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는 독립운동에서 처럼 육영사업에도 모든 재산을 털어넣었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는 최부자 고택이 있는 곳에 조성된 최부자아카데미에서 최부자 정신에 대한 내용을 체험형 교육으로 진행하고 있다. 경주시는 비단벌레전동차를 계림을 지나 교촌마을, 최부자 고택 앞으로 운행하면서 매번 최부자 정신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최부자집 창고 문서를 통해 밝혀진 내용 중 눈길을 사로잡는 많은 것 중 하나는 최부자의 11대 최현식, 12대 최준은 개인적인 사업가이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자 육영사업자로써 사회 교육자였다는 점이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최부자 7대 남강 최언경 선생은 남강서당을 열어 학문을 지도해 대과에 급제한 최벽을 비롯해 대소과에 급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며 “8대 이후에도 경산서당, 집안 사람들이 공부하는 수경당을 운영하며 육영사업에 힘써왔다”고 최부자의 교육에 대해 설명했다.경주최부자 12대 최준 선생이 월성초등학교 전신인 월성여학교를 1911년 설립해 개교하면서 오경주 선생에게 보낸 초청장. ▲월성여학교 설립최준 선생은 명치 44년(1911년)에 월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월성여학교를 설립해 개교한다는 초청장을 발송했다. 그해 5월5일자로 사립월성여학교설립자 최준이 오경수 선생 앞으로 5월7일 오전 10시에 개교식을 갖는다는 초청장이 깨끗하게 인쇄된 종이로 나왔다. 이 서류는 월성초등학교 연혁이 소개하는 개교년도를 16년이나 앞당긴 것으로 밝혀져 월성초등학교 연혁을 조정해야 할 판이다.한국산업은행경주지점장이 대구대학 최준 이사장 앞으로 대출금 상환을 독촉하는 독촉장 ▲대구대학교 설립독립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던 문파 최준 선생에 대한 기록들은 많이 알려지고 있지만 최부자집 창고에서 나온 서책들은 육영사업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활동에 비해 충분하지 않은 편이다. 최준 선생은 1908년 설립된 교남교육회에 가입하고, 대한협회 경주지회를 설립하면서 교육적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10년 경주에 간이학교를 설립해 학교 운영경비를 부담했다. 그는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30년 동경통지 편찬 주간으로 민족문화의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 1922년 김성수와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해 1921년 중앙학교의 이사로 재단운영에 참여했다. 또 1922년부터 보성학교를 후원하다가 1932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 참여해 기부금을 출연했다. 1920년에는 경주지역의 고적을 조사해 보존하고 전시하는 경주고적보존회 이사장을 맡았다. 최준이 최남선, 정인보 등의 편집자문을 받아 동경잡기를 수정 보완해 1930년부터 착수해 1933년 동경통지 14권 7책을 펴냈다. 이러한 활발한 문화운동을 전개하다 해방 이후 본격적인 교육운동에 전념했다. 1945년에 최준은 민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해 회장이 되었다. 이어 1947년 대구대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아 개교했다. 1955년 전재산을 들여 문파교육재단을 설립하고 경주에 계림학숙을 운영했다.대구대학교 이사장이 이사회를 소집하면서 발송한 소집 통지서.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전 재산을 올인했듯이 교육을 위한 사업에도 모든 재산을 털어 넣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창고에서 나온 문서에서는 교육적인 부분은 월성여학교 설립에 대한 근거, 대구대학교 이사회 초청장, 대구대학교 운영규정, 대구대학교 이사장 명함, 대구대학교 이사장 은행대출금 독촉장 정도에 그치고 있다.대구대학교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 문파 최준은 1970년 8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임재홍 교수는 ‘문파 최준의 민족대학 설립과 교육관’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대구대학교 설립자 최준은 현금 40만 원과 최씨 가문에서 300여년간 가보로 전수되어 온 희귀 고문서 7천200권을 내놓았다”면서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교육에 대한 열의를 소개했다.지난해 여름 최부자집 창고에서 여러 서류뭉치가 발견된 이후 최근 같은 창고의 궤짝에서대구대학교 이사장 최준 명함이 명함통과 함께 발견됐다. 전 경주향교 김기조 원장은 “최진립 장군의 후손이신 최준 선생은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공주감옥에서 옥살이까지 경험한 경주 최부자의 마지막 만석꾼”이라며 “모든 재산을 영남대학교에 희사함으로써 영원한 만석꾼으로 기억될 것”이라 회고했다. 최준의 손자 최염은 “할아버지는 평소부터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대구대학교 설립 이전에 대구에 종합대학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다”면서 “경북종합대학기성회 회장을 맡아 종합대학 설립에 앞장섰다”면서 교육적 열의를 설명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옥영정 연구원은 “문파 최준 선생이 8천968책을 대구대학교에 기증했다”면서 “이는 근검절약과 애민정신을 실천해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집안의 저인적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수원대학교 이원영 교수는 “대구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재정적 지원을 해오던 경주 최씨 가문의 최준이 중심이 되고 향교재단을 비롯한 식자층이 결합해 대학설립 운동을 벌인 결과”라며 “이땅의 사학문제를 근원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경주 최부자가 최남선, 정인보 등을 초청해 작성한 경주의 역사지 동경통지 원고. 최창호 이사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는 경주 최부자가 대대로 지켜온 나라를 위하고, 이웃과 함께 하고자 했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이라며 “창고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정확하게 번역해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할 것”이라 말했다. 이어 “최부자 정신이 널리 확산되어 함께 잘사는 윈윈하는 사회가 뿌리내리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밤이 아름다운 천 년 고도 경주에서 놀자

경주시가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야간 문화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야간 관광객 유치한다. 16일과 17일 경주교촌마을에서 진행하는 야간문화체험행사. 지난 7월 행사 장면.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역사문화도시 경주에 어둠이 내리면 낮과는 또 다른 매력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경주시가 야간문화체험행사, 첨성대 동부사적지와 동궁과 월지 등의 핫플레이스, 월정교, 봉황대 뮤직스퀘어, 경주보문단지의 호반과 물너울교 등의 경주만의 특별한 야간명소를 추천한다. 경주시가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야간 문화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야간 관광객 유치한다. 지난 7월 천년야행에서 사물놀이 장면. -경주 문화재 야행: 경주시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간 경주 교촌한옥마을에서 이색적인 야간문화체험 행사를 전개한다. 전통 한옥마을인 교촌마을에서 동궁과 월지에 이은 야간명소로 새롭게 복원된 월정교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상징인 경주 최부자댁, 신라 국학의 산실인 경주향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품은 야사를 탐방한다. 야로, 야설, 야화, 야경, 야숙, 야시, 야식 등 8야(夜)를 테마로 다채로운 야간문화 향유 프로그램을 참여자들의 체험행사로 진행한다. 무형문화재 풍류 마당을 비롯해 다채롭고 풍성한 골목 버스킹 ‘교촌 달빛을 노래하다’도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직접 만든 청사초롱을 들고 해설사와 함께 전설을 들으며 걷는 '교촌 달빛 스토리 답사'는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이외에도 가족과 함께하는 전통놀이, 골목 버스킹 공연, 십이지유등 소원지 달기 등 다양한 공연과 체험콘텐츠가 준비되어 있다. 경주시가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야간 문화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야간 관광객 유치한다. 경주 야경의 필수코스 동궁과 월지 야경. ◆경주 필수 야경코스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보지 않고는 경주 여행을 말할 수 없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쓰였다.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한 옛 신라인들의 뛰어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동궁과 월지는 어둠이 짙어질수록 누각과 연못, 숲이 불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자태를 드러낸다. 연못에 반사된 전각과 나무의 생생한 빛이 아련한 느낌을 불러온다. ◆왕릉과 조명의 조활 첨성대 동부사적지: 경주는 고대 왕들의 꿈이 묻혀 있는 고분의 도시다. 천년을 이어온 고대 신라의 흔적 위에 우뚝 서 있는 첨성대는 8색으로 변신하며 신비감을 더한다. 첨성대 일원 동부사적지는 4만8천㎡ 부지에 황금물결의 황화코스모스가 만개해 장관을 연출하고, 울긋불긋한 꽃 백일홍이 꽃물결의 파도를 감상하게 한다. 첨성대의 야경은 우아하고 고요하다. 고아한 곡선이 부각되며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야간 조명을 받은 황화코스모스와 백일홍 꽃 단지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절경이다. 