이 세분화돼 판매되고 있다.가능하면 모든 단계에서 자극이 없고 도움이 되는 제품을 환자의 피부 유형별로 맞춰 선택해야 할 것이다.더불어 환자 개개인의 피부 습성에 따라 민감성 피부에 동반될 수 있는 여드름 발생과 염증 및 홍반의 악화 등을 관리해 줄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보습제 뿐만 아니라 메이크업을 할 때도 가능한 최소 가짓수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한 제품에 다양한 기능을 보일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예를 들어 자외선 차단제가 포함된 메이크업베이스 같은 것이다.화장을 할 때에는 물리적으로 자극이 될 수 있는 도구들도 가능한 피해야 한다. 파운데이션을 바를 때도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펀지 보다는 브러시를 사용하거나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펴서 바른다.피부에 도구를 적용할 경우에는 항상 가벼운 터치로 항균성이 있는 브러시를 선택하며 화장 단계를 단순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피부에 적용하는 제품이나 단계가 많을수록 피부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는 성분이 피부에 도포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민감성 피부 증상이 오래 지속된다면 꼭 피부과 전문의를 찾아 피부 혹은 전신질환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필요할 경우 피부 검사도 받아야 한다.민감성 피부가 방치 된다면 피부 손상과 노화가 가속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두 영웅이 전한 보물의 울림에 적병은 물러가고 단비가 쏟아지네

신라 31대 신문왕은 이름이 정명으로 문무왕의 아들이다. 정명은 문무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6년째 되던 해에 태자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15년 동안 왕도에 대한 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신문왕은 문무왕이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와의 외교를 적대 관계에서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디딤돌을 놓아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탄탄대로 같았다. 그러나 전쟁 끝이라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어지러운 시기였다.왕위를 이어받는 시점에는 장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그의 아내를 궁궐에서 내치는 등의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다.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동해에 이견대, 감은사를 지었다. 감은사 바닥에는 물길을 내어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특이한 구조다.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선물로 준 만파식적으로 평화스러운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 신문왕편 만파식적에서 소개되고 있다.◆만파식적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김씨이다. 신문왕은 신사년(681년) 7월7일 왕위에 오른 후 돌아가신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에 감은사를 지었다.다음해인 임오년 5월 그믐께였다. 해관인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쪽 바다 가운데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 쪽으로 오고 있는데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다닙니다.”왕은 기이하게 여겨 일관 김춘질을 불러 물었더니 “돌아가신 임금께서 지금 바다용이 되어 이 나라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게다가 33천의 한 아들이신 김유신 공과 같이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주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해변으로 가신다면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고 했다.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 가마를 타고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았다.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신하가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 가서 잤다. 다음날 정오,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로 어두워지는데 7일간 이어졌다. 그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왕이 바다를 건너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쳐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마음으로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나더러 바치라고 했습니다”고 답했다.