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물고기 떼죽음 원인은 ‘오리무중’

구미의 한 저수지에서 물고기 1만여 마리가 떼죽음(본보 1월22일 10면)을 당했지만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9일 구미시에 따르면 올해 초 선산읍 내고 저수지에서 붕어 등 민물고기 1만여 마리가 죽은 채 수면 위로 떠올라 지난달 중순께 경북도보건환경연구원, 경북도어업기술센터 등 3곳에 조사를 의뢰했다.하지만 이들 기관에서도 물고기 떼죽음의 원인은 찾아내지 못했다.유해물질이나 독극물 유입이 원인이란 추측과 달리 물고기 사체와 저수지 물에선 독성이나 바이러스, 기준치 이상의 유류 화합물이 검출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수지에서 채취한 물의 용존 산소량은 기준치보다 높게 나타났다.일부 주민들은 용수로 정비공사가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지난해 말께 용수로 정비공사를 하면서 저수지 수위를 1.2m가량 낮췄는데 물고기들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폐사했다는 추측이다.그러나 저수지 수위 변화는 농번기나 갈수기에도 늘 있었던 일이라 1만 마리가 넘는 물고기의 폐사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물고기 떼죽음을 설명할 길이 사라지면서 주민들의 불안은 오히려 커졌다. 당장 봄 농사부터 이 물을 사용해도 되는지 안심할 수 없다.선산읍은 저수지 물을 완전히 뺀 뒤 바닥을 준설해 퇴적물을 제거하기로 했다. 주민들의 동의만 얻으면 다음달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진행할 계획이다.박종수 선산읍장은 “1만 마리가 넘는 물고기 죽었는데도 원인을 몰라 주민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며 “다소 지나친 감은 있지만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저수지를 준설하기로 했다”고 말했다.류성욱 기자 1968plus@idaegu.com

구미시의 번지수 틀린 물고기 떼죽음 조사

구미의 한 저수지에서 물고기가 떼죽음(본보 지난 17일 8면)을 당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정확한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아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수질관리를 맡은 구미시가 초기 대응을 허술하게 해 혼란을 키웠다는 지적이다.올해 초 구미시 선산읍 내고 저수지에서는 붕어 등 민물고기 1만여 마리가 죽은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구미시는 신고를 접수한 뒤 곧바로 기림생명과학원에 수질검사를 의뢰했고 지난 17일 결과를 통보받았다.기림생명과학원은 저수지 수질에서 질소가 기준치보다 높게 검출됐다는 검사결과를 내놨지만 정작 물고기 집단 폐사의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이 검사가 처음부터 독극물이나 오염물질 유입 여부가 아닌 농업용수로서 적합한가를 조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구미시 환경보전과는 뒤늦게 원인을 파악하겠다며 시료를 채취해 경북도보건환경연구원과 경북도어업기술센터에 다시 분석을 의뢰했다. 사건 발생 20여 일 동안 시간과 인력만 낭비한 셈이다.이에 대해 우준수 환경보전과장은 “원래 저수지의 농업용수 수질 관리는 농정과가 관리하게 돼 있다”며 “농정과가 사고 원인을 찾지 못해 협조 차원에서 관련 기관에 검사를 의뢰하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하지만 선산읍이나 농정과의 이야기는 다르다. 사고 직후 선산읍은 농정과와 환경보전과 모두 연락했지만 환경보전과는 소관 사무가 아니라며 발을 뺐다는 것.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눈길이 싸늘하다. 특히 농사를 위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 주민들은 저수지에서 “1만여 마리의 물고기가 죽었는데도 구미시가 소극적인 태도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내고리 주민 A씨는 “믿음을 주지는 못할망정 구미시가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며 “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류성욱 기자 1968plus@idaegu.com

구미 저수지서 물고기 떼죽음…독극물이나 오염물질 유입 가능성

구미의 한 저수지에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구미시가 역학조사에 나섰다.16일 구미시에 따르면 지난 6일 구미시 선산읍 내고 1리에 있는 ‘내고 저수지’에서 물고기 수천 마리가 집단 폐사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내고 저수지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45년 지어진 시설물이다. 유역면적은 64㏊로 5만5천300t의 물을 가둘 수 있다.주민들은 “올해 초부터 저수지의 물고기들이 죽기 시작했다”며 “내고 저수지에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폐사된 물고기는 대부분 크기 20㎝ 내외의 붕어다.시는 사고 직후 기림생명과학원에 농업용 수질 검사를 의뢰하는 한편 폐사된 물고기 수거작업에 나섰다. 지금까지 수거된 양은 한 장당 100마리의 죽은 물고기를 담을 수 있는 비닐 30포대 규모다.하지만 죽은 물고기가 계속해서 늘고 있는데다 겨울철 작업이 어려워 아직까지 수 천마리가 저수지에 방치돼 있다.구미시 관계자는 “보통 여름철에 부영양화가 발생해 물고기가 집단 폐사하긴 하지만 이번 사건에 적용하긴 어려워 보인다”며 “독극물이나 오염물질 유입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지만 저수지 인근에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아 정확한 원인을 밝히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류성욱 기자 1968plus@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41) 장보고

