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그의 꿈(78)패션디자이너 김선자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라는 브랜드를 열고 패션디자이너로서 36년간 활동했다. 뉴욕과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100여 차례 컬렉션을 열면서 대구 패션의 발전을 이끌었고 자신의 이름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그의 패션은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시대적 감각을 선도했다. 특히 드레스는 동양의 아름다움과 서양의 세련미를 고루 갖춰, 뉴욕 현지 언론으로부터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2008년 6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김선자를 사랑하고 그녀 옷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열정만으로 시작한 디자이너의 길김선자는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아버지 김형식과 어머니 김순이 사이에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무작정 옷이 좋아 부모 몰래 양재 학원에 다니며 디자인을 배웠을 정도다.여고시절 경북대 교정을 찾은 김선자(왼쪽 2번째).소재가 풍부하지 않았던 60년대 말 아버지의 낡은 포플린 셔츠의 컬러를 떼어내고 변형시켜 새로운 옷을 만들거나, 구제품 시장에서 옷을 구해다가 밤새 디자인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패션에 더 엄격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미스 김테일러’ 매장을 첫 선보인 1971년. 의상실에서 서 있는 이가 김선자.대구시 중구 동문동에 있던 패션 샵에서 일할 무렵 그는 남편 임창곤을 만나 결혼한다. 결혼 후 1년 만인 1971년 중구 동문동 시청 부근에 ‘미스 김테일러’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오픈했다.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은 내심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평소 사근사근하거나 남에게 이런저런 옷을 권할 만큼 사교적이지도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리자마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우아한 여성미를 단순화하고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옷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품질 소량생산 전략도 적중했다.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고집이 고객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옷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입히지 않았다.◆승승장구하다패션쇼 후 모델들과 함께 한 김선자.미스김테일러는 조금씩 번창해 갔다. 1973년 한·미 국제부인회 초청 쇼를 시작으로 1974년 신세계백화점 가을 겨울 컬렉션에 참여했고 1983년에는 그 당시 보기 드물었던 개인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대구에서 패션쇼를 할 만한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경주의 호텔에서 쇼를 가졌다. 대구에서 그녀의 패션쇼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자동차가 행렬을 이뤄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호응이 좋아 1985년 앙코르 쇼를 가지기도 했다.그녀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패션의 흐름을 읽는 직관력이 있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로지 패션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금은 타고난 감각과 운’이 작용한듯하다. 김선자는 기존의 중년층 고객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품위 있는 스타일의 옷을 제작했고, 여기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트렌디한 젊은 감각의 옷을 만들어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하게 했다.세일을 남발하지 않고 오랫동안 고객과 쌓은 신뢰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점 윈도에 한 번도 세일한다고 내건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 최고라는 자존심으로 일을 했다.자신의 패션쇼를 보러온 엄맹란과 이덕화와 함께.1987년 파리국제페스티벌 출품을 계기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고급 기성복)와 뉴욕 프레타 포르테, 중국 청도패션쇼, 미국 애틀랜타 패션쇼 등 국제 행사에 참여했다. 90년대 중반에는 1년에 6회 이상의 패션쇼를 미국과 대구, 서울에서 열며 전성기를 맞는다.◆신사옥을 짓다1973년 동아백화점 앞 동문동으로 가게를 옮긴 그녀는 1983년 동인호텔 뒤편 중구 공평동에 신사옥을 짓는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패션 샵이었다. 크기뿐 아니라 기성복과 맞춤복을 함께하는 복합매장으로 꾸며 고객들을 모았다.그녀의 샵은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여성들로 항상 넘쳐났다. 김선자 패션을 입어야 대구에서 성공한 여성으로 비칠 정도로 ‘그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대구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영과 사교 방법으로 자신의 매장을 고급스러우며 우아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1993년에는 서울 청담동에 가게를 오픈했다. 당시 청담동에 가게를 열자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구가 본점이고 서울은 분점일 뿐이다’고 강조했다.롯데월드 매장에 입점할 때 입점 조건으로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반대했다. 대구에서 30년 정도 대구시민을 위해 패션을 했는데 서울매장에 입점하기 위해 본점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입점을 했지만, 그녀는 늘 당당했고 시골 사람을 쉽게 보는 서울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기 위해 더 열심히 옷을 만들었다.다음 해인 1994년 대봉동으로 사옥을 옮긴다. 그녀는 이곳을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경남 센트로 팰리스가 들어서면서 아파트 부지로 편입돼 2007년 길 건너편으로 다시 사옥을 옮기게 된다.◆대한민국 톱 디자이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국제로타리 초청행사 패션쇼에서 인도출신의 라제드라 배부 국제로타리 회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1995년 그녀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회원이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톱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회원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1996년 스파서울컬렉션에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대구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지방에 있다고 해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결과는 성공이었다. 또 그해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그녀의 옷을 입고 출연하자 ‘황신혜가 입은 옷’이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KBS‘열린 음악회’ 사회자 황수경씨가 그녀의 드레스를 자주 입어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황수경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그녀의 서울패션쇼에 빠짐없이 나타나 축하해주었다. 탤런트 김수미, 강부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수미가 어려울 때 김선자씨를 찾아와 같이 위로를 나누며 자매처럼 우정을 이어갔다.김선자는 섬유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한국패션협회 회원, 세계패션그룹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대한민국 최고라 자부하던 박윤수, 진태옥, 한혜자 , 설윤형, 박항치 등과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한혜자씨는 여행을 할 때면 룸메이트를 할 만큼 친밀했다.이 당시 그녀와 함께 대구 패션을 이끈 박동준씨는 “서로가 경쟁하며 발전했다. 이 시기가 대구 패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대구 최고의 패션을 선보인 이들 둘은 동지였으며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들이 있어 대구 패션은 꽃을 피웠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대학강단에 서다1997년 김선자는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를 두고 말도 많았고 뒷이야기도 무성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신이 있었고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27년간 쌓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섬유 도시의 미래를 이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밝히기도 했다.1등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을 가진 그녀는 강의를 통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한사람이라도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패션행사로 인해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애썼다. 뉴욕에서 패션쇼가 있었던 2001년 9월,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를 탄 덕에 테러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모처럼 가족이 함께 했다. 오른쪽부터 큰 아들 내외. 둘째아들. 김선자 부부. 딸 내외.김선자는 디자이너로 성공했고 2남 1녀 아이들을 잘 키웠다. 큰아들은 삼성의 임원이 됐고 사진을 전공한 둘째 아들은 정교수가 됐다. 그녀는 자기 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디자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았다.자녀들이 외국 유학을 할 때는 봄이면 모든 일을 접고 직접 가서 옷이나 침구를 손수 갈아줄 정도였다. 딸은 미술대학을 나와 파리 에스모드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국내서 패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뒤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딸이 같은 길을 가기를 내심 원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모두가 부러워한 성공을 이뤘던 그녀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7년 2월 패션 세계그룹 한국협회 회장을 맡아 대구 디자이너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으나, 병마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와 행운을 주지 않았다. 2008년 10월. 그녀는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고맙심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내 아내 김선자남편 임창곤(82.전 한국패션센터 이사장)씨는 아내 김선자를 ‘패션만 알고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해내는 아주 독특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덧붙였다.제자가 그린 김선자 캐리컬처.해야 할 일이면 혼자서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 이러한 고집과 집념이 대구 패션에 이름 석 자를 남긴 힘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자기 일에는 아주 철저하고 고집스러웠지만 집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의 모난 기질도 잘 참아주었으며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자녀들의 의견을 따랐고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며 생활했다.그녀는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간섭받지 않았다. 패션은 아내가 알아서 하고, 나머지 비즈니스는 남편이 맡는 식이다. 요리할 때도 간섭이 싫어 부엌문을 닫고 혼자서 요리책을 펴놓고 음식을 만들 정도였다.일벌레인 그녀는 TV 볼 시간이 없어 배우 김수미씨가 대구가게에 왔을 때도 그녀의 얼굴을 몰라 ‘김수미씨 계십니꺼’ 라며 찾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김순재 언론인김선자 연보1947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서 출생1971년 ‘미스 김 테일러’ 패션 브랜드 설립1973년 한미 부인회 초청패션쇼. 신세계 대구 오프닝 기념 쇼1983년 중구 공평동 동인호텔 뒤편 사옥 오픈1985년 김선자 개인 컬렉션(신작 발표회)1988년 파리, 뉴욕 프레타포르테 출품1990년 섬유와 예술의 만남 전1993년 강남구 청담동 서울매장 오픈1994년 중구 대봉동 사옥 오픈1994년 중국 청도 패션쇼. 애틀랜타 패션쇼1996년 S.F.A.A 서울 컬렉션 참가1997년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2005년까지)2000년 밀레니엄 여성 경제인 패션 대전 유명디자이너 20인 선정2001년 뉴욕컬렉션 참가2003년 제13회 한국섬유 대상 패션디자인 부문 수상2007년 세계패션그룹 한국협회 회장 취임2007년 중구 대봉동 신사옥 오픈2008년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특임교수2008년 10월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공간…VR 쓰고 조종하니 나도 ‘게임 속 주인공’