경주시가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야간 문화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야간 관광객 유치한다. 월정교 야경. ◆천 년의 기하학적 미를 자랑하는 월정교: 첨성대 동부사적지 남쪽으로 아름다운 빛으로 물든 계림이 보이고 숲 속 커다란 나무 아래 산책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보면 교촌마을로 들어선다. 교촌마을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신라 교량 건축기술의 백미로 교각 자체도 멋스럽지만 양쪽 끝에 문루가 위엄 있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남천에 데칼코마니를 그리는 풍경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서려있는 월정교에 오르면 교촌 한옥마을의 풍경이 또 색다르게 다가온다. ◆고분 위의 이색무대 봉황대뮤직스퀘어와 프리마켓: 경주의 단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인 봉황대 일원은 최근 핫 플레이스 황리단길과 도심상가를 잇는 새로운 야간투어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 유일의 고분 콘서트인 ‘봉황대 뮤직스퀘어’가 매주 금요일 밤이면 다양한 장르의 수준 높은 공연으로 천년고도의 대표적 야외공연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이면 프리마켓 봉황장터가 열린다.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시장형 야간관광콘텐츠로, 황리단 길을 찾는 많은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경주시가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야간 문화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야간 관광객 유치한다. 보문호의 물너울교 야경. ◆경주 야경의 완성 보문호수와 물너울교: 보문관광단지 보문호수를 온전히 한 바퀴 돌아 볼 수 있는 호반길은 시민들의 운동코스로, 관광객들의 힐링코스로 인기 만점이다. 약 8km의 평탄한 호반길은 친환경 점토와 황토 소재로 포장되어 걷기로만 따지면 전국 최고다.경주시가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야간 문화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해 야간 관광객 유치한다. 경주보문관광단지 야경. 특히 밤이 되면 보문 호반길의 매력은 절정에 달한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멀리서도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무지개를 그리는 물너울교 풍경은 신비롭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만이 가진 역사성과 문화유산을 다양한 문화콘텐츠와 함께 밤이라는 이색적인 시간 속에서 새로운 야간문화를 만들어냈다”며 “문화의 향기를 통해 천년고도 경주의 아름다운 여름밤 매력을 만끽하시기 바란다”고 초청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24>- 문무왕 법민(상)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왜나라의 침략을 걱정해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해 바다 가운데 대왕암에 장사 지냈다. 경주 양북 앞바다 가운데 대왕암은 지금도 파도를 맞으며 굳건히 서 있다.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신라 제30대 왕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하였다.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된 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에게는 부왕이 미처 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668년 당나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의 군사들은 철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왕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경주 남산 통일전에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 문무왕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다.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터를 누볐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룬 후에 무기를 묻었다. 이어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노라며 바다에 묻혔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낀 진정한 성군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경주 남산 통일전 정원에 신라 삼국통일 주역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 3분의 사적비를 건립했다. 가운데가 문무왕의 사적비다.◆삼국유사: 문무왕 법민(1)총장 무진(668년)에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0년 2월에 당은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치게 했다.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하자,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당 고종이 문무왕의 동생인 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귀국하여 왕에게 알렸다. 문무왕이 당나라군사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호국사찰 사천왕사지. 동서 목탑지와 금당지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김천존의 추천으로 명랑법사에게 비법을 물었다. 명랑법사는 남산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개설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벌써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절 집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이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법을 썼다. 이에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다. 671에 당나라가 다시 5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나, 다시 문두루 비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사천왕사지 입구에 서 있는 당간지주.당시에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을 따라 감옥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랫동안 법석을 열었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 절을 살펴보게 했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 즉시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이라 하며 본국에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새 절에서 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 이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그 절을 망덕사라 했다.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하여 당나라 황제가 인문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고 강수를 통해 인문을 석방해달라는 글을 보냈다. 이에 황제가 감명을 받고 인문을 신라로 돌려보냈다. 경주 낭산에 문무왕을 화장한 곳으로 전해지는 탑지.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해인 6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보위하겠노라” 하니, 법사가 “용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찌 용이 되려 하십니까?”라 했다. 왕이 답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약에 추한 인연에 따라 축생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라던 바와 꼭 맞는 것이오”라 했다. 시호는 문무이며, 장지는 경북도 경주군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문무왕의 비편이 경주지역에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두루비법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되 천 년이 지나도 그 양은 변하지 않는다. 태양열에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얼음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니 모습은 바뀌어도 전체 질량은 그대로 인 것이다. 단지 겉모습이 변하여 사람들이 종종 오인하는 일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모든 무기를 모아 산 아래 묻었다. 그리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제 전쟁은 없으니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지어다.”군사들은 토함산 북쪽 계곡에 무기를 묻고 무장산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쟁은 그렇게 문무왕의 마음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당 고종이 설인귀를 앞세워 50만의 군사로 신라를 공격하러 배를 띄웠다. 마침 당나라에 수도 중이던 의상대사가 옥중에 갇힌 왕의 동생 김인문을 면회하러 갔다가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 신라의 궁궐에 위급한 정황을 알렸다. 사천왕사지 남쪽에 비석은 간데 없고 두 구의 귀부만 남아 있다. 문무대왕의 비편이 발견되어 두 귀부 중 하나는 문무왕비석의 귀부로 짐작된다. 서쪽의 귀부. 문무왕의 고민을 풀어줄 해법은 딱 하나였다. 세상에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은 하나씩만 존재한다. 