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보름 ‘까마귀의 제삿날’ 그 시작은 연못의 편지로부터

사금갑(射琴匣)은 ‘거문고집을 쏘라’고 풀이되는 서출지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삼국유사의 냄새가 가장 짙은 신화 같은 이야기다. 서출지는 경주 남산의 동쪽 가운데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지금도 사적지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경관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화유적이다. ‘사금갑’은 쥐와 까치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돼지가 서로 싸우고, 연못에서 신선이 나오는 등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당시 시대 상황을 여러 각도로 추측하게 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글이다. 학자들의 분석이 다양하게 보고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서출지 남쪽에는 신라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아미타불을 염불하던 스님이 있었다는 염불사터에 동서 쌍탑으로 삼층석탑이 복원돼 있다. 임금을 구한 편지가 출토되었던 연못과 신비스런 스님이 있었다던 염불사지로 가본다. 그리고 소지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력을 추측해 새로 삼국유사를 써본다. ◆삼국유사 사금갑-거문고집을 쏘라-제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이 즉위한 지 10년 되는 무진(488)에 천천정에 행차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소서”라 했다.(혹은 말하기를 신덕왕이 흥륜사에 예불하러 가려는데 길에서 여러 마리의 쥐들이 꼬리를 서로 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괴상히 여겨 돌아와 점을 쳐보니 ‘내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보라’ 등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왕이 말을 탄 무사에게 명령하여 뒤따르게 했다. 남쪽으로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으로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도착했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주저주저하며 그것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버리고 길가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이때 노인이 못에서 나와 편지를 주었다. 겉봉에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쓰여 있었다. 무사가 와서 그것을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떼지 않고 단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라 했다. 일관(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이 말씀드리기를 “두 사람이란 것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것은 왕입니다”라 하자 왕도 그렇게 여겨 편지를 떼어 보았다. 그 편지 속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집을 쏘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집을 보고 활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는 중과 궁주(왕비)가 은밀하게 사귀면서 간통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처형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속에 매년 정월 첫 돼지 날과 첫 쥐 날과 첫 말의 날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가서 함부로 움직이지 아니했다. 정월 보름을 ‘까마귀의 제삿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를 지냈으니,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세속의 말로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여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편지가 나온 못을 서출지로 이름을 붙였다. ◆흔적: 서출지△이요당: 이요당은 서출지 서편에 한쪽은 저수지 안쪽으로 쑥 들어와 있고, 한쪽은 저수지 둑과 연결된 도로에 접해 있는 조선시대 건축된 정자다. 동남향으로 ‘ㄱ’ 모양의 순수 한옥형 정자로 지어져 자못 풍류가 느껴진다.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과 함께 이요당은 지혜로움과 덕이 넘치는 인품을 두루 갖춘 선비의 풍모를 닮아 반은 물 위에 떠 있고, 반은 땅에 연접해 지어 선비들이 여름에도 시원하게 글을 읽었던 곳이다. 건물 이름 이요당도 요산요수에서 취했다. 조선시대 현종 5년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처음에는 3칸 규모였으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고풍을 연출하고 있다. 임적은 가뭄이 심할 때는 물줄기를 찾아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도왔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덕망이 높았다. 남쪽 양피못 언덕에는 임적의 아우 임극이 지은 산수당이 있다. 한때 양피못을 진짜 서출지라고 주장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현재 서출지가 진짜 서출지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서출지는 동남산 통일전 남쪽에 연접해 있는 부지면적 7천㎡ 규모의 아담한 연못이다.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깃든 연못으로 지금도 이요당 정자와 함께 향나무와 소나무, 백일홍이 어우러지고, 못 가운데는 연꽃이 가득해 연인들의 산책코스로 인기다. 경주시는 서출지 제방 둘레에 조명등을 설치해 밤에 오히려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해 찾는 발길이 늘어나고 있다. 신라 소지왕 때에 연못에서 신선이 편지를 들고 나타나 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역사문화 탐방객들의 필수코스로 손꼽힌다. 