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다중집합시설 화재, 언제 벗어날 수 있나

대구에서 또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허술한 다중이용시설 화재 관리가 문제로 밝혀졌다. 언제까지 후진국형 안전사고 발생에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참 기가 막힌다.지난 19일 대구 중구 대보상가 사우나에서 발생한 화재로 3명이 숨지고 88명이 다쳤다. 불은 이내 진압됐지만 피해가 컸다. 주거복합 건물이다 보니 연기를 흡입한 피해자가 많았다.불이 난 건물은 지은 지 40년 된 대형 노후 건물이다. 소방시설 점검 때마다 시설 노후화로 인해 결함이 지적됐다. 매년 두 차례 이상 받는 소방 점검에서 다수의 항목에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화재감지기 불량과 고장이 잦은 소방시설 등 화재에 치명적일 수 있는 문제가 매년 적발됐는데도 개선되지 않았다.또 상당수 지적 사항은 땜질식 보완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건물에 거주하지 않는 건물주가 많은 데다 건물관리도 세입자가 떠맡다 보니 소방시설 관리는 아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불이 처음 발생한 사우나에는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7층 건물 중 1~3층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6층 이상 건물의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했지만, 노후건물은 제외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초기 진화에 실패했고 피해가 커졌다.화재 발생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민도 있고 화재 발생 한참 뒤에야 경보기가 울렸다는 증언도 나왔다. 부상자의 상당수가 경보기 소리를 듣지 못해 피해가 커진 셈이다.화재 발생시간이 오전 7시11분으로 다수의 주민이 잠에서 깨어났을 시간이다. 비상벨만 제대로 가동됐어도 쉽게 피신할 수 있었다.미로 같은 건물 구조도 피해를 키웠다. 연기 속에 대피로 찾기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소방당국은 앞으로 미로 건물의 경우 비상구 및 대피로 확보에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이다.노후 건물은 아무리 수리 및 점검을 받아도 또 고장 나기 십상이다.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소유주가 많은 집합건물은 쉽지 않다. 게다가 취약계층이 많은 곳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이런 안전 무방비 상태의 노후 다중이용시설은 지자체가 소방시설 설치를 지원하는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화재 등에 허술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불법 고시텔 등도 시한폭탄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무색게 하는 후진국형 사고를 언제까지 안고 가야 할지 답답하다. 정부는 말로만 안전사고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대형화재 등 사고 발생에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오순택 동일분화장학재단 이사장 장학금 전달

오순택 (재)동일문화장학재단 이사장은 18일 ‘2019년도 학술연구 조성비 및 장학금 전달식’을 했다. 이날 대구·경북 20개 대학의 교수 및 학생에게 2억5천만 원을 지원했다. 동일재단은 1988년 설립돼 지금까지 53억8천만 원을 장학금 등으로 지원했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한국당 대표경선, TK 전략적 선택해야

자유한국당의 새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코앞에 닥쳤다. 오는 27일 열리는 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도전하는 당권 주자들이 18일 대구를 찾았다.황교안 전 국무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진태 국회의원(기호순) 등 당 대표 후보와 최고위원 후보들은 이날 대구·경북(TK) 합동연설회를 가졌다.TK 지역은 이번 전당대회의 최대 승부처다.현재 판세는 황 후보의 우세 속에 오 후보가 추격하는 모양새다. 거기에 ‘5·18 폄훼’ 논란의 중심에선 김 후보가 뒤를 쫓는 형국이다. 최근 변수가 생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 이후 위세를 떨치는 ‘태극기 부대’ 8천 명이 한국당에 집단 입당한 것이다. 태극기 부대는 김 후보를 민다.전당대회를 앞두고 대구·경북에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투표는 책임당원과 일반당원 등 선거인단 투표(70%)와 국민 여론조사(30%)로 진행된다. 책임당원 32만여 명 중 30%를 차지하는 대구·경북이 선거 판세를 좌우한다. 하지만 자체 후보는 못 냈다.전대는 ‘친박’ 대 ‘비박’의 계파 대리전 양상이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배박’논란에 휩싸인 황교안 후보 쪽에 줄을 섰다. 아무래도 ‘비박’을 결집해 당권을 잡으려는 오 전 시장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것 같다.전대에서 종속변수 정도로 보이던 김진태 의원은 태극기 부대를 등에 업고 보수의 선명성을 내세우며 판세를 흔들고 있다. 조직력과 시위로 다져진 태극기 부대가 가세하면서 힘을 받는 형세다.태극기 부대는 후보 합동연설회마다 단체로 참가, 분위기를 주도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들의 맹목적인 후보 지지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전당대회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을 막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한국당의 이 같은 전대 과정을 지켜보는 지역민들의 마음은 씁쓰레하다.보수의 본산이라는 지역에서 자체 후보를 내지 못하고 구경꾼에 그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최근 한국당의 ‘5·18 폄훼’와 도로 친박당 회귀 움직임에 대한 걱정도 있다. 자꾸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정부·여당의 거듭된 실책에 무임승차하려는 한국당의 행태에는 울화통만 터진다. 지역민의 열망과는 동떨어진 행동에 한국당에 대한 실망감만 커지고 있다.무기력에 빠진 자유한국당이 이번에도 박근혜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음 선거도 기대할 수 없다. 체질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친박과 비박을 넘어설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지역 한국당은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그의 삶, 그의 꿈(78)패션디자이너 김선자

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 브랜드 샵을 열고 36년 간 대구의 대표적인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다.김선자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국내 1세대 패션디자이너다. 1971년 ‘미스 김테일러’라는 브랜드를 열고 패션디자이너로서 36년간 활동했다. 뉴욕과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100여 차례 컬렉션을 열면서 대구 패션의 발전을 이끌었고 자신의 이름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그의 패션은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시대적 감각을 선도했다. 특히 드레스는 동양의 아름다움과 서양의 세련미를 고루 갖춰, 뉴욕 현지 언론으로부터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일밖에 몰랐던 그녀는 2008년 6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김선자를 사랑하고 그녀 옷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열정만으로 시작한 디자이너의 길김선자는 대구시 중구 동인동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는 아버지 김형식과 어머니 김순이 사이에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무작정 옷이 좋아 부모 몰래 양재 학원에 다니며 디자인을 배웠을 정도다.여고시절 경북대 교정을 찾은 김선자(왼쪽 2번째).소재가 풍부하지 않았던 60년대 말 아버지의 낡은 포플린 셔츠의 컬러를 떼어내고 변형시켜 새로운 옷을 만들거나, 구제품 시장에서 옷을 구해다가 밤새 디자인을 연구하고 공부했다.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패션에 더 엄격하고 철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미스 김테일러’ 매장을 첫 선보인 1971년. 의상실에서 서 있는 이가 김선자.대구시 중구 동문동에 있던 패션 샵에서 일할 무렵 그는 남편 임창곤을 만나 결혼한다. 결혼 후 1년 만인 1971년 중구 동문동 시청 부근에 ‘미스 김테일러’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오픈했다.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은 내심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평소 사근사근하거나 남에게 이런저런 옷을 권할 만큼 사교적이지도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리자마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우아한 여성미를 단순화하고 화려한 색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그녀의 옷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고품질 소량생산 전략도 적중했다. 