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32) 혜공왕

신라 제36대 혜공왕은 경덕왕이 하늘에 빌어 늦게 낳은 아들이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각간의 난을 비롯 많은 반란이 있었다.혜공왕 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났던 것은 측근과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정치적인 목적에서의 싸움과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오락에 빠져 이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반란이 주를 이루었다.혜공왕은 결국 김지정의 난이 발생해 김양상과 김경신이 진압하는 과정에 살해되는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혜공왕 때 처음으로 5묘를 지정해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5묘는 김씨의 시조 미추왕,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문무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이다.혜공왕은 경덕왕에 이어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었는데 1460년 영묘사로 옮겼다가 홍수로 떠내려가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관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을 새로 지어 지금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삼국유사: 혜공왕대력 초년(766)이었다. 강주의 관청 건물 본관의 동쪽 땅이 점점 함몰하더니 연못이 되었다.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인데 어디선가 잉어 대여섯 마리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연못 또한 따라서 커졌다.정미년(767)에 이르러 천구성이 동쪽 누각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꼬리는 3척쯤 되며 색깔은 타는 불 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또 이해 김포현에서는 논 5경 가운데 모든 쌀알이 이삭이 되었다. 이해 7월 북궁의 뜨락에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하나가 떨어졌는데 세별이 모두 땅속에 파묻혔다.이보다 앞서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가닥 연꽃이 피어났고, 또 봉성사 밭 가운데서 연꽃이 피었다.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공작새가 수없이 모여들었다.안국병법의 하권에 따르자면 천하에 군사가 큰 난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때 대사면을 내리고 살펴보며 조심하였다.7월3일 대공 각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왕도와 5도의 주군 모두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워 큰 난이 일었다. 대공 각간의 집은 없어지고, 그 집의 보물과 비단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신성과 장창에 불이 나 타버렸다. 역모를 저지른 무리의 보물과 곡식은 사량과 모량 등 마을 가운데 있었는데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난은 석 달 남짓 되어 그쳤다. 상급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고, 죽임을 당한 자도 무수히 많았다. 표훈대사의 말에 나라가 위태롭다 함이 이것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왕의 죽음혜공왕은 어려서부터 후궁과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심성 또한 점점 여성스러움에 길들여졌다. 왕위에 올라 있었지만 어머니의 섭정으로 정사가 진행되자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경향을 보였다. 혜공왕이 성인기에 접어들었어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 등의 대신들이 정치를 주물렀다.김양상 등의 대신들이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그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실세에서 밀려난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 김사인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기를 들면서 대신들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혜공왕 초기에는 김사공과 김사인 등의 대신들이 상대등과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양상이 상대등에 오르는 등으로 세력의 균형이 바뀌면서 대립의 강도가 커졌다.김사인 계열의 김대공과 대렴 형제가 각간들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공 형제는 지방의 귀족까지 상당히 많은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궁궐 내부까지 진입하지는 못했다. 중앙세력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96명의 각간들이 서로 패가름을 하여 전쟁을 치른 결과 대공 형제는 실패해 죽음을 맞았다.대신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혜공왕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혜공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음색에 빠져들며 정사에는 소홀하고, 대를 이을 후계자 또한 마땅치 않았다. 이러한 정황들은 무열왕의 12대손인 김경신이 최고 권력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특히 혜공왕이 여색을 가까이하는 한편 대신들의 자제 가운데 인물이 뛰어난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밤을 보내는 등으로 대신들의 공적으로 떠올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과 대신들의 이합집산은 김경신이 자신의 자리를 굳혀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김경신은 내물왕의 직계인 김양상이 상대등의 자리에 앉자 적극 동조자가 되어 김주원과 함께 내물왕계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했다. 경신은 김양상을 앞세워 병권을 거머쥐고, 인사·재정·공부에 이어 형부까지 전권을 수중에 집어넣었다.김경신은 반골기질이 뚜렷한 김지정을 희생의 제물로 점지했다. 그의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혜공왕의 여자 아닌 남자로 만들었다. 이어 속이 달아오른 김지정을 벽지 고을로 보낸다는 소문을 흘려 감정의 꼭짓점을 한껏 자극했다.김지정이 김경신의 그물망에 뛰어들었다. 김지정은 지방의 귀족세력까지 두텁게 포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각간의 난을 교훈 삼아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지방의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궁궐 내부 깊숙이 동조세력을 심었다.혜공왕이 24세의 생일을 자축하는 잔치를 1주일에 걸쳐 벌이는 기간이 김지정이 잡은 반란 D-Day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김양상과 김경신의 무리도 왕의 잔치에 적당히 취해 자리를 피하고, 자신의 세계로 빠져드는 혜공왕의 침소까지 김지정은 쉽게 접수했다.김지정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개로 삼은 혜공왕을 단칼에 죽였다. 그러나 나라의 왕좌에 오를 주인공을 정하지 못했다. 김지정의 무리가 왕좌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궁궐 내외부의 분위기는 더욱 어지러워졌다.김경신이 깔아둔 덫이었다. 김지정을 지원하고 나섰던 궁궐 내부의 조력자 대부분이 김경신의 사주를 받은 첩자들이었다. 혜공왕의 죽음을 묻어두고 자신들의 공을 서로 추켜세우기도 하며 어수선한 분위기에 빠져 지방의 동조세력 우두머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이던 어느 날. 술을 마신 김지정의 무리는 모두 약물에 마취되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다음날 아침 포승줄에 묶여 올가미를 쓴 채 무릎을 꿇었다. 김지정의 일족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김경신은 무열왕의 10대손 상대등 김양상을 왕위에 올렸다. 김경신의 잔꾀로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이다. 이어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어 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김양상의 조카 김주원이 서열상 자신의 윗자리에 있어 다음 전략을 추진해야 했다.김양상은 천성이 곱고 선이 굵지 않았으며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김경신이 주장하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왕관을 쓰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지 6년에 접어드는 시기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혜공왕과 선덕왕의 죽음은 김경신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작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사물인터넷, 전자기기의 밑바탕이 되다…전자제품 혼자 알아서 척척 우리 집이 ‘스마트’해졌어요

‘신혼의 재미’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자.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라는 게 말처럼 쉽진 않겠으나 큰 행복 대신 소소한 신혼의 행복을 ‘하나씩 늘려가는 세간’ 정도로 우선 만족한다. 작은 집에 꽤나 오랜 시간을 두고 꾸깃꾸깃 채워가는 살림용품들이야 말로 어제는 비록 힘들었으나 오늘은 기쁨이며 내일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다.이 같이 소박해 마지않던 행복도 점차 진화하고 있다. 바로 사물인터넷(IoT)의 기술력이 투영된 ‘스마트홈’의 이름으로 눈높이를 한껏 높여간다. 비록 작은 집이지만 스위치, 조명, 전자기기들이 원스톱으로 연결된 이른바 ‘토털 제어’가 가능해짐은 물론, ‘가전제품의 인공지능(AI)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파생된 스마트 가전은 고급형 부가 기능이 아닌 통상적 기본 사양으로 대두되는 시점이다.와이파이 기술을 통해 가정 내 비치된 전 가전제품을 콘트롤 해간다. 빅데이터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수집된 가전 정보를 능동적으로 발현, 이를 통해 최적의 편의를 제공하는 ‘네트워크 플랫폼’이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스마트 냉장고음식 보관을 위함이었다. ‘냉매’를 이용한 적정 온도를 유지함으로써 식품의 신선도 제고와 디자인적 측면만을 십분 강조한, 여기에 덧붙이자면 집안 내 가전제품 중 가장 덩치가 큰 세간 정도가 이제껏 각인된 냉장고의 이미지였다.하지만 냉장고도 똑똑해진다. ‘스마트 냉장고’의 이름으로 개명 뒤 과거의 구태를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앞서 일률적 유지에만 국한됐던 ‘온도제어기능’이 식료품의 성질에 따른 적정보관온도를 알아서 검색, 냉장고 외부 모퉁이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제시한다.실제 ‘마요네즈’의 경우 고온에선 분리가 되고 저온에서는 얼어버리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 냉장고 적정 온도인 5℃ 이하에서 마요네즈를 보관 시 세균 번식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진다.이 밖에도 방울토마토, 알약 등 식품들도 냉장보관은 금하고 상온(10℃ 이상)보관을 권장한다.김치 냉장고에도 IoT의 기술력이 깃들어있다.기본 냉장고의 사이드 가전, 혹은 김치 등 특수 식료품의 조금은 더 특별한 관리 및 유지를 위한 김치 냉장고에 IoT를 접목했다.도어에 장치된 터치스크린을 통해 더욱 전문적인 보관과 숙성 기능을 소비자에게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그날의 기상정보와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은 덤.특별한 이들의 특이해 마지 않은 전유물 정도로 인식되던 ‘차량용 냉장고’도 최근 캠핑 인구와 여흥을 즐기려는 이른바 ‘워라벨족’의 급증과 맞물려 큰 호응을 얻고 있다.운전자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차량용 냉장고를 IoT에 연결해 그간 입력해 둔 운전자의 쇼핑목록을 빅데이터화의 과정을 거친 후 분석해내는 기능이 최근 선을 보였다.설혹 데이터가 없는 경우라도 차량 내 부착된 각종 센서들이 운전자의 소비패턴과 그간의 동선 등을 파악, 그 자체로의 식재료 구입 시뮬레이션 등을 그려낸 후 운전자의 식품구매 니즈를 실시간으로 감지해낸다.식품 운송 간에도 스마트 냉장의 똑똑한 관리는 계속된다. 식품 배송의 관건은 바로 ‘식품의 변질 여부’다. 외부 날씨 및 습도의 영향도 있겠지만 차량 내부에서 발생하는 각종 열기로 말미암아 식료품이 부패 하는 경우 역시도 왕왕 발생한다.실제 무더위 아래 1시간 이상 주차된 차량의 내부 온도는 50~70℃에 육박하다. 만약 운행 중이라면 각종 실린더의 운동과 동력에 의해 발생된 열과 합쳐져 차량의 온도는 약 100℃에 까지 이른다.참고로 식품 개별의 성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 25℃ 이상의 상온에 노출된 식품은 부패 또는 변질이 빠르게 진행된다.이 같은 폐해를 일정 부분 상쇄시키기 위해 식료품 적재 시부터 도착지 운송 시점까지 소요되는 예정 거리 및 (도착)예상시간을 알려주는 네트워크 시스템이 도입을 앞두고 있다.운전자는 도착시간을 사전에 득함으로써 운행 간 식료품의 신선도 유지를 위한 최적의 온도 및 습도 등의 제반사항을 미리 체크·제어한다.일일이 손으로 ON/OFF를 콘트롤할 필요성도 사라진다. 차량 운행이 없을 시엔 제어 기능 역시 동시 종료된다. 이 냉장고는 차량 내부가 아닌 트렁크에 설치됨으로써 공간의 제약도 덜 받는다. ◆스마트 세탁기대한민국 세탁기의 시발은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인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G사의 마크를 달고 대중에 선보인 세탁기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 IoT, 빅데이터와의 콜라보를 통한 ‘스마트 세탁기’로 군웅할거 하고 있다.세탁기는 크게 드럼형과 일반형으로 나뉘는데 이는 세탁기 입구 위치에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기 소모가 상대적으로 덜한 와류식 세탁기가 조금 더 각광을 받는다. 와류란 세탁판이 회전하며 만들어지는 (세탁)물줄기로 와류식 세탁은 세탁조 내 회전판에서 생기는 물살로 빨래를 비벼 빠는 방식이다.세탁기는 다른 가전에 비해 개별의 살림 사정에 따라 그 니즈가 판이하다. 1인 가구의 경우에는 소형을 선호할 것이고 면역력이 약한 유아를 키우는 가정에선 ‘삶는 기능’이 추가된 세탁기가 선택의 주요 사양이 된다.스마트폰으로 집안 내 가전을 제어한다는 것이 신변잡기적 일상이 돼버린 요즘, 세탁기 역시 스마트폰에서 다운받은 앱을 통해 세탁 과정의 실시간 확인이 가능해짐은 물론, 인근 빨래방과의 네트워크 연계를 시도함으로써 ‘원스톱 예약’ 기능이 현실화됐다.이와 더불어 수만 개에 이르는 축적 데이터를 품은 빅데이터가 세탁물에 따른 최저의 물 온도와 (세탁)코스를 수작업이 아닌, 세탁기 내부 장착된 센서를 활용한 ‘능동적 세탁 컨트롤’에 한발 더 다가서려는 모양이다.이 밖에도 세탁물 상태확인 센서, 진단 등의 기능이 추가, 세탁기 오작동 시 연결된 스마트폰 앱을 통해 상시 확인이 가능해짐을 물론, 옷의 재질 등을 알아서 취합 후 그에 맞는 세탁 프로세스가 발현되는 등, 사람의 단순 조작을 넘어 세탁기 차원으로 구별해 내는 기술이 상용화를 위한 마지막 담금질에 매진하고 있다. ◆스마트 에어컨·TV·침대스마트의 캐치 프레이즈는 ‘스스로 학습’이다. ‘스마트 에어컨’은 소비자의 패턴과 환경, 집안 내 습도, 온도, 미세먼지 등의 사항을 일일이 체크·파악한 뒤, 이에 맞는 최적의 온도를 집 내부 곳곳에 공급한다.‘스마트 TV’의 본질은 다기능에 있다. 기본적으로 TV와 PC의 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매개가 연계점 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단순 방송청취를 넘어 TV에 인터넷 기능을 결합, TV를 통해 인터넷 검색을 하고 SNS를 활용하며 각종 VOD를 시청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스마트 TV가 지닌 모멘텀이다.‘침대는 과학이다’라는 고전의 멘트가 이제는 현실이 됐다. 침대에 장착된 스마트 시스템이 수면자의 취침 패턴을 넘어, 수면 중 체온과 혈압, 심지어 맥박까지 체크해냄으로써 최적의 잠자리를 제공한다.이외에도 침대 위에서 웬만한 여가활동이 가능하게끔 스크린과 스피커가 부착된 ‘엔터테이너 침대’가 단일상품으로 출시되는가 하면, 각종 알람기능과 수면자의 체형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안락한 수면을 유도하는 ‘인공지능 침대’가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안전한 스마트 가전 활용 팁일장일단이라고 했듯이 스마트의 편의 뒤에는 정보유출이라는 리스크가 항시 도사린다. 편의성이 담긴 스마트 가전에 안전성을 가한다면 더욱 안정감 있는 인공지능을 접할 수 있을 터다.우선 스마트 가전 개별로 설정된 비밀번호는 상시 교체해주는 것이 좋다.또 해킹 프로그램이 잠식돼 있는 프로그램은 곧바로 삭제해두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특히 수·발신자가 명확한 ‘이메일’ 등에서 해킹 프로그램이 곧잘 전해지곤 하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메일은 열어보지 말고 지우는 것이 안전하다.‘휴먼테크날리지’가 미래 사회의 공상이 아닌 현실사회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오늘이다.인간으로 말미암아 발현되던 AI의 기술력이 그 자체로의 서버를 구축, 스스로 제어, 스스로 통제, 스스로 업데이트 되는 이른바 ‘자율의 극점’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과거 세탁기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의 처녀 출현에 우리는 편의를 맛본 반면 기계 문명에 종속될 ‘파괴적 속성’이라며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하지만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오늘날의 ‘스마트 기술’은 어머니의 고충을 일거에 해소시킬 ‘가사노동의 자동화’를 꾀한다. 이는 파괴에 ‘혁신’을 얹힌 ‘파괴적 혁신’이라 지칭하기에 결코 과하지 않다. 글·사진 군월드 IT 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청송 대전사…부처님 현신 같은 기암단애 큰 법전의 진리 퍼트려 하늘 떠받치네

