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대왕-①즉위…한 발 물러나 ‘힘의 구도’ 재편 천재지변에 왕좌를 움켜쥐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이다. 그는 내물왕 12대손으로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했다.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6대 혜공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김양상을 선덕왕에 즉위하게 하고 김경신은 스스로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잡고는 본격적인 권력의 구도를 재편하기 시작했다.선덕왕의 뒤를 이어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어디에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혜공왕을 살해하고, 김양상을 또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김경신의 왕권에 대한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결국 원성왕 즉위 이후 신라는 왕좌를 두고 죽이고 죽는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천 년 사직이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삼국유사: 원성대왕이찬 김주완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때 원성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자리에 있었다. 왕이 하루는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십이현금을 끼고 천관사의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깨어나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다. “두건을 벗은 것은 직위를 잃는 조짐이고, 십이현금을 낀 것은 형틀을 차는 징조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히는 징조이고요.”왕은 이를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이 은밀히 왕을 뵙고자 하였으나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다시 통지가 오기를 “한 번만 뵙고자 합니다” 하니 왕이 응낙하였다.“공께서는 무슨 일로 그다지 꺼리십니까?”왕은 꿈을 점친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고 “이는 곧 매우 좋은 꿈입니다. 만약 공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께 맞는 해몽을 해 드리지요.”이에 왕은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 오지 못하게 한 다음 해몽을 부탁했다.“두건을 벗은 것은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 위에 없음이요, 흰 갓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십이현금을 낀 것은 열두 손대까지 이어질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움입니다.”“위로 주원이 있는데 어찌 윗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 하자 “청컨대 은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지내면 됩니다.” 왕은 그의 말에 따랐다.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이 죽었다. 사람들이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와 즉위하였다. 주원의 부하들이 모두 복종을 하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바로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고 김씨인데 대개 좋은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주원은 명주로 물러가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어 그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내려 주었다. 왕의 후손이 다섯인데 혜충태자, 헌평태자, 예영잡간, 대룡부인, 소룡부인 등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김경신의 조용한 쿠데타김경신은 전략가이면서 행동가이지만 직접 행하는 것보다 심복이나 주변 인물을 시켜서 뜻을 이루어가는 지시형 스타일이다.김지정의 난을 유발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도 김경신의 전략에 의한 작품이다. 이 또한 김경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철저한 계획에 따른 절차였다.김양상이 선덕왕에 즉위하면서 상대등의 자리를 꿰어찬 김경신은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경신은 선덕왕과 대신들이 자신보다 위의 상재로 있는 김주원을 차기 왕으로 점찍고 있을 때도 노골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장기적인 충실한 계획이 있었고 그는 또 그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김경신은 상대등으로써 입지를 굳혀 병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인사와 재정, 공부와 형부, 예부까지 대신들을 모두 자신의 수족으로 채웠다. 그 시간이 5년이나 걸렸지만 김경신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선덕왕 재위 6년에 이른 어느 여름 태풍이 동해안을 휩쓸고 서라벌에 상륙할 때였다. 김경신은 조용하게 병부의 대신을 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태풍이 서라벌을 지나갈 무렵 알천이 범람하는 때가 거사일이요. 만약에 대비해 병사들을 배치하고, 대신들에는 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함구하시오”라고 조용히 밀지를 내렸다.김경신은 전략가답게 김주원의 집이 알천을 건너 북쪽에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권을 손에 넣는 방법을 선택했다. 알천이 범람하면 북쪽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길은 차단된다. 토함산 고개를 넘어 명활산성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지만 지세가 험하고, 우기에는 무성하게 자란 잡목 때문에 군사들이 대규모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알천은 매년 여름 적어도 두세 번은 범람했다. 김주원이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면 궁궐로 들어가는 길이 차단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 북쪽의 집을 고집했던 데는 뚜렷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선조들의 터전을 버릴 수 없다는 것과 복잡한 업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김경신은 그 두 가지를 아주 적절하고도 교묘하게 이용했다. 