한 번 사면 최소한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고집이 고객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손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옷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입히지 않았다.◆승승장구하다패션쇼 후 모델들과 함께 한 김선자.미스김테일러는 조금씩 번창해 갔다. 1973년 한·미 국제부인회 초청 쇼를 시작으로 1974년 신세계백화점 가을 겨울 컬렉션에 참여했고 1983년에는 그 당시 보기 드물었던 개인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대구에서 패션쇼를 할 만한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경주의 호텔에서 쇼를 가졌다. 대구에서 그녀의 패션쇼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자동차가 행렬을 이뤄 호텔로 들어서는 모습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호응이 좋아 1985년 앙코르 쇼를 가지기도 했다.그녀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패션의 흐름을 읽는 직관력이 있었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오로지 패션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금은 타고난 감각과 운’이 작용한듯하다. 김선자는 기존의 중년층 고객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품위 있는 스타일의 옷을 제작했고, 여기에다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트렌디한 젊은 감각의 옷을 만들어 고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하게 했다.세일을 남발하지 않고 오랫동안 고객과 쌓은 신뢰감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녀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점 윈도에 한 번도 세일한다고 내건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 최고라는 자존심으로 일을 했다.자신의 패션쇼를 보러온 엄맹란과 이덕화와 함께.1987년 파리국제페스티벌 출품을 계기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고급 기성복)와 뉴욕 프레타 포르테, 중국 청도패션쇼, 미국 애틀랜타 패션쇼 등 국제 행사에 참여했다. 90년대 중반에는 1년에 6회 이상의 패션쇼를 미국과 대구, 서울에서 열며 전성기를 맞는다.◆신사옥을 짓다1973년 동아백화점 앞 동문동으로 가게를 옮긴 그녀는 1983년 동인호텔 뒤편 중구 공평동에 신사옥을 짓는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패션 샵이었다. 크기뿐 아니라 기성복과 맞춤복을 함께하는 복합매장으로 꾸며 고객들을 모았다.그녀의 샵은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여성들로 항상 넘쳐났다. 김선자 패션을 입어야 대구에서 성공한 여성으로 비칠 정도로 ‘그녀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대구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영과 사교 방법으로 자신의 매장을 고급스러우며 우아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1993년에는 서울 청담동에 가게를 오픈했다. 당시 청담동에 가게를 열자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구가 본점이고 서울은 분점일 뿐이다’고 강조했다.롯데월드 매장에 입점할 때 입점 조건으로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반대했다. 대구에서 30년 정도 대구시민을 위해 패션을 했는데 서울매장에 입점하기 위해 본점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입점을 했지만, 그녀는 늘 당당했고 시골 사람을 쉽게 보는 서울사람들의 시선을 바로 잡기 위해 더 열심히 옷을 만들었다.다음 해인 1994년 대봉동으로 사옥을 옮긴다. 그녀는 이곳을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경남 센트로 팰리스가 들어서면서 아파트 부지로 편입돼 2007년 길 건너편으로 다시 사옥을 옮기게 된다.◆대한민국 톱 디자이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국제로타리 초청행사 패션쇼에서 인도출신의 라제드라 배부 국제로타리 회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1995년 그녀는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회원이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톱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회원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1996년 스파서울컬렉션에 그녀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대구디자이너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고 지방에 있다고 해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결과는 성공이었다. 또 그해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그녀의 옷을 입고 출연하자 ‘황신혜가 입은 옷’이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KBS‘열린 음악회’ 사회자 황수경씨가 그녀의 드레스를 자주 입어 ‘드레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다.황수경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그녀의 서울패션쇼에 빠짐없이 나타나 축하해주었다. 탤런트 김수미, 강부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김수미가 어려울 때 김선자씨를 찾아와 같이 위로를 나누며 자매처럼 우정을 이어갔다.김선자는 섬유도시 대구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한국패션협회 회원, 세계패션그룹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대한민국 최고라 자부하던 박윤수, 진태옥, 한혜자 , 설윤형, 박항치 등과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한혜자씨는 여행을 할 때면 룸메이트를 할 만큼 친밀했다.이 당시 그녀와 함께 대구 패션을 이끈 박동준씨는 “서로가 경쟁하며 발전했다. 이 시기가 대구 패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했다. 서로 다른 지점에서 대구 최고의 패션을 선보인 이들 둘은 동지였으며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들이 있어 대구 패션은 꽃을 피웠고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대학강단에 서다1997년 김선자는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이를 두고 말도 많았고 뒷이야기도 무성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수십 년 현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신이 있었고 자격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27년간 쌓은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섬유 도시의 미래를 이끌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밝히기도 했다.1등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승부 근성을 가진 그녀는 강의를 통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한사람이라도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패션행사로 인해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애썼다. 뉴욕에서 패션쇼가 있었던 2001년 9월,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를 탄 덕에 테러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모처럼 가족이 함께 했다. 오른쪽부터 큰 아들 내외. 둘째아들. 김선자 부부. 딸 내외.김선자는 디자이너로 성공했고 2남 1녀 아이들을 잘 키웠다. 큰아들은 삼성의 임원이 됐고 사진을 전공한 둘째 아들은 정교수가 됐다. 그녀는 자기 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디자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았다.자녀들이 외국 유학을 할 때는 봄이면 모든 일을 접고 직접 가서 옷이나 침구를 손수 갈아줄 정도였다. 딸은 미술대학을 나와 파리 에스모드에서 패션을 공부했고 국내서 패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뒤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딸이 같은 길을 가기를 내심 원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았다.모두가 부러워한 성공을 이뤘던 그녀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2007년 2월 패션 세계그룹 한국협회 회장을 맡아 대구 디자이너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으나, 병마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와 행운을 주지 않았다. 2008년 10월. 그녀는 부와 명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모두들 고맙심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내 아내 김선자남편 임창곤(82.전 한국패션센터 이사장)씨는 아내 김선자를 ‘패션만 알고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해내는 아주 독특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덧붙였다.제자가 그린 김선자 캐리컬처.해야 할 일이면 혼자서 반드시 해내고 마는 사람. 