2017년 11월23일부터 26일까지 엑스코에서 ‘대구국제미래자동차엑스포’가 열렸고 이곳에서 아이오닉 자율주행 간접 체험을 위한 현대자동차의 아이오닉 4D 가상현실(VR) 체험장이 마련됐다. 관람객들은 VR 기반의 자율주행 기능을 체험했다.화력발전소 건립이나 지하철 정비 등 위험요소를 내포한 업무를 하기 이전에 현장 상황을 VR을 통해 작업자에게 미리 알림으로써 사고 위험성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디스플레이의 영상은 VR에 장착된 특수렌즈를 통해 시야에 도달한다. 특수렌즈는 상을 밀집시킴으로써 시야의 각도를 넓히고 이를 통해 초점 거리를 좁혀준다.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가 개최될 당시 강릉선수촌에는 올림픽선수촌플라자가 조성됐다. 사진은 헝가리 쇼트트랙 선수들이 삼성 홍보관을 찾아 가상현실(VR ) 체험을 하는 모습.스포츠에 AI 기술을 기반으로 VR과 AR을 접목하면 여러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경기 중인 선수들의 경로를 애니메이션으로 송출해 시청자에게 입체적 표현을 보여주거나 선수들의 경기 관련 능력치를 생동감 있게 확인할 수 있다.컷: AI와 함께하는 세상〈6편〉가상현실(VR), 생활 속 깊숙히 파고들다인기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등장하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증강현실과 복합현실(MR)을 마법과 과학, 중세와 현재, 스페인 그라나다와 서울을 게임 소재로 풀어낸 SF적 요소의 드라마다.VR은 인위적 기술을 그 시발점으로 한다. 거기에 곁들인 상상의 요소를 디스플레이 장치를 통해 송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와 같은 체험을 구현해내는 기술이다. VR은 더이상 이질적 대상이 아닌 신변잡기를 내제할 만큼 우리 실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VR은 아이러니하다. 분명 가상이긴 하지만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각종 해양 연구를 위한 해저탐사, 미지의 리스크를 VR에서 분출하는 정보 제공을 통해 일정 부분 상쇄시킨다. 화력발전소 건립이나 지하철 정비 등 파생 가능한 위험인자를 내포한 업무 이전에 그곳의 현장 상황을 VR을 통해 작업자에게 미리 알림으로써 사고 위험성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다음 편에 소개될 빅데이터가 수반돼야 함이 마땅하다. 이는 곧 경험치의 데이터를 VR을 통해 알림으로써 지피지기를 목표로 둔다는 것인데, 가상과 현실의 초연결망이 VR을 통해 발현되는 셈이다.엘론 머스 크테슬라 CEO는 “우리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이 세상이 현실일 가능성은 극히 낮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를 방증하듯 편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논리의 VR 산업이 대두되는 시점이다. VR 교육, 투어, 스포츠, 의료, 엔터테이먼트 등 이채롭고 다양한 VR 서비스 출시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기업은 AI 기술을 인간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AI 기술을 생활, 생산 현장, 사무 공간에 접목해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다면 이로 인해 비축한 새로운 자원의 총합은 엄청나다. 비축한 자원을 새로운 창의성 발현에 이용할 수 있고 때로는 다음 업무를 준비하기 위한 여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결국 전체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AI를 도외시하는 것보다 AI 도입으로 기술 진보를 이루고 사회 전반 효용을 높일 수 있다면 AI는 유토피아의 기반이 될 훌륭한 자원이다.지피지기면 승산은 충분하다. 가상과 증강, 그리고 혼합현실에 대한 고찰을 터부시 말아야 할 때다. ◆VR이란 무엇인가가상현실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가상현실이란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 등을 컴퓨터로 제작,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마치 실제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성해 주는 사람과 컴퓨터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의미한다.가상현실도 또 다른 현실의 범주다. 생경함이 아닌 생동감을 내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충족하기 위한 VR의 5가지 요소를 우선 알아둘 필요가 있다.그 첫 번째는 상호작용이다. VR이 이질적 대상이 아닌 사교의 아이덴티티가 구축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상과 현실 간 충분한 상호작용이 영위돼야 하며, 이것이 발현될 때야말로 VR은 또 다른 현실과의 다리 역할을 충족시킬 수 있다.VR로 인한 상호 공감을 표현하려면 현실감 있는 환경구축이 요구된다. 실제가 아닌 미디어가 어느 수준의 사건, 인물 등을 발현시키기 위해선 리얼리즘이 수반돼야 한다.리얼리즘의 정점은 실존이다. 서비스 구축 간 가상현실의 괴리를 최대한 상쇄하고 그 어떤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주의적 구현이 필요하다.리얼리즘이 구축되면 몰입도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VR 매체에 의한 가상환경은 신기함을 떠나 신비하되 현실을 충족할 또 다른 세상을 펼쳐낸다.상호작용은 당사자와의 교감뿐 아니라. 매체 속 인물과의 상호 공감마저 놓쳐선 안 된다. VR 공간 속 인물은 또 다른 자아일 수 있고, 가상이지만 현실에 존재할 법한 신변잡기를 내포한다는 데서 교감을 이끌어낼 명분을 찾아야 한다.위 사항이 VR의 하드웨어적 인지사항이라면 VR의 소프트웨어적 기술 원리에도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VR의 디스플레이는 좌·우 2개로 분할된 영상을 송출한다. 왼쪽은 인간의 좌측 눈으로 바라봤을 때의 영상이, 반대로 오른쪽은 우측 시야에서의 영상이 보여지는 원리다. 여기서 VR과 눈 사이 약 7cm가량의 이격으로 원근감이 발생한다. 이 같은 차이로 인해 3D와 같은 입체감이 느껴지게 된다.디스플레이의 영상은 VR에 장착된 특수렌즈를 통해 시야에 도달한다. 특수렌즈의 역할을 우선 알아 둘 필요가 있는데 이 렌즈는 상을 밀집시킴으로써 시야의 각도를 넓히고, 이를 통해초점 거리를 좁혀준다.머리의 움직임은 위치추적 센서가 감지해 낸다. VR 메인보드 내부에 장착된 위치추적 센서 는 머리의 여러 동작 등을 실시간으로 잡아낸다. 이를 통해 인간이 원하는 장소나 위치 등을 지연감 없이 관찰, 리얼리즘의 극대화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 생활곳곳에 활용되는 VR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기술은 전 방위적 산업군을 아우르는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우선 두드러지는 분야가 VR을 통한 스포츠 중계다. 기존 TV수신영상에서 온라인으로의 패턴 변화를 수용하고 시청자들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미국 NBA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한 여러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VR, AR 기술을 총망라한 이 기술은 경기 간 선수네임과 통계들이 증강현실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경기 중인 선수들의 경로를 애니메이션으로 송출해 시청자로 하여금 입체적 시청환경을 제공한다. 이 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능력치인 리바운드와 슛 성공률 등을 VR 및 AR 기술을 통해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다.VR의 비약적 발전은 e스포츠의 환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시발점이 바로 ‘VR 리그’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이다.VR 리그란 VR 헤드셋과 장비를 활용, 이를 통해 생성된 게임 등을 모태로 탄생한 e스포츠의 토너먼트다. 기존 컴퓨터 앞에서 영위되는 게임과 달리 프로게이머들은 구축된 VR 장비를 착용한 뒤, 특정 아이템 발굴을 위해 이곳저곳을 이동하는 등 새로운 장르의 게임문화를 선도해가고 있다.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보인 ‘VR 홍보관’은 올림픽 이외 또 다른 주목을 받기도 했다.이 홍보관은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 등 겨울스포츠의 생경함을 느끼는 관객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스키점프대 모형에 올라 직접 스키점프를 하는 것 같은 짜릿함을 맛볼 수 있는 스키점프 시뮬레이션 등의 여러 가상·증강 프로그램을 내놓음으로써 동계스포츠의 대리체험을 갖기에 충분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유통업계에 부는 VR의 바람도 거세다.3D입체화면을 통해 매장 이곳저곳을 발품 팔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VR 스트리트’, VR을 이용한 여러 테마파크를 생성함으로써 모객효과의 극대화를 꾀하겠다는 전략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수상 오토바이를 체험하고 카트를 이용해 아일랜드 곳곳을 둘러보는 등 체험형 VR 상품이 앞다퉈 출시되고 있다.인간 생명을 다루는 존엄의 분야, 의료계에도 VR은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인구 고령화와 비만, 이에 따른 만성질환의 증가에 대처하는 전문 인력의 부재를 VR이나 AR 기술로 충족하겠다는 것이다.실제 VR을 활용한 의료 관련 특허 출원은 최근 6년간 연평균 특허 출원 증가율이 49.4%로 급격히 늘었다.의료에 VR을 활용하는 대표 사례로는 수술, 진단, 의료인 훈련, 회복을 돕는 재활치료, 환자 삶의 질을 향상할 건강 체크 분야 등이다. 특히 고소공포증을 앓는 환자에게 실제가 아닌 고층 복도에 서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VR 노출 치료 프로그램’을 사용함으로써 다양한 공포증 치료에 적지 않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이 밖에도 뇌동맥류를 앓고 있는 환자가 가상현실을 통해 수술의 전 과정을 사전에 인지함으로써 수술적 공포를 일정 부분 완화하기도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자폐증, 조울증 같은 심리 치료에 VR 기술이 십분 활용되고 있는 추세다.직접 배를 절개하지 않아도 VR과 AR 기술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다. 의료진은 사전에 수술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감행한다. 실수는 줄어들 것이고 환자의 고통 절감차원에서 수술 시간도 절약될 수 있다.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백년지대계’로 일컬어지는 교육 분야에서도 VR은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입체감이 요구되는 원기둥이나 삼각뿔, 함수 등의 영역에서 VR이 접목된다면 학생들의 이해도 제고에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 수업 간에도 책에서 보는 것이 아닌 가상의 유적과 유물 등을 3D 영상을 통해 접할 수 있다면 시·청각 수업의 더할 나위 없는 표본이 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커지는 VR 시장VR 시장은 시나브로 확대되고 있다.한국VR 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VR 시장 규모를 올해 2조8천억 원에서 2020년 5조7천억 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전 세계적으로 눈을 돌리면 성장 폭은 더욱 고무적이다. 해외 유력 시장조사기관에 의하면 VR 시장 규모를 2017년 45억2천만 달러에서 2026년 2120억6천만 달러로 내다봤다. 이는 5G 이동통신 시대의 개막과 궤를 함께 하는데 초연결성과 초지연성을 포인트로 시장의 거대 성장을 예측하는 것이다.미국 역시 2014년 당시 90만 달러 규모였던 세계 시장이 2018년에는 5천200만 달러 규모로 성장한 것을 기반으로 VR 산업이 무한대의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현재까지의 VR 시장은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 기기의 수익 창출이 주를 이룬다. 구글의 데이드림, 페이스북의 오큘러스 리프트와 같은 VR 기기의 활용이 용이한 특정 계층을 기점으로 소비자층의 다변화가 예상된다.하지만 무조건적 청사진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철저히 분석돼야 함이 요구된다. VR의 지나친 의존으로 인한 중독 현상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구분치 못하는 신종환자들의 발생 개연성이 분명 존재한다. 이를 통해 발생 가능한 각종 범죄 역시도 쉬 간과할 수 없는 맹점이다. 아울러 지나친 AI 기술의 발발로 인한 인간소외 등 윤리적 문제들도 무시해선 안 된다. 콘텐츠 능력으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는 것이다. 병원은 그럴듯하게 지어졌지만 의료기기가 부족한 셈이다.예를 들어 원가절감과 원거리 이동이 용이치 않은 소비자를 위해 각 건설사마다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사이버 모델하우스’. 2006년 인터넷 청약과 함께 시작된 사이버 모델하우스는 청약과열을 방지하고 모델하우스 건립비용이 오롯이 소비자들에게 전가된다는 단점을 타파하기 위한 이름 그대로 스마트한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인터넷을 이용해 아파트 평면도 뿐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 심지어 마감재 확인까지도 가능하다.하지만 사이버 모델하우스의 맹점은 분명 존재한다. 3D 공간을 펼쳐냄으로써 입체화를 제고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실물에 비해선 왜곡된 사항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마감재의 질감까지는 확인이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기술적 한계를 방증하듯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이버 모델하우스는 보조수단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 또한 사실이다.세상일에는 일장일단(一长一短)이 상존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희망과 경계를 더불어 고려해야 한다. 그 괴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 그리고 현 시점이다.글·사진=군월드 IT 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운전으로부터의 해방…달리는 차 안은 나만의 ‘사무실·영화관·헬스장’

AI를 기반으로 안면인식 기술이 대두되고 있다. 인간의 시선을 자동차 내부에 장착된 카메라로 인지, 운전자가 졸거나 시야 반경에서 벗어날 시 경보음을 통해 알려주는 기능 등이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미국 전기자동차기업인 테슬라는 자체개발한 자율주행용 AI칩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자동차’는 6·25 전쟁 종전 직후인 1955년 미군이 내다버린 차량들의 부품을 모아 재조립해 탄생했다.구글의 무인화 차량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를 통해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핸들을 움직인다. 목적지를 설정하면 자동운전되는 항공기와 같은 원리다.자율주행차는 이제 단순 하드웨어적 기술을 넘어 심도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별도의 타이어 교환 없이 접지력이 높아지는 주행모드나 자동차 내부 센서를 통해 리모컨 하나로 모든 사항을 감지·조작 가능해진다. 인공지능(AI)은 흔히 바퀴의 발명과 같은 ‘파괴적 기술’에 비견 되곤 한다. 바퀴의 발명은 6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염원은 기술과 아울러 진화했다. 오롯이 인력으로 이동하던 수레의 시대는 한동안 지속됐다. 그 시기 동안 인간은 자체의 동력으로 이동하는 수단을 앙망해왔다. 그 같은 니즈가 한데 모여 1830년대 런던 시내를 질주하던 노면 마차는 점차 우리 기억 속으로 잊혀져 갔다.최초의 자동차는 148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작한 태엽자동차다. 이후 1769년 프랑스에서 증기 자동차가 시운행을 가지고 상용화 과정을 거쳤다. 바퀴의 발명이 후 두 번째 파괴를 경험한 셈이다. 증기기관차에 비해 강한 엔진을 장착한 오늘날의 휘발유 자동차는 1886년 독일로부터 비롯된다. 이때부터 공기 타이어가 발명되고 2기통 자동차가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대중에 공개됐다고는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는 특수성, 특별함을 지녔다. 상위계층만의 전리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셈이다.자동차 상용화는 1930년 불어닥친 대공황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고급화의 수단이었던 자동차는 쇠락하고 보편화된 자동차 시대가 본격 도래했다. 가성비 제고를 위한 개량화 정책은 시류에 따른 정책이었다.자동차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이제 운송수단을 넘어 인공지능(AI)에도 발산되고 있다. AI를 토대로 한 안면인식 기술이 대두되는 시점이다. 운전자는 사전설정을 통한 인터페이스를 활용한다. 인간의 시선을 자동차 내부에 장착된 카메라로 인지, 운전자가 졸거나 시야 반경에서 벗어날 시 경보음을 통해 알려주는 기능 등은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1980년대 후반 휴대폰 가격은 차 한 대 값을 상회했다. 불과 20년 후인 2010년 초 인터넷이 가능한 스마트폰이 대중화됐다. 현재 휴대폰 가입자 수는 대한민국 인구수와 비등한 5천만 명을 넘어선다. 이 같은 현상에 기인,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자율주행차의 상용화 역시 스마트폰과 그 궤를 함께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에선 오는 2030년 자율주행차의 대중화가 이뤄질 시 일반 자동차의 보급률은 80% 이상 하락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신속결합의 시대다. 병렬적 융합이 아닌 보안솔루션과 사물인터넷(IoT), 디지털 지도의 사례와 같이 전방위적 융합이 수반돼야 한다. 자율주행차 역시 이 같은 시류를 함께 타야 할 당위를 지닌다. ◆자율주행차의 원리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자동차와 소통하고 운전자의 아이덴티티를 인지한다는 것은 외화 시리즈의 공상 과학에서나 볼법한 장면이었다. 현실적 괴리 탓, 공상이라는 전제를 두고 영화 속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만큼 시쳇말로 ‘말도 안 되는’ 그저 허상이었다.30년이 지난 현재, 그 허상은 상용화를 목전에 둔 목표로 다가왔다. AI를 기반으로 한 각종 기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무인의 기조를 딴 각종 스마트 기기들이 생활 전반으로 시나브로 스며드는 시점이다.자율주행차는 크게 4가지 요소가 충족될 시 비로소 자율의 이름을 덧씌운다.그 첫 번째는 다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지구위치측정체계(GPS) 위성인데 GPS를 통해 자동차의 위치, 그에 따른 땅의 형세 등을 인지·파악하게 된다.GPS가 자율주행차의 궤적을 인식한다면 레이저 스캐너가 거리조절과 장애물 등의 각종 돌발요소를 인식해 안전운행을 도모한다.그렇다면 레이저 스캐너가 미처 잡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이곳은 사방에서 비춰오는 빛을 이용한 라이다가 리체크를 실시, 안전에 안전을 더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된다.영상센스는 이 모든 주행사항을 정확히 판독해 자율주행차 간 각종 돌발사항 등을 학습, 학습된 내용을 빅데이터화해 운전자의 습관을 바꾸듯 자율주행의 안정성 제고에 방점을 찍는다.자율주행차의 기본요소가 갖춰졌다면 상용화를 위한 완성단계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총 5단계로 나뉘는 데 우리가 현재 운송수단으로 삼는 유인 자동차는 통상 0단계로 지칭한다.1단계는 단순 운전자 보조 시스템이다. 상용화된 고급 자동차 사양에 포함된 크루즈컨트롤과 차선이탈방지 시스템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스템은 오롯이 보조의 역할이다. 시스템 제어는 운전자의 몫이다.2단계는 단순 시스템 제어를 넘어 속도 조절이 가능한 차량이다. 각종 장애물을 인지, 경보를 통해 돌발사항을 대비한다.자율주행차로 일컬어지는 것은 3단계부터다. 차선 유지, 장애물 경보, 노면 상태 체크 등을 시스템으로써 인식하고 대비한다. 긴급사항이 아니라면 운전에 대한 제어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4단계에 들어서면 운전자의 역할이 더욱 협소해진다. 운전자가 목적지만 설정하면 자동차의 원패스 시스템으로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는 단계다. 미국 자동차공학회 기준으로 현재 네이버의 자율주행차 기술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5단계는 자율주행차의 종착역이다. 위에서 언급한 허상이 현실화되는 시점이다. 운전자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단계야말로 완벽한 무인자동차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율주행차의 현재2016년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명제가 처음 대두됐다. 이후 AI를 기반으로 한 각종 IT 관련 커리큘럼(교육 과정)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중국은 시범도로를 넘어 공공도로에서 자율주행차 테스트를 할 수 있도록 승인한 차량 대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다. 자율주행에 관한 공격적 사업 영위를 공고히 했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현재 14개 도시, 32개 기업에서 100개가 넘는 자율주행차 승인 번호판을 발급받은 상태다. 이 중 베이징은 130여㎞에 달하는 44개의 자율주행차 테스트용 도로를 지정했다. 중국 내 가장 긴 테스트용 도로는 80㎞에 이르는 베이징 남부의 ‘이좡’ 거리다.미국에서는 자율주행차를 이용한 배송서비스가 상용화돼가는 추세다. 미국 최대 규모의 마켓인 ‘크로거’와 ‘월마트’는 스타트업과 각 협약을 맺고 배송서비스를 개시했다.테슬라 역시 자체개발한 자율주행용 AI 칩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테슬라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안전한 자율주행’의 캐치프레이즈로 강력한 하드웨어의 생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장거리 운행이 잦은 트럭운전자를 위한 자율주행용 트럭도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가 창업한 스타트업에서 연구 중인 이 시스템은 각종 제어기능이 장착된 운전자 보조장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우리 정부는 현재 자율주행차 상용화에 대비, 총 30여 건에 달하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가장 큰 골자는 자율 시스템이 주행하는 시뮬레이션 설정을 통한 도로교통법 개정과 자율주행 간 선행돼야 할 책임 주체 확립과 그에 따른 의무규정 확보에 나섰다. 이 같은 사항에 기인, IT 관련 기업들은 자율주행차 테스트베드를 조성하고 지자체와의 업무협약(MOU)을 통한 상용화 사업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를 위해선 최첨단의 교통인프라 구축이 우선 과제다. ◆자율주행차의 활용범위자율주행차는 이제 단순 하드웨어적 기술을 넘어 한층 더 심도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를테면 각종 자연재해(폭우, 폭설 등) 발생 시 별도의 타이어 교환 없이 접지력이 제고되는 주행모드가 생성되는가 하면, 자동차 내부 센서를 통해 리모컨 하나로 모든 사항을 감지, 조작 가능한 초고도화된 무인 자동차 개발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이처럼 자율주행차의 청사진이 속속 등장하면서 그에 따른 장밋빛 미래도 다각도로 점쳐지고 있다.지금까지 자동차의 덕목은 주행성, 안정성, 편의성으로 국한됐다. 하드웨어적 구성이 충족된다면 이를 제어하는 것은 운전자 몫이었다. 이성적 판단이 주효했고, 이것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안전운전’의 지름길이었다.자율주행의 도입은 운전자의 인식변화를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다. 필수였던 운전은 그저 취미생활의 하나일 뿐이다. 교통경찰은 감소할 것이며 운전면허 시험장 역시도 존폐의 기로에 들어설 것이다. 대리운전, 택시 등의 운수업 또한 하락세를 벗어나기 힘들 전망이다. AI로 인해 파생 가능한 디스토피아적 직업 감소세와 그 궤를 함께하는 대목이다.하지만 하릴없이 운전에 집중해야 할 과거 운행에 비해 무인운전으로 인한 엔터테이먼트 적 요소는 무한할 것으로 보인다. 이성보다 감성이 득세할 것이며, 잉여시간을 운동, 업무, 쇼핑, 더 나아가 차량 내부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영화를 즐기는 등 차량은 또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조짐이 농후하다. 차량 내부에 생체인식 센서, 서라운드 오디오를 삽입하고, 좌석의 전 방위적 공간을 스크린과 프로젝터 등으로 채우는 것. 그저 꿈만은 아니다.차량의 인터페이스 역시 단순 볼륨 조정, 냉난방기 On/Off에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손으로 조작할 것 없이 차량 내부에 장착한 각종 인식시스템을 활용, 음성을 통해 자동차의 모든 편의 기능을 조작할 수 있다.주차공간을 찾아 수 시간을 비집고 다닐 필요도 사라진다. 하차 장소에서 수집된 주차장 정보를 통해 원하는 시간, 편안한 장소에서의 승'하차가 용이해진다. 주차가 가장 어렵다는 볼멘 소리는 더 이상 들릴 것도, 들을 필요도 없을 것으로 기대된다.‘더 빨리’, ‘더 안전하게’ 모토로 경쟁력 제고에 나서는 배송시장 역시도 격변기를 맞고 있다. 사람의 힘이 아닌 드론, 자율주행차를 활용한 첨단 시스템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모양새다.아쉽게도 국내에서의 자율주행 서비스는 미진한 단계다. 기술 접목을 가능케 할 단계에는 들어섰다지만 현저히 부족한 인프라와 풀리지 않는 각종 규제 등이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이다. ◆자율주행차 전망스마트폰이 시나브로 일상에 스며든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간 스마트폰을 통한 각종 이슈와 직업군이 탄생했다. 철옹성과도 같은 스마트폰의 아이덴티티는 자율주행차 등의 디바이스로 점차 옮겨가고 있다.자율주행차는 드론, 가상현실(VR) 기술 등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혁신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실제 미국의 한 리서치 업체는 오는 2035년 자율주행차 관련 시장규모를 1천3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향후 자율자동차는 초기비용의 부담 외, 무인 자동화의 다채로운 이점만으로도 최적의 가성비를 자랑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상용화는 시간문제다.하지만 자율주행차의 청사진 이전, 산재한 윤리시스템적 절치부심이 선행돼야 함은 필수다.자율주행차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절감하기 위해선 끝없는 시뮬레이션을 통한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 내부의 엔터네이적 요소에 앞서 ‘안전성’ 구축 마련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혁신에도 ‘안전제일’이라는 원론적 모토는 희석되지 말아야 할 당위다.글·사진=군월드 IT 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그의 삶 그의 꿈(77)신화가 된 제지인(製紙人) 이종대