급하여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움직이다 보면 예상 밖의 평지풍파를 맞게 된다. 용궁에서 도를 닦은 명랑대사가 사천왕사를 지어 불법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지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불법으로 백성들의 안녕을 지키고자 했다. 사천왕사지 남쪽에 비석은 간데 없고 두 구의 귀부만 남아 있다. 문무대왕의 비편이 발견되어 두 귀부 중 하나는 문무왕비석의 귀부로 짐작된다. 동쪽의 귀부.나라를 지킬 도량을 짓는 일은 신승 양지가 맡았다. 그러나 양지가 미처 서까래도 올리기 전에 적군들의 배가 신라의 경계를 넘어섰다. 명랑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가명승들에게 위급을 알리는 전서구를 날렸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열흘이면 모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명랑과 해괴망측한 모습을 한 승려들이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12방향에 세웠다. 명랑은 왕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열흘간 비단으로 지은 도량 근처에 사람이 드나들게 해서는 아니되옵니다”라며 유가명승들이 술법을 펼치는 곳의 경계를 당부했다. 왕은 특별히 김유신으로부터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무예를 익히고 있었다. 왕 또한 비술을 네 명의 제자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왕은 그 네 명의 비밀스런 검사들에게 비법이 진행되는 도량의 동서남북을 방위하게 했다. 명랑을 비롯한 12명의 고승들은 12방향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도 밥을 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가끔 진언을 외우는 소리가 외부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비단으로 지은 절은 안개에 휩싸여 누구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됐다. 싸우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때 동해안에는 난리가 났다. 먼 바다에서 집채만 한 파도가 일어났다가 뒤집어지고 하면서 당나라군사들의 배가 서로 부딪치고, 좌우 앞뒤로 흔들리면서 파손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배 위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당나라의 35만 병사 중에 살아 돌아간 이들은 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가 미리 낌새를 알아채고 재빨리 후퇴를 지시하면서 재빠르게 배를 돌린 병사들이다. 그 이후 설인귀는 스스로 북방장군으로 임명해줄 것을 촉탁해 신라 쪽으로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오래 살아남은 신책이었다. 사천왕사지를 발굴하면서 탑지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 발굴 100년 만에 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협력해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3구의 신장들이 탑 기단부에 돌아가면서 1면에 6구씩, 두 탑에 모두 48구의 신상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은 사천왕사를 완공하고 명랑법사를 주지로 임명해 백성을 위한 불법을 이어가도록 명했다. 김유신은 명랑법사가 시전하는 문두루비법을 눈여겨보았다. 나라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왕에게 건의하여 신라로 들어오는 관문에 호국사찰 원원사를 건축했다. 사천왕사와 원원사를 건축하고 당나라군사는 물론 왜국에서도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 사천왕사지를 발굴하면서 탑지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 발굴 100년 만에 경주박물관과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협력해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3구의 신장들이 탑 기단부에 돌아가면서 1면에 6구씩, 두 탑에 모두 48구의 신상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최부자 300년 12대 만석꾼 9대 진사 비결 문서로 드러나

1천600년대부터 12대 300여년간 만석꾼 부자로 9대 진사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 고택 입구와 마당. 존경받는 최부자의 비밀을 보기 위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은 1천600년대부터 12대 300년간 9대 진사를 배출하고, 만석꾼을 유지하면서도 지금까지 훌륭한 평판을 받는 가문으로 손꼽혀 귀감이 되고 있다. 막연하게 이야기로 떠돌던 300년 최부자 전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실천강령 6훈이다. 지금까지는 말로만 전해내려 왔던 6훈을 실천한 것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최부자집 창고에서 최근 대거 발견됐다. 부자의 사회적 책임,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최경주 최부자 고택 마당 사랑채 벽에 최부자와 교류했던 인사들의 엽서 등을 소개한 현수막.부자의 비밀이 문서로 고스란히 드러났다.최근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발견된 이웃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손님을 접대했던 내용을 기록한 문서들. 국내에서 최초로 집안의 과객도기가 발견됐다. 과객도기, 진급기, 식상기, 추수기, 과거 시험지 등의 회계장부격으로 집안의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문서들이 드러난 것은 전국에서도 처음이다. 역사를 실증하면서 300여년 전의 문화와 생활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등록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부자되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지만 최부자는 3백년 착한부자의 전설”이라는 말이 우연이 아닌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최부자집의 6훈은 공공연한 비밀로 일반에 모두 공개되고 있다. 생활이 어려운 이웃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던 기록 부내면 구휼성책. 경주 최부자집 후손들이 과거에 응시했던 시험지 묶음. 9대까지 진사 벼슬을 했던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창고에서 9대까지 과거에 응시했던 시험지가 나왔다. 최부자 9대 진사라는 이야기가 증명되었다. 시험지들은 합격과 낙방 가리지 않고 50여매가 발견됐다. 최부자집은 12대를 내려오는 동안 9대 진사를 지낸 내용이 문서로 입증되었지만, 진사 이상의 벼슬에 나아간 기록이 없다. 지나친 권력에 대한 욕심을 경계해 현실적인 삶을 유지해 왔다. 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진사 정도의 벼슬을 하면 양반으로서 사회적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높은 벼슬에 나아가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어 부와 권세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을 교훈으로 삼은 것 같다”고 말했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최부자집의 가훈을 실천한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할 사람들의 명단과 곡식을 나누어 준 장부 구휼성책. -재물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하지 말라: 마을별 수확한 내용을 기록한 추수기를 통해 만석꾼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소작료를 받은 내용을 기록한 책도 250여권과 농계부까지 더하면 500여책의 문서들이 나왔다. 300여년에 걸친 최부자집의 추수 내용을 기록한 추수기는 10권짜리 20묶음이 있다. 지세조정 기록은 흉년에는 지세를 내리고, 풍년에는 다시 조정하는 탄력적으로 공생하는 지세를 운영한 것으로 보아 소작농과 윈윈하는 상생의 이치를 실천한 덕목이 엿보인다.최부자집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접대한 내용, 김생원, 이생원 등으로 점심과 저녁을 접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과객도기.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부자댁에서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한꺼번에 200명 이상의 상을 차릴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 매일 점심과 저녁에 손님에게 상을 차린 내용을 기록한 ‘과객도기’ 성책이 무더기로 나왔다. 식상기에서는 하루 점심과 저녁을 구분해 이름은 빼고 성을 ‘김생원’, ‘이생원’ 등으로 기록해 점심에 58명, 저녁에는 250여명에게 대접한 내용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최부자집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접대한 내용, 김생원, 이생원 등으로 점심과 저녁을 접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과객도기.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나라에서 할 일을 개인이 실천한 내용이다. 창고에서 나온 ‘기구성책’과 ‘진급기’는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할 어려운 사람의 명부를 기록하고, 곡식을 배급한 내용을 낱낱이 적어두고 있다. 곡식을 지급하고 그 내용을 집계한 회계장부까지 근거로 남겼다. 최부자집의 구휼기는 기록뿐 아니라 굶주린 이들을 위해 음식과 곡식을 나눠 주었던 체험적 증거 ‘활인소’를 경주 내남에 재현해 두고 있다.경주 최부자집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점심, 저녁 구분해서 김생원, 이생원 등으로 표기하고 대접했던 내용들을 기록해 둔 서식. 또 ‘구멍뒤주’로 구휼한 방식은 6.25전란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곡식을 넣어둔 상자 윗부분에 작은 구멍을 뚫어 한 줌 정도만 가져갈 수 있도록 제작해 예닐곱개를 대문 앞에 두어 계속 쌀을 보충해 굶는 이웃이 없도록 했다. 최창호 이사는 “최부자집이 300년 만석꾼 부자로 내려오면서 이웃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지만 이를 증명하는 서류 뭉치를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꼈다”면서 “선조들의 나눔을 실천했던 상생경영은 많은 시간이 흘러도 빛을 발할 것”이라 말했다. 이어 “덕행을 증명하는 기록들을 전문학자들을 통해 정확하게 번역하고 해석해 사회를 밝게 하려했던 최부자집의 교훈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최부자집의 6훈(訓)은 앞서 6헌(憲)으로 불리며 집안 사람들이 반드시 법규처럼 지켜야할 가훈 이상의 의미를 가진 생활지침으로 대대로 교육되어 엄격하게 지켜져 내려왔다고 전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최부잣집, 삼엄한 일제 감시 속 독립자금 지원 기지 역할 했다