청송 대전사 기와지붕 뒤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일곱 개의 돌기둥 단애가 펼쳐진다. 경이롭고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감탄스럽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으니 매표소를 지나자 바로 사찰 공간으로 들어선다. 먼저 ‘뫼산(山)자’의 형상을 한 기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은산 철벽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마치 선가에서 화두를 들 때 극단의 경계 앞에 마주 섰다고 하는 그 장소이다. 거대한 암벽이 앞으로 확 넘어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들이 절집 마당 구석구석까지 뻗치는 듯하다.주왕산(周王山)은 청송의 대표적인 산이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산의 입구에 서면 기묘한 자태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암봉이 보인다. ‘기암단애(旗岩斷崖)’ 즉 신기한 깃발바위로 불리는 기암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 때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 즉 ‘주왕’이라 칭하고 진나라의 재건에 나섰으나 실패, 그 후 주왕산으로 숨어들었다. 당나라가 신라에게 주왕을 제거해 달라 요청했고 신라 조정은 마일성 장군을 보냈다. 이곳에 은거하던 주왕이 마장군과 싸울 때 거대한 암벽에 볏짚을 둘러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해 신라 군사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마장군은 굴에 숨어 있던 주왕을 찾아냈다. 주왕산의 첫 봉우리에 대장기를 세웠다고 하여 ‘깃발바위’ 즉 ‘기암’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창건신라 문무왕 12년(서기 672년) 의상대사는 기암이 올려다보이는 넓은 남쪽 공간에 청송 대전사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로 사찰에 관련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연혁은 전하지 않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로 기록돼 있다. 대전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된 후 조선 현종 13년(1672년)에 중건됐다. 1751년에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지인 ‘택리지’에 이 절은 신선과 스님이 살기 좋은 곳이라 언급되어 있다.청송군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고 있다. 세계지질공원 홈페이지에는 기암단애의 생성을 설명하고 있다. 화산재가 완벽하게 굳어져서 ‘주왕산 응회암’이라 이름 붙었다. 오랜 시간 동안 비바람에 의해 깎여 지금과 같은 형상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과학적 설명으로 백악기 주왕산 일대에서는 아홉 번 이상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 뜨거운 화산재가 쌓이고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으면서 굳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암석이 바로 뜨거운 용결응회암인데 급격히 식을 때 수축이 일어나면서 세로로 틈이 생겼다. 이 틈을 따라 침식이 일어나 지금과 같은 단애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땅속에서 우뚝 솟아난 듯한 이 암봉 자체가 사천왕이고 금강역사의 형국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큰 절이 들어서기에 훌륭한 입지다. 들어선 절 이름도 대전사(大典寺)이니 큰 법전의 절인 데 여기서 큰 법전은 ‘화엄경’이다. 보광전은 이 경전의 진리가 깃든 주 법당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찰의 전각 중에 보광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이 주존으로 되어야 하나 조선조 화엄종의 퇴조와 함께 석가여래불 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명칭만 다를 뿐 대적광전, 대웅전과 같은 성격의 전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한다. ◆보광전보광전은 1985년 10월15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었다가 불교 문화재적 가치를 높게 인정받아 2008년 7월28일 보물 제1570호로 승격됐다. 지정될 당시에 문화재청은 ‘대전사 보광전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목조건축물로 건축연대가 명확하다. 양호한 보존 상태로 회화성이 돋보이는 내부단청과 벽화는 조선 중기 불교 미술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인정된다’며 보물지정 사유를 밝혔다. 1976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그 건축 연대가 밝혀졌었다. 임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부분 중수 및 단청을 했을 뿐 보광전의 뼈대는 상량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대로다. 과거 대전사가 쇠락해가는 가운데서도 이 건물은 약 350년을 그 자리에 있다. 보광전의 외형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판 외에는 고풍스런 큰 특징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조선 중기 다포양식의 목조건물로 세워졌다. 내부로 들어가면 넓고 넓은 빛이라는 보광(普光)의 의미처럼 찬란한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내부는 건축의 뼈대와 회화, 단청이 어우러진 미의 세계이며 적멸이 흐르는 선(禪)의 공간으로 장엄되어 있다. 법당 좌우벽면에 관음, 문수, 보현보살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창 당시의 것으로 짐작되는 내부의 단청은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보광전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356호 석조여래삼존상이 봉안돼 있다. 본존불은 석가모니, 좌우 협시불은 각각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다. 삼존상은 복장조상기문이 나와 숙종 11년인 1685년에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본존불인 석가모니상은 세 마리의 사자상이 떠받치고 있는 특이한 대좌에 앉아 있다. 불상에 있어서 대좌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한반도에는 없는 사자가 그리스와 인도를 거쳐 중국을 통해 들어와 왕릉이나 석탑 주위에 새겨지게 됐다. 이곳처럼 불상대좌 아래에서도 귀여운 사자가 되어 부처님을 지키고 있다. 약 30㎝ 정도의 앙증스런 크기의 작은 사자들이 앞발을 위로 치켜들어 대좌를 힘차게 들어 올리고 있다. 축생의 몸을 타고난 사자들이 긴 세월 업장 소멸하는 장엄한 순간을 보는 듯하다.◆명부전보광전 바로 옆에는 또 다른 당우인 명부전이 있다. 이 건물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을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난 9월 이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十王像 一括)이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일괄 안에는 판관상 2구, 사자, 금강역사상 2구 등 도합 18구로 구성돼 있다. 최근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년) 조각승인 수연이 조성해 대전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는 연대가 확실한 조선 후기 명부세계의 대표적인 불상이므로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서 학술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이번에 명부전 불상들과 함께 유형문화재로 새로이 지정된 불화도 있다. 대전사 신중도는 다섯 폭의 비단을 잇대어 하나의 화폭을 이루는 채색 탱화이다. 이 불화의 아랫부분에는 무장한 호법신들이 서로 마주 보듯 배치되어 있으며 화면의 윗부분에는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이 그려져 있다. 그 사이에 사천왕을 비롯한 수호신들이 상반신만 모습을 드러낸 채 서로 마주 보듯 시선을 맞춰 도열해 있다. 이 문화재는 도난사건에 관련됐던 사연이 있다. 보광전에 있던 이 불화는 2000년 9월4일 모두 도난을 당했다. 그 후 어느 사립박물관장이 숨기고 있다가 2014년 고미술품경매시장에 나왔다. 도난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문화재청 단속반과 경찰에 의해 환수하게 되었다. 지금은 교구 본사인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존 중이다. 현재의 대전사 보광전에는 도난 이후 그린 신중도 탱화 모사본이 봉안되어 있다.대전사의 부속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 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다. 보광전 앞마당에는 과거 유적 발굴 당시 경내에 흩어져 있던 잔해들을 모아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의 처음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석재와 천 년 전의 탑신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석탑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청송 주왕산은 입구에서 보면 거대한 바위인 기암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기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사시사철 변하고 있다. 하늘의 구름도 단 한 순간도 머무는 바가 없다. 대전사를 떠나면서 한 번 더 뒤돌아본 거대한 기암단애는 은산 철벽이 아니라 부처님 형상의 큰 바위 얼굴이었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건선,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자

