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피부과 의사회와 함께 하는 피부건강 이야기 (16) 원형 탈모증

원형탈모증은 국민의 1.7%에서 발생하는 흔한 질환이다. 원형 탈모증은 남성형 탈모증과 여성형 탈모증 다음으로 많이 발생한다. 1.원인 유전적 소인과 환경인자가 관여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환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정확한 발병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즉 원형 탈모증의 임상형이 다양한 만큼 발생기전이나 특징도 차이가 있고 비슷한 임상 양상을 보이더라도 개개인마다 서로 다른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2.임상 양상 원형 탈모증은 비교적 흔한 질환으로 두피에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탈모반으로 발생한다. 급성으로 발병하며 타원형 또는 원형의 경계가 분명한 탈모반의 형태로 탈모반 내에 매끄러운 표면을 갖는 것이 전형적이다. 임상에서 접하는 사례 중 90% 이상은 두피에서 관찰되지만 눈썹, 속눈썹, 턱수염, 팔다리 등 체모가 자라나는 신체 어느 부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원형 탈모증이 심해 두피 전체의 모발이 소실되는 경우를 온머리 탈모증이라 한다. 갑자기 발생하거나 부분 탈모에 이어 발생하며 다른 부위에도 부분탈모가 관찰될 수 있다. 전신의 체모가 모두 소실된 경우는 전신 탈모증이라고 하며 갑자기 발생하거나 오랜 기간 지속된 부분 탈모에 이어 발생할 수도 있다. 탈모반 내의 피부는 일반적으로 육안 소견상 정상이나 약간 분홍빛 또는 붉은빛을 띠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탈모반 내에서 자주 관찰되는 특징적인 소견은 감탄부호 모발로 모발의 근위부는 얇아졌고 원위부가 더 굵은 짧은 모발을 의미한다. 탈모반이 확장되는 활성기에 주변부에서 모발당김검사를 시행하면 양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소아환자에서 감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질환은 머리 백선증과 발모벽이다. 머리백선증은 염증의 동반이나 경미하게 존재하는 인설의 동반 여부로 감별될 수 있다. 발모벽은 불규칙적이거나 기이한 형태의 병변을 보인다. 또 다양한 길이를 가진 부러진 모발들이 존재하므로 원형탈모증의 매끄러운 표면과 달리 거친 촉감이 느껴지는 병변이다. 휴지기 탈모증과 미만성 원형탈모증을 감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병력 청취로 유발인자를 밝혀낼 수 있고 이것이 휴지기 탈모증 진단의 단서가 된다. 모발당김검사를 시행했을 때 휴지기 탈모증에서는 휴지기 모발만 보이는 반면 미만성 원형 탈모증에서는 영양실조상태의 성장기 모발을 볼 수 있다. 피부홍반성루푸스 및 이차 매독도 감별해야 한다. 3.치료 원형 탈모증의 치료에는 스테로이드의 도포 및 전신 투여, 병변 내 주사, 엑시머레이저, 접촉면역치료 등 다양한 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치료에 대한 반응도 다양하다. 특히 탈모범위가 넓은 환자의 치료에는 면역치료가 효과적이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치료법이다. 최근에 최신 유전자 연구결과에 근거해 다른 면역질환의 치료에 사용이 허가된 기존의 표적치료제가 원형 탈모증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원형 탈모증환자에게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4.예후 및 임상경과 질환의 임상경과는 매우 다양하며 불규칙적으로 재발하는 임상경과가 특징적이다. 환자 중 25%에서는 한 번의 발병으로 끝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적으로 모발이 다시 자라 회복되는 경우가 흔하다. 환자의 60%에서 적어도 1년 내에 탈모반 부위 모발의 부분적인 재성장을 보인다. 첫 1년 내에 40%에서 재발하지만 5년 후에도 재발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원형 탈모증은 대부분 예후가 양호한 질환이므로 이 질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부 치료가 잘 반응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인해 많은 환자가 검증되지 못한 방법에 현혹돼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을 보는 것은 물론 역시 치료가 잘 안 된다는 심리적인 좌절감을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심지어는 탈모의 기전이 전혀 다른데도 원형 탈모를 악화시키는 치료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형 탈모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 박재홍봄씨피부과원장

[대구 약령시, 연구논문 SCI급 국제학술지 등재] 아토피, 궁중비법 ‘자금정’으로 고친다

사복석 청신한약방 대표가 한약방에서 자금정을 내보이고 있다. 아토피 질환은 양약에서도 이렇다할 특효약이 없다. 각질발생을 줄이기 위해 보습을 도와주는 것이 치료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약이 아토피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논문이 발표돼 이목을 끌고 있다. 대구 악령시의 한방 고유처방 ‘자금정’이 아토피성 피부질환에 치료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내용의 논문은 세계적 저명 학술지에 게재되면서 한의약계가 주목하고 있다. 대구 약령시와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기술응용센터가 공동으로 시행한 자금정의 아토피성 피부질환 치료 가능성에 대한 연구논문이 SCI급 학회지인 ‘저널 오브 에드노파마콜로지(Journal of Ethnopharmacology)’ 7월호에 게재됐다. 저널 오브 에드노파마콜로지는 보완통합의학 분야에 상위 20% SCI급 저널이다. 저널평가지표 수록 사이트 JCR(학술지인용색인)차트 내 27개 중 4위다. 이번 연구에서 자금정을 피부각질세포에 투여한 결과 아토피 피부질환에서 발생하는 염증이 최고 50%까지 감소했음을 확인했다. 동물실험에서도 아토피를 유발한 실험쥐에 자금정을 투여한 결과 부종, 홍반, 각질 등의 피부병변이 유의미하게 줄었고 이상증식되는 표피도 회복되는 모습이 관찰됐다. 자금정을 투여한 실험쥐에서 어떠한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는 등 안정성도 확보됐다. ◆궁중비방 해독약이 아토피에 효능 자금정은 농약중독 효능연구 실험에서도 독성이 감소되는 양상이 확인돼 농약 급성 및 만성노출 시 해독제로도 활용가능성을 보여줬다. 자금정은 한약 가운데 해독약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는 궁중비방의 전통 한의약이다. 문합, 산자고, 대극, 속수자, 사향 등 5가지 한약재로 제조됐다. 자금정은 고가 약재인 사향이 많이 들어가고 제조공정이 까다로우며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돼 있지 않아 그동안 대량 생산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구 약령시에 위치한 청신한약방 사복석 대표가 15년 전부터 제조했으며 아토피 치료와 해독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번에 한국한의학연구원과 함께 효과 입증을 위한 연구에 들어간 것이다. 대구시는 현재 자금정과 같은 고유처방 한약들의 산업화를 위해 국비 연구개발자금을 확보했다. ◆동의보감 등 12개 고유처방에 기록 사복석 대표는 1970년에 한약방을 창업해 30년 동안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해독에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했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2004년 자금정을 제조하는데 성공했다. 자금정 효험이 기재된 중요 한방 문헌을 살펴보면 시재백일선방, 동의보감, 방약합편 등 12개 중요 고유처방 해독문에 기록이 돼 있다. 궁중내의원에서 조제해 임금님께 올리면 임금님은 이 약을 신하들에게 나눠 주던 구급상비약으로 널리 사용됐다. 자금정은 잘못된 식생활 환경에서 발병하는 급ㆍ만성 원인 불명의 복합적인 만성질환을 비롯해 과음주로 인한 알콜중독, 간손상, 숙취해소, 심혈관 질환, 중풍 전조증, 뇌경색 등 급성기 질환에 특히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체 내부에 독소가 쌓여서 유발되는 만성 피부질환, 만성 두드러기, 아토피성 피부질환,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약물중독, 미세먼지로 인한 인후염, 성대결절, 쯔쯔가무시병, 독충에 물렸을 때, 의식불명 위급시에도 효능이 있다. 사복석 대표는 “해독약이 흔할 것 같지만 자금정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 해독약이 개발된 것이 없다”며 “대구한의과대학 방제과학 글로벌 연구센터장 김상찬 교수와 간 보호연구와 약물의존성 억제연구에 대해 공동연구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 대표는 또 “최근 중국과 일본의 전통한의약 산업은 수출 주도형 신흥 산업으로 성장하는 반면 우리나라 한약 산업화는 부진한 상황에서 한방시장은 점차 위축돼 가고 있다”며 “자금정이 산업화를 통해 개발이 된다면 한방 생약을 제대로 방제학을 과학화시키는 것이며 한약의 안전성 유효성에 대한 불신 해소 및 복용의 편의성 제고를 통한 한약 제재 활성화를 통해 국내외 새로운 시장 개척자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한겨울 복숭아꽃 핀 산 중턱에 지은 절 ‘도리사’…화재로 소실된 후 부속 암자로 옮겨