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 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으로 제사를 올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왕이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기림사에 이르러 서쪽 시냇가에 머무르며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이 궁궐을 지키다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경하하였다. 서서히 살펴보더니 왕에게 말했다. “이 옥대의 여러 구멍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구멍 하나를 떼어내 물에 담가 보시지요.”이에 왼쪽 두 번째 구멍을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시냇물은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지금까지 용연이라 부르고 있다.왕은 행차에서 돌아와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보관했다.◆장인의 목을 베고 만파식적으로 평화를 이루다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왜구의 침략에 대한 걱정과 함께 김흠돌의 반란 움직임에 대비책을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결국 김흠돌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사위가 왕위에 오르면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워낙 조심성이 많았던 문무왕인지라, 그는 아들 신문왕에게 김유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신검을 비법과 함께 전수했다. 또 그의 그림자로 움직였던 비밀결사대 조직도 고스란히 넘겼다.백전노장 김흠돌은 문무왕이 죽자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주인 태자 정명에게 “왕좌는 오래 비워두면 나라가 불안하니 빨리 즉위식을 해야 합니다”라며 즉위식을 촉구했다. 국상과 즉위식을 겹치게 해 혼란한 틈을 타 반란을 도모하려는 속셈이었다.정명은 어리지 않았다. 김유신의 신검으로 수련을 거듭하면서 속까지 가득 채워지는 기운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당백의 실력을 갖춘 결사대를 측근에 두게 되면서 자신감은 배가 되었다.“좋아요, 즉위식을 거행합시다. 백성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또다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든든한 왕이 되겠다는 맹세를 하는 잔치로 식을 진행하겠습니다”며 정명은 당당하게 대답했다.정명은 장인 김흠돌 세력의 배후를 하나도 남김없이 파악했다. 그들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분석해 그들의 향후 계획도 깨알같이 알고 있었다. 즉위식은 그들이 움직이기 쉽게, 겉보기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게 틈을 마련해 두고, 일당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정명은 즉위식을 거대한 잔치로 진행했다. 중앙 귀족들은 물론 지방의 수령들도 한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정명은 신검으로 화려한 검무를 선보였다. 김흠돌뿐 아니라 모든 장군들조차 처음 보는 신묘한 검술이었다. 마지막에 높이 도약하면서 신검을 월지 가운데로 뿌리며 불기둥을 뿜어 올렸다. 이는 비밀결사대에게 내리는 명령의 신호가 되어 김흠돌 일당의 수뇌들 목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아연실색하는 김흠돌의 가슴에도 어느새 용포를 걸친 신문왕의 칼끝이 파고들고 있었다.김흠돌 세력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 가두고,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즉위식에 참여한 대중들을 향해 외쳤다.“나는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용서하지 않겠다. 짐은 선왕의 유지를 따라 오로지 백성들의 평화스럽고 행복한 날들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이다.”즉위식을 마친 신문왕은 백성을 위해 주검까지 바친 아버지의 희생에 감사하며, 장사지낸 동해에 감은사를 지었다. 또 감은사 바닥에는 용으로 화한 아버지가 쉴 수 있도록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신문왕이 감은사 상량식을 올린 이듬해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함께 거대한 물줄기를 타고 동해 한가운데에서 용오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안쪽은 호수와 같은 잔잔한 물 이랑이 윤슬에 반짝이고 조각배 위에 옥함이 빛을 받아 가끔 번쩍거렸다. 생시 같은 꿈에 놀란 신문왕이 다음날 동해로 행차했다.감은사 마루에 꿈에 보았던 그 옥함이 놓여 있었다. 열어보니 옥저와 옥대가 한 쌍으로 있었다. 옥대에는 용 무늬가 돌아가며 살아 움직이는 듯 조각되어 있었다. 피리를 손에 들자마자 향기를 뿜어내며 저절로 입에 닿았다. 피리는 미처 불기도 전에 천상의 소리가 흘러나오면서 마음이 편안해 졌다. 허리에 두르면 저절로 병이 낫게 될 뿐만 아니라 힘이 생기는 옥대, 불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만파식적, 신라의 보물이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떠나볼까? 광활하고 신비로운 우주 세계로!

