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다루는 의사 무너지면 안된다”…‘최상의 의술’ 끊임없이 공부

1985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간호사 등 직원들과 함께 한 신현철 원장(가운데 양복 입은 남자), 바로 옆에 가운 입은 의사는 맏사위 최경진 원장. 그는 평생 죽음의 신과 싸웠다. 그는 숱한 생명들을 죽음에서 구해냈다. 그는 항상 성실했고 냉철했다.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잊은 적이 없었다.그는 의사로서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최상의 의술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병원에서 친절이나 실내장식 등 외형적인 면에 치우는 것을 불편해 했다.그가 대구에서 개원한 1960년대 초 의료장비는 값비싼 미국산을 갖췄지만 집안은 가난했다. 고생만 한 아내까지 환자들의 빨래와 간호로 도와야 했다. 환자들이 수술 후 병원비를 내지 않고 달아나거나 상이군인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려도 불편하게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몰래 도와주려 했다.그는 가난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서 서양식 댄스파티를 열기도 했고, 어렸을 때 배운 솜씨로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은퇴와 별세그는 1999년 75세 때 아들 신기식 원장(피부과)과 사위 최경진 원장(비뇨기과), 딸 신혜원 원장(피부미용ㆍ질환) 등에게 병원을 인계했다.이후에도 명예원장으로 2008년까지 병원에 출근하며 옛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건강유지를 위해 바둑이나 피아노연주를 즐겼으며 전화영어로 영어공부를 계속했다.그는 2016년 3월11일 대구서부노인전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만 92세였다. 장지는 대전 현충원에 마련됐다.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연보1923년 3월12일 출생1936년 3월 영주보통학교 졸업1943년 9월 대입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 이수1944년 징병 추정1946년 4월 경성대학 의학부 입학1950년 6월 육군 9사단 통역장교로 참전1950년 10월 부산 제3 육군병원 복무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 참전1952년 11월 권남영과 결혼1952년 12월 충무무공훈장 받음1954년 12월 미국 LA 시립병원 인턴과정 시작1958년 11월 미국 매사추세츠 메모리얼 병원 비뇨기과 전문의 과정 수료1962년 4월 대구 중구 남일동 피부비뇨기과 의원 개원1966년 9월 경북대 의대 박사학위 취득1973년 9월 대구 중구 공평동 현 자리로 신축 이전 2008년 명예원장 은퇴2016년 3월11일 별세

성인 여드름, 흉터 더 잘 남는 거 아시나요…“성인 여드름 초기에 잡아야”

-전체 여드름 환자 중 42%가 ‘20대’-박석열 원장, “흉터로 이어질 수 있어 초기에 치료하는 게 중요”대구에 사는 김모(30)씨는 결혼을 2주일 앞두고 학창시절 때 경험하지 못한 여드름으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 손으로 여드름을 짜버렸는데 피부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졌다. 김씨는 “별 생각 없이 여드름을 손으로 짠 것이 이렇게 심해질 줄은 몰랐다”고 한숨을 쉬었다.‘성인 여드름’으로 고민하는 성인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여드름 개선방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성인 여드름 환자 수는 약 15% 증가했다. 특히 2016년 기준 전체 여드름 환자 중 42%가 2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성인 여드름은 사춘기에 생긴 여드름이 25세 이후까지 계속되거나 20대 후반에 나타나는 것을 일컫는다.성인 여드름은 일반적인 여드름과 마찬가지고 정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때와는 다르게 호르몬의 변화가 아닌 다른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렇다면 성인 여드름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성인 여드름 치료 중 PDT치료가 있다.PDT치료는 여드름의 원인이 되는 피지선을 광흡수제와 특정파장의 빛을 이용해 축소시키고 여드름균을 살균시켜 눈에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 모두들 개선하는 데에 도움 주는 방법이다.단 피부에 과도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치료는 증상 악화의 원인이기에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본인의 피부 상태를 잘 파악한 후 진행해야 한다.박 원장은 “PDT치료 시 광원을 IPL로 한다면 여드름으로 남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은 붉은 자국을 개선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어 다양한 곳에 활용될 수 있는 방법”이라며 “피부과 전문의와 함께 피부 상태부터 고려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하지만 무엇보다도 평소에 피부 관리에 신경 써 미리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관리에 소홀한데 강한 자외선을 사전에 차단해주고 담배, 면도 등 피부에 자극이 될 수 있는 행동들을 피해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만약 피부트러블이 발생했다면 초기에 대처해주는 것이 중요하다.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400년 전 조선조 정무공 발자취…가슴 깊이 ‘충의정신’ 깃들었네