도리사 찾아가는 길에 만난 태풍 ‘콩레이’가 만든 폭포.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는 최초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지은 사찰이다. 아쉽게도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그 도리사는 아니다. 17세기 중엽 원인을 알 수 없는 큰불로 도리사가 모두 불에 타면서 불상을 도리사 위쪽에 있던 금당암으로 옮겨 이름을 도리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리사는 냉산 중턱 아름드리 소나무가 둘러쳐진 양지바른 곳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태조산 도리사’라고 쓰여 있지만, 기록에는 ‘냉산 도리사’라고 전해진다.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가 직접 구미시 해평면 냉산 아래 지은 사찰이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중국 양나라에서 전해져 온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향으로 성국공주의 병을 고친 이적을 기념하고자 매년 ‘향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도리사의 흥망성쇠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아도가 당시 신라의 수도인 계림을 다녀오던 중 한겨울에 산 중턱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자두꽃)이 핀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가 눌지왕 2년(418)이다. 이후 신라불교 성지가 된 구미(당시 일선)에는 도리사를 중심으로 주륵사, 죽림사, 법륜사, 보천사 등 큰 사찰이 잇따라 세워졌다. 이와 더불어 죽장리 5층 석탑, 낙산리 3층 석탑, 도리사 화엄석탑, 원리 3층 석탑, 주륵사 석탑, 등 거대한 석탑들이 들어섰다. 아마도 신라불교 최초 전래자인 아도가 창건한 절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불교가 꽃을 피웠던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많은 신도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1천여 년 넘게 이어 온 도리사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도리사의 쇠퇴와 관련한 전설이 하나 있다. 도리사 절 옆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이 샘의 물을 마시면 힘이 장사가 된다는 것. 이 샘물을 마신 한 스님이 매번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렸는데, 한 선비가 이를 보다 못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도리사에 들어가 “앞산에 큰 돌산을 하나 만들면 절이 더욱 흥하리라”고 선동했다. 결국, 샘물을 마시고 힘이 남아돌던 스님들이 스스로 돌을 나르기 시작해 불과 일 년여 만에 몇 개의 돌산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돌산이 생겨난 후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화재까지 발생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도리사는 배가 떠 있는 등선형인데, 돌산을 만들어 배가 침몰한 형국이 됐다는 것.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이 돌산은 1958년 낙동강 호안공사를 하면서 모두 옮겨져 현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마지막 돌을 옮길 당시, 천둥과 폭풍우가 심했다고 한다. 돌산이 없어진 후인 1976년과 1977년 석승상과 세존사리가 발견돼 많은 불교인들에게 경사를 안겨줬다. 설화지만 어찌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도리사는 숙종 3년(1677) 큰 불로 모든 건물이 재가 됐다. 물론, 도리사의 창건과 쇠퇴는 우리나라 불교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왕권에 의해 들어온 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고려후기 신진사대부들이 수입한 성리학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서서히 그 존재감을 잃어갔다.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도리사는 현대에 들어서야 그 빛을 보게 됐다. 등선형의 도리사를 짓누르고 있던 돌산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금동 6각 사리함과 그 속에 세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보관돼 온 세존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면서다. 도굴로 방치돼 절 밖에 있던 석종형 사리탑을 경내로 옮겨 와 복원공사를 하던 중, 1977년 4월18일 그 속에 금동사리함과 진신사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불교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리함은 6각으로 표면에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음각 돼 있는데, 기존에 발견된 사리함이 사각형이거나 8각형인데 비해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조성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 가져온 진신사리로 추정된다. ◆도리사 가는 길 도리사의 시작은 일주문부터다. 도리사는 이 일주문에서 5㎞쯤 떨어져 있다. ‘신라최고가람 태조산도리사’라는 일주문 현판 아래를 지나면,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2㎞쯤 이어진다. 한국의 가로수길 62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가로수 길이다. 일주문이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시작점이라면, 전성기 때 도리사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2㎞에 걸쳐 길게 늘어선 이 느티나무 가로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터널을 이뤄 도리사를 찾는 방문객들을 온전히 도리사 한곳으로만 집중시킨다. 누가 있어 신라 최초 가람 도리사 방문을 이리 환영해 줄까? 이 길을 지나가려면 마치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설렘과 호기심, 그리움이 교차한다. 그래서 사찰의 일주문은 ‘속세와 내세를 가르는 경계’라고 하는가 보다.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끝나면 도리사까지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다. 꽤 큰 주차장을 갖춘 이곳엔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전통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들어서더니, 최근엔 유행을 타고 현대적 감각을 갖춘 커피숍까지 생겨났다. 절 아래는 조용하더니 경내는 제법 사람들로 북적인다. 많은 절들이 점점 주는 신도들을 붙잡고 새로운 신도들을 모으고자 음악회나 법회, 축제 등을 여는 것이 요즘 추세다. 불교 용어로 ‘야단법석’을 여는 셈이다. 도리사 역시 가을로 접어들면서 많은 가을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유물과 유적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 조선 숙종 때 도리사가 전소되자 새로 금칠을 한 후 산내 암자였던 금당암 본당(지금의 극락전)으로 옮겨졌다.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는 특이하게 생긴 석탑이 하나 있다. 최근 보수 작업을 마친 도리사 석탑이다. 화엄석탑이라고도 부른다. 보물 제470호로 신라시대 때 만들었다. 높이 4.5m, 기단 높이 1.3m, 기단너비 3m 규모로 화강암이 주 재료다. 쉽게 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이다. 마치 전탑처럼 흙벽돌을 구워서 쌓은 듯한 이 석탑은 기교는 없지만, 깊은 신앙으로 우직하게 만든 석공의 마음이 깃든 듯하다. 이 탑을 바라보고 앉은 전각이 극락전(문화재자료 제318호,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6호)이다. 당초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 극락전 안의 불상이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이다. 17세기경 나무로 조성한 것으로 여러 차례 개금 불사(금으로 새로 칠함)를 한 사실이 복장유물을 통해 밝혀졌다. 극락전과 화엄석탑 아래 작은 등산길을 따라가면 아도화상의 좌선대와 사적비가 있다. 아도화상이 앉아서 좌선했던 곳으로 너른 바위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쇠잔해 가던 도리사가 최근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세존 사리탑의 발견 때문이다. 극락전 뒤편에 높이 1.3m 남짓의 크기로 세상을 놀라게 한 석종형 부도, 곧 세존사리탑이 있다. 도굴돼 방치됐던 이 탑을 다시 경내로 옮겨와 세우는 과정에서 독특한 모양의 금동 6각 사리함(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사리함, 국보 제208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과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도리사에도 변화가 생겼다. 도리사의 원래 본당은 금당암의 본당인 극락전이었다. 하지만, 세존진신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본당이 적멸보궁으로 바뀐 것. 불교에 있어 존엄의 대상은 경전에서 불상, 진신사리 순으로 높아간다. 사찰 가장 뒤쪽에 자리한 도리사 적멸보궁에는 통상 본당에 있어야 할 불상이나 탱화가 없다. 대신 투명한 유리가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 유리 너머로 세존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다. 도리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적멸보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아득하다. 어느 곳 하나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마도 세상을 등지고 ‘나’를 찾고자 했던 고승들의 마음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적멸보궁에서 멀리 세상을 굽어본다. 첩첩 산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길게 이어진다. 어느 때는 바다처럼, 또 어느 때는 파도처럼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오랫동안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선지 낡아 보이는 전각이 초록빛 한결같은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적멸보궁 옆엔 마음을 내려놓고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에 육신의 때를 벗길 수 있는 소나무 숲이 있다. 그곳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백의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이라는 한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의역하면 ‘그대에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니, 단지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고 마음만 한가롭구나. 복사꽃을 띄운 물은 아득히 흘러가는데, 이곳이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구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대가 있다. 서대는 산책하던 아도화상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절을 세우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점지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가 가리킨 곳이 지금의 직지사다. 아마도 아도화상은 이미 세상 막히는 것이 없는 자유인이었던 모양이다. ◆인근 관광지 도리사 적멸보궁 옆 소나무 숲. 바쁜 일상에 지친 방문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도리사를 찾는 이라면 일주문 안팎 식당에서 삼겹살과 진한 향의 미나리 맛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하수로 재배해 청정하고 쌉싸래한 향이 일품이다. 도리사 인근엔 즐길 거리도 많다. 산악자전거와 유유자적 걷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임도가 있고, 암벽타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냉산 산악 레포츠 공원이 바로 인근에 있다. 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냉산 산림욕장과 선사시대 유적인 낙산리 고분군, 주인을 위해 의롭게 죽은 개를 위로하기 위한 의구총, 임하댐 수몰로 고향을 떠난 전주 류씨 무실파가 고향에서 살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마을을 만든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도 가까이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식민지 백성 설움 담은 노래 너도나도 따라불러

