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은 지나치다

오철환객원논설위원국회가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을 통과시켰다. 사람이 숨지거나 크게 다치는 산업재해가 발생한 경우 경영자 등 그 책임자(이하 사업주)에게 형사상 책임을 지우는 법이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막자는데 반대할 명분은 세상에 없다. 자기 사업장이나 협력업체에서 산재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사업주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업주의 도덕성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재해 발생이 영리추구라는 기업경영의 목적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업현장을 방치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근로자의 건강과 생명이 영리추구 과정에서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중대재해법도 그런 취지다.산재 발생을 시장에 맡겨둘 경우, 재해를 무릅쓰고 열악한 환경에서 근로자를 혹사해서 얻는 이익증분이 재해 발생의 증가로 인한 손실증분과 일치하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균형을 이룰 것이다. 현실적으로 산재 감소로 인한 이득이 산업안전에 쓰는 비용보다 큰 범위에서 유인이 발생한다. 산재의 비효용을 증가시켜주면 그 방지를 위한 지출을 늘리게 된다는 결론이다. 산재 발생 시 사업주에게도 페널티를 주는 중대재해법은 산재의 비효용을 높이는 입법적 시도다.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 확실히 산재가 줄 수 있다. 산재의 비효용이 엄청나게 커짐에 따라 그 예방을 위한 비용이 큰 폭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비용엔 근로시간 감소나 노동 강도 약화로 인한 생산력 감축과 기계화나 자동화를 통한 생력화 투자의 기회비용도 포함된다. 생산력 감축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생력화 투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은 퇴출될 것이다. 기업이 문을 닫고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는다. 실업이 증가하고 세금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산업재해가 없어지긴 할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지만.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한 방법은 사업주와 근로자가 윈·윈 하는 접점을 찾는 것이다. 상대방이 있는 문제의 경우,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해보고 상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기본이다. 사업주와 근로자가 함께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시스템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만 고려해 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입안한다면 그것은 외눈박이 해결책이다. 중대재해법은 근로자의 입장만 반영한 절름발이 법이다. 사업주와 근로자가 합의한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분배할 파이를 키우면서 상생하는 방법이다.중대재해법은 무과실에 대해 처벌하는 것으로 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 민법은 ‘과실 책임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고의가 있거나 객관적 주의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한해 그 책임을 묻는다. 세상이 복잡다기해지면서 일상 속에 위험이 상존함에 따라 가해자의 과실여부를 묻지 않고 책임을 지도록 하는 무과실책임주의가 각종 특별법에 의해 예외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무과실책임주의는 고의나 과실이 없어도 그 책임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제어하고 편안한 사회생활을 방해한다. 따라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무과실책임을 인정함으로써 그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산업재해 분야에 무과실책임을 도입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렇지만 산재보험을 활용하는 등 현 산재법 체계 내에서 국가가 확실히 책임지거나 법인격을 가진 기업이 일정부분 책임을 부담하는 정도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무과실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주에게 형사상 처벌까지 부과하는 것은 지나치다. 피해자를 두텁게 보호하자는 선의가 아무리 가치 있다고 하더라도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를 다하고 있는 무과실의 사업주에게 징역이나 벌금을 부과하는 입법은 불합리하고 가혹하다.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도 어긋난다.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과실이 없는 선량한 사업주를 처벌해야 정의롭고 공정하다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중대재해법이 정당하다면 대형사고가 나서 인명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논리다.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를 국가가 보상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통령에게 그 형사책임까지 물어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하는 건 지나친 억지논리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산재를 당해 인명피해가 크다는 이유로 사업주를 처벌하는 입법은 성급하고 감정적이다. 선거를 앞두고 표 계산을 한 입법이라면 최악의 포퓰리즘이다.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자천교회

