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아령 체조

아령 체조/ 이상식 고향에 갈 때 마다 아버님은 맏손자의 팔과 등허리 어루만지며 왜 이렇게 약하냐고 밥 많이 먹으라고 반 꾸중 반 애원하시곤 했다/ 추석 차례는 끝났다 아버님은 음복이 과한 탓으로 취기가 있으셨지만 예의 맏손자를 앉혀놓고 사랑의 잔소리 늘어놓으신다 그러다가/ 불현듯 일어나서 광에 가시더니 쇠뭉치를 들고 나오셨다 녹과 먼지가 뒤덮인 아령이었다 당신께서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썼던 운동기구란다/ 그러니까 50년 전의 골동품인 셈이다 아버님은 맏손자를 위해 조교처럼 시범을 보이신다 칠순 노인의 쇠잔한 육신과 거친 숨소리가 뿜는 율동/ 아버님도 맏아들도 맏손자도 눈시울 붉혔다- 시집 『춘란은 향기로 말한다』(아르코,2012).................................................. 이승만 대통령 시절 변영태 외무장관은 해외출장을 나갔다 귀국하면 출장비를 아껴 남긴 달러를 반드시 국고에 반납한 청렴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집을 떠나 어디를 가더라도 아령을 갖고 다니며 운동하는 분으로도 유명하다. 예전에 내가 아는 집안의 한 친척 어르신께서도 그와 같은 아령 마니아이면서 곧은 선비풍이시라 아령과 청렴강직의 이미지는 늘 겹쳐지곤 한다. 그래서 일단 시인의 아버지도 그런 분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 아버지가 추석 때 고향을 찾은 아들과 손자에게 꾸지람을 널어놓는다. 하지만 그 꾸중은 손자를 향한 어쩔 수 없는 내리사랑이다. 약해보이는 손자에게 ‘밥 많이 먹으라’는 소리는 누구나 하는 기본이고, 성이 차지 않은 아버지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취기를 빌어 광에서 녹슬고 있는 아령을 꺼내와 시범까지 보이신다. 귀한 맏손자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쇠잔한 알통을 내보이며 거친 숨소리를 뿜어댔다. 내리사랑은 어린 자식으로 내려갈수록 깊어지는 사랑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주 사랑이다. 16세기 조선시대에 ‘이문건’이란 사람이 쓴 ‘양아록’이란 육아일기가 있다. 귀양살이 와중에 손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면서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손자가 커가면서 생기는 갈등상황도 낱낱이 기록하였고 매를 드는 대목도 나온다. “놀기 좋아하는 애들이라 누가 날마다 부지런히 책을 들여다보겠는가. 할아버지는 다만 네가 모든 것을 소중히 하길 바란다. 꾸짖어 나무랐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틈만 나면 떼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직접 나가 데려와서 뒤통수와 엉덩이를 때리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울기에 내 마음도 아팠다.” 이문건은 손자가 더 이상 자신의 품속에 품을 수 없는 존재란 것을 깨달은 연후에야 일기쓰기를 중단했다. 물론 손자에 대한 사랑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손자와 아들 앞에서 아령체조 시범을 보이는 칠순노인의 가락과 기세로 보아 시인의 아버지도 손자라 해서 마냥 오냐오냐 하실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광경에 ‘아버님도 맏아들도 맏손자도 눈시울 붉혔다’고 하니, 그 성정들로 미뤄봐서는 장차 손자와의 갈등을 그리 염려할 바는 아닌 듯하다. 아들이 두고 간 아령을 이사 오면서 가져와 가끔 들었다 놨다 한다. 손녀를 안아본지 한참 되었다. 이제 만6세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간단다. 가까이 있지 않아 같이 놀아줄 수도 훈육할 수도 없다보니 “할아버지, 언제 와?” 그 소리만 귓전에 맴돈다.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三代