이종대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은 우리나라에 화장지 문화를 도입하고 대중화시킨 한국제지산업의 선구자다. 이종대 회장의 생전 모습. 지금은 ‘화장실’로 통칭하지만 예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변소, 뒷간, 측간(厠間), 정랑(淨廊), 통시, 절에서는 해우소(解憂所)….지금의 60, 70대 연령층만 해도 어렴풋한 기억 몇 조각쯤 있을 것이다. 뒷간 문 옆 철삿줄에 매달린 헌 잡지나 공책, 네모로 잘린 신문지며 누런 비료 포대 따위…. 특히 시골에선 지푸라기를 손으로 비벼 부들부들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담장 위 박넝쿨 잎 두어장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심지어 새끼줄을 타고 앉아 해결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지만 불과 몇십 년 전 일이다.그런 우리네 생활 풍경을 일거에 바꿔준 사람이 있다. 이 땅에 화장지 문화를 처음 도입해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제지산업의 선구자!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이종대(李鍾大)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이다.◆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 이종대1933년 5월 28일, 경북 금릉군 김천면의 농가에서 부 이규하와 모 이수연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넷의 노산 탓인지 어머니는 막둥이가 첫 돌 지난 지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여섯 자녀를 키우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쉴 틈이 없었다. 누구랄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어린 종대는 학교까지 시오릿길을 운동화가 닳을까 봐 벗어들고 맨발로 뛰어가곤 했다.해방 몇 달 전 김천중학교(6년제)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대학 4학년 때(1954) 학장 추천으로 대구의 청구제지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가난한 제자가 수업 틈틈이 캠퍼스 내 신축공사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교수들이 눈여겨본 것이다.청구제지는 직원 80명의 꽤 규모 있는 회사였다. 대학생 종대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기술을 익히느라 모두가 퇴근한 후에도 혼자 남아 기계를 붙들고 끙끙거렸다. 행운은 일찍 찾아왔다. 이듬해, 대학 졸업 몇 달 후 스물둘 나이로 일약 공장장이 됐다. 기계에 매달려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이 입사 1년 된 신입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청구제지 사장은 자신의 혜안이 훗날 세계적 제지인(製紙人) 이종대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줄 알았을까. 신혼시절의 이종대 부부. 청구제지 공장장으로 일하던 1955년 결혼, 공장옆 사택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해 가을엔 세 살 아래 김경애와 혼인, 공장옆 사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전기사정이 안 좋던 때라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에라도 뛰어갔다. 전기선 잇는 작업을 하다 감전돼 죽을뻔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이탈리아 유학과 제지공장 생활 1957년 국비유학생으로 이태리의 제지회사 카르테라 부르고에서 8개월간 선진 제지기술을 배우던 시절의 청년 이종대. 누구에게나 평생 세 번의 기회는 온다더니 1957년 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종이 제조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국비장학생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것. 카르테라 부르고(Cartera Burgo) 라는 회사에서 8개월간 제지기술을 배웠다.2001년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화적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지푸라기를 사용하며 자란 그에게 화장지 문화는 생소했다.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질 좋은 화장지를 사용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기술습득에 매진했다.귀국 후 청구제지로 돌아온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1958년엔 대구를 떠나 서울의 대한제지 생산부장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몇 달 후부터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언젠가 자신이 경영자가 되면 월급만큼은 제대로 주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이듬해에는 정부주도로 볏짚 펄프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한국펄프에 스카우트됐지만 볏짚 펄프산업 자체가 백지화되고 말았다.1961년엔 군산의 풍국제지 공장장으로 입사, 1963년에 국내 최초로 ‘주름 잡힌 화장지’를 만들어냈다. 서울업체들이 주름 잡힌 화장지를 전량 가지고 가서 가공․판매했다. 이후 한일제지로 옮겼지만 자금난 탓에 부도를 맞았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일부 부유층만 미군부대 등지에서 화장지를 사다 쓰는 정도였다.자신의 회사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1965년 7월, 화장지 전문회사 ‘일우제지’를 안양에 설립했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안양의 이화제지에 공장장으로 들어갔다.◆화장지 제조기계 직접 만들다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1966년, 그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미국의 대표적 위생제지 기업인 킴벌리 클라크 본사의 관계자가 합작기업 물색과 시장조사차 한국에 왔다. 6년 전 네덜란드의 한 공장에서 만났던 한국인에게서 받은 명함을 갖고 있었다. ‘J.D.Lee', 바로 ‘이종대’였다.그 무렵 그는 여전히 자기 사업의 꿈을 갖고 있었다. 킴벌리 클라크측은 합작대상인 유한양행에 “J.D.Lee가 합작회사의 리더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67년, 이종대는 유한양행 제지부장으로 입사했다. 합작과정에서 이견이 생겼다. 킴벌리 클라크 측은 한국의 화장지 수요량이 많지 않으므로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하자고 했고, 이종대 부장은 반대했다. 나아가 이 부장은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한국에서 직접 만들겠다고 건의했다. 킴벌리 클라크와 유한양행 모두 반대했다.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득에 유한양행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수용해주었다. 미국 측을 설득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해외출장때 눈여겨 봤던 기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어렵게 설계도면도 입수했다. 철공소들을 돌아다니며 모은 부품을 밤새워 뜯고 맞추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그린 도면을 처음으로 미국 본사에 가지고 갔을 때는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류머티스성 열병을 앓기도 했고, 사고로 손가락이 으스러져 6개월이나 깁스를 하기도 했지만 끝내 국산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 1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루 5t의 화장지 원단 생산이 가능했다. 직접 부품을 구해 조립한 기계라 설비비가 5만9천 달러 밖에 안 들었다. 저렴하게 만든 기계에서 화장지가 생산되자 미국 기술자들이 놀라워하며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했다.◆ 유한 킴벌리 설립과 다양한 제품 생산1970년 3월30일, 3년간의 합작추진 끝에 유한킴벌리 회사가 설립됐다. 12월엔 제1공장이 군포에 들어섰다. 창립을 주도한 이종대 부장은 상무이사 공장장으로 취임했다. 크리넥스 미용티슈(1971), 뽀삐 화장지(1974) 등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위생용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기 시작했다. 1980년 유한킴벌리 제2공장으로 설립된 김천공장 전경. 화장지․미용티슈․키친타월․부직포 등을 생산하고 있다. 1980년 3월엔 제2공장이 김천에 세워졌다. 킴벌리 클라크로부터 도입한 기계설치과정에 문제가 생겼는데 미국인 엔지니어들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모두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 이종대 부사장이 밤새워 문제를 해결해 놓은 것이다.1990년엔 배송센터를 겸한 제3공장이 성남에 들어섰고, 1994년엔 제4공장이 대전에 세워졌다. 화장지, 아기 기저귀, 생리대, 미용티슈, 물티슈, 키친타월, 부직포 등 유한킴벌리 제품들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작업복 차림의 이종대가 작업현장에서 직원과 작업 공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그는 탁월한 기업가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그의 지휘 아래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기계들을 플랜트 수출까지 하게 됐다. 화장지 만드는 회사가 화장지 원단 제조 기계까지 수출한 것이다. 설계부터 제작과 설치, 시운전, 기술지도까지 일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당시엔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했다.1975, 1976년 제지용 건조 기계를 개발, 이란과 태국에 플랜트 수출 뒤 1976, 1977년에는 화장지 가공 기계를 말레이시아에 수출했다. 1977년부터 1993년엔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필리핀, 타이완,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수출했고, 1987, 1988년에는 호주에 부직포 제조기계를 수출했다.◆제지산업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다유한킴벌리의 매출 규모도 급성장했다. 1971년 2억 원에서 대표이사 사장 때인 1993년엔 2천392억 원을 돌파했다. 수출액도 1975년 25만 달러에서 회장직 퇴임 무렵에는 4억 달러에 이르렀다. 포상과 수훈도 잇따랐다. 대통령 표창(1978), 국무총리 표창(1980), 석탑산업훈장(1984), 철탑산업훈장(1994)….국제적 명성도 더해졌다. 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는 뛰어난 실적의 경영자에게 주는 ‘기업인성취 대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킴벌리 클라크사의 125년 역사에서 수상자는 그를 포함해 6명뿐이었다고 한다. 1997년 동양인 최초로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 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헌정됐다. 왼쪽 두 번째가 이 회장. 다윈 스미스 킴벌리 클라크 회장이 친필 감사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당신은 1억 명 중에 하나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1997년 동양인 최초로 헌정되기도 했다.종이산업이 발달한 미국 위스컨신주의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는 1997년 당시까지 모두 35명이 헌정되었다. 이 회장은 생전에 “47년 제지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치열했던 ‘종이 인생’ 47년청구제지 견습공에서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에까지 오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런 만큼 휴일․휴가를 모르는 워커 홀릭이었다. 남들이 쉬고 놀 때 한 번이라도 더 기계를 살피고 새로운 일을 연구하는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원래 두루마리 화장지의 국제표준 규격은 114mm였지만 좀 줄여도 충분하겠다고 판단했다. 14mm를 줄여 100mm 폭으로 생산했더니 원가절감과 가격 인하, 원자재인 나무를 아끼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여러 국가가 화장지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시작된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도 점차 세계적인 환경보호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입지전적인 그의 삶의 여정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성실함과 부지런함, 부단한 도전정신,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자세, 투철한 주인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노년의 이종대 회장이 맏딸인 이혜정 요리연구가와 함께 미소짓고 있다. 그는 가정적으로도 멋진 가장이었다. 1녀 2남의 자녀들이 ‘살아있는 교과서’로 여겨 닮고 싶어했던 롤 모델이었다. 맏딸은 요리연구가이자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빅마마’ 이혜정 키친스토리 대표다.‘최초’라는 기록들을 만들어 내며 한국 제지산업에 뚜렷한 획을 그었던 이종대 회장은 작년 11월27일 향년 85세로 별세, 경기도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반세기에 걸친 그의 ‘종이 인생’은 치열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그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전경옥 언론인연보․1933년 경북 금릉군 김천면 출생․1951년 김천중(6년제) 졸업․1955년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 졸업․1955~1959년 청구제지 공장장․1959~1967년 한국펄프, 풍국제지, 한일제지, 이화제지 공장장․1967~1970년 유한양행 제지기술 부장․1970~1977년 유한킴벌리 상무이사(공장장)․1977~1980년 유한킴벌리 부사장․1978년 대통령 표창․1980~1995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1984년 석탑산업 훈장․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 ‘기업인 성취대상’ 수상․1994년 철탑산업 훈장․1995~1998년 유한킴벌리 회장․1997년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 헌정자로 선정․1995~2004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2018년 11월 27일 85세로 타계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옥산서원

