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안심3·4동행정복지센터에 지역민들 마스크 기부 이어져

대구 동구 안심3·4동행정복지센터에 코로나19 지역사회 확산을 막기 위한 지역민들의 온정어린 마스크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지역의 기초생활수급자로 보호받고 있던 한 학생이 안심3·4동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이거 쓰세요”라며 어머니가 손수 만든 면 마스크를 건넸다. 학생과 어머니는 “평소 도움을 받아온 안심3·4동행정복지센터에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었다”며 전화로 마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31일에는 안심3·4동 67통장이 “연일 마스크 배부와 선거업무까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행정복지센터 직원들의 건강이 걱정돼 만들었다”며 수제 마스크를 선물했다. 안심3·4동 정장환 동장은 “척박한 땅에 민들레 홀씨 뿌리내리듯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마스크는 코로나19 극복의 씨앗이 될 것 같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위를 돌아보는 지역민의 배려에 가슴이 벅차다”며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경산시 북부새마을금고 이웃돕기 성금·백미 기탁

경산시 북부동 북부새마을금고(이사장 허명)는 지난 3일 북부동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이웃돕기 성금 200만 원과 20kg들이 백미 20포(시가 110만 원 상당)를 기탁했다.남동해 기자 namdh@idaegu.com

대구대 이정복 교수 90% 넘는 지지로 교수회 신임 의장 당선

대구대학교 이정복 교수(한국어문학과)가 제7대 교수회 의장 선거에서 의장에 당선됐다. 임기는 12월부터 2년간이다.지난 20일 경산캠퍼스 성산홀(본관) 강당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에는 453명의 선거인단 중 266명이 참여해 투표율 58.7%를 기록했고, 단독 후보로 출마한 이 교수는 240표를 득표해 90.2%의 지지를 받았다.이날 선거에서 교수회 부의장으로 선출된 홍원기(정보통신공학부)·함요상(도시행정학과) 교수가 이정복 의장과 함께 활동할 예정이다.이정복 신임 의장은 “‘교권수호 위원회’와 ‘대학발전 위원회’를 양대 축으로 강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교수회, 대구대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정혜 기자 yun@idaegu.com