장보고는 신라인이지만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 더욱 유명한 인사로 기록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다.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당나라로 들어가 전쟁에서 맹활약하는 장군이 되었다. 다시 신라로 돌아와 백성을 돌보는 해상왕으로 이름을 날렸다.반란군으로 낙인이 찍혀 허망한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결코 반란을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장보고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왕도를 향해 군사를 움직였다는 내용은 없다. 간신배들의 혀 때문에 충신의 허망한 죽음이 생산된 것이다.해상왕 장보고의 충의와 강직한 신념으로 펼쳤던 업적,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미쳤던 그의 활달한 외교의 흔적을 찾아 오늘날 교훈으로 곱씹어본다.◆역사 속의 장보고장보고의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이라 전한다. 삼국유사는 궁파(弓巴)로 기록하고 있다. 모두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보고(張保皐)는 궁복이라는 이름의 한자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변환해 당나라로 건너간 이후부터 부른 것으로 풀이된다.장보고는 780년대 후반에 완도에서 태어나 84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보고는 친구인 정년과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그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828년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해 허락을 얻었다. 청해진 대사로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해상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그의 전력은 왜구의 노략질과 당나라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쳐 제압하고, 멀리 인도에서 들어오는 상인들까지 포용해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주도하기까지 했다.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라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했다.845년 장보고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보내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은 염장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이러한 내용이 역사의 주된 줄거리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더 확인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신라 궁성에서는 장보고의 죽음에 이어 청해진을 없애고, 병사들과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동북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신라의 아성은 이후로 무너져내렸다.◆완도 청해진 장보고유적지장보고는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접안시설, 다양한 생활시설과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신라하대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던 항만시설과 유적들이 대거 발굴됐다.청해진은 완도에서도 썰물, 밀물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작은 섬이 되는 장도를 위주로 성을 쌓고, 접안시설 등의 수비와 공격이 용이한 요새로 만들었다. 지금도 목재 다리를 만들어 걸어서 장도를 둘러볼 수 있게 했다.신라시대 청해진유적지 장도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해 입구까지 330여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는 소나무 말뚝, 목책이 박혀 있다. 방어용이었거나 접안시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우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최근 당시 모양을 살려 복원한 우물이 장도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청해진 입구에 외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내성문을 설치해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를 설치해 두고 있다.청해진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도 일대는 사적지 제30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청해진은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바다의 삼면을 살필 수 있어 접근하는 선박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역이다.◆중국 위해 적산법화원중국의 산둥반도 적산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설치한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주변에 신라인의 집단거주지 신라방이 있었다.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 소장으로 있을 당시 823년경에 창건했다. 이 사찰은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건립한 것으로 장보고가 나중 무역활동을 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의 신앙적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장소로 활용되었다. 신라와 연락을 하는 기관의 역할도 담당하고, 당나라로 건너가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도 이곳을 거쳐 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특히 이곳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일본 승려 옌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해 장보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글을 남겼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장보고의 전쟁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활과 승마, 창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신라의 계급사회에서 뜻을 펼치는데 한계를 느끼고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들어가 무인이 되었다.그는 뛰어난 무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받아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무령군이 감축되면서 장보고는 친구 정년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 백성을 지키기로 했다.흥덕왕을 찾아가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면 백성이 외국으로 팔려가는 일을 막고, 해상으로 침투해오는 왜구와 당나라 해적들을 토벌해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청원을 했다.