이러한 고집과 집념이 대구 패션에 이름 석 자를 남긴 힘이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자기 일에는 아주 철저하고 고집스러웠지만 집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의 모난 기질도 잘 참아주었으며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자녀들의 의견을 따랐고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며 생활했다.그녀는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부부지만 서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간섭받지 않았다. 패션은 아내가 알아서 하고, 나머지 비즈니스는 남편이 맡는 식이다. 요리할 때도 간섭이 싫어 부엌문을 닫고 혼자서 요리책을 펴놓고 음식을 만들 정도였다.일벌레인 그녀는 TV 볼 시간이 없어 배우 김수미씨가 대구가게에 왔을 때도 그녀의 얼굴을 몰라 ‘김수미씨 계십니꺼’ 라며 찾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김순재 언론인김선자 연보1947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서 출생1971년 ‘미스 김 테일러’ 패션 브랜드 설립1973년 한미 부인회 초청패션쇼. 신세계 대구 오프닝 기념 쇼1983년 중구 공평동 동인호텔 뒤편 사옥 오픈1985년 김선자 개인 컬렉션(신작 발표회)1988년 파리, 뉴욕 프레타포르테 출품1990년 섬유와 예술의 만남 전1993년 강남구 청담동 서울매장 오픈1994년 중구 대봉동 사옥 오픈1994년 중국 청도 패션쇼. 애틀랜타 패션쇼1996년 S.F.A.A 서울 컬렉션 참가1997년 계명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겸임교수(2005년까지)2000년 밀레니엄 여성 경제인 패션 대전 유명디자이너 20인 선정2001년 뉴욕컬렉션 참가2003년 제13회 한국섬유 대상 패션디자인 부문 수상2007년 세계패션그룹 한국협회 회장 취임2007년 중구 대봉동 신사옥 오픈2008년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특임교수2008년 10월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대일광장-대구 ‘스쿨미투’가 남긴 생채기

홍석봉/ 논설위원 남녘에선 꽃 소식이 들려온다. 2주 후면 신학기가 시작된다. ‘스쿨미투’의 광풍이 휩쓸고 간 학교는 이따금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봄방학에 들어간 교정엔 학생 자취가 끊긴 채 적막감만 흐른다.지난해 8월 29일 2학기 개학과 동시에 불어닥친 스쿨미투 바람은 지역의 한 여자중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페이스북 게시판에 한 학생이 인권 침해 사례를 고발한 것이 발단이다. 계속 유사한 글이 올라가면서 미투가 촉발됐다. 10월 중순까지 한 달 반 동안 경찰 수사와 함께 대구시교육청의 집중감사를 받았다.학생들이 미투로 고발한 내용은 “교사가 팔로 몸을 스치는 등 수차례 신체접촉을 했다”거나 “교사가 치마 길이를 조사하면서 다리를 툭 쳤다”, “교복 치마 입고 다리 벌리면 눈 돌아간다”며 수업 중에 바로 앉으라고 한 경우가 다수 있었다. 또 “여자가 살이 많이 찌면 매력이 없다”고 한 내용도 있다. 성희롱과 차별적 발언을 고발한 글이 주류를 이뤘다.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당시 이 게시판에는 약 170여 건의 고발 내용이 게재됐다. 물론 개중에는 성희롱이나 차별과는 관련이 없는 글도 상당수였다. 성 소수자라고 밝힌 한 학생은 동성애를 비난하는 교사를 고발하기도 했다.학생들은 해당 교사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성희롱과 성폭력으로 고발된 선생은 사퇴하라고 주장했다.-----------미투고발 글 발단, 교사 등 80명 조사여기에 시민단체 등이 가세, 대구 시내 일원과 시교육청 앞에서 스쿨미투를 고발하는 연쇄시위를 벌이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일부 학부모까지 동조했다. 금세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학교는 당시 스쿨미투의 발원지가 됐다.학교는 2학기 내내 홍역을 앓았다. 학생 70여 명과 교사 10여 명이 경찰과 교육청의 조사를 받았다. 교사 절반가량이 자술서를 썼다. 3명의 교사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 중 과도한 신체 접촉을 한 교사는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시교육청은 학생과의 스킨십이 문제 된 여교사 한 명도 추가 고발했다. 여교사의 가벼운 스킨십도 학생이 수치심을 느꼈다면 성폭력에 해당한다는 전문가 의견에 따른 것이다.무혐의 처분을 받은 교사는 타 학교 전보로 마무리됐다. 남은 교사와 학생들은 지금도 당시의 악몽 같은 상황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미투 후유증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됐다. 학교는 유혈이 낭자하다. 지난 1월 말 이 학교는 교사 55명 중 12명이 사퇴했다. 이 중 8명이 명퇴를 신청해 학교를 떠났다. 교장과 교감은 중징계를 받은 후 다른 학교로 발령 났다. 교사 상당수도 학교를 옮겼다.얼마 전 1학년 신입생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아는 학부모들이 학교 배정에 반발, 집단 거부하는 소동도 일었다.곧 새 학기를 맞는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 허물기 쉽지 않은 큰 벽이 처졌다. 사제 간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일부에서는 큰일도 아니었는데 언론 등에서 부풀려 사건이 침소봉대됐다는 의견도 있다. 교권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학생이 교사를 믿지 못하고 교사가 학생을 믿지 못하는 교단의 불신 사태는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다.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우려되는 부분이다.--------------성장통 여기기엔 상처 커, 제자리 찾길미투를 우리 사회의 성장통, 일과성 바람으로 치부하기엔 그 생채기가 너무 크다. 당장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거리를 두고 대한다. 이제 학생과 교사는 지식을 사고파는 개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스쿨미투를 학생의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찾아가는 한 과정이라고 위안 삼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참에 교직 사회에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교단에 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올 2월 말로 명퇴를 신청한 교사가 예년의 배가 넘는다고 한다. 사명감을 갖고 교직에 임했다가 실망과 회의만 갖고 떠나는 일이 더 이상 없도록 해야겠다. 설익은 학생들의 논리와 잣대로 교사를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미투로 멍든 지역 교육계는 새 학기부터 모두 털어버리고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기 바란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TK 패싱 더 이상은 안 된다

현 정부의 TK(대구·경북) 패싱이 점입가경이다. TK는 계속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는 13일 반도체 클러스터를 경기 용인으로 사실상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말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부처 장관 회의를 열어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안’을 확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이에 구미시가 산자부에 강력 항의하자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해명했지만 찜찜한 구석이 많다. 대기업들은 용인과 이천 등을 남방한계선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럴 경우 지방에 공장을 지을 생각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지역균형이고 뭐고 아무리 용을 써봐야 돈 될만한 기업은 이제 지방으로 오지 않는다. 용인 낙점이 ‘반도체 인재 확보를 위해 수도권에 조성해야 한다’는 SK하이닉스 측 요청을 수용한 때문이라는 배경 설명이 이를 뒷받침한다.경북도와 구미시는 그동안 지역 균형발전 논리를 앞세워 ‘구미형 일자리’를 창출한다며 반도체 클러스터 구미 유치 운동을 벌여왔다. 수도권 공장총량제를 지켜 달라고 요구해왔다. 자칫 헛심만 쓴 꼴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같은 날 부산에 간 문재인 대통령은 김해공항 확장공사 재검토를 언급해 기존 국토교통부의 ‘가덕도 신공항 불가 입장’을 바꾼 것으로 비치면서 대구시가 바짝 긴장했다. 대구시는 통합신공항 추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지만 상황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것 같다.대구공항 통합 이전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가덕도 신공항이 추진되면 노선 중복 등으로 대구공항 국제선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산시는 가덕도 신공항 추진을 기정사실로 하는 분위기여서 지역민들은 더욱 떨떠름할 수밖에 없다.앞서 지난 12일에는 경북도와 경주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해체연구소 입지가 부산과 울산 경계 지점으로 확정됐다는 보도가 나와 지역민들이 분통을 터뜨렸다.뿐만 아니라 지난달 29일에는 정부가 23개 지역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해 24조 원 규모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발표했지만 경북은 가장 규모가 적은 사업을 배정, 경북도와 포항시를 물 먹였다.대규모 국책 사업에서 잇따라 배제되면서 지역민들은 격앙된 모습이다. 일부에서는 현 정부 들어 “TK는 되는 게 없다”며 자조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을 부르짖으면서도 지역에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 않자 해도 너무하다는 반응들이다.경북도는 대책에 더욱 만전을 기하라. 지역 국회의원들도 나서라. 관련 부처를 항의 방문하고 안 되면 대규모 항의시위라도 해야 한다. 더 이상 TK 패싱은 안 된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사설-남부내륙철도, 성주 역사 설립해야