최부자의 왕성한 교류를 입증하는 4천여 통의 편지가 담긴 상자.(사진 오세윤 작가)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본사를 부산에 두고 서울, 원산에까지 지부를 둬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최부자집 창고의 서류들은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임시정부의 지원금 6할은 백산에서 나왔다”라는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북도 경찰책임자가 1919년 10월20일자로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가담해서는 안된다는 자제 경고문을 보내온 문서가 최부자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식산은행 부산지점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하기 위해 1922년 2월14일자 체결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설정된 부동산은 경주의 710건과 울산의 62건, 전답 66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3/4에 해당하는 규모다.(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백산무역주식회사(이하 백산)는 1919년 영남지역의 대지주들이 대거 출자해 당시 조선인의 자본으로 설립한 거대기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백산은 최준이 사장을 맡고, 안희제, 윤상은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임원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인사들로 백산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도 볼 수 있다. 백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경비를 조달하는 데 기여하면서 부실이 가속화 했다. 최준은 부친 최현식과 1921년 만석꾼의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35만 원을 대출받아 투입했지만 백산은 결국 1928년 130만 원의 부도를 내면서 파산했다.백산무역주식회사의 상당히 발전적인 현대식 대차대조표.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백산의 현대식 대차대조표와 영업보고서는 깨끗하게 남아 경제학계의 연구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백산의 운영 과정을 밝히는 대차대조표는 현대식으로 작성됐다. 1919년 11월6일 현재 합계잔액시산표를 보면 자산 131만9천 원에 불입자본금 25만 원, 부채 110만3천 원, 당기순손실이 3만4천 원으로 나타난다. 불입자본금 규모에 비해 부채와 손실이 크게 발생한 것은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세금이 실린 우편마차를 습격한 사건이 실린 매일신보. 최준이 박상진에게 정보를 제공해 거사가 진행됐다.일제가 경주, 영덕, 영일 일대에서 거둔 8천700원의 세금을 우편마차로 경주에서 대구로 수송하던 도중 1915년 12월24일 소태고개에서 탈취당한 사건이 매일신보에 실렸다. 대한평복회 재무부장 최준이 총사령 박상진에게 첩보를 제공해 지휘장 권영만, 우재룡이 거사했다. 자금 관리는 최준이 맡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제사건으로 남았다.박상진이 최준에게 자금 융통과 대구은행에 대출 상한가를 높여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독립운동 거점인 상덕태상회의 자금 회전을 위해 대한광복회 재무부장 최준에게 20편의 대구은행 어음 융통과 5천 원 한도 상향 조정을 부탁하는 편지다. 대구은행 발기인이자 대주주인 최준이 대구은행 지배인 윤정하 등에게 편지를 써서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경북도 일제 경찰책임자가 최준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하면 안된다는 자제를 요청하는 한편 경고하는 공문.일제 경찰책임자인 경상북도 제3부장이 1919년 10월20일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독립운동 자제를 촉구하는 자제 경고문을 보냈다.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은 불온한 유언비어이자 망상이라며 소요에 가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면서 임시정부 또는 과격단의 요구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았다.최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최준에게 건강을 염려하면서 보낸 편지. 수신주소가 감옥으로 나타나 있다.대한광복회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벌이는 한편 전국 부호들에게 의연금 모집 통고문을 발송했다. 긴장한 일제가 1918년 1월 충청도 지부원들을 시작으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원 검거에 나섰다. 재무부장 최준도 체포되어 공주헌병대에서 수사를 받은 뒤 공주 감옥에 수감됐다. 최준의 동생 최윤이 형을 면회한 뒤 1918년 6월13일 공주여관에서 감옥으로 부친 편지다. 옥고를 치르고 있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윤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형을 대신해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일본 외무성에 보관되고 있는 일제 밀정의 보고서. 최준이 현금 2만원을 들고 상하이에 입성했다는 내용.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지출금액이 6만 원 정도였다.중국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일제 밀정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동향, 3.1운동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에 쏟아진 국내외 동포들의 성원을 짐작하게 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되고 있는 보고서. 임시정부의 연간 총지출이 6만2천350원인 당시 최준이 현금 2만 원을 들고 동생 최완을 만나러 상하이에 나타났다.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독립자금 조성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최부자 일가가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내용을 입증하고 있다. 한편 창고에서 보관되고 있는 4천여 통의 편지글과 엽서, 명함들이 최부자의 인맥을 상상하게 한다. 최부자의 사랑채에는 독립운동가들 뿐 아니라 친일파들의 출입도 잦았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가 왕세자 때에 머물기도 했고, 의친왕과 덕혜옹주도 방문했다. 명사들의 사교장이었다. 일제가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경찰을 동원해 일상적인 감시를 펼치면서 항일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던 곳이다. 의병장 신돌석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장기간 최부자집 식객으로 은신했다. 대한광복회 우편마차 습격을 모의하고, 탈취한 세금을 은닉한 장소도 최부자집 사랑방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산실도 교촌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교촌으로 숨어들었고, 비밀리에 자금을 전달받았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최부자는 대를 이어 사회적 책무를 중하게 생각했다. 11대 최현식은 경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12대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맡아 전 재산을 담보로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최준의 둘째아우 최완은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으로 일했는데 일제에 체포됐다가 석방 직후 순국했다. 셋째 아우 최순은 백산무역의 상무를 맡아 독립자금 조달에 힘썼다.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에 암살당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몽과 대덕몽이 부른 이색 대한독립 만세,