또 서출지에서 비롯된 정월 대보름 제사와 찰밥 풍습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풍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출지는 국가에서 사적 138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서출지에서 약 1㎞ 거리에 염불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동서 쌍탑으로 복원돼 있다. 삼국유사에는 ‘피리사’라는 절에 신비스런 승려가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 피리사를 ‘염불사’로 고쳐 부르고 있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고, 2009년 1월 동서 쌍탑으로 삼층석탑을 복원했다. 이때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복원공사내역과 함께 매립했다. 염불사지에는 이거사 터에서 옮겨온 석탑 부재들이 쌓여 있다. ◆다시 쓰는 삼국유사: 소지왕의 위기소지왕은 479년에 아버지 자비왕의 뒤를 이어 신라 21대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17대 내물왕부터 실성왕, 눌지, 자비왕까지 김씨들이 왕위를 대물림하고 있었지만, 박씨와 석씨들의 권력을 향한 힘겨루기는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어 연대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박, 석, 김 3성의 왕권 차지를 위한 견제와 타협은 미묘한 권력 구도를 형성하면서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첨예한 대립의 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김씨 왕위세습체제는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힘으로 박씨, 석씨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전략을 동원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와 함께 육부촌장들의 힘겨루기와 백제, 고구려의 침략은 정권을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면서 소지왕의 의지를 지치게 했다. 소지왕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상당히 심취했다. 이름도 아버지는 자비왕, 자신은 스스로 부처를 뜻하는 ‘비처’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라의 불교는 왕실을 비롯해 귀족층에서부터 시작해 백성들에게로 전파되는 형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소지왕은 초창기에 백성들을 많이 사랑했던 왕으로 칭송을 들었다. 가뭄에 백성들을 위해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고, 지방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직접 보살피기도 했다. 사방에 우편 역을 설치하고, 도로를 고치고, 시장을 열어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려 했다. 계속되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월성 주변에 해자를 설치하는 한편, 백제와 결혼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다. 외세 침략에 대비하면서 소지왕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적들의 반란에 제대로 견제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지왕은 고구려 등의 침략에 대비해 월성의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해자를 보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공사 기간 동안 소지왕은 명활산성을 궁으로 사용했다. 다시 월성으로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 정적들의 공격을 받았다. 왕권을 노리는 정적들의 공격을 여러 번 받으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번이 가장 강력했다. 이때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 되었을 때다. 후궁으로 들어온 선혜부인이 신궁의 승려 묘심과 내통하고, 궁궐과 외부를 잇는 세력을 키워 소지왕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할 계획을 꾸몄다. 소지왕은 반란세력의 기미를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가까스로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란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숨죽이며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소지왕은 내부적인 정적들의 도전에 직면해 김씨 일족과 박, 석씨 세력의 도움으로 겨우 왕권을 유지하면서 정치싸움에 환멸을 느껴 점점 환락에 빠져들었다. 소지왕은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막연한 종교적인 힘에 의존하는 한편, 여성 편력으로 내부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권해 죽임을 당했다. 소지왕의 여성 편력을 이용해 반란세력들은 미모가 뛰어난 벽화를 왕에게 소개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며 정치에 몰입하려 애를 썼지만, 벽화의 조직적이고 개략적인 유혹에 소지왕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결국 소지왕은 반란세력의 힘에 밀려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고, 죽음으로 모든 권력을 놓아야 했다. 소지왕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신라 22대 왕좌에 오른 사람이 지증왕이다. 힘으로 왕좌를 빼앗은 지증왕은 3년여 동안 갈문왕으로 있으면서 왕위에 올라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며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64세에 왕의 권좌에 오른 지증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과 울릉도 영토회복 등의 활약을 하면서 15년 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신라’라는 국호도 지증왕이 처음 사용했다. 지증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계속 이어간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산중방농악보존회 제16회 정월 대보름 당산제 거행