충의공원 가운데 건립된 최진립 장군 동상. 동상 기단에는 충노 ‘기별’과 ‘옥동’의 활약상도 새겨져 있다. 나 혼자 살기도 힘겨운 세상이다. 충신, 효자, 열녀라는 말은 책 속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사회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갈수록 삭막하게 황폐화되는 느낌이다. 요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은 그냥 이야기로만 전할 뿐이다. 스포츠를 통해 울컥 한 번씩 치솟는 감정 확인으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소속감을 확인하고 있다. 이래도 ‘애국심이 살아있다’고 정의해도 될까? 이러한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충신, 이웃을 위해 내 곳간의 문을 활짝 열었던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효를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경주 내남면 이조리 충의공원에 가면 이런 이야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충의공원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나라를 지키고자 의연히 일어나 칼을 들었던 최진립 의병장군을 기리는 동상이 있다. 동상을 중심으로 최진립 장군이 공부하며 자랐던 충의당, 박물관으로 조성된 기념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활인당 등이 있다. 주변에 정자를 짓고, 벤치를 설치하고, 조경수 조성 등으로 쉼터를 만들어 공원으로 조성했다. 충의공원 일대에는 충노각, 효자각, 용산서원, 경덕왕릉 등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어 역사문화탐방 코스로도 훌륭하다. ◆충의공원 충의공원은 경주시 내남면 소재지 중심에 있다. 공원 인근에 내남면사무소, 내남농협,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내남우체국 등의 기관단체들이 있다. 내남면사무소까지 찾아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말을 달리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최진립 장군의 동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상 기단에는 장군의 활약상과 충노 ‘기별’과 ‘옥동’의 장엄한 기상을 새겨두고 있다. 동상 뒤편에는 400년 된 회나무가 큰 그늘을 만들고 있다. 최진립 장군이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직접 심은 나무로 전하고 있다. 공원 입구에는 최부자의 나눔과 상생정신을 전하는 ‘활인당’이 조형물로 조성돼 눈길을 끈다. 공원 서편에는 최진립 장군이 성장했던 터전 ‘충의당’이 있고, 사당, 기념관이 동서로 이어져 있다. 충의당 뒤편에는 충노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이 거처했던 충의당은 ‘최부자의 혼이 시작된 소박한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충과 의로 가득 찬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전통한옥으로 꾸며진 2인실, 4인실 등의 방이다. 맏며느리가 방문객들에게 문화해설을 하며 친절하게 안내한다. 충의공원 주변에도 많은 역사문화사적이 산재해 있다. 공원에서 승용차로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에 경덕왕릉, 용산서원, 최진립 장군 신도비가 있다. 또 가까운 곳에 효자각, 정무공 정려각, 개무덤 등의 탐방하고 싶은 의욕을 자극하는 사적들이 가득하다. ◆충의당과 기념관 충의당 내부. 충의당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가인 현곡에서 이사와서 살며 공부하고 성장한 외가 터전이다. 충의당은 경북도지정 민속자료 99호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최진립 장군이 기거하던 종택으로 1760년 중건되면서 흠흠당 편액을 걸고 있었다. 편액은 이계 홍양호 선생이 쓴 글이라 전한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 충의당은 후손이 기거하고 있는 전통한옥 주택과 서책을 보관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곳 ‘경모당’, 경모당에서 보관하던 고문서 등을 옮겨와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 장군과 현재 기거하는 후손으로부터 4위를 모시는 사당, 서실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흠흠당과 우산초려 등의 이름을 붙인 고택체험방도 있다. 가문에서 사용하던 농기구 등을 전시하고 있는 민속자료실도 눈길을 끈다. 충의당에는 3천500여 권의 고서가 보관되고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순우, 안승준, 김학수 등의 교수와 연구원들이 조사해 ‘고문서집성’과 ‘용산서원’이라는 연구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정무공최진립선생기념관’은 본건물 바로 앞에 서 있는 ‘경모각’을 확장 개편한 것으로 다양한 문화자원들이 전시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의 호패와 갓끈, 가죽신 등의 생활용품과 교서, 교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쟁터에서 직접 쓰던 칼. 활과 화살은 재현품. △칼과 활, 화살: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군사를 지휘할 때 사용하던 칼의 진품을 전하고 있다. 칼자루 15㎝를 포함 1m 크기다. 활과 화살은 장군이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최진립 장군이 병자호란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쓰던 각대와 흑혜(가죽신발) 등 유품. △호패와 각대, 흑혜: 조선시대 신분과 관직을 표시하여 공적인 활동을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던 호패는 정무공의 출생연도(1568년)와 급제한 시기(갑오년 1594)가 표시된 상아 호패다. 각대는 정무공이 관직을 역임할 때 관복에 착용하던 것(길이 86㎝)으로, 1630년 이후 병자호란으로 163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착용하던 것이다. 흑혜는 맑은 날에 신었던 것으로 문무 관료들이 제복과 함께 착용했던 가죽신이다. △교지: 최진립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받은 교지와 함께 임진왜란에 참가해 전공을 인정받아 공신 2등에 책봉된 선무원종공신녹권, 경원도호부사 겸 병마절제사로 지낼 때 자녀들에게 직접 상속한 내용을 기재한 분금문기, 서해안 군사적 요충지 경기수군절도사에 임명하는 국왕의 이름으로 내린 교지가 있다. 특히 효종이 정무공 시호를 내린 교지는 특별하다.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유일한 교지로 조선정부의 청나라에 대한 당시 의식을 대변한다. △서적: 용산서원에 관한 책들이 여러 권이다. 용산서원지, 용산서원 청액소, 용산서원 호적, 용산서원 심원록, 문루일기, 용산서원 사역을 담당하던 인원의 명단 소속안, 안계암 완문, 별치 추수기, 학생들의 성명과 주소가 기록된 유생안, 사림품목 등등 서원을 관리하던 내용들이 기록된 서적이 다수다. 용산서원 정문의 문루인 청풍루 현판. 후손들의 구전과 서풍으로 미루어 미수 허목의 글씨로 추정된다. △청풍루 현판: 용산서원 정문의 문루인 청풍루 현판이다. 정무공의 풍모와 절의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누각의 이름을 ‘청풍루’라 했다. 조선 중기 전서의 대가인 미수 허목(1595~1682)의 글씨로 추정된다. 용산서원이 사액받기 전인 17세기 후반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정무공 최진립 장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1568년 경주시 현곡면 구미동에서 문창후 최치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발생해 적도들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북상하여 경주성까지 무너뜨렸다. 당시 정무공은 부윤을 찾아가 경주성 수복을 위한 의거를 호소하고, 동생 계종과 집안 종들을 비롯해 마을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사들과 합세해 계연에서 적을 무찌르고, 경주 길목 열박재에서 언양으로 침입하는 적을 격파했다. 정유재란 때에도 결사대 100명을 이끌고 서생포에서 야영하던 왜적을 공격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2등에 녹훈 되었다. 1607년에 도총부도사, 다음해에 마량진첨사, 1614년 경원부사를 역임했다. 인조 원년인 1623년 경흥부사, 공조참판에 특진되고 이어 경기, 공청, 황해수군통어사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장군은 69세의 노령에도 군사를 이끌고 국왕이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 용인에서 적을 맞아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조정은 정무공의 공적을 기려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효종이 1651년에 시호 정무공을 내리며 청백리로 녹선했다. 숙종 때 함경도 경원에 충렬사를 창건해 제향했다. 1711년 향리 용산에 숭렬사우의 사액을 내리고 ‘용산서원’으로 이름 지었다. 자손들은 전쟁에 함께 참전해 순절한 충직한 노비 기별과 옥동을 장군의 제를 지낼 때 함께 제향하고 있다. ◆활인당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충신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손자 최국선은 문중과 협의해 마을 어귀에 초가집을 짓고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했다. 자신의 곳간을 열어 조선시대 헐벗은 백성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던 것이다. 이조리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이든 마을사람이든 굶주린 사람 누구나 끼니를 때울 수 있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활인당’이라 불렀다. 충의공원 입구에 초가집을 짓고, 마당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죽을 나누어 주는 당시 상황들을 조형물로 만들어 재현하고 있다. 지금 보아도 믿기 어려운 상황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굶주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줄을 지어 찾았을까? 어떻게 나라살림도 아닌 개인이 그런 베풂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궁금함을 넘어 감동하게 한다. 활인당은 최부자의 ‘상생과 나눔정신’의 시발점이 되었다. 최부자집이 교촌마을로 이사한 후에도, 이런 나눔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6ㆍ25전쟁 당시에도 최부자집은 집 앞의 공터에 솥을 걸고 죽을 쑤어 피난민들을 구호했다. 후손들이 선대의 상생정신을 누대로 이어 실천하면서, 최부자의 명성을 이어갔던 것이다. 교촌마을에는 최부자의 나눔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최부자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충노각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 가슴을 저미게 하는 말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최진립 장군이 69세의 노구로 병자호란 전쟁터로 뛰어나갈 때, 노비였던 ‘기별’과 ‘옥동’이 장군의 뒤를 따라 끝까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은 지금도 매년 음력 12월27일 장군의 대제일에 충노 두 사람을 함께 제향한다. 후손들은 그것이 장군의 뜻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최진립 장군이 자랐던 충의당 뒤편에 충노 기별과 옥동의 의기를 비석에 새겨 세우고 비각을 건립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나라를 위한 일에 신분의 고하가 없다는 말을 몸으로 보여준 현장을 체감하게 한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긴다. 오래전 정무공 최진립 장군 가문의 이야기가 인심이 각박해진 오늘날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힐링의 자원이 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전립선 암] 전립선비대증과 유사…60대 이상 발생률 높아