얼마 전까지 무더운 날씨에도 긴 팔, 긴 바지로 무장한 채 진료실을 찾는 건선 환자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중증건선환자들은 피부에 나타나는 붉은 발진과 두꺼운 각질 증상 때문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나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위를 피하는 것보다 피부를 가리는 것을 선택하곤 한다.건선은 몸 속 면역 시스템의 이상으로 인해 홍반, 염증성 판상, 은백색의 인설 등이 나타나는 만성 면역 매개성 질환이다. 특히 무릎과 팔꿈치와 같은 돌출 부위에서 잘 발생하며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눈에 띄는 병변에 고통이 심하지만 전염되지 않는 질환이다.하지만 질환에 대한 사회의 이해도가 낮고 편견이 많아 환자들은 증상을 감추거나 아토피 등 다른 피부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다행히 최근 건선 질환과 치료법에 대해 연구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중증 건선 환자들에게는 몸 속 면역체계에서 인터루킨-17A와 같은 건선 유발인자를 직접 차단하는 생물학적 제제를 처방해 효과를 빨리 나타낼 뿐만 아니라 완치에 가까운 호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부위는 작지만 환자 삶에 끼치는 영향이 높고 치료가 힘들었던 두피나 손발톱, 손발바닥 건선 증상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치료환경이 발전하면서 건선 관절염과 같은 동반 질환을 미리 살피는 치료도 가능해졌다. 건선 환자 3명 중 1명에서 나타나는 건선 관절염은 손가락, 발가락 관절과 같이 작은 관절에서 시작되며 초기에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절 변형을 불러온다. 건선을 치료하는 피부과 전문의들은 건선 관절염을 늘 염두에 두며 환자를 살피고 있다.제도적인 변화도 있었다.2년 전부터는 중증의 판상 건선이 산정특례 질환에 포함됐다.오랜 기간 치료와 관리를 해야 하는 건선 환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치료비 부담을 낮춘 것이다.전신치료와 광선치료 모두 각각 3개월 동안 받았지만 체표면적의 10% 이상에 증상이 나타나는 등 세부 산정특례 기준에 부합하는 환자는 치료비에 대한 본인 부담금이 10%로 줄어든다.이처럼 건선의 치료 환경은 최근 몇 년 사이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그럼에도 과거의 치료 실패 경험으로 인해 치료를 포기하고 숨어 있는 건선 환자들이 아직 많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지난해 전 세계 31개국에서 중등도에서 중증의 건선 환자 8천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설문 조사 결과 건선 환자들이 깨끗한 피부를 갖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해변에서의 일광욕’이 꼽혔다.수영하기, 포옹하기, 악수하기 등이 높은 빈도로 꼽혀 뒤를 이었다.보통의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누릴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다.이제 건선 환자들도 제대로 치료 받으면 얼마든지 깨끗한 피부를 되찾고 당당한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건선을 감추거나 숨기지 말고 병원을 찾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도움말=계명대 동산병원 피부과 김성애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담석증 수술, 언제·어떻게?…작은 돌이 더 위험…담낭관 틀어막을 수 있어

-대구 마크원외과 김기둥 원장(대구시의사회 정보통신이사) 담석증 수술을 언제 받아야 할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우리가 먹는 지방을 분해해서 흡수할 수 있게 만드는 소화효소가 담즙이다.담즙은 간에서 만들어져 간 내부 담도를 통해 총담관으로 모여 십이지장으로 분비된다. 장으로 분비돼 임무를 마친 담즙 중 대부분은 대변으로 배출되지 않고 소장 맨 끝에서 재 흡수돼 다시 간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되돌아온 담즙은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을 담즙 순환이라고 한다.담석증에는 간 내·외부에 걸쳐 존재하는 담도·담관에서 발견되는 담관결석과 담관과 연결돼 간 밑에 붙어 있는 담낭에 돌이 생기는 담낭결석이 있다.흐르는 냇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듯 담즙이 흘러가는 통로인 담관에서 자체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의 담관결석은 담낭의 담석이 담관으로 빠져나온 결과물이다.흔히 담낭결석의 크기가 작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아무런 증상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지름이 3㎝ 정도로 크다면 담낭 내벽에 손상을 주면서 향후 담낭암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수술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작 수술하는 외과 의사들은 5㎜ 내외의 작은 돌을 더 걱정한다.작은 결석이 담낭관을 완전히 틀어막아 급성담낭염을 유발하기 더 쉽고 최악의 경우 담낭을 빠져나와 담관결석이 돼 급성담관염이라는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상당히 위험해진 상태에서 응급 수술을 받아야하거나 수술 전에 담관결석 제거를 위한 응급담도내시경을 시행해야 하므로 외과 의사 입장에서는 조그만 담석이 더 미울 수밖에 없다. 담석증에 관한 위험한 오해 중 또 한 가지는 담석이 있어도 ‘안 아프면 괜찮다’이다.담석이 통증을 일으키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지방을 섭취하면 이에 반응하여 간 내부와 총담관의 담즙이 십이지장으로 분비되고 동시에 담낭도 수축해서 저장한 담즙을 배출한다.이때 담석이 담낭의 배출구를 막으면 오른쪽 갈비뼈 아래, 오른쪽 등과 어깨 등에 자지러지는 경련성 통증이 발생한다.환자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통증이라서 수술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그런데 담즙배출구의 일부만 막힌다면 상황은 달라진다.이럴 땐 더디지만 담즙이 빠져나갈 수는 있으므로 급격한 통증 없이 소화불량과 함께 담낭 벽에 반복적인 부종과 흉터현상에 의한 만성 염증이 발생한다.‘만성담낭염’은 담낭암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흔히들 담낭용종은 혹시 암이 되는 건 아닌지 알아서 걱정들을 많이 하시지만 담석증과 담낭암의 연관성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꼭 기억하는 게 좋겠다.이쯤 되면 담낭결석이 있으면 무조건 담낭을 떼어내야 하나 고민할 수 있다.복통, 소화불량 등 연관 증상이 전혀 없고 위에 언급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담낭결석의 경우 5년 안에 증상이나 담낭 변화를 일으킬 확률은 10%, 10년 안에 15%, 15년 안은 18% 등, 거의 5년마다 5%씩 증가한다.따라서 50대 이후에 증상이 전혀 없고 담낭 벽의 변화 없이 우연히 발견된 담낭결석은 증상 없이 여생을 지낼 확률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수술 받을 일은 아니다.이런 복잡한 원리를 따져가며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담석증을 진단 받았다면 경험 많은 외과 전문의와의 상담이 꼭 필요하지만 수술에 대한 두려움은 외과 진료를 꺼리게 만든다.물론 과거 담낭수술은 우측 갈빗대 아래쪽에 10㎝ 이상의 절개를 했기 때문에 환자에게 매우 힘든 수술이었다.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복벽에 직경 1~2㎝ 내외의 구멍 서너 개 뚫어서 시행하는 복강경 담낭절제술이 보편화됐다.최근에는 배꼽 안에 1.5㎝의 피부 절개만으로 시행 가능한 ‘단일통로 복강경 담낭절제술’ 덕분에 수술 후 뛰어난 미용효과 뿐만 아니라 보다 빠른 회복과 일상복귀가 가능해졌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냥 외과 진료를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4)북부

경주 북부지역의 문화관광 형태는 다른 지역과 판이하다. 다른 지역은 신라시대 역사적 문화자원이 풍부한 데 비해 북부지역은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비롯 대부분이 조선시대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특징이다.경주 북부지역은 경주시가지와 형산강을 경계로 구분되는 현곡면과 안강읍, 그리고 포항과 연결되는 강동면, 보문단지와 연접한 천북면 등 4개 읍·면 지역으로 나뉜다.안강읍의 옥산서원, 강동면의 양동마을, 천북면의 운곡서원, 현곡면의 용담정 등이 대표적인 문화관광자원으로 소개되고 있다. 모두 조선시대 문화유적이다. 1.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최근 등록됐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5년(1572)에 경주 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다. 다음해에 임금이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전통적인 향교 형식이다. 옥산서원 유물관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국보 제322-1호) 50권 9책 완결본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옥산서원은 훼철되지 않았다.2. 독락당(보물 제413호)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건물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어졌다.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으로 최근 건축법에도 종종 이용되고 있다. 독락당 동쪽에 자계천에 접해 지은 계정과 함께 자연 속의 하나로 사계절 운치가 그만이다.3.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이 거대한 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 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구조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4. 양동마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월성손씨와 여강이씨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360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고색창연함을 자랑하고,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2010년 7월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록됐다. 국보, 보물, 중요민속자료, 유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향토 문화재 등 문화재가 밀집해 있다.5. 관가정청백리로서 조선 성종~중종 때 우재 손중돈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해 살던 양동마을 월성손씨 종갓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6. 운곡서원안동권씨 시조인 고려 공신 태사 권행과 조선시대 참판 권산해, 군수 권덕린을 배향하기 위해 1784년(정조 8)에 건립했다. 고종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1976년 신라 밀곡사 터로 추정되는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청수골에 복원했다. 절경을 이루는 600년 된 은행나무 옆에서 매년 가을음악회가 열려 전국에서 전문 작가들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7. 종오정종오정 일원은 조선시대 영조 때 학자인 최치덕의 유적지이다. 최치덕이 영조 21년(1745)에 돌아가신 부모를 제사지내려고 일성재를 짓고 머무르자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따라온 제자들이 종오정과 귀산서사를 지었다. 종오정에는 연꽃이 가득하고, 주변에는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아름답게 우거져 있어 우리나라 정원유적의 표본이 된다.8. 소리지와 왕신예술촌경주시 천북면 성지리 552에 있는 저수지다. 소리못, 성지지(성지저수지)라고도 불린다. 마을이름도 성지리이지만 소오리, 소리라고도 부른다. 못 둑에 카페가 문을 열어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주변에는 화산 불고기단지, 왕신예술촌 등이 자리해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들과 식도락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9. 용담정용담정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포교활동을 벌이며 인간 절대평등의 가르침을 담은 용담유사를 저술한 곳이다. 최제우는 ‘사람마다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동학을 창시해 가난한 민중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근대사의 사상가이자 동학교주로 추앙받았다. 국립공원지역으로 최제우 생가복원사업을 비롯해 성역화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용담정 일대가 공원으로 사계절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10. 나원리오층석탑탑의 색이 사계절 흰색을 띠고 있어 ‘백탑’으로도 불린다. 이 때문에 신라 8괴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신라석탑으로는 장항리 사지석탑과 함께 유일하게 5층 구조다. 규모 또한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 삼층석탑 다음으로 크다. 1996년 탑에서 금동사리함이 출토됐다. 사리함에는 정교한 3층 금동탑, 9층 금동탑, 불상 1구와 부식된 나무탑 등이 나왔다. *경주 북부: 안강읍, 현곡면, 강동면, 천북면-안강읍: 안강, 양월, 육통, 노당, 산대, 옥산, 하곡, 강교, 두류, 근계, 감산, 대동, 검단, 사방, 청령리-현곡면: 금장, 상구, 하구, 가정, 남사, 내태, 무과, 소현, 오류, 나원리-강동면: 모서, 호명, 오금, 왕신, 국당, 유금, 인동, 양동, 안계, 다산, 단구리-천북면: 동산, 덕산, 신당, 모아, 오야, 물천, 갈곡, 성지, 화산리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덕왕과 표훈대덕…하늘의 경고에도 ‘딸보다 아들’ 욕심에 대가를 치르다