고향 성주에 있는 백년설 노래비. 은퇴 후 평소 언론계 친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추천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차례 입원과 수술을 했으며 마침내 1978년 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공항에 나온 선후배들의 배웅을 받자 그는 “가고 싶지 않다”고 큰 소리로 외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국생활은 말 그대로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1980년 12월6일. 그는 나그네 길을 떠나듯 이국에서 먼 길을 떠났다. 고향의 눈을 그리워하며.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백년설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꼭 주막집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눈 오는 마당을 혼곤히 넋을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구성지며 부드러운 성음이 있을 수 있는지 감탄 할 수밖에 없다.”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연보1915년 5월19일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출생1931년 성주 농업보습학교 졸업1935년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작사 시작1939년 노래 ‘유랑극단’ 출반. 예명 ‘백년설’로 가수 데뷔1940년 ‘나그네 설움’ 출반. ‘번지 없는 주막’ 히트1941년 이한옥과 결혼. ‘대지의 항구’ 등 히트1942년 오케레코드사로 이적.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1948년 대구로 이주1950년 고아원 청동원(靑童園) 운영1953년 부인 이한옥 사망,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경북사회사업연합회 회장1955년 가수 심연옥과 결혼1958년 백민영화사 창설1960년 가수협회 초대회장1963년 한국연예단장협회 초대회장. 서울 시민회관서 은퇴공연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백년설 독집’ 발매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1980년 12월6일 타계2002년 문화훈장 보관장 수훈백년설의 에피소드#1. 1950년대 중반 백년설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초청받았다. 평소 이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고 아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측근 보좌관이 백년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하도록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백년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노래만 부를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 백년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도 생일 축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었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고 한번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력에 눈치 보며 아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 큰 형인 이판룡씨가 1956년 사망했을 때였다. 백년설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 성주로 향했으나 상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상객과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을 막으며 ‘노래를 한 곡 먼저 불러주고 상가에 가라’는 것이었다. 백년설은 문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화까지 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백년설은 형 상가 앞에서 ‘한잔 술에 한잔 사랑’을 부르고 나서야 상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3. 화류계에서도 백년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방공연을 마치면 그를 초청하고자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 슬쩍 빠져나가 혼자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만 있으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진수성찬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순재 언론인

오르간 계단 오르며 흥얼흥얼…한국음악 100년 기억 오롯이

유충희(59) 관장은 건축전기설비기술사, 전기철도기술사, 국제기술사, 공학박사로 공학도이자 사업가다. 그는 이미 동탑산업훈장,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의 표창을 받은 성공한 공학도이자 사업가이지만 음악에 푹 빠진 음악애호가이기도 하다.유충희 관장은 “한국대중음악의 뿌리는 트로트”라며 “일제강점기와 보릿고개를 견디며 민주화 등의 사회 변화와 고비마다 대중음악이 국민들과 함께 있었다”며 클래식보다 대중음악을 즐기는 이유를 말했다. 이어 “대중음악은 클래식 못지않게 명곡이 많다”면서 “대중음악의 중요성과 우수성을 깨달아야 된다”고 강조했다.유 관장은 “음악은 제 삶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라며 “음악이 좋아 하나씩 모았던 자료들이 7만점에 이르러 이를 공유하고 싶어 박물관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시공간이 부족해 아직 공개하지 못한 자료들이 많다.그는 “4층을 증축해 전시실을 늘리고, 대학가요제를 부활해 대중음악의 신드롬을 재현하고 싶다”는 욕심을 소개했다. 이어 “한국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대중음악사를 공부하는 6개월 과정의 대중음악아카데미, 성인가요제 등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그는 또 “선진 20개 나라 중에 자국의 대중음악박물관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면서 스스로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을 건립한 이유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세계음악박물관, 종합뮤직센터 등도 설립된다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았다.경주시를 비롯한 행정기관에서도 음악박물관을 적극 활용해서 체험프로그램과 전시, 공연 등의 이벤트를 운영한다면 상생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공학도이자 사업가가 설립한 개인 음악박물관이 체험장소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힐링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문화쉼터로 발전하고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두 개의 얼굴 가진 야누스 ‘조울증’] 우울감 반복…지나치게 많이 먹고 잔다면 ‘의심’

우울증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인구의 1%는 평생에 한 번 조울증을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증과 우울증의 양 극단 사이에서 기분이 변화하는 질병인 조울증에 대해 알아보자. ◆조울증(양극성 장애)이란?최근 연예인이 자신이 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다고 털어놓거나 우발적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 중 조울증 치료 이력이 있는 경우가 알려져 조울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조울증의 의학적인 명칭은 양극성 장애로 조증상태와 우울증상태가 일생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병이다. 보통 조증시기보다 우울시기를 더 자주 더 오랜 시간(적게는 3.7배, 많게는 37배) 동안 겪는다. 즉 우울증상이 있다고 해서 의학적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울증상이 10대나 20대처럼 젊은 나이에 시작돼 자주 반복되고, 지나치게 많이 먹고 많이 자는 형태를 보이거나, 항우울제를 복용 시 조증이 유발되는 경우 조울증을 의심해볼 수 있다.◆조울증의 증상 및 특징조증기에는 기분이 들뜨거나 불안정하면서 지나치게 활동이 많아지는 상태가 1주일 이상 지속된다. 자신감이 넘쳐 말과 행동이 많아지고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다고 느낀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아이디어가 떠올라 일을 많이 벌이고 지나치게 낙관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과도하고 현실적이지 못할 때가 많아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증세가 악화되면 다른 사람들과 자주 다투고 공격적 성향을 보여 폭력 사고 위험이 커진다. 반대로 우울기에는 우울감, 의욕저하, 식욕저하, 불면증 등의 조증 증상과는 반대 양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 미래를 비관적으로 느끼며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증상이 악화되면 자살시도를 하기도 한다. 사고의 속도도 느려지고 이해력과 판단력이 감소한다. 글을 읽을 때 집중하지 못해 앞에서 읽은 것을 기억하지 못해 다시 읽기를 반복하며 다 읽어도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조울증 원인과 치료조울증은 두뇌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는 신경전달물질, 뇌세포 회로의 활성도, 호르몬 균형 등에 문제가 생기는 뇌질환이다. 발병이나 악화에 스트레스와 생체주기 변화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수면과 각성리듬과 같은 일중 변화와 여성의 경우 생리주기 및 출산, 갱년기 등의 여성호르몬 변화, 계절 특히 일조량 변화가 조울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봄, 가을과 같은 환절기에 조증의 재발이 빈번하며 겨울에 우울증의 재발이 빈번하다. 조울증의 치료에서 약물치료는 핵심적이다. 조울증은 당뇨, 고혈압처럼 만성적 질환이므로 일시적으로 증상이 호전되어도 계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지치료나 가족치료 등을 병행할 경우, 재발률을 낮출 수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도움말:한국건강관리협회 대구지부