성주 군민들이 단단히 뿔이 났다.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대상으로 선정된 남부내륙철도가 정작 철도 노선이 지나가는 성주에는 정차 역이 계획돼 있지 않은 때문이다.2017년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는 김천~경남 거제 간 172㎞ 남부내륙철도 구간 중 김천~합천 구간이 65km로 고성~통영(14.8km), 통영~거제(12.8km)보다 2배 이상 길지만 경북 구간에는 역사 건립 계획이 없다.경남과 경북 9개 시·군을 통과하는 6개 역사 가운데 경부선 김천역사와 경전선 진주역사는 그대로 사용하고 경남 합천·고성군과 통영·거제시 등의 4곳에 역사를 새로 지을 계획이다. 성주에는 신호장만 설치한다. 정차 역 없이 노선만 깔겠다는 것이다. 지역민들이 들끓는 이유다.하지만 성주군은 분을 참고 역사 유치에 나섰다. 성주역사 유치 대응팀(TF)을 만들어 결의대회와 서명운동 전개하고 필요한 경우 물리적 행동에도 나서기로 했다.부군수를 단장으로 한 TF는 12일 국토교통부를 방문, 성주역사 유치에 대한 지역 여론과 역사 설치의 필요성 및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계에 반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TF는 경북도·정부·국회도 방문 예정이다.성주군 내 기관단체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들 단체는 지난 11일 간담회를 갖고 성주역사 유치 공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건의문 작성과 범군민 서명운동 분위기 확산을 꾀하기로 했다. 또 성주역사 유치 필요성을 역설하는 단체장 서한문 발송, 연구용역 실시 등과 함께 삭발식도 갖기로 했다. 경북도도 경북지역 노선에 정차 역을 유치하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사업 선정을 열렬히 반겼던 성주 군민들의 실망감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성주는 지난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시위와 반대 투쟁이 이어지면서 홍역을 치렀다. 아직도 사드 후유증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각종 정책을 내놓으며 수습에 나섰지만 진척이 없어 주민들의 마음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내륙철도의 성주 패스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됐다.남북내륙철도사업은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을 앞세워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한 사업이다. 사업 취지를 살리려면 성주에 정차 역을 건립하는 것은 경제성 논리만 따져서는 안 된다. 또한 KDI의 용역 결과는 아직 계획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정부 당국은 지역균형발전 취지도 살리고 사드로 골병든 지역민들에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성주에 정차 역을 건립해야 한다. 이것은 지역민들의 너무도 당연한 요구다.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그의 삶 그의 꿈(77)신화가 된 제지인(製紙人) 이종대

이종대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은 우리나라에 화장지 문화를 도입하고 대중화시킨 한국제지산업의 선구자다. 이종대 회장의 생전 모습. 지금은 ‘화장실’로 통칭하지만 예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변소, 뒷간, 측간(厠間), 정랑(淨廊), 통시, 절에서는 해우소(解憂所)….지금의 60, 70대 연령층만 해도 어렴풋한 기억 몇 조각쯤 있을 것이다. 뒷간 문 옆 철삿줄에 매달린 헌 잡지나 공책, 네모로 잘린 신문지며 누런 비료 포대 따위…. 특히 시골에선 지푸라기를 손으로 비벼 부들부들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고, 담장 위 박넝쿨 잎 두어장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심지어 새끼줄을 타고 앉아 해결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지만 불과 몇십 년 전 일이다.그런 우리네 생활 풍경을 일거에 바꿔준 사람이 있다. 이 땅에 화장지 문화를 처음 도입해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 제지산업의 선구자!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이종대(李鍾大)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이다.◆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 이종대1933년 5월 28일, 경북 금릉군 김천면의 농가에서 부 이규하와 모 이수연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넷의 노산 탓인지 어머니는 막둥이가 첫 돌 지난 지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여섯 자녀를 키우며 새벽부터 밤늦도록 쉴 틈이 없었다. 누구랄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어린 종대는 학교까지 시오릿길을 운동화가 닳을까 봐 벗어들고 맨발로 뛰어가곤 했다.해방 몇 달 전 김천중학교(6년제)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대학 4학년 때(1954) 학장 추천으로 대구의 청구제지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가난한 제자가 수업 틈틈이 캠퍼스 내 신축공사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교수들이 눈여겨본 것이다.청구제지는 직원 80명의 꽤 규모 있는 회사였다. 대학생 종대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기술을 익히느라 모두가 퇴근한 후에도 혼자 남아 기계를 붙들고 끙끙거렸다. 행운은 일찍 찾아왔다. 이듬해, 대학 졸업 몇 달 후 스물둘 나이로 일약 공장장이 됐다. 기계에 매달려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이 입사 1년 된 신입에게 중책을 맡긴 것이다. 청구제지 사장은 자신의 혜안이 훗날 세계적 제지인(製紙人) 이종대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줄 알았을까. 신혼시절의 이종대 부부. 청구제지 공장장으로 일하던 1955년 결혼, 공장옆 사택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해 가을엔 세 살 아래 김경애와 혼인, 공장옆 사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전기사정이 안 좋던 때라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에라도 뛰어갔다. 전기선 잇는 작업을 하다 감전돼 죽을뻔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이탈리아 유학과 제지공장 생활 1957년 국비유학생으로 이태리의 제지회사 카르테라 부르고에서 8개월간 선진 제지기술을 배우던 시절의 청년 이종대. 누구에게나 평생 세 번의 기회는 온다더니 1957년 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종이 제조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국비장학생으로 이탈리아로 가게 된 것. 카르테라 부르고(Cartera Burgo) 라는 회사에서 8개월간 제지기술을 배웠다.2001년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화적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지푸라기를 사용하며 자란 그에게 화장지 문화는 생소했다.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질 좋은 화장지를 사용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기술습득에 매진했다.귀국 후 청구제지로 돌아온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1958년엔 대구를 떠나 서울의 대한제지 생산부장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몇 달 후부터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언젠가 자신이 경영자가 되면 월급만큼은 제대로 주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이듬해에는 정부주도로 볏짚 펄프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한국펄프에 스카우트됐지만 볏짚 펄프산업 자체가 백지화되고 말았다.1961년엔 군산의 풍국제지 공장장으로 입사, 1963년에 국내 최초로 ‘주름 잡힌 화장지’를 만들어냈다. 서울업체들이 주름 잡힌 화장지를 전량 가지고 가서 가공․판매했다. 이후 한일제지로 옮겼지만 자금난 탓에 부도를 맞았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일부 부유층만 미군부대 등지에서 화장지를 사다 쓰는 정도였다.자신의 회사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1965년 7월, 화장지 전문회사 ‘일우제지’를 안양에 설립했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안양의 이화제지에 공장장으로 들어갔다.◆화장지 제조기계 직접 만들다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1966년, 그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미국의 대표적 위생제지 기업인 킴벌리 클라크 본사의 관계자가 합작기업 물색과 시장조사차 한국에 왔다. 6년 전 네덜란드의 한 공장에서 만났던 한국인에게서 받은 명함을 갖고 있었다. ‘J.D.Lee', 바로 ‘이종대’였다.