三代/ 하종오그의 아버지는 국방군에 징집되어/ 서울 수복에 나가며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살아서 돌아올게요/ 정말로 인민군하고 육박전하고도 살아서 돌아와/ 고향에서 새로 초가집 짓고 감나무 심고 그를 낳았다/ 이제 전쟁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이십여 년 후,/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는 파병군에 지원하여/ 베트남 전에 나가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중략)이제 아들만은 전쟁에 안 나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후 어느 날,/ 대학생이 된 그의 아들이 군대 가게 된 날/ 그와 그의 아내가 먼저 말했다/ 너무 잘 하지도 말고 너무 못 하지도 말고 몸만 성해라/ 어김없이 군인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어디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오직 죽거나 죽이러 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시집 『반대쪽 천국』 (문학동네, 2004)............................................................ 6·25 전쟁 발발 69년, 휴전 이후로도 66년이나 지났음에도 한반도는 아직 전쟁의 불안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남북 8천만 겨레 모두가 종전선언을 희망하는데도 합의가 안 되는 이유가 무얼까. 종전선언을 하면 미국은 한반도 미군주둔 명분이 없어지고 한반도에 미국의 영향력이 떨어지게 되면 중국과 패권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한 견제력이 약화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하겠다. 이러한 역학관계를 잘 이해하는 북한에서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후에도 미군의 주둔을 양해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그 카드를 쉽게 꺼내지 않는 것은 완전한 비핵화와 미국에 대한 굴복 없이는 한반도 긴장상황에서 우려먹을 게 아직은 더 많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전략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체제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도모해야하는 절박한 입장에 놓여있다. 물론 전쟁의 불안을 제거하고 평화체제와 공동번영으로 가는데 우리가 주저할 이유는 없다. 미중 역학관계와 상호 불신이 주요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 내부 분열에도 그 원인이 적지 않아 보인다. 한국당은 ‘북한 소형 목선 경계 실패’사건을 규탄하면서 지난 21일 국회에서 안보 의원총회를 열었다. 그들은 이번 경계 실패가 지난 9·19 남북군사합의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규정하고, 남북군사합의 폐기를 당론으로 내걸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평소 자신들 진영과 코드가 맞는다고 생각했던 극우보수인사를 초청해서 강연을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남북군사합의와 이번 경계실패 사이에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경계심과 경각심이 저하되었을 수는 있다고 했다. 이처럼 보수적 안보관을 지닌 박 교수조차 남북군사합의와 경계 실패의 직접 연관성을 부인하는데도 한국당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 부으며 유지되는 군이 북에서 내려온 목선 하나 파악하지 못했냐고 추궁하면 정부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러나 억지를 써가며 안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3대를 이어오며 우리 민초가 바라는 건 오직 이 땅에 모든 철조망이 걷히고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그날이 아닌가.

세상읽기…신공항 재검토는 자살골이다

신공항 재검토는 자살골이다오철환객원논설위원 국토교통부장관과 부산·울산·경남 단체장들은 동남권신공항 문제를 총리실로 넘겨 재검토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이해당사자인 대구·경북을 소외시킨 상식 밖의 일방적 결정이다. ‘김해공항확장’은 중립적 전문기관인 파리공항관리공단의 연구용역을 바탕으로 2016년에 최종 확정된 정책이다. 그 결론이 어떻게 나오든 연구결과에 승복하기로 사전에 합의했던 터라, 관련 광역지자체들은 나름대로 각기 불만을 토로하긴 했지만 전문연구기관의 결론과 사전약속을 존중하여 동남권신공항 문제를 근근이 봉합했다. 그랬던 부·울·경 단체장들과 정부가 국민 앞에서 한 서약을 보란 듯이 깨어버렸다. 정부는 청와대와 여당의 압박에 굴복하여 기존 결정을 뒤집어엎기 위한 재검 절차에 착수하였다. 기가 차고 황당한 일이다. 정부의 신공항 정책결정은 일종의 행정계획 내지 국민에 대한 확언·확약이라고 볼 수 있다. 함부로 변경할 수 없는 불가변력이 존재한다. 물론 원시적 흠결을 이유로 취소 또는 변경하거나 후발적 사정을 이유로 철회할 수 있다. 이는 원시적 흠결을 치유하거나 후발적 사정 변경에 적응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법률적합성과 공익적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 경우에도 원시적 흠결과 후발적 사정 변경이란 전제조건을 충족해야만 하는 한계가 있다. 신공항 정책결정은 흠결이나 사정 변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당사자를 배제한 채 합의를 깨고 기존 결정을 변경하려는 책동은 위법·부당하다. 객관적 절차를 거쳐서 확정·공표된 정책을 합당한 사유 없이 변경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위법한 행위다. 법치국가에서 구체적 타당성 못지않게 법적 안정성도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식량, 군대 그리고 신뢰라 했다. 그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군대이고, 둘을 버려야 한다면 군대와 식량이라고 했다. 무신불립, 신뢰가 없으면 정치가 바로 설 수 없다. 상앙의 이목지신도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고사다.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신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가치로 꼽아왔다. 미국에서도 신뢰를 깨는 거짓말은 정치인에게 금기다. 정치든 행정이든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기존의 확언·확약을 뚜렷한 이유 없이 변경하는 일은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작태다.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장래를 향하여 신공항에 관한 자기구속을 확언하고서 특별한 이유 없이 정략적인 계산에서 대국민 약속을 깨는 행위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국가위해행위다. 이런 행태를 그냥 방치한다면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파괴된다. 비록 상급기관이라 하더라도 권위 있는 연구기관에서 판단한 전문적 의사결정을 비전문가인 행정청이 정치적인 이유로 무책임하게 재검토하는 상황은 비상식적일 뿐만 아니라 위법적이다. 행정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하는 점에서 위헌소지마저 존재한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행정이 중심을 잡고 제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동남권신공항 문제는 그 본질과 무관하게 국론을 분열시키고 지역갈등을 조장한다. 부·울·경과 대구·경북을 갈라 칠 뿐만 아니라 수도권과 지방을 갈라 치는 분열조장 사안이다. 수도권은 동남권신공항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관문공항은 인천공항 하나로 족하다. 인천공항을 세계 일등 공항으로 계속 키워가기도 힘에 부친다. 전국 어디에서라도 신속히 접근 가능한 교통망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세계 주요 공항을 연결하는 다양한 노선을 확보하고 항공사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 동남권의 관문공항은 불필요하다. 공항만 크게 지어놓는다고 관문공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거대 공항을 지어놓으면 활주로에서 고추말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지방공항은 근거리 노선에 집중하고 인천공항은 세계 일등 관문공항을 지향함으로써 상호 윈·윈 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수도권 사람들의 ‘선택과 집중’ 논리다. 기득권 항공계의 주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남권신공항에 대한 갈등을 재점화시키고 있는 청와대와 여당의 꼼수는 그 의도와 달리 자살골일 수 있다. 부·울·경의 표를 얻어 보려고 얄팍한 수작을 부리려다가 대구·경북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뜻하지 않는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어리석음이다.