흥덕왕이 이를 허락하여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가 되었다. 그는 1만의 병사를 훈련시켜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남방으로부터 침략해오는 일본과 중국반도에서 활약하던 해적들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서역까지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거상으로 성장했다.장보고는 또 중국 위해지역까지 진출해 신라인들이 편안하게 무역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 적산법화원을 세워 운영했다.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우징이 왕권쟁탈전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의탁해오면서 운명의 여신은 불길한 기운을 함께 던져주었다.김명이 뜻을 함께했던 희강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해 민애왕으로 등극하자, 우징은 장보고에게 “하늘을 두고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이때 장보고는 “흥덕왕과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소. 나는 바다를 지켜 신라의 백성을 돌보기로 했소.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면서 친구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불의한 임금을 제거하도록 했다.우징이 신무왕으로 등극하고, 3개월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신무왕의 아들이 문성왕으로 즉위해 아버지가 장보고와 한 약속을 지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보고는 이에 대한 복수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보고의 세력을 우려한 왕의 측근들은 간사한 계략으로 장보고를 제거키로 하고 염장을 파견했다.장보고는 왕의 신하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왕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왕이 신하의 목숨을 원하신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겠소”라며 문성왕의 밀지를 받고 달려온 염장의 칼끝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다.결국 간사한 무리들의 혀로 인해 해상왕 장보고는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세계 해상왕의 명성과 함께 청해진의 철옹성도 함께 무너졌다. 신라가 주름잡았던 해상 무역권까지 힘을 잃고 백성의 안위까지 담보할 수 없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환승

환승/ 전선용암울한 시간이 동굴처럼 막막해서/ 시계부속이 오류를 일으키며 째깍거립니다// 나는 가고 너는 오는 다리 위에서/ 고독이야말로 죽기 좋은 명분/ 가장 어둡고 밝은 교차로 0시/ 도시가 벚꽃처럼 집니다// 밝아올 아침은 흐드러진 꽃 따위와 상관없이/ 어제까지 막장 드라마를 보았고/ 클라이맥스가 뻔해서 슬프게 웃었습니다// 소주 둬 병을 들이켠 민낯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기척 없이 다가온 호명에 고개를 숙입니다/ 안온한 죽음을 부르는 꽃비가 계절을 덮을 때// 짐승이던 내가/ 비로소 사람 말을 합니다// 나는 이제,/ 순탄할 뿐입니다- 시집 『지금, 환승중입니다』 (도서출판 움, 2019).............................................. “이제야 사람 말을 한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그것들을 옮겨 적는다. 사람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사실과 또 사람만큼 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시집 맨 앞 ‘시인의 말’ 일부다. 이 진술만으로 ‘환승’의 의미를 희미하게 짐작한다. 환승은 갈아탄다는 뜻이다. 예전엔 일본어 ‘きりかえ’란 말을 곧잘 쓰곤 했다. 방향을 전환하거나 갱신할 때엔 반드시 어떤 동기나 계기가 있으리라. 지하철의 경우 환승역이겠는데, 인생으로 치자면 선택의 길 전환점이 될 것이다. 처음 탄 열차에 그냥 앉아있으면 누군가 정해 놓은 종착지에 도달하겠으나 내가 원하는 곳은 아니다. 내가 바라고 목적하는 곳으로 가자면 가던 길을 바꾸어 갈아타야 한다. ‘환승’은 또 다른 선택지이자 가능성이다. ‘나는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 걸까’ 시간은 가고 숱한 질문이 웅성거린다. 그러나 한 순간에 번민과 갈등을 덮어버리고 ‘그래, 지금이 내릴 때야’ ‘내려서 다른 열차를 기다려야해’라고 결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내린 곳이 바로 ‘환승역’이다. 하지만 인생에서는 사람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거나 꿈과 현실이 동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인은 ‘짐승이던 내가 비로소 사람 말을 합니다’ 다르게 살아보고자 하는 각성이었는지, 문학적 환경 변화가 터닝 포인트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거나 심오한 이유일지도. ‘어제까지 막장 드라마를 보았고 클라이맥스가 뻔해서 슬프게 웃었’다고 한다. ‘고독이야말로 죽기 좋은 명분’이라고 한다. 삶이란 아득한 침몰을 향해 운행하는 열차 위의 생이란 걸 알아챈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거스르거나 목적지를 변경할 수 없다는 사실도 눈치 챘으리라. 죽음이란 숙명의 강물에 빠지지 않을 방법은 없다. 이것만 생각하면 삶이란 참으로 절망스럽다. 사람의 정신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지만 절망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키르케고르도 절대고독은 절망이고, 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절대고독이 짙고도 깊어진 상황에 처했을 경우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한다. 그만큼 위험이 커졌을 때라야 절대고독에 빠져든다. 한 여성 연예인의 안타까운 죽음도 그러했으리라. 절망하는 자는 어떤 대상에 대해 절망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인 것이며, 그래서 자신을 삭제해 버리려는 충동에 휩싸인다. 이것은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죽음의 구원은 죽음을 번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시인은 긴 방황 끝 ‘환승’을 통해 돌파구를 만들고 희망을 건져낸다. 그 변곡점에서 문학적 열망도 탑재된 듯하다.