평소 건강했던 60대 남성이 야간뇨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 전립선 특이항원 검사 결과 수치가 상승해 전립선 조직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전립선암 1기.전립선 적출 수술 후 추가 치료는 없었으며 6년이 지난 현재 완치 판정을 앞두고 있다. 70대 남성이 등 쪽 통증과 하지 일부 마비증상으로 신경외과 진료 중 전립선암의 척추전이(전립선암 4기)로 진단 받고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증상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7년이 지난 현재까지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전립선암이란?정상적으로 우리 몸에서는 세포들이 성장하고 분열해 새로운 세포를 형성하는 과정들이 반복된다. 노후한 세포들은 죽고 그 자리는 새로운 세포들로 채워지게 되는데 간혹 이 정상적인 과정에 이상이 생겨 필요하지 않은 세포들이 생성되거나 혹은 노후화해 죽어야 할 세포들이 죽지 않고 조직 덩어리를 형성할 수가 있다. 이것이 종양이다. 전립선은 남자의 방광 바로 아래쪽, 직장의 앞쪽에 있어 밤톨 정도 크기로 15∼20g 무게의 조직이다. 방광에서 소변을 배출시키는 통로인 요도를 둘러싸고 있다. 전립선 비대증은 전립선에서 발생한 양성 종양이며 전립선암은 전립선에 생긴 악성종양이다. 전립선 암세포는 정상적인 통제에서 벗어난 증식을 하며 계속 성장하면 주변의 다른 조직으로 번져나가 혈관이나 림프관을 침범해 멀리 떨어진 조직으로 전이한다. 서구에서는 남성 암 발생 중 1위이며 암으로 인한 사망 원인 중에서는 폐암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립선암의 발생이 증가하는데 지난 10년간 7배가량 증가해 암 발생 증가율 1위를 기록했으며 2001년에 남성 6대 암이 됐다.◆증상과 원인초기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으며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알게 되거나 전립선 비대증 검사 도중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암이 증식해 요도나 방광경부로 자라면서 요도를 압박하면 소변이 쉽게 나오지 않고 소변 줄기가 가늘어지거나 배뇨 중간에 소변 줄기가 끊어진다. 또 방광자극 때문에 소변을 자주 보거나 참기 힘들고 자다가도 소변을 보러 일어난다. 전립선암이 정액의 배출구인 사정관을 침범하면 정액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 전립선 암은 뼈로 전이를 잘하는데 뼈 중에서도 척추와 골반으로 전이가 잘된다. 척추로 전이되면 허리가 심하게 아플 수 있다. 따라서 허리 통증으로 정형외과 등을 찾아 치료받는 도중 진단되기도 한다. 전립선 암의 초기에는 무증상인 경우가 많고 증상이 있더라도 전립선비대증과 비슷해 정확한 초기 진단이 중요하다.전립선 암은 나이, 인종, 가족력, 지방 과다섭취 등과 관련 있다. 특히 나이는 가장 중요한 위험인자이다. 45세 이전에는 전립선암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고 나이가 들면 발생률이 증가해 대부분 60세 이후에 발생한다. 전립선 암은 동양인에서는 발생률이 낮고 스칸디나비아인이 가장 높다. 흑인이 백인보다 발생률이 30%가량 높다. 9%정도에서 가족력이 있는데 전립선암 환자와 형제인 사람은 정상인보다 발생할 확률이 3배가량 높고 가족력이 있는 집안은 그렇지 않은 가계보다 8배 정도 많이 발생한다.음식물과 전립선암과의 관계는 복합적이어서 암의 발생과 관련짓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동물성 지방이나 육류의 과다한 섭취는 위험을 높이고 섬유질이 많고 동물성 지방이 적은 음식은 전립선암을 예방하는데 도움되는 것으로 알려졌다.강낭콩이나 완두콩 등의 콩류와 건포도 등의 마른 과일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은 발생률이 낮다. 토마토에 다량 함류된 항산화제인 라이코펜도 발생을 감소시킨다. ◆진단과 치료진단하기 위해서는 직장수지검사와 혈중 전립선특이항원치를 측정한다. 특히 50대 이상의 남성은 주기적으로 측정한다. 이 검사에서 이상이 있을 때는 전립선 조직검사를 한다. 가장 간편한 검사는 항문을 통해 손가락으로 전립선을 만지는 직장수지검사이다. 전립선특이항원치가 높을수록 암의 가능성이 증가한다. 4∼10ng/㎖일 경우 약 15%, 10∼20ng/㎖ 이상일 때는 약 30%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전립선암 환자의 25%는 4ng/㎖이하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2.5ng/㎖ 이상일 때 전립선조직검사를 권하는 경향이다. 전립선특이항원치가 높거나 직장수지검사나 전립선초음파검사에서 전립선암이 의심되는 경우 전립선 조직검사를 시행한다. 치료는 환자의 병기, 암세포의 분화도, 연령, 전신 상태, 치료의 부작용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치료는 국소적 치료와 전신적 치료로 구분한다. 국소적 치료에는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가 있다. 전신적 치료는 호르몬 치료나 항암화학치료가 있다. 적절히 선택된 환자에서 근치적 전립선 적출술은 국소 전립선암의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다. 전립선암이 다른 부위로 전이되면 남성 호르몬이 전립선암에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호르몬 치료를 한다. 80∼90% 환자에서 임상적 호전을 보이며 1∼2년이 지나면 호르몬 불응성 전립선암으로 진행하기도 한다.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도움말:대구가톨릭대병원 비뇨의학과 박재신 교수