[{IMG01}] 옥산서원 앞으로 자개천이 흐르는 계곡의 너럭바위에 새겨진 세심대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세심대는 계곡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라는 성리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원이다. 회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서원은 사액서원으로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 강당 안쪽에 걸려 있는 편액 ‘구인당’은 한석봉이 썼다.〈1〉 옥산서원-아버지의 이름으로-회재 이언적과 잠계 이전인 독락당에서 북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신라 시대 사찰인 정혜사지와 높이 5.9m의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몸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대구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에 넓은 안강들을 가로지르다 북쪽으로 자옥산을 향해 좁은 2차선 시골길을 달려 옥산서원(玉山書院·이하 서원)에 닿는다. 자옥산 계곡을 흐르는 자계천변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옥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서원은 조선조 도학자이자 대유학자이자 정치가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 ~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문인 및 경주 유림들이 세웠다. 서원 앞 개천을 건넌다. 옛날에는 입구에 있던 하마비를 옮겨 놓은 듯 계곡 건너편에서 하릴없이 서원을 지키고 있는 하마비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한여름이면 제법 물살이 거셌을 것 같은 계류가 넓은 청석판을 깔고 흐른다. 회재가 세심대(마음을 씻는 곳)라 이름 붙였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정문에 이르니 역락문(亦樂門), 공자가 말한 군자의 3가지 즐거움을 이곳에서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문인 소재 노수신이 이름 지었다. 묵직한 돌계단을 딛고 역락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의 커다란 2층 누각을 마주친다. 무변루(無邊樓)다. 가운데 3칸은 아래 위 모두 틔워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고 양쪽 1칸씩은 벽체로 막아 아래는 아궁이와 굴뚝을, 위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양 끝의 방들은 몸체에서 달아내어 누마루를 돌렸다. 벽을 허물어 외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한 보통의 누각과 달리 벽을 모두 닫아 대청과 누마루가 모두 막혔으니 무변루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2층 대청 안쪽에 걸린 편액으로 심오한 뜻을 품은 이름이라 짐작할 뿐이다. 아마 편액의 한 편에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니누나”라는 부기에서 무변루의 의미를 짚어본다. 무변루를 내려 계단을 올라서면 강당 격인 중정 구인당(求仁堂)이다. 정면 5칸 측면2칸인데 가운데 3칸은 마루를 틔웠고 양 옆은 무변루처럼 온돌을 놓았다. 그런데 온돌방 전체에 봉창 하나 없이 꽉 막아 놓았다. 가운데 걸린 커다란 편액 玉山書院(옥산서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인 54세에 쓴 것이다. “만력 갑술년(1574) 사액 후 266년 되는 을해년(1839)에 화재로 불타버려 다시 써서 하사한다”는 내용이 편액에 뚜렷하다. 서원 사액 당시 선조가 아계 이산해에게 명하여 쓰게 했던 것을 추사가 다시 쓴 것이다. 추사의 힘이 한껏 느껴지는 글씨체다. 대청 안쪽 구인당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의 동재와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좁고 긴 맞배지붕 건물로 실용성이 가미된 서생들의 생활공간이었다. 강당 뒤에는 체인묘와 전사청이 있고 출입이 금지돼 있다. 구인당 뒤 왼쪽 체인묘 옆으로 회재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비각 안 신도비는 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비석 위에는 두 마리 용이 휘감고 비석 아래에는 거북이 앞발은 땅을 굳게 딛고 버티고 있다. 서원 곳곳의 편액 글자 한 자 한 획이 모두 대가들의 솜씨 경연장이다. ◆ 회재 이언적 회재는 옥산에서 10km 떨어진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번(蕃)을 따라 양동에서 옥산의 정혜사(지금은 국보 40호인 13층 석탑만 남아 있다.)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공부했다.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정혜사 옆 아버지가 기거하던 독락당에서 살았고 귀양지 평안북도 강계에서 독락당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생을 마감했다. 회재는 김굉필, 정여창, 이황,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후 후손들의 노력으로 문묘에 종사되고 있으니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자고 일어나면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만큼 사화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조선조 정변기. 말 한마디, 잘못된 만남 한번이 생사를 가르던 살얼음 딛듯 아슬아슬한 시대, 회재는 2번이나 정변에 밀려 낙향한다. 그가 택한 곳은 본가가 있는 양동이 아닌, 10km 떨어진 독락당이었다. 중종 26년 1531년, 41세의 회재는 성균관 사간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종의 사돈인 김안로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기자고 했지만 회재는 그가 소인이라며 반대했다. 이 일로 파직되고 고향 독락당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7년 만에 불려 올라간다. 홍문관 응교로 다시 등용된 회재는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좌찬성으로 있던 명종 1년(1561년) 소윤과 대윤의 싸움이 극에 달한다. 역사에서 을사사화로 부르는 정파싸움에서 회재는 소윤의 편을 들어 공신이 되기도 했지만 파직되고 두 번째 귀향한다. 57세 되던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수렴첨정하던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괴문서 대자보 사건)으로, 쫓겨 내려와 독락당에 은거하던 회재도 이번에는 비껴가지 못한다. 을사사화 잔당이 남아 사건을 일으켰다며 연루된 것이다. 그는 “군자는 죽음에 이르러도 놀라거나 원망하지 않는 법이다. 내 머리가 희기 전에 벼슬을 버리고 이 산에 돌아오리라” 하고 국경 근처인 평안도 강계 땅으로 유배된다. 그리고는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옥산서원 건립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원이다. 회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서원은 사액서원으로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그 독락당 인근에 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아들 잠계 이전인과 손자 구암 이준과 치암 이순이 건립한다. 회재가 죽은 지 19년 지난 1572년, 회재의 학문을 기리고 뜻을 펴겠다는 뜻에서다.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였고 보물급 문서가 많은 서원으로 알려졌다.창건 당시 향중 사림 13명이 서원 건립을 건의했다고도 한다. 당시 대사성 허엽의 서원 기문에는 “선생의 문인 구봉 권덕린과 손자 구암 이준의 노력에 의해 창건됐다. 경주 본주 읍민들의 협조와 경산군수를 역임한 손자 이준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확보에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1574년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처음엔 40여 칸이었으며 사당 강당 동재와 서재 누각 등으로 서원의 기본을 갖췄다. 1835년 판각이 불타서 다시 지었고 1839년 강당이 불나 이듬해 중건했다. ◆ 아버지와 아들 회재는 18세때 16세인 함양 박씨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24살에 급제해 25살에 경주주관학교에 있을 때 감포만호 석귀동의 셋째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사촌의 아들 이응인을 양자들이고 그는 양동 무첨당에, 둘째부인 양주 석씨에게서 난 아들 이전인은 독락당 주인이 된다. 면천한 석씨는 회재의 모친 손씨 부인을 노후에 독락당에서 지성껏 모셨다고 전한다. 서자 이전인은 회재의 귀양지인 평안도 강계에서 7년 동안 회재를 극진히 모시고 같이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당시 회재의 학문적 성과는 아들 잠계 전인과 손자 준의 설득을 거쳐 퇴계가 인정하게 된다. 회재가 유배지 강계에서 대학장구보유, 예학의 선구가 된 봉선잡의와 구인록,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정리한 진수팔규를 지은 것도 모두 아들 이전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회재의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또 세상에 알린 것도 모두 이전인의 공이었다. 유배지에서 사망한 아버지 회재의 시신을 고향 옥산까지 운구해 온 것도 전인이다. 회재가 명종 8년(1553년) 11월23일 사망했지만 죄인이라 공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상여는 석 달이나 걸려 이듬해 2월에야 고향에 도착했다. 당시 실세인 문정왕후를 피해 평안도에서 동쪽 강원도 태백을 거쳐 안동 청송 영천으로 운구해 왔다고 ‘회재 주손’ 이해철 (71)씨는 설명한다. 이전인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인 1566년 회재가 중종 인종 명종 3대를 섬긴 충효를 상소해 회재는 죽은 지 13년 만에 사면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아들 이전인에게도 종1품 판사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전인은 “아버지의 복작 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병을 빙자해 사양했다. 이전인의 효성이 성인 회재를 가능하게 했다고 후손들은 입을 모은다. ◆회재 아들 잠계와 퇴계 퇴계는 생전 10살 위인 회재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잠계 이전인이 1560년 아들 준과 순을 데리고 퇴계를 찾아 회재의 행장을 부탁하고 학문적 성과를 확인받으면서 퇴계는 회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전인의 호 묵계도 이 때 퇴계가 지어준 것이다.퇴계는 “선생의 학문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며 “경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실토했다고 행장에 적었다. 퇴계는 “일찍이 선생이 그렇게 유도한 분인 줄 알았더라면 만나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하면서 아쉬워했다. 이단을 배척하고 정주학을 수립한 회재의 학문은 퇴계가 급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로소 퇴계의 학문이 체계적으로 성립된 셈이라고 이해철 씨는 말한다. 이를 이르러 학계에서는 “무회재면 무퇴계”라 이른다고 이 씨는 강조했다. 세상에서 잠계가 없었다면 회재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이어 회재야말로 퇴계의 학문을 성숙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퇴계가 쓴 회재의 행장은 5년 뒤인 1565년에야 완성된다. 퇴계는 회재의 진수팔규를 명종에게 올려 학문적 깊이를 평가했고 선조대에 회재의 복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기대승에게 부탁해 회재의 신도비명을 짓게 했다. 무회재면 무퇴계란 말이 유림 사이에 회자된 연유다. ◆옥산서원과 문화재 옥산서원 유물전시관은 보물 제525호인 삼국사기, 동국이상국전집 등 고서 4천여권을 비롯해 고문서 1천156건 등 모두 6천280여점의 문화유산이 소장되어 있다.회재의 서원에는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회재의 벼슬살이 과정의 교지 등과 학문의 깊이를 말해 주는 것으로 주로 그가 독락당에 있을 때와 강계에 유배돼 있으면서 저술한 것들이다. 국보인 삼국사기 본질 9책 50권이 서원 경내 유물전시관에 있으나 열람할 수 없다. 또 서책 1천382책과 보물급 문화재들이 독락당 유물관에 보관돼있다. 유물 보전과 관련해 주손 이해철씨는 “1970년대 경찰서 지인을 앞세워 유물 몇 점을 700만 원에 팔라는 제의를 받았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낸 뒤 그날 밤 한 숨도 못잤다. 당시 집을 두세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궁색한 살림살이에 고민이 되기도 했다.약속일이 되어 찾아 온 사람은 생각해 봤느냐고 했다. 머뭇거리니 포은의 시 한 편을 더 넣어서 900만 원 줄 테니 생각해보라고 했다”며 “조부가 총알을 무릅쓰고 난리 중에도 보관했는데 내가 이걸 팔고 어떻게 선조고 제사를 지내느냐는 생각으로 유혹을 뿌리쳤다”고 회고했다.이경우언론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5번 공청회, 대구의 희망 봤다

72년 대구시의사회 다시 초심으로. 끝-5번 공청회, 대구의료 희망 봤다. 올해는 개원의와 함께(지면 메인 제목으로 부탁해요 ) 대구시의사회는 72년의 전통이 있는 대구시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유일무이한 의료단체다.회원 수만 5천500명에 달한다. 장애인·노숙자·외국인 노동자 등을 위해 ‘사랑의 의술’을 지원하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웃을 위해 연탄을 배달하고 성금도 모금한다.메디시티 대구를 홍보하고 사랑의 의술을 실천하고자 해마다 전 세계 오지를 찾아 해외의료봉사를 펼치고 있다.지난해 11월12일에는 지역의료 발전을 위한 보건의료빅데이터 활용 업무협약을 체결했다.일주일 후인 19일에는 전국 시·도 의사회 중 최초로 기자협회(대구·경북기자협회(회장 이주형))와 시민 건강 증진을 위해 역량을 결집하고자 MOU를 맺었다.의사회는 의료 서비스 제공과 의료 인프라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기자협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로 약속한 것이다.이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공청회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공청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민이 합리적인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돕는 데 있다.공청회를 준비하려고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꼽히는 이들이 초심으로 돌아갔다. 대구의료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겸허한 자세로 근본에 충실하자고 서로 약속했다.대구의료가 수도권과 견줘도 전혀 손색없다는 ‘숨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이미 기득권이 된 서울의 대형병원과 초반 열세를 감수한 치열한 승부를 벌여야 하기에 더욱 전열을 가다듬고 강도 높은 실전훈련도 소화해야 했다. 첫 번째 처방이 공청회였다.의료 관련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공청회를 열고 현실을 냉정히 분석하고 반성도 했다. 이 과정에 나온 여러 대안을 꼼꼼히 분석했다.지난해 9월20일부터 11월22일까지 열린 5번 공청회의 여정을 소개하는 과정에 대구의료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료전달체계 확립해 환자 유출 막는다대구시와 대구시의사회, 메디시티대구협의회를 비롯한 의료 관련 기관·단체가 대구의 미래를 위해 야심 차게 추진 중인 프로젝트가 ‘메디시티 대구’다. 의료기술과 서비스에 앞서가는 대한민국 의료특별시의 새로운 이름이다.메디시티 대구를 본궤도로 올리면 대구 미래의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메디시티 대구’ 프로젝트는 지속 가능하고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춘 블루오션이다.그 중심에 대구시의사회가 있다.대구의사회는 대구가 의료관광 중심도시로 도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역 의료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수도권 빅 5 병원과 당당히 겨루고자 지역 의원 및 중소병원과 3차 의료기관과의 전달체계 확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이를 통해 의료기관 간 역할 분담을 양질의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 대구시의사회가 공청회를 준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의사회는 시민과 대구시의사회원들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대형병원별로 공청회를 실시해 대형병원에 실정을 고려한 맞춤형 의료서비스 개선에 나섰다.공청회를 거치며 대학병원의 의료진과 직원의 친절도가 향상된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우선 병원별로 신규환자를 위한 교수별 진료시간을 별도로 배정하는 등 빠른 진료예약과 신속한 치료가 가능하도록 했다.지난해 대형병원의 공청회에 이어 올해는 개원의들을 대상으로 공청회 후 변화를 알릴 예정이다.개원의들에게 지역 내 우수한 의료진 및 의료환경을 집중적으로 홍보해 중증환자를 얼마든지 지역 대형병원으로 의뢰해도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기로 했다.이와 함께 과별 개원의 모임과 구·군 의사회 총회 및 의사회 학술대회 등에서 지역 의료기관간의 올바른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할 것이다.지역 의료전달체계 확립의 핵심은 1·2차 의료기관은 경증 및 만성질환 환자에 집중하고 3차 의료기관은 급성 및 중증질환을 전담하는 것이다.또 지역 대형병원(3차 의료기관)은 1·2차 의료기관에서 전원 된 환자를 신속히 진료하고 급성 및 중증질환을 치료 후 다시 1·2차 의료기관으로 다시 의뢰하는 시스템을 활성화하고 시스템화해 균형 있는 의료기관별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이를 통해 수도권 대형병원의 지역 환자유출을 차근차근 줄여나간다는 중장기 계획을 세웠다.◆초심으로 돌아간 5번의 공청회대구시의사회는 공청회를 준비하는데 1년을 투자했다.지역환자 유출을 막는다는 1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라 ‘메디시티 대구’라는 지역의 미래 성장동력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지역의료 발전과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공청회’. 공청회의 목적은 타이틀에서부터 명확히 확인된다.첫 번째 공청회는 지난해 9월20일 경북대병원과 칠곡경북대병원을 대상으로 진행됐다.이후 10월4일 영남대병원, 10월18일 대구파티마병원, 11월1일 계명대 동산병원에 이어 11월22일 대구가톨릭대병원을 끝으로 5번의 공청회를 마쳤다.공청회에서 대구시의사회와 지역의료발전위원회, 메디시티대구협의회는 물론 개원의들의 질문과 공청회 대상인 해당 병원의 원장과 진료 책임자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먼저 첫 공청회를 진행한 경북대병원과 칠곡경북대병원이 다양한 개선방안을 내놨다.초진 환자 슬롯 확대 운영을 통한 대기시간 단축, 친절도 향상을 위해 보건복지부 심층관찰 참여, 환자 우선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 전국 최초로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Smart Mobile 서비스 운영), 진료의뢰-회송 시스템 활성화 등이다.영남대병원에서도 많은 개선사항 지적되고 이에 대한 답변이 나왔다. 같은 의료인끼리라고 ‘제 식구 감싸기 식’의 형식적인 질의응답을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진료예약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특정 교수와 과에 수술이 몰린 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의료인의 불친절과 진료받은 환자를 다시 회송하지 않은 경우 회신서의 무성의 문제도 개선해야 한다고 의견이 제시됐다.대구파티마병원은 △빠른 진료예약 시스템(당일 접수 및 진료, 필요 시 진료시간 연장) △신속한 검사와 수술 △의료진의 친절 △환자 재회송 및 회신서 작성 충실 등을 약속했다.계명대 동산병원과 대구가톨릭대병원의 공청회에서도 대학병원에서 흔히 발생하는 영남대병원과 유사한 지적이 나왔다.이들 병원은 이미 영남대병원 공청회를 경험한 터라 이미 개선한 내용과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성구 대구시의사회장(기고형식)우리 병원은 대구 동구에 있다. 병원이 있는 곳은 어르신이 많이 사신다.언제인가부터 암과 같이 수술을 해야 할 중증 질환으로 진단받으면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가는 이들이 많아졌다.처음에는 형편이 넉넉한 분들이 주로 서울로 향했는데 점차 소득이 낮은 사람도 서울을 찾기 시작했다.최근에는 어지간한 질환만으로도 서울로 가사 수술받거나 진료받는 것이 일상적인 상황이 됐다.하지만 서울의 대형병원을 찾을 때 여러 문제가 일어나고 그 문제들이 복잡하고 다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특히 2015년부터 대구시의사회 부회장, 지난해부터는 대구시의사회장을 맡으며 전국의 의사들을 만나 지역 의료문제를 폭넓게 보게 되면서 무작정 서울 대형병원을 찾을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수도권 빅 5 원정 진료에는 대략 3가지의 문제점이 생긴다.첫째는 환자 자신의 문제다. 한 번 수술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암 환자의 경우 서울을 오가는 불편함을 겪으며 꾸준한 항암 및 방사선 치료, 추적 관찰을 받아야 한다.특히 면역성이 떨어지는 노약자들은 경제적 부담은 물론 감염과 부상 등의 위험에 노출된다.두 번째는 대구 의료계의 문제다.대구는 명실상부한 의료메카로 통한다. 풍부한 의료인프라와 우수한 의료인력을 보유해 수도권 환자유출이 가장 적은 도시다. 그런데도 1년에 13만5천 명이 서울로 가고 진료비도 공단 지급액만 1천300억 원이나 된다. 지역 경제 사정을 고려해본다면 결코 간과할 규모가 아니다.지역 1·2차 의료기관이 충분히 진료할 수 있는 환자가 서울로 가니 당연히 병원 재정 악화는 물론 지역 의료기관의 불신도 생기게 된다. 세 번째는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경제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동일한 경제·진료 권역인 대구·경북을 합하면 한 해 50만 명이 넘는 환자가 원정 진료를 받는다. 공단 지급액만 6천억 원이 넘고 일반 진료비와 본인 부담금, 교통비, 식비와 숙박비 등을 합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이 수도권으로 새어 나간다.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2017년 지역 의료계 대표자들이 모여 시작한 일이 지역의료 활성화 사업이다.지역의료가 활성화돼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이 중환자 치료에 집중하면 경증 만성병 환자들은 자연스럽게 1·2차 병원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지역 의료계의 숙원인 의료전달 체계도 확립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지역 환자와 의료계는 물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사업이다. 또 지역의료 위상과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공감했다.이러한 확신과 공감으로 지역의료 활성화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대구시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역 대형병원의 참여와 관심으로 사업 첫해임에도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한다.이제 시작이다. 장기적으로 대구의 미래를 위한 사업인 만큼 여러 어려움이 있다더라도 사명감으로 적극적이고 꾸준히 대구의료 활성화에 올인할 것이다. 이성구 대구시의사회장. 2018년 10월4일 열린 영남대병원의 두 번째 공청회 장면.2018년 10월18일 열린 대구파티마병원의 세 번째 공청회 장면.대구시의사회가 지난해 4월 의료 단체들과 함께 베트남 빈증성 일원에서 나눔 의료봉사를 펼쳤다. 당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유아를 진료한 서연경 회원(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이 4시간이 걸리는 유아 환자의 집을 직접 찾아 생활환경을 점검하고 영양제를 챙기며 사랑의 의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대구시의사회가 지역 의료단체들과 홤께 2017년 7월 키르기스스탄을 찾아 의료봉사를 펼쳤다. 민복기 대구시의사회 부회장(대구·경북피부과의사회장)이 피부병에 앓는 현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한국 최대 중등 사학재단 일군 신진욱