그 무렵 그는 여전히 자기 사업의 꿈을 갖고 있었다. 킴벌리 클라크측은 합작대상인 유한양행에 “J.D.Lee가 합작회사의 리더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67년, 이종대는 유한양행 제지부장으로 입사했다. 합작과정에서 이견이 생겼다. 킴벌리 클라크 측은 한국의 화장지 수요량이 많지 않으므로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하자고 했고, 이종대 부장은 반대했다. 나아가 이 부장은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한국에서 직접 만들겠다고 건의했다. 킴벌리 클라크와 유한양행 모두 반대했다.하지만 그의 진지한 설득에 유한양행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수용해주었다. 미국 측을 설득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해외출장때 눈여겨 봤던 기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어렵게 설계도면도 입수했다. 철공소들을 돌아다니며 모은 부품을 밤새워 뜯고 맞추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그린 도면을 처음으로 미국 본사에 가지고 갔을 때는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류머티스성 열병을 앓기도 했고, 사고로 손가락이 으스러져 6개월이나 깁스를 하기도 했지만 끝내 국산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 1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루 5t의 화장지 원단 생산이 가능했다. 직접 부품을 구해 조립한 기계라 설비비가 5만9천 달러 밖에 안 들었다. 저렴하게 만든 기계에서 화장지가 생산되자 미국 기술자들이 놀라워하며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했다.◆ 유한 킴벌리 설립과 다양한 제품 생산1970년 3월30일, 3년간의 합작추진 끝에 유한킴벌리 회사가 설립됐다. 12월엔 제1공장이 군포에 들어섰다. 창립을 주도한 이종대 부장은 상무이사 공장장으로 취임했다. 크리넥스 미용티슈(1971), 뽀삐 화장지(1974) 등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위생용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기 시작했다. 1980년 유한킴벌리 제2공장으로 설립된 김천공장 전경. 화장지․미용티슈․키친타월․부직포 등을 생산하고 있다. 1980년 3월엔 제2공장이 김천에 세워졌다. 킴벌리 클라크로부터 도입한 기계설치과정에 문제가 생겼는데 미국인 엔지니어들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모두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당시 이종대 부사장이 밤새워 문제를 해결해 놓은 것이다.1990년엔 배송센터를 겸한 제3공장이 성남에 들어섰고, 1994년엔 제4공장이 대전에 세워졌다. 화장지, 아기 기저귀, 생리대, 미용티슈, 물티슈, 키친타월, 부직포 등 유한킴벌리 제품들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작업복 차림의 이종대가 작업현장에서 직원과 작업 공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그는 탁월한 기업가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그의 지휘 아래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기계들을 플랜트 수출까지 하게 됐다. 화장지 만드는 회사가 화장지 원단 제조 기계까지 수출한 것이다. 설계부터 제작과 설치, 시운전, 기술지도까지 일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당시엔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했다.1975, 1976년 제지용 건조 기계를 개발, 이란과 태국에 플랜트 수출 뒤 1976, 1977년에는 화장지 가공 기계를 말레이시아에 수출했다. 1977년부터 1993년엔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필리핀, 타이완,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화장지 원단 제조기계를 수출했고, 1987, 1988년에는 호주에 부직포 제조기계를 수출했다.◆제지산업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다유한킴벌리의 매출 규모도 급성장했다. 1971년 2억 원에서 대표이사 사장 때인 1993년엔 2천392억 원을 돌파했다. 수출액도 1975년 25만 달러에서 회장직 퇴임 무렵에는 4억 달러에 이르렀다. 포상과 수훈도 잇따랐다. 대통령 표창(1978), 국무총리 표창(1980), 석탑산업훈장(1984), 철탑산업훈장(1994)….국제적 명성도 더해졌다. 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는 뛰어난 실적의 경영자에게 주는 ‘기업인성취 대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당시 킴벌리 클라크사의 125년 역사에서 수상자는 그를 포함해 6명뿐이었다고 한다. 1997년 동양인 최초로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 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헌정됐다. 왼쪽 두 번째가 이 회장. 다윈 스미스 킴벌리 클라크 회장이 친필 감사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당신은 1억 명 중에 하나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종이 노벨상’ 으로도 불리는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The Paper industry Hall of Fame)’에 1997년 동양인 최초로 헌정되기도 했다.종이산업이 발달한 미국 위스컨신주의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는 1997년 당시까지 모두 35명이 헌정되었다. 이 회장은 생전에 “47년 제지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치열했던 ‘종이 인생’ 47년청구제지 견습공에서 유한킴벌리 초대 회장에까지 오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런 만큼 휴일․휴가를 모르는 워커 홀릭이었다. 남들이 쉬고 놀 때 한 번이라도 더 기계를 살피고 새로운 일을 연구하는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아이디어맨이기도 했다. 원래 두루마리 화장지의 국제표준 규격은 114mm였지만 좀 줄여도 충분하겠다고 판단했다. 14mm를 줄여 100mm 폭으로 생산했더니 원가절감과 가격 인하, 원자재인 나무를 아끼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여러 국가가 화장지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시작된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도 점차 세계적인 환경보호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입지전적인 그의 삶의 여정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성실함과 부지런함, 부단한 도전정신,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자세, 투철한 주인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노년의 이종대 회장이 맏딸인 이혜정 요리연구가와 함께 미소짓고 있다. 그는 가정적으로도 멋진 가장이었다. 1녀 2남의 자녀들이 ‘살아있는 교과서’로 여겨 닮고 싶어했던 롤 모델이었다. 맏딸은 요리연구가이자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빅마마’ 이혜정 키친스토리 대표다.‘최초’라는 기록들을 만들어 내며 한국 제지산업에 뚜렷한 획을 그었던 이종대 회장은 작년 11월27일 향년 85세로 별세, 경기도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반세기에 걸친 그의 ‘종이 인생’은 치열했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그 열매를 향유하고 있다.전경옥 언론인연보․1933년 경북 금릉군 김천면 출생․1951년 김천중(6년제) 졸업․1955년 경북대 사범대 물리학과 졸업․1955~1959년 청구제지 공장장․1959~1967년 한국펄프, 풍국제지, 한일제지, 이화제지 공장장․1967~1970년 유한양행 제지기술 부장․1970~1977년 유한킴벌리 상무이사(공장장)․1977~1980년 유한킴벌리 부사장․1978년 대통령 표창․1980~1995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1984년 석탑산업 훈장․1990년 킴벌리 클라크사 ‘기업인 성취대상’ 수상․1994년 철탑산업 훈장․1995~1998년 유한킴벌리 회장․1997년 ‘세계제지산업 명예의 전당’ 헌정자로 선정․1995~2004년 한국제지공업연합회 회장․2018년 11월 27일 85세로 타계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경북형 일자리’, 지역 경제회생 디딤돌 돼야