울릉군농업기술센터, ‘슬로푸드’ 산채 고부가가치 창출 심혈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울릉도는 동식물은 물론 지질학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울릉도 오징어’는 옛말이다. 어업 못지않게 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요즘은 ‘명이나물’ ‘부지깽이’ 같은 산채 종류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울릉군의 전체 면적은 72.89㎢이며, 이곳에 1만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전체 4천573가구 중 농가는 약 15%인 676가구다. 밭농사 중심의 울릉도 경지면적은 전체면적의 17.6%인 12.85㎢이지만, 경지면적의 89%가 15도 이상의 경사지다. 울릉도의 밭은 경사면이 가팔라 농사짓기가 힘들다. 그래서 모노레일을 이용한 영농법 등 타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농촌풍경이 펼쳐지고 있다.◆울릉군농업기술센터 현황 울릉농업기술센터의 농기계 순회수리 모습. 울릉군농업기술센터는 1962년 4월1일 울릉군 농촌지도소 설치를 시작으로 1975년 1월 서ㆍ북면 지소가 설치됐다. ‘농업기술센터’란 명칭을 쓴 것은 1997년 12월부터다. 이듬해에는 5계를 폐지하고, 3담당을 설치했다. 2003년 12월에는 농업연구담당을 신설하고, 연구사 3명을 채용했다. 2005년 5월 신청사를 건축해 현재 위치(울릉군 울릉읍 사동리 541-8)로 이전했다. 울릉군농업기술센터의 주요임무는 섬지역이지만 농민소득증대사업추진, 농가경영컨설팅, 농업인교육훈련, 농촌생활개선지도 등 전문적인 영농분야에 치중하고 있다. 이와 함께 비료ㆍ농약ㆍ양곡관리 수급조절, 축산ㆍ식량작물 보호, 기술보급 및 지도, 농산물가공 및 유통시설사업지원, 지역특산물 증식복원 및 보존 연구, 농가 부존자원 및 새 소득원 개발연구, 친환경농업 기술보급 등 농업인을 위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주요 부대시설은 현장중심의 농민교육장인 새 기술 실증시범포(1만7천723㎡)와 농기계공작실(면적 628㎡), 토양 정밀검정과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실험실인 종합검정실, 무균종묘생산ㆍ유전자원 증식을 한 조직배양실, 생활과학관, 정보화 교육장, 경영상담실, 울도하늘소(울릉도 하늘소) 사육실 등을 갖추고 있다. ◆울릉도는 화산섬밭농업시스템 울릉군은 국가중요농업문화유산 9호(화산섬밭농업시스템)로 지정됐다. 국가중요농업유산이란 농민이 해당 지역에서 환경, 사회, 풍습 등에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형성시켜 온 유무형의 농업자원 중에서 보전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국가가 지정한 농업유산을 말한다. 울릉도화산섬밭농업시스템은 화산이 분출한 후 화구가 함몰된 칼데라형과 급경사지를 밭으로 일궈 울릉도 자생식물을 재배하는 농업기술이다. 농업자원의 가치성(역사성, 생계유지, 경관 등)과 주민의 참여 및 지방자치단체와 협력관계가 우수한 것으로 평가됐다. 울릉군농업기술센터는 국비지원으로 농업유산의 보전과 유전자원의 복원, 주변환경정비, 관광자원 활용 등의 기대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농업기술센터, 산채 재배지도 울릉도는 고립된 섬의 특수한 환경으로 고유의 생태적 특성이 있는 다양한 식물분포를 형성하게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채류다. 울릉도 산채는 성인봉을 중심으로 원시림의 비옥한 땅과 겨울 눈 속에서 성장한다. 농업기술센터 임석원 소장은 “울릉도 산채는 이른봄 눈 속에서 싹을 틔우고, 적당한 일조량 덕분에 산채의 맛과 질이 우수하며 약효를 지닌 식물들이 많다”며 “생산기까지의 서늘한 기후는 부드럽고 산뜻한 미각과 진한 향기를 지닌 무공해 식품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울릉도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산채는 20종 이상이며, 다른 지방에 없는 산채만도 10여 종이 넘는다. 산채류 중에서 울릉미역취와 부지깽이의 재배농가수는 590호, 재배면적은 140㏊, 생산량은 연간 366t, 소득은 25억 원에 이른다. 고급 산채인 삼나물은 30ha, 참고비는 15ha를 재배하고 있다. 농업기술센터에서는 소포장 말린 나물로 높은 가격에 거래돼 농가소득 증대에 이바지하도록 지도ㆍ유통을 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울릉도의 주요 산채로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부지깽이, 미역취, 참고비, 삼나물, 명이(산마늘) 등이 있다. 일반 산채는 전호, 더덕, 두릅, 땅두릅, 엉겅퀴, 곤대서리, 두메부추, 고사리, 고비, 머위, 부추, 음나무, 모시딱지 등이 있다. 이렇듯 산채류는 농가의 주요 수입원이다. ◆농업인 위한 농업관련 시설기관 건립 울릉농기센터 관계자가 농업인들을 대상으로 농업인 실용교육을 하고 있다. 농업인을 위한 다양한 시설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울릉군 농ㆍ어업인들의 오랜 숙원인 특산물체험 유통타운이 지난 3월27일 준공식을 했다. 특산물유통타운은 지난 2008년 4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울릉개발촉진지구 지정 및 개발계획을 승인받아 80억 원의 국비를 투입해 건립했다. 5천491㎡의 부지에 건물 전체면적 2천㎡ 규모의 지상 4층으로 지어졌다. 1층은 저온ㆍ냉동저장고, 집하ㆍ선별장, 특산물판매장, 체험, 전시 행사장으로 활용하고 2층은 음식점이다. 3층은 사무실과 세미나실, 교육실로 배치했으며, 4층에는 관광객과 주민들을 배려한 카페와 전망대를 설치해 울릉항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농업기술센터는 농업 인프라 구축을 위한 복합시설로 농업인회관도 건립한다. 영농ㆍ창업ㆍ귀농교육 등 다양한 농업정보 제공과 지역농업인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9월15일 준공한다. 총사업비 30억 원(국비)을 들여 지상 2층(전체면적 990㎡) 규모로 건축, 1층에는 다목적강당, 농업역사자료관(홍보관), 농업인 단체 사무실, 2층에는 조리실습교육장, 가공실 등이 들어선다. 울릉농업인회관 준공으로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하는 농업의 신기술과 다양한 정보 등 농업인들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할 예정이다. ◆농업기술센터, 슬로푸드 구현 밭에서 재배되고 있는 명이(산마늘)나물. 최근 불기 시작한 슬로푸드의 바람 속에 전통 음식자원들이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특히 울릉도는 ‘섬’이라는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남다른 음식자원과 음식문화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슬로푸드 구현의 최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농업기술센터에서는 울릉슬로푸드 자원의 체계적인 육성을 위해지역 농특산물의 부가가치 상승과 농가소득 증대에 나서고 있다. 논농사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울릉도는 쌀 대신 섬말나리, 명이(산마늘), 토종옥수수, 홍감자 등으로 춘궁기를 면했다. 개척 초기부터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여러 작물과 음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슬로푸드국제협회는 울릉 음식자원의 가치를 인정해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홍감자, 섬말나리 등 9개 품목에 대해 ‘맛의 방주’와 ‘프레지디아(맛 지킴이 두레)’에 등재했다. 이와 함께 울릉 산채 4종(섬말나리, 두메부추, 삼나물, 참고비)이 슬로푸드국제협회의 프레지디아에에 선정되는 등 ‘좋은, 깨끗한, 공정한 음식’이라는 슬로푸드 정신을 구현하는 한국 슬로푸드 자원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농업용 모노레일 보급 등획기적인 생산기반 구축”임석원 울릉군농업기술센터 소장 -울릉군 농업비전과 전략목표는? △울릉군의 농업인들에게는 소득과 삶의 가치를 향상시키고, 소비자에게는 품질 좋은 울릉도의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목표로 농업인 복지증진과 농업기반 조성, 한우산업 경쟁력 강화, 가축 전염병 차단 및 동물보호, 농업인 복지향상에 업무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울릉도의 맞춤형 지도사업이란? △울릉도는 경작지의 85%가 경사가 심하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열악한 인력 의존형 농업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2004년을 기점으로 농업용 모노레일을 농가에 보급하면서 농업인의 중노동 해방, 축분퇴비의 토양환원에 따른 지력회복과 고품질 산채생산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경사지 밭 기계화농업이라는 획기적인 생산기반구축 지도사업을 시행해 오고 있다.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분야는? △농촌지도사업 활성화를 위한 직원들 역량강화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대체작물 육성을 통한 과학영농시험연구포장을 활용한 다양한 시험연구사업 성과창출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울릉도의 우수한 산채의 유통활성화를 위해 우수한 가공식품 개발과 기존 6차산업 사업화로 개발된 울릉도 편이식(쉽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산채비빔나물에 대해 자매도시 등 국내홍보와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이재훈 기자 ljh@idaegu.com