그 옛날 별나라 너머에는 옥토끼가 살았다. 간절해 마지않는 혹은 삶에 부칠 적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면 부지런히 방아를 찧는 옥토끼 두 마리가 보였단다. 다름 아닌 반짝이는 별을 보고 아름다움에 도취된 그날의 밤, 그 언저리였다.부부, 연인, 친구와 더불어 팍팍한 세상, 잠시나마 수놓은 별을 바라보며 마음 정화를 취해보리라. 하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저 별이 수백, 수억 년 전 생성된 그때의 별이었다는 것을. 그만큼 우주는 신비로웠고 광활했으며 우리는 무지했다.앞서 연재에서 다뤘듯 우리에게 우주 시대는 허구와 진실, 그리고 바람과 우려가 뒤섞인, 실로 복잡해 마지않는 ‘먼 훗날’ 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그날의 진실과 염원은 이제야말로 우리와 마주할 모양새다. ◆우주 시대 위한 인류의 시도우주탐사의 서막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봐야 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이라는 열강의 자존감은 ‘인공위성’이라는 선명성을 주창, 그 기술 개발에 가일 층 박차를 가했다. 전쟁의 상흔을 우주 시대 개막으로 말미암아 상쇄하려는 선언적 의미 하나와 ‘탈 지구화’라는 또 다른 국가적 레벨을 전 세계에 공고히 한 셈이다.무인 인공위성의 선두는 소련의 차지였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 궤도를 벗어나 우주로의 처녀길을 닦았던 것. 이로 말미암아 경외의 대상이었던 우주 영역은 형언할 수 없던 소싯적 괴리를 점차적으로 줄여나갔다.무인을 넘어 유인 인공위성의 시발도 소련의 몫이었다. 소련 국적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는 우주 공간 곳곳을 유영하기에 이르렀다.이제는 ‘달’의 영역이다.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긴 미국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의 공언을 시발로 달 착륙의 당위성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바로 전 세계를 상대로 말이다. 목표는 1960년 이전, “이 해가 가기 전 미국의 우주인은 오롯이 달에 착륙 후 지구로의 무사귀환을 영위해야 할 것” 당시 미국 우주산업의 캐치 프레이즈였다.미국의 이 같은 공언은 현실로 돌아왔다. 비록 당초 목표보다 9년 가까이 정체됐으나 1969년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면서 여타 행성으로의 진출과 저 너머 진실쯤으로 여겼던 믿음이 가시화되기에 이른다.이처럼 열강의 경쟁은 비록 치열했으나 우주 세계 진입으로의 험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동기이자 확실한 명분이 돼주었다. 암스트롱 선장은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는 불세출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그렇다면 대한민국 우주산업의 현주소는 어디쯤 와있을까. 우주 개발 간 중진국 진입을 위한 노력은 우선 고무적이다. 우리는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전라남도 고흥의 ‘나로 우주센터’를 통해 ‘나로호’를 발사한 이력이 있다.이 두 차례의 시도는 아쉽게도 불발에 그쳤다. 하지만 2013년 역사적인 첫 비행을 완수, 나로 위성을 예정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한다. 당시 교신 전반은 ‘카이스트 인공위성 센터’에서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다.우리나라 첫 우주인의 탄생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475번째. 이 여성 우주인은 당시 10일에 걸쳐 우주 정거장에 머물렀다. ◆우주 시대, 더이상 공상이 아니다.공상은 현실을 수반하고 미래를 대변한다. 지구 개별의 도시들이 필요시 우주선이 돼 날아오른다거나, 지구 전체를 하나의 인공위성으로 개조, 날려버린다는 상상력은 비단 공상과학 영화의 아류로 치부할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실제 중형위성 개발의 프로세스가 정부 차원으로 발현되고 있다. 정부 지원 아래 민간주도로 이뤄진다는 것인데, 3천100억 원 수준의 예산이 이 사업에 투입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SF적 요소가 가미돼있다. 바로 ‘전자광학카메라.’ 이는 대기권 밖에서 유영하고 있는 인공위성이 지상 4~5m에 이르는 물질을 인식해내는 초 고도화 기술이 탑재된다.인공위성의 시대, 로봇의 전 방위적 역할 또한 기대해 볼만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일이 수작업으로 영위해야 했던 작업을 ‘디지털 혁신’의 이름으로 로봇과 우주산업의 공생을 주선해 가고 있다. 실제 위성의 태양전지판 부착 및 생산 공정 전반은 로봇이 감시, 콘트롤 해가고 있는 시점이다.로봇의 기술적 범주가 ‘머신 콘트롤’에 그쳤던 과거와 달리, 이제 로봇은 인지와 뇌, 인공지능을 아우르는 등 본연의 역할을 확장해가고 있다. 로봇과 우주산업의 접점은 우연히 얻어걸리는 선물이 아닌 필연이다.우주공항과 그에 따른 라운지 사업도 우주 여행객을 맞이하기 위한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광활한 사막 위 건립 예정인 이 우주 공항은 우주 여행객의 편의와 서비스를 우선으로 제작·디자인한다. 