죽음으로 내모는 악성댓글, 대구도 악플 심각한 수준

지난달 가수이자 배우 설리에 이어 걸그룹 카라 출신 가수 구하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주된 이유가 악성댓글로 알려지는 가운데 대구에서 개설된 커뮤니티에서도 악성댓글이 도를 넘을 만큼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지역 커뮤니티 사이트 또는 SNS에는 설리 사망에 이어 구하라 사망 관련 글이 많이 올라왔다.게시글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댓글들이 달리는 한편 죽음을 비하하는 악성댓글도 있었다.특히 죽음과 관련한 추측성 글과 사건 관련 내용과 루머가 무분별하게 올라 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다. 심지어 또 다른 연예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극단적 선택을 할 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장한 섬뜩한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대구에서는 연예인에 대한 악플뿐 아니라 각종 사고에 대한 악플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악플도 여전하다.2003년 2월 참사가 발생한 후 추모시기 마다 관련 기사에는 어김없이 악성댓글이 붙고 있다. 대구를 비하하는 말과 함께 지하철 참사 당시 화재로 숨진 희생자 및 유가족들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유가족과 피해자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다. 이렇다 보니 악성댓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댓글 실명제 등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연예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악성댓글과 관련한 국민청원이 다수 등장하는 등 악성댓글을 규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국민 청원 홈페이지에는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여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청원인들은 “타인의 인격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실명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경북대학교 노진철 사회학과 교수는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인터넷의 익명성이라는 특성에 기대어 온갖 도를 넘은 악성댓글이 쏟아지고 있지만 통제가 되지 않는 실정이다. 무차별적인 공격을 표현의 자유라고 하기에는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심각하다.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한편 인터넷 실명제 등 해법을 모색해야 할 때”고 강조했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유품정리사

유품정리사정명섭 지음/한겨레출판/396쪽/1만4천 원 조선 시대, 죽은 여인들을 위한 유품정리사가 있었다면? 이 책은 작가의 이러한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유품정리사'는 2000년대 초반 고독사가 늘어난 일본 사회에서 성장하며 4차 산업시대의 새로운 직업군으로 꼽히는 직종이다. 작가는 21세기 직업군을 18세기로 옮겨와 새로운 여성 서사 소설을 선보인다. 죽인 여인들의 지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유품을 대신 정리하는 유품정리사. 작가는 이러한 직업적 특성을 미스터리한 죽음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사용한다.이 책은 조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유품정리사가 된 화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품에 남아 있는 삶의 흔적들을 통해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그간 정명섭 작가가 보여줬던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오롯이 녹아 있다. 여기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건들, 젠더의 역할과 정체성을 고착화시키는 사회,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굴레를 쓰는 모순 등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뜨거운 메시지를 담았다.역모 혐의로 의심받던 화연의 아버지가 죽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사건, 포도청은 이를 자살로 마무리한다. 저잣거리에서는 임오화변의 가담자들을 숙청하려는 대비마마(혜경궁 홍씨)의 흑막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사건 이후, 화연의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과천으로 내려가지만 화연은 끝내 한양에 남아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한다. 화연은 사건을 담당한 포교 완희를 찾아가 재수사를 요청하고, 완희는 수사에 대한 확답 대신 뜻밖의 제안을 한다.그렇게 화연은 몸종 곱분과 함께 죽은 여인들의 시신과 물건을 정리하는 대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로 한다.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됐지만, 유품을 정리하면서 화연은 규방에서는 알지 못했던 세상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들은 왜 죽은 것일까? 그녀들은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화연의 물음이 커질수록, 여인들의 죽음 이면에 놓인 비밀은 아득하게 멀어져만 간다. 죽은 이들의 물건만으로 화연과 곱분은 죽음의 비밀을, 세상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화연의 아버지의 죽음 뒤에는 어떤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일까?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화연과 곱분이 유품을 정리하며 알게 되는 여인들의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화연의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임오화변 가담자 가족들의 목소리다. 