경주몽과 대덕몽 시민단체가 15일 대전시청 앞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100개의 테이블을 설치하고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새로운 100년을 위한 대한독립 만세!” 시민사회단체가 주축이 돼 흰색 100개의 테이블을 설치하고 독립운동 100주년과 해방 74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경주 시민단체 경주몽과 대전의 대덕몽이 15일 대전시청 앞 보라매공원 소녀상 앞에서 나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선언하는 ‘새로운 독립의 아침, 백개의 테이블’이라는 이름으로 이색적인 광복절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행사장에는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흰색 테이블 100개를 설치하고, 참가자들은 하얀 옷을 입고 하얀 모자를 썼다. 200여 명의 하얀 옷을 입은 참석자들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참석자들은 “75년 전 8·15의 아침은 비록 일제의 그늘이었지만 그날도 싱그러운 초록의 여름이었을 것”이라며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타자의 그늘이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기념식을 갖는다”고 행사의 취지를 밝혔다. 경주몽과 대덕몽 시민단체가 15일 대전시청 앞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100개의 테이블을 설치하고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행사 준비는 오전 4시부터 시작됐다. 정토회와 대덕몽 회원들이 주먹밥 300인분을 만들었다. 흰 테이블 100개를 설치하고, 에스프레소는 야외카페를 설치해 참가자들에게 커피를 제공했다. 경주지역의 경주몽 회원들도 오전 4시30분 경주 황성공원에서 버스에 올라 대전 행사장으로 출발해 함께했다. 경주몽과 대덕몽 시민단체가 15일 대전시청 앞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100개의 테이블을 설치하고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독립의 아침을 위한 축배 들기, 독립의 아침을 위한 음악회,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 시낭송, 이난영 밴드 퓨전국악 공연은 나가거든, 아리랑, 마이웨이, 라쿰파르시타 등의 곡을 연주하며 무대를 달궜다. 오전 9시를 기해 ‘나의 새로운 자존적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을 기록하며 스스로의 독립을 외쳤다. 이를 기념해 “나로부터 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를 제창하면서 특별한 8·15행사를 마무리했다. 행사를 진행한 대덕몽 김은형 작가는 “관 주도의 행사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가 돼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어 행사를 기획하고 참여했다”고 말했다. 경주몽과 대덕몽 시민단체가 15일 대전시청 앞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100개의 테이블을 설치하고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경주몽 회원 임부돌 원장은 “요즘 일본의 경제적 압박이 수위를 높이고 있어 국민들이 스스로 독립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다”면서 “이러한 의미가 담긴 행사를 내년에는 경주에서도 기획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의 국채보상운동 조직적으로 전개된 민족운동

경주군 전역에서 일제히 단연운동으로 의연금을 마련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경주 이중구, 최현식이 주도하여 경주군금연회사 설립하고 밝힌 취지문.일본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갈등 양상이 식을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이런 가운데 발견된 경주 최부자집의 무더기 문서와 서책들은 경주가 국채보상운동은 물론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어 다른 어느 때보다 이목이 쏠리고 있다.본지는 경주지역민들과 최부자집이 우리 민족정신 말살에 항거하고 나라 독립을 위해 애쓴 흔적이 담긴 자료를 통해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재조명해 볼 예정이다.(편집자 주)경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단연회사를 설립하고 개인뿐 아니라 문중까지 참여해 조직적으로 전개된 민족운동인 것으로 확인됐다.이러한 경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최근까지 묻혀있었지만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문서가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재조명되고 있다.경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의 조직적인 확산과정을 밝히는 최부자집의 문서들은 민족정신을 확인하는 증거물이라는 평이다.최부자집 창고에서 발굴된 서책에서 경주지역의 참여자들의 명단과 의연금 기증 내역이 성책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국채보상운동의 전모가 밝혀졌다.경주지역에서는 이중구, 최현식이 공동대표를 맡아 금연회사를 설립하고, 금연회사 운영을 위한 경비는 경주지역 문중들이 나누어 부담했다.모금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어 경주군민 5천여 명이 참여해 3천250원이 모였다.경주군 전역에서 일제히 단연운동으로 의연금을 마련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경주 66개 문중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경비를 나누어 부담하기로 하고 문중별 부담 금액을 표기한 문서.경주군금연회사는 조직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었다.우리나라 외채가 1천300만 원에 이르러 지금 값지 않으면 장차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이라며 땅이 없어지면 국가의 수치와 백성의 치욕이 닥칠 것이므로 담배를 끊어 빚을 갚는 일에 동참하자고 취지문으로 호소했다.또 회사는 향교에 설립하고, 근무자와 출입하는 대소인원들도 금연할 것, 재무와 서기 두명은 본사에서 지공하고, 회장과 재무, 서기는 본사에 머물며 수납하고 영수증을 발행할 것, 모금에 반대하여 일을 그르치는 사람은 신문에 광고할 것, 의연금은 절대 함부로 쓰지 말 것 등의 회사규칙을 두었다.경주군 전역에서 일제히 단연운동으로 의연금을 마련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국민들이 하나로 뭉쳐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자 일제가 방해공작을 전개했다. 경주군일진회장이 경주군금연회 최현식 회장에게 보내는 방해 문서.의연금은 영수증을 발행하고, 면별로 의연금을 납부한 내역을 이름과 금액까지 정확하게 기록해 성책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김지욱 전문위원은 “경주에서 발굴된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세밀하게 작성된 문서로 문화재급”이라며 “번역과 조사를 통해 중요한 의미를 파악하고 학술세미나 등으로 뜻을 알리면 좋겠다”고 말했다.이어 “경주에서 발굴된 자료는 완벽한 상태로 드러났으며 인명록이 작성된 성책은 귀중한 자료”라며 “최부자측과 협의해 전시회, 세미나, 박물관 이관, 기념비 건립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도 “아직 자료를 번역하고 자료집을 만드는 과정”이라며 “도록형태의 자료집을 완성하고, 세미나, 전시회 등의 사업을 기념사업회 등과 협의해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최 이사는 “자료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과 자료집으로 만들어 문화재 지정 신청 등의 절차를 밟을 것”이라 전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시, 전기차 e-모빌리티산업 본격화

경주시 건천산업단지에 중국장쑤젠캉자동차유한공사가 경주 에디슨모터스(주)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올해부터 1t 전기트럭 800대를 생산한다. 경주시가 전기차 생산과 조립을 주로 하는 e-모빌리티산업에 탄력을 받는다. 경주시는 중국 장쑤젠캉자동차유한공사와 에디슨모터스가 최근 합자투자 계약을 맺어 검단일반산업단지에 구축할 e-모빌리티산업이 본격 추진된다고 밝혔다. 장쑤젠캉자동차유한공사 등은 향후 5년간 총 6천만 달러를 합영기업인 경주 에디슨건강기차에 투자해 전기차(1t트럭, 버스, SUV) 및 배터리팩을 생산, 조립할 예정이다. 2021년 검단산업단지 입주에 앞서 양사는 올해 건천산업단지 내 선행투자를 통해 1t전기트럭 800대를 생산할 계획이다. 건천산단의 사업으로 신규 일자리 100여 개의 창출이 기대된다. 향후 생산품목을 확대해 최소 300명 이상의 신규 고용 일자리도 늘린다. 이에 앞서 경북도, 경주시, 에디슨모터스(주), 중국 장쑤젠캉자동차유한공사는 지난 3월에 ‘전기자동차 제조공장 설립을 위한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에디슨모터스는 2010년부터 1천300대 규모의 전기버스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서울, 제주도 등 지자체에 250여 대를 납품하고 있다. 또 장쑤젠캉자동차는 중국 궈쉬안그룹의 계열사로 장쑤성에서 5천대의 전기버스를 비롯한 e-모빌리티를 전문 생산하는 우량기업이다. 경주시는 이번 합자투자 계약을 통해 1t전기트럭의 1만 대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국내 물류 관련 기업 및 개인 사업자에게 공급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주낙영 시장은 “e-모빌리티산업 발전은 첨단산업과 역사, 전통이 어우러진 30만 경제문화도시로의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경주에 본격 투자를 결정한 장쑤젠캉자동차와 에디슨모터스에 감사한다”고 밝혔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박인비와 월드클래스 대한민국 여자 프로 골프선수 열전 벌인다

경주에서 11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 3일간 한국 여자프로골프선수 국내외파 26명이 열전을 펼친다. 사진은 지난해 대회 출전에 앞서 기념촬영하는 선수들.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의 여자프로골프선수들이 경주에서 ‘챔피언’을 가린다.경주시는 13일 대외협력실에서 오렌지라이프 챔피언스트로피 박인비인비테이셔널 개최도시 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협약식에는 경주시 이영석 부시장, 브라노앤뉴 장상진 대표, 박인비 프로가 참석해 오는 11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 진행되는 박인비인비테이셔널 골프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상호 노력하기로 협약했다.이번 대회는 세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한국여자프로골프 국내파와 해외파 선수들 간의 자존심을 건 대항전으로 총 26명의 선수들이 참가하면서 한국여자골프의 수준 높은 플레이를 감상할 수 있다. 대회는 2015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다.2017년부터 박인비 프로의 요청으로 경주에서 개최되고 있다. 대회기간동안 2만여 명의 갤러리가 운집할 만큼 인기가 많은 대회다. 세계정상급 여자 프로선수들의 수준 높은 플레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많은 갤러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또 MBC, 케이블TV, 골프전문방송에서 생중계하며 경주의 주요 문화재, 사적지 등을 선수들이 사전 방문해 스포츠 도시 경주를 둘러보는 장면을 촬영해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홍보할 예정이다.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시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우수한 골프장이 많이 운영되고 있어 골프인구 저변확대에 더없이 좋은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며 “역사문화관광스포츠도시 경주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리며 소중한 추억을 만들기 바란다”고 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국채보상운동 역사 최부자집 창고 서류더미에서 드러나