정복군주 36년 뒷받침 ‘두 귀족 권력’ 돌아선 막강실세…씁쓸한 왕의 최후만이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7세에 즉위해 36년간 왕좌에 있으면서 신라 최고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권 강화를 꿈꾸면서 화려한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43세의 젊은 나이에 권력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진흥왕은 나제동맹으로 100년을 넘게 이어져 왔던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성왕을 죽이며 한강을 차지하는 정복 군주로 떠올랐다. 그는 화랑과 이사부, 거칠부 등의 장군을 앞세워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많은 국력을 기울였다. 영토가 국력을 자랑하게 했다. 신라의 부흥기에도 말기 못지않게 국가 간의 전쟁을 펼치면서도 권력에 대한 암투 또한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사부와 거칠부는 왕권을 옹호하며 직접 전쟁에 나서 많은 공적을 올렸지만, 자신들의 권력 구도를 쌓아 올리는데도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정복군주였던 진흥왕은 그를 어린 나이에 왕좌에 등극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그의 최후는 쓸쓸히 법당 안에서 맞이해야 했다. 진흥왕의 전쟁사와 함께 그를 지원했던 이사부와 거칠부, 내각의 힘이 절대적인 왕권을 흔들며 격랑 속으로 휘말렸던 역사를 돌아본다. ◆진흥왕의 전쟁진흥왕이 540년 즉위하고, 10여년 뒤 친정체제로 전환하면서 연호를 개국으로 변경하고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면서 신라, 고구려와 백제 삼국의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진흥왕은 551년 백제의 성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전성기를 지낸 고구려는 내부의 권력투쟁과 북방 돌궐의 침입 등으로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점령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한 백제와 나제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흥왕은 2년 뒤에 백제군을 급습해 한강 하류를 빼앗고 새로운 주를 설치했다. 100여 년이 넘도록 유지된 나제동맹을 깨트리고, 공격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의 나이는 당시 스무 살로 혈기왕성했다. 백제의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총사령관으로 태자 여창을 임명하고,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편성해 신라 관산성으로 쳐들어갔다. 554년 신라와 백제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간의 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으로 설명된다. 관산성은 백제군에게 함락되었고, 승리를 보고받은 성왕은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구천으로 향했다. 성왕이 친위군대 50명만 이끌고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진흥왕은 성왕을 급습해 목을 베고, 그 여세를 몰아 관산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인과 2만 9천600명에 이르는 군사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진흥왕은 넓어진 신라의 영토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 그가 정복한 땅의 경계를 순회하면서 순수비를 세웠다.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에서 발견된 순수비는 진흥왕의 업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한반도 동남부에 있는 약소국 신라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함경도에 이르는 큰 나라로 성장시킨 것은 패기만만한 진흥왕의 힘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강대국 틈에서 눈치를 보던 신라는 진흥왕 이후로 삼국통일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사부와 거칠부진흥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법흥왕의 왕비였던 그의 외할머니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법흥왕이 사망하면서 당시 왕실에서 실질적인 주인은 왕비였던 파도부인이었다. 아들이 없었던 왕비 파도부인은 딸 지소부인의 아들인 외손자 삼맥종의 자질을 높게 평가했다. 또 당시 법흥왕의 최측근으로 상대등과 2품의 고위직에 있던 이사부와 거칠부가 파도부인의 뜻을 받들어 진흥왕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다. 이사부와 거칠부도 내물왕의 4세, 5세손으로 가까운 왕손이자 정권의 실세로 나라의 일을 쥐락펴락하는 대신이자 무장이기도 했다. 진흥왕이 즉위하면서 태후 지소부인의 섭정으로 나라의 살림을 꾸려나갔지만, 실질적인 내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입김으로 흘러갔다. 이사부와 거칠부는 진흥왕의 전쟁에 앞장서는 무장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사부: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으로 이름은 약종이었다. 그는 지증왕과 동문수학하면서 자라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지증왕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장군으로 전장에 나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울릉도를 복속시킨 것도 이사부의 솜씨다. 이사부는 법흥왕 대에도 장군으로 대대적인 활약을 이어갔다. 왜와 백제, 고구려, 가야국의 자잘한 침략을 막아내면서 금관가야를 점령해 실질적인 가야를 복속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어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어부지리로 신라 땅으로 만들었다. 562년에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가야를 완전히 신라에 합병시켰다. 단양적성비 등에 이사부는 왕 다음으로 가장 앞에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신라의 실세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이사부는 내정에도 밝아 나라의 정통성을 잇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해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거칠부: 거칠부는 내물왕 5세손으로 왕손이었으며 이름은 황종(荒宗)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대신으로 나랏일을 했다. 그는 젊었을 때 승려로 고구려 땅을 누비며 내정을 정탐하는 일을 하면서 고구려의 유명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장군이 되어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입장에서 싸움을 전개할 수 있었다. 거칠부가 백제, 고구려 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쌓으면서 내각에서의 지위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면서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승려 혜량법사를 추천해 바로 신라의 승통으로 임명하게 했다. 승통은 당시 신라 승려 최고의 관직으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마운령비 등에 거칠부의 이름이 왕 아래, 맨 윗자리에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전쟁에서는 그의 공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알게 한다. ◆흔적: 울진 성유굴과 봉평리신라비△울진 봉평리 신라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리신라비가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다. 봉평리 신라비는 법흥왕 당시 울진지방에서 성을 에워싸고 불을 지르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여 정부가 대군을 동원해 진압하고, 사후 처리하는 과정까지 상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의 기록은 당시 율령반포에 대한 사실과 관료제도, 지방통치조직과 촌락구조, 의식행사 등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 전시관은 국보 신라비는 물론 실내전시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의 중요한 석비 모형을 전시하고, 금석학의 계보와 시대별 비의 양식변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야외 비석거리와 야외비석공원을 우리나라 지도 모양으로 조성하고, 비석이 발견된 위치에 그 비석의 모형을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진흥왕이 세운 명활산성작성비를 비롯해 창녕 신라 진흥왕척경비와 황초령순수비, 북한산순수비, 마운령순수비 등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성류굴의 진흥왕 명문: 최근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울진 성류굴 내부 제8 광장에서 신라시대 진흥왕이 560년 6월에 성류굴을 다녀간 기록이 확인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동굴 천정에서 바닥으로 연결된 종유석에 ‘경진년(560, 진흥왕 21년) 6월에 진흥왕이 다녀가면서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50명이 이를 보좌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560년 진흥왕이 울진 성류굴에 행차하여 다녀간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진흥왕의 이동에는 선박이 활용되었고, 행차에는 50인이 보좌하였으며, 행차와 관련하여 동굴 내부를 잇는 잔교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기존 문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신라사를 연구하고, 울진 성류굴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게 할 중요한 자료로 국보적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된다. △명활산성작성비: 명활산성작성비는 보문단지 입구 명활산성 성벽 터에서 농부에 의해 1988년 발견됐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실성왕 집권기인 405년 이전에 이미 축성되어 있었고, 자비왕과 소지왕 때에는 국왕이 머물렀던 궁성으로 사용되었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작성간지가 있는 서두,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공사 담당 위치, 작성 참가자의 수, 공사 기간,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첫머리의 신미년이라는 간지로 보아 진흥왕 12년 551년으로 추정된다. 축성 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밝히고 축성에 참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신라 영역에서 이러한 작성비는 591년의 남산신성비가 여러 개 발견되었으나, 명활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됐다. 명활산성작성비는 남산신성비와 공통되는 점이 많아 양자를 서로 보완하여 신라 중고기의 역사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흥왕과 거칠부의 갈등진흥왕이 왕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영토를 확장하던 당시 거칠부는 신라 최고 귀족으로 내정과 국방에서도 실질적인 권력자로 자리 잡았다. 진흥왕과 거칠부가 갈등을 빚게 된 계기는 왕위를 이을 세자 책봉 문제에서 비롯됐다. 세자였던 진흥왕의 첫째 아들 동륜이 책봉된 지 6년 만에 죽은 이후, 다음 세자 책봉 문제를 두고 진흥왕과 거칠부의 의견이 대립했다. 진흥왕은 세자 동륜의 아들 진평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중심이자 실세였던 거칠부는 동륜의 동생 금륜(진지)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진흥왕은 장손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과 신체가 장대하고, 지식이 깊으면서도 활달하며 강직한 기상을 가진 손자 진평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다. 진평이 자신의 어릴 때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둘째 아들 금륜에 대해서는 편향적인 성격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진흥왕의 뜻을 따르며 진평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세력들은, 왕비와 함께 금륜을 지지하는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조용하게 물러나 훗날을 도모하기로 했다. 진흥왕은 자신의 세력이 밀려나자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면서 승복을 입고 절에서 은둔하다 4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거칠부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을 제25대 진지왕으로 옹립하고, 상대등에 올라 정권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러나 거칠부의 종횡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지왕은 거칠부가 국사를 모두 자임하고 최고 실권을 행사하자 나랏일은 뒤로 하고 횡음에 빠졌다. 이어 거칠부가 죽자 그들의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고, 진평왕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26대 왕으로 내세웠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