경덕왕이 통일신라 불교문화를 최고의 극치에 이르는 정점으로 끌어올린 시대의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덕왕의 큰아들이 왕비의 폐비에 이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둘째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 정치에 휘둘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경덕왕은 귀족세력이 오랜 기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왕위까지 능히 간섭하는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여러 각도로 추진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도 곳곳에서 나타난다.당시 불교적 사상이 통치이념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진표, 법해와 대현, 원표스님과 월명사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스님과 교류를 맺었던 기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안민가를 지어 바친 충담,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에 관여한 표훈과의 교류는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를 뚜렷하게 조명한다.삼국유사가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행사했던 스님으로 분류하고 있는 충담과의 관계에 이어 표훈과의 관계를 살펴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표훈대덕왕은 옥경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왕비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폐위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는 만월부인이다.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김의충 각간의 딸이다.왕이 하루는 표훈대사를 불러 명을 내렸다. “짐이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사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었으면 하오.”표훈이 상제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상제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고 답했다.“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오.”표훈이 다시 상제께 이를 청하자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씀을 전하자 왕이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라고 말했다.곧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섭정했지만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어린 왕은 여자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표훈대사 다음으로 신라에는 성인이 나지 않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고민과 표훈대덕성덕왕이 이뤄 놓은 왕권의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려 버렸다. 김순원과 김순정, 김의충 등이 성덕왕에 이어 효성왕, 경덕왕까지 자신들의 딸을 왕비로 추천하면서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 전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권, 인사, 재정, 형부, 공부, 예부 등 여섯 부문의 주요 관직을 꿰차고는 끝없는 힘겨루기로 권력구도를 재편하며 나라 살림이 기우는 것도 몰랐다.경덕왕은 즉위 1년 만에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비를 내쫓고 새로운 왕비를 맞도록 하는 등 왕실 내부까지 귀족세력의 힘이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자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하게 관제를 개혁했다.국학을 장려하기 위해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고 관직의 명칭을 크게 바꾸었다. 또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는 정찰을 임명해 권한을 주어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다. 지방관리들에게 월급 대신 녹읍을 주어 부정부패를 없애려 했다.경덕왕은 대신들이 왕비와 후궁을 선택해 궁궐로 들여보내 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계 구도를 잇기 위해 태자가 태어나지 못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했다. 이어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왕비를 폐비하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간청했다.경덕왕은 스스로 왕비를 지키지 못하는 지아비는 백성의 아비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대신들의 세력으로 폐비 절차를 밟는 일은 없애겠다고 다짐해 처음 이후 그를 지켰다.백성의 정신적인 평안을 위해 불교를 장려해 굴불사와 불국사를 건립하고, 석굴암을 축조했다. 내적으로는 관제 개혁에 이어 태자 살리기 전략을 구상했다. 대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후궁세력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무인들을 암암리에 배치하고 운영하는 조직을 가동했다.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거대한 용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데 옷자락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정도로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초청해 국사를 맡겼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점잖게 사양하면서 “제게서 공부한 제자 표훈이 있사온데 옆에 두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자를 천거했다.경덕왕이 그의 말을 듣고 의상의 제자 표훈을 황룡사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들었다. 그때 저녁 공양 이후에는 표훈이 어김없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훈이 탑돌이를 할 때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는데 발자국을 뗄 때마다 공중을 마치 평지처럼 내달으며 9층 목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탑 외부를 공중부양한 채 목탁을 치며 낭낭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표훈은 이미 경덕왕이 자신의 도력을 시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왕이 보는 앞에서 공중을 부양하며 탑돌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왕은 표훈의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주변을 지키며 후궁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이어 경덕왕은 누구든지 왕비와 후궁들이 아이를 낳는데 방해를 하거나 위해를 끼치면 역적과 같이 간주하고, 3대를 멸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어 여섯 명의 후궁들이 아이를 편안하게 낳을 수 있도록 각자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왕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다.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어가도록 왕비와 후궁 누구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비는 물론 여섯 명의 후궁들까지 아무도 임신조차 못했다.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태자에 대한 욕심이 깊어졌다. 또 대신들의 끝 모를 정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태자의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왕은 대신들에게 천명했다. 왕비는 물론 후궁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을 낳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했다. 이어 태어나는 태자의 안전을 위해 왕실과 같은 수준의 호위를 받게 해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 이후 3년이 지나 기적같이 왕비가 아들을 낳았고, 표훈이 동궁 주변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결계를 치고, 태자의 신변을 지켰다.경덕왕은 태자가 8살 되던 해에 죽음을 맞으며 태자가 왕위를 잇고, 왕후가 섭정하며 대신들이 모두 협조하도록 유언했다. 대신들의 세력 다툼은 경덕왕이 죽은 이후 더욱 기승을 부려 아들 혜공왕은 끝내 반란군의 칼에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인류의 진화 ‘삶과 죽음’…인류의 조상은 원숭이?…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나

잣대부터 오염됐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나뉨은 ‘실리’보단 ‘명분’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말해 믿음에 따른 ‘주체적 괴리’일 뿐 설왕설래의 논쟁이란 ‘턱없는 궤변’이다. 인류의 시초를 진화냐, 창조이냐 구분 지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방증이다.이번 연재는 인류를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약육강식. 생물은 ‘적응의 동물’로 우선 정의 내린다. 배경과 환경에 의거, 순종하고, 점층적으로 ‘심플’에서 ‘심도’있게 발전한다. 생존을 위한 하릴없는 경쟁을 수행하며 수위에 따른 생·몰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터다.본격적으로 진화론을 언급하기 전 창조론의 정체성 역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창조론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기원을 신의 영역인 조물주에 의해 조성됐다는 관점인데, 이는 서서히 그 형태와 발전을 거듭해가는 진화론과 달리 지금의 인류는 완벽한 무에서 유의 과정을 거쳐 왔음을 믿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원시인’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인류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칭하는데 쉽게 말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그래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별칭을 ‘남쪽의 원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탄생 시기는 약 600만 년 전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처녀 발견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해부학 교수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만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근거지는 ‘동아프리카’ 등지로 추정한다.기원전 600만 년 전 인류의 시초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탄생했고 400만 년부터 본격적인 진화를 거듭했다. 이후 200만 년이 지난 시점에서 멸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의 생활습관·반경과 일맥상통하다. 소규모 무리를 이뤄 ‘작은 집단’의 생활을 영위했고 조금 더 진화된 시점에서는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진다.아프리카에서 비롯된 이 어설픈 도구 역시 점층적 발전을 거듭하며, 향후 아프리카를 넘어 유럽, 아시아에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또 다른 정체성은 최초의 ‘직립보행’이다. 직립보행이 가능해지니 이들은 손이 자유로워졌고 자유로운 손을 통해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하며 음식을 지어먹는 등 나름의 ‘생존법’을 굳혀간다.이처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처음’이라는 함의를 품고 인류 역사의 작은 공을 쏘아 올렸다. 아직 불을 사용하지 못했고, 초보적인 수준의 석기기술이었으나, 큰 턱뼈를 지닌 채 처음으로 두 발을 내딛었고 도구 발전의 시발이었다는 것, 꽤나 고무적이다. ◆호모하빌리스호모하빌리스의 출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멸망 이후인 약 15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적세에서 군집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홍적세란 지질시대의 한 시점으로, 정확히 말하면 신생대 중 제4기, 그중에서도 초기에 속한다. 참고로 신생대는 총 5대로 구분한다. 호모하빌리스의 화석 역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등지에서만 발견되고 있다.호모하빌리스는 1960년대 중반 영국의 한 인류학자로부터 발견된다. 당시 이들은 호모하빌리스를 명명하는 것으로 ‘손재주가 뛰어난 능력자’라고 표현했다. 1m30cm 정도의 신장을 가진 호모하빌리스를 두고 ‘역기를 만든 최초의 인류’라는 또 다른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여기서 의미하는 역기란 자연석의 한쪽에 날을 붙인 석기를 뜻한다.이로써 호모하빌리스는 ‘최초의 석기 이용 인류’로 통칭됐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비해 턱이 좁고, 비록 가설이지만, 생성된 석기의 운반과 저장에도 일정 부분 기술력을 투영했을 것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영국의 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는 호모하빌리스를 일컬어 ‘인간과 포유동물의 사이의 고유한 연결고리’ 임을 주창했다. 이는 호모하빌리스가 원숭이에 가까웠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제대로 된 직립원시인의 시초인 ‘호모에렉투스’ 사이에 출현한 것에 기인한다. ◆호모에렉투스앞서 언급했듯 호모에렉투스의 상징은 직립, 다시 말해 ‘완벽히 두발로 선 인류’로 볼 수 있다. 호모에렉투스는 제4기 신생대에서 생활한 인류로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범주를 벗어난 지금의 유럽등지에서 군락생활을 펼쳤으며, 불을 사용한 최초의 인류로 설명된다.호모에렉투스는 완전한 직립 원시인인 만큼 평균 신장이 160cm 수준으로 알려진다. 등이 굽어있는 호모하빌리스보다 30cm가량 크다. 현재 일반 여성의 신장과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호모에렉투스란 이름은 ‘자바원인’ 이후에서나 명시된다. 자바원인은 호모에렉투스의 한 종으로, 약 70만 년 전 트리닐의 갱신세 중기층에서 발견된 화석인류를 의미한다. 트리닐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솔로강 유역에 있는 지역을 뜻하며, 갱신세는 홍적세와 같은 의미로 지질시대 중 하나를 의미한다. 참고로 호모에렉투스는 ‘라틴어’다.호모에렉투스는 단순한 언어사용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근거는 호모에렉투스가 직립이 가능했다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호모에렉투스가 현 인류와 마찬가지로 서서 이동이 가능한 ‘동일 신체구조’임에 착안, 이로 말미암아 발성 구조 역시 지금의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추정에서 비롯된다. ◆네안데르탈인네안데르탈인의 발견은 독일에서 이뤄졌다. 1800년대 중반, 독일 프로이센의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된 것으로 말미암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명시하기에 이른다. 35만 년 전 첫 출현을 시발로 해 3만 년까지 ‘구세계’ 전역에 분포됐던 인류로 추정된다. 구세계는 ‘구대륙’이라고도 불리는데, 15세기까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알려진 지역 또는 지점 등을 뜻한다.네안데르탈인의 특이점은 추위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약 40만 년 전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네안데르탈인의 체내 형성된 ‘면역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최근 현대 인류에 존재하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중 150여 개가 오늘날 A·C형 간염바이러스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등과 상호호환 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참고로 유라시아란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네안데르탈인은 과거 ‘무스테리안 문화’를 이끌던 ‘문화적 선봉장’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무스테리안은 중기구석기 시대 발발한 문화형태를 의미하는데, 수많은 석기와 추상적인 벽화가 무스테리안 문화의 아이덴티티로 알려지고 있다. ◆호모사피엔스여기서부터 진정한 ‘사람’의 영역이다. 다름 아닌 ‘이성의 유무’에 따른 기준이다. 그렇기에 호모사피엔스를 두고 예전 가요에서 들어 봄직한 ‘신인류’라 부르기도 한다. 호모사피엔스의 주 활동시기는 빙하기의 끝 무렵이다. 빙하기는 전 세계적으로 기후가 한랭하게 됨에 따라, 고위도 지방 또는 산악지대에 빙하가 발달했던 시기를 의미한다.어찌 됐든 이때부터 인류는 생각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집단의 규칙을 설정함은 물론, 목축과 농경 등, 약간의 과장을 보태 ‘1차 산업’을 영위했다는 사실.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 그대로 ‘슬기로운 인류 생활’이 펼쳐진 셈이다.호모사피엔스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메소포타미아를 중점으로 이뤄진 신석기로의 변혁은 호모사피엔스 인류의 출현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문자를 발명한, 말 그대로 ‘인류의 지혜를 품은 첫 산물’로 대변된다.하지만 호모사피엔스를 ‘완벽한 인류’로 칭하기엔 약간의 무리는 따른다. 그 이유는 호모사피엔스의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기존의 호모 사피엔스에는 현생인류를 포함했으나, 미국의 물리화학자 마이어에 의해 밝혀진 ‘유인원과 흡사한 네안데르탈인도 호모사피엔스 포함시킨 학설’에 기인, 현 인류와 호모사피엔스 간 시쳇말로 ‘교통정리’가 필요했던 것이다.그래서 현생의 인류는 구석기의 마지막을 보내온 호모사피엔스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현생인류를 사피엔스를 하나 더 추가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명시하기에 이른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3)남부