아침논단…수제맥주 활성화, 양조장 유치부터

수제맥주 활성화, 양조장 유치부터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지난 6월 중순.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엔 많은 사람들이 수제맥주를 즐기기 위해 모여들었다. ‘대구 수제맥주 페스티벌 2019’ 현장이었다. 3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눈에 뜨였다. 이곳저곳 돗자리를 깔고 앉은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번 행사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축제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맥주가 메인 주제였지만 행사장 어디서건 흥청망청, 부어라마셔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시고 싶은 맥주 한두잔과 간단한 안주를 앞에 두고 분위기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대구에서 열리는 수제맥주 페스티벌에 참여한 대구지역 양조장은 세 곳 중 한 곳뿐이었다. 같은 기간 부산에서 열린 ‘2019 부산 수제맥주 페스티벌’엔 부산지역 양조장 8곳이 모두 참여했다. 기분이 착잡해진 건 양조장 숫자였다. 현재 부산에는 광안리와 기장, 송정 등지에 8개의 수제맥주 양조장이 들어서 있다. 이제 겨우 3곳을 채운 대구와는 비교가 안된다. 부산시도 양조장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벡스코에서 2년째 부산수제맥주페스티벌을 개최해 오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수제맥주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고 전국의 수제맥주 매니아들은 부산에서 브루어리 투어를 계획할 정도가 됐다. 다행인지 대구에서도 관련 산업 활성화를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수제맥주산업 활성화 협의체가 7월 중으로 출범할 계획이다. 업계와 학계, 관련 기관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정책 제안 등에서 활약이 기대된다. 다른 도시에 비해 뒤처진 대구의 수제맥주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지방자치단체의 제도적 뒷받침은 필수다. 전국에서 수제맥주 도시 대구를 찾으려면 많은 양조장이 들어서는 게 먼저다. 이 말은 곧 지자체에서 양조장 유치에 최우선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먼저 현행법상으로 양조장 설립은 복잡하면서도 어렵고 시간상으로도 6개월 정도 걸리는 만큼 행정절차를 간소화시키는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 여기에다가 양조장은 장치산업이라는 점을 감안해 설비 중 일정부분을 지원하는 방법이면 전국의 양조장이나 양조장 설립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미를 확 당길 수 있겠다. 이미 몇몇 지자체에서는 지역이름을 딴 맥주의 상품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지원에 나섰다. 부산 북구의 경우 구포지역이 과거 밀 집산지였다는 역사적 특성을 부각시키며 ‘구포 맥주’ 상품화를 고민하고 있다. 부산 북구는 양조장유치 간담회까지 열 정도로 적극적이다. 경북의 몇몇 기초자치단체에서도 수제맥주 양조장 유치 혹은 설립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도시재생 차원에서 수제맥주 특화거리를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국내의 한 경제일간지가 소개한 적이 있는 미국 뉴욕주 미들타운에 있는 이퀼리브리엄 양조장이 좋은 예다. 육류포장업체가 문을 닫은 후 버려져 도시의 골칫덩이였던 이곳은 양조장이 들어선 이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양조장 문이 열리기 전인 아침부터 100여 명이 줄을 선다고 한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맥주를 마셔보기 위해서다. 하루 수백 명씩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주변의 식당에도 손님들이 들어차기 시작하면서 이젠 양조산업이 지역의 대표산업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같은 성과에 힘입어 뉴욕주에만 400여개의 양조장이 버려진 공장 등지에 들어서 이곳들을 새롭게 변모시키고 있다. 대구가 맥주도시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10개 이상의 소규모 양조장이 들어서야 한다. 특화거리에 들어선 이들 양조장에서 대구 지역명을 딴 제품을 출시하고 또 지역특성과 잘 결합한 한정판 맥주를 만들어 내면 전국에서 이 맥주 맛을 보기위해 모여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 이퀼리브리엄 양조장처럼 수제맥주 산업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미국의 현재 수제맥주 시장은 전체 맥주시장의 약 13%를 차지할 정도로 큰 편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1% 턱밑까지 왔다. 성장가능성이 그만큼 크다. 얼마전 주세법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수제맥주 산업 활성화 가능성이 더 커졌다. 때맞춰 대구 수제맥주산업 활성화를 위한 협의체도 활동을 시작한다. 협의체에서 수제맥주 양조장 유치에 좋은 제안들이 쏟아지길 기대한다.