대종 있다는 감포앞바다 바람 불면 ‘웅~’ 우는 소리…“나 구해달라” 간절하게 들리네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높이가 80m에 이르렀다는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으로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른다. 최윤섭 전 경주 부시장을 만났다. 보물이 실렸다는 러시아 선박 돈스코이호 인양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무렵 황룡사 대종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황룡사 대종이 아직도 감포 앞바다에 묻혀 있느냐고 물었다. 머뭇거림 없이, 노력과 기술이 부족해서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가 들려준 황룡사 대종 찾기 전말은 이렇다. “이상 물체 발견!” 레이더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크기 2m가량의 타원형 물체가 레이더에 잡혔다는 보고를 받은 함장은 즉시 침투조 5명을 투입시켰다. 배를 타고 뒤쫓던 모 방송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전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룡사 대종이 천 년의 비밀을 벗고 세상에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97년 5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 타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만든 장엄한 평화의 대종소리로 세계인의 마음을 울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에 땀이 났다. 침투조가 황룡사 대종 발견 소식을 들고 나올 6~7분 안팎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망망한 바다 위를 밭이랑 갈 듯 누비던 허탈과 실망의 나날들, 20여 일의 가슴 졸이던 일들이 무성영화처럼 흘러갔다. 해군 탐사선의 작전 허락 기간이 닷새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는 소주 한 병과 북어 포 한 마리를 사들고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 제발,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세요. 어머니는 제가 바라는 것 다 들어주셨잖아요.” 경주 일대의 사찰들이 간절하게 올리는 불공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독교 신자의 조언도, 대종 찾기를 바라는 언론의 관심도, 마을 어른들의 전언도 끝내 대종이 묻힌 곳을 알려주지 못한 뒤의 일이었다.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어머니께 우리 집엔 왜 용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뒤뜰 항아리를 열고 용을 보여주셨다. 몸체는 꿈틀거리는 용이었으나 완성되지 못한 입 모양이 특이했다. 병아리 부리처럼 노란 입으로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이한 꿈이었다. 어느 날보다 더 환한 아침이 밝았다. 분명 오늘은 대종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를 설레게 했다. 종뉴(鐘紐)는 모두 용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는 함장에게 문무수중왕릉 뒤쪽을 샅샅이 살펴보자며 탐사선에 올랐다. 용이 있었던 뒤뜰이 수중왕릉 뒤쪽과 겹쳐보였던 것이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룡사 대종 삼국유사에도 전해져 타원형 모양의 2m 크기의 이상 물체는 황룡사 대종이 분명할 것이었다. 삼국유사권3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13년(754)에 만든 황룡사 종은 그 무게가 49만7천581근이나 되는 실로 거대한 종이었다. 종뉴의 길이를 제하고 나면 그 크기는 2m 정도로 추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침투조가 확인한 이상물체는 타원형의 바위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꿈이 우수수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렁이는 바다가 야속하기만 했다. 허망했다. 그의 고향은 경주시 양북면이다. 마을 어른들로부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봉길리 바다 쪽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 또한 멱을 감으며 놀다가 바다 쪽에서 웅~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 종소리는 고래가 우는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목소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종 이야기를 쓰고 있다. 황룡사 대종은 에밀레종(사진)보다 5배 이상 컸다.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을 불태운 몽고군이 황룡사 대종을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대종은 에밀레종보다 무게가 5배 이상일 정도로 컸다. 이 작전은 바닷길이 아니고는 운반이 불가능해 대종을 뗏목에 싣고 강에 띄워 바닷가로 운반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바닷가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만 물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딘가에 가라앉았고 이후 이 하천을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황룡사의 역사를 읽고 여몽전쟁사를 공부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창건이 시작되어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이르기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동양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근대에 가장 높았던 80m가량의 9층 목탑과 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 그리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대종으로 유명하다.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된 황룡사지에는 건물과 탑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들만 남아 있다. 1963년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 제6호로 지정되고,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7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기와를 비롯한 금동불, 풍탁(처마 끝에 매다는 장식물), 금동귀고리, 유리 등 유물 4만여 점이 출토됐다. 몽골군들은 왜 50만 근에 이르는 그 무거운 종을 가져가려 했을까? 세계정벌에 필요한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서? 군사적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가 욕심이 나서? 오랑캐 종족에게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그만한 이해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 왜 전란의 와중에 무거운 종을 메고 토함산을 넘었을까? 내 궁금한 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무리 짓밟아도 끝내 짓밟히지 않는 고려인들의 대몽항쟁, 그 원동력의 불가사의한 출처를 황룡사 대종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요? “섬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면서 백성과 장정을 칼과 화살에 죽게 만들고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와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장계(長計)가 아니다” 라고 조정의 강화도 천도를 저지하려던 종2품 문신 참지정사 유승단의 기개, 서슬 푸른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의 집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군사 양식이 풍족하니 천도는 불가하다”고 외치다 그 자리에 참수당한 삼별초 부대장 김세충의 결사항전의 용맹이 대종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그의 추정이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지만 대몽항쟁은 끝없이 전개되었다. 1206년 건국 이후 불과 50년 만에 모스크바를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집어삼킨 몽골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은 나라 고려를 정복하지 못했다. 국토를 초토화하고 백성을 짓이겨도 항복을 거부했다. 고려는 몽골에게 불가사의한 나라였던 것이다. 외세를 무찌르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과 당나라 군선을 침몰시킨 문무대왕의 문두루비법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몽골 군사들에게 황룡사 대종은 예사롭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꼈을지 모를 일이었다. ◆종은 국태민안의 상징 종이란 무엇인가? 종이 울지 않자 한 여인의 무남독녀를 쇳물 가마에 넣어 만들자 울었다는 에밀레종, 노모의 밥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자 나타났다는 돌종, 부부가 그 돌종을 치자 웅숭깊은 소리가 왕에게까지 들려 집 한 채와 벼 50석을 하사받았다는 모량리 사람 손순의 종. 불가에서는 우주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무병장수와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종을 친다고 한다. 종이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국태민안의 상징이다. 그것이 황룡사 대종을 찾아야 할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서 최윤섭 전 부시장에게 소주 한 잔 하자고 권했다. 건강검진이 약속되어 있어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황룡사 대종 찾기를 다시 하겠냐 물었다. “전설 속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 기록했다는 것으로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습니다.” 구전되는 전설은 구전자와 함께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의 대종탐사기는 기록되어 있어 지워지지 않을 테니 다행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돈벌이와 관계없이, 감포 앞바다에서 벌였던 순정한 그의 대종탐사기가 종소리처럼 은은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갓난아이 들쳐 업고 영화판서 분투…‘여성의 눈’으로 본 세상, 단 하나의 필름 남기다

영화 ‘미망인’의 한 장면 영화 ‘미망인’은 박남옥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딸을 낳고 15일 만에 촬영을 시작, 산후 조리조차 제대로 못한 채 제작한 영화다. 그녀가 곧 영화사였을 만큼 혼자 모든 작업을 해냈다. 스스로 영화 제작자이며 감독이었고 때로는 밥차 아줌마였으며 때로는 조명기사이자 영화 배급자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원제는 ‘과부의 눈물’. 이민자, 이택균, 나애심, 최남현 등 당대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살아가는 주인공 이신자가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갈등을 그린영화로 당시 전쟁미망인 문제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루었다. 전쟁으로 아내와 어머니라는 위치마저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느냐에 이 영화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우연이 거듭되는 플롯과 자극적인 치정관계, 과장된 연기들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여성의 욕망이 이토록 솔직하게 다루어진 작품은 드물다는 것이 평단의 시각이다.박남옥에게 영화 미망인은 여성이라는 현실적 한계와 함께 많은 고통을 주었다. 남자 감독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힘든 일을 겪었고 평단의 인정은 받았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영화는 그녀에게 현실의 냉혹함을 알려주었고 다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처가 되었다. 딸 이경주(미국 거주)는 영화판을 떠난 엄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투포환 선수였던 엄마는 영화 ‘미망인’이라는 포환을 던진 후, 그걸 주우러 가지 않았다. 그것이 어디쯤 떨어져있는지도 몰랐다.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그 포환을 던진 후, 새 포환을 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투포환장을 영영 떠났다’ 고 했다. 이 영화는 원본이 유실된 채 복원된 터라 마지막 5분은 아예 훼손되어 주인공이 어떠한 길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결말을 알 수 없다. 더구나 종료시간 10여분을 남겨둔 지점에서는 사운드 마저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미망인’은 무척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한국영화의 자산으로 여겨진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토대로 1950년대를 살아가던 여성들의 모습과 당시 사회상이 반영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또 너무 일찍 영화판에 뛰어든 여성 영화감독의 지난한 힘겨움과 눈물겨운 고집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순재 언론인연보1923년 경북 하양 출생1930년 대구 동인동으로 이사1936년 경북여학교 입학1943년 이화여전 가정과 입학1943년 조선영화 건설본부 산하 광희동촬영소에서 일함1946년 영화 ‘자유만세’ 후반작업 도움1953년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1955년 영화 ‘미망인’ 개봉1957년 동아출판사 출근1959년 영화잡지 ‘시네마 팬’ 출간1960년 동경아시아영화제 참석1980년 미국으로 이민1997년 제 1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미망인’ 상영2001년 임순례, 박남옥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2008년 박남옥 영화상 제정2017년 4월 미국에서 별세