경북 영천 화북면에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한 교회가 있다.바로 ‘자천교회’다.자천교회가 위치한 화북면은 태백산맥의 준봉인 보현산을 끼고 이로부터 발원한 횡계천과 고현천이 흐르고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현재 젊은이들이 다 떠나간 후 대부분 어르신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번성한 마을 중 하나였다.자천교회를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있는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천교회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1년에 3만여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찾았다.특히 자천교회를 설립한 권헌중(1865~1925) 장로에 대한 이야기는 각박해지고 있는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자천교회 시작, 그리고 과거와 현재영천 화북면 보현산 자락에 있는 자천교회는 미국 북 장로교에서 파송된 제임스 아담스(안의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 장로가 세운 교회다.제임스 아담스 선교사는 1895년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경북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98년 4월 전도차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순회하던 중 영천과 청송의 경계 지점인 노귀재에서 권헌중을 만나 선교했다. 같은해 10월 권헌중이 화북면 자천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해 서당 겸 기도소로 사용하면서 자천교회의 역사는 시작됐다.이후 교회가 조금씩 번성하게 되자 권헌중 장로는 좀 더 큰 예배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사재를 들여 1904년 현재의 16칸 목조건물의 예배당을 완공했다.이렇게 시작된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축 이후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을 함께 펼쳤다.권헌중 목사는 암울한 민족의 미래를 밝혀나가기 위해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구식인 서당 교육을 벗어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권 목사는 선교사들이 실시한 근대식 학교 교육 제도를 도입해 자천교회 예배당에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했다. 주일학교가 아닌 교회학교로서 근대식 공교육의 현장이었다.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수탈이 이어지면서 자천교회 또한 어려움에 직면했다.자천교회의 대들보였던 권헌중 장로가 1925년 별세해 교회의 앞날은 더욱 암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르러 도회지에서 전입해 온 양재황, 이복조 부부의 헌신으로 활기를 되찾았다.일제가 대동아전쟁에 광분해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자 전국에 걸쳐 잔혹한 수탈을 자행한 당시 자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의 귀중한 종이 공출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가 예배당에 가마니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어 교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일제의 핍박을 버틴 자천교회는 광복을 맞아 교회 재건에 힘썼다.하지만 좌우 이념 대립으로 피해를 받았다.대구 10·1사건 여파가 영천 자천리 마을까지 전해졌다.좌익 가담자들이 준동해 우익 인사들에게 해를 가했고 그 과정에서 자천교회 부속 건물이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6·25전 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천이 북한군의 점령지가 되자 자천교회 예배당은 북한군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북한군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교인들이 예배당 지붕에 하얀 횟가루로 ‘CHURCH’라고 표시해 예배당을 보존한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권헌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자천교회를 세운 권헌중 장로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오롯이 나라와 지역민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그는 경주에서 서당훈장을 지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의병으로 활동을 했다. 의병활동의 전력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청송과 영천의 경계가 되는 노귀재를 넘던 중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고 대구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지금의 영천 화북면 자천리에 정착했다.이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니 자천리 주민의 반발이 심했다.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천주교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이 완고했던 터라 “우리 마을에 야소교가 웬 말이냐”며 반대에 부딪쳤다.이에 권 장로는 당시 마을이 꽤 번성해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음에도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음을 간파하고 “내가 마을에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 줄 테니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제의했다.결국 마을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은 권헌중 장로는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해 서당을 겸한 교회를 시작하게 됐다.기도처처럼 교회를 시작하다 보니 서당 겸 가정교회로 출발했다.교인이 늘기 시작하자 예배당 역시 사재를 털어 지었다. 애초 교육자, 민족의식을 가졌던 권 장로는 ‘신성학교’를 세웠다. 1913년 1회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당시 50명이 모였다. 