[잘못된 습관이 만든 ‘근막통증증후근’] 긴 시간 같은 자세·과도한 운동 후 스트레칭 ‘필수’

근막통증증후군은 근육 내 통증유발점으로 인해 그 부위 및 연관부위까지 통증을 보이고 나아가 운동, 자율신경적 증상이 발현되는 질환이다.질환의 특징은 골격근이나 근막 내에 단단한 띠 또는 결절이 있고 이 통증 유발점에 자극을 가하면 국소연축반응(local twich response)이 나타난다. 통증유발점은 항상 긴장하는 자세유지근이나 사용이 많은 씹기 근육 등에 많이 위치하며 등세모근, 목갈비근, 목빗근, 어깨올림근, 허리네모근에서 흔히 발생한다.우리나라는 공식적인 통계가 없지만 미국에서 시행한 설문조사에는 전체 인구의 53%가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고된 바 있다. 30∼40대 중년층에서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고 65세 이상 노인에서는 유병률이 85% 정도로 높다는 보고가 있다. 결국 일생에 한 번쯤은 근육뼈대계통 통증으로 고생하며 그 원인이 근막통증증후군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증상을 유발 감각 증상으로 자발 통증, 압통, 연관 통증이 있는데 주로 쑤시고 가끔은 감각 이상을 동반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연관 통증은 다양한 강도의 둔하고, 쑤시는 양상으로 신경의 단일 피부 분절 분포 형태 또는 신경근 분포 양상과 다를 수 있다. 또 두통, 관절 통증, 요통, 엉덩이나 하지에 궁둥신경통(sciatica) 같은 통증을 호소할 수 있다.운동 증상은 근육경직, 운동범위의 제한, 근력 저하 등의 기능 장애이다. 통증보다 짧고 억제된 근육으로 인한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데 주로 잠재성 유발 점에 의해 일어나며 특히 수면 이후나 장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한 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자율신경증상으로 혈관수축, 발한, 눈물, 타액분비 과다, 현기증, 귀울림 등이 있으며 다른 증상들로 수면장애, 우울증과 불안 등을 동반할 수 있다◆이상근 증후군 환자의 신체 검진 중 FAIR test(이상근 테스트) 상에서 환자가 통증 반응을 보였을 때 이상근 증후군을 의심한다. 이상근 중후군은 포착성신경병증으로 궁둥신경분포 부위의 통증, 무감각, 이상감각, 위약감을 보인다. 이 증후군은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는 자세나 과도한 운동으로 유발될 수 있고, 초기 증상은 엉덩이 부위의 심한 통증, 하지와 발로 전달되는 방사통이다. 허리나 엉덩관절을 굽히거나 물건을 들어 올릴 때 통증이 심해진다. 심한 통증이 있을 때에는 걸음걸이가 바뀔 수 있다.치료법으로는 통증과 기능제한에 대해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병행한다. 보존적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국소마취제 등을 이상근과 궁둥신경 영역에 주사하거나 이상근의 이완을 위해 근육 내에 보톡스 주사를 시행할 수 있다. 치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자가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스트레칭하는 것이다. 치료의 시작은 환자교육을 통해 해로운 자세나 행동, 생활 습관 등을 피하는 것이다. 치료의 기본 원리는 통증유발점을 불활성화시키고 통증 경로를 차단함으로써 통증의 악성 순환 고리를 차단해야 한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도움말:영남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김혁구 교수