경주 남부지역은 외동읍과 내남면 지역으로 동쪽은 바다, 남쪽은 울산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여기에 역사유적지구 남산과 낭산이 포함되면서 경주지역의 전반적인 특성과 같이 역사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내남은 남산지역이고, 외동읍은 울산과 연접해 공단이 발달하고 있지만 원성왕릉을 비롯한 역사문화유적과 바다를 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특히 남산은 국립공원이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역사유적지구로 국보, 보물 등의 지정문화재를 포함해 비지정문화재까지 700여 점이 넘는 문화유적이 널려있다. 낭산 또한 해발 100여m 구릉처럼 낮은 산이지만 황복사지삼층석탑,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의 국보와 보물 등 문화유적이 즐비해 탐방객들이 줄을 잇는다.1. 선덕여왕릉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으로 646년경에 낭산자락에 조성됐다. 1969년 사적 제182호로 지정됐다. 사천왕사지 위의 낭산 정상에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봉토 밑에 둘레 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이다. 둘레 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밖으로 드문드문 둘레 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그 외에는 다른 석물은 없고 다만 전면에 상석이 있으나 이것은 후세에 설치된 것이다. 진입로가 소나무 숲과 다양한 초목이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2. 신문왕릉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사천왕사지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왕릉으로 비정되어, 1969년에 사적 제181호로 지정된 둥근 모양의 봉토분이다.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납작한 갑석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삼각형으로 다듬은 44개의 받침돌로 일정한 간격으로 둘레 돌을 받쳐 봉분을 지지하고 있다.성덕왕릉과는 달리 받침돌 사이의 12지상은 없으며, 무인석과 문인석, 석수 등도 없다. 정남향에 있는 삼각형 받침돌에 한자로 ‘문(門)’ 자가 새겨져 있고, 동쪽에는 크고 긴 돌을 쌓아서 만든 상석이 있다.3. 진평왕릉낭산의 동쪽 보문동에 숲이 우거져 공원으로 조성된 사적 제180호 진평왕릉은 시민과 관광객들의 편안한 힐링의 터전이 되고 있다. 동쪽에 명활산, 남쪽에 보문사 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낭산이 있다.특별한 석물 없이 밑 둘레 지름 약 10m, 높이 약 7m의 원형 토분으로 주위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특별하게 생긴 고목들이 서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신혼부부들의 웨딩촬영장소로 인기다.4. 황복사지삼층석탑 국보 제37호구황동 낭산의 황복사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황복사는 652년(진덕여왕 6) 의상이 출가한 사찰로 알려졌을 뿐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은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석탑을 해체해 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사리함 뚜껑의 안쪽 면에 새겨진 명문에 신라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692년에 석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전한다.5. 성덕왕릉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나라와 적극적인 교류를 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 둘레 46m 높이 5m이다.신라왕릉 중에서 호석과 함께 회랑을 갖추고 12지신상, 사자상, 석인상 등의 석물이 최초로 등장한 왕릉이다. 왕릉 앞에 비석과 이수가 사라진 대형 귀부가 있다.6. 용산서원정무공 최진립을 향사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 경주 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한 경북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서원의 입구에 3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낙엽이 절경을 연출해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사액서원이었지만 고종 때 훼철되었다가 다시 중건됐다. 최진립 장군은 경주 최 부자의 전설을 남기고 있는 원조다.7. 포석정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전복의 형태를 띠고 있어 포석정으로 이름이 붙은 문화재로 제1호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뿐이다. 경애왕이 이곳에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신라가 멸망에 이르게 됐다.8. 남산탑곡마애불상군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40여 점의 불상과 승려, 비천상 등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북면에는 좌우로 목탑형태의 9층과 7층 탑 2기가 있다. 기반부터 상륜부까지 완비되어 신라 목탑 양식 고찰에 중요자료로 연구되고 있다.남쪽 바위 면에는 삼존불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 면에는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을 표현해 놓았다.9. 용장사지남산에서 가장 큰 절터이다. 특히 둥근 형태의 특이한 3층 대좌 위에 몸체만 남아 있는 용장사지 석불좌상은 신라 고승 대현 스님이 염불을 하며 불상 주위를 돌면 불상도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고 하는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마애석불좌상과 삼층석탑 등 보물 3기가 한곳에 있다.학술적 가치 또한 높으면서 경치가 특히 아름다워 등산길이 험해도 탐방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10. 원원사지 삼층석탑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바다를 통해 침략해오는 왜를 방어하기 위한 호국사찰로 울산과 경주 경계지역에 건립했다. 사찰의 동서쪽에 쌍탑을 세웠는데 탑의 기단에 12지신상을 새기고 1층 탑신에 사천왕상을 새긴 독특한 양식이다.부조로 새긴 사천왕상은 조각수법이 뛰어나 지금도 예술인들의 공부가 되고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두텁게 입체적으로 새겨 예술적 가치도 높게 평가된다.*경주 남부: 외동읍, 내남면, 낭산, 남산-외동읍: 입실, 구어, 모화, 문산, 석계, 녹동, 냉천, 제내, 북토, 방어, 신계, 괘능, 활성, 말방, 죽동, 개곡, 연안리-내남면: 용장, 노곡, 명계, 월산, 이조, 부지 덕천 안심, 상신, 박달 비지, 화곡, 망성리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불교문화 꽃 피운 찬란한 시절 끝 꺾여버린 국운…‘혼란의 시대’ 들어서

신라 35대 경덕왕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첫째 아들이 태자로 책정되었다가 왕비 폐위에 이어 사라졌다. 어떤 기록에는 죽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은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이름이 알려진 김교각이 첫째 아들이라 전한다.성덕왕이 새 왕비를 맞아들이면서 뒤늦게 태어난 둘째 아들이 효성왕이다.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도 귀족들의 정치세력 다툼에 따라 진행된 요식절차와 같았다. 그러나 경덕왕은 23년, 비교적 긴 시간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의 강화를 통한 안정적인 정치를 하려고 상당히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경덕왕은 통일신라 가장 화려한 중대 말기의 왕이다. 불교문화의 극치를 이루고, 문화예술적으로도 가장 최고 정점에 이르렀던 시대로 평가된다. 불국사와 석굴암 등의 뛰어난 문화예술과 과학적 기술력은 오히려 현대적 과학을 앞선다고도 평가된다.그러나 아들을 얻기 위해 왕비를 몰아내고 새로운 부인을 얻는 등의 상당히 무리한 정치로 신라 중기를 끝내고 하대로 이어지는 시대를 맞는 부덕한 왕이 되고 말았다.충담과 표훈 같은 고승과의 대화에서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와 말기정치로 이어지는 엇갈림을 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충담사당나라 사신이 도덕경 등을 보내와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아들였다.옹이 다스린 지 24년째였다. 5악과 3산의 신들이 간혹 어전의 뜰에 나타나곤 했다. 3월3일. 왕이 귀정문의 다락에 올라 주위 신하들에게 “누가 거리에 나가 좋은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그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엄 있게 잘 차려입고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다가 왕 앞에 보였지만 “내가 말하는 좋은 스님이 아니다”고 했다.다시 한 스님이 허름한 중 옷을 입고 앵통을 진 채 남쪽에서 왔다.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다락 위로 불러오게 했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가 가득했다.“그대는 뉘신가?”“충담이라 하옵니다.”“어디 다녀오시는겐가?”“저는 매번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지금 막 바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과인에게도 차 한 잔 주실 수 있는가?”충담은 곧 차를 끓여 바쳤다. 차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자욱했다.“짐은 일찍이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그렇습니다.”“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잘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주실 수 있는가?”충담은 곧바로 명령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좋다’ 하고 왕사에 봉하였다. 충담은 거듭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노래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 하고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 찬기파랑가는 또 다음과 같다.구름 장막을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에/ 기파랑의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 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랑이시여.◆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백성을 위한 중흥정치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명을 고치고 행정 관제를 정비했다.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삽량주를 양주로 고쳤다. 청주는 강주, 한산주는 한주, 웅천주는 웅주, 하서주는 면주, 완산주는 전주, 무진주는 무주로 고쳐 지금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관직명도 크게 고치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국사, 석굴암을 지으면서 불교중흥을 꾀하는 한편 당나라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유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려는 고심한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충담 스님을 궁궐로 불러 백성을 위한 정치를 물어 ‘안민가’를 받아들고 충담을 왕사로 초빙하려 했다. 충담이 간곡히 사양하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충담은 매이는 것을 싫어하며 혼자 공부하고, 거리낌 없이 행하기를 즐겨 했다.충담은 도력이 높았다. 한 번 발걸음에 30여m의 거리를 내닫고, 범인들이 아무리 달려 따라가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 흔적을 못 찾게 되었다. 남산의 삼화령을 오르내리며 미륵세존에 공양을 하곤 했지만 남산 신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남루한 의복으로 경덕왕에게 나타나 안민가를 지어 바친 것도 일부러 백성을 위한 임금의 의지를 시험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충담은 나라의 대들보로 기능하고 있던 화랑들을 격려하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수시로 지도하는 일도 비밀스럽게 맡아 했다. 훌륭한 기파랑을 칭찬하는 노래를 지어 화랑들의 표상으로 삼게도 했다.경덕왕은 관리들이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 관리들을 감찰하는 기구를 두어 소홀한 관리는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파면하기도 했다. 이어 충성스런 신하들의 바른말은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천재지변이 일자 상대등 김사인이 상소를 올려 정치의 잘잘못을 이야기하자 경덕왕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순이 풍악을 즐긴다는 왕에 대해 충고했다. “제가 듣기로 중국 하나라 주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오락을 즐겨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망했습니다.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의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라 아뢰었다. 경덕왕은 이후 풍악을 그치게 하고 이순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다.경덕왕은 백성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살폈다. 웅천주(공주)에 사는 향덕이란 백성이 너무 가난해서 아버지를 모시기 어려워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봉양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많은 선물을 내리고 정표문을 세우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만약 태양이 사라진다면 지구엔 어떤 일이 펼쳐질까