상재의 위치에 있는 김주원에게 잡다한 민원성 업무는 모조리 넘겼다. 골치 아프게 내전에서 일하도록 주원을 묶어두고, 대내외적인 행사는 상대등인 김경신 자신이 처리하면서 실권을 휘둘렀다. “백성의 아픔을 헤아리는 중요한 일은 상재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원을 인정해주는 척하며 철저하게 내전에 고립시켜 각 부서의 실권자들과 친화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했다.내성적인 김주원의 성격을 파악한 김경신의 약삭빠른 처세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주도면밀해 김주원도 무어라 항변할 길도 없었다.선덕왕 6년 785년 음력 칠월 그믐께 긴 장마가 기승을 부리며 폭우를 동반한 태풍으로 돌변해 알천이 크게 범람한 깊은 밤. 비수를 품은 김경신이 왕을 치료하는 의사를 대동하고 왕의 침소를 찾았다. 내실 주변에는 살수의 눈을 번뜩이는 김경신의 병사들이 곳곳에 몸을 숨기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불편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만 겨우 일으켜 앉은 선덕왕은 주치의가 들고 온 약사발을 청하여 받아들었다. 왕은 김경신을 지긋이 바라보며 “내가 진작 대업을 경에게 넘겨야 하는데 눈 어두운 대신들의 중언부언에 밀려 늦었소. 백성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기 바라오”라며 부탁하고는 천천히 약사발을 기울였다. 선덕왕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과 김경신이 추진하는 전략을 인지하고, 그의 뜻을 암묵적으로 따르기로 벌써 작정하고 있었다. 선덕왕은 이제나저제나 하던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왕표를 받아든 김경신은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오. 아무도 피 흘리지 않고, 백성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겠소”라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선왕을 반듯하게 누이고는 천천히 돌아서 성큼성큼 왕좌에 올랐다. 그가 신라 제38대 원성왕으로 52대 효공왕까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본격적인 신라 멸망으로 가는 피의 시대 개막이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혜공왕…정사 외면하고 백성을 등진 임금 분노의 파바람 천지가 진동하네

신라 제36대 혜공왕은 경덕왕이 하늘에 빌어 늦게 낳은 아들이다.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해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각간의 난을 비롯 많은 반란이 있었다.혜공왕 시대에 많은 난이 일어났던 것은 측근과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정치적인 목적에서의 싸움과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오락에 빠져 이에 대한 반대세력들의 반란이 주를 이루었다.혜공왕은 결국 김지정의 난이 발생해 김양상과 김경신이 진압하는 과정에 살해되는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혜공왕 때 처음으로 5묘를 지정해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5묘는 김씨의 시조 미추왕,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과 문무왕,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이다.혜공왕은 경덕왕에 이어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원래 봉덕사에 있었는데 1460년 영묘사로 옮겼다가 홍수로 떠내려가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관했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을 새로 지어 지금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삼국유사: 혜공왕대력 초년(766)이었다. 강주의 관청 건물 본관의 동쪽 땅이 점점 함몰하더니 연못이 되었다. 세로가 13척이고, 가로가 7척인데 어디선가 잉어 대여섯 마리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연못 또한 따라서 커졌다.정미년(767)에 이르러 천구성이 동쪽 누각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만 하고 꼬리는 3척쯤 되며 색깔은 타는 불 같았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또 이해 김포현에서는 논 5경 가운데 모든 쌀알이 이삭이 되었다. 이해 7월 북궁의 뜨락에 별 두 개가 땅에 떨어지고 또 하나가 떨어졌는데 세별이 모두 땅속에 파묻혔다.이보다 앞서 대궐 북쪽 뒷간 속에서 두 가닥 연꽃이 피어났고, 또 봉성사 밭 가운데서 연꽃이 피었다.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공작새가 수없이 모여들었다.안국병법의 하권에 따르자면 천하에 군사가 큰 난을 일으킬 것이었다. 이때 대사면을 내리고 살펴보며 조심하였다.7월3일 대공 각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왕도와 5도의 주군 모두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워 큰 난이 일었다. 대공 각간의 집은 없어지고, 그 집의 보물과 비단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신성과 장창에 불이 나 타버렸다. 역모를 저지른 무리의 보물과 곡식은 사량과 모량 등 마을 가운데 있었는데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난은 석 달 남짓 되어 그쳤다. 상급을 받은 자가 자못 많았고, 죽임을 당한 자도 무수히 많았다. 표훈대사의 말에 나라가 위태롭다 함이 이것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왕의 죽음혜공왕은 어려서부터 후궁과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라면서 심성 또한 점점 여성스러움에 길들여졌다. 왕위에 올라 있었지만 어머니의 섭정으로 정사가 진행되자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경향을 보였다. 혜공왕이 성인기에 접어들었어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 등의 대신들이 정치를 주물렀다.김양상 등의 대신들이 정권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그들의 전횡이 심해지자 실세에서 밀려난 혜공왕의 삼촌과 사촌, 김사인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기를 들면서 대신들 간의 갈등이 심화됐다.혜공왕 초기에는 김사공과 김사인 등의 대신들이 상대등과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휘둘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양상이 상대등에 오르는 등으로 세력의 균형이 바뀌면서 대립의 강도가 커졌다.