세상읽기…6·25에 생각하는, '왜 평화인가?'

6·25에 생각하는, '왜 평화인가?'홍덕률대구대학교 사회학 교수69년 전 오늘이었다. 38선이 뚫렸다. 북한군이 남침해 온 것이다. 남한은 벼랑끝까지 몰렸다. 미국을 필두로 16개국이 남한을 도와 참전했다. 기사회생했다. 이번엔 북한군이 쫓겼다. 중국군이 북한을 돕겠다고 내려왔다.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커질 뻔도 했다.좁은 반도는 피로 물들었다. 마을도 학교도 공장도 파괴되고 불탔다. 수많은 군인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민간인 피해도 컸다. 어이없는 이유로 집단 학살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참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휴전 후에도 비극은 계속됐다. 부모, 배우자, 자식을 잃은 이들과 이산가족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과 북의 사회와 체제도 멍들고 뒤틀리긴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이후의 분단은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물론, 정상사회를 만드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묶어서 ‘분단 비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들 수 있다. 북은 핵개발에, 남은 최첨단 무기 구입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야 했다. 남과 북 모두,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는 데도 큰 돈이 들었다. 일부만이라도 경제, 복지, 교육에 투자할 수 있었다면, 남과 북 모두에서 국민의 삶은 크게 좋아졌을 것이다.둘째, 비용은 군사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반도는 전쟁을 끝낸 종전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일시 중단된 휴전상태다. 언제든 전쟁이 다시 터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군사적 충돌은 수도 없이 많았고 툭하면 전쟁위기설도 불거졌다. 그 때마다 사회는 긴장했고 경제는 위축됐으며 국가신용도는 추락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천문학적 규모가 될 것이다.셋째, 민주화의 지체도 큰 비극이었다. 북은 봉건적인 세습왕조로까지 퇴행했고, 남도 오랜 세월 권위주의 하에서 신음해야 했다. 적대적 분단구조와 준전시 상황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언제든 제한할 수 있는 이유로 작동되어 왔다. 정치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적대적 분단체제라고 할 수 있겠다.넷째, 합리적인 문제해결도 어렵게 했다. 남과 북 모두에서 특유의 분단문화를 만들어 냈고, 그것의 핵심은 진영논리다. 입장이 다른 이들을 북에서는 반동으로 처단했고 남에서는 빨갱이, 종북으로 매도했다. 합리적인 문제해결은 어렵게 되고 사회는 뒤틀리게 되었다.분단비용은 사실상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렇다면 적대적 분단구조를 해소하는 일은 무조건 당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훗날 밝혀진 경위가 어이없긴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월 신년기자회견 때 했던 ‘통일은 대박’ 선언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물론 남북간 적대구조의 해소가 곧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통일이 궁극적인 목표겠지만 자칫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통일로 인한 효용과 함께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의 혼란과 비용까지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여기서 우리는 통일로 가기 전 단계의 ‘평화체제’를 적극 고려하게 된다. 분단 상황 하에서라도 적대 관계를 완화하거나 해소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분단비용을 줄여가는 것이다. 핵 폐기와 군축, 화해와 왕래만으로도 남과 북 모두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적지 않은 재정을 경제와 교육과 복지를 위해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회복될 것이며, 각종 사회문제들도 바르게 해결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평화체제 위에서 공동번영의 틀을 세워가는 것은 절박하면서도 현실적인 과제다.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남과 북 내부에서 평화와 통일을 원치 않는 세력일 것이다. 적대적 분단구조 하에서라야 자신의 이익과 권력이 보장되는 반평화·분단세력이다. 그들은 남과 북 내부의 강고한 기득권층이기도 하다. 주변 강대국들 중에서도 그런 세력은 넘쳐난다.