화연의 아버지 장환길은 사도세자의 폐위 교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근신 중이었다. 화연의 아버지뿐 아니라 임오화변에 가담한 자들은 제 자리를 보존하지 못했으며, 궐에서 쫓겨나 비명횡사하거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여인들의 죽음을 정리하는 화연과 곱분 앞에 창포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의 사건과 녹색 도포의 비밀스러운 행적이 머문다. 당시 임금의 말을 따랐지만, 현재 임금의 아비를 죽인 데 동조한 셈이 된 이들과 그의 가족들. 그 억울함은 말 못 할 깊은 원한만을 새긴다. 그러던 어느 날, 화연과 곱분이 조사하던 여인들과 임오화변에 연루된 이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사라지고야 만다.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그리고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되는 정조. 소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궁궐 밖 사람들의 시선으로 담아내 저잣거리의 이야기꾼처럼 풀어낸다.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지음/돌베개/252쪽/1만5천 원이 책은 청소년 노동 인권의 현주소를 생생히 담은 르포르타주다. 책은 1,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마이스터고등학교를 다니던 동준이가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소시지 공장에서 일을하다 선배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동준이가 노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떠난 이의 삶을 추적해 재구성한다.동준이의 가족, 이 사건을 담당했던 노무사, 이 사건이 있은 후 3년이 지난 2017년 제주에서 목숨을 잃은 또 다른 현장실습생 이민호군의 아버지, 특성화고 교사, 특성화고 재학생·졸업생 등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2부의 부제는 ‘김동준들’이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특성화고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동준이의 가족, 이 사건을 담당했던 노무사, 이 사건이 있은 후 3년이 지난 2017년 제주에서 목숨을 잃은 또 다른 현장실습생 이민호군의 아버지, 특성화고 교사, 특성화고 재학생·졸업생 등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어느 젊은이의 죽음 / 권순진

어느 젊은이의 죽음/ 권순진둘째가 친구의 뼛가루를 수성못에 뿌리고 왔다. 강에 뿌리려다 생각날 때 찾기 쉽게 몰래 시내 가까운 유원지 못에다 뿌렸단다. 그 친구는 막 만 열여덟을 넘긴 어정쩡한 미성년이었다. 열둘에 갈라선 부모가 둘 다 아이 맡기를 기피해 외할머니 밑에 자랐으나 속속들이 세포가 망가지면서 그 지경이 되었단다. 외삼촌이 입원시켜서 어찌 손을 써보려 했다지만 이미 많이 늦어버렸단다. 죽어 재가 되고서야 아이의 어미가 달려와 내가 죽일 년이다 울부짖었단다. 친구들은 누구하나 따라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애비는 재를 물가에 흘려보내려할 쯤에야 나타나 돈 이십만 원을 건넸으나 친구들은 그 돈을 기어이 받지 않았단다.// 난 둘째의 얘기가 그 흔한 신문의 사건 사고 한 줄 기사의 낭독인줄 알았다. 어른들에 대한 적개심이 잡초처럼 마구 자랄지 모른다는 막연한 염려는 했지만 어쩌면 그 나이에 그런 비열한 충격의 경험은 인생살이 전체로 볼 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빌어먹을 통빡을 굴렸다. 하지만 죽은 애 아비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처지에 이내 몸을 진저리 쳤다. 내 아들의 죽은 친구여! 내 자식이 너의 죽음 앞뒤로 슬퍼하고 괴로워한 만큼 나는 그 십분의 일도 애도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다오. 오히려 배면에서 내 자식의 멀쩡함을 안도했고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이나 되는 양 멋대로 변용하여 자위했던 것을 용서해 다오.// 허구한 날 천부당만부당 억울하게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을 보고 내 비로소 고개 숙여 서러워하며 분노하노니 부디 사랑과 평화 가득한 곳에서 잠들다 좋은 옷 다시 얻어 입고 다른 세상으로 오기를......- 시집 『낙법』 (문학공원, 2011)...................................................작은아들이 지금 만 서른일곱이니 19년 전 일이다.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네친구라 나도 한두 번쯤 보았을 아이였겠다. 친엄마의 전화를 받고 나간 12살 어린 소녀는 그 길로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했다.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한 뒤였다.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가 TVN에서 방영하는 ‘그것만이 내 세상’을 운 좋게 거의 처음부터 봤다. 가정폭력을 다룬 이 영화를 보면서 여중생살해사건과 이 ‘시’가 생각났다. 구체적으로 신체에 위해를 가하거나 굶기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 역시 아동 학대에 속한다.여기서 조금만 도가 지나치면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않거나 무지한 정도를 넘어, 말 그대로 인간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른 막장 부모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정폭력은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그 폐해를 남긴다. 유년의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어 인간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면 정상적인 성장이 어렵다. 가정폭력, 막장부모 대물림 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대책을 마련할 때다. 그것만이 모두가 건강한 ‘내 세상’을 향해가는 첫걸음이다.