문화예술 즐기며 생태습지 걸으니 피로가 달아나네

금장대 앞으로 흐르는 형산강을 가로질러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잠수교. 신라문화제 등의 행사 때 설치돼 운치를 더하고 있다. 경주 금장대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힐링하는 곳이다.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열어, 시민들과 관광객이 산책하거나 즐기고 휴식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금장대는 형산강 지류인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정자다. 푸른 물결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365일 깊은 전설을 간직한 청소(淸沼) 앞의 작은 산봉우리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글을 짓고 읊던 정자였으며, 지금은 국제펜클럽의 세계한글작가대회, 시낭송, 음악회 등 지역문인들이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개최하는 등 경주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고있다. 금장대는 뛰어난 주변 풍광 때문에 신라시대 3기8괴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특히 날아가는 기러기가 푸른 물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금장대의 절경에 반해 반드시 앉았다 간다고 하여 ‘금장낙안(金丈落雁)’이라 불렀다. 풍경이 빼어나 옛 신라왕들도 이곳을 즐겨 찾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금장대 아래 아찔한 낭떠러지 아래 형산강은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예기청소(藝妓淸沼)다.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배경으로도 잘 알려지고 있다. 금장대에는 또 선사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석장동 암각화가 있어 문화유적지로도 지정되었다. 경주시는 금장대 정자를 복원하고, 주변에 생태습지 테마공원을 조성해 인기 있는 쉼터가 되고 있다. ◆금장대,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재탄생 경주예술의 전당과 금장대를 잇는 자전거와 사람만 건너다닐 수 있는 다리 공도교가 올해 10월 착공해 건설될 계획이다. 공도교 조감도. 금장대는 형산강이 흐르는 강변에 깎아지를 듯 솟은 절벽에 한옥형 정자로 지어졌으며,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정자로 알려지고 있다. 아름드리 28개의 배흘림식 기둥이 기와지붕을 떠받치고, 2층 누각에 마루가 깔려있다. 마루에 앉으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동서남북으로 전망이 훤하게 트여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금장대는 예나 지금이나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힐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금장대 정자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해 토요일과 주말 오후에는 시민들이 음악회와 시낭송 등의 행사를 주관할 수 있는 문화예술공간 역할을 한다. 금장대에서 열린 첫 공연은 성건동의 풍물놀이에 이어, 천년예술단(단장 김성애)의 대금 연주, 성악, 시 낭송, 하모니카 연주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금장대 토요음악회는 10월까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시민과 함께 대금연주를 비롯한 다채로운 공연으로 전개된다. 경주시는 2016년 3월 관광명소인 금장대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월령보를 새로 고쳐 짓고, 보 유지관리용 다리인 공도교를 만들기로 부산지방국토관리청과 합의했다. 월령보와 공도교 건설은 45억 원을 들여 10월께 공사에 들어가 내년 연말 끝낼 예정이다. 공도교는 길이 239m, 폭 5m로 차는 다닐 수 없고, 자전거나 사람만 다닐 수 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에 그려진 금장대의 풍경이나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장대 앞의 강물은 폭이 넓고 모래사장이 제법 풍성했다. 지금은 강폭은 제법 넓지만 모래사장은 거의 없어지고 경주시가 조성한 트레킹 로드와 축구장이 잔디로 덮여 있을 뿐이다. ◆금장낙안과 생태습지 산책로 금장대 생태습지 산책로에서 바라보이는 금장대와 경주예술의 전당. 신라시대때 경주에는 3가지의 신기한 것과 8가지 괴이한 것(3기8괴)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3기로는 금척, 옥적, 화주 또는 성덕대왕신종을 꼽는다. 금척은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의 천신에게서 받은 금으로 만들어진 자다. 금척으로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살아나는 신비한 자였다. 옥적은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해룡이 나타나 흑옥대를 바친 것이다. 이 피리를 불면 가뭄이나 홍수, 적군들이 쳐들어오거나 병도 모두 해소되었다고 전한다.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던 구슬인데, 광선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전한다. 8괴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남산부석,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문천도사, 움이 트면서 붉은색을 띄는 계림황엽, 금장대의 경치가 좋아 날아가던 기러기들이 반드시 내려서 쉬고 가던 금장낙안, 백률사 소나무는 베어도 순이 돋는다는 백률송순, 안압지의 뿌리가 없는 풀이 자란다는 압지부평, 나원리 오층석탑은 천 년이 지나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다는 나원백탑, 불국사 다보탑만 비치고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는 연못 불국영지 등이다. 3기8괴의 전설 중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반드시 내려앉아 쉬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금장낙안이 있는 금장대 일원은 지금도 풍경이 좋다. 이러한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게 생태습지 사이로 나무데크로 산책로를 조성했다. 또 강 건너 경주시가지 풍경과 하늘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감상하기 좋게 길을 내었다. 천 년 고목이 된 능수버들이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습지의 풍광은 저절로 시인묵객(詩人墨客)이 되게 한다. ◆금장대 암각화 석장동 암각화 앞에서 바라보는 경주예술의 전당과 형산강. 금장대가 자리한 절벽 중턱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이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서 발견됐다. 이 암각화는 방패 모양이라고도 하는 검파형 외에 사람 얼굴, 돌칼, 돌 화살촉, 꽃무늬, 도토리, 사람발자국, 짐승, 배 등 30여 점의 매우 다양한 그림이 보인다. 그림은 작은 편에 속하고 쪼아파기, 쪼고 갈아파기 같은 제작기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방패형은 청동기시대 전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 갖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발자국, 수렵 나가기 전 동물이 잘 잡히기를 기원하면서 조각한 꽃 모양의 동물 발자국 등이 있다. 또 청동기시대의 조각기법대로 인물상 속에서 남성은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고, 여성은 생식기만 조각되어 있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암각화는 1994년 경북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석조문화재다. 형산강변에 접한 금장대 수직절벽 윗부분에 있는데, 세로 9m, 가로 2m 되는 바위면에 추상적 도상(圖像)으로 음각되었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면은 남쪽을 향하며 모두 6개면으로 꺾여 층단을 이루는데, 바위그림을 새기고자 수직면으로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풍화작용으로 희미하게 잘 드러나지 않아 암각화 앞에 설치된 그림판을 봐야 암각화의 그림형태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금장대에 오르기 직전 벼랑에 새겨진 암각화 앞에 서면 동쪽으로는 경주예술의 전당과 시가지로 연결되는 북천, 남쪽으로는 형산강물이 굽이치고 강변도로와 동대교,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이어지는 도로 등의 풍경이 계절, 시간대별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한다. ◆홍도야 울지마라 금장대 소공원에 건립된 조선시대 명기 홍도 추모비. 금장대에 오르기 전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작은 자갈돌이 깔린 주차장을 지나 개울을 넘어서면 아담한 공원이 보인다. 소공원 한편에 남쪽을 바라보며 ‘동도명기 홍도추모비’가 날렵한 바위에 서 있다. 경주예술총연합회를 비롯한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2016년에 조선시대 정조 임금으로부터 ‘홍도’라는 별호를 받은 기생 홍도 최계옥의 생애를 기록한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1778∼1822년)은 음악과 시문 등에 뛰어난 천재예술인으로 후학 양성에도 전념한 인물이다. 최계옥은 죽은 뒤 경주시 도지동 산 18-7번지 일대에 안장됐다. 30년 후 철종 2년 경주의 풍류객과 교방의 악공, 기생들이 묘비를 건립해 묘지를 관리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경주지역 예술인들이 홍도의 묘를 관리했지만, 묘역 일대가 코아루아파트 부지에 편입되면서 묘비는 사라지고 분묘는 무연고분묘로 처리돼 2005년 납골당에 안치됐다. 홍도 추모비에는 ‘임은 한 송이 붉게 핀 복숭아꽃이었다. 어두운 곳에 두어도 스스로 발광하는 구슬처럼 온갖 꽃들의 시샘이 따사로웠다. 세상의 풍랑은 거칠고 사나웠으나, 임은 한 시대의 한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고결한 삶을 잃지 않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또 후진을 양성하고 마흔다섯 살에 모든 재산을 이웃과 친지에게 나누어 준 후, 죽어 야산에 묻혔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홍도는 가고 없다. 이 시간을 즐기고 풍미하려는 현시대의 사람들이 시나브로 드나들며 지나간 일들을 훑어볼 뿐이다. 그들의 발걸음은 또 어떠한 흔적으로 후세에 남을지 아무도 모른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허리통증, 인구 2/3 한 번은 경험 치료법은?