모처럼의 한반도 비핵화 평화 노력이 벽에 부딪쳤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다시 시작된 물밑대화로 꼭 돌파구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섬세하면서도 지혜로워야 한다. 여와 야가 따로일 수 없다. 6·25를 ‘새롭게’ 기억하고 다짐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과거 냉전적 방식으로가 아니라 평화지향적 방식으로 6·25를 기억하고, 그 위에서 한반도 평화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통일은 대박’이고, ‘평화는 필수’다. 69주년 6·25에 새기는 이 시대의 지표다.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을 사랑하라/ 토마스 칼라일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라/ 오늘은 영원 속의 오늘/ 오늘처럼 중요한 날도 없다/ 오늘처럼 소중한 시간도 없다/ 오늘을 사랑하라/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하략)- 『Past and Present』(1843) .....................................................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역사가이며 비평가이자 걸출한 지성인 칼 라일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대표적 저서가 이다. 프랑스 혁명사는 칼라일이 1833년부터 1837년까지 4년 넘게 걸려 쓴 대작으로 알려졌는데 집필과정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칼 라일은 두문불출 오로지 집필에만 매달려 쓴 수천 장의 원고를 친구 존 스튜어드 밀에게 한번 읽어봐 달라며 주었다. 얼마 뒤 밀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하녀가 실수로 그 원고를 몽땅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오늘 이 일화가 떠오른 것은 나도 최근 작업하던 한글파일들이 모두 깨져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 라일에게는 2년여의 노력이 그만 수포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한동안 그 충격으로 무력증에 빠진 그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것은 어느 공사장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한 노동자가 벽돌을 한 장씩 쌓는 것을 본 이후다. ‘오늘 한 페이지를 쓰자. 그리고 ‘날마다 한 페이지씩을 다시 쓰자’ 그렇게 해서 다시 2년의 세월을 통해 완성시킨 역작이 프랑스 혁명사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프랑스 왕정의 실패를 낱낱이 밝혔고 또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칼 라일은 에서 혁명을 지배계급의 악한 정치에 대한 천벌이라며 지지하면서 영웅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그는 지배계급의 가장 큰 잘못은 그들이 아무 잘못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섹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말도 그의 ‘영웅숭배론’에 언급되었을 만큼 뛰어난 인물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리고 인생은 ‘두 개의 영원 사이에서 번쩍 빛나는 한순간의 섬광’이라는 말도 남겼다. ‘인간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인생은 잠시 왔다가 잠시 후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라고 했다. 삶이란 ‘녹고 있는 얼음판’이고, 우리는 그걸 타고 지금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아래를 내려 보지 않아도 그것은 자꾸만 작아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가라앉을 것이다. 칼라일은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없다. 시간은 우리가 딴 짓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저만치 도망쳐 버린다.’고 일찍이 시간을 각성케 했다. 어제의 미련을 버리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면서 ‘오늘’을 사랑하라고 한다.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어제에 갇혀 허덕이거나 허황된 내일의 꿈만을 쫒는 사람에게 오늘을 살라며 권고하고 있지만 벅찬 선물로서의 오늘을 선뜻 받아들지 못할 때가 있다. 내일은 아직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오늘을 사랑’함은 지금에 감사하며 오늘의 삶에서 행복을 찾지 않으면 안 될 명백한 당위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지 않은가. 늘 뒤뚱거리는 내게도 오늘을 다시 선물한다.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얼굴 반찬