특히 마치 고급 음식점을 떠올리게 하는 라운지는 여행객뿐 아니라, 배웅을 필요로 하는 관계자들의 출입도 일정 부분을 허용한다는 방침이다.우주여행은 더이상 우주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민간 우주 관광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준 궤도비행’의 이름으로 운영 예정인 이 사업은 통상 궤도 자체를 유영하는 비행 궤적을 넘어, 그에 준하는 우주 궤도에 안착 후 재착륙함을 뜻한다. 실제 올해 초를 기점으로 첫 민간 우주 관광객의 탄생을 알리기도 했다.여행과 숙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우주여행으로의 가시적 커리큘럼이 쏟아지면서 ‘우주 호텔’에 관한 개발계획도 동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미국의 한 부동산 재벌로부터 비롯됐는데, 현재 풍선형의 우주 호텔 개발을 위한 마지막 담금질에 매진하고 있다.이처럼 민간 기업이 우주 개발을 주도하는 '뉴 스페이스 시대'가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우주산업 성장의 ‘러닝 메이트’로서 또 다른 용틀임을 준비하고 있다. 실제 세계 유수의 우주 전문가들은 한국의 지구관측 위성 기술을 두고 ‘이미 선진국과 대동소이한 위치’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상황. 이는 곧 오늘이야말로 우주산업 간 ‘선택’과 ‘집중’의 시기라는 방증이다. ◆정부와 민간, 모두 하나 돼야인류는 달 착륙 이후 반세기를 보내왔다. 이제 우주산업은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의 범주에서 다뤄져야 할 만큼 가시적이자, 또한 표면적이다. 우리나라 역시 우주 개발로의 후발주자를 자청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하고 있다.일본은 1990년 달 탐사선 ‘히텐’ 발사에 성공했다. 이후 2007년 ‘셀레네 프로젝트’의 이름으로 달의 표면과 토질, 성분 등 고급정보의 수집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같은 해 중국은 ‘창어 1호’를 달 궤도에 올렸고 그 후 6년이 2013년 무인 탐사로봇을 달 표면에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중국은 이후 ‘창어 4호’를 통해 전 세계 최초로 미지의 영역으로 점철됐던 ‘달의 뒷면’ 착륙이라는 기염을 토해냈다. 인도 역시 2008년 ‘찬드라얀 1호’를 달 궤도에 안착시켰다. 우리나라는 내년을 달 궤도 진입의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이제는 탈 지구화를 넘어 태양계 행성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깊은 우주’로의 진출을 꾀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이 고무적이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최근 ‘화성’을 우주산업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프로젝트명 ‘화성 2117.’ 바로 ‘100년 뒤 인류가 살 수 있는 화성 도시 건설’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우주 사업 도약을 위한 우리의 몸부림은 지난 30년을 걸쳐 가열 차게 진행돼왔다. 정부와 우주산업 관련 연구시설 등을 중심으로 ‘오롯이 대한민국의 기술력이 투영된 인공위성 개발’의 명분과 동기, 실질적 기술 개발에 소리 없이 매진해왔다.그 산물로 세계 10번째 안에 드는 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이로 말미암아 2021년 대한민국 형 발사체 ‘누리호’의 시범 발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야흐로 (우주산업 간)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시점이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우주산업을 ‘공공산업’의 특정성에서 민간이 주축이 되는 뉴 스페이스 시대로의 도래를 겸허히 받아드려야 할 때라는 또 다른 증명이다.여기에는 ‘분석’의 힘과 그간의 경험, 인프라, 기술력이 녹아든 ‘빅데이터’의 활용이 주효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세계 우주산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최신 트렌드 분석과 상시적 동향파악이 전제돼야 한다. 정부와 기업, 학계의 초월적 만남. 이것이야말로 우주산업의 ‘시대적 사명’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가려워 손대면 2차 합병증…여름철 특히 상처 잘 번져 주의