허리통증은 척추뼈, 추간판(디스크), 근육, 신경, 인대와 같은 구조물에 이상이 생겨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자극을 받아 발생한다. 인구의 2/3가량은 일생에 한 번 이상 심한 요통을 경험한다. 추간판 및 주위 근육, 인대와 같은 구조물들이 퇴행성 변화로 약해져 주위 통증 신경을 자극해 허리통증으로 나타난다. 흔한 예로 근육이나 인대에 손상이 생기는 요추부 염좌는 추간판에 퇴행성 변화가 있는 상태에서 인대 및 후관절에 과도한 스트레스가 가해져 발생한다. 원인은 허리에 가벼운 충격, 불량한 자세, 비만, 척추주위 및 등근육의 약화 등으로 다양하다. ◆허리통증 치료법 -선택적 신경차단술 선택적 신경차단술은 X-ray 장치나 초음파 등을 이용해 척추에서 나오는 신경뿌리의 주행을 파악하고 신경 주행부위에 주사약을 주입해 신경의 염증과 부종을 줄이는 주사요법이다. -경막 외 감압 신경성형술 경막 외 감압 신경성형술은 비수술적 척추치료의 한 방법이다. 국소마취를 시행 후 척추의 경막 외 강에 특수카테터를 통증 부위에 접근시켜 특수한 약물을 이용해 신경성형술을 시행한다. 수술을 꺼리는 디스크 질환자나 수술 후 치료가 안 되는 동통 증후군의 경우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급만성 추간판탈출증, 척추관 협착증 등의 질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시술이다. 통증유발 부위의 염증에 약물을 주입해 염증 유발물질을 차단함으로써 획기적으로 통증을 줄일 수 있다. 또 시술 후 흉터가 남지 않는 장점이 있다.-고주파열응고술 고주파 열응고술은 바늘을 통해 고주파를 전달하는 시술로 고주파를 방출해 주위 신경조직에 열을 발생시키는 치료법이다. 불필요하게 과민해진 상태의 신경부위를 응고시키는 것이다. 이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운동신경의 응고는 피하면서 통증을 전달하는 감각신경만을 치료해야 한다는 점이다.영상장치를 이용해 바늘을 위치한 후 전기 자극으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때문에 원하는 신경을 찾아 선택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주파 열응고술은 심각한 부작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 장시간의 통증완화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대부분은 입원 없이도 시술이 가능하며 다음날부터 활동할 수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도움말:경북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김세영 교수

대구·경북피부과의사회와 함께하는 피부건강 이야기 (12) 티눈, 사마귀, 물사마귀

“아이 발에 티눈이 생겼어요.” 진료를 하다 보면 손이나 발에 티눈이 생겨서 병원을 찾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실제로 티눈으로 진단될 때도 있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사마귀로 진단된다. 티눈은 만성적으로 힘이 많이 가해져서 눌리거나 마찰에 의해 발생한다. 힘이 비교적 넓은 부위에 작용하면 굳은살이 생기고 국소 부위에 집중해 티눈이 되는 것. 발바닥의 티눈은 사마귀와 구별해야 한다. 표면 각질을 깎아보면 티눈은 각질핵이 나타나고 사마귀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 점상 출혈이 보여 어느 정도는 구별된다. 티눈은 마찰이나 힘이 가해지는 원인이 없어지면 치료 없이 자연적으로 좋아질 수 있다. 좋아졌다가도 마찰이나 힘이 가해지면 다시 생기기도 한다. 너무 아파서 불편하거나 오래 지속되면 병원에서 레이저나 냉동 치료를 하기도 한다. 반면 사마귀는 유두종 바이러스 감염이 원인으로 주로 아이에게 잘 생긴다. 손이나 발에 땀이 많은 아이가 각질이 잘 생기고 유두종 바이러스에 감염이 잘 된다. 손에는 물을 자주 접하면 발생할 확률이 커진다. 손톱을 뜯으면 손톱 주위에, 맨발로 다니면 더 잘 생긴다. 따라서 사마귀가 생긴 사람은 다음에 또 생길 확률이 높은 것이다. 사마귀는 자연적으로 호전되기도 한다. 통상 일년 내에 50%가량 저절로 없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로 더 커지거나 번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미용 목적 외에도 걸을 때 아프고 생활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사마귀를 치료하는 것이 좋다. 치료법 선택은 사마귀의 위치나 크기, 숫자, 환자의 나이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치료에서 중요한 점은 흉터를 적게 생기게 하는 것이다. 재발을 줄이기 위해 너무 강한 치료를 해 흉터를 남기는 것보다 재발하더라도 흉터가 최대한 적게 생기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주 사용되는 치료법은 냉동치료, 레이저나 전기를 이용해 태우는 방법, 약물을 사마귀에 주사하는 방법 등이다. 치료할 때 통증이 생기므로 약을 처방받아 집에서 매일 발라서 제거하는 방법도 있다. “물사마귀가 생겼어요.” 부모들이 흔히 물사마귀라 부르는 전염성 연속종은 ‘전염성 연속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며 국내에도 최근 아토피 환자가 증가하면서 진료과정에 자주 접한다. 어린 아이에게 제일 흔하게 생기고 아토피 피부염이 있으면 감염이 더 잘 된다. 물론 성인이나 면역이 많이 저하된 환자에게서도 생길 수 있다. 직접 접촉에 의해 쉽게 전파가 가능하며 특히 피부가 젖어 있는 경우에 더 잘 전파된다. 그래서 물사마귀가 있는 아이가 형제와 자매랑 같이 목욕하면 잘 옮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물사마귀의 치료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린 아이면 특히 숫자가 너무 많으면 그냥 지켜보거나 트레티노인 연고를 발라 볼 수 있다. 무리하게 치료하다 보면 치료로 인한 스트레스가 크고 흉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가만히 둬도 흉터가 생기지 않고 없어질 수 있다. 만약 물사마귀가 숫자가 많지 않고 아이가 치료의 통증을 잘 참을 수 있다면 제거하는 것도 좋다. 통상 짜는 방법이 있으며 만약 부위가 크다면 냉동치료 또는 약물을 바르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장효찬진천가톨릭피부과원장

경주농업기술센터, 2022년 신농업혁신타운 완공…6차 산업 모델 육성 ‘탄탄대로’

“경주 농업의 총 조수익이 1조 원을 돌파해 전국 3위, 경북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농업도시로 위상에 맞는 경쟁력 있고 살맛 나는 농촌으로 건설해야 합니다.”경주농업기술센터 이해규 소장은 세계적인 관광도시 경주가 경북 최대의 농업도시임을 강조한다. 이를 바탕으로 “젊은이가 돌아오는 풍요롭고 행복한 경주를 만드는 일은 농업이 담당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이 소장은 경주시의 농업경쟁력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도 농업정책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업을 관광산업과 접목하고 6차산업으로의 발전시켜야 한다”며 “이에 대한 다양한 농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특히 이 소장은 다양화 전략으로 유통에 대한 혁신적 발전을 강조한다. 서울 가락시장에 집중해온 유통형태에서 벗어나 친환경농산물 생산을 확대해 대도시 직판과 함께 지역에서 직접 판매하는 시스템을 가동한다는 전략이다.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해 잔류농약검사기능을 강화하고, 경주 생산 스티커를 부착해 인근 대도시 공판장으로 출하하고, 지역에서도 로컬푸드 유통센터를 지속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현재 경주지역에서 생산하는 농특산물을 직접 판매하는 로컬푸드는 천북에 완공 운영 중이며, 불국사지역에도 부지를 확보해 공사 중이다. 또 농촌체험관광 활성화를 위해 안강세심마을 등의 농촌체험휴양마을을 6개소에 설치 운영해 도시민들을 문화관광도시, 농업도시 경주로 불러들이고 있다.이해규 소장은 “경주의 농업은 이미 전국에서 최상위에 위치해 중앙에서도 인정하고 있다”면서 “경주농업을 반석 위에 올려 젊은이가 돌아오는 풍요로운 농촌을 건설하겠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완치하기 힘든 아토피, 아토피 원인 찾고 꾸준히 치료해야