죽음으로 왕족 구해낸 충신 그의 부인 슬픔으로 굳어버려

내물왕은 신라 17대 왕으로 본격적인 김씨 왕조 세습의 시작이다. 삼국유사는 내물왕과 눌지왕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당시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의 일화를 길게 소개하고 있다. 김(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는 내물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 복호)를 구해온 데 이어, 왜에 잡혀 있는 내물왕의 또 다른 동생 미해(삼국사기 미사흔)를 구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돌아온 이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내친걸음으로 바로 왜국으로 떠났다. 이 때문에 김(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었고, 벌지지, 치술신모와 은을암 등의 흔적과 설화를 남기게 되었다. 삼국유사가 소개하는 충신 김(박)제상과 그의 부인 이야기를 소개하고, 설화를 고증하는 흔적이 있는 경주와 울산의 현장으로 가본다. 내물왕과 실성왕, 눌지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상세하게 더듬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내물왕 김제상신라 제17대 내물왕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 되는 경인(390)에 왜왕이 사신을 조정에 보내와서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한 분의 왕자를 보내시어 저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하여 주시옵소서”라 했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로 하여금 왜국을 예방하게 했다. 미해는 당시 10살이어서 말과 행동이 아직 미숙해 내신인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보냈더니, 왜왕이 붙들어 두고 30년 동안이나 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되는 기미(419)에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대왕의 아우님 되시는 보해께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로 친하기를 원하여 각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절히 청하도록 하였습니다”라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이 일로 인하여 화친하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 그의 아우 보해에게 명령을 내려 고구려로 가게 하면서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임명하여 보냈더니, 장수왕도 또한 그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9년 되는 을축(425)에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협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왕이 여러 신하에게 “예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신 까닭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왜에 보내었다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짐이 고구려가 화친하자고 하여 사랑하는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으나 고구려 역시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며 슬퍼했다. 관리들이 삽라군 태수 제상이 적임이라 추천했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물으니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신은 비록 똑똑하지 못하나 왕명을 받들어 행하고자 하나이다”라 했다. 왕이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당부했다. 제상이 변복하고 고구려로 들어가 보해의 처소로 가서 함께 도망갈 날짜를 모의했다. 제상이 먼저 5월15일에 고성 포구로 돌아와 배를 대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약속한 날이 닥쳐오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칠이나 조회에 참석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을 쳐 고성해변에 닿았다. 고구려왕이 사람들을 시켜 그들을 추격해 고성까지 와서야 따라잡았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군사들이 그들이 다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쏘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보자 미해를 더욱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말하기를 “한 몸뚱이에 한쪽 팔만 있고 얼굴 하나에 한쪽 눈만 있는 것과 같소이다. 비록 동생 하나는 찾았으나 또 한 동생이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라 했다. 그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말을 타고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떠나 곧바로 율포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왔으나 그의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올라 있었다. 그의 아내가 애절하고 간절하게 불렀으나 제상은 단지 손만 흔들 뿐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서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이 아무 죄도 없는데 저의 부친과 형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했습니다”라 하니 왜왕이 이 말을 믿고 집을 주어 그를 편안하게 했다. 이때부터 제상은 항상 미해를 모시고 바닷가에 나가 놀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서 매번 왜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둡게 되자 제상이 말하기를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라 하니 미해가 “그러면 함께 갑시다”라 했다. 제상이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들이 알아차리고 뒤를 쫓아올까 염려가 돼 오니 신은 남아서 뒤쫓는 것을 막도록 하겠습니다”라 했다. 