지구에 서서 태양의 오르내림을 살핀다. 해를 향한다는 ‘해바라기’에 ‘순정’을 입히고, 태양과 같은 젊은이에 ‘열정’을 대입한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가끔 눈을 찌푸려 보지만, 하릴없는 가난에 내몰린 이들에게 태양빛은 오직 한 줄기일 뿐. 그래서 더 간절하다.태양은 뜨겁고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를 뜨거운 태양이 감싸 안는다. 이 순수해 마지않는 원론적 원리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또 우리가 살며 느끼는 태양과 지구의 정체성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무지한 것은 더욱 아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이 정도의 인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해 특별히 공부하고 연구할 리 없다. 그저 ‘어머니’란 단어 하나로 통칭되고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태양 이야기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 그 외 수많은 무명의 별들. 이 모든 행성들의 전체집합이 바로 ‘태양’이다.태양은 태양 하나로 설명된다.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유일의 행성이기 때문으로. 더불어 지구 입장에서는 만물을 소생케 하는 이른바 ‘GOD(신)’와 같은 존재다.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약 1억5천만㎞다.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빛의 속도를 수치화하면 초속 30만㎞에 이른다. 이것을 다시 시간으로 환산하면 시간당 10억 ㎞를 이동하는 셈이다. 단 1초의 시간으로 지구 둘레를 8바퀴 가까이 돌 수 있는 속도다.이 지점에서 지구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바로 ‘생명체 존립의 최적지’라는 것인데, 학계에서는 태양과 약 2억5천만㎞ 떨어진 행성과 약 1억3천만㎞ 이내 위치한 지점에서는 물 생성 가능성을 희박하게 본다. 얼어 버리거나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자리 잡은 지구는 70%의 물로 이뤄져 있다.태양의 컬러는 ‘레드’로 상징된다. 태양이 붉은색으로 보이는 것은 ‘레일리 산란’의 원인인데, 레일리 산란이란 빛의 파장 대비 극소량의 분자와 입자들에 의한 산란작용을 의미한다. 실제 태양은 백색 혹은 매우 옅은 청백색을 띤다.태양의 지름은 약 139만㎞이다. 이는 지구 대비 110배 가까이 큰 규모이며, 그 무게만 해도지구 질량의 약 33만 배에 이른다. 태양계의 모든 행성들을 다 더한 질량보다도 800배 가까이 무거운 수준. 가히 ‘태양계의 어머니’라는 심벌이 예사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태양의 내부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핵과 복사층, 대류층으로 각각 이뤄진다. 태양의 핵은 태양 중심을 기준으로 20% 범위에 위치하는 지점으로 태양계 전체를 아울러 가장 뜨거운 부분이다. 약 1억5천만℃다.태양 복사층은 태양 핵으로 말미암아 파생한 에너지를 복사 형태로 대류층에 연계하는 지점이다. 대류층은 상승기류가 뜨거운 물질을 광구까지 올려보냄으로써 발생하는 포인트다. 광구란 ‘태양의 표면’을 의미하며 복사층의 상층부로부터 열을 전달받는다.태양의 밝기는 독보적이라 할만하다. 밝기는 실시등급 -26.8 수준인데 절대 등급 기준으로는 10pc(거리로 보는 절대기준)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보름달과 견줘보자. 보름달의 실시등급이 -12.5 정도임을 상기해보면 5등급 정도의 차이가 난다. 등급별로 20배 정도의 차이임을 감안할 때 태양과 달의 밝기 차이는 100배 정도 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태양은 태양계 행성은 물론이거니와 지구 입장에서도 ‘만물소생’의 근원과도 같은 존재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지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은 태양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열과 빛에 의존, 생존을 영위해 간다.그렇다면 태양의 소멸로 인해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46억년을 지내온 태양이 만약 사라진다면 결론부터 알아보자. 우리는 ‘지구의 멸망’을 하릴없이 만끽해야 할 순간을 오롯이 맞이해야 할 터.태양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태양의 인력 범주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인력은 다른 말로 ‘중력’이라고도 하는데, 인력은 ‘운동에너지’의 발생 근원이다. 다시 말해 태양 인력의 영향으로 물체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과 같이 낙하운동을 하고, 고기압은 위로 저기압은 아래로 상승하는 것이다.만약 지구에서의 인력이 소멸된다면 각종 빌딩과 또 다른 지각층은 우주 세계로 일거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간 중력의 영향을 받아온 대기권 역시 원치 않는 우주유영을 해야 할 것이며, 종국에는 지구의 내부구조가 다방면으로 분열되는 초유의 사태마저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쉽게 말해 태양의 인력으로 고정돼 온 지구가 일순간 태양의 손을 놓쳐버린다면 지구는 공전속도에 버금가는 초속 30㎞의 속도로 광활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주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행성과의 충격을 그 어떠한 제어 없이 수용해야 한다면, 그저 끔찍할 따름이다.비 역시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지구 대기의 ‘대류현상’은 태양열로부터 비롯되는데 태양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구름은 생성되지 않을 것이고, 식물의 생성을 촉진시키는 수분공급도 비가 오지 않음으로써 일 순간 정지돼 버릴 것.대류란 뜨거운 물은 온도가 올라가면서 밀도가 작아짐에 따라 부피가 팽창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했듯 뜨거운 것은 위로,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을 뜻한다.태양빛이 없다면 광합성도 기대할 수 없다. 광합성은 녹색식물이 태양 에너지를 이용,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부터 포도당 등의 유기물을 생성시킨 후, 산소를 분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식물들이 광합성을 수용할 수 없으니 생육 자체는 불가해질 것이다. 초식동물 들은 주요 먹거리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의 존립이 힘들어 짊은 자명하다. ‘사시사철’의 의미도 퇴색될 듯하다. 우주의 평균온도가 영하 280℃에 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태양이 없는 지구에서의 냉기류는 쉬 가늠하기 힘들 만큼의 고통이다. ◆지구 이야기지구가 태양계 유일의 ‘생존 적지’라 일컬어지는 데엔 ‘물’의 매개가 전체를 차지한다. 지구는 물의 행성이자, 태양과의 이상적 범주 내 위치해 있음에 따라 삶이 가능한 기온 분포를 보인다. 물론 지구에 존재하는 물의 97%가 바닷물이다 보니 음용으로의 물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단 2~3%의 물로 지구는 자가 호흡이 가능한 독보적 행성으로 인식된다.지구의 표면은 ‘지각’으로 대신할 수 있다. 지각은 크게 ‘해양지각’과 ‘대륙지각’으로 나뉜다. 해양지각은 해양범위에 맞물린 암석권의 일정 부분을 의미한다. ‘모호면’을 통해 그 하부에 위치한 ‘연약권’과 구별, 지각평형을 통해 연약권 상부에 위치한다. 모호면은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라도 불리는데, 지각과 맨틀의 경계 부를 뜻한다. 그리고 연약권은 명칭 그대로 지표면 아래 100~200㎞ 사이에 분포된 유연한 암석층이다.학계에선 지구의 유래를 약 45억 년 이전으로 본다. 이는 1950년 중반 활동한 영국과 미국의 지질학계로부터 비롯된 가설인데, 측정치는 지구 암반을 대상으로 한 ‘방사성연대측정법’을 통해 밝혀졌다.방사성연대측정의 원리는 이렇다. 지구에 분포돼있는 100t가량의 방사성 탄소를 통해 우주방사선을 활용, 그 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생물의 들·날숨 등 체내 방사성탄소 양 역시 대동소이한 수준으로 일정화한다. 이후 호흡이 멈추는 상황을 체크, 탄소의 양이 줄어드는 시점을 파악해 내는 원리다. 이를 통해 지구 또는 각종 고대 유기물 등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고대 그리스에선 ‘천동설’을 믿었다. 당시 대표적 과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학파에서 주창한 학설이었는데 천동설이란 말 그대로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보고, 모든 행성은 (태양 포함)지구를 주체로 해 그 주위를 돈다는 논리다.하지만 이후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금의 ‘공전’, 다시 말해 태양주위를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이 이른바 ‘혁명적 가설’로 각광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지동설 이론은 코페르니쿠스 발표 이후 50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지구가 둥글다는 불세출의 원론은 16세기 망원경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지하기에 이른다. 이는 의외로 신변잡기적 발견으로 비롯됐는데 당시 해안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평선 너머까지 운항하는 선박의 몸체가 돛보다 먼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 이를 통해 지구의 모양이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글·사진 군월드 IT 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울진 봉평비-6세기 신라역사의 다양한 면모 새겨…가장 오래되고 가장 귀한 ‘고비’

1988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거주하는 주민이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다가 옛날부터 그의 논에 박혀 있던 애물단지 큰 돌을 굴삭기로 파서 논둑에 버렸다.얼마 뒤 비가 내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석비의 흙이 씻겨 내리자 조경석으로 사용하려고 살펴보니 뜻밖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이 석비가 발견 당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비(古碑)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울진봉평리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이다.법흥왕 11년(524)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봉평비는 1989년 발견된 냉수리비(503년)와 2009년 발견된 중성리비(501년)에 최고비의 왕좌는 물려주었지만 내용과 크기 및 서체미에 있어서 6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석비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현재 봉평비는 2008년 8월 봉평리 521번지에 신축된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은 기존의 비각 바로 앞에 지어졌다. 봉평비를 찾아가려면 국도 7호선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가 죽변교차로에서 우회전해 300m를 직진하면 시야에 전시관이 들어오고 동남쪽 지척에는 봉평해수욕장이 있다.◆1500년 묵은 봉평비가 발굴된 사연봉평비는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1월20일 세상에 비신을 드러냈다.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 118번지 주두원씨 소유의 논에 비의 아랫부분 일부만 드러난 채 비면이 거꾸로 박혀 있어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교적 글자가 잘 판독된다.같은 해 3월20일께 마을 이장 권대선씨가 농로에 방치된 석비의 흙이 봄비에 씻겨 내리면서 글자가 보인다고 면사무소와 군청에 신고했다. 담당 공무원은 경북도청에 보고했다.4월7일 서예가인 윤현수씨가 울진군청 직원과 함께 초탁본을 떠서 서실에서 판독해 보니 임신서기석의 글자와 유사한 서풍으로 씌어진 서체임을 직감했다. 법흥왕을 지칭하는 매금왕과 신라육부라는 글자를 보고 신라고비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고 한다.4월15일 매일신문에 비의 발견상황이 보도됐고 4월16일 한국고대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의 옛 명칭)의 교수와 전문가들이 비문을 탁본하고 현장조사를 했다. 5월5일 재조사 때 비를 캐내면서 떨어져 나간 비편이 현장에서 발견돼 완형을 갖추게 됐다.7월22일과 23일 이틀간에 거쳐서 계명대학교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봉평비에 대한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4월께 출토된 위치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비좌(碑座)를 찾지 못해 8월에 비의 모형을 만들어 활용하도록 했다.한편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비의 정식명칭을 울진봉평신라비로 부르기로 했고 학술대회 결과를 이듬해 1989년 ‘한국고대사연구’ 2호에 특집으로 꾸며 간행했다. 이런 성과들이 모여서 마침내 울진의 어느 논에서 잠자든 봉평비는 문화재청에 의해 1988년 11월4일 ‘울진 봉평 신라비(국보 242호)’로 지정됐고, 2010년 12월27일 ‘울진 봉평리 신라비’로 명칭이 변경됐다.◆ 신라사 연구에 소중한 금석문봉평비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됐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기에 이를 피해 글자를 새겼다.긴 세월을 땅속에 있었던 탓인지 고르지 않은 네 면 중 한 면을 다듬은 뒤 음각으로 글자를 새겨놓았기 때문에 원형의 파손이 그리 심하지 않다.비의 높이는 204㎝, 윗너비 32㎝, 가운데 너비 36㎝, 밑너비 54.5㎝로 밑 부분은 비교적 둥근 편이고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의 긴 사각형으로 비문의 글자는 세로로 배치돼 있다. 글자 수는 행마다 다르고 글자 사이의 간격도 차이가 난다. 전체 구성은 10행으로 현재 학계에서 판독한 글자 수는 399자이다.서체는 예서에서 해서로 진행되는 과도기의 것으로 6세기 냉수리비나 중성리비 그리고 임신서기석의 글자와 유사한 글꼴을 보인다.비문의 글자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고 또 일부는 마멸돼 읽기 어려운 글자가 있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하기에 애매한 곳이 적지 않다.비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비문의 요지는 법흥왕 11년(524) 1월15일에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중앙 고위 귀족들이 모여 명을 내린다.직전 해인 523년 거벌모라(울진지역 중심지)와 남미지(울진지역촌) 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에 울진주민들이 길이 좁고 험한 이야개성에 불을 내고 성을 침범하는 등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에서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大軍·중앙군)으로 반란을 진압한다.신라육부는 사후처리로 칡소(얼룩소)를 죽여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한다. 관련된 자에게 장 육십(杖六十)대와 장 백(杖百)대 등의 형벌을 내리고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에는 하늘에서 죄를 얻게 될 것임을 주지시킨 내용을 빗돌에 새겨 놓았다.6세기 초에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마주할 때 삼척이 최전선이었는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울진은 경주에서 도사(道使)가 파견돼 다스렸으나 신라와 친한 주민과 고구려와 친한 주민들이 공존하고 있었다.신라의 중앙정부도 포상과 징벌을 적절하게 활용했으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기도 했다. 봉평비는 이러한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여겨진다.봉평비가 발견됨으로써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에게 부족했던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왜냐하면 다른 신라비보다 글자 수가 많고 내용이 풍부해 문헌자료에 없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기에 6세기 신라의 역사 연구에 도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예컨대 삼국사기의 율령반포 기록이 사실임이 확인되며, 신라 육부와 관등체계 및 지방통치조직과 촌락구조, 부(部)를 초월하지 못하는 왕권의 실태, 재판에 얼룩소를 잡았던 행위, 신라의 영역, 관료제도 등 법흥왕 때 신라의 정치·경제·사회의 다양한 시대상황을 광범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비는 어떤 신라고비보다 귀한 금석문으로 평가되고 있다.◆봉평비에서 느끼는 무기교의 기교와 무관심성근대 시기 서구미학을 수용한 뒤 이를 기초로 한국미학의 정초를 놓은 한국미론의 선구자 고유섭(1905~1944)은 한국미술의 전통이라 할 만한 성격적 특성을 ‘무기교의 기교’나 ‘무관심성’ 등으로 규정했다.기교나 개성이 강조되지 않았던 6세기 신라인들의 글씨, 구체적으로 봉평비의 글씨를 보고 있으면 고유섭의 미론에 동감하게 된다. 글자의 크기나 결구도 고려하지 않고 척척 써 내려간 치졸한 맛은 기교가 없는 듯 보이지만 살펴볼수록 은근히 기교가 녹아있음이 읽혀진다.1500년 전 봉평비를 휘호한 사람은 인위적인 기교를 추구하거나 치밀한 구성을 위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의 글씨는 바로 무기교 속에 고도의 기교가 스며든 궁극의 미학이라고 여겨진다.무관심성은 언뜻 보면 세부적이고 세련되지 못해 거칠고 서툴러 보이지만 기계로 찍어낸 듯한 통일감을 추구하지 않고, 세부의 치밀하지 아니한 분위기가 더 크게 전체를 포용하는 구수한 큰 맛을 불러일으킨다. 봉평비는 자연석의 생긴 원형을 살려 글자를 배치하고 글자의 크기도 자유자재로 처리해 천진난만한 무관심성을 보여주니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의 멋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금석물의 보고인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국보로 지정된 봉평비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울진군에서는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을 건립해 제1전시실에 봉평비를 전시하고 있다.제2전시실은 삼국시대의 비라는 주제로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의 주요한 비 10기를 실물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제3전시실은 금석문과 한글이라는 주제로 금석학의 계보 및 금석문의 역사,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비석의 양식과 특징 그리고 한자의 서체,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 기록, 한글의 미래와 비전 등을 소개하고 있다.전시관 뒤편에 조성된 야외비석공원은 우리나라 지도모양으로 조성됐다. 광개토대왕비,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원주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보 및 보물급 비석 25기가 실물 형태로 제작돼 전시되고 있다.울진은 백암온천과 금강송에 월송정과 불영사로 널리 알려진 동해안 휴양관광도시이다. 그러나 하늘 맑은 가을날. 7번 국도를 달려 6세기 신라역사의 비밀을 여는 봉평비를 둘러보는 것도 마음을 살찌우는 좋은 역사문화여행이 될 것이다.정태수(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우리동네 자랑 경주(2)서부