‘광주형 일자리’가 국가 경제 회생의 새로운 모델케이스가 되는 모양새다.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지난 8일 “상반기에 잘하면 최소한 한두 곳은 ‘광주형 일자리’가 급물살을 탈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정 수석은 “특히 구미·대구·군산이 구체적 계획을 가진 것 같다”고 구미와 대구를 콕 집어 말했다.‘광주형 일자리’는 그동안 노사 상생 모델이 될 수 있을지가 주목받아왔다. 그러다가 광주 현대차 공장 설립이 가시화되면서 탄력을 받았다.정 수석의 발표로 대구시와 경북도는 고무된 모습이다. 경북도는 바로 화답했다. 경북도는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를 위해 ‘경북형 일자리’ 모델을 전격 제안했다.경북도는 공장용지 10년간 무상 임대, 고용 목표 달성 시 1천억 원의 특별지원금 제공 등을 약속했다. 또 원만한 임금단체협상 진행과 노사갈등 및 급격한 임금상승을 차단하겠다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지역 주요 대학에 반도체 학과를 개설해 SK하이닉스가 걱정하고 있는 전문 인력도 공급해 주겠다고 했다. 직원들의 이전비와 정책자금 지원, 고순도 용수 및 인프라 건설 등 가히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당근을 제시했다.거기다가 요즘 한참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는 대구시가 힘을 보탰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난 7일 “대구의 일자리 상황도 힘들지만 구미 경제가 되살아나야 대구의 일자리가 같이 늘 수 있다” 며 자칫 대구형 일자리 모델을 함께 추진할 경우 SK하이닉스 반도체공장 구미 유치에 장애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양보할 뜻을 시사했다.고무적인 현상이다. 구미와 대구가 함께 같은 형태의 일자리 사업을 추진할 경우 자칫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우는 범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읽힌다.경북도는 그동안 SK하이닉스의 구미유치에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SK 측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여왔다. 어떻게든 수도권으로 갈 궁리만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경북형 일자리’ 제안은 ‘먼 산불 보듯’해온 SK에 명분과 실리를 한꺼번에 안기는 기회가 됐다. 이렇게 하는데도 외면한다면 기업의 도리가 아니다.이제 경북형 일자리가 정부의 일자리정책에 전기가 되고 ‘대구형 일자리’ 등으로 확산돼 지역 맞춤형 일자리 정책이 될 수 있어야 한다.경북도는 SK 외에 삼성·LG그룹과도 ‘경북형 일자리’ 가능성을 타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경북형 일자리’가 대기업이 대구·경북으로 되돌아오는 계기가 되고 지역경제 회생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미세먼지 속 설 연휴, ‘탈원전’ 청원 답하라

기해년 설 연휴를 미세먼지 속에서 보냈다. 즐거워야 할 귀성길이 미세먼지로 말미암아 고통 길이 됐다.설 명절 가족과 친지도 마스크를 쓴 채 만났고 대화도 미세먼지가 화두였다. 올해 들어 이틀에 하루꼴로 미세먼지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미세먼지와 싸움이 일상이 됐다.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국민 청원서를 청와대에 전달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아직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청와대는 오히려 울진 신한울원전 3·4호기 건설 중단 방침을 밝혀 울진군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다.‘탈원전 반대 및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범국민서명운동본부’는 지난달 21일 33만6천768명의 국민 청원서를 청와대에 전달했다.국민청원 9일 후인 지난달 30일에는 신문광고를 냈다. 운동본부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40년간 단 한 차례의 원전사고도 없을 정도로 안전성이 입증됐고 원전은 미세먼지 감축과 기후변화 대처에도 매우 유용하다”고 강조했다. 또 탈원전 정책으로 전기요금 인상, 세계 최고 경쟁력의 원전산업 몰락을 초래한다며 재고를 호소했다.신한울 3·4호기는 총사업비 8조2천600억 원을 들여 신형 원전(APR1400) 2기를 짓는 사업으로 2017년 신규 원전 건설을 백지화하면서 공정률 30%에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투자금 7천억 원은 공중에 날아갔고 기업체 직원은 일자리를 잃었다. 세계 최고수준의 원전생태계는 무너지고 있다.그러면서 미세먼지 감축을 위해 석탄화력발전소의 액화천연가스(LNG)발전소 전환 및 석탄발전소 감소 방침을 발표했다.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해진다.대부분의 국민이 과속 주행하는 탈원전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원자력학회 조사에서도 국민의 70%가 원전에 찬성한다고 했다. 외국의 전문가들까지 나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마당이다.정부는 언제까지 민의에 귀를 닫아놓으려 하는가. 지난달 30일 청와대를 방문한 울진군의회 의장에게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는 물론 공론화마저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행정관의 얘기이지만 언제까지 삐딱선을 탈려고 하나.문 대통령은 미세먼지와 관련, 답답하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 건강을 갉아먹는 탈원전에 대해 재고해야 마땅하다. 원전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여당 의원도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논의할 공론화위원회 설치를 제안한 바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국민청원이라는 명분도 갖춰졌다. 더 미루다가는 천추의 한이 될 수 있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경북 상실감, SK하이닉스가 대안이다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 선정 결과가 발표됐다. 경북도는 7조 원 규모의 동해안 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제외됐다. 경북도민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특히 이번 예타 면제를 건의한 11조 사업 가운데 4천억 원 규모의 동해안 복선 전철화 단선화 사업만 포함돼 불만의 기색이 역력하다. 예산 규모로만 따졌을 때 경북은 제주와 함께 전국 최하위 규모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정부는 이번 면제사업 선정을 지역별로 1개씩 배정했다. 하지만 경북은 타 지역과 비교하면 정작 필요한 사업은 빼놓고 가장 비중이 낮은 사업이 선정됐다. 경북도민들의 실망감이 큰 이유다.정부는 이번 예타 면제사업 선정 배경을 지역 균형발전에 우선순위를 뒀다고 했다.경북도는 동해안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1순위로 신청하면서 이미 건립된 서해안고속도로, 남해안고속도로와 균형을 맞춘 국토의 고른 발전을 내세웠다. 정부 신북방정책에 대비한 초광역 교통망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경북도의 요청은 철저히 무시됐다. 정부는 경북도의 이 같은 상실감과 배신감을 다른 형태로라도 메꿔주어야 할 상황이다.현 정부 들어 대구·경북이 인사와 재정 등에서 심한 불이익을 받아 ‘TK 패싱’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터다. 달랠 방안은 있다.현재 경북도와 구미시는 SK하이닉스 구미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지난 29일에는 권영진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나 SK하이닉스 구미 유치에 협력해 줄 것을 건의했다.구미는 935만㎡의 공장용지, 반도체 맞춤형 우수인력 10만 명과 SK실트론 등 협력 가능한 3천200여 개의 중소기업을 가졌다는 점을 내세워 구미 유치의 타당성을 호소했다.30일에는 경북도와 대구시가 ‘대구·경북 시·도민 상생경제 한마음 축제’를 열어 지역민의 염원을 설명하고 수도권 규제 완화 반대 및 수도권 ‘공장 총량제’를 지켜줄 것을 촉구하는 시·도민의 열망을 정부에 전달했다.구미 전자산업과 포항 철강산업의 위축 등으로 지역 경제는 고사 위기다. 인구는 자꾸 준다. 지난해 대구·경북에서 2만3천400명이 빠져나갔다. 통계청 인구이동통계다. 3명 중 1명이 수도권으로 갔다.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의 지역 유치는 지방에 인구와 돈을 끌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정부는 대구·경북의 분위기를 헤아려 민심을 달래는 방안을 내놓기 바란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그래야 나라도 살고 지방도 산다. 또 지역민들의 섭섭함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다.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경북 중소도시 분만 대책 시급하다

경북도와 김천시가 최근 김천도립의료원에 분만실과 신생아실, 산후조리원을 건립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김천제일병원 산후조리원이 얼마 전 문을 닫고 분만실마저 폐쇄할 상황이 벌어지자 행정당국이 다급하게 조치한 것이다. 인구 14만의 김천시가 인구 늘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가 오히려 뒤통수를 맞는 격이 됐다.김천시와 경북도가 김천의료원에 분만실, 신생아실, 산후조리원을 설치하는 방안을 협의, 대책을 마련했다. 물론 시설 비용 등 경비는 김천시가 대는 조건이다.출산환경 조성을 위해 김천의료원이 시설을 갖추기로 했지만 의료인력 수급이 변수다.현재 산부인과 전문의가 1명뿐인 김천의료원이 분만실과 신생아실을 24시간 운영하려면 최소한 산부인과 전문의 2명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2명, 간호사 10명 이상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한다.그런데 중소도시에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전문의가 잘 없다. 게다가 간호사 구하기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적정 인력수급은 발등의 불이 됐다.김천의료원은 분만실을 운영하다가 거듭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2002년 문을 닫았다. 지난해 말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김천제일병원이 적자 누적으로 산후조리원과 분만실을 폐쇄키로 했다. 지역 신생아를 위한 시설이 모두 문을 닫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이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김천시가 1억 원의 시설비 및 운영비 지원책을 내놓았으나 의회가 조례 제정에 제동을 걸었다. 민간병원에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 의원의 반대 때문이었다.여론이 좋지 않자 반대했던 시 의원은 병원에 대한 지원보다는 산모에 대한 직접 지원을 전제로 예산 문제를 양보, 해결됐다.김천시의 경우 연간 1천100명의 신생아 중 김천제일병원이 330명을 담당해왔다고 한다. 대책이 없다면 아기는 모두 구미나 대구에 가서 낳아야 할 처지다. 산모와 보호자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된다.이 같은 문제는 인구절벽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경북 도내 상당수 중소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농촌 지역에는 아예 산부인과가 없는 지역이 많다. 적절한 의료 시설 조성 및 인력 배치가 시급한 상황이다.경북도는 시군별로 현황을 파악해 권역별로 산부인과 병원 및 분만실과 산후조리원 등을 갖추도록 하는 등 아기 낳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정부가 출생률 저하에 따른 출산장려정책에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는 마당에 중소도시의 출산환경 조성을 위해 경북도와 지자체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한국 최대 중등 사학재단 일군 신진욱