정월대보름을 하루 앞둔 18일, 경산시 중방동 당산나무(경북도 지정 보호수) 앞에서 경산중방농악보존회가 ‘제16회 정월대보름 만사형통 기원 당산제’를 진행했다.이날 당산제는 분향, 강신을 시작으로 김충열 중방동장 초헌, 축문 읽기, 종헌 등 제례 행사를 통해 동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또 기 굿, 샘 굿, 소원문 쓰기, 만사형통 기원제, 중방농악 12마당 풍물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당산제는 신라 시대부터 전승되어온 세시 풍속으로 마을 형성 후 마을의 안녕과 질서,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마을의 수호신에게 공동으로 제사를 올리는 축제 의례이다.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특히 당산제는 예부터 공동체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으로 마을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협동 등 평등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형성 배경이다.경산중방농악보존회는 당시 소규모 농사굿 놀이로 전승됐으나 동고 선생 향사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달성서씨와 마을주민이 대거 참여해 규모가 대형화됐다. 이후 농경 사회의 애환을 담아 경산지방의 독창적이고 대표적인 농악보존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이승호 중방농악보존회장은 “당산제를 통해 우리는 잊혀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다질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계속해서 중방동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남동해 기자 namdh@idaegu.com

안동시, 정월 대보름 맞아 동제, 곳곳에서 열려

산업화, 도시화 추세로 세시풍습이 점차 잊히는 가운데 안동지역에서는 아직도 굳건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으나 의미 있고 중요한 날에는 세습풍습이 행해진다.그 세시풍습의 거의 절반이 정월에 치러지고, 그 절반 이상이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다. 정월 대보름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정월 대보름, 다른 어떤 행사보다 앞서 치르며 중요하게 여기고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동제이다.동제는 마을의 안녕과 화합,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제사로 대개 마을의 전설과 관련된 고목,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지내게 된다. 전통사회에서 동제는 마을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옛날부터 안동에는 안동부사나 군수가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안동 고을만이 가진 특이한 의전행사가 있다. 바로 안동의 신목에 당제를 지내는 일이었다. 권영세 안동시장도 18일 자정(2월 19일 첫 새벽) 웅부공원에 있는 신목에서 ‘안동부 신목제사’를 올린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회마을에서도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정월 대보름 오전 6시 30분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서낭당을 시작으로, 중당인 국신당과 하당인 삼신당을 돌며 동제를 올린다.특이하게도 3곳을 돌며 동제를 지내는 것이다.제사 후에는 삼신당, 양진당, 충효당을 차례로 돌며 지신밟기를 한다. 특히 안동에서는 신격화된 신앙으로 발전한 공민왕 관련 동제가 있다.‘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에 몽진한 공민왕을 추모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민왕 관련 동제는 18일 자정에 도산면 가송리 딸당, 용상동 공민왕당, 예안면 정자골 며느리당, 신남리 딸당에서 제사를 지낸다.풍산읍 수리 국신당과 도산 내살미 왕모당에서는 19일 오전에 올려지는 등 현재 6곳에서 공민왕 관련 제사를 지낸다. 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에도 제사를 올린다.‘녹전 사신리 느티나무 당산제’와 ‘길안 송사리 소태나무 동제’, ‘임동면 대곡리 굴참나무 동제’로 사라져 가는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황태진 기자 tjhwang@idaegu.com

영천소방서, 정월 대보름 화재예방 총력

영천소방서는 시민들이 정월 대보름 풍등날리기,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등 행사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화재 예방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영천소방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풍등으로 인한 저유소 화재가 발생함에 따라 소방기본법 제12조가 개정되면서 풍등 날리기와 소형 열기구 날리기를 금지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기존에는 불장난이나 모닥불, 흡연, 화기 취급 등만 금지하거나 제한했으나, 법이 개정되면서 소방본부장이나 소방서장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시 풍등을 날리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이에 영천소방서는 오는 20일까지 특별경계근무 및 순찰활동, 이·통장에게 풍등날리기, 소형 열기구 등 화재예방 문자 발송으로 화재 예방에 주력하는 등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가이드라인은 풍속 2㎧ 이상 시 풍등 띄우기 금지, 행사 주최 측 풍등날리기 전 교육, 행사장 주변 및 예상 낙하지점 수거팀 배치,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고 주변에 위험시설이 없는 지역을 행사장으로 선정 등이다. 박윤환 영천소방서장은 “정월 대보름 모두의 안전을 위해 행사 주최 측 등 시민에게 관심과 주의를 당부한다”고 말했다.박웅호 기자 park8779@idaegu.com