소·양 1천 마리씩 키우며 모례장자네 5년간 머슴살이한 아도…집터·우물 아직 남아있어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곳으로 알려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일원. 현재 신라불교 초전지가 조성돼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는 공식적인 국가사절 등 외교통로를 통해 이뤄졌다. 이에 비해 양국에 둘러싸여 있던 신라는 외교적 고립은 물론, 내부 귀족과 왕족의 갈등 등 지배체제가 정착되지 않아 국가사절을 통한 불교 전래는 늦어졌다. 결국, 법흥왕 8년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에 의해 신라 왕실에 불교가 전해졌다. 불교를 수용한 법흥왕은 이를 장려하려 노력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러했듯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족과 갈등관계에 있던 귀족의 반대로 국가 차원의 불교 확산은 실패했다. 급기야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 백성들은 이미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변방부터 불교가 차츰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 구미(일선)가 있다. ◆구미(선산 또는 일선) 신라 불교의 초전법륜지 우리가 늘 배워온 것처럼, 신라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됐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눌지왕 때 구미(선산 또는 일선)에 불교가 처음 전래됐다는 기록이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이 기록과 오랫동안 한국불교 문화를 연구해 온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학논집 제24편에서 ‘선산을 포함한 구미지역이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 논문에서 “선산(구미) 지역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로 주목돼 왔다”며 “문헌의 기록과 현지의 전설, 각 지역의 유적ㆍ유물 등을 종합해 신라불교의 초전지역 또는 발상지역으로 심증을 굳혔다”고 밝혔다. 특히 1968년과 1997년 두 차례 이곳에 대한 조사에서 전시대를 통해 많은 불교 유적ㆍ유물이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의 두 번에 걸친 현지 조사와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불교가 구미 도개에 전해지는 과정은 이렇다. ◆고구려 사람 ‘아도’, 구미로 향하다. 지금의 도리사 극락전과 도리사 석탑 인근 소나무 숲에 있는 아도화상 좌선대와 사적비. 집까지 이어진 칡줄기를 따라 냉산에 오른 모례장자가 아도를 만난 곳이다. 뒤로 보이는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 6 년)에 세운 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이 적혀있다. 아도화상은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 모례장자네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양 1천 마리와 소 1천 마리를 기르며 5년간 일해 주고 이곳을 떠났는데, 품삯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모례가 섭섭한 마음에 아도가 가는 길을 물으니 어디라고 밝히지는 않고 “얼마 후 칡순이 모례의 집에 내려올 것이니, 그 칡순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났다. 이후 정월 엄동설한에 칡순이 모례의 집 문턱에 들어오자, 모례는 놀라 그 줄기를 따라 올라가니 그곳에 아도가 있었다. 그가 있던 자리가 바로 도리사 자리다.(현재의 도리사 위치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 도리사는 도리사 부속 암자인 금당암을 새로 지은 것이다.) 아도는 모례장자에게 두 말쯤 들어가는 자그마한 망태기를 주며 시주를 부탁했다. 선뜻 이를 받아들인 모례는 곧 후회를 하게 된다. 두말 쯤 들어갈 정도의 망태기가 몇 섬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례는 망태기를 가득 채우지 못한 채 망태기를 아도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아도는 이를 종자로 삼아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지었다. 그 후 도리사는 번성하고 승려도 크게 늘었다. 하루는 모례가 시주를 나온 탁발승에게 “더욱 부자가 되는 길이 없느냐”고 묻자, 시주는 하지 않고 욕심만 부리는 모례가 미웠던 탁발승은 “이곳 지형이 배 모양이므로 여기는 돛을 세우면 더욱 좋고 부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모례가 이 말을 믿고 석비 셋을 세웠는데,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어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아도가 양과 소 1천 마리씩을 키웠다고 전하는데, 도개면 신림리와 다곡리에 실제로 양천골, 소천골(또 소골, 우실, 쇠골)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있다”며 “마을 한쪽에 모례장자의 집터가 있고, 모례장자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다”고 말했다. 도개2리 마을 어귀에 있는 석주. 시주에 인색한 모례를 골탕먹일 생각에 도리사 스님이 세울 것을 권유한 석주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례의 집안을 망친 이 입석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라의 미소라고 불릴 만큼 자연스런 미소를 간직한 불상의 모습을 품고 있다. ‘모례정(井)’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인데, 1천600여 년의 내력을 지닌 이 샘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돼 있다. 샘 모양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해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우물 깊이는 3m, 둘레는 단면이 원형이며, 종단면은 가운데가 배가 부르고 상하가 좁다.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들었는데, 그 나무판자가 아직도 썩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정 교수는 “또 마을 어귀에 석주 하나가 있는데, 이 입석이 모례의 집안을 망쳤다는 문제의 석주삼좌 중 하나”라며 이들 지형과 유적, 유물 등이 아도가 구미 도개면에 신라 불교를 처음 전한 흔적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선산 지역을 답사하는 과정에 도리사를 중심으로 한 주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절터를 10여 곳이나 발견해 조사했다”며 “이런 사실을 미뤄보면 신라의 불교는 삼국 중 가장 뒤늦게 공인됐지만, 그 근원은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라고 강조했다. ◆기록에 등장하는 ‘아도’ 아도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고구려 승려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 묵호자가 일선군에 등장해 고을 사람인 모례가 자기 집에 머물게 했으며, 비천왕 때에는 아도화상이 시중을 드는 사람 3명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나타났는데,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와 각훈의 해동고승전은 아도가 263년 19세에 신라로 들어가 계림 왕성 서쪽에서 생활하며 임금에게 불법 시행을 건의했다가 음해당하자 이를 피해 속림(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지냈으며, 미추왕이 죽은 뒤 아도도 입적하고 다시 불교가 폐하여졌다고 전한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묵호자와 아도가 신라에 온 시기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일연은 묵호자와 아도는 동일인물이며, 아도가 일선군에 온 것은 눌지왕 때일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도, 아두, 묵호자 등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승려’를 뜻하는 말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스님을 뜻하는 ‘승(僧)’을 몰라서 ‘아두삼마’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삭발한 중’이라는 뜻으로 당시 신라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불법을 전하는 포교승들이 숨어서 활동했었음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들 기록 모두에서 아도나 묵호자가 당시 신라의 땅인 구미(일선) 모례에 집에서 생활하거나 숨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내용을 같이하고 있다. ◆구미(일선·선산의 옛 고을 이름)를 선택한 이유 모례장자의 집이 있었던 ‘도개’는 신라시대 때 일선군에 속했다. 이는 ‘불도가 열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모례의 집을 중심으로 아도가 신라 땅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개지역은 불교문화의 전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도는 불교 전도를 왜 왕성이 있는 계림(지금의 경주)이 아닌, 일선군 도개에서 시작했을까?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는 내물왕 때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왜국을 물리치고, 실성왕과 눌지왕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선군(지금의 구미)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왕경인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토착신앙과 왕권과 귀족 간 갈등 등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계림(경주)에 비해, 교통상 군사적 요충지인 일선에서 신라 불교가 시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문에 아도가 신라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력을 따라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유물로 본 신라불교 초전지 정영호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구미가 예부터 불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봤다. 금오산 일대에 현존하는 수 개의 사찰은 물론, 산 정상과 산기슭에 20여 개의 폐사지가 있다. 또 아도화상의 이야기와 주륵사 폐사지, 죽장사 오층석탑, 낙산동 삼층석탑 등 찬란했던 불교 유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등에도 신라 불교가 처음 시작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과 현재 전해지는 유물, 유적, 전설 등으로 현재 도개면 도개2리 일대가 신라 불교의 초전지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국보 제182호와 183, 184호로 각각 지정된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과 구미 선산읍 금동관음보살입상 2점은 1976년 도개리와 그다지 멀지 않은 구미시 고아읍에서 사방공사 도중 발견됐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삼국시대 후기 전형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발견 당시 주변에 기와와 토기 조각이 상당수 발견돼 아마도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불교가 국교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 불교 신자들이 처음 불교가 전해진 구미(선산, 일선)지역을 순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신자와 승려들이 찾던 구미(선산)의 불교는 고려를 거치면서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조선시대 들어 영남학파의 근간이 된 성리학의 번성지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면서 급격히 위축된 후 오늘에 이른다. 구미 도개지역이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재조명된 것은 근세 들어서다.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도개가 신라불교 초전지로 우리나라 불교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재조명하면서다.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운동에 앞장선 용성스님은 스승 혜월스님의 유훈에 따라 신라불교 초전지인 도개리를 찾아 수행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수행한 용성 스님은 “신라 불교가 처음 전래된 모례마을을 가꿔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삶이 고된 사람들에 ‘신바람 박사’표 처방 행복과 웃음으로 마음의 건강 회복

황수관 박사는 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로 임명됐다. 사진은 이듬 해 초 필리핀을 방문, 결핵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고난의 길을 헤쳐 온 황수관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우 이웃들에 대한 기부와 봉사를 쉬지 않았다.태안반도 기름때 제거, 백령도 주민 위로 강연, 오지 주택 보수까지 그는 틈만 나면 봉사에 나섰다.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로 임명돼 르완다, 필리핀 등 외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다.그는 의외로 정치권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황 박사가 권세까지 탐한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정치가 봉사와 애국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그는 1999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음 해 그는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마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이회창 총재의 간청으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경주 국회의원 보선과 비례대표 공천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성공할 것으로 낙관했다.◆느닷없는 종말2012년 12월11일 건강했던 그가 갑자기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로 서울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진단 결과 간농양으로 밝혀져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입원 20일 만인 30일 병이 악화돼 합병증인 급성 패혈증으로 숨졌다. 만 67세, 느닷없는 종말이었다. 유족으로 부인 손정자 씨와 세 자녀가 있다. ‘황수관 박사의 웰빙 건강법’ 등 저서 20여 편과 운동ㆍ건강 관련 논문 100여 편을 남겼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연보1945년 8월30일 일본 히로시마 부근 출생1957년 안강북부초등학교 졸업, 포항 영일중 입학1960년 안강중 졸업1963년 안강농고 졸업1966년 대구교대 졸업1968년 손정자와 결혼1966년 3월~1979년 10월 초등학교 교사1978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야간) 졸업1980년 경북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야간) 졸업1981년 5월~1987년 2월 경북대 의대 연구원1990년 국민대 대학원 생리학 박사 취득1987년 10월~1999년 10월 12년 간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교수1997년 SBS 예능 프로그램 ‘호기심 천국’ 출연1999년 새천년민주당 입당2000년 4월 제16대 총선 서울 마포 을 지역구 출마, 낙선2009년 3월 경북 경주 국회의원 재선거 한나라당 공천 탈락2010년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 임명, 해외 봉사 활동2012년 12월30일 67세로 별세