[{IMG01}]◆(2)서부경주지역은 대부분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구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사적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더욱 관심이 높다. 어디를 가든 역사문화사적으로 문화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서부지역은 선도산, 화랑, 단석산 등의 국립공원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그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고 또 역사문화사적들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선도동, 건천읍, 서면, 산내면 지역이다.1. 태종무열왕릉경주 서악지구 국립공원에 위치해 있다. 왕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된 왕릉이다. 삼국통일의 주역 3인방에 가장 앞자리에 두는 김춘추 태종무열왕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다.무열왕릉은 소나무 숲 속에 대형고분으로 조성돼 있다. 그 뒤로 능선을 따라 4기의 고분이 나란히 위치해 고분공원을 이루고 있다.2. 서악서원 경북도기념물 제19호.조선시대 이정이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으나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됐다.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라 이름 짓고 직접 글씨를 써 현판을 달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2년에 묘우(廟宇)를 새로 짓고 1610년에 강당과 재사를 중건했다.3. 서악리 삼층석탑 보물 65호무열왕릉 북동쪽 경사지에 있는 신라시대 삼층모전석탑이다. 1층 탑신 정면 중앙에 문짝무늬, 그 양쪽에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에 비해 옥개석이 커서 상하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눈길을 끈다. 쉰등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고분 중심에 위치해 전체 균형을 맞추고 있다.4. 선도산 마애삼존입상선도산은 경주시 서쪽에 있는 높이 390m의 낮은 산이지만 국립공원이다. 산에는 신라 건국설화와 관련된 선도산 성모가 신라 개국 이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신라를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선도산 기슭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진흥왕릉, 문성왕릉, 서악리삼층석탑 등의 문화유적이 즐비하다.무열왕릉 입구에서 걸어서 1.5㎞ 정도 올라간 선도산 정상에 보물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삼존불상이 암벽에 두텁게 새겨져 있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가팔라 숨 가쁘게 올라야 한다.5. 김유신 장군묘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장군이다. 죽은 이후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다. 김유신 장군묘는 진위 여부를 두고 시비가 있지만 왕릉급으로 대규모로 조성됐으며 12지신상 등으로 화려하게 조성했다.직경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웅장하다. 봉문 아래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을 설치했고 호석 중간중간에는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을 배치했다. 특히 쥐와 용의 호석이 여의주를 들고 있어 특이하다. 장군묘 아래로 흥무공원을 조성해 관광객과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6. 법흥왕릉 사적 제176호경주의 서악으로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법흥왕릉은 수많은 대소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경주시내의 평지고분군을 벗어나 처음으로 교외에 조성된 왕릉이다. 무열왕릉을 지나 주택지에서 살짝 벗어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길로 접어들 때 논에서 개구리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은 특별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산책로가 인기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법흥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분의 남쪽에는 신라 하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다. 애공사지삼층석탑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효현리 삼층석탑으로 보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7. 금척고분군경주 중심부 서쪽 4번 국도변 건천읍 금척리에는 크고 작은 40여 기의 삼국시대 고분군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앉아있다. 신라 박혁거세가 고분 어딘가에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신통한 금으로 만든 자, 금척를 묻었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하려 시도했다. 작업을 하려는데 난데없이 천둥벼락이 치면서 폭우가 1주일이나 쏟아져 발굴을 포기했다. 고분군 주변에 개망초가 군락을 지어 달밤이면 장관을 이룬다.8. 율동 마애삼존불무열왕릉이 있는 서악동을 거쳐 약 2.7㎞를 지나가면 왼쪽으로 벽도산 아래에 두대리 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애삼존불이 서 있고 불상 앞쪽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높이 2.5m 크기의 당당한 대장부 같은 몸체에 풍만한 얼굴, 미소를 머금은 자비에 넘치는 본존불의 표정은 합장 예배할 마음을 절로 우러나오게 한다. 화려하면서도 약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으며,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예술적 향기가 짙은 8세기 중엽 신라문화 전성기의 작품이다.9. 산내면 천룡폭포산내면은 경주에서 가장 오지에 속한다. 면소재지로 들어서면 마을 입구를 에둘러 흐르는 맑은 하천이 넓은 강변에 제법 깊은 소를 형성한다. 강변에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고, 청룡폭포가 산 위에서 물줄기를 형성해 떨어져 내리면서 비산하는 물보라가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땀을 식혀 준다. 바닥의 조약돌이 선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넷물에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과 다슬기를 줍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름 최고의 힐링명소로 알려지고 있다.10. 단석산국립공원건천읍과 산내면을 잇는 고갯길을 형성하고 있는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해발 1천m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서면 경주 전체가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연결된 등산로가 좋아 방문객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동쪽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중턱에 신선사와 문화재로 등록된 신라시대 마애불상군이 있다. 또 정상에는 김유신 장군이 청년기에 수도하면서 신선에게 하사받은 보검으로 단칼에 베었다는 단석이 있다. *선도동: 충효동, 서악동, 효현동, 광명동*건천읍: 건천, 천포, 송선, 신평, 용명, 대곡, 화천, 모량, 방내, 금척, 조전리*서면: 아화, 도계, 천촌, 서오, 심곡, 도리, 사라, 운대리*산내면: 의곡, 내일, 대현, 일부, 신원, 외칠, 내칠, 우라, 감산리-경주시 행정지도-경주시 전경 사진-경주 전경사진 서악동[{IMG01}]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원대했던 꿈 어디가고 이룬 것 없이 사라져 되풀이 되는 역사 씁쓸한 뒷모습만

신라 34대 효성왕과 35대 경덕왕은 32대 효소왕과 33대 성덕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너무나 닮았다. 효소왕과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이자 형제다. 효소왕이 즉위 10년 만에 죽자 동생인 성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35년간 나라 살림을 돌봤다.효성왕과 경덕왕 역시 성덕왕의 아들이면서 형제로 효성왕이 5년간의 짧은 기간 왕위에 있다가 물러나고 동생인 경덕왕이 왕위를 계승해 24년간 나라의 살림을 책임졌다.두 형제 모두 처음에는 귀족들의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 성공하고, 차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경덕왕도 성덕왕과 비슷한 입장이었다.이러다 보니 효성왕도 효소왕과 같이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 가야 했다. 삼국유사 효성왕조에 효성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성덕왕 당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관문성 이야기와 관문성과 관련된 원원사 이야기를 새로 쓰는 삼국유사에서 재구성해 본다.◆삼국유사: 효성왕개원 10년은 임술년(722)인데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을 지었다. 지금 모화촌은 경주의 동남쪽 경계에 속하고, 일본을 방어하던 요새이다. 둘레가 6천792보이고 높이가 5척이다. 일한 사람이 3만9천262명이며, 맡아서 한 이는 원진 각간이다.개원 21년은 계유년(733)인데 당나라가 북쪽 오랑캐를 치고자 신라에 군대를 청하러 사신 604명이 왔다가 돌아갔다.-역사: 관산성을 쌓은 722년과 당나라 사신이 다녀간 733년은 성덕왕 때이다. 성덕왕은 702년에 즉위해 7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복형인 태자 중경의 어머니가 폐위되고, 궁궐을 나가자 성덕왕에 이어 34대 왕으로 737년 즉위해 742년까지 5년간 왕위에 있었다.효성왕은 김순원의 딸,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와 결혼했다. 김순원 세력의 외압에 의한 강제적인 왕비 책봉이었다. 때문에 왕비에 대한 사랑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효성왕이 영종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왕비가 이를 질투해 후궁을 죽였다. 영종이 이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다.효성왕은 외척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동생을 태자에 책봉했다. 효성왕의 동생이 35대 경덕왕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문성과 원원사지-원원사(遠願寺)는 울산과 경주의 경계지점에 문무왕 당시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 건립됐다. 김유신과 김의원, 김술종 등의 대신들과 밀교의 종파인 신인종을 신라에 들여온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 낭융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호국사찰이다.사찰에서는 법회를 이어가며 국운을 강하게 하는 주문을 외웠다.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는 공부를 하는 한편 무술을 익혀 뛰어난 병사로 양성되었다.원원사지 동서 쌍탑은 가운데 석등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펼치는 진법의 중심 설치물로 건립됐다. 삼층석탑의 상층기단 면마다 3구씩 십이지상을 새기고, 탑신에는 악을 물리치는 사천왕상을 입체적으로 두텁게 새겨 넣었다. 사천왕과 12지신은 불교의 대표적 신장상으로 불법을 수호함과 동시에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문두루비법이 펼쳐지면 신장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구름을 타고 날아가 적들을 물리친다. 탑에 새겨진 신장상들은 지금도 금방 튀어나올 듯이 현실적으로 새겨졌을 뿐 아니라 붓으로 그린 듯이 섬세하게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김유신과 김술종은 명랑이 사천왕사를 지어 당나라 대군을 방어한 법력을 지켜보고, 왜군들이 신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경계지점에 호국사찰을 짓는데 직접 나섰다.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를 막기 위해서는 사천왕사가 제 몫을 하고 있지만 왜군을 막기 위해서는 별도의 군사적 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원원사를 서둘러 건립했다.사천왕사는 양지스님과 명랑법사가 법회를 이어가고, 원원사에는 명랑의 제자 안혜와 낭융 등이 주지하며 호국불법을 펼치게 했다.성덕왕 18년인 719년에 왜병들이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해왔다. 당나라를 섬기면서 왜나라와는 교류를 단절하고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이에 명랑으로부터 술법을 이어받은 안혜와 낭융 등이 문두루비법을 시전했다. 이들의 술법은 법력이 약해 왜군 절반은 바다에서 침몰했으나 절반은 육지로 올라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관문성: 성덕왕은 원원사의 법력을 보완하기 위해 치술령 줄기를 따라 울산 바다로 이어지는 띠처럼 12㎞의 장성을 쌓았다. 산과 산을 잇고, 계곡을 메워 성을 길게 쌓아 신라의 만리장성이라 불렀다.성덕왕은 백성들의 안위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성덕왕은 궁궐 내부에서 김순원과 김순정 형제가 득세해 온갖 모략을 펼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 정리를 하지 못했다.단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수시로 평복으로 갈아입고 암행에 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필요한 정책들을 입안해 실천하곤 했다.울산과 양남지역 등의 동해안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지역적으로 방어벽을 쌓아 올렸다. 만리장성을 쌓는데 동원된 인원이 4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덕을 등지고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외벽에서는 15m 이상 높았지만 내벽에서는 대부분 쉽게 걸터앉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쌓아 성을 방어하기에 쉽도록 했다.-성덕왕 18년 대규모 군함을 끌고와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병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병들의 목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꺾어버리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적의 화살과 칼질을 막는 갑옷도 입지 않았다. 머리에 절간의 화부가 두르는 두건을 질끈 두르고 여자라 할 정도로 날씬하게 허리에 끈을 묶고 있었다.기림사 광유선승의 절기를 이어받은 유천이었다. 유천은 김유신과 천관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천관이 몰래 낳아 기른 김유신의 아들이다. 유천은 본래 자질이 뛰어난 데다 기림사에서 글공부와 무학을 깊이 있게 갈고 닦아 성취가 높았다.유천은 기림사와 골굴사로 이어지는 혈사에서 우연히 광유선승의 깨달음을 얻는 기연으로 환골탈태했다.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지경에 이르는 도학을 깨우쳐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다.천관이 죽음에 이르러 유신과의 관계를 차분히 일러 주었다. “네 아버지는 나라의 기둥이신 김유신 장군 이시다.”유천은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에 품고, 김유신 장군이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매초성전투에 참가해 먼발치에서 싸움에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유천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음을 맞는 아버지와 해후했다. 이어 아버지가 세운 호국사찰 원원사 화부로 들어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묵묵히 이어갔다. 왜구들은 유천의 용보다 크고 원귀와도 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백 년 간 원원사와 관문성 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제2의 지구·목자의 별·청록빛 서늘한 행성…태양계 행성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던데?