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오순도순’이란 낱말이 한 시대의 유행어도 아닌데 요즘엔 이 낱말을 통 듣지 못한다. 오순도순 식구끼리 모여서 밥 한번 같이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닌 세상이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끼리의 그저 밥 한 끼인데 무슨 동창회처럼 날을 잡고 받아서야 가능한 회식이 되어버렸다. 가족이 둘러앉아 다정하게 혹은 퉁명스럽게라도 말을 건네고 생선 가운데 토막 언저리에서 젓가락 부딪는 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먹는 일이 보기 드문 현상이 된 것이다.각자 생활의 사이클이 같지 않으니 제각각 알아서 해결하는 식사가 보편화되어있다. 각자가 외로운 하숙집에 기거하는 동거인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한끼 줍쇼’하며 불쑥 찾아오는 식객이 썩 내키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 모여 식사할 경우에도 TV가 아내의 얼굴을 가리고 연예인의 영양가 없는 수다가 자식과의 대화를 가로막곤 한다. 이런 형편이니 그 옛날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는 일’은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 정경이 되어버렸다.10년 전 한 기관의 ‘친족범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4촌 이내를 친족으로 여겼다. 젊은 응답자일수록 그 범위가 좁혀졌다. 지금 조사하면 아마 친족의 범위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예전보다 4촌의 수가 훨씬 적어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4촌들의 이름들을 다 모른다고 답한 사람이 절반은 된다고 한다, 촌수 계산 못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시하고 겨우 4촌을 알아도 6촌은 거의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내 경우에만 해도 부모들이 살아계실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 후로는 4촌도 집안에 혼사나 있어야 겨우 얼굴 보고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우리의 민법에서는 친인척의 범위를 8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혼인으로 맺은), 그리고 배우자까지로 정해두고 있다. 각종 경제 법령에 적용하는 기준은 조금씩 다르다.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여 친족범위를 축소 조정해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하물며 친인척은 고사하고 가족들 간에 벌어지는 빈번한 사건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고약하게 치닫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임을 실감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가족은 다행히 건강하고, 힘겹지만 신통하게 지켜져 가고 있다. 하지만 서로 얼굴 쳐다보며 그 얼굴을 반찬삼아 눈빛으로 정을 나누고 풀잎 반찬을 먹든 옛 시절이 마냥 그립다.