아이들에게 발진이 생겼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부모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하곤 한다. 발진이 생겼을 때 주의해서 살펴야 할 몇 가지 질환을 구별하는 요령에 대해 알아보자.◆발진 시 발열 유무발열과 동반하는 발진인 경우는 대부분 진행성이 많고 항생제나 면역 글로불린 등의 치료를 하기도 하며, 다른 합병증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돌 전후에 잘 생기는 ‘돌발진’이라는 발진성 질환 3~5일 열이 난 후 떨어지는 발진이며, ‘홍역’ 등의 발진은 3~4일 전에 기침, 콧물, 눈곱 같은 전구 증상과 열일 생기며 발진이 나타나면서 열이 더 올라가는 상태를 보인다.그리고 발진과 열이 동반하면서 눈이나 입술이 빨개지는 ‘가와사키’라는 염증성 질환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면역 글로불린 이라는 주사제 치료를 해야 하고 심장 관상동맥 합병증 유무를 꼭 확인해야 한다.세균성 편도선염과 동반하는 ‘성홍열’이라는 병도 항생제 치료를 해야 하는 질환이다.물론 수막구균성 발진은 위급을 다투는 병이며 아이가 많이 아프다는 표현을 한다. 이 경우 열과 동반한 발진을 보이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가서 정확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예외로 발진 전후에 열이 없이 발진을 보이는 ‘점상 출혈반’이라는 질환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열을 동반하는 발진, 점점 진행하는 발진은 병원을 찾아야 한다. ◆발진과 가려움 동반 여부아픈 건 참아도 가려운 건 못 참는다는 얘기가 있다. 아토피 환자들이 괴롭고 만성인 이유가 바로 가려움 때문.가려우면 긁게 되고 긁으면 피부의 보호막이 깨져 주변의 세균이 쉽게 침투해 2차적인 염증성 합병증을 일으키고 염증이 진행하면서 태선화 같은 만성적인 상태로 넘어가 수분 항상성도 깨어지고 주면 피부도 약해져 다음에는 쉽게 방어막이 붕괴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긴다.그래서 어떤 발진이던지 가려 워서 손을 댄다면 빠른 시일 내에 개입해야 2차, 3차 진행을 막을 수 있다.열을 동반하는 발진과 마찬가지로 가려움을 동반한다면 서둘러 진료를 받아야 한다.이 밖에도 여름에 많이 생기는 발진으로 ‘농가진’이라는 세균성 감염 질환이 있다.대부분 코를 후비거나 모기 물린 곳의 미세한 상처를 통해 피부표면에 존재하던 황색포도상 구균 등이 침투해 수포를 만들고 터져서 노란 딱지 등을 만드는 질환이다.이질환 특징은 전신적인 감염보다는 병변을 건드리고 그 속의 내용물을 옆 피부에 자가 이식 방식으로 옮기면서 번진다는 것. 그래서 겨울보다는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에 더 많이 발생한다.농가진을 치료하려면 항생제 연고를 바르고 먹는 항생제를 복용해야 한다.가끔 ‘수두’를 염증성 땀띠 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수두와 같은 바이러스성 발진은 2~3일에 걸쳐 점차 진행한다. 첫날 오후에 얼굴과 팔 다리에 4~5개 발진이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몸통에도 생기고 발진 개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늘어난다면 바이러스성 발진일 확률이 높다. 수두는 가려움을 많이 동반하므로 긁어서 터트려 놓은 흔적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자랑 -성주군

‘별 고을’ 성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지세가 별 모양을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낙동강과 가야산의 수려한 풍광이 조화를 이루는 성주군은 1950년대부터 수박과 참외를 많이 재배했다. 낙동강을 끼고 있어 습한 땅이 많아 과채류 재배에 용이하기 때문에 참외 재배 농가는 5천여 가구에 이르며, 재배 면적은 4천h가 넘는다. 요즘은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과 유럽에 참외를 수출하고 있어 성주참외는 전국 명성을 넘어 세계적으로 뻗어가고 있다. 이를 토대로 성주군은 최근 가장 역동적인 모습으로 가시적인 성과들이 나오고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화·발전하고 있다. 과거의 농촌 풍경을 탈피해 성주별고을교육원, 국민체육센터, 1·2차 산업단지, 독용산성 자연휴양림, 성주호 수상레저산업 등이 들어서면서 도·농 복합도시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가야산(수륜면)가야산은 경남 합천·거창군, 경북 성주군에 걸쳐있는 명산이다. 1972년 제9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산세가 변화무쌍하고 검붉은 기암절벽이 하늘을 찌르는 장쾌한 광경이 펼쳐진다. 특히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2,성산고분군(성주읍)성산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1·2·6호분 및 대분·팔도분이 발굴조사 된 바 있으나 조사의 경위나 결과에 대한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승왜마을 남쪽 능선에 분포하는 대형봉토분 5기가 발굴 조사됐다. 지금까지 조사되어 밝혀진 무덤의 내부구조를 보면 매장주체부인 석실의 구조가 할석으로 축조한 할석과 대형판석을 주로 사용한 판석식의 수혈식석실분으로 되어 있다. 3, 독용산성 자연 휴양림(금수면)도지정문화재인 독용산성과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성주호 아라월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산림휴양과 수상레포츠를 동시에 체험 가능하다.