신진욱은 국내 최대의 중등 사학재단을 일궜고 또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지역 교육계와 정치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말년의 신진욱. 신진욱은 5대조(회병 신체인)의 강학 공간이던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의성 봉양에 중건하고 1981년 금산서원(錦山書院)으로 승격시킨다. 금연정사 앞에선 신진욱. 대구시 남구 봉덕동 경일여자고등학교. 진입로 왼쪽에 학교법인 협성교육재단 건물이 있다. 소속된 중학교‧고등학교 등이 12개나 돼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세운 중등학교로 숫자가 가장 많은 교육재단이다.고인이 된 재단 설립자 우봉(友峰) 신진욱(申鎭旭‧1924∼2014)은 중년 이상 대구 시민이면 상당수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대구 교육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간 길을 돌아보았다.재단 사무실은 교실 한 칸이 족히 될 정도로 널찍했다. 그곳에서 협성교육재단 권오수(58) 관리국장과 박준식(50) 관리실장을 만났다. 사무실이 자리는 많은데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박 실장은 두 사람이 교육재단 직원의 전부라고 했다. 신철원(52) 이사장은 행사 참석차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재단의 내력을 들은 뒤 ‘학원장실’ 이름이 붙은 집무실을 둘러봤다. 신진욱 학원장이 생전 근무할 때 그대로 집기와 자료 등을 보존해 두었다. 한쪽에는 1995년 경북예술고 교사가 만든 우봉의 흉상이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는 굵은 글씨로 인쇄된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그가 즐겨 읽었다는 시편 23장이다.◆교육사업에 눈 뜨다우봉은 경북 의성의 유교 집안인 아주 신씨 신종기와 전주 이씨 이소선 여사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기독교였다. 그래서 유교의 효(孝)와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다를 게 없다며 두 가르침을 모두 따랐다.우봉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가면서 교육과 인연을 맺는다. 1944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첫발을 디뎠다. 이어 대구와 의성‧경주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기 광복과 6‧25를 거친다.1953년 우봉은 화재로 소실돼 길거리에 나앉은 경주고아원 전쟁고아 120명을 맞닥뜨린다. 교육사업에 눈을 뜨는 ‘사건’이다. 그는 잿더미 위에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련했지만 해결책이 아니었다.고민을 거듭한 끝에 120명 중 일부는 의성 자혜원으로, 또 일부는 연고를 찾아 돌려보냈다. 그러고도 30여 명이 남았다. 그는 그들을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처음에는 큰 집을 하나 얻어 함께 사글세를 살았다. 이후 남구 대명동 지금의 경북예고 땅을 인수해 원사를 지어 새로 출발한다.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구호물자로 의식주는 해결됐는데 학교 교육이 과제였다. 그 사이 60여 명으로 불어난 원아들은 유아부터 고등학교 들어갈 나이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는 인근 중학교에 입학을 부탁하러 갔다가 무안을 당한다. 그때 우봉은 ‘좋다. 나도 학교를 해야지’ 다짐한다.◆협성상고 설립…신익희와 인연 신진욱은 1955년 협성상고 야간부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야간부는 전쟁과 가정 사정으로 진학을 미뤘던 학생과 군인이 주를 이뤘다. 사진은 협성상고 입학식 장면. 신진욱은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에게 교정을 유세장으로 빌려주면서 인연이 돼 평생 야당의 길을 걷는다. 사진은 선조인 오봉사당 앞에서. 앞줄 중앙이 신익희, 오른 쪽이 신진욱. 학교 설립을 추진한 지 1년여 만인 1955년 2월28일 학교법인 자혜학원이 인가를 받는다. 이어 4월에는 드디어 협성상업고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한 학급이다. 이어 전쟁 등으로 진학을 미뤄 온 나이 많은 학생과 군인들이 주축이 된 야간부를 설치했다. 학교 이름은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룬다’는 뜻을 담아 ‘협성(協成)’으로 정했다.이렇게 출발한 협성상고는 1956년 2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후보에게 유세장으로 교정을 빌려주면서 시련을 맞는다. 우봉은 자서전 ‘교육에도 왕도는 있다’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대통령 후보가 장소를 못 구해 유세를 포기할 처지인 걸 알게 됐다. 나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일이라면 폐교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자진해 교정을 빌려주었다.’ 이 결단으로 우봉은 신익희와 인연이 닿아 40여 년 영욕의 정치 생활이 시작된다.한번은 신익희가 경북 북부지역을 다지느라 의성을 방문해 우봉의 집에 묵으며 꿈을 심는 글을 써 주기도 한다. 야당과 가까워지면서 협성교육재단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그때부터 1971년 대구 남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우봉과 재단은 숱한 불이익을 감수한다. 그는 자서전에 ‘학생이 늘어나 학교는 더 필요한데 인문 학교와 대학은 인가하지 않고 남들이 싫어하는 중학교와 실업고만 설립을 허가했다. 그렇게도 바랐던 대학교 설립의 기회도 잃고 말았다’고 술회했다.◆재단 해체 위기서 기사회생그 시기 관(官)은 재단의 학교 경영 전반을 감사하거나 사찰을 계속했다. 학교 경리는 물론 건축, 학사 행정 심지어는 교실에 들어가 학생 수를 세기까지 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투명한 재단 경영을 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그 무렵 재단에 결정적인 위기가 닥쳤다. 검찰이 재단 설립 과정을 정밀 조사하고 나선 것이다. 거기서 재단의 구성 요건 중 기본재산 미확보가 드러났다. 재단 설립 당시 일가친척의 과수원‧논밭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몇 건은 등기 서류를 내지 않아 차후 보완 각서를 제출한 뒤 설립을 인가받은 게 문제였다. 담당 검사는 재단을 문 닫게 할 작정으로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우봉은 눈앞이 캄캄했다.드디어 검찰에 출두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사이 담당 검사가 바뀌어 있었다. 새 검사는 설명을 들은 뒤 “서류 보완 시기가 늦었을 뿐 사기성은 없으니 돌아가 학생이나 열심히 가르치라”고 격려했다. 우봉은 “그 말이 천사의 음성 같았다”고 회고했다. 기사회생이다.◆중·고교 등 12개의 매머드 사학재단 일궈재단의 모체인 협성상고는 1975년 대명동에서 현재의 봉덕동 교사로 이전한다. 재단 건물 남쪽이다. 협성상고는 1985년 다시 일반계인 협성고로 전환한다. 협성고는 이후 명문의 반열에 오른다. 대명동 일대가 부촌(富村)으로 수성구가 떠오르기 전이다. 한동안 협성고는 서울대 합격생 수에서 대구지역 상위를 다투었다. 1980년엔 재단에 마지막으로 경일여고가 세워졌다. 대구의 유일한 자율형 여자 사립고다. 협성교육재단은 중‧고교 등 12개 학교가 소속돼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세운 중등학교로 숫자가 가장 많은 교육재단이다. 학생들과 함께 교정을 걷고 있는 신진욱. 1955년 재단 설립 이래 지난해 2월까지 유치원 포함 12개 산하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모두 30만3천900여 명. 또 재학생은 6천680여 명에 전체 교직원은 530명쯤이다. 전성기엔 재학생이 2만까지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교육자 우봉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어떨까.지역에서 교장을 지낸 한 인사(81)는 “그를 참교육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으냐”고 지적했다. 오랜 기간 정치에 발을 걸쳤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단 산하 소선여중을 나온 한 졸업생(55)은 “설립자가 어머니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붙이고 어머니 생신날 가족과 함께 학교를 찾아와 전교생이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건 어딘가 씁쓸하다”고 회상했다. 시민들의 평가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정치에도 큰 족적 남겨우봉은 생전에 스스로 “본업은 교육, 정치는 외도”라고 표현했지만 정치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국회 진출 꿈은 집요했다. 그는 5대 총선에 고향 의성에서 36세 나이로 첫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6‧7대는 대구 남구로 출마했다. 다시 연거푸 낙선한다. 3전 4기. 1971년 8대 총선에서 우봉은 마침내 당선증을 거머쥔다. 그것도 이효상 국회의장을 1만3천여 표 차로 이긴 짜릿한 승리였다. 신진욱은 평생을 야당생활을 했다. 1971년 대구 남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신진욱과 재단은 숱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진은 민주화 투쟁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모습. 신진욱은1973년 9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국민투표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구속 40일 만에 풀려났다. 출소 후 대구교도소 앞에서 지인들과 함께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은 1년7개월 만에 끝이 난다. 1973년 그는 다시 9대에 출마하지만 이번에는 국민투표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화원 대구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옥중에서 낙선 소식을 듣는다. 구속 기간은 40일에 불과했지만 그의 정치 활동은 발이 묶였다. 1984년 정치인 해금으로 우봉은 정치를 재개한다. 그리고 14대에 민주당 전국구로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우봉은 사학을 운영하면서 30년을 이렇게 가시밭길인 야당과 더불어 산 풍운아였다.◆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사치와 낭비 몰라 신진욱 부부의 단란한 한 때. 부인(장경옥)은 경북예고 교장 등을 지내며 재단을 함께 이끈 동반자였다. 그는 어머니의 뜻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한때의 포부였던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구 남산교회의 장로였고 선교에 열심이었다. 또 1975년에는 동심교회를 세웠다. 그가 3남 3녀 자식들에게 자주 말했다는 세상에 산 표적을 남기려면 “첫째, 학교를 지어라. 둘째, 병원을 지어라. 셋째, 교회를 지어라” 중 두 가지를 실현한 것이다. 부인(장경옥)은 경북예고 교장 등을 지내며 재단을 함께 이끈 동반자였다.그는 교회 설립과 함께 5대조(회병 신체인)의 강학 공간이던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의성 봉양에 중건하고 1981년에는 금산서원(錦山書院)으로 승격시킨다. 회병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이상정의 제자였다. 우봉은 그래서 퇴계 선생을 누구보다 흠모했다. 또 과거에 급제한 뒤 승지를 지낸 11대조(오봉 신지제)를 그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었다. 그가 즐겨 쓴 우봉(又峰‧友峰‧愚峰)이란 호(號)의 ‘봉’도 자신이 따르고 싶었던 오봉 선조에서 유래한다. 자신이 경영한 교육재단의 연원(淵源)은 이렇게 금연정사로 이어진다.우봉은 자전 에세이 ‘아직도 할 일이 많다’에 ‘내 돈 씀씀이가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이유를 자수성가한 데다 사치‧낭비를 모르는 생활 철학으로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남에게 만족하게 쓰지 못했다고 술회했다.직원은 학원장이 그런 가운데도 유머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재단 박 실장은 “한번은 학원장이 이사장(신철원)과 길을 가다가 음식점 아주머니의 인사를 받고는 ‘우리 아들인데 다음에 가면 밥 많이 주이소’ 하자 아주머니가 크게 웃더라”고 했다. 스스로 밝힌 좌우명도 ‘얼굴에는 미소가/머리에는 지혜가/가슴에는 사랑이/손에는 일이 있어라’였다.우봉은 2014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유택(幽宅)은 고향 선영에 마련됐다. 유학자 김창회는 묘비에 “(우봉은) 오직 내 갈 길은 내가 개척하라는 좌우명을 실천하고 협성 가족 모두에게 깊이 심었다”고 적었다.우봉은 수많은 이력만큼 평가도 다양하다. 그래도 열정으로 국내 최대 중등 사학재단을 일구고 또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몸을 사리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신진욱 연보‧192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출생‧1931년 의성 봉양초 입학‧1942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졸업‧1944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초등학교 교사‧1950년 경주 문화고등학교 교사‧1952년 사회복지법인 자혜원 설립(경주‧의성)‧1955년 협성상업고등학교 설립‧1968년 한국 YMCA 연맹 이사‧1970년 대구 남산교회 장로‧1971년 제8대 국회의원 당선(신민당, 대구 남구)‧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구속‧1977년 대구 동심교회 설립‧1980년 경일여자고등학교 설립‧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당선(민주당, 전국구), 국회 한일의원연맹 부회장‧2000년 재단법인 협성장학재단 설립‧2014년 타계