세상읽기…할머니 만세

할머니 만세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기찻길 옆 모내기를 한 논에 하늘이 곱게 내려와 있다. 푸르름을 더해가는 여름 들판의 정경이 평화스럽게 다가온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아침이라 기분이 상쾌하다. 한낮에는 대지가 또 이글거릴지라도 간간이 뿌리는 비가 있어 한결 살 만한 요즘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구름 사이로 빗방울 그림이 떠 있어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릴까 싶어 우산을 챙겨 넣는다. 언젠가는 저 우산이 활짝 펼쳐져 소임을 다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며칠씩 이어질 심포지엄이라 호텔을 예약했다. 요즘엔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이 아무리 편리해졌다고 해도 꼭두새벽에 나가서 늦은 밤에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것은 힘에 부쳤다. 덜컥 병이라도 날까 봐 서울에 머무르며 연수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멀리 타국에 있는 아들이 방학을 맞아 잠시 집에 오고 싶다는 것이 아닌가. 새벽 공항에 내리게 된다는 아이의 문자를 받고 세미나장에 앉아 있으려니 마음은 자꾸만 콩밭으로 내달린다. 산란한 마음을 겨우 다잡아 일정을 끝내자마자 역으로 달려갔다. 어떤 기차든 남아 있다면 타고 내려가서 아이 얼굴이라도 먼저 한번 살펴보고 다시 올라와야지 싶었다. 마침 막 출발하려는 기차가 2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승강장으로 뛰어 내려가면서 손으로는 스마트폰으로 차표를 검색해 결재 버튼을 눌렀다. 간신히 기차에 발을 올렸다.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하지만, 순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파문이 가슴에 일었다. 엄마의 이런 마음을 설사 아이가 알아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뻐근한 가슴 뿌듯함은 나의 기억에 내내 남아 있을 터이니.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늘 순간이지 않던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때그때 표현하면서 살아야 후회가 없지 않겠는가. 늘 기쁘고 즐겁게, 뒤돌아보면서 후회할 일은 될 수 있으면 만들지 말고, 만나는 상대에게 작은 감사라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으랴.최근 칠십 대 박 할머니가 화제다. 정말 믿을 수 없도록,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사회 관계망 팬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이도 있으니 말이다.언젠가 읽은 아흔 살, 노마 할머니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죽음을 마주한 순간 암 투병 대신 여행을 선택한 노마 할머니는 여행을 통해서 진정한 ‘미스 노마’로 거듭났듯이 박막례 할머니는 손녀의 도움으로 세계여행을 떠나면서 삶이 달라졌다. 노마 할머니는 인생에 밀려오는 불행에서도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주체적인 의지, 소소한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가는 지혜, 죽는 순간까지도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가치를 세계인에게 전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독립심을 견지하며 늘 침실로 갈 때 했던 의식처럼 춤과 노래로 평온히 눈을 감지 않았던가. 긍정적인 힘과 용기만 있다면 불행한 순간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았던가.‘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라는 책 표지가 나의 눈길을 끈다. 나이 71세에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데뷔한 박막례 할머니 이야기였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막례’라는 이름을 받은 박막례 할머니의 인생사와 유튜브를 시작한 이후 100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를 모으고 유튜브와 구글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이야기도 펼쳐져 있다.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가슴 먹먹하여 울다가도 너무나 신나서 옆에 그들이 함께 있는 듯 손뼉 치며 웃기도 하다가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되었다. 카메라 뒤에서 할머니의 매력을 있는 대로 발산하게 만든 재간둥이 손녀의 이야기는 양념이다.나날이 나이 먹고 한 해 한 해 주름살이 늘어가더라도 박 할머니처럼 신나게 살아간다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만나게 되더라도 쓸쓸함 대신 만족감에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길었던 하지가 지났다. 한 해의 중반이 지나간다, 우리 삶도 나날이 익어간다. 우리네 인생살이, 최고의 마무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Korean Grandma’ 박막례 할머니의 열렬한 팬이 되어 신나는 하루를 맞이하는 지금, 스스로 나이 들어가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주변에 있는 이들을 더욱 사랑하고 위해줄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기를, 그리하여 한 번뿐인 인생의 하루를 거침없이 멋지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미주통신…미국발 르네상스 ‘거리 예술’