국채보상운동 참가를 비롯한 경주 독립운동의 모든 역사가 최부자집 창고에서 나온 서류더미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그동안 말로만 떠돌던 경주 최부자집의 일제 민족말살정책 정면 항거가 이번에 쏟아져 나온 항일운동 증명 문서들로 확실한 역사로 재탄생될 전망이다.최부자집에서 나온 문서더미에는 최부자집과 교류했던 인사들의 서신, 명함이 다수 발견 됐다. 특히 국채보상운동과 백산무역주식회사에 관련한 회계장부까지 무더기로 발견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할 수 있게 했다.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최부자집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내용을 기록한 책. -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 일제는 1904년 고문정치에 이어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해 1907년 1천30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의 외채를 짊어지게 했다.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최부자집과 교류했던 인사들이 보내온 서신들. -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 당시 국민들은 국채를 상환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기록은 1907년 1월29일 서상돈 선생이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국채 1천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한 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이 시작되고 5월까지 4만여명이 참여해 230만 원의 의연금이 모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유학중인 800여명의 유학생들까지 동참하게 됐다. 이렇게 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극력 탄압하기 시작했고,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 일진회가 공공연히 방해운동을 벌였다.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면서 군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광고.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경주지역의 김시권, 손규주 등이 2월5일에 일제히 모이자면서 국채보상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1907년 1월에 알린 광고. 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 최부자집 창고 서류더미에는 1907년 정월 김시권, 손규주 등이 경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면서 2월5일에 일제히 모이자고 제안하는 광고문이 들어 있었다. 광고문은 국채 1천300만 원의 상환에 사직의 존망이 걸려 있으니 당연히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경주 최현식이 의연금 100원을 보내면서 국채보환단연동맹회의에 참가하지 못함을 이해를 구하는 글. 특히 1907년 정월22일에 경주 최현식이 단연금 100원을 보내면서 국채보환단연동맹회의 에 참여하지 못한데 양해를 구하는 서신이 나와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 1월에 이미 시작됐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 경주지역에서 5천명이 넘는 인사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개인별 의연금 기탁금액과 이름을 기록하고 있어 경주지역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경주지역은 경주 최씨 11대 최현식이 회장을 맡아 운동을 주도했다. 일제가 조선인 부호들의 재산관리규정을 둬 서울의 이봉래, 진주 김기태, 경주 최준 3인을 지정해 일본인 관리인을 두고, 재산 처분은 관청의 허가를 득해야 한다고 제한했다.이 때문에 최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여의도 면적의 3/4에 이르는 전재산을 일본의 식산은행에 담보로 근저당설정을 하고 35만 원을 빌려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했다.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경주군 일진회장이 최현식에게 의연금 납부자 명단과 금액을 신문에 게재하라고 독촉하는 글. 최부자집의 문서들은 독립운동가 남형우, 박상진, 박열, 김응섭, 김지섭 등을 지원하는 한편 기미육영회 설립, 계림대학 설립, 월성초등학교의 전신인 월성여학교를 설립해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한 회계보고서와 대차대조표 등은 당시에도 상당히 진보된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했던 것으로 드러나 연구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수만건의 문화재급 서류더미가 발견됐다. 매년 소작료 등의 추수 상황을 기록한 250여 권이 발견됐다. -사진 제공 오세윤 작가. 최부자집 창고의 문서들은 육영사업, 독립운동 지원에 이어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목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진사 시험에 응시한 과거시험지 60여매, 매일 과객을 접대한 서류는 하루 점심 67명, 저녁 250명 등으로 이름은 무시하고 성만 기록한 김생원 등으로 일일이 표기하며 집계한 서류가 남아 있다. 경주최부자 최창호 이사는 “우리 국민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로 뭉치는 습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담배를 끊어 의연금을 모아 나라 부채를 상환했던 정신을 창고의 먼지 속에 묻혀있던 서류더미에서 발견하고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우리가 처한 여러 가지 어려움도 국민들은 슬기롭게 헤쳐나갈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였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국채보상운동 출발시기 알려진 것보다 더 빨랐다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가 문서가 출토된 궤짝을 열어보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출발 시기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빨랐던 것으로 보여지는 서책과 경주 최부자집이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독립운동자금 지원에 깊숙히 관련된 각종 문서 등이 대거 발견됐다.일본 수출규제로 인한 한일갈등과 74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문화재급 역사적인 자료 수만 건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이하 최부자선양회)는 1972년 최부자집 사랑채에 불이 나자 긴급히 옮겨 두었던 자료들을 창고에서 발견, 중요 문서로 확인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한문학과 교수 등에 의뢰해 번역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부자집 창고에서 나온 서책들은 국채보상운동,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 독립운동 과정 등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서책들로 보물급이라는 분석이다. 이 문서들은 하나 같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스란히 증명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를 새로 고쳐쓰게 할 내용들도 있어 충격적이다.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최부자집. 특히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돼 지금까지는 대구의 서상돈 선생이 1907년 1월29일 운동을 발의한 것이 정설로 돼 있었다.하지만 경주의 이 자료에는 1907년 1월22일자 의연금 영수증과 대구본부로 보고한 문서가 있어 국채보상운동의 시작 시기를 조정하게 한다. 자료에는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5천86명의 이름과 기탁금액까지 기록하고 있어 경주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던 것을 설명한다. 또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 자료와 최부자집의 전 재산을 담보로 35만 원을 일본 식산은행에 차용하는 근저당설정계약서 문서가 깨끗한 활자로 남아있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고 증명하는 편지와 엽서, 일본 정부의 내부 보고서 등의 서류들도 함께 발견됐다.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최부자집 전재산을 담보로 일본의 식산은행에 독립자금 35만 원을 융자받기 위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독립운동가 박상진,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지섭, 조선 최고 문장가 김매순, 실학가 서유구 등의 편지를 통해 최부자집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최부자집이 동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목 6훈을 이해하게 하는 기록들도 대거 발견됐다.