정월 대보름인 19일 비 소식 있어 보름달 볼 가능성 낮아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정월대보름 달맞이를 하며 1년 농사를 점치고 풍년을 기원했다.정월대보름 달빛이 희면 많은 비가 내리고 붉으면 가뭄이 들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점쳤다.14일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정월 대보름인 오는 19일 달이 뜨는 시각은 대구 오후 5시42분, 울진 오후 5시37분, 영덕 오후 5시38분, 포항 오후 5시39분, 경주·안동·영주 오후 5시40분, 의성 오후 5시41분, 상주·구미·영천 오후 5시43분, 김천 오후 5시44분 등이다.19일이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이지만 올해 가장 큰 보름달은 20일 0시54분께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다만 19일 대구·경북은 흐린 가운데 비 소식이 예보돼 있어 보름달 관측 여부는 미지수다.한편 이번 주말 대구·경북은 흐린 가운데 구름 낀 날씨가 예상된다.기온은 대체로 낮 최고 10℃를 웃돌며 포근하겠으나 아침 기온은 영하권으로 뚝 떨어져 일교차 큰 날씨가 이어질 전망이다.15일 아침 최저기온 대구·경산 0℃, 김천 영하 4℃, 군위·청송·봉화 영하 3℃, 낮 최고 포항·김천·청도·고령 11℃, 대구·경산·영덕·칠곡·울진 10℃ 등의 분포를 보이겠다.16일 아침 최저기온은 대구·구미·경산·칠곡 0℃ 등 영하 5~영상 3℃, 낮 최고 대구 6℃ 등 3~7℃를 기록하겠다.17일 아침 최저 기온 대구 영하 3℃, 안동 영하 6℃, 포항 영하 2℃, 낮 최고기온은 대구 8℃, 안동 6℃, 포항 9℃가 예상된다.대구기상지청 강성규 예보관은 “아침저녁으로 기온 차가 크게 나기 때문에 건강 관리에 유의해야 한다”며 “대기가 매우 건조한 만큼 산불 등 각종 화재 발생 우려도 높다”고 말했다.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경산시립박물관 15일 ‘정월 대보름 세시풍속’ 체험행사

경산시립박물관(관장 손옥분)은 음력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을 맞아 15일 오후 2시부터 박물관 전시동 1층 로비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정월 대보름 세시풍속 체험행사를 한다.‘정월이 좋아야 일 년 열두 달이 좋다’는 믿음에서 예로부터 정월에 다양한 세시 행사가 집중되는데, 그중 가장 큰 보름인 정월 대보름은 선조가 한 해의 무병장수와 풍요를 기원하고 액을 막는 다양한 세시풍속을 즐겼다.정월 대보름 당일 선착순으로 진행되는 이번 정월 대보름 세시 체험행사는 △한 해 동안 이(齒)를 튼튼하게 하고 부스럼을 예방하려는 부스럼 깨물기 △해충을 없애 풍년을 기원하는 쥐불놓이 만들기 △연 몸통이나 꼬리에 나쁜 기운을 보낸다는 연날리기 △정월 대보름 대표 절식인 약과 모양 비누 만들기 등 체험을 한다.자세한 행사 내용은 경산시립박물관(053-804-7323)으로 문의하거나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동해 기자 namdh@idaegu.com