“계속되는 안구건조증, 정확한 진단 통해 개선해야”

매서운 겨울 날씨에 난방기 사용이 급증함에 따라 건조한 환경으로 인해 안구건조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안구건조증은 흔히 겪는 증상이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잘 관리하지 않으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최근 안과 분야 국제 저널인 ‘Optometry and Vision Science’ 에 따르면 안구건조증을 가진 사람의 경우 정상인보다 장문을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직장인들에게는 업무 능률 저하로, 학생에게는 학업 능률 저하로 이어질 수 있어 보다 적극적인 예방 및 치료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의 정확한 진단 필요 누네안과병원 임성아 원장은 “안구건조증을 방치할 경우 눈이 쉽게 충혈되고 피로해지면서 학업이나 업무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며 “장기화되면 일시적인 시력 저하현상은 물론 상에 대한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완벽하게 확인하지 못한 시각정보가 뇌로 들어가 두통이나 인지 기능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구건조증의 증상과 원인은 다양하다. 인공눈물을 사용해도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안검염’을 의심해볼 수 있다. 눈꺼풀 여드름으로도 불리는 ‘안검염’은 눈꺼풀 가장자리와 속눈썹 부위의 기름샘이 노폐물과 세균에 막혀 기름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해 주로 발생한다. 중장년층에 비교적 많이 발생하지만 눈 화장을 자주하거나 콘택트렌즈를 많이 사용하는 젊은 여성은 주의하는 것이 좋다. 라식이나 라섹, 백내장 수술 후라면 보다 주의가 필요하다. 보통 안과 수술 후에는 눈에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눈물이나 눈곱을 잘 닦아내지 못해 눈꺼풀에 노폐물이 쉽게 쌓이기 때문이다. 속눈썹 부위에 노란색 노폐물이 볼록하게 올라오거나 눈썹 주변에 비늘 같은 비듬이나 딱지가 생긴다면 안검염을 의심해봐야 한다. 눈의 기름샘에서 분비되는 기름은 눈물이 증발되지 않게 코팅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탁한 기름이 나오거나 굳은 기름으로 기름샘 통로가 막히면 눈물이 쉽게 증발해 눈이 건조해진다. 이처럼 눈물이 눈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잘 증발하는 경우를 ‘증발성 안구건조증’ 이라 한다. 누네안과병원 임성아 원장은 “파괴된 기름샘은 재생되지 않기 때문에 안구건조증의 원인이 안검염이라면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안구건조증으로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라면 우선 본인의 기름샘 상태를 확인한 후 더 파괴되지 않도록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만일 안구건조증을 가진 상태에서 시력교정술이나 백내장 수술 등을 고려한다면 수술 전 안구건조증 치료를 선행하는 것이 빠른 각막재생과 건조 증상 완화에 도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기름샘의 형태나 기능을 심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리피뷰’ 검사 등을 진행하기도 한다. 검사를 통해 기름샘이 얼마나 파괴됐는지 체크할 수 있으며 안구건조증에 영향을 주는 원인 중 하나인 불완전 깜빡임도 알아볼 수 있다. ◆눈 완전히 깜빡이고, 눈꺼풀 위생 철저 올바른 눈 깜빡임은 눈물막을 형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등 한 곳을 집중해서 볼 때는 눈의 깜빡임 횟수가 줄고 불완전하게 눈을 감는 빈도가 늘어난다. 이런 생활습관이 반복될 경우 눈의 피로감은 더 쌓이게 되며 안구건조 증상은 더 악화된다. 따라서 특히 근거리 작업 시에는 의식적으로 눈을 완전히 깜빡여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안검염으로 인한 안구건조증이라면 눈꺼풀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좋다. 집에서 꾸준히 온찜질 및 눈꺼풀 세척을 하면 눈물층의 안정화를 도와 눈이 침침한 증상 및 안구건조증이 호전된다. 눈꺼풀 위에 눈 온찜질 팩을 5분간 올려 막힌 기름샘을 녹여주고 면봉이나 거즈 등으로 속눈썹 주변의 노폐물을 닦아내면 좋다. 안구건조증이 심할 경우 병원 치료를 병행하면 보다 빠르게 개선이 가능하다. 기름샘에 굳어있는 기름을 녹여주고 미세혈관 이상으로 인한 염증을 억제하기 위해 ‘IPL 레이저’를 시행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FDA 허가를 받은 기름샘 치료 장비인 ‘리피플로우’ 시술을 하기도 한다. 통증 없이 한 번의 시술로 비교적 오랫동안 촉촉한 눈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장점이다. ◆눈 건강에 도움되는 눈 운동법 -눈을 완전히 감고 눈을 감은 상태로 셋을 세다가 넷에 눈을 뜬다. -위 과정을 10번 반복하는 것을 한 세트로 하고 하루 15세트 반복한다. -두 달 이상 꾸준히 반복하면 불완전 눈 깜빡임 횟수가 줄어들고 기름 분비도 늘어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도움말=누네안과병원 각막센터 임성아 원장