김사인 계열의 김대공과 대렴 형제가 각간들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공 형제는 지방의 귀족까지 상당히 많은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궁궐 내부까지 진입하지는 못했다. 중앙세력을 김양상과 김주원, 김경신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96명의 각간들이 서로 패가름을 하여 전쟁을 치른 결과 대공 형제는 실패해 죽음을 맞았다.대신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혜공왕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혜공왕이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음색에 빠져들며 정사에는 소홀하고, 대를 이을 후계자 또한 마땅치 않았다. 이러한 정황들은 무열왕의 12대손인 김경신이 최고 권력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특히 혜공왕이 여색을 가까이하는 한편 대신들의 자제 가운데 인물이 뛰어난 남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함께 밤을 보내는 등으로 대신들의 공적으로 떠올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반란과 대신들의 이합집산은 김경신이 자신의 자리를 굳혀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김경신은 내물왕의 직계인 김양상이 상대등의 자리에 앉자 적극 동조자가 되어 김주원과 함께 내물왕계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했다. 경신은 김양상을 앞세워 병권을 거머쥐고, 인사·재정·공부에 이어 형부까지 전권을 수중에 집어넣었다.김경신은 반골기질이 뚜렷한 김지정을 희생의 제물로 점지했다. 그의 아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혜공왕의 여자 아닌 남자로 만들었다. 이어 속이 달아오른 김지정을 벽지 고을로 보낸다는 소문을 흘려 감정의 꼭짓점을 한껏 자극했다.김지정이 김경신의 그물망에 뛰어들었다. 김지정은 지방의 귀족세력까지 두텁게 포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각간의 난을 교훈 삼아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지방의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궁궐 내부 깊숙이 동조세력을 심었다.혜공왕이 24세의 생일을 자축하는 잔치를 1주일에 걸쳐 벌이는 기간이 김지정이 잡은 반란 D-Day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김양상과 김경신의 무리도 왕의 잔치에 적당히 취해 자리를 피하고, 자신의 세계로 빠져드는 혜공왕의 침소까지 김지정은 쉽게 접수했다.김지정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개로 삼은 혜공왕을 단칼에 죽였다. 그러나 나라의 왕좌에 오를 주인공을 정하지 못했다. 김지정의 무리가 왕좌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궁궐 내외부의 분위기는 더욱 어지러워졌다.김경신이 깔아둔 덫이었다. 김지정을 지원하고 나섰던 궁궐 내부의 조력자 대부분이 김경신의 사주를 받은 첩자들이었다. 혜공왕의 죽음을 묻어두고 자신들의 공을 서로 추켜세우기도 하며 어수선한 분위기에 빠져 지방의 동조세력 우두머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벌이던 어느 날. 술을 마신 김지정의 무리는 모두 약물에 마취되어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다음날 아침 포승줄에 묶여 올가미를 쓴 채 무릎을 꿇었다. 김지정의 일족은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김경신은 무열왕의 10대손 상대등 김양상을 왕위에 올렸다. 김경신의 잔꾀로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이다. 이어 김경신은 상대등이 되어 나라의 전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김양상의 조카 김주원이 서열상 자신의 윗자리에 있어 다음 전략을 추진해야 했다.김양상은 천성이 곱고 선이 굵지 않았으며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김경신이 주장하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왕관을 쓰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지 6년에 접어드는 시기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혜공왕과 선덕왕의 죽음은 김경신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작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덕왕과 표훈대덕…하늘의 경고에도 ‘딸보다 아들’ 욕심에 대가를 치르다

경덕왕이 통일신라 불교문화를 최고의 극치에 이르는 정점으로 끌어올린 시대의 통치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덕왕의 큰아들이 왕비의 폐비에 이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둘째 효성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귀족 정치에 휘둘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경덕왕은 귀족세력이 오랜 기간 두텁게 자리를 잡고, 왕위까지 능히 간섭하는 정치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여러 각도로 추진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도 곳곳에서 나타난다.당시 불교적 사상이 통치이념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진표, 법해와 대현, 원표스님과 월명사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스님과 교류를 맺었던 기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안민가를 지어 바친 충담, 아들을 얻기 위한 노력에 관여한 표훈과의 교류는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를 뚜렷하게 조명한다.삼국유사가 경덕왕의 정치적 행보에 크나큰 영향을 행사했던 스님으로 분류하고 있는 충담과의 관계에 이어 표훈과의 관계를 살펴본다.◆삼국유사: 경덕왕과 표훈대덕왕은 옥경의 길이가 8촌이나 되었다. 왕비가 아들을 두지 못하자 폐위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는 만월부인이다.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김의충 각간의 딸이다.왕이 하루는 표훈대사를 불러 명을 내렸다. “짐이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대사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얻었으면 하오.”표훈이 상제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상제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고 답했다.