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시대 과거 시험지, 과객을 후하게 접대하라는 ‘과객도기’ 기록,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을 없게 하라를 실천한 ‘구휼기’와 ‘기구성책’은 어려운 사람들의 명단과 곡식을 지급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 창고에서 일제강점기 전후의 보물급 문서 수만건이 쏟아져 나왔다. 최준과 최현식이 공동으로 백산주식회사 대표로 식산은행과의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마지막장.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 김동리의 형 김범부, 안동의 권오설 등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장학지원 자료, 만석꾼 집안의 200년에 이르는 추수기를 기록한 250권의 서책, 조선시대 판서, 총리 등의 인물들과 교류한 흔적이 나타나는 1910년 전후의 편지 4천여 통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들도 다양하다. 최부자집에서 1911년에 월성초등학교를 설립했다는 문서는 현재 192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학교 설립역사를 고치게 한다. 경남일보 창간호,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 기록 신문(만세보 1910년 2월16일자), 오세창의 민족신문 대한민보에 실린 최초의 신문삽화 등의 희귀한 자료들도 많다. 사단법인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말로만 듣던 선조들의 행적들이 깨알같이 선명한 인쇄체로 남아있는 자료들을 대하니 가슴이 먹먹하다”면서 “이해할 수 있게 번역작업을 서둘러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있는 교육적 자료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일간신문 지상에는 보도된 적은 없다”면서 “귀중한 자료를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우선 보관을 의뢰하고, 번역에 따라 차츰 문화재 등록 절차 등을 밟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최부자집 창고에서 발견된 서책을 국채보상운동, 백산무역주식회사, 최부자집의 6훈, 일제강점기 기록들 등의 특집 4회로 연재하면서 소개할 예정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23 >-태종 춘추공(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문무왕 등 신라 삼국통일 주역을 모신 통일전 앞에 화랑들의 정신을 추념하기 위한 화랑지에 화랑정을 지었다. 화랑지에는 연꽃이 피고, 잉어들이 떼지어 다니는 모습이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여 장관이다. 태종 무열왕은 신라에서 여러 가지 기록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성골이 아닌 진골로서 최초의 신라왕이 되었다. 죽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신라왕릉 중에서 귀부가 있는 비석이 최초로 나타난 왕릉이기도 하다. 비석의 몸돌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은 귀부와 이수는 최고의 예술적인 가치를 자랑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힘을 얻어 결국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18년 만에 그의 딸과 사위에 대한 원한을 갚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는 누구보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사리가 깊었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눈도 밝아 전쟁에 대한 전술전략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김춘추는 51세에 왕위에 올라 백제 의자왕의 무릎을 꿇리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김유신과의 이중적 혈연관계를 맺기도 했다.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 당나라를 방문해 군사를 빌려줄 것을 간청하며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그중 당나라 복식을 신라조정에 도입할 것을 약속하고 입은 당시의 모습. 당나라와의 협력관계 유지를 위해 둘째 아들 인문을 당나라 황실 내부 깊숙하게 심어두었다. 김인문은 당의 정보를 신라에 전달하는 한편, 당나라가 신라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도록 상당한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는 태종 춘추공에 대한 기록을 길게 늘여 소개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단락을 나누어 간략하게 줄여 소개한다.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3)당나라 고종은 백제가 멸망 이후에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전쟁을 일삼자 문무왕 5년 665년에 장군 유인원을 보내 신라와 백제가 서로 형제의 의를 맺어 화친하고, 영원히 당나라에 복종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668년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신라에 군수물자를 요청했다. 문무왕이 적군 진영 깊숙이 있는 당나라 군사에게 누가 수송의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김유신 장군이 나서 군량 2만 섬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박물관 전경.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고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강물이 있다.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최후를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을 할 지언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지는 않겠다”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백화정 정자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의 풍경.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쳐서 평정하고 또 신라를 칠 계획으로 머물고 있었다. 유신이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에게 짐이라는 독약을 먹여 모조리 죽여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가 있다. 이곳이 그들을 묻은 땅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가 멸망한 곳에 위치해 있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후,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백제의 남은 적을 추격하여 잡게 했다. 군사가 주둔한 한산성에 고구려와 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해서 마주 싸웠으나 포위를 풀지 못하더니 5월11일부터 6월22일 사이에 신라군사들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묻기를 “어떻게 할 계책이 없을까?” 하고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형세가 급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신의 술법으로만 구할 수가 있습니다”라 했다. 이에 성부산에 제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빌었더니, 갑자기 큰 항아리 만한 불빛이 번쩍거리며 제단 위로 나와 즉시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백제가 무열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위기에 처하자 삼천궁녀들이 스스로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죽음을 택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정자 백화정.적들이 공격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번쩍번쩍하는 불빛이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포 30여 곳을 때려 부수었다. 적군의 활과 화살 그리고 창칼들은 주판알이 흩어지듯 산산이 부서지고 병사들은 모두 땅에 쓰러졌다. 태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니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 개나 되는 멧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해석하는 사람이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 할 좋은 징조입니다”라 했다. 태종 무열왕 때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과 아홀을 쓰게 되었다. 바로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지고 와서 전한 것이다. 백마강이 흐르는 언덕에 삼천궁녀들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뛰어 내렸다 하여 ‘낙화암’이라 바위이름을 짓고, 정자 이름을 ‘백화정’이라 부른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짐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천하를 통일하셨다. 그래서 태종 황제로 하였는 데 너희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하여 천자의 이름을 범한 것은 불충하니 빨리 호칭을 고칠 것이다”라 했다.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당나라로 들어가 고종황제에게 군사를 빌려 앞장군이 되어 백제를 치는데 성공했다. 그는 끝내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후에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시신을 가져와 장례를 치렀다. 