가볍게 산책 후 즐기는 불가마…쌓였던 피로 싹 달아나네

경주보문단지 서쪽 순환도로 가운데에서 천군동 피막골의 웰빙타운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안내간판과 함께 바람개비와 솟대가 서 있다. 오늘날 서울을 두고 ‘상전벽해’라 한다. 뽕밭이 빌딩숲으로 변화해 사람들이 붐빈다. 경주에도 상전벽해라 할 웰빙타운이 조성되고 있다. 산속에 생활폐기물매립시설과 소각장, 음식물자원시설, 재활용선별시설이 들어서면서, 주민복지시설이 함께 조성돼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주민복지시설은 웰빙센터, 찜질방과 목욕탕, 헬스장 등으로 구성되고, 축구장과 족구장, 풋살구장 등의 스포츠시설도 조성됐다. 또한 자연생태학습지와 산책로가 길게 이어지는 생태공원 환경드림파크가 자리잡고 있다. 이와 더불어 내년 상반기에 카라반과 오토캠핑장, 사랑방 등을 갖춘 친환경에너지타운이 완공된다. 에너지타운은 온수를 활용한 실외 목욕탕 자쿠지, 비어가든, 서바이벌게임 모험체험시설 등으로 꾸며진다. 또한 인근에 글램핑, 골프연습장, 미니수영장 등의 다양한 레저시설들이 하나 둘 들어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시설들이 완공되면, 혐오시설이 힐링공간으로 대변신을 하면서 주민편익 복지지원시설로 크게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웰빙타운’은 경주보문관광단지에서 5분 거리다. 명활산성에서 경주엑스포 방향의 중간쯤에 서쪽 숲 속으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요술램프처럼 하나, 둘 시설들이 드러난다. 웰빙타운이 조성된 지역 인근에는 복원되지 않은 석탑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여서 탐방객들의 발길은 뜸하지만,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웰빙타운은 경주보문단지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웰빙센터와 문화자원이 풍부한데다 다양한 레저시설들이 늘어나면서 힐링명소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경주 웰빙센터 웰빙센터 옥상에 마련된 옥상 휴게실. 경주 천군동 산 270-1번지 일대에 생활폐기물매립시설과 소각장, 음식물자원화시설, 재활용선별시설 등의 종합자원회수센터가 형성되면서 웰빙센터와 복지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웰빙타운이 형성되고 있는 천군동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안동권씨들이 움막을 짓고 피란살이를 하면서 피막골, 필막골 등으로 불리고 있다. 피막골에 웰빙센터가 설립되면서 쓰레기처리장이 복지시설로 변신하고 있다. 찜질방과 헬스장, 축구장, 족구장 등의 스포츠시설까지 다양하게 들어서면서 웰빙타운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웰빙센터에는 사우나와 목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찜질방이 있다. 찜질방은 황토불가마, 게르마늄방, 참숯방, 개인토굴방, 수면실, 휴게실과 식당까지 갖추고 있다. 옥상은 공원휴게실로 조성돼 있다.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전망이 시원하게 트인 공간이다. 웰빙센터는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쉼터로 인기다. 특히 가격이 착해 시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목욕과 사우나는 물론 찜질을 하는데 6천 원이면 온종일 모임을 하거나 쉴 수 있다. 2㎞ 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3천 원에 이용할 수 있는 혜택까지 누린다. 헬스장과 실내골프연습장도 마련돼 하루 이용권이나 월 회원으로 등록해 웰빙시설을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웰빙센터 바로 옆에는 축구장과 전문족구장과 풋살장도 있어 경주지역 조기회원들이 많이 활용하는 등 인기다. 족구장은 다목적 구장으로 배구와 배드민턴도 즐길 수 있다. 웰빙센터는 보문단지에서도 승용차로 5분 거리여서 경주시민은 물론 관광객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하루 500여 명이 이용하고 있으나, 주말에는 1천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찾는다. 또 인근지역에 글램핑과 골프장 등을 갖춘 관광농원이 조성 중이다. 웰빙타운은 말 그대로 경주에서 잘나가는 힐링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환경드림파크 환경드림파크에 조성된 생태습지. 연못 가운데까지 나무데크가 설 치돼 포토존으로 이용 된다. 환경드림파크는 웰빙센터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친환경 종합공원이다. 남북으로 왕복 2㎞ 남짓 짧은 거리지만, 산책로 주변에 자연생태학습단지와 장미원, 정자, 벤치 등의 다양한 편의시설과 쉼터가 생태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누구나 부담없이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거리다. 가볍게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왕복하게 되고, 야생화를 보면서 사색을 즐기는 낭만을 찾는다면 두어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드림파크에 들어서면 공기부터 달라진다. 해발 200여m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이 아늑한 기분을 들게 한다. 멀리 동북 방향으로 트인 전망은 층층이 펼쳐지는 절경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하늘을 향해 저절로 두 팔을 벌리게 한다. 공원 전체에는 야생화들이 가득하다. 가을에는 미국쑥부쟁이가 마른 체구에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하얗게 꽃을 피워 소금밭을 연상케 한다. 하얗게 깔린 보도블록을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양파를 까듯 새로운 풍경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곳곳에 벤치가 있고, 정자도 군데군데 세워져 쉼터를 제공한다. 작은 연못 주변에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자라면서 야생화들과 조화를 이뤄 포토존이 된다. 나무로 만든 아치에는 넝쿨장미를 올릴 계획인지? 아직은 하늘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내년쯤이면 장미 다발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철을 잊은 듯 10월에 핀 붉은 장미 네댓 송이가 내년을 예고한다.  환경드림파크에 조성된 산책로. 아직은 키가 낮은 메타쉐콰이아들이 줄을 지어 울창한 밀림을 꿈꾸고 있다. 계곡을 따라 물 흐름은 없지만, 잔디와 돌담, 야생화들이 작은 나무다리와 이색적인 풍경으로 자연공원을 형성하고 있다. 친한 사람과의 동행이라면 팔짱이라도 끼고 걷고 싶어지는 정감이 넘치는 산책로다. ◆종합캠핑장 친환경에너지타운 경주시가 웰빙타운을 힐링명소로 조성하고자 웰빙센터에 이어, 종합캠핑장 친환경에너지타운을 건설하고 있다. 에너지타운은 웰빙센터 남쪽 인근 2만1천585m² 부지에 63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카라반 16대, 오토캠핑장 4면, 관리사무실 사랑방(400㎡) 규모로 조성된다. 카라반은 편리한 편익시설이 설치된 북유럽풍의 우수한 제품으로 갖춰 고객을 유치한다는 전략이다. 카라반이 들어서는 곳은 서남쪽 산비탈이어서 웰빙타운 전체와 멀리 명활산 입구까지 내려다보이는 조망권이 좋은 지역이다. 카라반은 환경드림파크 생태연못 바로 위에 설치돼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기에도 좋다. 카라반을 설치할 장소는 이미 준비가 대부분 완료됐다. 오토캠핑장도 카라반이 위치한 곳과 비슷한 지역으로 조망권이 시원하게 트인 곳이다. 공동샤워장과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전기시설도 연결해 편리하게 캠핑을 즐길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경주시종합자원화단지 도병우 이사장은 “에너지타운에는 시설의 열을 이용해 실외목욕탕 자쿠비를 설치하고, 서바이벌 같은 모험 체험시설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양한 레저시설들이 들어서면 겨울은 물론 4계절 손님이 몰려들 것으로 기대된다. 도 이사장은 “환경드림파크 일원에 조명시설을 완비하면, 산책로가 밤에도 환하게 밝아져 야간에도 멋진 포토존을 구성해 웰빙타운은 힐링명소로 거듭날 것”이라 설명한다. ◆문화재와 레저시설의 공존 웰빙타운 바로 맞은편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폐사지 석탑재 웰빙타운이 조성되고 있는 피막골에는 신라시대 사찰이 있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경주가 노천박물관이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한다. 웰빙센터 바로 맞은편 철제 보호 울타리 안에 폐 탑재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절터였음을 증명한다. 아쉽게도 사찰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물론 사찰의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석탑의 지붕돌과 몸돌, 기단 갑석과 면석, 지대석 3매 등 석탑재 8매가 남아있다. 석탑의 1층 몸돌로 보이는 탑신석 사면에 사천왕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원형의 사리공이 있다. 사천왕상은 4구 모두 머리에 투구와 갑옷을 착의한 무신상이다. 발아래 악귀 대신 구름을 딛고 서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왼손에 탑을 든 북방다문천왕상은 둥근 두광에 발아래에 구름까지 비교적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나머지 무신상은 훼손이 심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지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기단 갑석도 일부만 남아있으며, 윗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1층 지붕돌의 옥개받침은 5단이고, 윗면에는 1단의 탑신 받침이 보인다. 지붕돌의 전각에는 풍탁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재 주변에는 기와 조각, 토기 조각, 자기편 등이 드문드문 드러나 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게 한다. 사학자들은 “무신상의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9세기 석탑으로 추정하며, 한정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고 말한다. 특히 유적이 도로 바로 옆에 있어 도난의 위험이 있고, 훼손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발굴조사와 복원사업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다. 또 마을 일대 묘소 3기에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화강암으로 만든 배례석들이 쓰이고 있다. 어느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찰에서 완벽한 상태로 옮겨져 고분에 대한 연구와 함께 학계의 조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문화자원들이 마을에 있고, 웰빙센터와 환경드림파크에 이어 친환경에너지타운이 조성되는 등 다양한 레저시설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있어, 피막골은 경주를 대표하는 힐링명소로 자리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피부과의사회와 함께 하는 피부건강 이야기 (15) 두드러기