이중 여학생은 단 1명이었는데 자신의 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계집아이 글 가르쳐서 뭐하느냐”며 딸자식을 보내지 않자 권헌중 장로가 주민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솔선수범했다.이후 학교가 마을에 긍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주민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 여학생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됐다.자천교회는 선교사가 재정적 지원을 해준 교회가 아니다 보니 권 장로의 고심은 깊어져 갔다. 교회에 빚이 생기자 권헌중 장로는 자신의 논밭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 자기 살던 집을 담보로 잡혀 있었고 결국 다른사람에게 넘어갔다. 현재 자천교회 부지는 예배당과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 한옥 교육관인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신성학당이 있던 부지는 영천의 한 재력가에게 넘어가면서 예배당과 신성학당은 돌담으로 단절돼 있었다. 권헌중 장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마음이 통했을까.2007년 신성학당 부지의 주인의 아들이 교회에 기증을 했고 초창기 교회 터 일대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과거 권헌중 장로가 살았던 곳이자 재력가가 살았던 이 집은 오늘날 신성학당으로 재탄생됐고 이곳에서 전국 유일무이한 ‘처치스테이’가 진행되고 있다.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자천교회의 역사적 가치는 독특한 예배당 구조를 들여다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자천교회 예배당은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으로서 독특한 ‘ㅡ자형’ 구조를 가졌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은 ‘ㄱ자형’, ‘정방형’, ‘장방형’ 등의 형태가 일반적이다.자천교회는 똑같은 장방형 집 두 채를 나란히 ‘ㅡ자형’으로 배치한 겹집 양식이다.‘ㅡ자형’ 겹집 구조로 독특한 지붕 모양을 갖게 됐다. 자천교회의 지붕은 아주 짧은 용마루를 가진 ‘우진각’ 형태로서 이는 전후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이다.자천교회 지붕이 극단적으로 짧은 용마루를 갖게 된 원인은 내부의 종도리(상량)가 활처럼 굽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종도리는 일직선으로 곧게 돼 있으나 자천교회 예배당은 종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이를 연결점으로 해 종도리를 활처럼 굽게 했다.겹집 구조는 넓고 높은 지붕을 갖게 했다. 따라서 지붕의 하중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서까래를 촘촘하게 깔았으며 실내에 기둥 4개를 세웠다.이 기둥들을 자세히 보면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중앙의 기둥 열을 따르면 강대상에도 수직 기둥이 있어야 하지만 이를 아치형의 기둥으로 대신해 강대상 공간을 자연스럽게 확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또 초기 한국 교회 예배당의 칸막이는 대부분 천으로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했지만 자천교회는 나무 칸막이를 설치했다. 그 이유는 중앙의 기둥들 때문에 휘장을 치는 것에 방해가 되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나무로 잇대어 칸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중석에 앉아서 보면 벽처럼 높은 칸막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지만 강대상의 중앙에서 보면 칸막이는 기둥에 가려 보이질 않아 설교자는 마치 열린 공간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분리된 남녀 공간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자천교회 예배당 건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투박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옥 예배당 가운데 제일 오래되고 고급스런 성공회 강화읍성당 예배당(1900년 건축)과 견줘볼 만하다.자천교회는 시골 목수의 세련되지 못한 솜씨와 인근 보현산에서 난 목재를 가지고 나무 모양 그대로 투박하게 지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지혜를 발휘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 한 예로 예배당 안 뒤편에 온돌방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고 들문을 달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을 표현했다.자천교회 예배당의 건축 양식과 기법들은 예배당은 물론 일반 한옥 구조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어 교회사적, 건축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하지만 아쉬운 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남에도 아직까지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한 채 경북도 문화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가 남긴 신앙의 역사적 유산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예배당과 같은 건축물을 비롯해 서적 등을 말하며 후자는 과거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하는 신앙 삶, 정신,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그런 점에서 자천교회는 유형과 무형을 모두 갖춘 유산이다. 이미 한국 교회에서 자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신교의 초입 이래 토착화로부터 시작해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전 과정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경북도를 비롯해 영천시에서 많은 관심으로 오늘날의 자천교회 모습이 지속되고 있지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경북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거듭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세상읽기…경제도 골든타임이 있다