미해가 “지금 나와 그대는 부모·형제와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나 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 하니 제상이 “신은 왕자님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만 위로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오이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 하면서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이때 계림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고 제상은 미해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이 들어가 보려 했으나 제상이 나와서 “어제 사냥을 하시느라 말을 타고 쏘다니셨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여 일어나지 못한다”라며 말렸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에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으니 “미해는 이미 오래전에 갔다”고 하자 그들은 급히 달려가 왜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말 탄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쫓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심문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몰래 보냈느냐?”라 하니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뿐인데 어찌 구태여 그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왜왕이 화를 내며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한다면 응당 온갖 형벌을 가하겠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후한 녹봉을 상으로 주겠다”라 했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봉은 받지 않겠다”라 했다. 왜왕이 화가 나서 제상의 발바닥 살갗을 벗기고 갈대를 베고는 그 위를 걷게 하였다.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 하니 대답하기를 “계림의 신하다”고 했다. 다시 그를 뜨겁게 단 철판 위에 서게 하고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 물었다. 제상이 역시 “계림의 신하이다”라 하자 왜왕은 그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미해가 바다를 건너와서 강구려를 시켜 먼저 나라에 알렸더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모든 관리로 하여금 굴헐역에서 맞이하도록 했다. 왕이 친아우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 연회를 베풀었다. 나라 안에 죄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여 크게 풀어주었으며 제상의 처를 국대부인으로 책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처음 제상이 떠나갈 때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 문의 남쪽 모래밭 위까지 와서는 거기에 누워 오래도록 목 놓아 울었다. 그로 인해 모래밭을 장사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했으나 부인이 다리를 뻗고 일어서지 않으므로 그 땅 이름을 벌지지라 했다. 한참 뒤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치술신모가 되었는데 지금도(고려시대) 이곳에는 사당이 있다. ◆흔적내물왕의 흔적은 경주 동부사적지에 능으로 남아 있다. 정확한 능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사적지로 지정하고 능을 관리하고 있다. 눌지왕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울산광역시는 울산 도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 일대 박(김)제상의 유적을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충렬공 박제상기념관을 건립해 관리하고 있다. 울산은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유적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치술령 신모설화: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미해)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숨을 거두었다.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변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 보게 하였던바 새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박제상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망부석: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망부석은 박제상의 부인과 딸의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은을암: 은을암은 망부석의 남쪽 4㎞ 거리에 떨어져 있는 바위다. 은을암은 동해가 바라보이는 큰 바위에 성인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이 어둡게 입을 열고 있다.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숨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굴에서는 사시사철 샘이 흘러내리고 있다. 은을암에는 지금도 사당을 지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충렬공 박제상기념관: 울산시가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에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설화를 영상물과 그림, 조각 등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기념관 옆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두 딸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건립한 치산서원을 복원해 두고 있다. 서원 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 등 3동의 사당이 있다. -벌지지: 경주 남산과 낭산을 잇는 넓은 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있고, 제방에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모래밭에 두 다리를 뻗어 일어서지 않았다는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동쪽에 보물로 지정된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 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코리아나호텔' 사장 방용훈, PD수첩 방송… 이미란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과정