수도권 대형병원과 진검승부 준비…대구 의료 마스터플랜 완성한다

대구의 의료 인프라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여러 자료와 수치를 보면 금방 확인될 만큼 대구는 의료도시로 꼽힌다. 대구에만 4개 의과대학이 몰려 있고 해마다 7천여 명의 인력을 배출한다. 의사와 약사, 한의사 등의 의료인력만 전국의 20%나 된다. 부러울 만큼 탄탄한 의료 인프라를 바탕으로 대구에는 5개 대형병원과 3천500여 개의 의료기관에서 2만1천여 명 의료인력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구 1천명 당 의사 수는 서울의 제외하면 전국 공동 1위, 간호사 수는 3위. 인구 10만 명당 의료장비 수는 전국 3위. 여기에다 4조6천억 원을 들여 대구 동구에 조성한 대구ㆍ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는 신약 및 첨단의료기기 개발ㆍ실험동물ㆍ임상시험 센터 등을 갖춘 대구의 신성장 동력을 책임지는 컨트롤 타워로 꼽힌다. 대한민국 의료특별시 ‘메디시티 대구’를 지향하는 대구는 단순 수치로만 따져봐도 양적으로 풍부한 의료인력과 장비를 구축한 명실상부한 의료 1번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구시의사회(회장 이성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렇다면 왜 많은 시ㆍ도민이 대구가 아닌 서울(수도권)의 대형병원을 찾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환자에 대한 정성과 감동이 미흡했다. 또 우수한 인프라에 대한 홍보도 부족했다. 게다가 1ㆍ2ㆍ3차 의료기관 간의 유기적인 진료 연계도 원활하지 않아 환자들은 불편은 물론 경제적 손실도 감당해야 했었다. 환자들에게 대구의 3차 의료기관은 오히려 갑으로 통했다. 대구시의사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2017년부터 의료계와 연관 기관을 총망라한 수장들이 모여 협약을 맺고 꼼꼼한 준비를 했다. 일 년 후. 의사회는 지역 대형병원 5곳과 함께 지역의료 발전과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공청회를 마련해 허심탄회하게 의논하고 반성하며 개선방안을 모색했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공청회는 3개월의 여정을 끝내고 막을 내렸다. 또 시민 1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벌여 지역 및 수도권 의료기관에 대한 인식도 확인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구시의사회는 공청회와 설문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올해 중점 추진 방향을 정하고 수도권 대형병원과의 진검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대구시의사회가 추진한 공청회 과정과 이를 통해 제시한 대구의료의 마스터 플랜과 ‘메디시티 대구’ 완성을 노력,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망라해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1년간 준비한 만큼 관심과 기대 커 공청회는 2018년 9월20일 경북대병원ㆍ칠곡경북대병원을 시작으로 영남대병원, 대구파티마병원, 계명대 동산병원 순으로 열렸다. 11월22일 대구가톨릭대병원 공청회를 마지막으로 3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지역 의료발전과 의료전달 체계 확립’을 주제로 대구시의사회와 대구시, 메디시티대구협의회가 공청회에 늘 함께했다. 20일 열린 첫번째 공청회에는 대상 병원인 경북대병원과 칠곡경북대병원은 물론 대구ㆍ경북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 및 개원가 관계자, 대구시와 시의회, 경북도의사회 등 200여 명이 모였다. 실제 현장 분위기는 1년간 준비한 공청회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구시의사회는 물론 메디시티대구협의회와 공청회에 참석한 회원과 의료 관계자가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고 경북대병원과 칠곡경북대병원이 답변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이들은 수도권 환자 유출 방지 방안, 병원 문화 개선, 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1차ㆍ3차 의료기관의 역할 분담 및 협력 강화에 대해 논의를 했다. 먼저 지역의료발전위원회(위원장 금동윤, 계명대 동산병원 흉부외과 교수 겸 진료 부원장)가 수도권 상급병원 쏠림현상에 따른 의료전달 체계 왜곡과 지역 중증질환자의 수도권 유출로 인한 환자 불편과 경제적 손실을 예방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대구 의료기관의 개선방안에 대한 설문조사와 서울지역 대형병원을 이용한 지역환자의 반응, 지역 1차 의료기관 개원의 및 지역 3차 의료기관 의료진 등의 설문 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김용림 경북대병원 진료처장은 지역 의료 문제를 개선하고자 대기시간 단축, 친절도 향상, 환자 우선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 진료의뢰 및 회송 시스템 활성화 등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2020년 다시 한자리에 모여 변화 확인 대구시의사회는 2018년과 같은 대시민 설문조사와 대형병원 공청회를 2020년 다시 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단순히 ‘보여주기’를 위한 일회성 행사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지역에서 올바른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료 발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대구시의사회와 대형병원 및 1차ㆍ2차 의료기관이 운명 공동체임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지난해 공청회 결과를 토대로 의사회 회원, 의료기관, 시민을 상대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기로 했다. 먼저 시민을 대상으로 균형 있는 의료기관 발전을 위한 인식조사 및 홍보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난해 지역 대형병원과 수도권 대형병원에 대한 시민의 인식을 설문 조사한 결과 시민이 수도권 병원을 찾는 이유는 해당 병원이 유명하다는 막연한 기대감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최근 발표에 따른 5대 암 중의 하나인 위암과 대장암은 수도권과 대구의 병원 간 생존율에 차이가 없었고 의료수준도 동일했다. 의사회는 이를 지속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다. 또 올해는 시민을 대상으로 1ㆍ2ㆍ3차 의료기관에 대한 인식과 진료 등에 대한 설문 조사하기로 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문제점과 해결점을 제시하는 한편 올바른 의료기관 이용을 위한 언론 홍보를 강화할 것이다. 이후 2020년 공청회 때는 업그레이드된 지역 의료기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우수한 지역의료기술 홍보다양한 정책개발 앞장설 것금동윤 지역의료발전위원회 위원장 수도권 몇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현상은 이제는 대구·경북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가 됐다.대구에도 중증 고난도 질환을 치료하는 우수한 의료 인력과 시설이 충분히 있음에도 많은 환자가 수도권 대형병원을 찾는 실정이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대구의 환자가 수도권 의료기관에서 지불한 비용이 한해 1천억 원을 넘는 것으로 보고된다. 특히 이동수단 등 기타 경비를 추정할 경우 2배 이상의 경비를 수도권에 지출한 것으로 판단된다.지역 대형병원이 간혹 급성기(아급성기) 치료를 끝낸 후에도 해당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다 보니 다른 중증 및 응급 질환자의 즉각적인 진단과 치료가 지연되는 의료전달체계 왜곡 현상이 발생하곤 한다.이를 방지하고자 2017년 말 대구시의사회와 대구의 6개 대형병원(경북대병원, 칠곡경북대병원, 계명대 동산병원, 영남대병원, 대구가톨릭대병원, 대구파티마병원)은 지역 의료발전을 위한 협약식을 체결했고 지역의료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지난해 지역의료발전위원회의 주요 사업내용은 지역 의료 우수성에 대한 대시민 홍보와 ‘지역의료발전과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공청회’ 개최였다.홍보 포스터를 제작해 홍보에 나섰고 라디오 광고를 통해 지역 1·2차 및 3차 의료기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공청회 준비를 위해 위원회는 전문 조사기관에 의뢰해 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이를 통해 시민의 수도권 및 지역의료기관에 대한 인식을 파악한 것이다.또 1·2차 의료기관 의사들로부터 지역 3차 의료기관의 문제점과 요청사항도 꼼꼼히 들었다. 3차 의료기관 의사들과는 지역환자 유치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공청회는 대구의 대형병원이 주관하고 대구시의사회가 주최, 대구시와 메디시티협의회의 후원해 모두 5차례 열렸다.일부 대형병원이 중심이 돼 병원 홍보를 위해 협력 병·의원장 간담회를 마련한 적은 있었지만 대구시의사회가 직접 나선 공청회 형식의 대형 모임은 이번이 처음이며 전국적으로 최초의 일이다.공청회를 시작하기 전 각종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공유했으며 대형병원의 병원장 이하 실무책임자들은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공청회에서는 수도권으로 환자유출 방지를 위해 빠른 진료예약 및 검사시스템 구축, 지역의료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 의료진의 친절 향상을 위한 대책 등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또 1·2차 의료기관으로 환자회송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모색했다.공청회를 통해 대형병원은 신속한 진료와 치료를 원하는 지역 환자의 요구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이같은 결과를 대구시와 의사회, 의료기관은 정책적으로 반영해 지속해서 개선하기로 했다. 자화자찬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참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든다. 특히 공청회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열기가 더해져 지역 의료인이 합심해 지역의료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해법을 찾는 하나 된 모습을 보여줬다.올해도 지역의료발전위원회는 우수한 지역의료기술 홍보와 다양한 정책 개발을 통해 지역의료발전과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한반도,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 아냐…‘스마트 시스템’으로 피해 막는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경주와 포항지진 이후 지진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사진은 2017년 포항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외벽과 2016년 경주지진 때 손상된 기와집의 복구를 하는 모습. 경주지진(2016)대구·경북지역에서는 경주와 포항지진 이후 지진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사진은 2017년 포항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외벽과 2016년 경주지진 때 손상된 기와집의 복구를 하는 모습. 포항지진(2017)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최근 딥러닝을 이용해 태풍 진로를 예측하는 심층 신경망을 구축했다. 태풍에 영향을 미치는 해수면과 온도, 풍속 등의 갖가지 변수를 인공지능(AI)에 심층 학습시켰다.구글과 하버드대 연구팀은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바둑대결을 한 알파고 기술을 재해대응 시스템에 접목했다. 알파고에 적용했던 딥러닝 기술에 과거 지진 이력을 입력해 100%에 가까운 정확도로 미소지진까지 감지해냈다.미국항공우주국에서는 최근 인공위성으로 관측한 정보를 분석하고 태풍의 위치와 풍속 등을 사전에 감지해 이동경로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국내 건설사와 이동통신사업계도 다양한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기술을 도입해 지진에 대비하고 있다. 개발 중인 기술들은 5.0 이상의 강진 발생 시 경보를 울리거나 엘리베이터와 가스, 집안 곳곳의 조명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등 다양하다. 지진은 더 이상 ‘특수함’이 아닌 ‘신변잡기’를 내포한다.인간은 삶을 영위해가며 숱한 경험을 축적하지만 그 모두를 기억해 현실을 진단, 또는 미래 예측 시 의식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반면 인공지능(AI)은 이 모든 궤적 정보를 축적하고 그 정보를 빠짐없이 활용,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상황을 두고 최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최근 경북 경주와 포항 등지에서 잇따라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들로 인해 ‘지진 안전지대’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해진 대한민국. 무사안일을 거둬야 할 때임을 범국민적 차원으로 인지할 때라는 것이다.인터넷 기술이란 몸에 인적 데이터의 옷을 입힌 초고도화 연결망으로 지진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수반돼야 할 때다.지진은 지표 100㎞ 정도의 단단한 암석인 판(plate)의 이동으로 발생한다. 지진이 발생하면 매질을 따라 직선 이동하는 P파(초기진동)와 파고를 일으키며 움직이는 S파(주진동)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지진발생에 관한 대표적 학설은 크게 판 구조론과 탄성반발설로 나뉜다. 판구조론에 의하면 암석권의 종류는 유라시아판, 태평양판을 비롯해 대략 10여 개의 판으로 구별돼 있다.이 판들은 점성이 있는 맨틀 상부에서 각기 다른 경로의 이동을 한다. 이 같은 이동 동력이 임계점을 넘어설 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지진이라는 것이다.탄성반발설은 장시간에 걸친 지각의 변형으로 암석 강도의 한계점을 초과하게 될 때 지진이 발생한다고 규정한다. 지진으로 인한 진파는 소규모 면적에서 점차 팽창을 거듭해 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랬다. 지진과 쓰나미 등 각종 자연재해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수반해야 할 때다. ◆세계의 지진세계 곳곳이 자연재해의 범람으로 시름을 앓고 있다.최근 인도네시아에선 규모 6.6의 지진이 발생했고, 필리핀에서도 규모 5.4 지진이 일어났다.이란에서는 규모 5.5 지진으로 인해 80여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미국 알래스카 주에서 규모 7.0의 강진으로 인해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기도 했다.최근에는 G20 정상들이 모여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서도 3.8의 지진이 일어나 아찔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역대 최고의 지진은 무려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낳은 칠레 지진이다. 1960년에 발발한 이 지진은 리히터 규모 9.5 수준으로 진앙지 1천㎞ 밖에서도 지진파를 감지할 만큼의 강진이었다.이 같은 9.0 이상의 초강도 지진은 칠레 이외에도 1964년 알레스카(9.2), 2004년 수마트라(9.1), 2011년 일본(9.0), 1952년 캄차카반도(9.0)가 기록으로 남아있다.세계지진의 10% 이상은 일본열도에서 발발한다. 그렇다면 유독 일본에서 지진이 빈번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유수의 지질학자들은 본래 육지였던 일본은 화산폭발 등으로 인한 지각 변동으로 육지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오게 되고 이렇게 떨어진 땅이 지금의 일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일본은 지진에 의해 형성된 섬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진이 잦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아이러니하게 일본은 여타 국가에 비해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현저히 낮다. 숱한 지진 발생으로 인한 확고한 지진 대비책 마련 덕이다. 일본 기상청은 지진에 대한 감지와 공지가 세계 어느 곳보다 신속,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본기상청은 300여 개의 지진계와 국립방재과학기술연구소의 관측망 800여 곳을 이용해 지진을 예측한다. 진도계급은 경험치로 축적된 국내 자체개발용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어렵지 않고 일반인들의 접근이 용이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반도의 지진우리나라에서 지진 관측을 시작한 것은 1978년이다. 관측 이래 북한과 인근 해역을 포함, 최근 40년간 한반도서 발생한 5.0 이상의 강진은 총 10차례다. 통상 5.0 이상의 지진 발생 시 직립이 불가하고, 건물 내·외장재에 균열이 간다.한반도에서 발생한 가장 큰 지진은 지난 2016년 경주에서 일어난 리히터 규모 5.8 지진이었다.두 번째는 지난해 11월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지진. 포항지진은 경주지진에 비해 규모 면에선 작았지만 경주에 비해 지표 인근에서 발생함에 따라 120여 명의 사상자와 약 900억 원의 재산 손실을 낳았다.경주와 포항에서 발생한 강진 외에도 크고 작은 여진은 한반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 1년간 국내서 발생한 2.0 이상의 지진은 200여 회에 이른다.기상청은 일련의 지진사태를 분석, 향후 한반도에 불어 닥칠 맥시멈의 지진 규모를 6.0으로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7.0 이상의 초 강진을 경고하고 나섰다.그 근거로 지난 2011년 발발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을 꼽는다. 한반도가 일본 열도에 끌려가는 바람에 지진 에너지의 양이 현격히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기존 유라시아 판 내부에 위치한 한반도는 적층 에너지가 일본에 비해 소량 분출됨에 따라 지진 빈도가 낮으며 그 규모도 현저히 적다는 기존 분석을 뒤집은 결과다.이 같은 결과에 기인, 경주와 포항을 지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의 강진 역시도 간과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1546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갔으며 한참 뒤에 그쳤다. 처음에는 소리가 약한 천둥 같았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집채가 모두 흔들리고 담과 벽이 흔들려 무너졌다’는 내용이 기술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진과 IT의 융합관계구글은 최근 발생한 동일본 지진 발생 시점으로부터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재해 대응’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했다.구글은 이를 토대로 지진 발발 한달 여 동안 TV와 인터넷 라이브 매체, 동일본 지원 사이트 등 30건이 넘는 파생 서비스를 구축해냈다. 구글의 재해 관련 시스템 구축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미국의 한 연구팀에서는 인공지능(AI)을 통한 지진데이터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과거 발생한 지진을 빅데이터화 함으로써 지진에 대한 선제적 감지를 가능케 하는 예측지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이는 사람의 뇌를 차용한 신경망과 AI를 융합, 지진 발생 시 진파를 음향으로 변환해 시스템에 입력 후 분석해내는 기술이다. 연구팀에 의하면 이 시스템 도입 시 지진 분석 간, 기존의 슈퍼컴퓨터에 비해 수백 배에 이르는 정확도를 보인다.구글과 하버드대 연구팀 역시, 이세돌 9단과의 세기의 바둑대결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알파고 기술을 재해 대응시스템에 접목, 무소불위의 지진에 대한 공포를 일정 부분 희석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알파고에 적용했던 딥러닝 기술을 도입, 지진에 관한 과거 이력 등을 여기에 입력하자 100%에 가까운 정확도를 보이며 미소지진까지도 감지해냈다.황사의 진원지로 악명이 높은 중국에서는 미세먼지 분석을 통한 예측, 감소 등 대책마련에 AI 기술을 도입했다.특히 중국 텐진시와 같은 공업지역의 연료 분출량과 이를 통해 발생하는 미세먼지의 인과관계를 파악, 이를 AI 기술로 분석해 30% 이상의 미세먼지 절감효과를 거두겠다는 대책을 내놨다.우리나라 역시도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지진에 관한 각종 대비책에 몰두하고 있다.기상청은 지진조기경보 대상 영역을 전 방위적으로 확대했다. 더불어 지진 경보 시간 단축을 위한 기반 구축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그 시발점으로 일본 기상청 등과의 정보 공유를 통해 한반도를 넘어 일본 규슈지방까지 경보 대상 범위를 확대, 실시한다는 복안이다. 대상 영역은 북쪽으로는 평양 인근과 남동쪽으로는 일본 규슈 북쪽 대마도 일대를 아우른다.각 지자체 역시 지진 대비 간 스마트 시스템 도입에 주력하고 있다. 원시적 지진경보를 넘어 빅데이터 축적을 통한 경험치를 바탕으로 한층 더 체계적이고 정확한 IT기술을 접목한다는 것이다. ◆대구·경북의 지진 대비 상황은현재 대구시를 비롯한 여러 자치단체서 추진 중인 ‘스마트 재난상황정보전파시스템’. 이 시스템은 지진 발발 시 가장 신속하게 고지할 수 있는 방송과 휴대폰 메시지, 전광판 등에 동시다발적으로 재난소식을 전송한다. 재해발생 시 주민대피 간 골든타임 확보를 위함이다.각 건설사와 이동통신사업계도 다양한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기술을 도입, 지진 대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단지 내 스마트 지진계를 설치, 약진 발생 시 입주민에게 지진대응 행동요령을 집안 내 설치된 월패드로 경보하는 스마트 지진감지 경보시스템 개발에 주력하는 가하면, 5.0 이상의 강진 발발 시에는 경보와 동시 엘리베이터와 가스, 집안 곳곳의 조명을 알아서 제어한다.대구도시철도공사는 종합관제소에 지진계를 추가 설치, 지진대응시스템의 업그레이드를 영위했고, 부산도시철도는 재난조기전파체계 구축을 통해 기상청 지진조기경보시스템과의 유기적 연계를 꾀함으로써 전파매체별 자동으로 전파시나리오가 작성, 단 한 번 클릭으로 신속한 재난상황 전파를 가능케 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경주와 포항지진 이후 지진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포항시민 52만 명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재해피해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피해액을 인구수로 환산하면 5조 원에 이른다. 내가 사는 집의 지진 대응책에 고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내진이란 지진 발발 시 구조체와 비구조체간의 충돌로 인한 충격 완화를 위함이다. 우리나라는 내진을 차용하고 일본은 면진, 대만은 제진 방식을 이용한다. 여기에도 과학은 숨겨져 있다.내진의 원리는 작용 지진력을 상대로 버팀대를 이용, 이를 구조 부재에 견고히 연결시켜 지지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면진은 지진력이 애초 배관에 전달치 못하도록 특수한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며 제진은 지진력을 감소시키는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지진력을 자연스레 소진하는 방식이다.대한민국 유수의 건설사들은 내진설계의 기준을 새롭게 잡고 있다. 지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건물 진동이 건물 내 ICT 장비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면진 테이블을 도입하는 한편, 내진 방지 성능을 제고하는 진동 에너지 흡수 장치 도입을 통해 건물 손상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적용했다.글·사진=군월드 IT 사업팀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현대사 최전선에서 한국적 ‘자주인 사상’ 자율공동체 꿈꾸다

2002년 6월 고향 안의면 안의공원에서 동료ㆍ후학 130명이 참가한 가운데 학덕비 제막식이 열렸다. 학덕비에는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라는 제자 김주완 교수(경산대)가 스승 하기락을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은 하 교수의 4남 하영선(전 대구대 식품공학과 교수) 부부. 하기락은 영어ㆍ일어ㆍ독일어ㆍ한문에 능통했다. 그는 1980년대 경북대 대학원 과정에 개설된 동양철학 강좌에서 한문 원문으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근사록’ 등을 강의했다.그는 1980년대 후반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 읽기 모임을 만들어 정확한 번역과 해설로 후학들의 이해를 도왔다.그는 80세 때인 1992년 ‘조선철학사’를 발간했다. 서양철학자인 그가 한국역사를 1만 년까지 끌어올려 상고시대부터 근세까지 철학을 기(氣)의 관점에서 풀어쓴 것이다.1997년 2월3일 그는 대구 만촌동 집을 나서다 쓰러졌다. 국제평화협회지 ‘평협’을 돌리려 집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그는 경북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뒀다.그는 언제나 약자 편이었다. 누구에게나 겸손했고, 평생을 청빈했다. 광복 후 한국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한국 현대철학 1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였으나 학술원 회원도 되지 못했고 훈장이나 상조차 받은 적이 없다. 늘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후학들은 그를 전설처럼 말하고 있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 1912년 1월26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 1922년 안의공립보통학교 입학• 1927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입학• 1929년 광주학생운동 시위 주동으로 퇴학• 1934년 최재전과 결혼• 1935년 일본 밀항/일본 동경 상지대 예과 입학• 1937년 와세다대 철학과 입학• 1939년 12월 창씨개명 비판, 3개월 구류처분• 1941년 대학 졸업/황해도 재령상고 교사• 1946년 부산 ‘자유민보’ 주필• 1946년 4월 안의 전국아나키스트대회 개최• 1947~52년 옛 대구대 교수• 1951년 안의고교 설립• 1952~68년 2월 경북대 철학과 교수• 1963년 한국칸트학회 설립 주도• 1973년 민주통일당 정책위의장제9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1987년 제3회 전국아나키스트대회 대회장• 1988년 서울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 1992년 12월 조선철학사 발간• 1997년 2월3일 별세연보