-아토피 피부염, 가려움증 증상인 만성적 염증성 피부질환-김종철 원장, “아토피 전문 피부과나 한의원에서 지속적 관리 중요”“아토피질환은 장기적 치료가 필요하고 단순히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아토피의 근본적 원인을 찾은 후 염증을 줄이고 가려움증으로 인해 더 이상 피부가 손상되지 않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깨끗안 한의원 양산점 김종철 원장 김종철 깨끗안 한의원 양산점 원장이 우리나라 부모의 대표 근심거리 중 하나인 자녀의 ‘아토피 피부염’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했다.아토피 피부염은 가려움증을 주된 증상으로 하는 만성적인 염증성 피부질환이다. 주로 영유아기에 시작된다.아토피 발생의 원인은 아토피성 소인을 기반으로 해 특유한 임상증상과 경과를 보이는 피부염으로 병인은 분명치 않다.다만 유전적인 요인과 관여되며 lgE(면역글로블린 E, Immunoglobulin E)가 관여되는 체액면역과 세포면역이 모두 관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토피 피부염에서는 혈청 중 lgE가 증가되는 것이 보통이며 세포면역은 일반적으로 저하돼 있다는 것이다.아토피 치료 방법에는 스테로이드 이외에 국소면역조절제, 전신 면역조절제, 항히스타민제 등 약제의 사용, 습포 치료, 광선 치료, 면역 요법, 보조적 치료 등이 있다.아토피 전문 한의원에서의 한방치료프로그램도 있다.김종철 원장은 “한방치료프로그램은 면역학적 안정화 및 피부체질 개선을 통해 장기적 치료에도 부작용이 없도록 하고 아토피 치료뿐만 아니라 습진, 피부건조증, 땀띠 등의 피부질환에 효과를 가지도록 해 건강한 피부, 윤기 있는 피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했다.또 한의원에서는 아토피 치료 유형을 초기아토피, 아토피 2차감염, 부종을 동반한 아토피, 진물아토피, 태선화아토피 등 5가지로 나눠 치료하고 있다.전문가에 따르면 아토피 피부염 증상은 연령에 따라 3단계로 구분되며 특징도 차이가 있다.김 원장은 “신생아·유아기(생후 2개월~2세 사이)의 경우 양 뺨에 불그레하게 부푼 반점으로 시작해 얼굴, 머리 등에 붉은 반점과 진물, 딱지 등이 생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전신에 퍼지고, 태선화 진행속도가 아주 빠른 것이 특징이다.이어 “유아기·학동기(4~10세 사이)의 경우 피부가 건조해지고 가려움증이 발작적으로 심해진다. 얼굴, 목, 팔꿈치, 무릎 등에 잘 생기며 유아기 때보다는 진물이 적고 건조하다. 피부를 계속 긁어 상처가 남고 가죽처럼 두꺼워지기도 한다”며 “사춘기·성인기는 천식 및 알레르기성 비염을 동반한다는 게 특징이다. 피부 건조 정도가 심하며 가려움증도 더욱 심해진다”고 말했다.치료도 중요하지만 생활습관 개선도 동반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경우 목욕은 미지근한 물로 간단하게 샤워하거나 10분 이상 요조에 몸을 담그는 방법이 좋다. 세정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피부가 건조해지지만 물로만 씻는 경우 세균이나 오염물이 충분히 제거되지 않으므로 적절한 세정제 사용이 필요하다.특히 영유아 아토피 피부염 환자 중 증상이 심하거나 재발이 잦은 경우가 있는데 음식 알레르기와 관련이 있으므로 전문가의 진료와 검사를 통해 확인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게 좋다.김종철 깨끗안 한의원 양산점 원장은 “현재까지 아토피 피부염을 완치하는 치료법은 없다. 상업적인 광고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아토피 피부염은 피부과 전문의나 아토피 전문 한의원 등을 통해 적절한 관리와 치료를 하면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송재성, 일제시대 이후 맥 끊긴 ‘과하주’ 재현…6·25로 황폐해진 김천 재건에도 ‘솔선수범’

송재성에 대한 지역민의 감동적 정서는 남달랐다. 1999년 그가 작고했을 때 전례가 없는 김천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만큼 지극한 애향 인물로 평가받았다. 영결식 모습. 전후복구와 과하주 재현을 위한 업적 외에도 김천을 위한 그의 헌신과 활동은 광범위해 그가 생존했던 시기의 김천시민들은 직간접적으로 그와 연계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52년부터 9년간 김천고등학교의 사친회장을 역임했고 1953년부터 8년간 김천시 교육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그후 송설당 교육재단이사, 김천여자중고등학교 기성회장 등을 지내면서 김천의 후세교육을 위해서도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김천교육의 큰 버팀목 역할을 했던 것이다.1969년에는 김천시립도서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김천지역의 문헌자료와 도서 정보를 총괄 관리하고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도서관이용의 편의를 제공하는 기초를 만든 것이다. 1972년에는 재단법인 문화재보존협회 김천시지부장을 맡아 김천의 문화재 지킴이로서 역할을 수행했었다.이밖에도 그가 맡았던 직함으로는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회위원, 김천세무서 조세자문위원장, 반공연맹 김천금릉지부장, 국제로타리클럽 김천시지역회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천시행정자문위원장, 대한노인회 김천시지부장, 사회정화협의회 경북연구평가분석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김천지역과 경북지역의 여러 방면에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그는 슬하에 5남 1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 장남 영호씨는 치과의사로서 가업을 이었고, 차남 강호씨는 김천에서 과하주 양조업을 맡아 그의 필생의 업적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고향인 충북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에 있다. 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연보·1913년 충북 영동서 출생·1940년 치과의사 검정고시합격·1942년 송치과의원 개업 ·1953~1960년 김천시교육위원회 위원·1956~1960년 송설당 교육재단이사(김천중고)·1956~1989년 대구지방법원 인사조정위원회 위원·1960~1967년 김천여자중ㆍ고등학교 기성회장·1960~1970년 국제인권옹호 김천시금릉군지부장·1967년 김천시문화상(제1회)수상·1968~1973년 김천경찰서 자문위원장·1970년 김천시립도서관 건립추진위원장·1971~1972년 국제로타리클럽 김천시지역회장·1972~1976년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1979~1989년 김천시 행정자문위원장 ·1980년 김천 문화원장·1982년 대한노인회 김천시지부장·1987년 경북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경북 제13호)·1995년 전통식품 명인지정(농수산부 제8호)·1999년 5월1일 별세

다이어트의 최대 적 ‘요요현상’, 한의원에서 한방다이어트로 극복

-잘못된 다이어트, 요요현상으로 이어져-조은 원장, “다이어트한약은, 개인의 체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상담 필수”직장인 김모(31)씨는 최근 체중 20kg를 빼는 등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얼마가지 않았다. 오히려 쓰라린 아픔을 경험했다. 요요현상이 온 것이다. 결국 한의원과 병원을 찾은 김씨는 단기간의 급격한 감량 등으로 요요현상이 왔다는 진단을 받았다. 조은 원장은 “한방다이어트는 고도비만으로 체력이 급격히 저하된 사람, 요요현상을 겪는 사람, 임신이나 갱년기 등 급격히 살이 찌는 사람, 수술이나 시술을 두려워하는 사람 등이 하면 좋다”고 말했다.하지만 다이어트한약은 개인의 체질을 정확히 파악해 약을 제조해야 해 사전에 충분한 상담이 동반돼야 한다. 조은 깨끗안 한의원 천안점 원장은 “한방다이어트는 체질을 변화시켜 요요현상의 가능성을 낮추고 효과적으로 살을 빼는데 도움주는 다이어트 방법 중 하나”라며 “진료상담을 통해 체질을 꼼꼼히 파악하고 치료해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한편 다이어트 한의원에서는 부위별 다이어트프로그램을 통해 지방제거 및 부분별 비만의 직접치료를 통해 몸의 라인을 잡아주고 있다. 부위별 다이어트프로그램에는 지방분해침, 멀티부황 등이 있다.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