미국발 르네상스 ‘거리 예술’이성숙수필가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 예술)만큼 미국을 설명하기 좋은 예술 영역도 없다. 스트리트 아트의 원조는 원색의 그래피티, 거리의 낙서라고 할 수 있다. 음지문화였던 셈이다. 음지의 낙서가 예술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미국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낙서는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그려져 있다. 대부분의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 소음에 가깝다. 15, 16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이란 왕실과 귀족, 성직자의 전유물이었을 뿐 아니라 모름지기 고상한 정신 활동의 소산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 후 부르주아(중산층) 계층이 생겨나면서 개성이 가미된 그림이 소비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규격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집스런 중세미술의 눈에 거리 미술이 ‘예술’로 대접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거리 미술은 독백같은 형태를 띤다. 혼잣말의 생동감과 구체성, 그 무경계의 자유분방함이 펼쳐진다. 스트리트 아트는 1960년대 시작하여 80년대에 붐을 이루었다. 이 음지의 낙서에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회화적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고, 신흥 예술 장르로 발전한 것이다. 스트리트 아트에는 숭고함이 해체된 발랄함, 개인적 정서, 반항해도 좋은 미국적 유연함이 깊이 배어 있다. 이것들을 회의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 출생 배경 때문인지 스트리트 아트를 반달리즘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지만 작가가 살고 있는 도시나 시대를 가장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게 스트리트 아트이기도 하다. 역사가에게 그 시대를 기록할 의무가 있다면 예술가에게는 그들이 살아 있는 시대와 소통할 책무가 있다. 스트리트 아트는 아부나 비방이 아닌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예술의 소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관객의 상식을 파괴한 예술, 익명의 예술. 스트리트 아트는 익명성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고발성과 반항성이 농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화나 초상화, 잘 알려진 성지 등을 그렸던 이전의 미술이 왕실과 귀족에 봉사한 예술이었다면 스트리트 아트의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봉사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는 모방에서 기인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그들은 스스로 오리지널이 되어 스트리트 아트의 권위를 확장하고 있다. 미국의 토양이 이들을 자라게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스트리트 아트의 선구는 로스앤젤레스다. 시(City)는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벽을 제공하고 작가 정보와 작품을 직접 관리한다. 로스앤젤레스는 도시 전체에 수천 개의 벽화를 보유하고 있다. 다운타운에 있는 앤젤 시티 양조장 벽면을 중심으로 벽화가 펼쳐져 있다. 이 거대한 캔버스 앞을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지날 수는 없다.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다보면 ‘로스앤젤레스 심장(안티 걸 작품)’이나 ‘도시의 주름(JR 작품)’, 그 옆으로 펼쳐진 ‘나는 보톡스 중독자였다(트리스탄 이튼 작)’, ‘비누 거품을 부는 여인(킴 웨스트 작)’ 등 지역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는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옥션을 뒤흔든 뱅시((Banksy)의 작품도 이곳에서 만난다. 벽화 작품은 매달 바뀐다. 여기서 좀 떨어진 웨스트 8가, 메이시스 백화점 코너를 돌면 대형 천사의 날개가 그려져 있다. 날개 옆에는 ‘천사의 도시에 살고 있는 당신은 여신이다’라는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즐거운 상상은 덤이다.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들은 스트리트 기법을 작업실에서도 구현하여 전 세계 아트페어에서도 스트리트 아트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는 원색의 거친 터치로 강렬하게 그려진 캔버스 앞에 서면 그 자유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한다. 주제들이 현실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거기에는 해학과 풍자, 익살이 스며있다. 웃음이 나는 것이다.일주일 간격으로 두 곳 전시회에 다녀왔다. 먼저는 산타모니카 에어포트 아트 페어로 산타모니카 지역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하는 오픈 전시였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영국 사치 갤러리가 주목하는 작가 140인 전이 열리는 디 아더 아트 페어였다. 산타모니카 아트 페어는 물론이고 전 세계 작가가 한 데 모인 디 아더 아트페어에서도 스트리트 아트는 다양한 재료와 주제로 사람들 시선을 잡았다.미국은 역동적이다. 그들은 젊다. 미국에 살면서 이들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자신감에 넘쳐 있다. 노예제 폐지, 끝없는 서부로의 개척정신, 사회 전반에 두텁게 형성된 기부문화, 드라이브 스루, 스트리트 아트까지 미국발 르네상스가 확산하고 있다.호기심이 대접받는 나라. 아메리칸 드림이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진 말이 아니다. 여전히 미국은 꿈이 실현되는 땅이다. 인간의 도전과 창의력을 높이 사는 국가정신은 앞으로도 미국을 문명주도국으로 남게 할 것이다.

당직변호사

▲21일 이상은 ▲22일 이용호 ▲23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후손들에게

후손들에게/ B. 브레히트1.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중략)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중략) 2.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반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누워 잠을 자고 되는대로 사랑에 빠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중략) 3.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브레히트 선집 『나, 살아남았지』 (에프. 2018)................................................... 1898년생인 브레히트가 1939년 덴마크에 망명해 있을 때 쓴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하여 그때까지 계속 보완되고 수정, 조탁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전보다 더욱 넓고 깊어진 안목을 읽을 수 있다. 견디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싸움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 싸움에 자신을 내던지는 결연함이 있으며, 그 싸움의 끝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리라는 믿음이 버티고 있다. 시의 후반부는 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의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따라서 이 시는 그 시기에 쓰인 시라 하겠다. 그는 실제로 ‘구두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었다’ 1933년 망명길에 올라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덴마크에 정착하는 듯했다가 1940년 나치를 피해 핀란드로 피신했고, 이후 러시아를 거쳐서 미국 산타모니카에 정착한다. 1947년에는 매카시즘 열풍에 휘말려 반미행위조사위원회로부터 심문을 받은 뒤 프랑스로 향했다가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1948년에야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동베를린에 정착하는데 사회주의를 표방한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선택했다. 좌파 정치운동을 지지했던 만큼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동독 정부는 브레히트의 작품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음에도 그는 당국의 문화예술계에 대한 검열을 냉소하고 조롱했다. 브레히트는 독일민주공화국 체제와 더 나아가 소련 스탈린 체제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풍자했다. 어쨌든 그는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이 적어도 나치보다는 더 낫다고 여겼으며 독일연방공화국과 그 후원국들의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은 쇠잔함이 물씬 풍기지만 브레히트만큼 시대의 우울을 겪고서 우리에게 고뇌에 찬 진실의 언어를 말해주는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좀 생뚱맞지만 브레히트와 같은 해(1898년)에 태어난 조선의 김원봉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그의 상처투성이 역사는 누가 닦아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