풍수, 미신 아닌 과학?…IT기술과 동양철학 하나의 길로 잇다

해외에서 유명한 명당으로 알려진 지역으로는 그리스의 산토리니, 인도의 자이푸르, 중국의 만리장성 등이 있다. 사진은 그리스의 산토리니 전경. 풍수를 미신이 아니라 과학으로 푸는 시대가 왔다. 풍수는 과학과 인문학의 교집합이다. 풍수에서 화학과 생물학, 천문학 등과 같은 명제성립의 조건은 충족되지 않는다. 다만 자연에 관한 겸허한 연구, 그에 따른 소중한 경험치다. 풍수의 철학적 의미를 단순하게 살펴보면 풍수란 길흉화복을 구별해주는 철학이다. 이를 통해 물아일체와 과학적 생활공간을 디자인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패철 하나에 의존해 명당을 점지하던 지관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 고해상도의 드론을 띄워 지형해독의 질을 한층 더 제고시킨다. 애플 창업자 스티븐 잡스는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이야말로 최고의 수익처’임을 자신했다. 태블릿PC에 돼지머리 이미지 띄워 고사를 지내고 이메일로 받은 부적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미신이라고 치부돼왔던 일들이 디지털화되고 있는 추세다. 평범한 장삼이사들 역시 이메일로 받은 부적을 스마트폰에 저장하며, 태블릿PC 속 돼지머리 이미지로 고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미신이라고 치부돼왔던 것들을 일상에서 친하게 만나는 추세다. 인문학 상위 카테고리인 동양철학과 인공지능(AI)의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걸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게 실생활에 스며든 풍수인 셈이다. ◆풍수와 상대성 이론 세계적 물리학자들의 최종 난제는 ‘우주의 기원’이다. 우주의 시발점과 소멸, 주기에 관한 모든 것이다. 미신으로 치부되던 풍수는 아이러니하게 상대성 이론과 궤를 함께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운동의 절대적 기준을 부정한다.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는 데 대한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원리인데 30㎞/s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지구의 움직임을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등속으로 움직이는 어느 좌표계에서든 물리 법칙이 동일하다는 이치다. 뮤온 입자를 시간 지연에 의해 지상에서 관찰 가능한 것, 목성 주변의 빛이 휘어지는 것 등도 상대성 원리의 동력이다. 풍수의 기운 역시도 사람마다 상대적이다. 풍수학자들은 인간에게도 생체 에너지가 흐른다고 한다. 생체 에너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기, 인도 프라나(prana), 그리스 프네우마(pneuma) 등으로 불린다는 것.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에서 기의 작용을 ‘기가 막히다’, ‘기가 차다’ 등의 관용어로 표현한다. 기 역시 절대적 기준 없이 남녀노소에 따라 가변하는 동력이다. 어떤 풍수일지라도 청년에게는 행복한 기운이, 어르신에게는 강골의 기가 흐르는 상대성을 내포한다. 풍수는 개인에게 맞는 균형을 이뤄내는 일련의 과정이다. 자연과 인간의 생체 에너지가 조화를 이룰 때 건강을 영위할 수 있다는 암묵적 믿음이다. 이렇듯 물리학과 풍수학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고찰이라는 공통점을 내포한다. 물질과 반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기와의 연계성을 터득한다. 우주와 자연의 공간에 흐르는 자기장의 원리가 우주 활동의 동력이라는 논리다. 자기장의 원리를 공간학문에 적용한 것이 바로 풍수학이란 게 관련 학자들의 설명이다. 공명을 찍는 사진기는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러시아 전기기사 세미온 키를리안이 개발한 이 사진기는 피사체와 절연체 간 전극에 2만 볼트 내외의 고압전기를 흘려보낸 후 방전된 부분을 필름에 기록한다. 그 예가 바로 오라(aura) 촬영하는 장치로 알려진 키를리안(kirlian) 사진기라는 것. 공명을 찍는 사진기로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시아 전기기사 세미온 키를리안으로부터 탄생한 이 사진기는 피사체와 절연체 간 전극에 2만 볼트 내외의 고압전기를 흘려보낸 후 방전된 부분을 필름에 기록하는 원리다. 물론 정확한 툴에 따른 자료 수집이 선행돼야겠지만, 공명현상에 의해 상이 찍히면서 사람의 건강ㆍ기분 등 기운의 상태가 카메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굳이 풍수를 맹신할 필요는 없다. 그저 최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선한 디딤돌 정도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풍수와 IT IT산업의 집약체로 일컬어지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풍수가 각광받고 있다. 풍수에 맞는 사무실 인테리어 변경 뒤 매출이 신장했다는 웃지 못할 사례도 빈번하다. 심지어 그들은 “풍수에 맞는 인테리어 변경으로 회사가 더욱 굳건해졌다”며 ‘풍수예찬론’을 공공연히 펼치고 다닌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 삼성물산 최고경영자(CEO)의 집무실은 최고층인 32층이 아니라 19층에 위치한다. ‘19’라는 풍수적 의미를 두는 것이다. 풍수상 19층은 땅의 기운이 충만한 위치라고 본다. 19가 풍수학적으로 ‘퍼펙트’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전자ㆍIT기업들이 풍수지리를 고찰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SK 기업의 서울 종로구 사옥 정문 계단에는 거북이 머리를 상징하는 검은 돌에 흰 점이 박혀있다. 명당 지역이지만 불의 기운이 강해 건물 설계 당시 물의 기운을 가진 조형물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의 서울 종로구 서린동 사옥 정문 계단에는 ‘거북이 머리’를 상징하는 흰 점이 박힌 검은 돌이 있는가 하면, 삼성동 코엑스 맞은편 현대산업개발 사옥은 흉조의 기운 차단하고자 바닥면에 동판을 깔았다.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강원도 강릉 오죽한옥마을에는 스마트 빌리지가 조성됐다. 전통마을에 IT기술을 접목해 관광객의 시설 안내, 예약 등 모든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도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전통과 AI 기술이 융합한 ‘스마트 빌리지’가 강릉시에 조성됐다. 시는 전통역사문화지구에 들어서는 한옥마을에 IT기술을 접목, 새로운 개념의 공간으로 조성해 나가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한옥마을은 마을 공동 숲을 조성, 마을 경관을 연출하고, 풍수상 북서풍을 막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이 조성된다. 아이러니하게 전통요소가 물씬 가미된 이곳에는 네트워크 통신망 인프라를 기본으로 관광ㆍ체류자들을 위한 시설안내, 예약, 멀티 시스템 등 모든 서비스가 IT기술과 접목돼 제공된다. 이처럼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전 방위적 영향을 미치는 풍수에 드론이 등장했다. 드론을 이용한 촬영은 입체감을 입혔다. 기존 항공촬영에 사용되던 유인헬기에는 인력과 촬영장비 등 투입으로 복잡한 시스템인데 반해, 간소하고 편리한 드론의 등장은 ‘항공풍수’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현상을 왜곡 없이 드라이하게 촬영하다 보니 정확도는 더할 나위 없다. 특히 드론 촬영은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다각도 촬영이 가능하다. 풍수상 길하다고 여겨지는 배산임수, 좌청룡ㆍ우백호 등의 지형을 자유롭게 살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 밖에도 빅데이터를 활용한 최첨단의 정보를 취사 선택해야 할 증권업계에서 음양오행, 역학의 이치를 주제로 한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IT기술과 동양철학은 더 이상 이질적 대립관계가 아닌 융합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추세다. ◆외국에서 바라본 풍수 2000년 초반 준공된 미국 트럼프월드타워는 사각 형태로 올곧게 올라간 길한 풍수의 요건을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사업가 시절 자신의 회사에 풍수 전문가를 채용했다. 뉴욕 개발 당시 풍수가의 도움을 받았고 2000년 초반 준공된 트럼프월드타워는 사각 형태로 올곧게 올라간 길한 풍수의 요건을 차용했다는 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물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홍콩의 상하이은행 본사(HSBC)는 영국인 건축가의 설계 지휘 아래 자국 풍수전문가의 자문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은행은 주출입구를 2층에 배치해 눈길을 끈다. 배산임수에 입지해 있는 건물이 산에서 내려오는 기운을 제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전해진다. 아시아를 넘어 서양에서도 풍수이라는 이름의 풍수학이 각광받고 있다. 서양의 수도 여러 곳이 실제 풍수지리학적 명당에 들어서 있음이 이를 방증한다. 실제 런던에서는 ‘풍수전문가’라는 직종이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들은 상담료로 하루 기준 300파운드 이상 벌어들이고, 건축 간 건물 형태 및 지형 감별에는 5만 파운드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고 알려졌다. 리츠호텔과 같은 영국 내 유수의 기업들은 객실 배치 등에 풍수지리를 적극 활용하며, 호텔 내 카펫 색깔은 풍수적으로 길한 기운을 불러들인다는 블랙과 레드를 이용한다. 그렇다면 유럽 국가 중 유독 영국이 풍수와 밀접한 접점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서양 풍수의 근간은 중국으로부터 건너왔고, 홍콩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영국이 자연스레 풍수사상에 감화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동양 풍수와 서양의 풍수는 긍정의 기운을 찾는 기본은 일치하지만, 절대 방위를 기준으로 잡는 동양풍수에 비해 서양 풍수는 입구의 방위를 시발점으로 한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풍수지리 전문가로 알려진 송대선 영남대 가족주거학과 겸임교수는 “4차 산업혁명의 범람과 궤를 함께하는 것이 현대 풍수의 아이덴티티라 할지라도 풍수의 기본은 내가 사는 주거로서의 풍수”라며 “풍수는 인간의 의식주와 맞닿아있는 요소들에 대한 세심한 고찰이기에 풍수의 사상성이 인문학적 스탠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 군월드 IT 사업팀

[유산균 바로알기] 내 몸의 면역 담당…장내 ‘세균 균형’ 건강한 식습관 먼저

유산균은 포도당이나 유당과 같은 탄수화물을 분해해 유산으로 만든다.최근에는 유산균뿐만 아니라 대장 내에 생존하면서 인체에 유익한 작용을 하는 기능성 세균을 통칭해 ‘프로바이오틱스’라고 부른다.프로바이오틱스가 활동하는 장은 거대한 면역기관이다. 우리 몸의 면역세포 중 70%는 장 안에 살고 있다.◆유익한 균인 유산균, 침입자 막아유산균은 소장 점막이 외부 항원에 의해 손상됐을 때 항체 생산을 도와 장내 침입자들을 막는 역할을 한다.유산균 덕분에 면역세포가 건강하면 나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몸 안에 침투했을 때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고 쓸데없는 과민반응으로 각종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키지 않는다.장 안에 사는 균은 수천여 종에 이른다.이 가운데 정체와 역할이 제대로 밝혀진 세균은 20~30%에 불과하다.장내에 있는 유익균은 락토바실러스와 비피더박테리움이 대표적이다. 유해균으로는 장염을 일으키는 클로스트리디움과 이질의 원인인 살모넬라, O157을 일으키는 대장균 등이 있다.장내에 사는 유익균과 유해균은 끊임없이 세력 다툼을 벌이며 건강을 좌지우지한다.건강한 사람은 장내에 유익균과 유해균의 비율은 대략 8대 2 정도로 유익균의 힘이 세다. 하지만 유해균이 세력을 확장하면 각종 면역 관련 질환과 장염 등 소화기질환 등에 시달리게 된다.엄마의 배 속에 있던 아기의 장은 무균 상태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다양한 균을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미생물이 장의 구석구석까지 자리를 잡고 정착한다.출생 후 6개월 이내에 면역의 70%가 결정되고 모유나 먹는 음식에 따라 장내 세균의 구성이 완성되는 데는 거의 3년이 걸린다.이후에는 평생 거의 비슷한 구성의 장내 세균을 갖고 산다.모유를 먹는 아기의 장에는 분유를 먹는 아기보다 훨씬 다양한 세균과 그로 인해 자극을 받은 면역 세포들이 자리 잡는다.모유에는 유산균의 먹이가 되는 올리고당이 분유에 비해 많이 함유돼 유산균의 증식을 도와준다.따라서 모유를 먹는 아기가 분유를 먹는 아기와 비교하면 면역력이 높고 각종 감염성 질환에 덜 걸리는 것이다.하지만 분유를 먹인다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첫돌이 지나고 모유나 분유 대신 밥을 먹으면 그 차이가 대부분 사라진다.◆아군과 적군장내 세균의 균형을 해치는 치명타는 항생제다.항생제는 유해균뿐만 아니라 장내에 자리 잡은 유익균까지 사멸시켜버린다. 장내에 나쁜 균의 비율이 높아지면 설사와 변비가 잦고 염증으로 인해 복통을 자주 느낀다.나이가 들거나 식습관과 스트레스 등에 의해서도 세균의 균형이 깨지기도 한다. 유익균이 줄어들면 장 기능이 악화되고 면역세포의 기능이 떨어져 각종 질환에 쉽게 걸린다.에너지 생산이 줄어 만성 피로에 시달리거나 각종 위장장애, 설사, 변비, 대사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장내에 나쁜 균들이 창궐하는 가장 큰 원인은 주로 음식 때문이다.나쁜 균은 동물성 지방이 풍부한 육류나 설탕을 즐겨 먹고 자란다. 인스턴트 식품과 탄산음료, 식품첨가물이 많이 든 음식, 기름진 음식, 술, 담배 등은 유산균의 적이다.반대로 좋은 균들은 야채에 많이 있는 섬유질이나 올리고당 등 양질의 당을 먹으면서 세력을 키운다. 따라서 과일과 채소, 통곡물 등 유산균 증식에 도움이 되는 식품을 꾸준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 김치나 된장, 간장, 청국장, 젓갈류 등 발효식품도 장에 서식하는 유산균을 돕는다.식습관을 바꾸지 않으면서 유산균 제품을 먹는다면 장기간 꾸준하게 섭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포장된 유산균은 쉽게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일 먹어야 하고 먹지 않으면 장에서 밀려나게 된다.무작정 유산균을 먹기보다는 장 기능이 약할 경우 3~4개월 복용하는 것이 좋다. 만약 유산균을 꾸준히 먹어도 증상 개선이 없다면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아토피피부염이나 이유 없는 잦은 복통에도 효과가 있고 크론병이나 궤양성 대장염 등 난치성 질환의 경우 고농도 유산균이 도움이 된다. 단일균 제품보다는 혼합유산균 제제가 더 좋고 유산균의 수가 높을수록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유산균에 대한 ‘맹신’은 금물이다.유산균은 의약품과 달리 정확한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고 증상이 다양해 표준화된 실험도 부족하다.유산균이 잘 살 수 있도록 장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유산균 제품은 보조식품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도움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김영진 과장

[나에게 맞는 휴식법 찾기] 몸도 마음도 피곤한 일상, 온전히 쉬어볼까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 일과에 몸도 마음도 피로한 시간.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최상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휴대폰과 TV에서 벗어나 조용한 환경에서 취하는 휴식은 그 효과를 두 배로 올려준다. ◆명상 명상은 손쉽지만 가장 효과적인 휴식 방법이다. 편안히 누워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베개를 조정해 목을 편안하게 한다. 코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호흡의 흐름에 집중한다. 체내 산소량이 증가하면서 피로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킬 수 있다. 떠오르는 생각에 집중하기보다 가능한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핵심이다. 어깨나 허리, 목 등 근육 뭉침이나 경직이 느껴진다면 명상 후 그 부위를 스트레칭을 통해 풀어주는 것도 피로 회복에 효과적이다. ◆운동 몸이 피로할 때는 물론 수면이 필요하다. 에너지를 보충하고 피로 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이나 짜증 등 정신적 피로에는 30분 정도의 수영 등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이 좋다. 흥분된 대뇌피질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3대 의학연구지 중 하나인 ‘란셋’의 내용을 살펴보면 만성피로를 느끼는 640명을 대상으로 운동을 하게 한 결과 운동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틈날 때마다 하는 스트레칭도 컨디션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정적 휴식할 때는 SNS의 알람은 잠시 꺼두자. 빛과 소리, 자극, 정보 등이 가득한 휴대전화를 보면서 온전히 쉬기는 힘들다. TV와 라디오 등도 마찬가지. 완벽한 정적 속에서 뇌는 비로소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은 집중력과 창의력을 높이는 데도 효율적이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도움말=한국건강관리협회 대구지부 건강검진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