정월 초하루

신동환/ 객원 논설위원, 전 경산교육장 설이 지나갔지만, 설을 쇠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아직도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한다. 올해 설은 어떤 설이었을까?손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설에도 고향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데요.” 어린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아들을 의심했다. 아이 듣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서, 그러나 이야기의 출처는 다른 데 있었다. 손자의 반 친구 중, 많은 아이가 설 연휴 기간에 부모와 함께 해외여행을 갔다나.참 참한 젊은 친구 C가 있다. C는 자기 일 만해도 복잡하다. 본인이 심혈관 질환으로 쓰러져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부인 또한 위장 계통의 질환으로 사흘이 멀다 않고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그런데도 C는 대구에 살고 있는 누나를 친부모 이상으로 돌보고 있다. 누나는 70대 초반으로, 아들이 멀리 서울에 살고 있다. C가 아들을 대신하고 있다. 누나는 무슨 병원을 그리 자주 가고, 무슨 위급한 상황이 그리 많은지, 그때마다 C는 밤낮없이 달려간다. 병원뿐 아니다. 누나는 다니는 절도 많고, 찾아볼 무당도 많아, C가 할 일은 그만큼 많아진다. “자네 어떻게 그리 누나에게 잘하나” 물으면 C는 그저 웃기만 한다. 토요일이나 공휴일에는 아들을 부르라 했지만 아들은 시간을 잘 낼 수 없단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번 설에도 오지 않았다. 해외여행 때문이다. 손자가 12월부터 3개월 예정으로 며느리와 같이 어학연수를 하러 베트남에 갔단다. 아들은 설 연휴가 되니 손자를 만나러 베트남으로 날아간 거다. 평시에도 부모를 나 몰라라 해놓고서, 설 명절에 아버지 차례도 지내지 않고, 노모도 찾아뵙지 않았다. 참 우울하다. 아들은 설날 아침에 따뜻한 남쪽 나라 바닷가에 있을 것이다. 손자는 무엇을 배울지, 영어를 배울지, 설날은 외국 바닷가에서 유람선 타는 날이란 것을 배울지…, 한숨만 나온다.우리 어릴 때 설은 설이었다. 음력 그믐께부터 식구들은 바쁘고, 먹거리는 풍요했다. 좁은 방에서 한지 위에 유과를 널려 놓고 말렸다. 우리는 유과를 밟을까 봐 까치발로 다녔지만 가슴은 마냥 두근거렸다. 부엌에서는 감주 달이는 냄새가 달콤하고, 방 한쪽에서는 막걸리 단지가 담요에 싸여 또 다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래떡을 썰고, 동생들은 그것을 얻어 꼬챙이로 꿰어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었다. 섣달 그믐날 밤에 묵은세배를 했다. 먼저 부모님께 묵은세배를 하고 작은아버지께 세배를 갔다. 도깨비가 나온다는 산모롱이 길도 무섭지 않았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부모님 말씀에 오는 잠을 이기려고 눈을 끔벅이다 잠이 들었다.집안 어른들이 모두 모여 사랑방에서 차례를 지냈다. 제관이 너무 많아 방문을 열어 놓고 마루에서까지 지냈지만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제사상의 과일을 먹을 생각에 제사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어른들은 꽹과리를 치며 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했다. 아이들은 덩달아 어른들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밤에는 논이나 밭에 불을 피우며 즐거워했고, 어떤 아이들은 구멍 뚫린 깡통에 짚불을 넣고 빙빙 돌리며 ‘망우리’를 소리 높여 외쳤다. 설은 얼마나 긴지 음력 2월 초하룻날 동네 사람들의 윷놀이가 끝나야 끝난다. 아이들은 그 긴 기간이 늘 설이었다. 정초에는 십이 간지에 따라 금기가 많았다. 소날에는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고. 토끼날에는 여자의 출입을 금했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이 남의 집 대문을 ‘열어 주라’고도 했다.옛날의 설은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었고, 사람의 도리를 체험으로 알게 하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였다. 깨끗하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무언의 인성교육이었다.올 설 연휴에 해외 여행객이 사상 최대란다. 서울에서 인천 공항 사이의 공항철도가 특별 증설 운행되었다. 서울에 있는 재벌 L 회사 어떤 팀 직원들의 설 연휴 기간 계획이다. 팀원 12명 중 해외 여행객 4명, 국내 여행객 3명, 친정집 방문 3명, 방콕족 2명이었다. 설 차례를 지내러 시댁에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진정한 우리의 설은 없어질지 모른다. 다만 연휴가 많은 정월 초하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