신진욱은 국내 최대의 중등 사학재단을 일궜고 또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몸을 사리지 않으면서 지역 교육계와 정치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말년의 신진욱. 신진욱은 5대조(회병 신체인)의 강학 공간이던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의성 봉양에 중건하고 1981년 금산서원(錦山書院)으로 승격시킨다. 금연정사 앞에선 신진욱. 대구시 남구 봉덕동 경일여자고등학교. 진입로 왼쪽에 학교법인 협성교육재단 건물이 있다. 소속된 중학교‧고등학교 등이 12개나 돼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세운 중등학교로 숫자가 가장 많은 교육재단이다.고인이 된 재단 설립자 우봉(友峰) 신진욱(申鎭旭‧1924∼2014)은 중년 이상 대구 시민이면 상당수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대구 교육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간 길을 돌아보았다.재단 사무실은 교실 한 칸이 족히 될 정도로 널찍했다. 그곳에서 협성교육재단 권오수(58) 관리국장과 박준식(50) 관리실장을 만났다. 사무실이 자리는 많은데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박 실장은 두 사람이 교육재단 직원의 전부라고 했다. 신철원(52) 이사장은 행사 참석차 미국에 체류 중이었다.재단의 내력을 들은 뒤 ‘학원장실’ 이름이 붙은 집무실을 둘러봤다. 신진욱 학원장이 생전 근무할 때 그대로 집기와 자료 등을 보존해 두었다. 한쪽에는 1995년 경북예술고 교사가 만든 우봉의 흉상이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는 굵은 글씨로 인쇄된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그가 즐겨 읽었다는 시편 23장이다.◆교육사업에 눈 뜨다우봉은 경북 의성의 유교 집안인 아주 신씨 신종기와 전주 이씨 이소선 여사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 기독교였다. 그래서 유교의 효(孝)와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다를 게 없다며 두 가르침을 모두 따랐다.우봉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가면서 교육과 인연을 맺는다. 1944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첫발을 디뎠다. 이어 대구와 의성‧경주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기 광복과 6‧25를 거친다.1953년 우봉은 화재로 소실돼 길거리에 나앉은 경주고아원 전쟁고아 120명을 맞닥뜨린다. 교육사업에 눈을 뜨는 ‘사건’이다. 그는 잿더미 위에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련했지만 해결책이 아니었다.고민을 거듭한 끝에 120명 중 일부는 의성 자혜원으로, 또 일부는 연고를 찾아 돌려보냈다. 그러고도 30여 명이 남았다. 그는 그들을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처음에는 큰 집을 하나 얻어 함께 사글세를 살았다. 이후 남구 대명동 지금의 경북예고 땅을 인수해 원사를 지어 새로 출발한다.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구호물자로 의식주는 해결됐는데 학교 교육이 과제였다. 그 사이 60여 명으로 불어난 원아들은 유아부터 고등학교 들어갈 나이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는 인근 중학교에 입학을 부탁하러 갔다가 무안을 당한다. 그때 우봉은 ‘좋다. 나도 학교를 해야지’ 다짐한다.◆협성상고 설립…신익희와 인연 신진욱은 1955년 협성상고 야간부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야간부는 전쟁과 가정 사정으로 진학을 미뤘던 학생과 군인이 주를 이뤘다. 사진은 협성상고 입학식 장면. 신진욱은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에게 교정을 유세장으로 빌려주면서 인연이 돼 평생 야당의 길을 걷는다. 사진은 선조인 오봉사당 앞에서. 앞줄 중앙이 신익희, 오른 쪽이 신진욱. 학교 설립을 추진한 지 1년여 만인 1955년 2월28일 학교법인 자혜학원이 인가를 받는다. 이어 4월에는 드디어 협성상업고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한 학급이다. 이어 전쟁 등으로 진학을 미뤄 온 나이 많은 학생과 군인들이 주축이 된 야간부를 설치했다. 학교 이름은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룬다’는 뜻을 담아 ‘협성(協成)’으로 정했다.이렇게 출발한 협성상고는 1956년 2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후보에게 유세장으로 교정을 빌려주면서 시련을 맞는다. 우봉은 자서전 ‘교육에도 왕도는 있다’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대통령 후보가 장소를 못 구해 유세를 포기할 처지인 걸 알게 됐다. 나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일이라면 폐교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자진해 교정을 빌려주었다.’ 이 결단으로 우봉은 신익희와 인연이 닿아 40여 년 영욕의 정치 생활이 시작된다.한번은 신익희가 경북 북부지역을 다지느라 의성을 방문해 우봉의 집에 묵으며 꿈을 심는 글을 써 주기도 한다. 야당과 가까워지면서 협성교육재단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그때부터 1971년 대구 남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우봉과 재단은 숱한 불이익을 감수한다. 그는 자서전에 ‘학생이 늘어나 학교는 더 필요한데 인문 학교와 대학은 인가하지 않고 남들이 싫어하는 중학교와 실업고만 설립을 허가했다. 그렇게도 바랐던 대학교 설립의 기회도 잃고 말았다’고 술회했다.◆재단 해체 위기서 기사회생그 시기 관(官)은 재단의 학교 경영 전반을 감사하거나 사찰을 계속했다. 학교 경리는 물론 건축, 학사 행정 심지어는 교실에 들어가 학생 수를 세기까지 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투명한 재단 경영을 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그 무렵 재단에 결정적인 위기가 닥쳤다. 검찰이 재단 설립 과정을 정밀 조사하고 나선 것이다. 거기서 재단의 구성 요건 중 기본재산 미확보가 드러났다. 재단 설립 당시 일가친척의 과수원‧논밭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몇 건은 등기 서류를 내지 않아 차후 보완 각서를 제출한 뒤 설립을 인가받은 게 문제였다. 담당 검사는 재단을 문 닫게 할 작정으로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우봉은 눈앞이 캄캄했다.드디어 검찰에 출두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사이 담당 검사가 바뀌어 있었다. 새 검사는 설명을 들은 뒤 “서류 보완 시기가 늦었을 뿐 사기성은 없으니 돌아가 학생이나 열심히 가르치라”고 격려했다. 우봉은 “그 말이 천사의 음성 같았다”고 회고했다. 기사회생이다.◆중·고교 등 12개의 매머드 사학재단 일궈재단의 모체인 협성상고는 1975년 대명동에서 현재의 봉덕동 교사로 이전한다. 재단 건물 남쪽이다. 협성상고는 1985년 다시 일반계인 협성고로 전환한다. 협성고는 이후 명문의 반열에 오른다. 대명동 일대가 부촌(富村)으로 수성구가 떠오르기 전이다. 한동안 협성고는 서울대 합격생 수에서 대구지역 상위를 다투었다. 1980년엔 재단에 마지막으로 경일여고가 세워졌다. 대구의 유일한 자율형 여자 사립고다. 협성교육재단은 중‧고교 등 12개 학교가 소속돼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세운 중등학교로 숫자가 가장 많은 교육재단이다. 학생들과 함께 교정을 걷고 있는 신진욱. 1955년 재단 설립 이래 지난해 2월까지 유치원 포함 12개 산하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모두 30만3천900여 명. 또 재학생은 6천680여 명에 전체 교직원은 530명쯤이다. 전성기엔 재학생이 2만까지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교육자 우봉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어떨까.지역에서 교장을 지낸 한 인사(81)는 “그를 참교육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으냐”고 지적했다. 오랜 기간 정치에 발을 걸쳤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재단 산하 소선여중을 나온 한 졸업생(55)은 “설립자가 어머니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붙이고 어머니 생신날 가족과 함께 학교를 찾아와 전교생이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건 어딘가 씁쓸하다”고 회상했다. 시민들의 평가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다.◆정치에도 큰 족적 남겨우봉은 생전에 스스로 “본업은 교육, 정치는 외도”라고 표현했지만 정치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국회 진출 꿈은 집요했다. 