경제도 골든타임이 있다오철환객원논설위원 코로나19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 기세가 육대주로 번졌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의 집 걱정해야 할 판이다. 남의 집에 번진 불이 활활 타오르는 바람에 집안의 불 끄는 일에 소홀해진 감이 든다. 그동안 절제를 보이던 사람들이 따뜻한 봄날과 함께 찾아온 봄꽃으로 마음이 풀린 듯 나들이에 나서는 모습이 완연하다. 나름 침착하게 대처해왔던 성과가 말짱 도루묵이 되지 않을까. 샴페인을 빨리 터트리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냄비근성은 방역에도 문제다. 아직 마음 놓을 때가 아니다. 마스크 착용은 물리적 거리를 확대하는 효과가 있다. 집회나 모임, 이동을 자제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도 지속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마스크 착용은 미세먼지나 황사도 막아주고 환절기 감기도 예방한다. 일석삼조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모바일과 영상회의를 통하여 결핍을 메워가는 방법을 찾아간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재난은 평소 간과했던 점을 성찰하는 기회다. 그 중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개인주의를 보완하는 미덕으로 공동체를 이어주고 결속한다.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가정하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거리두기를 꾀하면서 절제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시민의식은 어떠한 역병도 극복 가능한 방역체계다. 전염병의 직격탄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선별적 구휼이 절박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영세자영업자와 실업자가 그 부류다. 이런 계층을 효과적으로 분류하여 맞춤형 지원이 즉각 이뤄져야 한다. 상품권이 미지근한 조치라면 현금은 화끈한 처방이다. 지역의 자금유출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긴급한 비상사태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절실한 건 현금이다. 무엇이 절박한지는 본인들이 잘 안다. 생활보호계층과 영세자영업자에게 가계 빚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이러한 서민 사정을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위정자들이 간과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화급하다. 중소기업은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운영자금의 저리 융자도 중요하지만 제품을 사주는 것이 효율적 처방이다. 조달청이나 농협 등을 통해 중소기업제품을 비축해두는 방법이 바람직하다. 중소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실업자를 양산하는 상황도 예측가능하다. 경제위기에서 흔히 소외되는 계층이 중간층이다. 고소득층은 비축 재원이 있기 때문에 국가 지원이 불요하지만 중간층은 그렇지 않다. ‘집 있고, 차 있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되는 중간층도 늘 쪼들리며 간당간당하게 산다. 가계 빚에 시달리는 건 매일반이다. 자식 키우고 부모 돌보며 대소사 챙기다 보면 가계 빚을 피할 수 없다. 가계 빚은 대부분 담보대출이다. 집을 전부 자기 돈으로 사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서민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투기과열지구로 묶고 대출제한을 하는 행태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런 탁상행정은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으로 서민을 내몬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대부분 국민은 강남 집값과 무관하다. 강남에 집 살 생각도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극소수 강남 투기꾼을 잡느라고 대부분의 선량한 국민을 회초리로 친다. 정부는 ‘뻑 하면 지지 않겠다.’, ‘버릇을 고치겠다.’며 악착같이 달려든다. 무슨 열등감이 휩싸인 양. 정부가 국민을 너무 불편하게 만든다. 국민과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려고 한다. 시장을 반드시 이기겠다는 정부가 시장을 이기는 걸 본 일이 없다. 운동권 정권이라 그런지 데모하듯이 몰아붙이길 즐긴다. 이젠 좀 세련된 정치를 해야 할 때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그 위세를 떨치자 세계는 말 그대로 공포의 도가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입출국을 통제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주력하게 되자 세계경제가 얼어붙을 조짐이다. 경기선행지표로 일컬어지는 주가지수가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몰려올 경제위기에 대비해야 함을 시사한다. 지금은 전염병 창궐에 정신이 팔려 국가역량을 방역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경제정책에 손 놓고 있다는 방증이다. 전염병이 휩쓸고 간 자리엔 더 큰 위기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역병이 할퀴고 간 이후를 철저히 대비하는 일이 발등의 불이다. 한시바삐 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월호 사고’에만 골든타임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경제위기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골든타임을 넘기면 경제는 죽는다. 탈원전 철회, 주 52시간 유예 등 잘못 끼운 단추를 한시바삐 풀어야 한다. 각종 규제를 획기적으로 철폐하고 소주성 실험도 끝내야 한다. 대구 수성구의 투기과열지구도 즉각 해제돼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