'PD수첩'에서 지난 5일 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 부인 이미란 씨의 죽음에 관한 사건을 다뤘다.이날 방송에서는 조선일보 4대 주주이자 코리아나 호텔 방용훈 사장 부인 이미란 씨의 죽음과 관련해 고인이 남긴 음성 메시지와 주변 관계자의 증언, 검찰 및 경찰의 조서로 진실을 추적했다.이미란 씨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장면으로 시작된 이날 방송은 경찰과 검찰이 CCTV에 나타난 사실보다는 방용훈 측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를 마무리했다며 부실수사 의혹을 제기했다. 2016년 8월 22일(사건 열흘 전) : 이날 오전부터 모인 아이들은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강제로 사설 구급차에 태워 보내려함. 오후 2시 경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집으로 출동해 자녀들을 타일러 취소를 시킴.경찰이 돌아가자 더욱 격해진 아이들은 자신들의 욕설을 녹음하고 있던 엄마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변기에 버림.전직 가사도우미는 "갑자기 "사람살려" 소리가 나서 창문 밖을 보니까 다리랑 어깻죽지를 잡고 끌려 나가는데 등허리 살이 다 나오고 신발도 안 신은 채로 끌려나가는데..."라고 전했으며 당시 이미란 씨가 사설 요원들에게 "당신네들 이렇게 하면 당신네 직장을 잃을 뿐 아니라 당신 소속해 있는 병원도 문 닫는다. 이거는 절대로 불법이니까 나를 친정에다 데려다 다오"라고 말해 친정집에 구급차가 멈춰 섰다고 한다.이미란 씨의 언니는 "옷은 찢기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몰골로 애가 친정에 들어왔다"며 이미란 씨 어머니 또한 "딸이 "엄마, 나 왔어"라며 들어오는 거예요, 유령 같이. 아무 생각도 안 나요. 내 딸이 외딴 섬에 버려지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라는 생각 뿐이었다고 말했다.2016년 9월 1일 밤 12시 29분 : 이미란씨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모습이 CCTV에 찍힘2016년 9월 2일 정오 무렵 : 방화대교 갓길에 멈춰선 차가 빈 차로 발견되어 고속도로 순찰 직원들의 신고로 수사가 접수돼 사체 발견2016년 9월 3일(사체 발견 다음 날) : 부검 직후 남편과 자녀들은 이미란 씨 친정에도 알리지 않고 시신을 화장 처리2016년 11월 1일 : CCTV상에서 이미란 씨 큰 아들이 이모집 앞을 맨발로 서성인 후 현관문을 돌로 내려침. 방용훈 사장은 등산용 도끼를 들고 올라옴.이미란 씨 언니는 "자고 있는데 밤에 엄청 뭐가 깨지고 부숴지는 소리가 났어요. 보니까 난장판이 났고"라며 이미란 씨의 남편은 "CCTV를 보니 방용훈 사장하고 그 아들을 보고 저희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죠. 조카는 돌을 들고 올라왔고 조카를 따라서 올라온 제부(방용훈 사장)는 등산용 도끼를 들고 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경찰은 영상 증거와는 달리 방용훈 사장이 아들을 말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결론지었다.---------------------------------------------------------------------------------------------------33년 만에 비극으로 끝이 난 결혼생활에서 이미란 씨의 유서에는 "남편은 전화를 하든 문자를 하든 아무것도 안 하니 대화할 수도 없고 이유를 알 수도 없고 소송밖에 없는데. 다들 풍비박산 날 거고 만신창이가 돼서 끝날 텐데 어떻게 제가 그렇게 되게 놔두겠어요. 조선일보 방용훈을 어떻게 이기겠어요"라며 "4개월 지하실에서 투명 인간처럼, 강제로 끌려서 내쫓긴 그날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방용훈이라는 큰 산 앞에서 저나 친정 식구들이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라고 적혀 있었다.당시 이미란 씨의 사체 수습하던 경찰은 "친정 식구들만 나와 있어서 (수습) 하면서도 이거 참 특이하다. 어떻게 자기 아내가, 엄마가 이런데도 아무도 안 나와 있을까 생각했다"며 의혹을 가졌다.이미란 씨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전직 가사도우미 A씨는 "지옥이었어요. 제가 볼 때 사모님은 지옥을 헤메셨어요. 사장님이 퍽하면 때리고 그랬어요. 애들은 XX년아, 뭔 년아, 도둑년아, 말끝마다 도둑년이에요. 자기엄마한테"라고 얘기했으며 이미란 씨가 다니던 스파 관계자 또한 "맨날 무섭다고 하셨어요. 무섭다고 하셨어. "나는 OO이 아빠가 참 무서워요" 그러시더라고"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미란 씨의 언니는 이런 말도 전했다. "갑자기 죽기 석 달 전인가? 넉달 전에 동생이 너무 놀랐다 그러면서 남편이 자기한테 준 돈이 자기는 자기 돈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아들한테 아들 돈이라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네가 알아서 찾아서 가져가라" "유산이 이제 한 푼도 없다, 엄마가 다 썼기 때문에"라고 전했다며 그 이후부터 비극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하고 있다.당시 이미란 씨의 상황에 대해 전직 가사도우미들은 "(자기 엄마한테 애들이) 기어 내려가, 기어 내려가 도둑년아. 자기네는 1층에서 친구들하고 파티처럼 밥을 먹고 음식을 먹고 깔깔대고. 사모님은 지하실에서 아침에 고구마 2개 달걀 2개 먹고 나중에는 입에서 썩은 내가 올라올 정도로 속이 비어 있었어요", "어떤 때는 여기(볼)이 시퍼래서 내려와요. 그래서 사모님 왜 이래 이러니까 "어디 받쳤어" 이러더라고요. 그렇게 파래서 내려오면 그건 맞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한 번은 나보고 그러더라고 "아줌마, 아줌마. 나는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왜 이러한 상황에서 이혼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미란 시의 친정은 "이혼 생각 안 했겠냐. 저희가 만나본 변호사들 다 "못 한다. 소송 못한다" 다른게 아니라 일단 변호사들이 몸을 많이 사리더라구요. 안 맡을 거고 우리한테 이런 이야기 했다는 자체도 자료를 없애라. 어차피 이게 이혼 소송 정도만 하더라도 조선일보 측의 상대가 직접, 간접적으로 들어갈 텐데 그러면 자기들 법무법인 망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놨다.이날 방송은 올해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5일 방송된 MBC 'PD수첩'의 '호텔 사모님의 마지막 메시지' 편은 6.2%의 전국시청률을 기록했다. online@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