“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 주시오.”표훈이 다시 상제께 이를 청하자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이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표훈이 와서 상제의 말씀을 전하자 왕이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라고 말했다.곧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섭정했지만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어린 왕은 여자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 이윽고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김양상과 김경신에게 죽임을 당했다.표훈대사 다음으로 신라에는 성인이 나지 않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경덕왕의 고민과 표훈대덕성덕왕이 이뤄 놓은 왕권의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려 버렸다. 김순원과 김순정, 김의충 등이 성덕왕에 이어 효성왕, 경덕왕까지 자신들의 딸을 왕비로 추천하면서 내정에 깊숙이 개입해 전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권, 인사, 재정, 형부, 공부, 예부 등 여섯 부문의 주요 관직을 꿰차고는 끝없는 힘겨루기로 권력구도를 재편하며 나라 살림이 기우는 것도 몰랐다.경덕왕은 즉위 1년 만에 아들이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비를 내쫓고 새로운 왕비를 맞도록 하는 등 왕실 내부까지 귀족세력의 힘이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자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하게 관제를 개혁했다.국학을 장려하기 위해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고 관직의 명칭을 크게 바꾸었다. 또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는 정찰을 임명해 권한을 주어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다. 지방관리들에게 월급 대신 녹읍을 주어 부정부패를 없애려 했다.경덕왕은 대신들이 왕비와 후궁을 선택해 궁궐로 들여보내 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계 구도를 잇기 위해 태자가 태어나지 못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했다. 이어 아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끊임없이 왕비를 폐비하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간청했다.경덕왕은 스스로 왕비를 지키지 못하는 지아비는 백성의 아비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대신들의 세력으로 폐비 절차를 밟는 일은 없애겠다고 다짐해 처음 이후 그를 지켰다.백성의 정신적인 평안을 위해 불교를 장려해 굴불사와 불국사를 건립하고, 석굴암을 축조했다. 내적으로는 관제 개혁에 이어 태자 살리기 전략을 구상했다. 대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후궁세력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는 뛰어난 무인들을 암암리에 배치하고 운영하는 조직을 가동했다.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거대한 용을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데 옷자락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을 정도로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초청해 국사를 맡겼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점잖게 사양하면서 “제게서 공부한 제자 표훈이 있사온데 옆에 두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자를 천거했다.경덕왕이 그의 말을 듣고 의상의 제자 표훈을 황룡사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들었다. 그때 저녁 공양 이후에는 표훈이 어김없이 황룡사 9층 목탑에서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훈이 탑돌이를 할 때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는데 발자국을 뗄 때마다 공중을 마치 평지처럼 내달으며 9층 목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탑 외부를 공중부양한 채 목탁을 치며 낭낭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웠다.표훈은 이미 경덕왕이 자신의 도력을 시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왕이 보는 앞에서 공중을 부양하며 탑돌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왕은 표훈의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주변을 지키며 후궁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했다.이어 경덕왕은 누구든지 왕비와 후궁들이 아이를 낳는데 방해를 하거나 위해를 끼치면 역적과 같이 간주하고, 3대를 멸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어 여섯 명의 후궁들이 아이를 편안하게 낳을 수 있도록 각자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왕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다. 경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어가도록 왕비와 후궁 누구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왕비는 물론 여섯 명의 후궁들까지 아무도 임신조차 못했다.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태자에 대한 욕심이 깊어졌다. 또 대신들의 끝 모를 정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태자의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왕은 대신들에게 천명했다. 왕비는 물론 후궁 중에서 가장 먼저 아들을 낳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했다. 이어 태어나는 태자의 안전을 위해 왕실과 같은 수준의 호위를 받게 해줄 것이라 약속했다. 그 이후 3년이 지나 기적같이 왕비가 아들을 낳았고, 표훈이 동궁 주변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결계를 치고, 태자의 신변을 지켰다.경덕왕은 태자가 8살 되던 해에 죽음을 맞으며 태자가 왕위를 잇고, 왕후가 섭정하며 대신들이 모두 협조하도록 유언했다. 대신들의 세력 다툼은 경덕왕이 죽은 이후 더욱 기승을 부려 아들 혜공왕은 끝내 반란군의 칼에 죽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