김인문의 비석 일부가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신라왕이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거룩한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태종으로 한 것이오”라 했다. 당나라 황제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33천의 한 분이 신라에 내려와 유신이 되었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꺼내다 보고 놀랍고 두려워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이라는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춘추의 권력 이양김춘추는 선덕여왕 당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왕권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진해지면서 서서히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해 치밀한 작전을 빠르게 세우기 시작했다.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결혼으로 두터운 관계를 형성하고,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죽어서도 가까운 거리에 무덤을 두고 있다. 김유신을 앞세워 대신들을 지지 세력으로 우회시켰다. 김유신 옆에는 자신의 큰 아들 법민을 밀착시켜 감시하면서 친위세력으로 항상 가까이 두었다. 반면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구도를 짜 맞추었다. 삼진덕여왕 당시 상대등이자 완력으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알평을 고립시키고, 김유신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지지층을 두텁게 만들어 진골 출신이지만 왕위에 오르는 일을 착착 순조롭게 진행했다.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지만 두 가지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첫 번째가 딸과 사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는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의 힘을 업고 백제 의자왕을 무릎 꿇게 하고, 윤충의 목을 베어 복수를 이룬 춘추는 하늘을 보며 다시 한 번 포효했다. 경주 남산자락 통일전 앞의 화랑지.두 번째는 절대적인 우방이자 절친인 최고의 무신 김유신을 왕좌에 대한 욕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한편,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두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미리 간택하고, 처남인 김유신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이중적인 혈연관계로 두텁게 옭아맸다. 김춘추의 머리는 촘촘한 전략으로 짜여진 그물 같다. 그는 김유신이 처음 백제와의 전투에서 돌아와 좌절에 울부짖으며 단석산으로 들어가 수련에 몰두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이어 김유신이 보검을 차고, 한층 깊어진 눈으로 돌아왔을 때 절대 그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는 김유신의 경지가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를 낼 수조차 없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짐작했다. 이어 유신과의 친분을 두텁게 쌓으면서 서둘러 그의 누이와 결혼해 확실한 우방으로의 관계를 맺었다. 춘추는 집요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아내와 아들을 수시로 유신의 집으로 보내 교류를 두텁게 쌓았다. 특히 아들이 걸음걸이가 자유로워질 무렵부터 유신에게 사정하여 사제지간의 정을 맺도록 했다. 춘추의 아들 법민은 외삼촌 김유신으로부터 검술과 전쟁의 기술을 오롯이 물려받은 장수로 성장했다. 김유신 또한 전쟁터에서 적군 깊숙이 들어가 적진을 혼란스럽게 휘저을 때는 뒤를 받쳐줄 실력 있는 우군이 필요했다. 법민은 빠르게 무술을 배워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을 따라 전쟁터에 나섰다. 법민은 뛰어난 자질을 가진데다 유신의 신적인 기술의 지도와 실전에서 익히는 검법으로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고구려와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법민이 앞장을 서고, 유신이 뒤를 호위하는 무사가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법민은 전쟁을 끝내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문무왕 법민은 칠순에 이른 외삼촌이자 무술의 스승인 김유신을 전쟁의 선봉에 세울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경주 서악동에 위치한 무열왕릉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김춘추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김유신의 신력을 가진 태산 같은 마음도 아들 같은 애제자이자 조카 법민, 즉 문무왕을 꺾고 왕위에 올라야겠다는 욕심은 애초부터 티끌만큼도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등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아오는 김유신과 아들 법민의 손을 꽉 잡고 신라를 부탁하면서 이순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김유신은 수염이 희끗희끗한 턱이 떨리지 않게 어금니를 깨물면서 법민을 도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룩하겠노라 다짐하며 무열왕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시정 방향 정하는 원탁회의에 앉을 시민 모십니다

경주시가 주요 시정방향을 결정하는데 시민원탁회의 방식을 도입한다. 10월1일 원탁회의 참가자 200명을 모집한다는 포스터.경주시가 주낙영 시장 공약사업으로 추진하는 첫 시민원탁회의에 참가할 시민들을 공개 모집한다. 경주시는 10월1일 개최하는 ‘경주시민원탁회의’ 주제를 ‘문무대왕릉 관광지 활성화 방안’으로 결정하고 참가자 200명을 모집한다. 경주 시민원탁회의는 민선 7기 주요공약사업으로 주요 시정방향을 시민들과 소통을 통해 결정하겠다는 약속이다. 시민원탁회의는 시정 주요현안에 대해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를 만들어 가기 위한 소통의 일환이다. 첫 시민원탁회의는 10월1일 오후 2시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시민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무대왕릉 관광지 활성화 방안’이라는 의제로 토론을 펼칠 예정이다. 경주시는 시민원탁회의에서 토론할 첫 의제를 시민들이 직접 선정하도록 지난 7일 ‘시민원탁회의 준비를 위한 열린 토론회’를 개최했다. 1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해 열띤 토론과 투표를 거쳐 의제를 선정했다. 의제에 따른 세부 토론 주제는 9월중 시민들을 대상으로 사전 설문조사를 거쳐 선정할 계획이다. 시민원탁회의는 경주시민이라면 누구나 참가신청 할 수 있다. 이달 19일부터 다음달 20일까지 경주시홈페이지, 방문, 우편, 팩스, 이메일을 통해 신청하면 된다. 시민원탁회의시 테이블에서 토론을 원활하게 진행할 퍼실리테이터 40명을 이달 26일까지 선착순 모집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시의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시민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며 “시민원탁회의에서 나온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실질적인 정책을 발굴하고 이를 통해 행복한 경주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시민원탁회의와 관련해 궁금한 사항은 경주시청 시민소통협력관 시민소통팀(054-760-2602)으로 문의하면 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신라문화제 주인공이 될 참가자 공개 모집

경주시가 10월3일부터 9일까지 7일간 일정으로 추진하는 신라문화제에 참가할 시민들을 공개 모집한다. K-POP댄스팀, 시가지 행진 퍼포먼스팀, 먹거리 체험부스 운영팀 등 3개 부문으로 모집한다. 사진은 모집 포스터. 경주시가 ‘천 년 왕국 신라의 힘찬 부활을 꿈꾸는 제47회 신라문화제 빅3 공모사업에 참가해 끼와 재능을 맘껏 발산할 시민을 공개 모집한다. 경주시가 주최하고 신라문화선양회와 한국예총경주지회가 주관하는 ‘제47회 신라문화제’가 ‘신라 화랑에게 풍류의 길을 묻다’를 주제로 10월3일부터 9일까지 황성공원과 경주시가지 일원에서 열린다. 경주시는 올해 개최하는 신라문화제를 대한민국 최고 명품축제로 만든다는 방침으로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참여해 만들고 즐길 수 있는 ‘빅3 공모사업’을 추진한다. ‘빅3 공모사업’은 K-POP 댄스팀, 시가지 퍼레이드 코스프레, 먹거리 체험부스 운영팀 등 3개 부문으로 나누어 모집한다. 신라 화랑의 멋과 흥을 표현할 수 있는 K-POP을 테마로 시민과 관광객이 직접 참여해 함께 즐길 수 있는 경연프로그램인 Silla K-POP Cover Dance Fest 참가자를 이달 18일까지 공모한다. 참가대상은 지역, 나이, 국적 등에 제한 없이 K-POP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코스프레 퍼레이드 참가자도 다음달 15일까지 공개 모집한다. 봉황대에서 황성공원까지 이어지는 진흥왕 행차와 함께 펼쳐질 코스프레 퍼레이드는 대회부와 일반부로 구분해 모집한다. 시민과 함께하는 시끌벅적 난장파티, 선호하는 캐릭터 분장, 상징 조형물을 활용한 퍼포먼스 등 개성 있는 아이디어를 담아 도전하면 된다. 신라문화제 행사장의 저잣거리에 들어설 먹거리 및 체험부스 50개동 운영자도 이달 중 공개 모집한다. 저잣거리 부스는 한국수력원자력이 후원하며 경주시 소재 사업자, 사회적 기업, 비영리민간단체 등 지역주민에게 우선권을 제공할 예정이다. 신라문화제 빅3 공모사업에 대한 자세한 모집요강 및 접수방법은 경주시와 신라문화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앞으로 신라문화제는 일회성으로 그치는 행사가 아닌 시민과 기업이 만들고 관광객이 즐겨 찾는 종합적인 전통예술제로 위상을 높이고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도시 경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축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