“원장님 피부에 두드러기가 생겼어요.”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 분이 이야기를 꺼낸다. 실상 피부를 살펴보면 두드러기인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 두드러기라는 피부용어는 일반인에게 어느 정도 널리 알려져서 피부에 발진이 생기며 가려운 증상을 동반하면 두드러기라고 인식하고 피부과를 찾는 경우가 흔히 있다. 두드러기는 피부의 여러 부위를 돌아다니며 발진이 생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피부질환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요즘은 이러한 특징을 미리 알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촬영했다가 보여주는 환자분도 꽤 있다. 두드러기는 벌레에 물렸을 때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은 피부 발진이 특징인데 이를 전문용어로 팽진(wheal)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팽진은 몇 ㎜ 정도의 아주 작은 것부터 손바닥보다 더 큰 것까지 매우 다양하며 병변이 빠른 속도로 커지고 서로 융합해 다양한 지도 모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피부가 몹시 가렵거나 따가우며 경계가 명확하게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부어오른다. 이러한 팽진은 혈관반응으로 인해 피부의 진피상부에 국한될 때에는 임상적으로 두드러기로 나타나며 부종이 심부진피, 피하 또는 점막하 조직에 침범하면 혈관부종(angioedema)으로 나타난다. 흔히 말하는 ‘속두드러기’라는 표현이 이런 혈관부종을 뜻한다. 이때는 피부뿐만 아니라 위장관계, 호흡기 증상을 동반하는데 위장관 점막에 침범했을 때는 입술이 평소 크기보다 2배 이상 붓고, 구토, 복통 및 설사를 유발하기도 한다. 기도 부위 점막에 침범하면 쌕쌕거리며 쉰소리를 내거나 심한 경우 호흡곤란이 발생하는 때도 있다. 이 경우 응급치료를 해야 한다. 편의상 두드러기는 급성과 만성으로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수일 또는 수주 동안 지속하다가 완전히 소실되는 경우를 급성두드러기라고 한다. 적어도 6∼8주 이상 지속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계속되면 만성두드러기라고 한다. 급성 두드러기로 대부분 피부과를 찾는데 발진 전 먹은 음식물이나 약물, 벌레물림, 감기와 같은 각종 감염질환 등에 의한 경우가 흔하지만 종종 그 원인을 찾지 못할 때도 있다. 이럴때는 우선 약물치료를 시작하면서 발진 전 평소와는 달랐던 점을 찾아 피해준다면 대부분 증상은 쉽게 사라진다. 하지만 급성 두드러기를 치료하다 실패하거나 치료시기를 놓쳐서 만성 두드러기로 진행돼 피부과를 찾는 경우가 최근에는 꽤 있는 편이다. 만성화된 상태에서는 원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 환자의 일상생활, 환경, 음식물, 물리적 인자와의 관계를 철저히 조사하고 각종 검사(혈액검사, 유발검사 등)를 통해 원인물질에 대한 규명과 전신 질환 동반 유무에 대한 확인 등의 의사와 환자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항히스타민제가 두드러기 치료에 가장 중요한 약제이다. 부신피질호르몬제(스테로이드)는 여러 가지 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급성 두드러기에 단기간 사용할 수 있다. 만성두드러기에서는 더운 목욕, 과도한 운동, 양모, 담요, 술 등 가려움증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들을 피하도록 한다. 국소적 치료로는 찬물 목욕, 전분이나 오트밀 등을 이용한 약물 목욕이 도움되며 멘톨이 포함된 로션이나 국소스테로이드 연고의 간헐적 도포를 시행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두드러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빠른 치료를 위해서는 가까운 피부과를 찾아 전문의 상담을 통한 치료를 권한다.박영도대구 아름다운피부과원장

가을철 감염질환과 예방법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가을이 됐다. 가을철에 유행하는 감염병과 야외 활동 시 주의해야할 점을 미리 알아두면 보다 즐겁고 건강하게 이번 가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쯔쯔가무시병 쯔쯔가무시병이란 오리엔티아 쯔쯔가무시균 감염에 의한 급성 발열성 질환이다. 주로 가을철 야외활동 시 진드기에 물려 감염되며 사람 간에는 감염이 안 돼 격리 및 소독이 필요없다. 털진드기 유충이 동물의 체액을 흡입하는 봄과 가을이 감염에 위험한 시기이다. 감염 후 보통 8∼11일 정도의 잠복기를 거친 후 급성으로 발생하며 두통, 발열, 오한, 구토, 발진, 근육통, 기침 등이 나타나고 진드기 유충에 물린 부위에 가피가 형성된다. 심하면 기관지염, 폐렴, 심근염, 수막염 등이 생길 수 있다. 초기에 발견해 적절한 항생제로 치료하면 빨리 낫지만 단순 감기로 착각해 치료시기를 놓치기 쉽다. 따라서 증상이 있을 경우 즉시 의료기관을 방문해 조기진단 및 치료를 받아야 한다. 쯔쯔가무시병에 감염돼 회복된 과거력이 있는 환자도 다른 혈청형 균에 다시 감염되어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렙토스피라증 렙토스피라증은 렙토스피라 균에 감염돼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신성 질환이다. 사람과 동물에게 감염될 수 있고(인수공통전염병) 특히 설치류(쥐류)에게 감염돼 사람에게 전파된다. 감염된 동물은 만성적으로 보균상태를 유지하면서 렙토스피라 균을 소변으로 배설하여 흙, 진흙, 지하수, 개울, 논둑 물, 강물 등을 오염시킨다. 사람과 동물은 오염된 소변에 상처 부위나 점막을 통해서 직접 접촉돼 감염되거나 오염된 물이나 환경에 간접적으로 노출돼 감염된다. 우리나라의 주된 보유동물은 등줄쥐다. 따라서 야생 쥐 사이에 균 전파의 기회가 많아지는 8∼11월에 주로 발생된다. 임상증상은 감염 후 1∼2주의 잠복기를 지나서 나타난다. 먼저 혈액과 뇌척수액에서 균이 나오는 렙토스피라 혈증기(발열기)가 4∼9일 정도 지속된다. 이 기간 급작스런 두통, 근육통, 오한, 발열과 폐출혈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폐출혈로 인한 사망의 위험이 크다.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살인 진드기로 불리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은 2011년 중국에서 처음 확인된 SFTS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으로 SFTS 바이러스에 감염된 진드기에 물려서 감염된다. 국내 진드기의 SFTS 바이러스 보유율은 0.5% 미만으로 알려졌다. 보통 고열과 구토, 설사 증상이 주로 나타나며 이후 의식장애, 경련 등이 나타나며 장출혈 등의 증상을 동반할 수 있다. 현재까지 효과적인 치료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대증 치료를 하게 되나 현재 국내 통계 자료로는 치사율이 47% 정도로 매우 높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도움말: 김현아 교수 / 계명대 동산병원 감염내과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서 불법 전파”…고구려와 가깝던 ‘일선’ 불교 먼저 꽃피워