그는 5대 총선에 고향 의성에서 36세 나이로 첫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6‧7대는 대구 남구로 출마했다. 다시 연거푸 낙선한다. 3전 4기. 1971년 8대 총선에서 우봉은 마침내 당선증을 거머쥔다. 그것도 이효상 국회의장을 1만3천여 표 차로 이긴 짜릿한 승리였다. 신진욱은 평생을 야당생활을 했다. 1971년 대구 남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신진욱과 재단은 숱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진은 민주화 투쟁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모습. 신진욱은1973년 9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국민투표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구속 40일 만에 풀려났다. 출소 후 대구교도소 앞에서 지인들과 함께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은 1년7개월 만에 끝이 난다. 1973년 그는 다시 9대에 출마하지만 이번에는 국민투표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화원 대구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옥중에서 낙선 소식을 듣는다. 구속 기간은 40일에 불과했지만 그의 정치 활동은 발이 묶였다. 1984년 정치인 해금으로 우봉은 정치를 재개한다. 그리고 14대에 민주당 전국구로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우봉은 사학을 운영하면서 30년을 이렇게 가시밭길인 야당과 더불어 산 풍운아였다.◆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사치와 낭비 몰라 신진욱 부부의 단란한 한 때. 부인(장경옥)은 경북예고 교장 등을 지내며 재단을 함께 이끈 동반자였다. 그는 어머니의 뜻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한때의 포부였던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대구 남산교회의 장로였고 선교에 열심이었다. 또 1975년에는 동심교회를 세웠다. 그가 3남 3녀 자식들에게 자주 말했다는 세상에 산 표적을 남기려면 “첫째, 학교를 지어라. 둘째, 병원을 지어라. 셋째, 교회를 지어라” 중 두 가지를 실현한 것이다. 부인(장경옥)은 경북예고 교장 등을 지내며 재단을 함께 이끈 동반자였다.그는 교회 설립과 함께 5대조(회병 신체인)의 강학 공간이던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의성 봉양에 중건하고 1981년에는 금산서원(錦山書院)으로 승격시킨다. 회병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이상정의 제자였다. 우봉은 그래서 퇴계 선생을 누구보다 흠모했다. 또 과거에 급제한 뒤 승지를 지낸 11대조(오봉 신지제)를 그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었다. 그가 즐겨 쓴 우봉(又峰‧友峰‧愚峰)이란 호(號)의 ‘봉’도 자신이 따르고 싶었던 오봉 선조에서 유래한다. 자신이 경영한 교육재단의 연원(淵源)은 이렇게 금연정사로 이어진다.우봉은 자전 에세이 ‘아직도 할 일이 많다’에 ‘내 돈 씀씀이가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이유를 자수성가한 데다 사치‧낭비를 모르는 생활 철학으로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남에게 만족하게 쓰지 못했다고 술회했다.직원은 학원장이 그런 가운데도 유머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재단 박 실장은 “한번은 학원장이 이사장(신철원)과 길을 가다가 음식점 아주머니의 인사를 받고는 ‘우리 아들인데 다음에 가면 밥 많이 주이소’ 하자 아주머니가 크게 웃더라”고 했다. 스스로 밝힌 좌우명도 ‘얼굴에는 미소가/머리에는 지혜가/가슴에는 사랑이/손에는 일이 있어라’였다.우봉은 2014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유택(幽宅)은 고향 선영에 마련됐다. 유학자 김창회는 묘비에 “(우봉은) 오직 내 갈 길은 내가 개척하라는 좌우명을 실천하고 협성 가족 모두에게 깊이 심었다”고 적었다.우봉은 수많은 이력만큼 평가도 다양하다. 그래도 열정으로 국내 최대 중등 사학재단을 일구고 또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몸을 사리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신진욱 연보‧192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 출생‧1931년 의성 봉양초 입학‧1942년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졸업‧1944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초등학교 교사‧1950년 경주 문화고등학교 교사‧1952년 사회복지법인 자혜원 설립(경주‧의성)‧1955년 협성상업고등학교 설립‧1968년 한국 YMCA 연맹 이사‧1970년 대구 남산교회 장로‧1971년 제8대 국회의원 당선(신민당, 대구 남구)‧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구속‧1977년 대구 동심교회 설립‧1980년 경일여자고등학교 설립‧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당선(민주당, 전국구), 국회 한일의원연맹 부회장‧2000년 재단법인 협성장학재단 설립‧2014년 타계

‘괴물’ 4대 강, ‘보물’될 수 있다

홍석봉편집위원최근 ‘4대 강 사업’과 관련한 두 가지 언론 보도가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4대강 사업 후 금강 수질이 좋아졌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대구지방환경청이 낙동강 상류 구미보 수문을 개방한다는 것이었다.박석순 이화여대 교수가 4대 강 사업 이후 금강 수질이 개선됐다는 내용의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게재했다.논문은 4대 강 사업 전인 2009년과 사업 후인 2013년 금강 하류의 수질을 비교한 결과 수질 평가 지표인 생화학적 산소요구량(BOD)과 화학적 산소요구량(COD), 총인(TP), 클로로필a(ChI-a 등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박 교수의 논문 자료는 수질 변화 분석에 필요한 포괄적 자료가 아니고 한 측면만의 자료였다며 반박하는 이도 있지만 4대강 사업 후의 수질오염이 심화됐다는 정부와 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뒤엎는 결과다.또한 수질 악화 등을 이유로 4대 강 보(洑) 개방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 정책과는 정면 배치되는 연구 결과여서 주목받았다.-수질 논란 4대 강 사업, 보 수문 열어 물 관리 시험대대구지방환경청은 지난 24일 구미보 수문을 개방했다. 보 수위를 떨어뜨렸다가 3월 영농철에 맞춰 수위를 회복할 계획이라고 한다. 보 개방 관측 자료는 다른 보의 수문 개방 자료로 활용하겠단다.환경부는 지난해 상주·낙단·구미보 등 낙동강 상류 3개 보를 개방해 모니터링할 계획이었지만 지자체와 농민 반발로 미뤄왔다.4대강 사업은 2009년 시작돼 2013년 초 마무리됐다. 수질 개선, 가뭄· 홍수 예방 등을 위해 22조2천억 원의 천문학적 비용이 투입됐다.4대 강 사업은 대운하 사업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MB가 환경전문가 등의 거센 반발에 따라 국면 전환용으로 시행했다. 나중에 운하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 뒀다.하지만 해마다 4대 강 유역에서 녹조가 창궐, ‘녹조라떼’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물고기 떼죽음 등 피해도 잇따랐다.4대 강 사업은 2012년부터 2018년까지 4차례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마지막 감사는 2017년 문재인 정부 때 실시됐다. 4대강 적폐를 캐는 게 주목적이었다.주무 부처의 실증적 검토 없이 MB 지시에 따라 일방 진행됐으며 경제성 분석 결과 50년간 총비용은 31조 원인 반면 총편익은 6조6천억 원에 그치는 등 경제성 없는 사업으로 결론을 냈다.이후 여름철 녹조 등 수질오염이 문제가 돼 실패한 ‘적폐 사업’으로 몰렸고 4대강 사업이 환경보다 일자리 창출에만 신경 쓴 무리한 토목공사라는 비판이 제기됐다.또 수질오염 논란과 함께 투입된 비용 대비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며 철거주장이 나오는 등 ‘괴물’이 됐다.적폐 취급을 받으며 원상복구 논란을 빚었던 4대 강은 현재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주눅 들었던 지역민, 마음의 빚 벗어버려야4대 강 사업은 당초 목적이었던 치수 사업은 성공했다. 과거 4대 강 사업 공사 이전에는 해마다 홍수 복구비로 수천억 원이 들어갔으나 4대 강 사업 이후에는 해마다 50억 원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낙동강 등 유역의 가뭄 피해도 줄였다.다만 수질 오염이 문제였다. 수질 문제는 수자원공사와 감사원 등의 조사에 의해 4대 강 사업 이후 개선된 곳이 더 많다는 결과도 이미 나왔었다. 4대 강을 적폐로 모는 주장이 워낙 거세 당국의 조사발표조차 믿지 않는 분위기가 더 컸기에 4대 강 사업 후 수질 개선 주장은 ‘쇠기에 경 읽기’가 됐다.수질 오염도 금강 사례에서 드러났듯 오명을 벗는 분위기다. 또한 이번에 보 개방 시험을 통해 물을 적시에 가뒀다가 빼내면 오염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이제 적어도 4대 강 사업을 적폐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게 됐다. 보 개방 관리만 성공적으로 드러나면 4대 강 사업은 ‘괴물’에서 ‘보물’이 될 수도 있다.문재인 정부의 적폐 규정은 과장임이 드러났다. 4대 강 이야기만 나오면 괜스레 주눅 들어 하던 대구·경북 지역민들이었다. 이젠 그런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앞으로 4대 강의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자원화해 기껏 만들어 놓은 국가 재산을 헛되이 만드는 우(愚)는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홍석봉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