너무 굳어져 ‘관용적 표현’이 자연스럽다. ‘샛별’처럼 반짝이는 누군가의 눈망울이 그랬고 둘레를 감싸 도는 고리문양에 흠뻑 도취된다.또 SF영화의 단골배경이 되기도 푸른 빛의 상징쯤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태양계를 둘러싼 행성은 개별로 가진 사연들이 있단다. 물과 공기의 유무에서부터 생명체의 생존 여부, 지구에서는 생각하지도, 구태여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행성만의 고유 사례와 형태, 정체성을 비록 신비롭지만 그저 신변잡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수성태양의 온도는 1억5천만℃를 육박한다. 물론 태양 전 방위의 평균 온도는 아니다. 핵 중심을 기준으로 ‘핵융합 반응’에 의해 발발하는 최고치다. 오만했던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를 일거에 녹여버렸던 태양의 열정에 ‘수성’은 가장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 태양과 수성과의 거리는 5천791만㎞다.그렇다고 수성이 가장 뜨거운 행성이라고 하기 엔 어폐가 있다. 사실 켜켜이 쌓인 이산화탄소로 인해 열 순환이 이뤄지지 않는 ‘금성’이 한 걸음 떨어져 있음에도 갑절로 뜨겁다. 반면 수성은 태양과 근접해 있으나 열의 원활한 방출로 인해 금방 식어버린다.사실 수성 관측은 타 행성에 비해 여의치 않다. 태양과 워낙 붙어있다 보니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시간을 피한 일출과 일몰시간에만 그 자태를 드러낸다. 형태상 싱크로율을 따져보면 ‘달’과 가장 유사하다.수성은 작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기준으로 해서다. 전체 질량은 지구 대비 5% 내외 수준이지만 밀도로 따지면 100% 가까이 지구와 일치한다.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기온은 변화무쌍하다. 흔히들 말하는 ‘일교차’란 수성에서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한다. 영하 200℃에서 영상 450℃까지 이른바 고·저의 극점을 각각 달린다.이유는 간단하다. 수성에는 공기가 없다. 그리고 자전 속도 또한 0.003㎞/s로 느리다. 공기가 없으니 당연히 눈·비와 같은 대기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씻겨 내려가는 과정이 없다 보니 운석 간 충격으로 발생한 구덩이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구덩이가 바로 ‘크레이터’다.이를 수치화해보자. 수성의 자전 속도를 기준으로 주기를 나눠보면 59일 정도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24시간, 하루인 점을 감안해볼 때, 수성의 하루는 60일 가까이 되는 셈이다. 참고로 수성의 1년은 90일 정도다. 다시 말해 수성에서의 일출과 일몰은 지구 입장에선 2년 가까이 걸리는 꼴이다.조선시대에는 수성을 ‘진성’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특이하게도 수성을 두 개의 행성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새벽의 수성을 ‘아폴로’, 밤에 보이는 수성을 ‘헤르메스’라고 각각 칭했다고 전해진다. ◆금성흔히들 아름답거나 예쁜 눈을 두고 ‘샛별’ 같다고 한다. 샛별의 원주인이 바로 ‘금성’이다. 이름값을 하듯 금성의 또 다른 이름은 미의 여신 ‘비너스’다. 그리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금성은 어두운 우주 험로를 비춰준다고 해 ‘길라잡이’, ‘목자의 별’ 등으로 통칭된다.위에서 언급했듯 금성은 이산화탄소의 결집체다. 그렇다 보니 천체 망원경으로는 관측이 쉽지 않다. 하지만 절기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달과 같이 금성 또한 그 형태를 달리한다. 물론 뿌연 점 정도로 보이는 게 맹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금성의 관측을 위해선 긴 파장의 전파 기술이 필수다.금성도 지구에 비하면 소규모다. 지구 대비 약 700㎞ 정도의 작은 크기다. 금성과 지구는 가까운 듯 반대다. 지구와 가장 근접한 위치까지 접근하는 행성이자, 지구와 달리 서쪽에서 해가 뜨는 특징을 보인다. 금성의 하루는 지구의 반년을 훌쩍 넘는 250여 일이며 묘하게도 공전보다 자전의 시간이 더 길다. 이것은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화성영화 ‘마션’을 비롯한 각종 공상과학 영화의 주요 무대다. 그도 그럴 것이 화성의 또 다른 정체성이 바로 ‘제2의 지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사(NASA)는 화성에 흐르는 물줄기를 공식 인정·발표했고 이로 말미암아 대체 지구의 선봉장쯤으로 인식되고 있다.하지만 화성 역시 공기량은 절대 부족이다. 대기가 모자란 이유는 턱없이 작은 중력이 주요 원인이다. 화성의 중력은 지구의 40% 수준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1t 트럭이 화성에 간다면 400㎏를 넘기지 못할 정도다. 실제 화성의 평균 온도는 영하 90°C에 육박한다. 공기가 없기에 당연히 열을 머금을 수 있는 여건은 전무하다.화성의 컬러 이미지는 붉다. 열정적이자 선동성이 짙다. 그렇다 보니 고대 그리스에선 화성을 ‘아레스’라고 불렀다. 아레스는 전쟁의 영웅이자 신으로 상징된다. 화성의 하루는 제2의 지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지구와 대동소이하다. 40분 정도 더 길다고 보면 된다. 다만 화성에서의 1년은 지구로써는 2년이다. 공전 주기가 2배인 셈이다. ◆목성‘자이언트 행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태양계 행성 중 가장 크다. 그리고 무겁다. 지구 기준으로 부피는 자그만 치 1천400배를 훌쩍 넘긴다. 하지만 부피 대비 질량은 작은 편이다. ‘암석형’인 지구와 달리 목성은 ‘뜨거운 가스형’이기 때문이다.목성에는 거대한 붉은 포인트가 나타난다. ‘대적반’이라고 불리는데, ‘적갈색 소용돌이’라고 흔히들 부른다. 지구의 5배나 되는 큰 저기압의 구름 소용돌이로 대적반은 지구 2개를 포함시킬 만큼의 크기다.목성의 자전 속도는 태양계 행성 중 단연 수위다. 약 12.6㎞/s로 목성의 하루는 10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다. 목성의 형질은 기본적으로 기체로 구성돼 있다. 그렇다 보니 태양과 마찬가지로 ‘차등 자전’을 한다. 차등 자전은 한 천체 내 위치나 거리에 따라 자전주기가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목성은 그 크기만큼이나 많은 위성을 거느리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위성 수만 해도 63개에 이른다. 다른 말로 ‘목성계’라고도 부르는데 이 위성들은 크게 목성의 인력으로 인해 생성된 ‘불규칙 위성’과 목성의 탄생과 아울러 형성된 ‘규칙 위성’으로 나뉜다. ◆토성·천왕성·해왕성우선 환상적이다. 통상 행성을 떠올리거나 이미지화할 때 가장 먼저 각인되는 것이 바로 ‘토성’이다. 지구보다 10배가 큰 토성이 이처럼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토성을 감싸고 있는 ‘띠’가 그것이다.토성의 띠는 다른 말로 ‘고리’라고 하는데, 이는 주변 소행성의 잔해물이나 먼지, 얼음 조각들이 모여 생성된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참고로 토성의 고리와 같이 선명하지 않을 뿐 목성과 해왕성에도 황토색, 얼음조각 등으로 둘러싸인 고리를 각각 지니고 있다.천왕성의 캐치 프레이는 ‘청록빛깔의 서늘한 행성’이다. 이는 태양빛의 적색 파장을 흡수, 이로 인해 청· 녹색 파장들의 많은 양을 반사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의 한 천문학자로부터 발견된 이 행성은 평균온도 영하 215°C를 유지할 만큼 추운 행성이다. 천왕성의 특이점은 자전형태로 살펴봐야 한다.일반 행성의 자전방향은 서에서 동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공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천왕성의 자전축은 마치 누워있는 듯 기울어져 있어 자전과 공전의 방향이 반대로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천왕성을 ‘거꾸로 행성’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해왕성은 행성계의 막내다. 최근 명왕성이 작은 크기와 궤도의 불규칙성을 이유로 사실상 행성계에서 퇴출된 이후 해왕성은 명실공히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으로 이름을 올렸다.해왕성은 푸르다. 그 이유는 공기 중에 포함된 ‘메테인’의 영향인데, 메테인은 탄소 하나와 수소 네 개로 이뤄진 탄화수소, 알케인 화합물을 의미한다. 흔히들 ‘메탄’이라고도 부른다. 해왕성 표면에는 ‘대흑점’이 있는데 이는 해왕성에서 일고 있는 ‘반 시계 방향’ 의 거대 폭풍이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매캐한 메탄가스와 흡사 ‘블랙홀’과 같은 대흑점이 해왕성을 ‘아름다운 행성’으로 꼽는 이유가 된다. 그저 ‘서글픈 인생’을 빗대는 듯하다. 마치 멀리서 보면 ‘희극’이되 가까이 살펴보면 ‘비극’인 듯 말이다. 글·사진 군월드 IT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