중국 동진의 스님 마라난타가 백제 사신과 함께 발을 디딘 곳으로 알려진 법성포 인근에 전남 영광군이 조성한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전경. 연간 13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불교는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함께해 오면서 각종 생활풍습 속에도 녹아들었다. 또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산, 물, 바람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산 중에 남아있는 창건 수백 년을 넘긴 사찰들은 가끔 산과 사찰을 찾는 대중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치유를 선물한다.물론 전남 영광군은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을 통해 지역을 관광지로 변모시켜 가고 있다.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구미(일선)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수백 곳에 사찰이 들어설 만큼 불교가 번성했다.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편안한 하루하루 누구 덕일까…한쪽 눈 뽑히는 고문 당하고도 끝끝내 싸웠던 의병대장 있었지

1908년 8월 17일 대전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의병장 노병대 체포에 관한 문서. “노병대(1856~1913)선생의 항일행적에는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쪽 눈을 빼어버리는 혹독한 고문에도 초지를 꺾지 않고 항거했다는 점이고, 셋째는 항일의 표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입니다.”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 열사’를 편찬한 상주문화원장 김철수 박사의 설명이었다. 노병대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배불리 먹고살 수 있는 것도 다 노병대 선생 같은 분이 나라를 지켜준 덕분이라며 상주가 낳은 인물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김 박사는 “선생이 남긴 글이나 문서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소실돼 선생의 생애를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노병대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 선생의 아우, 후재 노극신 선생의 13대 주손으로 1856년 12월4일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재조(才操)와 기국(基局)이 범인과 달라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며 성장했다.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이었던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의 행적은 존성상현(尊聖尙賢)하려는 유학자로서의 자세와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대장으로서의 활동으로 요약된다. 1895년 선생은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한다. 포기하지 않고 1898년 정월 허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진사 허운과 함께 도움을 청하러 중국 곡부를 찾아간다. 사람을 시켜 성묘(聖廟)일을 고했으나 공자의 72세 손 연성공은 병을 핑계 삼아 나타나지 않는다. “부자(夫子)의 가학(家學)이 어찌 이토록 오만하기에 이르렀는가?” 선생은 편지로써 연성공의 무례함을 꾸짖는다. 선생의 기개에 놀란 연성공은 사과를 하고 옛 친구처럼 맞아 수 십 편의 시(詩)를 주고받으며 교유한다. 연성공의 편지를 받아 조정과 태학(太學)에 전했지만 향교 향사의 회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림의 법도를 지키려는 선생의 발걸음은 멈춤이 없었다. 호남지방에는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을 정도로 당시 향교 부근에는 범장(犯葬)된 묘가 많았다. 선생은 이와 같은 사실을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해 모두 옮겨가도록 한다. 이렇듯 선생은 유학자로서 반듯한 자세와 숭고한 정신은 철저한 것이었다. 나라 안의 일을 나라 밖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는 자세나 향교에 대한 배타적 존중에 대한 옮고 그름에 대해 살피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학자로서 선생은 주자주의에 눌러앉은 공리공론의 관념론자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고종으로부터 밀조 받아 노병대선생과 500여 명의 의병들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던 충북 보은군 산외면 장갑리. 전투를 벌인 후 의병들은 상주로 철수했다. 선생의 의병활동 일지의 대강은 이렇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참정대신 민영환은 자결하고, 지사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황성신문에 발표한다. 조야는 물끓듯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노도처럼 일어난다. 선생은 북향통곡하고 상경해 전 판서 이용원을 만난다.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를 하겠다”고 간청한 끝에 선생은 고종 임금으로부터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비서원 비서승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를 받는다. 1907년 8월20일 해산된 진위대 2백여 명을 규합, 속리산 계곡에서 창의한다. 해산병 수백 명이 추가로 합세해 의병이 무려 1천여 명에 이른다. 선생의 의병대는 충북 보은에서 적 2명을 사로잡고, 청주 미원에서는 5명의 적을 사로잡는 등 전과를 올린다. 적의 공격을 피해 상주 청계사로 진을 옮겼으나 적병의 급습을 받아 진영을 미원으로 옮긴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경북 성주, 경남 안의, 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투쟁을 하다가 거창의 우두령에서 크게 패한다. 속리산으로 귀환했을 때 남은 의병은 겨우 50여 명이었다. 1908년 7월13일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하던 중 보은군 관기면에서 왜군 수비대에게 체포된다. 왜군의 문초에도 선생은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는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희들의 종자를 없애고자 창의하였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의병조직을 뿌리 뽑기 위해서 온갖 고문을 다했으나 자백하지 않자 왜군은 왼쪽 눈을 뽑는 만행을 저지른다. 1908년 9월1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기소돼 10년의 유형을 선고 받는다. 재판부는 선생에게 “이런 형벌은 너희 임금이 시행하는 것이니 우리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하자 선생은 대노하여 “우리 임금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으랴?”하고 꾸짖는다. 분을 참지 못한 왜적들은 선생을 형무소로 보내는 한편, 종자(從者)들을 시켜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에 있는 공의 야로당(野老堂) 종택을 불태워 버린다. 길거리로 내몰린 가족들은 호구지책으로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의 출옥은 기약도 없고, 집도 가재도 모두 잃은 부인 김씨는 사랑채 앞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1905년부터 8년간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답 300두락과 산 8필지 약 250정보 등 많은 재산을 모두 소진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특사로 강제 출옥 된다. “너희들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 “나는 내 나라를 구하려다 도적떼와 같은 너희에게 체포되어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옥중에서 죽어 금수만도 못한 네놈들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며 끝까지 저항한다. 출옥 후 선생은 의병활동을 위해 군자금 모집을 시작한다. 1912년 11월 18일,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류참봉가에 군자금 협조를 부탁하고 왜병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총기를 휴대시켜 잠입시킨다. 총기 휴대 사실이 누설되어 1913년 3월12일 강도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돼 1913년 6월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는다.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한다. 1913년 6월6일 피를 토하며 감옥에서 순국한다. 선생의 나이 58세, 단식 28일만의 일이었다. 왜군들은 “강도 노병직(그의 옛 이름)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라고 발표한다. 정부에서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노병대 의병대장 알지 못해 안타까워 현재 포도밭으로 변한 생가터. 해질 무렵 화동면 이소1길 선생의 추모각 앞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후손 노진영(68)씨를 만났다. 할아버지의 충절을 기리는 뜻으로 추모각 대문에 늘 태극기를 걸어둔다고 했다. 1년에 한 차례씩 거행하는 추모행사 때 교통정리를 해주는 지구대 경찰들마저도 할아버지가 무엇을 한 분인지 모른다며 섭섭해 했다. 선생의 의로움을 돌에 새긴 순국비의 끝부분은 이렇다. “빛나는 노공이시여!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었도다. 다만 나라가 있음만 알고 내 몸은 생각하지 아니하였구나. 해를 꿰뚫는 곧은 충의는 문폐(文陛)와 같은 차례이다. 비석에 크게 새겨서 이로써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노라.”(장병규, 열사 금포 광선노공, 순국비명 부분) ‘다만 내 몸이 있음만 알고 나라는 생각하지 않는’.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못난 후손들을 채찍질하는 아픈 훈계이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