숲속의 집, 숲속휴양관, 산책로, 등산로 등의 다양한 산림 휴양시설을 갖춰 방문객들은 도시생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또한 휴양림에서 내려다 볼 때 성주호가 한눈에 보이는 등 조망이 뛰어나다. 4,성밖숲(성주읍)성밖숲은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성주읍성 밖에 조성한 숲으로 300~500년생의 왕버들 55그루가 자라고 있다. 현재 성밖숲은 축제 등 각종 행사를 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산책 공간, 생활체육 활동 공간 등 다양한 주민생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성밖마을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등 여러 흉사가 이어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5,세종대왕자태실(월항면)월항면 인촌리 선석산(742.4m) 아래의 태봉 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 19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원손인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다. 이곳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됐다. 6,한개마을(월항면)조선시대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해 개척한 마을로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성산이씨 집성마을이다.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10곳에 이르고 있다. 건축물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됐다. 전체적인 마을구성은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이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7,포천계곡(가천면)가야산의 여러 계곡 중 대표적인 명소로서 물이 맑고, 풍부할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힘찬 가야산 전경과 어우러져 옛 성주 선비들이 심신과 학문을 도야하는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포천’은 계곡 물이 마치 광목천과 같다하여 부른 말이기도 하며, 계곡의 반석에 심청색 무늬가 많아 마치 베를 널어놓은 모습 같다하여 포천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8,회연서원과 봉비암(수륜면)조선 선조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 정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강학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다.서원 뒤쪽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대가천의 맑은 물과 기암괴석과 수목이 절경을 이루는 무흘구곡 제1곡인 봉비암이 자리잡고 있다. 9,가야산야생화식물원(수륜면)2006년 개관한 국내 최초 야생화 전문식물원이다. 총 400여 종의 수목과 야생화를 식재하여 야생화 자원보전과 자연학습과 학술연구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야생화 문화공간이다.식물원은 소나무 외 92종의 교목, 산철쭉 외 54종의 관목, 할미꽃 외 257종의 야생화를 보유하고 있다. 종합전시관과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된 유리온실을 갖추고 있다. 10,아라월드(금수면 봉두리)천혜의 아름다운 경관과 독용산성이 둘러싼 성주호에 위치한 아시아 최대 그리고 국내 최초의 수상레저 테마파크다.각종 교육시설과 환경, 다양하고 전문적인 프로그램과 서비스, 국가대표와 프로선수 등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휴식과 레저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형 수상레저 테마파크이다. 11,성주아트랜드(선남면)2004년 성주도예체험공원으로 개설되어 2005년 성주아트랜드로 명칭을 변경하고, 경북도 관광자원 체험관으로 선정되어 경북지역의 맞춤식 체험수업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사계절 연중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 전문 체험학습장으로 도자기, 천연염색, 가죽, 한지공예 등 연령대에 맞춘 다양한 공예체험 프로그램이 있어 보다 수준 높은 체험을 할 수 있다. 12,성주생활문화센터(금수면)성주생활문화센터는 2000년 문화관광부와 성주군, 성주교육청이 지역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예술인들에게 제공한 창작스튜디오이자 주민들의 문화체험공간으로 설립됐다. 부지면적 1만㎡ 넘는 넓은 공간에 7개의 스튜디오와 소극장, 다목적 야외공간, 잔디구장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도예, 풍물체험과 같은 전통 체험뿐만 아니라 연극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김재호 기자 kjh35711@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